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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7.19|조회수884 목록 댓글 0

아래글은 디펜스코리아에서 가져온글입니다.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1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서유럽 전장에서 개인의 무예의 개념이 소멸된 것은 16세기가 끝나서야 가능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유럽 군사사의 중핵을 이르는 전쟁과정을 중심으로 이를 분석할 경우, 15세기 말에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과정에서 이미 본격적으로 개인의 무예가 전장에서 끼치는 영향이 신속하게 약화되었으며, 16세기 군사사의 핵심 축을 이루는 16세기 중반이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주둔한 Army of Flanders군과 네덜란드군을 통해서, 그리고 서유럽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으면서도 독특한 군사적 특성을 유지한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을 통해서 이러한 요인들을 관측할 수 있다.

전장에서의 개별적인 개인의 무예수준이 전투자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군을 비롯하여 중세에 이르기까지, 효과적인 전술단위와 전술운용을 보여준 로마군이나, 이보다 현격히 열위에 있었던 중세유럽의 군대에 이르기까지 개인무예는 군사적 능력을 성장시키는 중대한 수단으로서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와는 달리 보다 짧은 글라디우스와 방패로 무장한 로마 중장보병의 전투는 보다 격렬하고 피가 튀기는 전투의 양상을 구축했고, 그러한 유혈은 대열의 붕괴가 즉각적인 패배로 이어지는 그리스의 전투양상처럼 이수스, 아르벨라 전투가 승자가 겨우 200, 300의 소수의 피해에 불과했던 반면 완벽한 전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칸네회전의 한니발측의 피해가 5500명으로 전력의 10%를 상회한 것처럼 것처럼 1), 전투양상이 변화하는데 기여하였고 개인무예는 단위전술조직과 결합되거나 또는 비잔틴제국의 바랑기안 근위대처럼 화기가 본격적으로 전장을 지배하기 전까지 유효하게 운용되었다.

그러나, 화약이 전장에 본격적으로 접목되기 시작한 15세기부터 전투양상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 이전부터 개인무예보다는 전술적 수단, 조직으로서의 전투가 중세에서부터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장기적인 변화단계를 거쳐 16세기-17세기에 화약무기와 그러한 발전과 변화가 결합되면서 유럽 군사체계의 혁신적인 변화를 통해 동양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등 기존에 적어도 중세유럽보다 효과적인 군사체계를 보여준 문명권의 군사체계상의 열위가 도출되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무예가 전장에 끼치는 영향이 점차 소멸되어가는 과정은 "화약"이라는 소재가 공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과 서양간의 군사체계간의 격차가 생기게 되는 원인으로서 하나의 기준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1) 중세 유럽 군사사에서 시작되는 개인무예에 대한 위협


중세말 서유럽 전장의 특징은, 충격집단의 운용과 장궁-보병전술이라고 대변되어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세의 전장은 충격집단으로서의 "기사"와 보병들에 의해 전쟁이 수행되었다. 실제로 회전개념의 전투는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거점방어개념의 전략으로 통일된 중앙집권국가의 부재는 전장을 기나긴 공성전 및 유격전의 양상으로 형성되게 만들었다. 실제 전장은 100여명 이하의 소수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무수한 거점들과 100명에서 200명이 주둔한 소수의 거점과 극히 적은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도시들에 대한 공성전, 유격전개념으로 이루어졌으며 15세기에 와서야 이러한 전장양상이 일시적으로 전환되었다.

제한된 전투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세의 전술의 특징은 충격집단의 운용으로 대변되어질 수 있다. Phlippe Contamine은 그의 저서에서 중세군대의 전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대 대열은 3가지-기병, 하마기병, 보병-으로 분류되어질 수 있다. 첫번째 사례의 경우 기병들은 얇은 대열, 대체로 3에서 4열정도의 지속적인 대열을 구축하는데 1km넓이의 전장에 1500에서 2000명의 기병이 배치되게 된다. 이 그룹은 'Battle', 즉 주력부대로 구성된다. 이를 구성하는 전술조직은 Banners(bannieres)로서 이 조직은 가족단위, 혈연, 봉건주종관계를 토대로 구성되며 깃발이나 지휘관의 주위에 위치하거나, 동일한 함성(War-cry)에 의해 위치를 잡게 된다. 이들은 서로 간격을 좁혀서 대열을 이루며 이들사이에 사과나 자두하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조밀한 대열을 이루어 Guillaume Guart의 저서에 의하면 '랜스사이로 바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의 대열을 구축하며, 주력부대는 드물게 단일대형으로 충격을 가하지만, 대체로 대열의 부분마다 공격을 가하고, 오른쪽에서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대열의 부분들은 Echelle라고 불리는데 이후 Company 또는 Squadron이라 불리게 된다. 이러한 기병대열은 적에게 공격을 가하여 적을 위협하여 대열을 흐트리도록 만들고 부대대열을 돌파하여 붕괴시킨다" 2)

이것은 가장 전통적인 기병의 운용수단으로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14세기의 백년전쟁 이전에도 기병은 이러한 충격집단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마기병으로도 운용되었다. 1148년 신성로마황제 콘라트 3세는 그의 기사들을 하마시켜 싸우도록 지시했고 노르만 기사들은 1106년 Tinchebray전투와 1119년 Bremule전투, 1124년 Bourgtheroulde전투에서 하마하고 전투를 벌였다. 2) 하마전투는 백년전쟁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마한 기사들은 기율과 훈련면에서 이후 출현할 보병에 비해 약체였던 중세의 보병대에게 로마군에서 Centurion들이 한 등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마한 기사들은 기동성을 상실하여 기존의 충격집단으로서 또는 공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방어적인 전투에서 그들은 육체적인 힘과 전투기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병에게 강력한 사기진작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3)

중세 기사는 자신의 무예를 과시하는 처절한 전투와 랜스차지를 통한 살상, 그리고 대열속에서 검과 도끼, 철퇴를 휘두르는 토너먼트상의 이미지로 역사가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게 하였으나, 실제 전투속에서 중세기사에 대한 강조는, 물론 결정적 역할이기는 하였으나 과장되었다고 평가해야 적합하다. 1214년 Bouvines 전투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기병돌격은 분명히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나(역사가들은 결정적이란 애매한 표현을 즐긴다.)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전투 이전의 기동 및 통합적인 공세행동과정에 의한 것이었다. 3) 실제로 다수의 보병이 중세 기사들이 형성한 적 부대대열의 붕괴상황에서 이를 패주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에 투입되었다. 중세 기사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대열을 무너뜨리고 돌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무예로서가 아닌 집단대열으로서 구현된 것이었다.

중세말기의 중장기병은 기존과 동일한 정치적 위치에 서지는 않았지만 기사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빽빽한 대형을 구축하고 대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전투를 위한 기동을 실시했으며 기율을 흩트리는 행동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본격적인 돌격을 위한 Gallop은 50야드 이내에서 시작되었다. 중세 기병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대열을 파괴하는 능력에 의해서 구축된 것이었고 전장의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사시속의 야성적이고 개인으로서의 전사가 아니라 기율을 갖춘 전사로서 전술적으로 운용되는 전술단위로서 전투에 임했다. 3)

즉 중세기사를 우수한 개인무예의 소유자로서의 전사로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미 개인무예가 전장에서 끼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전사로서의 기사의 역할이 중요했던 중세유럽에서조차 비교적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은 장궁-보병전술과 파이크전술의 출현으로 인해 가속되기 시작한다.

장궁-보병전술이 최초로 출현한 시기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에드워드3세의 군사행동의 첫 성과였던 1332년의 Dupplin Moor 전투였다.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데이비드를 후원하는 측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Edward Balliol가 이끄는 영국궁 장궁병과 보병 및 하마기사들은 1314년 Bannockburn전투에서와 같이 스킬트론(스코틀랜드 저지대인들의 전통적인 창병집단운용형태)로 전위부대, 주력부대, 후위부대의 3개 대열로 접근해왔다. 영국군-Balliol군은 중앙에는 하마한 기사와 보병을 배치하고 이 대열 양측익에 영국 장궁병을 배치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중앙의 보병대열을 분쇄하기 위하여 전진해왔고 그들은 1302년 Coutrai 전투나 1304년 Mons-en-Pévèle전투의 플랑드르 창병보다 효과적이었고 공세적으로 운용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측익의 장궁병이 종심이 깊은 방진대형으로 전진하는 스코틀랜드 보병대의 측면에 사격을 가했고 측면의 대열은 점점 중앙쪽으로 쏠렸다. 중앙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야말로 움직임이 어려울정도로 밀집되었고 중앙의 영국-반란군측 보병과 하마기사들은 손쉽게 지나치게 밀집되고 지쳐버린 스코틀랜드 창병들을 물리쳐버렸다. 4) 창병운용 자체도, 중세의 기병이나 하마한 기사들에 대하여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궁-보병전술은 적어도 15세기의 Grandson이나 Morat전투에서 스위스군이 유사한 전술을 사용한 부르군디군을 격파할 때까지 분명히 유용함을 증명하였다.

이후 1333년 Halidon Hill전투에서 에드워드3세가 직접이끄는 전력이 이 전술의 유용성을 다시 증명하였다. 크레시 전투도 이런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갑주로 보호되지 않는 말에 탑승한 기병은 보병보다도 더 이러한 공세에 취약했다. 푸와티에 전투에 대해서 14세기 연대기 작가 Geoffrey the Baker는 영국 궁수들이 말의 다리부분을 향해 활을 쏘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4) 프랑스는 하마기사, Men at arms를 말에서 내리게 해 공세에 투입하는 방법을 도입하였으나 방어적인 전투에서 그들이 발휘한 위력과는 달리 기동력이 결여된 이 전력은 기다리고 있던 영국측 Men at arms들과 보병들에게 격퇴되었다.

장궁-보병전술은 부분적으로 개인무예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으나, 투사무기가 전장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고(그것이 실질적인 살상력의 결과는 아니었으나) 또한 전술적인 수준에서 적의 기동, 전투능력을 마비시키고 최종적으로 우월한 방어대형이 이를 격파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무예나 용맹보다 전술적인 운용에서 그 승리의 결과를 도출해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장궁-보병전술은 또하나의 측면에서 중요하다. 유럽 전쟁사에서 투사무기는 대체로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해왔다. BC 53년 Carrhae전투와 같이 파르티아 궁기병의 위력이 강조되는 전투에서조차 궁시자체는 로마군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는 수단이상으로 시현되지 못했고, 로마군의 방어진을 분쇄한 것은 궁시나 돌격이 아닌 자중지란이었다. 530년 다라전투에서도 로마군과 페르시아군 모두 궁시를 사용했으며 양자 모두 복합궁을 사용했으나 이것은 전투 전체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복합궁이 조기부터 사용된 제정시대와 후기의 로마군조차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나, 투사무기의 집중운용이란 개념이 영국에서 태동하여 이후 16세기초에 개인화기의 밀집운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란 것은 가정해볼만한 사항이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2



2) 중세 파이크 전술의 출현


야전상황에서 개인무예가 거의 배제된 집단전술로서 가장 전통적인 수단은 투사무기를 제외하는 경우 창병밀집대형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의 팔랑크스와 마케도니아의 사리사를 비롯하여, 동양에서도 신당서 23권에 장창대의 존재를, 구당서 199권에서는 고구려 북부욕살 고연수를 격파하는데 이적이 이끄는 장창보병이 큰 역할을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5) 진한시대 정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도'에서는 보병이 기병과 전차를 제압하는데 있어 장창과 쇠뇌를 언급하고 있다. 5) 한서(漢書) 49권의 조조(?錯)전에서는 흉노를 치려하는 한문제에게 “騎射에 뛰어난 강건한 흉노의 군사에 대하여, 漢軍은 평지에서 輕車나 돌격 기병으로 교란하면서 强弩나 長戟등 射程이 긴 무기로써 사용하며, 말에서 내려 지상에서 백병전으로 몰아가는 것이 유리합니다”라고 언급한바 있다.

보병의 장창밀집대형이 동서양에서 공히 사용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무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전술로서 유목민이나 봉건귀족과 같은 전사로서의 소양을 장기간 몸에 익히게 되는 이들과는 달리 농경민족의 보병대가 평시훈련을 최소화하더라도 가능케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창병밀집대형은 보병이 기병의 돌격으로 인해 대열이 붕괴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 정확히 말해 기병이 대열로 파고드는 것이 불가능하게 함으로서 농경민족이 평시 개인무예를 훈련치 않는 농민이 기병이나 보병에게 효과적으로 대응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각광받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대 서양에서 장창밀집대형을 활용했던 그리스나 마케도니아는 로마에게 패배했다. 로마군단은 짧은 글라디우스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장창이 글라디우스에게 취약하다는 결론으로 드러내어질 수는 없다. 로마군단은 그리스나 마케도니아가 가지지 못했던 전술조직과 우수한 기율과 용기를 지닌 마리우스의 노새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전면에서는 로마군을 쉽사리 압도했으나, 대체로 긴 횡대를 이루는 대형으로 인한 유연성과 기동성의 부족과 전술조직의 결여, 그리고 측후방에 대한 심리적 취약성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첨언하자면 피로스와 같은 수준의 리더십이 공존하는 경우 로마측이 패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후 그리스에는 그런 전술가적 자질이나,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없었다.) 또한 긴 횡대대형을 이룰만한 유효한 평원지대에서만 전투가 가능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장창밀집대형이 전면에서 아무리 위력을 자랑한다 해도 운용상 로마군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장창밀집대형은 유용성과 문제점을 공유하는 전술적 수단이었다. 실제로, 장창밀집대형은 일반적으로 개인무예와 전투력수준이 밀접하게 연관되는 여타 병종에 비하여 그 운용상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이는 전적으로 대규모 회전의 상황에서만 유용하며, 때문에 실제 전쟁에서 오히려 더 많은 사상자와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은 유격전, 공성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취약함을 나타내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창밀집대형에 관심을 지녀야 하는 것은 이것이 개인무예가 거의 배제된 전술운용의 수단이며, 또한 근대의 전술 및 군사체계의 변화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친바 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사에서 창은 보병에게도 매우 일반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장창밀집대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5세기 스위스군의 파이크대형이 한세기를 풍미하기 이전에 이미 장창밀집대형은 고대로부터 부활하게 된다. 그 위치는 스코틀랜드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출현하여 중세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저지대 스코틀랜드인들의 장창밀집대형의 전통은 꾸준히 이어진다. schiltron이라 불리는 이 대형은 방진, 횡대, 또는 원형등 다양하게 펼쳐진다고 하는데, 전방향에 대해 장창을 세워 저항하는 스위스 파이크대형의 Hedgehog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대형을 발명한 이는 13세기 스코틀랜드 저항군 지휘자 William wallace나 또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이룩해낸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브루스라고 일컬어진다.

최초사용 전투도 애매한데, 1294년 Stirling bridge 전투에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이에 대해 월레스는 이를 발명하지 않았고 Stirling bridge전투나, 1298년 Falkirk 전투에서도 사용한바 없고 발명자는 로버트 브루스이며, 1314년 Bannockburn전투가 최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당시 이미 저지대 스코틀랜드인의 장창밀집운용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스킬트론은 영국 중장기병을 격퇴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전투를 통해 입증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Falkirk 전투에서 웨일즈와 아일랜드의 궁병을 운용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에드워드 2세는 1314년 Bannockburn전투에서 기병을 중심으로 섯부른 공세를 감행하다 패배하게 된다.(Bannockburn전투를 섬세하게 관측하면 결코 중세 전투가 안이한 기병돌격의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드워드 2세는 일부 기병분견대로 스코틀랜드 주력부대의 후방(숲으로 보호되는)을 공격하려 했고 로버트 브루스는 스킬트론 일부를 파견해 이에 대응했다. 또한 스코틀랜드군은 공격전면을 축소시키기 위해 장애물도 운용했다. 7))

스코틀랜드와 유사한 시기에 플랑드르(벨기에 지방)에서도 장창밀집대형이 중세 중장기병의 우위를 위협하는 시도로서 실현되었다. 1302년 플랑드르 지방의 농민들은 프랑스 귀족인 플랑드르 백작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실지로 반란지도자들은 귀족출신이었다. 플랑드르측 병력 9000명중 대부분은 농민병이나 도시민병이었고 400명의 귀족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거의 전부가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은 Coutrai를 구원하기 위해 2500의 기사를 포함한 8000여 병력을 파견했다. 지리상의 이점을 지닌 위치에 포진한 플랑드르군은 장창과 철퇴, 도리깨로 무장하고 밀집대형을 이뤄 프랑스 기사들이 대열을 붕괴시키지 못하도록 방어대형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은 연이어 공격을 감행했으나, 보병도 기병도 성공하지 못했고 패배했다.

그러나 이미 Coutrai전투에서부터 플랑드르군의 한계가 드러났다. 플랑드르군은 전투도중 병력통제에 실패해 일부 전력이 공세를 감행하다 프랑스군의 반격을 맞이하여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1304년 Mons-en-Pévèle전투에서 이런 문제점이 다시 한번 나타났으나 플랑드르군은 붕괴의 위기를 넘겼다. 플랑드르군은 다시 밀집대형을 구성하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단려왕 필립 4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측면을 마차로 방호하는 플랑드르군의 방어대열에 신중하게 크로스보우로 무장한 유격대를 파견하고 측면으로 우회기동하여 마차로 방호되는 측면을 타격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필립 4세는 신중하게도 무리한 공격으로 Coutrai에서의 황금박차전투를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규모 전투가 없이 서로가 기다리며 지쳐갔다. 플랑드르군측의 문제는 심각했다. 그들은 후퇴할 공간이나 거점이 없었고 기동하는 순간 지리상의 이점은 포기해야했다. 결국 플랑드르군은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고 고대의 팔랑스처럼 거대한 횡대는 최선을 다해 대열을 유지하면서 텐트로 돌아가있던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감행했다. 실지로 훈련이 결여된 중세 보병에게 앞으로 전진하는 이러한 단순한 대열의 유지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들은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립4세는 승리하지도 못했지만 병력을 유지하면서 후퇴할 수 있었고 이 전투를 통해서 플랑드르군의 한계는 명백하게 드러났다. 3) 공세를 취하지 않으면 밀집창병대형은 적어도 그시점까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328년 Cassel전투에서 이러한 플랑드르군의 한계로 인해 프랑스군은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필립 6세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플랑드르 농민병과 교전하게 되었다. 플랑드르군은 언덕위에 방어대형을 구축했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방어대형에 공세를 취하지 않고 주변의 농장과 마을을 불태우는 것으로 일관했다. 3일간의 파괴행위에도 플랑드르군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플랑드르군의 방어진지에 대한 보급로를 차단했고 간단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프랑스 지휘관들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텐트로 돌아간 동안 플랑드르군은 방어대형을 포기하고 Mons-en-Pévèle전투에서 그랬듯이 공세행동에 돌입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기습의 이점으로 어느정도 돌파에 성공한 듯이 보였으나 프랑스군도 신속히 대응을 시작했고 보병으로서 기사들이 랜스와 방패를 들고 전투에 임했다. 프랑스군은 플랑드르군이 원래 위치했던 언덕위로의 퇴로를 열어놓았고 플랑드르군의 일부가 안전한 그곳으로 돌아가 방어대열을 구축할 수 있으리란 믿음에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손쉽게 대열사이로 파고들어 밀집대형을 붕괴시켰다. 플랑드르군의 40%가 괴멸되었고 프랑스군의 손실은 매우 적었다. 3)

창병밀집대형은 Dupplin moor전투나 Hallidon Hill전투의 스코틀랜드군이나, Cassel전투의 플랑드르군에서 보여지듯이, 공세행동을 감행할 경우 밀집대형의 대열을 유지하고 그 기동성과 충격력을 유지하는 면에 있어서 보다 적은 병력으로 보다 훈련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은 중세 기사집단에 비해 불리했다. 개개인의 잘못된 행동이 전체 대열의 전투력을 무너뜨리게 했고 결과적으로 집단전술의 효율성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문제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적 형태의 창병운용은 훨씬 효과적이었으나, 보급을 차단당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공세를 채택해야만 했다. 공세를 취하는 경우 창병대형은 취약함을 나타냈다. 기율이나 훈련이 결여된 대열은 기동력이 취약했고 기동과정에서 대열이 흐트러지기 쉬웠다. 스코틀랜드군의 경우, 당시 나타난 영국의 장궁-보병전술로 인하여 플랑드르군보다는 훨씬 유효한 창병의 공세적 밀집운용이 가능했음에도 패배했다.

이러한 한계는 스위스군의 등장으로 드디어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아리아리 마지막 부분이 상당히 재미 있네요. -일부러 퇴로를 열어 놓음으로서 조직의 붕괴를 유인 해넨 것-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3


3) 스위스 파이크 전술


스위스군은 도시 길드나 지방 자치공동체의 연방을 그 근간으로 하는 보병위주의 군사력을 통해서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위스군은 장창밀집대형의 선구자라고 하기 어렵다. 장창 중심의 병력을 구축한 것은 저지대 스코틀랜드인들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플랑드르인들의 경우는 장창외에도 고덴닥과 같은 둔기류를 비롯한 무기로 무장했다. 스위스군은 1422년 밀라노군과의 교전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주력병기로서 파이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1422년의 이 Arbedo전투는 스위스군이 본격적으로 파이크로 기병을 저지해낸 전투가 아니라, 오히려 밀라노군의 용병대장 Carmagnola가 중장기병을 하마시키고 그들의 랜스를 마치 파이크와 같이 활용하여 핼버드 위주로 무장한 스위스군에게 큰 타격을 가한 전투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1315년 모어가르텐과 1339년 뤼펜에서의 스위스군은 12에서 18피트의 자루, 12인치의 창날을 가진 파이크를 사용하였다. 8) 이것은 4미터에서 5.8미터에 달하는 길이로서 6, 7미터 수준의 파이크보다 짧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파이크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항이다. 정확히 말해서, 1422년의 Arbedo전투는 스위스군이 하마한 중장기병의 장창운용에 패배한 후, 핼버드 위주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위주로 전환되게 하는 전환기적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Arbedo 전투 이후의 스위스군의 병력구성비에서 여전히 스위스군은 파이크병보다 핼버디어의 비중이 높았다. 1443년의 취리히 canton군의 병종구성을 확인해 보면, 전체의 23%만이 파이크병이었던 반면 58%정도는 핼버드로 무장하고 있었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주력은 파이크병으로 전환되었다. 핼버드나 도검등으로 무장한 병력은 대열 외각에 배열된 파이크병대열 안쪽에 배치되거나, 전위, 주력부대, 후위로 구성된 병력에서 후위를 구성했다. 이들이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대부분 파이크병으로 구성된 대열이 적을 붕괴시켜 대열이 무너진 이후, 즉 확인사살을 하는 경우나, 또는 파이크병의 공세가 저지된 경우에 이를 지원하는 경우에 제한되었다.(이런 형태로 야전에서 신속하게 개인무기로서의 핼버드나 도검의 역할이 제한되면서 16세기 중반이후부터는 전체 병력비중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주 목적은 유격전, 공성전, 공병, 상징적 무기, 군기호위의 목적으로 전환되어간다.)

이러한 스위스군의 개혁은 1444년 St. Jakob an der Birs전투에서 프랑스 왕 루이11세가 되는 Dauphin이 이끄는 아르마냑군 3만과의 교전에서 그 성과를 드러냈다. 스위스 연방군의 1600여 병력은 18피트의 파이크로 무장하고 프랑스군의 중장기병에게 돌격하여 5시간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후퇴해야했다. 스위스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후퇴한 후 고립되어 괴멸되었으나, 아르마냑군의 피해는 4천에서 8천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스위스군은 플랑드르인들과는 달리, 방어적인 창병운용을 채택하지 않고 공세적으로 운용했다. 그들은 이후 1522년 Bicocca 전투까지, 방어가 아닌 공세적으로 적에게 전진하는 형태의 파이크운용을 지속하였다. 파이크밀집대형은 필요에 따라 hedgehog와 같이 방어에 이용될수도 있었으며, 석궁이나 장궁, 개인화기나 야포의 사격을 무시하고 적의 대열을 향해 높은 속도를 유지하면서 대열을 유지하여야만 했다. 이는 중세의 일반적인 보병의 수준으로 달성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로 인해 스위스군은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스위스군의 명성을 드높이게 된 것은 부르고뉴공 샤를과의 전쟁을 거치면서였다. 부르고뉴공 샤를의 군대는 15세기 중반,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군대중 하나였다. 최초로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야포를 전장에 도입하였으며, 다수의 영국장궁병을 포함한 군대를 보유하였고 군사체계를 혁신한 부르고뉴군을 연이어 격파함으로서 스위스군은 본격적으로 유럽을 떨어울리는 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476년 Grandson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을 패배시킨 스위스군은 같은 해, Morat에서 다시 부르고뉴군과 전투를 벌였다.

스위스군은 5000명의 파이크병과 석궁병, 핸드건으로 무장한 전위, 전방 4열을 파이크병으로 구성하고 중앙에 핼버디어가 위치한 10000명의 주력부대, 그리고 보다 소수의 핼버디어 위주로 구성된 후위부대로 나뉘어 전투에 임했다. 반면 부르고뉴군은 스위스군의 공세를 전면에서 버텨내야하는 중앙에 3천의 보병을, 그 양익에 영국 장궁병을 포함한 대규모 궁병을 배치했으며 그 좌측에는 포병진지를, 우익 끝에는 1200의 기병을 배치하였다. 2)

이미 이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은 야포와 석궁, 활을 집중운용함으로서 스위스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배치는 영국 장궁-보병전술과 유사한 면이 있다.(실제 이시점은 영국의 장궁-보병전술이 프랑스군의 야포운용을 통한 방어진지 포기유도로 인해 1450년 Formingly전투에서 분쇄된 이후였다.) 부르고뉴군은 야전축성을 통해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투사무기와 화기를 집중운용하였으나, 스위스군은 이를 극복하고 부르고뉴군을 붕괴시켰다.

유사한 상황, 아니, 오히려 부르고뉴군이 더 강력한 살상을 유도할 수 있고 공포를 전파할 수 있는 야포나, 개인화기, 석궁과 장궁을 집중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Hallidon Hill이나 Dupplin moor의 스코틀랜드군이나 푸와티에의 프랑스군과 달리 스위스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창병대열을 기동간에 유지하고, 공세적으로 운용하면서, 마치 충격집단으로서의 중장기병과 같이 적의 대열을 돌파, 붕괴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기동하면서 측후방 노출로 인한 위협에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팔랑스와 비교해 보면, 스위스군의 창병대형은 정방형에 가깝다. 1만명의 병력이 가로 60미터, 세로 60미터의 좁은 구획에 밀집되며, 종심의 깊이가 정면의 넓이와 일치한다. 이렇게 종심의 깊이를 깊게 하는 대형을 통해 파이크병은 17세기 총검으로 교체되기까지 측후방에 대한 기병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파이크병 위주에서 화승총과 머스켓과 같은 병종이 중심이 되면서 이러한 대형은 측후방에 대한 위협에는 효과적이지만 화력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단점이 드러났다. 10) ), 이러한 형태는 18세기 근대유럽군의 대기병 보병대형인 스퀘어대형으로 계승되게 된다.

스위스군의 우수성에 대하여 George Gush교수는 용기, 훈련, 잔인성을 들고 있다. 그는 스위스군이 대체로 마지막 한사람까지 싸우고, 또한 대열을 유지하면서 후퇴하거나 돌파를 감행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최초로 패닉상태에 빠진 이를 교수형에 처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훈련측면에서 간단한 방식의 훈련형태를 개별 병사들에게 병사위원회를 통해 완고한 고참병사들에 의해 전수되는 로마군과 유사한 개념이 적용되었고 또한 포로에 대해 극히 가혹한 학살을 감행함으로서 이를 극대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Bert S Hall은 그의 저서에서, 스위스군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스위스군은 지방공동체나 길드공동체에서 차출되고 많은 경우에 같은 가족이기도 했다. 파이크 훈련은 소년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실시된다. 이들은 형제 또는 이웃, 또는 단일사회계급으로 구성되고 병사들에게서 선임된 위원회가 이끌게 된다.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동료인 것이다. 파이크 대형은 기동간에 발생하는 투사무기, 측면에서의 공격등 모든 피해를 대열내의 개별 병사들이 무시해야 하고 대열을 흐트리거나 도주하게 되는 패닉현상을 저지해야 한다. 스위스군은 대열내에서 서로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지니는 대상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이들은 단체를 개인보다 우선해야 하며 자신의 생명보다도 대열을 유지하고 기율을 유지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3)

Jeremy Black은 그의 저서에서, 파이크란 무기 자체는 근본적으로 방어적으로 운용되는 특성을 지니며, 스위스군의 파이크 운용은 이러한 본질적인 운용형태와는 정반대의 특성을 지닌다고 언급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스위스군의 우수성은 파이크 운용자체보다는 무수한 피해를 감수하고 대열을 굳건히 유지하고 전진하는 용기와 기율의 측면이라는 것이다. 11)

이러한 측면에서 스위스군과 고대 그리스, 그리고 유사한 시기의 스코틀랜드와 플랑드르를 비교해 보면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스위스군은 정방형의 파이크대형을 기동력있게 전진시켜 적에게 공세를 가할 능력을 보유함으로서 전술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충격집단과 같은 전술로서 적의 대열을 분쇄하고, 또한 측후방에 대한 취약성을 제거함으로서 중장기병에게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고, 투사무기의 위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장창밀집운용은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파이크라는 무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스위스군이 그 이전부터 가졌던 동일사회계급, 동일 지역이라는 전장외적인 사회적, 인간적 관계가 16세기부터 태동하는 엄격한 군율을 통해 달성하는 군기라는 개념을 스위스군의 등뼈로서 제공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스와비안지역을 중심으로 징병되었던 란츠크네흐트를 비롯해, 이시대 다수의 용병들은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이후 등장하는 엄격한 군율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동시에 전장외에서의 인적, 사회적 관계를 통한 형제애를 통하여 이후 군법과 지휘체계가 제공하던 통제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후의 달성수단의 방향과는 다르지만, 스위스군은 효과적으로 전술단위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기율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것, 즉 개인이 전장에서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껴 집단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휘관들에게 알려주었다. 프랑스군이 스위스 용병들의 군사체계를 도입하고도 "동일한 원칙과 방법을 사용하지만 같은 용기는 지니지 못한" 이들로 혹평을 당한 것은 파이크의 밀집운용이라는 것 자체에 이러한 심리적 통제수단으로서의 무언가가 필요했고, 스위스 용병들은 형제애와 사회구조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심리적 기제를 통하여 목적을 달성했고, 이것이 결코 쉬운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보다 개인무예로서 숙련된 핼버드나 도검류와 같은 무기에서, 개인의 무예나 육체적 능력보다는 집단으로서의 원칙과 기율에 부합되도록 하는 집단전술로서 파이크밀집대형으로 전환해가는 스위스군의 등장과 영향은, 개인무예가 전장에서 그 유효성을 상실하게 하는데 개인화기에 앞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스위스군이 높게 평가되었던 것은 그들이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육체적인 강함이 아니라, 그들의 효과적인 집단전술을 위한 심리적 수단을 통한 "용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4



4) 16세기 영국과 아일랜드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서유럽의 군사적 변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상대적으로 16세기초부터 급속하게 일어난 서유럽 군사체계의 변화를 신속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국은 16세기 중반까지, 아일랜드는 16세기 말에야 본격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개인무예라는 차원에서는 동시기 서유럽, 특히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서 군사체계를 혁신하고 본격적인 중앙집권화와 상비군의 구축, 그리고 화승총과 파이크중심의 보병운용이라는 과정을 거치게된 스페인과, 그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교전을 벌인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에 비하여 서유럽이 집단전술위주로 전술이 전환되어진 것과는 달리, 개인무예의 필요성, 그리고 활용성을 여전히 유지하는 형태와, 기존의 전통적인 전술이 장기간 고수되었다.

이러한 정체는 British isles, 즉 영국제도가 유럽대륙과 바다로 인해 이격되어 있다는 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지만, 그 외에도 각 국가가 독특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적 효용성은 군사체계를 혁신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 전체를 설명해줄수는 없다. 미래학자 토인비는 그의 저서 "War and civilization"에서 역사상 팽창국가를 가능케한 군사체계가 승리 이후 패배를 경험하지 않은 경우 기존 군사조직에 대한 추종을 불러와 화석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바다로 인해 외부의 위협이 제한되었던 것도 이와 관련되어있을 수 있다.

영국의 경우, 16세기는 튜더왕조의 시기였다. 헨리8세는 부친 헨리7세가 기초한 영국 절대왕정을 확고히 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영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정복욕을 불태운 사람이라 일컬을 만 한 인물로서, 프랑스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던 그의 이후부터, 영국은 백년전쟁과 헨리8세의 치세동안 보여준 영토확장적 태도를 전환, 종교적, 전략적 사유에서 대륙에 강력한 헤게모니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본격적인 이러한 태도는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확고히 형성되게 되며, 합스부르크의 헤게모니 제어를 위한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위그노에 대한 지원으로 시현되게 된다.

영국은 육군체계는 굉장히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마키아벨리가 그의 이상적 군대로서 추천한 바 있고(실제 그가 모델로 삼은 로마군이 전술적으로 완성된 것은 민병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때라고 봐야하겠지만), 실제 피렌체에서 그의 조언에 따라 피렌체공화국이 구축한 5천규모의 민병대와 유사하게, 영국은 자영농과 도시민등 자유민계층을 중심으로한 민병체계를 군사체제의 핵심으로 두고 있었다.

영국은 1285년 제정된 윈체스터 성문법에서부터 오랜 민병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의 에드워드 3세의 승리와 백년전쟁에서의 승리를 달성해낸 기간 역시 장궁으로 무장한 민병에 있었다. 1285년 에드워드 1세는 윈체스터성문법을 통해서 활과 화살을 보유할 여유가 있는 모든 이는 활과 화살을 보유, 유지해야 한다고 공포했다. 에드워드 3세나 그의 후계자인 리처드2세 역시도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평시에 훈련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러한 오랜 민병의 전통으로 인해 헨리8세 치하의 영국은 민병중심의 육군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1511년 헨리8세는 윈체스터 성문법령을 강화할 것을 선포했으며, 그는 그의 군벌귀족들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사력은 전적으로 지방커뮤니티에 의존되어 있었다. 16세에서 60세 이내의 모든 자유민 남성은 민병으로 복무할 의무가 있었고 통계에 의하면 30여개의 카운티에서 128250명의 병력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12) 영국은 이러한 병력을 방어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백년전쟁에서와 같이 헨리8세의 프랑스원정에도 동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민병의 무장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부담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민병소집은 무장의 형태, 훈련수준과는 별개로 이루어졌다.

16세기초에서 중반까지 영국민병은 장궁과 빌(bill)로 무장했다. 이전에 하마한 중장기병이 담당했던 보병의 역할은 이제 빌로 무장한 민병으로 대체되었고 영국 보병대의 중핵을 이루었다.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오기 이전까지 영국군의 이러한 무장형태는 근본적인 변화를 나타내지 못하는데, 이는 프랑스나 스페인이 용병을 보병의 중핵으로 삼은 것과는 달리 자유민 민병을 군사력의 중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1513년 헨리8세시대의 Flodden전투와, 에드워드 6세 당시 서머셋공이 이끈 영국군이 치른 1547년의 Pinkie전투에서 잘 드러난다. 양전투 모두 이미 이 시대의 서유럽군이 파이크와 화승총이라는 무기로 신속히 전환되게된 이탈리아전쟁의 영향 이후의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영국군 보병은 거의 전적으로 장궁과 빌로 무장한 병력이 중핵을 이루었다. 헨리8세 치하에서 파이크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1544년 프랑스원정당시의 1400명의 란츠크네흐트 파이크병이 포함된 8000명의 외국인 용병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10) 에드워드 6세시대의 스코틀랜드 원정기간에서도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스페인, 이탈리아 용병으로, 대부분이 기병이었다.

이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적어도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성공적인 전투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1513년 Flodden에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이끄는 30000정도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군은 Surrey 백작 토마스 하워드가 이끄는 15000정도의 병력과 전투를 벌였다. 12) 스코틀랜드군은 다수의 야포를 배치하고 전통적인 장창위주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고지대 스코틀랜드인(하이랜더)들이 우익에 배치되었으며 스코틀랜드군은 먼저 전투위치를 확보하여 고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Borderer로 구성된 기병과 빌과 장궁으로 무장한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실제로 포병전력에서 우위에 있었고, 적어도 이시점에서 헨리8세의 주조소보다 제임스 4세의 주조소가 더 크고, 긴 포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0) 스코틀랜드 군은 당시 제임스 4세가 그의 동맹인 루이12세가 보내준 40명의 프랑스 장교들에 의해 스위스/독일식의 파이크훈련을 받았다. 실지로 스코틀랜드군은 고지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점을 포기하고 공세적인 작전행동을 감행했다.(그러나, 이 견해에 대하여 스코틀랜드군이 야포수에선 우수했으나 포병의 숙련도가 낮아 오히려 영국측 포병사격에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제임스 4세가 대응한 결과였다고 보기도 한다.)

영국군은 병력을 2개단위로 나누고 좌익주력부대는 Surrey 백작이, 우익은 그의 아들인 함대사령장관인 토마스가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5개 종대로 구성되어 언덕아래쪽으로 공세를 감행했다. 기병교전으로 전투가 시작되어 좌익부터 보병의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영국군 주력인 좌익이 대열을 갖추기 전에 우익을 격파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전방횡대가 좁고, 측면이 긴형태의 대열로 전진했다. 전투는 4단계 행동으로 이어졌는데, 첫째는 스코틀랜드군이, 나머지 셋은 영국군이 주도하였다. 10)

영국군 우익에 대한 최초 격돌은 스코틀랜드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전면적인 붕괴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시간적 여유동안 Surrey 백작은 신속하게 Dacre경이 지휘하는 주력부대 우익의 Borderer(국경방어를 담당하는 경기병집단)에서 분견대를 차출해 아들이 지휘하는 우익군의 노출된 측방을 엄호하도록 했다. 스코틀랜드는 추가병력을 투입해 우익군에게 공세를 감행했다. 스코틀랜드군 중앙의 제임스 4세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영국군 포병의 공격으로 인해 Surrey백작의 주력부대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영국 장궁병이 사격을 실시하였으나 스코틀랜드군은 갑주로 잘 무장하여(대체로 파이크병운용시 전방대열에 갑주착용을 실시했다.)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은 의외의 산등성이와 늪지대를 거치면서 충격력을 상실하였다. 영국 좌익군의 우측 병력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스코틀랜드의 우익 고지인(하이랜더)병력을 향해 언덕을 올라가 격퇴시켰고 고지인들은 도주했다. 치열한 전투끝에, 스코틀랜드군은 최초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Surrey백작의 장남이 이끄는 영국군 우익이 후방과 측방에 공격을 가해 결국 무너져내렸다.

Flodden 전투는 Bill과 장궁으로 무장한 영국군이 오히려 더 선구적인 무장과 집단전술을 갖춘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사례이다. 영국군은 이전의 장궁집단전술의 이점을 향유하지는 못했으나, 스코틀랜드군의 야포운용의 미숙, 그리고 유리한 고지의 포기, 그리고 기동로상의 장애물이라는 적의 오류를 통해서 초기 집단전술상의 이점을 향유한 스코틀랜드군을 기병분견대운용과 측후방에 대한 타격을 통해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이 스위스군의 파이크전술을 도입했으나, 과연 스위스군에 비견할 만한 용기나 기율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영국군의 교전환경에 있어서 서유럽에 비하여 파이크전술을 수행하는데 비하여 기존의 전통적 전술이 유효한 이점이 있다는 것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1547년 Pinkie 전투에서도 영국군 보병은 대다수가 Bill과 장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서머셋 공작이 이끄는 18000에서 16000명의 영국군은 24000에서 31000으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군과 Musselburgh에서 마주쳤다. 영국군 우측에는 늪지대가, 좌측에는 바다가 위치해 있었다. 영국군은 4000명의 맨엣암즈와 데미랜스(보다 경장이지만 갑주로 무장한 창기병), 그리고 2000명의 경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에는 스페인 출신 지휘관 Pedro de Gamboa가 지휘하는 200여명의 이탈리아인 마상 화승총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스코틀랜드군의 기병은 800에서 1500정도로 영국군에 비해 취약했고 저지대 파이크병외에 Flodden전투와 같이 고지대인들과 섬에서온 경장보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기병들은 전투전날 영국기병대와 교전을 벌이다 참패함으로서 심각한 타격을 입어 전투에서 별다른 활약을 할수 없었다.

서머셋공작은 자신이 포병전력이 충분하고 바다에는 영국함대가 포격지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이 방어적인 전투를 감행하지 못하리라고 예상했다. 스코틀랜드군은 3개 파이크대형(전위, 주력, 후위=실지로는 전위는 우익, 주력은 중앙, 후위는 좌익을 구성했다.)로 나누어 전진을 시작했다. 전체대열의 우익에는 서부 하이랜더들을, 좌익에는 섬에서 온 병력으로 측방을 방호했다. 신속한 기습으로 인하여 스코틀랜드군은 영국군이 완전히 준비를 갖추기전에 전진을 시작했고 유리한 언덕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이전에 고지로 진격해나가는 시간싸움이 되었다. 전진하면서 해안지대에서 영국함대의 포격을 받자 하이랜더들은 즉시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주해버렸고 우익의 스코틀랜드 파이크대형이 중앙으로 쏠리면서 주력부대와 전위부대는 단일한 파이크대형으로 통합되었다. 혼란이 발생했지만 전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머셋공작은 이 돌진을 저지하고 보병과 포병이 대열을 갖추고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는 1600기의 맨엣암즈(당시 마갑을 캠프에 두고왔기 때문에 말에는 마갑이 장착되지 않은)와, 1800기의 데미랜스를 투입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이들의 공세는 스코틀랜드 파이크대형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수차례의 돌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기병대는 Gamboa의 마상화승총병의 엄호하에 후퇴했고 영국군 보병과 포병은 이러한 기병의 저지로 인해 진지에 배치될 여유를 얻었다.

접근해온 스코틀랜드 파이크밀집대형을 향해 마상화승총병들의 사격과 영국군 측방에 위치한 장궁병들의 사격이 쏟아졌다. 최악의 사태는 영국군 포병들이 근접거리에서 밀집대형을 향해 일제히 산탄사격을 감행하면서 벌어졌다. 이러한 타격으로 인해 파이크대형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후퇴했던 영국군 기병들이 재집결을 완료한후 돌격을 시작하자, 완전히 붕괴되었다.

Pinkie전투는 Flodden전투에 비하여 Bill로 무장한 전력이 파이크로 무장한 전력에게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Flodden전투 역시 그러한 도식을 제시해주는 충분한 근거일수는 없다. 단지 이 양 전투는 영국군이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병종구성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운용에 따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1549년의 Robert Kett의 반란과정에서 Pinkie전투에서 활약한 Pedro de Gaboa의 용병들이나 Conrad Pennick휘하의 란츠크네흐트들은 전통적인 민병대로 구성된 반란군을 괴멸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대륙의 병종들은 John Smith경의 저서에 따르면 반란과정에서 반란군의 궁병들이 화승총병에 대해 영국지형에서 매우 유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8세는 신성로마황제에게 2만크라운으로 스코틀랜드공격을 위한 1천명의 스페인 화승총병을 요청하거나 12),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그의 왕립군수공장에서 장궁의 두배나 되는 화승총이 생산되고 있는등, 영국의 지배자들이 서유럽의 군사적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지속적 노력이 감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의 요구는 16세기 중반을 넘어서야 영국의 전통적인 민병시스템은 새로운 변화에 발맞추어 1573년 Trained band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민병시스템은 부유한 런던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미 1559년 런던에서는 800명의 파이크병과 200명의 핼버디어, 그리고 400명의 개인화기로 무장한 병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0)

이전의 민병시스템에서 영국군은 상비군의 성격이 없는 자유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에게 대열과 제식훈련, 기율이 필요한 파이크대형, 그리고 여기에 접목된 화승총병의 운용을 접목시키기 어려웠으며, 또한 이들은 용병이 아니었기에, 개인이 평시에 무기를 구매, 유지, 관리해야하는 민병대에게 있어서 평상시 사용이 가능한 Bill과 같은 폴암류나 장궁에 비해, 평시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파이크와 같은 무기는 적합하지 않았다. 때문에 영국군은 집단전술보다는 백병전에 있어 주로 Bill로 무장한 개별전사들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구조를 지녀야 했다.

이러한 경우, 평상시 조선과 유사하게, 평상시 전쟁과 무관한 지역과, 유사시 징집가능성이 높은 지역의 군사적 역량의 차이는 높아지게 된다. 영국의 경우 Flodden전투에서 우익군을 구성한 것은 Lancashire와 Cheshire지방의 민병이었는데, 이와같이 스코틀랜드 지방에 대한 작전에 징병되는 병력이 특정지방일 경우 Kent나 Cornwall지방과 같이 남부에 위치한 경우 전력이 약체화될 수 있다. 즉 군사적 긴장상황에 있는 지역의 민병은 타국가의 용병이나 상비군과 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반면에 그렇지 않은 지역의 민병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다. 송대의 민병이 오히려 중앙군인 금군보다 막강했다는 아이러니함은 이러한 영향을 대변하는 요소일 것이다.

서유럽의 무기체계, 전술상의 변화를 도입하고, 민병에게 개인단위의 자발적인 훈련에서 집단전술로의 이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일정수준의 정기적 훈련과, 장비의 구입, 관리, 유지의 강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민병시스템으로는 이러한 형태로 민병대를 유지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Trained Band의 민병시스템은 기존의 민병체제의 전통을 살리면서, 동시에 민병을 서유럽 군사체제에 접목시키기 위한 변화를 필요로 하였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2. Mark Charles Fissel, routledge "English Warfare 1511-1624"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5
(전챕터에 이어서)


Mark Fissel은 기존의 민병체제가 Trained Band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요인으로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요인은 민병체제를 위한 기반이 농민병으로서의 시골지역보다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도시와 마을들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12) 헨리8세의 치세에는 시골의 주택이나 농장들마다 Bill이나 장궁을 보유하고 있었다. 13) 이는 무기를 보유유지하는 개인으로서의 다수의 자영농에 영국군이 병력자원을 의존하고 있던 현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Trained Band는 근대화된 개인화기와 파이크로 무장한 병력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무장은 기존의 개인이 구매하고 유지하고 훈련하는데 장애가 있었다. 이러한 무기를 구매하고 훈련을 위한 병력자원을 차출하고 훈련비용과 일부 급여를 제공하는 의무가 경제적으로 성장한 도시와 마을에 부여되었던 것이다. 또한 Bert S Hall에 의하면 이 시기에 신대륙에서의 은의 유입으로 인해 인플레현상이 일어나고,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감소되었던 인구가 급성장한 결과, 노동력의 임금수준이 낮아졌다고 한다. 3) 이러한 과정에서 도시와 마을은 사회하류층들에게 Trained Band를 위한 병역의무를 강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해당하는 도시와 마을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보유무장의 수준이나 병력규모는 천차만별이었다.

둘째요인은 일반적인 병기가 아닌 특별한 병기(개인적 해석이라면 핼버드나 빌과 같은 폴암류나 장궁은 평상시 호신 및 사냥의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인 반면 파이크나 화승총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다만 화승총의 경우 중세유럽의 단궁이 사냥도구로서 많이 퍼져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용되어지는 전통이 있었다.)를 사용하는 엘리트 병사의 육성이다. 12) 기존의 민병이 평상시 보유하고 연습하던 무기로서 장궁이나 폴암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 지배층이 필요로했던 근대적인 대륙 군사체계를 위해서는 평상시는 거의 아무런 쓸모도 없는 파이크나 화승총을 일정대열을 갖추고 훈련받아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전의 민병시스템이 무기에 따른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차별된다.

셋째요인은 과거 징병대상이 16세에서 60세라는 광범위한 대상이었던 반면, 징병대상연령이 18세에서 25세로 좁혀졌다. 이는 새로운 근대적 군사체계를 위한 훈련이 용이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12)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의 Trained Band의 근대적 무장, 즉 파이크와 화승총과 같은 개인보유무장이 아닌 병기들은 지방의 길드공동체 또는 도시공동체가 구매하여 지급하고 관리해야 했다. 이러한 무장들은 자택에 보관하는 장궁이나 Bill과는 달리 교회나 별도의 건물에 통합보관되었으며 훈련기간에 개인에게 지급되었다. 다수의 비무장인들이 민병조직에 포함되었는데 장궁이나 Bill이 Trained Band의 중대 정규무장에 비포함된 16세기 말에도 여전히 이런 무장이 "Unarmed man"에 의해 들려졌으리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지방공동체는 무기구입 및 소정의 임금을 지급하는 의무를, 국가는 전투를 위한 화약 및 병참물자를 제공하고 면세혜택을 부여하였다. 병사들에게는 채권자에 대한 보호도 약속되곤 했다. 12)

이로서, 백병전을 Bill위주로 무장하던 영국군은 본격적으로 파이크와 개인화기 위주의 전술단위로 변화하면서 집단전술 위주의 전투형태로 전환되어지게 된다. 규정대로라면 영국군 1개 중대는 150명으로 이루어지는데 45명의 파이크병, 30명의 머스켓병, 75명의 Caliver(아큐버스)병으로 구성되었다. 12)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1573년이라는 시점의 혁신이라기보다는 점진적 전개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존의 민병구조가 혁신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렸다. 또한 실제로 규정된 완편편제를 구축, 유지하는 보병중대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더 적은 병력을 보유했고 더 많다고 속여서 더 많은 돈을 지휘관이 갈취했다.(이것은 당시 서유럽 대부분의 군대에서 비전투손실과 탈영, 지휘관의 부패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영국군에도 여전히 핼버드나 Bill로 무장한 병력이 포함되었고, 또한 투핸디드소드로 무장한 병력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전술이라기보다 개인무예적 성격을 지니는 무기들이 전술적 효용성이 있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1598년 "The Theorike and Practike of Moderne Warres"를 쓴 Robert Barret은 파이크방진내에 폴암류를 배치할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폴암류로 무장한 병력은 파이크방진이 붕괴된 이후에나 쓸모가 있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저자들이 남긴 책에서는 핼버드나 빌과 같은 폴암류무기가 군기수나 군악대를 보호하는데 쓸모가 있다고 평가했다. 10)

영국군 중대에는 오랜 기간 Whiffler라는 투핸디드 소드로 무장한 하급장교가 배치되었다. 런던 민병대에 배치된 이들의 직무는 군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하사관들이 이들의 직무를 대체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으며 사령관의 종자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590년에 마지막으로 이들에 대한 언급이 존재하는데 극히 소수의 투핸디드소드가 기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10)

16세기 후반이 되면서 핼버드는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보다는 부사관의 상징적무기로 전환되었고, Bill의 비중은 신속하게 줄어들었으나 장기간 유지되었다. Bill이 장기간 유지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이유로서 런던과 같이 부유한 도시는 Bill의 비중이 적었던 반면 가난하거나 도시가 적은 Shire의 경우 Bill로 무장한 병력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Bill은 기존의 민병들이 가택에 유지했던 병기이면서 동시에 강철제가 아니거나 극히 적은 강철이 섞인 열악한 품질이었고 George Carew경은 Bill따위는 농부들에게 팔아버리는게 최선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영국군의 전투형태는 개인무예의 영향이 큰 무기에서 집단전술과 대형위주의 훈련이 강조되는 대륙형 군사체제로 개편되어갔다. 소수의 도검류나 폴암류는 상징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야전 전투력에서 배제되었고, 이로 인하여 기존의 전통에서 영국은 본격적으로 대륙의 전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영국은 독특한 병과를 부분적으로 유지하게 되는데, 1600년의 영국 중대의 편성사례를 보면 20명의 파이크병과 10명의 핼버디어, 6명의 Sword and Buckler병, 24명의 머스켓병과 40명의 Caliver병이다.

Sword and Buckler는 나무, 또는 금속제의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영국군은 아일랜드 반란군과의 교전과정에서 그들의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과 검과 방패로 무장한 Targetier를 혼성편재하였다. 1593년 Erne Ford전투에서 영국군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과 Targetier를 활용하였다. 12) 아일랜드의 다수의 소택지와 작은 하천과 삼림지대에 매복병을 배치하거나 야전축성으로 저항하는 반란군에 대응하기 위해서 파이크대형보다 지형에 대한 유연성이 우수한 도검병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전투에서도 병력구성은 파이크병과 화승총병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실제 Sword and buckler로 무장한 병력의 야전에서의 운용은 유격전, 정찰에서나 유용할수 있었다. 그들의 진정한 활용의 여지는 무엇보다도 공성전에서의 돌격이나 유격전이었지 야전에서는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를 포함한 다수의 인문주의자들이 로마군의 재현을 위해 갑주와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의 유용성을 주장했지만 실제 검과 방패는 "병사"들의 무기로서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중후반동안 네덜란드전쟁에 참여했으며 " A brief discourse of war "의 저자인 Roger Willams는 방탄성능을 달성할 정도로 방패를 제작하는 경우에 무거워서 1시간 이상 들고 있을 수 없었다고 언급한바 있다. 10) 또한 도검으로 무장한 병력은 파이크대형에 비해 기병에 취약했고 이시대에는 여전히 기병을 배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영국군 중대병력중 검과 방패로 무장한 것은 "병사"가 아닌 장교였다. 영국군의 중대지휘관인 Captain(대위라고 번역하나 중대지휘관이 적합)이나 부지휘관인 Lieutenant(중위라고 할 수 있으나 부중대장이 적합)들은 각각 상징적인 무기로 폴암류인 파르티잔이나 하프파이크등으로 무장했으나, 그들의 target(방패)를(때때로 그의 파르티잔이나 투구까지) 종자와 같은 소년들에게 들고 다니게했고 전투중에는 방패와 검으로 무장하는 것을 선호했다. 검과 방패는 중세시대부터 대체로 귀족의 무기였고(예외도 존재한다. 중세 스페인 민병이나 이탈리아 보병중에는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존재했다.) 이시대에서는 발달한 스포츠로서 펜싱스쿨이 다수 만들어지고 귀족소양의 일환으로서 성장했으나, 적어도 병사들의 무기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아일랜드는 16세기 말까지 서유럽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영국도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늦게 육군의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일랜드 반란군이 기승을 올렸던 16세기 중후반에는 파이크와 화승총 위주의 병력구조가 정착되어갔다. 아일랜드군의 주력을 구성했던 것은 아일랜드 귀족들과 초기 영국인 개척자들인 앵글로-아일랜드 귀족들에게 고용된 스코틀랜드 서부해안 출신의 Galloglass들이었다. 10) 이들은 투구와 체인메일로 중무장했으며(이점이 스코틀랜드 고지대인이나 저지대인들이 보이는 특성과 구별되나 고지인들중 높은 계급의 경우 이와 유사한 무장을 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로커버액스와는 다르지만 Galloglass Axe라는 대형도끼와 투핸디드소드등으로 중무장한 이들은 서유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활약한 개인무예적 병종이라 할 만 하다. 이들은 초기 아일랜드 반란군 백병전력의 핵심이었으며 13세기부터 거대한 체구와 힘, 그리고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들의 취약성은 당장 드러났다. 16세기 아일랜드 의회의장이자 아일랜드 역사가였던 Richard Stanihurst은 이들이 기병에게도, 그리고 파이크로 무장한 병력에게도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평가했다. 10) 아일랜드 반란군은 평지에서 영국군에게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신속하게 인식했고 15세기 말에 최초로 등장하고 16세기 중반에는 일반화된 화승총으로 경무장 보병인 Kern들을 무장시켜 게릴라전으로 대응했다. 야전축성이나 매복의 도움을 받은 아일랜드 반란군들은 게릴라전으로 끊임없이 영국군을 괴롭혔으나, 영국군이 신중하게 정찰을 감행하고 취약한 병참능력을 가진 아일랜드군을 겨울에 작전함으로서 압박해나감으로서 이러한 게릴라전의 역량은 취약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 귀족이며, 한때 영국군과 함께 아일랜드 반란군과 싸웠던 티론백작 Hugh O Neill이 반란에 참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티론백작은 기존의 Galloglass들과 스코틀랜드 용병들을 파이크병으로 훈련시켰고 영국과 전쟁중이던 스페인의 장교들에게 훈련받게했다. 티론백작은 1598년 Yellow Ford전투에서 그의 파이크병을 공세적으로 운용해 영국군을 야전에서 패배시킴으로서 아일랜드군이 집단전술을 도입해서 영국군과 야전에서 상대할 수 있음을 입증시켰다. 그는 1601년 Kinsale에서 패배함으로서 반란은 종결되지만, 서유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개인무예위주의 백병전력을 유지하던 아일랜드에서 집단전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승리를 거둔 것을 통해서, 어떻게, 그리고 왜 유럽 군사사에서 개인무예가 전장에서 소멸되어갔는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례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2. Mark Charles Fissel, routledge "English Warfare 1511-1624"
13. Sir Charles Oman, "A HISTORY OF THE ART OF WAR IN THE SIXTEENTH CENTURY" 288 page(William S. Fields와 David T. Hardy의 글에서 재인용)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6



5) 16세기 스페인 플랑드르 주둔군 / 네덜란드군


16세기 초 이탈리아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교황, 신성로마제국과 영국,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유럽 군사체계의 혁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중 하나다. 1494년부터 1559년간의 이 전쟁과정에서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발루아가문간의 분쟁에 개입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게 됨으로서 초기 아라곤왕국의 시실리를 비롯한 이탈리아지역의 부분적 영유권으로 시작되었던 스페인의 군사적 진출은 합스부르크가문이 스페인의 왕위를 확보하면서 다시 부르고뉴공국의 영토인 플랑드르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함으로서 다시 이탈리아 전쟁과정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스페인군의 절정기를 달성케 하는 플랑드르 주둔군과, 이에 대적하여 네덜란드 독립을 위해 다시 한번의 군사적 혁신을 가능케한 네덜란드군이 활약하게 되는, 80년 전쟁, 즉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실지로, 개인무예가 집단전술로 전환되는 측면에서 가장 가시적인 것은 스페인군의 16세기 초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변화이다. 레콩퀴스타를 종결지은 그라나다 전쟁의 명장 Gonsalvo de Cordova는 1495년 스페인 연합왕국의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보장받기 위하여 프랑스군에 대적하여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Oman의 저서에 의하면, 그의 휘하에는 500명의 Ginetes(투창으로 무장한 경무장 기병)과 100명의 중장기병, 그리고 극히 소수의 화승총병과 다수의 석궁병, 그리고 대다수가 아라곤출신의 검과 방패로 무장한 도검병으로 구성된 15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1496년 Seminara에서 페르디난드 왕과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나폴리 민병들은 프랑스군 지휘관인 스코틀랜드인 D'Aubigny가 이끄는 프랑스 중장기병과 스위스 파이크병과 전투를 벌였다.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수적우위를 믿고 전투를 원했던 페르디난드에 비해서 자신이 보유한 병력이 프랑스군에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Ginetes는 무어인들과의 전투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프랑스 중장기병의 돌격에 대응할 능력이 없었고, 그의 직속 보병대는 검과 방패만으로 무장했고 수도 다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위스 파이크병에 대적할 수 없다고 보았다. 더욱이 그는 그의 휘하에 포함된 6000명의 이탈리아 민병대에 어떤 신뢰도 주지 않았다. 결과는 그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프랑스 중장기병을 저지하지 못한 스페인 경기병대는 스페인에서 했듯이 일시적으로 물러서 교전을 회피하고자했고 이 행동에 공포에 질린 이탈리아 민병대는 무너져버렸다. 그의 보병들은 스위스군의 파이크대형을 저지할 수 없었다. 14)

이탈리아 전쟁을 치르기 이전의 스페인 보병대는 민병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은 그라나다 전쟁을 거치면서 귀족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레콩퀴스타를 위한 대규모 병력의 필요성과 대포주조등 중앙권력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왕권이 강화되었고 레콩퀴스타를 위한 거점과 병력자원을 조달하기 위해서 세금 및 자유를 보장하고 남부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과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도시나 마을공동체, 의회를 활용하였다. 그라나다 전쟁기간에 1487년에는 45000명의 보병과 11000명의 경기병이 동원될 수 있었다. 3) 그러나, 그라나다 전쟁은 대규모 야전보다는 무어인 기병의 기습을 야전축성진지를 통해 방어하고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형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병, 보병전력은 경무장했고 개별적으로는 강건하고 우수한 체력과 전투경험을 지녔지만, 야전전투에서 필요한 엄격한 규율과 대열유지능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곤잘로 데 코르도바는 Seminara에서의 패배이후 그가 익숙한 게릴라전으로 적을 끌어들였고 이탈리아 남부 Calabria지역의 산악지대에서 스위스 파이크병과의 정면교전을 철저히 회피하면서 그의 경장기병과 경보병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이후 그는 그의 병력을 재편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 전쟁과정과 전투사례들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본인이 쓴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의 3번챕터 첫번째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http://blog.naver.com/laguel/60018649281)

초기 곤잘로 데 코르도바의 병력편제 형태는 기존의 경무장 보병을 개혁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개인의 체력의 강건성이나 개인무예수준에 크게 영향을 받는 기존의 검과 방패로 무장한 Rondeleros가 대다수였던 보병의 병종구성은 파이크와 화승총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1505년 1000명에서 1500명으로 구성된 Colunelas편제에서 20%까지 감소하게 된다. 이탈리아 전쟁동안 Rondeleros는 단 두번의 전투로 16세기 동안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찬양받게 되는데, 특히 마키아벨리의 영향이 컸다. 1503년 Seminara근교에서 다시 일어난 곤잘로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보낸 일부 전력과 곤잘로를 패배시킨 D'Aubigny 휘하 전력과의 교전에서의 승리와 1512년 Ravenna전투에서 스페인 도검병의 분전을 근거로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군을 재현한 병종이 가장 이상적인 군대라고 판단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전술론"에서 이상적인 군대의 구성을 10개 코호트로 구성되는 1개 로마군단을 모델로 하여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는 "Battalion"을 10개 중대로 나누고, 10개 중대는 450명으로 구성되며 중대병력 450명중 50명이 경장병으로 화승총이나 석궁, 핼버드, 방패등으로 무장하고, 300명은 검과 방패와 갑주로 무장하며, 100명은 파이크병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15)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견해는 개인무예위주의 전투형태가 집단전술로 이전되는 과정과 얼마나 괴리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견해를 떠나서, 그는 중대병력의 9분의 1, 그것도 그중 일부만을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구성함으로서 당시의 전투형태의 변화와 완전히 괴리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군사체계에 대하여 복고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고대의 재현만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 인문주의자들이 현실속에서 발전해나가고 있는 군사체계의 현상을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 재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는 1422년 Arbedo전투에서 용병대장 Carmagnola가 밀라노 기병대를 하마시켜 랜스를 파이크처럼 사용하여 핼버드로 무장한 스위스군을 격파한 것에 대하여 승리의 원인을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스위스군이 대적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그의 견해와는 달리, 스위스군은 이 전투에서 파이크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전면적으로 전술형태를 바꾸게 된다.

그는 1503년 케리그놀라에서 유럽 군사사상 최초로 개인화기의 야전에서의 밀집운용이라는 기념비적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 이후 Seminara에서 일어난 전투(이 전투에서 패배한 D'Aubigny군은 1496년 Seminara에서 그 스페인 도검병을, 그리고 패전하기 전 Teranova에서 스페인 본토 지원군을 재차 격파한 병력이었다.) 에 주목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1512년 Ravenna전투는 기병이 여전히 중요한 병종이며, 야전축성을 포병화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서 현대 군사사가들이 평가하는 전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실제 중요한 부분이 아닌 도검병이 파이크병에게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 단 두차례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기록으로 인하여 다수의 저작들에서는 이를 근거로해서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대형에 "치명적"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 두전투를 제외하고(이 두 전투도 과연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그러한 견해를 입증할만한 사례는 도검병비중의 신속한 감소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기병이 보병에 취약하다는 일방적 결론을 그의 저서에서 내리고 있는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과거 로마중장보병은 기병을 압도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로마군이 기병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칸네전투나 자마전투와 같이 기병의 중요성을 확연하게 보여주는(실제 당시 기병은 16세기초의 기병에 비해 등자도, 무장수준, 마필의 수준도 떨어짐에도 불구하고)전례들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에 대한 지나친 편향적 태도로 인하여 그는 16세기에도 여전히 결정적 수단으로서 전투에 영향을 미친 기병전력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인문주의자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실제 군사편제에서 개인무예적 성격을 지니는 병종은 순식간에 화석화되었다. 1534년 본격적으로 스페인군은 16세기 초기에 구축된 기존의 Colonellas 편제를 Tercio라는 여단편제로 전환하게 된다. Tercio란 Third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3개의 Colonellas로 구성되었다는 주장, 또는 파이크와 화승총, 검이라는 3개 무기를 의미한다는 주장, 전통적인 전위, 주력, 후위와 같은 편제를 의미한다는 주장들이 다양하게 언급되어지고 있다. 1567년 플랑드르군이 탄생하게 되는 시점에 Alva대공이 네덜란드에 부임할 때 이끌고 간 전력은 4개 Tercio로서 각각 나폴리, 롬바르드, 시실리, 사르디니아 Tercio였다.(초기에는 어디서 징병,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이름붙여졌다.) 10)

초기 Alva대공이 이끈 Tercio는 2가지 형태의 중대로 구성되었는데, 2개중대의 화승총병만으로 구성된 중대와, 10개중대의 파이크와 화승총으로 구성된 중대였다. Roger Williams는 파이크병력의 4분의 3은 파이크로 무장했으며, 4분의 1은 핼버드와 방패로 무장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0) 여기서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Rondeleos로 추정된다. 초기의 Tercio에는 소수의 Rondeleros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편제대로라면 Alva대공 휘하의 Tercio의 파이크-화승총비율은 3분의 2가 파이크병(핼버디어나 Rondeleos)이어야 하나, 실제로는 1:1정도의 비율이었다. 10) 때문에 1505년 20%정도의 비중이었던 Rondeleos는 10%이하로, 핼버드로 무장한 병력(공병들은 핼버드로 무장했기 때문에 적어도 Rondeleos보다는 수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을 제외하면 거의 미미한 수준이다.

플랑드르군의 스페인군 구성비율은 상당히 낮은 편으로, 6만에서 8만에 달했던 플랑드르군 중 4000명에서 1만명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으로 각각 1만에서 3만이상까지 달하기도 했다. 16) 그러나 플랑드르군의 스페인 지휘관들은 대체로 네덜란드의 Wallon인들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인, 독일인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Wallon인들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에서 징병되었기에 네덜란드인과의 싸움에서 별로 신뢰성이 없다고 평가되었고, 독일인들에 대해 1567년 알바대공은 스페인주재 프랑스대사에게 자신은 독일인들이 네덜란드 반군과의 친밀한 관계때문에 단지 수적인 요인외에 전투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언급했으며, 1567년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보고서에는 스페인이 그들의 고향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기율이 결여되어 있기에 지휘관들은 단지 2선급부대로만 이탈리아인을 활용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10)

스페인군은 정규 장교 및 부사관외에도 비공식적인 "등뼈"가 존재했다. 영국의 Gentleman Volunteer와 같은 Gentleman계급, 또는 귀족으로서 상속받을 땅이나 재산이 없는 스페인인들이 군대에 자원하였다. 이들은 Particulares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일반 병사에 비하여 Ventaja라는 추가임금을 받았고 공식적인 직위는 없이 일반적인 병사들과 동일한 위치에서 중대전력에 배치되었다. 알바대공은 이들이야말로 전쟁에서 행동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이들이며 부대에 기율을 확보하게 할 수 있는 근간으로서 이들을 보병대열에 투입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1640년 네덜란드 민정장관은 이들에 대하여 전투와 공성전에서 선두에 서는 이들이며 다른 병사들에게 빠르게 대열을 갖추고 용기를 가지고 싸우게하는 이들이라고 평가하였다. 16)

이들은 중세시대의 하마기사들처럼, 병사들에게 용기와 기율을 부여하는 자들이었으나, 병사들과 별개의 무장으로 분리된 존재는 아니었다. Roger Willams는 그들이 대부분 파이크로 무장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0) 이들은 공식적 장교 및 부사관이 별도의 무장을 하고 지휘통제를 하는 것과는 달리 집단의 전술단위내에서 병사의 하나로서 복무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중대지휘관이나 부지휘관이 될 수 있기를 꿈꿨는데, 대체로 플랑드르군에서는 기존의 지휘관이었던 자가 완편병력을 갖추지 못한 Tercio나 연대단위의 중대들을 통합시키는 Reformation(항명, 군율위반등에 대한 처벌목적으로 실시되기도 했다.)과정에서 타중대의 Particulares가 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이들은 자신이 포함된 대열내의 병사들의 리더로서 복무하거나 때로는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알레한드로 파르네세 공작의 42명의 종자들처럼 복무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원자들은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관측되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이들이 개인무예를 전장에서 발휘하는 전사들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장교집단의 일원이자, 병사로서 전투에 임했다는 점이다. 집단전술이 개인무예를 전장에서 거의 배제시킴으로서 실제 이들의 무예수준은 전투에서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병력을 통제하고 기율을 유지함으로서 집단전술로서의 백병전능력을 강화시키는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과거 하마한 기사들과 유사하나, 기사들이 자신의 갑주와 개인무예라는 물리적 수단으로서 어깨를 마주하고 싸운 보병들과 차별화된 존재였다는 점과는 다르다. Particulares들은 단지 장교로서 복무할 경우에만 검과 방패로 무장했다. 1578년 파르네세공작과 같은 지휘관들을 비롯해서 이시대 대부분의 장교들은 검과 방패로 무장하는 것을 선호했으나, 플랑드르군내에서 방패로 무장한 병력 자체가 소수에 불과했다.

네덜란드군의 경우, 그것이 마키아벨리의 견해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유일하게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을 전장의 주요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네덜란드 군개혁의 선구자인 모리츠 왕자를 통하여 시도되었다. Nassau의 모리츠라고 불리는 이 왕자는 그의 일반적인 병력개선의 방향이 병력통제 및 운용에 효과적이며 보다 유연성이 있도록 중대규모를 감소시키는 것을 추구하였다. 1598년 네덜란드군의 150명의 중대단위는 120명으로 편제가 변화되었고, 보다 대형의 중대인 200명단위 중대는 160명으로 규모를 줄이게 되었다. 네덜란드 군 1개중대의 장교 및 하사관은 3명의 장교, 5명의 하사관과 2명의 군악대, 1명의 사무원등으로 구성되어 변하지 않았으나, 병력수가 감소함으로서 간부대 병사의 비율이 신장되었다. 1600년에 편제상 네덜란드군은 같은 병력의 스페인군에 비해 2배의 간부비율을 보였다. 10), 1941년의 대패전 이후 소련군이 자군의 병력 통제, 운용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소총여단을 통해 병력단위규모를 줄임으로서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과 비견되어질 만 하다. 또한 네덜란드군은 화승총과 파이크의 중대내 비율에 있어 화승총의 비율을 높이고자 했는데, 1580년대 네덜란드군의 화승총:파이크비율은 7:4, 1590년대에는 5:3, 17세기 초에는 2:1까지 상승하였다.

이러한 집단전술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모리츠는 그의 개인적 견해에 의거하여 매우 독특한 시도를 하고자 했다. 1594년 Griningen공성전에서 모리츠는 영국군 지휘관 Francis Vere와 함께 총격에 직면했으나, 방패가 두명을 덮어주었기에 부상만을 입고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 그는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병보다 효과적이라는 Matthew Sutcliffe와 같은 당시의 저자들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 1595년 그는 이를 실험했고, 적어도 그의 개인적인 만족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도출했다. 그는 파이크병 200명당 100명의 Targetier를 편제하여 최초 3열의 파이크대열의 절반을 이들로 편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실질적으로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공유되어지지 못했고 기각되었다. 그는 끈질기게도, 그의 직할 호위대의 일부를 Targetier로 편성했다. 10) 그러나 이 전력이 특별한 활약을 했던 전례를 찾기는 어렵다. John Lothrop Motley는 그의 저서에서 네덜란드의 보병중대에 3인이 방패로 무장하고 있으며, 이는 지휘관이 탄환에 노출되는 것을 방호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17) 네덜란드 1개 중대의 장교인원은 중대지휘관, 부지휘관, 기수로 정확히 3인이므로, 장교계층의 실전무기가 대체로 검과 방패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방패로 무장한 3인의 병력일 것으로 보인다.

Targetier은 실제로, 다수의 인문주의자를 포함한 군사관련 저작에서 "Mortal to Pikeman", 즉 파이크병이란 백병전 집단전술에 대해 효과적인 병기로 기록되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주된 활약은 파이크병이 활약하기 어려운 공성전에서의 돌격, 참호나 삼림지대등에 대한 유격전수행으로서 파이크병에게 효과적이라는 야전에서의 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즉 개인무예로서 고전적인 전통을 가지며, 귀족적인 스포츠로서 16세기 장교집단의 주무기로 활약한 이 무장형태는 야전에서 파이크병을 위협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개인무예에 대한 집단전술의 우위는, 파이크병에 화승총병이 결합되면서 보다 신속하게 진행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역할마저도, 16세기 중후반에는 공성전 외에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이는 유격전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Targetier의 효용성이 극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1600년 이전까지 네덜란드 전쟁은 야전보다는 유격전 및 공성전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중앙집중화된 군사체제보다는 개별 도시 및 촌락에 배치된 소수병력의 지휘관이 자체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고 자금을 확보하며 습격전을 벌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때문에 실제로 Tercio와 같은 대규모 병력단위는 전투에 참여할 일이 거의 없었다. 대체로 대대적 군사행동은 파이크병에 비해 압도적으로 화승총병이 많은 비율을 가지는 1000명에서 3000명단위의 Escuadron으로 실시되었다. 15) 아일랜드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유격전에서는 경무장 기병이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경보병이 파이크병보다 효과적이었으며, 때문에 소단위 유격전에는 화승총위주의 병력이 Targetier보다 더 일반적일수밖에 없었다. 단지, 이 시점에서는 개인무예라는 측면은 아니지만 현대의 특수부대에 요구되는 경험많고 노련한 개별 병사들의 숙련도가 유격전이라는 특성상 강조되는 편이었으나, 이것은 개인무예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16세기 후반 유럽군사사의 핵심코드로서의 네덜란드전쟁과, 플랑드르군, 네덜란드군에게서 개인무예는 전장에서 그 가치가 거의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2. Mark Charles Fissel, routledge "English Warfare 1511-1624"
13. Sir Charles Oman, "A HISTORY OF THE ART OF WAR IN THE SIXTEENTH CENTURY" 288 page(William S. Fields와 David T. Hardy의 글에서 재인용)
14. William H. Prescott "The History of the Reign of Ferdinand and Isabella The Catholic"
15. NICCOLO MACHIAVELLI, "THE SEVEN BOOKS ON THE ART OF WAR"
16. Geoffrey Parker, Cambridge Univercity Press "The Army of Flanders and the Spanish Road 1567-1659", Cambridge Studies in Early Modern History
17. John Lothrop Motley "History of United Netherlands, 1590-92"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조선 전기 군사체제의 측면


6) 조선 군사체계에 있어서의 개인무예의 변천


유럽과는 달리, 조선군은 안보적 위협의 성격이 판이하였고,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구축됨에 따라서, 이론적인 집단전술체계는 갖추었으되, 이것이 실질적인 백병전력으로서 구축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조선후기에는 결여된 백병전 역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집단전술보다는 개인무예의 강화란 측면에 가까운 전술체계를 지향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를 제외하고 조선군에게 있어 적절한 백병전역량을 확보할 만한 개인무예도, 효과적인 집단전술도 시현해낼 수 없었다.

조선 개국초기의 주된 안보위협은 태종-세종연간, 문종연간의 일시적인 정규전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왜구와 여진족과의 비정규전의 성격을 띠었다. 태종-세종연간에는 명 내부의 내전과 영략제의 원정, 명의 만주지역에 대한 진출로 인하여 조정내부에서는 명의 침공을 우려하였는데, 태종 13년 7월 26일자 실록에 의하면 하륜을 비롯한 조정중신들은 영락제의 북정이 조선을 위협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면서 산성을 축성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태종은 오히려 "난국(難局)이 온다면 장차 거병(擧兵)하여 바로 쳐들어갈 것이지, 어찌 마땅히 성을 지키고 기다릴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또한 문종대 1449년에는 오이라트를 이끄는 에센이 명의 영종을 사로잡은 토목보의 변으로 인하여 조선내부에서 외부의 대규모 위협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면서 기존의 행성과 읍성수축을 정지하고 기존 읍성의 강화를 비롯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길도등 이북지역의 산성의 대대적 수리 및 수축을 실시하며, 대규모 병력편성에 대한 고려가 가미되어진 "오위진법"을 편찬하는등 정규전 위협에 대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침공에 대한 우려는 임진왜란때까지 실현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조선초기의 주된 안보위협은 남방의 왜구와 북방의 여진족이 주종을 이루었으므로 대규모 정규전보다는 비정규전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경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된 병농일치제를 통하여 정규군 15만명, 보충병인 보인을 포함하면 50만의 병력자원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태종의 발언과 같이, 조선 개국초에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태조나 태종과 같은 국왕은 수성전에 치중하기보다는 보다 공세적으로 군사를 운용할 의지와 역량을 확보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의 북원과의 충돌이나 요동정벌의 시도는 이러한 역량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국가안보상의 위협이 비정규전적 성격을 장기간 유지하는 과정에서 조선 개국초의 이러한 상무적 기상과 공세적 정신과 같이 정규전 상황에 요구되는 요소보다는 비정규전상황에 적합한 형태로 양상이 전환되어지게 된다. 명이 동북아 일대에 대한 안정적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조선과 사대관계를 유지하여 조선의 군사체계는 토목보의 변 당시의 일시적 상황을 제외하고 비정규전에 적합한 군사체계를 발전시키는데 치중하게 된다.

왕자의 난의 수단이자 원인이 되었던 조선의 사병을 혁파하고, 조선 군사체계를 혁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도전은 조선 최초의 실질적 군사력운용의 수단으로서의 병학으로서 "진법"을 편찬한다. "삼봉집"에 실린 "진법"에 대해서 정도전은 군사훈련에 있었서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전투대형의 훈련이며, 하나는 전투기술의 훈련으로서 과거 사병위주의 군사체제하에서는 후자위주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진법훈련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1)

"지금의 훈련(講武)하는 법을 보면, 징과 북(金鼓), 기치(旗麾)를 가지고 나아가서 물러서고 앉고 서는 절차만 자세히 가르치고, 창, 칼, 활, 화살을 가지고 치고 찌르고 활쏘고 말달리는 기술은 연습하지 않고 있으나, 이것은 생략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데 순서가 있어서입니다." 21)

이를 통해서, 고려말 조선초의 군사훈련형태가 주로 개인무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의 "진법"상의 5개 진은 전형, 중축, 후형, 좌익, 우익으로 구성되는데, 전형과 중축은 적을 저지하고, 후형은 전형과 중축사이로 진출해 적을 유인하고, 유인책에 끌려들어온 적을 중축의 양익에 위치한 좌익과 우익이 적의 측방을 강타하여 양익포위를 달성하게 되는데, 진법상의 결진십오지도에 의하면 이러한 대형은 밀집대형이 아니라 5명단위의 2개 오를 가진 10명단위의 소패로 구성되며 5개의 소패가 간격을 가지고 1개 열을 구성하는 것이 1개 중패가 되며, 2개 중패가 2열로 배치되는 것이 1개 총패를 구성한다. 하나의 진은 각 면마다 2개 총패가 배치되어 4면에 총 8개총패가 내부에 1개 총패가 배치되어 900명이 최소단위의 五陣을 이루게 된다. 20)

이러한 "진법"의 전투배치는 동양적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창병 밀집대형에 비해 전투단위부대의 유연한 기동 및 운용이 가능하다는 이점면에서 로마군의 초기 Maniple이나 Cohort와 같은 전술단위에 비견되어질 만 하며, 동시기 중세유럽에 비해 전술체계면에서 매우 이상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보다 유연하고 단위전술조직을 완비한 집단전술은 척계광의 절강병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단위 병력이 유연하게 진형을 갖추고 변형시키고 기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군이나 척계광의 척가군이 지녔던 것처럼 이 전투대형은 백병전을 상정할 경우, 개별전사들의 개인무예의 수준, 기율, 용기가 일정 이상 보장되지 않아선 안된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기병이 대열간의 간격으로 파고들거나 돌파하여 대열의 붕괴를 야기하기 용이하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전술단위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통제 및 운용, 유연성면에서 유리한 점과 동시에 전사 개개인의 전투기예의 수준과 심리적 강건성이 로마 군단병 이상으로(전술단위 크기면에서 볼 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기의 경우, 사병위주의 군사력 기반, 그리고 개인무예위주의 훈련체제하에서는 개별병사들의 수준이 이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나, 태종이후 사병이 혁파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 병농일치라는 조선의 군사체계가 확립된 이후에는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군사체계상에서 투사무기와 화약무기에 대한 비중의 증가, 비정규전 양상은 이러한 백병전상의 취약성을 가중시키게 된다.

세종대에 들어와서 조선의 실용적 병학의 르네상스시기가 꽃피게 되는데, 세종, 문종대의 병서는 조선 전기 군사체제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세종 3년 병조에서 "진도법"을 올렸는데 저자는 변계량으로 추정되어진다. 진도법에서의 부대편제는 5명을 1오, 2오를 소대, 5오를 중대, 10오를 대대로 편성하고 50명인 대대를 전투의 기본단위로 삼았다. 진형은 원진, 직진, 예진, 방진, 곡진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21) 외부에 정찰 및 유격전에 투입하는 유군기병의 운용을 비롯하여 진형의 최일선에는 팽배수(방패)를, 그 다음에는 창수와 창검수를, 그 다음에는 화통수와 궁노수를, 그다음에는 창기병을, 궁기병을 배치하는 병종구성을 취하게 된다. 22)

진도법의 의의는 진법에서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유군기병의 운용을 언급하고, 또한 최초로 개인화기를 사용하는 화통수를 기재하여 이 시점에서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화기활용이 가능해졌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전열배치를 이후의 군사체계발전과 비교하여 본다면, 팽배수 직후방에 백병전에 참여하는 창수와 창검수가 배치되어 백병전 역량 및 중요도가 여전히 어느정도 견지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이후 가장 실전적이고 여진과의 전투경험이 고려되어진 "계축진설"과의 비교를 통해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수 있다. 세종 15년 7월 조선 초기 북방정벌의 명장 하경복이 편찬한 "계축진설"은 "진도법"과 함께 소규모 여진족과의 교전을 위한 병서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21)

계축진설에서는 전체병력의 20%를 유군으로 편성하며 특히 정찰요령과 험지, 협로에서의 매복에 대한 대응, 수송수단에 대한 보호등 행군요령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체적 적시는 여진족과의 비정규전상황에서 정벌전과 같은 군사행동에 대한 효과적 근간으로서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지로 이후 조선전기 전술체계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오위진법이 이론적 체계로서의 성격을 띠는데 반해 계축진설은 그 세분화, 세밀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실용적이고 실질적으로 사용되기 적합한 군사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진도법의 편제상에서는 각 개인의 간격을 여섯자, 기병은 그 두배로 하고 있는데 이처럼 개인의 간격이 크기 때문에 백병전상황에서는 개개인의 무예수준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간격상의 문제로 인해 진도법의 군령상에서는 1오에서 2인을 잃으면 구원하지 않은 나머지 3인을 벌주는 형태의 군령을 포함하고 있다.

계축진설에서는 "조운진"이라는 기존의 병력배치와는 다른 형태의 병종배치를 보여주는데 중군이 대열을 유지하고 이외의 각군은 사면의 안팎에 방패수를 세우고, 이외 병력이 진밖으로 배치되는데 최전방에 궁기병이, 그 다음에 창기병이, 그 다음이 화통수, 궁수로 배치되어 정병과 기병으로 운용하여 대형양익에는 전, 후, 좌, 우의 해당병종이 기병으로 운용되어 협공을 가한다. 22) 이러한 형태는 공세 및 방어에 있어서 궁시와 화기, 그리고 기병위주로 병력을 운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비정규전 경향에 있어서 투사무기와 기병위주로 전투형태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 13년 6월 2일자 실록에는 병조에서 하번 갑사에 대한 취재에 있어 기창세와 보창세를 상세히 설명하며 이 역시 시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세종 23년 10월 25일자 실록에는 기사(騎射)와 보사(步射)로 하번갑사 및 별시위 취재를 하고 있는데 기창세를 시험하는 법을 세워놓고도 군사들이 마음을 써서 익히지 않으려 하니 기창세와 보창세도 시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세종대에 궁시외의 개인무예로서의 단병이 군사들에게 외면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궁시위주의 경향은 당시 여진족의 무장상태가 빈약했고, 소규모 약탈전 위주로 습격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종 4년 7월 18일의 함길도 병마도절제사의 장계에는 "올적합(兀狄哈)·올랑합(兀郞哈) 등 잡종들은 갑옷과 투구도 쓰지 아니하고 열도 이루지 아니하고 싸우나 활[弓]을 잘 쏘기 때문에 상대하기 어려우니, 나무로 방패(防牌)를 만들어서 사용하되, 매양 싸울 때에 이것을 전열에 세우고 기창(騎槍)·기사(騎射)를 뒤에 세우면, 비록 겁이 많고 약한 자라도 반드시 등지고 달아나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언급하였다. 성종 22년의 실록기록에는 이수언이 성종에게 여진족이 10중 1, 2이 수은갑과 같은 갑주를 입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반면 임진왜란 이후에는 여진족이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갑주로 무장함으로서 이러한 궁시의 위력이 감소되었다. 선조 38년 북변 건퇴에서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10배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100여기의 여진기병이 단병접전으로 기습을 감행하자 패배직전까지 같으나 우후 성우길의 선전으로 간신히 만회할 수 있었다. 당해 상이순변사 이시언이 선조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건퇴전투에서 여진족이 중국갑옷을 입어 궁력으로 관통할 수 없어 총통만이 관통할 수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진족의 무장상태와 세력의 융성함 여부에 따라서 궁시무기의 위력이 달라졌으나, 조선초기에는 여진족의 무장상태가 상대적으로 빈약하여 궁시무기의 효과가 상당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하여 별시위나 갑사 취재에서 보창세는 사라졌으며, 기창역시 보사나 기사중 하나만 골라서 할 수 있도록 간편화되고 점차 궁시위주로 취재가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문종대에 편찬된 오위진법은, 조선 전기 군사체계의 집대성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 당시 토목보의 변으로 인한 대규모 침공의 위협이 인식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오위진법은 소규모 접전이나 비정규전에 적합한 "진도법", "계축진설"과는 달리 대규모 부대를 수용할 수 있는 지휘체제를 구축하였으며, 동시에 이러한 대규모 부대가 융통성있게 편성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시점에서 조선의 군사체제가 5사로 개편되었는데, 이러한 군사개편 및 통합과정에서 실질적인 군사운용 및 편제에 대한 병서편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오위진법의 정식 명칭은 "진법"이나 정도전의 진법과 구별하기 위해 오위진법이라 지칭한다. 대장아래 5위가 있고, 위 내에는 5부, 부마다 4통이 있으며, 별개로 5인이 1오, 25인이 1개 대, 125인이 1개 여를 이루게 된다. 통의 규모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부대규모를 융통성있게 조정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닌다. 오위진법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편성시, 1개 부의 4개 통의 경우 2개통은 보병으로, 2개통은 기병으로 하도록 규정하여 기병을 가장 중요한 전투력으로 편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위진법은 보병의 병종배치에서 팽배수를 1선에 화통수를 2선, 창수와 검수를 그 다음에, 궁수를 마지막에 배치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전기의 군사체제의 특성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개인무예위주의 사병체제를 중앙집권화하는 과정에서 전투대형중심으로 개편한데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규모 적을 상정한 군사적 충돌에 적합한 군대보다는 실질적으로 비정규전이나 습격전에 적합한 기병, 궁시위주의 병력구성을 지향해 왔다. 가장 전투경험이 많고 실전적이라 할 수 있는 하경복이 작성한 "계축진설"이 오히려 실전상에서는 오위진법보다 조선전기를 대변하는 병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전술형태는 혁신적인 소규모 전술단위와 개별병사간 간격을 두는 유연성을 위한 구조적 형태로 인하여, 사격전이 아닌 백병전을 상정할 경우, 기병에 의해 대열이 붕괴되거나, 또는 개인무예를 발휘하여야만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술적 운용의 측면에서는 분명한 이론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이 고려말 조선초의 무예에 능한 사병집단이자 개인무예에 대한 부분적 고려가 지속된 세종대의 조선병사가 아닌, 병농일치가 진행되고 갑사취재에 있어서 보창세나 기창의 의미가 퇴색된 시점에서는 임진왜란과 같은 대열의 조기붕괴를 야기하기 쉬운 구조로 전환되어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밀집대형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이나 대열이탈자에 대한 통제가 용이하지 않고, 개인간 간격이 지나치게 넓어서 개개인에게 일정 이상의 무예수준을 요구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때문에 분명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진법이라는 집단전술개념은 단병접전이라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개인무예를 배제하는 경우 취약함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임진왜란을 거치고서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척계광의 절강병법을 조선후기군사체계의 모델로 삼게 되면서 오히려 집단전술과 개인무예의 배제라는 유럽군사사의 방향과는 다르게 개인무예의 강화와 재편이라는 개선작업으로 시도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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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노영구, "조선시대 병서의 분류와 간행추이"
22.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병장설, 진법"
23. 정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통병서의 이해"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1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조선의 삼수병 운용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토대로 하여, 이를 조선의 상황에 적합하게 개선-보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체제에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군에 대응하기 적합하다는 평가와, 화기의 중요성 강화로 인하여 절강에서 왜구를 상대로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던 척계광의 절강병 운용과 왜란과정에서의 남병운용에 대한 적극적 도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척계광의 절강지역에서의 대 왜구 전투의 노하우를 담은 '기효신서'를 발췌한 조선의 '병학지남'은 조선 후기 군사제도의 기틀이 되었으며, 이를 제도화, 표준화하기 위한 '병학통', 알기 쉽게 풀이한 '병학지남연의'를 비롯한 병서가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후 호란을 거치면서 어왜전법이라는 논지하에, 북방의 위협 및 북벌가능성과 관련한 비판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척계광이 북부 몽고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편찬된 '연병실기'의 거기영도를 도입하고, "병학통"에도 조선 전기 오위진법의 기병중심의 개념을 도입한 영조시대의 '속병장도설'을 활용하였다.

연려실기술 26권에서의 각 장수에 대한 사적에서 등장하는 광교산 전투 및 탑골전투, 그리고 사르허 전투의 전례에서 부분적으로 삼수병의 실제 운용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 이후의 조선 후기의 다양한 군사적 노력의 결과는 청과 일본에서 안정적인 헤게모니가 구축됨으로서, 실제 실용적으로 사용되지 않음으로서 전투사례로서 그 운용의 효과성을 측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14세기 초에서 16세기 중후반에 이르는 기간의 다양한 전투사례와 군사적 변화과정을 조선의 삼수병 운용과 비교하는 경우, 그 효과성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유사한 전술 및 병기운용에 대한 기록을 관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화거와 유사한 수레를 이용한 화기운용을 비롯하여, "연병실기"의 거기영이나 "융원필비"의 화거방진도와 유사한 "Wagenburg"의 운용이나 플랑드르,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지에서 일어난 굉장히 다양한 전투사례를 통해서 삼수병 운용이 적합한지, 그리고 조선 후기의 다양한 노력이 청이나 일본을 가상적으로 설정할 경우 효과적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 논의하기에 유용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 삼수병 운용에 대한 이해


삼수병 운용이 기초하고 있는 "기효신서"에서는 보병전력 위주로 병력을 편성하여 이를 2개 대로 분류하는데, 편제형태상 상호지원하는 2개 부대는 소단위병력으로 구성되며 단병접전에 투입되는 살수대와 조총부대로 편성되는데, 살수대는 "기효신서"에 따르면, 대장 1명, 취사병인 화병 1명, 등패 2명, 낭선 2명, 당파 2명, 장창 4명등 12명으로 구성된다. 조총부대는 대장 1명외에 조총수 10명과 화병 1명으로 마찬가지로 12명으로 구성된다. 1)

"병학지남"의 장단상제편에 따르면, 살수대의 원앙진은 등패병 한명씩을 낭선(대나무 가지를 자르지 않은 죽장창) 한명씩이 지원하고 장창 2명이 낭성과 등패 한명씩을 담당하여 백병전을 지원한다고 한다. 낭선으로 등패를, 장창으로 낭선을, 그리고 최후미의 당파(삼지창) 2명이 장창을 지원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 장창의 수가 2명으로 줄고 2명이 대봉으로 대체된다.

"병학지남"의 주간훈련과정에 포함된 전투형태에서 조총부대는 적이 접근하는 경우 일제사격 또는 윤방(5발의 교대사격)으로 사격을 가하고 후퇴한다.(이때 사수대와 화전(로켓무기)을 단 당파수도 사격하게 된다) 이후 후방의 살수대가 초월 전방으로 전진하여 교전을 벌이고, 후퇴하며, 이후 다시 조총과 활을 쏘는데 이때는 일제사격으로 한다. 이후 전방에서 대기하던 살수대가 교전을 벌이며 적을 후방 살수대지역으로 유인, 함께 공격을 가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이상적인 조련과정대로 교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이러한 "병학지남"상의 교련과정을 통해서 삼수병 운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삼수병 운용과 절강병법은 백병전을 살수대의 상호지원하는 소규모 분대규모 병력을 통해 방어하며, 병기를 밀집대형으로 집단운용하지 않는다. 병력규모가 커지더라도 기본 전투단위는 소단위체제로 유지된다. 원앙진 외에도 삼재진, 매화진과 같이 대열의 변화를 주기는 하지만 최소단위인 살수대, 조총대는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살수대는 북방의 경우 백총이 이끄는 국단위로 1개 국에 3기(9개 대)가 배치되며, 남방의 경우 이를 초관이 이끄는 1초(3기, 9개대)로 배치된다. 북방의 경우 3국이 1사, 남방의 경우 5초가 1사를 이루는데, 병학지남 원근겸수편에 따르면, 살수 4초, 조총 1초로 1사가 구성된다고 한다.(물론 실제로는 조총비율이 항상 더 많았다.)

"병학지남"상에서는 병력을 전층, 후층으로 나누어 교련하는데, 한사가 두층, 또는 한층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살수대는 전층과 후층으로 구분하여 언급하는 반면, 조총부대는 전층의 전면에서 작전하는 것으로 언급하는데, 1사가 1개 층을 형성하는 경우에 각 사의 조총부대가 통합운용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이론적으로는 살수의 수가 더 많고, 전투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살수가 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 이렇게 하기 어려웠다고 보아야 현실적일 것이다. 각 살수대의 최소단위인 대의 원앙진간 거리는 1장으로 명시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병력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최소단위가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체계가 방어적인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장창수를 비롯하여 살수대 대장도 활로 무장한다. 이를 보면 정확히 삼수병 체제라기 보다는 살수가 활로 무장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연병실기 상에서는 장창병을 조총수 2명과 구형 화기인 곤방(타격무기면서 동시에 짧은 총신이 달린 무기)으로 무장한 2명으로 교체했다. 척계광은 북방의 유목민을 대상으로 하면서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이런 형태를 취하는데, 장창이 일반적으로 대기병용으로 활용된 여타 동시대 사례와는 판이하다. 소규모 단위부대에서 장창이 대보병 백병전 지원용으로는 활용되었지만,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대기병용 백병용으로 활용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병학지남"은 기본적으로 "기효신서"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병자호란 이후 북방의 기병대가 주된 위협으로 상정되면서 많은 비판이 가해지게 된다. "기효신서"를 지은 척계광은 1568년 봄에 북방의 계주총병으로 전보되어 몽고기마부대를 상대하게 된다. 이후 그는 1571년 "연병실기"를 간행하였는데, 이 내용상에서는 기존의 절강병법과는 달리, 기병과 보병의 상호연계 및 전차전을 도입함으로서 대응하게 되었다.

정조는 "병학지남"을 새로 간행하면서 "연병실기"상에 수록된 "거기영진"을 수록하였는데, 이전의 1684년 간행된 판본에서는 전차와 마병과 관련된 4개 진도를 조선의 지형에 맞지않다하여 삭제하였으나, 병학지남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서 북방기병에도 대응하기 위한 "거기영진"을 수록한 것이다.

"병학지남"상에서 또한 유의해야 할 것은 2가지 사항이 더 있다. 병학지남 야간훈련내용의 안영편에는 진지를 구축함에 있어서 거마창(날카로운 창을 여러개 묶어서 세워놓은 것)을 세우고, 질려(4개의 뾰족한 날이 있어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뿌리는 장애물)를 뿌린다. 그리고 성을 방어하는 훈련내용상의 일면조 편에 "불랑기"의 사격이 등장한다.

이론적인 훈련내용상에서 알 수 있고, 지금의 글에서 중시할 3가지 사항이 이것이다. 조선군은 야전시 조총위주의 병력이 기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보고 임진왜란 당시부터 거마목을 제작한 기록이 있다. 질려는 조선 개국초기부터 사용되었다. 1808년에 어영청에 3만여개의 철질려가 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량비축되었다.

불랑기의 경우 야전에서의 전투상황에서 불랑기를 비롯한 대형총통의 사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수성전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주력 화포였던 불랑기가 야전에서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아마도 기동성의 문제가 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종 4년에야 신헌이 제작한 불랑기동거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그것 역시 근대식 포거와 괴리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융원필비"에 소개된 동거는 야전에서의 기동성을 갖출만한 형태는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크다.(실제로, 호란당시의 연려실기술상에서 야전시 화포의 운용에 대한 언급은 조선군측이 아니라 청군의 호준포다.) 조선 후기 연병실기상의 전차전을 구현하기 위하여 불랑기 2문을 장착한 전거를 제작, 유지하려 했는데, 1808년 편찬된 만기요람에 어영청에 51량의 전거가 비축되었다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12)??이것이 불랑기가 야전에서 운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증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삼수병 운용과 관련하여, 조선군의 야전운용에서 이 3가지, 즉 병력 및 전술단위와 운용, 야전에서의 진지축성 및 장애물설치, 야전에서의 대형화기 운용이 중요한 것은, 이 3가지 사항이 14세기부터 16세기간의 보병전술 및 화기운용에 있어서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요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실제 전례를 통해서 조선 삼수병 운용에 대해서 확인해 볼 것이다.




2. 실제 전례를 통해서 본 삼수병 운용


호란 당시의 3개 전투는 왜란 이후의 조총병 및 삼수병 운용에 대한 드문 사례로 제공될 수 있다. 광교산 전투 및 탑골 전투, 쌍령 전투의 경우 조선군이 조총을 주력화기로 운용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나, 이것이 과연 삼수병 운용으로 보아야 할지는 의문스럽다. 이는 병학지남에서 보여지는 삼수병운용이 살수대 운용이 상당히 두드러지는 반면에, 실제 전투에서는 살수대 운용에 대한 내용 자체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평안병사 류림과 순찰사 홍명구가 이끈 탑골 전투에서, 홍명구는 금화현 산기슭의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 진을 쳤으나, 류림은 병력을 합쳐야 하며(홍명구측의 주장에서는 류림이 병력을 합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고지에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고(홍명구측 주장에서는 류림이 먼저 험지에 진을 치고 구원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제의했으나, 홍명구가 받아들이지 않아 병력이 이분되게 되었다. 홍명구의 우진은 먼저 청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였는데, 상세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류림은 험지에 진을 설치하고 잣나무 숲을 이용해 목책을 구축하였다고 “해동명장전”에 언급된다.

이 경우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기병이 접근하기 용이하지 않았고, 근접거리에서 조총사격을 가함으로서 “탄환 한 개로 몇사람의 적을 거꾸러뜨릴 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은 류림의 진지를 돌파하다가 다시 물러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살수대가 운용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홍명구의 우진붕괴과정을 고려할 때, 살수대는 평원지형에서 기병에게 대적할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준룡의 광교산 전투에서도 고지에 병력을 배치한 김준룡은 방진형태로 진을 구축하고 방어에 임했다. 전투양상은 탑골전투와 유사하게 진행된다.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청군을 조총사격으로 격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여기서 가시적인 기록은 청병이 호준포를 활용하였다는 점인데, 이는 무척 중요한 사항이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의 쌍령전투는 가장 충격적인 조선군의 패배사례인데, 약간은 탑골전투와 유사하다. 허완의 경우 영장 선약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지에 진을 쳤으며, 민영은 산등성이에 진을 쳤다. 연려실기술 상의 초기언급은 남산 상봉에서 33명이 목방패를 들고 접근했다고 하는데, 전투과정은 사격통제 및 탄약배분상의 문제로 어이없는 허완의 좌진의 붕괴, 그리고 탄약배분과정에서의 실수로 인한 민영의 우진의 붕괴로 인한 대패다.

이 3개 전투과정에서 승전의 주요 요인은 2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먼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탑골전투와 광교산전투에서 청군은 고지에 배치된 조선군에게 기병운용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으며, 조총사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반면, 탑골전투의 홍명구군, 그리고 쌍령전투에서는 조선군은 평지에 병력을 배치함으로서 기병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홍명구군의 경우 병력열세를 고려하면 어쩔수 없다 할지라도, 허완과 민영의 경우, 4만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하는데 300여 기병에게 패배했다고 하는 것은, 수치의 오차가 있다할지라도 어이없는 패배라고 할 수 있다.

2번째 요인은 유효한 사격통제다. 세 전투중 탑골전투와 광교산 전투는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 양식과 탄환의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방어적인 전술을 추구하는 경우 고래로부터 지속적으로 직면해야하는 문제였다. 특히 적이 기병전력상에서 우위에 있을 경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판이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많은 전례들이 존재한다. 실지로 유효하게 사격을 통제한다 할지라도 고지에 고립된 병력은 비축한 식량과 발사체, 그리고 물의 부족에 시달리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전투과정에서 살수대의 공세적 운용에 대한 묘사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전투의 주력은 조총화력에 의거하며 수세적으로 운용되는데, 이 과정에서 병학지남의 교련과정에서 드러나는 제한적인 살수대의 공세적 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삼수병체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권율의 이치전투나 행주산성전투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실제로 유사한 상황에서 중요한 1가지 요인으로서 야전에서의 대형화기 운용이 있는데, 조선은 호란 이후로는 이렇다 할 외침에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할 전례는 조선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청군의 화기의 야전운용에서의 미숙함 때문에 호란과정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이와 관련한 고려가 삼수병체계를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이러한 전례는 16세기 유럽의 전례를 통해서나 볼 수 있다. 때문에 조선은 군사체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병학지남”의 훈련체계를 비롯하여 수원화성과 같은 성곽체계에 대한 관찰에서 볼 수 있다.




3. 유럽 군사사를 통해서 본 삼수병 운용의 문제점



1) 삼수병의 야전운용과 스페인군의 야전운용 비교


유럽의 16세기 초는 개인화기인 화승총이 드디어 주력화기로서 전장에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를 만들게 된다. 이미 이전에도 화승총을 비롯한 개인화기는 부르고뉴군을 비롯하여, 15세기 초중반의 얀 지슈카의 후스파 군대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다수의 도시내의 민병들은 도시방어전과정에서 화승총을 활용하였다는 것을 1470년의 공성전 묘사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80년 그려진 그림에서는 화승총이 오리사냥에 사용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이러한 개인화기가 기존의 활이 사용되던 평화시의 목적과 유사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그러나, 16세기 초까지 화승총을 비롯한 개인화기는 야전에서 주된 화력을 제공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석궁과 유사하다. 석궁의 경우, 장궁보다 우월한 관통력에도 불구하고 야전보다는 성곽을 방어하거나, 농민반란군(후스파를 포함하여)들이 마차를 활용한 방어선을 구축한 경우에 야전에서 효율적으로 운용되는데 그쳤다. 이는 발사율의 차이로 인한 것인데, 상대적으로 짧은 사정거리와 관통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장궁이 연사율의 이점을 활용하여 야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또한 영국의 군사적 발전의 근간이 됨으로서 장기적 관점으로 볼 때 화승총 운용에 대한 근간을 제공한 것과는 구분된다.

연사율의 문제는 이 시기의 유럽에서 여전히 기사로 대변되는 중장기병의 돌격에 효과적으로 발사무기가 대응하기 어려웠다는 문제에 기인한다. 화승총은 낮은 명중률에도 불구하고 근접거리에서의 우수한 관통력, 그리고 저렴한 비용(화승총이 활용되기 시작한 15세기에 유럽의 화약제조기술 발전으로 인하여 화약의 경제성이 증진되었으며, 석궁의 경우 활몸이 스프링강의 재질을 지녀야 했기 때문에 화승총에 비해 대량생산되기 어려웠다.)과 장궁과 같은 병력자원의 제한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신속하게 증가했으나, 석궁과 동일한 이유로 야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장궁의 경우는 활의 우수성이라기 보다는, 전술과의 조합과 혁신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장궁은 합성궁에 비견할 만한 위력을 가진 적이 없다.) 직접비교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어떤 투사무기도 집중운용한다고 해서 기병의 돌격에 대응하거나, 15세기를 풍미한 파이크병의 공세적 운용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의 전환기가 16세기 초, 이탈리아 전쟁이다. 1492년 드디어 그라나다에 대한 레콩퀴스타를 종료한 카스틸라 아라곤 통합왕국(스페인)은 과거 아라곤이 패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에 프랑스가 침공하여 가시적인 군사적 성공을 거두자,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개입하였다. 스페인의 개입과 이미 진출해있던 프랑스와의 충돌과정이 이탈리아 전쟁을 장식하는 핵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의 초기 정복과정을 통해 화약무기 효율성의 극대화와 기존의 중세 도시국가로서는 왕권이 강화된 프랑스, 영국, 스페인등의 근대적 국가들에게 도저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다른 관점에서도 커다란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대형화기의 운용과 Trace Italienne에 대해서 추후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스페인군은 600명의 기병(그중 500명이 투창으로 무장한 경기병 Jinete), 대부분이 검과 방패로 무장한 Rondeleos(sword and buckler man)인 1500명의 보병을 그라나다 전쟁의 베테랑인 곤잘로 페르난데즈 데 코르도바, 일명 Great Captain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진입시켰다가 1495년 Seminara에서 대패한다. 여기서 스페인군의 경기병은 프랑스군의 중장기병인 Gendarmes에게, 스페인군의 민병인 Rondeleos는 프랑스군에 복무하는 스위스 파이크병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결과로 드러났다. 곤잘로는 전면전을 회피하고 그라나다에서 익숙한 산악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산악 게릴라전 과정에서 Rondeleos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6)

시간을 번 곤잘로는 독일의 란츠크네흐트 파이크병과 독일 화승총병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으로부터 지원받았다. 2000명 수준의 이 지원병력중 300여명이 화승총병이었는데, 이후 곤잘로 휘하의 스페인군은 14000수준으로 증강되었고 이중 6분의 1이 화승총병이었다. 2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6)

이 시점에서 드디어 화승총의 시대를 연 역사적인 전투 Cerignola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의 결과는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등장하는 시점까지 보병의 야전운용에 있어서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스페인군은 먼저 전투위치를 선점하고 참호를 구축하였다. 야전축성을 통해서 화승총병을 방호할 참호를 구축하였는데, 여기서 실제 스페인군의 화승총병 운용 및 야전축성을 지휘 감독한 것은 곤잘로 휘하의 장교이자 공병책임자였던 페드로 나바로였다.(그는 최초의 군사기술자로 손꼽히며, 이후 다시 중요하게 언급될 라벤나 전투의 스페인측 지휘관이기도 하다.)

최초 교전은 프랑스 중장기병돌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참호를 건너 육박할 수 없었던 중장기병은 지근거리에서 스페인 화승총의 사격에 직면해 와해되었다. 후속된 스위스 창병의 공세 역시 동일한 운명에 직면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후퇴했다.

실제로 이 전투과정은 공성전과 크게 다를바 없다. 기병이나 보병이 접근하기 어려운 성벽대신 참호를 파고 거기에 효과적으로 배치된 화승총이 지근거리에서 밀집운용됨으로서 부족한 명중률 대신 관통력이 극대화되었다. 이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활용한 말뚝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장궁이 승리의 최후결정요인이 아니었던(1298년 Falkirk에서의 승리이후 잊혀졌다가 에드워드 3세때 1333년 Dupplin Moor전투와 Halidon Hill전투를 통해 정립된 영국 장궁-보병 통합전술, 기록에 의하면 장궁의 관통력은 원거리에서 매우 취약했으며, 기본적인 방호구로 방어가 가능했다. 근거리에서 관통력은 상승하는데 근거리에서는 별도의 화살로 관통력을 극대화하고자 했으나, 전투과정을 통해서 실제 장궁자체의 살상력으로 승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것과는 달리, 프랑스군 사상자의 핵심요인은 화승총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후 대부분의 야전에서 스페인군은 이러한 보병중심의 방어적 전술을 지속했다. 실지로, 테르시오로 대변되는 파이크-화승총의 통합운용은 야전에서 실제 관측할 만한 전례를 찾기가 매우 쉽지 않다. 이후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나 30년 전쟁에서나 찾아볼만 하다. 그 시대 이전까지 16세기를 풍미한 스페인군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야전축성을 통해 적의 유효한 접근을 막고 화승총을 활용하는 전술을 견지한다. 이탈리아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중,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만 스페인군은 야전축성의 보호없이 승리했다.(이후 Ceresole전투에서는 패배한다.) 파비아 전투에서는 그러나 파이크병과 화승총병의 효과적인 조합의 결과로서 승리했다기 보다는, 새벽녂의 짖은 안개와 지형상의 문제로 인해 소수 병력으로 분산시킨 화승총병의 유격전의 승리였다고 평해진다.

이러한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스페인군의 야전운용과 조선군의 삼수병의 야전에서의 운용은 "병학지남"과 같은 이론적인 운용상황에서는 불일치하나, 호란과정에서의 광교산, 탑골, 쌍령전투의 실질 조선군의 조총부대 운용과는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1610년 간행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의 "협도곤제"에는 "오랑캐 방비에서 철갑을 입고 말을 탄 군사가 일제히 돌격할 즈음에 장창을 쓰면 부러지므로 오로지 대봉과 협도곤을 사용해야" 승리한다고 적혀있는데 6), 이를 고려할 때 당시 청 기병대가 갑주로 무장한 중장기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진기병과의 조선 북방군의 교전에서 화기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조선 초기부터 교역을 통해 갑주로 무장한 여진기병과의 교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스페인군의 주로 상대해야 했던 프랑스군의 Gendarmes, Men at arms는 조선군이 상대해야 했던 청기병과 유사하다.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스위스 파이크병은 왜란당시 장창 나게야리로 무장한 일본군의 장창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물론 당시 스위스 파이크병은 훈련도, 사기, 편제등 모든 측면에서 비견할 만한 병종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의 피카르디 창병도 스위스 방식으로 훈련하였지만 "동일하게 훈련받았지만 동일한 정신은 없다"라고 평가받았다. 창병의 공세적 운용, 특히 15세기와 같이 이미 다수의 화기를 비롯한 발사무기가 운용되던 상황에서 현대 군사사가들은 스위스군은 "파이크"의 본질적 방어운용과 무기의 특성보다는 그 훈련과 정신, 기율과 사회적 응집성으로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6) 9) )

척계광의 절강병법은 화력측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상태에서 편제상 정규군에 가깝지 않은 왜구를 대상으로 시현되었으며, 절강지방에서는 호준포를 운용한 원인처럼 기병운용이 쉬운 지방은 아니었고 왜구가 대량의 기병을 운용했으리라 보여지지는 않는다. 원앙진과 최소단위의 살수대운용에서 보듯이, "기효신서"는 개개인의 무예의 필요성, 그리고 보다 소규모의 보병 단병접전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실제로 왜구에 대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특히 대형 도검(야태도나 나기나타?)의 무서움을 언급하고, 그로 인해 조총부대에게 양수도를 무장케 한 것처럼, 척계광은 기병과의 교전가능성이나 밀집 장창대와의 교전가능성을 상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후 계주총병으로 옮기면서(실제 대규모 몽골기병과의 교전은 없었다고 한다.) 연병실기를 편찬, 전차, 기병을 혼용하는 거기영진을 만드는데, 여기서 살수대의 장창을 폐지하고 화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개선하게 되는데, 이를 볼 때도, 살수대로서는 기병과의 교전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앙진은 기본적으로 개개인간의 단병접전시 다른 무기를 보유한 살수대 인원이 상호 지원함으로서 백병전에서 조총대를 방어하고, 전층과 후층이 상호지원하면서 화력을 활용하는 형태를 취한다. 만약, 장창밀집대형같이 별도의 개인교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원앙진과 같은 살수대는 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호란당시의 조선군의 야전운용은 지휘관이 어느정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리를 거둔 류림, 김준룡이나 쌍령전투에서의 영장 선약해등은 지리적인 이점을 가진 위치에 방어대형을 구축해야함을 인지하고 있었고, 특히 고지를 거점으로 하고 목책을 설치한 류림의 전투지휘는 Cerignola에서의 스페인군의 야전축성과 비견할만 하다.

먼저, 조선군의 "병학지남"의 장조정식, 즉 주간훈련과정을 통해 관측하면, 야전에서 적과 교전할 경우 조선군의 훈련과정에는 구체적으로 지리적 이점이 활용가능한 방어진지의 구축이나 지침이 제시되지 않는다. 즉 적의 출현시, 야전에서 조선군은 방진을 구축하고 살수대와 조총대를 활용하여 적과 교전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 경우, 가상 적으로 설정가능한 청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야전에서 유효한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조총의 사격과 살수대의 운용을 통해 접근하는 청군과 일본군을 저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조총사격만으로는 척계광이 상대한 왜구라도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1513년 노바라 전투에서 스위스군은 프랑스를 상대로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야전축성을 미리 하지 않은 프랑스측 화승총병과 포대는 스위스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나 저지하지는 못했고 이를 보호하던 란츠크네흐트도 괴멸되었다. 6) 그 때문에 살수대가 필요한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과연 살수대가 청의 중장기병이나 일본측 장창부대를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군의 전례에서는 대부분 지휘관들은 유효한 방어진형을 구축하고 장애물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살리허 전투에서 패배한 강홍립의 조선군은 거마작(거마창으로 추정)을 청의 기병을 저지할 목적으로 지참하였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고 한다. 10)

"병학지남" 2권의 영진정구의 야영편에 보면, 적의 출몰가능성이 낮은 경우에는 거마창과 질려만을 설치하며, 높은 경우 목책을 설치하여 방비를 튼튼히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언급을 고려할 때, 실제로 야전상황에서 조선군이 방어를 수행할 때는 급히 진을 치고 거마창과 질려 및 목책을 설치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그러나, 살리허 전투에서 보듯이 평지지형에서는 거마창과 같은 장애물의 유효성도 떨어진다. 특히 장애물지대는 보병의 공격에 의해서는 제한되는데, 1522년 Bicocca 전투에서 스위스 파이크병은 종대대형에 심각한 포격을 받았으나 대열을 유지하고 참호벽에 도달, 4차례의 화승총 일제사격에도 불구하고 소수가 누벽에 기어올랐으나 마지막에 란츠크네흐트에 의해 격퇴되었다.

황제(독일)군은 Bicocca에서 유효한 방어위치를 채택하고 야전축성으로 강화하였고 이를 다시 란츠크네흐트 창병으로 보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창병은 이를 극복했다. 기병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군의 경우, 거마창, 질려, 목책의 활용 이외에 야전축성을 위한 공병의 활용이나 장비의 적극적 활용을 관측할 수 없다. 평지에서의 이러한 장애물활용은 청 기병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물론 살수대도 이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조선군은 조총부대 집중운용에 필수적인 장애물지대 구축이 충분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 유럽에 비해 다양한 전투사례가 부족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살수대나 거마창이 평지에서 기병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구체적 전례에도 불구하고 조선측의 이에 대한 대응은 연병실기상의 거기영진을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에 국한되었다. 문제는 다수의 수레를 유지, 보수하는 비용과 마필의 조달, 그리고 지형상의 문제점때문에 실용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어영청에 이를 위한 전거가 모두 51량이 있었는데 5륜이 5량, 양륜이 20량, 독륜이 26량이라고 한다. 12) 이는 연병실기상에서 말하는 2개의 불랑기로 무장한 수레일 가능성이 있는 전거가 겨우 5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양륜과 독륜은 아마도 검거(검을 부착한 수레)나 화거(다수의 승자총통을 설치한 일종의 Organ gun), 목화수거로 보인다. 이것으로는 융원필비상의 화거방진도를 위한 100개의 화거와 20개의 목화수거도 충족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거기영진이 가능했다 할지라도, 실용성은 떨어진다. 다시 논하겠지만, 척계광의 연병실기는 몽고 유목민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 청이나 일본같은 수준의 국가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거기영진이나 화거방진이 불가능하다면, 조선군은 장애물지대를 구축하기 위한 별도의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실지로 살수대가 이런 목적으로 활용되어야만 하지만, 그렇지 못했고, 서구적인 장창대형을 활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오히려 장창은 폐지되었다. 이는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밀집대형을 취하지 않는다면, 장창은 그다지 효과적인 병기는 아니다.) 물론 구체적인 전례나, "병학지남"상에 구체적인 야전축성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조선군은 야전축성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부적절하겠지만, 야전축성과 관련된 조선군의 훈련체계 및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전례가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봐야할 것인가? 1619년 살리허 전투과정에서 산해총병관 두송예하의 좌측 중로군의 2진인 2000여명의 전차 및 기병으로 이루어진 유격 공염수와 이희필의 병력은 참호를 파고 전차와 화기를 배치하였다. "연병실기"상에서 고려된 전차의 활용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야전축성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1천여 병력을 이끌고 500여 병력을 하마시켜 공병으로 운용, 전차방어선을 돌파하고 이곳에 기병을 투입하여 격파하였다. 좌측 북로군의 지휘관 마림도 3중의 참호를 구축했다고 한다. 11)

이외에도 1642년 이자성군과 명군과의 주선진 전투과정에서 이자성군은 56Km, 깊이 5M, 너비 5M의 대규모 참호선을 구축했다고 한다. 11) 그 목적은 보급선 차단에 있었으나 이와 같이, 명의 멸망을 전후하여, 참호를 이용한 전례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조선군이 야전축성을 행했을 가능성이나, 적어도, 조선이 야전에서의 삼수병운용에 있어서 야전축성을 도입할 근거는 충분히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호란당시의 목책활용이나 거마창보다는 보다 효과적인 목책의 활용법이 제시되었다. 유성룡은 설책지법에서 행군과정에서 영벽을 구축할 필요성을 제시하며 특히 흙을 사용하는 고래의 영벽과 왜란과정에서 일본군이 활용한 목책을 참작하여 안이 비도록 땅에 박은 목책을 나무로 연결하여 네모지게 엮어서 안에 찰흙을 짚과 섞고 물을 섞어 안애 채워놓고 마르면 다시 쌓아 꼭대기까지 올리는데 그 높이를 한길 반에서 두길(길을 8척에서 10척으로 볼 때, 최소 2.4미터에서 최대 6미터이나, 실제로는 사람키 정도로 가정한다면 1.6미터에서 3미터수준정도로 추정)로 쌓고 다시 안팎을 고운진흙으로 바르면 성이 되며, 네 모퉁이에 포구를 만들어 대형화포를, 중간에는 작은 구멍으로 소형총통을, 꼮대기엔 망루를 만들어 활용하자고 하였다. 12) 이는 16세기 유럽의 공성전에 등장하는 gabion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남북전쟁 당시의 요새에도 나타난다.)

또한, 신속성을 고려한 야전축성에 대한 고려도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숙종 3년 8월 4일 실록에 의하면, 이인척이 아버지 이완이 강구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약 20두(斗)(36리터)의 흙을 담을 수 있는 포대를 병사들에게 지게 하여 3자루씩 쌓아 1첩을 만드는데 이를 빙 둘러 쌓고 성앞에 흙을 판 자리가 해자가 되나 이 방법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고 했는데, 당시 영의정 허적이 이완에게 이미 들은바이며 훈련도감에는 이미 포대가 있고, 총융청은 준비가 어렵고, 어영청에 준비시키면 좋겠다고 답한 것으로 보아 이런 노력이 강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병학지남에는 이러한 야전축성에 대해 영진정구 윤사편에서 호안[壕岸]이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적병이 소수가 다가오면 사격하지 말고 대기하다가 다수가 접근할 경우 지근거리까지 기다리다가 목성, 호안, 거마아래서 연속사격을 가한다고 언급하는데, 이를 상세히 풀이한 병학지남연의 영진정구 윤방편에서는 호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호안은 참호를 의미하며, 성하, 즉 해자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넓이는 3장 5척(10미터 이상) 이상, 깊이는 1장 5척(4미터 이상) 이상으로 하고 물이 깊으면 좋고 얕고 진흙이 있는게 그 다음이며 여기에 찌르는 나무나 대못, 쇠칼날을 넣으면 좋다고 언급한다. 13)

그러나 이러한 해자는 병학지남상에서는 영진을 구축할 때 한다고 되어있는데, 야영상에서는 거마창이나 목책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나, 규정된 해자의 규모로 볼 때, 과연 실제 이런 야전축성을 시행했을까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만약, 이러한 규모의 해자가 축성되고, 이완의 포대의 활용이 실제 시행됬다면 적어도 청기병이던, 일본 보병이던 지근거리에서 조선군의 화력에 일방적으로 학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진을 구축하는 경우이고, 야전에서의 실제 방어, 공격훈련간에 이러한 야전축성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야전축성과 장창대형의 도입은 조선에 성공적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야전축성의 경우, 대부분이 농민이라는 점이나 그다지 독특한 기술적인 우수성이 필요하다거나 거마창과 같이 다수의 장애물을 지참할 필요성이 적다는 면에서 효율적이면서 효과적이다. 특히 야전축성을 통한 누벽과 해자와 같은 형태의 구조물은 프랑스 중장기병의 돌파를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이런 면에서 평지에서도 탑골전투에서 류림이 위치했던 고지대의 잣나무와 같은 지리적 이점이 없더라도 고지와 같은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실제로 많은 무예훈련과 조련이 필요한 살수대운용에 비하여, 장창 밀집대형은 상대적으로 개인의 무예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면에서 조총부대와 유사하다. 스위스 파이크병의 경우, 높은 수준의 훈련도가 필요했는데, 이는 스위스 파이크병이 공세적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화력위주의 조총부대를 주력으로 활용한다면, 장창을 방어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플랑드르 농민병들이 14세기에 증명했듯이 대단치 않은 훈련도로도 가능하다(Caessel에서 플랑드르군은 프랑스에게 패배한다. 그 원인은 기병이 장창대열을 뚫고 들어가서가 아니라 플랑드르군이 공세를 감행하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야전축성과 장창의 활용이 가능했다면, 보다 낮은 훈련수준의 농민병으로 방어적인 상황에서 청이나 일본의 공세는 조총부대의 화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며, 지리적인 취사선택의 범위를 상당부분 넓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러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조선군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스페인군의 야전축성-파이크-화승총의 방어적 운용에서 가졌던 문제점이나, 플랑드르 농민병들이 가졌던 문제점과 유사하다. 방어적인 전술운용은 근본적으로 전장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이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는 공세를 유예하여 방자의 보급선을 끊거나, 또는 원거리에서 효과적인 장거리 화력을 통해 방자에게 피해를 강요함으로서 방자가 자신의 이점을 포기하고 공세에 나서도록 함으로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1328년 Cassel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농민병들이 방어적인 대형을 유지하다가 1304년 Mons-en-Pevele에서 간신히 성공했던 공격행동을 감행하도록 공세를 연기했다. 공자는 단지 공세를 연기함으로서 방자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유럽에서는 화승총병운용이 야전축성과 결합됨으로서 당시 대부분의 군사지휘관들은 방어적인 병력운용을 선호했다. 누구나 유효한 지형을 선점하고 야전축성을 실시했으며 상대가 공격하길 기대했다. 1553년 Marciano에서는 프랑스-시에나군은 합스부르크군과 교전하기 위해 140M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참호를 파고 1주간 저격만을 교환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프랑스-시에네군의 보급이 떨어질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여전히 기병이나 파이크병은 야전축성이나 파이크병으로 보호받지 않는 포병진지나 화승총병을 휩쓸어버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1513년 Novara전투에서 스위스군은 참호진지를 구축하기 전의 프랑스군을 기습했고 포병화력의 피해를 무시하고 방호하던 란츠크네흐트를 격퇴하고 800여명의 화승총병이 이 앞에서 괴멸되었다. 1512년 Ravenna전투에서 프랑스 중장기병은 스페인-교황군 기병을 전장에서 쫒아낸 후, 스페인 보병이 참호로 방어받지 않는 쪽에서 공격함으로서 승리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삼수병운용에 있어서, 야전축성과 장창밀집대형의 운용은 상당한 필수적 요소로 제시될 만 하다. 즉, 야전축성만으로는 살리허 전투나 유럽의 전투사례들에서 언급했듯이 조총부대에 충분한 방어력을 제공하기 어려우며, 기병과 보병이 궁극적으로 극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의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고 야전축성과 장애물지대를 구축한다 할지라도 전장의 주도권을 양도함으로서 이러한 이점을 포기해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총부대를 공세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개인의 무예수준보다 단순한 훈련이 가능하며, 기병 및 보병의 공세에 방어적으로 운용가능한 장창밀집대형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척계광이 대안으로 제시한 거기영진또한 대안이 될 수 있으나, 호란이후의 일본 및 청의 군사기술의 수준과 유럽에서 유사하게 적용된 "Wagenburg"의 등장과 몰락을 고려할 때에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장창밀집대형의 경우에도 물론 유럽에서 증명됬듯이, 상당한 수준의 훈련체계와 개개 병사에 대한 통제와 기율이 필요하다.(스위스 파이크병은 동질적 사회계급과 지속적인 훈련, 군악을 통해 이를 달성했는데, 부분적으로 일본의 아시가루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유럽의 용병에 대한 선호는 어떤 지역에 대한 독특한 선호에 기인한 면이 큰데, 란츠크네흐트는 주로 스와비안 지역에서, 저지대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왈룬인들이 용병으로서 선호되었다. 동일한 사회계급이 창출하는 전우애와 상호간의 규율로 인해 신뢰받았으며, 마키아벨리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민병보다는 덜 폭력적이고 믿을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수대 운용에 비해 개인의 무예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무장의 표준화에 용이하며, 갑주를 무장할 필요가 적고, "병학지남"상의 훈련체계나 군악운용의 수준은 당시 유럽의 창병운용보다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파이크대형의 도입은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야전에서의 대형화기 운용과 연병실기상의 거기영진, 융원필비의 화거방진에 대해서 유럽의 사례를 다룸으로서 조선군의 삼수병 운용과 이의 개선방안이 가졌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해서 논해보도록 한다.


참고문헌

1)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2) 정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
3) 누리한국한 DB시리즈, "병학지남"
4) 이긍익,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연려실기술 26권”
5) http://www.koreanmonsters.com, “해동명장전에서 류림에 대한 내용”
6) Bert S. Hall,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Weapons &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www.swords.pe.kr, "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인 運用"
9)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0)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11) http://munjeyouth.egloos.com, 문제청년님의 "사르후 전투(1619)", "이자성의 난~하남 전역(1641~44)"
12)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만기요람, 2 군정편”
13) 이상정, 국방군사연구소 편역, "병학지남연의" 영진정구 2권 윤방편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2



2) 조선군의 대형화기의 야전운용


왜란 이후의 조선의 주력 화포는 불랑기라고 할 수 있다. 만기요람 군정편에 의하면 북한산성의 3영, 승창의 병기고에 유(놋쇠)불랑기가 도합 415문, 철불랑기가 60문으로 소화기인 목모포나 단가포류에 비해서도 많은 수를 점유하고 있다. 어영청과 총융청, 훈련도감 자체 병기고에도 금위영이 위원포가 79문으로 다수인 것을 제외하고는 훈련도감에 불랑기 65문, 어영청에 60문으로 주종을 이룬다. 예외적으로 어영청에 동포 116자루, 훈련도감에 동포 119문이 있는데, 이는 이전의 지자, 현자, 황자총통으로 추측되는데, 금위영에서 승자동포라고 지칭되는 2문의 포가 있고 이러한 총통류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동포 역시, 어영청의 기록에 의하면 116문중 장동포가 8문, 중동포가 3문, 단동포가 78문으로 단동포가 주종을 이루는데, 승자총통이 단동포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14)

조선후기 대원군 이전까지 가장 강력한 화포라고 할 수 있는 홍이포의 경우 영조 7년(1731년) 9월 21일 실록에 훈련도감에서 최초로 2문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훈련도감에 2문의 홍이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추가로 다수의 홍이포를 제작한 것 같지는 않다. 현종수정실록 5년(1664년) 6월 24일의 강화도어사 민유중의 보고에 의하면 강화도에는 대포 1백 79좌, 남만 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 2백 44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자체제작하기 이전에도 홍이포류의 서양화포가 수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서도 여전히 불랑기가 가장 주력이라 할 수 있다.

불랑기의 사거리는 해군충무공 유물발굴단, 해군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에서 총통실물유물을 참조하여 복제품을 제작하여 실험한 결과, 철환을 사용할 경우 1300m에서 1400m의 사거리가 나왔다. 15) 구경은 불랑기 4호가 경복궁이나 육군이 보유한 것이 33mm에서 40mm고 주로 40mm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는 86.5cm에서 104cm에 이른다. 무게는 32.5kg에서 74kg이다. 화포식언해, 화기도감의궤에 따르면 불랑기 4호는 3척 1촌 7분(90cm 이상), 무게 90근(54kg)인데, 화약은 3냥(112g)을 사용한다. 16)

불랑기 5호의 경우 실물유물은 2개 유물이 남아있는데, 구경은 83.5cm와 69.7cm, 구경은 23mm와 25mm, 무게는 17.8kg과 29kg이다. 화포식언해와 화기도감의궤에 의하면 불랑기 5호의 길이는 2척 6촌 5푼(80cm수준), 무게는 60근(18kg수준), 화약은 2냥(75g)을 사용한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4호와 5호를 구분한 어영청의 경우, 4호가 10문, 5호가 50문이며 훈련도감의 경우, 4호가 15문, 5호가 50문이었다. 5호가 상대적으로 더 주종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불랑기의 적정한 유효사거리는 어느정도일까? 병학지남 성조정식 일면조편에서 불랑기의 사격거리는 백보로 조총과 동일하다. 주력화기인 불랑기 5호의 구경은 25mm이며 무게는 최대 29kg수준이다. 사람이 들 수 있는 정도의 무게라고 볼 수 있다. 사용하는 화약은 2냥, 112g인데, 이러한 기술이 전래된 시점의 1639년 영국의 화포표준에 의거해서 유사한 화포를 찾으면 Base뿐이다. 이 화포는 구경 1.25인치(31.75mm), 무게 200파운드(90kg), 발사체는 3분의 1파운드(453g), Corned powder를 사용시 화약량은 0.25파운드(113g), 사거리는 직사거리가 100pace(75m), 최대사거리가 560pace(420m)다. 17)

철환의 경우, 백보로 사정거리를 설정한 것은 산탄사격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단일철환을 발사한다 할지라도, 동시대 서양과 유사한 사거리일 가능성이 높다. 단일체로 야전에서 사격을 할 경우 동시대 유럽처럼 도탄사격(ricochet fire)를 가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도 유효사정은 Base포와 같이 75m 내외수준의 직사사격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지표면에 대한 입사각이 클 경우 도탄되지 않고 지면에 박혀버리기 때문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경이 Base가 불랑기 5호보다 크다는 점에서 단일철환을 사용시 불랑기 5호의 사정거리가 더 길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화약량을 고려하면 이 정도는 줄어들 것이다. 또한 화약의 구성비율에 따라 사정거리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원거리 사격용으로 대장군전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으나, 병학지남 성조정식 우마장준비에 의하면, "우마장 내에서 유병(遊兵)은 총안(銃眼)으로 바깥을 내다보아 적세가 적으면 총을 쏘고 적세가 많으면 대장군전[大將軍]을 쏜다."고 되어 있다. 우마장은 해자와 성벽사이에 설치되는 구조물로서, 양마장이라고도 한다. 만기요람 관방총론에 유성룡의 축성론에서 언급되는데, 양마장을 성밖 참호안에 높이 한길(2.4m, 그러나 사람 키높이로 볼 수도 있다.)로 담을 쌓고 밑에 구멍을 뚫어 대포를 쏘며 중간에 구멍을 뚫어 조총을 쏘는 "기효신서"에 언급된 방어구조물로서 2004년 경남 하동의 하동읍성에서 발견되었다. 12)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장군전은 직사거리내에서 조총의 사격거리와 유사한 권역에 적의 밀집대형을 대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불랑기는 야전에서 활용할 만한 기동성을 갖추었을까? 이문제는 상당히 밝혀내기 어렵다. 불랑기는 4, 5호가 각각 각각 최대 74, 29kg이 실물유물을 기준할 때의 무게이다. 이 무게는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스웨덴군에 도입한 경야포 Regimental gun, 즉 연대포보다 훨씬 가볍다. 이 포의 무게는 겨우 138kg에 불과했으며, 3파운더 포였다. 18) 이포는 구경이 유사한 1639년 영국기준의 Minion포가 498kg인데 비해 현격하게 가볍다. Regimental Gun은 포신을 짧게함으로서 무게를 최소화했고 기동성을 강화함으로서 기동력이 강화된 스웨덴 보병과 같이 이동하면서 전면에서 화력을 지원할 수 있었다.

즉 중량면에서 불랑기는 충분히 야전에서 운용되기 적절하다. 정확히 말하면, 16세기에 활용된 주된 효과적인 대구경 야포는 12파운더 급으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데미컬버린은, 1639년 영국기준으로는 3000파운드, 즉 1.3톤에 달한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Lech강 도하 전투에서 오로지 포병만으로 틸리를 패배시켰는데, 이당시 18문의 24파운드 포가 사용되었다. 24파운드 포는 1639년의 영국기준의 경우 19파운더 포인 컬버린을 상회한다.(컬버린이란 명칭은 국가간 기준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애매한데, 스페인의 경우 24파운더 급을 컬버린이라 하지만 탄체무게는 20파운드에서 50파운드까지 존재한다. 20) ) 이 포의 무게는 4500파운드, 즉 2톤급으로 홍이포수준이 된다.(홍이포는 무게는 컬버린급이지만 구경은 100밀리로 데미컬버린 수준이다.)

즉 야전에서의 공세상황에서 직접화력지원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홍이포도 야전에 투입될 수 있다. 게다가 조선군의 야전에서의 삼수병체제는 화력위주의 방어적 병력운용을 지향하기 때문에 사전에 포병진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홍이포도 충분히 투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에서는 실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포가와 병참체제의 문제 때문이다.

조선에 근대적인 개념의 포가가 존재했는지 여부는 매우 불명확하다.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차와 같은 수준의 포가는 이미 존재했지만, 조선 후기에 근대적 포가의 존재에 대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는 아마도 주로 성곽위주로 배치된 것으로 보이며, 동차외에도 고정을 위한 구조물에 포를 배치하기 위해서 정철, 또는 족철이라 지칭하는 구조물을 포이(포를 고정시키기 위해 양측으로 튀어나온 돌기)에 연결시켰다. 현종 6년(1665년) 5월 8일, 통제사 정부현에게 강화도로 불랑기등 무기를 보내게 한 기록에 따르면 불랑기 50문을 보내는데, 1문마다 족철 1개씩을 만들어 보낼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족철은 15세기 폴란드 포병교범 "Dell' Aqua Praxis"에 등장하는 1파운더 포의 Smeriglio(포가륜)과 Sleigh(포가 활동부위)에 대한 묘사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 즉 15세기 초반에는 이미 유럽에서는 근대적인 포가가 등장한 상황이었다. 부르고뉴군은 1430년대에 이미 Serpentine포를 사용했는데, 50에서 150mm수준의 구경과 7피트(213cm)정도의 포신길이에 양륜을 가진 근대식 포가에 설치되었다. 21) 1430년대에 그려진 현재 루브르에 소장된 후스파 군대의 전투도에는 양륜의 근대식 포가에 설치된 화포가 그려져 있는데, 1426년 Usti에서 후스파 군대는 Houfnice라는 단포신 대구경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두었다. 22)

이러한 15세기 초의 포가의 등장을 통해서 유럽은 대구경 화포에 기동성을 부여할 수 있었고, 공성전에서 확연한 위력을 드러내는 1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야전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대구경화기의 야전투입이 가능해졌다. 즉 화포가 운용되는 매우 초기시점에만 조선에서 일반적인 족철의 활용이 소구경야포에서나 보여질 뿐, 기동성과 반동을 흡수하는데 용이한 근대식 포가가 신속하게 도입되어진 것이다.

조선의 경우, 근대식 포가는 독립기념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1869년에 운현궁에서 제작된 대포, 중포, 소포의 포가다. 훈국신조기계도설에는 신헌이 고종 5년 1868년에 제작한 불랑기 동거가 수록되어 있는데 아래쪽에는 4개의 통나무바퀴가 달린 직사각형의 나무판이 그 위에 구름모양의 활차가 실려 있어 불랑기는 이 활차의 좌우에 있는 구멍에 포이를 걸어 적재하여 활차는 좌우회전이, 불랑기는 포이를 상하조정할 수 있어, 이전의 동차보다 조준에 효과적이었고 활차좌우에 각각 2개식의 자포를 실어서 운반했다.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마반포거, 쌍포양륜거가 제작되었는데, 여전히 이후 제작된 소포, 중포, 대포와 같은 근대식 포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1)

고종대에 와서야, 이러한 포가가 개발되고 근대식 포가가 전래될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전까지는 야전에서 필수적인 포가의 도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때로 국내에서는 조선후기의 화포의 야전운용가능성을 실록자료를 통해 제시하기도 한다. 영조 7년(1731년) 9월 21일의 훈련도감이 홍이포에 대해서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동포가 50문, 홍이포가 2문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를 싣는 수레가 52대임을 언급하고 있다.(별도로 동포의 탄환도달거리가 2천보(2480m), 홍이포의 사정거리가 10리(3.92km)라고 이것을 실제 그대로 보아 서양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는데, 홍이포의 모델로 추정되는 12파운더 데미캘버린(스페인 16세기 기준)의 최대사정은 5000야드로 4.57km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이 추정하는 실제 최대사정은 1600야드, 유효사정은 500야드 수준이다.)

이외에도 현종 5년(1664년) 6월 23일 강화도 어사 민유중의 서계에 따르면, 화기 가운데 불랑기를 넉넉하게 제조하고, 화기 가운데 무거워 운반하기 어려운 것이 많으니 몇사람이 싣고 끌수 있는 작은 수레를 별도로 만들자는 내용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 후기에 야전에서의 화포운용이 가능한 증거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하다. 만기요람 군정편에는 북한산성의 금위영창에 동차 32좌가 있는 것까지도 언급하고 있는데, 군기편에 각 병기고에는 이러한 수레를 찾아볼 수 없고, 이를 위한 별도의 복마군(복마(짐말)을 담당하는 병력)도 편성되있지 않다. 또한 당시의 조선의 수레는 매우 열악한 구조였고, 대부분 황소나 말이 끌기 보다는 사람이 미는 것을 기대하고 만들어진 병거가 대부분이다. 어영청이 보유한 전차 51량중 독륜거가 26량에 달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불랑기가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점에서 들거나, 또는 말에 실어서 이동할 수도 있다. 불랑기 5호는 36kg상당으로 실질유물은 20에서 29kg정도로 더 가볍다. 4호의 경우도 60kg정도나 32.5kg짜리도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조선군의 병참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수레가 아니라 마필이라는 점이다. 훈련도감은 도합 332필의 색복마를 보유했는데, 수레는 9량에 불과했다. 수레는 보급용이 아니라, 아마도 24척에 이르는 훈련도감 직속 수하선, 수상선이 지방에서 가져오는 조총색, 화약색의 유지물자를 이송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 조총색 배속이 3량, 화약색 배속이 6량이었다. 14) 한필의 복마는 100근의 짐만을 이송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60kg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최소 20kg의 모포에, 자포 4개가 더해지고, 필요한 연환, 화약등을 고려하면 불랑기 5호 1문을 이동하는데 최소한 2마리의 시복마는 필요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병력이 이를 분담하는 대안의 경우, 보병은 이외에도 거마창과 같은 장애물을 번갈아가면서 들어야할 의무가 있었다. 13) 332필에 달하는 색복마는 보급품을 실어야 하는데, 짐말을 부릴 경우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불랑기를 포신만 가지고는 제대로 활용할 수 없고 최소한 기가나 포가, 아니면 동차라도 있어야 거치와 포격이 가능할텐데, 동차는 끌어서 이동한다 해도 복마나 개개 보병에 대한 부담이 커진다. 즉 근대식 포가나 수레가 없다면 야포의 야전활용은 심각한 문제에 부딫친다.

왜 화포의 야전활용이 중요한가라는 본연의 문제로 돌아가면, 2가지 전례를 통해 그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1450년 4월 15일 프랑스 Formigny에서 영국군은 평야에서 프랑스군과 직면했다. 영국군은 아쟁쿠르와 동일한 방식으로 측면에는 장궁병, 중앙에는 하마한 기사와 보병이 위치했고 장궁병들은 날카로운 말뚝을 전면에 박아서 장애물지대를 구축했다. 프랑스군은 아쟁쿠르에서처럼 바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2문의 컬버린(야전운용이 가능한 중포로 추정되는)을 배치하여 측면에서 포격을 감행했다. 구형탄체로 가해진 포격으로 영국군은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 참호와 장애물지대를 떠나 포대에 공격을 감행해 점령했다. 이 대포를 아군 방어선쪽으로 끌고가는 도중에 프랑스군은 대열이 흐트러진 영국군을 양측방에서 전통적인 기병전술로 공격했다. 영국군은 용맹하게 싸웠지만, 전투가 끝나고 난후 3000명 이상의 영국군이 포로가 되었다. 지휘관 토마스 키리엘 경도 포로가 되었다. 6) 이 전투로 인해, 더 이상 영국군이 1333년 Dupplin Moor전투와 Halidon Hill전투를 통해 시작한 장궁-보병전술이 더이상 무적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프랑스군은 이 성공을 스페인군을 상대로 다시 이룩한다.

1503년 Cerignola에서 화승총과 참호를 통해 대승을 거둔 스페인군으로 인해, 방어적으로 개인화기로 무장한 병력을 야전축성을 통해 활용하는 스페인군의 전술이 정립된 후 얼마 안되서 이것이 무적이 아님을 증명하는 전투가 1512년 3월 11일 라벤나에서 벌어졌다.

스페인-교황동맹군은 공성중이던 프랑스군에게서 라벤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접근했다. Cerignola에서 스페인군의 화기 및 축성을 담당했던 페드로 나바로가 지휘를 맡은 동맹군은 이를 재현하기 위해 라벤나 남쪽에 야전축성을 실시하고 공격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보급물자가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페인-교황군의 진지에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측 지휘관 Gaston de Foix는 Cerignola에서와는 달리, 신중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는 공성중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포애호가인 페라라대공이 프랑스측 동맹으로 포병지휘관으로 전투에 참여하였기에 포병화력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전투를 포병화력교환으로 시작했다. 스페인측의 포격은 프랑스군의 중앙보병에게 가해졌고, 프랑스군은 스페인측의 측익 기병대에 강력한 포격을 가했고, 그 결과 양자는 포격으로 인해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프랑스군 중앙의 보병은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공격을 감행했으나, Cerignola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참호지대를 건너면서 지근거리에서 화승총사격에 피해를 입고, 대열이 흐트러진 프랑스측 보병은 스페인 보병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프랑스군 보병과 마찬가지로 포병화력에 노출된 스페인측 중장기병과 Jinte, 경기병은 프랑스측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통일된 공세를 가하지 못했고 프랑스 중장기병은 이들을 무찔러 전장밖으로 몰아내었다. 중앙에서 스페인군은 거의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으나, 결정적인 일격은 스페인기병을 추격하던 것을 멈추고 돌아온 프랑스 중장기병에 의해 가해졌다. 스페인 기병이 떠난 진지쪽은 중앙에 대한 참호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고, 이 지역으로 진입한 프랑스 중장기병이 스페인 보병의 후방을 공격했고 전선은 붕괴되었다.

Fomigny와 라벤나에서의 프랑스군의 승리는 방어적으로 축성진지를 구축하고 장거리화력을 활용하는 상황에서, 공자가 강력한 포병화력을 보유할 경우에는 Cerignola나 아쟁쿠르같은 결과가 도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라벤나 전투는 야전축성으로 방호되지 않는 보병에게 기병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란 이후, 조선이 상정할 수 있는 가상적국은 역시 청과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의 경우, 명대에 영원성에서 홍이포가 성공을 거두자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제작시킨 홍이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홍타이지(청 태종)는 1631년부터 이러한 대형화포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1642년에 명에 대한 대규모 공세준비의 일환으로 홍타이지는 홍이포를 주조했던 진저우에 대포주조공장을 건설하고 대포 구경 및 화약량, 발사체등에 대한 표준화가 시작되었으나, 이는 여전히 명이 영원전투 이후 시작한 포르투갈 대포를 모방했던 모델에 기반해 있었다. 23)

강희제대에 와서 청의 화포에 대한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673년 삼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의 화포는 다양한 타입으로 개량되었는데, 특히 경량화된 대포가 등장했다. 강희제 시대에 주조된 총 900문의 화포중 500대가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시기에 포가에 설치된 경량화된 포가 제작되어 삼번을 진압하는데 활용되었다. 이시기의 대포는 예수회 선교사 베르비스트(한자명 남회인)이 제작을 주도하였다. 23)

이 시기의 청의 대표적인 화포는 3가지인데, 200kg정도의 무게에 2륜 포가, 그리고 200m에서 300m수준의 유효사정을 지녔으며, 900g의 포탄을 발사하는 경야포 "Shenwei"포(선위포?), 2톤에서 3.5톤정도의 무게, 10kg의 포탄을 발사하며 역시 바퀴가 달린 포가에 설치된 "wuchengyongyu"포, 그리고 3륜 포가에 설치된 500kg 정도의무게, 1.8kg의 포탄을 사용하는 "Shengong"포가 사용되었다. 23)

일본의 경우, 1847년의 "大筒?之?" 에 대포를 주조하는 그림이 남아있으며 1850년에 최초의 서양식 대포를 주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다산시문집 11권 군기논이편에서 "호준포, 백자총등은 오히려 소루한 무기에 속한다. 홍이포란 무기는 빠르고 강해 잔혹하기가 전에 비할 수 없는데, 중국 일본에서는 사용한지 오래다"라고 언급한바 있다. 2) 또한 1635년부터 1641년까지 히라도에서의 네덜란드 상관의 수출입품목록을 보면, 기병총을 비롯하여, 피스톨, 화승총, 그리고 박격포나 야포, 대포와 포가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본내에서 포가용 차바퀴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24)

이를 고려하면, 조선의 가상적국이 될 수 있는 두 국가 모두, 적어도 16세기 수준의 유럽 화포, 그것도 근대식 포가를 갖추어 야전운용될 수 있는 화포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청과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한다면, 야전에서 조선군은 적어도 홍이포 수준의 사거리를 갖춘 대구경 화포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라벤나 전투나, Fomingny전투를 조선군에 대입한다면 이런 결과가 도출된다. 조선조정이 끊임없이 걱정한 백병교전을 걱정할 일 없이, 삼수병이 호란과 같이 고지, 또는 평야에서 철저하게 야전축성을 실시한다고 가정한다. 적어도 개인화기의 화력측면에서 청이나 일본은 조선에 대응하지 못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조선군은 조총사거리 이상에서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구경 화포를 야전에서 지참하고 운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경우 성곽에서 유효사정 백보(124m)의 불랑기를 사격한다고 가정할 경우, 유사한 구경의 영국제 Base포와 유사한 사정거리의 경우 최대사정은 420m, 그러나 단일탄체가 아닌 산탄을 사용할 경우, 200m내외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국내실험결과에 따른 1300m에서 1400m수준의 최대사정이 실제 가능했다고 본다해도 유효사정은 더 짧다.

청군의 "wuchengyongyu"포의 경우 유럽의 24파운더 급인데, 16세기 스페인의 해군용 동급화포의 최대사정은 6000야드, 직사거리가 1700야드 수준인데, 12파운더급 야포사정의 경우 1600야드 이상은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경우 유효사정이 500야드를 약간 상회하는데, 24파운더 포의 유효사정도 이를 크게 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라벤나 전투와 같이, 만약 조선군이 강력한 야전축성진지를 구축하고 복마에 실은 소구경 화포를 동원한 경우에는 청군이나 일본군 모두 급하지 않게 대구경 화포를 투입할 수 있다. 이 경우, 불랑기의 최대사정 밖에서 사격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전투에서 청군은 홍이포로 공격을 가하다 조선군의 불랑기사격에 피해를 입는데, 이는 고지인 산성으로 인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일본이나 청은 근접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입지 않고, 원거리에서 대구경화포를 활용하여 타격을 가함으로서 조선군이 자발적으로 진지에서 공세를 감행하도록 유도한 후, 우월한 청기병이나 일본의 장창대가 조선군을 휩쓸게 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즉 기동성을 갖춘 장사정 화포를 보유하지 않는다면, 기동력을 갖춘 기병전력이나 공세적으로 운용가능한 보병대형을 갖추지 않는한, 기존의 방어적 대형은 라벤나 전투, Fomingny와 같은 패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때문에, 조선 후기 삼수병 운용은 충분한 야전축성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야전에서의 공세적 운용이 가능하지 않는한 가상적국인 청과 일본의 군대에 전술적으로 열위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2) 정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
3) 누리한국한 DB시리즈, "병학지남"
4) 이긍익,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연려실기술 26권”
5) http://www.koreanmonsters.com, “해동명장전에서 류림에 대한 내용”
6) Bert S. Hall,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Weapons &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www.swords.pe.kr, "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인 運用"
9)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0)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11) http://munjeyouth.egloos.com, 문제청년님의 "사르후 전투(1619)", "이자성의 난~하남 전역(1641~44)"
12)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만기요람, 2 군정편”
13) 이상정, 국방군사연구소 편역, "병학지남연의" 영진정구 2권 윤방편
14) 민족문화추진회 편역, "국역 만기요람 군정편"
15) 신재호 디펜스코리아 전쟁이론분야 자문위원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요 무기체계"
16) 채연석, 강사임, 한국과학문화재단, "우리의 로켓과 화약무기"
17) Roger Towner, Richard Roberts, "Information for the parish of Rowner near Portsmouth southern England in 1642"
19) Richard Brzezinski, Richard Hook, OSPREY "The Army of Gustavus Adolphus 2 CAVALRY"
20) Albert Manucy, National Park Service, "ARTILLERY THROUGH THE AGES"
21) Nicholas Michael, G A Embleton, OSPREY "Armies of Medieval Burgundy 1364-1477"
22) Stephen Turnbull, OSPREY, "The Hussite Wars 1419-36"
23) Nicola Di Cosmo, University of Canterbury, "European Technology and Manchu Power: Reflections on the "Military Revolution" in Seventeenth Century China"
24) 유쿠타케 가즈히로, 도쿄대 사료편찬소, "에도시대의 네덜란드선 무역"


훌륭한 글입니다. 몇가지 사소한 지적...
-불랑기 사거리와 대장군 해석 문제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글 쓰는데 상당한 품이 들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몇 가지 사소한 의문점을 지적하겠습니다.



1) 불랑기의 사거리 문제

조선후기의 표준교범이라고 할 수 있는 병학지남 성조정식 일면조편을 인용, 불랑기의 사격거리는 백보로 조총과 동일하다고 설명하셨는데 이 부분은 사실상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그대로 옮겨 쓴 부분이므로 과연 이 구절이 조선시대 불랑기의 유효사거리를 추정하는데 유효한 자료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병학지남 성조정식 일면조편의 해당 구절은 18권본 기효신서 練守城解편의 百步內本回不待中軍號令自擧砲佛狼機鳥銃齊打를 사실상 그대로 옮겨적은 것입니다.

더구나 기효신서 불랑기제 편에 나오는 불랑기의 규격(1등~5등)을 보면 우리나라의 화포식언해나 화기도감의궤에 나오는 규격과 차이가 큽니다. 예를 들어 기효신서 불랑기 중에 제일 작은 5등이 길이 1척, 화약 5전이지만 화기도감의궤의 조선 불랑기 5호는 길이 2척6척5푼에 화약 1량 5전입니다. 다시 말해 애당초 명나라의 불랑기와 조선의 불랑기는 규격이 모조리 다릅니다. 기효신서에 규정된 사격 지침을 가지고 조선군 불랑가의 유효사거리를 논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기효신서 불랑기해 편에서 척계광은 불랑기 1,2,3등은 선박이나 성,영,루 같은 요새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불랑기 4등은 행영(行營), 다시 말해 야전 기동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불랑기 5등은 장난감 같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결국 척계광이 연수성해 편(조선 병학지남의 성조정식 일면조편에 해당)에서 언급한 불랑기는 명나라 불랑기 중 1,2,3등으로 봐야하는데 과연 이것이 조선식 불랑기 중 어느 호에 해당할지는 좀 더 비교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런 선행 비교 과정 없이 척계광의 지침만으로 조선군 불랑기의 유효사거리를 논하는 것은 더욱 위험 부담이 큽니다.

한편, 기효신서 연수성해편에서 불랑기나 조총의 사거리로 언급한 100보는 전체 문맥으로 본다면 <100보 이내 거리로 들어왔을 때는 상급자인 중군의 지시가 없더라도 알아서 사격하라>는 의미입니다. 유효사거거리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성곽 방어전에 있어
서 최후 저지사격의 느낌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구경이나 화약량, 발사체 무게 같은 몇가지 단서만으로는 사거리의 편차가 너무 큽니다. 어차피 명시적인 실험 결과를 제시할 수 없는 상태라면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의 impetus나 열역학적 효과계수, 포구 초속 같은 구체적인 검증 수치가 없이 몇몇 유사성만으로 동시대 유럽 포와의 사거리 비교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너무 클 것 같습니다.

또한 지상에서 포탄이 구를 수 있는 입사각을 유효사거리로 친다는 전제도 발사체의 특성을 감안해서 조금 더 검증할 여지가 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2) 수성작전에서 대장군전의 전술적 운용 문제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병학지남 성조정식 제8우마장준비편에 나오는 대장군(大將軍)의 해석 문제입니다. lemiel님은 이것을 대장군전으로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수성작전에 있어서 대장군전의 전술적 운용문제를 논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병학지남연의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병학지남 자체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제가 소장한 병학지남 고판본의 우마장준비제8편을 보면 勢大對放大將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전체 문맥으로 보아 기효신서 우마장해 편의 敵衆則用大將軍을 번안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마장에서 대장군을 사용한다고 말한 사람은 척계광이므로, 척계광이 말한 대장군이 무엇인지 다시 검토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기효신서가 발행될 무렵의 명나라군대는 대형 화살형 발사체를 화포에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이 대장군은 절대로 조선의 대장군전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척계광이 말한 대장군은 명나라 문헌상의 무적대장군이나 대장군포, 내지 현재 실물이 엄청나게 남아있는 명나라 대장군포(大將軍砲)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병학지남연의 등 조선시대 일부 병학지남 주석서에서 병학지남 본문의 대장군을 대장군전으로 풀이한 것은 명나라 척계광 시대의 중국 무기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 명나라 대장군포로 생각하지 못하고 비슷한 이름의 우리나라 무기 이름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굳이 기효신서의 해당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병학지남연의본이 아닌 병학지남 자체만 봐도 문맥상 대장군이 조선군의 대장군전일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3) 야전에서 화포 운용 문제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선군이 야전에서 화포 운용 능력이 극도로 제한돼 있었다는 lemiel님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포가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군이나 수성 책임을 맡은 육군 지방부대가 아닌 기동부대인 중앙의 핵심 군영에서 조총 수준을 넘는 대구경 화포 운용을 위한 체계적인 편제나 훈련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을 봐도 야전에서의 대구경 화포 운용에 대한 체계적 고려가 부족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병학지남 뿐만 아니라 상당히 토착화가 진전된 조선 영조대의 속병장도설이나 정조대의 병학통 같은 兵書에도 수성전이 아닌 야전에서 대형 화포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거의 (사실상 전혀)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lemiel님의 지적대로 수성전이 아닌 기동작전시에 화포를 운용할 준비가 부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어차피 조선시대 삼수병과 유럽, 청과 일본까지 비교하신다면 연대 설정과 실제 기술의 보급 문제에 있어 조금 더 엄격한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일본이 서양식 포가를 도입한 화포를 대량으로 배치한 것이 언제인가 같은 문제도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전제가 없이 조선군이 야전에서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면 조금 무리일 것 같습니다.

또한 삼수병 특히 조총병을 중심으로 어떤 방식으로 병종을 조합해서 전투를 수행할 것인가가 논문의 핵심 주제라면 정온의 삼첩진에 대해서도 반드시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병학지남과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병 운용에 있어 차이점이 적지 않은 정조대의 병학통에 대한 분석도 필수적일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효종, 현종대에 남만식 화포의 포가에 대해서 조선군 나름대로의 분석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건 해당 자료를 확인하고 추가적으로 논해야 할 것 같군요.



* 참고-본문 중에 Nicola Di Cosmo의 글에서 인용하신 청나라 Shenwei포는 神威將軍砲, wuchengyongyu포는 武成永固大將軍砲, Shengong포는 神功將軍砲를 각각 지칭한 것 같습니다.
shen이면 神 외에는 달리 대포 이름으로 사용할만한 한자가 없고 무게나 제원으로 봐선 神威大將軍砲나 神威武敵大將軍砲가 아니라 神威將軍砲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wuchengyongyu는 표기법이 약간 이상한 것 같은데 이런 유사한 발음이 날수 있는 포는 武成永固大將軍砲 외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길어서 다시 옮기면서 정리합니다)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3


3) 조선군의 전차전 운용과 도입에 대한 논쟁의 무용성


조선군의 전차전 운용은, 중국의 거기영 운용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전차운용의 목적은 주로 청기병을 그 대상으로 하여, 어왜전법 위주였던 척계광의 절강병법에서 척계광이 계주총병으로 이전하여 북방의 몽골기병에 대치하게 됨으로서 "기효신서"의 법에 추가, 보완하게된(조선의 기효신서의 경우, 연병실기의 내용이 포함된 판본이 존재한다.) "연병실기"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차전 운용에 대한 중국에서의 실례는 명에성는 이미 1447년에 실시되었는데, 통병관 주면이 화차비전방안(火車備傳方案)을 통해 전차전에 대해 논의한 기록이 있고,  가정 43년(1564년)에는 중앙군인 경영(京營)에 차영(車營)을 건립하여 각각 신창 2기, 협파창 2기를 보유한 전차 4000량을 보유했는데, 각각 5명의 보병이 탑승하였다. 1569년 계주총병 척계광이 계주에 7개 전차영을 설치했는데, 각 전차영은 포를 장착한 중차 156량 또는 창을 장착한 경차 256량으로 구성되며 1개 차영에는 보병 4000, 기병 3000이 배치되는데, 그 운용방식은 방진을 구축하고 가장 외부에 전차들이 배치되며 전차전면에 거마창을 설치하고 화포사격을 가하다 보병이 저지하고 패퇴하는 적을 기병이 추격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천계연간(1620~1627)에는 수종의 전차가 제작되었는데, 화창, 화총이 설치된 독륜소차, 화포를 장착한 쌍륜차가포, 창과 검을 부착한 독륜차재창을 비롯하여 륜차, 중차등이 제작되었다. 25)

척계광은 계주총병제직시에 이러한 전차부대를 실제 몽고기병의 대규모 공세에 활용할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이미 언급한 1619년 살리허 전투에서 명군은 참호를 파고 전차를 배치하였으나 하마한 청군이 참호 및 전차돌파에 보병으로 투입되고 이어서 여기에 기병을 투입함으로서 승리했다. (병력비 명 2000 : 청 1000) 마림 휘하의 명군도 전차를 이용한 엄중한 방어진을 구축하였으나, 청군은 고지를 장악함으로서 마림이 진지를 이탈하도록 강요했고 결국 고지에서의 격전끝에 명군이 패배했다. 11)

명군의 전차운용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조선후기 군사체제의 기틀로 삼던 조선에서 하나의 화두가 되는데, 선조 26년(1593년) 1월 8일 실록에 따르면 남병 지휘관(선조 31년 4월 24일자 기록에 따르면)인 유격 척금(戚金)의 전차 100량이 수송되어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3일후인 선조 26년 1월 11일 중국각영병에 대한 실록에 의거하면 척금은 보병 1천을 거느렸다고 한다. 척계광의 연병실기상에서 1개의 전차에 10명의 보병이 탑승하는데, 지휘관인 차정 1명, 수레의 운전수인 타공이 1명, 화전수가 2명, 불랑기를 쏘는 랑기수가 6명이다. 26)




1개 전차에 편제된 전차병과 이를 보조하는 살수대를 개편한 보병편제

수레의 수가 과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척금의 보병전력이 전차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던 전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듯 하다. 이미 선조 26년에 명의 위원랑 유황상이 조선조정에 전차전을 배울 것을 언급한 것을 비변사가 알린 기록이 실록에 있으며, 선조 37년에 훈련도감은 기효신서외에 연병실기에 대해 보고한 실록내용에 따르면 연병실기의 거기보 통합운용 및 전차의 화기활용, 그리고 이러한 전차전이 북방기병에 적합함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는 초본 기효신서의 법대로,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는 연병실기의 법대로 가르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전차운용에 대한 구체적인 체계를 제시한 경우는 3가지인데, 먼저 선조대에 연병실기를 비롯한 병서편찬을 담당한 부사용 한교는 광해군 3년(1611년) 3월 29일에 서북지역의 조련에 대한 논의를 지시받고 다녀온 후,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척계광이 남부에서 왜구를 상대할 때는 기효신서의 포살법을, 북쪽에서 오랑캐를 상대할 때는 연병실기의 거기보의 법을 썼으니, 기존의 기효신서의 보병운용은 서북의 철기병을 상대할 수 없으나 연병실기의 거기보의 법은 왜구에도 통용될 수 있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연병실기의 방법을 도입하자는 제안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연병실기의 거기영은 중차 156량 또는 창을 장착한 경차 256량으로 구성되며 1개 차영에는 보병 4000, 기병 3000이 배속된다. 전차에 탑승하는 인원은 총 10명이며, 2대의 불랑기가 전차위에서 운용되는데, 양륜차이다. 불랑기는 2척에서 4척 5촌의 길이에 정철로 거치될 수 있는 구조이며, 거치될 중차의 무게는 600근이다. 26)



경차와 중차



전차에 배치되는 소형불랑기



거기영은 이러한 중차의 사이에 8량의 대장군차를 배치하여 대구경 화포를 운용하는데, 여기 운용되는 무적대장군포는 양륜의 수레에 거치된다. 중량은 1050근으로 중차에 거치되는 불랑기와 형태는 거의 동일하나 중차에 배치되는 불랑기는 소구경 화포로 보인다.



무적대장군포와 중차



거기영은 외곽에 중차로 벽을 쌓고 중차는 1개 살수대와 같이 편성되는데, 여기서 살수대는 "기효신서"의 살수대와는 달리 장창수 4명이 전원 조총수로 전환되었다. 실제로 당파수는 화창의 일종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등패수 2명을 제외한 전투병력 전원이 화기로 무장하여 적의 백병전을 고려한 전력이 아닌 화력지원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외곽방어선 내부에 기병이 배치되는데, 기병은 전차방어선의 화력으로 적이 패퇴할 경우에 추격전의 임무를 맡았다.


두번째는 1778년(정조 2)에 정헌대부 행동지중추부사 송규빈이 국방 ·진형 ·병기등 군사문제 전반에 관하여 그 개선책과 저자의 견해를 밝힌 "풍천유향"의 상승진인데, 송규빈은 거기영의 전거와 유사한 검거의 운용에 대해 논하고 있다. 송규빈은 척계광이 기효신서에 대해서 논한 언급을 인용하여 당시 조선의 군사운용이 기효신서의 법을 맹종함을 비판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효신서의 진제는 왜적을 막기위한 제도이다. 만일 이 진제를 다른 지역의 방어에 사용한다면 적절히 변통하는 방법을 모를 염려가 있으므로 내 감히 이것을 자랑하여 동지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북방은 지역이 평탄하고 광활하여 오랑캐의 말들이 폭풍우처럼 달려오니 어찌 이 방법을 쓸 수 있겠는가?" 27)



송규빈의 상승진은 모두 128량의 검거를 운용하는데, 1대의 검거는 독륜으로 평지에서는 4명이, 험지에서는 6명이 미는 인력거이다. 검거의 형태에 대한 그림에서는 독륜이 아닌데 독륜이라고 하는 것은 양쪽이 아닌 검거의 앞뒤로 달려있는 형태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중간의 좌우에 보조바퀴가 달려있어 세울 수 있도록 되어있다. 검거 1대에는 2개대가 배치되어 총 25명이 배속되는데, 2개대는 개량된 원앙진으로 화병 2명과 대장 2명이 화포를 담당하고 나머지 병력은 조총/살수가 혼성된 편제로 이전의 기효신서의 살수대 / 조총대운용과 구별된다. 27)

검거는 앞에 칼날을 꽂는다고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8개의 창이 전방으로 부착되고 수레위에 세겹의 방패가 설치되어 대포가 배치된다. 4명에서 6명이 끄는 것으로 보아,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소구경화포일 가능성이 높다. 검거 전면에는 쇠창과 거마창을 배치하고 방진을 구축하는데, 외곽방어선에 56대의 검거가, 그 다음 40대, 그 다음 24대, 그리고 예비로 중앙에 8대가 배치된다. 별도로 장군차 8대에 호준포, 불랑기포를 탑재하여 방진의 네귀퉁이에 배치한다. 이것이 1개 검거영을 구축하는데, 진안쪽에 포수가 300, 기병이 600명 배치되어 거기영과 유사하게 운용된다. 3000여 병력의 검차영은 3개 검차영으로 구축, 서로 상호지원하도록 운영되며, 국경밖에서 운용될 경우에는 소가끄는 300대의 치중차를 만들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27)


세번째는 1813년(순조 13) 박종경이 편찬하여 간행된 각종 무기를 도해(圖解)하고 그 규격과 용법(用法) 등의 설명을 붙인 융원필비에 등장하는 화거방진도인데, 이는 100대의 화거와 20대의 목화수거로 구축되는데, 화거는 양륜이며 50개의 조총을 10개씩 묶어 5개 층으로 만들어진다. 목화수거는 호랑이모습의 나무조각으로 만들어지는 사격통제기의 역할을 하는데, 15개의 조총을 3층으로 나누어 수레 아래쪽에 탑재하여 적이 멀리서 접근하면 각각 면마다 30량이 배치된 방진에서 해당 면의 목화수거가 1층의 조총을 일제히 쏘아서 응하고, 가까이 온경우 2층을 일제히 쏜다. 적이 백보 내에 들어오면 목화수차 3층을 일제히 쏘며 이 경우 신호포와 천아성을 통해 해당면의 화차가 일제사격을 가한다. 1)

이러한 전차전은 기본적으로 방진을 통해 전 방향에서 기병 및 보병의 백병전 공세를 전차가 일종의 기동력을 갖춘 성벽으로서 방어하고, 전차를 통해 화기의 기동성을 부여하여 화력을 강화함으로서 살수대보다 효율적으로 화기운용에 대한 방호력과 화력강화를 추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전차전이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 전차전에 대해서 조선조정에서는 지속적으로 그 효용성을 강조하는 측과, 그 효용성을 부정하는 측과의 논쟁이 벌어졌다. 효용성을 강조하는 측은 기존의 삼수병 운용이 북방기병과의 교전에서 실용성이 부재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고래로부터 전차전의 효용성과 "연병실기"를 통해 북방기병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대응하는 것 역시 가능함을 주장하였고, 효용성을 부정하는 측은 국내의 지형이 험하고 산이 많기 때문에 전차전을 수행하기 적절치 못하다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반대의 이유에는 전차전을 위한 수레제작의 비용문제에 대한 지적도 지속되었고, 숙종대에는 윤휴를 비롯한 북벌을 주창하는 남인계파에서 전차를 제작하고 운용할 것을, 서인계열에서는 이를 실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논쟁을 벌였고 윤휴는 전차의 도입과 운용을 자신의 진퇴에 결부시킬 정도로 당쟁과도 결합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를 단지 당쟁으로 보기도 어려운 것은 윤휴와 같은 계파인 권대운이나 유혁연도 이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노론계열의 민진후가 역설적으로 전차의 도입에 찬성했다는 점이다.

이미 선조 38년(1605년) 11월 7일 실록에 좌부승지 최염이 전차전이 조선의 험준한 지형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시작으로 하여, 전차전의 효용성에 대한 논쟁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윤휴는 조선의 지형에 맞게 전차를 독륜으로 제작해야 함을 언급하여 험지에서는 전차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자체는 아쉽게도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에서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정해은씨가 언급하듯이 "살아있는" 군사체계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전차가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 조선에서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 지는데, 현실적으로 검증되거나 실증된 내용이 아니며, 군사적으로도 이 부분이 중점이 되어야 한다고 보기도 어렵고, 실질적으로 전차전이 문제시 되어야 할 점은 다른 요인에 있기 때문이다.

15세기초 1420년대에 일어난 후스파의 반란은 화기운용이라는 측면에서 진정한 혁명을 불러일으킨 걸출한 지휘관을 탄생시켰다. 얀 지슈카는 튜턴기사단과 싸우던 폴란드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면서 군사경험을 얻었고 그곳에서 독일의 기사단이 가지는 취약함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강력한 공격보다는 효과적인 방어를 통해서 승리를 달성하는 방법은 후스파가 근거하는 도시민과 농민이라는 병력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Wagenburg, 즉 마차요새와 화기운용이라는 두 축을 활용하게 되었다. 농민들의 마차를 다루는 능력과 도시의 화기생산을 위한 산업능력이 결합되었고 농민들의 도리깨와 폴암이 결합되면서 Wagenburg 전술이 탄생되었다. 6)

후스파의 전차전 방식은 마차를 마차안에서 소구경 핸드건과 석궁을 사용하고 내부의 병력이 방호받을 수 있는 구조로 마차를 개량하였으며, 마차간 간격에 포가에 얹힌 대구경 화포를 운용함으로서 화력을 극대화 하였다. 1개 마차는 15명에서 20명의 병사가 엄폐가능하였고, 마차에는 6명 이상의 병사가 석궁을, 2명이 핸드건으로 무장했으며, 나머지는 도리깨나 나무클럽, 할버드로 무장했다. 마차사이에는 추가로 파비안방패(석궁병이 사용하는 대형방패)가 배치되고, 초기에는 양륜형 포가가 아닌 이동이 불가능한 나무포가에 얹힌 소구경 화포가 여기에 배치되었으나, 후반에는 보다 대구경 화포인 Houfnice가 양륜형 포가에 얹혀서 배치되었으며 상하각도조정이 가능한 구조였다. 6)

1420년 Sudomer전투에서는 겨우 12량의 마차가 활용되었으나, 이후 최종적인 Wagenburg 전술의 마차는 총 180량, 대형화포는 35문에 달했다. 반드시 전차는 방진을 구축할 필요는 없었는데, 효과적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할 경우, 특히 강을 이용할 경우(Sudomer전투) 보다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1424년 6월 7일 Malesov전투에서 6미터마다 1문의 대형화포와 4에서 6정의 소형화기, 그리고 다수의 석궁이 배치될 수 있었다. 6)

이러한 후스파의 전차전에서 가장 중요한 화력은 Houfnice와 같은 대구경화포가 제공했다. 마차로 접근하는 밀집대형에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한 이러한 화기와 석궁이 주요한 화력이었다. 대구경화포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Kutna Hora에서 지슈카가 이끄는 병력은 가톨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전차전을 펼치기 어려운 위치에서 공세적으로 병력을 운용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후스파 군대는 화력지원하에 포위망을 돌파했고 Wagenburg 대형을 구축할 수 있었다. 6)

그러나, 이러한 Wagenburg대형은 무적이었을까? 물론, 그시대에 Wagenburg를 무력화시킨 적은 없었으며, 후스파와 국경을 맞댄 독일 도시들은 공포에 시달렸으며 황제 지기스문트가 병력을 징병하기 위한 1%세금에 동의했다. 그러나, 후스파 군대만큼 화기를 유효하게 활용하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내분에 시달리고, 후스파의 Wagenburg를 받아들인 어떤 군대도 후스파에게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로 이 전술은 사용되지 않거나, 사용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후스파가 독일황제군과 적대하던 당시의 기사군과 정부군이 가지는 화기운용의 취약성 때문이다. Wagenburg는 대형화포의 공세에 매우 취약했고, 당시 기사군들은 대구경 공성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Wagenburg의 우수한 기동력과 당시 공성포의 취약한 기동성(행군대열 후미에서 끌려오다가 하루가 걸려야 배치가 가능한)으로 인하여 Wagenburg는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실시한 대구경 화포의 침착한 포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 시대에 아직 적절한 야전포를 운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얀 지슈카의 군대는 양륜형 포가에 거치된 대구경 야포를 운용함으로서 월등한 화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즉 전차전에서의 취약성은 지형의 용이성보다는 대형화기에 대한 취약성의 문제인 것이다. 후스파의 성공 이후에 반란군들이 이러한 Wagenburg를 활용하려 하나 실패한 원인에는 16세기에는 이미 대다수의 중앙집권화된 정부군들이 강력한 대형화포를 야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9) 마차를 활용하는 것은 14세기의 플랑드르의 반란군이 이미 방어대형의 측후방을 방호할 목적으로 자주 사용한 바 있었던 전통적인 농민병들의 전술이었다. 이는 조선과는 달리, 기술이나 문명수준에서 현격히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로라는 측면에서는 이전의 로마시대에 가설된 가도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이것이 마모된 이후에는 그 옆에 열악한 도로를 구축한 바 있었던 중세의 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조정은 호란 이후 이렇다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평화기를 누렸기 때문에, 척계광의 병서와 왜란, 호란의 전투경험, 그리고 고대의 전례에 비추어 군사체계에 대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주변의 군사기술의 발전에 무감각한 편이었기 때문에, 북벌을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전 논쟁에 있어서 진정 고려해야할 문제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전차를 이용한 방어선은 야전축성에 비해 장사정 포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한 어떤 언급도 부재하며, 호란당시에 이미 청군이 홍이포와 호준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일본군의 화기운용에 대한 우려도 부재하다는 점은 안이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 당시에 청은 자체적으로 24파운더 급의 야포를 운용하고 있었고 명군과의 교전에서 전차전을 경험한 바 있었으며, 포가를 활용하고 있었다. 일본 역시 네덜란드에서 포가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포를 수입하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청 기병과 왜군 보병의 백병전 가능성만을 고려해 전차전 운용을 주장하고 이를 단지 험지에서의 운용성 문제로 반대한 것은 당시 조선 조정의 군사적 발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조정이 고민해야할 문제는 전차가 조선에서 운용가능하느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차 자체는 조선에서 충분히 운용가능했으나 그 목적은 달라야 했다. 대규모 병력의 동원 및 운용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인지, 조선군의 병참체제능력은 취약하기 이를데 없다고 봐야한다. 수레운용과 관련하여 다음에는 조선군의 병참체제를 훈련도감을 대상으로 논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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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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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만기요람, 2 군정편”
13) 이상정, 국방군사연구소 편역, "병학지남연의" 영진정구 2권 윤방편
14) 민족문화추진회 편역, "국역 만기요람 군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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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송규빈,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풍천유향"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4

4) 훈련도감 사례로 본 조선군의 병참상의 문제와 수레운용


이미 수레와 복마(짐말)이 가지는 조선군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기본적으로, 1인의 식사량에 대한 논의의 경우, "청장관전서"에는 성인남성이 한끼에 7홉의 쌀을 먹는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끼당 식사량을 좀더 자세하게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大男은 7홉, 中男은 5홉, 小男은 3홉을 먹으며, 大女는 5홉, 中女는 4홉을 먹는다고 하였다. 28)

우인수 교수의 조선후기 서인계열의 이유태의 정훈을 토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유태 집안의 노의 경우 6개월은 세끼, 6개월은 두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28) 이를 고려하면 대체로 상대적으로 건장한 체격일 가능성이 높은 훈련도감의 직업병의 경우 최소 한끼에 5홉, 하루 두끼로 1되의 최소식사량을 가정할 수 있다. 최대로 잡을 경우, 하루 세끼 2되까지 식사량이 증대한다. 현대의 쌀 한섬은 180리터로, 도정한 쌀인 경우 144kg이다. 즉 리터당 0.8kg의 무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1되의 리터기준은 현대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1되는 연구자들에 따라 최소 0.518리터에서, 최대 0.5967리터로 추정되어지고 있다.(현대 기준으로 1말은 18리터, 1되는 1.8리터) 29)

그렇다면, 조선후기 1일 성인남성의 최소식사량을 1되로 잡았을 때, 최소 414g에서, 최대 477g의 쌀을 소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를 훈련도감의 편제상 1개 대, 즉 10명의 1대에 1명의 복마군이 편제된 구조에 따라 적용될 경우에, 1필의 복마가 지게되는 60kg의 무게를 비교하면 편제상 어느정도의 병참이 가능한지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 복마가 소비하는 콩을 고려해야 한다. 콩의 경우, 대두로 추정되는데, 1리터당 0.75kg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현대 마필의 1일사료 섭취량은 9kg으로 이중 농후사료인 곡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50%로 그렇다면 4.5kg의 곡류를 1일에 섭취하나, 19세기의 영국 정치가 조오지 커즌이 1894년 조선을 방문한 "Problems of the Far East"나, 조랑말을 타고 금강산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에 따르면 식사량이 그다지 많지 않으며 200파운드까지 짐을 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훈련도감의 마필보유자에 대한 추가 봉급은 쌀이 1말, 콩이 9말이다. 이중 콩이 사료용인 걸로 추정할 경우, 최소한 대두기준으로 46kg에서 53kg을 1달동안 섭취하고 최소로 잡았을 때 1일 콩류의 섭취량은 1.53kg이다.

이것으로 계산할 경우, 1개 대(살수던 포수던)를 구성하는 10인과 복마군 1인의 11인의 식량인 약 4.5kg과 말사료용 콩 1.53kg을 합한 약 6kg정도가 1일 필요한 곡류라고 할 수 있다. 마필이 기준량 60kg을 실을 경우, 보급량은 10일을 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개인이 추가로 상당량의 식량을 지참하지 않을 경우, 조선 최대 정예군인 훈련도감병력의 작전가능거리는 도보로 10일 이내여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복마던, 전마던 간에 조선시대에는 조정과 군을 비롯하여 지속적인 전마 및 복마의 유지문제에 시달려왔다는 점과 조선후기 제주마의 품질하락과 짐말사용과정에서의 폐사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며, 상기한 소비량 기준이 항상 최소기준에 맞춰진 것임도 고려되어야 한다. 게다가, 훈련도감에는 국출신, 별기군을 비롯한 병력과 대량으로 곡류를 소모할 마병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기요람 군정편에 따르면 훈련도감에는 전마가 별무사 25필, 마병에 좌마병 214필, 우마병 231필로 470필의 전마와 334필의 복마가 있었다. 병력은 별무사와 국출신, 마병과 살수, 포수, 제색표하군을 비롯하 5801명의 병력이 편제되어 있었다. 12)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수레가 9량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도감의 24척의 직속 수송선이 실어오는 쌀과 물자를 이송하는 용도로 추정된다. 복마 334필은 규정상 20톤정도를 수송할 수 있다. 훈련도감 전체의 식량소비량을 추산하면 먼저 1일 소비되는 말사료용 대두가 1224kg, 일일 2끼, 중남기준으로 했을 때 2401kg이 소비된다. 총 소비되는 곡류는 1일 3625kg으로 이 경우 훈련도감이 행군을 개시한 6일째에 식량 및 마초가 모두 소모된다.

물론, 개개인이 추가로 식량을 지참하는 경우에는 조건이 개선된다. 만기요람상의 포수기준으로 대략 2.7kg의 조총과 0.9kg의 환도, 연환 50개무게 1kg정도를 지참하는데 대략 4.6kg이다. 여기에 12냥 5돈의 화약을 합하면 5kg, 유삼이나 갑주를 지참하지 않는 경우 개인의 군용장비의 무게는 5kg수준이다. 여기에 15kg정도의 물자를 전체 병력이 지참하는 경우 작전가능일수는 30일로 늘어난다. 그러나 여기에 복마는 추가로 여분의 화약과 연환을 비롯하여 만약 화포를 지참한다면 더 힘들어지며, 개개인의 병력은 번갈아가며 거마창이나 녹각목을 지참할 의무가 있었다. 즉 조선군 최정예군인 훈련도감의 병력의 평시 작전가능일수는 10일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지 군량문제에 집중되 있으나, 조선군의 병참능력상의 문제는 화약이나 탄환, 화살과 같은 소모품에서도 가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군의 병참사정은 호란과정에서도 드러난다. 1637년 홍명구, 류림이 이끄는 평안도 근왕병은 평안감사 홍명구가 2000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에서 방어하다. 12월 14일 평안병사 류림과 합류, 도합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월 26일에 김화로 진입했다. 27일에 당시 일대에 배치되었던 청군 우익군 6000여명의 병력이 접근해왔고, 28일의 전투에서 홍명구군은 전멸, 류림은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하루내내 격전을 벌였고 해가 지자 탄환 및 화살의 부족으로 야음을 틈타 적을 기만하고 후퇴했다. 30) 단 하루만의 교전으로 인해 화기위주의 조선군이 교전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광교산 전투에서는 전라병사 김준용의 전라도 근왕병 선봉군 2000명은 1월 4일에 광교산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량등 군수물자를 비축했다. 전투는 1월 5일부터 6일까지 청군의 지속적인 공세를 조선군이 격퇴해내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6일 밤 김준룡은 식량과 화살의 부족으로 인하여 후퇴해야 했다. 3일만에 2000명의 선봉군이 보유하고 비축했던 군량 및 물자가 소모되어 전투가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

이러한 문제는 실질적인 전술운용보다 대규모 정규전 상황에서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다. 정조대에 치열하게 일어났던 병학지남에 대한 유효성논쟁이나 전차전의 도입논의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이러한 취약성은 조정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이는 적대지역에서의 원거리 작전에서의 독자적인 병참체계유지보다는 대체로 국내에서의 작전이 대부분으로 군사적 분쟁상황과 점점 거리가 있게된 조선후기의 필연적인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조선 자체 내에서 그러한 병참능력을 구축하기 위한 기간이 마련되어있지 않다는데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해상수운 위주로 유통로가 유지되고 육상도로가 미비했기 때문에, 수레를 위한 기본적인 기술발전과 도로가설을 위한 충분한 노력도 견지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실지로, 전차운용과는 별개로 수레의 도입과 운용에 대해서, 심지어 19세기 중반의 헌종때까지도 조정내에서는 험지에서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지상에서 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오히려 수레를 사용함으로서 이에 익숙치 않은 말이 잘 죽는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조선의 수레의 문제점은 조선에서는 일반적인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는, 즉 산지가 많은 조선의 지형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숙종때에 논의된 전차역시 독륜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풍천유향"의 검거 역시 세로로 2개의 륜이 달린 독륜거형태를 취한다. 특히 독륜거는 우마가 끄는 것이 아니라 인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숙종 36년 10월 10일자 실록에 의하면 민진후가 북경에 갔을 때의 독륜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수어청에서 양륜거를 제작하였는데, 이 역시 우마를 사용하기 위해서보다는 독륜거를 조선인이 익숙하게 사용치 못하여 양륜거를 제작해서 사람이 끌게 하였다고 언급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산지의 험함으로 인해서 인력을 통한 독륜거가 사용되야 하고 수레가 적합치 않다는 주장은 합리적인가? 이에 대해서는 정조대에 홍양호가 명백하게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정조 7년 7월 18일에 대사헌 홍양호는 사행과정에서 중국에서 본 수레의 활용에 대해서 논하면서, 섬서, 관중, 사천, 촉도의 험한 길과 강소, 절강, 광동의 먼길을 다수의 상인들이 수레를 활용해 드나드는데, 이것이 짐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펼리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수레 1량이 5, 6마리의 말이 끌어도 수십필이 적재하는 것과 맞먹게 적재가 가능한데 도로가 험악하고 우마가 희소해 이것이 불가능하다 주장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가한다. 중국의 촉도의 험준함과, 자신이 사행에서 실제 본 청석령과 마천령이 조선의 동선령보다 더했지만 수레의 사용이 일반적임을 들어 비판하였다.

홍양호는 국내에서도 영남의 안동, 의성, 해서의 장연과 신천, 관북의 함흥등 우차의 사용이 잦음을 언급하면서, 문제는 제작이 조잡하여 운행에 불편이 많음을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정의조는 함흥에서 수레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를 수원부에 적용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조선후기에는 지형이 험한 함경도, 북관지역에서는 민간에도 소가 끄는 우차가 매우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 홍의영(洪儀泳:1750∼1815)이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 일대를 답사하고 그 연혁과 정황 및 자기의 개혁안을 엮어 조정에 올린 "북관기사"에는 소 1마리가 이끄는 대차가 2, 3마리의 말이 지는 짐을 끌 수 있고, 함흥에는 모두 수레를 이용하기에 등에 짐을 진 소가 없다고 언급한바 있다. 31)

지형이 평탄치 않은 함경도는 조정의 엄격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민간이 편의를 위하여 도로를 개척하는 일이 잦았고 개시와 후시를 통해서 상업경제가 융성해짐에 따라서 조정이 백성의 사치함으로 인해 검박했던 풍토가 바뀌고 있음을 걱정할 정도로 민간경제가 성장하였다. 민간경제의 성장과 외부문화의 높은 유입가능성등이 종합되어 함경도 일대에서 수레는 보다 일상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산지지형과 수레의 활용은 그다지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다른 문제는 이 시대의 전마, 복마용 마필의 청국에 대한 의존도 심화에 있다고 봐야한다. 청과 실질적인 교전관계가 야기되지도 않았고, 국내에서 마필에 의한 유통인프라의 의존도 역시 일부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청마(청에서 수입된 말)에 대한 심각한 의존과 북마(조선 북부지역에서 생산되어 전마로 활용된 말)나 제주마의 품질저하는 청마가격의 저하와 유입증대로 인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청을 가상적으로 수립하고 조선군이 충분한 병참체계를 위한 수레의 활용을 상정할 경우에는 높은 청마에 대한 의존도는 문제가 될 만 하다.

특히 공식적인 개시 내에서의 마시는 청과 교역 초기에 군사적 필요성과 함께 만주지역의 농경화를 위한 농우의 필요성이 증대됨으로서 불리한 교역비로 청마를 농우와 북마로 교환하여 북마의 유출로 인해서 우수한 종마가 대거 유출됨으로서 북마의 생산능력이 저하되었고 목마장이 농경지로 전용되는 등의 관리소홀, 그리고 조선후기 가시화된 제주마의 품질저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숙종 36년 이후 청마와 소의 우마교역으로 전환되고 3영의 마병증가로 인해 전마의 수요는 증대되었고 북마의 품질저하(우수마의 유출)과 생산능력 저하와 개인의 말 수요 증가는 조정의 마필부족을 심화시켰다. 영조대에는 종마수입을 통한 마정쇄신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31) 게다가 강희제 이후 청이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전마의 수요가 줄고, 만주개발로 농우수요가 증대되며, 만주에서의 말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청마공급이 증대됨으로서 31), 청마의 유입이 국내의 목마장의 경제성을 더욱 하락시켰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여건상으로 순조대까지, 훈련도감과 같은 중앙정예군에도 기본적인 병참체계가 구축되지 못하고 복마위주의 병참체계가 유지되었다는 점은, 화기중심의 보병을 핵심으로한 조선군의 군사체계가 단순히 전술운용상의 문제를 넘어선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조선의 근본적인 경제적 인프라라는 배경을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병참체계가 중요한 화기중심의 군사체계를 구축한 국가가 북벌이라는 국가의 중차대한 전략을 한때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본적인 고려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군사체계의 발전과 삼수병체계를 비롯한 전술운용의 논의가, 근본적인 전례의 부족과 잘못된 관점으로 인해 탁상공론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감히 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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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5


5) 아일랜드 사례로 본 조선군의 이상적 군사개혁과 그 현실성


16세기 중반에서부터 후반까지 이어진 아일랜드 토착세력과 영국사이에서 벌어진 아일랜드 내에서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가장 전장환경이나 야전에서의 병력구조면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군에 비교할 만한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정치, 문명수준면에서는 중세의 부족사회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아일랜드의 정치적, 경제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의 자연환경과 아일랜드 토착 반란군(영국의 입장에서)의 특징은 조선군과 여러면에서 비교할 만 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조선과 같이 산지지형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삼림지대, 늪과 소택지, 낮지만 다수의 구릉지대가 분포하였으며, 도로가 발달하지 못했다. 1560년에 반란을 일으킨 Shane O Neill의 병력은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부대, 특히 Galloglass와 같은 주로 스코틀랜드인과 같은 외국인으로 구성된 도끼로 무장한 중장보병이나 Kern같은 아일랜드의 토착민으로 구성된 경장보병들과 같은 전통적인 도검병과 화승총을 결합하여 Glentaisie 전투에서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9) 아일랜드 반란당시의 영국군은 헨리8세 시대의 Bill과 장궁위주로 무장한 전통적인 영국군에서 Caliver(화승총의 영국측 표현)와 파이크로 무장을 대체하는 Trained Bands의 새로운 민병체제로 변환되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서유럽의 파이크-화승총의 결합으로 구축된 전술운용이 전통적인 도검병에 대한 불리함을 증명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영국측의 기병과 파이크-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은 야전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을 완전히 압도했다. 대체로 초기에 전통적인 아일랜드 반란군은 평지에서 정규전을 벌이는 것을 극도로 회피하고 아일랜드의 삼림과 습지, 구릉지대를 통과하는 영국군을 매복지점으로 끌어들여 화승총사격을 가하고 대열이 흐트러질 때 일순간에 도검병이 돌격을 감행하는 수단을 활용했다. 최초의 돌격이 실패하면 아일랜드인들은 영국군이 공포에 질려 흐트러지지 않을 경우 공격을 포기하고 삼림지대로 도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 경우 영국군이 추격을 감행하더라도 지형상의 어려움과 아일랜드 경보병의 기동성때문에 대체로 실패하거나 또다른 매복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32)

아일랜드군은 야전 및 공성전에서 대체로 대포를 활용하지 못했는데, 아일랜드군이 빠른속도로 화승총을 받아들이고 이를 민병에 가까운 Kern과 같은 경장보병이 활용하게 된 것과는 매우 판이하다. 아일랜드측의 Tyrconnell의 백작이었던 Hugh Oge O Donnell이 최초로 프랑스에서 도입한 포를 활용하였고 그의 아들 Manus가 1544년에 공성전에 포를 사용했다고 한다. Manus의 손자였던 Hugh Roe O Donnell이 스페인에게서 받은 1문의 포를 1599년에 Ballintober 공성전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대부분의 포는 영국군만이 사용했으며 영국군에서 다수의 포를 노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군은 포를 활용하지 못했으며, 이는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를 도로의 부족과 지형의 문제로 보지만, 영국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아일랜드 반란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인 pynes moryson은 그의 여행기에서 당시 아일랜드군이 대형 포를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출신 포병이 아일랜드에는 극히 소수만 존재했다는 언급을 했다는 것을 통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32)

조선군과 초기 아일랜드 반란군은 야전에서 주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군사력에 대하여 평지에서 정면대응할 능력이 없었으며, 조선군이 청군 기병에 대해 취약했던 것과 같이, 아일랜드 반란군의 기병은 영국측 기병대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Kinsale 전투에서 영국측 기병은 전면전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측 기병을 무너뜨림으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체로 아일랜드 기병은 유격전 위주로 운용되었고 경무장이었으며, 투창과 창으로 무장한 반면, 영국측은 상대적으로 갑주와 권총, 검과 창으로 무장하고 아일랜드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32) 청의 기병이 조선군 보병을 압도한 것과 비견할 만 하다.

아일랜드 반란군은 이러한 문제를 두가지 방법으로 완화시킬 수 있었다. 먼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일랜드 반란군은 자신들이 익숙한 아일랜드의 지형, 구릉과 늪지, 삼림지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1597년 Turnhort전투에서 스페인 플랑드르군의 파이크대열이 기습당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기병에게 학살당했듯이, 아일랜드군이 매복한 지역을 지나가던 영국군 대열은 화승총 사격과 기습에 큰 피해를 입곤 했다. 영국군도 대체로 현지에서 징병한 보병전력을 활용했기 때문에 파이크대형은 이런 피해에 결연히 대열을 고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1593년 Erne ford 전투에서, 에른강 주면의 ford(여울)에 야전축성을 하고 영국군과 영국편에선 티론 백작(이후 아일랜드 반란군 개혁의 중심이 되는 인물)의 아일랜드 군에 대적하였다. 32) 이아전투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은 패배했지만, 아일랜드 군은 행군종대의 측후방을 화승총과 도검병으로 기습하거나, 여울이나 습지, 삼림지대에 야전축성진지를 구축하고 매복하고 있다가 사격을 가하는 형태로 영국군을 패배시키곤 했다. 이러한 양상의 전투가 번복되면서, 유격전에서 활용가능한 검과 버클러로 무장한 병력이 화승총과 조합되었다고 제레미 블랙은 자신의 저서 "European warfare, 1494-1660 "에서 언급하고 있다. 9) 실제로 1597년 Blackwater전투에서 영국의 Thomas Burgh경은 아일랜드 반란군이 구축한 축성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직속 수행원인 gentlemen volunteer(요맨, 젠틀맨계층에서 상속재산이 없는 전쟁에 자원한 상류계층 자제들로서 당시 영국, 스페인에서 다수가 존재했으며 병사와 동일하게 전열에 참여하거나, 장교로 임관하곤 했다.)들과 뛰어 들었다. 당시 영국 장교계급은 주로 Sword and Buckler로 무장했는데, 이들이 그렇게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의 방안은 바로 아일랜드 반란군에 대한 서유럽 군사체계의 도입이었다. 티론의 백작이었던 Hugh O Neill이 그러한 혁신의 주도자였다. 그는 1585년 티론 백작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임을 받았고 1593년엔 아일랜드측으로부터 "그의 이름과 지역의 족장"으로서 인정받았다. 그가 1595년 반란군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그의 군대는 그의 동족들에 대적해 영국편에서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영국의 무기, 전술, 훈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아일랜드의 용병인 갤로우글래스 중장보병과 스코틀랜드 용병인 "Redshanks(하이랜더를 뜻하는 속칭)"들을 현대화하고 파이크로 무장시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물론, 그는 1603년 항복할 때까지 이전의 전통적인 도검병을 완전히 퇴출시키지는 못했으나 그의 노력으로 1595년에는 그의 군대의 20%는 파이크병으로 구성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평지에서 유지되던 영국군의 절대적 우위가 점차 약화되어 1596년에 영국의 정치가이자 재무차관이었던 Henry Wallop경은 아일랜드군이 영국군과 필요할 경우에는 야전에서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티론 백작은 필립2세와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았고 200여명의 스페인 장교들을 파이크병을 교육시키는데 투입할 수 있었다. 32)

이 결과 티론백작은 1598년 Yellow Ford전투에서 영국군을 패배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일랜드 반란군은 전통적인 야전축성과 함께 Arquebuses a croc(주로 양륜형 마차에 대형 화승총(소형화포에 가까운)을 설치한 일종의 전차)를 배치했고 목책을 설치했으나 영국군은 야포사격으로 이 장애물을 파괴하고 병력을 전진시켰으나, 티론백작 자신이 이끄는 기병 40기와 아일랜드 파이크병력이 영국군을 휩쓸어버렸다. 32) 이후 Kinsale전투에서 티론백작은 영국군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동안 티론백작은 아일랜드 반란군을 재조직하고 전통적인 장점과 새로운 전술을 조합함으로서 아일랜드 반란군이 한 때 영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조선군의 경우, 티론백작의 아일랜드 반란군에 비교할 때, 야전에서 일본이나 청의 군사력과 정면에서 교전이 가능한 야전군을 육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보병에 다수의 창병을 집중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적으로 우월한 조총의 화력을 활용할 여지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Yellow Ford전투에서 보듯이, 여전히, 조선군의 포병전력이 충분히 구축되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우월한 포병전력을 가진 청이나 가질 가능성이 있는 일본의 군사전력에게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적절한 포가를 제작하고 보유할 능력과 이를 위한 병참체계구축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창병의 도입은, 대체로 보병이 조총과 환도 위주로 무장한 것을 고려할 때, 관점에 따라, 오히려 퇴보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독립전쟁간의 1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동안 화승총병과 파이크병의 비율에서 화승총병의 비율이 증대하는 원인은 화력증대를 위한 필요성이 증가되어서라기 보다는 전신갑주로 무장한 중장기병, Men-at-arms가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한 reiter와 같은 기병대에 의해 축출되면서 상대적으로 중장기병에 의한 위협이 감소되고 파이크병에 대한 Reiter의 위협이 증대된 것이 주요원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9)

당시 유럽의 경우, 중세의 기병위주의 군사체계가 보병중심적으로 전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변천과정은 보병, 기병, 야포를 비롯하여 Trace italiane와 같은 축성체계의 변화, 야전축성의 출현등 복합적인 요인들의 통합적 결과였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기간동안, 이렇다할 군사적 기술의 성장은 그다지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 전쟁사학자들이 보는 시각이다. 유일하게 기술발전으로 인한 군사적 혁명은 머스켓의 도입보다는(머스켓의 도입은 현재에는 단지 이후 기존의 화승총과 같은 활강총의 명칭으로 이어지는 것 이상은 아니라는 평가가 가해지고 있다. 6) )치륜식 권총의 등장에 있었다. 중장기병의 위협의 감소와 반대로 점차 경무장하고 권총으로 무장한 reiter이나 lancer과 같은 경기병의 등장, 프랑스의 위그노 기병대와 같은 기병전술의 변화가 보병의 파이크:화기 비율의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George Gush교수의 영국군의 1개 중대병력비중의 변화를 보면, 1558년대에 파이크병이 300명, 화승총병이 100명으로 3:1의 비율을, 1596년에는 파이크병이 50명, 머스켓이 12명, 화승총이 36명으로 1:1으로 변화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군사적 발전이 낙후한 동부유럽의 경우 오히려 화승총비율이 더 높다. 폴란드군의 경우 1577년 키에프성의 여타 유럽국가의 중대급 보병제대인 rota의 편성표에는 111명의 화승총병과 34명의 파이크병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폴란드군의 100명에서 200명의 Haiduks라는 보병편제는 오스만군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경우는 전원이 화승총병으로 구성된다. 33)

그렇다면, 폴란드군의 보병편제가 가장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편제는 폴란드군이 보병을 기병을 화력으로 지원하는 보조적인 병과로 편제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적어도 17세기 후반, 18세기에 들어가서야 보병이 모두 화력위주로 편성되었고, 그것은 보병에 대한 훈련수준과 통제력이 강화되어 총검만으로도 스퀘어대형을 구축하고 기병의 공세에 대해 대열을 흐트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화력의 강화로 파이크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보병화력의 강화로 인해 파이크를 줄이고 보병화력을 강화해야할 필요성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종합적인 요인들을 볼 때, 조선군이 야전에서 청의 기병이나 일본의 장창밀집대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창병의 도입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여기에 경량화된 야포를 도입할 필요성도 존재한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보다 적극적으로 야전군에 필요한 마차위주의 병참부대도 필요하다. 이는 개별 병사의 무예훈련이나 인력을 활용한 전차의 운용보다 효과적으로 기병 및 보병의 백병전에 대응할 수 있으며, 공세적으로 운용이 가능하고, 소화기많이 아니라 대형화기에서도 화력면에서 가상적국을 압도할 수 있고, 장기간 작전이 가능하여 기존의 조선군의 작전적 한계를 타파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체계는 엄청난 비용을 소모한다. 단지 기존의 직업병인 훈련도감병 위주로 이런 편제를 도입하여 기존 중앙군제에만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나, 번상병, 지방군영에 이런 체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창병과 조총병을 연계하는 대형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직업군인과 같이 지속적인 훈련이 요구된다. 영국의 Trained Bands는 유일하게 영국의 민병체계에 이를 도입하였으나, 이는 중앙정권이 무장과 훈련을 위한 재원을 지방의 도시와 지역커뮤니티에 부담지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당시 런던을 비롯한 영국 도시들의 경제적 성장으로 인해 가능했던 일이었다. 34) 상대적으로 Bill의 비중이 여전히 유지된 것은 Bill과 같은 폴암류의 유효성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런던의 Trained Bands에는 Bill이 한자루도 없었고, 상대적으로 빈한한 카운티에 Bill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이나, Bill과 같은 병기는 별도보관이 아닌 개인보관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34)

화승총이나 폴암류와 같은 병기는 상대적으로 평상시에 사용이 가능하거나 유효하고, 별다른 집단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반면, 파이크는 특히 집단훈련이 필요한 병기이며 다른 어떤 병기보다 훈련수준이 크게 영향을 미치는 편이라는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당연히 직업군인이나 지속적으로 훈련을 위한 재원이 보장된 민병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아일랜드와 같이, 한반도의 산지 및 삼림지형에 적합한 유격전의 도입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조총병 위주로 편성하기 용이한 지방군영에 부담을 덜게하기 용이하고 비용효율적인 지방군사체계구축에 효과적이라고 보여진다. 실제로, 지속적으로 조선은 "견벽청야"의 전략을 추구했다. 산성에 의거하여 식량과 군민을 지키고 외부의 식량을 제거함으로서 도로사정이 좋지 않고 지형이 산지가 많은 환경을 활용하여 적이 물러가게 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이 활용한 소화기 위주의 매복, 유격전은 조선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기존 삼수병에 대한 견해에 추가하여, 기병편제의 경우, 유럽에 비교한다면, 기존의 조선기병을 프랑스 위그노, 또는 스웨덴 기병과 같이 보다 경량화한 기병을 지향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상대적으로 중갑주로 무장한 여진기병보다 더 중장갑으로 무장했던 중장기병이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했던 Reiter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중장갑을 갖춘 청의 기병에 대적하기 위해서 치륜식 권총과 마상편곤으로 무장하고 갑주를 거의 제거한 경기병위주로 조선 기병을 편성한다면 더 효과적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마상전투의 경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18세기의 경우, 마상전투에서 경기병과 중기병간의 교전이 벌어지면, 상대적으로 경쾌한 작은 말에 탄 경기병이 우세했다고 한다. 16세기의 reiter과 같은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한 기병은 중장기병과의 교전시, 실제로는 Caracole과 같은 선회기동이 아니라 먼저 최초의 사격으로 중장기병을 노리고, 2번째 권총(3정의 권총 보유)으로 말을 겨눠서 사격을 가하고, 그 다음 중장기병 대열간의 간격으로 치고 들어가 칼로 벤 다음, 신속하게 이탈하여 재차 사격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6)

상기한 조선군의 야전군사체계의 개편은, 물론 먼 유럽에서의 전례들이라는 점에서 조선에 전파되어 군체제 개편에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창의 도입, 야전포의 운용, 병참체제의 개선,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한 경기병과 같은 군사체계 변혁에 필요한 전례 및 경험, 기술적 수준은 이미 다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을 통해 장창밀집대형을 관측했을 것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임진왜란의 명군, 호란의 청군 모두 야전에서 이동가능한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병참체제에 대해서 풍천유향을 비롯하여 수레의 도입을 논한 많은 언급들에 수레의 도입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개선한다거나, 또는 국경외에서는 소가 끄는 병참용 수레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치륜식 권총의 경우에도 이미 1612년 아륜철(부싯돌과 마찰하는 치륜)을 사용하는 지뢰 파진포를 국내에서 개발한 바 있고, 권총과 유사한 단총은 이미 기병이 활용하는 바였다.

그러나, 조선의 군사체계에 대한 개편안은 여전히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병학지남, 풍천유향을 비롯한 다수의 병서들이 중국의 척계광의 "기효신서", "연병실기"에 국한하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사대주의인가, 아니면 창의성과 유연성의 부족으로 봐야할 것인가는 명확치 않다. 결론적으로 유럽의 동시대 전례와 군사체계의 관점에서 조선후기의 야전군의 이상적 모델은 실현 가능할 하드웨어적인 기반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소프트웨어적 개선을 위한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평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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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6

6) 조선의 견벽청야전략에 따른 성곽체계 및 유격전


지금까지 논한 주제는 조선후기의 삼수병 체제를 야전군 위주의 관점에서 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조선은 대규모 정규전에서 야전에서 적의 주력전력과 정면대응하기보다는 성곽에 의존하여 청야를 실시함으로서 교통이 여의치 않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적이 자멸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군사체계를 논하는데 있어서, 성곽체계와 청야전술을 제외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때문에 야전군체제로서의 삼수병을 논하는데에 부가적으로 조선후기의 성곽체계와 유격전 체제, 그리고 견벽청야전략에 대해 유럽의 사례와 비교함으로서 그 유효성과 대안을 논해보고자 한다.

조선의 성곽체계의 발전은 산성이라는 전통적인 성곽체제에 대한 강조에서 읍성으로의 전환, 양자의 공존, 그리고 위기상황 및 전쟁시의 산성체제에 대한 강화와 비판론에 의한 읍성체제로의 전환과정을 거치게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특히 군사적인 의미로서의 산성위주에서 정치, 경제적 중심지와 군사적 기능의 결합이라는 읍성체제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평가될 수 있다.

 건국 초기 조선의 성곽체제는 고려말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평가될 수 있다. 원의 영향력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던 시점의 고려에서는 이렇다할 축성이 시도되지 않았으나,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연해지역과 침임이 있었거나 우려가 있는 내륙지역에 대한 축성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우왕 통치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자 각도의 요충지에 방호(防護)를 설치하고 연해주군에 산성을 수축도록 하였다. (고려사 133권 열전 46, 신우1, 3년 2월 기록을 인용) 우왕 3년 7월에는 각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산성을 수축하게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존재하며, 이러한 산성이 예전에는 북방의 위협에 대응한 것에서 왜구의 위협에 대한 방어시설로 전환되게 되었다. 35)

삼국시대 이후부터 전통적으로 중시되던 산성에 대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강구되었으며 조선개국초에는 개국이후의 국가정비로 인해 도성축조외에 이렇다할 대규모 축성이 시도되지 않았다. 고려말, 조선 개국초기의 성곽체제의 특징은 가급적 산성위주로 축성하며, 치소와 성곽이 분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치소와 성곽이 결합되는 통합기능적 읍성에 대한 축성노력이 기울여지지 않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산성중시론의 결과였다. 우왕 3년에 개성부에서 올린 문서에도 평지읍성의 축조에 반대하며 "唐鑑에서도 말한 것처럼 고구려의 산성을 이용한 방책이 상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말에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읍성이 수축되기는 하나 대체로 토성이 주를 이루며 응급적인 경우가 많아 조악한 구조를 이루었다.35)

 태조 2년의 평양성, 갑주, 공주읍성과 이듬해의 안주성수축외에 이렇다할 읍성수축이 없었던데 비하여 여전히 산성위주의 성곽체제가 유지되는데 이는 거주지와 성곽을 일치시켜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는게 적절하다고 보고 이후 읍성이 강화되기 시작한 이후와는 구분되는데, 이는 고려말과는 달리 조선대에는 왜구에 대한 방어책이 산성입보보다는 강력한 수군이 일차적으로 왜구를 차단하고 이후 육군을 동원하여 이를 타격하는 공세적인 전략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35)

태종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읍성축조가 강화되어 가는데, 태종초기에는 명에서 건문제와 연왕간의 내전으로 인해서 조선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서 서북 및 동북지방의 축성이 강화되었으며, 당시 여진에 대한 영락제 7년의 115개의 위소건립과 같은 위협적 태도와 오이라트등에 대한 대규모 원정으로 인해 위기의식이 고양되어 부분적인 축성이 시도되었고, 태종 13년 7월 16일자 실록에 의하면 하륜을 비롯한 조정중신들은 영락제의 북정이 조선을 위협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면서 산성을 축성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태종은 오히려 "난국(難局)이 온다면 장차 거병(擧兵)하여 바로 쳐들어갈 것이지, 어찌 마땅히 성을 지키고 기다릴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즉 이 당시에는 개국 초기의 조선이 보다 공세적이고 자국의 군사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젊은 국가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에 와서 이러한 성곽체계에 대한 입장이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기존의 속성축성된 읍성을 적절한 위치로 대량 이전하고 축조하며, 영락제 사망이후 명이 보다 안정적인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동시에 양국간의 외교관계의 안정성이 강화되면서 조선의 주된 안보위협이 대규모 정규전에서 왜구를 비롯한 남방에 집중되기 시작하여 경상도, 전라도의 읍성수축이 뚜렷이 증대하였다. 35) 그러나 아직까지는 방어시설로서 읍성보다 산성이 주를 이루었다.

세종대에는 축성이 산성을 읍성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매우 많은데 이전에는 읍성을 축조하더라도 산성과 병존시키는 정책을 추구한 반면 산성을 폐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최윤덕이 성곽축조를 담당하여 하삼도의 읍성축조가 세종 전기에 두드러졌으며, 이후 후반기에는 북방에 행성(장성)을 축조하는 등 대규모 정규전 위주의 축성체제가 주로 해당 지역의 왜구 및 여진의 위협을 대응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성폐지의 주요 원인은 대규모 정규전의 가능성을 지닌 명의 위협이 거의 제거되어 가상적이 주로 비정규전 성격을 띠는 소규모 집단에 국한되어 갔고, 이러한 상황에서 치소나 거주지와 이격된 산성을 유지하는 것이 백성이 불편해 했기 때문에 황희는 세종 10년에 "대저 산성이란 위급한 사태가 있을 때만 쓰고 평상시에는 그다지 쓰지 않는 까닭에, 오르내리면서 출입하는 것을 백성들은 모두가 싫어하고 꺼리는 법이온데,"라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문종대 1449년에는 오이라트를 이끄는 에센이 명의 영종을 사로잡은 토목보의 변으로 인하여 조선내부에서 외부의 대규모 위협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면서 기존의 행성과 읍성수축을 정지하고 기존 읍성의 강화를 비롯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길도등 이북지역의 산성의 대대적 수리 및 수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특정한 위협상황에 한정되어 점차 임진왜란시기까지 산성은 퇴락하는 과정을 거친다.

산성의 퇴락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북방의 대규모 위협이 감소하면서 성곽축조의 목적이 왜구나 북방 여진족의 위협에 대응하는 목적으로 전환되고, 이에 대응하는 방법이 고려말의 산성입보에서 공세적인 기동병력의 운용과 수군의 강화로 지향되고, 또한 거주지에서 이격된 산성보다 읍성이 관리 유지가 용이하였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임진왜란시기부터 다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하삼도의 읍성이 일본군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함몰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산성중시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소수의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의 성벽높이가 낮은데다가, 이후 나타나는 포루나 치성, 옹성과 같은 유효한 부대시설이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 정규군과의 교전에서 방어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호남과 영남에 성곽을 축성한 기록에 의하면 호남과 영남의 큰읍성들을 증축하고 수리하였으나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3장에 불과했으며,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언급한데서 확인할 수 있다.

개전초기에 조선의 방비상의 헛점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서 전통적인 산성중시론이 강조되기 시작하였으며, 야전에서의 전투를 가급적 회피하고 지구전과 기습, 보급로차단이 주된 전투양상이 되면서 아군의 식량, 무기, 병력보존이 가능한 안전한 거점으로서의 산성이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강화교섭의 전망이 부정적이고 유정의 군사가 선조 27년 후퇴하면서 재침위기론으로 인하여 적극적인 산성수축이 추진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산성수축이 조정에 의해 적극적으로 강조되었으며 선조 29년(1596년)에는 각도 감사로 하여금 산성으로 입거하고 각고을의 수령도 대체로 산성에 입거하라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산성유익론으로 인해 세종이후부터 강조되었던 읍성위주의 축성체계는 다시 산성위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이러한 세태를 다시 바꿔놓았다. 병자호란 이전의 1차침입과정인 정묘호란에서는, 청군은 용천군민이 입보한 용골산성을 비롯하여 안주성, 선천, 곽산, 정주군민이 입보한 능한산성등을 공략했다. 당시 동원병력이 3만내외였고 도중의 성곽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청군은 강화를 선택하게 되었다.

반면 병자호란 당시에는 이러한 청군의 전략이 전환되었다. 청군은 12만 8천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의주성에서 백마산성으로 입보한 임경업군에 공세를 가하다가 결전을 회피하고 의주, 용천, 곽산, 선천, 정주등에 소수병력만을 잔존시키고 바로 남하하였다. 정묘호란때 함락된 안주성도 청군은 바로 지나쳤으며, 서북지역의 산성에 입보한 조선군에 대해 소규모 병력을 잔존시켜 조선군을 견제하며 수도권을 향해 주력은 그대로 남하함으로서 청군의 선봉부대는 12월 8일에 압록강을 도하한 후 14일에 강화도와 한성간의 이동로를 차단함으로서 조선 조정의 강화도 이전을 도하 6일만에 차단하는 신속성을 보여주었다. 조선군의 방침은 산성에 입거한 병력이 청군의 이동을 저지하여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수도권 방어태세를 확립하고 근왕군을 집결시킬 시간적 여유를 얻는 것이었으나 산성에 입거한 전력을 청군이 무시하고, 읍성을 방기함으로서 보급물자가 청군에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30)

때문에 이후부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산성위주 성곽체계에 대한 비판이 강력하게 가해졌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우리 나라 여러 곳의 산성은 거의 읍내와 떨어져 먼 곳에 있는데 비상시에는 고을 백성을 데리고 산성(山城)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적의 침입이 그리 급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기의 가신을 잊을 수 없고 또 험하고 먼길 가기를 꺼려서 성에 들어가 방위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적이 딱 다가오면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이를 껴안고 산과 들로 도망을 치면서도 명령에 복종하기를 싫어하니 하물며 다른 고을 성에 들어가서 지키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 이라고 주장하였다. 36)

또한 그는 "산성을 고수하였다 하더라도 읍이나 부락은 물론 창고와 주민과 가축들을 전부 적에게 빼앗겨 버린다면 사수했다는 그까짓 산봉우리 하나가 결국 무엇을 줄 것인가? 이것이 반드시 망할 데로 가는 길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은 일본이나 여진 사람들처럼 전쟁만을 일삼고 항상 집이 없는 군인을 거느리고 활쏘기와 사냥을 직업으로 하며 가는 곳마다 산채를 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36)"라고 주장하여 군민의 입보를 상정하는 청야전략에서의 산성이 병자호란에서와 같이 유사시 군민의 입보뿐만 아니라, 청야를 위한 물자의 이동과 확보 역시 읍성이 효과적임을 주창하였다.  이처럼 산성위주의 기존 청야입보전략이 가진 문제점들의 지적으로 인해, 수원화성과 같은 당시 조선으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축성기술이 적용된 평지성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A. 성곽체계의 유효성 여부


일단 조선후기의 성곽체제의 유효성을 측정하는 모델로서 수원화성을 그 대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로 갈 수록, 점차 성곽체제는 치소와 성곽이 결합되어 읍성을 구축하거나, 또는 가능한 경우에는 산성으로 치소를 이전하는(남한산성에 이후 광주의 치소가 이전됨) 성격을 띠며, 상정하는 청야전술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물자와 인력이 유사시 신속하게 입보가능한 읍성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수원화성이 조선에서 달성한 다양한 축성기술의 정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당시의 최첨단 기술의 정화로 평가되는 수원화성은 가상적국을 대상으로 할 때, "최첨단"의 성격을 띠는가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화성지도: 화성성역의궤 39)

위의 지도를 보면 화성의 구조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화성은 평지성이지만 산지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축성되었으며, 포루, 치성, 옹성과 같은 화기운용에 필요한 구조물을 갖춘 형태의 성곽이다. 특히 화포운용을 위한 돌출구조물은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대적으로 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효과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화성의 성곽으로서의 유효성에 대해서 2가지 측면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성벽의 방호성능이며, 둘째는 사각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성벽의 방호성능은 중요한 문제였으나, 화기가 등장하면서 성벽의 방호성능은 높이에서 두께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유럽의 석조성벽이 화포의 등장, 그리고 Corned powder와 철제 포탄의 도입으로 인해 손쉽게 파괴될 수 있게 되면서, 이후의 성벽에 대한 관점은 가급적 낮고 두꺼운 형태를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은 병자호란당시 남한산성에 대한 홍이포사격을 경험했지만, 이러한 포격이 성벽을 파괴하여 함락시키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당시 청군은 이후 강희제치세와 같이 대규모로 화포를 운용하고 제작하는 수준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초기 명이 도입하고 제작하기 시작한 홍이포를 카피생산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성의 직접적인 점령을 위해서는 병력투입위주로 달성되어야 했고, 그 결과 성의 방어를 위해서 화기를 활용하기 위한 치성이나 포루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실학자들 역시 성벽의 높이가 높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성의 높이가 반드시 여장(성벽 위의 총안이나 요철형의 구조물)을 제외하고 5장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으며, 기효신서에서는 3장에서 4장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했다.


수원 화성의 성벽 단면도 37)

위의 그림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른 화성 성벽의 단면도인데 화성의 성벽 높이는 이에 따르면 2장으로 실학자들이 주장한 높이와는 다르다. 이러한 성벽은 석조로 내외부를 쌓는 협축식이 아니라 내탁식 구조로 되어 있다. 위의 내탁식 구조로 본 성벽을 보다 상세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형태의 구조는, 전통적인 산성의 편축, 또는 내탁식 축조법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산성의 경우 지형을 잘 활용하는 경우, 일정 경사에 적합하게 외부에만 석축을 할 경우, 훌륭한 성벽을 보다 저렴하고 손쉽게 만들 수 있는데, 반면 평지나 성문을 축조할 경우, 내외부를 모두 석축으로 하는 협축식 방식으로 축조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로 성벽을 축조할 경우, 협축식으로 완전 석조형으로 축조하는 것보다 더 두꺼운 성벽을 손쉽게 축조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의도한 목적과는 달리, 협축식 성벽보다 더 높은 방호력을 가진다. 보다 두텁고 흙으로 내부가 채워지거나 지지된 성벽이기 때문에 포격을 받을 경우 부서지기 쉬운 석축성벽보다 유리한 것이다.



왼쪽의 사진은 Rocroi요새의 현대 사진으로, 16세기 프랑스 앙리2세가 축조했고 1675년에 세바스티앙 보방이 보강한 요새이며, 오른쪽의 두개의 사진은 Belfort요새의 사진인데, 이를 통해서 보면 구조물의 외부 전면만을 석축구조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성벽을 만드는 경우, 훨씬 더 두텁게 성벽을 구축할 수 있고, 성벽의 수리가 용이하고 비용이 덜 들며, 포탄의 파편효과가 감소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진다. 그러나, 수원화성과 16-17세기의 이러한 유럽의 요새들과 성벽이라는 요소에 대해 구별되는 점이 존재한다.

유럽측의 성벽은 위에서 보듯이, 가급적 성벽을 최대한 낮추고, 대신 성벽 앞에 폭이 넓은 해자를 파서 성벽과 유사한 효과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보다 두텁고, 낮은 성벽이 Trace italienne라는 16세기에 등장하여 기존의 중세식 성벽을 교체한 유럽 축성법의 모토였는데 비하여, 조선의 성벽은 여전히, 가급적 높게 쌓음으로서 방어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당시 청과 일본이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화포를 보유했음을 고려할 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성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피탄범위가 커지기 때문에, 수원화성이 아무리 내탁식 축성으로 두터운 구조를 가졌다 할지라도 성벽과 성벽을 방어하는 병력은 공자의 화포를 이용한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다. 즉, 당시의 축성에 대한 논의가 화포에 대해 조선측이 여전히 압도적 우위를 가진다는 전제하에 성립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는 병자호란에 이미 홍이포와 호준포를 활용한 공격에 노출되었으나, 그것이 성벽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각인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성벽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수원화성에서 성벽은 공격을 받는 전면에 위치하여 있다. 공자가 포격을 가하는 경우, 성벽은 거의 직각에 가깝게 포격을 가할 수 있도록 구조가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그림은 보방의 요새중 가장 유명한 요새로 손꼽히는 Lille요새의 지도인데, 이러한 구조로 성벽이 구축될 경우, 공자는 성벽에 직각이 되도록 사격을 가할 수가 없게 된다. 성벽은 가급적 낮게, 그리고 두텁게 구축하고 경사진 구조를 지향함으로서 피탄범위와 피탄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화기가 도입된 상황에서 적용되어야할 축성체계로 본다면, 수원화성은 단지 국내에서 과거의 전례를 통해 가정할 수 있는 학자들의 가정속에서만 구축된 성채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수원화성과 유사한 구조물은 근대 초기 피터 대제의 개혁 이전의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러시아의 경우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특히 수원화성의 포루나 치성, 공심돈과 같이 다수의 포탑을 통해 방어력을 증강시키는 형태를 취했다.9) 러시아 요새들은 성벽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인데(피터 폴 요새와 같은 근대적 요새를 제외하고) 이러한 중세식 요새는 화포와 개인화기에서 초기의 주된 가상 적인 타타르족을 압도했기 때문에 생성된 과도기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의 추가적인 전투사례의 부족과 제한된 외부문화 및 기술과의 교류부족으로 인하여 과도기적인 수준 이상으로 이전의 축성체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좌측은 발틱해연안의 나르바강 일대를 감시하는 Ivangorod요새 1496년에서 1507년간 지어졌으며 몽골의 지배에서 독립한 이반3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우측은 15세기에 건립된 노브고로드의 탑 38) )

이제 두가지 문제중 전자, 즉 성벽의 방어력에 대해서 논했지만, 방어력 자체만으로 성곽의 유효성을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효과적이지 못하더라도 화기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서 방자가 공세를 감행하지 못하도록 강요한다면 효과적인 방어전이 가능한 것이다. 수원화성의 경우, 특히 포루나 치성, 옹성과 같이 근본적인 축성개념상 고대로부터 이어진 돌출된 구조물을 통해 사각을 줄인다는 사상과 함께, 화기운용을 위한 구조물구축을 통해서 성곽의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기존의 성곽체계에 포루와 보루등을 확보하여 강화해야한다는 유성룡의 주장과 기효신서의 축성체계를 대거 받아들임으로서 수원화성은 이전에 비해 화포운용에 효과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화성성역의궤내의 포루 내외도 39)

이러한 형태의 포루는 수원화성에 5개가 있으며 이외에는 鋪樓(포루), 치와 같은 형태의 돌출구조물이 있는데 鋪樓(포루)는 치성, 즉 성벽이 돌출형태로 튀어나온 구조물 위에 포루와 같이 상부에 집을 지어 만든다. 포루의 경우에는 안이 비어있고 벽돌로 만들어져 3개층에서 화포를 운용할 수 있다. 鋪樓(포루)나 치성역시 돌출구조물로서 방어의 중핵이 된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돌출구조물은 성벽에 대한 사각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축되었다. 특히 정방형으로 구축된 성곽의 경우 한쪽 면에 공세가 가해질 경우 해당 면의 일부 전력만이 전투가 가능하며, 또한 투사무기사격이 성벽 하부에 공자가 접근할 경우 사각이 생기기 때문에 유효한 공세를 가하기 어렵다. 이러한 돌출구조물은 성벽에 대한 사각을 최소화하고 화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또한 포루는 성벽에 접근한 적에게 화력을 대량활용할 수 있도록 양측면에 포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수원화성은 높게 평가받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국내에서 만이 아니라, 그리고 적어도 동북아시아의 청과 일본을 가상적으로 상정할 때, “최첨단”에 가까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1677년 Cambrai 공성전

위의 캉브레에 대한 공성전도를 보면 유럽의 요새에서 Bastion의 형태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에 등장한 Trace italienne는 성벽을 가급적 낮고 두텁게 구축하는데, 또한 Bastion, 즉 능보라는 돌출구조물이 이전의 성벽이 제공한 방어형태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는 수원화성의 포루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능보체계의 중요성은 이러한 구조가 치성과 같이 화력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며 성벽과 같은 화력의 방호벽 역할을 수행하며, 동시에 이러한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 기존의 사각지대이자 취약지점이자 화력이 최소화되는 돌출구조물 사이의 간격이 가장 화력이 집중되는 살상지역이 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살상지역을 통해 능보에 대한 포화의 적절한 위치를 최소화하는 이점을 가지게 된다.

위의 지도의 능보와 화성의 포루, 치성, 鋪樓(포루)는 모두 동일하게 방어의 중핵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포루는 능보와 같이 화력이 집약된 지점이다. 하지만 포루의 경우 정방형의 구조로 선형 성벽에서 기존 성과 거의 다를바 없이 아주 조금 돌출해 있을 뿐으로 기존의 치성에 화포의 운용을 위해 내부를 비워놨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능보체계는 삼각형의 능보가 양옆의 능보와 연결됨으로서 역으로 공자의 입장에서도 능보를 피해 접근할 경우, 또는 능보의 벽에 직각이 되도록 입사각을 가지려 할 경우 삼각형으로 점점 좁아지는 지대에서 공세를 감행하게 된다.

위의 캉브레 공방전에서 공자의 병행호접근로를 보면, 대부분이 능보의 꼭지점 끝으로 접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능보 사이의 간격으로 접근하여 돌파하고자 한다면 방자는 간격 양측의 능보에서 화력을 공자에게 집중할 수 있다. 이 간격지대에서 사격해야만 직사사격을 통해 화력을 효과적으로 능보의 벽에 가할 수 있으나 이 경우 십자포화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능보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사격위치를 강요받게 되어 상대적으로 취약한 선형성벽이나 또는 능보가 추가적으로 배치되기 이전의 중세형 성벽에 대한 공세를 가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 능보는 화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방어병력을 능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을 향유할 수 있다. 반면, 수원화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조물들은 이런 역할을 하기 어렵다.



성곽시설물 배치도 37)

조선 읍성의 돌출구조물들은 과거의 궁시위주의 성곽방어의 치성구조물 이상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있다. 단지 포루와 같이 기존의 치성구조물에 화포를 운용하기 용이하도록 개조한 정도 이상은 아니며, 사각을 줄이는 것 역시, 기존의 치성과 크게 다를바 없다. 이러한 구조로 인하여 포루는 단지 화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구조물 그 이상은 아니며, 과거에 비해 이렇다할 발전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성곽에 가해지는 포격 및 보병의 공세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할 수 있는 성벽 자체에 집중될 수 있으며, 포격의 입사각도 직각에 가깝게 언제든 자유롭게 채택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의 성곽체계가 기존의 성곽체계에서 화기운용에 적합한 구조로의 근본적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조선의 훈련교범인 병학지남에서는 수성전에서의 불랑기 사정거리를 조총과 동일하게 적이 백보내로 접근한 이후로 하고 있다. 이 외에 적이 장거리에서 화포사격을 가해왔을 경우를 상정한 계획은 부재하다. 실지로, 조선이 화포사격을 통한 성곽의 함락을 경험해 본적이 없으며, 그러한 전투양상은 극히 드물었다. 유럽의 축성체계가 능보체계를 도입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이탈리아 전쟁과정에서 보여준 프랑스군의 공성포가 이탈리아의 중세형 성곽을 무너뜨린 충격의 결과였다. 반면 근대 초기의 러시아나 조선의 경우, 강력한 화포로 무장한 적국의 공세에 직면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조선은 화포의 포격으로 인한 성곽의 붕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였고, 이에 대한 우려도 없었기 때문에 성벽을 낮게 유지한다던가, 또는 기하학적인 구조로 돌출부를 형성하는 등의 고려를 할 필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다. 단지 화약무기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성곽방어를 위한 총통류의 활용에 대한 필요성은 강조되었고 그 결과가 여장의 총안구나 포루의 도입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러시아와 유사하게 화포의 활용이 용이한 포탑을 성곽체계에 도입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수원화성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의 축성기술은 국내에서는 “최첨단”기술의 적용이지만, 이미 홍이포와 같은 유럽제 화포를 활용하고 있는 청국이나 수입이 용이했던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할 경우, 유럽을 비교대상으로 하지 않더라고 해도, 충분히 발전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조선 성곽체계는 공성전시 포격에 대응하는 고려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고, 단지 기존 축성체계에 화기운용을 위한 고려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큰 발전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는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화약무기의 위협이 화포의 기존 성곽체계에 대한 위협으로 가시화되고, 그 다음 야전에서의 소형화기의 운용이 가시화된 유럽에 비하여, 가상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기운용이 발달하고 화포에 의한 성곽에 대한 위협을 크게 경험해보지 못한 조선으로서는 화포의 위협을 가정한 성곽체계의 발전을 추구할 필요성도 고려할 만한 전례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B. 유격전의 필요성


성곽체계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와 같으며, 이미 읍성의 필요성이 조선의 청야전략에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반계수록의 내용을 통해 언급한바 있다. 그렇다면, 우수한 성곽체계의 발전과 읍성의 축성으로 조선의 청야입보전략이 효과적으로 달성가능한가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성이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12월 8일에 압록강을 도하한 후 14일에 강화도와 한성간의 이동로를 차단함으로서 6일만에 도성까지 이르러 청야입보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읍성을 방기하고 산성으로 입보하는 전략의 문제점이라는 점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안주성과 같은 읍성에 대한 청군의 태도를 고려해야 한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청 나라 임금이 큰 낙타를 타고 가다가 성 위에 한 폭의 깃발도 없고 한 사람의 인기척도 없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대군(大軍)이 성에 다달았는데 이와 같이 고요하니 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가 반드시 지략이 있는 것이다.” 하고, 성 밖에 풀을 쌓고 바람을 따라 불을 피워 연기 밖으로 군사를 이끌고 지나갔으니, 이는 대개 우리 군사의 추격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면 인조 15년 4월 11일자 실록에서는 사헌부에서 “유림(柳琳)은 안주(安州)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적의 선봉을 편안히 보내주고 성문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와 대항하지 않아서 저들로 하여금 쏜살같이 서울로 직향하게 하였으니, 군부를 저버린 그의 죄가 여러 장수에 비하여 더욱 큽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처럼 읍성이라 할지라도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도성을 향해 남하하는 청군의 경우, 또는 일본군의 경우를 상정하는 경우, 청야입보를 통하여 도성에 대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한다는 전략은 근본적으로 달성될 수 없게 된다. 성을 사수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목표하고 있는 전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거나 또는 침공군이 기동로상의 산성 또는 읍성을 공략하도록 강요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국경과 도성간의 지방군의 문제점은 먼저 입보를 실시한 이후, 적이 접근하는 경우 수성전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청북방어사 임경업이 의주성을 포기하고 백마산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최초도하한 청군은 무혈입성할 수 있었고 이후 안주성도 무혈통과했으며 평양성도 점령하지 않고 통과하였다.

즉 단순히 읍성의 강화책만으로는 청야입보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적어도 단기간에 도성까지 접근할 수 없도록 기동을 저지할 수 있는 작전행동이 가해지지 않는 경우에는 침공군은 성을 공략하거나 지나친다는 전략적인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효과적인 대안은 보다 적극적인 유격전의 도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전면전 보다는 소규모 전력을 위주로 유격전을 감행함으로서 청야입보전략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유격전에 대한 적극적 고려를 하지 않았다.

의병이 효과적으로 청야입보전략과 연계될 수 있다는 임진왜란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면전을 회피하고 가급적 병력손실과 병참선의 교란을 위한 유격전 개념의 적용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조선 후기 군사체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정약용은 민보라는 지역 민방위개념의 적용에 대해서 백성의 반란을 우려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 우려할 사항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보살피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바 있는데 2) 이러한 요인이 전시에 효과적으로 활약한 의병체계를 적극적으로 비정규전 개념으로 군사체계에 접목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보여진다.

정약용 당시의 민보론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군정의 문란과 사쓰마번의 경제적 성장과 막부의 통제력 상실에 대한 우려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40), 의병의 왜란에서의 활약을 고려할 때, 청야입보전략에 있어서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 민보란 정약용이 고려한 향토방위체제로서 자위가 가능한 민보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유사시에 식량과 군민이 입보하며, 전통적인 산성체계와 유사한 방어시설을 통해 민보가 성립되면, 이후 여기서 탈향촌적 의병이 운용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민보에서 운용되는 민방위군의 병력은 최소 30에서 150명으로 하였으며 총기의 제작역시 배제하지 않았다. 민보는 상호방어를 포함하여 화공, 매복, 사격등을 포함 비정규전을 수행하도록 규정짓고 있다. 40)

이미 언급한 아일랜드의 16세기 말의 반란과정에서 보여준 화승총의 효과적인 비정규전에서의 활용은 조선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아일랜드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압한 아일랜드의 영국군 사령관 마운트조이경은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지켜져야할 원칙으로서 5가지를 유지했다. 그 중 두가지는 유격전이 조선의 청야입보전략에 가지는 효과를 확인하게 해준다. 마운트조이경은 대규모 종대로 병력을 이동시켜 기동로를 노출함으로서 매복공격을 당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1000여명의 보병과 2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들을 끊임없이 이동시켜 자신의 기도를 은폐하였으며, 삼림지대, 늪지와 같이 기동하기 어려운 지점을 지날 때에는 매복에 당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32)

즉 조총으로 무장한 소규모 전력이 매복을 통해 기동하는 대규모 병력에 기습을 가혹 병참부대를 타격하는 경우에, 침공군은 필연적으로 기동속도의 저하를 감수해야 하고, 후방의 위협에 직면하여 소규모 유격대의 거점을 제거하기 위해 읍성이나 산성을 함락시켜야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격전의 적극적인 수행과, 읍성과 민보의 활용을 통해 보급물자와 군민의 철저한 입보전략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청야입보라는 전략을 추구할 시간적 여유를 상실하고 수도권까지 적의 신속한 기동을 선택할 전략적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도권을 오히려 침공군이 확보하게 되는 경우, 상황이 반전되어, 침공군은 신속하게 기동하여 청야입보를 위한 물자와 군민의 입보이전의 지역의 물자를 확보할 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하며, 또한 입보한 전력이 중앙집권국가의 특성상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기동하다가 야전에서의 교전을 강요당하여 병자호란당시의 근왕병처럼 패배하거나 물자의 부족을 방자가 오히려 겪게 되는 사태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16세기 말의 아일랜드 반란군의 효과적인 비정규전사례는 야전에서 필적할 수 없는 전술적 열위를 비정규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의병과 민보개념을 적극적으로 군사체계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이 견지한 청야입보전략의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조선군은 삼수병체계에서 단병을 위한 무예체계의 발전을 강구하기 보다는 보유한 유효자원과 전투사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의병운용과 청야입보전략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소규모 조총수 운용을 이와 접목시켰다면 보다 효과적인 군사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성곽체계를 통해 하천선을 통한 종심방어체계에서도 적어도 기병을 활용하는 기동병력과의 결합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효과적으로 수와 당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성곽체계와 기동전력의 병참선 차단과 비정규전 수행에 대한 전쟁사상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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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7


4. 결론 - 조선후기, 16-17세기 유럽 군사체계간의 차이의 원인


지금까지의 조선후기 군사체계를 야전에서의 삼수병을 중점으로 하여, 야전운용과 실전사례, 야포, 전차전 도입, 병참, 축성과 전략에 대하여 16-17세기 유럽의 군사체계와 비교함으로서 그 효용성과 이상적 발전방향의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 보았다. 여러 요소를 종합하여 봤을 때, 조선후기의 군사체계는 18세기 들어서의 상대적으로 확연한 우위에 서기 시작한 유럽군사체계가 아닌 16-17세기의 유럽 군사체계에 비교해도 확연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등, 당시 군사혁신을 주도했던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군의 군사체계는 오히려 폴란드나 러시아등 본격적인 서유럽 군사체계를 도입하기 이전의 과도기적인 수준의 군사체계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16세기 이후의 유럽의 전략, 전술적 체계를 하나의 정론으로 보고 이에 조선후기 군사체제를 대입하는 선입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포의 도입과 활용이 유럽에 비해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유사한 과도기적 축성체계를 가진다거나, 보헤미아 후스파의 wagenburg와 같이 화기의 야전운용을 위한 과도기적인 전술을 지속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고려한다거나, 개개인의 무예와 소집단 단병접전을 발전시키는 조선후기의 군사체계는 이미 유럽 근대 전쟁사에서 점차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거친 과도기적 전례와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병참문제와 같이 조선의 경제, 사회적 문화와 인프라와 연결된 요인을 제외한 군사적 요소들이 이러한 면모를 보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합리적인 답안은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의 주된 가상적국은 어디까지나 북방의 여진족과, 남부의 왜구로서 정규군을 가상적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하삼도의 읍성이 임진왜란 당시 그렇게 쉽게 함락되고 성벽의 높이가 취약했던 원인은 소규모 왜구를 가상적으로 설정한 조선 전기 군사체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여진 및 왜구에 대한 정규군의 작전은 대체로 전면전보다는 정벌전의 성격을 띠었고 명이 오이라트와의 교전에서 토목보의 변을 당했던 반면 건주, 해서, 야인여진등은 후금이 강성하기 전까지 어디까지나 비정규전의 성격으로 조선이 대규모 병력으로 공세작전을 감행할 경우 이에 전면대응할 능력이 없었고, 고려말, 조선 개국초 주된 문제였던 왜구는 대마도 토벌 이후 침구사례는 극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평화가 군사적 긴장을 푼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조선은 개국이후 대규모 정규군으로 교전을 벌이는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중에 하나일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태조, 태종대의 명과의 긴장관계, 그리고 문종즉위 직전의 토목보의 변으로 인한 일시적 긴장상태를 제외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동북아에 중국에서는 명이, 한반도는 조선이 안정적 헤게모니를 유지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북벌에 대한 논의가 수그러든 이후 청과 일본에 각각 안정화되고 삼국간 관계가 긍정적으로 유지됨으로서 조선이 상정할 수 있는 최신의 전투사례라는 것은 왜란과 호란 양자에 불과하였으며, 그 대상또한 일본과 청이라는 양자로 국한되었다.

반면 유럽의 경우 16세기-17세기는 안정적인 헤게모니가 구축되지 않고 종교적 문제와 왕권의 강화로 인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국가간의 이탈리아 전쟁이 공성포의 혁신과 축성기술의 발전, 소화기의 야전운용과 야전축성, 파이크와 화승총의 결합을 불러왔으며,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스페인 플랑드르군이라는 대규모 상비군으로 군의 대규모화를 촉진시키고 축성체계와 스페인의 전략형성에 기여하였으며, 독일의 종교 및 황제위와 관련된 전쟁과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제한하기 위한 프랑스의 시도와 위그노와 개톨릭간의 내전, 스웨덴과 러시아, 폴란드간의 전쟁과 30년전쟁등 무수한 정규전이 극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국가간에 이루어졌고 각각의 전쟁에 복무한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독일, 스위스용병이 각국을 이동하여 이러한 사례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폐기되는 과정을 거쳤다.

게다가 조선은 짧은 기간동안 왜란과 호란이라는 대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의지한 벤치마킹 대상은 여전히 중화, "명"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제한된 전투사례마저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였다. 왜란과정에서 척계광의 절강병법을 받아들인 조선군은(물론 왜란에서 조총을 경험한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조총의 적극적 도입이 과연 일본의 영향으로 봐야하는지 기효신서의 병제의 영향으로 봐야하는지 의문이 든다.) 삼수병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호란과정에서 삼수병제의 문제점을 인식한 이후에는 마찬가지로, 척계광이 계주총병으로 재직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연병실기"의 체제를 활용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연병실기"의 거기영제도는 실제 실현되지 못했고 오히려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과 기병의 강화를 추구하긴 했지만, 군사체계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척계광이 조선후기 군사체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척계광의 기효신서, 연병실기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극히 제한된 상황의 전투사례에 기인한 것이다. 기효신서는 절강에서 왜구집단을 대상으로 교전을 벌인 것인데, 그 형태는 우월한 화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이를 근접시 방호하는 수단으로 소집단 무예를 활용하는 것이며, 연병실기는 북방의 유목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전차를 활용하여 화기를 기병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절강의 왜구나 계주의 몽고기병 모두 당시 척계광이 대규모 정규군을 그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임진왜란에서도 남병이 야전에서 왜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경우 경주 안강현에서 낙상지등 남병이 패배한 사례가 없는것도 아니다. 기효신서와 연병실기는 어디까지나, 가상적이 화기로 무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월한 화력을 제한된 적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추구한다. 전자는 척계광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기병에게 취약하며 27) 대규모 정규군에게 통용된다고 하기 어렵고 후자는 유럽에서 시현된 바와 같이 야포를 지닌 적에게 취약하다. 9)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척계광의 양 전술체계 역시 제한된 전투사례와 가상적으로 인하여 단지 상대는 화기를 가지지 않은 것을 상정한 과도기적 제도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의 축성체계 역시 공성포로 인한 위협에 심각하게 직면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후기 실학자들조차도 성벽의 높이가 높아야 함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장기간 안정적 평화적 국제관계가 일시적 전쟁상태를 제외하고 유지되고, 가상적이 극히 제한되었으며, 그렇게 제한된 전례와 가상적에도 불구하고 전술체계의 관찰과 도입을 "명"의 척계광의 군제와 조선전기의 오위진법에 국한하여 일본군이나 청의 군제에 대한 관찰과 논의를 소홀히 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초 일본 미토번의 군사훈련도에서는 근대식 포가를 갖춘 야전포가 전통 일본군의 진막에 배치되어 있으며 강희제대에 청은 경량 야전포를 비롯해서 중형, 대형포를 대규모로 주조, 실전에 배치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실학자들이 영향을 미쳤던 정조대에서조차 기존의 기효신서의 법제를 체계화하는데 주력하고 공성포의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수원화성을 축조했다.

제한된 전례와 가상적, 그리고 전례와 가상적의 군사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의 제한된 취사선택, 그리고 가상적의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관찰과 고려를 조선후기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정약용이 우려와 민보체계에 대한 관심은 군정의 문란이 없었다 할지라도 유효한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반드시 조선만의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는 3개국 모두 각 지역의 안정적인 패권과 폐쇄성으로 인해 장기간 평화를 누렸고, 히라도나 나가사키와 같은 무역항을 보유, 유지한 일본이나 마카오와 같은 통로와 이후 유럽의 대표단이 방문했던 청에 비해 외부문물이나 정보를 청에 의존하는 조선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전례들과 일본군을 비롯, 청에 유입된 서양문물과 일본의 서양인등을 비롯, 국내에 천주교도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각국의 군사체계에 대한 관심과 고려에 조선이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실학자들조차 서구의 군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조선후기 군사체계를 평가하고 분석하며 그 효용성을 측정하는데 있어, 그 자체만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동시기의 근접한 가상적국이라 할 수 있는 청과 일본이 보유한 군사체계와 기술적 수준, 보유무기를 고려하며, 또한 유사한 단계로 군사체계면에서 발전했던 시점의 유럽의 사례를 비교연구함으로서 보다 일보 전진한 평가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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