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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가족 이야기

[스크랩] 함안조씨 독립운동가~ 조시원선생.

작성자아구할배|작성시간12.04.20|조회수1,013 목록 댓글 1

선생은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본부 한인청년총동맹,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화랑소년회 등 민족주의 단체들을 끊임 없이 조직하며, 임정을 위해 일했다. 친일모리배들을 숙청하고 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였으며, 광복 후 사회당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가족 모두 항일투쟁에 나선 일가의 6남. 조소앙이 둘째 형

조시원(趙時元, 1904. 10. 23 ~ 1982. 7. 18)은 1904년 10월 23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서 부친 이화제(理化齊) 조정규(趙禎奎)와 모친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7남매 중 6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용원(鏞元), 호는 호일(胡逸), 시원(時元)은 별명이었는데, 독립운동기에 통명(通名)으로 사용하여 본명 같이 불려졌다. 선생의 함안 조씨 가문은 시조 조정(趙鼎)이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운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었다. 여말선초에 두문동 72현 중에 고죽제(孤竹齊) 안경(安卿)과 덕곡(德谷) 승숙(承肅) 두 분이 있다. 조선조 생육신인 어계(漁溪) 여(旅), 또한 임란과 호란 등을 당했을 때 수천(壽千) 등 함안 조씨 13충(忠)이 있다.

 

이러한 선조들의 얼을 이어받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소앙(素昻) 용은(鏞殷), 대만에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며 왕족인 구니노미야(久邇宮邦彦王) 대장을 자살(刺殺)한 장거로 순국한 독립의사 명하(明河)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학자 명사들, 벼슬길에는 청백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같은 현조(顯祖)들이 여러 대를 이어 유훈과 덕업을 계승한 정신은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진충보국(盡忠報國)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을 이은 선생의 부친 조정규 역시 문중에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성룡(趙性龍)의 외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신망이 높은 유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 슬하에 장남 용하(鏞夏, 1977 독립장), 차남 소앙(1989 대한민국장), 3남 용주(鏞周, 1991 애국장), 4남 용한(鏞漢, 1990 애국장), 딸 용제(鏞濟, 1990 애족장), 5남 용진(鏞晋), 6남 시원(1963 독립장) 등 6남 1녀 중 6명을 비롯하여 손자 시제(時濟, 1990 애국장, 소앙의 2남), 인제(仁濟, 1963 독립장, 소앙의 3남), 손녀 순옥(順玉, 1990 애국장, 선생의 장녀,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의 부인), 자부 이순승(李順承, 1990 애족장, 선생의 부인) 등 4명을 합하여 일가족 10명을 독립운동가로 육성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집안’이다.

 

이 같이 자녀 6명을 독립운동가로 육성한 조정규 자신도 1932년에 부인과 함께 5남 용진만을 남기고 상해로 망명하여 당시 그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소앙⋅시원⋅용제 등과 같이 망명생활 내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중요거점을 빠짐없이 전전하며 심혈을 기울여 이들을 뒷바라지 하였다. 선생은 이 같은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필연코 항일민족의식이 싹트게 된 것은 물론, 망명 전부터 형들의 독립운동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맏형 용하는 1901년 대한제국 주독⋅주프랑스 공사관 참사관(參事官)을 역임하다가 1903년 귀국, 경기도 죽산⋅이천⋅마전의 3개 군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북경(北京)으로 망명, 경학사(耕學社)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3년 도미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같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고 독립을 위한 외교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형 소앙은 일본 유학 때부터 일제침탈에 저항하여 국권회복의지를 표출하고, 귀국 후 1913년 북경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공표하고, 1919년 2월 1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기초하여 독립지사 39명의 서명 아래 공표하였다. 이어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인 임시헌장(臨時憲章)을 기초하고,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에 취임하였으며, 8월에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사회당대회(國際社會黨大會)에 참석하여 한국독립결의안(韓國獨立決議案)을 통과시켰다. 1920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한 러시아혁명대회에 참석하여 러시아 각처를 시찰하고 귀국길에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고 이후 임시의정원의원, 임시정부 국무위원, 외무총장, 한국독립당의 핵심간부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셋째 형 용주는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친형 소앙과 협력하여 1916년 상해에서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당(亞細亞民族反日大同黨)을 창립하고, 1917년 소앙이 기초한 대동단결선언을 같이 공표하였으며,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 작성에 있어 강경론을 펴기도 하였다. 그 해 국내에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국내외 독립외교에 힘을 썼으며 그 후 대조선애국부인회(大朝鮮愛國婦人會) 등을 조직하여 상해와 국내를 왕래하며 활동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전개하던 형들의 독립운동의 실상은 선생의 항일민족의식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생으로 하여금 항일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임시정부의 <관보(官報)>와《독립신문》사건에 연루되어 16살 소년 때 상해 망명

이러한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관보(官報)>와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전람(轉覽) 사건에 연루된다. 이 사건으로 왜경의 감시를 받게 되자 선생은 1920년 2월에 친형 소앙이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상해로 망명하였으니 이때 나이가 16세의 소년이었다. 이후 선생은 항일민족독립운동 전선(戰線)에서 소앙과 함께 헌신(獻身)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정원 간부 경질>(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1940년 2월 1일자 사본) 1939년 10월 15일 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 간부의 경질이 이루어진 사실을 전하고 있다. 조시원은 전임 김붕준에 이어 비서가 되었다.


상해로 망명한 즉시 선생은 상해남방대학 부속 중학교(上海南方大學 附屬 中學校)에 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하고, 이어 같은 대학 부속 고급(高級)중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고급중학교를 나온 선생은 다시 상해남방대학 역사사회학과에 진학하여 전문지식을 탐구하는 한편, 앞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이론적 무장을 정립하는 데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같은 정립된 독립운동의 이론적 무장으로 먼저 1927년에 선생은 상해에서 조한용(趙漢用), 오명(吳明), 이동농(李東儂), 최남식(崔南植), 고원우(高遠于), 김원식(金元植), 허열추(許烈秋), 강창제(姜昌濟), 윤호(尹浩), 김의한(金毅漢), 김무정(金武亭) 등과 같이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 韓人靑年同盟) 상해지부(上海支部)를 결성하였다. 이때 선생은 정치문화부장(政治文化部長) 겸 선전조직부장(宣傳組織部長)에 선임되어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조직을 확대 강화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중국본부 한인청년총동맹(中國本部 韓人靑年總同盟)을 창립하여 중앙위원장(中央委員長)에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중앙본부 및 각 지부 간부를 총지휘하고, 이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에 선생은 한구(漢口)에서 결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 창립에 참가하여 간부의 일원으로 국제적인 항일선전운동(抗日宣傳運動)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그 해에 상해남방대학 역사사회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만주로 가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장군과 협의하여 함께 동만청년동맹(東滿靑年同盟)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하여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만주 흥경현민립중학교(興京縣民立中學校) 학감(學監)으로 3년 동안 육영사업에도 종사하고, 《중국대공보(中國大公報)》, 《시민일보(市民日報)》 기자 등 직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9년에 선생은 북경으로 가서 여기서 1925년에 조직된 항일비밀운동단체인 다물단(多勿團)에 가담하여 이규준(李圭俊)⋅이해천(李海天) 등과 같이 상해, 천진(天津), 북경 등지에서 친일주구배 등의 숙청공작을 전개하였다.

 

 

한인청년총동맹,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화랑소년회…민족혼 일깨우는 단체 끊임 없이 조직

1930년에는 상해에서 화랑소년회(花郞少年會)를 조직⋅지도하고, 이두천(李杜天)에게 비밀 임무를 주어 국내에 파견하였는데 도중에 왜경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 해 겨울에 월간잡지 《한보(韓報)》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하여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항일독립운동을 고취하는데 전력하며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천진대공보사(天津大公報社)에 교섭하여 《한국문원(韓國文苑)》을 발간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진력하였다.

 

1933년에 이르러서 선생은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고 특파원으로 서안(西安)에 파견되어 중국서북군 총사령(中國西北軍 總司令) 양호성(楊虎城)과 한중간 무장 항일운동 근거지건설에 관한 군사협력을 교섭하였다. 이듬해에는 북경으로 가서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이상일(李相一) 등과 같이 항일투쟁을 벌여 친일주구배를 숙청하였으며, 1935년에는 조소앙, 홍진(洪震), 김사집(金思集) 등과 같이 월간잡지 《진광(震光)》을 발간하였다. 1938년에 선생은 사천성(泗川省) 기강(綦江)에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 3당 통합회의에 조소앙, 홍진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한국국민당 대표 김구(金九), 조완구(趙琬九), 이동녕(李東寧), 조선혁명당 대표 유동열(柳東說), 지청천(池靑天), 최동오(崔東旿) 등과 협의하여 중국관내 우파 통합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중앙상임위원(中央常任委員)으로 선임되고, 비서부장(秘書部長), 조사부장(調査部長), 조직부장(組織部長), 선전부장(宣傳部長)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10월에 기강에서 열린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31회 회의에서 의원 겸 비서장으로 선임되고, 11월에는 임시정부 선전위원(宣傳委員), 특파원(特派員), 선무단장(宣撫團長) 등으로 임명되어 입법⋅행정 양면으로 활약하였다.

 

조시원 선생의 유묵

 

 

친일주구배 숙청작업부터 광복군 창군 작업까지…본토진공작전 앞두고 광복 맞아

1940년 9월 17일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군에 참여하여 총사령부 부관(副官)에 임명되었고, 총사령부가 중경(重慶)에서 서안으로 옮겨짐에 따라 서안으로 가서 부관처장대리(부관주임)로 복무하였다. 1941년에는 전시 아래서 급격히 소요되는 간부의 대량 양성을 위하여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군사교육기관인 중국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國中央戰時幹部訓練 第4團 特科總大學員隊 韓靑班)에서 안일청(安一淸), 한유한(韓悠韓), 송호성(宋虎聲) 등과 함께 군사 교관으로서 전술, 역사, 정신교육을 담당하여 민족정신 앙양에 진력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법무처장(法務處長), 정훈처장(政訓處長), 특파원(特派員) 등을 역임하며, 광복군 정령(正領)으로 복무하였다.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본토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아 그 해 12월에 임시정부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나이 열 여섯에 상해로 망명한지 만 25년만의 환국이었다.

 

 

16살에 망명, 마흔 두 살의 중년으로 환국. 한국광복군전우회장으로 애국지사들 구심점 역할

선생은 환국하여 1946년에 국민의회(國民議會) 대의원 겸 법무위원에 피임되고, 전재동포원호회(戰災同胞援護會)를 조직하고 상무위원 겸 재무부장으로 구호사업에 종사하였으며, 국민회(國民會) 중앙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47년에는 삼균주의청년동맹이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김상옥열사기념사업회(金相玉烈士記念事業會) 상무이사, 후생협회중앙본부(厚生協會中央本部) 상무위원, 태양신문사(太陽新聞社) 고문 등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중책을 맡아 선생은 건국준비에 진력하였다.

 

한편,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金奎植), 조소앙 등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차 방북했을 때에 선생은 삼균주의청년동맹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에 동행하여 친형 조소앙과 진로를 함께 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조소앙이 사회당(社會黨)을 조직하자 중앙상무위원 겸 선전부장과 문교정책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1950년 5월 30일에 고향인 양주군에서 제2대 국회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이때 조소앙은 성북구에서 전국최고득표로 당선되어 형제가 나란히 국회의원이 되었다. 조소앙은 국회에 진출하여 국정(國政)의 대계(大計)를 전진시킬 수 있는 큰 기회를 맞이하였으나 6⋅25전란으로 납북되었다. 선생은 6⋅25전쟁의 와중(渦中)에 난국을 수습하고자 국사에 전념하였고, 1960년 2월에는 한국광복군전우회장(韓國光復軍戰友會長)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이후 1968년부터 1971년까지 한중문화협회 3대 회장을 역임하며 양국간의 문화교류와 유대강화에 진력하였고, 1965년에 광복회와 1975년에는 삼균학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1965년 2월에서 1971년 5월에 이르기까지 광복회 초대⋅2대⋅3대 부회장을 역임하고, 1971년 2월부터 1973년 5월까지는 광복회 3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79년 3월에는 광복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삼균학회에서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구현하는데 힘씀은 물론,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조소앙 연구에 몰두한 학자들을 적극 도왔다. 1975년에 고려대 홍선희 교수는 단행본 《조소앙사상》(태극출판사)을 저술하여 출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소앙의 삼균주의사상이 널리 보급되고, 연구가 활성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78년에는 조소앙 탄신 92주년을 맞이하여 선생은 고희를 넘긴 노구를 이끌고 옛 동지들의 힘을 빌려서《소앙선생문집》상⋅하권을 발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문집은 조소앙이 30여 년 동안 항일민족독립운동과 망명생활을 통하여 세워놓은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며, 한민족의 이데올로기인 균등사상의 사료집이다. 선생은 이 문집의 간행사에서 이렇게 썼다.


<통일의 구체안 수립되면 강력 추진-대책위원회를 구성>(자유신문 1948년 6월 5일자 기사 사본) 김구, 김규식 등 한국독립당 및 민족자주연맹 등 대표들이 모여 통일문제에 대해 논의한 결과 남북통일추진대책수립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기사로 한국독립당 측에서는 조시원이 대책위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가형(家兄) 소앙선생은 조국건립을 위해 전심치력(專心致力) 하시던 중 6⋅25동란으로 납북 당하시어 뵙지 못한지도 벌써 30년이나 되었다. 아직도 생존여부마저 모르는 채 90여 고령을 넘기시게 되었으니 그 용음(容音)을 뵈올 기약조차 없는 한스러운 심정은 이산동포가 허다하지만 나 혼자 당한 듯 가슴이 터진다.

어디에다 비할 수 없는 형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동생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冷戰)체제 아래서 분단된 국토를 통일시키고 영광된 대한민국을 건국하려고 노심초사 하던 나라의 기둥이요 사상의 구심점인 조소앙의 심정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은 1982년 7월 18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광복회장(光復會葬)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봉안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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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춘추필법 | 작성시간 12.07.11 저도 이 글을 네이버 역사에 관한 위인을 찾아 보던중 우리 일가에 독립운동가 6남이 나라를 위해 훌륭한 업적으로 후손에게까지 가문의영광을 일 꺠워주는듯해요. 다시 한번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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