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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역사에세이] 100년의 뒤안길에서…퇴출 궁녀

작성자산내음|작성시간06.08.02|조회수120 목록 댓글 0
[이규태 역사에세이] 100년의 뒤안길에서…퇴출 궁녀

주모 전락해도 법도만은 지켰다...한말 왕실 구조조정에 쫓겨나 .

나라를 반신불수로 만든 을사조약에 분을 못참아 자결한 충정공 민영 환의 전동집 문전에 소복한 20대 미녀가 돗자리를 깔아놓고 연일호곡을 하여 장안에 화제가 됐었다. 이 울음이 진원이 되어 이웃 주민들이 따라 울고, 그 울음이 성안에 번져 일본 경찰이 울음 단속에 나서기까지 했다.


사진설명 : 궁녀중 하나로 앞가슴에 침통을 차고 있는 약방 기생. '조선정감'은 고급 기생이 신분을 과시하느라 안경을 끼던 때가 있었다는데, 이 기생이 들고 있는 안경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공이 흘린 피에 /머리 적시는 저 여인아 /울어서 한이 풀리면 /기백년 을 울어 못예이리만은 '. 어느 문사가 이 호곡하는 미녀를 두고즉흥시를 지어 전동 골목에 붙이기도 했다.

그 60여년 뒤 이 호곡 미녀의 행방을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진주 촉석 을 논개를 모신 사당 모의당이요, 곱게 늙은 할머니가 된 이 여인은 이 곳에서 논개를 모시는 것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촉석루 곁 비닐 지 붕이 펄럭이는 술집으로 손을 끌고 들어가 앉히더니 왼손에 술잔을 얹고 오른손으로 가볍게 감싼 듯 떠받친 다음 무릎을 굽실 고개를 깊이 숙이 며 술을 권하고는 헌작무를 추는 것이었다. 황제에게 진작하는 예절이라 며 오늘은 젊은이가 황제라 하던 것이 기억난다.

이름은 박봉래, '설도 할매'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가 한말 궁중에 약방기생으로 있을 때의 예명이다. 명분은 궁중 여의사요 간호사 지만, 침통을 앞가슴에 차고 다닐 뿐 왕실 잔치 등 궁중 행사나 왕비의 친잠의례에 들러리를 서는 게 고작이요 사나이가 출입할 수 없는 사대부 집안채를 염탐할 일이 있으면 수사요원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청국 공사 위안스카이(원세개)가 그러했고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그러했듯이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도 먼저 궁녀들의 환심부터 사놓고 궁중을 조종했다.

그가 일본에서 올 때마다 궁녀들에게 옷감 시계줄 목걸이 화장품 등 선 물을 잊은 적이 없었다. 세도가 당당했던 상궁급 궁녀들을 일본에 데려 가 회유하기까지 했다.

궁에서 있었던 이런 일을 설도 할매는 기억하고 있었다. 창덕궁 낙선 재 앞 너른 뜰에서 설도 할매를 포함한 궁녀 일단이 웅성거리고 있으면 이토 히로부미가 참모들을 거느리고 걸어온다. 이때 궁녀들이 다가가 고 운비단 한 단을 펴 그 앞에 깔고, 밟고 넘어가시라는 듯 해놓고선 나란 히 부복을 했다. 워낙 궁녀들에게 인기가 있던 터라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그런 식으로 나타내는 줄로만 알았 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만은 그 속셈을 알아채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 다. 실은 밟고 가도록 깔아놓은 것이 자기가 유화책으로 궁녀에게 선물 했던 바로 그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손아귀에 들어가 조국 침략의 앞잡이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궁녀들의 레지스탕스였던 것 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 구조조정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진행돼왔 던 궁녀 퇴출이 가속됐으며, 당시 이 집단 시위에 연루된 궁녀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밤중에 보쌈에 싸인 채 장정 등에 업혀 궁밖으로 퇴출당했 다한다. 설도도 그런 퇴출 궁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조정에 궁녀 수는 600여명이 상식이었다. 한데 갑오개 혁 뒤에 궁중 재정을 합리화한다는 명목으로 서서히 감축, 이토 히로부 미의 일제 통감정치 시절에는 3분의 1을 줄여 200명이 창덕궁과 덕수궁 에 분산돼 있었을 뿐이다. 궁녀가 일단 궁에 들면 종신제이지만 예외적 으로 방출 사례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받들어온 상전이 승하하면 1년 동안 조석 상식을 올리고 3년 대상을 치른 다음, 신주를 종묘나 사당에 모시면 그때야 상복을 벗고 방출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해방되어 나간다 해도 시집을 가도 안되고 평생 홀몸으로 수절해야 한다. 태종 때 정승 조영무가 관음이라는 출궁한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퇴출 후에도 궁녀는 평생 정조를 지키는 것이 법도 다.

'경국대전'에 방출 궁녀를 얻어 사는 자는 곤장 100대를 가한다고 못 박고 있고, 비록 임금의 사랑인 승은을 입지 못했더라도 두 임금 두지아 비를 섬기지 않는 불문율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퇴출 궁녀 는 대부분 남편이나 자식이 있을 수 없기에 말미를 형제나 조카에게 얹 혀살다가 죽어갔지만 개중에는 대담한 변신을 기도한 퇴출 궁녀 또한 없 지 않았다.

1904년 망해가는 조국을 등지고 멕시코로 노동 이민을 가는 이민선에 서 있었던 일이다. 그 이민 가는 한 사람인 울주 사는 김치환이화물칸 곁을 지나가고 있는데 '나 좀 살려줘요' 하는 가냘픈 여자 목소리를 들 었다. 선원에게 고하여 소리 가까이 접근해보니 커다란 짐 궤짝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출발지인 제물포에서 짐 속에 숨어든 밀항 남장 여인인 것이다. 밀항자이기에 송환해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동행해주지 않으면 단식한다고 위협, 항해중 죽은 이민자 대신 멕시코의 유카탄 이민촌에 입촌할 수 있었다.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궤짝네'로 친근했던 이 간 큰 여인이 바로 1900 년대초 창덕궁에서 감원으로 퇴출당한 궁녀였다. 이 궤짝네는 왕실이나 왕가,그리고 정승판서 집에 초상이 나면 차출되어 울어주던 곡비였다.만 리타향 의지할 곳 없는 곳에서 죽어갈 이민자들에게 그래도 죽으면 한국 울음으로 울어줄 여인이 있다는 위안을 주어온 그 퇴출 궁녀가 노예 노 동을 감시하는 모진 스페인 감독의 첩이 되어 놀아나더니 그 뒤 소식을 알수 없다 했다. 60여년 이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 노인에게 직접 들은 퇴출궁녀 애사다.

상방 기생이나 약방 기생, 소주방 등에서 일하던 궁녀들은 퇴출 후에 은밀히 술집을 차렸는데 궁녀로서 법도와 체면을 지키면서 술을 팔아야 했기에 이색적 매주 풍조를 탄생시키기까지 했다. 남녀 내외가 깍듯했던 내외 술집이 그것이다. 손님이 이리 오너라 외치며 중문간에 들어서면 안에서 '손님께서 거기 있는 자리를 깔고 앉아 계시라고 여쭈어라' 한다.

그럼 '술상 내보내시라고 여쭈어라' 하고 중문 열면 차려놓았다고 여쭈 어라' 한다. '술이 몇 주전자 나왔으며 값이 얼마인가 여쭈어보아라.'이 런 식으로 가공의 심부름꾼을 가운데 두고 대화를 하며 술을 마시고 값 을 물어 상위에놓고 '잘 먹고 간다고 여쭈어라' 하며 나간다. 이렇게 술 파는 주모는 머리카락 하나 나타내지 않고 술을 판다. 삼엄한 내외풍습 을 따르면서도 궁녀의 법도를 지켰으니 눈물겹기만 하다.

학생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강의실 앞에 인파가 웅성거리기에 우연히 비집고 들어갔더니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을 강단에 모시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학과의 공개행사로 한말 늦게까지 일했던 궁녀 조하서 상궁을 모셔놓고 옛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궁녀가 무더기로 퇴출당하던 무렵 선택받은 소수의 궁녀는 신식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궁궐생활이 개 화될 수 없다 하여 숙명여학교에 입학시켜 궁에서 통학시켰다. 영친왕 이은을 모셨던 신태형 상궁도 그런 궁녀 학생이었다. 한말의 모진 풍상 을 다 겪은 조 상궁도 20세에 궁녀 학생으로 발탁되어 다른 궁녀 7명과 신학문을 익힌 만학도다. 그는 고종이 승하하실 때까지 덕수궁에서 모시 고 있다가 퇴출 궁녀가 된 것이다.

조 상궁은 갑신정변 때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었다. 어릴적 노상궁들 손에 이끌려 육의전 큰거리에 나가 보았다. 산발하고 옷이 찢어진 한 여 자를 포졸 네 명이 손발을 나눠 잡고 큰 거리를 끌고 가는데 행인들이 달려들어 손으로 할퀴고 머리채를 잡아 채며 더러는 돌을 던져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했다. 바로 그 비극의 여인이 갑신정변에서 혁명 주체인 김옥균과 내통했던 이우석이라는 궁녀였다. 키가 7척 장신이요 벼한 섬 을 번쩍번쩍 들어나른다는 이 거녀는 김옥균 일행이 궁에 들어가 고종의 이궁이 촉박했을 때 바로 이웃 궁 건물에서 폭약을 터뜨려 임금의 간담 을 서늘케 했던 여혁명가다. 아마도 '삼일천하'후 잡힌 몸이 되어 처형 끝에 시체에 모욕을 가하는 폭시를 했던 것 같으며 계고용으로 궁녀들에 게 그 현장을 보였음직하다.

마지막 황후인 윤비가 돌아가시자 늙도록 시중했던 김 상궁 박 상궁 성 상궁 세 분이 있었는데, 법도대로 3년상을 치르고 약간 말미를 얻아 궁을 나온 것이 한국 궁녀의 마지막 퇴출이었다. 김 상궁은 퇴출 후에도 대궐 곁을 떠나지 않고 원서동 창덕궁 담 옆에 방 하나 얻어 누이동생과 살다가 16년 전에 작고했고, 나머지 두 상궁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삭발 입산했다 한다. 수천년 한국 궁녀애사는 이렇게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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