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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연표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5.03.22|조회수226 목록 댓글 0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이집트의 테베를 약탈한것이 기원전 664년이고, 그의 할아버지인

사르곤2세가 남진하여 이집트 북쪽 구경에 이르른것이 기원전 716년 이었다. 여기서 그는 '실칸

니'라는 이집트 파라오에게 공물을 받았다. 학자들은아시리아어로 표기된 '실칸니'가 '[오]소르

콘'이라는 이집트 이름을 나타낸다고 결론 지었다.('오'가 생략되고, 'r'은 'l'로 바뀔수 있다).

그렇다면 오소르콘은 '오실칸'과 비슷하게 발음되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오소르콘이라는

이름의 파라오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단서는 거의 없다.

기원전 716년 부터 아마르나 시대(기원전 11세기 말경에 시작되어 기원전 10세기 초반까지 지속

되는,기존년표에서는 기원전 1350년경으로 봄)에 이르기까지는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연결해주

는 당시 문헌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기존 연표에서는 두나라의 접촉 기록이 약 605년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아마르나 시대의 대조연표는 아시리아 연표를 통해 아케나텐의 연대를 확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아마르나 문서 보관서에는아시리아 왕 아슈르 발리트가 이집트에보낸 편지

두통이 남아 있다. 아슈르발리트는 아시리아 왕명록에서 신원이 확인되었고, 그왕명론을 근거로

기원전 1362~1327년으로 연대가 확정되었다. 이 연대는 아시리아통치자들이(병존 왕존없이)

순서대로 연속하여 나라를 다스렸다고 가정하고 왕명록에 기록된 그들의 재위 기간을 합산하여

얻은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아케나텐이 기원전 14세기 중엽에 이집트를 다스렸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외적 증거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이책의 저자-데이비드 롤)생각에는 아시리아 군주들

이 단하나의 연속된 통치자 계보를 이루었다는 기본적인가정을 미심쩍게 만드는 관측 기록이

많이 있다.

현재 전통 연표로 인정받고 있는 아시리아 연표가 제기하는 문제점을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다루고,새연표에 반대하는 논거를 다소나마 해결할수 있는 몇가지 생각을 제시하겠다.

1.아시리아 왕권은 분열되어 있었다.

아시리아 왕명록이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한시기

에는 둘 이상의 왕이 동시에 아시리아를 다스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카르두니아시(바빌

로니아)의 통치자인 아다스-슈마-우스르는 는 이런 편지를 썼다.

"아시리아의 왕들인 아슈르-니라리와 일리-하다 에게 말한다! 위대한 왕, 강력한 왕,[세계의

왕], 카르두니아시의 왕 아다드-슈마-우수르[의말]"

바빌로니아 통치자는같은 편지에서 아시리아의 두 왕에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두 왕이 아시리

아의 수도 아슈르를 근거지를 둔 의회의 합의에 따라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생각할수

있다. R. 보저는 '일리-하다'가 아시리아 북부에 있는 하니갈바트의 왕이었다고 주장했다. 나라

전체의 행정수도는 정부기관이 근거를 두고 있는 아슈르에 남겨둔 채 한 왕조는 아시리아 북부

를 다스리고 또 다른 왕조는 남부를 다스릴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협정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났을까? 유명한 아시리아 학자인 A.푀벨은 '일리-하다'와 '아슈르-니라리3세'가 즉위하기

직전에 강력한 왕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암살된것이 아시리아를 분열시켰다고 믿었다.

아마르나 (기원전 11세기 말에 시작되어 기원전 10세기말까지 지속되는 문서를 쓴 아슈루발리

트는 아마 투쿨티 니누르타1세가 암살된뒤- 학자들은 이 시대를 아시리아의 암흑시대라고 불렀

다.-정식으로 인정받지 않고 나라를 다스릴 통치자들 가운데 하나일것이라고 본다.

2.히타이트와의 대조 연표

보가즈쾨이(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의 기록 보관소에는 아시리아 통치자들이 보낸 여러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히타이트 연표가 동시성을 입증하는 여러자료(예를 들면 수필루리우마스

1세가 아멘호테프3세에게 보낸 편지, 하투실리스 3세와 람세스 2세가 맺은 조약등)를 통해 이집

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브가즈쾨이 문서를 쓴 아시리아왕의 신원을 확인하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문서 25,74,70은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라는왕이 하티(히타이트)의 투달리야스 4세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를 쓴 사람은 정통 연표에서는 투쿨티-니누르타 1세(정통연표-기원전

1242~1206년)지만,새 연표에서는 투쿨티-니누르타 2세(정통연표와새연표 -기원전 890~884

년)가 유력한 후보다.

문서 20의 연대는 하투실리스3세 시대에 아시리아의 아다드-니라리가 보낸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정통 연표에서는 아다느-니라리1세(전통연표 기원전 1304~1273년)지만, 새 연표에서는

아다드-니라리 2세(기존연표와 새 연표-기원전 911~891년)다.


마지막으로 문서 99와 88은 둘다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가 투달리야스 4세에게 보낸 편지다.

샬마네세르는 기존 연표에서는 샬마네세르 1세(기존연표 -기원전 1272~1243년)지만, 새 연표

에서는 샬마네세르 3세(기존연표와 새 연표-기원전 858~828년)다. 따라서 두통의 편지에 적힌

샬마네세르는 이름의 형태가 샬마네세르 1세의 아시리아 중기 명문에서는 전혀 찾아 볼수

없다는 하겐부흐너의 주장은 흥미롭다.

3. 바빌로니아 연표의 모순

바빌로니아 연표의 흥미로운 모순 가운데 하나는 바빌로니아 왕세계에서 나온다. 이신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레시시(기존연표-기원전 1133~1116년)와 동시대인

으로 '대조역사'에서 입증되었기 때문에, 기원전 1126~1105년 결정되었다. 따라서 그 바빌로니

아 왕의 연대는아시리아 연표를 통해 결정된 셈이다. 그런데 네부카드네자르가 즉위한 지 140년

뒤, 기존연표에서 따르면 시리크티-슈카무나라는 왕이 바빌로니아 왕위에 오른다. 그는 바지 왕

조의 마지막 통치자 인데, 바지 왕조의 연대도 역시 아시리아 연표를 통해 결정 되었다.

문제는 바빌로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시리크티-슈카무나가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동생이었다는

것이다. 두 왕 사이에 1세기가 넘는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면, 두 왕이 형제라는 것은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명백한 해결책은 넵카드네자르가 죽은 직후에 바지 왕조가 이신왕조의 뒤를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키르키-슈카무나는 형이 죽은 지 30년이네에 석달동안 나라를 다스

릴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수 있다면, 바빌로니아 연표의 변화를 수용

하기 위해 아시리아 연표도 수정해야 할것이다. 이 사례는 메소포타미아 연표를 재검토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4.'대조 역사'에 나타난 공백

'대조 역사는 바빌론에서 발견된 중요한 점토판인데, 여기에는바빌로니아 왕들과 아시리아

통치자들의 접촉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대부분 두나라의 충돌을 다루고 있지만, 정략

결혼과 정치적 협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 진귀한 문헌에 따르면, 아슈르-벨-칼라(기존연표-기원

전 1073~1056년)의 치세가 끝난뒤- 아홉명의 아시리아 왕이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두

나라 사이에 정치적관계가 없었다는 증거로 해석할수 있다면-이웃한 두 나라의 접촉에 긴

공백이 있었던것 같다. 아슈르-벨-칼라 바라 다음에 바빌론과 관계를 가진 아시리아 왕으로

'대조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다드-니라리 2세(기원전 911~891년)다. 따라서 그 사이에

는 150년의 공백이 있다. 문제의 문헌은 마치 공백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그 긴공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런 단절이 정말로 있었는지, 문헌에 빠져 있는 아홉명의 아시

리아 왕이-'대조 역사'에 등장하는 아시리아 남부의 왕들과는 달리-바빌로니아와 직접 적촉하지

않은 아시리아 북부의 하니칼바트 왕국을 다스린 통치자는 아니었는지는 당연히 제기할수 있는

의문이다. 이 시나리오는 투쿨티-니누르타 1세사 암살된 뒤 아시리아 왕국이 분열했을지도 모른

다는 푀벨의 주장과 일치학 내가 바빌로니아 연표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안한 것을 뒷받

침 해준다. 또한 내가 5번에서 내놓을 가설과도 잘 들어 맞는다.

5. 아슈루발리트 문제

아케나텐에게 편지를 보낸 아슈르발리트와 아시리아 왕명록에 기록된 아슈르 발리느 사이에는

한가지 명백한 차이가 있다. 바로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에 편지를 보낸 아슈루발리

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아버지 아슈르-나딘-아헤는 이집트에 편지를보내고 금 20탈렌트를 받았습니다. 하니갈바

트 왕은 이집트에 있는 폐하(아케나톤)의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고 금 20탈렌트를 받았습니다.

[이제는]내가 하니칼바트 왕[...]이지만, 폐하는 낭게 금[...]을 보냅니다. 그것으로는 내 편지를

가져가는 심부름꾼의여비를 충당하기에도 부족합니다. "(문서 EA-16)

세번째 문장을 '이제는 내가 하니갈카트 왕인 사람'으로 복원해야 할지 '이제 내가 하니갈바트

왕과 대등한 사람'으로 복원해야 할지는 말하기 어렵다. 전자라면,아멘 호테프 3세가 죽었을

무렵 미탄니(하니칼바트를 일컫는 이집트식 이름)의 통치자들을 타도한 뒤에 들어서 하니갈바트

아시리아 왕조의 아슈류발리트와 잘 들어 맞는다.

아시리아 왕명록에는 아슈루발리트의 아버지가 에리바0아다드로 되어 있지만 ,아마르나 문서

를 쓴 아슈루발리트의아버지는 아슈르-나딘-아헤다. 오늘날에는 '아버지'라는 말이 조상이라는

뜻을 가질수 있다고 이전되지만 D.D.러큰빌이 말했듯이' 그렇다 해도 우리의 어려움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헌에서..아슈르발리트는자신의 6대조까지 언급하고 있지만,아슈르 나딘-

아헤는 자기 조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아시리아 왕명록의 아슈루발리트와 아마르나 시대 아슈르발리트의 계보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아시리아 통치자0한사람은 기원전 14세기, 또 한사람은 기원

전 11세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흥미로운증거가 있다.

몽테가 타니스에서 발굴한 프수센네스 왕의미라는 목에 청금속 구슬을 엮은 커다란 목걸이를

걸고 있다. 이 목걸이의 매력적인 특징은 구슬 한개가나머지 구슬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다른

구슬들보다 색깔이 짙고 상당히 순수한 이 구슬은 장식이 새겨진 유일한 구슬이다. 구스에 쐐기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R.보저는 고서체와 역사를 근거로 하여 이 짧은 아카디아어 명문을

기원전 11세기의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명문에 이름이 기록된 관리는아마르나 시대에만

그 존재가 입증되어 있다. 구슬에 새겨진 명문은 아래와 같다.

"이바슈시-일루 총리總理(의소유). 그는 사랑하는 맏딸의 생명을보존하기 위해 아슈르의 수호

신 아슈르와 엔릴과 닌릴(의 소유물을 만들었다). 아무도 이것을 부당하게 탐내어 훔텨가거나 신

과 왕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써 이것을 제것으로 삼지 않기를."

이 물건이 어떻게 제21왕조 파라오인 프수센네스의 부장품이 되었을까? 네가(책의 저자 데이비

드 롤) 추리한 시나리오를 제시 하겠다.

*'왕가의 계곡'에 있던 왕들의 미라가 '로열캐시'와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안에 마련된 제2의

은닉처로 이장될때 당시 이집트 통치자들이 신왕국 시대 무덤의 보물을 자기 개인의 치부를

위해-특히 제 무덤의 부장품으로- 훔쳐간것은 분명하다.

*아멘호테프3세와 그의왕비인 티예의 미라는 왕족의 미라를 보관하는제2의 납골당으로 쓰인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로열 캐시'보다 작은 이 은닉처는 '로열 캐시'보다

먼저 활용되었고,왕묘들을 치우는 작업도 이곳에서 먼저-아마 시아문의 치세 직전에-이루어진

듯 하다. 다시말해서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WKV-22)에서 보물을 빼내고 KV-55에 들어가 왕비

인 티예의 머리를 꺼내는작업은 프수센네스 시대에이루어 졌을 것이다. 사제들은 KV-55에 왕의

미라 한구를 남겼다. 그들은 이 미라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왕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다. 최근

무덤 KV-55D의 이 시빈로운 주인을 연구한 결과는 이 미라가 아케나텐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한다. 따라서 이바슈시-일루의 쐐기 문자가 새겨진 청금석 구슬은 아마르나시대에 테베에 만들

어진 두기의 무덤-WKV-22나 KV-55- 가운데 하나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구슬은

원래 아마르나 시대의 왕묘에 들어 있던 부장품일것이다.

*놀라운 일로여겨지겠지만, 아슈루발리트가 이집트에 선물로 보낸 이 구슬을 언급한 문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문서 EA-15에서 아시리아 왕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나는 폐

하께 편지를 씁니다.나는 아름다운 병거와 말 두마리와 순수한 청금석 구슬 한개를 폐하께

경의를 표하는 선물로 보냅니다."

*구슬에 새겨진 명문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J.레위 였다. 1948년에 그는 이명문이 아마르나

시대에 씌어졌다고 주장 했지만, 지금은 명문에 사용된 아카드어를 근거로 기원전 11세기에

씌어졌다는 설이 우세하다. 두가지 해석이 모두 옳을수 있을까? 새연표에 따르면 아마르나

시대는 이스라엘 통일왕국 시대-즉 기원전 11세기-와 동시대다. 그렇다면 아마르나 시대의 아시

리아 총리인 이바슈시-일루는 당연히 기원전 11세기의 아카드어로 글을 썼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르나 시대네 아슈루발리트라는 아시리아 왕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에포님 명부 때문에 11세기 이후의 아시리아 연표를 주정할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1세기에 아슈루발리트라는 이름을 가진 통치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에포님 명부에서 기원전 1007년에 해당하는 부분은 점토판이심하게 손상 되어 있지만,실제로

'아슈[루]발[리트]'라는 이름을 알아 볼수 있다. 아시리아 통치자의 이름을 따라 그해의 이름을

붙인 경우, 그에게는 특별히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는다(예를 들면 아슈르-니나리 4세,아

슈르-비 2세,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 아슈르-단 2세). 에포님 명부의 이 부분이 바로 그런 경우

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기원전 1007년의 에포님인 '아슈루발리트'가 설명할수 없는 이유로 왕명

록에 기독되지 않은 제2의 아슈루발리트 왕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

리는 아시리아 왕명록을 통해 직접 왕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바빌로니아 통치자가 아슈르의

왕으로 인정한 아시리아 통치자를 적어도 한명은알고 있다. 일리-하다가 바로 그사람이다.

*기원전 11세기 말에 정말로 아슈르발리트라는 왕이 있었다면, 아시리아 연표는 이집트와 팔레

스타인의 새연표에 더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것이다. 기원전 1007년의 에포님인 아슈[루]발[리

트] (왕)으 새 연표에 따르면 정확히 아케나텐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고, 기원전 1012년의 우가리

트 일식 날짜도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 한다.

휴우~~~ 끄으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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