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관으로 1506년(병인년)연산군 12년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시어,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의 녹권전지(錄券傳旨)가 내려졌으며,
처음에는 함흥부사를 배수하시고, 이어서 밀양부사의 제수가 있었으며,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시어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계시다가,
호위의 시종반열의 뛰어난 공적이 있으시어 가선대부로 승진하시었다.
뒤에 외직으로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가 되시고,
관질만기(官秩滿期)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셨으며,
1553년(계축년) 명종임금 8년 3월 25일에 원북리 본집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72세이셨다.
문집(文集)에는 북계일기(北溪日記)가 남아있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 후배(後配)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와 의 슬하에
응세(應世: 여흥민씨 소생), 응기(應箕: 여흥민씨 소생), 응춘(應春: 전의이씨 소생)등
삼형제를 두셨읍니다.
공(公)의 묘소는 함안군 군북면 동점동(銅店洞)에
후배(後配)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와 고 모하 유좌 합부(考 墓下 酉坐 合부)로
원북재 묘역에 모셔져 있으며,
초배(初配)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아기산 유좌에 모셨다가,
1977년(정사년)에 전남 곡성군 죽곡면 봉정 청룡등 간좌로 이장(移葬)하였읍니다.
선적(先蹟)으로는 절도공 신도비(節度公 神道碑)가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낙동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읍니다.
언행록(言行錄)을 보면
공(公)께서는 어려서부터 상모(狀貌)와 기량(器量)이 보통사람을 능가 하셨고,
학업에 일찍 성취하시어, 장성함에 이르시니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정대(正大)하며,
풍채가 늠늠하시고, 의표가 당당하시며, 용맹한 무예가 남달리 준출 하시고, 의지가 굳건하시며,
기개가 확호(確乎)하시어 언어수작(言語酬酌)이 영특하시는 등 활발하시었다.
공(公)의 나이 25세때(1506년 병인년/조선 연산12년/ 중종1년)
당시의 임금인 연산군은 어둡고 음탕하기 짝이없어
나라의 정사(政事)가 어지럽고 기강이 흐트러지게 되자
판서 유순정,정광필, 성희안, 지중추, 박원종,등의 제공(諸公)이
종묘와 사직이 장차 기울어 짐을 통탄하고
연산군 폐위와 중종 옹립을 명약 밀계하기 위하여 9월 3일에 훈련원에서 모임을 가지니
그때 부친 좌윤공은 훈련원 부정 이였고, 공(公)은 선전관으로 있었다.
제공(諸公)이 공(公)의 지기(志氣)가 용예(勇藝) 함을 칭찬하고
이윤과 곽광이 암군(暗君)을 몰아내고 현주(賢主)를 옹립한 고사(故事)에 협찬하기를 당부하며
말 하기를 " 이 중대한 때를 당 하여 그대가 아니면 누가 감당 할 것인가." 하였다.
공(公)께서는 탈의(奪義)하여 정국동맹(靖國同盟)에 앞장서고,
특히 반정원훈(反正元勳)을 세우시니 중종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입시(入侍)를 명(命)하고
손을 잡으시고 이르시길 " 난세(亂世)를 만나 지절을 지키기는 쉬우나
기우러지는 나라를 붙잡고 바로 잡기는 어렵다" 하시며 다시 경상수군 절도사를 제수하고,
그 선고(先考: 여기서는 휘(諱) 금호(金虎)에게
한성부 좌윤 겸 동지의금부사를 연증(延贈)하시었다.
중종 2년 정묘년 1507년 4월 3일에 도승지 홍경주가 녹권을 받들어 전하고,
정충록(精忠錄)을 포사(褒賜)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종가(宗家)에서 보관 하던중
화재로 소실 되었으며, 그 전지(傳旨)는 다음과 같읍니다.
< 왕이 이르기를 " 충의(忠義)에 탈발(奪發)하고 위란(危亂)을 바로 잡는 것이
신하의 직분(職分)이오. 훈공(勳功)을 기록하고 포상을 반포(頒布) 하는 것은
임금의 전법(典法)이다. 한동안 국운이 불퇴(不退)하여 사직(社稷)이 기우러 질 무렵
나의 작은 덕(德)으로 종숙(宗叔)의 장(長)이 되어
다행히 덕(德)을 같이한 신하들의 협찬 추대를 따름이라.
내 진실로 가상히 여기거늘 어찌 잊으랴.
마땅히 포상의 전(典)을 베풀고 군신의 의리로 시종(始終) 할 뜻을 굳게 하는 것이니
원종 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은 각각 벼슬을 한 급씩 가증(加增)하고,
그 부모로 하여금 관작을 봉(封)하고
자손은 그 음덕(蔭德)으로 유죄(宥罪: 죄를 너그러이 용서함)의 혜택이 후세에 미치게 하라.">
공(公)의 부친 좌윤공께서는
중종14년 기묘년 1519년에 벼슬을 그만두시고 향리로 거가(居家)하시었읍니다.
이때 공(公)께서는 충청 병마절도사로 계시면서 종종 휴가로 양친을 뵈올때는
많은 수레와 말을 마을 밖에 멈추고 사치하고 화려한 거동없이 간소한 차림으로 하여
가정의 청검(淸儉)한 절제를 지키셨읍니다.
공(公)께서 어렸을때 강신효등과 더불어 동학(同學) 하시었으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어시고
병가(兵家)의 육도 삼략(六韜三略)에 이르기 까지 통달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셨으며.
늦게 무과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임금을 시어(侍御)하는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오르시었으나
할아버지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청근(淸謹)하신 절행(節行)을 이어 행실(行實)하시고,
아버지 좌윤공(左尹公)의 절검(節儉)하신 가풍을 준수하시어
항상 이르시길
"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 효도함은 신하된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고 하시었으니
그 큰 기량(器量)은 당시 어진선비들의 추허(推許)를 받으셨고,
그 중에서도 충제 권선생, 발농암 이 선생, 현보 참의 장공(公) 대훈
종형이신 판결공 휘(諱)적(積)등과 더불어 사이가 좋았으니
언제나 응천(凝川)에서 서로 술양(述양=심방변+襄)하고 즐기셨읍니다.
충제공이 만송정(萬松亭)을 숭인문 밖에 터를 가려 새로 짓고 여러 벗을 청하여
절구(絶句) 한수를 지어 깊은 정교(情交)를 서술하니 공(公)께서 화답하여 이르시길,
" 일찍 몸을 나라에 바친 것은 내 집을 위한 것이 아닌거늘 ,
오늘 동문(東門)에 만송정 신축을 축하하니 그 아니 아름다운가,
우리 한몸 한뜻으로 외람되이 천은에 보답하였으니
흰 머리된 뒤에 함께 물러가는 다섯 사람의 마음인들 오죽이나 흐뭇하리." 하셨읍니다.
이 시(詩)를 보면 그 지기(志氣)가 서로 화합하고,
물러가는 결개(潔介)하신 절조(節操)가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敬意)를 일으키게 하셨다.
공(公)의 연세 52세 되시던 1533년 계사년 (중종 28년) 아버지 좌윤공의 상(喪)을 당하시매
그 슬픔이 한도를 지나고, 상장(喪葬)의 절차가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면
무덤앞에 기둥같은 돌을 다듬어 세우고, 글을 지어 새기니
" 마음 모아 비옵건데 인인(仁人) 군자(君子)는 몸에 돌이켜 구하는 지라.
산과 바다에 맹서 하노니 힘써 밭을 갈고 우마(牛馬)를 기르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 할 것이며,
길이 부모를 추모하는 도리를 다 할 지어다." 하셨고,
" 산령(山靈)과 산신(山神)께 비옵나니,
슬프다 ! 우리 선영을 천추만세 토록 풍우에 허물어 지지 않게하여
길이 부모님을 사모하는 길을 보전케 하옵소서." 하였다.
이 글을 좌우(左右) 돌기둥에 나누어 새겼으니
그 깊이 사모하고 깊이 효도하는 마음의 지극함을 엿 볼수 있읍니다.
1545년 을사년(인종1년/ 명종 즉위 초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史禍)로 인 하여
세상에 실의(失意)를 느낀 공(公)께서
여러 벗들과 이별 하시면서 말씀 하시길
" 삼조(三朝)의 임금을 섬겨 벼슬이 어전(御前)의 문지방 배목을 지키는데 이르렀으니,
내 또한 무엇을 구하리." 하시며 관직을 내어 놓으시고,
고향으로 돌아 오시어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북계(北溪)위 신동(申洞)에 정자를 지으시고,
손수 세그루의 나무를 심어시어 삼수정(三樹亭)이라 하셨으니
종명(終命)하실때 까지 늙음을 달래시며 쉬는 곳으로 매양 노니시고 기뻐하시니
맑은 물 흘러가는 냇가에 푸른 숲 우거지고, 우뚝한 바위에 흰 안개 띠를 메니
아마도 한가한 자연풍경을 나만이 즐기노라 하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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