묘지 여행[경기 안성] 김대건신부 묘

작성자광나루|작성시간10.04.06|조회수1,839 목록 댓글 0

김대건신부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김대건 신부님이 묻히신 경당 모습

미리내 성지는,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소와,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 그리고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미리내성지 관내 약도

또한 김대건 신부의 묘역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세 번째 방인사제 중 한 분) 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하고 있다.

▲ 미리내성지 주차장에서 내려서 길을 따라서 쭉 걸어 갑니다.

묘역 왼쪽 윗 편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소,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 한국 순교자 103위 기념 성당까지 가는 길목의 주변 모습

김대건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사람,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 관명은 대건. 본관은 김해이다.

▲ 한국 순교자 103위 기념 성당과 잔디광장 모습

김대건은 1821년 (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 한국 순교자 103위 기념 성당과 성모당 건물 모습

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리고 종한의 딸 데레사는 1839년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되고, 그에 앞서 남편 손연욱(요셉)은 1824년 덕산에서 옥사 하였다. 또 진후의 아우 선후의 손자 제교와 진후의 넷째 아들 희연의 아들인 제항은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김대건의 숙부 제철의 아들인 진식은 1867년 공주에서, 선식은 해미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 경당 전경

그리고 김대건의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진후의 둘째 아들인 택현은 솔뫼를 떠나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에 정착하였는데,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듯하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이 세례를 받은 것은 1836년이었다. 그는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 경당 앞의 좌우로 두 분씩, 네 분의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는 두 기둥으로 묘가 가려 있음.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 되었는데 최양업(토마)은 2월 6일에, 최방제는 3월 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 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 경당 좌측편에 있는 강도영 마르코신부 묘(좌)와 김대건신부 묘(우)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 우측에서 바라 본 경당 모습과 우측편에 있는 페레올주교 묘(좌)와 최문식 베드로신부 묘(우)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 김대건신부 묘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 경당 내부는 줄을 서서 한 사람씩 들어 갑니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 경당 측면 모습과 경당 좌측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 경당을 돌아 나와서 103위 성전으로 갑니다.

▲ 103위 성전 내부 전경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 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 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 103위 성전 내부에 안치된 김대건 신부님 성해 비골(종아리뼈) 모습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 등을 방문했는데,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 103위 성전 내부 모습

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 이었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 103위 성전 내부 모습과 2층으로 올라가면 순교 형틀과 순교 장면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 미리내성지 홈페이지 내용 발췌 -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25>김대건 신부와 솔뫼·미리내 성지
 ◇당진 솔뫼성지 내의 김대건 신부 생가. 평야를 달려온 천전협(穿田峽)을 금원수가 환포하고 있는 좋은 양택지다.

천주교의 솔뫼성지(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5)는 김대건(1822∼1846) 신부가 출생한 곳이고, 미리내성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는 그가 군문효수를 당해 절명한 후 묻혀 있는 곳이다. ‘소나무 산’이라는 솔뫼에는 200살이 넘는 재래 적송들이 상큼한 솔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은하수 골짜기’란 뜻의 미리내는 계곡이 무척 아름답다. 두 곳 모두 곱디고운 우리말 땅이름이다.

 

김 신부(세례명 안드레아)의 증조부(진후·1814년), 종조부(한현·1816년), 부친(제준·1839년)은 천주교를 믿는다고 차례로 처형당했다. 아흔 아홉칸의 대갓집에 살던 김해 김씨 가문이 몰락하여 폐문지경에 이르렀고 정든 고향에 머물 수조차 없게 되었다. 7세때 어머니 고씨(우르술라)를 따라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하였다. 여기서 프랑스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렇다면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출현한 당진 솔뫼 생가터는 어떤 자리일까. 22년 동안 4명의 고귀한 목숨이 희생됐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가족사다.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당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거봉 김혁규(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 선생과 이상호, 심순희, 신현웅(요셉), 심효보씨 등 문하생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당진 성당의 이춘옥(리디아), 신효철(데레사), 홍경자(루시아), 안영옥씨 등 여성 신자들이 합류하니 간산 순례길이 한층 활기를 띠며 즐거워졌다. 최근 들어 여성 풍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특히 양택 등 실용풍수 쪽으로 주부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미리내성지를 아우르는 길격의 산세.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며 특히 북현무의 위용이 우람장중하다.

 

당진의 면천 두견주와 기지시 줄다리기는 문화재로 지정돼 민속문화의 큰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이곳에 와 길을 물으면 “저 너머 거짐(거의) 다 와 가유” 하는데 4㎞는 더 가야 한다고 한다.

 

저 멀리 송림이 우거진 곳에 솔뫼성지가 보인다. 사방이 넓은 평야지역인데 김 신부 생가 터만 봉긋이 솟아 있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이상호씨가 “축좌미향에 술건(戌乾)득수가 을진(乙辰)파로 빠졌으니 좋은 양택지”라고 설명한다. 이씨는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며 스승의 학맥을 탄탄하게 이어가고 있다. 거봉이 “평야에 이런 자리가 형성되었다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고 반색한다. 더구나 전방에는 금원수(錦遠水)가 넓은 들녘을 감싸 돌고 있다.

 

“펀펀한 논과 밭에도 과연 명당이 있을까.” 솔뫼성지 내의 올곧은 소나무 밭을 거닐면서 일행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뒤에서 듣던 거봉이 질문으로 받아 “그것이 바로 평지풍수”라며 야외강론을 편다. 특히 끝을 알 수 없는 일망무제 평원지역의 중국에서는 보편화된 풍수다.

 

밭이나 논을 뚫고 지나가는 용맥을 천전협(穿田峽)이라 하는데 대개는 농사짓느라 갈아 엎어 눈에 띄기 어렵다. 그러나 쟁기질과 써레질을 한다 해도 쟁기보습 들어가는 깊이가 일정하므로 반드시 높낮이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기 마련이다. 한 치만 높아도 산이요, 한 치만 낮으면 물이라 했다. 이 천수협을 과맥(過脈)과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제 몫을 하는 풍수라는 것이다.

 

◇안성 미리내성지 경당 안에 있는 김 신부 묘. 찾는 신자들마다 무덤 가슴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새카맣게 변했다.

 

또한 강이나 바다의 물길을 건너는 협맥이 있으니 바로 도수협(渡水峽)이다. 물 가운데의 석량(石梁·돌줄기)으로 이어져 섬으로 치받아 오르는 용맥이다. 강화도 거제도 울릉도 등 모든 섬에는 사방에서 솟아오른 도수협이 반드시 있어 이 맥을 기준으로 도서풍수가 이뤄지는 것이다. 토맥은 물이 막아서면 멈추지만 석맥은 산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관통한다. 청암(靑岩) 중에도 과골(過骨)이면 최길이라 하여 돌 가운데 동아줄처럼 불끈 솟은 돌뼈(石骨)를 말한다.

 

그러고 보니 김 신부의 동상이 서 있는 후룡맥이 은근히 살아 있다. 아파트가 가로막아 얼핏 보아 넘기기 일쑤겠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찾아 내겠다. 복원된 생가가 옛 집 좌향 그대로인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서북쪽에서 들어온 물길이 남동(동에서 15도) 쪽으로 빠지며 보이질 않는다. 밖에서는 평지 같아 보이던 피정의 집과 김 신부 기념관에도 2∼3m의 얕은 구릉으로 표고가 다르다. 안산과 조산이 멀어 조응이야 빠르다 할 수 없겠지만 사신사도 길격으로 저 멀리서 옹위하고 있다. 평야지대 들판에서도 음택과 양택지를 골라 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현장이다.

 

솔뫼성지를 떠나 안성 미리내성지로 향하는 국도에 먹장구름과 황사바람이 막아 선다. 4월 초순인데도 올봄 날씨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봄볕엔 며느리 내놓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 했는데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려 가고 있다.

 

◇솔뫼의 김 신부 동상 앞에서 평지풍수에 관해 전해 듣는 간산 순례일행. 왼쪽부터 홍루시아, 안영옥, 이리디아, 신데레사로 당진성당 교우들이며 그 옆이 김혁규 선생이다.

 

이곳 미리내에 오면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김 신부의 참혹한 죽음과 안타까운 묘지 사연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사람이 당하는 불행 앞에 네 종교 내 신자가 무엇일 것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숨이 막혀올 따름이다.

 

생소한 문물이나 종교가 낯선 땅에 뿌리내리고 정착하려면 습합 과정에서 충돌과 고통은 수반되기 마련이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는 데도 이차돈의 순교가 뒤따랐다. 병자호란(1637년) 후 중국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9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도 천주학 등 서양문물을 도입해 왔다.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그의 독살설은 너무 앞서갔던 서학과 무관치 않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당시는 군신 간의 상하 관계 지배윤리로 왕조체제가 유지되던 절대왕권 시대다. 이런 상황에 천주학은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임금과 백성이 평등하다는 논리였으니 먹혀들었을 리 없다. 천주교 신자 이벽이 지은 ‘천주가사’(1779년)에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삼강오륜을 지켜가는 중에도 천주공경이 으뜸”이라는 내용이 있다.

 

문제는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을해박해(1815년) 기해박해(1839년)로 이어지는 천주교 탄압이 권력유지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정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서구문화 수입을 공격하고 천주교를 배척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했다. 반면 시파는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는 자세였으며 세자 죽음을 반대했다.

 

◇김 신부 시신을 수습해 와 미리내에 장사지낸 이 빈첸시오 묘. 스승과 제자(이상호·오른쪽) 간의 대화를 듣고만 있어도 옆 사람에게는 큰 학습이다.

 

이 같은 살얼음판 정국에서 김 안드레아는 1845년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정조시대에 이미 1만명을 넘어선 천주교 신자는 왕실까지 파고들어 뿌리내리는 등 무서운 성장세를 보였다. 그는 이미 내려진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전교 비밀항로 개설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군문효수-. 고종31년(1894) 폐지되기는 했지만 큰 죄를 범한 죄인의 목을 벤 후 장대에 묶어 매달아 군중들을 경계시켰던 사형법이다. 효수를 당한 죄인은 시신조차 수습 못하게 군졸들이 파수를 지켰다. 김대건 신부는 여섯 번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 교우들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긴 후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후 김 신부는 철종8년(1857) 교황청에서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福者品)에 오른 후 1984년 4월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위에 올랐다.

 

◇103인의 성인위를 봉안한 기념성당. 후면의 하전(下殿)이 장관이며 500만 천주교 신자의 영성귀의처다.

 

김 신부가 죽은 지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1829∼1921)은 시신을 몰래 파내 등에 지고 야음을 틈탄 1주일의 강행군 끝에 고향 선산인 안성의 이곳에 안장하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미리내성지는 조성되며 이후 빈첸시오는 자기 선산을 복자기념지로 기증했다. 1928년 세워진 경당 앞에 대리석으로 조영된 김 신부 묘 가슴 부위는 손때가 새카맣게 묻어 있다. 찾는 교우들마다 눈물 흘리며 그 위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이다.

 

앞·뒷산이 목(木)체형으로 후룡맥이 대담하게 살아 내려왔다. 경황이 없다고 함부로 쓴 묘 자리가 아니다. 신좌을향에 해(亥)득수, 오(午)파구니 이만 한 자리도 아무나 얻지 못한다는 거봉의 산국(山局) 설명이다. 특히 북현무가 병풍치듯 안온하게 둘러싸여 따사롭기 그지없다. 경당 옆에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의 묘가 나란히 있다.

 

경당 우측 아래에는 한국가톨릭의 103위 성인을 봉안한 거대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함부로 범접 못 할 위용과 함께 후면의 하전(下殿)이 장관이다. 하전은 장군이 대궐을 지키는 형국이어서 음택이나 양택에서 최고로 꼽는 산세다. 뒤를 돌아보니 미리내성지를 둘러싼 동·서·남·북이 흠결 없이 환포되었다.

 

500만 가톨릭 신자들의 영성귀의처인 솔뫼와 미리내성지가 그냥 있어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2007.04.12(목) 21:09

미리내성지 위치도

 소재지 : 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                                                 화살표 ↑ 위치 부근에 미리내성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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