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여행[경기 고양] 굴씨 묘

작성자광나루|작성시간11.06.06|조회수587 목록 댓글 0

굴씨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명나라 궁녀(이후 청나라 궁녀)인 굴씨 묘역 전경

우리나라 유일의 중국 궁녀 묘인 굴씨묘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 박상진-

 

소현세자가 병자호란의 강화조약으로 중국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모셨던 명나라 궁녀 굴씨(屈氏)의 묘가 고양시 대자동에 고려 말의 명장 최영장군 묘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1638년(인조 16) 11월 11일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는 청나라 예친왕으로부터 귀국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그때 천주교 신자로 개종해 있던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자였던 멸망한 명왕조의 5명의 환관과 4명의 궁녀들을 데리고 귀국한다.

 

그녀들의 이름은 굴저(屈姐), 최회저(崔回姐), 유저(柔姐), 긴저(緊姐)였다. 이들 중 가장 세인의 입에 회자된 이가 바로 굴저(굴씨)였다. 그녀는 원래 중국 소주(蘇州) 지방 양인(良人) 출신의 딸이었다. 굴저가 살던 시기는 이미 기울어져가던 명나라 말기로 탐관오리들의 행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굴저가 살던 마을의 관리 또한 학정을 일삼으며 미녀들을 마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그녀의 어머니는 굴저를 살해하려 했지만 다행히 죽기 직전 구해준 자가 있어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녀를 구해준 자는 내직의 관리였던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는 장추궁(長秋宮)에 들어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의 황후였던 주황후(周皇后)를 모시게 된다. 이때 나이가 겨우 7살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와 품행이 발라서 황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농민 반란군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자금성이 점령되고, 황제와 황후가 자결하자 그녀도 황후의 뒤를 따라 자결하고자 했지만 황후의 만류로 대궐에서 도망쳐나와 민간에 숨었다고 한다. <『존주휘편(尊周彙編)』에 의함.>

후면과 측면에서 바라 본 굴씨 묘역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자성이 부장인 유종민(劉宗敏)에게 주었는데, 굴씨가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살하려 하니, 종민이 그녀의 곱고 빛나는 절개를 애석하게 여겨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의함.>

 

민간에 숨어 지내던 그녀는 결국 청나라 군사에게 발각되어 최고 사령관인 예친왕에게 보내졌다. 이때 그녀는 오랑캐를 유적(流賊 : 부랑배)이라고 욕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구왕(九王 : 예친왕)이 둥근 모자에 짧은 상의를 입고 얼굴에는 면사(面紗)를 드리우고 앉아있는데 이 모습을 본 굴씨는 “남자도 면사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오랑캐로구나.”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친왕은 아직 철없는 어린 아녀자가 한 말이라 하여 그녀를 죽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청천자고(靑川子稿)』「굴씨전(屈氏傳)」과 『존주휘편』에 의함>

 

이것으로 보아 굴씨도 대단한 용기의 소유자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예친왕 또한 대단한 호걸이었던 것 같다.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이 데리고 있기에는 부담스러웠던 예친왕은 그녀를 심양에 있는 소현세자에게 보냈던 것이다. 당시 나이가 22세였다.이후 귀국하는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온 그녀는 만수전에 소속되어 대비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를 모셨다가 후에 세자를 따라 향교방(鄕校坊 : 안국동 교동초교 근방)에 나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세자가 죽자 그녀는 여승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에 살게 된 듯 하다. 한 때 자수원은 5천명의 여승을 거느릴 정도로 국내 최대의 비구니(여승) 사찰이었다. 조선에 사는 동안 그녀는 항상 중국 쪽을 바라보고 황후의 은덕을 말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유적(여진족)을 언급할 때마나 몹시 분노하였다고 한다.

▲ 소현세자 귀국시 따라 왔던 청나라 궁녀 굴씨. 소현세자 사후에도 청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굴씨는 비파를 잘 타서 스스로 ‘사귀곡(思歸曲)’을 짓고 궁인들에게 머리 트는 모양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상투 트는 법이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는데, 효종은 굴씨가 명나라 황실에서 익혔던 결발법(結髮法)을 시범케 하여 본을 삼았다고 한다. 송시열은 이 ‘자수원 결발법’을 표준으로 삼아 전국에 통일하도록 주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소 새와 짐승을 잘 길들였는데, 각기 신호가 있어서 뜻대로 재주를 부리게 하였다. 그녀는 이 비법을 제자인 진춘(進春)에게 전수하였다. 이후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臨昌君)의 집에 나와 있으면서 어린 임창군을 보살피다가 죽었는데, 고양군 대자동 장령산(長嶺山) 기슭에 장사했다 한다.

 

글을 몰랐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물으면, “반름기(頒름記)에 제 성의 글자 머릿부분이 자척(尺)자와 같았고, 발음은 규(圭)라 하였습지요”라고 하여 모두 그녀의 성을 규씨(圭氏)로 잘못 알고 규저(圭姐)라 불렀다. 뒤에 중국에 가는 역관을 통해 물어보고서야 그녀의 성이 굴씨(屈氏)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항상 명나라 황실의 부흥을 밤낮으로 기원하던 그녀는 마침내 한을 품고 죽었는데,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오. 허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

 

그녀의 간절한 소원에 따라 사람들은 서쪽 교외인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대자2동 간촌(間村) 마을에 고이 묻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70세였다. 그곳은 바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의 묘 오른쪽 기슭인데, 세자의 손자인 임창군(臨昌君)이 그녀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 말의 명장 최영(崔瑩)장군 묘소 입구로서,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의 묘소 맞은편에 위치한다.

굴씨 묘역 위치도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556-1           지도 좌측 상단의 빨간선 41m 부분이 굴씨 묘이며, 우측 묘역이 밀풍군 묘입니다.

 빨간선의 시작 부분이 굴씨 묘, 110m 부분이 밀풍군 묘, 우측 상단 봉분이 경안군과 임창군 묘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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