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아 문명과 기후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 요약 미노아 문명을 발굴한 에반스는 이 문명의 붕괴가 지진 때문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는 지진학이나 지형학, 고기후학의 지원을 받아 테라 섬의 화산 폭발로 인한 기후변화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산화황이 태양빛을 차단해 추위와 가뭄이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이카로스 이야기가 나온다. 크레타 섬의 위대한 왕 미노스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를 미궁에 감금했다. 다이달로스는 기묘한 미궁을 만든 건축가였는데 왕은 그가 더 이상 이런 미궁을 짓지 못하도록 가두었던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탈출을 결심하고 감옥의 창문에 날아와 앉는 새들의 날개에서 깃털을 모았다. 깃털을 실로 엮고 밀랍을 발라 날개를 만든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의 날개까지 만들었다.
다이달로스는 이카로스에게 말했다. "태양의 열에 의해 밀랍이 녹으니 너무 높이 날지 말거라.“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이카로스는 에게 해를 내려다 보고 너무 신이 나서 아버지의 당부를 잊은 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자 태양의 뜨거운 열에 의해 깃털을 붙였던 밀랍이 녹았다. 이카로스는 날개를 잃고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기상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높은 고도로 올라갈수록 기온은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태양에 가까이 올라가면 더울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이 신화가 탄생한 곳이 바로 미노아 문명을 꽃피웠던 크레타 섬이다.
미노아 문명의 탄생
우리는 유럽 문명의 출발점이 그리스 문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가 아닌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tion)이다. 지금의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달한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2600년경 시작되었다. 에게 해 주변의 세계가 중기 청동기시대로 들어갈 무렵이었다.
기원전 1900년경에 제1차 궁전 문명(1st palace period)이 시작되었고, 기원전 1700년부터는 제2차 궁전 문명으로 이 시기가 미노아 문명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전성기를 누리던 이 문명은 기원전 1400년 정도에 멸망했다.
크레타 섬에 고도의 문명이 만들어진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온난한 기후를 들 수 있다. 또 크레타 섬은 다른 섬들보다 면적이 훨씬 넓은 데다 평야가 많았다. 아시아와 가까워 오리엔트 문화권과 해상교통으로 연결된다는 장점도 있었다. 농업생산이 풍부한 데다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밝고 생동적인 문화가 성립되었다.
초기의 크레타 섬은 동부와 중부에 각각 독립적인 세력이 분립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000년경에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졌다. 미노스라 불리는 왕이 통일을 이루면서 섬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미노아 문명이란 명칭은 전설적인 왕 미노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노스 왕 때부터 정치·군사·예술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미노아 왕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교역을 거의 독점했다.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화려한 항아리에 담아 이집트, 시리아 등지로 수출하면서 무역국가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크노소스를 비롯하여 말리아, 파이스토스, 자크로스 등에도 궁전이 건립되었다. 도기(陶器)와 금속기, 화려하고 세밀한 조각과 그림도 발달했다.
크레타 섬에는 오리엔트 지역과 달리 독립된 신전이 없었다. 신상(神像)이라고 확인될 만한 조상(彫像)도 없었다. 이로 미루어 왕은 지배자인 동시에 최고의 신관으로 신성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문자로는 그림문자(상형문자)와 선(線)문자 A·B가 있었는데, 선문자 B만이 1953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이클 벤트리스(Michael George Francis Ventris)에 의해 거의 해독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붕괴설
아더 에반스(Arthur John Evans)는 미노아 문명을 발굴했던 고고학자다. 신화에서처럼 미노스의 크노소스 궁전이 크레타에 있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진 그는 1900년에 크레타의 수도 헤라크 레이온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서 발굴에 착수했다.
시작하자마자 거대한 궁전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방이 1천 개가 넘는 궁전은 3~4층으로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궁전 안에는 유럽 최초의 포장도로가 깔려 있었고, 수도 설비와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호화로운 목욕탕도 있었다.
광정(光井)1)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건물 내부를 밝힌 구조는 건축술이 고도로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방과 복도의 벽은 화려한 프레스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장난치며 물속을 헤엄치는 돌고래들, 머리를 길게 땋은 젊은 여인들의 행렬, 돌진하는 황소와 곡예사 등을 그린 그림이었다.
커다란 항아리들이 많이 발견된 지하는 아마도 창고였던 것 같다. 이 항아리 모두에 올리브유를 채운다면 19,000갤론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엄청난 양의 올리브유 수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 궁전에서는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옥좌가 발굴되기도 했다. 신하들이 앉는 긴 의자 사이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 그리핀2)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 옥좌이다.
기원전 1700년경에 대지진으로 추정되는 재난으로 섬 전 지역의 왕궁이 무너졌다. 그러나 곧이어 보다 대규모의 새 궁전이 재건되었음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후 약 2세기 동안 크레타 문화는 절정기를 이루었다. 수도 크노소스는 인구 8만을 헤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려했던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1400년경 갑자기 붕괴했다. 미노아 문명을 발굴한 에반스는 지진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궁전의 방에서 갑작스런 재해의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피할 틈도 없이 숨진 것으로 보이는 주검을 찾아낸 것이다. 기름 그릇도 넘어져 있었고 연장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완성되지 못한 예술 작품, 가사 도구도 그대로 있었다.
크레타가 유럽에서 지진 활동이 활발한 지역인 것은 사실이다. 에반스가 지진 붕괴설을 주장한 것은 체험의 영향도 있었다. 1926년 6월26일 크노소스 궁전 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중에 강한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궁전은 큰 피해가 없었지만 근처 마을들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후 에반스는 거대한 크노소스 궁전이 지진으로 무너졌고 미노아 문명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는 지진학이나 지형학, 고기후학의 도움을 받지 못했던 시기였다.
테라 섬의 화산 폭발
1939년 그리스의 젊은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S. Marinatos)는 크레타의 여러 유적지들을 발굴하고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기원전 16세기를 기점으로 지중해 문명의 중심세력이 바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에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에 주목하면서 크레타 섬 인근의 테라 섬 발굴 작업에 참여한 그는 죽기 전인 1988년까지 발굴을 계속하면서 미노아 문명을 연구했다.
1967년 그리스의 고고학자들은 테라 섬에서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화산재를 수십 미터 파헤치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한 아크로티리 마을 주변에서 고대 유적을 발굴한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잘게 부서져 바닥에 잔뜩 깔려 있는 채색 벽화의 조각들이었다.
복원된 완성품은 너무나 놀라웠다. 돌고래와 각종 물고기가 뛰노는 바닷속 풍경,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사슴들, 백합꽃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제비 등 자연의 생동감 있는 모습이었다. 권투하는 아이들, 양손에 물고기를 들고 있는 어부, 배를 타고 출전하는 용사들 등 당시 사람들의 일상이 놀랍게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었다. 지금부터 3천6백여 년 전에 그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마리나토스는 에반스가 문명 붕괴의 원인으로 지목한 지진보다 더 강력한 천재지변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지질학자들이 테라 섬 화산의 돌들을 조사했더니 이 화산이 크레타 문명 멸망 전에 폭발했고 두 번의 폭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나토스는 1883년에 발생했던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을 예로 들었다. 당시의 화산 폭발로 3만6천 명이 죽었고, 폭발로 생긴 쓰나미가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다. 지질분석에 의하면 테라 섬의 화산 폭발은 크라카타우의 4배가 넘는 규모였다고 한다.
따라서 테라 섬의 화산 폭발은 160㎞ 밖에 떨어지지 않은 크레타 섬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지진의 직접적인 피해도 받았지만 섬이었기에 쓰나미의 피해도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미노아 문명이 테라 섬의 화산 폭발로 쇠약해졌고 그 뒤 그리스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주장한다.
테라 섬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서 <대화>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왕국 ‘아틀란티스’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 전설은 원래 기원전 7세기 아테네의 정치가로서 이집트를 방문한 솔론이 그곳의 제사장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었다. “많은 섬을 거느렸던 아틀란티스 왕국에 어느 날 갑자기 화산 폭발과 홍수가 발생해 사람들이 모두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대륙 자체도 바다 밑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탐험가들이 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를 찾고자 했으나 아무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1967년부터 시작된 아크로티리 유적 발굴은 아틀란티스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고도로 발달했던 테라 섬의 문명이야말로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로 지칭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테라 섬의 도시들이 기원전 1600년경 화산 폭발로 완전히 파괴된 사건의 기록이 이집트인들에게 전해졌고, 아테네의 솔론을 통해 플라톤의 작품에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미노아 문명의 붕괴는 기후 때문
하와이 대학의 교수인 플로이드 맥코이(Floyd McCoy)는 조금 다른 주장을 한다. 미노아 문명이 남긴 폐허에 매혹된 그는 이 문명의 붕괴 원인이 화산 폭발이라 추정하고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테라 섬의 화산 폭발 현장을 찾았다. 테라 섬은 화산 분출로 중심이 떨어져 나갔고 섬 가운데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금은 섬 둘레만 남아 넓은 분화구를 목걸이처럼 둘러싸고 있다. 분화구는 바닷물로 채워졌다.
화산재 속의 단서를 연구한 맥코이는 분출된 화산재가 크레타 섬을 뒤덮고 부석이 맹렬히 쏟아졌으며, 뒤를 이어 고온의 분진이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강력한 쓰나미가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크레타 섬을 강타했다는 마리나토스의 의견에 동의한다.
입구가 좁은 크레타 북쪽 만에 쓰나미 파도가 갇히면서 피해가 훨씬 커졌을 것으로 본다. 바닷물이 크레타의 토지를 휩쓸어 염분으로 피해를 입었고 식량 저장창고의 식량도 상해 버렸다. 그는 이로 인해 미노아 문명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문명이 붕괴될 만큼 위력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맥코이는 화산 폭발 때 분출된 엄청난 양의 이산화황에 주목했다. 화산학자들은 테라 섬의 화산 폭발이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의 폭발과 비슷한 규모라고 말한다.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성층권에 치솟은 이산화황은 태양빛을 차단했다.
그해에 기온이 급속히 낮아지면서 여름에도 눈이 내렸다. 3년 동안 전 지구 기온이 평년보다 평균 1~2℃ 내려가면서 식량생산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농업생산이 거의 붕괴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곳곳에 폭동이 일어났다. 세계 최초의 금융공황이 발생하고 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다. 1815년의 탐보라 화산 폭발이 전 지구를 흔들었다면 기원전 1600년경의 테라 섬 화산폭발은 어땠을까가 그의 논거이다.
맥코이는 엄청난 기후변화가 미노아 문명을 붕괴시켰다고 본다. 그는 고기후학자들의 당시 기후분석을 예로 들었다. 나무의 나이테를 이용하면 7,000년이 넘는 기후 역사를 알 수 있다. 고기후의 나이테 전문가인 북아일랜드 퀸스 대학의 마이크 베일리(Mike Baillie) 교수가 분석한 나이테 샘플에 의하면 기원전 1627년부터 10년간 여름에 생장이 없었다고 한다. 맥코이는 이 시기가 화산 폭발로 인한 생장발육이 가장 부진한 때였다고 본다.
덴마크의 과학자들은 그린란드의 빙하 얼음에서 기원전 1,600년경의 황산층을 찾아냈다. 맥코이는 이것도 미노아 문명의 붕괴 증거로 채택했다. 화산 폭발로 인한 급작스러운 기후변화가 미노아 문명을 강타했다는 것이다.
그는 화산 폭발만으로 미노아 문명이 붕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화산 폭발에 이은 쓰나미와 급격한 기후변화가 미노아 문명을 쇠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고 쓰나미로 해군력까지 타격을 받으면서 식량 조달도 어려워졌다. 자연재해를 주관하는 왕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져 들고 자연스럽게 국력이 쇠약해져 갔다.
미노아 문명의 전성기엔 온화하고 비도 많이 내렸던 기후가 화산 폭발로 추워지면서 가뭄까지 들이닥쳤다. 미노아 문명이 쇠퇴하자 그리스인들이 침략해 왔다. 이들은 크노소스를 포함한 각지의 궁전을 파괴했다. 이후 에게 문명의 중심은 그리스 본토인 미케네로 옮겨졌다는 것이 맥코이 교수의 결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노아 문명과 기후 -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지구과학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