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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병자호란 이전에 청군은 한인 수군과 전함을 확보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4.22|조회수172 목록 댓글 0
병자호란 이전에 청군은 한인 수군과 전함을 확보해놓은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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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높았던데, 왜 그런 수군을 가지고도 뗏목 함대 하나 제대로 못 막았을까요?

===>1633년 3월 등주에서 명의 공유덕과 경중명등이 반란을 일으킨 뒤 전선을 이끌고 후금으로 도주했습니다. 후금은 공유덕 등의 귀순을 맞아 상당히 고무되었죠. 무엇보다 그들이 귀순하면서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함선과 수군 병력, 홍이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무입니다. 후금은 1631년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이 수로에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함선과 수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바 있습니다. 이 때 그들은 조선수군이 명의 수군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조선이 함선과 수군을 보내준다면 이전의 원한은 풀어버리겠다고 호소성 협박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후금은 이 같은 상황에서 공유덕 등의 귀순으로 수십척의 함선을 얻게 된 것을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겠지요.

공유덕의 귀순을 통해 함선과 수군, 그리고 홍이포까지 손에넣은 후금의 전력은 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후금에게 명과 조선은 더이상 두려운 존재가 될수 없었죠.

공유덕이 투항항 직후 명은 전략적 요충지 여순을 상실했고, 후금이 가도를 점령하는 것 역시 시간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후금은 조선에 대해 정치, 경제적으로 더욱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1636년 후금은 마침내 '칭제건원'을 하였고, 조선에 대해 복속할 것을 강요합니다.그리고 조선이 거부하자 병자호란을 도발하게 되었죠.


강화도(江華島)전투  

조선군은 청군 주력이 남한산성 포위에 동원되었으므로 강화도에 대한 직접 침공 위협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판단하였다. 또 청군은 수전에 미숙하므로 도하공격을 쉽게 감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광성진 일대에만 약간의 수군을 집결시켜 두었을 뿐 김포반도 대안의 해안선에 대해서는 별다른 방어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화도 공략을 맡은 청의 우익군 16,000명은 12월 30일에 강화도 대안의 포구골, 성내, 포내, 원포 부근에 포진하여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주력인 여진족은 수전에 능하지 않았으나 침공한 청군에는 수전에 익숙한 항복 한병(漢兵)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장거리포인 홍이포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청군의 도하능력이나 수전수행능력은 조선군의 예상보다 훨씬 우수한 것이었다. 이들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 부근에서 선박을 모으고, 민가를 헐어 선박과 뗏목을 제작하였다.

청군이 도하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조선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청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침공을 막으려 하였다. 먼저 주사대장 장신 휘하의 강화수군을 광성진 부근에 배치하고 충청수사 강진흔이 이끄는 충청수군을 연미정 일대에 포진시켜 통진나루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강화해안에 3,000여 병력을 포진시켜 상륙을 저지하려 하였으며 강화부성에도 700여명을 두어 각 문루를 지키도록 하였다.
 
1637년 1월 22일 새벽 강화도 공략준비를 완료한 청군은 염하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먼저 홍이포를 발사하여 조선수군과 해안의 육군부대를 공격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포탄이 떨어지자 원거리 사격에 놀란 조선군은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포격 후 청군은 대소 선박과 뗏목에 병력을 분승시켜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벌이려 하였다. 조선군은 청군 선박을 요격하기 위해 갑곶 부근의 충청수군이 출동하여 청군 선박 10여척을 격침시키는 등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이때 광성진에 포진해 있다가 갑곶으로 이동 중이던 강화수군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보강되었고 혼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강화수군을 이끌던 주사대장 장신은 청군 선단의 기세에 눌려 자기 휘하 선단에게 퇴각을 명하고 원배치지인 광성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고립된 채 분전하던 충청수군은 궤멸되었으며 염하에서 청군의 상륙부대를 저지하려던 계획은 실패하였다.

염하에서의 해전에서 패배하고 청군의 도하를 저지할 수 없게 되자 강화검찰사 김경징은 연안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해안에 포진하였던 병력을 강화성으로 후퇴시켰으며 자신은 광성진으로 달아나 주사대장 황신과 함께 육지로 피신하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은 대부분의 병력은 강화성으로 철수하거나 산간으로 분산 도주하였다. 해안에는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자리를 고수한 중군 황선신 이하 100여 병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청군은 해안에 조선군 복병이 배치되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먼저 정찰병을 갑곶에 상륙시켜 상황을 확인하였으며 홍이포를 이용하여 재차 원거리 제압사격을 가한 후 일제히 해안에 상륙하였다. 청군이 상륙하자 해안에 남아 있던 소수의 조선군은 지근거리까지 청군을 유인한 후 일제 사격을 가하여 다수의 청군을 살상하였으나 대오를 정비한 청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전멸당하고 말았다.
 
오전 8시경 갑곶 일대의 해안을 장악한 청군은 별다른 저지를 받지 않고 전진하여 오전 10시경 강화성에 도착하였다. 주장이 도주한 강화성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이 해안에서 후퇴한 병력 등 3,000여의 인원을 각 성첩에 배치하여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강화성을 완전히 포위한 청군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김상용 등은 이를 거부하자 정오경 청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청군은 먼저 화포로 집중사격을 가한 후 운제와 당차 등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조선군도 총포와 화살로 대항하여 오후 내내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청군의 포격에 성벽이 무너지고 문루가 파손되었다. 북문 방어망이 먼저 붕괴되어 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이어서 동·서·남문의 수비도 무너지자 청군이 일제히 성내에 돌입하였다. 남문을 방어하던 김상용은 형세가 기울자 부근의 화약궤에 불을 던져 자폭하고 말았다. 성 안 각지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청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청군의 학살과 약탈로 강화부민과 이곳에 피난와 있던 종실과 대신의 가족 중 상당수가 피살되거나 청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자결한 이들도 많았다.

강화성을 점령한 청군은 성 안에 있던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의 항복을 받은 후 약탈과 살육행위를 중지하였다. 이들은 비빈과 왕자·종실·대신 및 그 가족을 포로로 잡은 채 철수하여 남한산성 부근에 자리한 청태종의 본진에 합류하였다.

강화도 전투의 참패는 적정에 대한 안이한 판단과 정보수집 소홀로 올바른 방어계획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주장의 적전 이탈은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인조는 더 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강화도 전투는 조선의 항복을 재촉한 결정적인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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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defence.co.kr/~club/bbs/bbs.cgi?db=etica&mode=read&num=2054&page=1&ftype=4&fval=%c8%a3%bc%b1&backdepth=1

글쓴 이 - 신재호



정화의 배가 거창했다고해서 모든 명나라시대 배들이 다 그런식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난중일기 1598년 10월3일조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명 수군의 함정은 주로 사선(沙船)과 호선임을 알수 있습니다.

호선은 중국의 절강과 복건성지역에서 주로 사용한 소형 선박인데, 우리나라 협선 수준입니다. 논할 가치도 없는 배지요.

사선 중에 청말기에 출현한 상업용 사선 중에는 제법 대형 선박도 있지만 명 수군이 사용한 사선은 그렇게 큰 종류들이 아닙니다.

명대의 대형 사선이래봐야 길이가 100척입니다. 우리나라 통제영 거북선의 전장이 100척(저판 길이는 이보다 짧음)이므로 명대의 대형사선이 우리 나라 판옥선이나 거북선과 비슷한 크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대의 대형 사선은 탑재량이 1500석이었다고 합니다. 각선도본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표준형 조선(漕船:조운선)은 저판길이가 57척, 저판의 가로 폭이 13척으로 판옥선보다 작은데, 이 정도 조선이면 보통 쌀 탑재량이 1천석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보다 큰 판옥선의 경우 최소한 1천석이상은 탑재가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역시 판옥선이나 명대의 대형 사선이 큰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 전통 선박중에는 조선 기술적으로 진보된 첨저선도 존재했지만, 사선은 첨저선이 아니라 판옥선과 동일한 평저선입니다. 더구나 사선은 판옥선과 달리 2층 갑판이 존재하는 배가 아닙니다. 중국 수군은 사선, 호선 외에 다른 종류의 군함들도 많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출전한 명 수군은 사선, 호선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고 이들 종류의 배라면 판옥선에 비교해서 더 뛰어날 것도 없습니다.

중국의 조선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과 실제 그런 기술을 적용하여 만든 군함을 대량으로 보유하는것, 그런 배를 운용하는 수군의 전통을 장기간 일정하게 유지할수 있는 것은 각각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서봉덕 그럼 딱 결론이 나와 버리는군요. 이순신이 맡아도 힘들겠구려. 근데 홍이포가 그리도 대단했단 말입니까? 조선에는 그에 필적할 만한 화포가 없단 말입니까? 2005-09-02 20:46:09
222.99.22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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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과 김경진은 딱 박홍과 원균 꼴인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2005-09-02 20:47:42
222.99.22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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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서봉덕님, 지휘관의 방심과 안이함으로 인하 참패를 가지고 조선수군의 전반적인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어디서 뗏목소리는 줏어들어가지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선수군은 뗏목타고 떠내려오는 여진족 오랑캐한테 도 당하는 2005-09-02 21:05:59
222.108.10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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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혁 당시 전투에서 충청수사 강진흔의 배는 홍이포에 20여 발을 맞았으나 전투수행이 가능했습니다. (먼산) 남한산성에서도 홍이포 포격 사례가 숱하게 보이지만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언급이 기록에 보이지요. (조선 포병이 대포병사격으로 제압했다는 기록도 있죠.) 2005-09-02 21:08:20
pe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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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합지졸 에 머저리들로 알겠습니다 .혹세무민 하지마십시오. 도대체 글 쓰실때 자료같은거 참고 안하십니까? 강화도 전투당시 청군이 명나라 수군을 보유하고있다는 것도 모르고 계셨잖습니까? 그리고 그걸 나한테 물어봐요,본인이 잘 아신다면서요? 2005-09-02 21:08:44
222.108.10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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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윤믹혁님, 당시 청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이 보유한 전함의 숫자와 판옥선, 사선, 호선등이 얼마나 됬는지 혹시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2005-09-02 21:10:36
222.108.10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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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혁 청군 수군전력은 숫자 자체가 모두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만, 실제 전투부대 규모는 작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수군이 투입한 배도 적어서, 충청수사 강진흔이 전투 당일 지휘한 배가 단 7척이었습니다. 2005-09-02 21:17:57
pe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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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혁 그 외에 광성진에 경기수영 전선이 일부 있었는데, 유수 장신이 지휘하던 부대입니다. 이들은 갑곶에서 집중포화를 받으면서도 버티는 충청수군을 돕지 않고 후퇴했습니다. (다만 정포만호 정연만이 적선 1척 격침전과가 있습니다.) 총 규모는 많아야 4척입니다. 2005-09-02 21:19:44
pe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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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만 가지고 따지면 다 최강의 군대 아닌가요? 암만 수치상으로 훌륭하면 뭐합니까? 게다가 강화도 전투라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좋은 평가하기는 어렵죠? 머저리 이야기 나왔는데 당시 조선 수군은 그런 소릴 들어도 변명할 말이 있을까요? 2005-09-02 21:20:20
222.99.22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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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혁 그리고 충청수군이 괴멸했다는 것도 낭설이어서, 당시 전투지휘관이던 강진흔이 체포된 것은 충청수영 본영에서입니다. 전투에서 심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배는 모두 탈출, 충청도로 돌아왔다는 얘깁니다. 실은, 한참 싸운 다음 탄약이 떨어져서 갑곶을 비운 겁니다. 2005-09-02 21:21:10
pe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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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혁 덤, 조선 당국은 1631년에 중국에 전선 40척을 은화로 매각한 적이 있습니다. -ㅅ- 공유덕, 경중명이 몰고 온 배들 중 상당수는 바로 이 전선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2005-09-02 21:27:24
pe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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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혁 사실 강화도 해협 전투 자체는 그리 무시할 만한 전투가 아닙니다. 최초 전투개시일은 21일이고, 강진흔 군이 무너진 것은 22일 오전입니다. 전선 7척이 갑곶을 하루종일 막은 거죠. -_- 그 정도 버텼으면 안 무너지는 게 신기한 일입니다. 그것도 해안포대 앞에서. 2005-09-02 21:35:04
pe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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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 바보 청군을 상대로 삽질해서 졌다..는 아닙니다. 싸울만큼 싸우기는 했죠... 황당할 정도로 정보수집에 등한히 한 나머지 대전략 자체가 잘못되어서 압도적인 전략적 열세하에서 싸워서 문제지... 2005-09-02 22:12:17
island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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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승우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2005-09-04 09:48:43
218.147.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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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천만다행으로 강화도방어를 서봉덕님이 맡지 않은게 그나마 나은거겠죠.(무슨일이 일어났을지...ㅡ.ㅡ;;; A)비평은 쉬어도 실전은... 2005-09-05 16:41:04
211.194.8.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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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함최고 2차대전초의프랑스군을봐도알수있지만너무분산된전력과안이한적전분석으로허망하게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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