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선 (steven0302, hotmail.com)
2004/10/22 (19:02)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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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발전사 -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석기시대 인류는 조잡한 석기도구를 들고 다른 부족들과 식량, 여자 그리고 땅을 위해 싸웠다. 아니 석기시대 이전에도 다툼은 있었을것이다. 현대인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온몸에 털이 숭숭 난 유인원시절데도 말이다. 이러한 다툼은 훗날 두가지의 형태로 발전되었는데 하나는 전쟁이요 하나는 스포츠이다. 둘다 이기기위해 싸운다는것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선사시대가 끝나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비로소 전쟁이라 부를만한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체계가 잡히지 않았던 영역다툼에서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는것은 인류가 "시스템(system)"을 만드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누구나 구할수있던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힘의 균형이 만들어졌고 이것은 더욱 복잡한 사회와 정치적구조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인류의 역사가 늘 그렇듯 사회는 점점 복잡해졌고 마침내 복잡해진 사회의 결정판 "문명(civilisation)"이 탄생하기까진 불과 수천년밖에 걸리지않았다.
수천년이라면 사람들은 상당히 길게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의 석기시대가 수백만년이라는것을 생각해보면 인류의 발전이 얼마나 빨리 이루어졌는가를 알수있다. 문명의 발생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초고대문명이니 외계인이라느니 하는말들을 하지만 인류가 한번 발전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빨리 발전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그런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을것이다. 비행기를 발명해낸지 백년도 안되어 달에 착륙한 인류가 아니던가?
어쨌든 인류의 역사의 시작, 그것은 전쟁의 역사도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이 지금의 만물의 영장일수있게 만들어준것-욕심은 남의것을 빼았기위한 그리고 그런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위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인류역사에 있었는가? 일년, 하루라도 전쟁이 없었던날이 있었던가?
기원전 1500년전까지 사실 전쟁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은 끊임이 없었지만 세월의 흐름이 모든 기록들을 휩쓸어버린것이다. 자세한 전쟁의 기록은 기원전 6,7세기경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밀리터리 발전사를 다루기전에 무기의 발달부터 알아보자.
무기
무기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수있다. 쇼크(shock)와 미사일(missile)이 그것이다. 초기의 쇼크무기는 원시인들이 가지고 다니던 막대기였고 미사일무기는 땅에 널려있는 돌들이었다. 미사일은 그뒤 가죽슬링(sling)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원심력을 이용해서 던지므로 팔만 쓰는것보다 더욱 큰 거리와 힘을 실을수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돌대신 던지는 막대기가 발전했는데 이것은 후일 투창, 활, 부메랑(Boomerang), 다트(dart)로 진화하게된다.
쇼크무기의 원조인 막대기역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일부는 위에 언급했듯 투창등으로 발전했고 한쪽면이나 끝을 날카롭게하여 도끼나 칼등으로 발전하기도했다.
그렇다면 방어구는 어떠했을까? 최초의 방어구는 방패였가. 대부분의 인류가 오른손잡이임으로 방패는 주로 왼손이나 왼팔을 이용해서 잡았는데 그것은 오른손을 자유롭게하여 무기를 사용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방패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그위에 가죽을 씌워 충격을 흡수하기도 하였다.
청동기시대가 도래하면서 금속의 유연성을 알아차린 인류는 청동의 특징을 이용하여 무기의 날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칼의 탄생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날을 길게 만들지 못해서 단검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나 나중에 점점 청동을 다루는데 익숙해지면서 날이 점점 길어져 검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고대 아시리아(Assyria)인들이 본격적으로 검을 전쟁에 사용하기 시작한것으로 알려진다.
갑주또한 무기의 발달과 함께 점점 방어구로서 그 모습을 들어냈다. 처음 방어구로서의 갑주는 가죽이었으나 중요한 부분(몸통이나 다리 앞면등)을 금속이나 목재로 대채하고 관절같은 유연성이 필요한 부분만 가죽이나 천으로 감쌈으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형태의 갑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술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도 무기, 임무, 기동성에 따라 군대의 진열이 정해진다. 초기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고 갑주나 검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신분이 낮은 출신의 병사들이 신분높은 병사들을 감싸거나 앞열에 나서는것이 일반적이었다. 문화나 국가별로 다르지만 투석병(slinger)이나 궁병들도 전면에 나서는일이 많았다.
그뒤 말을 전쟁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차가 등장했는데 무장한 말이 끌게했으며 바퀴의 살(spoke)에는 칼날을 달아 더욱 살상력을 높이는 일도 있었다. 보통 전차는 귀족이나 기타 신분이 높은 사람이 끌고 전장을 지휘하는것이 일반적이었다.
기병역시 귀족, 혹은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로마나 중세의 기사들에게서도 볼수있듯이 말과 또한 그에 맞는 장비를 갖추는것이 가난한 평민들에게는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병의 위력은 그 돌파력과 기동성에 있었지만 지역에 따라 직접적인 전투가 아닌 투창이나 활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전투는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는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당시에는 전투의 규모가 크지않았고 적을 제압하는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발달하고 규모도 커지면서 전쟁의 규모도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는데 전쟁의 개념도 한번의 충돌에서 여러개의 전투들로 이뤄진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때 캠페인(campaign)이란 개염이 확립된다.
캠페인이란 큰 공격을 말하는데 넓은 지역이 침략당하고 패배한 군대가 학살되고 도시가 파괴되고 패배한 지역사람들이 노예가 되는것을 뜻한다. 이것은 승리자에게는 경쟁자가 없어짐과 동시에 상당한 약탈품과 전리품을 거둘수 있다는것을 의미했으니 캠페인은 곧 전쟁과 동의어가 되어버린다.
고대의 진형은 대개 창을 든 보병들이 군대 중앙에 서고 대개 귀족들인 기병이나 전차병들이 앞이나 측면에 서며 무장이 상대적으로 덜된 궁병이나 투석병들이 군대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앞줄에 서서 공격하는것이 일반적이었다. 양군이 서로에게 전진하는동안 궁병이나 투석병들은 화살과 돌로 적을 괴롭히는 역할을 하다 적군이 너무 가까이 오면 아군들사이로 들어가 뒤나 옆으로 빠졌다. 훗날 검과 활이 발달하면서 투석병은 쇠퇴하고 궁병들은 검을 들고 보병이 되어 싸우기도 하였다.
가끔씩 기병이나 전차의 선공은 적에게 가공할 공포를 주기도 했는데 이럴경우 전투는 전면전이 아닌 추격전이 되는일도 다반사였다고한다. 하지만 전면전은 여전히 전장을 지배했다.
전면전 벌어졌을때 양군은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데 한순간 한쪽이 패배를 느꼈을때 어느 한명이라도 도망가는 일이 생기면 이는 전군으로 퍼져 군대는 허겁지겁 도망치고 승기를 잡은 군대는 이를 추격하여 말살시켰다. 오직 발빠른 병사만이 탈출할뿐이었다.
포로를 잡을 경우 어떻게 했는지 국가마다 다양하고 기록의 부재로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죽이거나 노예로 부리거나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일이 일반적이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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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무게잡고 글쓰려니 어렵네요-_-;;; 그냥 글솜씨나 닥으려고 쓴글입니다. "...습니다"와 "...했지요"로 글쓰는 제가 막상 이런글을 쓰니 어색하기가 이를데없군요-_-;;; 앞으로 몇번 더 연습해봐야겠습니다-_-(<=잼없는 글 또 쓰겠다는거냐?ㅡㅡ^)
계속 하세요. 뭐든지 많이 하다 보면 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꾸준히 쓰시다 보면 좋은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밀리터리 발전사 - 아시리아(Assyria)
아시리아는 세계최초로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집트의 나일 델타에서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라크로 이어지는 초승달모양의 지역)을 모두 정복한 강대국이며 또한 최초의 군국사회이기도 했다. 성경에서 무지막지하고 탐욕스러운 정복자이자 또한 가끔씩 신의 저주를 받아 십삼만명이 죽기도하는(ㅡㅡ;;;) 나라로도 나온다.
아시리아의 부와 번영은 전쟁으로 얻는 전리품과 정복지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공물과 세금, 그리고 정복지의 광대함에서 나오는 무역의 발달이었다. 중동에서 왠만한 문명이 있는곳들이 아시리아에 의해 통일되면서 그만큼 전쟁이 줄어들었고 무역이 그만큼 발전했던것이다.
사실 아시리아의 군대가 처음부터 강한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다른 중동국가들이 그렇듯 아시리아는 민병(militia)들이 군대의 핵심이었다. 민병이란 성경에도 나오지만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필요할때 부름을 받고 자원해서 모이는 군대를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은 조직적인 전략전술에 익숙하지가 않았고 개인기에 더 익숙했으므로 방어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복에는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런 민병중심의 군대를 폐지하고 전문적으로 군에만 복무하는 정식군대를 창설한것이 바로 아시리아의 황금기를 이룬 군주중 하나인 Tiglath-pileser 3세이다. 그는 성장하는 아시리아가 타국을 정복하고 자국을 지켜내려면 비효율적인 민병들보다 전문적인 군대가 더 낳다고 판단했을것이다.
아시리아인들은 철의 장인이기도 했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아시리아의 민병들은 철로 만든 무기와 전차, 갑옷들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그마한 도시국가 아수르(Assur)가 당시 오리엔트 최강의 강대국으로 성장할수 있었던 이유였다. Tiglath-pileser때에 이르러 아시리아의 철기술은 군대와 접목되어 체계적인 군대시스템이 탄생했는데 이때와 함께 아시리아의 전성기도 역시 시작이었다.
아시리아 군대의 핵심은 진열을 이룬 거대한 규모의 창병들이었다. 이들은 겉보기엔 느리고 답답해보일지 몰라도 조직적인 움직임이 탁월했고 따라서 개인기를 주무기로 삼던 타국의 병사들은 아시리아군대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발달된 아시리아의 야금술은 검의 발달도 가져왔는데 아시리아인들은 그때까지 단검형태를 못벗어나던 검의 날을 더 길게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켜 검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장에서 쓰이기 시작한다.
아시리아 궁병들은 그들의 카운터파트(counterpart)보다 훨신 더 조직적이었는데 이들은 적진에 혼란을 주는 역할을 맡았다. 아시리아의 발달된 기술은 활의 사정거리와 속도, 살상력(화살촉을 철로 만들었음)을 더욱 높여주었고 이는 적궁병들의 사정거리 바깥에서의 발사가 가능했음을 의미하므로 적진은 아시리아군의 돌격전에 이미 화살세례를 받고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혼란에 빠진 적군을 향해 기병과 전차가 콤비를 이루어 적의 열을 돌파했고 뒤이어 보병들이 돌격하면 전투는 거의 아시리아의 승리였다.
기병들은 군대에서 가장 적은수를 차지했지만 이들은 최정예였고 무장도 제일 잘 갖추었다. 이 소수의 정예들은 적진을 휘젖고만 다니는 전차와는 달리 직접 싸웠는데 일당팔을 상대한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에 따라 그 효과는 확실했다. 다만 등자가 없었으므로 등자를 사용하는 기병들보다 더 잘 미끄러지거나 끌어내려졌을것이다.
축성술은 아시리아가 역사전면에 나서기 수천년전부터 중동에서 꽃을 피워왔다. 대도시를 둘러싼 성벽들은 당시의 기술로는 공략하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아시리아는 기술자들의 나라답게 공성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아시리아의 장인들이 만든 공성기구중 유명한것은 거대한 목재탑(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오크들이 사용하던 탑과 비슷함)과 램(ram)이다. 램은 전차나 쇠달구지를 개량한것으로서 수비군의 공격을 막기위해 위를 막아놓았고 초기에는 병사들이 그안에 들어가 망치등으로 성벽을 부쉈지만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장치를 설치하여 수동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목재탑에 경우 성벽보다 높게 만들어 탑위에 있는 병사들이 성안으로 침투할수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다. 다만 목재의 특성상 불에 타기 쉬움으로 젖은 가죽을 덮기도 했다.
이러한 아시리아인들의 공성술은 사실 그들이 만들어낸것은 아니었고 수메르(Sumer)인들의 업적을 빌린것이었지만 이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한것은 순전히 아시리아인들의 공이라고 할수있을것이다.
아시리아가 성공할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바로 공포였다. 아시리아인들의 잔인함과 사나움은 아마 수천년동안 그들의 고국을 주변의 사나운 적들로부터 지켜내면서 얻은것일것이다. 하지만 공포도 당시 아시리아인들에게는 계산된 전략의 하나였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세계최초의 심리전이 아닐까한다. 점령한 도시의 모든 남녀노소를 학살하는것은 아시리아인들에게 전혀 별난 행동이 아니었다. 어떤때는 점령지의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가는일도 있었다.
아시리아인들은 수많은 침략을 받은 민족이고 따라서 숫한 전쟁을 격어왔다. 이러한 전쟁의 경험은 아시리아인들에게 유익한 전쟁기술을 습득하게하는 원인이 되었고 충분히 힘을 얻은 아시리아인들은 여태껏 침략받던 민족에서 침략자로 변신할수 있었다. 또한 한지역을 점령하면 그곳의 기술자들을 십분 이용함으로서 기술적인 발달을 꾀하기도했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잔학한 통치는 피지배민족들의 반감을 샀고 끈임없는 반란이 전국에서 터졌으며 아시리아는 강제이주나 학살같은 강력한 대응을 했지만 제국은 나날이 쇠약해져갔다. 결국 아시리아는 신바빌로니아(New Babylonia)와 메디아(Media)의 합동공격을 받고 수도인 니네베(Nineveh)가 함락당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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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가 그나마 고대전쟁사에 가장 많은 흔적이 남아있는 국가입니다. 그후의 중동전쟁사(이스라엘하고 아립이 싸운 전쟁이 아니라)는 아시리아의 전철을 그대로 따랐다고 보면 좋을것입니다. 그리고 누구 동양쪽의 고대전쟁에 대해 전문적으로 쓴 책이나 사이트 아시는것 있습니까? 도대체 고대에 어떤식으로 전쟁이 일어났는지는 자료를 찾기가 장난이 아니고 그나마 있는것들도 전부 서양쪽이라 동양쪽의 것을 찾는것이 어렵습니다.
그나저나 추천게시물은 어떤식으로 올라가는걸까요? 추천을 많이 받으면 된다고 하지만 추천게시판에 올라갔을땐 제목이 바껴있는것을 볼때 펜스지기님이 임의로 고르는것이 아닐까합니다.
밀리터리 발전사 - 예술이 된 전쟁(600~400 BC)
기원전 600년대에 들어서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수천년간에 걸친 문명과 문명의 접촉, 무역의 발달, 끈임없는 전쟁으로 새로운 기술과 과학을 계속 섭취한 인간사회에서는 샤머니즘과 "우상숭배"의 종교관에서 벗어나 유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체계가 잡힌 새로운 종교들이 출현했고 동시에 전장에서도 본격적인 시스템화된 전략전술이 등장하여 이전까지 패싸움에 가깝던 전쟁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다만 무기들은 별 발전이 없었다. 무기의 근본적인 변화는 이천년후 화기의 시대가 오면서 시작된다.
지상전략과 독트린
6세기 중반 페르시아(Persia)의 키루스(Cyrus the Great)는 그때까지도 미숙하던 훈련이란 개념을 군대에 완전히 도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개념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 초기부터 있었지만 페르시아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히 정착을 한것이다.
군대는 출발하기전 수천년동안 해봐서 진부할지도 모르지만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는것이 거의 관례였다. 점성가나 예언자들에 의해 의식이 행해지고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지면서 신은 아군이 이길거라는 계시를 내려준다. 그러면 군대의 사기가 오르는것은 당연지사였다. 의식이 끝난후 왕, 장군, 신관들의 연설이 끝나면 군대는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전투현장으로 진군했다. 더욱 사기를 높이기위해 악단이 동원되어 군가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도 있었다.
적군과 만났을때 두 군대는 평행을 이루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주로 보병들은 중앙에, 전차와 기병들은 측면이나 앞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투석병(slinger)이나 궁병들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주로 본대와는 약간 떨어진체 앞이나 측면에서 적병들을 괴롭히는 역할을 맡고 군대가 충돌하면 무기를 꺼내들고 백병전에 끼어들거나 아군의 뒤 혹은 측면으로 빠졌다. 군대는 돌진하면서 적의 사기를 죽이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함성을 질렀다. 이러한 군대의 포메이션(formation)은 오랜 시간 전장을 지배해왔다.
진열의 중요성은 전장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진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 적군에게 하나씩 각개격파되는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열을 흩뜨리려는 수많은 전략전술이 시도되었다. 가장 흔한것은 적군 프론트라인의 한부분을 집중공격하여 틈을 만들고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적의 내부에서부터 진열을 흩뜨리는것이다. 물론 이 전략은 아군의 수가 적과 같거나 많을때 주로 유용했다. 또한 적이 잘 훈련된 군대라면 라인을 뜷고 들어온 아군을 금방 처리하고 진열을 복구하거나 반대로 프론트라인의 틈을 복구한뒤 내부로 침입한 아군을 포위하여 말살시킬수도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적군의 측면포위, 혹은 완전포위가 있다. 기병을 제외한 10에서 30열로 이뤄진 보병들의 진열은 측면과 배후에서의 공격에 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작전에 미리 대비한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하므로 포위작전의 경우 재빠른 속도전이 승리의 관건이었다. 포위를 당해도 재빨리 진열을 재정비하면(원형배치, 조금 다르지만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인간군이 오크군에게 포위되자 썼던 진열. 대충 양파를 연상하면 된다) 포위전에 대처할수 있었고 포위를 시도하는 측도 적이 진열을 재정비하기전 적을 포위하고 공격에 들어가면 거의 승리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포위를 시도하는 측의 병력이 적과 같거나 많아야 효과적이었다.
속도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것은 바로 기병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광활한 평원에서 주로 활약했는데 이전까지 등자와 안장문제로 말은 전차를 끄는데 주로 사용되었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면서 말은 기병과 하나가 되어 전장을 휘젖는데 사용되었다. 동시에 전차는 기병의 등장과 함께 점점 쇠퇴해간다.
기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국가는 키루스의 페르시아가 있다. 페르시아는 강력한 궁병과 보병의 콤비로 상당한 성공을 거둘수 있었지만 기병이 점차 보편적인 전쟁도구가 됨을 인식하고 재빨리 기병중심의 군대편제를 이뤄냈다. 페르시아는 기병이 없었다면 그렇듯 대제국으로 성장하는것이 불가능했을것이다.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이뤄낸것은 다름아닌 돌파에 강한 중기병들과 여러가지로 적군을 괴롭히는 궁기병들이라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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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쓸려 그랬는데 밤이 늦었습니다. 지난번 질문에서 많은 고수분들의 답변이 큰 도움이 되었구요 앞으로 한번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밀리터리 발전사를 써볼 예정입니다(재미없는 글을 계속 쓰겠다는 소리냐?ㅡㅡ+++). 그나저나 동양쪽은 아예 포기를 했습니다. 서양쪽은 넘치는데 왜이리 동양쪽은 자료가 없는걸까요?ㅠㅠ 서양사람들이 관심이 없으면 동양쪽에서 번역을 해서라도 알려야되는거 아닙니까?ㅠㅠ 어쨌든 밀리터리 발전사는 지독히도 서양중심으로 써나갈수밖에 없겠습니다ㅠㅠ
어제가 할로윈이었는데 몇년전이 생각납니다. 그때 어린 제 사촌이 호주에 할로윈이 있는줄 알고 잔뜩 기대하고 왔다가 잔뜩 실망하고 간적이 있었지요. 호주와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미권에서도 별로 없는 할로윈이 한국에서 유행했다는 말을 듣고 "인간들아 정신차려라! 미국것은 총기문화까지 다 받아들일거냐?"라고 소리치고픈 생각이...ㅡㅡ;;;
ps 어디선가 등자를 최초로 사용한 민족이 고구려라고 들었는데 그게 맞는말입니까ㅡㅡ? 아니면 그냥 잘난민족이 되려는 꼴통들이 만들어낸 낭설인가ㅡㅡ?
밀리터리 발전사 - 거인의 시대(400~200 BC)
기원전 600~400년대의 기간이 전쟁에서 체계가 잡혀가던 시대였다면 이 시대는 모든 것에서 완벽한 체계가 잡힌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이르러 알렉산드로스(Alexander the Great)나 한니발(Hannibal)같은 희대의 명장들이 출현했고 그외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인 필리포스(Philip)나 후계자인 Diadochi,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Hamilcar), 스키피오(Scipio), Marcellus, 네로(Nero), 에피로스(Epirus)의 피로스(Pyrrhus), 그리스의 Epamanondas, Xanthippus, Philopoemen, Syracuse의 Dionysius와 Agathocles, 인도의 찬드라굽타(Chandragupta) 등이 있다. 이렇듯 이 시대에는 다른 시대에서도 태어나기 힘든 수많은 명장들이 나타난 시대이기도 했다.
전쟁의 이론
한니발은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린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다. 이들 군사천재들은 후배들의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네로의 Metaurus 전투와 스키피오의 스페인,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한니발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 이르러 경제는 매우 중요해졌는데 당연하게도 군사전략과 함께 경제 역시 체계가 잡혀 지중해를 모두 연결하는 무역인프라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전쟁이란 이러한 잘 짜여진 무역인프라가 무너질때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포에니 전쟁이 있다. 이 전쟁은 전통강호인 카르타고의 헤게모니에 신흥강호 로마가 정치적, 경제적인 도전을 하면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군사조직
아직 통일되지 않은 다양한 군사적인 요소들이 전략에 눈을 뜬 인류에 의해 통합되어 보다 발달되고 발전한 전략전술들이 탄생한 것을 보면 이 시대의 발전상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Persia)는 기병을 이용한 전략전술에 능했지만 보병들을 기병들과 그리 잘 조합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페르시아의 이러한 단점을 보고 보완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Epaminondas는 Leuctra에서 기병과 보병을 조화시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Syracuse의 Dionysius도 역시 복합적 병종을 응용한 전술로 성공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제 시대는 바야흐로 단일 병종만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복합적인 병종의 혼합전술이 지배적인 시대가 온 것이다.
과학적인 군사전술의 시대를 연 것은 마케도니아(Macedonia)의 필리포스2세였다. 그의 미사일 엔진(missile engine, 뭐라 마땅히 표현할 한국말이 없어서ㅡㅡ;;;)을 이용한 평원에서의 기병, 보병과의 혼합전술은 아틸러리(artiliary, 이것도 뭐라 딱 표현할 말이 없어서ㅡㅡ;;;)의 시초이자 창세기였으며 후일 알렉산드로스에게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케도니아 지방은 평원이 그리스본토보다 많고 넓은 관계로 기병전술이 팔랑크스를 기본으로 하는 그리스본토보다 더 발달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또한 그리스의 팔랑크스 전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의 전술과 팔랑크스를 적절히 응용하여 psiloi 대신 hypaspist라는 새로운 경장보병제도를 도입했다. 이들은 그리스본토에서 전투에 hoplite에 비해 보조적인 역할밖에 못하는 psiloi보다 훨씬 잘 훈련되어 있었고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이 경장보병의 기원은 반세기전 아테네의 Iphicrates가 소개한 바 있는 주로 용병이었던 peltast라는 경장보병을 기원으로 하고 있었다.
무기
이 시대의 신무기라고 한다면 catapult(한국말로 뭔지 사전을 찾아보니 뭔노메 뜻이 이리도 다양한지ㅡㅡ;;;)와 ballista가 있다. Catapult는 시리아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거대한 화살에 밧줄을 묶어 단단히 당긴 다음 담당병사가 밧줄을 끊거나 풀어서 화살을 날아가게 만드는 무기였다. 최대 500m 가까이 날아갈 수 있었고 그 폭도 자그마치 200m에 가까웠다고 한다. 나중에 화살대신 돌을 장전하는 투석기로 발전하기도 했다. Ballista는 비슷하지만 보통 더 큰 의미로 사용된다. 밧줄을 사용하여 단단히 당긴 다음 창, 화살, 돌 등을 발사하는 무기이다.
이 무겁고 다소 휴대하기 부담스러운 장치들은 주로 공성전이나 수성전에 쓰였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의 두 명군(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들은 이것을 가볍게 개조하여 휴대하기 편하게 만들었고 평원에서의 전투에서도 이용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Catapult나 ballista같은 중대형 무기들을 제외하고 휴대형 무기들은 그다지 발전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몇가지 무기들은 주목할만한데 마케도니아의 장창인 sarissa, 로마의 gladius 단검(dagger는 아니고 short sword입니다)과 pilum 투창 등이 다소 유명하다. 갑옷으로는 앞에 "경장(輕仗, 한자가 맞는지 모르겠네ㅡㅡ;;;)"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 peltast와 마케도니아 hypaspist의 경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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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못올리는게 이리도 원통할 줄이야ㅠㅠ
그리고 hoplite는 중장보병 정도로 해석된다지만 중장과 경장, 보병과 기병의 조합만으로는 서구의 수많았던 병종들을 모두 이름짓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렇듯 그냥 psiloi나 peltast같이 그냥 알파벳으로 써놨으니 그점 양해해 주세요.
밀리터리 발전사 - 거인의 시대(400~200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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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
공성전의 기본적인 무기는 램(battering ram)과 이동식탑(movable tower)이다. 이러한 공성기구들의 문제점은 재료가 목재여서 불에 타기 쉽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용된 것이 mantelet이다. Mantelet은 일종의 방패로 전진하는 병사들의 초공을 보호하거나 적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공성기구들을 적의 불화살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쓰였다. 물론 이동식탑같은 대형기구들은 보호가 불가능했고 주로 catapult나 ballista를 보호하는데 쓰였다.
알렉산드로스(Alexander)의 기술자인 Diades는 crow라는 공성기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끝에 마치 까마귀 부리같은 갈고리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다. 이 기구는 평소에는 수직으로 서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성벽 안쪽으로 기울어져 끝에 달린 갈고리로 몸체를 고정시킨뒤 병사들이 성내로 침투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후일 이것은 미숙한 로마해군이 노련한 카르타고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Diades는 telenon이라는 상자, 혹은 바구니도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안에 병사들을 담아 boom(뭐라 설명할지 좀 막막하지만 대충 기중기의 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성벽위로 침투시키는 장치였다. 이때 사용되는 boom은 도르래를 통해 높이를 조절할 수 있었고 또한 사방으로 회전할수도 있게 만들어졌다. 해자나 성벽 등을 넘을때 매우 유용한 장치였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또한 수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술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의 공격으로부터 시라쿠사(Syracuse, 이탈리아어로는 Syracusa)를 방어해내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만들었지만 오늘날 그것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지상전략
전략적인 측면에서 지중해세계에는 두가지의 주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테베(Thebes)의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와 로마의 전략적 유연성이 그것이다.
초기의 전투에서는 마라톤(Marathon)에서 보여지듯 기존의 전술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전술들이 쓰였지만 에파미논다스는 Leuctra에서 이러한 전통을 깨뜨리고 독창적인 그만의 전술을 사용했다. 기존의 전술들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획일화 되어 있었지만 이 시대에 들어서 예측불가능한 전술들이 다량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한니발(Hannibal)이 세계전사에 이름을 날리는 명장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예측이 불가능한 전술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전술들로 수없이 로마의 허를 찔렀고 그리하여 로마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의 유연성은 로마가 지중해를 제패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도 비슷한 전략전술만을 편애했던 그리스에 비해 로마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의 전략전술들을 받아들이고 그로인해 위기를 여러번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의 팔랑크스(phalanx)를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볼 수 있는 레기온(legion)에서도 들어나는데 팔랑크스가 평지에서만 효율적이라는 단점을 보완하여 레기온은 다양한 지형에서도 쉽게 대처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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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ortunecity.com/underworld/straif/69/engleuctra.htm에 가면 Leuctra 전투에 관한 자세한 정황을 볼 수 있습니다.
및의 것은 에파미논다스라는 게임입니다.
이두선 (steven0302, hotmail.com)
2004/11/24 (15:36)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390
Access : 2904 , Lines : 19
밀리터리 발전사 - 거인의 시대(400~200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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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전쟁에 처음 사용한 나라는 인도였다. 동방으로 원정온 알렉산드로스(Alexander)는 Hydaspes에서 코끼리를 만났는데 말들은 코끼리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전진하려하지 않았지만 잘 훈련된 팔랑크스는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했어도 침착하여 대응하여 마침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코끼리에게 감명을 받은 Seleucus는 후일 인도의 찬드라굽타와 교섭하여 자신의 영토 일부와 코끼리 오백마리를 교환했고 이 코끼리를 이용하여 Ipsus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코끼리 전술은 그리스와 카르타고로 전해졌고 피로스(Pyrrhus)와 한니발이 로마를 침공할 때 코끼리는 주요한 병종중 하나가 되었다.
Beneventum과 Heraclea에서 보여지듯 코끼리는 그것에 생소한 적에게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코끼리라고 불패인 것은 아니었다. 화살이나 투창세례를 받으면 성난 코끼리는 통제불능이 되는데 이럴때는 적이 아닌 아군을 짓밟기도 했기 때문에 코끼리 전술은 어떻게 보면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래서 mahout은 철창을 들고 코끼리가 날뛸 경우 뇌에 철창을 박아넣어 더큰 인명살상을 피하기도 하였다.
코끼리를 막기위한 전법은 주로 불화살을 집중적으로 쏴서 코끼리를 쫓거나 죽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도에서 처음 시행되었는데 코끼리에 대해서 생소한 그리스는 일종의 지뢰를 까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철창이나 쇠사슬 등을 설치하여 코끼리를 그리로 유인한뒤 코끼리의 발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대코끼리지뢰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에 의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해상전략
로마와 카르타고의 일이차 포에니 전쟁(Punic War) 동안 양측은 몇번의 해전을 격었는데 보통의 해전이 그렇듯 전함 수백척이 뒤섞여 싸우는 전투였다. 이런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이후 벌어지는 대규모의 해전이었고 해전의 키 포인트는 얼마나 조직적으로 관리가 되느냐 였으므로 지휘관의 역량과 행정구조가 승리의 관건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해군을 창설한 첫해에 카르타고를 이기는 이변을 일으켰는데 그 열쇠는 앞서 언급했던 공성기구인 crow(라틴어로는 corvus.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니 "까마귀"라고ㅡ.,ㅡ)를 해전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비록 바다를 잘 아는 동맹국의 선원들을 채용했다지만 그래도 여러가지로 미숙한 로마해군은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전을 지상전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카르타고의 허를 찌르는 작전으로 로마는 많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시대에 이르러 함선의 세대교체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때까지 바다를 지배하던 아테네(Athens)의 trireme은 최강의 함선의 지위를 오단층 갤리(galley)선인 quinquireme(스펠링 기억하기도 어렵네-_-)에게 내줬는데 이 함선은 시라쿠사(Syracuse)의 Dionysius에 의해 처음 진수되었다. 포에니 전쟁 기간 동안 이 함선은 표준적인 전함이 되었다. 이 quinquireme에는 통상 삼백명의 노 젖는 사람과 선원이 필요하고 거기에 백여명의 병사들이 탔다.
행정과 병참
"예술이 된 전쟁"편에서 기원전 600~400년 까지의 기간은 모든 면에서 체계가 잡혀가던 시대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후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체계가 완벽하게 잡힌 시대이고 이제 남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체계 역시 변해가는 시대이다. 병력의 효율적인 운용과 전투중 피해의 최소화를 위해 병참학이 발달되기 시작한 시대도 바로 이때이다.
식량이나 무기 등의 짐은 군대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짐을 옮기는 데에도 역시 병참학이 적용되었는데 짐을 어떻게 싸고 어떻게 운반하느냐에 따라 행군속도라던지 재정의 낭비 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슈타인호프 코르부스도 1차 포에니전쟁 때 잠깐 쓰이고는 곧바로 퇴장해버렸다죠? 너무 무거워서 배 항해성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하더군요~^_^
밀리터리 발전사 - 마케도니아(350~320 BC)
알렉산드로스(Alexander)의 아버지인 필리포스(Philip)가 기원전 359년 즉위했을 때 그는 기존의 마케도니아(Macedonia)의 군사시스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결과는 그리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강의 군대의 탄생이었다. 그리스 용병들의 용병술(용병이라서 용병술이 아닌건 다 아실거고...ㅡ.ㅡ)과 애국시민정신이 결합된 새로운 군대의 등장으로 여태껏 그리스 변방의 야만족에 불과했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최강의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역사상 처음으로 군대에 과학적인 검토와 기술을 접합시켜 "계산된" 전략과 전술이 탄생하였다. 철저한 조직력과 훈련은 군대를 필리포스의 지휘를 받는 하나의 몸체로 만들었고 필리포스의 이러한 탁월한 군사적 역량은 나중에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을 원정하고 비록 얼마 못가지만 대제국을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마케도니아군의 주력은 보병이었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phalanx)는 그리스의 것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그리스보다는 더욱 밀착된 형태였다. 그리스에서는 어깨넓이 정도로 병사들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에서는 거의 어깨를 붙이고 있었고 또한 그리스에서는 평균 8에서 12열인 반면 마케도니아는 16열을 항상 표준으로 했다. 마케도니아의 hoplite는 두가지로 나뉘어 있었는데 pezetaeri와 hypaspist가 그들이다(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 둘의 다른 표현으로는 pezhetairoi와 hypaspistoi가 있는데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는 분 있으면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영어와 그리스어의 차이인지 아니면 복수와 단수의 차이인지 모르겠네요ㅡ.ㅡ). 숫자가 더 많았던 pezetari는 4m 가량의 sarissa 장창을 들었는데 어떤 때는 더 길고 무거운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병사들은 무릎을 꿇었을 때 온몸을 가릴수 있는 방패와 짧은 검을 벨트에 차고 무장은 보통의 그리스 병사들이 그렇듯 투구와 흉갑 그리고 정강이받이(greave)을 착용하고 진열에 맞추어 팔랑크스를 이루었다. sarissa를 들때는 대략 일이m 정도를 둔부 뒤로 빼고 팔랑크스의 처음 대여섯줄은 앞쪽으로 내밀어 전투를 치뤘다. pezetaeri 일인이 휴대하고 있는 무장은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엄격한 훈련과 단련은 그들을 기동성면에서 기존의 그리스 팔랑크스보다 월등하게 만들어 주었다. 훈련의 성과 덕분인지 그들은 신속하게 진형을 이루고 변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Hypaspist는 보병에서 팥떡의 팥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pezetaeri보다 짧은 2.5~3m 정도의 장창을 들었고 무장은 약간 가벼웠다. Hypaspist의 포메이션과 진화는 pezetaeri와 같았다. Pezetaeri에 비해서는 팔랑크스에서 두드러진 병종이 아니었지만 민첩함과 속도에서는 pezetaeri 보다 더 뛰어났다. 알렉산드로스는 oblique order를 자주 사용했는데 이 전법은 기병-hypaspist-pezetaeri 순서로 돌격하는 것이었다. Pezetaeri는 무장 때문에 속도가 느림으로 기병과 pezetaeri 사이의 간격을 hypaspist가 매꿔주는 것이다.
필리포스가 만들어낸 이와같은 팔랑크스 전법은 먼저 기병돌격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기병의 충격으로부터 적군이 회복되기 전에 보병들이 공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이 성공하기 가장 쉬운곳은 평지였지만 평지가 아닌 지형에서도 작전은 무난히 먹혀들어갔다.
필리포스의 팔랑크스는 언뜻 보면 지금까지 언급했던 병종들만으로도 완벽해 보이지만 다른 팔랑크스와 같이 측면과 배후의 방어가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 약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두가지 종류의 경장보병이었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hoplite, peltast, psilos가 4:2:1의 비율로 되어 있었다. 전투전의 팔랑크스에서 peltast는 8열로 늘어서 배후에 자리잡았다. Psilos의 경우에는 얇은 열을 이룬 다음 팔랑크스의 가장 앞에서 skirmish line을 만들었다. 이들의 무장은 다양했는데 갑옷은 경장이었고 활, 투창, 다트, 투석기(sling) 등을 사용하고 적에게 혼란을 주거나 본진을 방어했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얼핏 보면 현대군과 매우 비슷하게 조직되었다. 64명의 hoplite는 platoon(tetrarchia, 참고로 혹시 여기에 왜 4를 뜻하는 tetra가 붙는지 아시는분 있으면 좀 가르쳐주세요)을, 128명이면 company(taxiarchia), 256명은 battalion(synlagma), 1024명은 regiment(chilarchia), 마지막으로 4개의 regiment로 이뤄져 있는 하나의 division인 기초적인 팔랑크스가 있다(번역상의 문제가...ㅡㅡ;;;). 이것은 hoplite만을 말한 것이고 그외 2048명의 peltast, 1024명의 psilos, 1024명의 기병이 있었으니 합계 8192명이 하나의 팔랑크스(division)에 속해있는 것이다. 참고로 기병의 경우 1024명, 즉 regiment일 경우 epihipparchy라고 불렀다. 더큰 단위의 팔랑크스는 네개의 기초적 팔랑크스(division)로 이뤄져 있었으며 대략 삼만이천여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기초적인 팔랑크스를 그리면 이렇게 된다.
1024 psiloi(4열)
512 기병(4열)========== |||||||||||||||||||||||||||| ==========512 기병(4열)
512 기병(4열)========== |||||||||||||||||||||||||||| ==========512 기병(4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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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6 hoplites(16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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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8 peltasts(8열)
|<-보병, =<-기병
기병은 보병만큼이나 잘 훈련받고 무장도 잘 되어 있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의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필리포스나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들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하기를 좋아했다. 그외 테살리아(Thessaly)의 용병기병들이 있었다. 이들도 다른 기병들과 마찬가지로 초공용으로 이용되었다. 팔랑크스에서는 이들 용병기병들은 왼쪽, 마케도니아 기병들은 오른쪽에 주로 배치되었다. 기병들의 주무기는 3m 가량의 장창인데 이 창은 던지거나 적병들을 찌를때 사용되었다. 창만이 기병들의 무기는 아니었고 그들은 보병들과 마찬가지로 단검(short sword)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갑주는 비늘 갑옷(scale armour)과 투구, 흉갑이었다.
다른 형태의 기병전술도 있었다. 어떤 기병들은 창기병으로 사용되었지만 말위와 땅위에서 동시에 싸울수 있도록 훈련받은 용기병(dragoon, 오랜만에 스타크나 한판 해야겠군-_-;;;)의 시초가 되는 기병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경장과 경갑을 갖추고 나갔다. Psilos와 같이 투창, 랜스(lance), 활로 무장한 경기병도 있었다. 이 경기병들은 투구를 제외하고 갑주를 걸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임무는 정찰이나 측면보호였다.
이때는 등자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수들은 안장이나 안장 깔개 등에 그냥 앉아서 말을 다뤘다. 경기병들은 그냥 안장없이 말에 탈 때도 있었다. 그외 고삐, 재갈, 굴레 장식 등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등자가 없었으므로 기마술은 사람이나 말이나 상당한 훈련을 요하는 기술이었다.
마케도니아군은 처음으로 포병술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필리포스는 공성전에 주로 사용되던 catapult와 ballista를 가볍고 휴대하기 편리하게 개조했으며 필드 오퍼레이션(field operation)에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산악지대나 도하작전 때 주로 저 무기들을 사용했다. 이동할 때는 장치를 분해하여 노새나 말에게 이고 가게 하거나 아니면 필요한 부분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벌목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일이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이 진군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으므로 이미 완성된 장치를 짐마차에 싣고 다니기도 했다.
전에 언급했듯이 마케도니아의 기술자들은 몇개의 획기적인 공성기구를 발명했고 이것은 그리스의 전임자들이 과거에 만들어낸 것들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기술자들은 공성기구뿐 아니라 도하할 때 가교에도 신경을 썼다. 공성기구 등은 도하때 물에 젖거나 급류에 휘말려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의 명령체계는 오늘날에는 자세한 정황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필리포스나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성공으로 봐서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군대에서 전체에 명령을 내릴때는 큰 목소리로 외치거나 트럼펫을 불었다. 긴 거리를 교신할 때는 낮에는 연기를 피웠고 밤에는 불빛으로 교신했다. 전장에서의 명령하달은 부관이나 사환이 담당했는데 이들은 오늘날의 사관학교와 같은 곳에서 그쪽 방면으로 교육받은 인재들이었다.
이렇듯 철저하게 행정적이고 병참학적인 군조직은 필리포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 전해지는 역사상 처음 만들어졌다. 마케도니아군은 의료행정 서비스와 공성전, 도하작전 등에 투입되는 공병단까지 갖추고 있었다. 필리포스가 만든 이러한 유능하고 과학적인 군사체계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해져 페르시아(Persia)를 멸망시키고 헬레니즘(Hellenism) 문화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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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기호로 그려놓은 팔랑크스가 망가져도 알아볼 수 있을 것으로 믿슴뇌다=_=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전쟁들은 http://users.tyenet.com/kozlich/alexander.htm에 잘 설명되어 있더군요. 에고 좀 오래 걸렸습니다=_=
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기원전 220년 경)
군조직과 전법
로마의 안보(이 단어만 보면 왜 북한이 항상 떠오를까나ㅡㅡ?)와 안전은 시민군에게 달려 있었다. 17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성한 성인 남성들은 군에서 복무해야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는데 47세 이상의 군인들은 수비대의 역할을 주로 맡았다. 기원전 220년 경 로마의 병력동원수는 총인구 375만여 명에서 대략 75만여 명 정도 되었다. 로마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전쟁에 익숙한 베테랑(veteran)들은 언제나 넘쳐났다. 로마의 군사적인 성공에는 크게 네가지의 이유가 있다. 자부심과 애국시민정신으로 무장된 시민군이 첫번째 이유이고 레기온(legion)의 발달도 이유의 하나로 뽑을 수 있다. 또한 엄격한 훈련과 수많은 전쟁경험으로 다듬어진 명령체계와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과감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결단성도 한몫을 했다. 그외 패배한 적들마저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정치력과 적재적소에 만들었던 동맹과 식민지 역시 로마의 패권을 유지시키고 성장시키는 버팀목이 되었다.
레기온의 탄생은 전설적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의 개혁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뒤 많은 개조와 변형이 마르쿠스 카밀루스(Marcus Camillus)에 의해 이뤄졌는데 그 요는 레기온 내 재산과 무장의 정도에 따른 분류와 편성이 아닌 나이와 경험에 따른 분류와 편성이었다. 또한 군인 개개인의 무장은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장비와 무기는 국가로부터 구입했다.
로마는 3세기 무렵까지 일정한 전략전술만을 애용했지만 이탈리아 중부의 산악민족인 Samnite들과의 전쟁경험에서 보다 다양한 적들과의 결전을 대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300년 경에 이르러 로마는 cellular type(이런건 진짜 번역하기 껄끄럽다ㅡㅡ;;;)의 레기온을 편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레기온은 피로스(Pyrrhus)의 Macedonian-Epirote(Macedonian은 알겠는데 Epirote는 Epirus의 형용사인가ㅡㅡ?) 팔랑크스(Phalanx)와 일이차 포에니(Punic) 전쟁 때 카르타고(Carthage)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운용되었다. 3세기 후반 동안 레기온의 발전은 그 절정이었다.
로마의 군대에는 경험과 연령에 따라 네개의 계급이 있었다. 가장 젊고 민첩하며 훈련을 적게 받고 경험도 적은 군인들을 velite 혹은 경장보병이라 불렀다. 경험과 나이, 민첩성에서 velite에 이은 군인들은 hastati라 불렸으며 이들은 중장을 하고 레기온의 선두에 섰다. 평균연령 30에 레기온의 주력이자 숙련된 베테랑인 principes는 레기온의 두번째 라인을 이루었다. 가장 나이가 많고 침착한 triarii는 레기온의 후미를 맡았다.
로마의 기초적인 전략적 군단위는 현대의 중대(company)와 비슷한 maniple이었다. 각 maniple은 두개의 century(소대, platoon)로 이뤄져 있었는데 century에는 60에서 80명 까지의 인원이 있었다. 다만 triarii의 maniple에는 한개의 century만이 있었다. 현대의 대대(battalion)과 견줄 수 있는 cohort에는 450에서 570명 까지의 인원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120~160명의 velite와 같은 수의 hastati와 principes, 60~80명의 triarii 그리고 하나의 turma(기병의 군단위, 열명을 decuriae로 묶었는데 decuriae가 셋이면 turma가 됨으로 turma는 기병 30명임)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병들의 경우에는 이 maniple안에서 싸우기 보다는 더큰 기병들의 진형에서 싸웠다.
오늘날의 사단(division)과 비견되는 레기온에는 300명의 기병을 포함한 4,500에서 5,000명의 군인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로마의 레기온과는 다른 동맹군의 레기온도 있었는데 조직은 로마의 것과 동일했지만 기병은 600명이 있었다.
동맹군까지 합하여 군단(army corps)라고 할 수 있는 전체 레기온에는 구천에서 만명의 인원이 있었으며 그중 구백명 정도는 기병이었다. 두개의 로마 레기온과 동맹군 레기온은 하나의 야전군(field army)를 이루었으며 이 군대를 consular army라고 불렀다. 로마의 두 집정관(consul) 중 한명이 지휘를 맡았다.
Consular army의 인원은 18,00~20,000 사이였으며 열의 길이는 2.5km 정도였다. 가끔씩 두개의 consular army가 서로 합치기도 했는데 이럴때는 집정관들이 서로의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로마는 평상시 8개의 표준레기온(로마와 동맹시들이 각각 4개씩)을 보유했지만 전시상황이나 국가위기상황에서는 군단을 증강시켰다. 이럴때 로마에는 임기 6개월의 dictator(독재자는 아니고 일정기간동안 큰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공직자라고 할까요? 90년대에 읽어본 로마인이야기에 뭐라고 번역해놓은 단어가 있었는데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ㅡㅡ;;;)를 선출하여 군권을 그에게 맡겼다. 아무래도 여러명의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것보다 한명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dictator가 선출되든 안되든 로마에는 항상 전직집정관(proconsul)의 지휘를 받는 예비군이 있었다. 이 전직집정관들은 원로원(senate)이나 praetor(뭔지 알것으로 믿습니다. Consul이나 proconsul이나 praetor나 죄다 집정괸이라고 번역해놓은 1996년판 동아 프라임 영어사전은 물러가라~!)에게 권한을 받아 군대를 맡았다.
집정관은 군사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국가의 최고공직자였다. 하지만 모든 지도자라고 반드시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평범한 전략전술이 뛰어난 전략전술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집정관은 일년마다 한번씩 바뀜으로 집정관이 군대를 지휘할때가 장기간의 전쟁기이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집정관이나 진직집정관 밑에는 quaestor라는 공직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회계를 감찰하거나 군대의 행정, 보급 등을 담당하는 직무를 맡았다. 그외 6명의 호민관(tribune, 근데 이게 진짜 호민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전이 꾸려서리ㅡㅡ;;;)이 있었는데 두명씩 하나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특수한 경우에는 여섯명의 호민관들이 돌아가면서 레기온의 지휘를 맡았는데 전체지휘관이 부재중일 때는 호민관이 레기온의 전체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두 호민관은 60명의 백부장(centurion)과 두개의 maniple을 각각 휘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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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nrv.com/military/organization-roman-republican-legion.php에 가면 보다 자세한 로마의 군대조직을 볼 수 있습니다.
Proconsul Praetor는 법무관이라고 번역해야 하고 Quaestor는 회계감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Tribune은 호민관이란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군단장, 혹은 군단 장교 등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Dictator는 독재관으로 번역할 수 있지요. 2004-12-06 23:14:33
211.117.174.54
사족입니다만.. cellular type이라면 소조직 편성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초보라서 그런지 번역된 책 중에는 로마인 이야기만큼 로마 군사에 대해 잘 설명해놓은 것이 없어서 로마인 이야기 해석을 따릅니다만......소조직 편성을 하여 기동성이 높아졌다나요? 2004-12-07 20:53:55
210.99.147.253
이두선 근데 quaestor가 회계감사관이라 하기에 하는일이 좀 많지 않습니까? 물론 회계감사도 하지만 그것보다 군단재정관이 훨씬 낳지 않을까요? 아니 군대를 지휘도 했으니 재정일만 한것도 아니고 헷갈리네ㅡㅡ;;; 2004-12-14 14:27:48
211.30.181.174
민족백서 트리아리(Triarii)의 마니풀루스(manipulus)에 백인대(Centuria)가 한개만 있는게 아니라, 하스타티(Hastati)나 프린키페스(Principes)처럼 백인대는 2개지만, 그 구성원의 숫자가 하스타티나 프린키페스의 60명의 절반인 30명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5-01-18 22:50:45
211.207.75.226
이두선 (steven0302, hotmail.com)
2004/12/13 (19:37)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395
Access : 1629 , Lines : 25
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기원전 220년 경)
레기온(legion)의 유연성은 maniple들 사이에 전략적인 관계와 보병들 사이의 진열에 그 비결이 있었다. 각각의 maniple들은 작은 팔랑크스(phalanx)와도 같았는데 군인들은 20명 씩 6줄로 늘어서 팔랑크스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지만 그들 사이의 간격은 팔랑크스보다 더 넓었다. 군인 일인이 차지하는 면적은 대략 1.5㎡ 정도 되었다. 또한 maniple 사이의 간격은 대략 20m 정도였다.
이러한 레기온의 장기판 모양의 포메이션은 팔랑크스보다 더큰 이점이 있었다. 험한 지형에서도 기동성이 높았으며 열이 무너져도 충분히 커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열에 틈이 생기면 두번째 열의 병사가 앞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첫줄의 병사가 뒤로 갈수도 있었다. 즉 전체적인 생김새는 팔랑크스와 비슷했지만 유연성이나 기동성 면에서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Hastati와 principes는 2m 정도 되는 투창과 검신이 넓은 60cm 정도의 짧은 검(gladius)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투창은 적과 접전 직전 던졌으며 검은 백병전에 쓰였다. 이런 전략은 아마 현대전에서 라이플을 쏜뒤 총검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Triarii의 경우에는 검 외에 3.5m 가량의 창도 휴대하고 있었다. Velites는 투창과 다트로 무장하였다. 로마의 군대는 백병전이 주 목적이었지만 원거리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발레아레스의 투석기병(Balearic slinger)이나 에게해(Aegean Sea)에서 궁수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Pilum이란 이름의 로마 투창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무기였다. Pilum의 촉과 자루 사이는 가느다란 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번 pilum이 던져지면 촉은 휘거나 부러지고 그렇게 되면 적이 재활용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촉은 적의 방패와 갑옷, 피부 속에 그대로 남아 적에게 불편을 끼치는데 한몫을 했다.
로마의 성공비결 중 하나에는 castrametation(왜 이 단어는 사전에 없을까ㅡㅡ?)도 있었다. 작전 중 로마군은 밤마다 요새화된 진지를 만들었다. 이 진지는 상당히 견고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수도 로마나 아군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던지 상관없이 안전한 기지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안전했기에 심신도 비교적 안정되어 전력전술을 짜는데 유리했다. 진지를 만드는데 그리 긴 시간은 소요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다수의 병사들이 수많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건설과정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었고 또한 역할분담도 꽤 잘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진지건설용 장비들은 군대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진지 주변에는 도랑이 포위하듯 파여졌는데 이때 퍼낸 흙은 말뚝을 세울때 지대를 단단히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진지 내에서의 군대의 배치는 전투 때의 진열과 같았다.
행군 중 군인 일인이 져야하는 군수품의 무게는 대략 20~40kg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의 행군은 빨랐다. 놀랍게도 로마군에게는 특별히 고정된 배치도가 없었다. 이것은 행군 중의 정찰이나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였고 결국 한니발(Hannibal)에게 호된 댓가를 치르게 된다.
로마군의 다른 약점은 공성술이었다. 공성술에 탁월했던 마케도니아에 비해서 로마군은 포위하거나 소모전으로 적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것이 최고였다. 하지만 포에니(Punic) 전쟁을 통해 로마의 공성술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해군조직과 전법
로마인들은 해상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박과 선원들의 공급은 동맹국들이나 속주민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Magna Graecia)의 그리스인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이렇듯 해군에 약한 로마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해상전술로는 이기는 것이 힘들었으므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로마 해군사의 큰 발전은 일차 포에니 전쟁에 의해서였다. 전쟁에서의 가장 큰 고민은 카르타고(Carthage)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빈약한 해군력이었는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먼저 카르타고의 오단층 갤리(galley)인 quinquireme을 모방한 전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라면 몰라도 육상전에서는 자신있어 하는 로마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해상전을 육상전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이 바로 까마귀라는 뜻의 corvus(어떤델 보니까 적교라고도 하던데 烏橋라고 부르는게 더 원제에 맞지 않을까나ㅡㅡ;;;) 의 발명이었다. Corvus는 5~6m 정도의 일종의 다리로 뱃머리 위에 회전축(pivot)을 설치하여 360도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평상시에는 밧줄이나 도르래에 의해 거의 수직으로 놓여 있다가 적선이 가까이 오면 적의 갑판에 끝에 달린 까마귀 부리같이 생긴 창(그래서 이름이 "까마귀"였음)이 떨어져 내리꽂혀 그대로 로마군선과 적선 사이의 다리를 놓게 되는 장치였다. 그외 뱃머리나 고물 쪽에 설치한 작은 탑(turret)으로 투척용 무기를 사용하여 적선의 병사와 선원들을 상대하는 기술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조된 로마의 전함들은 어떻게 보면 비밀무기였다. 이 전함들이 모두 건조될 때까지 로마인들은 전투는 되도록 피하면서 결국에는 Mylae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예상치 못한 승리를 이뤄냈다.
해군에도 역시 castrametation이 적용되었다. 고대의 함대는 현대와 같은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밤이 되면 해안가에서 해병들과 노 젖는 사람들의 진지를 만들고 사람과 선박들을 보호했다.
밀리터리 발전사 - 마우리아(Maurya)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찬드라굽타(Chandragupta)는 군사적, 행정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혹은 Patna)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는 거대한 군대를 양성하였는데 육십만명의 보병과 삼만명의 기병 그리고 구천마리의 코끼리를 보유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과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기록은 셀레우코스(Seleucus) 왕조의 외교관이었던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가 남겼던 기록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차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한데 그 이유는 메가스테네스가 전차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거나 혹은 찬드라굽타가 알렉산드로스(Alexander)의 군사적 성공에서 전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없다는 것을 보고 전차를 도외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우리아가 인도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비밀결사대까지 포함한 수준높은 군사행정조직 덕분이었다. 찬드라굽타는 수군(강에서 활동했으니 해군은 아니겠지ㅡㅡ?) 역시 운용했는데 인더스(Indus) 강과 갠지스(Ganges) 강 일대에는 주요 수군기지들이 산재해 있었고 해안에서도 해군활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우리아 시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인도의 역사를 집필한 것이었다. 찬드라굽타의 가까운 친구이자 주요 행정관 중 하나인 Kautilya가 썼다고 전해지는 의역하면 "정치학" 정도로 해석되는 아르타사스트라(Arthasastra)는 단순한 역사뿐 아니라 군대사와 그외 여러가지 행정, 정치적인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아르타사스트라는 완벽하고 철저하게 초기 힌두(Hindu)교적인 정치, 법률, 군사적인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저서와 비견되기도 하는데 군사적인 가르침은 손자와 유사한 부분도 있다. 아르타사스트라의 군사에 대한 항목에는 군대의 배치, 군행정, 지휘관의 의무와 임무, 야전의 법칙, 공성과 축성술 그리고 전략전술에 대한 각종 가르침들이 포함되어 있다.
상비군의 존재는 기원전 4세기 이후 상식이 되어 있었는데 재정의 상당부분은 이 상비군을 유지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시작되면 군주들은 보통 군대의 숫자와 재정을 늘릴 필요성을 느낀다. 그럴때 상비군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guild levy였다. 그들은 일종의 길드라고 할 수 있는 상인이나 장인조합에 소속된 회원들로 비상시 병사로 활용할 수 있게끔 평소에 군사훈련을 받고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전장으로 나갔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봉급을 지급받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파트타임(part-time)으로 일하는 군대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외에 용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조합(military guild)도 존재했다. 이들은 군주들에게 고용되어 봉급을 지급받고 전쟁에 나갔는데 이들도 guild levy였지만 상인이나 장인조합원들과 달랐던 점은 그들은 항상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데 비해 이들은 전쟁시에만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그때에만 봉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guild levy들은 마우리아의 군사적 성공에 큰 기여를 했지만 전쟁터에서 이들이 얻는 명성과 권력 때문에 군주들은 항상 이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끈임없는 연습과 훈련(끈임없는 잡초뽑기가 생각나는...ㅡㅡ;;;)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도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종교와 인종들이 뒤섞인 마우리아의 군대에 이론을 적용시키기 어렵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훈련과 연습은 더더욱 필요했다.
전차와 코끼리 전술의 약점은 이미 들어난 바 있다. 신뢰가 가지않는 전차와 다루기 힘든 코끼리가 침착하게 대응하는 보병과 기병들을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히다스페스(Hydaspes) 전투에서 보여졌다. 그래도 전차는 그후 천년간 천천히 쇠퇴하면서도 꾸준히 쓰여지는 병종이었다. 베다(Veda) 이후의 전차들은 크기가 대형이었고 네필의 말이 이끌었으며 네명에서 여섯명 까지의 인원을 태우고 달렸다.
코끼리를 이용한 전술은 코끼리가 원췌 다루기 어렵고 또한 부상당한 코끼리는 적보다 아군에게 위험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19세기 까지 꾸준히 쓰였던 병종이었다. 마우리아 시대에는 코끼리 한마리에 다루는 사람까지 포함한 세네명이 타는 것이 보통이었다. 코끼리를 탄 사람이 쓰는 주요무기는 활이다. 코끼리가 쓰인 때는 전면전 뿐만이 아니었다. 공성전에서 요새나 도시의 성문을 부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고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강 등에서는 코끼리를 세워놓고 등 뒤로 보병들이 건너다니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도하하다가 미끄러지거나 코끼리가 몸을 흔들어 물속으로 떨어지는 사고도 빈번했다고 한다.
아르타사스트라의 기록 덕분에 마우리아군은 진지를 만들때 진지 주위에 참호를 포위하듯 파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로마와는 다르게 마우리아군은 매일밤이 아니라 한곳에 오래 머물 경우에만 참호를 팠다. 하지만 경계태세나 진지의 안전 등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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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사스트라 구하기 어렵네요ㅡ.ㅡ
밀리터리 발전사 - 제국의 시대(200~1 BC)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서 두 제국이 크게 성장하여 패권을 쥐었다는 것이다. 두 제국이란 중국의 한나라와 지중해의 로마를 뜻한다. 이 시대에는 전과는 다르게 뛰어난 군사지도자들이 별로 나타나지 않은 시대였다. 카이사르(Caesar)나 한무제 만이 알렉산드로스(Alexander)나 한니발(Hannibal)에 비견될 수 있겠고 그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술라(Sulla), 루쿨루스(Luculus) 등이 이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들이나 Diadochi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전쟁의 이론과 전법
이 시대에는 로마의 군조직 재편 이외에 그리 큰 군사적인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다(모르는 일입니다. 서양쪽만 아는 제가 아시아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수가 없지요). 유럽에서는 여전히 보병이 우세했고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기병이 우세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마케도니아(Macedonia)의 팔랑크스(Phalanx)와 로마의 레기온(legion)은 두개의 대규모 전투(Cynoscephalae, Pydna)를 치뤘는데 결과는 레기온의 승리였다.
한편 로마의 야전축성작업은 더욱 공격적인 방법으로 바뀌었다.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로마군의 활동 범위가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전쟁 후 해외출병이 많아지면서 그만큼 기존의 방법으로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군의 진지는 더욱 견고해졌으며 마케도니아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투척형 기구(missile engine)를 사용하여 프로토-포병전술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기병
서력이 시작되면서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에서는 궁기병들이 전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북인도에서는 기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지만 그들의 주무기는 창과 짧은 검이었으며 중부와 남부에서는 지형과 기후의 문제로 인해 대규모의 기병들을 운용하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보병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남인도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말은 주로 전차를 끄는데 사용되었다. 전차를 운용한 것은 남인도에서뿐만이 아니라 폰토스(Pontus)의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왕도 마찬가지였다.
궁기병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 의해 전장에 소개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Scythia, 유목민족임)의 한 부족을 작사르테스(Jaxartes) 북쪽에 있는 소그디아나(Sogdiana)에서 물리친 적이 있다. 스키타이인의 후예인 파르티아(Parthia)는 궁기병을 서남아시아에 소개한 민족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흉노와 월지 등이 궁기병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들의 활약은 중국으로 하여금 기병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시기 일어난 미래의 군사발전을 암시하는 사건은 크라수스(Crassus)가 이끄는 로마의 레기온(보병이 주력인)이 수레나스(Surenas)가 이끄는 파르티아군(궁기병이 주력임)에게 Carrhae에서 완패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비슷한 적을 만난적이 있지만 그의 행로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여러가지 상황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직 이시대에 알렉산드로스와 같이 기병과 보병을 잘 조합하여 운용할 수 있는 군사천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 될 수 있다.
파르티아는 전투 이후 뚜렸한 성공을 거두질 못했다. 일단은 소모적인 전쟁을 치루기보다 동서를 중개하는 무역으로 얻는 이익이 더 많았기 때문이고 파르티아의 전체적인 국력이 로마보다 열세였으므로 전쟁을 되도록이면 피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Carrhae 전투가 로마군에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했다. 몇백년 후 로마와 비잔틴(Byzantine)의 동쪽국경은 레기오나리스(legionary, 레기온에 속한 병사, 주로 보병) 대신 궁기병이 지키게 된다.
인도의 경우에는 전체적인 당시 군대사의 흐름으로 볼때 상당히 발전이 뒤처진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등자를 처음 사용한 것이 바로 인도의 창기병으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세기 쯤이었다.
공성전
알렉산드로스에 이어서 공성전에 탁월한 재능을 선보인 위인은 카르사르가 있다. 그는 여태까지의 로마인이 여러 방면에서 그래왔듯 체계가 잡힌 공성기술을 도입한 인물이다. 공성은 상황에 따라 전술이 달라지지만 단계를 적는다면 다음과 같다.
1.목표를 정찰, 목표나 주위에 적의 자원이 될만한 목재, 석재, 동물, 식량, 사료 등이 있는지 알아본다.
2.요새화된 진지를 짓는다.
3.공성기구나 건설에 필요한 재료를 모은다.
4.Mantelet과 이동식탑(movable tower,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대충 펠렌노르 전투에 나온 그 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을 건설한다.
5.목표 주위에 망루를 만들고 이들을 연결하여 대루(contravallation)를 쌓는다. 어떤때는 목표인 성을 둘러싸는 벽을 만들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항상 이러한 이중 벽을 쌓았다.
6.Mantelet과 참호, 포위벽 등을 이용해서 지하갱도를 파거나 혹은 공성기구들을 사용한다. 이때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어 양측은 공격을 주고받는다.
7.단층으로 된 목루를 쌓는다. 이 토루를 mantelet이 보호하면서 점점 성벽쪽으로 옮긴다.
8.목루 위에 탑을 세운다. 목루와 함께 탑을 서서히 성벽 쪽으로 옮긴다. 탑은 불화살에 대비해서 젖은 가죽으로 덮어놓고 항상 보병들이 적의 기습에 대비하여 지켜본다.
9.만약 목표가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면 토루를 쌓았다가 해자를 매우는데 사용한다. 하지만 해자를 전부 매우는 것은 아니고 공격지점에만 공격이 가능하도록 매우는 것이다. 공격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램(ram,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니 숫양이라고ㅡ.,ㅡ)을 이용하여 성벽이나 성문을 부수는 것이고 또하나는 땅굴을 파서 성내로 침투하거나 혹은 성벽 밑의 지대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무너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방어자가 이 사실을 알았을 경우 성벽 내에 또다른 성벽을 세울 수도 있었으므로 이 작업이 몇번씩 반복되는 경우도 있었다. 혹은 방어자들이 대항 갱도(countermine)를 팔때도 있었다.
10.병력을 동원하는 공격, 주로 위의 9번과 병용되기도 한다. 이때 동원되는 공성기구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동식탑, telenon, 성곽 공격용 사다리(up scaling ladder) 등이 있다. 만약 이때 성벽 내부로 파놓은 갱도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병사들이 비밀리에 그곳으로 침투하여 성문을 열거나 방어군을 배후에서 공격한다. 이때 전형적인 로마의 공격방식은 cohort 단위로 병사들이 testudo(귀갑 모양의 방패)를 들고 머리위를 보호하면서 전진하는 것이다.
해상전
바다에서의 전쟁은 조금 바뀌었다. Trireme과 quinquireme은 주요 전투선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외 강에서의 전투에 사용하는 pontones라는 밑바닥이 평평한 선박도 있었다. 해전에서 전함들의 목적은 상대편의 노를 부러뜨리거나 적선을 들이받아 침몰시키거나 혹은 선상에서 백병전을 벌여 배를 점령하던지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해군의 숙식문제는 전과 다를바 없었다.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의 제독인 아그리파가 개발한 harpax 혹은 harpago였다. 이것은 catapult에 의해 쏘아지는 끝에 갈고리가 달린 장대로 적선에 쏘아져서 박힌 뒤 권양기로 끌어당겨 두배를 하나로 묶어두고 갑판에 상륙하는데 도움을 주는 장치였다. 포경용 작살(harpoon)의 시초이자 어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치는 Naulochos와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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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제가 보니까 기원전 1년 다음해가 바로 서기 1년이더군요. 왜 0년이 없을까요? 이거 완전히 1999년 다음해가 2001년이 되버리는 꼴이 아닙니까? 기원전에 생긴 일을 계산하려면 일년을 빼야지 계산이 제대로 되겠군요.
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기원전 50년 경)
포에니 전쟁 이후의 정세변화와 세력의 재편은 로마의 군체제에도 변화를 주었다. 로마의 군인이 되는 자격은 일정량의 재산을 보유해야만 가질 수 있었다. 이 시대 재산의 척도는 곧 토지였으니 일정한 넓이의 토지를 보유해야만 군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해외출병이 많아지면서 군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오랫동안 돌보지 못해 귀환했을 때 토지가 황폐화되는 일이 잦았고 그럴 경우 그 토지를 싼값에 팔아넘겨 무산자가 되어 로마에 들어와 식량을 배급받는 길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계층간 위화감이 생기며 또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징집 가능한 군인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패권국가가 된 로마로서는 자뭇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기존의 병력수에 맞추기 위해 징집자격을 낮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군대의 질을 떨어뜨리는 또다른 문제를 낳았다.
로마의 군대는 시민이 중심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분위기는 군대에도 영향을 끼친다. 빈부격차와 계층간의 위화감은 그대로 군간부들과 일반병사들 사이에서도 들어났고 이것은 여태껏 무적의 로마군을 지탱해주던 정신이 깨어지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나 나찬가지였다. 그 결과는 곧 전장 곳곳에서 들어났다. 이제껏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위해 로마로서는 혁신이 필요한 때였다.
마리우스(Marius)의 개혁
아라우시오(Arausio)의 비극은 시민중심의 군대에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마리우스로 하여금 현실에 맞게 군제를 개편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으로 있는 동안 새롭게 군조직을 개편했고 이 체제는 서력이 시작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카이사르(Caesar) 역시 몇번의 개혁과 변화를 단행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가 태어날 때 마리우스가 만들어놓은 체제를 모델로 하고있다. 마리우스는 토종 로마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집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여러 군사적인 업적을 통해 그 자리에 이른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군사적인 능력에 비해 정치적인 관록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단행한 군사개혁은 그의 이름을 후세에 떨치게 만들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군대내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라던지 혹은 나이와 경험에 따른 hastati, principes, triarii 등의 구별도 명칭만을 남겨두고 모두 사라졌다. 이것은 로마의 군사적인 성공을 이끌어냈던 유연성을 대폭 강화시켜 주었고 기동성과 필요할 때 지원병력을 빨리 공수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했다.
엄격한 군율과 규정은 마리우스의 동료인 푸블리우스 루푸스(Publius Rufus)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후일 술라(Sulla)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고쳐지기는 했지만 카이사르의 시대까지도 상당히 효율적인 규정이었다. 전문군인의 개념이 로마군대에게 도입됨에 따라 시민의 의무라는 개념 또한 서서히 사라져갔다.
마리우스의 레기온(Legion)
레기온이 팔랑크스(phalanx)보다 유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팔랑크스는 전체가 하나로 묶인만큼 개개인의 활동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기 때문인데 비해 레기온은 소규모 팔랑크스라고 할 수 있는 maniple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동하여 조직적인 전략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활동을 얼마나 제한하느냐에 따라 유연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마리우스는 기존의 레기온 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maniple 대신 cohort를 더욱 중요시했다. Maniple은 명령체계에서나 간신히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위치로 전락했지만 열개의 cohort가 하나의 레기온을 이루는 것은 그대로였다.
Cohort는 50명씩 8에서 10열을 유지했으며 기동력을 요구하는 작전이나 투창을 던지기 위한 밀집대형을 만들 때는 각 병사들 간에 1m의 간격이 있었다. 가끔씩 백병전에도 밀집대형을 쓸 때가 있었다. 산개대형에는 1.5~2m의 간격을 만들었으며 전투 중에도 왠만해서는 대열을 이탈하지 않았다. 밀집에서 산개대형으로 대열을 바꿀 때는 cohort들 사이에 거리를 전과 같이 유지해야 했다. 이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그냥 maniple 대신 cohort가 장기판 모양의 진형을 만들어 변화된 진열을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혼란이 있었을테지만 이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Cohort는 행군 중 4~5열로 행진했는데 이들은 좌우로의 전환이 매우 빨랐다. 이것은 측면공격에 불리한 보병밀집대형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레기온의 방향전환은 현대전에서 close-order drill, 혹은 다이아몬드 포메이션(diamond formation)과 비견될 수 있다.
전체적인 레기온의 모양은 네개의 cohort가 제일 앞에 서고 세개씩 두번째와 세번째 라인에 서는 것이다. 즉 앞에 네개의 cohort가 서므로써 cohort들 사이에 세개의 틈이 생기고 그 틈을 뒤의 세개의 cohort들이 막아주는 형세였다. 라인이 두개일 경우에는 각 라인에 다섯개의 cohort가 배치되었다. 가끔씩 희귀하게 라인을 하나만 이루는 경우도 있었고 더욱 희귀하게는 네개의 라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Cohort의 폭과 cohort들 사이의 간격은 30~50m로 동일했다. 즉 세라인일 경우 레기온의 폭은 대략 300m가 된다는 뜻이다. 라인들 사이의 거리는 50m인데 라인이 셋일 경우 레기온의 길이는 150m가 된다.
야전군은 평균 4,500명이 속해있는 8개의 레기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레기온이 세 라인으로 이루어져 있을 경우 군대의 폭은 2.5km가 되었다. 계산해보면 군대의 폭을 1m씩 나눴을 때 첫 라인에는 평균 13명이 있는 것이다. 많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평균 25명이 밀집해 있던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보다는 낳은 편이었다.
레기온의 주요 방어진은 line, square, circle이 있었다. Line은 주로 수성전이나 진지방어전에 쓰이는 진형으로서 10개의 cohort가 참호나 벽 뒤에서 쭉 늘어서는 것이다. Square는 평지에서 적에게 측면이나 주위를 완전히 포위당했을 때 진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되도록 아군의 지원이 있을 때까지(없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버티도록 고안된 진형으로서 세 라인인 레기온에서 쉽게 변형이 가능하였다. 이 진형은 10개의 cohort 중 7개가 이동하여 각각 3개의 cohort가 앞과 뒤를 맡고 두개가 측면을 방어하는 것이다. Circle은 기병으로부터 진열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변칙진이었다. 만약 레기온의 측면이 아군기병이나 기타 보조병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을 경우 기병의 돌격은 오히려 로마군에게 새로운 사냥감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팔랑크스에서도 어느정도 통하지만 방진으로의 정면돌격은 기병들을 상당히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레기온의 상징은 은독수리였다. 원래 레기온 마다 상징이 달랐지만 마리우스는 이들을 모두 하나로 통합시켰다. Cohort와 maniple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의 부대기의 역할을 했다. 이 기들을 사용하여 부대끼리의 구별과 편성이 가능했다.
이두선 (steven0302, hotmail.com)
2004/12/17 (21:00)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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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기원전 50년 경)
경장 보병
작지만 빼놓을 수 없는 레기온(legion)의 주요병종은 열명의 정찰병(speculatores)이었다. 열명을 묶어서 정찰대가 된다. 여러 레기온의 정찰대가 합쳐 다함께 정찰임무를 수행할 때도 있었다.
경장병력, 혹은 보조병(auxiliary)들은 레기온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따로이 cohort와 비슷한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오래전의 벨리테스(velites)처럼 레기온의 앞과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따로 레기온을 이루지는 않았고 또한 임무도 불규칙적이었다. 전통적으로 Cisalpine 갈리아(Gaul)의 리구리아(Liguria) 출신의 경장보병들이 유명했다. 또한 투석기병(slinger)과 궁수들은 발레아레스 제도(Balearic Island)와 크레타(Crete) 및 다른 에게(Aegean)지방에서 주로 공수되었다.
기병
마리우스(Marius)의 개혁으로 기사(equites 혹은 그냥 knight라고 쓸때도 있음. 중세의 기사는 아님)나 귀족으로 이루어지던 기병체제는 사라졌다. 대신 동맹국이나 용병에 대한 기병의존도가 높아졌다. 마리우스의 시대 기병의 주공급처는 트라키아(Thrace)와 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지방이었다. 카이사르(Caesar)의 경우 기병의 거의 전부를 갈리아나 게르만 용병들 혹은 동맹국들에 의존했다.
자연적으로 기병의 조직력과 훈련은 전보다 덜 엄격해졌다. 마리우스는 이러한 기병에도 손을 댔는데 기존의 30명이던 turma를 32명으로 개편했으며 지금의 하사관 정도 되는 데쿠리온(decurion)의 지휘하에 전투 중에는 4열을 짓도록 했다. 12개의 turma는 대대(squadron)라고 할 수 있는 ala(날개라는 뜻)로 묶였으며 대대장(tribune)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장교가 지휘했다. 레기온의 cohort와 비슷하게 turma들은 ala 내에서 장기판 모양의 진형을 이뤘으며 두세개의 라인을 만들었다.
군단병(legionary)
레기온의 병사들은 주로 이탈리아의 농민이나 계급이 낮은 도시주민이었다. 카이사르의 시대에는 모든 이탈리아인들이 로마시민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만으로는 군대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래서 속주나 혹은 "야만인"들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들은 따로 레기온을 형성하기도 하고 이탈리아인들과 섞이기도 하였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효과 역시 나타났는데 그것은 군대의 사병화였다. 군인이 의무가 아닌 직업이 되면서 직접 일당을 줄 수 있는(당시의 일용직 일당과 비슷함, 11 cent) 장군을 국가 자체보다 더욱 섬기게 되는 것이다. 지휘관(장군)은 전리품과 약탈품을 분배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 퇴역병에게는 퇴역금(주로 토지)을 줄 수 있었다. 물론 퇴역금의 분배는 원로원의 권한이었지만 군대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장군들을 거스르지 않기위해 대부분의 경우에는 장군의 뜻대로 따랐다. 이러한 병사들의 성향은 야만인(갈리아와 게르만족)들에 대한 두려움이 한몫을 했다. 아라우시오(Arausio)의 참패 이후 마리우스같은 유명한 장군들이 크게 활약하면서 야만인을 물리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지휘관에 대한 의지도가 높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충성의 대상이 국가에서 마리우스, 술라(Sulla), 카이사르같은 장군들로 바뀐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 이들 군인정치가들의 치세에서 로마는 더욱 성장했기 때문이다.
명령체계와 군행정
개혁 이전 시민중심의 병제에서는 백부장(centurion), 대대장(tribune), 참모 장교 등이 군대가 소집될 때마다 임명되어 위치를 배정받았다. 백부장은 정규계급이 아니었고 백인대(century) 내에서 병사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직급이었다. 군대의 전문화와 함께 군행정권은 두개의 계급으로 나눠졌다. 백부장은 여전히 백인대 내의 병사 중에서 선발되었지만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 계속 백부장을 맡을 수 있을 뿐더러 군대 내 승진도 가능했다. 그들 중 현대로 치면 위관급 이상 승진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지만 이러한 primipilus(백부장 출신의 장교) 중에는 독수리기를 들고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대장(tribune)급 이상의 장교들은 귀족들이었다. 백부장과 대대장의 관계는 현대로 치면 위관과 하사관의 관계였다.
이론적으로 레기온의 지휘는 여섯명의 대대장이 돌아가면서 맡고 cohort는 전임백부장(primipilus)이 지휘했다. 하지만 대대장들이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legate의 참모 장교로 지휘하면서 cohort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휘하의 legate들의 임기를 종신으로 만들었다.
장군(imperator)은 전처럼 군대의 병참과 행정을 책임지는 quaestor의 보좌를 받았다. 그외 젊은 귀족들로 이루어진 지원참모(comites praetori)도 보좌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장군과 참모부(praetorium)를 보호하기 위해 숙련되고 신뢰받는 군단병들이 호위대(cohors praetorians)를 맡았다. 이 호위대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에 의해 누만티아 분쟁(Numantian campaign) 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또한 제정 로마의 유명한 근위대(Praetorian Guards)의 기원이 된다.
로마의 이러한 군행정은 엘리트들을 생산해냄과 동시에 경험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급간의 교류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군제개혁에도 바뀌지 않은 전통적인 소조직 편성은(비록 규모는 바꼈지만) 아직은 그 효율성이 상당하다는 것을 뜻한다. 로마의 사회간접자본(설마 내가 시오노 할머니를 인용할 줄이야ㅡㅡ;;;)이라고 할 수 있는 가도들은 지방과 중앙의 교통과 교류, 경제와 군사적 동향을 살피거나 조종할 수 있는 효용성을 가져다 주었다.
궁금한 왜 마리우스 이후 기병들의 훈련과 조직력이 동맹국이나 용병이기에 나빠졌다고 여기시는지요? 전투용 기병은 그 전에도 누미디아 같은데서 얻어쓴 걸로 아는데요. 귀족으로 이루어진 (마리우스 이전의) 로마인 기병은 사실 전투용은 못 된 걸로 아는데. 2004-12-19 02:24:21
164.125.144.163
궁금한 동맹국에서 기병을 빌려쓰다가 용병으로 군단 휘하에 거느렸으면 조직력은 더 나아진다고 봐야되지 않나요? 아니면 로마인으로 된 기병이 실질적인 전쟁전력이 된 시대가 있었는데 제가 모르는 건가요? 2004-12-19 02:27:21
164.125.144.163
이두선 죄송 글이 좀 이상하게 쓰여졌군요. 나빠진게 아니라 뭐라할까 예전에는 지나치게 군율 등에 묶여 있었는데 기병의 자유(?)를 너무 제한하면 전략에 안좋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정도 풀어줬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기병전술의 유연성이 더 좋아졌다고 해야지요.
이두선 (steven0302, hotmail.com)
2005/01/14 (18:12)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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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기원전 5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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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온(legion)의 작전
현대군과 마찬가지로 로마군은 행군 중 군대의 주위를 경호하는데 상당한 신경을 썼다. 그 원인은 아마 이탈리아 반도 내에 머물던 과거와는 달리 해외출병이 늘어나면서 기습 등의 위협이 많아졌고 포에니 전쟁 중 트라시메누스(Trasimene, 트레비아였던가ㅡㅡ? 기억이 가물가물-_-;;;) 전투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한 레기온은 보통 500~550 mules의 짐을 지니고 다녔다. 짐은 주로 가죽천막(한 천막에 열명씩 기거), 식량, ballista나 catapult 등의 무기들이었다. 이런 짐들은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에 위험한 적지 등을 지날 때는 짐들을 가운데 배치하고 사각을 이루며 행군하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지대가 넓고 평평하다면 모든 짐들을 한가운데 모으고 전군대가 정사각진으로 진군했다.
전시가 아니면 갑옷은 그냥 짐에 넣어 가지고 다녔지만 마리우스(Marius)는 짐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갑옷은 군단병들이 스스로 가지고 다니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또한 15~20kg의 개인장비, 15일치 식량도 함께 가지고 다녔는데 이것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갈래진 막대기를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이 막대기는 Marius' mule이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위의 사진에 나와있다(근데 진짜 저기에 15~20kg의 개인장비와 15일치 식량이 다 들어갈까나ㅡㅡ? 왠만한건 그냥 그냥 짐에 실었다지만...).
기존의 castrametation(진지구축작업?)은 계속 되었지만 카이사르에 의해 더 발전된 형태가 되었다. 보통은 모서리부분을 방어의 용이를 위해 다소 둥글게 만든 사각형모양의 진지를 구축했지만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진지를 구축했다. 진지는 주로 식수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가 주위에 만들었다. 진지구축에는 도랑파기, 목책세우기, 길닥기(진지내), 천막세우기 등이 포함되는데 모든 작업이 끝나는데는 대략 세네시간이 걸렸다(작전 중에는 로마군들 진지 만드는데 다 죽겄다ㅡㅡ;;; 이짓을 매일 해야한다니ㅠㅠ). 적지에서는 삼분의 일에서 절반에 이르는 병사들이 보초를 서야하기 때문에 진지구축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법
전략상 당연한 것이지만 로마는 전쟁 중 적보다 높은 지대를 차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고지에서는 적보다 투척무기 사용의 가거리가 늘어나는데다 돌진할 때의 충격효과와 함께 체력을 아낄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약간이지만 창검을 휘두르는 것이 저지의 병사들보다 더 편했다. 카이사르는 항상은 아니지만 주로 그의 정예들로 이뤄진 코호르트(cohort)들을 고지에서 저지로 돌격할 때 앞세워 첫충돌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작전을 즐겼다.
투척무기와 경장병력의 전초전이 끝나면 주력부대의 충돌이 그 다음으로 이어졌다. 레기온은 전진하거나 적이 대략 20m 정도까지 다가올 동안 기다렸다 첫 두줄의 병사들이 투창을 던졌다. 투창투척 순간 레기온은 산개대형으로 바뀌며 반팔랑크스(semiphalangial) 상태가 된다. 물론 투창의 투척이 늦어지면 진형의 변형도 늦어졌다.
이러한 방어적인 진법이 항상 이런 순서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 체력적인 우위에 있는 방어군이 적의 주력본대가 다가오는 중 갑자기 돌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첫 라인의 병사들(앞의 8~10줄)은 사납게 적의 대열로 뛰어들었고 투창투척이 전문인 첫 두줄의 병사들은 이미 창을 던졌기 때문에 검만으로 싸웠다. 이러한 선제공격 후 뒤의 열은 투창을 아군의 머리 위를 넘겨 던진 뒤 싸움에 동참했다. 맨 뒤의 열은 진열의 측면과 배후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경장병력들에게 계속 투창을 공급받아 투척했다. 이 경장병들은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투창과 다트(dart)를 찾아내 투척병들에게 공급하는 역할도 있었다.
만약 첫 라인이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던가 충돌의 효과를 내지 못하면 두번째 라인이 다가와서 첫 라인에 진열 중인 병사들의 사이로 지나가 전투에 참여했고 그러는 사이 첫 라인의 병사들은 일시후퇴하여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전투가 길어지면 예비대로 남아있던 세번째 라인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전투 중에 열의 위치가 바뀌는 것은 예사였다. 하지만 경직되었던 그리스의 팔랑크스(phalanx)와는 달리 이런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로마군이었기 때문에 야만인들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이점이었다. 또한 소규모의 군대로도 뛰어난 지도자만 있다면 훨씬 많은 야만족의 군대를 상대해도 밀림이 없었다.
장시간 전투에서도 승리한 군대의 사상자는 가벼운데 비해 패배한 군대는 비극적이라 할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스쿠툼(scutum)이라 불리는 커다란 안쪽으로 휜 사각형의 방패는 고대인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패였다. 이 스쿠툼과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오른쪽에만 했음. 방패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무기를 사용했으므로 방패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왼쪽다리는 방패에 의해 보호가 되지만 오른쪽은 노출됨으로 오른쪽에만 정강이받이를 한것임. 그러면 왼손잡이들은???)로 완전무장된 군단병들의 조직적인 진형은 적이 상대하기 껄끄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열이 붕괴되거나 측면이나 배후를 기습당하면 진형은 공격에 무력하게 된다. 공격을 받고 붕괴된 진열이 다시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승리한 군대에게는 부상자의 숫자가 전사자보다 세배에서 열배에 달했다. 패배한 군대의 부상자들은 적의 동정이 없는한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소형발사기구의 사용량은 증가했다. 카이사르의 시대에 각 레기온은 열명의 담당자가 담당하는 catapult와 ballista를 30개 가지고 있었다. 이 발사기구들은 주로 공성전, 야전진지방어, 도하작전 때 쓰였다. 이런 방어적인 목적 이외에도 필리포스(Phillip)나 알렉산드로스(Alexander)처럼 평지에서의 전장에 쓰이기도 했는데 그 목적은 보병밀집대형에 원거리에서 묵직한 충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화살은 따끔한 바늘, 발사기구들은 강력한 핵펀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밀리터리 발전사 - 팍스 로마나(AD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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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만큼 군사적 격동이 없었던 시대도 드물 것이다. 물론 대내외적인 위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을 파멸로 밀어넣을 만큼 제국의 안정과 군사력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커다란 위협이 없었다는 것은 그에 맞는 걸출한 영웅이 없었다는 것도 뜻했다. 같은 시대 아시아에서는 쿠샨(Kushan)의 황제 가니슈카(Kanishka)가 큰 위세를 떨쳤다. 로마의 명군들로는 네명의 군인황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티베리우스(Tiberius), 트라야누스(Trajan),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그리고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였다. 이들은 카이사르(Caesar)급의 군사천재는 아니었지만 열정적으로 임무에 임했고 경험이 많은 유능한 군사전문가들이었다.
팍스 로마나
팍스 로마나의 시작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 훗날의 Augustus인건 아마 다들 아실 듯)가 라이벌인 안토니우스(Antony)에게 승리하고 로마로 돌아온 기원전 29년으로 본다. 로마 치하의 평화를 뜻하는 이 팍스 로마나의 시대는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였다고 표현한 오현제시대 중 마지막인 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하였지만 162년 동부전쟁으로 인해 끝나게 된다.
기원전 13년 아우구스투스는 군단(legion)의 수를 25개로 줄였다. 이때 로마군의 전체병력은 근위대(Praetorian Guards)와 보조병(Auxiliary)을 합쳐 삼십만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에는 라인(Rhine)과 다뉴브(Danube) 전선에서의 야만인들의 압박 때문에 삼십오~사십만여명의 수준으로 군대가 증강되었다. 광대한 영토와 그에 걸맞는 국경선을 방어하면서도 이 정도의 군대로도 수많은 종족들을 막아낼 수 있었던 비결은 언제나 그렇듯 우수한 훈련과 군조직 덕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펼친 정책 중 퇴역병 정책이 있는데 그것은 퇴역병들에게 일종의 연금을 지급하고(aerarium militare, 서기 6년부터 시행) 또한 그들이 국경 근처에 정착해서 살도록 장려한 것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침략이나 국경분쟁 등의 사태에 대비하여 현역부족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퇴역병들의 정착촌은 영구적인 진지나 작은 요새(castella, 영어로는 blockhouse인데 벽돌집으로 해석할뻔 했음-_-;;;)로 발전하여 로마의 국경방어체계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이 정착촌들은 영토고착화의 효과도 내었으며 군대의 주둔지를 로마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로마화된 예전의 야만인들의 영토에서는 농업경제가 발전했는데 그에 따라 남이탈리아와 그외 제국의 중심부에서는 농업의 계속적인 쇠퇴현상이 일어났다.
이 시대에는 지중해 전체가 로마의 내해가 되면서 해군은 국가간 해전보다는 바다의 경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해안감시, 해적활동억제, 밀무역적발 등이었다.
팍스 로마나 시대 정치적, 군사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정책은 근위대의 통제였다. 당시 근위대가 국가에 간섭하는 것은 법적, 물리적, 도덕적, 원칙적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들은 국가정책과 제위계승문제에 영향을 끼쳤으며 종종 오만하거나 승리자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네명의 황제가 제위에 올랐던 서기 69년 이후 근위대는 문제를 인식한 황제에 의해 완벽하게 황제의 통제아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근위대의 문제는 한세기가 지난 후 코모두스(Commodus) 사건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근위대는 또다시 황제를 폐위하고 만들었으며 이것은 결국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의해 시작되는 군인황제시대에 다다르는 계기가 되었다.
무기, 병법, 기술
이 시대 육지에서건 바다에서건 획기적인 무기의 발명이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는 최전성기였으므로 바다와 육지에서 모두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우세을 계속 유지시키는 요소들을 강경하게 지켜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발전의 의지나 자극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결과는 변화의 기초가 되는 과학지식이나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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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미지는 쿠샨의 황제 가니슈카-_-;;;
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의 쇠퇴와 기병의 융성(200~400)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전투(378)는 두가지의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게르만 야만인의 손에 제국이 강한 영향을 받게 된 것이고 또하나는 보병이 전장에서 기병에게 주도권을 내준 것이다. 이 시대 명장이라 부를만한 인물은 별로 없었지만 평균치를 넘고 위대한 명장이 될만한 가능성이 있었던 클라우디우스2세(Claudius II),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Aurelian Probus), 율리아누스(Julian) 등은 일찍 죽어버렸다. 그외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던 인물들로는 카루스(Carus),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스틸리코(Stilicho), 아랍인 오데나투스(Odenathus), 페르시아인 아르다쉬르(Ardashir)와 샤푸르1세(Shapur I) 그리고 인도의 Samadragupta 등이 있다.
튜튼(Teuton)족
이 통제 불가능한 게르만 부족들은 이 시대에는 아직 로마와 정면으로 맞설만한 기술이나 훈련도, 조직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3세기 중반까지 이들은 제국에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제국내의 무질서와 혼란으로 인해 게르만족에게 파고들 틈을 주고 말았다. 게다가 로마화된 이들은 로마와의 대결에서 더욱 자신감을 얻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드리아노플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튜튼족은 로마의 도시들을 빼았거나 제국의 영토에서 로마인들을 쫓아내지는 못했다. 로마의 문제는 행정적인 문제에 가까웠지 군사적인 요소들은 아직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마의 정신과 국력은 쇠퇴를 거듭했고 그뒤 서로마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야만족(로마의 관점에서는)들에게는 특정한 군제나 병법이 없었다. 독일 북서부의 프랑크(frank)족은 기병을 운용은 했지만 기본적으로 보병중심이었고 남독일의 알레만니(Alemanni)족은 동쪽의 콰디(Quadi)족처럼 기병중심이었지만 경보병과의 합동운용을 주로 하였다. 게르만과 스키타이(Scythia)의 혼혈민족이며 투르크(Turk)계인 알란(Alan)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르마티아(Sarmatia)족은 그 피를 잊지 않고 기마민족으로 남아 있었다.
역시 스키타이와 게르만의 혼혈로 보이지만 아시아적인 요소는 훨씬 적은 고트(Goth)족은 둘로 크게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동고트(Ostrogoth)족으로 기병들이었으며 드네프르-돈(Dnieper-Don) 지방의 스텝(steppe)지대에 살고 있었다. 서고트(Visigoth)족은 카르파티아-트란실바니아(Carpathian-Transylvania) 지방에 살았으며 보기 혼합전술을 사용했지만 주로 보병에 더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다. 그들의 사촌격인 헤룰리(Heruli)족처럼 고트족은 해상기술을 배워 흑해와 에게해(Aegean Sea)를 휘젖고 다녔다. 독일 북부의 색슨(Saxon)족들도 바다의 강도들이었다. 이들은 자주 브리튼(Britain)과 갈리아(Gaul)해안을 습격했다.
이 시대 가장 흥미있는 게르만족의 혁신은 아마 마차요새(wagon fort)일 것이다. 이동을 하거나 작전 중일 때 그들은 마차를 가지고 다니며 야영할 때는 마차들을 주변에 원형으로 둘러 차진(laager)을 만들었다. 이 이동식요새는 조잡했지만 효과적이었다. 이 마차요새와 차진이 그들 고유의 발명이었는지 혹은 아시아에서 건너온 것인지 아니면 로마의 진지구축술(castrametation)을 받아들여 변형시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야만인들의 로마군내에서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야만인들을 그 어떤 전임자들보다도 더욱 기용하여 그들에게 공적인 권력과 책임을 부과했고 이러한 경향은 율리아누스 치세를 거쳐 테오도시우스의 시대에 그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 군대 내에서 야만인들의 영향력은 강했으며 대부분의 군지도자들은 야만족출신이었다.
기병의 융성
기병은 오랜 시간동안 남인도를 제외한 아시아의 전장을 지배해왔다. 로마는 그리스나 마케도니아같이 보병이 군대의 핵심이었지만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기병의 중요성은 점점 늘어났고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 유럽인들은 기병전술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병종간의 균형을 시대에 맞게 그리 잘 이루지 못하던 로마는 전장(특히 동부사막이나 동유럽의 스텝지대)에서의 기동성, 속도, 이동성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기병전술은 로마의 주적인 파르티아(Parthia), 페르시아(Persia), 튜튼 등의 적에 맞게 발전하였다. 같은 시기 투척무기(또는 궁시무기???)사용의 증가는 보병의 진열을 넓고 얇게 만들어 기병돌격에 불리하게 되었지만 대신 전투의 결과가 보병들의 백병전에 의해 결정되는 일은 줄어들었다. 회전(pitched battle)에서 겪을 위험과 손해를 피하고 이동과 기동으로 이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로마는 이런 식의 전투를 파르티아와의 Carrhae 전투에서 한수 배운바 있다. 게다가 느리지만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로마 군기강의 쇠퇴는 군단병(legionary)들로 하여금 기병돌격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게 하였다. 아드리아노플은 Carrhae로부터 시작된 기병의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충격효과를 위한 기병전술은 아시아에서부터 발전했다. 안장과 등자가 발명되면서 기수에게는 단단한 고정점이 생겼고 이것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적진을 향해 말과 기수의 몸무게와 돌격에 따른 가속도로 충돌하여 적열을 흩뜨리는 것이 기병전술의 주목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방에서는 충격전술에 적합한 무거운 말의 종이 개량에 의해 나타났다. 이렇게 등장한 기병전술은 로마에 의해 받아들여져(등자 빼고) 페르시아와 같이 작고 가벼운 무기들을 막을 수 있는 사슬갑옷(chain mail)을 입은 기수들이 활약하게 되었다.
돌격을 기본으로 하는 창기병들 외에도 파르티아, 중국, 중앙아시아인들이 적들에 맞서 사용하던 궁기병들의 대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두 기병종들은 상호보완적인 존재들이었다. 창기병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밀집대형이 있는데 여기에 정면으로 돌격하면 아무리 우수한 창기병이라도 손해를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밀집대형은 화살의 좋은 타겟이 되었고 궁기병으로 적진을 흔들어준 다음 창기병들이 돌진하게 만드는 것이 궁+창기병 콤비작전의 핵심이었다. 재미있게도 로마는 아라비아(Arabia)와 누비아(Nubia) 사막에서 로마인 특유의 융통성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낙타를 말대신 사용한 것이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레기온(legion)의 공격진형으로서의 역할이 끝났다고 할 수 있는 전투였다. 군대에서의 주력은 기병들인 궁기병(cataphract)과 창기병이 차지했고 중장보병들은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진형을 이루었다. 기동성이 승리의 관건이 되면서 중장보병들보다는 경장보병들이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중장보병들은 팔랑크스(phalanx)로 되돌아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전쟁이론
이 시대 후반기에 일생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귀족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Flavius Vegetius Renatus)는 로마의 군사이론들을 통합, 편집하여 De Re Militari(직역하면 on military affair이며 보통 의역하여 the military institutions of the Romans)라는 책을 썼다. 베게티우스는 아마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 383년에서 392년 사이에 이 책을 쓴듯하다.
베게티우스는 유명한 군사지도자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군대경험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군대사에 정통했으며 과거 로마의 영광을 초기의 병법과 경영방식을 되살리면 부활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시기적으로 부적당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베게티우스가 투척무기와 기병의 발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게티우스의 저서는 따라서 동시대와 바로 뒤이은 후세에 손자병법처럼 그리 큰 관심이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세에 그의 책은 교육받은 군지도자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당시 그 책이 유일하다시피한 병법서였고 또한 베게티우스가 살던 시대의 기병의 발전에 대한 그의 논고가 쉽사리 조잡했던 중세의 군개념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베게티우스는 책을 쓴지 천년이 지난뒤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13,4세기 석궁(그리고 장궁)의 발달과 이에맞서 지나칠 정도로 무거워져 기병의 특기인 충격효과마저 상당부분 상실해버린 중장기병의 갑주 등 당시의 상황에서 기병은 쇠퇴하고 보병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에 베게티우스의 사상이 더욱 잘 먹힌 것이다. 14세기에 이르러 De Re Militari는 서구세계에서 군사지도자들에게는 성경으로 떠올랐다.
다른 발전들
무기
무기들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다만 투척무기의 발달과 더불어 ballisat와 catapult는 가볍게 개발되어 전장에서 사용되었다.
축성과 공성
축성과 공성분야에서 그리 큰 혁신은 없었다. 중국과 로마 등은 이 분야에서 서서히 발전해나갔다고 할 수 있지만 깜짝 놀랄만한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전
다른 두개와 마찬가지로 해상에서도 새롭다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로마는 아드리아해(Adriatic Sea)와 티레니아해(Tyrrhenian Sea), 갈리아 북서부 등에 해군기지들을 두고 해안을 순찰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목적은 외국과의 해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해적들의 출현과 약탈을 막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해군이 중요하게 쓰인 일이 있다면 내전 중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협들을 장악하려 경쟁을 벌인 일이 다였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강에 수군기지들을 두고 해안지방을 경비하는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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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몇달간 오렌지(Orange, NSW 내륙 깊숙히 있는 도시인데 오렌지농업으로 한때 유명했기 때문에 이름까지 오렌지가 되었다는군요)에 다녀올 예정인데 그때까지 디코에 잘 못들어올듯 하군요ㅠㅠ
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서기 300년까지)
로마가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패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적마저도 받아들이는 감화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제국으로 이전된뒤 350여년간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떤 것은 정상적인 전개의 결과였고 어떤 것은 내부의 분열과 긴장의 결과였으며 적에 의한 변화도 있었다. 로마가 수백년간 패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문제에 대해 실용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기를 좋아했던 로마인들의 성격 덕분이었다. 로마인들은 전통을 중요시했지만 전통의 노예는 아니었으며 군사적 변화의 적응에 대해서 상당한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원전 50년 경에서 서기 300년 경까지 부가적인 요소 외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로마의 성향이 완고하게 변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한 어떻게 보면 그동안의 과학의 발전이 그만큼 뒤따라주지 않았거나 혹은 공화국시절부터 이어진 군사적 전통이 그만큼 유용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군사정책
아우구스투스는 어느 후계자도 더이상 진전시키지 못한 군사정책의 근본을 쌓은 장본인이었다. 그는 경제적인 안정을 군사적인 안정만큼이나 중요시 여겼다. 그의 시대 제국은 광대해져 수백명의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며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비춰졌고 무장한 군대는 최전방의 방어나 내부안정에만 이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경제에 되도록이면 적은 부담을 주기위해 되도록 군대는 작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조직력과 기술에 의해 군대는 소규모가 되었지만 효과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30만여명의 군대는 대략 오천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제국의 인구와 주변의 적들에 비해 적은 것같지만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지켜나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경제와 군사의 상관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소규모의 정예군이 대규모의 보통군대보다 cost effective하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거의 예외가 없던 그의 후계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최전방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숫자의 차이정도는 로마군대의 능력안이라고 믿으며 불필요하게 비싸고 비효율적인 증강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외압이 커짐에 따라 상비군의 숫자도 불어났지만 3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로마군의 숫자는 다른 시대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군사경제정책은 제국으로 하여금 예산이 많이 드는 중앙예비군의 유지를 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만여명의 근위대(Praetorian Guard, 보통 근위대라고 하면 황제의 안위를 지키는 보디가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로마의 근위대는 내부안정을 주목적으로 하였음)를 제외하고 제국의 모든 무장한 군대는 전선마다 분산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한 전선이 위험에 처하면 다른 전선에서 군대를 빼내어 그 지역에 투입하였다. 로마는 예비군은 없다시피 했지만 전선 배후의 속주들마다 잘 정비된 도로망들은 예비군을 대신하는 든든한 지원군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레기온(legion)
아우구스투스는 레기온의 크기를 육천명으로 표준화하고 기존의 열개의 코호르트는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중 첫번째와 열번째 코호르트는 천명이었고 나머지 8개는 오백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군단을 편성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지휘권의 배치는 카이사르(Caesar) 때와 거의 같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를 25개의 레기온으로 편성하고 각 전선에 이들을 배치하였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병사들은 보통 20년간 복무하게 된다. 신병훈련은 대부분의 신병들이 베테랑(veteran)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부모들이 훈련을 시켰단 말인가ㅡㅡ?).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병사들이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병사들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제대한 군인이 받게되는 연금 중 일부는 전선 가까이에 있는 농지였다. 이것은 앞서 팍스 로마나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만약의 경우 현역으로 보충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영토고착화의 효과를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제대군인들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속했던 부대에 되도록이면 배치되지 않았다.
레기온의 사기는 엄격한 훈련과 esprit de corps(부대내 단결심???)에 의해 유지되었다. 군사 개개인이 수세기 동안 존재해온 군단에 복무하고 있다는 것과 전설처럼 들려오는 승리와 전투 그리고 영웅들을 조상으로 뒀다는 자부심이 군대사기에 주는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훈련과 단련은 거칠고 격렬했지만 또한 효과적이었다. 물론 시간이 갈 수록 훈련도가 약해진 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로마의 훈련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오히려 적이 강할 수록 로마군의 훈련은 강해졌다.
군대내 보조병(auxiliary)
로마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25개 군단만으로는 제국의 변경들을 모두 수비하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거의 같은 수의(15만여명) 보조병들을 유지하였다. 보조병에는 궁병, 투석기병, 경보병, 기병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로마 주변의 야만부족들에게서 보충되었다.
보조병들은 군단병(legionary)들보다 더 적은 봉급을 받았다. 그들의 복무기간은 주로 25년 정도였다. 복무를 모두 마친뒤 보조병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이 부여되었으며 가끔씩 군단병 베테랑들에 못지않은 토지와 돈을 보수로 지급받기도 하였다.
초기에 대부분의 보조병들은 그들고유의 부족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특수부대를 제외하고는(제국동방에서 주로 공수되던 투석기병이나 궁병들) 보조병들은 그들의 거주지 근처에서 복무하였다. 이런 체제는 가끔씩 보조병들이 지방의 부족민들과 힘을 합쳐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기 쉽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에는 야만족출신의 보조병들은 고향에서 떨어진 곳에 복무하도록 하였으며 부대원들은 되도록이면 하나의 부족민들로 이루기 보다는 다른 부족에서 차출하여 부대내 부족간 동질감이 생기는 것을 억제하였다.
트라야누스(Trajan)의 시대가 되자 보조병들의 반란억제정책은 더욱 확장되어 그전까지 부족적인 틀을 유지하던 보조병부대들은 각기 다른 부족에서 차출되어온 보조병들로 편성되었고 지휘관은 더이상 부족장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따라서 부족민간 동질감은 esprit de corps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보조병들로 하여금 레기온의 코호르트에 비견되는 부대단위가 창설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 부대들은 숫자로 구분되었는데 그리하여 이 부대들을 숫자라는 뜻의 누메리(numeri)라고 불렀다. 부대네 영속성과 규율은 줄어든던 부대원(야만인들도 점점 로마화됨)간의 거리감을 더욱 줄여주었고 3, 4세기에는 레기온 내에서도 이들의 비중이 커졌다.
로마인들이 제공하는 야만인 보조병들의 훈련과 장비가 로마인들을 적대하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시간 야만인들은 로마군과의 전투를 통해 로마군의 진형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이러한 야만인들의 경험을 통한 "업그레이드"는 로마가 몰락하는 한 원인이 된다. 이런 일이 더 일찍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로마의 정치력과 뛰어난 장군들의 활약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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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에서 잠시 시드니로 돌아왔습니다. 오렌지는 선선하던데 시드니는 늦더위가 장난이 아니군요ㅡㅡ;;; 근데 이주만에 글을 쓰는거라 그런지 글이 영 안써지더군요. 이곳저곳 어색한 부분들이...ㅡㅡ;;;
ps financier님의 리플을 보고 ("쓰던 글은 마저 쓰시고 가시지") 순간 더운 날씨에 열을 받아버렸습니다ㅡㅡ;;; financier님의 죄는 financier님이 알것으로...쿨럭...ㅡㅡ;;;
이두선 (steven0302, hotmail.com)
2005/02/09 (14:32)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45
Access : 800 , Lines : 37
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서기 300년까지)
하드리아누스(Hadrian),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혁신
비록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제국의 방어와 군사정책이 완벽했다지만 후대에도 계속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전임자가 정복해놨던 동쪽의 영토일부를 포기했고 트라야누스(Trajan)는 제국이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으로 지배하기에 너무 광대하여 확장정책을 중단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이동적인 방어체제를 고정적인 개념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목적은 레기온(legion)의 탁월한 기동성이나 전술적 유연성을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연적인 강이나 산같은 자연적인 방벽에 인공적인 구조물들을 보완하여 제국의 변경들을 지키는 방어벽을 건설했다. 이것은 야만인들이 전선을 넘어오기 어렵게 만들었고 설사 넘어온다해도 후방으로부터의 지원을 어렵게해 상대하기가 수월해졌을뿐 아니라 다른 전선에서 지원군을 불러오지 않아도되는 플러스효과가 나타났으며 따라서 대규모의 토벌작전이 줄어들었으므로 재정을 아낄 수 있었다.
독일의 리메스(Limes)와 영국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흙을 높이 쌓아 그위에 목재방벽을 친 것이었다. 이들은 로마군에 의해 항상 관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넓은 전선들을 지키기에 병사의 수가 모자랐던 것이다. 이 방벽들의 주목적은 국경을 정찰할 때 병사들을 보호, 은폐하거나 야만인들이 비밀리에 넘어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설령 넘어온다해도 적이 후퇴할 때 이 방벽들은 방해물이 되어 추격해오는 로마군이 적을 섬멸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다뉴브(Danube)와 라인(Rhine) 국경선에서의 선박정찰을 더욱 강화하여 침략을 방비하였다. 또한 이미 존재하는 제국의 정보망을 국경선 밖으로 넓혀 침략계획 등을 미리 알아내기도 하였다.
로마의 용병술과 정보활용술로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편제에 몇가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상비군에 두개의 레기온을 추가하고 보조병(auxiliary)의 비율을 더 높였다. 그의 시대 로마의 전체병력은 아마 삼십오만이 넘었을 것이다.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세 레기온을 더 창설했으며 그중 하나는 항상 이탈리아내에서 예비군으로서 주둔하도록 하였다. 그의 시대 로마의 전체병력은 대략 사십만에 육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베루스는 합법적인 결혼을 허락하는 등 군인들의 처우개선에 여러모로 힘쓰기도 했다. 그는 명령체계를 개편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지역전선의 지휘권을 나눠서 지역군사지휘관들이 중앙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성벽도 역시 세베루스에게는 개편의 대상이었는데 원래 목재방벽이었던 것을 석벽으로 바꾼 것이다(16' high and 8' thick라는데 '가 대체 무슨 단위지ㅡㅡ? feet를 말하는건가ㅡㅡ?).
기병들이 로마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여기에 관련하여 기마보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평소에는 보병이지만 급히 이동할 때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의 개혁
아우구스투스가 처음 틀을 잡아놓고 후계자들에 의해 조금씩 개정되었던 행정, 정치, 군사정책들은 3세기 중반의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과감한 개정의 대상이 되었다. 중앙예비군이 없는 로마의 방어체제로는 더이상 진보하고 로마화된 야만인들과 최대의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막아내기 벅찼던 것이다. 편제의 변화없이 단순히 군대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무튼 아우구스투스의 유산을 물려받은 일리리아(Illyria) 황제들은 가중되는 위협으로 인해 개정이나 개혁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군대를 증강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군대의 수는 약 오십만으로 늘어났다. 이 군대를 질적으로도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 프로부스(Probus), 카루스(Carus)는 초기 제국의 훈련을 도입하였다. 일단 이러한 임시방편으로 그들은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페르시아를 견제했다.
로마군대가 이렇듯 혼란에 빠지고 분열된 원인은 한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다른 교전중인 전선에 투입하는 낡은 체제가 주원인이 되었다. 이런 체제는 한 전선에 공백이 생겨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평화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이익이었을지 몰라도 혼란기에는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레기온, 최소한 레기온의 주력이 국경의 공백을 방치하고 주둔지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사태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방법으로 다른 코호르트(cohort), 레기온, 누메리(numeri)에서 일부씩을 빼내 임시기동부대(vexillation)를 만들고 이들을 교전지역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다루기 쉬운 이들 임시부대의 숫자는 보병일 경우 천명, 기병일 경우 오백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임시부대의 운용은 처음에는 만족스러웠다. 위협이 사라지면 이들 임시기동대는 해체되어 원래 부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235년에서 290년 사이의 혼란기에는 이런 방법도 너무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소속감에 혼란이 생겼고 따라서 로마군대의 전통이던 부대원들의 단결심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군의 중요한 부분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혁을 결심한 이유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단결심의 상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의 개혁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완성된다.
기동성을 갖춘 예비군의 필요성에 따라 군대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전선을 지키는 리미타네이(rimitanei) 혹은 리파리엔세스(riparienses)였고 다른 하나는 기동야전군(더 기동성있는 병종들로 이뤄졌음)인 palatini 혹은 comitatenses였다. 대략 삼분의 이 정도의 병력이 국경수비대(리미타네이)였다. 나머지는 황제(Augustus or Caesar)들이 자신의 근거지에 주둔시켰다. 이들 기동부대원들은 국경수비대원들보다 조금 더 높은 봉급을 받았는데 이것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임시기동부대의 경험을 살려 레기온 야전부대의 수를 천명으로 줄였다. 이것의 결과는 임시기동부대보다 상당한 전략전술적 유연성을 갖게 된 것이었다. 전선의 레기온들은 육천명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보조병(auxiliary)들은 국경수비군이나 기동야전군이나 모두 천명씩 딸렸다.
문재많은 근위대(Praetorian Guards)를 지휘하는 근위대장(Praetorian prefect)의 지위는 폐지되었다. 근위대장의 힘은 황제를 몰아내거나 혹은 직접 황제가 되는데 사용된 예가 있기 때문이다. 근위대를 대신하여 정제(Augustus)와 부제(Caesar)들에게는 기병대장(master of cavalry)과 보병대장(master of foot, 근데 이름이 좀 유치하다ㅡㅡ;;;)직을 부하로 두었다. 이러한 개혁은 단순히 군사적인 권력이 나뉘어 정치적인 위험이 줄어들었다는 것보다 로마군 내에서 늘어나는 기병의 비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는 나중에 근위대를 폐지해버렸고 대신 각 황제들에게는 사천명의 호위대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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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오렌지로 돌아가는데 언제 또 올지 모르겠군요. 내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한번 글하나 올려보도록 노력하지요.
이두선 (steven0302, hotmail.com)
2005/02/09 (23:05)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46
Access : 794 , Lines : 37
밀리터리 발전사 - 로마(서기 300년까지)
새로운 진형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의 개혁으로 레기온(legion)의 크기는 변화했지만 전략적 조직력이나 병사들에 대해서는 표면상으로 작은 변화만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개혁의 결과는 긍정적이었으며 로마제국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공헌한 바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동야전군의 보병들은 국경방어군보다 경무장이었다. 이것과 이들이 받는 더 많은 봉급은 국경방어군으로 하여금 시기심이 생겨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군단병(legionary)들과 보조병(auxiliary)들의 배경에 그리 큰 차이가 없어지면서 국경방어군단병들은 경훈련/경무장한 보조병들이나 기동야전군단병들에 비해 인기가 없어지게 되었다. 결과는 군대 대부분에서의 사기저하로 나타났다. 또한 군단병과 보조병 사이에 차별을 없애는 장비와 훈련 프로그램의 변화도 나타나게 되었다.
병사(군단병과 보조병, 국경방어군과 기동야전군)들은 대부분 야만인들이었다. 이것은 375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야만인전사들은 무기와 전술적으로 로마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로마군 내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생각했으며 전문적인 군인으로서 그들이 속한 부대와 지휘관에게 충성했다. 이들은 동족들과 싸우는데 로마지휘관(주로 로마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동족과의 전투명령은 내통, 폭동, 탈영 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다.
표준 훈련도의 쇠퇴에 따라 로마군에는 새로운 병사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첫째로 야만부족들이 제국의 영내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것이 허락됨에 따라 부족단위의 보조병들을 해체하려던 트라야누스(Trajan)의 정책은 반전되었다. 그들 고유의 지휘관과 무기, 전투방식을 유지하는 부족단위의 보조병들은 많은 수가 제국군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federati라고 불렸다. 물론 야만인들의 상당수는 로마화되었기 때문에 그리 전략적인 영향은 별로 없었지만 대신 불안과 폭동의 가능성은 항상 상존하고 있었다.
두번째로 지원자들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제국의 일부에서는 징집이 행해졌다. 대지주들은 이때 일정한 비율로 혹은 교대로 신병들을 제공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징집병들은 정규군보다 적은 부담을 주는 존재였다. 징집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지만 로마군의 전문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이것은 후일 중세 봉건제도로 가는 한 단계였다.
후기 제국의 병법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와 율리아누스(Julian)의 시대 사이에는 지휘관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써서 후세에 전한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류역사가들도 그들이 살던 시대의 전투들을 남긴 이가 없었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경험한 "현장증인"이 없었기 때문에 기원전 50년부터 서기 350년 까지의 4세기 동안 어떤 병법이 주로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다.
레기온의 진형이 연구되는 동안 보기에는 다섯개의 코호르트(cohort)가 한 줄로 선 2-라인 포메이션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보병들의 진형이 기병의 발달과 훈련도의 저하로 인해 전보다 더 밀집된 형태를 띄었다는 것이다.
한편 백병전에서 마리우스(Marius)가 코호르트들에 도입한 오엽배열진(quincunx formation)은 공화국시절 만큼이나 후기 로마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진은 콘스탄티누스의 타우리노룸(Taurinorum, 지금의 Turin) 전투기록에서 나타나는데 그의 군대는 카이사르의 레기온 만큼이나 기병돌격에 잘 대처했고 군단내 소대들끼리 초기처럼 유기적으로 기동하였다.
보병들이 밀집과 산개를 유기적으로 행하여 전투를 치르는 근본적인 방식은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기병들의 비중은 점점 커져갔고 효과또한 상당했다. 훈련도가 높을 때는 진형은 오엽배열진과 유사한 형태로 운용되었지만 훈련도가 낮을 때는 장군들은 팔랑크스(phalanx)와 비슷한 형태로 밀집대형을 이루었다.
레기온의 쇠퇴와 기병의 융성에 기초하여 주목할만한 점은 필룸(pilum)의 투창화였다. 이 새로운 투창은 전의 것보다 가벼웠고 다른 보병들과의 백병전이 일어나기전 던져졌다. 아마 글라디우스(gladius)를 휘두를 공간을 얻기위해 앞열은 초기 레기온과 마찬가지로 산개진을 펼쳤을 것이다. 필룸의 변화는 줄어든 유연성과 공격능력, 훈련도의 저하 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4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기병은 전체군에서 사분의 일을 차지했고 그 비율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와 대적하는 동부사막지대에서는 더 높았다. 기병은 이제 승패를 결정짖는 병종이 되었다.
투척무기 역시 로마군에서 그 중요성이 나날이 커져갔다. 이들의 발전은 전략적 딜레마를 가져왔다. 기병의 돌격에는 밀집진형이 효과적인데 이러한 밀집진형은 투척무기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고 또다른 기병대처법으로는 투척무기사용이 있는데 이 진형은 넓고 앏게 퍼졌기 때문에 기병의 조공을 막아내지 못하면 쉽게 무너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같은 딜레마를 적역시 격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마는 투척무기와 기병의 비율을 점점 높여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끔 자신들의 유연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4세기에 이르자 로마는 원래 백명당 한개씩이던 ballista, catapult, onager의 수를 더욱 높였다. 아마 보조보병의 절반정도는 궁병이나 투석기병이었을 것이고 기병 역시 상당수 아시아의 것을 모델로 하는 궁기병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투척무기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는 승패가 보병들의 백병전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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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올린다고 했는데 오늘 다 써서 올리는군요. 그나저나 몇가지는 지난번 것을 재탕했다는...ㅡㅡ;;;
오렌지에 가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지만 대신 묵고있는 집이 모뎀을 쓰고 또한 영어윈도를 써서 한글지원이 안되기 때문에 메일만 간신히(?) 체크하는 수준입니다ㅠㅠ 집에 이주만에 오니까 비싼 돈주고 설치한 케이블이 쌩쌩해서 좋았는데(평소에는 못느끼다가 몇주 모뎀만 쓰니까 비로소 케이블이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도 내일로 끝이군요ㅠㅠ) 내일이면 다시 그 느려터진 모뎀을 주인집의 눈치보며 써야하는군요ㅠㅠ
밀리터리 발전사 - 중세의 시작(400~600)
이 시대는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쇠퇴해가던 로마제국은 분열되어 곧 서방은 몰락해버리고 동방제국만이 남아 서구문명을 지키는 유일한 수호자가 된 것이다. 제국의 쇠퇴는 국가정책으로서 지도력, 고안력, 체계적인 군사연구의 동반적인 쇠퇴도 불러왔다. 전투는 체계적인 부분을 상당수 상실했으며 일단 맡붙고 보는 전투가 대세가 되었다.
동로마는 부분적으로 예외였지만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제위시절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사정상 국가정책이나 군사전략은 방어적이고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군사적인 발전은 계속되었다. 바로 전시대를 풍미하던 기병의 대세는 중세초기까지 계속 유지되었고 후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세의 모습으로 이행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모든 것이 정체되고 후퇴하던 이 시대 눈에 띄는 군사지도자로는 아마 세계전쟁사에 이름이 남을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있을 것이다. 나르세스(Narses) 역시 여러 병종의 합동운용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서른살 가까이 어린 벨리사리우스를 보고 배운 것일 것이다. 스틸리코(Stilicho)와 아에티우스(Aetius)는 동시대의 장군들과 적수들을 능가하는 지도력, 창작력, 운용력을 가진 지도자들이었다. 훈(Hun)족의 지도자 아틸라(Attila)는 경기병을 이용한 다른 의미에서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대의 몽골, 투르크, 타타르, 아랍 등의 경기병을 이용한 명장들에 비하면 그리 뚜렸하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알라리크(Alaric), 오도아케르(Odoacer), 게이세리쿠스(Gaiseric), 테오도리쿠스(Theodoric), 클로비스(Clovis) 등은 용기와 책략, 카리스마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비티게스(Vitiges)와 토틸라(Totila)는 나름대로 뛰어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의 불운은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야만인 용병
5세기초 동과 서로마제국은 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야만인 용병들을 기용하였다. 이들은 개인씩 점점 줄어드는 로마정규군에 등록을 하거나 혹은 federati로서 각자의 지도자하에 지휘되었다. 기병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제국의 장군들은 선천적인 기마부족들을 선호하였으므로 아시아계 유목민족인 훈, 알란(Alan), 아바르(Avar), 불가르(Bulgar)족 등이 경무장 궁기병으로 제국군에 복무했다. 다뉴브(Danube)와 흑해 사이의 평원에 거주하던 고트(Goth), 헤룰리(Heruli), 반달(Vandal), 게피다이(Gepidae) 등의 게르만부족들은 창을 들고 적진에 돌격하는 중장기병의 역할을 맡았다.
동로마제국의 보병들은 대부분 자체에서 조달했지만(특히 아나톨리아) 게르만이나 슬라브(Slav)족도 복무했다. 서방의 경우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병사들을 자체에서 조달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갈리아(Gaul)에서 나왔다. 나머지의 병력은 야만인들에게서 차출했으며 보병의 경우 대부분 프랑크(Frank)나 부르군드(Burgund)족에게서 모집했다.
서로마의 멸망은 의심할 여지없이 레오1세(Leo I)와 그의 후계자 제논(Zeno)에게 federati에 대한 의지를 줄이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병사들을 국경내에서 조달하려고 노력했고 특히 타우루스(Taurus) 산맥의 산악민족인 이사우리아(Isauria)인들이 중심이 되어 외국 야만인 용병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가 되면 제국의 군대는 federati와 전문시민군들이 동등한 지위를 나눠가지게 된다.
기병전법
비극적인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전투의 교훈으로 5세기 초 로마는 군편제를 조절하고 특히 훈족 궁기병의 유용성을 인정했다. 전투와 훈족, 페르시아와의 전쟁경험은 로마의 기병에 영향을 주게되었다. 처음에 이 새로운 종류의 기병은 경장이었으며 야만인들의 federati와는 편제와 훈련도에서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점점 무거운 갑주를 착용했으며 창, 검, 방패, 활 등을 가지고 다녔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카타프락토스(cataphract)는 6세기초에 등장했으며 비잔틴(Byzantine) 제국의 주력으로 떠올랐고 또한 중세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병종이기도 했다. 이 중무장한 로마의 궁기병은 화력, 훈련, 기동성, 충돌작전 등으로 서구 최강의 기병종으로 자라났으며 군단병들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페르시아, 반달, 고트 등과 싸우는 동안 세 종류의 기병들을 활용했다. 먼저 로마의 중장궁기병이 있고 로마에 federati로 복무하는 훈족 경장궁기병이 있었으며 이 두 병종에 비해 중요도나 신뢰도는 낮지만 고트, 헤룰리, 롬바르드(Lombard) 등에서 차출한 중장창기병도 있었다.
아시아계 경기병의 경우 굳건한 편제와 정규군과의 합동운용, 적절한 병참 등이 동반되야지만 지휘가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의 효력은 상당부분 반감해버렸다. 로마인들과 중국인들은 이런 이들을 성공적으로 다뤘다. 이들은 그들의 말을 먹일 수 있는 목초지로만 이동했으며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가축무리와 함께 동반하고 다녔다. 겨울에는 성공적인 작전수행에 어려움을 격었는데 말에게 먹일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가로부터 항상 지원을 받지 않거나 먹여야할 가축들이 너무 많은 경우 이들은 한 장소에 오래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군사편제에 무관심했다.
전투에서 아시아계 경기병들은 굳게 조직된 적들과의 충돌작전을 꺼려했다. 만약 원거리에서의 화살공격으로 적을 괴롭혀 진열을 흐트리는데 성공했다면 훈족과 그들의 사촌들은 그때서야 적에게 다가가 검과 올가미(lasso)로 적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적이 만약 화살공격에 끝까지 견디고 반격해오거나 질서를 갖추고 후퇴할 경우 훈족은 뚜렸한 승리의 맛을 보지 못하고 습격이나 약탈 등으로 만족해야했다.
보병전법
5세기 후반에 이르러 레기온(legion)은 양 로마의 군대에서 사라져버렸다. 투척무기와 기병돌격 합동운용의 위협에 대한 대응책은 기병에는 성공했지만 보병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예전의 레기온만큼 힘과 유연성을 동시에 갖춘 보병조직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팔랑크스(phalanx)를 연상시키는 중장보병들의 밀집대형과 투척무기를 던지는 경장보병 양극단의 두개의 보병종들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보병이 완전히 기병에게 종속된 일은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가끔씩 ballista같은 발사장비와 함께였던 육중한 밀집대형은 기동성있는 기병들의 전략적활동을 위한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경무장 선발공격대(skirmisher, 궁병과 투창병)는 적진을 혼란에 빠뜨려 기병의 돌격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체계가 잘 잡혀있던 동로마와 중국을 제외하고 이 시대 군사지도자들은 투척과 충격, 기동과 부동 등을 조화롭게 다루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결과는 판에 박힌 진부한 병법과 마라톤(Marathon) 전투 이전으로의 퇴행이었다.
기병에 대한 의존에서 중요한 하나의 예외는 프랑크(Frank)족이었다. 그들은 보병전략에 기동성, 원거리공격력, 충격효과 등을 추가하는데 서툴렀다. 프랑크족은 그들의 조상이 초기로마와 싸웠을때 썼던 전술과는 비교되게 경장을 하고(6세기 이전에는 거의 무장을 안했음) 정렬되지 않은 밀집대형으로 돌격하는 전법을 사용했다. 적과 접전하기 직전 그들은 서고트(Visigoth)족에 의해 프란키스카(francisca)라고 불린 무거운 투척용 도끼 혹은 투창을 던졌으며 혼란에 빠진 적진에 검을 들고 돌진했다. 이 겁없는 야만인들은 기병이 돌격해올때는 밀집한체 기다리다가 기병들을 둘러싸 꼼짝못하는 기수와 말을 베었다.
찰스 오만(Charles Oman)은 그의 저서(A History of the Art of War in the Middle Ages)에서 프랑크족은 로마와 접촉한 수세기 동안 무기, 훈련, 병법 등 배운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들의 성공은 단순히 프랑크족의 특별한 생명력과 그들 주위의 적들이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평가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완전한 답은 되지 않는다. 클로비스가 그의 군사들을 훈련시킨 흔적이 있는데다 그는 로마군사체계의 열렬한 찬양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군대는 적었으며 그의 전쟁기간동안 그는 숫자적으로 훨씬 많은 적들(특히 서고트족의 중장기병)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오만이 주장한 것보다 수준높은 편제와 전략전술이 없었다면 설명하지 못할 성공이다.
동고트, 서고트, 롬바르드, 아바르, 동로마 등과의 전쟁경험으로 프랑크족들도 기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6세기말에는 그들도 창기병의 돌격에 의지하게 되었다.
앵글(Angle), 색슨(Saxon), 주트(jute)족은 브리튼(Britain) 침공 중 프랑크족과 마찬가지로 정렬되지 않은 보병전법에 의지했다. 브리튼에서는 대륙과는 달리 기병을 사용하는 이렇다할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보병은 계속 대세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해군의 발달
바다에서의 전쟁은 육지에서의 전쟁보다 더욱 쇠퇴했다. 동로마의 해군은 흑해와 동지중해에서의 지배력을 유지했지만 튜턴(Teuton)의 습격자들은 시종일관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의 해군력을 약올렸으며 동방의 항해자들은 헬레스폰토스(Hellespont)의 대규모통과를 막을 수 없었다. 반달족인 게이세리쿠스는 특유의 지휘력을 통해 장거리 약탈원정을 조직하거나 아프리카 해안의 위협에 대처했다. 하지만 과연 반달을 포함한 이 시대의 해군이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나 포에니 전쟁 때의 로마와 카르타고(Carthage)의 해군과 맞설만한 힘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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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이후 글이 하나도 안올라오다니 글이 잔뜩 올라있을 것으로 기대한 저는ㅠㅠ
밀리터리 발전사 - 이슬람의 등장과 견제(600~800)
이 시대는 문명화된 세계의 거의 절반을 정복한 이슬람의 등장으로 인한 역동적인 변화가 있던 시대였다. 비잔틴은 이슬람 효과의 직접적인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견뎌내고 다시 반격을 시도한 것이 높게 평가된다. 이것은 메카로부터 수천km 떨어져 있는 프랑크(Frank)나 중국이 훨씬 나중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투에서 승리하거나(프랑크) 기세가 꺾인 것에 비하면(중국)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 최고의 장군을 고른다면 비잔틴 황제 헤라클레이오스(Heraclius)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외 유능하고 일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장군들은 중국의 당태종과 고선지, 티베트의 송챈감포와 가르친링, 인도의 하르샤(Harsha)와 풀라케신2세(Pulakesin II), 이슬람의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Khalid ibn al-Walid)와 하룬 알-라쉬드(Harun al-Rashid), 비잔틴의 레온3세(Leo III)와 콘스탄티노스5세(Constantine V) 그리고 프랑크의 샤를마뉴(Charlemagne) 등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비효과를 상당히 신뢰하기 때문에 역사에서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냐느니 가장 중요한 사건이 뭐니 하는 것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샤를마뉴는 역사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제로였던 시절 서구세계의 기초를 쌓았다고 할 수 있으며 로마의 멸망 이후 혼란에 빠져있던 서유럽에 어느정도는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다. 비록 그가 생전에 쌓아온 것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지만 서유럽은 그가 쌓아올린 기초에서 출발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전쟁에서의 이슬람의 영향
이슬람이 급격하게 팽창할 수 있었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카리스마적인 마호메트(Mohammed)의 영도와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죽은 자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교의가 제일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 어떤 종교도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을 단시일내에 끌여들여 죽음의 공포와 위협을 무릅쓰고 싸울 수 있는 전사로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팽창과 그에 따른 군사적인 성공은 기술보다는 열정, 즉 우수한 군사체계보다는 종교적인 신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신병모집보다는 선교를 통한 모집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슬람이 당시 서남아시아에서 주요 종교, 정치, 군사세력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 서남아시아가 처했던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양국 모두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종교적 불만이 팽배해 있었으며 지방들은 반란이나 외부로의 침략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만약 이러한 요소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슬람이 그렇듯 빨리 광대한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초기의 급격한 팽창 후 이슬람은 아무리 종교적 열정으로 철저히 무장했다고 해도 거의 비무장이고 칼과 창을 휘두르는 경기병들의 돌격작전 만으로는 중국과 비잔틴의 숙달된 궁병들과 프랑크의 단단한 밀집대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의 모든 군사체제들을 실용적으로 비교해본 그들은 특히 비잔틴의 군사관제를 많이 도입했다. 그들은 비잔틴처럼 잘 훈련받거나 조직되진 않았다. 또한 상비군을 이용하기보다는 부족들에게서 지원받아 병력을 충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종교에 대한 열정과 비잔틴으로부터 도입한 전략전술은 이슬람을 이 시대 말까지도 가장 강력한 침략군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각 왕조들과 종파들간의 대립은 이슬람의 에너지를 내부로 쏟게 만들었다. 8세기 말이 되면 이슬람의 세력은 대체적으로 안정되었지만 안달루시아(Andalusia)와 아나톨리아의 산악지대와 아시아의 산과 사막 등 크게 세개의 전선에서는 국지전이 계속 되었다.
무기
이 시대 유일의 새로운 주요무기라고 한다면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일차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공성전에서 처음 등장한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 있다. 현재 이 그리스의 불의 제작방식이나 재료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화염방사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 무기는 아마 젖으면 화염을 발생시키는 유황, 석뇌유, 생석회 등을 섞어서 만들었을 것이다.
이 인화혼합물질은 놋쇠로 보강한 나무관, 혹은 사이펀(siphon)에 담겨졌다. 물은 고압으로 호스에서 끌어올려져 사이펀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물의 압력에 따라 화염의 세기나 사정거리가 정해졌으므로 거리를 잘 조절해야했다. 이 무기가 목재로 만들어진 배와 적병의 살을 태우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된다. 그리스의 불은 이슬람의 도전으로부터 비잔틴이 해상패권을 유지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수도의 성벽을 적으로부터 지키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기존 무기의 변화, 특히 창기병의 창(lance)의 발달은 제일 중요했다. 이 무기는 서유럽에서의 주요무기였고 비잔틴의 카타프락토스(cataphract)에게는 두번째로 중요한 무기였다.
전세계적으로 본다면 활은 가장 주된 무기였다. 활의 범적인 사용은 비잔틴과 같은 고도로 발달된 군대에게 비록 로마인들에 의해 유용하게 쓰였지만 공, 수성외에 야전에서 무겁고 불편한 catapult와 ballista를 버리게 만들었다. 활의 효과와 유용성은 이슬람으로 하여금 이 시대 말기 광범위하게 활을 도입한 것에서도 알 수 있고 샤를마뉴는 서유럽에 활을 소개하려고 했지만 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병법
가장 중요한 병법적인 발달은 샤를마뉴와 비잔틴의 군사체제와 연결되어 설명된다.
대체적으로 중요한 병법은 전세계적인 기병전술이었다. 투척무기전술 역시 상당히 보편적인 전술이었는데 어떤 때는 전투의 결과가 투척무기에 의해 결정되고 기병은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사용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두개의 예외도 있었는데 이슬람과 서유럽이 그러했다.
비잔틴만이 이 시대 보병과 기병의 합동운용을 수월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운용력은 상당한 단련과 훈련, 통솔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비잔틴 외에 이러한 운용력은 상당히 희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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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티베트어는 된소리가 많기때문에 송챈감포의 원래발음은 송짼감뽀에 가깝지만 아무래도 송챈감포가 더 뽀대나기에ㅡㅡ;;;
밀리터리 발전사 - 비잔틴(600~1071)
이론적 기초
주목할만한 비잔틴의 긴 수명은 그 저변에 오만(Oman)이 지적하듯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병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병제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로마시절부터 전해내려오는 우수한 훈련과 편제, 장비, 병법 그리고 병사들간의 단결심이었다. 비잔틴의 우수함은 분석의 중요성에서 기초한다. 비잔틴인들은 자기자신들과 적, 지형적인 분석 등을 통해 우수함을 유지했다.
분석의 결과는 많은 군사논문들에서 나타나는데 그중의 셋은 주목할만하다. 하나는 마우리키우스(Maurice)가 아직 황제가 되기전 580년대에 쓴 스트라테기콘(Strategikon)이고 또하나는 현군 레온(Leo the Wise)이 900년대에 쓴 탁티카(Tactica)였다. 다른 하나는 작은 책자로 980년 경 니케포로스 포카스(Nicephorus Phocas)가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마 그의 참모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개의 문서들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이후 수백년 동안 많은 분석과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병제의 근본이 조금밖에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쓸 비잔틴의 편제와 병법 등은 헤라클레이오스(Heraclius)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체제로 이슬람과 대결하는 동안에 나타난 것들이다. 이 기간 동안 체제가 성공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잔틴도 몇번의 비극적이라고 할만한 패배를 경험했지만 탄탄한 기초와 사려깊은 지도력으로 그리 불리한 수세에는 놓이지 않았다. 7세기에서 11세기 중반까지 제국은 우수한 지도자들로 인해 전성기를 누렸고 이때 쌓아올려진 기초는 제국의 멸망을 연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기간 동안 스트라테기콘은 기초적인 군사교과서가 되었다. 스트라테기콘은 전술과 지도력에 대해 포괄적으로 알기 쉽게 써놓은 책으로 현대군의 야전규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훈련, 전술작전, 행정, 병참 그리고 적들의 특성에 맞는 대처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편제
비잔틴군 보병과 기병의 기초적인 행정적, 전략적 군단위는오늘날의 대대라고 할 수 있는 300~400명으로 이루어진 누메로스(numerus) 혹은 반다(banda)였다. 이 누메로스는 처음에는 대대장(tribune)이나 백작에게 지휘되었지만 나중에는 오늘날의 대령과 비슷한 드룬가리오스(drungarios)에게 지휘되었다. 다섯개에서 여덞개의 누메로스가 모이면 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투르마(Turma)가 되었는데 투르마는 Turmarch 혹은 공작의 휘하에 있었다. 두세개의 투르마는 또한 군단에 비견되는 테마(thema)를 이뤘으며 이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가 지휘했다. 비잔틴군이 늘 이렇듯 정형화된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단위들의 위치나 크기가 수시로 바뀌기도 했는데 이는 적에게 비잔틴군의 전력이 얼마인지 예측하는데 혼란을 주기도 하였다.
드룬가리오스 이상의 직책은 황제에 의해 직접 임명되며 이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서약했다. 이들을 중앙정부에 이런 식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것은 로마의 전통에 따라 마우리키우스에 의해 소개되었다.
마우리키우스에 의해 크게 소개되고 윤곽이 잡힌 비잔틴의 야전편제는 헤라클레이오스의 치세 후반기와 그의 후계자들인 콘스탄스2세(Constans II)와 콘스탄티노스4세(Constantine IV)의 치하에서 지형적, 지역적인 군사지구를 설치함으로서 완성되었다.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은 과거의 낡은 지방편제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바꿔버리도록 일조하였다. 아나톨리아(Anatolia)가 재점령되자 중앙군만으로는 방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비잔틴은 지방에 사령관들을 파견하여 현지주민들을 훈련시켜 지방에 대한 방어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민병대 제도는 사라센의 위협이 계속되자 아예 황제에 의해 영구화되었고 민병대는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각각의 군사지구는 테메(theme)라고 불리며 스트라테고스의 지배하에 있었고 각 테메에는 하나의 테마가 있었으며 그 하위에는 turmarch나 드룬가리오스의 행정력이 행사되는 하위행정군사지구가 있었다. 타우로스(Taurus) 지역을 비롯한 외침의 위협이 큰 지역들에는 더 작은 지구인 클리수라스(clissuras)가 설치되었으며 clissurarch의 지휘를 받았고 또한 항상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7세기 말 비잔틴에는 13개의 테메가 설치되었으며 7개는 아나톨리아에, 3개는 발칸에 그리고 나머지는 지중해와 에게해 지방의 섬들과 해안가에 설치되었다. 10세기가 되면 테메의 수는 30여개로 늘어나게 되자만 군대의 숫자는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대신 각 테메에 더 적은 병력이 상주하게 되었다. 이 삼백년 동안 제국의 상비군은 대략 12~15만명이었으며 기병과 보병이 절반씩의 비율을 차지했다.
전선에 가까이 있는 테메에는 내륙의 테메보다 더 많은 상비병력이 상주했다. 평균적으로 각 스트라테고스는 야전에서 둘에서 네 투르마까지의 중장기병과 같은 숫자의 보병들을 일시적으로 통보하여 거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방위를 위해 모두 데려가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정도의 보병은 수비병으로 남겨뒀는데 가끔씩은 기병만을 데려가고 보병전원을 수비병으로 남겨두기도 하였다.
인력과 신병보충
보편적으로 상비군의 신병보충은 각 테메내에서 장래성있어 보이는 현지주민들 중에서 선택하여 입대시켰다. 이러한 테마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야만인들의 부대는 계속해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야만인들에 대한 군대의 의존은 줄어들었다. 제국은 병력의 대부분을 자체에서 조달했으며 그중에서 특히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Cappadocia), 이사우리아(Isauria), 트라키아(Thrace) 출신의 병사들이 우수했다. 그리스인들은 군사로는 별로 적합치 않다고 여겨졌다.
테메제도는 민병대적인 요소가 포함된 자가지역방어군이었다. 이 제도는 주민들이 거칠고 호전적인 지역에서는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었으나 그리스와 같은 곳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 적들이 처들어왔을 때 현지주민들의 게릴라전법은 적들을 괴롭힘과 동시에 정규군이 적들을 물리치기 쉽게 보조해주는 역할로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뒀다.
비잔틴의 전략적 개념
제국 대부분의 역사를 보면 제국은 그리 공격적인 성향이 없었고 시민들이 영토의 상실에 적응하는 것도 빨랐다. 삶의 기준은 높았으며 당시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번성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해외정복은 인명과 재정을 너무 많이 소비하는 과정이었으며 결과 역시 행정과 방어에 많은 경비를 지출케 할 뿐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부는 주변의 탐욕스러운 야만인들을 끌어당긴다는 것도 비잔틴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비잔틴의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군사정책은 이해가 된다. 이 정책의 목표는 영토와 자원이 보존이었다. 비잔틴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중세적인 전쟁억지력, 즉 왠만하면 전쟁은 되도록 피하고 싸우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가능하면 적은 경비와 인력으로 적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적이 처들어오면 비잔틴은 탄력적인 방어-공격을 하며 침략자들을 방어선(주로 산맥이나 강) 바깥으로 밀어내고 그다음 둘 이상의 테마를 보내 적을 섬멸하는 방법을 썼다.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인 술책으로 전쟁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적들을 서로 이간시켜 교묘하게 대립을 조장하기도 하거나 동맹을 늘려 적을 견제하는 것 등이 그러했다. 동맹들이 보내주는 원조금이나 국경분쟁지역의 반독립적인 야만인족장들도 군대의 짐을 덜어주는 존재였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제국의 움직임은 상인이나 높은 수당을 받고 주변국들에 파견된 정보원들로 이루어진 정보망에 의해 용이하게 돌아갔다.
황제들에게 종교는 최후의 카드가 아니었다. 이교도(heathen)들에게 기독교가 포교되면서 그들은 선교사들이 개종한 지배자의 궁정에 민감하고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기독교지도자들의 연합은 당연하게도 이교도(pagan)들과 이슬람이 힘을 합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기병: 무기, 장비, 군복 등
제국의 기초적인 군사력은 잘 훈련된 중장기병에 있었다. 카타프락토스(cataphract)는 그 옛날 군단병(legionary)들의 로마의 영광을 대표했듯이 비잔틴의 힘을 대표하는 병종이었다.
개개의 기병들은 말갈기모양의 술이 달린 면갑이 없는 원뿔형의 투구와 목에서 넙적다리까지 감싸주는 사슬갑옷을 착용했다. 발에는 쇠신을 신었는데 보통 정강이를 보호해주는 보호구(가죽이나 정강이받이)와 이어져 있었다. 손과 손목은 건틀릿(gauntlet)으로 보호했다. 또한 작은 원형방패를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시켰는데 이것은 말의 고삐를 다루거나 무기를 사용할때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고 무기를 들지않은 좌측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사슬갑옷 위에는 가벼운 무명겉옷(surcoat)를 걸쳤으며 각 부대마다 이 겉옷은 색깔이 달랐는데 이는 투구의 술과 방패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날씨를 대비한 두껍고 무거운 망토(야영용 담요로도 쓰였음)도 있었는데 이것은 안장에 가죽끈으로 묵여있다가 필요할때 풀어서 썼다.주로 앞열에 배치되는 말들은 머리와 목, 가슴을 갑옷으로 가렸다.
카타프락토스가 가지고 다니는 무기들은 활과 활살통, 마상용 장창, 날이 넓은 검(broadsword), 단검, 가끔씩 도끼를 가지고 다닐 때도 있었다. 중장기병의 역할은 창기병만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활과 창을 모두 가지고 다녔다. 이들이 궁기병으로 활동할 때 창은 아마 훗날의 기병총(carbine)처럼 등자나 안장에 실었을 것이다. 반대로 창이나 검, 도끼를 쓸때는 활은 안장에 매달았다. 창에는 창기가 붙어 있어서 투구술, 망토, 겉옷, 방패와 마찬가지로 부대를 구분할 때 쓰였다.
말과 병사는 우수하게 훈련되었으며 연병장이나 전장에서의 복잡한 기동도 충분히 소화해냈다. 이들이 특히 중점으로 뒀던 것은 궁술이었지만 다른 무기들도 꾸준히 연습의 대상이 되었다.
보병: 무기, 장비, 군복 등
보병은 거의 같은 숫자의 중장과 경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다녔던 둥근 방패 때문에 스쿠타토스(scutatus)라 불렸던 중장보병들은 카타프락토스와 비슷한 무장을 하였다. 그들은 투구와 사슬갑옷, 건틀릿, 무명겉옷, 정강이받이, 혹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착용했다. 무기로는 장창과 방패, 검, 가끔씩 도끼도 가지고 다닌다. 카타프락토스와 비슷하게도 겉옷과 투구술, 방패의 색에 의해 부대가 구분되어졌다.
대부분의 경장보병들은 궁병이었지만 투창병들도 있었다. 최대의 기동성을 내기위해 갑옷이나 다른 무기들은 최소한으로 가지고 다녔지만 개인마다 여유들이 있다면 추가로 휴대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은 가죽재킷을 입었고 투구를 쓸때도 있었으며 활, 화살통, 투창 등에 추가적으로 짧은 검을 가지고 다녔다.
전술
기병으로만 이뤄지는 군대는 비잔틴에게 별로 색다른 것이 아니었지만 두 병종들이 비슷한 비율로 전투를 치뤄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보병 내에서도 경장과 중장은 같은 숫자로 나뉘었다.
비잔틴의 전술은 공세나 방어-공세, 행동, 적을 향한 몇번의 타격 등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 비잔틴의 전술적 진형은 다섯개의 주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중앙 프론트라인, 둘째로는 중앙 세컨드라인, 세번째는 예비대 겸 후방경호대(주로 크게 두개로 나뉘어 측면후방에 섰다), 네번째는 측면경호대, 다섯번째로는 선발대 및 다목적 부대가 그들이다. 기병과 보병이 같은 비율로 이루어져 있는 합동부대에서는 첫번째와 두번째가 스쿠타토스가 가운데 있고 경장보병이 측면에 서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셋은 항상 기병이었다. 만약 보병의 비율이 더 작다면 보병들은 중앙 세컨드라인에만 서거나 아니면 예비대 겸 후방경호대만으로 세워졌다. 이때 비잔틴군의 진형을 그리면 다음과 같다.
ㅁ
(5) ㅁ ㅁ (5)
ㅁ ㅁ
ㅁ ㅁ
ㅁ (1)||| ||||||||||||| |||(1) ㅁ
(4)|||| scutati ||||(4)
(5) (2)||| ||||||||||||| |||(2) (5)
ㅁ ||||| ||||| ㅁ
(3) (3)
(1)중앙 프론트라인
(2)중앙 세컨드라인
(3)예비대 겸 후방엄호대
(4)측면엄호대
(5)선발대 및 다목적 부대
만약 적들의 주력이 기병이고 비잔틴군은 보병이 주력인 상황이라면 프론트라인의 보병들은 적이 공격해올 때까지 기다린다. 측면과 후방이 기병에 의해 보호되는 스쿠타토스는 옛날 로마의 군단병들만큼이나 기병에 효과적이었다. 적의 첫 공격은 측면에서 측면엄호대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후방에서 다목적 부대의 공격을 받으면 적은 공격하려다 되려 양쪽으로 협공당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비잔틴의 카운터펀치 전술이 실패하거나 프론트라인이 물러나야할 일이 생기면 그들은 세컨드라인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고 이에 프론트와 세컨드가 반전된다. 이런 전술은 전형적인 로마의 전술이었다. 라인이 반전되면 다른 세개의 부대들 역시 진열을 바꿔 다시 적의 도전에 직면했다. 만약 세컨드라인이 나서도 밀리고 일단 후퇴했던 프론트가 미처 진열을 갖추기전이라면 그때가 바로 예비대가 나서는 때였다. 예비대는 주로 정면공격보다는 이중포위를 특기로 했다.
위의 것은 전투를 정형적인 전면전으로 봤을 때의 경우이고 실제로는 적의 종류나 병종들의 구성에 따라 여러가지 변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잔틴군에 표준화된 전술적 원칙, 즉 엄호와 포위의 중요성, 합동운용(병종들간, 부대들간, 전술적인 행동간), 비상사태에 대비한 예비대의 유지 등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비록 기병들을 보조해주는 역할이었지만 비잔틴의 보병정책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병종간 합동운용을 하는 상황이건 보병들의 독무대나 다름없는 거친 지형에서건 궁병을 비롯한 투척무기계열 병종들의 지원을 받는 스쿠타토스는 기선을 제압하고 우세를 유지시키는데 익숙해했다. 스쿠타토스의 진형은 16열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각각의 누메로스들은 진열을 산개시키거나 밀집하는 등 고대 로마의 코호르트(cohort)들처럼 전술적, 전략적 개별기동을 할 수 있었다. 공격할 때 적에게 돌진하다가 접전 직전 창을 던지는 것도 레기온(legion)의 코호르트와 비슷했다. 그러므로 스쿠타토스의 누메로스는 옛 레기온과 팔랑크스(phalanx)의 특성을 물려받은 것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보병들처럼 우세한 사기를 가지진 않았다.
기병의 누메로스는 주로 8에서 10열을 이루었다. 이런 진열은 최적진열보다 더 만들기 성가신 진열이었지만 이러한 깊은 진열은 유연성을 좀 떨어뜨리는 대신 병사 개개인이 더욱 안심하여 싸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적특성에 대한 적응
비잔틴의 군사이론가들은 많은 시간을 적들을 분석하여 각 적들의 특성에 맞는 진형을 연구했다. 아러한 분석과 연구들은 비잔틴의 우세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전쟁은 적들이 어느때고 준비가 덜 되었을때 때를 가리지 않고 벌여야한다고 제안했다. 예를 들면 훈(Hun)족과 스키타이(scythia)족은 말이 먹이부족으로 쇠약해지는 이월과 삼월이 가장 취약한 시간이었다. 조금 이른 한겨울에는 초지의 슬라브족을 정벌하기가 쉬운 때였는데 물이 얼어붙어 도하 등에 별 문제가 없었고 적들이 강을 넘어 도망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었으며 갈대숲에 몸을 숨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가을, 겨울, 봄에는 산악부족들과 결전을 벌이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었는데 눈이 그들의 흔적을 남겨주며 나뭇잎들이 떨어져 그들의 은신처를 발견하기 쉽기 때문이다. 춥거나 비가 오는 날씨에는 페르시아와 아랍을 상대하기 좋은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익숙치 않은 그들은 효율가 사기가 떨어졌다.
주적이 유럽의 프랑크(Frank)와 교활한 아랍인이었던 현군 레온 때 황제는 비슷한 조언을 한적이 있다. 그중 프랑크에 대해 레온은 이렇게 말했다. 원문은 탁티카에 있지만 그 책은 번역된 것이 없으므로 밑의 번역은 오만이 탁티카에서 부분적으로 번역해놓은 것이다.
"프랑크(와 롬바르드)는 용감하고 선두로 나서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면으로 당당하게 공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며 싸움을 걸어올 때는 언제든지 응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프랑크 기사들이 검과 창, 방패를 들고 돌격해오는 것인데 이런 때는 공격할 기회가 올 때까지 회전을 회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들은 훈련을 받지 못했고 규율도 없으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이 전부이기 때문에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후방이나 측면을 공격당하면 혼란에 빠져든다. 그들은 정찰이나 보초 등을 두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에 쉽게 이런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그들은 야영을 할때 아무렇게나 진지를 만듦으로 야습에 취약하다. 거짓으로 도망쳐 예외없이 조급히 추격해오는 그들을 매복으로 덫에 걸리게 만드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것은 또 없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전술은 전투를 오래 끄는 것이다. 그들을 언덕이나 고립된 지역으로 끌어들여 보급을 끈으면 공복과 갈증으로 그들의 사기는 금방 떨어져버리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권위가 없기 때문에(귀족들은 자신들이 각자보다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불평불만이 생기면 즉시 명령에 불복종한다. 이런 때는 족장이라도 뇌물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다. 보급에 취약한 그들은 항상 원정에 필요한 경비가 모자랐다. 그러므로 종합해서 말할 때 프랑크인들을 한번에 치는 것보다 기습이나 고립된 지역에서의 장기전이 더 쉽고 돈이 적게 든다."
레온은 아랍인들을 더 존경하고 있었다.오만이 인용한 바에 따르면 그는 사라센에 대해 "많은 야만스러운 종족 중에 그들은 가장 신중하고 제일 조심성많은 종족이다... 그들은 우리의 전략전술과 무기을 가장 많이 배워갔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아랍이 모방해간 것들중에 비잔틴에게 성공을 안겨다준 훈련과 편제는 흡수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이슬람의 숫자적인 우세와 종교적인 열정, 경험을 통한 습득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은 기술과 훈련, 편제로 그들과 상대하여 승리할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승리했다.
전시행정
비록 병사 개개인이 무기와 생활필수품, 며칠간의 식량을 가지고 다녔지만 각 군대는 보급을 할 수 있거나 공성전 등 전투에 필요한 장비, 작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보급품과 짐마차와 항상 함께 했다. 짐을 나를 때는 마차를 사용하거나 당나귀같은 말을 사용했다. 이 짐들은 비전투원인 하인들이나 취사담당원들이 담당했다. 보통 여성들은 비전투 종군자들로는 부적당하다고 여겨졌다.
기초적인 장비로는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곡괭이와 삽 등이 있었는데 진지구축술(castrametation)은 초기 로마인들의 전통이었던 것을 비잔틴인들도 충실히 지켜나가고 있었다. 야영지가 정해지면 공병들이 나서 천막 등의 배치도를 만든다. 그런 다음 일정한 숫자의 병사들이 경비를 서는 동안 나머지의 병사들이 짐마차나 당나귀 등으로부터 삽과 곡괭이를 가져와 해자와 목책 등을 세우는 등 예전 로마의 방식대로 진지를 건설했다.
각 누메로스에는 의료팀이 하나씩 배속되어 있었는데 보통 한명의 의사와 군의, 8~10명까지의 들것운반자 겸 의료대원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각 대원들에게는 한명을 구할 때마다 상당한 성과급이 지불되었다.
고도로 발달한 신호작업도 존재했다. 비잔틴은 각지의 왕복거리 등을 생각하여 봉화제도를 발달시켰는데 이는 전선에서의 움직임이나 전쟁 중의 적의 움직임을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됨으로서 적에 대해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군대에는 항상 군목이 함께 따라다녔다.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사제와 수도사들은 그들에게 마련된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다만 서유럽과의 차이는 자칫 사나워질 수 있는 군대의 성질을 누그러뜨리는 일이었는데 정교회는 성경구절의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병사들에게 무분별한 학살을 피하게 만든 반면 로마교회는 그 방면에서는 비교적 자유(?)를 만끽했다.
참모와 명령체계
장교의 훈련은 젊을 때 사관후보생도로 등록되면서 시작된다. 평시 생도들의 훈련내용은 사관학교에서 배우는 군인들의 기본적인 임무, 무기와 승마 숙달, 과거와 현재의 군사전문가들에 대한 논고, 이론적 지식의 실습 등 오늘날의 사관후보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시에 생도들은 다양한 스트라테고스 밑에서 서기나 사환 등으로 활동하며 참모장교들을 도와 간단한 명령서나 계획안 등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젊은 장교들의 전선배치나 전장체험 등의 실습은 그들에게 경험을 주고 또한 그들을 관찰함으로서 우수한 인재를 찾아낼 수 있게 만드는 제도였다. 가장 유망해 보이는 turmarch는 clissurarch로서 독립된 지휘권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만약 성공하면 스트라테고스로의 승진은 보장받은 셈이었다. 이러한 철저한 장교와 참모들의 단련과 우수한 인재의 발굴은 분석에 대한 일가견이 있는 비잔틴인들의 안목과 함께 우수한 지휘관과 참모들이 비잔틴의 성공을 이뤄준다고 믿는 비잔틴에 의해 꾸준히 이뤄졌다.
스트라테고스들은 각 테메들을 돌아가면서 맡았다. 이런 조치는 강력한 지방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또한 전략전술의 다양화를 위한 방편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고참 스트라테고스의 경우 중요한 전선이나 그 가까운 곳의 테마에 배치되었는데 주로 아나톨리아에 있는 테마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황재가 부재 중일 때는 거의 독립적인 재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해군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인들은 바다의 해상권을 쥐게 되었고 로마의 우수한 해군력은 고트와 반달해적들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비잔틴에게로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7세기 후반 이슬람의 해군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의식한 비잔틴은 곧바로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레온3세가 이끌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농성전에서 보여지듯 8세기 초 제국의 해상권은 다시 확립되었으며 그뒤 많은 위협과 혼란이 있었지만 다음 4세기까지 해상권은 대체적으로 유지되었다.
비잔틴 해군의 본거지는 아나톨리아 남부해안에 있는 로마공화국 시절에 해적들의 본거지로도 유명했던 Cibyrrhaeots 테메였다.배와 선원들은 주로 에게지방의 섬들이나 아나톨리아의 해상지역에서 공급되었다. Cibyrrhaeots는 비잔틴에 육군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 테메였지만 거의 백여척의 배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이만명의 선원들을 보유하는 등 인력으로만 치면 비잔틴 해군전력의 반을 차지한 테메였다.
해군은 작고 가벼우며 빠른 속도의 각각 두개의 돗대와 삼각돛을 가진 이단갤리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는 한쪽에 30~40개 정도였다. 배에는 비상시 백병전을 치룰 수 있도록 훈련받은 노꾼들 외에 소수의 해병들도 타고 있었는데 이들을 합치면 한척에 200~300명이 탑승한 샘이다. 대형전함에는 회전하는 탑과 전쟁기구들을 탑재했다. 하지만 진짜로 적에게 치명적인 무기는 다름아닌 67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화염방사기의 원조 그리스의 불이었다.
전쟁에서의 비잔틴의 명예
비잔틴인들은 교활함과 기만전술은 전쟁 중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유럽의 기사도적인 관점으로 보면(그런게 정말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경멸할만한 일이지만 최소의 피해와 경비지출,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쟁은 피하자는 것이 비잔틴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증회와 속임수도 능력의 하나라고 믿었으며 전쟁에 이런 것을 써서 승리를 하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심리전에 능숙했으며 적들을 서로 분열시키거나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잘못된 선전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현대전의 빛안에서 비잔틴을 보고 무조건 비판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보기 힘들었던 근현대적인 체계를 갖춘 국가였으며 생존을 최우선으로 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이 무조건 야비하고 속임수만 잘 썼던 것은 아니었고 협약 등은 잘 지켰으며 사자나 협상가들은 해치지 않았다. 전쟁 중 잡힌 비전투원들을 학대하는 일도 없었다.용감하게 싸우다 패배한 적들은 관용과 존경을 받았다.
밀리터리 발전사 -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750~1258)는 비잔틴의 병제를 상당부분 도입했지만 비잔틴만큼의 대규모 상비군이나 훈련, 편제 등을 갖추지는 못했다. 칼리프의 호위대(Haras)가 엄밀히 말해 유일한 상비군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호위대는 정부에게 봉급을 받고 칼리프에게 지휘되는 모든 군대를 뜻한다. 이들 정규군(jund)은 다른 말로 "일정하게 봉급을 받는다"는 뜻의 murtaziqah라고 불렸는데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장기병(fursan), 중장보병(harbiyah), 궁병(ramiyah)이 그들이다. 궁병 중에는 척탄병(naffatun)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불이 잘 붙지않는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나프타(naphtha)에 불을 붙여 적에게 발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칼리프의 군대에 항상 동반하는 공병중대와 엘리트 공병단(manjanikin)도 있었다. 공병 장교들은 모든 도시와 요새에 많은 수가 머물러 있었다.
진짜 호위대인 Jandar는 주로 투르크(주로 Khwarism인들)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사천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권력은 로마의 근위대(Praetorian Guard)와 닮았으며 11세기 초가 되면 압바스 칼리프는 이들 투르크 장군들의 꼭두각시가 된다. 또다른 근위대(household troops)로는 지방의 대지주들이나 궁정의 유력자들로 이뤄진 al-Manuat가 있다. 이들은 어릴때 근위대에 편입되었으며 궁정에서 교육을 받고 군사훈련에 나갔다. 이들 예비역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야전에서 칼리프를 ADC같이 섬겼다.
Jandar와 al-Manuat같은 군대의 핵심 외에는 용병들과 족장이 이끄는 지원부족들, 지방에서 징집한 병사 등이 있다. 지원자(mutatawwiah)들은 칼리프와 이슬람에 대한 신성한 의무 때문에 지원했는데 이들은 전장에서만 식량을 배급받았지만 그들의 가족은 그들이 없는 동안 식량과 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용병들은 주로 외국인들로 이슬람을 받아들여 여러 부족 중 한곳으로 받아들여져 순혈아랍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거나 중요인사들을 섬겨 피보호자의 지위(clientage; wala)를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주로 바랑(Varangian), 프랑크(Frank), 페르시아, 그리스, 아프리카, 베르베르(BerBer)인들로 탐험을 하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케이스였고 그중에는 오직 칼리프가 주는 봉급만을 노린 부류도 있었다.군대에서 이들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지원자들이 주축이던 체제는 깨지고 지원자들과 함께 이슬람의 정신을 대표하던 부대 내 단결심(esprit de corps) 역시 서서히 사라졌다.
비잔틴과의 국경지대는 강력한 수비대의 경비를 받았으며 이들은 봉급, 식량, 수당 그리고 자주 토지를 하사받아 가족들과 함께 경작하였다. 비잔틴을 통한 로마체제의 도입은 여기에서 나타나는데 어떤 때는 전 부족을 이주시켜 국경지대에서의 이슬람 인구를 늘리기도 하였다.
다른 종류의 군대로는 도시의 경찰인 슈르타(shurta)가 있었다. 이들은 모든 도시에 존재했으며 성벽과 성문을 밤낮으로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이들은 또한 대중과 그들의 재산을 지키는 의무도 있었으며 밤에는 도시를 순찰하였다. 슈르타는 Sahib ush-Shurta의 지휘를 받았으며 도시의 구역마다 조가 나뉘어 있었고 각 구역에서는 구역대장이 지휘했다. 슈르타는 군대로 구분되었으며 바그다드와 같은 대도시 내의 Sahib ush-Shurta의 부서는 지사의 직과 거의 동등한 권위를 누렸다.
10세기 후반 야전군은 네개의 주요군단으로 나뉘었는데 북아라비아, 남아라비아, 주로 콰리즘인이었던 페르시아 그리고 투르크와 아프리카(Nubia)인들이 그들이다. 각 군단에는 주로 북페르시아나 콰리즘인이었던 궁기병이 붙어다녔다. 참고로 콰리즘인으로 알려진 기병들은 반드시 코라산(Khorassan) 출신인 것만은 아니었고 코라산은 오히려 이웃인 킵차크(kipchak) 투르크인들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루었다. 한 군단은 만명이었으며 수장(emir)에 의해 지휘받았다. 그 밑으로 천명의 연대는 kaid, 백명의 대대 혹은 중대는 nikib, 오십명으로 이뤄진 그 하위그룹은 칼리파(khalifah), 그 밑의 열명은 aarif가 지휘했다.종종 몇개의 중대가 보병대(cohort; kurdus)를 이루기도 하였다.
행군 중에 군대는 다섯개의 분대로 나뉘었다. 중앙(kalb, 총사령관이 이곳에 있음), 좌익(maimaneh), 우익(maisareh), 전위(talieh), 후위(sakeh) 등이다. 전위부대는 항상 본대에서 수km 떨어져 먼저 출발했는데 이들의 임무는 정찰만이 아니라 본대가 지나갈 길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본대가 쉴 곳에 미리 도착하여 참호를 구축하는 임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본대는 천막을 일정한 선과 구역을 정해 세웠고 참호 안에서 각 분대들은 행군 때와 마찬가지의 진지를 쳤다.
식량, 천막, 군수품, 공성기구 등은 대개 낙타로 운반했지만 노새나 말도 동원되었으며 이런 방식은 십자군 전쟁 때 아랍군이 낙타를 사용할 수 없는 십자군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장거리 행군일 경우 보병들은 말이나 낙타를 제공받았으며 충분한 말과 낙타가 없을 경우 기병들이 자신들의 뒤에 한명씩 태웠다.
군대에 의료부대가 빠질 수는 없었다. 의약품과 도구들을 낙타와 노새에 싣고 다니는 이들은 이슬람의 발달된 의술로 서양보다 더 효율적으로 환자를 치료했으며 낙타로 이뤄진 "앰뷸런스"도 갖추고 있었다. 병기고나 조병창은 중요한 기지마다 위치해 있었으며 자주 관리들에게 감사를 받았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라센의 군사력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제국은 더이상 변경을 지키는데 필요한 대규모 군대에게 봉급을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소개된 것이 이크타(Iqta) 제도였다. 원래 이 제도는 이슬람 초기부터 제국과 종교에 봉헌한 자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일종의 "식읍"으로 주었던 것이었지만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짐에 따라 개인에게 토지를 배분하고 지방의 행정권과 지배권을 이양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지역마다 부의 정도가 틀렸기 때문에 곧 이 제도는 힘의 불균형을 초래했으며 부유한 지방들은 경제력과 그것으로 쌓아올린 군사력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군대는 이 당시 지방의 지배자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칼리프보다 더 자신들의 봉급을 지불하는 주인을 섬겼다.
1071년이 되자 페르시아는 셀주크(Seljuk)에게 넘어갔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칼리프를 자신들의 지배자로 인정하면서도 그 이상의 충성심은 없었던 소왕조들로 나뉘었으며 이들은 자주 자기들끼리 분쟁을 벌였기 때문에 제국의 힘은 더욱 약해졌다. 오직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만이 통합을 유지하면서 셀주크와 맞섰다.
밀리터리 발전사 - 샤를마뉴(Charlemagne)
샤를마뉴의 군사체제는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의 편제와 비교하면 조잡했다. 하지만 4세기 동안의 서유럽의 군사적인 혼란과 비교하면 비록 그의 죽음 후 다시 되돌아가기는 했지만 혁명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중세 봉건제도와 기사도가 발달하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일이다.
샤를마뉴 이전 프랑크(Frank)족의 군사적인 특징은 잘 훈련받지 않은 병사 개개인의 용기에 달려있었다.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나 피핀(Pepin)같은 유능한 전사들의 휘하에서도 프랑크군은 정렬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정복은 일시적이었다. 그들의 자손인 샤를마뉴 대에 이르러 프랑크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프랑크인들의 용기와 열정을 훈련과 효과적인 편제를 통해 효율적으로 이용한 샤를마뉴의 유능함과 영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를마뉴의 군사체제 중 눈여겨 봐둘 것은 롬바르드(Lombard) 중장기병에 대한 적응이었다. 그는 롬바르드와의 두번의 전쟁에서 별 문제를 겪지는 않았지만 프랑크 기병보다 우수한 롬바르드 기병의 힘을 알아차렸다. 프랑크 기병을 우수하게 육성함과 동시에 그는 롬바르드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아바르(Avar)족을 물리치는데 이용하였다. 샤를마뉴의 재편과 훈련 전 롬바르드족은 북이탈리아를 노리는 아바르족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모든 성공적인 병제가 그렇듯 훈련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튜턴(Teuton)족이 무너뜨린 로마의 레기온(legion)에서처럼 기병과 보병은 보다 고위군관의 명령에 지휘되게 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정복한 광대한 영토에서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고 질낮은 병사들을 무한정 고용하여 방어력을 떨어뜨릴 수 있을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지방마다 확립한 질서와 안정을 무너뜨릴 염려가 있는 상비군제도를 도입하는 대신 가신들에게 임무를 부과하여 군주의 명령에 따라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는 형태로 군대를 동원했다.
샤를마뉴의 전임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만큼 야전군을 동원할 수 없었던 원인은 병참편제의 부족 때문이었다. 프랑크군은 군사행동을 할때 현지조달과 약탈로 물자를 얻었다. 적지라면 모르지만 적지가 아닌 경우 이런 행동은 현지인들의 반감을 샀고 이것은 내부불안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또한 적지라도 약탈을 하느라 병력이 분산되기가 쉽기 때문에 적에게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었다. 병참이 이렇듯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야전기간은 거의 항상 수주에 불과했다. 샤를마뉴는 그의 군대가 몇주간 쓸 수 있는 식량과 장비를 나르는 보급수송대 등을 포함하는 병참조직을 만들었다. 보급품의 보충은 체계적인 식량모집(forage)이나 추가보급품을 야전군에게 호송해주는 것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체계적인 병참을 바탕으로 샤를마뉴는 프랑스의 심장부에서 수천km 떨어진 곳으로의 원정과 공성, 심지어는 로마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에서 사라졌던 겨울철전쟁을 치뤄낼 수 있었다.
샤를마뉴는 로마와 마케도니아에서 쓰였던 공성기구들도 부활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적의 대책없는 농성전에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보급선과 공성기구로 인해 그의 군대는 행군이 다소 늦어졌지만 그만큼의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원정을 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높아가는 기병에 대한 의존과 노새를 이용한 보급품수송에 그는 결과적으로 원정을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이뤄낼 수 있었다.
샤를마뉴 병제의 키가 되는 것은 전방의 요새화된 주둔지, 성시(burg)였다. 이들은 정복된 지역의 전선마다 세워졌으며 각 전선들을 이어주는 가도들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더하자면 이렇듯 전선들끼리 이어주는 가도들과 함께 옛 전선들에 세워졌던 성시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후방가도들도 있었다. 이러한 성시들은 훈련받은 프랑크 기병들의 작전을 위한 기지가 되기도 했으며 정복된 지역의 질서를 되찾거나 또다른 정복전쟁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샤를마뉴는 활을 서유럽에 다시 소개했다. 아마 아바르와 비잔틴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활은 그의 죽음 후 사냥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유럽군대들에게 버림받았다.
병제의 효능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로는 획일화된 병법 독트린이 있다. 하위 지휘관의 교화와 훈련은 오직 고도로 효과적인 군사편제에서만 가능했다. 샤를마뉴의 체제는 샤를마뉴 개인의 유능함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의 유능함으로 인해 효율적인 참모체계도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샤를마뉴 체제의 중요한 요소들은 803년에서 813년까지 포고한 일종의 야전법칙인 다섯개의 법령에 포함되어 있다. 이 법령은 주군으로부터 요구받았을 때 군대를 준비하는 가신들의 임무, 소집된 병사들의 권리, 병사들의 편제, 무기, 갑주, 장비들은 병사 개개인이 준비할 것과 가지고 다닐 것, 군율준수에 의한 형벌 등이 규정되어 있다.
| 밀리터리 발전사 - 암흑시대(800~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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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마뉴(Charlemagne)의 등장으로 서방은 질서를 되찾나 했더니 그의 사후 서구는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리 중요한 전쟁은 얼마 없었다. 그리 뛰어나다고 할만한 장군들은 없었지만 비잔틴 황제 중에는 바실레이오스1세(Basil I), 니케포로스 포카스(Nicephorus Phocas), 요안네스 치미스케스(John Zimisces), 바실레이오스2세 등이 상당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니케포로스가 제일 뛰어나다고 생각한다(이제 슬슬 개인의 주관을 집어넣기 시작하는군ㅡㅡ+++<=원래는 주관적이 아니었나?ㅡㅡ;;;). 혼돈에 빠진 중에서도 네가지의 중요한 역사적, 군사적인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는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그리고 일본?)에서 봉건제도 시작된 일이다. 둘째는 비잔틴의 군사적인 우세이다. 마케도니아 왕조 치하에서 전성기를 맞은 제국은 병제와 튼실한 사회구조 덕분에 사방에서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도 굳건히 서있는 암초같은 단단함을 자랑했다. 세계를 강타한 이슬람의 충격을 그대로 받고서도 무너지지 않고 두세기가 지난 뒤에는 유럽과 아시아로 뻗어나간 비잔틴의 저력은 현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다(왠 간지나는 말이냣?ㅡㅡ^). 세번째는 투르크족의 이동이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이들은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이슬람 세계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투르크족의 이동과정에는 두가지 면이 있었다. 하나는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 알려진 곳에서 서쪽과 남서쪽으로 이동한 부족들이 있고 또하나는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가 투르크인들의 용맹과 전술을 높게 사 투르크 용병들과 노예들을 받아들여 군사목적으로 이용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투르크인들 중 가장 중요한 부대는 유일한 상비군이자 전문군이었던 황실근위대로 이들을 통솔하는 투르크 장군들은 처음에는 지방의 지사가 되었다가 이집트같은 곳에서 독립왕조들을 이루기 시작했다. 네번째는 현대국가들의 선조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봉건제 서유럽 봉건제의 시작은 로마의 멸망 후 혼란이 오면서 로마 치하에서의 질서와 안정이 깨지고 제도와 법률들이 무너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무역과 거래의 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재산의 척도는 식량을 얻을 수 있는 토지가 되었고 이러한 토지를 소유한 야만족장들이 휘하의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신 그들로부터 대가를 받는 것이 봉건제의 시초였다. 이러한 추세는 샤를마뉴의 등장으로 멈추는 듯 했지만 그의 군사동원정책(휘하의 귀족들이 속민들을 군대로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봉건제로 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바이킹과 마자르(Magyar)의 횡횡은 더욱 봉건제를 촉진시켰다. 왕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속민들과 가축, 무역거점들을 지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샤를마뉴의 후계자들 간의 분쟁은 습격자들을 막아내는데 힘을 모으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고 샤를마뉴같이 군사, 행정체계들을 재정립할 능력을 가진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방어와 보호의 치수는 지방적으로밖에 머물지 못했다. 이러한 추세는 성의 발달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성의 목적은 농민들을 지키고 교통과 무역의 거점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침략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대 후반기로 갈수록 혼란은 전시대에 비해 줄어들었고 샤를마뉴의 병제는 스케일이 좀 작아진체 귀족들의 휘하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기병의 대세는 계속 이어졌고 상비병력의 경우 기사와 중장기병 등 거의 기병으로 이뤄졌다. 보병의 경우 영지내 동원가능한(안그럴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군사훈련은 어느정도 받았음) 남자들을 썼지만 이들은 불충분한 장비를 갖췄고 편제또한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므로 전장에서의 보병의 임무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었다. 이러한 사회의 발달속에서 기사와 성으로 대표되며 강자가 약자를 지켜주는 대신 약자는 강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봉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독립적인 중간계층은 사라졌다. 어느정도의 재산이 있는 자유민들은 이웃에 있는 영주의 가신이 되었으며 가신이나 종자의 자격으로 기병이 되어 영주를 섬겼다. 가난한 자유민들은 상류계층(gentry)나 귀족(nobility)들의 농노가 되었다. 이들은 부름에 응할 의무가 있었지만 결집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영주의 성을 지키는데 동원되었다. 영주의 보호를 받는 농민들은 대가로 세금이나 군역을 해야했지만 바이킹이나 마자르족의 손에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는 낳았다고 생각했다. 봉건제도는 지방방어를 우선시하는 군사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대영주들은 왕으로부터 토지를 수여받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 토지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왕이 부르면 일년에 정해진 기간 동안(대체적으로 40일)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 군대를 이끌고 왕의 군대에 참가하였다. 영주의 주임무는 자신의 영지를 우선으로 지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봉건제의 군사적인 결과는 공세를 위한 국왕의 부름으로 모인 군대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돌질성이 부족했고 왕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전체를 하나로 결집시켜주는 훈련, 편제 등이 없었다. 한가지 병사들이 동질성을 느끼는 부분은 기독교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이것은 중세를 대표하는 기사도를 이루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기사도는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멋있고 품위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깊이 파고들어 가보면 원래 야만적인 풍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이킹의 침략은 브리튼의 봉건제에도 기여를 했지만 이 경우 앵글로색슨(나중에는 데인)의 상비병력은 거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을 제외하고 브리튼의 봉건제는 대륙과 거의 비슷하게 발달했지만 축성술의 경우 브리튼이 현저하게 뒤지게 되었다. 대륙의 석조성곽 대신 브리튼에서는 작은 해자와 목책벽이 전부였던 것이다. 잉글랜드의 영주들과 군사지도자들은 thegn으로 불려졌다. 바이킹과 마자르의 침략은 점점 적어지고 곧 멈췄지만 귀족들은 지방의 경비임무가 중앙의 권한에 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였다. 그러므로 중세의 서유럽사는 거의 중앙과 지방, 성벽으로 보호되는 도시들 간의 권력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슬람 이슬람에서의 봉건제의 출현은 처기에는 서유럽과는 맥을 달리하고 있었다. 초기 통합되어 있었던 이슬람은 지배력이 지나치게 넓어지고 내부에서 수많은 정치적, 종교적 분열이 일어나면서 점점 지방분권적인 형태를 띄기 시작했으며 이런 현상은 결국 다수의 독립공국들과 이단(혹은 타종파)공동체를 중앙의 권력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갈라진 이슬람세력들은 독립세력들과 중앙권력간의 경쟁과 서유럽과 비슷하게도 비잔틴, 하자르(Khazar), 투르크, 이베리아의 기독교 등의 공격과 더불어 지방 경비의 임무를 맡는 봉건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무기와 갑주 이 시대의 무기는 유럽에서 다소의 변화는 있었어도 그리 큰 혁신은 없었다. 검은 무겁고 길어졌고 찌르기보다는 베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양날도끼는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중세에 화려하고 민첩한 기술보다는 힘에 더 의존하는 기술이 선호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활을 서유럽에 소개하려는 샤를마뉴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비잔틴을 제외한 유럽에서 활은 북유럽(Norseman)인이나 투르크-스키타이(Turko-Scythia)계통의 유목민족인 불가르(Bulgar), 마자르(Magyar), 페체네그(Pecheneg)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노르만족의 경우 활은 전투에서보다는 사냥에 더 많이 쓰였다. 방어갑주의 사용은 유럽과 이슬람에서 효과적으로 널리 퍼졌다. 대표적으로 비잔틴이 있지만 그외의 지역에서도 진전은 있었다. 고대의 장식달린 투구는 사라졌으며 원뿔형의 투구로 대체되었으며 유럽에서는 투구에 코싸개를 더했는데 이것은 면갑의 시초가 되었다. 메일셔츠(mail shirt)는 갑주의 기본이 되었으며 힘이 강화되어 말을 탔을때 무릎을 보호할 수 있게 하였다. 서유럽 방어구의 혁신 중 하나는 연모양의 방패였는데 이것은 로마의 스쿠툼(scutum)과 작은 원형방패의 효과를 절충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병들에게 원형방패보다 더 휴대하기 간편한 모양이었다. 또다른 혁신은 호버크(hauberk)의 발명이었는데 이것의 목적은 투구와 메일셔츠 사이의 목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지상전술 일반 전술적인 혁신은 별로 없었다. 기병은 그 우세를 세계적으로 이어나갔다. 비잔틴은 계속 전시대의 기세를 이어나갔고 적들은 비잔틴의 전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그에 걸맞는 훈련과 편제를 갖추지 못했다. 축성술의 부활은 공성술에도 프리미엄이 붙게 만들었다. 비잔틴은 이번에도 모범이 되었지만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제외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상의 기술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서유럽의 경우 무기와 기술은 로마가 천년전에 도입했던 것들과 비교해서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바이킹의 파리공성전같이 눈여겨볼 만한 사건도 있었다. 모든 전술적인 면에서 서유럽인들은 로마를 최고의 보기로 들고 그들이 이해하는만큼 로마의 전술을 무겁고 둔중한 기병들의 충돌에 적용시켰다. 이때 서방에서 유일하게 중요하게 여겨졌던 병법서는 베게티우스(Vegetius)의 데 레 밀리타리(De Re Militari)였는데 이것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상류계층(gentry)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바이킹의 전술 바이킹들은 본질적으로 습격자들로 정복보다는 약탈과 전리품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호전적이고 전투를 즐겼지만 굳이 전투를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투를 피하려하지는 않았다. 숙련된 전사였던 이들은 서유럽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더 훈련받았으며 임시로 지정된 대장에 대한 충성이 기초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병으로 창, 검, 도끼 등으로 무장했으며 가끔씩 활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방어갑주로는 투구, 둥근 방패, 가죽재킷 등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메일셔츠도 많이 도입되었다. 처음 바이킹들은 수백명 단위의 소규모 부대로 약탈활동을 벌였지만 많은 숫자가 서로 연합하여 합동활동을 펴는 것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885~886년 파리를 공격한 바이킹들의 숫자는 대략 삼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바이킹들이 처음 서유럽인들과 싸울 때 그들이 처음 만나는 것은 숫자는 더 많지만 무장, 훈련, 지휘 등에서 빈약하기 그지없는 민병들인데 바이킹들은 방어-공세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 전술은 민병 다음으로 만나는 전문기병들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성체와 결합한 기병의 전문화가 바이킹 습격자들에게 효과적인 답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장기병들은 큰 충격을 줄 수 있고 대등하게, 혹은 숫자적으로 열세가 아니라면 우월하게 싸울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중장기병들의 전면전만으로 결판이 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빠른 전문기병들이 바이킹들의 진열과 어느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효과적으로 끈임없이 바이킹들을 괴롭혔다. 기병만이 아닌 다른 병종들과 함께 전투를 벌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저항이 계속되자 바이킹들은 두가지의 대응책을 내놓았다. 첫번째는 뭍에 닿자마자 가까이에 있는 모든 말을 빼았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 말은 오직 이동할 때만 사용되었다. 나중에 적기병들의 대응이 더욱 강력해지자 그들은 물가와 반도, 섬 등에 잘 방비되는 대규모의 영구기지들을 차려놓고 자신들의 고유의 기병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바이킹의 주력은 보병이었다. 마자르의 전술 마자르족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고대 스키타이족과 비슷했다. 그들은 경기병이 주력이었으며 경장이거나 아예 무장을 하지 않았고 무기로는 주로 활을 썼으며 특징으로는 기동력이 있었다. 그들은 서유럽의 중장기병과는 전면전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되도록이면 전면전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들의 싸움방법은 대략 파르티아군이 Carrhae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한 것과 비슷했다. 일단 유럽의 둔중한 포메이션에 닿지 않도록 거리를 둔뒤 활로 적을 괴롭히고 적이 부상, 피로 등으로 진열에 틈이 생기면 그 틈으로 파고든다(주로 배후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진열을 산산조각내 각개격파하거나 떨어져나간 병사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서유럽 기병들을 만났을 경우 그들은 적기병들의 집중공격을 피해 재빨리 기동하거나 방향을 전환하였다. 하지만 적들보다 빠른 기동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성체가 발달하고 중장기병들의 대응도 점점 효과적으로 변해가자 곧 그들의 유목민족으로서의 전술은 여러 사회적 여건과 맞물려 점점 사라지고 유럽식 전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해전 해전에서는 그리 중요한 진전이 없었다. 제대로된 효과적인 함대를 보유한 국가도 비잔틴뿐이었고 이것도 전시대보다 더 쇠퇴한 것이었다. 이시대 눈여겨볼만한 해상세력이라면 해적들인 서유럽의 바이킹, 지중해의 이슬람 해적(corsair, 디스럽션 웹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ㅡㅡ;;;), 흑해의 바랑인(Varangian, Rus)들이 있다. 해적들은 바다에서의 전투보다는 배를 약탈하고 육지에서 싸웠기 때문에 해전은 되도록 마지막으로 돌려놓았다. 10세기에 이르면 다시 회복한 비잔틴의 해군이 해적들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지중해에서는 몇가지의 화려한 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바이킹의 배는 지중해의 전선들과는 달랐다. 길이는 30m 이내였고 열개에서 열여섯개의 노가 양쪽에 있었으며 바람이 잘 불때는 충분히 배를 추진시킬 수 있는 사각돛을 달고 있었다. 처음 이 배는 60에서 백명의 인원을 태울 수 있었지만 9세기 후반에는 최대 이백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바이킹들의 선박조종술은 육상전만큼이나 우수했다.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은 해안지방을 바이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해군을 건설했다. 이것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와 Aethelstan이 데인족과 스코트족에 대한 해상공세에 비교할만한 업적이었다. 보통 알프레드를 영국해군(Royal Navy)의 아버지로 부르는데 이것은 앵글로색슨의 함대가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사라지고 한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영국의 해군이 재건되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때 뭔가 좀 빠진 듯하다. 니케포로스 포카스(Nicephorus Phocas)가 주도한 비잔틴의 크레타에 대한 육해 공동작전을 보면 비잔틴의 기술력과 독창성을 알 수 있다. 그의 운반선에는 경사로(ramp)가 달려있어서 기병들은 상륙하고 준비할 필요없이 곧바로 적지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현대 LST의 프로토타입이었다. |
밀리터리 발전사 -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
1099년부터 1107년까지 이집트는 해마다 우트르메르(Outremer, 십자군 왕국들)를 침공했는데 이들의 부와 통합성 그리고 편제 때문에 파티마 왕조는 잠재적으로 셀주크(Seljuk)보다 더욱 위협적인 적이었다. 왕조는 가능하다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야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101년 9월 1,1000명의 기병과 2,1000명의 보병을 투입한 Ramleh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도 이집트는 다음해 이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데 문제를 겪지 않았다. 해군력에 있어서도 다른 이슬람 세력에 비하면 독보적이라 할만큼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투르크와 달리 군사국가가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부로 많은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정예부대는 왕실근위대(Halka)로 백인노예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주로 다양한 투르크 부족들 중에서 뽑혔지만 슬라브, 아르메니아, 비잔틴, 수단인들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투르크인들은 기병으로 활약했으며 수단인들은 보병이었다. 근위대는 몇개의 연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각 연대 중에서 두드러진 병사나 혹은 출신국가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비잔틴인으로 이뤄진 Rumiya(로마라는 뜻), 슬라브인들로 이뤄진 사칼리바(Sakaliba), 흑인들로 이뤄진 Sudaniya 등은 병사들의 출신국가에 따라 편성된 연대들이고 그외 Gafiziya나 Guyushiya라는 이름의 연대도 있었으며 근위대의 총병력은 오천명이었다. 그외 천영근위대라는 조직도 있었는데 총수 오백명 정도로 귀족가문의 젊은이들에서 뽑혔으며 군사와 관료수업을 받고 군사행정면에서 활약하였다. 이들 중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사람은 수장(emir)이 될 수 있었다. 근위대는 전체군대의 핵심이었으며 전투 중 이들의 행동은 모든 군대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민약 이들이 패배하거나 전장을 떠난다면 전투는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수장들은 그들만의 호위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1160년대의 고관(vizier)이었던 Dhirgham은 오백명의 기병과 Barkiya라는 연대를 따로 거느렸다.
다른 군대는 주로 아랍, 베르베르, 수단인들 중에서 충원되었지만 이들의 전투능력은 셀주크나 프랑크군에 비해 낮았다. 수단인들은 보병과 궁병을 맡았는데 활을 사용할 때는 무릎을 꿇고 화살을 쐈다. 베르베르, 페르시아, 시리아인들도 보병연대를 만들어 움직였다. 아랍과 일부 베르베르 병사들은 창과 칼을 들고 기병으로 활동했지만 프랑크 기병들에 비하면 전투력이 낮은 대신 기동력과 숫적 우세로 승부를 봤다. 군대 중에 궁기병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궁기병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동맹을 맺은 투르크인들이 군대에 참여하여 궁기병으로서 활약하였다. 군대는 셀주크의 영향으로 영토예비병체제로 지탱되었다.
아랍인들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동부와 시나이 반도에 거주하는 아랍인들(Bedouin)들은 경기병으로 치고빠지기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아이유브(Ayyub) 왕조에서도 활약하였다. 1249년 다미에타(Damietta)에서는 밤에 성벽 위로 기어올라가 밖에 나와있는 프랑크인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다미에타가 십자군에게 점령항다기 직전까지 도시를 지켰지만 자신들의 임무에 그리 억매이지는 않았다.
베두인인들은 그때도 지금과 같이 살고 있었다. 여러 관계있는 가족들이 모여 씨족을 이루었고 하나 이상의 씨족은 그 밑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지족에서 선출된 족장(shiekh)의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씨족들이 여러개가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사회는 가부장적이었고 전사들은 족장이 하는 일을 자원하여 따를 뿐 명령을 받지는 않았다. 이러한 것은 족장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약탈을 위해 승자쪽편으로 돌아설 수도 있었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정규전에서 베두인인들은 별로 믿을 수 없었다. Banu Kinana는 베두인 부족들 중 군사력과 용맹성으로 가장 명성을 얻는 부족이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군대의 힘은 거대했으며 12세기 초 우트르메르를 침공한 것은 오직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의 세부적인 것은 1037~94년 사이에 가장 잘 알려졌지만 12세기의 군대와 왜 그렇듯 달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잠재적인 군사력은 구만명의 보병과 115,000명의 기병으로 기병의 경우 만명은 궁정근위대, 오만명은 베두인, 이만명은 튀니지아, 만오천명은 모로코와 알제리였고 나머지는 기타지역에서 모집되었다. 보병은 이만명은 모로코(특히 Masmudi족), 만명은 동방인(시리아로 추정), 삼만명은 페르시아와 투르크에서 차출된 병력이었다. 병종들의 균형은 전쟁 때마다 달랐는데 1167년 Ashmunein 전투에서는 메일을 입은 구천명의 기병(Askaris로 추정), 삼천명의 궁병, 차으로 무장한 만만명의 아랍보병이 참전하였다.
군대는 복잡한 계급체제에 의해 지휘되었다. 국가의 최고기관인 궁정회의는 "검의 남자"라고 불리는 관리들의 기관인데 고위직부터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관(Vizier)
고위의전관(High Chamberlain)
원수(Isfehsalar) - 모든 군대와 궁전보호책임자
대수장(great emir)
군주(sword-bearer)
창군주(lance-bearer)
마필관리관(equerry)
카이로 방위사령관
푸스타트(Fustat) 방위사령관
군대에는 세 종류의 수장들이 있었는데 가장 높은 금사슬의 수장은 수많은 사단들을 지휘할 수 있었고 군주(sword-bearer)는 칼리프와 관리들을 호종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장 낮은 계급들은 함께 모여 중장기마대를 형성했으며 그들의 종자들은 보다 가벼운 무장으로 기병부대를 이뤘지만 이들의 무장은 베두인 경장기병들보다는 중장이었기 때문에 중장인지 경장인지 분류하기 어려웠다.
십자군 시대 이집트의 해군력은 이슬람 중에 가장 강력했으며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프랑크와 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해군기지들은 알렉산드리아, 다미에타, 아스칼론(Ascalon) 그리고 시리아와 홍해 등에 설치되었다. 해군에는 전함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각 지방과 항구에서는 일정한 수의 상선들을 공급하여 함대를 지원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아이유브 왕조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해군의 역할은 바다에서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각 전함들은 선장의 지휘를 받았는데 이들은 해병들을 주로 지휘했고 항해는 주로 부선장의 몫이었다. 해병들은 12세기에 최소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183년 이집트를 출발한 이들은 홍해를 건너 베두인 말을 타고 메디나(Medina)를 공격하려는 샤티용(Chatillon)의 레날(Retnauld)을 패배시켰고 1189년에는 아크레(Acre)에 만여명의 해병들이 상륙하여 살라딘이 아스칼론 전투 이후 새로운 군대를 일으킬 때까지 프랑크인들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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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그러고보니 예를 든다는게 전부 십자군이라는ㅡㅡ;;; 그나저나 신재호님은 언제 사이트개편 끝내신답니까? 한달이라더니 이건 일년은 된거같은디ㅡㅡ;;;
밀리터리 발전사 - 전쟁의 부활(1000~1200)
혼란의 시대를 지나 어느정도 안정기로 들어선 이 시대는 로마의 멸망 이후의 무질서를 바로 잡고 서서히 체계가 잡혀가던 시대였다. 이러한 경향은 군사기술에도 영향을 미쳐 특히 서유럽과 투르크족의 융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군사적인 분야에서 천재성을 나타낸 인물은 없었지만 몇몇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 군인들은 가즈니(Ghazni)의 마흐무드(Mahmud), 잉글랜드의 리처드 사자왕(Richard the Lionhearted) 비잔틴의 알렉시오스(Alexius),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이집트와 시리아의 살라딘, 시칠리아의 노르만인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 등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역량 뿐 아니라 이 시대에 나타난 다음 네가지의 요소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번째는 전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과 남쪽으로 서진하는 투르크족이었다. 그중 북쪽에서의 움직임은 비잔틴과 슬라브족의 연합으로 페체네그(Pecheneg)족과 쿠마나(Cuman)족을 막아냄으로서 막을 수 있었지만 남쪽인 중동에서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이들은 비잔틴의 아시아영토를 대부분 빼았고 중동의 거의 전역으로 스며들었으며 십자군에게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의 팽창은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두번째는 첫번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비잔틴의 쇠퇴가 있다. 하드리아노폴리스(Adrianople) 전투가 로마의 몰락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처럼 만치케르트(Manzikert) 전투는 비잔틴의 운명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하지만 국력과 군사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은 여전히 병법적 우수성에서 서구세계의 지도적인 위치에 군림했으며 놀라운 회복력 덕분에 제국의 수명을 몇세기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유럽국가들에서의 권력의 집중현상이었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민족적인 결집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특히 두드러졌고 독일, 스페인, 폴란드에서는 억제되었다.
마지막은 가장 유명하고 군사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십자군 전쟁이 있다.
무기와 갑주
새롭게 나타난 중요한 무기로는 석궁이 있다. 석궁은 말그대로 휴대용 노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기존의 활보다 무겁고 연사속도도 느렸다. 하지만 석궁의 화살(bolt)은 전통적인 가벼운 화살보다 더 멀리 빠르고 정확하게 나아갔으며 가장 중요한 점은 왠만한 투척무기는 견뎌내는 갑주도 뚫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휴대용 노포에 대한 실험은 중국과 로마에서 시도되었지만 서구에서는 로마의 몰락 이후 그 개념조차 사라져버렸다. 이 석궁은 11세기에 다시 부활했으며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노르만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석궁은 투르크 기마궁술에 대한 서유럽의 답변이었다. 석궁병은 주로 보병이었으며 십자군은 기마석궁술을 시도했지만 그렇게 되면 기동성은 높아질지 몰라도 석궁의 정확도와 연사속도가 차감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미있게도 같은 시대 동남아의 참(Cham)인들은 기마석궁병을 운용했었다.
서유럽의 또다른 새로운 무기는 보병용 미늘창인 핼버드(halberd)가 있다. 핼버드는 기존의 창끝에 도끼머리를 단것으로 찌르기뿐 아니라 베기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기들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서유럽인들이 한때 쓸모없고 기병의 보조용으로만 여겼던 보병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석궁과 마찬가지로 핼버드는 보병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와 마찬가지였다.
또다른 무기의 발달은 이슬람의 시미터(scimitar)의 완벽함이 있다. 이 언월도의 주목할만한 점은 외형적인 면보다는 야금술의 발달에 있다. 특히 다마스코스(Damascus)와 톨레도(Toledo)의 장인들이 칼날의 제작자들로 유명했으며 이들이 만든 칼날은 유연하고 단단하며 날카로운 것으로 유명했다.
유럽에서는 방어갑주가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었으며 중갑화되어갔다. 메일셔트(mail shirt)는 짧아졌고 긴 스커트는 메일브리치즈(mail breeches)로 대체되었다. 소매는 손목길이에 맞춰졌고 두건(coif)이나 메일드후드(mailed hood)가 종종 더 달렸으며 투구를 대신하기도 했다. 체인메일(chain mail) 한벌은 15~25kg 정도 나갔다. 착용자의 몸이 단단한 갑주의 표면과 마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갑주 안에 무거운 가죽코트인 펠트(felt)를 입었다. 보병의 경우 가죽이나 펠트재킷이 유일한 방어구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방어구로 왠만한 가벼운 화살공격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러한 십자군 보병을 목격한 투르크 기록자는 이들이 마치 바늘겨레같았다고 표현했다.
투구 역시 발달했다. 코가리개는 길어지고 단단해졌으며 나중에는 캐스크(casque)의 발달로 시야와 호흡을 위한 구멍을 제외한 머리와 목 전체를 둘러싸는 투구가 나오게 되었다. 이런 투구는 너무 무겁고 호흡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보통 때는 안장앞머리에 달고 다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그제서야 착용했다. 이 시대 가장 흔했던 포트헬멧(pot helmet)의 겨우 7~10kg 정도 무게가 나갔다. 이 시대 말이 되자 끝이 뽀족한 투구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면에 맞았을 때 충격을 빗겨나가게 하고 투구가 착용자의 얼굴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이러한 갑주의 발달은 유럽에서 사상자들이 적게 나오는 원인이 되었지만 동방에서는 승패에 따라 사상자의 불균형이 심했다. 이겼을 경우에는 사상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가볍지만 패했을 경우에는 무거운 방어구가 오히려 도망치는데 짐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봤던 것이다.
축성과 공성
축성분야에 있어서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십자군은 비잔틴으로부터 비록 다른 곳에 각각 적용했지만 서유럽을 완전히 바꿔놓을 축성과 도시방어에 대한 개념을 배워왔다. 비잔틴에게 있어 요새란 방어-공세를 위한 기지였으며 따라서 쉽게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접근이 용이한 곳에 세웠다.
봉건제의 제약으로 장기간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쉽지 않은 유럽에서는 축성은 주로 방어를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요새나 성들은 되도록이면 접근이 용이치 않은 장소에 세웠다. 그렇기에 공격자가 요새나 성을 공격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은 수성측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성 밖으로 반격을 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성전에는 한가지 새로운 무기가 소개되었다. 트레뷰셰(trebuchet) 혹은 망고넬(mangonel)이라 불렸던 이 투석기는 돌이나 기타 투척물로 성벽을 부수거나 성벽 안으로 던져넣는 역할을 맡았다. 노포(ballista, catapult)와 다른 점은 노포의 경우 당김과 휨으로 힘을 얻어 발사하는 것에 비해 트레뷰셰는 투척물보다 무거운 물체를 갑자기 놓아서 그 반동으로 투척물이 날아가게 만드는 원리로 움직였다.
공성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이미 인간은 오래전부터 성벽을 부쉬거나 성벽 위에 올라가거나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는 등 더이상의 새로운 공성술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축성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중세유럽에서도 고대 마케도니아와 로마와 같은 방법의 인공산(agger)을 쌓아 수성측의 우위에 서는 공성전술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왠만한 유럽의 군대는 인력부족으로 소규모인데다 공성할 대상의 위치또한 대부분 험한 지형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술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대부분의 공성은 포위를 통한 기아의 유도였다. 봉건귀족들과 군주들은 언제까지고 기약없이 군대를 야전에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성측에서 준비만 잘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지상전술
일반
기병은 주요병종이었지만 보병의 주요성은 높아져갔다. 십자군 이전에도 유럽인들은 보병을 잘만 이용하면 완전히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적보다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병들은 기병들의 기동을 위한 발판이 되었으며 중요한 곳을 빼았거나 지킬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지도자들은 기사와 중기병(man-at-arms)의 일부를 하마시켜 신용이 안가는 모집병대신 군대의 핵심으로 삼기도 하였다. 어떤때는 보병 전체가 하마기사들일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기사들은 보통의 모집병들보다 훨씬 잘 무장되어있고 명예에 대한 의식 등이 그들에게 훈련과 비슷한 효과를 주어 보통의 민병(fyrd)들이라면 흩어져버렸을 기병의 돌격에 굳건히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싼 기병을 이런 식으로 매번 쓰는것은 비경제적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모집병들 대신 무장과 훈련이 잘된 보병의 상비군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십자군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전투 중 기동에 능한 이슬람군과 싸우기위해 기병의 기동에 기초가 될 수 있는 보병의 진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십자군의 작전을 알아차린 이슬람군은 기병과 보병을 분리시켜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도입하게 되었다. 살라딘은 하틴(Hattin) 전투에서 이런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슬람의 이런 전술은 십자군으로 하여금 다시 기병과 보병의 밀착된 합동운용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었고 아르수프(Arsouf) 전투는 그런 식으로 치뤄졌다.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은 발사와 이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석궁에 대한 의존은 십자군의 경험으로 촉진되었는데 투르크 궁기병들에 대항하려면 발사무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궁으로 적들을 뒤흔든뒤 승패를 결정짓는 중장기병을 돌격시키는 것이 십자군의 전술이 되었다.
단일병종으로는 십자군을 괴롭힐순 있어도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슬람은 역시 병종들간의 유기적인 운용이 필요함을 느꼈다. 살라딘은 아랍과 이집트 보병들과 맘루크(Mameluke) 궁기병들을 효과적으로 혼합하여 활용한 인물이었지만 이슬람군은 대체적으로 경무장을 했기 때문에 백병전능력이 십자군에 비해 떨어졌다.
보병전술
이시대 말이 될때까지도 보병은 기병에 비해 명성이나 효과에서 뒤떨어졌다. 보병의 전술적인 행동은 기병들보다 뒤처진 상황이었다. 보병의 목적은 기병의 돌격을 위한 기지로 쓰여지거나 적기병이 돌격할때 발사무기를 사용하여 적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기병전술
이시대 기병은 크게 세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비잔틴과 투르크의 궁기병으로 비잔틴의 것은 훨씬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중무장했고 두번째 기종인 중장충돌기병의 역할도 병행했다. 서유럽인들은 이 병종에 강했으며 세계 어디에서도 서유럽의 기사와 중기병들과 같은 숫자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군대는 없었을 것이다. 세번째는 경기병으로 창과 검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충돌기병으로 활용되었으며 아랍, 이집트, 북아프리카에서 사용되었지만 살라딘 이전에는 십자군들에게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었다.
비잔틴과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십자군은 경기병을 받아들여 정찰에 사용하였으며 궁기병으로도 활용하였다. 일차십자군이 성공한뒤 경장궁기병종인 Turcopoles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주로 현지에서 태어난 2세대유럽인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베리아의 기독교왕국들도 같은 시기 비슷한 병종인 Genitours를 운용했는데 이들은 가벼운 창이나 투창으로 무장하고 정찰과 습격이 주목적인 기병들이었다.
십자군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에 궁기병을 소개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하지만 투르크와 헝가리의 용병 궁기병은 가끔씩 유럽의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세유럽의 군대
살펴본 바와 같이 충돌을 목적으로 한 중무장기병은 서유럽 봉건병제의 핵심이었다. 무기와 갑주는 비쌌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유한 귀족들만이 무장할 엄무를 낼 수 있었다. 고대로마의 단어인 miles는 오직 이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여겨졌으며 이들 중장기병들은 기사로 불렸다.
두가지 원인은 상황을 바꿔놓았다. 첫번째는 귀족들과 국왕들은 전쟁을 일으킬때 병력동원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가신들이 상위군주들에게 군대를 제공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 수많은 군주들의 야망이 좌절되었다.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상위군주에게 능력이 있다면 평민들에게 무장과 말, 훈련을 제공하고 필요하면 어느때나 소환할 수 있는 일종의 상비군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기병(man-at-arms)으로 불렸으며 miles는 기사외에 이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러한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들은 가신들에게 의무대신 돈을 받았으며 이것은 군주와 가신 모두를 만족시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집된 민병들은 통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와 중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보병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잘 훈련되고 무장된 전문보병들이 나타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창병들이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전투 중에 두터운 방진을 이룬후 석궁병과 아직은 둔했던 기병들의 행동을 엄호해주던 것이었다. 레냐노(Legnano) 전투에서 독일 기사들을 막아내고 밀라노 기병들을 엄호하여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Barbarossa)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것은 다름아닌 보병들이었다. 아마 12세기 최고의 창병종들은 네덜란드에서 육성되었다.
그보다 전 잉글랜드에서는 민병들의 취약함을 고민하던 카뉴트(Canute)가 대규모의 호위대 상비군(housecarl)을 만들어 자신의 군대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들 하우스칼은 잉글랜드군의 주력으로 있다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어떤 귀족들은 용병들을 육성하여 상비군이 없는 군주들이나 자신의 병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필요한 군대를 원하는 군주들에게 댓가를 받고 빌려주기도 하였다. 이들 용병들은 잉글랜드를 침략한 노르망디 공작 기욤(William)의 군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전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이탈리아에 있는 해상국가들, 특히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의 성장이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국도 상당한 해군력을 보유했다. 12세기가 되면 4국의 해군들이 지중해 대부분을 장악하게된다. 한때 최강의 해상강국이었던 비잔틴은 투르크에게 해군의 근거지인 아나톨리아를 상실한뒤 해군력이 현저히 쇠퇴했다.
해운력은 십자군에게 결정적인 요소였다. 12세기 십자군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해상세력들에 의해 성지로 운반되었으며 병참또한 이들의 몫이었다. 만약 이슬람세력이 11세기에 지중해에서 세력을 잃지 않았다면 십자군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함들은 전시대와 다름없이 길고 낮은 갤리선으로 노꾼들은 노예들이었다. 해전방법 역시 전시대와 마찬가지로 배를 적선에 들이받은 뒤 갑판에 올라가 선상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교회와 군대
서방교회
이론적으로 서유럽의 호전적인 야수성은 카톨릭의 교리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였으며 군대를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것은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간의 알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설적인 일은 사제들의 전투참여였다. 이들은 적극적인 참여는 아니더라도 군대의 요청에 거부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신앙심때문에 성직자가 되었다기보다는 성직자가 누리는 특권을 위해 그길로 들어선 귀족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많은 성직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전투에만 참전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아데마르 뒤 퓌(Adhemar du Puy)는 이교도 이슬람과 싸우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기여이며 신의 영광이라고 믿었다.
전쟁을 지배하거나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이시대에 일어났는데 여기에 관한 세가지 징후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신의 평화"이다. 10세기말 프랑스의 교회는 군사작전 중에는 사제, 수도사, 수녀 등은 해칠 수 없다는 격언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목동, 학동, 상인, 여행자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나중에 신의 평화는 더욱 확장되어 교회 자체나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포함되게 되었다. 신의 평화는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에게 별 문제없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이 군사활동에 저촉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신의 평화보다 더욱 영향을 끼친 것은 사투중지령(the Truce of God)이었다. 이 계율은 11세기초 아키텐(Aquitaine)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일요일에 싸우는 것을 금지했다. 이 계율은 처음에는 관망만 됐지만 나중에 주교들에 의해 모든 주말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수요일 저녁기도 때부터 월요일 아침해가 뜰때까지로 연장되었으며 모든 사순절, 강림절, 성일 등이 포함되자 그냥 무시되었다.
세번째 교회의 계율은 확실하게 전쟁에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석궁의 사용금지였다. 1139년 석궁은 바티칸 칙령에 의해 기독교도들간에 쓰기에는 너무 야만스러운 무기라 하여 금지되었지만 이슬람을 비롯한 다른 이교도들에게는 사용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석궁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동방교회
서유럽과 달리 통일되고 발달했던 비잔틴 제국의 정교회는 로마교회보다 전쟁과 살육에 대한 타협점이 적었다. 하지만 자기방어를 위한 살인은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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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날려버렸던 그글입니다;; 지난번에 썼을때는 쓰다만 글이었는데도 지금보다 더 많은 내용같았는데...;;
밀리터리 발전사 -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를 섬기던 투르크군인들은 노르만인들이 기독교세계를 관통하여 원정을 다닌 것 같이 거의 모든 이슬람세계를 관통하였고 11세기에는 칼리프가 힘을 잃고 지방의 유력자들이 독립해나가자 거의 모든 독립국들이 투르크인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집단은 셀주크 투르크로 지금의 중국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랄의 스텝지방에서 왔다. 셀주크군은 쇠퇴하던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를 평정했으며 1055년에는 그의 투르크 고관(vizier)이 파티마 왕조와 함께 음모를 꾸미는 것에 대해 강력한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 압바스 칼리프의 초대로 바그다드로 입성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토그룰-벡(Togrul Beg)은 이후 바그다드의 술탄임을 선포했으며 그의 형제인 차그리-벡(Chagri Beg)은 페르시아와 호라산(Khorassan)의 술탄이 되었다. 토그룰-벡의 후계자인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은 두 술탄국을 병합했으며 파티마 왕조로부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빼았고 비잔틴을 만치케르트(Manzikert)에서 물리치고 서아시아를 거의 지배함으로서 거의 모든 이슬람(주로 수니파)을 다시 하나의 지배체제하에 통일했다.
셀주크인들은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지방유력자들(주로 아랍인들)의 기본적인 군사편제는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크타(Iqta) 제도를 바꿔 순수하게 군사적인 임무에만 집중하도록 하였다.
총독들은 일년에 한번만 공물을 냈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충독 자신이 전비를 지출하여 무장시킨 일정한 양의 군대를 술탄의 지휘하에 참전시켰다. 페르시아에서만 투르크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수장국(emirate) 사십개가 있었으며 이러한 제도는 투르크인들의 세력이 미치는 곳에 두루 퍼졌다. 물론 투르크의 지배를 받지않는 아랍가문들의 수장령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중 샤이자르(Shaizar)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수장들이 영토의 일부나 마을을 유력자에게 주고 그들이 거느리는 군대를 술탄이 수장들에게 군역을 받는 것과 같이 군역을 받았다. 이들 소수장들은 대부분 아랍인들이었다.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해서 이들 전차인들은 술탄에게 가신의 의무를 지지 않았으며 이들이 섬기는 것은 오직 자신의 바로 위의 수장들이었다.
그러므로 셀주크의 군대는 술탄의 호위대와 근위대, 고용된 용병대 등과 이크타 제도에 의해 모인 지방수장들의 호위대, 노예, 가신, 모집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술탄의 호위대는 주로 투르크인들이었지만 투르드, 비잔틴, 아나톨리아, 슬라브, 그루지야 노예 등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기병이었으며 연대로 편성되었다. 이 정규군은 아스카르(Askar)로 알려졌으며 여기에 속한 병사들은 아스카리스(Askaris)라 불렸다. 진급은 복무기간에 따라 정해졌고 연대장은 수장이라 불렸으며 더 높은 지위의 지휘관은 하집(Hajib)이라 불렸다. 고위장교들은 노예들을 모아 자신들만의 사병중대를 만들 수 있었으며 이들은 주인이 죽으면 그 주인의 이름으로 연대명이 정해져 아스카르로 편입되었다. 시리아 아스카르에서는 자유인들도 지원할 수 있었으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투르코만(Turcoman) 용병(궁기병)들과 카스피해 남서쪽 산악지대에 사는 다일람(Daylam)인들의 보병연대가 아스카르에 편입되어 싸우기도 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다마스코스와 이집트 아스카르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다른 곳에 복무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스카르의 인원은 지휘관이나 수장의 능력에 따라 달랐고 정확한 편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차 십자군 전쟁 때 시리아의 대표적인 수장국들이던 알레포(Aleppo)와 다마스코스는 각각 이천명의 아스카르를 보유하고 있었고 1115년에는 그 두 도시와 마르딘(Mardin)은 야전군에 총 오천명의 아스카리스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소국이었던 샤이자르 수장국은 수백명 규모의 아스카르 밖에 보유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아타베그(atabeg)들이 보유한 아스카르들은 훨씬 강력했는데 그중 알레포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모술은 안티오케이아(Antioch)를 점령할때 만오천명의 야전군을 동원했다. 13세기 중반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대부분이 용병인 12만명의 기병을 지휘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스카르는 필요가 없을 때 타국에 빌려줄 수도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1110년 시돈(Sidon)의 총독은 셀주크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다마스코스로부터 투르크 궁기병을 빌린 적이 있다.
전투에서는 아스카르가 주력이었지만 모집병들도 필요할 때 빠질 수 없었다. 아랍의 이러한 민병제도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소아랍왕조들이 계속 되면서 존속했고 작은 아랍수장국들은 소수의 아스카르 밖에 거느리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의 주력은 민병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민병들은 북서아프리카와 쿠르디스탄(Kurdistan)의 이주자들과 함께 다양한 부족에 속한 아랍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금 다른 군대의 종류로는 땅을 수여받고 야전군에는 참전하지 않는 영역예비군이 있다. 이들은 12세기까지 이집트에 남아있었고 시리아에서는 초기 십자군시대까지 남아있었다. 유목아랍부족인 베우인(Bedouin)인들은 투르코만과 마찬가지로 따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병들과 영역예비군들은 모두 말을 탔으며 토종아랍인들은 창과 검으로 무장했고 원거리공격을 위해 투르크인 이주자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두 군대에서 무기와 말은 본인부담이었지만 공동으로 출자하여 병기공장에 집단으로 주문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셀주크군의 주력은 기병, 특히 궁기병이었지만 세번째 열에서는 보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이나 시골에서 징집되어 오거나 지원자들과 비전투 종군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열정으로 사기는 높았지만 훈련과 무장 등은 형편없었고 군사적인 가치도 적었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의 시민들로 이뤄진 부대는 달랐는데 이들은 용감하기로 유명했고 공병과 지뢰공병으로 크게 활약했다. 보병의 주된 임무는 요새, 성전, 진지의 수비를 맡거나 공성전에서 활약하는 것이었다. 무기는 각자가 알아서 부담했다.
야전에서의 병종비율은 작전 때마다 달라서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아스카르가 주력인 것은 변함이 없었고 1167년에 있었던 아슈무네인(Ashmunein) 전투의 예를 든다면 쉬르쿠(Shirkuh)는 이천명의 아스카르를 보유하고 있었고 육천명의 각각의 지도자에 의해 지휘되는 투르코만과 투르크 용병 경기병들을 동원했다.
작전 중에 아스카르는 상당한 군수품과 마초들을 노새와 난타에 싣고 가는데 대체적으로 건조한 중동의 기후 때문에 마초의 비율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초동반은 아군의 영토에서 마초를 징발하는데 스스로 제한을 두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불충분한 병참은 작전기간을 겨울을 제외한 계절동안 두세달 정도밖에 지속시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군의들은 예전의 압바스 때와 같이 군대와 동행했는데 셀주크의 임시야전병원은 낙타 사십마리분의 의료품을 싣고다녔다.
위에서 본것과 같이 수장들은 아스카르에 절대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스카르 외에 봉건모집병들이나 지원자들로는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아스카르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이들을 잘 어루만져 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아스카르는 특정한 인물에게 속해있는 집단이 아니라서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을 바꾸는 것은 색다른 일이 아니었다. 수장국들간의 끈임없는 전쟁은 더 많은 땅을 정복하고 더 많은 세금을 걷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권력의 바탕인 아스카르를 강화시키거나 그들에게 지급하는 봉급을 늘리려는 의도로 인해 일어났다.
수장들간의 경쟁은 투르크와 아랍 왕조들간의 끈임없는 전쟁 뿐 아니라 수장과 그들의 피지배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시리아의 알레포와 다마스코스에서는 전통적으로 시민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일종의 시민군인 아흐다트(ahdath)가 형성되어 그들을 복종시키려는 지배자들의 야망을 억제했다.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를 정복했을 때 다마스코스의 아흐다트는 정복자에게 복종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아흐다트는 나중에 십자군이 침략해올 때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수장국들의 독립성과 형식적인 바그다드 술탄과의 예속관계는 예전의 사라센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셀주크 제국을 점점 붕괴시켜 나갔다. 상황은 셀주크의 왕자들과 지방정부들이 투르크 아타베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아타베그는 왕실 아스카르 중에 뽑힌 해방노예로 대부분 킵차크(Kipchak)와 타타르(Tartary) 출신이었으며 술탄에 의해 왕실에서 뽑혀 군사와 행정경험을 쌓으며 진급했다. 자유민들은 먼 지방의 관리를 맡기는 것에 대해 통 신뢰감이 가지 않았고 토종 페르시아인들이나 아랍인들이 정복자들에게 바치는 충성심은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술탄을 오랫동안 섬긴 노예출신 고위관료들은 술탄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노예가 되는 것은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노예출신의 관료와 장군들은 많은 존경과 명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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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셀주크인데 내용은 전혀 아니다;;;
밀리터리 발전사 - 아이유브 왕조(Ayyubid sultanate)
살라딘은 1169년 프랑크와 손을 잡고 살라딘과 그가 이끄는 투르크인들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민 파티마 왕조의 최고고문관을 참수함으로서 이집트의 실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라딘의 실권장악을 못마땅하게 여긴 근위대의 수단부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살라딘은 이들의 병영에 불을 질러 가족들을 구하러 병영으로 돌아가는 반란군을 공격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아르메니아 부대는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병영에 불이 나는 바람에 타죽거나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수단인들의 저항은 화제 이후에도 이틀간이나 지속되었고 살라딘은 이들을 도시 밖으로 나가도록 일단 허가증을 줌으로서 사태를 일단락지었지만 살라딘에 대한 저항은 1176년까지 이어졌다. 근위대가 해산되자 살라딘은 자기 가문의 가신 중 쿠르드 자유인 천여명, 이집트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새한 아사드-앗-딘 시르쿠(Asad-ed-Din Shirkuh)과 누레딘(Nur ed-Din)의 아스카르(askar) 이천명을 뽑아 근위대를 새로 조직했다. 이들 새 근위대는 주인들의 이름을 따서 부대명이 정해졌는데 살라딘의 부대는 Salahiyah, 시르쿠의 부대는 Asadiyah로 이름지어졌다. 근위대 다음으로 살라딘은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1163년부터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려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제거하기로 유명한 Dhirgham의 철권통치를 받았으나 그는 프랑크 영토를 습격하는 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방어적인 정책을 취했다. 살라딘은 기존의 봉건제도로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용병들에게 줄 자원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이크타(Iqta) 제도를 도입하여 이년 뒤 작지만 효율적인 군대를 만들었다.
모술과 같은 이슬람의 주요군주들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봉건모집병들이 필요했다. 그의 1174년부터 83년까지의 정복활동은 주로 정예궁기병들과 이집트 창기병들의 활약에 크게 힘입었지만 그것도 모집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그가 이집트 병력만을 데리고 1170년과 77년에 시도했던 원정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원정 중 소수장들은 스스로 자원하여 살라딘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알레포(Aleppo), 다마스코스(Damascus), 모술(Mosul)같은 대수장국들은 1183년 알레포가 함락당할 때까지 강하게 저항했다. 살라딘의 손에 들어온 봉건수장들은 살라딘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모술과 같은 경우 프랑크에 대한 지하드나 시리아 원정 등에 깊숙히 참여하기도 하였다.
십자군을 상대로 한 원정에서 살라딘의 군대는 셀주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소속과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눈에 띄는 소속군대만도 그의 쿠르드 호위대, 맘루크(Mamluk, 그의 아스카르에 속해있음), 각 수장들의 호위병들, 쿠르드 궁기병과 투르코만(Turcoman) 용병 그리고 모집병들이 있다. 1177년 아스칼론(Ascalon)에서 그는 이만육천명의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중 팔천명은 그의 쿠르드 호위병 천명과 용병들을 포함한 정예였고 나머지는 티레(Tyre)의 기욤(William)에게 "낮은 서열의 흑인노예들"이라고 묘사된 창병과 수단궁병으로 이뤄진 구이집트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187년이 되자 정예의 숫자는 아스카리스(askaris)와 용병을 포함한 만이천명으로 불어났는데 이것은 보병으로 참가한 구이집트군 모집병들과 같은 숫자였다. 이 병력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자지라(Jazira)와 디야르-바키르(Diyar-Bakir)까지의 북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알레포, 모술, 마르딘(Mardin), Balad Sinjar, 에데사(Edessa), 하란(Harran) 등지에서 참가한 수장들의 병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크레(Acre)에서는 다른 병력비율이 되었는데 이때는 모술, 디야르-바키르, 북시리아, Balad Sinjar, 티그리스의 쿠르드 참가병, 하란의 아스카르 그리고 살라딘의 직접 거느린 아스카리스들이었다. 2년 뒤 리처드1세와의 대결을 벌인 아르수프(Arsuf)에서는 투릌, 수단, 아랍, 베두인인들이 참가했다. 이것을 보면 그의 군대가 점점 정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결과인지 53년 후 그의 후계자는 가자(Gaza)에서 오천명의 정예기병과 만명의 콰리즘(Khwarism)인들을 이끌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살라딘은 베두인으로 이뤄진 정찰부대를 둬서 항상 프랑크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였다. 군대의 핵심이 아스카리스와 투르코만 용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마(Hama) 참가병의 경우 살라딘은 그들을 항상 우익에 두어 신뢰감을 보였다.
살라딘의 주요문제는 전쟁 중 모집병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원정에 참가한 수장들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보급과 무장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특히 장거리원정에 경우 많은 경비를 지출해야했고 그렇게 되면 원정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의 사기는 몇주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충분한 전리품을 얻거나 추수철이 가까운 때와 겨울과 우기가 길어질 때에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용병들은 계속해서 봉급이 지불되거나 충분한 약탈을 하지 못한 경우가 아니면 싸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따라서 원정기간은 길어야 일년을 넘지 못했고 군대는 매년 봄마다 재편성되었다. 살라딘은 예외적으로 삼년동안(1190~3) 군대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역시 이슬람군대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1188년 그는 북시리아 원정에 성공한뒤 안티오케이아(Antioch)를 정복하려 했지만 원정에 지친 그의 가신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도시정복에 실패한 적이 있다.
약탈의 유혹은 또다른 약점이었다. 1177년 살라딘은 보두앵(Baldwin)이 이끄는 기사 500명과 만났는데 보두앵은 살라딘과 싸울 뜻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그의 병력은 흩어져 약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상당한 군대가 보두앵의 지휘를 벗어나 살라딘의 군대를 공격했고 이렇게 벌어진 몽기사르(Montgisard) 전투로 살라딘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틴(Hattin) 이후의 진격도 역시 약탈에 대한 군사들의 욕심 때문에 티레를 함락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맘루크
맘루크들은 백인노예들로 전쟁에서 잡히거나 시장에서 팔린뒤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어린 시절부터 높은 계급의 수장들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아 호위대가 되었다. 맘루크와 비슷한 조직은 사라센 시절부터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맘루크가 아니었고 투르크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의 투르크 호위대는 투르크인만이 아니었고 슬라브, 아르메니아, 러시아인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이 순수히 투르크인만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1230년대부터인데 몽골의 침략을 받은 쿠만(Cuman)족이 킵차크(Kipchak) 스텝에서 도망쳐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들 호위대는 파티마와 프랑크로부터 약한 칼리프령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한 압바스 치하에서 강성해졌는데 누레딘과 살라딘의 지휘하에서는 더욱 숫자가 많아지고 강력해져 야전군의 절반을 차지할때도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살라딘의 후계자들에 의해 완벽해졌는데 봉건군대보다 뛰어난 이들의 자질을 깨달은 그들은 살라딘의 사후 일어난 내전에서 증원된 아스카르를 동원했다. 이후 호위대의 힘은 더욱 커져 자신들의 주인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고 술탄계승에도 영향을 미쳐 Kamili 맘루크가 엘-카밀(el-Kamil, Kamili 맘루크는 이 술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음)의 작은 아들 Es-Salih Ayyub를 술탄위에 앉히기도 하였다(1240).
아이유브(1240~9)는 왕조의 마지막 효과적인 술탄이었다. 술탄계승에서의 과정으로 그역시 같은 방법으로 쫓겨날 것을 우려한 아이유브는 Kamiliyah 맘루크나 군대의 쿠르드 자유민, 이집트와 아랍 모집병들 중 어느 하나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호위대없이 지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투르크인이 주류인 새로운 맘루크들을 수입해와 그중 천명 정도를 뽑아 푸스타트(Fustat) 반대편에 있는 al-Rawda 섬에 머물게 했다. 이들이 수도에 머물지 않은 이유는 카이로에서 술탄 비호하의 안하무인의 행동과 기존의 맘루크들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새로운 맘루크들은 바흐리(Bahri, 완전한 이름은 al-Bahriyah as-Salihiyah) 연대라고 불렸는데 bahr는 해외라는 뜻으로 새 맘루크들이 해외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유브는 1249년에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몇몇 바흐리 지도자들은 자신들 고유의 맘루크까지 갖고있을 정도로 세력이 컸지만 계속 왕조에 충성을 바쳤고 바흐리의 본부는 Mansourah에 있다가 1250년 2월 이집트의 총사령관이 죽으면서 바흐리가 그자리를 차지하여 이집트의 군수권을 잡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들 바흐리를 이슬람의 템플기사단이라고 불렀다.
아이유브의 후계자는 같은해 모술에서 도착했지만 그는 자기 고유의 맘루크들을 이집트로 데려와 이들에게 실권을 줄 생각이었기에 바흐리와 다른 이집트 맘루크들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그해 5월 2일 그는 맘루크 바이바르스(Baibars)와 다른 바흐리들에게 피살당하고 아이유브의 아내는 고위 바흐리 사령관인 아이베크(Aybek)와 결혼함으로서 긴 맘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 밀리터리 발전사 - 몽골의 시대(1200~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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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두세기의 대부분은 한 세력의 독판이나 다름없었다. 서유럽을 비롯한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몽골의 말발굽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상 등장했던 천재중 한명인 몽골의 족장이자 문맹이었던 징기스칸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의 후계자와 부하들인 수보타이, 제베, 몽케, 쿠빌라이 등도 상당한 인물들이었다. 이외에 뛰어난 장군들로는 티무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1세, 프랑스의 뒤 게클랭(Du Guesclin), 맘루크(Mameluk) 바이바르스(Baibars), 오토만의 무라드(Murad) 등이 돋보였다. 그리고 전략적으로는 별로지만 전술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던 에드워드3세도 충분히 주목할만하다. 투르크인들은 아직도 전장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위에 나열한 장군들 중 세명이 투르크인들이라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그리고 두명이 잉글랜드인이라는 사실은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는 뜻이었다.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도 경직된 특성이 남아있던 중세의 전쟁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전장에서의 기병의 주도권은 넓게보면 몽골의 등장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지만 보병들의 우세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크레시(Crecy) 전투는 카레(Carrhae)나 하드리아노폴리스(Adrianople) 전투가 그랬던 것처럼 보병의 우세를 결정하는 전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3세는 그의 할아버지 에드워드1세가 시작한 전술체제를 중장보병들의 견고한 방어와 강력한 장궁을 쏘는 경장궁병들의 기동성을 결합시켜 완성하였다. 이것과 기병을 이용한 반격은 여러 병종들을 유기적으로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 군사적인 성공의 길임을 입증하는 사례였다. 비록 그렇게까지 큰 영향력은 없었지만 화약무기의 등장은 군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시대는 전사(戰史)에 많은 영향을 끼친 두 시기의 끝이기도 하였다. 한때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유럽의 문지기였던 비잔틴은 4차십자군 이후 사실상 전사에 언급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몰락했고 비슷한 시기 중동의 마지막 기독교의 보루였던 아크레(Acre)의 함락은 십자군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외 다른 형태의 이단이나 이교도에 대한 전쟁이 십자군의 이름을 걸고 일어났지만 진정한 십자군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갑주 야금술의 꾸준한 발달은 13세기 유럽에 판금갑옷(plate armour)이 소개되도록 만들었다. 처음 철로 된 판금은 신체의 중요한 부위인 어깨나 넙적다리 등을 감싼채 사슬갑옷(chain mail)의 속에 입었다. 중반이 되자 그것을 메일 밖에 입거나 어깨, 팔꿈치, 무릎, 정강이, 넙적다리 등 전보다 더 넓은 부위에 걸치게 되었다가 후반이 되자 동체갑옷과 흉갑이 체인셔츠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러한 사슬과 판금의 결합은 양쪽이 만나는 팔꿈치, 어깨, 무릎 부분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게 했으며 이러한 것들 때문에 잘 만들어진 판금갑옷이 14세기에 발달하고 메일을 완전히 대체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숙련된 유럽의 기술자들은 13세기 초 메일로 만들어진 벙어기장갑을 개발했으며 곧 메일장갑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사와 중장기병(man-at-arms)들의 판금갑옷은 당시의 무기로는 거의 불가침이었기 때문에 방패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작아져 문장을 새기는 삼각형모양의 장식품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문장은 귀족들과 상류계층(gentry)의 필수가 되었는데 문장은 주로 방패나 겉옷(surcoat)에 수놓아져 장식용으로 사용되거나 서로를 구분할때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눈구멍과 숨구멍이 뚤려있는 포트형투구(pot helmet)을 받아들였지만 많은수가 편하고 간단한 메일두건(mail coif) 위에 걸치는 캐스크(casque)를 착용했다. 14세기가 되자 답답한 기존의 포트형투구 대신 얼굴쪽에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면갑(visor)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혁신들은 기사들의 갑주무게를 증가시켰다. 만약에 쓰러지거나 하마했을 경우 도움없이 간신히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말을 사살할 경우 불리했고 이런 우려는 마갑의 발달로 나타났다. 14세기 후반이 되자 말 한마리당 승마인과 마갑까지 합해 최소 60kg을 지탱했고 여기에 승마인의 몸무게까지 합하면 말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이것은 크고 느린 말들만이 중장기병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었고 이들은 겨우 속보(trot)나 보통 구보(canter) 정도의 속도로만 돌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갑주의 발달로 인한 확실한 효과는 전투에서 전체적인 사상자의 숫자가 줄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바꿔 말하면 도망갈때의 불리함으로 패배한 쪽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 될수도 있었지만 이때의 전투는 섬멸전이 아니었고 포로를 붙잡아 몸값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큰 학살은 없었다. 또다른 효과는 기병의 보호를 위해 기병의 특기인 기동력을 희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것이 역이용되어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14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초중장을 한 기병들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와 화약무기의 발달은 기동력을 희생하면서까지 얻은 갑주의 보호력도 쓸모없다는 것을 거침없이 이야기한 사건들이다. 무기 화약이전의 무기 화약이 소개되기전 등장했던 중요한 무기는 잉글랜드의 장궁이었다. 원래 장궁은 웨일즈의 무기였지만 에드워드1세의 웨일즈 정벌 중 진가를 알아본 잉글랜드인에 의해 12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장궁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잉글랜드 보병(yeoman이라 불리던 계급이 주로 전담)들의 기본적인 무기로 삼았으며 스코틀랜드인들과의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3세는 역시 장궁을 이용하여 스코틀랜드를 굴복시켰으며 크레시에서 프랑스를 격파하였다. 장궁의 사정거리는 최대 350m, 그리고 200m 이내가 가장 효과적이었으므로 석궁보다 더 길었고 장전시간도 더 빨랐다. 경험이 많은 장궁병들은 더 정확하고 석궁보다 위력적인 관통력을 지니고 쏠수도 있었다. 장궁은 가볍고 다루기 쉬우며 전초전때 일제사격용으로 딱이었다. 장궁은 한동안 가장 위력적이고 효율적인 개인무기로 군림했다. ![]() 하지만 장궁 이외에는 그다지 주목할만한 무기나 장비는 없는 편이었다. 화약의 출현 화약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중국에서는 1161년 화약이 사용되었지만 소리를 내는 정도의 용도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중국인들은 금과 몽골과의 전쟁에서 원시로켓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고 몽골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는 14세기 화약을 이용한 미사일 추진체가 사용되었다고 잉글랜드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과 독일의 수도사 베르트홀트 슈바르츠(Berthold Schwarz)가 전하고 있다. 유럽에서 최초로 화약무기가 사용된때는 크레시(1346)와 메츠(Metz, 1324), 알헤시라스(Algeciras, 1342) 전투 등 몇가지 설들이 있다. 에드워드는 3~5개의 roundelaide, 혹은 쇠물병이란 뜻의 pots de fer라는 무기를 사용했다는데 이것의 모양이 쇠로 만든 물병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후 초기형태의 대포가 백년전쟁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의해 전장과 공성전에 쓰이기 시작했다. 이 무기는 독일과 이탈리아에도 같은 시기 나타났다. 초기의 화약무기는 화살같이 생긴 볼트(bolt)를 꽂는 작은 금속단지였다. 무게가 상당했고 내부에서 화약이 폭발할때 잡고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작은 대포나 다름없었던 핸드건(handgun)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약무기는 계속 발달하여 이시대가 끝날무렵 포는 모든 유럽군대에게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 되었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황금군단(Golden Horde)과의 전투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축성과 공성 축성과 공성은 그다지 큰 발전은 없었다. 비잔틴의 아나톨리아 요새들과 십자군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지었던 성채들을 따라 유럽에도 그를 따라한 성들이 대량으로 지어졌다. 축성술의 발달에 비해 공성술은 뒤처진 상태였다. 공성기술은 전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사실 아직 화약무기가 도입단계에 있는 부분에서 인간의 창의력상 이상의 발달을 기대하는것은 무리였다. 특별한 공성무기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설사 등장한다고 해도 다른 무기들과 마찬가지로 당김, 뒤틀림, 평행 등으로 추진력을 얻는 무기였을 것이다. 필립2세에 의해 가이야르성(Chateau Gaillard)이 함락된 사건은 충분한 자원과 병력, 의지를 가진 군주라면 아무리 강력한 방어라도 충분히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런것을 이룰만한 인내심, 부, 결단력, 기술 등이 중세에는 흔치 않았다. 공성을 위해 동원하는 봉건군대는 대략 모집병들과 용병들로 나뉘는데 모집병들의 복무기간은 몇주에 불과했고 용병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공성에 동원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그 결과로 방어전략을 짤때는 공격능력을 먼저 감안해야했다. 이것과 맞물리게도 이 시대에는 다른 시대보다도 열린 공간에서의 회전이 적은 때이기도 했다. 힘이 약한 쪽은 굳이 회전을 치루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기기 위해 혹은 최소 지지 않기 위해 요새 안으로 퇴각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보통 회전은 무모하거나 무능하거나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아니면 적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사실을 확신한 다음에 치루었다. ![]() 지상전술 기병과 보병을 함께 균형을 맞춰 운용하는 전술이 보다 효율적이고 승리할 확률도 높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면서 보병은 다시 주요병종으로 전장에 나타났고 크레시 전투에서 신무기인 장궁을 이용한 궁병들이 장갑창병들을 지원해주면서(실제로는 거의 전장을 주도) 보병전술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잉글랜드만이 아니었다. 14세기의 다른 지도자들은 잉글랜드의 예를 쫓아 중장기병들을 하마시켜 전투에 써먹으려고 했지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잉글랜드가 승리한 비결은 하마한 기사들과 궁병들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는 두 병종과 함께 기병들을 예비대로 세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하마기병들과 장궁병들이 서로 상호보완을 하도록 함과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적의 허를 찔러 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잉글랜드, 플랑드르(Flanders), 스위스 창병들의 성공은 유럽의 전투를 방어측이 우세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방어측의 우세는 위에 언급한 불리할 경우 요새 안으로 들어가는 농성술의 연장선상에 있다. 14세기 유럽의 이러한 변화와 관련하여 만약 에드워드3세의 합동운용을 통한 방어전술과 13세기 세계를 재패했던 징기스칸의 기병을 이용한 공격전술이 맞부딪힌다면 어떻게 될지 가정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듯 싶다. ![]() ![]() 후기중세 서유럽의 군대 용병들이 숫자, 크기, 세력적인 면에서 힘이 커지는데 반해 형편없는 훈련에 급하게 모집시킨 봉건모집병들에 대한 의존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잉글랜드와 후의 프랑스에서는 두개의 양립하기 어려운 체제에 대한 부분적인 조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플랜태저닛(Plantagenet) 왕조에서는 일종의 도제제도를 시행하여 민병들과 용병들을 합치려는 체제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가신들로 하여금 병력을 제공하여 왕령을 지키도록 하는대신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였다. 명목상 이것은 가신의 의무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국왕이 이 민병들을 소집하는 일은 적었다. 이러한 상비병력은 결과적으로 영속적인 잉글랜드 육군의 시초가 되었다. 이 체제는 병력을 제공하는 귀족들이 자율적으로 하는 것으로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로마나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전문군대였다. 이들은 자신 스스로를 잉글랜드 군인이라고 생각했으며 비록 귀족들에 의해 제공되었지만 국왕을 따르는 무리였다. 하지만 이들은 용병이기도 했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려웠고 자주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다. 잉글랜드의 상비부대는 주로 프랑스 내에 있는 플랜태저닛 왕가의 소유지에 주둔했기 때문에 도제제도는 잉글랜드 보다는 프랑스와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럽에 많은 명성을 떨친 잉글랜드의 보병들은 사실상 하마한 기병들이었다. 이것은 군대가 이동할때 빠른 행군이 가능하게 해주고 전투에서는 말에서 내림으로서 기/보병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에드워드3세와 그의 아들 흑태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제목과 내용이 매치가 안되는듯 한데...몽골에 관해 따로 글을 써야되나-_-? |
밀리터리 발전사 - 몽골(1225년 경)
몽골 "호드(horde)"
호드라는 단어는 몽골의 부족이나 야전군을 가리키는 말인데 적은 수의 군대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 그들의 서방의 적들에 의해 "수많은 무리"와 동일한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의 반은 자신들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이고 나머지 반은 폭풍같이 세계를 재패한 몽골의 저력이 있게한 군의 편제를 유럽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3세기의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엄청난 숫자였고 훈련되지 않은 무리였으며 자신들의 목적을 그저 우수한 숫자로만 이룬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징기스칸과 그의 몽골군은 현대군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위업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훈련받은 최강의 군대를 통해 성취해냈다. 몽골군은 그들의 주요적들보다 더 적은 숫자였다. 징기스칸이 일으켰던 최대의 군대는 페르시아를 정복할때 동원했던 24만명이었다. 러시아와 중동유럽을 정복할때 몽골군이 동원했던 군사들의 수는 15만이 넘은적이 없었다.
편제
양이 아닌 질이 몽골군이 성공했던 원인의 기초였다. 이들의 간단한 편제는 가장 큰 특징이다. 일부 보조병들을 제외한 기병으로 이뤄진 전체군에게 이는 모두 동일했다. 편제는 십진법으로 이뤄졌는데 가장 큰 독립단위는 만명으로 이뤄진 투만(touman)으로 오늘날의 기마사단과 비슷한 부대단위였다. 세개의 투만은 하나의 군단을 구성했다. 한개의 투만은 천명으로 이뤄진 열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다. 이 연대 밑으로는 열개의 백인대가 있고 그밑은 또다시 열개의 십인대가 있었다.
전형적인 몽골군의 사할은 적과의 충돌을 위한 중장기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패배한 적들이 저항할때를 대비하여 이들은 전신에 갑주를 착용했으며 갑주는 가죽이나 메일아머(mail armour)였다. 이들은 동시대 중국이나 비잔틴에서 사용하던 간편한 캐스트 투구(casque helmet)를 썼다. 중장기병들이 타고다니는 말 역시 보호를 위해 가죽으로 만든 마갑을 착용했으며 중장기병들의 주무기는 창이었다.
군대의 나머지를 차지하는 경장기병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으며 최소한의 보호를 위해 투구만을 착용했다. 이들의 주무기는 반사궁(복합곡궁)과 투창, 올가미였다. 잉글랜드의 장궁보다 사정거리가 약간 짧았던 몽골의 반사궁은 스키타이-투르크 관습에서는 위력적인 무기였다. 각 경기병들은 두개의 화살통을 매고 다녔으며 보급을 통해 계속 화살을 충원했다. 경기병들의 임무는 정찰, 교란, 원거리공격, 소탕, 추격 등이었다.
기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기병들은 한마리 이상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기수가 타지않는 말은 행렬 뒷쪽에서 몰고다녔으며 이동중 갈아타거나 심지어 전투 중에도 갈아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전투와 기동성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병과 중장기병은 모두 시머터(scimitar)와 전부(battleax)를 들고다녔다. 질긴 비단으로 만든 셔츠는 거의 모든 몽골군이 착용하고 있었다. 이 셔츠는 화살에 관통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착용자가 화살에 맞으면 찰박상이나 뼈가 부러지는 등의 관통상보다는 경미한 상처를 입었다. 따라서 종군한 의사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할때 비단을 빼내기만 하면 화살촉은 비단을 따라 빠졌다.
훈련
몽골병사 개개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받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고비사막의 험악한 환경으로부터 단련된 강인한 인내력과 불굴의 정신을 가졌으며 무기를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어렸을때부터 말을 다루었다. 이들은 험악한 자연환경 덕분에 강인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종군의사가 개입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개인의 능력과 전장에서의 용기를 얼마나 보여주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으며 또한 자신역시 상위부대지휘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했다. 이러한 체제는 몽골군이 하나로 뭉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징기스칸의 훈련방법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것은 몽골의 소조직 전술이 상당히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투의 정밀도는 상당한 연습과 근접한 지휘체계하에 가능했다. 몽골군이 수많은 전장에서 보여준 투만 내부와 투만 사이 그리고 더큰 부대끼리의 합동작전은 그것에 상당한 훈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전술
징기스칸의 기동력은 다른 지상군들과는 차원이 틀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군대란 집단과 속도를 제곱하면 가장 힘을 낼수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듯 하다. 그는 기선제압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었으며 전술이 방어적일때도 항상 공격상태를 유지했다.
작전이 시작되면 투만들은 최전선에서 넓게 포진하여 본진과는 두절되지 않을 정도의 연락만을 한채 진군한다. 적군이 발견되면 그것은 가까이 있는 부대들의 목표가 된다. 적들의 위치와 전력, 이동방향 등은 곧 중앙사령부로 전달되고 그다음 전군으로 퍼져나간다. 만약 적의 규모가 작다면 이들에 대한 대처는 일선지휘관만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적이 한부대만으로 처리하기 힘들 정도라면 전군이 전투준비를 하고 일전을 치뤘으며 어떤때는 적이 준비를 하기전에 재빨리 공격하여 흩어진 적들을 각개격파하기도 하였다.
징기스칸과 그의 부하들은 상투적인 전면전과 같은 전투들을 피했다. 적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몽골군은 적의 배후나 측면을 공격했고 어떤때는 후퇴하는 척하며 추격하는 적들에게 화살을 쏘면서 괴롭혔으며 적들이 지치면 그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다른 부대나 혹은 예비용말을 바꿔타고 공격에 나섰다.
몽골군은 자주 경기병들을 앞세우고 그들의 뒤에서 평행행렬상태로 넓게 포진하여 진군했다. 이러한 진형은 군대의 유연성을 높여주었으며 적들이 막강한 상대거나 위치가 정확하지 않을 경우에 유용했다. 행렬들이 적을 만나면 상황에 따라 위치를 사수하거나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정면으로 적과 마주치지 않은 행렬들은 계속 앞으로 나가 적의 배후나 측면을 포위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연락망이 끈길까 두려워한 적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군대의 대형이 흩뜨러질때는 후퇴 중이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때를 틈타 전군이 공격에 나섰다. 이렇게 되면 적은 대부분 포위당해 무너지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몽골기병들은 정밀성과 협동능력, 우수한 기동력 덕분에 적들이 아무리 수가 더 많고 무장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항상 우세할 수 있었다. 몽골의 민첩한 이동은 변함없이 결정적인 순간 우세를 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선제압과 기동성의 극대화로 인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은 적들이 아닌 몽골군일때가 더 많았다.
전투진형은 한줄로 이뤄진 오열의 간격넓은 횡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장기병들은 첫 두열에 포진했으며 나머지 셋은 경기병들이었다. 이 횡열들과는 별도로 경기병으로 구성된 정찰 겸 전초부대가 가장 앞에 배치되었다. 적군과 마주쳤을 경우 배후에 있는 경기병 3열이 앞의 중장기병들의 틈사이로 빠져나와 적에게 투창과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잘 준비된 원거리공격은 아무리 견고한 적이라도 뒤흔들어놓기 마련이다. 어떤때는 이러한 원거리공격만으로도 접전없이 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적이 원거리공격으로 흩뜨러졌다고 판단되면 지휘관들은 신호를 보내 경기병들을 뒤로 물리고 중장기병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원거리공격과 기동 등을 적절히 조화하기 위해서는 부대들간의 박자와 리듬이 잘 맞아야 했다. 적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병력의 일부가 적의 정면을 공격하여 적의 시선을 잡아두는 동안 몽골군의 주력은 틈을 노려 적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하여 승리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공성전
처음 징기스칸이 중국을 공격할때 그는 도시들을 둘러싼 강력한 성벽들에게 좌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몇년뒤 중국의 무기와 장비, 기술 그리고 경험 등을 축적한 몽골군은 뛰어난 공성술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주요공성무기는 크기가 컸지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원거리공격기구나 다른 장비들은 마차나 말 등에 싯고다녔다. 공성기구들을 다루는 것은 거진 중국인들이었다. 계약을 맺거나 징집되어 만들어진 공변군단들은 과거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의 것 만큼이나 효과적이었다.
징기스칸과 그의 유능한 부하 수보타이는 자신들의 뛰어난 공병들을 이용하여 그 어떤 요새도 몽골군의 앞길을 막지 못하게 만들었다. 주요거점들이나 다수의 방어인원이 지키는 곳은 공병기구들의 지원을 받는 투만이 둘러쌌으며 본진은 그대로 계속 진군해갔다. 어떤때는 책략이나 대담한 공격으로 도시를 습격할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공성중인 투만과 공병들은 정기적인 공성작전을 펼쳤으며 주군은 적을 상대할 병력들을 뽑았다. 야전에서 변함없는 승리를 거두고나면 대부분의 도시나 요새들은 더이상의 저항은 포기한체 항복하였다. 이경우 주민들은 학살은 면할지 모르지만 상당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요새의 방어자들이 어리석게도 계속 저항한다면 징기스칸의 뛰어난 공병들이 나서 성벽을 뚫거나 다른 방식으로 방어를 무너뜨릴 것이다. 점령된 도시는 약탈과 파괴를 당했으며 살아남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징기스칸은 역사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 중 하나로 기억되었다.
어떤때는 가장 강력하게 방어되는 도시들조차 몽골군이 근접해있다는 사실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압도당하고 함락당했다. 선두에 있는 몽골 경기병들은 패배한 적들을 가까이 정력적으로 뒤쫓았기 때문에 패잔병들이 미처 성안으로 다 대피하기 전에 이미 그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이런것을 사전에 알았다 해도 몽골군의 빠른 기동력으로 인해 몇분안에 공성진형이 완성되어 방어측은 쉴세도 없이 막다가 무너지는 일이 흔했다. 노포와 화살을 이용한 공격으로 방어측이 제대로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에게 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몽골군의 또다른 수법이었다.
참모와 지휘체계
징기스칸의 참모체계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적들이었고 또한 그들은 그가 어떻게 성공했는데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는 대부분의 작전을 자신이 직접 지휘했지만 나중에는 수보타이나 제베같은 유능한 부하들에게 맡길때도 있었다. 전략과 전술은 신중한 논의 끝에 완성되었다.
몽골군의 주요요소중 하나는 정보체계였다. 작전계획은 항상 정확하고 정밀하게 수집된 정보를 통한 신중한 논의와 분석 끝에 이루어졌다. 몽골의 정보망은 거의 전세계에 걸쳐있었으며 이는 중세시대의 모든 국가들의 정보수집능력을 능가하는 것이었다.스파이들은 보통 상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하였다.
수집된 정보에 대한 분석과 논의가 끝난 다음에는 몇개의 작전들이 세워지며 투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목표에 따라 움직였다. 작전지휘관들에게는 넓은 범위의 권한이 주어졌다. 이들은 전체전략에 부합하는 선에서 군대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명령과 전투정보교환은 기마급사를 이용했으며 칸의 사령부를 통해 빠르게 하급부대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징기스칸은 넓은 전선에도 불구하고 전군의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모든 전선을 통제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심리전에 숙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잔혹함과 야만성, 저항하는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에 대한 소식은 의도적으로 널리 퍼뜨렸으며 그들의 다음목표가 될 적들의 저항의지를 꺽어버리는데 사용하였다. 물론 이런 소문은 과장된 것도 있지만 어느정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전쟁과 행정에 유용한 역할을 할수있는 상대가 투항해올 경우 이들이 잘못 대접받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몽골군의 참모체제는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유능한 상대가 투항해올 경우 이들은 단지 몽골의 편리를 위해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능력과 자신들의 경험, 수집된 능력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역시 체계적인 훈련프로그램을 만들고 전문적인 참모들을 육성해냈다.
행정
작전 중 보급문제는 각각의 지휘관들의 재량에 달려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몽골군은 휴대와 처리가 간단한 콩으로 만든 메주 비슷한 음식과 말젖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런것은 특히 사막이나 산악지역에서 이용하기 편리했다.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가축을 몰고다니며 보급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작전지역을 약탈함으로서 보급을 해결했다. 후기에는 체계적인 보급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이때 행정을 맡은 사람들은 포로로 잡힌 학자, 관리, 군의 등이었다.
목적은 확실치 않지만 몽골군은 아군과 적군의 사상자를 세고다녔는데 아군의 경우 출석부 등을 통해서 사상자의 수를 알수 있지만 적군의 사상자수를 셀때는 이를 위한 별도의 부대가 따로 있어서 전장을 돌아다니며 죽은 적의 머리에서 오른쪽귀를 잘라내 부대에 담았다. 이것의 목적은 아마 적과 아군의 사상자수 대비를 통해 체계적인 연구를 하려는 목적으로 추측된다.
연락
급사를 이용한 장거리 연락법은 이미 위에 언급하였다. 전술적인 움직임은 백인대장과 천인대장에 의해 흑기와 백기로 통제되었다. 대부분의 몽골지휘관들은 문맹이었으므로 문자를 통한 명령은 거의 없는 편이었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것이 더 정확한 명령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기를 이용한 연락은 목소리가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서 사용되었다.
어두울때나 기를 보지 못하는 지형에서는 불화살을 사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책략
가끔씩 지나친 기사도정신에 물들어 바보같은 행동을 보이는 서유럽의 기사들과는 달리 몽골군은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고 적의 피해를 늘릴수 있다면 무슨 책략이라도 마다치 않았다. 이러한 책략은 작전중 예외적인 상황에서 일어날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몽골 지휘관들의 전술적 레퍼터리 중 일부인때가 더 많았다.
몽골군은 겨울철에 작전기간을 짜는걸 즐겼는데 얼어붙은 늪지와 강이 그들의 기동력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골군이 기병들이 건너기에 충분할 정도로 얼어붙은 도하지점을 찾아다닐 동안 적들이 예상외의 반응을 보일때도 있었다. 1241년 몽골군이 도하지점을 찾아 보급용 가축들을 다뉴브 동쪽에 놔두고 간사이 그해초 몽골군에 의해 쫓겨났던 굶주린 피난민들과 패잔병들이 가축들을 탈취해버렸고 몽골군은 전략을 약간 수정하였다.
또다른 책략은 전술적인 행동에 더욱 가까웠는데 일종의 기만전술로 소부대가 특정지역을 습격하거나 방화하여 적이 그곳으로 시선을 집중하는 사이 본대는 그것을 이용하여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군정
몽골에 의해 정복된 지역에서 무력저항이 진압되고나면 몽골은 그때부터 파괴행위를 그만두고 계산된 재건을 시작했다. 이때 정복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기구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군정이었는데 이것은 20세기 이전 등장했던 군정들중 가장 잘 계획된 군정체계였을 것이다. 민간행정은 주로 몽골이 만족할만한 지도자에 의해 처리되었고 그들은 그 지방에 머무는 몽골군의 지원과 관리를 받았다. 점령지에서는 곧 인구조사가 실시되고 효율적인 세금기관이 설립된다. 징기스칸은 점령지가 경제적으로 그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점령지에서 거둬들인 자금은 지방정부와 점령군을 유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카라코룸에 공물로 보내는데 사용되었다.
몽골은 점령지에서 분쟁이 계속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지했다. 법률과 질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 결과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몽골지배하에서 침략전보다 더욱 평화스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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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밀리터리 발전사편에서 만약 크레시에서 프랑스군이 아닌 몽골군이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은근슬쩍 언급하면서 반응들을 유도해내려고 했는데 아무도 언급을 안해서 삐졌음ㅜㅡ
밀리터리 발전사 - 맘루크(Mamluk)
맘루크의 술탄은 이슬람을 재통합하여 그 지배영역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일부 상류 유프라테스 계곡, 아나톨리아 동남부, 히야즈(Hijaz, 아라비아 사막 서쪽 산악 지방), 수단 북부, 키레나이카(Cyrenaica)에 이르렀다. 그들이 첫번째로 한것은 몽골의 세력을 아인 얄루드(Ain Jalud)에서 제거한 것이었고 그다음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지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맘루크 지배하에서 계승은 세습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술탄좌는 곧장 강하고 세력이 큰 에미르에게 돌아갔고 이는 자신의 자리가 전복되거나 한 지방을 상실할 위협 때문에 먼 지방의 사령관을 임명할때마다 술탄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러므로 한명은 지방총독, 한명은 요새책임자 이런식으로 두명의 사령관을 임명하고 자주 자리를 바꾸는 것은 지배계급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였다. 술탄위의 안정과 권력은 술탄에 의해 이집트에 봉토를 하사받은 근위대 장교들의 충성심에서 나왔다. 이들 에미르들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봉토의 삼분의 이를 사병맘루크들에게 분배하고 그들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맘루크군의 주력은 세부분으로 나눠지는데 둘은 근위대의 두세력(근위대도 여러부대로 나눠지는데 진정한 의미의 근위대는 술탄이 제일 총애하는 부대였다. 여기서 "두세력"이란 술탄의 총애부대와 다른 맘루크들을 뜻하는 것이다)과 그들이 거느린 사병맘루크들이었다. 전체군대가 맘루크로만 이뤄지는것은 아니었고 베두인, 투르코만, 쿠르드 그리고 가끔씩 콰리즘(Khwarism) 용병들도 고용되어 군대의 세력이 늘어났다. 그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지에서 모집된 모집병들도 있다. 이들 모집병들은 다른 이슬람 수장국들과는 다르게 질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으며 특히 알레포와 하마(Hama) 출신들이 유명했고 자지라(Jazira) 지방의 무라(Mura)족 전사들은 무장이 잘되어있기로 유명했다.
14세기초 근위대의 세력은 이천명의 병력에 사십명의 장교들로 이뤄져 있었지만 13세기에는 이보다 약간 적었을 것이다. 1281년 홈스(Homs) 전투에서 칼라운(Kala'un)이 일시적으로 고립되었을때 그의 맘루크는 천명뿐이었지만 삼년후 몽골이 사자를 보내왔을때 맘루크들은 천오백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가 가진 맘루크의 총수는 1290년경 만이천명에 달했다가 1299년에는 이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모두 그가 직접적으로 거느린 군대가 아니고 천인수장(emir of one thousand)이라 불리는 에미르들이 이름대로 각각 천명씩을 거느렸고 그들의 밑에는 하위에미르들은 사십명씩을 거느렸으며 그들의 밑에는 최하위의 열명의 부대를 포함했다.
칼라운 휘하에서의 맘루크들의 급격한 증가는 그가 Burdjiyya 부대를 그의 근위대로 삼은것에 그 이유가 있다. Burdjiyya의 총수는 삼천칠백명으로 이들은 카이로 요새의 탑들에 숙영했기 때문에 탑이라는 의미의 Burdj가 이름에 붙은 것이다. 이들은 체르케스(Circassia)와 불확실하지만 아르메니아 출신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전체맘루크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다. 다른 맘루크들은 킵차크인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다수의 몽골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칼라운의 선임자들을 살해했으며 그들의 주인으로 하여금 권좌를 잡게 만들었다.
지방의 베두인 병사들이나 이제는 급격히 쇠퇴하는 바흐리 부대는 삼류로 취급되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해안지방의 요새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때는 고위맘루크들이 이러한 임무에 종사할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단기에 그쳤고 명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카이로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압바스 시절의 특수부대들도 아직 맘루크군대에 남아있었다. 나프타 튜브로 무장한 오백명의 척탄병들과 알레포에서 충원된 공병들이 그들이다. 군사원정중에는 물자를 운반하는 낙타들이 동행했으며 노새는 가끔 쓰였고 바퀴는 오직 공성기구들에만 사용되었다. 군대의 규모가 클때는 팔백에서 천마리의 낙타가 경갑운반에 사용되었다고 하며 맘루크 한명당 두마리분의 짐을 날랐다고 한다. 짐의 비율은 비(非)맘루크 병사들 세명당 낙타 두마리였다고 하는데 낙타관리병들은 한명당 세마리의 낙타를 관리했다. 이것외에도 맘루크군은 곳곳에 보급창을 두어 식량과 예비용 말과 낙타를 비축해두었다. 그외 전염병과 그로인한 계획차질을 예방하기위해 종군의사와 약사, 의료품의 동행은 필수였다.
맘루크들이 전쟁만큼이나 신경쓴것은 바로 악대였다. 술탄의 악대에서는 사십개의 케틀드럼과 네개의 북, 네개의 오보에, 이십개의 트럼펫을 연주했다. 악대를 가지는 것은 상당한 영광으로 이를 허락받은 에미르들은 북의 군주(Lord of the Drums)라고 불렸다. 악대를 소유했던 사십인수장들은 삼십명인데 이들은 열개의 북, 오보에 두개, 트럼펫 네개를 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러한 악대는 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북은 소리에 익숙치 못한 적기병의 말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281년 홈스 전투에서 본대에서 고립된 칼라운은 모든 북들을 멈추게 하여 몽골의 시선을 끌지않으려 했다. 승리한 군대가 카이로에 들어가면 승전고는 칠일동안 멈추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적에게 빼았은 북들은 찢겨지고 전리품으로 취급되었다.
군사동원은 북치는 소리와 깃발신호로 이뤄졌으며 이에 따라 전군이 훈련받은대로 사열했다. 이렇게 모인 맘루크들에게는 장비와 필요한 물품들을 위한 돈이 지급되었으며 명령서가 하달되었다. 군경찰들은 병사들이 제시간에 모이는지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다.
맘루크군대는 맘루크 집권이후 항상 카이로 근처에서 모였으며 분쟁이 이집트에서 일어났을 경우 수도 근처에서 싸우기를 원했다. 1248년 아이유브(Ayyub)는 하이집트 북동쪽에 al-Salhiyya라는 마을을 세워 시리아 진군시 집결소 역할과 시나이 사막을 넘어 다시 되돌아왔을 경우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하게 하였다. 맘루크들은 이 마을을 단지 돌아올때 쉬는 장소로만 이용했다. 진군할때 주로 가는 길은 카이로-가자-Baysan-다마스코스-홈스-하마-알레포로 통하는 길이었다. 행군중에는 정찰병이 파견되어 사방을 정찰하고 다녔다.
가는 시간은 카이로에서 가자까지가 11~12일, 가자에서 Baysan까지는 5~6일, 다마스코스까지는 3~4일, 홈스는 2~3일, 하마에서 알레포까지는 2~3일이었다. 각 도시에서 쉬는 시간은 가자는 3~5일, Baysan 2~3일, 다마스코스 5~7일, 하마 2~3일이었다. 홈스에서 하마까지 걸리는 시간과 홈스에서 쉬는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바이바르스는 잘 조직된 포스팅-하우스(posting-house) 체제을 운용하여 제국의 각지와 수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갈아타는 말들을 예비하도록 만들었다. 중앙과 지방과의 보고와 답변은 일주일에 두번씩 이뤄졌다. 아랍 칼리프령을 따라한 비둘기연락망도 있었는데 수도의 요새와 각지에는 이러한 비둘기집이 있어서 특정한 장소만을 날아다니도록 훈련시킨 비둘기들을 이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술탄의 특명을 전달하는 비둘기는 특별한 표시로 다른 비둘기들과 구분되었으며 오직 술탄만이 날려보낼수 있었다.
기본적인 진형은 tulb로 복수로는 atlab라고 한다. 맘루크들은 하나의 tulb를 이뤘는데 다른 tulb들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Tulb는 느슨한 진형으로 병사들의 숫자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보통 부족과 지역별로 하나의 tulb를 이뤘으며 각각 한명의 에미르들이 지휘했다. 맘루크들의 tulb는 다른 모든 tulb들을 다 합친것보다 더 강하고 세력이 컸다.
맘루크나 전임 아이유브 왕조는 해상세력이 아니었다. 1270년 맘루크가 보유한 전함대가 키프로스 해안가에서 난파당했는데 상당수의 제독들과 수백명의 선원들이 포로로 잡혔지만 그중 맘루크는 한명도 없었다. 해병이라는 뜻의 ustuli는 사실 기병인 맘루크들에게 모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함대는 전의 함대가 보유한 전함들이 모두 폐선되고 난후에야 만들어졌으며 이런 현실때문에 효율적인 해군체제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아이유브 왕조와 맘루크들은 이러한 해군력의 부족을 자신들의 손에 들어오는 모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항구들을 파괴함으로서 매꿨다. 하틴 이후 이런 정책들은 열정적으로 행해졌으며 아스칼론, 아르수프, 카이사레아 등은 현대까지 폐허로 남았고 야파(Jaffa)와 아크레는 16세기까지 작은 마을로 전락해있었다. 이러한 항구파괴정책은 결정적으로 경제적인 쇠퇴를 불러와 나중에 오스만 투르크에게 정복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