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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왕 장례길(1) - 경주 월성(月城)

작성자계림|작성시간07.10.06|조회수185 목록 댓글 0

신라 문무왕 장례길(1) - 경주 월성(月城)

 

   가을 (681년)7월 1일에 (문무)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왕이 화(化)하여 용이 되었다 하고 또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1년조>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왕이 죽었다. 신라의 왕 56명 가운데 유일하게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문무왕 이외에는 '화장하라'는 유언만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화장유언을 남긴 왕들은 모두 병사한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가지 학계에서는 화장을 불교식 장법으로 잘못 해석하는 우를 범했다. 문무왕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신라시대에는 승려조차도 화장을 하지 않았다. 신라에서는 '화장'은 '병사(病死)'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월성(月城) 원경

 

*월성(月城) 원경

 

   ......(중략)......(그러나)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오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중략)......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뭇 관원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있는 이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宗廟)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1년조>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김유신과 손잡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무열왕계는 끊임없이 반대파들의 도전을 받으며 항상 권력에 대한 불암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통일 전쟁 중이던 문무왕 때는 다소 안정을 누리고 잇었다. 하지만 문무왕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하자 장례 중에 김흠돌의 난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고 9족을 멸하였다. 이러한 왕권에 대한 위협 대문에 문무왕은 태자로 하여금 관앞에서 즉위하라는 유언을 남기게 된다.

 

   ......(중략) ......죽고 나서 10일이 지나면 고문(庫門) 바깥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을 입는 등급은 정해진 규정에 있거니와 장례 치르는 제도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힘스라. 변경의 성(城)과 진(鎭)을 지키는 일과 주(州)와 현(縣)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도록 할 것이며 주관하는 이는 시행하도록 하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1년조>

 

   16년 간의 통일전쟁의 상처는 컸다. 오랜 전쟁으로 국고는 탕진되었고, 민생은 도탄에 바젺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어려움과 정치적 사정으로 문무왕은 세금을 줄이고 검소한 장례식을 유언으로 남겼다. 

 

*월성(月城) 성벽

 

*월성(月城) 성벽

 

*월성(月城) 내부

 

   신라의 역대왕들은 월성의 침전(寢殿)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침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또한 월성에 대한 발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발굴이 이루어지면 건물의 구조가 드러나고 침전의 위치도 밝혀질 것으로 기대해본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발인(發靷) 때까지 관(棺)을 두던 곳을 빈전(殯殿)이라 한다. 즉 정식 장레가 이루어질 대까지 가매장을 하던 곳이다. 신라 역대왕들의 빈전에 관한 기록은 유일하게 55대 경애왕의 경우만  남아있다.

 

   (경순왕은) 견훤에 의하여 추대되어 즉위하게 되었는데, 앞 왕의 시신을 들어서 서당(西堂)에 모셔두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고 시호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였으며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즉위조>

 

   중국에서 7세기 이전까지 황제는 '동당(東堂)' 또는 '서당(西堂)'에서 붕어하였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가 끝나고 당나라 이후가지도 그 제도를 그대로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월성(月城) 내부

  

*월성(月城) 내부

 

*월성(月城) 내부

 

   문무왕의 장례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빈장기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을 참고하여 짐작해볼 수는 있다.

 

   사람이 죽으면 관을 쓰고 염습해서 장사를 지내고 무덤을 만든다. 왕이나 부모, 처자가 죽었을 대도 1년밖에 상복을 입지 않는다.(수서 신라전)

 

   연재원년(延載元年, 694년) 4월 29일에 병으로 누워 당나라 서울에서 죽으니 향년 66세였다. ...영구(靈柩)를 (신라로)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대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담당관서에 명하여 연재(延載) 2년(695) 10월 27일에 서울 서쪽 언덕에 묻었다.(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김인문전)

 

   김인문의 경우는 빈장 기간이 1년 5개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상의 빈장기간이 1년이었음에 비하면 다소 길었다. 물론 김인문의 사망 장소가 당나라여서 신라까지 운구를 하는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중(大中) 11년(857) 8월 13일에 (김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문성대왕은 애통하며, 서발한을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장례(葬禮)를 모두 김유신의 구례(舊禮)에 따라 하게하고 그 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릉에 배장하였다.(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김양전)

 

   김양의 경우는 빈장기간이 4개월이다. 물론 왕이 아닌 신하의 경우이지만 1년에서 4개월로 많이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월성(月城) 내부

 

*월성(月城) 내부

  

*월성(月城) 성벽 내부

 

   백제와 고구려의 빈장에 관한 기록도 살펴보자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가 되는 계묘년(523) 5월 (병술일이 초하루인데)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 8월 (게유일이 초하루인데)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그리고) 돈 1만매, 이상 한 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사마왕은 상기 금액으로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천상천하 이천석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증명을 삼으니 율령이 따르지 않는다.(백제 25대 무령왕 묘지석)

 

   병오년(526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겼다. 서쪽의 빈전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529) 계미일 초하루(2월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백제 무령왕비 묘지석)

 

   백제의 경우 빈장기간은 3년상이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무령왕은 공산성에서 사망하였고 정지산에 빈전을 세우고 왕릉에 안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사람은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앗다가 3년이 지난 뒤에 길일을 가려서 장사를 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죽었을 대에는 모두 3년복을 입고, 형제간에는 석 달을 입는다. 초종(初終)을 치를 대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를 치르고 나면 북을 울리면서 춤을 추고 음악을 녀주하여 죽은 이를 보낸다. 매장이 끝나면 죽은 자가 살았을 때 입던 옷과 사용하던 수레와 말을 가져다 무덤 곁에 두면 장례에 온 사람들이 모두 가져간다.(수서 권 81 고려전)

 

   고구려의 빈장기간도 3년이었다. 북을 울리고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영혼을 천상에 보냈다. 장레용품은 재활용하였다.

 

   (673년) 가을 7월 1일에 김유신이 자기 집의 방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부의(賻儀)로 문채를 놓은 비단 1천필과 조(租) 2천 섬을 주어 장사에 쓰게 하였다. 그리고 군악(軍樂)의 고취수(鼓吹手) 100인을 주어 금산원에 장사지내게 하고, 담당관서(有司)에게 명하여 비(碑)를 세워 공적을 기록케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하)

 

   신라의 경우 장송곡을 연주 한 후에 장지로 향하였는데 비하여 고구려에서는 장례가 끝난 후에 장송곡이 연주되었던 것 같다.

 

*월성(月城) 성벽 내부

 

*월성(月城) 성벽 내부

 

 

 

<2007.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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