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학과 예술

질병의 몽환에서 깨어난(awakened)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기적>

작성자지성아범|작성시간20.06.11|조회수483 목록 댓글 1

본 게시물은 사이언스타임즈에 2015년에  박지옥 신경과 전문의가 작성한 [메디시네마 : 의사와 극장에 간다면] 박지욱의 메디시네마 (1) '사랑의 기적'을 발췌한 글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듯, 질병의 몽환에서 깨어난(awakened)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기적>을 보셨나요? 지난 여름의 끝에 세상을 떠난 의사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Oliver Sachs)와도 인연이 깊은 이 영화를 소개합니다.

1969년 뉴욕 브롱스의 요양병원에 일자리를 얻은 닥터 세이어, 환자라고는 본 적이 없이 연구만 해온 ‘장롱면허’ 의사입니다. 적성에 안 맞는 환자 진료에 몸서리를 치면서 지내던 어느 날, 세이어는 아주 특이한 환자들을 만납니다. 뇌염을 앓은 후에 수십 년 동안 눈뜨고 잠자듯 지내온 환자들이었지요. 세이어는 이들을 치료해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파킨슨병 치료제인 엘도파(L-DOPA)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 약을 구해 환자에게 먹입니다. 환자는 기적처럼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잠시뿐, 환자는 부작용을 일으켜 더 이상 약을 먹을 수가 없어 투약을 중단합니다. 그러자 생생했던 환자들은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영화에서도 밝혔듯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영화 <사랑의 기적 1990>과 그 원작 작품

발견자의 이름을 따 ‘폰 에코노모 뇌염(von Economo encephalitis)’, 죽은 듯 잠만 잔다고 ‘수면병(sleep sickness)’ 혹은 ‘잠자는 뇌염(encephalitis lethargica)’으로도 불리는 이 신경질환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3년 동안 유럽의 대도시에서 대유행했습니다.

병에 걸리면 열이 나고 눈이 마비되며 의식을 잃습니다. 치사율이 40%나 되어 5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았다 해도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여 움직이지도 못한 채 폰 에코노모의 말처럼 ‘유령처럼 비현실적이고 좀비처럼 수동적인’ 상태로 평생을 지냈습니다. 일부 생존자들은 파킨슨병 증상(뇌염후 파킨슨병)을 보였습니다.

목숨을 잃은 환자의 뇌를 부검해본 병리학자들은 파킨슨병 환자처럼 중뇌의 흑체(substantia nigra)가 망가져 있어 파킨슨병(parkinsonism)과 연관지어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별다른 치료법도 없고, 정체도 알 수 없고, 원인도 모르고,….

한마디로 괴질(怪疾)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1927년 이후로는 새로운 환자도 없어 이 병에 대한 관심은 곧 시들어가고 잊혀진 병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환자들은 요양병원에 수용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야했습니다. 그러다가 올리버 색스가 이 환자들을 깨웁니다.

영국 출신의 신경과 의사로 1966년에 뉴욕 브롱스의 요양병원에 일자리를 얻은 올리버 색스는 생전 처음 보는 환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들의 기록을 통해 ‘잠자는 뇌염’의 후유증이란 사실을 알게 되지만 폰 에코노모 이후로 40년 동안 아무런 후속 연구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리고 1969년 봄에 파킨슨병 치료제로 새로 나온 엘도파(L-DOPA)를 시험적으로 환자들에게 먹이는 대규모 임상시험에 참여하였습니다.

색스의 환자들은 모두 80명이었고 약을 먹은 환자들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해피엔딩 장면처럼 하나 둘 깨어납니다. 하지만 소생도 잠시, 레너드에게 나타난 것처럼 엘도파의 용량을 정확히 맞추기 힘들어집니다. 약효가 강하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약하면 굳어지는 상태를, 환자들은 마치 롤러코스터에 앉은 것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갑니다. 용량을 제아무리 조절해보아도 엘도파는 더 이상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고통만 안겨다 주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약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고 환자들은 원래의 상태대로 굳어져 갑니다.

색스는 엘도파가 처음에는 잘 듣지만 몇 주 내에 약효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글을 의학학술지에 실었습니다. 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알리려던 그의 시도는 파킨슨병의 유일한 치료제인 엘도파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후로 색스의 글은 어느 학술지에도 실리지 않았고 그 자신도 학술지를 포기합니다.

올리버 색스, 영화 <사랑의 기적>을 계기로 학계에서 인정받다

몇 년 후 영국의 주간지에 이 이야기가 실려 많은 대중들에게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은 ‘기적과 비극’이 알려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연극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환자 레너드 역을 맡은 로버트 드니로는 환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고, 닥터 세이어 역을 맡은 로빈 월리엄스는 원작자인 색스를 직접 만나 많은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환자와 의사의 역할을 완벽하게 재현해냈습니다. 색스는 로빈 윌리엄스의 말투와 몸짓이 너무나 자신을 닮아 거울을 보는 기분이라 했습니다. 영화에서 한번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영화는 색스의 <Awakenings(1973년)>을 원작으로 만들었지만 허구와 사실이 반반입니다. 하지만 숨은 그림 찾듯 ‘팩트 체크’를 한번 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어린 레너드의 친구 중에는 ‘올리버’가 나오는데 영화의 세세한 부분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원작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 아닐까요?

회복된 레너드를 데리고 세이어가 세상 구경을 다닐 때 달 착륙 사진이 거리에 보이고, 굉음을 내며 보잉 747 점보기가 머리 위로 날아갑니다. 점보기는 1969년 2월에 처음 날았고, 달 착륙은 그 해 여름의 일입니다. 환자들의 기적도 1969년 봄에서 여름까지였습니다. 또, 늙은 잉감(Dr. Ingham)이 자신이 연구했던 환자들의 오래된 영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화면은 1925년에 레비(F.H. Lewy)라는 신경과의사가 촬영한 환자 영상과 많이 닮았습니다. 한번 비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lNVtUlroZc)

한낱 변두리 요양병원에서 일하던 색스의 주장에 모두 시큰둥했던 학계도 점점 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지금은 신경과 의사들 누구라도 이 약의 한계를 인식하고 처방을 하고 있습니다. 아, 색스는 약의 한계에 대해 너무 빨리 ‘깬’ 사람이었네요.

영화는 1990년 연말에 개봉했고 흥행 성적은 <나홀로 집에>의 돌풍에 밀려 2위에 그쳤습니다. 아카데미상은 후보로만 지명되었고 수상은 하나도 못했습니다. 1991년에 우리나라에도 개봉했는데 <사랑의 기적>이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영화 내용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올해 초 색스는 자신이 불치의 병을 앓고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평생 ‘환자가 머무는 풍경’을 그렸던 그는 마지막 순간을 환자로서 기록을 남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가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풍경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가 그리울 때면 <사랑의 기적>을 보면서 소심하면서도 열정적이었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빙긋 웃어주고 싶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보영 작성시간 20.06.13 와~ 놀라운 일이 있었군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