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문명과 기후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하라파 문명
인더스 문명은 ‘하라파 문명(Harappan civilization)’이라고도 부른다. 하라파 문명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처럼 강 계곡의 충적평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성립되었기에 자연적인 조건도 다양했다. 강 유역과 산간지역, 해안지역의 성격이 망라되고, 매년의 홍수나 관개기술에 연관되기도 하고 무관하기도 한 특성이 있다.
하라파 문명이 발전하는 데 기후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구르딥 싱의 학설이 있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인더스 계곡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온난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 덕분이었다. 이런 기후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정착민 외에도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마을은 도시로 발전했다.〉
이 학설은 19세기의 유명한 기후학자 리드 브리슨과 토머스 머리에 의해 지지 받았다. 그들은 ‘굶주림의 기후’라는 책을 통해 하라파 문명이 생성된 바탕에는 기후가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라파 문명이 처음 만들어진 계기에 대한 다른 학설도 있다. 이 학설을 처음 주장한 이들은 주로 고고학자들이었다.
〈인더스 계곡에 도시가 발달한 까닭은 당시 거주지가 척박하고 날이 가물었기 때문이다. 가뭄 때문에 사냥감이 줄어들고 농업을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사람들이 강 근처에 모여들며 마을이 생기고 도시로 발전했다. 관개농업을 하기 위해서 문명이 만들어진 것이다.〉 통상적으로 고대 문명이 발생하게 되는 원리와 유사한 주장이다.
하라파 문명의 특징
하라파 문명은 여느 문명과 크게 구별되는 차이점이 있다. 메소포타미아·나일·황허 문명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기반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그러기에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축물들을 건설했다. 확고한 신분제도로 정치를 지탱했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라파 문명에는 왕과 같은 강력한 권력이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넓은 지역에 도시 형태로 존재한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100여 개가 넘는 하라파 문명의 주거지 중에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330에이커(1,335,000㎡)를 넘는 큰 규모이다. 그러나 나머지 유적은 규모가 작아서 15에이커(60,700㎡)를 넘지 않는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600㎞ 이상 떨어져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아마도 이 두 도시는 통치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증거로 보인다. 하라파는 펀잡의 고지대 수도였고 모헨조다로는 인더스 충적지역인 저지대의 수도였을 것이다.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특징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 신드 주의 인더스 강 하류에 위치해 있다. 1920년 R. D. 배너지가 쿠샨 왕조 시대의 불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도시를 처음 발견했다. 현지 언어로 ‘죽은 자들의 흙 무덤’이라는 의미를 가진 모헨조다로 유적의 발굴은 1920년에 시작되어 1931년까지 계속되었다.
모헨조다로의 성립 연대는 기원전 4,000년경으로 추정된다. 모헨조다로 유적은 크게 서쪽의 성곽 요새 지구와 동쪽의 시가 지구,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성곽 요새 지구에는 성벽을 따라 사방 각 30미터에 이르는 넓은 회랑과 회의장, 학습장, 목욕탕, 곡물 창고 등이 있다. 이곳에는 종교와 행정에 관련된 기관들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가 지구에는 포장된 길을 따라 집들이 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다. 대부분의 집들은 불에 구운 벽돌을 쌓아올려 지었다. 집의 크기가 획일적인 것으로 봐서 주민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팀은 모헨조다로에 세 차례의 큰 홍수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시가 예전처럼 재건되었음을 밝혀냈다. 이것은 고대였음에도 모헨조다로에 정밀한 도시계획과 함께 홍수통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정교한 문명이었던 하라파 문명이 기원전 1,800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모헨조다로도 잘 계획된 도시에서 점차 빈민촌들이 생겨나는 도시로 변했다. 유적지 발굴에 의하면 성곽 요새 지구에도 허름한 집들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도시의 행정기능은 마비 상태로 빠져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헨조다로의 몰락을 시작으로 인더스 문명권의 여러 도시들도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라파 문명은 전성기에 나일 강 하곡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지역에 이르렀다. 그러나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하라파 문명의 도시들은 기원전 1,500년경 완전히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화산 폭발이나 소행성 충돌 같은 재앙도 없었다. 한때는 초목이 우거진 비옥한 땅이 모래로 뒤덮인 사막으로 완전히 변했다. 많은 과학자들과 환경론자들에게 하라파 문명은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의 상징이 되었다.
하라파 문명의 멸망 원인
하라파 문명이 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아리아인의 침입이 원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아리아인이 도시를 공격한 흔적이 없다. 아리아인의 침입과 인더스 문명의 쇠퇴 시기는 수백 년이나 차이가 난다. 둘째로 인더스 강이 범람해 큰 피해를 입어 쇠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인더스 강의 범람 후에도 도시가 재건된 흔적이 발견되었기에 홍수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인도에 대가뭄이 닥쳐 하라파 문명 지역이 건조지대가 됨으로써 멸망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토지의 건조화로 염분이 지표에서 나오는 염분 노출이 이루어졌고, 이는 농작물 생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식량이 사라진 문명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가장 많은 과학자와 고고학자들에게 인정을 받는 견해이다.
인도의 역사는 하라파 문명의 멸망에서부터 인도의 다음 거주자들인 아리아인이 도착하기 전의 몇 세기 동안 역사의 단절이 나타난다. 유적도 기록도 거의 없는 시대이다. 이것은 하라파 문명이 대가뭄으로 멸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가뭄은 문명을 파괴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던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침입해 고대 국가를 세운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 등을 만들어 철저한 신분제를 확립한 민족이기도 하다.
자, 그럼 기후변화로 하라파 문명이 멸망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를 살펴보자. 하라파 문명이 가뭄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은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퍼트리샤 폴 박사이다. 그녀는 화분학이라는 고기후 추정 방법을 사용했다.
화분학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첫째, 꽃식물과 양치식물의 유전자가 들어 있는 꽃가루와 포자는 상당히 단단하고 오랫동안 보존된다. 꽃가루와 포자의 세포벽은 스포로폴레닌이라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스포로폴레닌은 천연 플라스틱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그렇기 때문에 꽃가루는 대단히 혹독한 기후조건에서도 보존된다.
둘째, 꽃가루는 표면의 형태나 무늬 같은 겉모양이 대단히 다양하다. 따라서 꽃가루를 통해 식물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어 그 지역의 기본적인 식생을 알 수 있다. 셋째, 식물이 만들어내는 꽃가루의 양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식물이 생산하는 꽃가루는 엄청나게 많다. 꽃가루는 바람과 비와 흐르는 물을 따라 이동한다.
마지막으로, 꽃가루나 포자는 크기가 아주 작아 대부분 1/1,000밀리미터에 불과한 미크론 규모이기 때문에 찻숟가락 하나 분량의 표본에서도 발견된다. 호수에 가라앉은 꽃가루는 밑바닥에 상당히 균일하게 자리를 잡는다. 해마다 계속해서 그 위에 꽃가루가 쌓인다.
산소가 부족해 물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경우에는 1년을 주기로 쌓이는 꽃가루의 퇴적층이 형성된다. 이를 퇴적물의 나이테라고 부른다. 화분학자들은 호수 밑바닥의 퇴적층에 구멍을 뚫어 퇴적물 코어를 채취한 뒤 이를 분석한다.
이런 방법으로 인더스 계곡의 꽃가루 종류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놀랍게도 타르 사막(예전의 하라파 문명지역) 한가운데 위치한 몇 곳의 호수와 마른 호수(플라야)에 이런 기록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다. 과학자들이 화분을 분석한 결과로 내놓은 학설은 이렇다.
문명의 붕괴를 몰고 온 기후변화
약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의 인더스 계곡 지역은 건조하고 척박했다. 그러나 지구 전체의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이 지역에 물이 충분히 많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습지 식물의 수가 점차 증가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후 5,000년 동안 주기적으로 가뭄이 찾아온 징후가 있지만 대격변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다습한 시기가 끝나고 기원전 3,000년경부터 건조한 시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뭄은 점차 심해져 대가뭄이 되었다. 인더스 문명이 멸망하고도 남을 정도인 대가뭄의 흔적이 꽃가루에 남아 있는 것이다.
꽃가루 분석 결과를 가지고 다시 하라파 문명을 살펴보자. 다습한 기후가 되고 난 기원전 4,000년 무렵에 하라파 사람들이 처음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지역 전체에 작물재배법이 널리 퍼지고 사회가 정착되는 데는 온난다습한 기후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더스 계곡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기반으로 사회가 형성되는 동안,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가뭄이 더 자주 일어났다는 뜻이다. 인구가 증가하는 상태에서 하라파 사람들은 더 안정적인 물 공급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있다. 인더스 강과 가가르-하크라 강1) 유역이 그런 곳이다.
지리적으로 더 좁은 공간인 강가에 정착하는 것은 더 도시적인 생활방식으로 변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하라파 도시 문명은 발전하고 번성했다. 이 문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가 기원전 2,500년경이었다. 그 후 하라파 문명의 거대 도시들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해 마침내 사라졌다. 대가뭄을 몰고 온 기후변화 때문이었다.
당시의 기후를 추정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지형학이다. 지형학은 강의 본류와 지류 등 하계의 형태와 흐름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 분야다. 지형학 연구를 통해 하라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물을 얻을 수 있었는지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지형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더스 강과 나란히 흐르던 가가르-하크라 강의 하계를 따라 수많은 하라파 정착지가 있었다. 가가르-하크라 강은 현재 남동쪽을 제외하고는 말라버렸지만 과학자들은 이 마른 강바닥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정착지를 통해 하라파 문명의 절정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가가르-하크라 강에 많은 인구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물이 흘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뭄으로 강의 물이 말라 버리면서 사람들은 떠나갔고 초기 인더스 문명도 그렇게 사라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더스 문명과 기후 -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지구과학산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