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화랑세기》... <7>사다함이 죽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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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공(公), 제가 잘못했습니다. 공의 친구로서, 아랫사람으로서 의리를 배반한 저에게 큰 벌을 내려주십시오.』
무관랑(武官郞)은 사다함(斯多含)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사방은 어둠속에 고요했고 벌판에 서있는 두사람의 머리위로 별빛만 쏟아졌다. 명활성(明活城) 쪽에서 어렴풋이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명활성은 자비왕과 소지왕때 정궁인 월성(月城)을 수리하느라 13년간 임시 궁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이는 진흥왕 24년(서기 563년)의 일.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우정이 깊어평생을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맹세를 한 사이였다.
사다함은 나이가 비록 17세 밖에 되지 않았으나 1년전 대가야 정벌의 승전에 큰 공을 남긴 장수였던데다 5세 풍월주의 신분으로 그의 인품을 수많은낭도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는 전공의 대가로 받은 대가야 노예들을 평민으로 풀어주고 땅을 부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힘없이 시선을 궁쪽으로 돌려 한참동안 괴로워하던 사다함이 실의에 찬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모두가 나의 어머니 탓이지. 나는자네를 이해하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무관랑을 자주 불러 관계를 한다는 이야기가 낭도들에게 퍼지고 있어 사다함이 무관랑에게 주의를 주고자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먼저 찾아와 용서를 구한 것이다.
『미실낭주로 인해 엄청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공에게 제가 고통을 줘미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아니야,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갈 때가 있는게지. 자네에게 승전(勝戰)에 대한 보답이 돌아가도록 해줘야 했는데 내 힘이 거기까지미치지 못해 미안하네. 사실 그게 늘 마음의 짐이 되고 있다네.』
『아닙니다. 제가 신분이 미천한데도 친구로 대해주시고 늘 곁에 두시는것만 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공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하겠습니다.』
사다함은 돌아가는 무관랑의 뒷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물처럼밀려들었다. 차츰 멀어져가는 무관랑은 어느새 그토록 그리워하는 미실의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분별없이 다른 남자를 탐하는 어머니 금진의 모습으로 바뀌어 혼란스러웠다.
사다함은 진골 출신으로 내물왕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구리지(仇梨知)였다. 어머니 금진은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로 법흥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고 구리지와 몰래 정을 통해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월성과 알천(閼川·경주시의 북천) 사이의 벌판에서 무관랑과밤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며칠 뒤 무관랑이 죽어가고 있다는 연락을 갑작스레 받았다. 사다함이 한숨에 달려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또 무관랑을 불러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하자 무관랑이 사다함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금진의 손길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무관랑이 급하게 뛰어나오면서 월성의 담을 넘다가 담아래에 있는 못(구지·溝池)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다함이 그의 치유를 위해 애를썼으나 소용이 없었고 며칠 후 무관랑은 죽고 만다.
사다함은 알력과 시기가 횡행하던 당시의 정치 풍토 속에서 무관랑과 유일하게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무관랑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던 그가 죽자 사다함은 무척 비통해 했다. 이제 그에겐 삶의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던 여자인 미실도 뺏기고 행실이 문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삶의 회의부터 들었던 것이다.
절망속에 사다함은 아무 것도 먹지않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가슴에 품었던 미실만 생각났다. 대장부에게 한 여자의 배신이 이토록 가슴에 사무칠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미실을 미워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미실이 세종에게 시집갔다는 말을 듣고 청조(靑鳥·미실을 지칭함)가를지어 부르며 두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여러 생각들이 겹치고 실의에 빠져있는 사이 여위고 병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낸 지 7일이 되자 천하의 대장부인 사다함도 숨이 목에 까지 차올랐다. 그 때서야 달려온 어머니 금진은 사다함을 품에 안고 발을 굴렀다.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제 내가 어찌살꼬.』
그러자 효자로 소문났던 사다함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제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을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하고 힘들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미실의 남편인 세종이 풍월주가 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숨을 거두었다.
한편 「삼국사기」열전에는 사다함과 무관랑은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되기로 언약했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매우 슬퍼하다 그 또한 7일만에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해석에 따르면 사다함이 죽은 근본적인 원인은 미실의 배신이 불러온 실연의 상심 때문이다. 실연의상처가 큰 와중에 친구 무관랑의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절망감이 겹친 셈이다.
무관랑이 죽자 사다함이 상심끝에 뒤따라 죽을 만큼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진 사이였다는 점을 들어 일본 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具房之進)은 저서 「화랑고잡고(花郞攷雜攷)」에서 「두사람은 동성애자였다」는 흥미있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 조해훈기자 massjo@kookje.co.kr
[무관량 빠져죽은 월성 못터]
무관랑이 빠져 죽었다는 경주 월성의 못(구지)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84∼94년 10년에 걸쳐 시행한 「월성 해자 및 주변 유적 발굴조사」에서확인되자 당시 학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발굴 전인 84년 이전까지는 해자(垓字)라고 불리는 이 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1930∼40년대의 위작이라면 「무관랑이 월성의 못에 빠져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진서의 필사본이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이상준 학예연구사는 『사다함의 정확한 생몰시기는 알수 없으나 여러 사료들을 분석해보면 그의 생존기간은 545년에서 565년 께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해자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에 나오는 「도사(道使)」란 지방관직명이 5∼세기 사용됐던 점에서 본다면 연못형 해자는 5세기말에 축조돼 7세기말까지 존재했던 방어시설이었다.
즉 당시의 궁이었던 월성은 자연천인 남쪽의 남천외에 동 북 서편에 인공적인 연못을 파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했고 또 왕성인 월성과 외곽을 구분짓는 시설물로 이용했던 것이다.
/ 조해훈기자 국제신문 200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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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공(公), 제가 잘못했습니다. 공의 친구로서, 아랫사람으로서 의리를 배반한 저에게 큰 벌을 내려주십시오.』
무관랑(武官郞)은 사다함(斯多含)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사방은 어둠속에 고요했고 벌판에 서있는 두사람의 머리위로 별빛만 쏟아졌다. 명활성(明活城) 쪽에서 어렴풋이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명활성은 자비왕과 소지왕때 정궁인 월성(月城)을 수리하느라 13년간 임시 궁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이는 진흥왕 24년(서기 563년)의 일.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우정이 깊어평생을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맹세를 한 사이였다.
사다함은 나이가 비록 17세 밖에 되지 않았으나 1년전 대가야 정벌의 승전에 큰 공을 남긴 장수였던데다 5세 풍월주의 신분으로 그의 인품을 수많은낭도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는 전공의 대가로 받은 대가야 노예들을 평민으로 풀어주고 땅을 부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힘없이 시선을 궁쪽으로 돌려 한참동안 괴로워하던 사다함이 실의에 찬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모두가 나의 어머니 탓이지. 나는자네를 이해하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무관랑을 자주 불러 관계를 한다는 이야기가 낭도들에게 퍼지고 있어 사다함이 무관랑에게 주의를 주고자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먼저 찾아와 용서를 구한 것이다.
『미실낭주로 인해 엄청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공에게 제가 고통을 줘미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아니야,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갈 때가 있는게지. 자네에게 승전(勝戰)에 대한 보답이 돌아가도록 해줘야 했는데 내 힘이 거기까지미치지 못해 미안하네. 사실 그게 늘 마음의 짐이 되고 있다네.』
『아닙니다. 제가 신분이 미천한데도 친구로 대해주시고 늘 곁에 두시는것만 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공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하겠습니다.』
사다함은 돌아가는 무관랑의 뒷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물처럼밀려들었다. 차츰 멀어져가는 무관랑은 어느새 그토록 그리워하는 미실의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분별없이 다른 남자를 탐하는 어머니 금진의 모습으로 바뀌어 혼란스러웠다.
사다함은 진골 출신으로 내물왕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구리지(仇梨知)였다. 어머니 금진은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로 법흥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고 구리지와 몰래 정을 통해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월성과 알천(閼川·경주시의 북천) 사이의 벌판에서 무관랑과밤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며칠 뒤 무관랑이 죽어가고 있다는 연락을 갑작스레 받았다. 사다함이 한숨에 달려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또 무관랑을 불러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하자 무관랑이 사다함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금진의 손길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무관랑이 급하게 뛰어나오면서 월성의 담을 넘다가 담아래에 있는 못(구지·溝池)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다함이 그의 치유를 위해 애를썼으나 소용이 없었고 며칠 후 무관랑은 죽고 만다.
사다함은 알력과 시기가 횡행하던 당시의 정치 풍토 속에서 무관랑과 유일하게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무관랑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던 그가 죽자 사다함은 무척 비통해 했다. 이제 그에겐 삶의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던 여자인 미실도 뺏기고 행실이 문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삶의 회의부터 들었던 것이다.
절망속에 사다함은 아무 것도 먹지않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가슴에 품었던 미실만 생각났다. 대장부에게 한 여자의 배신이 이토록 가슴에 사무칠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미실을 미워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미실이 세종에게 시집갔다는 말을 듣고 청조(靑鳥·미실을 지칭함)가를지어 부르며 두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여러 생각들이 겹치고 실의에 빠져있는 사이 여위고 병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낸 지 7일이 되자 천하의 대장부인 사다함도 숨이 목에 까지 차올랐다. 그 때서야 달려온 어머니 금진은 사다함을 품에 안고 발을 굴렀다.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제 내가 어찌살꼬.』
그러자 효자로 소문났던 사다함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제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을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하고 힘들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미실의 남편인 세종이 풍월주가 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숨을 거두었다.
한편 「삼국사기」열전에는 사다함과 무관랑은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되기로 언약했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매우 슬퍼하다 그 또한 7일만에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해석에 따르면 사다함이 죽은 근본적인 원인은 미실의 배신이 불러온 실연의 상심 때문이다. 실연의상처가 큰 와중에 친구 무관랑의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절망감이 겹친 셈이다.
무관랑이 죽자 사다함이 상심끝에 뒤따라 죽을 만큼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진 사이였다는 점을 들어 일본 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具房之進)은 저서 「화랑고잡고(花郞攷雜攷)」에서 「두사람은 동성애자였다」는 흥미있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 조해훈기자 massjo@kookje.co.kr
[무관량 빠져죽은 월성 못터]
무관랑이 빠져 죽었다는 경주 월성의 못(구지)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84∼94년 10년에 걸쳐 시행한 「월성 해자 및 주변 유적 발굴조사」에서확인되자 당시 학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발굴 전인 84년 이전까지는 해자(垓字)라고 불리는 이 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1930∼40년대의 위작이라면 「무관랑이 월성의 못에 빠져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진서의 필사본이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이상준 학예연구사는 『사다함의 정확한 생몰시기는 알수 없으나 여러 사료들을 분석해보면 그의 생존기간은 545년에서 565년 께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해자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에 나오는 「도사(道使)」란 지방관직명이 5∼세기 사용됐던 점에서 본다면 연못형 해자는 5세기말에 축조돼 7세기말까지 존재했던 방어시설이었다.
즉 당시의 궁이었던 월성은 자연천인 남쪽의 남천외에 동 북 서편에 인공적인 연못을 파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했고 또 왕성인 월성과 외곽을 구분짓는 시설물로 이용했던 것이다.
/ 조해훈기자 국제신문 200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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