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도마 복음서

도마복음(Gospel of Thomas)

작성자성모세|작성시간21.05.23|조회수1,314 목록 댓글 0

도마복음(Gospel of Thomas)

 

서문 :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Didymos Judas Thomas)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서문은 도마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몇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도올 교수가 강조하고 있다시피 '살아 있는 예수'라는 것은 예수 사후에 일부 사도들과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신격화된 예수가 아니라 죽기 전의 살아 있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말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도마복음이 성경 속에서 신격화된 예수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말씀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1절에 나오는 '구절'은 영문으로는 sayings로 표기되는데 이를 말씀으로 번역하게 된다면 "그"를 예수가 아닌 도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sayings를 (예수의) 말씀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구절을 묶은 예수의 말씀을 통칭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이 경우 도마복음은 예수가 죽은 이후에 도마가 역사적인간 예수가 하셨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으로 남겼고, 누군가가 그 기록을 도마복음이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 - https://borrowingworld.tistory.com/1116 1절 하단부)

 

셋째, 서문 가장 첫 머리인 "이는"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간 예수가 하신 말씀을 도마가 정리했고, 그 자료들을 '도마의 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인 제 3자가 있었고,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것이 그 도마복음의 콥트어 판이라는 사실이다. 

 

1.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해석 - 1절은 도마복음을 해석해야만 하는 절대명제를 예수가 제시하고 있는 구절로써 역사적인간 예수 말씀의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는 단 한순간도 시체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구절이다.

또한 1절은 역사적인간 예수가 추구했던 바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와도 관련이 있다.

 

1절에서 "그"는 도마보다는 예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후미의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는 부분이 85절과 111절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사용한 문구를 마치 자신이 처음 사용한 것처럼 도마가 1절에 박제를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도마복음은 도마 자신이 기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1절에 나오는 '구절'은 영문으로는 sayings로 표기되는데 이를 말씀으로 번역하게 된다면 "그"를 예수가 아닌 도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sayings를 (예수의) 말씀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구절을 묶은 예수의 말씀을 통칭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이 경우 도마복음은 예수가 하셨던 말씀들을 도마가 모아서 누군가에게 이야기 했고, 그 누군가가 그것들을 받아 적어 도마복음이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서문과 1절을 동시에 놓고 보면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2.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고통스러울 때에 그는 경이로우리라.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해석 - 2절의 "고통스러움"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천국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이 진리나 진실이 아니었음을 깨달음으로써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절에서 예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현재 성경의 구약이 된 유대교의 당시 경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당시 역사적인간 예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서 예수는 2절을 통하여 두 가지를 전달하고 있다.

첫째, 하늘나라는 죽음 후에 맞게 되는 천국의 개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 임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예수가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탐구의 결과물로써의 최종 단계를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는) 나의 왕이 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3.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 '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 나라는 바다속에 있도다 '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해석 - 3절은 51절과 113절로 연결된다. 

3절에 등장하는 "나라" "천국"을 영문 도마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kingdom"으로 표기되고 있다.

kingdom을 한글로 번역하면 "나라"이외에 "왕국" 혹은 "세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기독교는 이를 천국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하는 구절들을 통하여 3절에서의 "나라" 혹은 "왕국"은 "깨달음(득도, 열반, 해탈)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는 영혼(정신)의 영역"을 의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3절을 통하여 실제로 예수가 말했던 나라(왕국, 천국)는 외형적, 장소적 차원의 왕국이 아니라 내면적(정신적) 차원으로서의 영혼(빛)의 영역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10절, 11절, 50, 57절과 관련 있음).

또한 예수가 도마복음에서 강조한 천국이나 나라는 이를테면 현대 기독교의 교리나 다름 없이 되어버린 천국론 즉, '교회에 자신이 가진 것들을 갖다 바침으로써 그 대가로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게 되는 미래에 예정된 입장티켓'과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109절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3절의 '나라' '천국'을 더 확장하면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로 표현할 수도 있다.

또한 이 부분은 뒤에 81, 83절에서도 연결되고 있다.

역사적인간 예수는 유대인들이 믿는 장소적 개념의 천국을 부정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따르던 율법에 저항하는 새로운 천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역사적으로는 당시 갈릴리와 유다 지방을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마복음 전체적으로 3절은 도마복음의 근간, 뿌리, 규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중요한 구절이다.

 

추가적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3절의 "살아 계신 아버지"이란 문구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다.

왜 그런가는 예수가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저항하고 있었으며, 당시 예수가 천국운동을 전개할 때 종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난다.

예수가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도반들에게 현실적으로,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끊임없는 탐구를 지속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상태, 즉 해탈과 같은 정신적인 깨우침을 얻는 데 있다.

 

 

또한 3절에 등장하는 살아 계신 아버지는 50절에 등장하는 "빛"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그 빛은 내면에 존재하는 영혼의 빛 그리고 외면에 존재하는 만물의 형체를 드러나게 하며, 그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빛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줄에서 예수는 자신의 내면과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빈곤 중에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많은 이는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부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똑같이 한 모습이 될 그들과 끝이 있는 인생의 시작점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해석 - 4절은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추구했던 천국론과 생명의 의미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4절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시간을 다 쓴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예수가 삶을 처음 살아내기 시작하는 시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알려주고자 하는 심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 함은 현실적으로 보면 당시 유대인이라면 태어난 후 8일째 되는 날에 누구나 받아야 하는 할례 의식을 아직 치르기 전의 존재, 즉 유대 율법에 오염되지 않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상징적으로 보면 칠일 갓난 작은 아이는 7절에 나오는 사람이 먹어 삼켜 사람이 된 사자로 비유될 수 있다.

7절에 등장하는 '사람이 먹어 삼켜 사람이 된 사자'는 물욕, 권력욕, 성욕을 극복한 존재이거나 혹은 이와같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느끼기 이전의 존재 즉,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이와 같이 순수한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낼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56절에 등장하는 시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체와 같은 삶에 관하여는 도마복음 곳곳에서 예수가 이에 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다)

 

5. 예수께서 가라사대, " 네 (얼굴) 눈 앞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그리하면 너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것이 다 너에게 드러나리라. 감추인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해석 - 5절은 천국운동을 하는 도반(제자)들에게 가해질 박해의 공포에 당당히 맞서도록 하기 위하여 도반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또한 5절은 '나라(천국)은 죽음 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안과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진리는 숨겨지지 않고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필연성을 선포하는 맥락에서 쓰여진 구절이다.

나라가 사람들의 안과 밖에 이미 와 있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도마복음 3절에 이미 나와 있다.

 

6.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음식 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말라. 그리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말라. 모든 것은 하늘 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감추인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고, 덮힌 것은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


해석 - 6절에서의 예수는 도반들에게 위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는 진실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선을 숨기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기도, 금식을 형식적으로 하는 것들이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매우 엄격한 형식적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교 또는 이와 관련된 것들을 예수가 부정하는 모습이 도마복음 여러 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6절 역시 예수가 유대교를 부정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7. 예수께서 가라사대, "복되도다 사자여! 사람이 그대를 먹어 삼키기에 그대는 사람이 되는도다.

저주 있을진저 사람이여! 사자가 그대를 먹어 삼킬 것이니,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로다."

 

해석 - 7절의 "사자"는 세속적인 탐욕과 같은 내면의 적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는 내면의 적인 사자에 먹혀 탐욕에 지배당해서는 안되며, 사자를 지배함으로써 진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돈(물질의 욕구), 섹스(육신의 욕구), 권력의 욕구와 같은 세속적인 욕구에 지배당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욕구들을 극복하였을 때의 그 상태를 평화, 안식(유여 열반)이라 표현할 수 있으며, 동양사상에서 유여 열반, 해탈의 경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7절의 '사자'는 21절의 '도적' 103절의 '도둑'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 그리고 그께서 가라사대,"사람 된 자는 슬기로운 어부와도 같다.

그는 그의 그물을 바다에 던져 작은 고기가 가득 찬 채로 바다로부터 끌어올리는도다.

그 가득한 고기 가운데서 슬기로운 어부는 잘생긴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는도다.

그는 모든 작은 고기를 다시 바닷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가려 얻는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해석 - 8절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잘생긴 큰 고기'와 '작은 고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작은 고기'는 7절에서 '물욕' '권력욕' '성욕'을 의미하는 "사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8절에서의 예수는 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해탈로 표현되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작은 고기'를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보라!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 쥐고 그것을 뿌렸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해석 - 여기에서 "씨"는 진짜 곡식의 씨앗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운동의 씨앗을 의미한다.

씨(앗)이라는 단어는 57절에서도 등장한다.

9절은 예수의 말씀을 확신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단 몇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들로 인하여 천국운동이 수십 배, 수백 배 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9절을 통하여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던 시기의 역사적인간 예수가 자신의 설교로 인하여 많은 괴롭힘을 받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기독교와 현대의 복음서가 얼마나 변질되어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9절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씨를 선의 관점으로, 새와 바위 그리고 가시와 벌레를 악의 관점으로 본다면 역사적 인간 예수는 선과악은 항상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는 선과악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현재 기독교가 추구하는 선악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써 시사하는 바가 많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해석 - 불이라 함은 새로운 자아, 빛, 평화, 안식(유여 열반), 사랑 등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종의 새로운 질서 또는 새로운 가치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불"은 82절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불을 던졌다' 함은 장소의 개념으로써의 천국이 아닌 새로운 질서의 확립을 위한 천국운동의 불씨를 피웠음을 뜻한다.

그리고 천국운동의 불씨를 피운 예수가 그 운동이 크게 일어날 때까지 지킬 것임을 말하고 있다.

9절에서 예수의 말씀이 씨앗에 비유되었던 것처럼 여기에서 예수의 말씀이 불에 비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절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간 예수는 살아 있을 당시 이원론을 부정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예수가 강조한 것은 사랑과 같은 포용적인 측면이었으나, 현재 기독교는 선, 악과 같은 이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하늘도 사라지리라. 그리고 이 하늘 위에 있는 저 하늘도 사라지리라.

죽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삶은 죽은 것이 아니다.

너희가 죽은 것을 먹던 그 날에는 너희는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

(너희가 죽음을 소멸시킨 그 날에는 너희는 그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

너희가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는 과연 너희는무엇을 할 것이냐?

너희가 하나였던 바로 그 날에 너희는 둘이 되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둘이 되었을 때 과연 너희는무엇을 할 것이냐?"

 

해석 - 한글 번역을 위 링크와는 약간 다르게 해 보았다.

10절에 이어 11절도 예수가 이원론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3절에서 장소적 개념의 천국을 부정했던 것처럼 역시 11절에서도 장소적 개념의 천국을 부정하고 있다.

 

"하늘도 사라지지라"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늘의 영원한 존재성을 부정하고 있다. 즉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죽은 자들은 하늘의 천국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는 부분으로써 유대인의 율법을 부정하던 당시 인간 예수의 가치관과 일치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거꾸로 보면 현실에 천국이 있으니 살아있는 자들은 하늘의 천국을 기대하고 죽을 일이 없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는 부분이다.

즉,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죽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즉, 죽음은 죽음일 뿐 결코 살아 있는 것이 될 수 없다는 표현을 통하여 인간 예수는 부활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은 것은 서로 연결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지난 2,000년 동안의 기독교라는 종교의 핵심인 부활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이다.

 

다음 " 너희가 죽은 것을 소멸시킨 그 날에는" 문구들은 예수가 전제로 들었던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다는 선언과는 반대되는 상황을 예시로 들어 도반들에게 설명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만약에 너희가 죽음을 소멸시킨 날이 온다면 그 날은 부활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부활이 가능한 상태에 거하게 되었을 때 예수는 도반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묻고 있다.

죽음을 소멸시킨 그 날이 온다면 삶 하나만을 갖고 있던 인간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영유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순간이 왔을 때 도반들에게 삶과 죽음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 묻고 있다.

 

12.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 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오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너희는 의로운 자 야고보에게 갈 것이니라. 그를 위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느니라."

 

해석 - 12절 자체의 신빙성 의문 때문에 해석 보류.

 

13. 예수가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가라사대 "나를 무엇엔가 비교해 보아라. 그리고 내가 무엇과 같은지 말해 보라.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 당신은 의로운 천사 같나이다."

마태가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현명한 철학자 같나이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스승님이시여! 제 입은 지금 당신이 무엇과 같은지 전혀 언표(言表)할 수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그대의 스승도 아니로라. 그대는 내가 보살펴온,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광천 샘으로부터 직접 많이 마셨기에 취하였도다."

그리고 예수께서 도마만을 데리고 은밀한 곳으로 가시 었다. 그리고 도마에게 세 마디 말씀을 전하였다.

도마가 그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에, 그들이 도마에게 물었다: "예수께서 너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뇨?"

도마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가 예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 중 하나만 너희에게 이야기해도, 너희들은 돌을 주워 나를 쳐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 손에 있는 그 돌로부터 불길이 솟아 너희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해석 - 13절은 예수의 말씀을 직접 많이 들은 도마를 예수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나타내는 구절로써, 그의 친구들과의 차별화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구절이다.

 

14.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禁食)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自招)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定罪)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害惡)을 끼치리라.

너희가 어느 땅에 가든지, 한 시골 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病者)를 고쳐주어라.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해석 - 예수가 당시 유대교인들의 위선적이고, 구약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본래 기도와 금식, 구제 같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15. 예수께서 가라사대,"너희가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를 볼 때에는 너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라. 그 이가 곧 너희 아버지니라."

 

해석 - 예수는 역설적으로 본인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마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는 없으며, 이후에 증보판 작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부터 등장하게 된다.

시기적으로 마태, 누가 이전의 바울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예수는 자신이 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증하는 구절이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는 자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는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와 같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되겠다.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 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해석 -16절은 당시 예수를 따르던 도반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절에서 핵심은 맨 마지막 구절이다.

맨 마지막 구절에는 현재 나를 중심으로 한 안과 밖의 가치에 대한 눈을 뜬다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영적인 영역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즉, 부모와 자식의 영적인 세계관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가족 간에 옳고 그름에 대한 다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인 성장은 육체적인 성장과 달리 누구의 도움이나 지시의 대상이 아니며, 오롯이 각자의 고유한 영역임을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개개인의 영적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곧 가족 간의 분쟁과 관련되며, 그 분쟁은 가족 구성원과의 이별을 의미하며 그 이별은 육체적인 의미에서 가족과 떨어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6절의 갈등이 가족주의를 버리기 위한 분열이라면 72절의 갈등은 소유를 위한 분열이다.

16절에서의 예수는 자신을 분열을 일으키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72절에서의 예수는 자신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희에게 여태 눈이 보지 못한 것, 귀가 듣지 못한 것, 손이 만지지 못한 것,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한 것을 주리라."

 

해석 - 봄 다음에 여름이 오는 것,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 항상 푸른 잎을 가진 나무로 우거진 숲과 같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을 경이로운 시각으로 대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18.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해석 - 18절에서 시작과 종말은 인간의 삶의 시작과 삶의 끝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맑은 영혼을 소유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는 종말 즉, 죽음보다 현실의 삶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시작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는 현재의 시간을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살아낼 시간이 있는 자(시작에 서 있는 자)는 행복한 것이라 하고 있다.

"종말을 알 것이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자라면 현실에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18절은 4절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다.

 

19. 예수께서 가라사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 자여, 복되도다.

너희가 나의 따르는 자들이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왜냐하면 너희를 위하여 파라다이스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준비되어 있나니,

그 나무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변하지도 아니하며, 그 잎사귀는 떨어지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 나무들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

 

해석 -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고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 인간의 순수한 자아를 회복한다면, 즉 현실에 존재하는 천국과 같은 생명인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빛과 내면에 존재하는 빛을 발견한다면 제자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모든 만물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되고, 그것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소중한 가치를 현실에서 깨우친 자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않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20.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하늘나라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그께서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도다.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식물을 내니, 하늘의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나니라."

 

해석 - 예수가 하고자 했던 천국운동의 풀뿌리적인 성격을 표현한 것이다. 즉 천국운동의 대중운동적 신념을 표방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제자가 처음에는 비록 매우 평범할지 모르나 훌륭한 스승을 만나 배우고 깨우치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복된 일을 할 수 있는 비범한 인물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1. 마리아가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당신의 따르는 자들이 어떠 하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밭에서 사는 아해들과 같도다.

그 밭의 주인들이 올 때에, 그 주인들은 ‘ 우리의 밭을 우리에게 돌려다오 ’라고 말할 것이다.

아해들은 주인들 앞에서 그들의 옷을, 주인들에게 밭을 돌려주기 위하여, 벗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해들은 그들의 밭을 주인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내가 이르노니, 한 집의 주인이 한 도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주인은 그 도적이 도착하기 이전에 방비 태세에 있을 것이요,

그 도적이 그의 소유인 집을 뚫고 들어와 그의 물건을 훔쳐 내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대하여 방비 태세에 있으라.

너희 자신들을 강건한 힘으로 무장하여, 도둑들이 너희에게 도달하는 길을 발견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기대하는 환난이 결국 닥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들 가운데 내 말을 이해하는 한 사람이 있기를 바라노라.

곡식이 익었을 때가 되면, 곧 그 사람이 손에 낫을 들고 와서 그것을 추수하였나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해석 - 세속적인 탐욕에 대한 욕망은 사람의 마음의 틈새를 파고든다는 사실을 예수가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도마복음 7절, 21절, 103절에 등장하는 '도적' '도둑' '사자' 모두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으로써의 내면의 빛에 대한 탐구를 방해하는 세속적인 탐욕과 같은 것을 예수는 '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내면에 존재하는 영혼의 빛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또한 이를 위하여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2. 예수께서 몇 아기들이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시었다. 예수께서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젖을 빨고 있는 아기들이야말로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과 같나니라."

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그리하면 우리는 아기로서만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

 

해석 - 22절은 도마복음의 핵심 구절 중 한 구절이다.

22절은 4, 11, 50, 82, 83절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다.

22절 후미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은 실제 어떤 공간에 들어간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예수가 줄곧 강조하는 빛의 영역, 영혼의 영역, 나라, 천국을 알아보게 된다는 의미라 해석할 수 있다.

22절에서 예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상태,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빌어 형상이 나타나는 상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상태, 빛이 그 형상을 드러내는 상태,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빛의 영역과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되고, 나라(천국)를 느낄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23.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택하리라.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 그리고 그들은 하나 된 자로서 서있게 되리라."

 

해석 - 여기에서 하나가 되었다 함은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의 욕구를 바라는 마음과 세속의 욕구를 극복하려는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신의 말을 듣고 세속의 욕구를 극복한 상태 즉, 정신일도의 상태를 이룸으로써 천국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현실(현재 지금 순간)의 가치를 깨닫는 이는 극히 드물 것임을 말하고 있다.

 

24. 그의 따르는 자들이 가로되, "당신이 계신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우리가 그곳을 찾아야 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가라사대,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빛의 사람 속에는 반드시 빛이 있나니,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추나니라.

그것이 빛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어둠이니라."

 

해석 - 예수는 인간의 무지, 세속적인 욕구, 욕망을 어둠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고 내면과 외면에 항상 존재하는 빛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면에서 빛이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여전히 세속적인 탐욕에 지배당하는 상태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람을 네 눈의 동자처럼 보호하라."

 

해석 - 여기에서 형제라 함은 예수를 따르는 도반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25절은 인류 전체가 아닌 예수를 따르는 도반들이라는 한정된 무리를 대상으로 하는 예수의 말씀이다.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는도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의 눈 속에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도다.

네 자신의 눈으로부터 들보를 빼낼 때에야 비로소 너는 밝히 보리니, 그제야 너의 형제의 눈으로부터 티를 빼줄 수 있으리라."

 

해석 - 예수는 타인의 구원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우침이 우선이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너희가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키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버지를 볼 수 없으리라."

 

해석 - 예수는 도반들에게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자신 안에 혹은 곁에 있는 천국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27절에서 안식은 모든 욕구를 극복한 상태, 유여 열반, 해탈, 인간 내면의 진짜 세계(왕국, 천국)를 보게 됨에 이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안식일을 안식일으로서 지키지 않는다면"의 의미는 세속적인 욕구를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밖 혹은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진짜 가치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3절, 50절 참조)

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대표적으로 예를 들 수 있다면 아마도 사실상 세상의 모든 물체의 존재감이 드러내도록 하는 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이를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다면 자신의 정신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내적인 생명의 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빛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실제 존재하는 밝은 빛 그리고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내면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이성을 통제하면서 사실상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빛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빛이 없다면 식물도 인간도 동물도 존재할 수 없으며, 그 형상 또한 확인할 수 없게 된다.

50절에서 "빛은 살아 있으며, 움직이며, 스스로 존재하며, 살아 있는 아버지"로 표현되고 있다.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육신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나타냈다.

나는 그들이 모두 술에 취하였음을발견하였다. 나는 그들 어느 누구도목마른 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나의 영혼은 사람의 자식들을 위하여 고통스러워 하노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가슴속이눈멀어 보지를 못하기 때문이요,

또 텅 빈 채 이 세상으로 왔다가, 텅 빈 채 이 세상을 떠나기만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확실하게 취해 있도다.

그들이 그들의 술을 뒤흔들게 될 때에는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리라."

 

해석 - 예수는 28절에서 인간이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를 술에 취한 것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욕구에 지배당하는 상태로부터 벗어날 때 진리를 찾고자 할 것이며, 천국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며, 보이지 않던 것을 보려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즉, 세속의 욕구를 극복함으로써 안식에 이르기 위한 삶을 살도록 생각을 바꾸게 된다는 의미다.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고 해탈의 경지를 위한 삶의 노력을 하려는 이가 없음을 비통해하는 위대한 예수의 실존적 고백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이로다.

그러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로다.

그러나 진실로 나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 거(居)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노라."

 

해석 - 29절은 48, 50, 61, 81, 83절과 관련되는 구절이다.

29절은 인간이 갖고 있는 영혼의 위대함을 매우 극명하게 설파하는 구절이며, 동시에 예수가 추구하는 천국운동의 핵심사상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구절이다.

그리고 29절을 통하여 예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천국운동의 핵심은 세속적이며, 탐욕적인 육신의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영혼의 형상이 육신을 통하여 구체화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진짜 부자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10절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또한 29절은 자체적인 형상이 없는 영혼이 해탈(유여 열반, 불완전한 깨달음, 참고로 무여 열반, 완전한 깨달음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도올선생은 말씀하고 있다)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그 영혼이 육신의 모습으로 온전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면 그런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된다는 것"이 언어로 표현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을 이루어 낸 인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기적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부분은 50절의 "빛은 그들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부분과 관련 있다.

그리고 역시 81절에서의 "자신의 영적인 부분이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과 그 의미가 연결된다.

또한 83절과도 그 의미가 연결되고 있다.

 

30.예수께서 가라사대,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들일뿐이다.

두 명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선 나는 그 한 명과 함께 하노라."

 

해석 - 세 명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체 즉, 신들이므로 내가 같이할 필요가 없음을 전제로 놓고 보면,

예수는 자신이 신들이 있는 세 명중에 있지 아니하며, 한 명이나 두 명과 같이 할 수 있는 평범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자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 될 사람이 있으니, 그중 좋은 점은 골라서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은 거울삼아 고치도록 한다.

 

31.예수께서 가라사대,“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의사는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고치지 아니한다."

해석 - 선지자로 인정을 받기 이전의 인간 예수를 기억하고 있는 고향에서의 활동에 대한 예수의 인간적 고뇌가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 혹은 예언자 정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32. 예수께서 가라사대,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요새처럼 강화된 동네는 무너질 수 없고, 또한 숨겨질 수도 없다."

 

해석 -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이러한 예수운동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외부 침략에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또한 저절로 외부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33.예수께서 가라사대, “너의 귀로 네가 듣는 것을, 너희 집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

그 어느 누구도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 감추거나,숨겨진 장소에 두거나하지 않는다.

오히려그것을 등경 위에 올려놓나니,이는 집안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해석 - 예수는 자신에게서 듣고 배운 것을 당당하게 전파해도 좋음을 강조하고 있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이 다 구멍에 빠지리라."

 

해석 - 여기에서 눈먼 자라 함은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에서 아직 해방되지 않는 자, 즉 예수가 말하는 안식(유여 열반)에 이르지 못한 자, 자신의 마음속 또는 밖에 있는 천국을 깨닫지 못한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천국을 깨닫지 못한 자가 다른 이를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강한 자의 집에 쳐들어가, 그의 양손을 결박하지 않고서는, 그 집을 약탈하지 못하리라. 결박한 후에야 강한 자의 집을 샅샅이 늑탈할 수 있으리라."

 

해석 - 강한 자를 상대로 예수의 말씀(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방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강하지 아니한 자를 상대로 예수의 말씀(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더 쉽다는 점을 예수가 도반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도 해석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복음이라 함은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을 볼 때 구원과 아무 관련이 없고, 단지 예수의 좋은 말씀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복음(福音)은 그 자체로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36.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해석 - 예수는 도반들에게 세속적인 욕구를 절제하고, 내면적인 수양을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37.그를 따르는 자들이 여쭈어 가로되, "언제 당신은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오리이까, 그리고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게 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부끄럼 없이 발가벗을 때, 그리고 너희가 어린 아해들처럼 너희 옷을 벗어 발아래 두고, 짓밟을 때,

비로소 너희는 살아있는 자(로서)의 아들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는 두렵지 않게 되리라."

 

해석 - 예수를 따르는 도반들이 언제쯤 해탈의 경지에 오른 예수를 드러낼 것인지, 그리고 언제 그러한 예수를 볼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예수는 도반들에게 어린아이처럼 세속적인 떼가 묻지 않는 상태가 이르도록 내면의 수양을 거쳐 해탈의 경지에 올랐을 때 보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37절은 도반들이 그 당시에 예수가 살아 있으면서 해탈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100퍼센트 신뢰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구절이다.

이렇게 예수를 전적으로 믿지 못해 하던 도반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아직 도반들이 세속적인 떼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으로 인해서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고, 내면적으로 해탈의 경지에 오른 예수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임을 돌려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드러나게 되다, 보게 되다는 것의 의미는 살아 있는 예수가 줄곧 주창하고 있는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에 대한 자기 절제(극복)와 끊임없는 정신수련을 통한 내면적인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을 이해하거나 혹은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38.예수께서 가라사대, “여러 번 너희는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하고 있는 이 말들을 듣기를 갈구하였도다.

그리고 너희는 이 말들을 나 이외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들을 수 없도다.

너희가 나를 구하고자 하나 나를 발견치 못하는 그런 날들이 있으리라."

 

해석 - 38절의 예수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자신으로부터 직접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 의미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라는 질문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경우일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죽게 되면 더 이상 누구에게도 드러날 수 없게 되고,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예수가 현재의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 가능한 신적인 존재로서의 예수였다면 당시에 예수는 38절에서와 같이 다시 볼 수 없는 날이 있을 것임을 암시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지식의 열쇠들을 움켜쥐고 그것들을 숨겨버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지도 않았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

 

해석 -예수가 살던 시대의 토라와 관련한 유대교의 전승을 주도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같은 당시 지식들인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인 동시에, 거기에 사마리아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삶의 자세에 대하여 예수가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40.예수께서 가라사대,“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아버지 밖에 심어졌다.

그 나무는 견고하지 못하므로, 그것은 뿌리째 뽑힐 것이며, 멸망할 것이다."

 

해석 - 50절에 "아버지"를 살아 있는 빛"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를 인용하여 "아버지"를 살아 있는 빛으로 해석하면...

빛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심어진 포도나무가 생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는 당시 잘못된 사상을 가르치던 많은 선각자들을 주의해야 올바르게 깨달음을 구할 수 있음을 비틀어 표현한 것이라 해석된다.

 

41.예수께서 가라사대,“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

 

해석 - 첫 줄에서 예수가 말하는 가지다라는 것의 의미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줄에서 조금 가지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관직이나 물질적 의미 재산을 의미한다.

예수는 깨달음이 아무리 적더라도 일단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그것의 가치는 큰 물질이나 관직을 가진 것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살아 있는 자신에게서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얻은 이는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러하지 못한 자는 자신의 재산이나 관직마저 잃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재산이나 관직은 자신이 영원히 가질 수 없으나, 깨달음은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자신이 소유할 수 있게 된다.

 

42.예수께서 가라사대, "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

 

해석 - 42절을 이해하려면 도마복음은 전체적으로 당시 예수를 따르던 도반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살아 있는 예수는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도반들에게 도반 자신들의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것(나라, 빛)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한결 같이 말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로 42절을 본다면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방랑자가 되라는 말씀은 물질 우선주의 삶보다는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이나 정신적인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영혼의 방랑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도올선생은 이 때의 깨달음을 70강에서 동양사상의 "유여 열반" 즉, 불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구하는 이미다 얻을 것이요"

이 구절을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을 빌어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탐구와 정신 수양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면 누구나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43.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었다:

"당신이 도대체 뉘시길래 이 같은 일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도다.

차라리 너희는 유대 사람들처럼 되어버렸구나.

그들은 나무를 사랑하면서 그 열매를 증오하기도 하고, 열매를 사랑하면서 그 나무를 증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석 - 도반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통합적 사고의 반증.

예수는 도반들에게 이르기를 예수 자신의 말의 의미, 진위, 가치를 보려 해야지, 그 말을 하는 자신이 어떠한지 등에 관심을 두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44.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아들에 대해 모독하는 자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거룩한 영혼(정신)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해석 - 훗날 학습에 보탬이 되고자 도마복음 전체를 나름대로 해석함에 있어 도올 선생님의 강의를 기초로 하고 있으나, 44절의 번역(원 번역분 수정 - 괄호부분)은 본인의 생각이 약간 반영되어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는 44절에서 도마복음 영문을 참고하여 약간 다르게 해석을 해볼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바로 도마복음 한글 해석본 전체를 통틀어 이 구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성령"이라는 단어를 말한다.

때문에 44절을 해석하기 위하여는 최소한 콥트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구를 반드시 참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마복음 44절 마지막 줄에 등장하는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라는 부분은 영어로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http://gnosis.org/naghamm/gthlamb.html)

위 영문을 있는 구글 번역기에서 돌리면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라 번역이 되며 또한 구글 번역 역시 문장 전체의 번역에 있어 "holy spirit"가 성령이란 문구로 번역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holy spirit" 만을 떼어서 두 개의 단어를 각각 별도로 번역을 하면 매우 다른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정신(정기, 기상)"이다.

여기에서 더 들어가서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성령"이라는 단어가 '성스러운 영혼'의 줄임말이며, 여기에서 "영혼"은 곧 정신과 같은 의미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시체와 다름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은 종교와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인간의 생명과 동급인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룩한 정신"(성스러운 영혼, 내면의 빛)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와 목사들이 흔히 말하는 '성령의 감동' '성령의 은혜'라는 것이 실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껏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영혼의 교감 혹은 내면의 감동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목사들이 "영혼의 교감"을 "성령의 감동"이라 부르고, 마치 예수나 하나님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 마냥 포장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교인들의 교회 충성을 유도하고, 재물을 바치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holy spirit"로 돌아와 다시 보면 holy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spirit에는 정신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holy spirit"를 해석함에 있어 "성령"이라 해석하기보다는 "거룩한 정신" 또는 "거룩한 정기(기상)"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매우 잘 맞지 않나 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왜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분의 강의에 담긴 숨은 뜻을 완전하게 이 글에서 재현할 수는 없으나 도올 선생은 도마복음 강의 중에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신 바 있다.

"석가모니나 예수는 당시 포교활동을 하거나, 도반이나 대중을 상대로 예수운동을 하는 등의 말씀을 전할 때에 두 분 다 공통적으로 종교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가 천국운동을 하던 당시, 종교라는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 두지 않았던 예수가 성령이라는 의미를 입에 올렸을 리가 없거니와, 표현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천국운동은 유대인들의 율법(현재의 구약성경)에 저항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예수가 유대인들의 유대교 경전(현재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성령을 추종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다.

또한 예수는 도반들에게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인 탐구와 노력을 통하여 정신적인 수양을 통한 해탈과 같은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44절을 내가 도올 선생과 다르게 해석하게 된 이유다.

 

최종적으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44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볼 수 있다.

44절의 아버지나 아들은 말 그대로 가족의 개념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도마복음은 살아 있는 예수가 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령. 아버지, 아들이란 단어가 등장한다고 하여 성경의 아버지, 아들, 성령과 연결시키려 드는 순간 그 해석은 안드로메다로 가 버릴 우려가 발생하게 된다.)

가족 간에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혹은 자신의 거룩한 정신을 부정하거나, 더럽혀 욕되게 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임을 도반들에게 예수가 말씀하시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추가로, 말씀을 거룩한 정신의 표현이라 한다면,

만일 예수의 말씀을 들은 도반들이 43절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면 예수로서는 자신의 거룩한 정신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법한 경우일 것이다.

 

45. 예수께서 가라사대,

"포도는 가시나무에서 수확되지 않고, 무화과는 엉겅퀴에서 수확되지 않나니, 이것들은 열매를 맺지 않음이라.

선한 사람은 창고로부터 선한 것을 내온다.

나쁜 사람은 가슴속에 있는 나쁜 창고로부터 나쁜 것들을 내오고 또 나쁜 것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은 가슴에 쌓여 넘치는 것으로부터 나쁜 것들을 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석 - 선한 행동과 선한 마음을 쌓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는 도마복음 내내 예수가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이나 정신적인 깨달음을 계속해서 추구할 때 비로소 내면에 선한 기운이 가득 차고 비로소 그것에 의한 선한 표현이 가능해짐을 의미한다.

46. 예수께서 가라사대, " 아담으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이는 없도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눈길은 돌려져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이미 나는 말했노라,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아기가 되는 자는 나라를 알 것이요, 요한보다 더 위대하게 되리라.

 

해석 - 46절에서의 "나라"는 계속적인 탐구를 통하여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아이와 같은 매우 순수한 정신의 세계로써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신적으로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정신적인 공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신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정신적인 세계라는 개념으로 나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kingdom을 한글로 번역을 하면 세계라는 의미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7. 예수께서 가라사대, "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말 위에 올라탈 수 없고, 한 사람이 동시에 두 활을 당길 수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 종은 한 주인은 영예롭게 할 것이나 또 한 주인은 거스르게 되리라.

그 어느 누구도 오래 묵은 (양질의)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금방 새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부어 넣지 않는다. 낡은 가죽부대가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묵은(양질의)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쏟아붓지도 않는다.

그(양질의 포도주의) 맛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낡은 천조각을 새 옷에다가 기워 붙이지 않는다. 그것은 새 천에 안 맞아 다시 터질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 - 두 말, 두 활, 두 주인, 오래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 낡은 가죽부대와 새 가죽부대, 낡은 천조각과 새 천조각...

여러 가지의 예를 들고 있으나 결국 한 가지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 한 가지의 뜻이라 함은 자신의 설교를 유대인의 율법에 맞추려 하거나, 율법의 기준에서 해석하려 하지 말라는 의미로써, 예수가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을 비판하고 있었던 점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예수에게 있어 유대인들의 율법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면, 그들이 산을 보고 ' 여기서 움직여라!'라고 말하면, 산이 움직이리라.

 

해석 - 48절의 "집안"은 눈에 보이는 형태의 구조물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영혼, 정신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면"이라는 의미는 29절에 등장하는 세속적인 탐욕에 대한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영혼이 육신의 모습으로 존재케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과 유사한 표현을 61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평화"라는 단어는 61절의 "분열되지 않는 전체"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48절의 후미 부분은 실제로 산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게 됨으로써 그 정도로

놀라운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복이 있을지어다! 홀로 되고 선택된 자여!

왜냐하면 너희는 나라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라.

왜냐하면 너희는 나라에서 왔고, 또다시 나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 -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다스리고,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세속적인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상태, 분열되지 않은 상태, 하나 된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순수한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자신의 안(내면)과 밖에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또 다른 자신의 정신적인 세계(나라)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의 시작과 끝을 통틀어 최고의 가치, 가장 우선해야 할 핵심적인 부분은 애초부터 자신과 항상 함께하고 있었지만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혜안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면, 49절에서 중요한 사실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그 순수한 자아를 다시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구절로 해석이 된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희는 어디서 왔느뇨?'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에서 왔노라. 빛이 스스로 생겨나는 곳에서 왔노라. 빛은 스스로 존재하며, 자립하며, 그들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도다.'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그 빛이 너희뇨?'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이다.'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속에 계시다는 증표가 무엇이뇨?'라고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운동이요, 안식이로다.'"

 

해석 - 도마복음 3절에서 예수는 안식 또는 나라는 살아 있는 자신의 밖과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추가로 설명드리면 도올선생은 강의를 통하여 예수가 말한 "안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여 열반, 해탈, 불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와 같다."

그러나 나는 50절의 안식을 운동과 반대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이럴 경우의 안식은 '완전한 죽음' 혹은 '무여 열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빛은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우리 눈으로 물체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외면의 빛은 그 자체로 인간은 물론 인간이 접촉 가능한 모든 공간에서, 모든 물체들에게 생명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인간의 내면에서 항상 움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 또한 살아 있기에,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러므로 이것을 내면의 빛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빛은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그의 내면에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빛은 스스로 존재하고, 자립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에게 있어 빛은 곧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50절의 마지막줄에서 "아버지께서 너희 속에 계시다는 증표를 예수가 "운동과 안식""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한 것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운동=생명=내면의 빛=깨달음=유여열반

안식=죽음=무여열반

빛=아버지=하나님.

 

51.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어 가로되, "언제 죽은 자의 안식이 이루어지리이까? 그리고 언제 새 세상이 오리이까?"

그가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해석 - 51절은 3절과 113절과 연결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51절에서 죽은 자의 안식은 죽음을 통하여 이르게 되는 '무여 열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새 세상은 살아 있는 자의 안식 혹은 살아 있는 상태의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여 열반'의 상태를 의미한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이러한 것을 '나라' 혹은 '아버지'라 표현하고 있다. 

도반들이 새로운 세상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자, 바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천국이지만, 단지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어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단지 특정 형태로 물(체)화 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식의 대상인 천국이 매일 대가 없이 주어짐으로써 매 순간순간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 역시 어떤 수고와 노력이 없이 태어남과 동시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어서 그것의 진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2.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스물넷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예언하였나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당신을 지목하여 말하였나이다."

그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면전에 있는 살아있는 자를 보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만을 이야기하는구나!"

 

해석 - 살아 있을 때의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의 유대교 경전인 율법 즉, 현재 성경의 구약부분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52절은 율법에 대한 당시 예수의 감정이 잘 드러난 구절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믿는 율법을 기록한 선지자들은 오래전에 이미 죽어서 살아 있지 않았다.

예수는 살아 있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의 설교를 과거에 쓰여인 율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는 것에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53.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할례가 유용합니까, 유용하지 않습니까?"

그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만약 할례가 유용하다면, 그 아기들의 아버지가 그 아기들을 그들 엄마의 태 속에서부터 이미 할례 된 채로 낳게 하였으리라. 차라리 영 속에서의 진정한 할례야말로 온전하게 유용하리라."

 

해석 - 유대의 율법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도반들을 꾸짖는 구절이다.

예수는 지속적으로 율법에 거부, 저항감을 드러내고 있다.

53절 또한 예수는 도반들이 살아 있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미 죽은 선지자들의 기록인 유대인들의 율법을 정당화하는데 끼워 맞추거나 이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구절이다.

 

54. 예수께서 가라사대,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해석 - 당시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의 생활상을 54절에 대입한다면 이 구절에서 "가난한 자"는 세속적인 것을 탐하는 욕구가 없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사람을 부자로 보았을까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데 110절에서 그 간접적인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110절에서 나라를 발견한 사람과 부자를 연결 짓고 있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도반들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탐구하고 정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예수는 54절에서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를 절제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자신 주위에 있는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내면과 밖에 이미 존재하는 하늘나라 즉, 천국을 느끼게 될 것이라 하고 있다.

천국이 어디 하늘에 있을까... 예수는 3절에서 이미 그렇지 않다 하고 있다. 천국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으며, 각자의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단지 우리가 세상의 욕구에 찌들고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지금 이 순간의 가치와 내 눈으로 보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나의 정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여 여기가 천국임을 알아채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새를 보고, 그 새의 소리를 듣고, 그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그 하늘의 색을 보며, 그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그것들이 존재하는 곳이 천국인지는 죽은 후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가 너희 것임이라"하는 것은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직설적 의미가 아니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빛의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55.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나니라.

그리고 누구든지 그의 형제와 그의 자매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또 나의 길에서 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해석 - 55절은 예수 자신과 함께 하고자 하는 도반들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에 대한 구절이다.

예수는 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으로써의 빚의 존재를 알아보고, 진짜 천국을 발견하기 위한 탐구의 길을 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길임을 "가족에 대한 미움"과 "십자가를 짊어지는 행위"를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55절에서 자신과 함께 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려면 최소한 가족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능히 짊어질 각오가 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과거나 현재나 아버지와 엄마를 증오하고, 형제자매를 증오하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마음먹기도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말한 '미워하다'의 의미는 자신에게 합당한 자기 되려면 부모형제를 진짜로 버리거나 미워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생명, 나라, 천국)을 발견하기 위한 탐구를 할 수 있으려면 부모와 형제에 대한 의지로부터 벗어남, 떠남, 홀로서기, 단독자가 되는 것을 능히 해내려는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그 시대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을 당할 죄인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그 심정이야 말로 인간이 가장 최후에 느낄 수 있는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일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각오가 없이는 자신의 설교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하고 있다.

아무런 노력이 없이도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과 자신 근처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는 굳이 55절의 말씀과 같은 것을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성경에 등장하는 십자가에 관한 부분이다.

예수가 생존하던 로마시대의 십자가형은 법정 최고형으로써 부끄러워해야 하는 형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십자가 처형을 오직 예수만이 당했던 형벌도 아니었고 성경에 나온 것처럼 미화할 수 있는 그런 경우도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을 인류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부분은 논리적으로 매우 지나친 비약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 전에도 이미 시행되고 있었으며, 동시대에 행해지던 법정 최고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도올교수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당시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드라마'에 불과한 것이며, 바울의 서한에도 '예수는 나무에 매달렸다'라고만 표현되어 있다고 강의에서 밝히고 있다.

 

설사 십자가 처형 부분이 구약에 등장한다 하더라도 차이가 없다.

이는 예수는 살아 있을 때에 유대의 성경인 지금의 구약, 즉 모세의 율법에 계속해서 저항을 하였고, 지역적인 개념의 천국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구약의 율법을 부정하고, 구약의 천국을 부정했던 예수가 구약의 율법에 맞추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처형을 자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55절의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본 즉, 현재 예수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오늘날 목사가 헌금을 언급하고, 십일조를 내고, 십계명을 지키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와 교회들을 향해 "사기"라는 표현을 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3절과 51절에서 예수는 천국은 바로 내 안에, 그리고 밖에 이미 와 있지만 단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하고 있다.

 

56.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든지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재번역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세상을 이해하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시체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시체를 발견하게 된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이 세상이 합당치 아니하다."

 

해석 - 현재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다르게 표현하면 해탈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러한 눈에 비친 세상은 죽음이 가득한 세상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세상 자체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탐욕의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져 자신과 세상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의 인간들의 눈에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천국이 보일 리가 없으며, 그들의 마음에 세상의 빛이 생명으로 느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예수와 같이 깨달음을 얻은 이의 눈에는 이러한 탐욕에 찌든 세상이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57.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를(심은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

그의 원수가 밤중에 몰래 와서 그 좋은 씨들 사이에 가라지(잡초 씨앗)를 덧 뿌렸다.

그러나 그 사람( 밭의 주인)은 종들을 시켜 그 가라지를 뽑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내버려 두어라! 너희가 가서 가라지를 뽑으려 하다가, 가라지와 더불어 좋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왜냐하면 추수의 그 날에는 가라지는 현저히 드러나게 마련이므로 뽑히어 불사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 - 9절에서 말씀을 "씨"로 비유하고 있다.

57절에서는 "좋은 씨를 가진 자" 즉, 좋은 말씀을 들은 자, 혹은 말씀을 알고 있는 자를 '아버지의 나라'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57절의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의 좋은 말씀(복음)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또한 29절의 "영혼이 육신으로 인하여 존재케 된 상태, 혹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곧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계속 강조되고, 반복되고 있는 나라, 천국, 자기 자신의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것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으로 표현되는 것들과 매우 밀접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좋은 말씀(복음)을 들었거나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굳이 지금 시점에서 억지로 나누려 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다.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것의 가치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때에 이르러 바르지 않은 소리를 들은 이들과 확연하게 그 차이가 드러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57절에서 "좋은 씨"와 "잡초 씨앗"을 선과 악으로 비유한다면 예수가 선과 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어느 한쪽을 제거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때가 올 때까지 함께 공존하도록 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57절은 현재 기독교가 선과 악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매우 대비되는 구절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고통을 겪기에 생명을 발견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해석 -

55절은 도반들이 예수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어떤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매우 절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58절을 통하여 예수는 55절의 고통을 감내하고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천국(유여 열반의 상태,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의 영역)을 알아본 도반들은 복이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또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세속적인 탐욕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하여 내면의 빛인 영혼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고통을 겪는 자는 복이 있다.

여기에서 고통은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됨을 통하여 세속적인 탐욕에 빠져 살아왔던 지난날 자신의 시체와 같은 삶을 돌아보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고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56절에도 "시체"라는 표현 등장하고 있다.)

 

5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살아있을 동안에 살아있는 자를 주의 깊게 보라. 너희가 죽어서는 아무리 살아있는 자를 보려고 하여도 그를 볼 수 없을 터이니. "

 

해석 - 인간 예수는 철저하게 부활을 부정하였으며, 종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음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다.

인간 예수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설교를 들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죽는 순간 이 세상과는 단절되어 더 이상은 자신이 해줄 것이 없음을 그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60. 예수께서 유대지방으로 가실 때 양을 들고 가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시게 되었다.

그는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 사람이 양을 메고 가는구나!"

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 분명 저 자는 그 양을 죽여서 먹을 것 이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저 자는 저 양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죽여서 그것이 시체가 된 후에야 먹을 것이다."

따르는 자들이 가로되, "딴 수가 없겠지요. 산 채로 먹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렇다면 너희 또한 그러하다. 자신을 안식 상태에 있도록 노력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도 시체가 되어 먹히우리라."

 

해석 - 60절의 마지막 부분의 한글해석을 영어원문에 충실하게 했다.

56절에 등장하는 "시체"가 60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예수는 이전 구절에서 살아 있는 자가 이뤄야 할 안식(유여 열반)의 상태를 의미하는 천국 또는 나라는 각자의 밖에 혹은 그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60절에서 예수는 내면과 외면적으로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생명을 지속하게 해주는 빛과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갖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항상 이러한 것들을 깨달은 상태에 있도록 노력해야 빛과 내면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며, 탐욕의 아비규환에 빠져 시체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61. 예수께서 가라사대, "둘이 한 침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면 하나는 죽을 것이요, 하나는 살 것이니라."

살로메가 가로되, "남자여! 당신은 도대체 뉘시니이까? 당신은, 마치 누가 보낸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내 침대에 올라와 동침하고 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시 나이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분열되지 않은 전체로부터 온 사람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몇 가지의 물건을 받은 사람이다."

살로메가 가로되, "나는 당신을 따르는 자이로소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기에 내가 너에게 말하노라. 누구든지 분열되지 않은 전체 속에 있으면 빛으로 가득 차게 되고, 누구든지 분열되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나니라."

 

해석 - 61절은 29절, 48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는 구절로써,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둘이 한 침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면 하나는 죽을 것이요, 하나는 살 것이니라." 이 부분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 된 상태, 육체의 세속적인 탐욕의 욕망을 극복한 상태, 영혼의 모습이 육신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6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나의 신비로운 가르침을 듣기에 합당한 자들에게만 나의 신비를 드러내노라.

너의 왼손이 너의 오른손이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

 

해석 - 55절에서 등장한 "합당하다"라는 단어가 62절에 다시 등장하였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 즉, 예수 자신에게 합당한 자들만이 자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만 설교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자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62절을 통하여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우선 62절의 첫 번째 구절은 마태복음 18장 12~14절과는 다소 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고 62절의 두 번째 구절은 현대 교회에서 사실상의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전락한 전도를 당시 인간 예수가 보았다면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을 수 있다는 점이다.

 

63. 예수께서 가라사대, "돈을 많이 지닌 부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돈을 투자하여 뿌리고, 거두고, 심고 하여 나의 곡창을 곡물로 가득 채우리라. 그리하여 부족함이 없이 살리라.'

이것들이 바로 그 부자가 그의 가슴속에 간직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그는 죽었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해석 - 63절은 평범한 사람이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는 것이 세속적인 탐욕의 욕구가 아님을 매우 분명하게 예수가 제시하고 있는 구절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닮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첫줄에 "돈을 많이 지닌 부자"라는 표현에서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63절은 한 마디로 인간이 죽을 때까지 집착하는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의 욕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세속적인 탐욕에 찌들어 있는 인간들을 시체로 표현했던 예수의 인생관이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된 구절이다.

63절에서 예수는 누구든지 죽는 순간 그가 평행 탐욕의 결과로 쌓았던 부귀영화가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됨을 말함으로써, 부활을 통한 죽음 후의 세계를 단적으로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3절은 "일장춘몽"이라는 한자성어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영혼과 육체는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무엇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지, 나의 영혼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며,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때에(그것을 보는 눈을 갖게 될 때에, 성스러운 영혼이 빛으로 가득 찰 때에) 비로소 바로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의 내면과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을 찾는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그리고 밖에 있음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현재라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고 있다.

 

63절은 기독교 교회가 2,000년 동안 천국과 부활을 대가로 십일조와 헌금을 요구해왔던 것이 얼마나 큰 사기인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회와 목사들이 부활과 원죄를 팔고 받은 헌금과 십일조는 모두 그들의 안락한 삶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사람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그가 만찬을 준비한 후에 손님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종을 내보냈다.

그 종이 최초의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말했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몇몇의 상인들이 나에게 빚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오늘 밤 나에게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서 그들에게 상환의 지시를 해야만 합니다.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은 다음 사람에게 갔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방금 집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 볼 일을 보러 가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의 친구가 결혼합니다. 제가 그 피로연을 마련해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최근 큰 농장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소작료를 거두러 가야 합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이 돌아와서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당신께서 만찬에 초청하신 분들은 모두 사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주인이 그의 종에게 말하였다: '길거리로 나아가서 네가 만나는 누구든지 만찬에 올 수 있다고 하면 데리고 오라.'

거래인들(비지니스맨)과 상인들은 나의 아버지의 자리들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

 

해석 - 64절은 도마복음과 비교해 볼 때 현재 성경의 신약이 얼마나 변질되어 있는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라 할 수 있다.

64절은 55절과 62절, 63절의 내용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에 합당한 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자라고 예수는 두 구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64절 또한 그러한 예수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64절은 세속적인 부에 대한 관심과 세상사에 눈이 멀어 현재 바로 이 순간의 진정한 가치 혹은 인간 내면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탓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초청을 받을 때에 그 초청에 응할 상황에 있지 아니하거나, 준비가 되지 아니한 사람은 만찬에 올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이를 예수의 설교에 비추어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예수 자신으로부터 설교를 듣는다고 하여 모두가 자신의 현재의 삶과 영혼의 가치(나라, 천국)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응당 그때에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신비로운 설교를 들을 자격이 있으며, 천국을 발견할 자격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64절은 예수가 천국운동을 함에 있어 강권하지 않았으며,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이들을 상대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는 현재 기독교의 전도활동과는 매우 배치되는 모습이다.

 

65. 그가 말하기를, "포도원을 소유한 한 사람(고리대금업자)이 있었나니라.

그 사람이 포도원을 소작농부들에게 빌려주어, 그들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하고,

그리고 그는 그들로부터 소출을 거두려 하였다.

그는 그의 종을 보내어, 소작농부들이 종에게 포도원의 소출을 주도록 하였다.

그들은 그의 종을 붙잡아, 그를 때리고, 거의 죽일 뻔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그의 주인이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구나' 하였다.

그는 또 다른 종을 보내었다. 그러자 소작농부들은 그 종까지도 마찬가지로 구타하였다.

그러자 그 주인은 그 아들을 보내며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은 나의 아들에게는 충분한 존경심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 소작농부들은 그가 이 포도원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붙잡아 죽여버렸다.

귀가 있는 자는 누구든지 들으라!"

 

해석 - 65절은 부재지주들과 소작농들의 대립관계에서 나타나는 무모하고 세속적인 탐욕과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예수의 비유가 잘 나타난 구절이다.

그리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여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과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탐구해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다.

성경의 공관복음서들은 도마복음 65절의 원형을 변질시켜 매우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66. 예수께서 가라사대, "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바로 그 돌을 나에게 보여다오. 그것이야말로 모퉁이의 머릿돌이로다."

 

해석 -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하여 빛과 내면(영혼)의 가치(의미)를 깨닫는 것이야 말로 사람이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일들 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재 이 순간을 세속적인 탐욕에 속박되지 않고 살아가는 자가 나라(천국)를 알아볼 수 있다.

현재 자기 영혼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삶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지혜롭게 살아내는 것이다.

66절을 통하여 끈임 없는 탐욕과 세상에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할애하느라 자신이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과 영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죽어서 천국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어리석은 일일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구절이다.

 

67.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군가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자기를 모르면,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다. "

 

해석 - 67절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알아볼 때 진정 강한 자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영혼(자아)의 세계와 그 가치를 깨닫는 자가 진정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원초적으로 탐욕적 존재로써의 자신에 대한 인정과 그 세속적이며, 물질적 욕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4대 성인이라 하면 석가모니,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를 흔히 말한다.

이들은 장관도 아니었으며, 총리도 아니었으며, 기업가도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영향력을 인류사회에 끼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이며, 영생이 아닐까...

그런데 이들은 왜 성인이라 불리고 있을까...

그들이 단지 매우 많은 지식을 겸비한 인물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학자들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만 유독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로 인류가 인정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지식 탐구의 가장 마지막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한 중요한 영역일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의 내면적 가치 또는 내면의 세계에 탐구의 완성도가 보통의 인간들이 다가서기에는 어려울 만큼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영원한 휴식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자신과 함께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정신세계의 가치를 알아본다는 것이 쉽게 이룰 수 없는 영역일 것이라는 것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6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할 때에 너희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박해를 당하는 그곳에는 아무 자리도 발견되지 않으리라."

 

해석 - 재물과 높은 직위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마음을 멀리 할 때에 진정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근원적해탈에대한말씀의구절이다.

 

개인적으로 68절을 나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인다.

일단 박해의 의미를 말 그대로 "개인이나 조직의 의하여 집단적 또는 조직적으로 학대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박해는 육체적인 박해와 정신적인 박해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로마제국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상황을 볼 때 예수를 따르는 도반들이 유대교나 로마제국에 의하여 많은 육체적 핍박과 박해를 받았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반들이 육체적인 박해를 받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자기 밖과 안에 존재하는 빛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복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면 재물과 높은 지위에 대한 욕구가 차지할 자리가 없게 됨을 의미한다.

 

나머지 하나는 정신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박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박해를 일종의 정신적인 갈등이나 고통으로 놓고 본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재물과 지위에 대한 탐욕을 느끼는 감정과 그것을 억누르는 감정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의 욕구를 억제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탐욕을 느끼는 내면의 자신에게는 일종의 정신적인 고통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내면적인 고통이나 핍박을 극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진정한 가치의 세계들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이 아닐까 한다.

내면적 박해의 부분은 다음 69절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68절은 66절의 모퉁이의 머릿돌과 67절의 자신을 알게 되는 것과 일정 부분 그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69.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슴속에서 박해를 당하는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그들이야말로 아버지를 참되게 알게 되는 자들이로다.

굶주린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배고파하는 자의 배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로다."

 

해석 - 68절에서의 박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69절을 통하여 68절의 박해는 육체적, 외면적 박해에 관한 것이며, 69절의 박해는 정신적, 내면적 박해에 관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내면적 박해를 당하는 것이라 함은 달리 표현하면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영혼의 굶주린 고통을 겪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68절 후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69절의 "박해"와 관련한 구절은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와 탐욕의 욕구를 극복하기 위한 내면적인 고통(갈등, 박해)을 감내할 수 있어야 예수가 앞부분에서 언급한 3절의 "나라"와 51절의 "새 세상"을 알아볼 수 있으며, 또한 24절과 50절에서 언급한 "빛"을 알아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있다.

그리고 69절 후미에서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배고픔을 참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고 있다. 이는 곧 정신적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69절을 통하여 교회 자체의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갖고, 교회를 목사의 소유물로 이용하며, 굶어 죽는 이가 매년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북한 동포를 외면하는 일부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변절된 종교관의 집단인가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70.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산출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만약 너희가 그것을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너희가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한 그 상태가 너희를 죽이리라."

 

해석 - 70절은 24절의 "빛" 그리고 56절, 60절의 "시체"와 관련된 구절이다.

외면의 빛은 천국이나 다름없는 세상이 살아 숨 쉬게 해주는 생명과 같은 존재다.

인간의 내면은 영혼의 세계다. 그 영혼이 계속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활동함으로 인하여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을 또 다른 자신만의 세계, 나라, 천국이라 표현할 수 있다.

밝게 빛나는 빛이 인간의 외적인 생명이라면 영혼은 인간 내적인 생명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인간 내면의 빛이라 할 수 있다.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은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태어남과 동시에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들이라는 것은 엄연한 진리이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 존재 인가하면 그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이 늘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져 왔기 때문에 그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70절에 등장하는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이라 함은

예수는 이러한 외면과 내면의 빛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도반들의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러나와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속적인 탐욕과 세상사에 온전히 시간을 할애한 채 살아가는 시체와 같은 인간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내면에 이러한 가치에 대한 탐구의 의지가 없이 삶을 살아간다면 이는 곧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체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임을 예수는 말씀하고 있다.

 

7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 집을 헐겠노라.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다시 짓지 못하리라."

 

해석 - 71절에서 예수가 언급한 "집"은 매우 다양한 단어들로 표현될 수 있다.

유대교의 율법(구약), 유대교의 성전, 세속적인 탐욕이 만든 제도와 규범, 권력 등등..

71절은 예수의 철저한 유대교의 율법(성경의 구약)과 성전 부정 사상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71절의 "집"을 "성전"으로 본다면 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이라 한 예수의 사상과 매우 일치한다.

그리고 구약의 측면에서 본다면 71절은 구약의 종말을 선언하는 구절이다.

또한 71절은 "죽는 순간 다시는 살아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다"라고 한 59절과도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에 71절과 유사한 구절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성경의 구절은 도마복음 71절과는 매우 다르게 변질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사흘 안에 성전을 짓거나 사흘 안에 부활한다는 성경의 구절 또한 도마복음의 예수 말씀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도올 교수는 설파하고 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성전 지상주의가 도마복음 속 예수의 말씀과 얼마나 큰 괴리를 갖고 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주고 있는 구절이 71절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의 한국 기독교 교회들을 볼 때 교회 내 권력의 순위를 매겨 본다면.

맨 위에 교회 - 목사 - 성경 - 하나님 순서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형교회들이 수백억짜리 으리으리한 성전을 짓는 것 자체만으로도 교회 내에서 누가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비록 생전에 종교를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구약을 부정했던 뛰어난 사상가요 선지자로서의 인간 예수였지만, 예수가 죽은 이후 그의 말씀이 오랜 기간 입으로 전해지고, 책으로 쓰이면서 수정된 책들이 모여 성경으로 모양을 바꾸고, 거기에 2,000년이란 세월이 더해져서 인간 예수와는 전혀 무관하게 사후에 종교가 되었고 예수가 신으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이라면...

그래서 교회와 목사들이 예수를 진짜 신이라고 믿고 있다면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교회를 세습하고, 교회를 부의 치부 수단으로 만들고, 자신의 재산으로 만들고, 성도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일삼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행위일 것이다.

왜냐 교회와 목사들이 신이 진정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 믿음만으로도 신이 노여워할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신을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의 웃어른 격인 70대 80대의 은퇴장로, 권사들은 목사의 잘못된 행위를 제지하기는커녕 젊은 신도들의 소리에 "믿어라" "의심하지 말라"는 소리나 하는 인물들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지난 100년 동안 그들이 목사의 설교에 세뇌되어 온 결과다.

그 결과로 인해 대형교회의 분할, 재산다툼, 각종 잇권 개입, 성폭행, 사기, 교회세습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마복음 56절에서 예수가 말씀하신 구절을 다기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든지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자신 밖의 빛과 내면의 영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본 이들의 눈에는 지금의 한국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의 모습들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72. 한 사람이 그에게 가로되, "나의 형제들에게 나의 아버지의 재산을 나에게 분할하도록 말해주소서."

그께서 그 사람에게 가라사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분할자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는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몸을 돌려 그들에게 물었다: "나는 분할자가 아니로다. 그렇지 아니한가?"

 

해석 - 72절의 "분할"을 표현하는 데 있어 영문 도마복음에서는 "divider"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한글로 번역하면 분할, 분열,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소유와 관련한 72절에서의 분할(분열)은 16절에서의 가족주의 분열과 관련한 갈등과는 다르다.

16절에서의 예수가 분열자임을 인정하는 쪽에 있었다면 72절에서의 예수는 분할(분열)자임을 부정하는 쪽에 있다.

예수는 재산에 대한 분할을 위한 촉매자로써의 역할을 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인간 내면의 측면에서 본다면 61절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61절에서 예수는 분열되지 않은 전체 속에 있으면 빛으로 가득 차게 되고, 자아가 빛으로 가득 찬 상태일 때 즉, 자아가 분열되지 않고 오로지 전체를 이룰 때 안식에 이를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73. 예수께서 가라사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해석 - 73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9절에서 "뿌려진 씨"와과 57절에 나오는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앗을 가진 사람과 같다"라는 것과 "추수의 날"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73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당시 예수운동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그래서 점점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예수는 몰려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관리할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73절에서 "추수"라는 것은 예수에게서 좋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관리하는 행위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는 73절에서 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을 하라고 했을까...

73절의 주인을 영문 도마복음에서는 "Lord"로 표현하고 있다.

Lord는 귀족이나 또는 영주 혹은 도시의 시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왕성하게 번성하던 기원 후 1-2세기 무렵에는 수많은 도시들이 생겨나면서 매우 굉장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근거하여 볼 때 73절은 기원 후 1세기 초 당시 귀족 혹은 시장이나 영주들이 흉년이 들 때에도 추수할 일꾼들을 계속해서 데리고 있었다면, 영주나 시장들이 흉작에도 많은 일꾼들을 놀리면서 데리고 있는 상황을 예수가 은근히 돌려서 비판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다.

 

74. 그께서 가라사대, "오 주여! 샘물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나이다. 그러나 샘 속에는 아무도 없나이다."

( 그가 말하기를, "오 맙소사, 술통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지만 샘 안에는 아무도 없나이다.")

해석 - 74절을 괄호 안과 같이 바꾸어서 번역을 했다.

 

번역을 달리 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도마복음 74절의 영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He said, "O Lord, there are many around the drinking trough, but there is nothing in the cistern."

good lord를 한글로 번역하면 "하느님 맙소사"로 번역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위 영어 문장 중 "O Lord"는 "오 맙소사"로 번역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번역을 한 이유는 74절은 어떤 한 사람이 예수에게 이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 주여"라고 번역을 하게 되면 구약의 율법을 부정하고, 성전을 부정하며, 종교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예수를 다른 사람이 "주님"이라고 호칭하는 황당한 경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drinking trough"를 한글로 번역하면 술통이라고 번역을 할 수 있다.

 

괄호 안의 한글 번역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몸에 좋지 않은 술통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나, 정작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샘 안에 있는 물을 뜨는 사람은 없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도마복음 속에 한 구절로 당당히 74절이 들어온 데에는 그 만한 이유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즉, 단순히 샘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 것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한글로 번역을 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하는 말인 74절을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들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만을 중시하고, 진짜 소중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신의 밖과 내면(영혼)의 빛에 관심을 갖는 이는 없다."

 

75. 예수께서 가라사대, "문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단독자만이 신부의 혼방(婚房)에 들어갈 수 있다."

 

해석 - 75절의 "단독자"는 16절의 "홀로 된 자", 23절의 "하나 된 자",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된 상태(에 도달한 자)", 49절의 "홀로 된 자", 61절의 "분열되지 않은 전체로부터 온 자"라는 의미와 매우 밀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혼방"이라 함은 분열되지 않은 자아의 공간이라는 의미다.

또한 "혼방"은 아기와 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영역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2절에서 "아기들이야말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46절에서는 "아기가 되는 자는 나라를 알 것이라"라고 하고 있는 부분과 맥이 닿아 있다.

그리고 예수가 3절과 4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라"와 75절의 "혼방"은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75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73절, 74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인간 예수나 소크라테스, 부처, 공자와 같은 보통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깨달음의 반열에 오른 성인들의 가르침이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75절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닮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75절은 혼방과 같은 깨달음의 영역은 아무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76.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한 상인과도 같도다. 그는 매매할 많은 상품을 가지고 있었으나 언젠가 영롱한 한 진주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 상인은 매우 신중하였다. 그는 그 상품을 모두 팔아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단 하나의 진주를 샀느니라.

그러하므로 너희도 그리하라. 좀이 갉아먹거나 벌레가 궤멸시키지 못하는 곳에서 썩지도 않고 변치도 않는 그의 보물을 구하라."

 

해석 - 76절의 예수는 상인의 가치 투자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떤 것에 자신을 투자해야 하는 가를 전하고 있다.

76절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보물에 자신의 것을 투자하는 것 자체를 예수가 추구했던 '천국운동' 그리고 자신의 안과 밖에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예수가 말했던 '나라'라는 개념을 또 다른 표현을 통하여 드러냄으로써 그 맥이 연결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상인의 입장이 된 예수는 한 상인이 매우 신중한 자세로 자신이 보유한 상품들을 모두 팔아 단 하나의 진주를 샀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그 가치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오롯이 투자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예수가 언급한 상인은 대표적 예를 든 것이고 상인 외에도 학자, 기술자, 가수 등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도 상인의 진주와 같은 또 다른 그들만의 진주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헤아릴 수 있다.

76절은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갖다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약(유대교의 경전)을 부정했던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이라 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러한 사실이 더 분명해진다.

우리는 76절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의 목사들이 신도들의 헌금을 내도록 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단골 멘트인 "재물을 교회에 받치는 것이 곧 하늘에 있는 천국에 재물을 쌓는 것"이라는 설교가 얼마나 괴이하고 기만적인 설교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은 죽는 순간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수는 더더욱 살아 있는 시간들의 소중함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그 시간을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이나 에너지를 할애해야 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76절과 같은 말씀을 하셨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76절은 59절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7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빛이다. 나는 전부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그리고 나에게로 모든 것이 돌아온다.

한 편의 장작을 쪼개 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돌 하나를 들어보아라! 그리하면 너희는 나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77절 영문 재번역 : 예수께서가라사대,"나는존재하는모든것위에존재하는빛이다.
나는모든사람과같은존재다.
모든 것(천국운동)은 나로부터 제안되었고, 퍼져나간 모든 것(천국운동)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한편의장작을쪼개 보아라!나는거기에있을것이다.
돌 하나를 들어보아라! 그리하면 너희는 나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해석 - 77절은 24절, 50절, 52절과 관련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77절의 예수는 자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그냥 살아 있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77절의 예수가 전하고자 한 것을 나열해 보면, 예수 자신은 살아 있는 존재이며, 예수는 생명을 갖고 있고, 그 생명을 유지해주는 것은 (내, 외면의) 빛이다. 그러므로 빛과 생명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77절은 예수 자신 역시 모든 존재하는 것들 위에 함께 하는 빛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구절이다.

 

7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무엇 때문에 모래벌판에 나왔느뇨?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함이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 왕들이나 너희 궁전의 힘센 고관들처럼 화려한 옷을 두른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냐?

진실로 그들은 화려한 옷을 둘렀으나 그들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느니라."

 

해석 -78절의 예수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심상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현실 속의 예수 자신의 차이를 알리고 있다.

예수를 찾아 오는 사람들은 예수를 사회적 문제나, 권력과 문제와 같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나 메시아로 보고 있었으나 예수는 그것이 그들의 착오적 기대임을 겸손하게 일깨우고 있다.

또한 좋은 의복을 갖추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삶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님 또한 가르치고 있다.

78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가 말하고자 한 것은 28절, 29절, 49절, 54절, 69절, 74절에서 예수가 전하고자 하는 것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79. 무리 속의 한 여인이 그를 향해 외쳤다, "너를 낳은 자궁과 너를 먹인 유방이여, 복이 있도다!"

그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애기 밴 적이 없는 자궁과 젖을 먹인 적이 없는 유방 (역시) 복이 있다'라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참되게 지킨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해석 - 79절의 문맥을 매끄럽게 번역하기 위하여 특히 마지막 부분의 순서를 바꾸었다.

79절에서는 영문을 보면 예수를 가리킬 때 jesus 대신 him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복되다" "복이 있다"라는 표현은 18절과 19절, 49절, 54절, 58절, 68절, 69절, 79절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79절은 여성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79절을 접함에 있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키우는 여성을 예수가 경시하고 있는 것이 아나라는 사실을 매우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79절에서 예수는 단순히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에서 느끼는 자긍심 외에도 또 다른 영역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외면과 내면(영혼)의 빛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을 극복하는 삶을 사는 것을 통하여 모든 여성이 자긍심을 느끼게 될 것임을 예수는 설파하고 있다.

79절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 함은 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탐욕의 극복을 통한 인간 내, 외면에 존재하는 빛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본다.

50절에서 예수는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8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세상을 알게된 사람은 누구든지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시체를 발견하게 된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이 세상이 합당치 아니 한다."

 

해석 - 80절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56절에서의 그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구절이다.

도마복음 영문 80절을 보면 body가 등장하는데 body는 육체 대신 "시체"로 번역을 할 수도 있다.

예수는 56절과 80절을 통하여 죽으면 육체는 썩어 사라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부분은 29절과 38절 그리고 59절에 매우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80절과 59절은 그만큼 영혼의 소리, 빛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구절이다.

 

81. 예수께서 가라사대, "풍요롭게 된 자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라. 그리고 힘을 가진 자로 하여금 그것을 부정하게 하라."

 

81절 재번역 : 예수께서 가라사대, "정신적 깨달음을 통하여 나라(해탈, 열반, 해탈, 왕국)의 경지에 오른 자는 육체를 지배하는(다스리는) 지배자가 된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석 - 81절의 "(정신이) 풍요롭게 된 자로 하여금 (육체를) 다스리게 하라" 이 부분은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육체"는 56절에서 등장하는 세속적인 탐욕에 빠져 있는 시체와 같은 육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풍요로운 상태" 즉, 정신적 깨달음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경지는 3절의 "나라"와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는 영혼이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항상 겸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82.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니라.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부터 멀리 있는 자는 나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니라."

 

해석 - 82절의 "불"은 10절의 "불"의 의미와 같은 "천국운동의 불씨"를 의미한다.

82절은 10절에서 예수가 던진 천국운동의 불씨를 구체적으로 다시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다.

82절의 예수는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자는 내면에 천국운동의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 하고 있다.

그렇지 아니하고 천국운동의 불씨를 내면에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나라에 다가갈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82절에서 "나라"는 "깨달음(득도, 열반, 해탈)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는 영혼(정신)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르게 표현하면 천국, 왕국, 세계로도 표현될 수 있다.

70강의 도올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깨달음에 대하여 더 자세히 설명하면 "깨달음"은 완전한 깨달음과 불완전한 깨달음이 있다. 완전한 깨달음은 살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무여 열반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82절에서의 나라는 "불완전한 깨달음" 혹은 "유여 열반"의 상태라 할 수 있다.

 

83.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습들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모습들 속에 있는 빛은 아버지의 빛의 모습 속에 가리워져 있다. 아버지도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아버지의 빛 속에 숨겨져 있다."

 

해석 - 83절은 29절과 50절과 관련 있는 구절이다.

83절의 '모습'은 영문으로는 image로 통일되어 표현되고 있지만, 의미를 해석 함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닮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나오는 '모습들'의 모습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나중에 등장하는 '빛의 모습'의 모습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 형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83절에서 예수가 전하고자 한 것은 밖으로 드러난 외면의 모습이 아닌 그 안에 감춰진 내면의 형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99.9%의 인간은 누구나 상대방을 평가함에 있어 그 상대방의 겉모습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상대방의 겉모습을 통하여 상대방을 평가하는 주체는 자신의 외면이 아닌 자신의 내면, 영혼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사물이나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주체가 자신의 내면 혹은 영혼이라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객채 또한 동등하게 다른 사람의 내면의 영역, 영혼의 형상이어야 동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3절은 예를 들면 29절의 "영혼이 육신을 통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사물이나 상대방의 실체를 알아보는 안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8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하나님을) 닮은 너희 모습을 볼 때에, 너희는 행복하도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이전에 존재한, 그리고 죽지도 아니하고 보여지지도 아니하는 너희 형상들을 볼 때에는, 과연 너희가 얼마나 감내할 수 있으랴!

 

해석 - 84절의 '형상'은 83절의 나중에 등장하는 '모습'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84절의 첫 줄은 당시 유대인들이 믿던 유대 율법(현재 성경의 구약)적인 관점을 꾸짖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두 번째 줄에서 예수는 첫 줄에서의 외형적 모습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그 생며의 빛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에 세속적인 탐욕과 외면의 모습에 충실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느끼면서 갖게 되는 정신적 괴로움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2절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8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담은 거대한 힘과 거대한 부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너희에게도 합당치 아니하다.

만약 그가 합당한 자라고 한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 - 85절은 38절, 63절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 그 차이에 대하여 예수가 말씀했던 것의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85절은 당시 유대교의 율법(현재 성경의 구약 부분)을 부정하던 예수가 구약에 등장하는 '아담'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필요 이상의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과 권력의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아담.

예수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육신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진실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나 진리가 '아담'이 아님을 깨우치고 있다.

86.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자식인 나는 머리를 뉘어 안식할 곳조차 없도다."

 

해석 - 86절은 우선 15절에서 예수가 언급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86절에서 예수는 모든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8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기 부정'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86절은 42절의 '방랑하는 자'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86절은 "son of man"이란 의미를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86절의 "인간의 자식(인자)"은 영문으로는 "son of man"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표현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son of man(인간의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간 예수가 어떤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그가 사용했던 언어로 번역했을 때 son of man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문헌들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 예수가 '아람어'를 기본 언어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람어'는 "아랍어"와 매우 비슷한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의 편의상 son of man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영문 'son of man'을 우선 아랍어로 번역하면 'ابن آدم'가 되며, 'ابن آدم'을 영문으로 재번역하면 'Adam's son'이 되며, 이를 한글로 번역하면 '아담의 아들'로 번역이 된다.

결과적으로 "(영문) son of man = (아랍어) ابن آدم = (영어) Adam's son = (한글) 아담의 아들"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결과에서 '아담'이 갖는 상징성을 다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아담'은 쾌락과 세속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위와 같이 '인간의 아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의 자식(인자)"이라는 표현들이 지난 2,000년 동안 복음서의 기자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던 '인자 담론'의 예수, '신아 아들' 예수가 자신을 낮춰 부르는 의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은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서도 이미 곳곳에서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지만 특히 15절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 그리고 86절의 쾌락과 세속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평범한 인간의 자식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자식"이란 표현을 예수가 직접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인자"라는 표현들 또한 위와 같은 시각에서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86절의 '안식'의 의미를 정신적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결론적으로 86절의 예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정신적 방랑생활을 하고 있으나 완전한 깨달음,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탄식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죽으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한낱 인간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예수가 정말로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인류를 세뇌하는데 이용해 왔던 '신의 아들'이었다면, 예수는 86절에서와 같이 '안식할 곳이 없다'는 표현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안식할 곳'을 실제로 누워 쉬는 잠자리라고 이해하면 86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탐구하는 방랑을 통하여 "빛의 존재"를 깨닫고 해탈의 경지에 올랐으나 실제 자신이 누리는 권세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누워 잘 곳도 조차 없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하여 예수가 전하고자 한 것은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갖더라도 겸손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86절은 현재 교회와 목사들이 누리고 있는 권세가 예수의 가르침과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87. 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몸에 매달리는 그 몸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이 양자에 매달리는 그 영혼은 얼마나 비참한가!"

 

해석 - 87절은 29절, 55절, 81절에서 예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87절을 통하여 예수는 육신을 위한 쾌락과 큰 부와 권력에 대한 속세의 탐욕을 추구하는 것으로로부터 벗어나 내면의 빛과 주변의 빛의 존재 가치를 알아보고, 궁극적으로 안식(열반)의 상태에 수 있도록 끊임없이 탐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87절에서 예수는 29절에서 언급하였던 "영혼이 육신의 몸을 빌어 존재케 되는 상태가 되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88. 예수께서 가라사대,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때엔 너희도 보답으로, 너희가 세상에서 발견한 그런 것들을 그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너희 자신에게 자문해보라, '언제나 그들은 다시 와서 그들 자신의 것을 가져갈 것인가?' 라고."

 

해석 - 88절을 의역하여 보았다.

88절을 조금 더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전후 문맥 상 'have'를 "경험하다", 'take'를 "속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88절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 천사와 예언자(라고 하거나 , 혹은 불리는) 자들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가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는 그런 것들을 전해 줄 것이다.

그때엔 너희도 보답으로, 너희가 경험한 것들을 전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 자신에게 자문해보라, '언제쯤이면 그들이 그들만의 것으로 속이려 하게 될 것인가?'라고." ]

 

88절은 유대인의 율법(구약)을 부정했던 인간 예수가 당시 천사와 예언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88절에서 예수는 예언자 혹은 천사들이 전하는 것들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도반들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예수는 천사와 예언자들이라 하는 자들이 과연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갖고 도반들을 속이려 할 수 있는 때가 오기는 할 것인지 의문을 표현하고 있다.

88절은 구약의 천사, 예언자들의 소리가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인가를 잘 드러 주고 있는 구절이다.

 

8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너희는 잔의 겉만을 씻으려 하느뇨?

안을 만드신 이가 또한 겉을 만드신 이라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뇨?"

 

해석 - 89절은 22절, 29절과 관련되는 구절로써, 율법 특히 이원론적인 유대인의 율법을 부정하는 예수의 사상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89절을 통하여 예수가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의 욕구와 같은 외형적인 치장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89절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는 자신의 외면, 외형의 모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내면의 위대함, 가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위하여 더욱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9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에게로 오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안식을 발견하리라."

 

해석 - 90절을 이해하기 앞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자신의 설교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대하려고 했다는 점.

둘째,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안식을 줄 수 있는 인물로 비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90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간 예수가 살던 당시의 시대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민중들은 정부가 부과하는 엄청난 세금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고된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90절에서의 예수는 당시 민중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면서 자신에게 설교를 듣는 것이 그들에게 큰 부담(멍에)을 주지 않을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민중들 각자의 안식(깨달음)은 스스로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예수 자신은 결코 구원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겠다. 예수는 민중들이 밥 먹는 법을 가르쳐 줄 뿐, 밥을 떠 먹여 주는 역할자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90절은 기독교가 지난 2,000년 간 예수를 구원의 상징으로 이용하여 왔다는 사실과, 구원론이 신자들을 종교의 권력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도구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난 구절이다.

 

91.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을 믿고자 하오니, 당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

그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을 줄 알면서 너희 앞에 서있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니까 너희는 바로 이 순간을 읽을 줄을 알지 못하는도다."

 

해석 - 91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반들이 언급한 "믿음"이란 것은 어떤 것을 의미했을 것인가 그리고 91절의 마지막 줄에 나오는 "바로 이 순간을 읽을 줄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는가라고 했던 예수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당시 도반들은 이미 유대교의 율법, 즉 현재 성경의 구약 부분에 익숙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91절의 도반들이 말한 "믿음"이라는 것은 민수기, 시편과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 이를테면 "영구적인 피난처" 또는 "구세주"와 같은 의미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구약의 "믿음"에는 현실적으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영구적이고 확신적인 구원자로서의 신뢰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해야 두 번째와 마지막 줄에서 예수가 가슴을 쥐어뜯듯 답답해하는 듯한 표현을 왜 저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91절의 예수는 (눈 앞에 없는) 하늘과 땅의 이치는 알아보면서도 바로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예수 자신에게서 듣고 깨달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믿음을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도반들을 꾸짖고 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91절의 예수는 자신은 메시아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서 믿음을 보려 하지 말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91절에서 예수가 도반들에게 하고자 한 말씀의 의미는,

예수 자신은 도반들에게 믿음을 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으며, 눈 앞에 있는 자신이 하는 말을 도반들 각자가 영혼의 귀로 듣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 (내면의 빛, 생명의 빛, 나라, 천국에 대하여)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란 것이라 할 수 있다.

91절은 예수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바울이 예수가 죽고 나서 만들었다는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를 메시아, 믿음의 상징으로 신격화해 왔던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절이다.

 

92.예수께서 가라사대, "찾으라! 그러면 너희는 발견할 것이다.

허나 지난 시절에는, 너희가 나에게 구하는 것들에 관하여 나는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바로 그것들을 말하려하나 너희가 그것들을 찾고 있지 않구나!"

 

해석 - 92절은 91절에서 강조했던 것을 또다시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92절은 진리, 생명, 빛, 구원과 같은 믿음은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닌 평생에 걸친 끊임없는 탐구와 고통의 결과 스스로 깨우치고 알게 되는 대상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오늘날 성서는 예수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수많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수백, 수천 번의 수정을 하면서 애초의 의미와는 매우 다르게 변절된 상태다.

92절과 유사하지만 매우 다른 형태로 변질된 마태복음 7장 7절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92절은 4 복음서가 역사적인간 예수의 말씀을 얼마나 모욕적으로 변절시켰는가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다.

교회는 마태복음 7장 7절과 같은 구절을 성도들의 충성과 헌금유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매우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92절은 사지로 기어 기껏 살아야 100년도 살지 못할 신세이면서 성서와 교회의 꼬임에 빠져 2,000년 동안 아무도 받은 적 없는, 본 적이 없는 것을 구하겠다고 일 평생을 천국의 달콤함과 같은 시간과 재물을 교회에 갖다 바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어리석은 짓인가를 깨닫게 하는 구절이다.

 

93. "(예수께서 가라사대,) " 거룩한 것들을 개들에게 주지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똥거름 더미에 던지지 않도록 하라. 2 진주들을 돼지들에게 주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진창 속에 밟지 않도록 하라."

 

해석 - 93절의 예수는 "자신에게서 들은 것을 아무에게나 전해서는 안 되며, 진리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에게만 전해줄 것을 강조하고 있다."

93절은 교회의 막무가내식 전도행위가 역사적인간 예수의 말씀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94. 예수께서 가라사대, "찾는 자는 발견할 것이다.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다."

 

해석 - 92절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92절은 진리에 대한 믿음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자 하는 평생에 걸친 끊임없는 탐구와 그 고통의 결과로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마치 예배에 대한 출석과 헌금을 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며, 영생을 얻고,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것이 역사적인간 예수의 말씀에 견주어 볼 때에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9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돈을 가지고 있다면, 이자 받을 생각하고 빌려주지 말라. 차라리, 그 돈을 너희가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버려라."

해석 - 95절은 예수가 어떤 마음으로 도반들에게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가르쳤는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난 구절이다.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베풀 때에는 무언가 기대하지 말고 베풀 것은 말씀하고 있다.

95절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죽음 후에 하늘에서 받게 될 영생의 면류관을 위하여 교회에 헌신하고, 매주 헌금을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목사들의 설교가 얼마나 위선적인가 하는 것이다.

 

96. 예수께서 가라사대, " 아버지의 나라는 한 여인과도 같도다.

그 여인은 아주 소량의 효모를 가져다가 밀가루 반죽 속에 숨기어, 그것을 많은 수의 빵으로 부풀리었도다.

귀가 있는 자는 누구든지 들어라!"

 

해석 - 96절은 예수는 자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도반들이 자신의 이야기(천국운동)를 어떻게 전파했으면 하는지에 관하여 우회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96절을 통하여 도반들이 자신에게서 들은 것을 요란스럽게 전파하고 다니는 것을 예수가 탐탁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는 단지 많은 숫자의 제자들 보다 차라리 역할을 충실히 하는 제대로 된 한 사람의 제자를 더 중요시했던 모양이다.

밀가루를 많은 수의 빵으로 부풀리게 하는 능력을 가진 효모.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효모는 요란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은근하고 지속적으로 꽤나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할 뿐이다.

96절은 예수는 위와 같은 효모의 역할처럼 비록 소수의 제자들일지라도 그들이 소리없이 계속해서 천국운동을 세상에 펼쳐주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96절과 유사한 케이스를 107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97.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밀가루를 가득 채운 동이를 이고 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그녀가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고 가는 동이의 손잡이가 깨져서, 밀가루가 새어 나와 그녀가 가는 길가에 흩날려 뿌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여인이 집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그 동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석 - 97절은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했던 큰 부와 권력에 대한 세속적인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진정한 빛의 가치를 알게 되며, 주변과 내면에 이미 존재하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천국을 발견하게 된다는 천국운동의 의미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63절에서 예수가 하시고자 한 말씀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97절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첫째, 우리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천국(나라)은 부자이어야 갖는 것도 아니며, 죽어서야 얻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진정한 천국이란 97절에 등장하는 여인이 밀가루를 가득 채운 동이를 이고 길을 가는 동안에 하였을 상상, 즉 집에 가서 그 밀가루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행복한 상상을 하는 그 시공간에 있다는 것이며,

둘째, 97절에서의 '나라'는 살아 있는 삶 속에서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독교가 흔히 교세 확장이나 교인관리에 이용해 왔던 죽어서나 만나게 되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충실한 신앙생활과 열심히 납부하는 십일조만이 하늘나라에 복을 쌓는 것이라고 하는 목사들의 괘변과는 매우 다른 개념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98.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엄청난 강자를 죽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도 같다.

집에 있을 때 그는 그의 칼을 뽑아, 자신의 팔이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를 시험하기 위하여, 벽 속으로 세차게 찔러넣었다. 그러자 그는 그 강자를 죽이고 말았다."

 

해석 - 98절에서 예수는 천국이라는 것이 늘 우리 곁에 혹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렇다고하여 그것이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시피 천국의 발견은 평생에 걸친 끊임없는 탐구와 큰 부와 권세에 대한 세속적인 탐욕을 절제하여야 가능하게 된다.

천국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 매우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다..

약자가 엄청난 강자를 죽이기 위하여 오랜 기간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는 7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99.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형제들과 모친이 밖에 서있나이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형제들이요 나의 모친이니라. 이들이야말로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이들이 나의 형제이며 나의 어머니이다. 그들이 내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갈 자들이다."

 

해석 - 99절에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가족은 혈족의 개념이 아니다.

55절에서 예수는 "가족을 미워하지 않는 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자"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의 빛(천국) 알아보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를 예수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감당해야 것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야 그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5절에서의 예수 말씀과 연계시켜 보면 99절은 예수에게 가족은 혈족으로써의 가족이 아닌 내면에 존재하는 천국(빛, 생명)을 알아보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를 같이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천국을 함께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0. 그들이 예수에게 한 개의 금화를 보이며, 그에게 말하였다: "카이사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금을 요구하나이다."

그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 카이사의 것들은 카이사에게 주어라.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해석 - 72절과 함께 보면 100절에서 예수 말씀의 의미를 헤아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72절에서 예수 자신은 재산이나 물건의 소유관계를 정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72절과 같은 생각을 가진 예수에게 사람들이 '카이사의 세금 징수'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지를 묻자, 그 질문에 대한 예수의 우회적인 답변을 기록한 것이 100절이다.

100절은 겉으로 드러난 대화 자체보다는 문맥 속에 감춰진 부분을 드려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다음 부분을 직설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

이 부분에서 우리는 "나"라는 대상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나'라는 대상을 예수 자신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매우 엄청난 해석의 오류일 수도 있다.

예수가 사용한 "나"라는 것은 질문한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야 문맥이 자연스럽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설명하면,

예수는 살아 있을 당시 종교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역사적 인간이었다.

11절, 38, 63절에서도 나타나듯이 '죽음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 다시는 살아 있는 자신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며 당시 예수는 부활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100절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가 사용한 "나"라는 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예수 자신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만약에 예수가 사람들이 가진 것 중 일부는 자신의 것이므로 예수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왜?...

자신은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릴 신적인 존재이니까?

그래서 기독교는커녕 복음서가 세상에 나오기 도 전에, 종교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던 예수가 이런 이율배반적 말씀을 했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한결 같이 보여지고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통해 판단할 때 예수가 그랬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추론이라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너 자신의 것은 너 자신이 가져라"

 

이렇듯 구약을 부정하고, 유대교의 천국을 부정했던 예수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은 너희 것이고, 어떤 것은 카이사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였을 리가 없다.

 

두 번째 줄, 예수의 답변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 앞 부분에 "너희들이 구분할 수 있다면"이라는 문구를 넣어서 해석해야 예수가 어떤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을 헤아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의 답변 부분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하는 이들을 예수가 일견으로는 훈계하는 것일 수 있고, 일견으로는 비꼬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0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증오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증오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나의 (가짜) 엄마는 거짓을 주었지만 나의 참된 엄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해석 - 101절의 첫 번째 줄은 55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55절을 참고해주시기 바란다.

두 번째 줄은 첫 번째 줄에서의 예수의 각오? 의지?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부모님은 언제나 사랑하고 공경해야 할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세 번째 줄의 영문에는 앞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형태이며, 한글 번역분은 뒷부분에서 앞부분의 의미를 유추하여 보충한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짜 엄마'라는 것은 세속적이며,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부모를 의미하여, '진짜 엄마'라는 것은 예수가 생명으로써의 빛으로 표현했던 존재의 근원으로써의 부모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가짜 엄마가 거짓을 주었다'는 '은 사망으로 인하여 끝나는 육체의 유한함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부분은 11절과, 63절에서의 예수의 말씀과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참된 엄마가 생명을 주었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가 죽어 사라져서 볼 수 없더라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을 생명으로써의 빛의 영속성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102. 예수께서 가라사대, "부끄러워할지어다!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은 소 구유에서 잠자고 있는 개와 같기 때문이다.

개는 여물을 먹지도 않으면서 또 소들로 하여금 여물을 먹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해석 -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바리새인'을 비판하거나 언급한 것은 39절과 102절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수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일반 갈릴리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고 갈릴리 사람들을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로 여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도반을 비롯한 여러 대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는 것을 사사건건 바리새인들이 방해를 하였을 것이라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예수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39절이나 102절에서와 같은 말씀으로 꾸짖거나 비판했을 것이다.

 

103. 예수께서 가라사대, "도둑놈들이 어느 시점에 어디로 들어올지를 미리 아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일어나서 그의 중요한 자산들을 점검하고, 도둑놈들이 들어오기 전에 자신을 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 - 102절의 '도둑'은 7절의 '사자' 21절의 '도적'이 시사하는 것과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03절에서의 '도둑'을 거대한 부나 높은 직책과 같은 속세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을 취하고자 하는 내면의 욕망이라 한다면 103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세상의 것들을 미리 알고 그것에 대한 욕구를 절제할 수 있도록 자기수양을 통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 현명한 자들이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도 그렇지만 103절에서 예수는 속세에 의한 지배,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자신의 밖에 그리고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되는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104. 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오소서! 오늘 같이 기도합시다. 그리고 같이 금식합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러단 말인가? 또한 내가 어떻게 파멸되었단 말인가?

차라리,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서야 사람들로 하여금 금식하고 기도케하라."

 

해석 - 104절은 유대교의 경전, 토라를 부정했던 예수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난 구절이다.

당시 금식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장소적 개념의 천국을 부정하고, 천국은 자기 주변과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예수에게 있어 당시 유대인들의 금식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104절 후미에 등장하는 "혼방"은 75절에 등장했던 혼방과 같은 개념이다.

104절의 예수는 분열되지 않은 자아의 공간에 있는 자들 즉, 천국(나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그러한 깨달음을 부정하지 않는 한 유대교의 경전인 토라에 맞춰 금식과 기도를 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105. 예수께서 가라사대, "(세속적) 아버지와 엄마만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창녀의 자식이라 불릴 것이니라."

 

해석 - 105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엄마는 55절에 등장했던 아버지와 엄마와 같은 대상이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천국운동의 핵심을 "세속적인 탐욕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하여 내면과 주변에 존재하는 생명(빛)의 가치를 깨닫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예수가 허례허식이나 세속적인 것을 멀리했으며, 내면적인 깨달음을 중시했다는 의미다.

 

105절에 등장하는 창녀는 영어로 "whore" "harlot"로 변역되고 있다.

이 중에서 whore에서 파생된 whoredom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성서적 의미로 우상숭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105절의 '창녀의 자식'을 '우상숭배하는 자의 자식'으로 번역을 해볼 수도 있다.

즉, 105절의 창녀는 흔히 사용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서 '창녀의 자식'을 106절의 '사람의 자식'과 반대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창녀의 자식은 (영혼적인) 내면적인 것보다는 외형적인 모습, 제식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우를 비틀어 표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105절의 '세속적 아버지와 엄마만을 아는 자'는 62절의 "합당한 자들"의 반대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육체적으로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엄마만을 안다면 이는 자신과 함께 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다.

 

또한 105절을 자신을 낳아 준 부모와의 내면적인 교감을 강조한 것으로 접근하여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105절은 예수가 자신의 부모와의 내면적인 교감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결론적으로 105절은 예수가 자신이 도마복음을 통해 계속 강조한 부분들을 육체와 정신(내면, 영혼)의 관점에서 설파하고 있는 구절이다.

 

10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는 너희는 사람의 자식들이 될 것이니라. 그리고 너희가 '산이여! 여기서 움직이라' 라고 말하면, 산이 움직이리라."

 

해석 - 106절은 105절과 같은 선상에서 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절이다.

106절에서 예수가 말하는 '둘'이라 함은 '육신과 영혼'을 의미한다.

예수가 내면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했는지에 대하여는 도마복음에서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다.

대표적인 부분이 29절에 등장하는 "영혼이 육신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이 이러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 자신과 같이 내면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된 것이라는 뜻에서 "사람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후미에 등장하는 산을 움직이는 부분은 실제로 산이 움직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눈 앞 보이는 산이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변화를 내면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07. 예수께서 가라사대, 왕국은 100 마리 양을 지키는 목자와 같다. 그중 가장 큰 것이 길을 잃으매 99 마리를 방치한 채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니, 고생 끝에 그 한 마리를 찾고 이르기를 '나머지 99 마리 보다 너를 더 사랑 하노라'

 

해석 - 107절의 '목자'는 96절의 '여인'과 닮은 의미를 갖고 있다.

소량의 효모를 이용하여 밀가루를 많은 수의 빵으로 크게 부풀리는 여인이나 가장 큰 양을 99마리 보다 더 사랑하는 목자나 모두 나라(천국)이라고 예수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107절은 예수는 양적으로나 숫적인 것보다는 진짜로 천국운동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양적으로 작더라도, 혹은 숫적으로 단 한 개이더라도 그것에 더 큰 의미를 두었음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0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나와 같이 되리라. 나 자신 또한 그 사람과 같이 되리라. 그리고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그 사람에게 드러나게 되리라."

 

해석 - 전반부는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면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됨을 말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나와 같이 되리라'의 의미를 자신과 함께 수행하기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후반부의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 함은 깨닫지 못하여 보지 못하는 상태의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50절에 등장하였던 생명이라 표현할 수 있는 내면의 빛과 같은 것이 있다.

깨달음을 얻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알 수 있게 되고, 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 부분은 5절에서도 등장하였던 부분이다.

 

10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라는 그의 밭에 한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도 그것이 거기에 있는 줄을 모르는 한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에 그는 그 밭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아들 또한 보물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다. 그 아들은 그 밭을 상속받은 후에 곧 팔아버렸다.

그 밭을 산 사람은 밭을 갈았고 그 보물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누구에게든지 이자를 붙여서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해석 - 109절은 3절, 96절, 97절에 등장했던 천국으로써의 '나라'의 또 다른 표현의 구절로써, 지금도 예수가 살아 있다면 기독교의 천국 보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대표적 구절이라 했을 것으로 보일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구절이다.

109절의 핵심은 첫 줄에 있다.

1즉, 세속적인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 비로소 나라를 발견하게 됨을 예수는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1이러한 예수의 말씀이 거대 기독교 자본권력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성서 기자들에 의하여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가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1'거대한 부의 탐욕에 눈이 멀은 나머지 자기 주변과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천국(나라)을 발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했던 예수의 말씀을 성서기자들이 왜곡시켜 성서를 조작함으로써 교회와 목사들이 이를 이용하여 신도들을 상대로 모든 재산을 예수와 하나님으로 포장된 교회에 갖다 바치면 미래에 획득하게 될 보물인 천국을 그 대가로 얻게 된다는 해괴한 사기를 치는 상황들이 계속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세상을 발견하여 부자가 된 자는 누구든지, 그로 하여금 세상을 부정케 하라."

 

해석 - 110절에는 "세상"이란 단어가 두 번 등장하는데 두 개의 세상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부분의 '세상'은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나라(천국)로 표현했던 그 세상을 말한다. 뒷부분의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속적인 탐욕에 찌든 '세상'을 말한다.

29절을 보면 '부유함'이란 단어를 예수가 사용하고 있다. 이는 110절 앞부분의 '부자'라는 단어와 일치한다.

이를 토대로 110절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누구든지 영혼이 몸으로 존재케 되는 경지에 이르러 즉, 나라(세상)를 발견하여 진짜 부자가 된 자는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재화 같은 것으로 부자와 가난을 결정짓는 그런 세상을 부정해도 된다."

 

111.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늘들과 땅이 너희 면전에서 두루 말릴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로부터 살아있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아니하느뇨?: "자신을 발견한 자는 누구든지, 이 세상이 그에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해석 - 111절은 2절 그리고 56절과 62절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다.

111절은 2절, 크게 두 개의 문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첫 번째 문장은 또다시 두 개로 쪼개 볼 수 있다.

첫 번째 문장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러나'라는 단어다.

'그러나'를 이용했다는 것은 첫 문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반대되는 상황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면전에서 두루 말린다는 것은 사람이 숨을 멈추는 죽음의 순간에 눈을 감는 것 즉,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첫 문장의 해석이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하여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세상(나라,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은 육신이 정신을 지배하고, 세속적 탐욕의 욕구에 지배당하는 시체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된다.

두 번째 문장은 56절과 연관되는 부문으로써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세상(나라, 천국)을 발견한다면 그가 이전까지 살고 있던 세상은 죽음이 가득한 시체와 같은 세상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부끄러울지어다. 영혼에 매달린 육체여! 2 부끄러울지어다. 육체에 매달린 영혼이여!."

해석 - 112절은 표현을 달리 한 또 다른 29절이다.

112절은 말 그대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써 종국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영혼이 육신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단지 영혼과 육체가 단지 서로 붙어 있는 상태로만 놔두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의미다.

 

113.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언제 나라가 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결코 오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 있다!' '보아라, 저기 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

 

해석 - 113절은 대표적으로 3절, 51절 등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가 계속 '아버지' 혹은 '나라'라는 표현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는 부분의 의미를 또 다른 표현을 통하여 드러낸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13절에서 예수는 나라(천국)는 죽음 이후에 보게 되거나 갈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13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사도들을 신봉하는 기독교를 지난 2,000년 동안 지탱해 왔던 것들이 얼마나 허왕된 것인가를 입증하는 중요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14.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가로되, "마리아는 우리를 떠나야 한다. 여자는 생명에 합당치 아니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마리아를 인도하여 그녀 스스로 남성이 되도록 만드리라. 그리하여 그녀도 너희 남성들을 닮은 살아있는 정기(精氣)가 되도록 하리라. 어떠한 여인이라도 자신을 남성으로 만드는 모든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니라."

 

해석 - 114절은 22절과 연결되고 있는 구절로써 22절 중에서도 특별히 남녀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114절에서 예수가 언급하고 있는 '남성'은 앞뒤 문맥상 단순히 여성의 반대 개념으로써의 남성이 아닌 차별받지 않는 것이 당연한 대상으로써의 남성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114절의 예수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를 구분함에 있어 신체적 구조를 통해서 결정짓지 않고, 정기(기상)가 살아 있는가 여부(여자라도 자신을 남자와 똑같은 존재로 인식하는가 여부)에 관점을 두고 있다.

즉, 정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나 56절과 80절에 등장했던 시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나라에 드러갈 수 없다고 예수는 보고 있다. 여기에서의 나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그러한 의미의 천국이 아니다.

 

도마복음 해석을 마치며-

어째서 도마복음에 등장하는 '나라'가 성경에 등장하는 '천국'과 같지 아니한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도올 선생이 도마복음 강의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이 사실상 만든 것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는 이러한 기독교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 자체를 믿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christ, 기름 부은 자, 유다 왕, 메시아, 구세주)라 신봉하는 사도들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종교였다는데 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유다 왕이라 믿었던 사도들은 기독교를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하여 예수를 신격화해야 했을 것이며, 그러한 필요성을 필체로 구체화시킨 것들의 모음이 현재의 성경이라고 보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를 종교로 선택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운동'(나라운동)을 펼쳤던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예수 사후에 예수를 신격화하고 복음장사를 하고 다녔던 사도들을 믿고 있었던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출처: https://borrowingworld.tistory.com/1000 [人生知己의 세상만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