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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文咨明王)

작성자산내음|작성시간06.08.02|조회수192 목록 댓글 1
문자명왕(文咨明王)



■ ?∼519(안장왕 1)
■ 고구려 제21대왕
■ 재위 492∼519

일명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나운(羅雲)이다. 장수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 의하여 양육되다가 장수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자료의 인멸로 그의 내치(內治)가 어떠하였던가는 잘 알 수 없으나, 498년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한 사실을 보면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확립에도 노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외관계를 살펴보면, 그는 전대(前代)의 외교정책을 따라서 남북조의 분열을 잘 이용하여 국제질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였다. 즉, 즉위와 더불어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낭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았고, 북위와 이른바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동시에 494년 제(齊), 508년 양(梁) 등 남조의 국가로부터 각각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 (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과 ‘무동대장군개부의동삼사(撫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도 가졌다.

또한 494년 물길족(勿吉族)에 의하여 멸망당한 부여의 왕과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에 대한 침공을 통하여 497년 신라의 우산성(牛山城), 512년 백제의 가불성(加弗城) 및 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나제군사동맹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문자명왕은 광개토왕 및 장수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전성기를 지속시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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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산내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3.08.28 중원 고구려비를 알려면 광개토왕.장수왕.문자왕을 알아야겠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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