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4
성령충만하여 웨슬리의 뜨거운가슴으로
행2:1~1
서론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 회심 288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회심”은 “성령”으로 “가슴이 뜨거워져 심령이 변화된 사건”을 말합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증조할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목사님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목사였고, 어머니 “수산나는 청교도 목사의 딸”이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형제는 모두 19명인데 “존 웨슬리”는 15번 째였습니다. (3남7녀)만 살아남았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태어난 1700년대에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세속화로 물질문명에 빠져 “죄”가 늘어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도박장, 술집, 창녀촌, 나체로 공연하는 연극 등이 생겨나 영국 사회가 타락의 길로 가는 때였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6세 때에 큰일을 겪었었습니다.
목사관에 누군가가 밤에 불을 질러 목사관이 불이 나서 식구들은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수산나가 그들을 점검해보니 한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목사관 2층에서 “사람 살려”라는 소리가 들렸고 “존 웨슬리”가 창문에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목마를 타고 올라가 “존 웨슬리”를 구해 내려오자마자 목사관의 지붕이 내려앉았습니다.
“어머니 수산나”는 “존 웨슬리”를 “타다 남은 부지깽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시키시기 위해 구출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끼며 특별히 말씀과 영적으로 관리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10세 때 런던 카르투지오 수도회 수도원의 챠터하우스에서 6년간 공부했습니다.
“존 웨슬리”가 “챠터 하우스”에 들어갔을 때 “자신은 신령한 성도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죄인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 시와 노래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으며 성적도 우수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컬리지의 “펠로우” 연구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형식적인 신안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생 “찰스 웨슬리”가 만든 모임인 “홀리 클럽” “거룩한 모임”을 인도 합니다.
이 모임에서는 “매일 성경 보기와 금식, 매일 밤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경건 훈련”을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경건 생활의 방법”으로 확고한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규칙쟁이”(Methodist)라는 별명을 얻어 후에 감리교의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감리회 운동”은 “신앙 운동”과 “감옥 개선과 노예제 폐지” 등과 같은 “사회 운동”까지 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개인적 경험”을 강조하며 “성화 거룩한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22세에 서리전도사가 되고 25세에 “성공회 신부”의 서품을 받게 됩니다.
“존 웨슬리”는 1735년에 미국 선교사로 가기 위해 “시몬즈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미국으로 가는 항해 도중 대서양에는 심한 폭풍이 몰아닥쳤습니다.
“배”는 침몰 직전에 이르렀고 “존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웨슬리”는 찬송과 기도로 죽음의 위기를 맞고 있는 26명의 “독일 모라비안교인들”을 보게 됩니다.
여러 차례의 풍랑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존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안 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하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폭풍”이 지난 후 “웨슬리”는 모라비안교인들에게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모라비안교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 때 “경건의 규칙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외면적 신앙”으로만 안된다는 경험을 하고 자기의 믿음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여, 모라비안 선교사 아우구스트 슈팡겐베르크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그 목사님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선교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슈팡겐베르크 목사님은 “당신 속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오?” “존 웨슬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나는 그 분이 세상의 구주신 줄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셨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존 웨슬리”는 확신 없는 대답을 하게 됩니다.
“조지아주 사바나” 항구에 도착하여 2년 동안 선교 했는데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조지아 선교 실패로 인해 “존 웨슬리”는 자존감이 지극히 낮아졌고, 결국 미국 조지아 선교는 실패하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 옵니다.
“웨슬리”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뵐러”목사님과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올더스케이트 거리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때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던 “존 웨슬리”의 마음에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24일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월 24일 수요일 저녁이 되어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가의 모임에 갔다. 그 집회는 페인트공인 홀런드씨가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였다. 8시 45분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그 사람이 말할 때에 이상하게 내 마음에 감동이 왔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바로 내 죄를 제하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직후 나를 특히 괴롭히며 박해하던 원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가 처음으로 마음속에 경험한 사실을 간증했다.”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가슴이 “뜨거워짐”은 “성령충만의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의 사건”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믿음의 확신과 열정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요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지식만으로 안되고, 거듭나 변화된 심령이 되어야 일군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죄 사함 받고 멸망 받지 않고 영생에 이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 “웨슬리”는 탄광촌과 어촌, 농촌 재래시장 등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서 합리적인 설교를 할 때는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지만 밖에 나가서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고 선포하자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성공회”는 강단에서만 설교하고, “야외설교”는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목사”가 강단을 벗어나 설교를 한다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파문 시켰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감리교”(Methodist)입니다.
웨슬리 때문에 영국 사회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설교하면 여선교회는 “금주, 금연운동, 도박퇴치,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하였습니다.
은혜받아 “죄”를 멀리하고 알코올 중독자들, 도박 중독자들이 술과 도박을 끊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정직하고, 바르게 열심히 일하자 술집과 도박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 “성령충만”입니다.
“웨슬리”는 “회심”을 통하여 요3:16 말씀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 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웨슬리”는“구원의 확신”이 생겨 “성령충만”한 때부터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담대히 전하여 “개인 구원과 사회구원”을 외치기 시작하여 “영국 사회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 성령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모든 영적 운동은 “성령충만”할 때 “성령 운동”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신앙의 성장이나 변화는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성도들이 “성령충만”할 때 “성령 운동”만이 이 민족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2, 기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87세의 생신을 맞은 웨슬리목사님에게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한 결과라고 하였으며, 감리교인으로써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증거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철야기도, 새벽기도, 금식기도 등을 하였습니다.
3, 말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네가지 균형”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전통, 경험, 이성”입니다.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갖추어진자가 “감리교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자신도 “나는 한 권의 책의 사람 곧 성경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4, 이웃 사랑 실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산업혁명” 여파로 유럽은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지만 반면에 유럽 사회는 “물질주의, 세속주의” 영향으로 사회 양극화와 온갖 부정부패, 탈법, 음란과 타락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영국 사회도 “프랑스 대혁명”처럼 “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웨슬리 목사님”의 이웃 사랑 실천운동으로 영국 사회가 “무혈 산업혁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감리교는 처음부터 “빈민 구제운동, 금주운동, 도박 금지운동, 학교와 병원, 고아원”을 세워 불우한 사람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형무소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노예해방 운동을 하였으며,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과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신용조합,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결 론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 사건” “성령 충만”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명과 사명을 경험하였습니다.
마가 다락방의 성령임재 사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사건, 루터의 사건, 웨슬리 회심 사건, 이 모두는 “성령 충만”의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의 사건이 일어나 다시 뜨거운 가슴이 되는 임마누엘 가족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