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여행[충남 예산] 최익현선생 묘

작성자광나루|작성시간11.03.11|조회수522 목록 댓글 0

최익현선생 묘(충남 기념물 29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면암 최익현선생 묘역 전경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충신이었던 면암(勉菴) 최익현(1833∼1906) 선생의 묘소이다. 어렸을 때부터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대학자 이항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 면암 최익현선생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

▲ 비석 우측편에 재실이 있습니다.

고종 10년(1873)에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과 서원 철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3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관직생활에 대한 뜻을 접고 위정척사론자로서의 길을 선택하였다.

▲ 답사 당시 재실은 수리 중이었으며, 묘역은 재실 뒷편에 있습니다.

이 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 단발령 실시, 불법적인 을사조약 체결 등을 반대하는 상소를 통해 강력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면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 축대 위로 오르면 묘역이 있습니다.

▲ 최익현선생 묘

1906년 제자 임병찬과 함께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침략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고, 일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숨을 거두었다.

▲ 면암 최익현선생 묘는 정부인 청주한씨와 합장묘입니다.

선생의 묘는 1907년 충남 논산군 국도변에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1910년에 오지인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무덤 옆에는 이선근이 글을 짓고 김기승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최익현선생 묘역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 봉분도 작고 비석과 망주석만 조성되어 있어서 묘역치고는 매우 단촐합니다.

▲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대마도로 끌려가서 순국한 장소인 수선사 - '나홀로 테마 여행' 대마도 행사시 촬영

▲ 위 사진 우측에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습니다 - '나홀로 테마 여행' 대마도 행사시 촬영

최익현 초상(보물 1510호) 

구한말의 대표적 우국지사(憂國之士)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의 초상화로, “勉庵崔先生七十四歲像 毛冠本” 및 “乙巳孟春上澣定山郡守蔡龍臣圖寫”라고 쓰인 우측 상하단의 기록을 통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심의를 입고 털모자를 쓴 모습인데 심의(深衣)는 그가 위정척사에 노력한 전통 성리학자임을 잘 전해주고 털모자의 모관(毛冠)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최익현의 애국적 풍모를 잘 보여준다.

 

채용신의 초기 작품에서 풍기는 조심스럽고 근실한 화법과 소박한 화격이 최익현의 우국지사적인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주고 있다.

 

◀ 문화재청 사진(어디에서도 더 큰 사진을 찾을 수가 없네요...)

모덕사(충남 문화재자료 152호) 

▲ 모덕사 전경 - 이하 문하재청 사진

▲ 모덕사 입구 전경

조선 후기 애국지사인 최익현(1833∼1906)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후에 그를 추모하는 사림들이 태인, 포천, 곡성 등 여러 지역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이곳 모덕사는 선생에 살았던 고택에 마련된 사당으로 많은 장서를 보존하고 있는 장서각과 선생의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함께 들어서 있다.

▲ 최익현선생 사당(모덕사)

▲ 영당

[여적] 면암 최익현

경향신문 | 입력 2006.02.26 18:18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린다. '아, 어느 시대인들 난적의 변고가 없겠는가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의병을 일으키라,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고희도 넘긴 일흔넷의 면암이 쓴 소(疏)는 절절이 추상 같다.

 

면암은 직접 의병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대마도에 감금됐다. 면암은 일체의 음식을 거부했다. "어떻게 적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면암은 끝내 적의 땅에서 굶어 죽었다. 익히 알려졌지만, 늘 옷깃을 여미게 하는 면암의 최후이다. 면암이 취했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노선을 두고 당대적 타당성 등의 논의는 있을 수 있겠으나, 변할 수 없는 것은 선생의 전 생애에서 우러나는 순연한 지사적 삶의 형형함이다.

 

오만으로 변절되던 대원군의 개혁 실정을 질타하고, 소위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항의해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상소하고(丙子持斧疏), 을사늑약 오적(五賊)을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는 등 면암의 항거는 실로 처절했으나 망국(亡國)을 막기에는 너무도 가녀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 청년들에게는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안중근)이었고, 적에게는 "조선군 10만명은 두렵지 않으나, 오직 최익현 한 사람이 두렵다"(이토 히로부미)는 존재였다. 
 

올해로 선생이 서거한 지 100년이다. 각종 추모 행사들이 열리고,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각별해지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과 원로의 소임이다. 선생만큼 그 본연을 오늘에 되살리는 이도 없다. 몇 해 전 한 방송사의 면암을 다룬 특집극 제목이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였다. 천박한 애국주의가 판치고, 그 '주의'를 팔아먹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날뛰는 시대이기에 면암의 삶이 던지는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는 질문이 더욱 뼈아프게 들린다. 〈양권모 논설위원〉

최익현선생 묘역 위치도

              화살표  상단에 보이는 봉분이 최익현선생 묘역입니다.                                  소재지 :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

지도 좌측 중앙의 A 위치에 최익현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신양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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