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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수 · 당의 군사제도및 부병제에 대한 잡설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4.30|조회수654 목록 댓글 0
블레이드 (runsema, defence.co.kr)
2004/12/30 (15:49)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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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 당의 군사제도및 부병제에 대한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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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 혹은 민족의 국력을 가늠하는 수단은 여러가지가 있다. 현대에는 경제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고대에는 군사력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군대의 집중과 필요한 지점 혹은 장소에 대한 투입능력이 중요한 척도가 될수 있다고 볼수 있다.

물론 현대에도 군사력이 그 나라의 국력을 잴수 있는 중요한 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서양의 고대 군사부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진행된 것과는 반대로 고대 동양의 군사부분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자료로 인해서 서양에 비해서 미진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서양 특히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가 상당부분 진행된 것은 당연히 그 시대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풍부하고도 면밀한 자료가 밑바탕이 되었다면 고대 동양 – 중국을 중심으로 한 – 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간략한 기록과 전쟁의 승패를 단지 지휘관의 도덕성과 자만심으로만 볼려는 시각과 그에 따른 영향으로 사서에 단지 양측의 투입병력과 승패만을 기록함으로 인해서 전쟁의 본질적 혹은 심층적인 연구를 하는데 결정적인 문제점을 제공하였다.

고구려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는 거의 걸음마 단계라고 볼수 있겠다. 그나마 활발한 고구려 후기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는 후기에 보여지는 몇 가지 무관직을 중심으로 한 연구 및 지방 행정체제와 일체화 된 것으로 판단되는 지방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에 그치고 있다.

여기에서는 동양의 군사제도 중 그 실체가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당나라의 군사제도 특히 군의 징집 및 지휘체계에 대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당은 중국에서 탄생된 토착 정권중 대외 정복전쟁을 가장 활발하게 진행시켰던 왕조였었다.

그 근간에는 당태종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었지만 몇 차례의 크나큰 패배를 극복한 이면에는 부병제를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병력 징집 체제가 존재했었다.

또한 당나라의 각종 군사제도는 바로 직전에 존재했던 수나라에게의 강한 연결성을 지니고 있었고, 북주에서 시작되어서 수나라를 거쳐서 완성된 당나라의 군사제도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로 동양에서는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되었다.

측천무후 시대를 지나 8세기 중반 현종시대에 실질적으로 부병제가 붕괴된 이후에도 당의 지배층은 부병제의 존속을 위해 확기제와 같은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했었다.

당나라의 군사제도는 다른 여러가지 제도 및 문화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국과 일본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같은 시기 고구려의 군사제도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수 있다.


부병제의 시작

황하 이북의 지배자였던 북위는 유목민족으로서 선비족 탁발부가 중심이 된 국가였었다. 북위는 화북을 통일한 이후 효문제(재위 471 ~ 499)시대 때 수도를 북쪽의 평성(현재의 산서성 대동시)에서 남쪽의 황하 남안에 있는 낙양(하남성)으로 옮기고 급진적인 한화(漢化)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한화정책의 원래 목적은 다수의 한족을 포용함으로서 정권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였지만 급진적인 한화정책은 일부 선비족의 강한 불만을 사게 되었고, 결국 524년 옛 도읍인 평성 북쪽에 있는 옥야진(沃野鎭)에서 파육한발릉(破六汗拔陵)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 반란군 때문에 북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동쪽의 업(현재의 하남시 임장현)에 기반을 둔 고환(496 ~ 547)과 서쪽의 장안(섬서성 서안시)에 근거지를 둔 우문태(505 ~ 556)가 북위를 양분하여 각각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이중 서위의 우문태 정권의 기반이 된 것은 무천진(현재의 내몽고 자치구 무천현)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선비계 집단으로 이들은 관중지방의 토착 호족의 협력으로 국가를 확립하고 유지할수 있었다.

서위는 동위에 비해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인들을 징집해야 했고, 8주국 12대장군제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의동부(儀同府)를 두어 한인들을 징집하였다. 이 96개의 의동부가 후에 수당 시대의 부병제의 근원이라고 할수 있겠다.

580년 5월 북주의 선제가 사망한 이후 즉위한 정제때 양견은 승상의 자리에 오르며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양견이 북주의 실권을 장악하는데에는 아버지였던 대장군 양충때부터 이어져온 무력이 밑바탕이 되었고 그에게 반대하는 몇 차례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다음해인 581년 2월 선제에게서 양위를 받고 새로운 왕조인 수(隨)를 연다.

관롱(關籠 : 섬서성과 감숙성을 가리키며 여기서 얘기하는 관롱은 이 지역에 근거를 둔 선비족과 토착 지배층을 가리킨다)집단이라는 북주, 서위시대 이래의 지배집단을 정치적인 기반으로 유교를 정치적인 지배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수왕조가 등장한 첫 해 새로이 제정된 개황률(률은 형법법규를 지칭한다)을 근간으로 하는 통치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는데 이때 함께 제정된 것으로 추정되는 개황령(령이란 행정법규를 가리키는 것으로 율과 령을 함께 묶어서 율령이라고 부르며 이 율령제의 실시를 중앙집권화의 성공 즉 고대국가의 완전한 성립을 보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 개황령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치적으로는 고대중국 및 그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국가의 보편적인 정치제도인 3성 6부제도가 시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상세한 부분은 남아있지 않지만 균전제, 조용조제 그리고 부병제와 같은 일반 백성들을 통치할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이때 완성되었다는 점을 들수있겠다. 이 시대에 등장한 정치제도는 곧이어 등장한 당나라도 명칭의 변화를 제외한 본질적인 부분은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학자들은 보고있다.

588년 10월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태자 광(후에 수양제)과 양소가 지휘하는 51만 8천명의 수나라 군대는 양자강을 건너 남조인 진의 수도였던 건업(현재의 강소성 남경)으로 진격한다.

별다른 저항없이 건업을 점령하고 진의 황제를 생포함으로써 589년 개황 9년 마침내 신흥제국 수는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이래 350여년에 걸친 분열을 마감하고 통일제국을 탄생시켰다.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남북조의 분열을 기반으로 한 다원화된 중심축 중 하나로 동아시아의 중심국이었던 고구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6세기 중반이후 귀족들의 세력다툼으로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았기고 함경도 지역까지 신라의 세력이 잠식되는 상태였었던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귀족들의 분쟁이 중단되고 귀족들의 세력균형을 기반으로 하는 귀족연립정권이 탄생되었고, 이 연립정권은 642년 연개소문의 유혈정변의 배경과 고구려의 멸망에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604년 병이 악화되었던 수문제는 당시 태자였던 태왕 광에게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이어 즉위한 태왕 광은 후일 수양제로 불리워졌다.


수나라의 부병제와 군사력

수나라에서 본격적인 호구조사가 시작된 것은 583년이었다. 그 동안 정치적인 혼란기가 지속됨으로서 호적에서 누락되었던 호구를 철저히 조사해서 등재하였고, 그 결과 당시 40만명에 불과했던 장정이 2백만명까지 증가하였다.

또한 호구의 증가에 따른 조세수입과 요역의 수취도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 호적에 등재된 호구수도 수문제 초기의 4백만호에서 남조인 진을 멸망시키고 진의 호구였던 6십여만 호를 흡수함으로서 약 4백6십만호에 이르게 되었다.

급격히 증가된 호구는 막대한 국가세입의 창출로 이어졌고, 수는 급격한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통일 직후인 590년 수는 부병제를 실시하였고, 막대한 세입과 장정의 수는 군사제도의 정비와 확립으로 이어져갔다.

지방행정기구인 주 ·현에 소속된 병적을 바탕으로 군인이 될 장정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완성시켰고, 군인을 징집하는것에 따른 보상을 지급함으로서 안정적으로 병력을 확보할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이전에 존재했던 군부를 정리해서 표기 장군부(607년에 응양부로 개편)를 두어 지휘권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군사기구 특히 지방군사기구의 단일화와 함께 지방군의 관할권을 주현의 행정체계와 분리해서 중앙의 군령기관으로 집중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 방식은 후일 당나라에서도 절충부라는 명칭으로 계속 이어져 갔다.

이 시기 이후부터 징집된 장정은 부병 즉 중앙의 군령기관의 관할하에 있는 응양부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어갔다.

수나라는 604년 양제의 즉위 이후 전국의 응양부병을 12위에 지휘하에 두게 하고 각 위에는 대장군 1명과 장군 2명씩을 두어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12위의 명칭은 다음과 같으며 지휘관은 원칙적으로는 대장군 1명과 장군 2명씩을 두게 되어있다.

좌익위,우익위,좌효기위,우효기위,좌무위,우무위,좌둔위.우둔위,좌어위,우어위,좌후위,우후위

그리고 12위에 나누어서 소속된 응양부병들을 형성하는 각 지방의 응양부에는 기병을 지휘하는 월기교위와 보병을 지휘하는 보병교위가 각각 2명씩 배치되어 이들이 각기 해당병종을 통솔하였다.

부병제의 형태와 임무

수(후술하겠지만 당나라의 부병제 역시 수나라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나라는 정리된 호적을 바탕으로 20세부터 60세까지의 장정을 응양부병으로 편성하였다.

편성된 응양부병들은 개인마다 각각 17결(結)씩의 토지를 국가에게서 지급받았고 농번기인 봄, 여름, 가을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농한기인 겨울철에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응양부병들에게 주어진 주요한 의무는1년에 1개월 내지는 2개월씩 교대로 상경하여 도읍의 경비를 담당하는 이른바 상경입번(上京入番)이 대표적이었다. 도읍에 올라온 응양부병들은 위사(衛士)라고 불리워졌으며 그때 사용되는 무기와 식량등은 각자가 부담하게 되어있었으며 국가는 그에 대한 대가로 응양부병들에게 분배된 토지에 대한 면세혜택을 주었다.

또한 병역의 시작연령인 20세부터 끝나는 시기인 60세까지 1회의 국경지방의 요충지에 설치된 진(鎭)과 수(守)에서 3년동안을 보내야 하는 의무도 같이 부과되었다.

물론 유사시에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전과 대외원정에도 종군하였다. 이 때에는 이미 편성된 응양부병 외에 추가로 모집한 병력을 편성하여 추가하여 행군(行軍)이라는 부대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편성된 군대의 총 지휘관은 행군원수(行軍元帥)라고 호칭되었으며 그 규모는 일정하지 않았다.

출전부대가 다수일 경우에는 임명된 행군원수중 1명의 선임지휘관이 절도(節度)가 되어서 다른 행군원수들을 통괄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출동하는 행군원수의 휘하에는 행군총관이 휘하의 단위부대를 지휘하였다.

행군총관이 지휘하는 부대의 규모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통상적으로는 약 6천명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병력 규모의 변동과는 상관없이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2 : 1로 편성되었다.

행군총관의 휘하의 하급부대로는 천명이 편제되어 있는 단(團)이 있어서 단장(團長)이 지휘를 맡았고, 그 밑에는 백명으로 편성되어 있는 10개의 대(隊)가 있어서 대정(隊正)의 지휘를 받았다.

수나라는 그 짧은 존속기간에 비해서 적지않은 성과를 남겨놓았다. 대표적인게 중국을 경제적으로 통일시켰다는 평을 받은 대운하의 개통이었다.

수 양제는 605년 백만명의 인원을 동원해 수문제가 개통시킨 광통거에 이어 두번째 운하인 통제거를 개통시키고 이어서 608년에는 탁군(북경)까지 연결된 영제거를 개통시켰다. 특히 탁군까지 연결된 영제거는 북방민족 특히 고구려 원정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학자들의 대략적인 판단이다.

수나라의 급속한 대외원정과 국력신장의 원인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당시 주위 국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광대한 인력동원 능력이었다. 이것은 물론 보유한 인구라는 자연적인 조건외에도 이 인력을 효율적으로 편제해서 투입할수 있는 능력도 포함하고 있다.

대운하의 개통은 참여민중에게 적지않은 고통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도읍의 경제적인 안정외에도 원활한 물자의 유통을 통한 상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경제적인 안정은 황제권의 안정과 중앙집권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충분한 훈련과 장비를 보유한 부병집단을 보유함으로 인해서 방어일변도 였던 대외정책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590년 부병제의 도입시기에는 4백6여십만호로 확인되었던 호구수도 불과 십몇년이 지난 양제의 즉위 초기에는 8백9십여만 호로 급증하였다.

물론 자연증가적인 호구외에도 그 동안 파악되지 않았던 호구들이 수나라의 행정지배력 아래로 포함되는 것을 의미하면 이 8백9십여만 호의 호구수는 후일 당 현종시기에 9백만호를 돌파하기 까지 수당대의 최대호구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밑바탕으로 해서 수양제는 신무기의 개발과 대규모 훈련을 실시함으로 그 성과를 가시화시키고 608년 부터는 북방민족인 토욕혼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개시함으로서 그 동안 쌓아온 군사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토욕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실전경험은 무기의 개량과 전술상의 문제점을 보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수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던 돌궐을 정복하는 밑바탕이 된다.

중국의 전통적인 이민족 통치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에 휘말린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고, 수의 급속한 몰락으로 인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전 까지 돌궐은 계속 수의 지배하에 있었다.


편견과 신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편견중에 하나가 고구려를 공격한 수양제의 백만대군이 오합지졸이었다는 것이다.

전투 능력도 전투 의지도 부족한 병사들과 무능한 지휘관과 광기에 사로잡힌 황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나라 군대의 이미지였지만 실상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고 볼수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나라는 590년부터 실시한 부병제를 밑바탕으로 충분한 장비를 갖춘 수십만의 부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들은 수나라의 남조 정벌과 이어진 토욕혼과 돌궐정복전에 참가해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추었고, 육합성과 같은 조립식 성을 만들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수나라 군대가 패퇴한 결정적인 원인은 수나라 군대의 능력부족이나 실전 경험부족이 아니라 전체적인 전략의 부재와 보급선의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무리한 속전속결 전술의 실패, 그리고 내호아의 수군의 독단적이고 무리한 공격 때문이었다.

여기에 만약 이라는 가정을 삽입해보면 재미있는 결과들이 나올수 있다.

“만약 내호아군이 우문술의 군대와 합류하는데 성공했다면?…”

“만약 수양제 혹은 우문술이나 우중문이 보급선의 확보에 좀더 신경을 썼더라면?…”

전쟁에서는 “행운”도 일종의 “실력이나 능력”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믿고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완전한 해결에도 실패했지만 적어도 외부의 침략 앞에서는 하나로 뭉쳐서 결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구려의 인구가 얼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5백만이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국가에 병참과 보급능력, 실전경험과 우수한 장비를 갖춘 백만명이 넘는 대군이 공격해 왔고, 비록 도읍이 함락될 위기까지 처하기는 했지만 고구려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중국인들이 만든 역사서에는 오직 영양왕과 을지문덕, 그리고 건무의 이름밖에는 없지만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압도적인 적과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퇴각하는 우군을 엄호하기 위해 벌떼처럼 요하를 건너오는 수군의 대오에 덤벼든 나이어른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고, 화살과 돌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 그 순간에도 성가퀴 밖으로 몸을 내밀어서 창으로 적을 찔렀던 늙은 병사도 존재했을 것이다.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격파했던 살수에서도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사투를 벌였던 중장보병이나 손가락이 끊어질 정도로 화살을 쏘아대던 궁수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병사들을 제 자리 아니 필요한 자리에 있게 하고 이들에게 자신의 임무가 무엇이고 왜 싸워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줄수 있고, 이들이 자신의 임무를 다할수 있을 때까지 혹은 죽을때까지 싸울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어주는 것이 진정한 힘이자 군사적인 역량이라고 보고있다.



비도(승우) 좋은글 잘읽었습니다^^전투의지와 행동신념을 병사개개인이 이해하고 실천하는군대와 그렇치못한군대의 차이는 동서고금을막론하고 정말크죠.전승요소중의 무형적요소의 중요함이 새삼떠오르는군요^^ 2004-12-30 16: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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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덕 당이 수의 부병제를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이 전쟁에 능한 주변 이민족을 잘 부렸던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차이라고 봅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대당전쟁과정을 보면 당군은 한인부대보다도 오히려 말갈인, 돌궐인 부대의 비중이 막강하죠. 고구려인 고선지 장군이 2004-12-30 17: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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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서역정 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거나 백제 출신의 흑치상치가 대돌궐전에서 역시 빛나는 전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의 번장제도 운용이란느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후기 당에는 터어키계 유목민족 출신의 무장들과 병사들이 제국의 간성이 될 정도입니다. 2004-12-30 17: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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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기록 을 보면 이런 이민족 출신의 군인에 비하면 한인들은 거의 겁쟁이로 매도되는 실정입니다. 오대 중 하나인 후당태조 이극용은 터어키계 사타족이죠. 2004-12-30 17: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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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다양한 이민족의 활용이 바로 당을 세계제국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합니다..다만 이런 이민족의 활용이 당이 사해평등주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한 분이 상당히 존재했습니다. 2004-12-30 22: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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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즉 지속적인 대외팽창과 잦은 대외원정으로 인해서 부병들과 그때 그때 모병한 병사들로는 감당할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민족들을 활용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면서 이들을 지휘할수 있는 이민족 출신의 무장들을 기용했습니다. 2004-12-30 22: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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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제국 후기에 위구르족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결국 이들에 의해 당이 멸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안사의 난과 뒤 이은 황소의 난 때 이들의 힘을 빌려야만 할 정도로 당이 쇠약해져 버린것도 하나의 원인입니다. 2004-12-30 22: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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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runsema, defence.co.kr)
2004/12/31 (19:30)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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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멸망과 당의 등장

612년과 613년, 그리고 614년 수의 거듭된 고구려원정의 실패는 막대한 인명과 물자의 소모 외에 수황제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태원유수였던 이 연은 동돌궐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난 이후 617년 11월 9일 장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장안을 점령한 이 연은 수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제위에 올려서 공제라고 칭하고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지만 어디까지나 양 견(수문제)이 북주의 정제에게 실권을 넘겨받아서 수나라 창업의 기초를 마련한 것 처럼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실제로 약 반년 후인 618년 5월 20일 이 연은 공제로부터 제위를 넘겨받은 후 당을 건국한다. 하지만 이 시기는 물론 약 10여년 후까지 당은 아직 장안 일대를 점령한 군벌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626년 6월 4일 장안성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진왕 이세민과 그의 처남인 장손무기등은 그 유명한 현무문의 정변을 일으켜서 형인 태자 건성과 동생이었던 제왕 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였던 당 고조 이 연을 핍박해서 제위를 넘겨받는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군주는 이렇게 형과 동생을 죽이고 손에 피를 묻힌채 아버지를 협박하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아마 당 고조 이 연이 제위를 넘겨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세민이 제위에 오른지 2년만인 628년 삭방(섬서성 북부)의 양사도를 진압한 것을 끝으로 당은 중국은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630년에 풍년이 들기 전까지는 계속된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물가상승으로 인해서 적지 않은 혼란이 계속되었다.

630년은 당에게 대내적인 안정외에도 돌궐의 복속이라는 또 하나의 정치적인 선물이 주어진 해였다. 당 태종은 항복한 돌궐의 일릭 카간으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또 628년에는 영류왕(재위 618 ~ 642)의 즉위 이후 당나라에 대한 유화정책을 실시하던 고구려에서 봉역도라는 지도를 바쳤다.

우리들이 역사책에서 볼수 있는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정관의 치”의 시작이었다.


만들어진 환상..믿고 싶은 이야기


과연 이 시기 당나라의 백성들은 과연 자부심을 가지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정말 당시의 기록대로 벼 한말이 비단 한 필 값까지 올랐던 것이 4~5전 정도로 하락해서 굶주리는 자가 없고 도망친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었을까?

1년간 전국의 사형수가 불과 29명에 불과했고 집은 문단속을 할 필요가 없었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했을까?

632년 문무백관들이 태종에게 봉선(封禪)의식을 치르도록 요청하였다. 봉선이란 천자가 천하의 안정과 번영을 하늘에게 감사하기 위해 올리는 제사였다.

이 봉선의식의 진행에 대해서 당시의 유력한 신하였던 위징은 강력하게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폐하는 여섯 가지의 훌룡한 점이 있습니다만 수말대란의 뒤를 이어 호구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곡물창고는 텅텅 비었습니다. 그런데 봉선을 위한 행차와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은 백성들이 감당할수 없습니다. 지금 낙양에서부터 바다에 이르기 까지 연기는 드물고 잡초만 무성합니다. 자치통감 194권 中 –

물론 위징의 이 발언은 봉선의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과장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관의 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수 있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한 왜곡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수 있다.

이 시기의 사서 특히 당 태종의 대 고구려 전쟁기록은 그대로 믿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나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 까지 감안하면 이 시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처럼 당나라의 거의 모든 백성들이 행복한 시기로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결국 당 태종의 치적 중에 남는 부분은 실패한 고구려 원정을 제외하고 주변 유목민족들을 제압한 것이지만 이 역시 불완전하고 허술하였다.


당나라의 부병제


여러 차례 언급했던 것 처럼 당의 군사제도 특히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부병제는 수의 제도를 명칭만 변경한 채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볼수 있다.

636년 지방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한 절충부(折衝府)가 병력의 징집과 공급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수나라때와 마찬가지로 절충부는 지방 행정체제의 관할 하에 있지 않았다.

절충부는 전국에 약 6백여개가 존재했으며 그 중 약 3분의 2가 장안 및 낙양을 중심으로 인구집중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절충부가 설치되어 있는 지역에서 절충부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역으로의 이주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수나라때의 응양부병과 마찬가지로 당의 부병들은 20세부터 60세까지의 장정들로 구성되었으며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서 농번기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농한기에는 집중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수나라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순서가 되면 조를 짜서 장안과 낙양으로 상경을 해서 번상을 해야 했다. 『군방령』의 기록을 보면 “5백리 안에서는 5번(番)으로 나누고 5백리 밖에서는 7번(番)으로 나누어서 각각 1개월씩 올라온다.”라고 되어 있다.

도읍으로 올라온 부병들은 12위 6솔부 휘하에 편성되어서 외국사신의 영접 및 호송 황제의 행렬을 호위하는 등의 일을 맡았으며 이때 소비되는 식량과 비용 그리고 필요한 장비는 원칙적으로 부병의 개인부담이다.

또한 도읍까지 이동하는 시일과 이동시 들어가는 비용역시 부병의 개인부담으로 만약 도읍에서 5백리 안에 있는 절충부에 속해있는 부병이라면 5월에 번상을 했다면 10월에 번상을 다시 해야 했다. 여기에 도읍과 거주지에 사이를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산술적으로 30일의 번상기간과 10일 정도의 이동기간까지 포함해서 일년에 최소한 60일에서 80일 만약 도읍에서 5백리 가까이 떨어져 있다면 90일에서 심하면 백일을 넘길수도 있었다.

또한 부병들은 20세부터 60세 사이에 반드시 한번은 3년 동안 국경지방의 경비를 담당해야 했다.

국경경비는 진(鎭)과 수(戍)서 담당했으며 진과 수는 병력의 규모에 따라서 상, 중, 하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상진은 5백명, 중진은 3백명, 하진은 3백명 이하의 규모로 편성되었으며 수는 진에 비하여 약 10분의 1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진과 수의 숫자는 각 시기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약 245진과 332수가 존재했었고, 진장(鎭長)과 수주(戍主)가 절충부에서 파견되는 부병인 방인(防人)을 통솔하여 국경방어를 담당했으며 이 때 국경을 수비하는 부병의 경비를 분담하고 그 가정의 생업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3명의 방인을 한 조로 짜서 1명이 국경으로 파견되어 있으면 나머지 2명이 파견된 부병과 그 가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한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부병들에게는 일률적으로 17결의 토지가 원칙적으로 지급되었으며 변경에 파병된 방인의 토지에 대한 면세혜택과 조세의 면제와 같은 혜택을 부여함으로 인해서 부병제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 외에 부병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대외전쟁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수나라때와 같이 행군(行軍)이 편성되어 행군대총관이 이를 통솔하였다. 하지만 당나라의 지속적인 대외원정은 약 60만명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병들로만 감당할수는 없었으며 이 때에는 원칙적으로는 절충부가 편성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 모병을 하여 충원하였다. 이것을 병모(兵募)라고 불렀으며 실제로는 절충부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병사들을 모병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의 군사조직와 체제


당은 건국 직후 최초로 설치되었떤 군사조직은 관중을 12도로 분할하여 설치한 군부(軍府)였다.

이후 몇 차례의 변화 끝에 636년 통군을 절충도위로 별장을 과의도위로 변경하면서 각 지방에 설치되어 있던 군부를 절충부라고 호칭하였다.

이리하여 당나라에는 약 630개의 절충부가 설치되었고 이 630개의 절충부를 다시 40 ~ 60개씩 편성해서 16위(衛)를 구성하였다.

각 위는 상장군과 대장군 1인 그리고 장군이 2인씩 존재했으며 그 아래에는 절충부에 소속된 부병들을 직접 지휘하는 절충도위가 있었다.


표 – 1 16위의 명칭과 지휘관 편성표

16위의 명칭 상장군 대장군 장군 절충도위
좌 위 1 1 2 40 ~ 60
우 위 1 1 2 40 ~ 60
좌 효 위 1 1 2 40 ~ 60
우 효 위 1 1 2 40 ~ 60
좌 무 위 1 1 2 40 ~ 60
우 무 위 1 1 2 40 ~ 60
좌 위 위 1 1 2 40 ~ 60
우 위 위 1 1 2 40 ~ 60
좌영군위 1 1 2 40 ~ 60
우영군위 1 1 2 40 ~ 60
좌금오위 1 1 2 40 ~ 60
우금오위 1 1 2 40 ~ 60
좌감문위 1 1 2 40 ~ 60
우감문위 1 1 2 40 ~ 60
좌천우위 1 1 2 40 ~ 60
우천우위 1 1 2 40 ~ 60

절충부가 편제되어 있던 16개의 상위에는 총사령부 격인 총부(總部)가 존재해서 중앙은 물론 지방의 군령권을 총괄하였다.

이 부병제의 특징은 지방병과 중앙병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과 병농일치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60만명이 넘는 부병들이 전부 군역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약 10만에서 15만명으로 추정되는 방인들과 전체 부병의 약 5분의 1정도인 번상병(위사라고도 불리워졌다)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는 생업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절충부의 구성


320여개 주 가운데 설치된 90개 주에 설치된 630개의 절충부는 소속 병력의 규모에 따라 상부(上府)와 중부(中府) 그리고 하부(下府)로 구분되었다

상부는 1천2백명, 중부는 1천명, 하부는 8백명으로 편성되었으며 절충도위가 통괄하는 절충부의 예하 조직으로는 2백명으로 조직된 단(團)을 교위가 지휘하였고, 그 밑으로는 1백명 규모의 여(旅)가 두개씩 편제되어 있었다. 여의 지휘관은 여수라고 불리워졌다.

여의 예하에는 50명 규모의 대(隊)가 있었으며 그 대정이 지휘하였다. 각각의 대는 10명으로 편성된 5개의 화(火)가 편성되어 있었고 화의 지휘관은 화장이라고 불리워졌다.

편성된 부병들 중 기사(驥騎)에 능한 부병은 월기(越騎)라고 불리우는 기병으로 선발되었으나 나머지는 무장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보병으로 편성되었다.

절충부의 지휘관인 절충도위 휘하에는 좌과위도위와 우과위도위 각각 1명씩을 두어서 참모격인 장사와 병조, 별장이 보좌해 주었다.

절충부에 소속된 부병들은 활 1개, 화살 30개. 횡도등과 같은 장비와 식량은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규정된 장비와 식량을 평상시에는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번상할 때나 혹은 대외 출정시에는 장비와 식량을 모두 반출하여 이것을 사용하였다.

개인 장비 외에도 10명으로 구성된 화에서는 천막과 삽과 같은 장비를 구비해야 했고, 각 화에서는 6필씩의 군마를 확보해야 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당나라가 부병제로 확보한 병력은 60만에서 70만명으로 추정할수 있다. 이중 10만에서 15만명은 국경경비와 역시 10만에서 15만명은 번상을 하였기 때문에 대외 원정시에 동원할수 있는 병력수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30만명에서 40만명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당은 동쪽의 고구려와 북쪽의 유목민족 그리고 서쪽의 토번까지 항상 군사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정면 전쟁을 강요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병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적지 않은 경우에는 실제로는 강제적인 징집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북주에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시기까지 시기별로 각 국가의 징집제도와 군사제도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였다.

수와 당의 군사제도를 언급하고 살펴본 이유는 대략 두가지이다.

하나는 고구려의 군사제도를 추정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의 군사제도는 처음에 언급한대로 쉽게 얘기하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로 미궁속에 빠져 있고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당사자인 고구려인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 특히 후기의 군사제도는 병력동원 규모로 추정하건데 당나라에 뒤지지 않았지만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바람에 그냥 사서에 있는 “몇 만명을 동원했다”라는 짧은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인류는 초창기 부족사회를 거치면서 점차 거대해진 사회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발 맞추어서 인류의 탄생과 함께 겪고 있던 전쟁의 규모와 목적도 점점 거대해 졌고, 그에 맞추어서 전쟁도 더 복잡해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개인의 용기나 혹은 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얼마나 많은 병력을 전쟁터에 내보낼수 있고 얼마나 많은 병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시점에 도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수 있는 무게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곧 국가의 완성으로 보고 있으며 그 정점에는 바로 수와 당이 존재하고 있다.

수나라는 백만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절반 혹은 절반에 가까운 병력의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도 그 다음해와 또 그 다음해 고구려 원정을 실행에 옮겼다.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 역시 645년의 원정실패에도 불구하고 결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고 실제로 668년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당나라에 대해 가지는 두 가지 환상 중 하나는 당은 군사적으로 대단한 국가였다는 것이다.

물론 당은 건국초기의 혼란을 벗어나고 당 태종이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에서 그 이전 어느 왕조도 경험하지 못했던 지속적인 대외원정을 통한 팽창정책을 실시했고, 일정부분에서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당 태종과 그를 뒤이은 당고종 그리고 측천무후 시대에 이루어 놓은 군사적인 성과는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로마가 어느 지역을 점령하고 군단기지를 설치한 이후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심어놓음으로서 점령지역의 대다수를 자국의 속주로 유지할수 있었던데 비해서 당의 기미정책은 해당 민족이 분열하고 서로 내분을 일으켰던 시기에는 비교적 잘 유지되었지만 결국 해당되는 민족이 외부의 억압을 인식하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다.

막대한 물자와 인원을 동원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지도 못했고 발해의 건국을 막지도 못했다.

토번을 정벌하는데에도 실패해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당 태종 시기에 평정했던 돌궐역시 얼마 못 가서 다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만 그것을 저지하는데에도 실패한다.

당나라가 특정시기에 보인 군사적인 성과와 역량은 당연히 높이 평가 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되며 그 군사적인 성과를 얻기위해 투입한 인원과 물자를 생각해 보면 실제로는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로마제국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시절 팽창정책을 포기한 이후 리메스(방벽)을 설치해서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고, 이 방벽은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황제시기 까지 제대로 작동했다.

반면 당나라는 벌써 7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팽창주의 정책이 가져온 한계를 경험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도 제대로 이겨내지도 못했다.

(660년 백제의 멸망이후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은 신라와 점령지역을 놓고 무력분쟁을 벌인다. 물론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당과 신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결국 당은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한륙도에 대한 군사적인 개입을 중지해야만 했다. 또한 많은 인명과 물자를 투입하면서 점령한 고구려에 대해서도 완전한 지배에 실패하고 만다. 이것은 같은 시기 당에 대해서 실질적인 위험세력으로 등장한 토번과 돌궐세력 때문 이기도 했지만 결국 당나라의 무리한 팽창정책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676년의 기벌포 해전 이후에도 당은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이 때 당의 재상이 올린 표문에서는 “신라는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지만 토번은 그렇지 않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결국 당은 스스로 펼쳐놓은 함정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일단 점령한 지역을 유지할려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고, 당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고구려는 발해와 신라에게 백제역시 신라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제2제국을 건설한 돌궐은 당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또 하나의 환상은 618년부터 907년까지 3백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당이 항상 강력했고 항상 번영했고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당나라의 군사적인 역량은 이미 측천무후 시절에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이전 시기에도 당은 외부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적지않은 패배와 실패를 경험했었다.

당나라의 전체 유지기간을 살펴보면 당나라의 군사적인 역량이 존재했던 기간은 당 태종의 즉위 초기인 630년대부터 불과 30년을 넘기지 못했다. 676년 신라와의 기벌포 해전에서의 패배를 끝으로 당은 더 이상의 대외적인 팽창을 접어야만 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돌궐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는 등 표면적인 정책에서는 변화가 없었지만 당 태종 시기를 끝으로 더 이상의 환상적인 승리는 존재하지 못했다.

측천무후의 시대를 지나서 현종의 즉위는 두번째 안정기를 가져왔지만 짧은 안정기 이후에는 755년 안록산의 난이 시작되었고, 비슷한 시기 당나라의 부병제는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안록산과 그를 뒤이은 사사명의 난은 당으로 하여금 조용조 정책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조용조 정책의 포기는 단순히 조세정책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시기 백성들을 강력하게 규제하고 통제함으로 인해서 유지되었던 힘의 상실을 의미했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이후에도 독자적인 정권을 유지했던 번진과의 대립과 손실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실시한 소금의 전매제도 때문에 발생한 황소의 난으로 당은 마침내 그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학자들은 안사의 난 이후 당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고 보고있다. 당이 안사의 난 이후에도 약 1백5십년간 유지될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의 개통으로 인해서 개발된 강남의 경제력 덕분으로 보고있다.

당나라가 세계제국이라고 불리워 질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대운하의 개통을 바탕으로 한 활발한 상업활동과 네르토리우스 교, 마니교와 같은 다양한 외래 종교의 번영과 이민족 출신을 고위 직급에 올리는 등 내면적인 문제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당 태종에서 현종 말기 안사의 난 이전의 당은 분명히 다른 제국과는 다른 활동성과 다양성을 포용할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질수 있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러한 포용력의 배경에는 “힘의 우위”가 존재했다고 믿고있다. 북주 말기에도 선비족은 호한융합정책을 포기하고 일종의 국수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민족 우선주의 정책은 자신감이 없어졌거나 혹은 외부의 충격에 극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에 드러내는 모습으로 스스로의 힘에 자신감을 가졌을 때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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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도 없는 글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염치가 없습니다^^ 어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다시 한번 잘라야만 했습니다.

다음에는 당의 군사적인 성과를 이룩하게 했던 부병제의 붕괴와 그에 대처하기 위해 등장했던 여러 징집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판옥선 형님의 소설은 꼭 백만권을 돌파하기를 기원합니다.^^







행인 K 뭘요. 재미있기만 한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당의 강대함이 어느정도는 껍대기에 불과했다는게 조금 충격이네요. 2004-12-31 23:23:22
218.39.195.151
서봉덕 짝- 짝- 짝-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사학을 공부하셨나봐요. 저렇게 조리가 딱딱 떨어지니 말입니다. 2005-01-01 00:16:04
222.99.229.151
비도(승우) 하지만 당시세계의 수준을 상대적으로 비교해볼필요는 있습니다. 그정도의 정리된병력동원체계와 인구수,문화수준,경제,생산력을 감안하면 당은 분명세계최강국이었습니다,정관,개원의치는 중국학자들도말하길 과장된측면이 없지안다고 인정하는바이나 5호16국으로부터 2005-01-05 14:31:46
218.153.90.215
비도(승우) 근300년간전란의 소용돌이에 살아온 중국민중들로서는 당의치세가 우리기준에는 과장일지몰라도 그들에겐 분명태평성대였다는점입니다. 완벽한의미의 태평성대는 아닐지라도 상대적관점과 당시의기준으론 좋은시절이었습니다.그리고당이무너지기시작한건 현종대죠. 2005-01-05 14:34:07
218.153.90.215
비도(승우) 측천무후가 솥단지거덜내고 현종이솥단지팔아먹고 그후로당은사분오열 진짜 당나라군대되는거죠.발해건국초 발해와당의 천문령전투만봐도 이해고라는 당의대장이 얼마나무능한인물이었고 당군이 강군이아니다란 느낌이듭니다.정말당태종시기와 현종초반기가 최고였죠^^ 2005-01-05 14:36:36
218.153.90.215
블레이드 비도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성기의 당은 군사적인 측면만 보아도 대단했었지요..다만 세상에 알려진 것 처럼 완전무결한 태평성대는 아니었지요. 당태종 시기만 해도 고구려원정에 필요한 배를 만드는 것 때문에 2005-01-05 21:14:06
61.37.145.4
블레이드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병제만 보아도 지배층 입장에서는 환상적인 병력동원체제 였지만 40년동안 묶여있을 농민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005-01-05 21:15:34
61.37.145.4

블레이드 (runsema, defence.co.kr)
2005/01/06 (17:53)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23
Access : 1584 , Lines : 145
수 · 당의 군사제도및 부병제에 대한 잡설 - 3
Download : 4-삼족오.jpg (3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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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병제의 붕괴

당나라의 부병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의 병농일치의 부병제가 붕괴된 시기를 보통 8세기 중반 더 정확하게는 755년 일어난 안록산의 난 이전인 747년(당 현종 천보 6년)에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보고있다.

당 현종시기는 당 태종의 집권기간과 더불어 “개원의 치”라고 불리우는 전성기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 측천무후의 재위기간에도 정치적인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그 여파가 일반 백성들이나 대외정책에도 심각하게 미치지는 않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시기에 왜 당의 군사적인 업적을 이룩하게 만든 밑바탕이 되었고, 당을 세계제국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안겨주었던 주춧돌이 되었던 부병제가 붕괴되었을까? 636년 시행되었던 부병제가 왜 백년이 조금 지나서 당의 전성기라고 불리워졌던 시기에 사라져버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외부적인 요인은 지속적인 대외팽창에 따른 농민들의 부담과 위험이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군단이 술라와 마리우스 시절 부병제와 동일한 개념이었던 시민병 제도가 무너지고 직업군인제 일명 “마리우스의 노새들”로 변형되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본래 시민들의 참여로 편성되었던 로마 군단이 지속적인 대외원정으로 인하여 징집된 시민들을 생업에 종사할수 없을 정도로 계속 붙잡아 두었고, 생업이었던 농업에 종사할 틈이 없었던 시민병들은 결국 파산해서 도시로 흘러들게 되었다.

그 빈자리를 정복전쟁의 전리품으로 얻어진 노예들로 구성된 대농장들이 차지하였고, 그 대농장들의 실질적인 주인은 물론 대부분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로마군단을 로마군단답게 만들었던 시민들이 사라지자 로마군은 허약해졌고, 누미디아에서 벌어졌던 유구르타 전쟁에서 그 허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끝으로 시민군단은 로마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당의 부병제는 토지를 분배받기는 했지만 소농민들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제도였었다.

부병으로 등록되어서 절충부에 속하게되면 약 40년간 일년에 석달 넘게 도읍으로 번상을 해야 했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과 장비는 모두 개인부담이었다.

거기다 반드시 3년은 국경에 있는 진과 수에 나가서 경계를 서야 했는데 만약 여기서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당은 고구려만 해도 645년, 647년, 648년, 659년과 661년 그리고 668년까지 계속된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거기다 비록 단기간에 끝나기는 했지만 660년 백제 멸망 이후에도 약 3년간 백제 부흥군과 지속적인 전투를 치루어야 했고, 마지막에는 왜의 원군과도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668년 고구려의 멸망이후에도 역시 약 3년정도 고구려 부흥군의 저항을 분쇄해야 했고, 고구려인들 제압한 시점 이후에는 다시 신라와 점령지역에 대한 분배 문제를 놓고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645년의 원정에서 당군이 얻은 인명피해를 2천명 정도로 잡고 있지만 그 숫자를 글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며 그 외에도 설연타와 돌궐, 토번과도 지속적인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특히 토번은 여러 차례 당군을 격파해서 결국 당은 흑치상지 같은 이민족 장수들을 급히 투입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러야 했다.

이 기간동안 부병으로 동원되었건 병모로 참여했건 전투에 종군한 병사들의 계속적인 소모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으며 자영 소농민이 대외원정에 종군하는 동안에는 생업은 거의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시민으로 구성되었던 로마군단의 붕괴과정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볼수 있지만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과 장비구입비 정도 밖에 안되는 급료를 받았던 로마군단병과는 달리 당나라의 부병들은 개인당 17결의 토지를 지급받을수 있었다. 다만 이 토지를 제대로 경작할수 있었는지 여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의 호구수는 755년의 8백9십만여호가 최대였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정남으로 분류되는 20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비율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낮았다.

당나라가 조사하는 호구수에는 포함되지만 조세와 병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호구를 당에서는 불과호(不課戶)라고 불렀고, 조세와 병역을 부담을 지지 않은 사람들을 불과구(不課口)라고 하였다.

당나라에서의 공식적인 불과구는 물론 20세 이하의 연소자나 60세 이상의 노약자, 신체장애자와 노예신분에 속해있던 사람들과 관료들이었다.


하지만 755년의 호구조사에서 파악되었던 8백9십여만호 가운데 불과호는 무려 40%에 달하는 3백 5십여만 호에 달했고, 불과구 역시 80%가 넘었다.

이 부자연스러운 수치는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한 장정의 전사와 부상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이 부자연스러운 숫자는 아마 병역과 조세를 기피하기 위해서 호적에 남성을 여성으로 기입하거나 혹은 태어난 남자아이를 아예 호적에 올리지 않은 상황을 제외하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고 보고있다.

참고로 8세기 후반의 학자였던 두우가 편찬한 『통전』에서는 당의 실제인구수를 약 1천3백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호적에 잡히지 않은 이 사람들은 고향에서 도망친 백성들과 자기땅을 상실한채 소작농으로 전락한 백성들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당의 부병제가 붕괴된 또 다른 원인은 지속적인 대외원정 외에도 또 다른 측면에서 확인할수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펠리오와 영국의 존 스타인 벡에 의해 발견된 돈황(감숙성 돈황현)의 호적은 그에 대한 연구를 따로 『돈황학』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나라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마치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의 촌락문서가 후기 신라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에 비교할수 있을 것 같다.

돈황에서 발견된 자료중에는 기주에 소속된 9현 가운데 하나인 미현(眉懸 : 협서성 미현)의 서리였던 송지에 관한 기록을 볼수있다.

노리 즉 노련한 서리라고 불리우며 조선시대의 아전들과 같이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송지는 공공연하게 여비보태기라는 관행적인 부담을 거부한다. 이것은 농촌에서 일반적으로 실시되었던 관습에 어긋나는 것으로 송지가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당의 균전제와 부병제는 농업활동을 하는 소규모 자영농민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일괄적으로 같은 크기의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도 영업전이외에는 원칙적으로 대규모토지의 습득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의 이면에는 피지배층을 경제적으로 동등한 상태로 만들어놓고 그에 따른 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들어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런 근본지배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 지배체제를 지탱하고 유지시켜야할 관리에 의해서 말이다.

같은 상태 혹은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서 구성원간에 경제적인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사유재산제가 실시되는 이상 고대사회건 현대사회건 피할수 없는 일이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인한 강남의 개발과 상업의 발달은 농민들 간에도 경제적인 격차를 나타내게 하였고, 당 왕조가 가장 균질적이고 평등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노력했던 농촌역시 대토지 소유자와 공권력과 결탁한 신흥 권력층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다른 성원들보다 더 많은 경제적인 여유를 가졌던 이들은 자신들에게 지워질 병역과 국경으로 나간 병사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 같은 것들을 거부하거나 다른 힘없는 농민들에게 떠 넘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것은 빈부격차를 늘리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불합리한 부담에 맞서서 몰락한 농민들이 선택한 수단은 “도망”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절충부가 설치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특히 조세와 병역의 부담을 지는 과호의 도망은 엄격한 처벌의 대상이었지만, 과호들의 도주는 중지되지는 않았다.

마침낸 당의 조정은 처벌에 의한 금지정책으로는 이 과호들의 도주 – 이들은 도호라고 불리워졌다 – 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태평성대로 알려져 있던 당 현종의 재위초기인 723년 재상 우문융의 주도로 소위 『괄호 정책』을 실시한다.

도망친 도호를 처벌하는 대신 회유하는 한편 도망친 곳으로 정착하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실시해서 약 80여만호의 도호를 괄호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전체 호구의 약 10분의 1에 육박하는 숫자로 다소간의 과장이 들어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적지않은 숫자였었다.

이들에게는 처벌대신 회유와 설득으로 다시 당의 행정권 안으로 편입시키고 가벼운 조세를 부담하게 하는등의 정책을 펴지만 결국 당의 근본적인 통치체제의 심각한 균열의 조짐이라고 할수있겠다.

새로운 군대의 등장

앞에서 살펴본대로 차과부(부병으로 등록되는 호적)에 들어가서 부병으로 등록되면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군역의 종류는 전시에 동원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도읍으로의 번상과 국경경비로 나눌수 있겠다.

부병제가 붕괴될 무렵 기존의 국경 경비체제인 진수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흔히 당의 국경경비는 제정 로마의 국경경비 체제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리메스(방벽)이라고 불리우는 수비체제는 주로 보조병으로 편성된 소규모 병력을 국경선을 따라 배치하고 야만족의 침입을 감지하면 약간 후방에 군단병으로 편성된 예비부대가 출동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수비체제는 전 국경선을 수비할수 있고, 후방이 적의 침입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줄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길어진 국경선에 배치된 소규모 병력이 감당할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침공에는 무력했다. 실제로 제정 로마의 오현제시대(같은 시대 로마인들은 황금시대라고 불렀다)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때에는 벌써 이 리메스가 여러 차례 돌파되기 시작했고, 이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황제는 2개군단을 따로 창설해야만 했다.

즉 소규모 적의 반복적인 침입에는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어체제였지만 적이 대규모로 결집하고 전력을 집중시킨다면 막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로마나 당나라 모두 이러한 소규모 진지를 이용한 방어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한 것은 국경선을 마주한 상대방의 군사적 역량이 결집되지 못한 시기였었다. 로마의 리메스나 당의 경계선 모두 국경선 너머에 있던 게르만족과 돌궐족이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국경선을 넘어서 공격을 해야할 목적이 발생하고 전력을 집중할 능력, 그리고 공격시 발생할 피해를 감당할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로마가 후방에 예비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대처했다면 당나라는 이민족을 분열시켰던 기미정책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돌궐의 제 2제국이 성립되던 7세기 후반부터 국경의 방어요충지에 진수(鎭戍)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방어부대를 주둔시킨다. 이것을 군진(軍鎭)이라고 불렀는데 당나라가 부병에 의한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를 도입하는 것과 발을 맞추어서 점점 규모가 커져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군진을 지휘하는 번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710년 최초로 설치된 안서번진을 시작으로 이어진 번진의 탄생은 당나라 후기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절도사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부병제의 붕괴가 곧바로 완전한 모병제의 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모병제를 실시한 것은 737년으로 군진병을 모병으로 충원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보통 장정건아라고 불리웠던 이 병사들은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변경의 군진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부병들과 마찬가지로 조세를 면제해주고 급료를 지급하는 모병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는 군진 인근지역에 경지를 지급받았으므로 둔전병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병농일치의 부병제는 붕괴되었다.

이러한 장정건아는 주로 객호라고 불리우는 도망농민들이나 전객이나 장객이라고 불리우는 소작농들로 충당되었다.

한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고 있던 7세기 말 산동지방을 중심으로 단결병(團結兵)이라고 불리우는 병종이 태어났다.

단결병이라고 불리우는 병종은 일종의 지역 방위부대로 급증하기 시작한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장정건아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군사체제의 균열과 혼돈속에서 탄생되었다.

150호마다 병사 15명과 말 1필로 징병된 단결병은 주로 지방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단련사라고 불리우는 무관이 지휘하였다. 초기에는 지방에서 파견되었지만 현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지방의 주장관인 자사가 겸임하면서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흔히 지방행정의 책임자가 민정권과 군 지휘권을 동시에 장악했던 경우는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 혹은 외적의 침입이 빈발했던 시대로 단결병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설치가 확대되었다.

이 단결병은 모병이 아니라 징병이었고, 원칙적으로는 부유한 농민을 우선적으로 징병하게 되어있지만 이미 동등함이 사라진 농촌의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관리들과 결탁해서 소작농들이나 빈농들에게 전가시켰다.

한편 부병들의 주요임무였던 도읍으로의 번상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 조정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읍의 경비만을 전담하는 확기(擴騎)라는 새로운 병제를 창설하였다.

725년 만들어진 이 병제는 초기 모병제를 염두에 둔 것과는 반대로 국경경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부병제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이 확기들도 단결병들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농민들을 우선적으로 징병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당나라가 시행했던 부병제의 붕괴과정을 살펴보았다. 간단히 요약하면 636년 시행되었던 부병제는 747년에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부병제가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계속된 팽창정책으로 인해 빈번해진 전쟁에 동원되었던 부병들이 전쟁을 기피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은 크기의 토지를 나누어주고 그 반대급부로 동일한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농민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통치제제가 농촌의 계층분화에 따른 변화로 인해서 통제에 실패했다는 점을 들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왜 부병제의 붕괴가 확실해진 상황에서도 당의 지도층들은 부병제를 고집했는지 하는 것이다.

우선 들수 있는 이유는 비용의 증가였었다. 실제로 현종 시대에 점차 대규모로 커지기 시작한 변경의 번진은 막대한 유지비용이 들어갔고, 양세법으로 거두어들인 거의 모든 세입이 변경의 군진을 유지하는데 소모되었다.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실시한 소금의 전매제도가 결국 당의 완전한 소멸을 불러온 황소의 난의 발생원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고집스러운 태도가 약간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이들 지배층들이 병농일치의 부병제를 가장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지도층들은 이들 소농민들을 국가의 하부단위로 이해했고, 이들에게 같은 크기의 토지를 분배해서 동등한 상태로 만들어 놓은 후에 이들을 징집해서 군대를 이룬다는 것은 주대의 정전법에서부터 그 전통이 이어져 온 것으로 당시의 상황으로는 가장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징병체제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동감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당이 이러한 부병제를 포기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부병제를 시행할수 없게 된 체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병농일치의 부병제를 가장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이해했던 기존의 귀족들 대신 과거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관료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부터였다.

이들은 기존 지배층인 귀족들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었고, 부병제를 고집한다면 결국 소농민들의 이탈을 가져올것이라는 예측도 했었다.

8세기 중반 완전히 사라진 부병제는 모병제로 대체되었고, 그것은 토지를 분배를 기초로 한 당나라의 행정지배 체제가 후퇴하게 된 것을 의미했으며, 당 현종말기에 발생한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당은 자랑스럽게 불리워졌던 - 세계제국 - 이라는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주어야 했다.

부병제의 붕괴는 결국 거대한 번진의 출현과 절도사라는 직책을 탄생시켰고, 당을 멸망시키는 열쇠가 되었다.

개인이건 국가건 초기의 성장동력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필연적으로 노쇠화 현상이 발생한다. 로마가 위대한 제국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이러한 상태에서 치열한 내부개혁으로 체제를 유지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한 국가나 혹은 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정책의 변경과 소멸은 해당 국가나 민족의 존립기반을 흔들어버릴수도 있으며 특히 고대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financier 블레이드님, 글좀 퍼가도 되겠습니까?^^ 2005-01-06 23:53:15
financier
블레이드 저도 여기저기에서 짜깁기하고 약간의 살을 붙인것에 불과합니다. 부담같지 마시고 대신 디코에서 가져갔다는 것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5-01-07 00:11:27
210.124.57.245
비도(승우) 좋은글입니다^^정말잘읽었습니다.블레이드님^^근데 참아이러니하지안습니까?진수가 국경방어를 감당키러여워 배치한 번진들이 나중에번진할거하여 당이무너진다는게.-- 절도사들의 지방분권화-안녹산의난이 그시발점이었고 나중엔 거의 독립된각각의 세력이 되어5대10국 2005-01-07 15:58:10
218.153.90.215
비도(승우) 의 결과를 낳죠.그리고 단련사는 송대에도 그제도가 유지되죠.물론 당만큼 이민족을 막아내지못하고 무너집니다만--;아무는 젛은글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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