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컨대 20세기의 1백 년 동안 세계 인구는 네 배나 늘어났지만 농산물 생산이 그 이상 늘어나지 못했다면 그러한 인구 증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공기 중의 질소에서 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발견을 계기로 인류는 공기를 빵으로 바꾸는 기술을 갖게 되었고, 첫번째 난제였던 식량 문제를 1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럼, 불과 1백여 년 전만 해도 죽음의 주원인들 중의 하나였던 전염병을 보자. 19세기 초 세계는 50년 동안 단 6년만 빼고는 매년 쉴새없이 찾아오는 콜레라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게다가 전염병은 모질게도 빈부를 차별했다. 1832년에 파리에서 창궐한 콜레라에 대한 공식 보고서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1천 명당 53명이 사망했고 부자들은 1천 명당 8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3년 콜레라균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콜레라가 사람의 배설물에서 식수를 통해 다시 사람에게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또한 1905년 염소 소독법 도입으로 여과 및 침전법과 함께 수돗물의 질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콜레라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인성 전염병들을 막을 수 있었고, 분석화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20세기 후반에는 염소 소독법의 맹독성 부산물까지도 인지하여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질병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인 위생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자. 비누가 나오기 전까지 인류에게는 청결 개념이 별로 없었다. 아니, 없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그리스·로마인들은 올리브유와 왕겨로 몸을 닦았고 공중화장실에서 퍼온 오줌에 옷을 적셔 색깔도 내고 세탁도 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도 모래와 짚으로 놋그릇을 닦았고, 기름때가 있을라치면 뽕잎을 문질러 식기를 닦았다. 틀어올린 상투나 곱게 빗어 비녀를 꽂은 머리카락도 비누를 만난 적이 없으니, 한겨울을 나고 나면 벼룩과 머릿니로 허연 데다 냄새가 지독했음은 불문가지이다. 오늘날 멋진 향내를 자랑하는 예쁜 포장지 속의 비누 한 덩이가 몇 백원에 불과하지만, 늘상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던 조선 사람들이 근대 비누 제조법의 혜택을 보게 된 것은 그다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이처럼 현대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기본적으로 삶의 질은 건강해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가 질병에 대한 예방과 치료라는 실질적인 무기를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신비적인 시각이나 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던 자세를 바꿔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50년대 초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 DNA)의 구조가 밝혀지고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생명의 적인 질병에 대한 이해와 대처도 분자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접근되기 시작했다.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이 분자 차원에서 속속 규명되어, 최근 들어서는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 기법까지 도입될 만큼 인류는 질병에 대하여 상당한 이해에 도달했다. 뿐만 아니라 유기합성화학과 분석화학의 비약적인 발달은 신물질 합성과 천연물로부터의 성분 추출 및 정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신약 개발의 초석이 되었다. 오늘날 제약 산업은 대표적인 생명공학 기술(biological technology : BT)에 기초한 기술 패권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로서, 한 가지 약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황금알을 낳는 글로벌 비즈니스이다.
인류의 질병 정복에 대한 노력은 20세기 후반 들어 색다른 전기를 맞았다. 기존의 생물학, 화학, 의학, 약학 등의 질병 관련 학문이 반도체 공학, 정보기술(IT) 등과 결합하는 새로운 추세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비쿼터스 헬스 케어 시스템(ubiquitous healthcare system)이라는 긴 이름의 외래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추세에 기인한다. 무슨 말일까? 우리가 건강에 이상을 느꼈거나 정기 검진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자. 학교나 직장을 쉬고 병원에 가서 많은 양의 피를 뽑고 며칠씩 기다려야 결과가 나오고, 그나마 약속을 정하여 의사를 만나야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이유는 혈액 검사를 포함하여 여타 건강 검진에 관련된 검사들이 복잡한 기기를 사용하거나 진단검사 실험실에서의 숙련된 분석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만약 건강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화학적, 생물학적 검사들을 비전문가인 우리들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또한 그 결과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병원의 주치의 컴퓨터에 자동으로 전송되어 건강에 문제가 있을 때 우리에게 경고해 주거나 왕진해줄 수 있다면 어떨까? 당뇨병이나 뇌졸중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 독거 노인 등 거동이 불편한 많은 노약자들이 예약을 하고 병원까지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늘 성인병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은 휴대전화만으로도 그때그때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집안 병력이 있거나 특별히 약한 장기를 가진 가족이 있다면 평상시에도 관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생활,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미래 생활이다. 그리고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시스템이라 부르는 체제이다. 이러한 세상 앞에 우리는 얼마만큼 다가와 있을까?
이른바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컴퓨터는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아졌고, 휴대전화를 비롯한 모바일 기기가 보편화되었다. 병원과 가정, 개인은 이미 네트워크를 통해 충분히 많은 양의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편리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 그 결과 냉장고, 텔레비전, 심지어 옷 속이나 변기에도 컴퓨터와 인터넷 접속장치를 넣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정보 기술의 발전과 유무선 네트워크로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된 사회는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시스템의 기본 요건이다. 우리나라를 필두로 세계의 많은 선진국들이 이미 이런 요건을 갖추고 있다. 남아 있는 장애물은 병원의 진단검사 분석실에 있는 커다란 기자재나 숙련된 검사 요원들의 노동을 대신할 작고 값싼 분석 장치 개발에 관한 문제이다.
바이오센서(biosensor)와 바이오칩(biochip)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줄 목적으로 등장한 물건들이다. 바이오센서와 바이오칩을 한마디로 명료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당뇨병 환자들이 사용하는 일회용 혈당 측정기나 임신 진단용 키트 등은 바이오센서로 분류되고, DNA 칩과 같은 마이크로어레이(microarray)나 랩온어칩(lab on a chip)이라 부르는 것들은 흔히 바이오칩으로 간주된다. 이들을 구조나 원리, 기능 등에 따라 학문적으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시스템에서 간편하게 질병을 진단하는 데 유용한 기구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혈당(blood glucose) 측정기는 혈액 안의 포도당 농도를 재는 데 사용되는 기구로 여러 모로 바이오센서의 대표적 모델이다. 1962년 처음 산소 센서와 효소를 결합한 포도당(glucose) 센서가 개발되었고 1960년대 말에 최초의 광학식 혈당 측정기가 출현하였으니, 이제 혈당 측정기의 나이는 마흔 살이 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굴지의 다국적 기업들이 혈당 측정기를 공급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이미 수년 전에 기술을 국산화하여 국내 업체에서 혈당 측정기를 시판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휴대 전화 등 모바일 기기와 연결하여 기능을 배가한 제품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머지않아 휴대전화가 건강 관리를 위한 필수품으로 떠오를 것이다.
특히 폐암, 췌장암과 같이 생존율이 매우 낮고 영상 진단이나 내시경 등으로 조기에 발견하기 어려운 암의 경우에는 더더욱 체외 진단을 통한 암의 조기 발견이 생사의 관건이다. 또한 수술 뒤 암의 재발 여부를 효과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것도 지극히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은 암 진단을 하려면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혈액을 포함하여 우리의 몸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체액으로 손쉽게 암을 진단할 수 있는 바이오칩이 있다면 더없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최근 들어 암을 진단할 수 있는 바이오칩에 대한 연구가 무척 활발하며, 암 조기 진단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고 있다. 자궁경부암과 관련이 많다고 알려진 인간 유두종 바이러스(human papilloma virus : HPV) 검출을 비롯하여 몇 가지 암 표지인자를 검출하는 칩이 알려져 있으나 아직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혈액 또는 소변이나 대변에 존재하는 DNA를 분석하여 암을 진단할 수 있는 바이오칩도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바이러스는 단백질에 둘러싸인 일종의 핵산(nucleic acid)으로, 핵산 검사(nucleic acid analysis)를 통해 직접적으로 검출하거나 단백질 분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핵산 검사는 DNA 혹은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 RNA)을 분석하는 것을 뜻한다. DNA의 경우 다른 생체분자에 비해 매우 안정적이고 소량만 존재하더라도 증폭이 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분석할 수 있다. 핵산을 검사할 수 있는 바이오칩으로 마이크로어레이 방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전기영동 등 다른 원리를 이용한 것들도 있다. 우리가 흔히 DNA 칩, 단백질 칩이라 부르는 것들은 주로 마이크로어레이를 가리킨다.
핵산 검사를 위한 바이오칩은 아직 일반인들도 간편하게 쓸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되지 못해서, 현재는 거의가 생명공학 연구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바이오칩이 제안하는 기능 때문에 현재 개발 속도는 무척 빠르다. 유용한 응용 사례로 수혈에 의한 감염 방지를 들 수 있다. 바이오칩을 이용하여 신속하고 간편하게 핵산 검사를 할 수 있다면 수혈에 의한 감염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용하는 면역분석법에 의한 항원 혹은 항체 검사로는 에이즈에 감염된 뒤 약 3주 이내에 헌혈한 사람을 가려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수혈의 의한 감염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다. 바이오칩의 실용화가 진척됨에 따라 앞으로 헌혈한 뒤뿐만 아니라 수혈 직전에도 핵산 검사를 통한 에이즈 검사를 필수적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밖에도 음식 및 물의 오염 감시, 작물 및 동물의 유전자 검사, 유전자 변형 농산물(GMO)에 대한 검사, 생화학 테러 물질 검출, 인류학적 계보 검사 등에 폭넓게 응용할 수 있다.
요즘 항생제의 오남용으로 약에 대한 내성이 있는 박테리아 발생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항생제의 처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기대되는 것이 신속하고 간편한 병원균의 확인 작업이다. 현재 개발하고 있는 핵산 검사용 바이오칩이 실용화되면, 감염된 박테리아 종류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되어 일반 병원에서 처방 전에 일상적으로 원인균 확인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일반 병원에서 의사가 원인균에 맞는 항생제를 처방하거나 감염된 박테리아의 내성 정도에 따라 약을 처방할 수 있으므로 유행성 독감, 심지어 감기에 걸렸을 때도 적절한 항생제로 맞춤 치료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쓸모없는 약의 처방을 막고 치료 기간이 짧아져 전체적인 의료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핵산 검사용 바이오칩의 용도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범죄 수사 때나 보안을 위한 신원 확인용으로 가장 확실한 핵산 검사가 현장에서 보편화될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와 같은 미궁에 빠진 수사는 핵산 검사용 바이오칩이 있었더라면 미연에 방지되었을 것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에 의해 인간의 염기서열이 알려졌다. 인간의 염기서열 가운데 어느 부분 중 단 하나의 염기가 다른 것을 단일염기다형성(SNP)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개개인이 유전적 차이를 보이는 원인의 90%를 차지한다. 현재 SNP에 의해 발생하는 표현형(phenotype)의 변화와 질병과의 관련성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가까운 장래에 누가 유전적으로 어떤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지 예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몇몇 유전병을 제외하고는 당뇨병, 고혈압 등과 같이 매우 복합적인 요인을 가지는 병이 대부분이므로 질병을 SNP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직 무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약을 처방하는 데 SNP 정보를 응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의원에서 체질에 따라 처방하는 한약이 달라지듯이, 유전 정보에 따라 부작용을 예측하고 적절히 약을 처방하는 것이다. 이른바 맞춤 의약(personalized medicine)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맞춤 의약이 일반화되면 약물에 의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고, 개인에 따라 평균 3~5배 정도 차이가 나는 약물 투여량을 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굴지의 다국적 회사들은 벌써 맞춤 의약 시대에 대비하여 이와 관련된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약과 함께 핵산 진단 키트를 한 패키지로 판매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이미 상품화되어 있는 바이오센서와 가장 많은 진보를 이룬 핵산 검사용 바이오칩을 중심으로 바이오칩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외에도 무척 많은 종류의 바이오센서와 바이오칩이 개발중이거나 상품화가 완료되어 우리 주위에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임신 진단용 키트 등은 혈당 측정기에 이어 단일 품목으로는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바이오센서이다. 바이오칩의 경우 아직 우리 생활에서 보편화되었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온 세계 과학기술자들은 바이오칩 개발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되고 있는 바이오센서와 바이오칩 기술을 볼 때, 어쩌면 우리는 불과 수년 후에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시스템이 작동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생물학과 의학, 약학이 전자공학과 기계공학, 소프트웨어 공학과 만나는 접점에서 우리는 바이오센서와 바이오칩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화학이 현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