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5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7.20|조회수1,166 목록 댓글 0
  몽골, 또 다른 한국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0>
  2005-08-09 오후 8:00:14
  『원사(元史)』는 또 하나의 『고려사(高麗史)』
  
  1990년 대만에 거주하는 세계적인 몽골인 학자 한촐라 교수는 한국에 도착하자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라고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한촐라 교수의 고향은 동명성왕의 원주지로 추정되는 홀룬보이르 초원(대싱안링 북동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촐라 교수의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한국이 몽골의 '어머니의 나라', 이 말은 아마도 몽골의 시조신인 알랑고아의 아버지가 고주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알랑고아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특히 유목생활에서 남편이 없이 살아갈 때의 그 처절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명성왕 원주지(추정). ⓒ김운회  

  칭기즈칸의 어머니도 알랑고아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처절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자식을 키웠고 그 아들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 몽골에게는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바로 알랑고아이며 민족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의 나라가 한국일 수밖에요. 한국은 바로 고주몽의 나라이니까요.
  
  몽골에서는 한반도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즐겨 입는 무지개의 일곱 색깔 그 색동옷의 고향이 바로 몽골입니다.
  
  솔롱고스, 한마디로 '꿈의 나라'입니다. 모질게 춥고 힘든 유목생활에서 끝없이 남으로 내려오고 싶은 몽골의 소망의 표현이 바로 '솔롱고스'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몽골은 또 다른 한국'이고, '한국은 또 다른 몽골'입니다.
  
  한국에서는 복숭아나무를 귀신을 쫓는 나무라고 하여 불에 태우지를 않지요. 몽골은 불로써 모든 부정을 없애는데 복숭아나무를 절대로 불에 넣어 태우지 못하게 합니다. 몽골에 있어서도 복숭아나무는 바로 귀신을 쫓는 나무지요.
  
  터키 말이나 몽골어·한국어·일본어가 유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긴 이야기는 못하고 제가 별로 아는 바도 없으니 한두 가지 예만 들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검다(black)라는 말에 대해서 이들 언어들을 보면 다음과 같지요.
  
  터키어 ――― 몽골어 ――― 한국어 ――― 일본어
  카라(kara) 카르(kar) 검다 구로(くろ)
  
  그리고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의 경우 중국의 문헌에는 각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和林) ·화령(和寧) 등으로 쓰입니다. 유목민들이 가진 천손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태양(太陽, 日)을 보면 몽골어에서는 '나ㄹ'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말[날]과 완전히 같지요. 유목민들이 동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은 흉노·돌궐·거란 이래의 전통입니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태음력으로 1월1일을 차강사르(흰색의 달)라고 하여 최고의 명절로 칩니다. 설날을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것은 백색이 길상·풍부·순결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빔을 입고 밖으로 나가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동이 트면 먼저 해가 뜨는 방향으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립니다. 하늘에 예를 올릴 때 마유주나 우유 등을 하늘로 뿌리는데 이것을 차찰[배천(拜天 : 하늘에 절함)]이라고 한다. 이 같은 의식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샤만 신앙의 유풍이지요. 우리가 하는 해맞이 풍습과 다를 바 없지요.
  
  몽골은 우리와 같이 백색 숭배의 풍습이 강합니다(몽골이 훨씬 더 심하죠). 몽골인은 종종 겔의 입구에 천마(天馬)를 그린 깃발을 내걸고 있는데 말은 행운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애마(愛馬)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 말이 없으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몽골인들은 백마(白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한답니다.
  
  동몽골의 다리강가 지방에는 한국의 색동저고리와 같은 전통의상이 내려오고 있지요. 이 일대는 고대의 코리(貊)족의 이동과 관계가 있고, 또 그들이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성이 깊습니다.
  
  겨울철에 몽골의 아이들은 비석치기나 '샤가'를 합니다. 샤가는 우리의 윷놀이와 같은 놀이죠. 이러한 풍경은 30~40년 전에 한국의 겨울에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습니다. 물론 윷놀이는 아직도 즐기는 놀이이지만요.
  
  (1) 너무 닮은 그대
  
  제가 잘 아는 유명 방송인 한 분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이 유명 방송인은 몽골 민속이나 우리 뿌리를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일로 바이칼 호수에 취재차 갔다가 어느 몽골의 오두막에 들렀답니다. 겉모습은 우리네 강원도의 산골에 있음직한 집과 흡사하더랍니다.
  
  그 분은 아무 생각 없이 집안에 들어섰고 그 집에 있던 몽골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는데 둘 다 너무 놀라서 서로 부둥켜안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 분의 말씀은 이 몽골 할머니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과 똑 같았다는 것이지요. 그 몽골 할머니도 당신과 너무 닮은 이 분을 보고 그만 끌어안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잠시 정신을 차린 후 몽골 할머니의 입에선 러시아 말이 나오고 자기의 입에서는 한국말이 나와서 오히려 어색해지더랍니다.
  
  그 후 이 분은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남다른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몽골과 접해본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알 수 없지만 어떻게 한국인과 이렇게 닮을 수가 있지?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친근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사실로 말하면 과거의 만주 쥬신도 너무 닮아 구별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이 부분은 만주쥬신 부분에서 살펴보지요), 그들은 지금 한족(漢族)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찾기가 어렵죠. 만주에서 만주쥬신을 만나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청나라 말기 - 모택동 정부 이후 한족들이 대거 이주 정착하였기 때문이죠.
  
  몽골은 어떻게 보면, 중국과 비교적 많이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쥬신의 원형을 잘 보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주 쥬신은 중국과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중국에 쉽게 동화되어버린 감이 있습니다.
  
  몽골전문가인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형제 관계였다고 합니다. 멀리 대흥안령(大興安嶺) 남단에서 발원하는 할흐강(江)이 보이르 호수(湖水)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할힌골솜'이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는 석상(石像)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꼬우리(꾸리 : Khori - 고구려, 고리, 구리)'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석상을 중심으로 서쪽은 몽골이 살고 있고 동쪽은 코리족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서로 통혼(通婚)하며 같은 풍습과 민족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고주몽)으로부터 몽골과 고구려로 나눠졌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초원(草原)에서 몽골과 꼬우리(꾸리) 양족(兩族)의 여자들이 오줌을 누다 서로 만나면 몽골의 여자는 왼손을, 꼬우리족의 여자는 오른손을 흔들어 형제애(兄弟愛)를 과시하곤 했다고 합니다.
  
  몽골인들의 고유 신앙을 한족들은 산만교(珊蠻敎), 또는 살만교(薩滿敎)라고 불렀습니다. 산만((珊蠻 : 비틀거리는 야만인)이라니 무슨 야만족(野蠻族)처럼 들립니다만 샤먼, 즉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샤먼 신앙, 즉 샤머니즘을 말하는 것이지요. 한족(漢族)들은 꼭 이런 식으로 표기를 해야 적성이 풀리는 모양입니다. 이 샤만에 대하여 "여진어로 무구(巫嫗 : 늙은 여자 무당)(『三朝北盟會編』卷3)", 또는 "하늘에 대하여 기원하는 사람(祝神人)을 말한다(『滿洲源流考』卷3)"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만주 몽골 쥬신의 가장 일반적인 신앙인데 반도 쥬신(한국)의 경우에도 매우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즉 자연계에 모든 만물이 정령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님(天神)이 되는 것입니다. 무당이 북을 치고 방울을 울리고 춤을 추어 귀신을 부르고 병을 고치는 등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오늘날에도 한국에서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대부분 사람들의 카운슬러(counsellor)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들이 부부 금슬관리에 대학진학 상담, 비즈니스 고문(顧問)은 물론이고 의사노릇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샤먼 신앙의 전통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몽골인가 흉노인가?
  
  여러분들은 그 동안 흉노(匈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흉포하고 농경민을 괴롭히는 초원의 무법자로 말입니다. 흉노의 주무기는 활이죠.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이구동성으로 흉노는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단순히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해서만 강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탁월한 정보수집능력과 전술의 유연성(flexibility)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후퇴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후퇴하면서도 활로 적에게 치명상을 입혀 전세(戰勢)를 역전시키기가 다반사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흉노, 도대체 이들은 누구입니까?
  
  우선 말부터 봅시다. 흉노는 중국어로는 슝누[xiongnu]인데 몽골어의 훙(XYH)에서 나온 말로 문어(文語)에서는 훙누로 들립니다. 이 말의 뜻은 몽골어로 그저'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음차(音借 : 음을 빌려 표현)하여 한족(漢族)들은 흉노(匈奴)로 불렀지요. 그런데 이 흉(匈)자가 '입심이 좋은(시끄러운)' 이라는 의미이고 노(奴)자는 노예(奴隸)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이 그 민족의 명칭이 된다는 것도 거북스러운데 이것을 아예 '시끄러운 노예'라고 표기했다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한국인의 명칭을 한족(중국인)이 '사기 사(詐)'와 '누더기 람(襤)'을 사용하여 詐襤(사람 : 성품은 사기를 잘치고 몸은 거지 꼬락서니)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모욕적인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흉노라는 말은 적합한 말이 아니니 다른 말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황병란의 연구에 따르면 흉노(匈奴)는 산시(陝西) 지역의 서남지역·서북지역·허베이(河北) 지역 대부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주(周)나라 때는 융적(戎狄[룽띠]), 또는 견융(犬戎[취엔룽])이라고 불렀고 전국시대 이후에는 호(胡), 또는 흉노(匈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황병란, 『중국고대사』(1958) 102쪽]. 즉 흉노와 호(胡)는 다른 종족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흉노는 오히려 유럽에 가까운 인종으로 치부하고 호(胡)는 만주족을 뜻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이 부분의 전문 연구자인 정수일 교수(단국대)에 의하면, 흉노는 특정 종족집단이 아니라 알타이 산맥의 동남쪽에 거주했던 유목민의 총칭이라고 합니다. 크게 본다면 이 민족에서 동으로는 쥬신이 나타났고 서쪽으로는 훈족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흉노가 서유럽을 뿌리째 흔든 '훈족'이라는 것은 1750년대 프랑스의 드 기네(Joseph de Guignes, 1721~1800)가 제시한 이후 여러 가지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흉노는 유럽이나 일본학자들에 의하면 몽골계통이나 투르크 계통, 몽골-투르크 혼합계통·슬라브 계통·이란 계통 등에 속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부 유럽까지 가는 동안 많은 피가 섞였겠지요.
  
  흉노는 모두루 대단군[모돈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 시대가 전성기였습니다. 그는 칭기즈칸과 유사한 분으로 알타이 주변의 초원 지대의 대부분 민족을 하나로 묶어버립니다. 이때 흉노의 땅은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 등에 이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유념할 것은 정수일 교수의 지적처럼 흉노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흉노란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집합체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여러 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에서 나타납니다. 사실 흉노만 하더라도 휴도(休屠, 혹은 屠各)·우문(宇文)·독호(獨狐)·하뢰(賀賴)·강거(羌渠) 등 여러 부족이 있었고 또 하나의 부족이 몇 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흉노 = 쥬신'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쥬신은 흉노의 일파로 주로 알타이 동부 지역에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지에 거주하는 민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알타이 서부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초원 쪽으로 진출한 민족은 제외하는 것입니다. 물론 민족적으로 많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천 수백 년 이상을 단절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같이 분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유목민이 본 세계사>에서도 중국의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 때부터는 동호(東胡)와 흉노(匈奴)를 다른 듯이 서술하기는 해도 한(漢)나라 때까지도 흉노니 동호니 하는 말은 특정한 민족이나 부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도 사용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후 지속적으로 흉노와 한(漢)나라는 투쟁의 길로 접어들다가 흉노의 일부는 서쪽의 초원으로 이유도 모르게 사라져가고 나머지는 남흉노·북흉노로 나눠져 중국의 동북방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몽골 쥬신을 북흉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흉노는 중국에 복속하고 북흉노는 후한 명제(明帝, 58~75)와 화제(和帝, 89~105) 때 한나라에 쫓겨 일부는 서역으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선비(鮮卑) 쪽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들은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290~306)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다시 흥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다시 그림을 통해 살펴봅시다.
  
 
  기원전후의 흉노의 활동영역(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262쪽 재구성). ⓒ김운회

  
  그림을 보시면 한족(漢族)이 흉노라고 부른 종족들이 알타이를 중심으로 퍼져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서쪽 지역의 흉노들은 더욱 서쪽으로 옮겨가고 있고, 동쪽 지역의 흉노들은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서쪽으로 이동한 민족들을 훈족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죠). 몽골의 경우, 이들 흉노족들의 거주영역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습니다.
  
  흉노(훈)는 보드(Bod)라 불리는 혈연 공동체가 보둔(Bodun)이란 부족공동체로 확대되고 이것이 정치적 종합체인 흉노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부족연합체인 유목 국가로 성장합니다. 흉노는 광대한 목초지에 분산되어 사는 유목인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을 지배하는 핵심 지배집단이 있어서 전체 부족들을 이끌어 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지배집단이 가진 풍습과 전통이 전체 흉노(훈)를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흉노의 정치적 특성은 족장의 계승이나 전쟁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각지의 수령들이 어느 한 곳에 집합하여 회의한 후 중요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몽골 쥬신이나 만주 쥬신도 같은 행태를 보입니다.
  
  지배선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민족은 대부분 승리한 민족에 흡수되는 것이고 흉노가 북아시아를 제패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가 흉노(皆以爲匈奴)"라고 했으며 선비가 장악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는 선비(皆自號鮮卑)"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지배선, 「匈奴·鮮卑에 관한 二·三」 『동양사학연구』제25호, 171쪽).
  
  이 부분은 쥬신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농경화한 민족들이나 한족화(漢族化)된 민족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한족(漢族)들은 정체성이 워낙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아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세계의 주인 칭기즈칸의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쥬신과 한족의 이질성(異質性)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쥬신의 생태는 마치 자연계의 볼복스(Volvox)를 연상시킵니다.
  
  볼복스(Volvox)류는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의 이행 단계에 있는 생물로 경우에 따라서 서로 떨어져 살기도 하고 함께 모여서 살기도 합니다. 볼복스는 단세포생물이 5백~5천 개가 모여서 공 모양의 군체를 이루는데, 군체(群體)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운동·먹이섭취·생식 등의 역할을 분담하도록 특수화됩니다. 그러나 볼복스는 여러 세포로 구성되어 있어도 필요에 의해 합쳐져 있기 때문에 다세포 생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저 군체로 보죠.
  
 
볼복스(Volvox). ⓒ김운회  

  볼복스는 개체 상호간에 세포질 다리로 연락하여(개체 상호간에 서로 연결하는 기능이 나타나) 편모의 움직임이 통합되어 있죠. 세포에는 이미 역할분담이 있고 생식전문 세포가 있어 새로운 군체를 만듭니다. 이 같은 군체의 특성은 다른 경우도 상당히 유사합니다.
  
  예를 들면 점균은 흩어져 있는 이웃들과 느슨하게 집합체를 만들어 하나의 군체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로 모이면 점균이 아니라 1~2mm의 괄태충 모양으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게 되면, 그 가운데 일부는 포자가 되고 다른 부분은 포자를 지탱하다가 결국은 소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주위의 조건이 좋아지면 포자는 발아하여 다시 분열을 하는 원래의 단세포로서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을 보면 교묘하다고 할 만큼 세포가 모여서 서로 도우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이 개체에서 군체를 이루는 생물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은 같은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체들 내부에 흐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공통성이 이들의 결합을 촉진하는 것이죠. 종류가 다른 것은 하나로 합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목민들이 족보(族譜)를 중시하는 이유도 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속성 때문이겠지요. 유목민들은 공통성을 끝없이 유지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족(漢族)과 쥬신을 섞어 놓았을 경우에 화합이 안 되는 이유도 그 근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쥬신계열의 정복자들이 중국을 통일하고 더 큰 영토와 영광을 주어도 한족들은 그들을 자기들의 황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한족과 쥬신은 서로 합쳐질 수가 없습니다. 보세요, 아무리 새끼 중국인들이 천년 이상 한국을 지배하고 중국에 동화(同化)하려고 온갖 몸부림을 쳐도 한국인들이 중국인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아마 새끼 중국인들도 한국을 중국의 한 성(省)으로 만드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할 것입니다.
  
  일본인(열도쥬신)과 아이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누는 열도쥬신과 수천 년을 같이 살아도 융합하지 못하고 물위에 뜬 기름처럼 살다가 훗가이도(北海島) 저편으로 밀려갔지요.
  
  그래서 몽골인들은 아무리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그들을 만나는 순간 이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한족(漢族)들은 TV나 영화 등을 통해 매일 봐도 이상하게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흉노가 세상을 지배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가 흉노(皆以爲匈奴)"라고 했으며 선비가 장악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는 선비(皆自號鮮卑)"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이들은 같기 때문이죠.
  
  유목민들의 역사를 보면 외부에서는 알기 어렵지만 영걸(英傑)이 나타나면 흩어진 부족들이 하나로 쉽게 뭉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국가라는 정치 체제(political system)를 갖추어져야만 '민족적 일체감(national identity)'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유태인들이 유태의 유일신에 대한 숭배 신앙이 있음으로 일체감을 형성하듯이 유목민들도 어떤 일체감, 예를 들면 천손족(天孫族)이라든가 샤머니즘이라든가 하는 어떤 공통의 요소들이 이들을 뭉치게 하는 힘으로 보입니다.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은 국가의 생성 중간 단계 상태에서 수천 년간 이어왔습니다. 유목민들은 볼복스처럼 개별적인 부족으로 살기도 하고 환경이 되면 국가를 구성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부족연맹의 성격이 대단히 강하고 각 부족간의 합의에 따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집니다. 마치 가야 연맹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지요. 가야는 여러 개로 되어있지만 가야라는 하나의 연맹으로 단결력을 과시하지요. 이런 환경 하에서는 왕권 즉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황제 권력들이 제대로 형성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메이저(major) 부족이 나타나면 그 부족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성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쥬신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있지만 언제라도 하나가 되려는 속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송사(宋史)』에, "거란의 경우, 강토는 비록 넓었지만 인구와 말의 수가 적어서 남쪽으로 중국을 경략할 때는 반드시 고려·발해·여진·실위 등을 이끌고 회전(會戰)한다.(『宋史』326 郭諮列傳)"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서는 "거란의 풍속은 말갈과 같다(『北史』94 契丹)."고 하여 만주쥬신(숙신계)과 몽골 쥬신(동호계)이 다르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만주 쥬신과 몽골 쥬신을 다르게 보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은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는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할 때는 결혼을 통하여 더욱 결속을 다지고 하나로 결합하여 그 힘을 바탕으로 중국을 경영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의 결합은 동등한 부족의 재생산 과정인 셈이지요.
  
  예를 들면 청나라의 경우에는 한족(漢族)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하였지만 몽골에 대해서는 철저히 혼인을 장려합니다. 청나라 황제마다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로 삼고 청 황제의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의 왕공의 자제와 결혼을 합니다[임계순, 『청사』(신서원 : 2001)]. 몽골의 황녀(皇女)와 고려의 왕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설이 다소 길었군요. 이제 정리해 봅시다. 흉노란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집합체이고 쥬신은 흉노의 일파로 주로 알타이 동부 지역에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지에 거주하는 민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알타이 서부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초원 쪽으로 진출한 민족은 제외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쥬신과 흉노의 관계를 아시겠죠?
  
  (3) 쥬신의 나라 몽골
  
  몽골은 8세기 무렵 흑룡강 상류인 에르군네(Ergüne) 강[河] 유역에서 몽올실위(蒙兀室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당나라·위구르·토번 등이 붕괴, 또는 와해되는 틈을 타서 지속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11~12세기 무렵에는 오난(Onan) 강[河] 일대까지 진출합니다. 오난강으로 진출한 몽골은 게레이드(Kereyid)·메르키드(Merekid)·타타르(Tartar)·나이만(Naiman) 등의 부족들과 서로 다투면서 성장하다가 1206년 칭기즈칸을 중심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민속원 : 2001) 205쪽].
  
  몽골의 기원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몽골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몽골은 한나라 초기 흉노의 모두루 단군임금이 동호를 제압하자 살아남은 부족들이 동쪽으로 와서 그 가운데 어떤 무리는 선비가 되고 어떤 무리는 오환(烏桓)이 되고, 후에 이들은 다시 실위(室韋 : 몽골)·거란(契丹)이 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에 있는 동호는 거란이 되었고 북쪽에 있는 동호는 몽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 현재의 흑룡강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몽골 또는 모골 또는 머골(蒙兀)이라는 이름이 이 때 나타났다는 것이지요[屠寄,『蒙兀兒史記』1 世紀].
  
  몽골의 원류인 동호계는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습(飁)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 지역) 등 입니다(『新五代史』74 契丹 ; 『北史』94 奚).
  
  해(奚 - 여자노예라는 의미), 습(飁 - 큰바람), 실위(室韋 - 집에서 잘 다듬은 가죽) 등 말들이 이상하죠? 대부분 욕설에 가깝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 이유는 이 말들이 음차(音借 : 발음을 빌림)를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족(漢族)들은 여전히 이들을 욕설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족을 잘 봐주려고 해도 신성한 민족이름이 이게 뭡니까? 이렇게 함부로 불러도 됩니까?
  
  이 한자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에 가깝게 나타납니다. 즉 해(奚 [xī]), 습(飁 [xí]), 실위(室韋 [shìweí]) 등으로 예(濊), 또는 예맥(濊貊)과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똥고양이와 단군신화' 참고). 발음으로만 보면 이들은 예맥과는 구별이 잘 안 되지요. 결국은 철과 관련된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해는 거란이 되고 실위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는 거란과 동류인 "해(奚)는 본래 흉노의 별종(『新五代史』74 契丹)"이라고 합니다. 『북사(北史)』에 따르면, "해는 거란과 이종동류로 본래 고막해(庫莫奚)라 하였는데 그 선조가 동호의 우문(宇文)의 별종(『北史』94 奚)"이라고 합니다. 요나라 태조가 해(奚)를 정벌하면서 "거란과 해(奚)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하나의 나라이다(『遼史』72 宗室列傳)."라고 합니다. 요나라는 자신의 발상지인 현재 내몽골 자치구 빠린줘치(巴林左旗)를 상경(上京)으로 하였습니다(『契丹國志』22 四京本末).
  
 
  거란 발상지. ⓒ김운회

  『북사(北史)』에 따르면 "실위는 대체로 거란의 부류로서 남쪽에 있는 것은 거란이 되고 북쪽에 있는 것은 실위라고 불렀다.(『北史』94 室韋)"고 합니다. 실위는 발음이 예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예맥이나 숙신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사(北史)』에서도 "실위는 풍속이 말갈(靺鞨)과 같다(『北史』94 室韋)."라고 합니다. 이 실위는 바로 이전의 오환·선비이며 그 후 거란·해·실위가 되고 후일 몽골이 되지요.
  
  선비·거란·오환·해·실위·말갈·숙신·동호 등등으로 불러왔던 민족들이 실제로는 별로 다르지 않는데 그 동안 우리는 너무 다르게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모두가 한족(漢族)의 사가(史家) 덕분입니다. 그래서 한족(漢族)들이라면 지방의 특색 정도에 불과한 것을 쥬신의 경우에는 무슨 유럽의 나라들과 한국이 다르듯이 묘사를 한 것이지요.
  
  이 점은 새끼중국인들의 근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대부분의 한국 사가들도 그대로 가진 속성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을 대표한다면서 민족사학에 대해서 이렇게 비난하고 있지요.
  
  "만주의 지배족이었던 여진·거란·몽고 등 이른 바 동이족 전체를 배달족(倍達族)이라는 이름 아래 동족(同族)으로 간주하고 배달족 전체의 시조를 단군(檀君)에서 찾고 단군 이래의 고유 신앙을 민족문화의 핵심으로 높이 선양하였다 … 이러한 민족주의 사학은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이 정신적 기초가 되어 일제에 많은 타격을 주고 만주식민사업을 방조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우리 민족의 범주를 동이족 전체로 확대 해석한 것은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한영우,「총론」『한국사 특강』(서울대학교 한국사 특강편찬위원회 : 2003) 9쪽]."
  
  이것이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연구의 종합적 발전적 성과"로 자화자찬하면서 대학 교양교재로 내놓은 책입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민족주의 사학이 오히려 일본의 극우 제국주의자들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를 않나(망국의 백성들이 만주에서 식민사업을 제대로 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역사를 동이족 중심으로 본다는 방식 자체가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쥬신의 연구, 참으로 갈 길이 멀군요. 저도 최소 50년은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만주와 몽골 쥬신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쥬신에 대한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선비·거란·오환·해·실위·말갈·숙신·동호 등등으로 다르게 생각한 것은 이들이 제대로 국가체제도 갖추지 못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지역적으로 기후라든가 환경에 따라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각기 독특한 풍습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특히 몽골의 경우에는 자연환경이 가장 혹독한 쥬신의 북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 문화의 일부는 쥬신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형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식주(衣食住)라든가 변발과 같은 머리 모양새·유물·분묘제도·결혼풍습·샤머니즘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일 집단으로 판단할 수 있는 주요한 문화적인 근거들을 상당한 부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한족(漢族)이나 '새끼 중국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쥬신은 적어도 한족만큼 자부심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 예가 있나요? 그런 예는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봅시다. 몽골이 같은 민족인 거란인들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거란인들이 지나치게 한화(漢化)하여 동질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몽골도 중국을 경멸하여 '거란'이라고 부르죠.
  
  여기서 거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 넘어갑시다. 거란은 한국과 중국의 사가들에 의해 외면을 받아왔지만 쥬신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나라입니다. 몽골은 바로 거란과 같은 동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란의 역사를 아는 것은 몽골의 역사를 아는 것도 됩니다.
  
  거란은 "과거 흉노의 종족이다(『舊五代史』137 契丹)"라고 하기도 하고 "거란은 동호로 그 선조는 흉노에게 격파되어 선비산에서 살았다(『唐書』129 北狄傳)"고 하기도 하고 "거란은 본래 선비족(『五代會要』29 契丹)."이라고 합니다. 『구오대사』에 따르면, "거란의 땅은 본래 선비의 옛 땅이었다(『舊五代史』137 契丹)."고 합니다.
  
  거란은 쥬신의 전통 그대로 태양을 숭배하여 매월 초하루 아침[朔(초하루)旦(아침)]이면 동쪽으로 향하고 태양에게 절을 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마음을 견고히 했다고 합니다(『新五代史』「四夷附錄」契丹條). 뿐만 아니라 거란은 쥬신들 가운데 샤먼 신앙이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쥬신에게 있어서 샤먼은 정치적인 군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단군왕검(檀君王儉)도 종교수장(단군 : 샤먼)과 정치적 군장(왕검)을 함께 나타내는 말이지요.『요사(遼史)』에 따르면, 요나라의 태조는 "천명을 받은 군주는 마땅히 하늘을 섬기고 신을 경배한다(受命之君 當事天敬神 :「耶律倍傳」)"라고 하여 샤마니즘을 아예 국교(國敎)로 숭상합니다[島田正郞, 『遼朝官制の硏究』(1979) 321쪽].
  
  거란(契丹)은 무엇보다도 거란 자체가 바로 '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契丹'으로 쓰고 글단, 또는 글안·거란 등으로 읽으시니까 그것이 '쇠'라는 사실을 모르죠. 契는 중국 발음으로 바로 '쇠(xiè)'입니다. 놀랐죠?
  
  알타이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 : 서울대 교수)은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고(蒙古 : 몽골)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박시인『알타이 신화』232쪽)."
  
  즉 몽골도 역시 쥬신의 기본적인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쇠, 또는 금을 숭상하는 알타이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단 말이죠.
  
  거란은 부족들 가운데 큰 것을 대하씨(大賀氏)라고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8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의 우두머리를 대인(大人)이라고 불렀는데 항상 한 사람을 대인으로 추대하여 기고(旗鼓)를 세워 8부를 통솔하게 하는데 그 기간이 오래 되거나 나라에 재앙이나 역병이 돌아 목축이 쇠퇴해지면 이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원래 약속이 그러했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新五代史』72 契丹)."고 합니다. 이것은 쥬신의 일반적인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부여·고구려·신라·몽골·금 등 대부분의 쥬신의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러나 야루아버지(耶律阿保機 : 야율아보기)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마침내 군주가 되었고, 더 이상 여러 부족이 교대하는 관행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국왕을 칭하게 되었고(『舊五代史』137 契丹), 이로써 강력한 고대 정복국가로 탈바꿈합니다.
  
  이 점은 쥬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란이 부족을 통합하고 그것을 통해 1인 군주지배체제에 들어서면서 강력한 고대국가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정벌에 나서서 중국을 경영하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의 모범답안처럼 쥬신들이 답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다만 거란이 너무 중국화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소멸되는데 만주쥬신이나 몽골쥬신들은 한족(漢族)과 동화되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은 민족적 정체성을 견고히 유지합니다만, 최근 만주쥬신은 모택동(1949) 이후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거란은 야루덕광(耶律德光) 시기에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합니다. 야루덕광은 후진(後晋)의 고조인 석경당(石敬瑭)을 책봉하여 후진의 황제로 삼았습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따르면, "야루덕광은 진성(晋城) 남쪽에 단을 쌓고 석경당을 세워 황제로 삼고 의관을 스스로 벗어 입혀주면서 책봉하여 말하기를 '아들 진왕아, 나는 이처럼 너를 아들로 여길 것이니 너 역시 나를 아비처럼 생각하라'고 하였다(『新五代史』72 契丹)." 라고 합니다. 즉 거란은 한족(漢族)의 후진(後晋)과 부자지국(父子之國)의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舊五代史』48 唐書 末帝紀). 다시 말해서 한족의 국가인 후진의 황제가 거란의 황제에 의해 책봉되었고 이들은 서로 부자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진은 석경당이 죽고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더 이상 거란에 대하여 칭신(稱臣 : 신하를 칭함)을 거부합니다. 거란의 황제들이 어쩌면 너무 순진했던 것이죠. 거란 황제 야루덕광은 여러 번 이를 나무랐지만 한족의 황제는 도무지 반응도 없어 944년 후진을 공격하고 후진의 황제를 부의후(負義侯)에 봉하고 진국을 고쳐 대요국(大遼國)으로 합니다(『新五代史』72 契丹).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이와 같이 철저히 한족화한 나라들은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르네 그루쎄(René Grousset)가 말하듯이 "중국과 페르시아 문화는 비록 정복되었지만 도리어 거칠고 야만적인 승리자들을 압도하고 도취시키고 잠에 빠뜨려 소멸시켜 버렸다. 정복된 지 50년만 지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과 같은 생활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René Grousset,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 : 1998). 33쪽]."라는 것입니다. 거란이나 북위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거란이 원(元)나라 이후 돌연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한 민족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거란족 실종에 관한 의문" 등으로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되는 식은 아닙니다. 거란이 멸망했다고 그 동호계 주민들이 다 증발하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그 지배층이 지나치게 한화하여 그 계승자들이 없으므로 역사 속에 사라진 듯이 보이지요.
  
  최근 중국학계는 DNA 분석기법을 동원해서 거란의 핏줄은 "중국 동북 지방의 소수 민족인 다얼(達爾)족에 의해 상당부분 계승되고 있다(『중앙일보』 2004.8.5)"고 밝혔습니다. 이들 다얼족이 거론된 이유는 거란이 웅거했던 네이멍구(內蒙古) 초원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도 거란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학적 증명"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그들은 다얼족의 시조 설화는 "거란의 한 군대가 이 땅에 와서 지역 방어를 위한 성을 쌓은 뒤 선조가 됐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중국인들이 거란을 아예 다른 민족으로 보려고 하다 보니 나타난 결과지요. 아니면 상식(常識)이 없는 것이지요.
  
  거란족이 멸망하면서 거란 민족 모두가 어디로 도망을 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늘로 날아갔든가 땅으로 꺼졌습니까? 중국이나 한국이나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으니 그 민족의 실체를 볼 수 없는 것이죠. 거란은 다만 지배층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고수하여 중국 문화에 흡수되어버린 것이고 그 일반 국민들은 그저 쥬신으로 그 지역에 그대로 살고 있다가 금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몽골의 백성이 되기도 한 것이죠. 쉽게 말해서 다시 부족(部族) 상태로 회귀한 것일 뿐이죠.
  
  거란은 부족 상태로 금나라는 물론 원나라 때에도 일정한 지역을 독립적으로 지배한 흔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금나라는 요나라 거란의 백성들이 반심(叛心)을 가지지 않도록 여진족 2가구가 거란 1가구를 함께 살도록 했다거나(『元史』149 耶律留哥傳), 거란인 9만 명이 고려의 강동에 침입하여 웅거했다거나(『元史』208 高麗) 耶律留哥傳), 거란인들을 때로 단속하고(『元史』11 世祖紀) 요동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농기구를 지원하는(『元史』16 世祖本紀) 등의 기록들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1300년대 이후 역사책에서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들어오듯이 하늘로 날아갔거나 땅으로 꺼진 것이 아니라 몽골과 융합하여 하나가 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없지요.
  
  몽골이 거란을 경멸하고 중국조차도 거란으로 부르는 것은 같은 민족이면서 한족화(漢族化)하면서 같은 민족을 짐승취급을 하는 데에 대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원나라가 일본을 싫어한 것도 중국과 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가 일본과 가까워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침공의 원인이 됩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일본은 비밀리에 고려와 내통하고, 개국이래로 늘 중국과 교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류를 하기 위한 사신을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 장차 사해를 하나의 집으로 만들려하나 이렇게 서로 즐겁게 통교를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의 집안이 되겠는가?(日本密邇高麗, 開國以來, 時通中國, 至於朕躬, 而無一乘之使以通和好. 尙恐王國知之未審, 故特遣使持書布告朕心, 冀自今以往, 通問結好, 以相親睦. 且聖人以四海爲家, 不相通好, 豈一家之理哉?以至用兵 :『元史』卷6 本紀第6 世祖)"라고 합니다.
  
  『원사(元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동부나 북부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모르는 여진인이나 거란인들은 모두 몽골인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한나라 땅에 태어나 자란 여진인들은 중국인(한족 : 漢族)과 같이 대우한다(『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중국에서 자라서 중국어를 말하고 중국인과 동화된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하지만 여진이나 거란인들은 몽골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동안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이상한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몽골 - 여진 - 거란 등이 각기 다른 종족처럼 분명히 배웠거든요.
  
  그런데 위의 기록이나 그 동안의 논의를 보면 몽골·여진·거란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만 기준이 되는 것은 한족화(漢族化)하여 쥬신의 특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4) 또 하나의 『고려사(高麗史)』, 『원사(元史)』
  
  다음의 그림을 봅시다. 이 그림은 세계적인 대제국 몽골제국의 직할령을 표시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습 회사의 그림을 알기 쉽게 우리말로 재구성한 그림입니다.
  
 
대몽골 제국과 고려. ⓒ김운회  

  아마 이 그림은 여러분이 항상 보아오던 지도일 겁니다. 무심코 지나쳐서 이 지도의 본질을 못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세계 모든 나라가 몽골의 깃발 아래에 있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남아있습니다. 세상은 오직 몽골과 고려만이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에 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본과 베트남·인디아는 정벌하기가 힘들어서 못했겠지만 몽골 제국의 수도(首都) 바로 옆에 있는 땅을 직할령(직속령)으로 두지 않고 자치국으로 두었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마 고교 역사부도였다면 여러분들은 으레 한국역사부도이니 한국만 따로 빼놓았겠지 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세계적인 학습회사의 그림들을 번역하고 알기 쉽게 재구성하여 붙여놓았습니다.
  
  이상하죠? 왜 바로 자기의 수도 코앞에 있는 나라를 세계를 제패했던 무력을 가진 원나라가 그대로 두었을까요? 이제 그 의문을 한번 풀어봅시다.
  
  역사를 꼼꼼히 보면,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일부를 보면, 1224년 원나라는 저고여(扎古雅) 등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그만 살해되고 맙니다. 그 후 원나라 태종 3년(1231) 살리타이(薩里台, 또는 撒禮塔)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이 동생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元史』208 高麗傳).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초토화(焦土化)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원나라 황제의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그 시간 이후 잿더미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살됨을 의미하는데 말입니다. 몽골은 항복하면 평화롭게 받아주지만 반항하거나 대항하면 철저히 보복하고 응징하는 특성을 가진 나라지요). 이 부분을 현재 한국의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8쪽]."
  
  이상한 일이죠. 몽골 쥬신들이 반도쥬신에 대한 매우 강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나라 조정은 역대 고려왕에게 공주를 출가시켜 원나라 황실과의 혈통적인 결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나라 세조는 당시 만주쥬신(여진)들이 고려 땅을 침범하는 일이 있자 이를 엄금하도록 조치하고 관(官)으로 하여금 고려 국민을 보호하게 하고 파사부(婆娑府)에 명하여 군대를 둔전하게 하여 압록강 서부지역을 지키게 합니다(乙未, 禁女直侵軼高麗國民, 其使臣往還, 官爲護送. 命婆娑府屯田軍移駐鴨綠江之西, 以防海道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여러분도 시간이 나면 『원사(元史)』를 한번 보십시오. 이상하리만큼 『원사』에는 고려(高麗)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많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다른 어떤 사서보다도 고려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원나라는 마치 고려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와는 국교(國交)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원사(元史)』에는 신년 새해부터 고려에 대한 기사가 줄줄이 엮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와 관련해서는 조유(詔諭 : 황제가 친히 타일러 말하다), 위무(慰撫 : 위로하여 달래다), 조사(詔賜 : 황제가 친히 내리다) 등의 말들이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고려왕이 내조하면 원나라 황제는 우조답지(優詔答之 : 황제가 친히 넉넉하게 이에 보답함)합니다.
  
  『원사』의 세조기(世祖紀)에서는 고려왕이 황제를 속인 죄를 범하여 이를 책망하지만 달력을 보내주었고(詔責高麗欺慢之罪 又詔賜高麗王□曆), 고려왕이 황제의 조서에 대해 답이 없자 사신을 보내어 이를 나무라는(以高麗不答詔書, 詰其使者) 장면들이 나옵니다. 원나라의 세조는 고려의 군신들이 내조하자 "고려와 원나라는 군신의 관계라 할지라도 짐이 느끼는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高麗君臣, 感戴來朝, 義雖君臣, 而歡若父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조는 중국과 친한 일본으로부터 고려를 떼어내도록 하는데 만전을 기울입니다. 마치 고려가 딴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지를 시새움하는 듯합니다. 전 세계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계의 주인 원나라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운 광경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고려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기도 합니다(高麗使還, 以王□病, 詔和藥賜之 : 『元史』卷6 本紀第6 世祖三). 뿐만 아니라 고려의 술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세금을 면해주기도 합니다(免高麗酒課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칸). ⓒ김운회

  제가 보기엔 동아시아의 역사상 (고구려 이후) 원나라 때만큼 반도쥬신이 요동에서 활개를 친 예는 없었을 것입니다. 심양왕(瀋陽王) 제도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원사(元史)』에 나타난 고려 부분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했습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나타나는 고려에 대한 기록 때문에 그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지나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사』를 보면 세상엔 단 두 나라만 존재하는 듯합니다. 원(元)나라와 고려(高麗), 단 두 나라 말입니다.
  
  마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반도부여(백제)사의 다른 한 편이라면 『원사(元史)』는 고려사의 다른 한편으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시콜콜한 고려의 내외 이야기들이 대부분 수록되어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마치 남녀간의 사랑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몽골은 지속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고 고려는 피하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몽골은 한족(漢族)과 가까운 것은 다 싫어하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예외였습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습니다. 『원사(元史)』를 보시죠.
  
  "천하를 가진 자 가운데 한(漢)나라·수(隋)나라·당나라·송나라 등이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원나라에 미치지는 못한다. 한나라는 북적(北狄)에게 시달렸고 수나라는 동이(東夷)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서융(西戎)으로 인하여 환란을 겪었고 송나라의 걱정은 항상 서북(西北)에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삭막(朔漠)에서 일어나 서역을 병합하고 서하(西夏)를 평정하였다. 여진을 멸하고 고려를 신속(臣屬)시켰고 남송을 평정하여 천하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 고려는 동번(東藩)이 되어 신하의 예를 공손하게 취하니 이전에는 볼 수가 없었던 일이다(『元史』57 地理志)."
  
  그리고 1270년 고려의 원종이 원나라에 내조(來朝)했을 때, 원나라 황제는 "경(卿)은 내조를 늦게 했으니 제왕(諸王 : 칭기즈칸의 종친)들보다 반열(班列)이 낮게 되었습니다. 경은 이런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元史』7 世祖紀)."라고 합니다. 즉 조금이라도 일찍 원나라에 내조(來朝)를 했다면 원나라 종친들보다도 더 높거나 같은 지위를 줄 수 있는데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거의 천년 동안 몽골의 나쁜 점만 들추어내어 가르쳐왔습니다. 몽골에 대해 공식적으로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면 '야만족'과 같은 놈이라고 매도당해 왔습니다. 새끼 중국인들이 천년 이상을 한국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얘긴가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한국의 새끼중국인들은 고려가 몽골의 속국(屬國)인 점만 강조합니다. 이런 점을 천년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비판 없이 지내왔다는 것이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에는 아마 제대로 된 학문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군요. 한족(漢族)과 중국(中國)을 찬양하면 그것은 학문이고, 그 이외의 것을 제대로 보려면 모두 오랑캐로 매도합니다. 그러니 쥬신의 역사가 수천 년 동안 감춰질 수밖에요.
  
  한국과 일본의 새끼중국인들에게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원나라 때 도대체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몇 군데 있습니까?
  
  험준한 산악·먼 바다·밀림 등 몽골이 이르지 못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국체를 유지한 나라는 고려(高麗)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원사(元史)』를 보면 온통 고려 이야기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제 왜 그런지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왜 몽골인들이 반도쥬신을 이렇게 끔찍하게 대해주었는지 말입니다. 몽골 군대가 갈 수 있는 정복 가능한 땅에서 몽골의 직속령(直屬領)이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바로 고려입니다.
  
  이것을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려의 끈질긴 항쟁의 결과[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7쪽]"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지요. 세계를 굴복시키고 복종하지 않은 나라를 온통 잿더미로 만든 나라에게 남송(南宋)의 10분의 1도 안 될 국력(國力)을 가지고 끈질긴 저항으로 직속령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그것도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 현재의 베이징)의 바로 코앞에 있는 국가(고려)가 말입니다.
  
  아무리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식이면 안 되죠. 한국 학생들이 창의성이 없고 비판력이 부족한 이유도 다 이런 교육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합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 참고서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암기했다가 자기의 느낌인양 말합니다. 한마디로 철저히 유리(羑里)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죠.
  
  제 경험으로는 서울대학생들이 가장 비판력이 없고 맹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직 공부만 하여 학교 우등생으로만 자란 아이들이 대학교 들어와서 논리 정연한 다른 이데올로기를 접하면 그 곳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디다. 1981년 대학별 본고사(本考査)가 폐지된 이후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80년대부터 오랫동안 서울대학교 학생운동 세력이 말도 안 되는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요즘 많이 떠드는 386(30대로 80년대 대학생활을 하면서 현재 사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도 사실은 신문과 방송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당시 실제로 고뇌(苦惱)하고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을 열심히 했던 분들은 소위 말하는 386처럼 출세를 한 것도 아니지만 하나같이 소박하게 사회에 깊이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려고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싸구려 저널리즘'에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가장 정확히 보는 사람이 가장 올바른 해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왜곡(歷史歪曲)은 중국(中國)이 가장 심각한 수준이고 그 다음이 바로 일본(日本)과 한국(韓國)입니다. 모든 것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합니다. 그것도 새끼 중국인의 근성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말입니다.
  
  물론 역사를 어느 정도는 자국중심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너무 지나치니까 문제지요. 사실을 호도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비싼 대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좀 사실을 바로 볼 때도 되었습니다. 자신이 없는 나라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나라 안에서만 "자기가 최고"라고 떠듭니다. 왜냐고요? 힘도 없고 형편없이 못사는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다릅니다. 뉴욕(New York)의 브로드웨이에도 한국 기업들의 광고판이 붙어있고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제품이 즐비합니다.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몇 손가락에 들어가는 세계적인 무역대국입니다. 톰크루즈 같은 세계적인 스타도 자기 영화를 광고하기 위해 한국에 오고 욘사마(배용준)와 같은 세계적 스타도 있습니다. 월드컵도 4강이 아닙니까? 첨단 과학문명의 꽃인 인터넷 인프라스트럭처와 정보통신산업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합니다. 이젠 좀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갑시다. 몽골이 이토록 고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허물을 덮어두려고 한 것은 제가 보기엔 몽골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정체성 때문입니다. 한국인들과 몽골을 하나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족들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Khori : 고구려족, 또는 구리족, 또는 고리국의 구성원)족의 발원지로서 보고 있으며 이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이런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전설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그 방향에 차이가 다소 있습니다. 즉 제가 보기엔 흑룡강에서 오난강쪽으로 이동해갔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한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서 한국 생활을 경험했던 몽골 쥬신들이 한국인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고 저질의 한국인들이 몽골에서 저지르는 많은 사기 사건들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한국인들의 행태들이 우리들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합니다.
  
  원나라 때 고려 습속이 세계의 중심지인 원나라의 서울에서 크게 풍미하여 고려의'한류열풍'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당시의 '한류열풍'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지배자들이 고려 한류(韓流)에 열광하여 고려양(高麗樣)·고려풍(高麗風)이란 말이 기록될 정도이니 말입니다. 오늘날 한류 열풍이 미국의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영국의 런던 등에는 없질 않습니까? 그리고 몽골 제국은 당시 유럽과 중근동의 각종 문물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의 문화를 접해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몽골의 민족정체성과 관련하여 지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몽골은 부여·고구려의 원류인 바로 고리족(코리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번 지적했지만 한번만 더 보고 지나갑시다.
  
  『몽골비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주목할 만합니다. 알탄 칸(금나라의 황제)이 타타르가 자신에 복종하지 않자 칭기즈칸에 협력을 요청하고 칭기즈칸이 타타르를 정벌합니다. 이 때 칭기즈칸이 받은 칭호가 '자오드 코리(札兀忽里)'입니다(『몽골비사』134절).
  
  여기서 말하는 자오드는 족장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코리족의 족장이라는 말이죠. 이 코리는 바로 고리·고리국·구리(고구리·고구려) 등을 의미하는 것이죠. 칭기즈칸은 이 호칭에 대해 대체로 만족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당시 칭기즈칸은 자오드(札兀) 이상의 제후인 '제후타오(招討) 코리'를 요청하였으나 금의 승상 옹깅이 그것은 대금황제에게 결정하도록 요청해보겠다고 하면서 떠났다고 합니다.
  
  몽골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는 고구려는 기원적으로 몽골과 유사성을 가진 민족으로 단언합니다. 부여·고구려의 시조의 어머님인 유화부인은 중세 몽골에서 버드나무꽃(Uda-Checheg)으로 다시 복원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후금의 삼신할머니인 포도마마(佛多媽媽)는 다름 아닌 버드나무(Uda)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몽골계나 부여·고구려·금(만주) 민족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흑룡강 중상류 일대에서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는 나무는 버드나무밖에는 없다는 것이죠[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칭기즈칸은 분명히 코리족의 족장이었으며 금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성장해왔고 후일 세계정복을 하는 과정에서 남으로 이동하여 금나라를 병합합니다. 그리고 금나라와 힘을 합해 중국경영에 나섭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먼 후일 청 태조가 북으로 몽골의 주요부족을 통일하고 그들과 함께 다시 남으로 내려가 중국경영에 나섰다는 것이죠. 방향만 다를 뿐 결국은 유사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요.
  
  (5) 오해하고 싶은 중국인
  
  중국인들은 과거 흉노나 몽골을 매우 더럽고 천한 민족으로 생각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부터 명나라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북방의 유목민들은 용모는 물론이고 성생활(性生活)도 지저분하고 의식주도 형편없는 똥고양이, 또는 시끄러운 머슴 같은 족속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예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기(史記)』의 「흉노열전」은 흉노가 얼마나 더럽고 한심하고 흉포한지를 말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책 같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몽골은 노인을 매우 공경하는 예절바른 사회인데, 한족(漢族)들은 몽골을 포함한 모든 쥬신(諸申)들을 마치 예절이 없는 짐승 같은 사회로 묘사합니다. 말씀 드린 대로 한족들이 쥬신들에 대해 이 같은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사마천의 『사기』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흉노는) 젊은 아이들은(壯者) 살지고 맛좋은 것을 먹고 늙은이들은 그 나머지를 먹는다. 씩씩하고 건장한 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늙고 병든 것을 천하게 생각한다(壯者食肥美 老者食其餘 貴壯健 賤老弱 : 司馬遷, 『史記』「匈奴列傳」)"
  
  바로 이 구절이 일반적으로 흉노와 쥬신들을 천하게 보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된 구절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이 한족(漢族)들이 만든 사서(史書)들에 묘사된 쥬신과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의심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몽골과 꼬우리족은 족보를 매우 중시하는 민족으로 몽골 속담에 "7대 조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숲 속의 원숭이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쥬신을 마치 조상과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쥬신에 대해 무지한지를 보여줍니다.
  
  세계에서 가장 족보를 중시하는 백성들이 쥬신입니다. 그리고 그 쥬신 가운데서도 가장 족보를 중시하는 백성이 한국이지요. 한국의 보학(譜學 : 족보학)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것도 조상을 중시하는 쥬신의 전통 때문입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족보를 중시하는데다가 중국에서 유입된 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몽골은 결혼의 경우에도 족외혼이 엄격하게 시행됩니다. 몽골에서는 "모르도흐"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말 타고 떠난다."라는 뜻입니다. 즉 엄격하게 족외혼이 시행되었으므로 딸은 한번 시집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말의 "시집가다"라는 의미와 거의 유사하죠.
  
  쥬신이 예의를 중시한다는 것은 말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대부분의 쥬신어(한국어·일본어·몽골어·만주어)들은 존대법이 고도로 발달해 있습니다(오히려 이 때문에 디지털 사회에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중국어에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존대법이 없지요. 다만 몇 개의 단어로, 또는 그 사람의 직위 등으로 존칭을 표현할 뿐입니다.
  
  쥬신이 예절을 중시하는 예들은 매우 많습니다. 몽골의 예를 들면 음주나 흡연에 대한 연장자의 예의규범은 아주 엄격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나 일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몽골의 경우 만약 연장자 앞에서 흡연을 할 경우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듣고 연회나 결혼 등 특별한 사유로 인하여 청년이 연장자와 함께 동석해야만 하는 경우 그는 연장자의 허락을 받아 비로소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젊은이들이 술집에서 싸우는 일 가운데 대부분이 "너, 왜 반말하니?"하는 식의 예절문제 때문일 겁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일본이나 한국에는 선배들에게 '줄 방망이(선배들로부터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는 것)'를 맞는 일은 흔한 일이었죠. 한국이나 일본이나 연장자를 존중하는 관습이 남아서 때로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흔히 논쟁이나 말싸움이 벌어지다가 안 되면, "야, 너 몇 살이야? 네가 내게 그럴 수 있어?" 라는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국적인, 아니 쥬신적인 풍경이지요. 물론 이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몽골 쥬신의 이동식 가옥인 겔도 여기저기 아무나 함께 자고 들어가고 앉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나이에 따라 다 순서가 있고 위계가 엄격합니다.
  
  『몽골비사』에도 조상이나 연장자들을 숭배하거나 존중하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황금사(黃金史)』에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안락한 생활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평안한 생활을 누리게 해 준다"라는 오고타이 칸의 치세 목표까지 기록되어있지요.
  
  『고려사(高麗史)』에는 "칭기즈칸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정말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적다면 하늘은 반드시 이를 알 것이다(成吉思嘗 人苟小有孝心 天必知之)."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쥬신의 사회가 사마천이 말하는 귀장천노(貴壯賤老)가 아니라 노인이나 연장자를 대단히 공경하는 사회임을 문헌적으로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몽골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6) 슐랭에서 설렁탕까지
  
  몽골과 한국, 그리고 일본 참으로 멀리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은 유목민, 한국과 일본은 농경민인데 아무리 쥬신족이라 해도 음식문화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음식문화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데도 공통성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역사적으로 몽골과 한국은 음식을 조리할 때 탕을 위주로 한 조리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름 튀김을 위주로 하는 중국이나 바비큐를 위주로 하는 돌궐, 또는 유럽인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이러한 음식 문화의 유사성 때문에 원나라 때에는 고려의 음식들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갈비를 먹을 때 끝까지 벗겨먹는 것도 두 민족만의 특징입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한국 음식은 어떤 의미에서 유목민인 쥬신의 음식이 농경민족으로 변화되었을 때의 변형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독특하지요. 원나라 당시 몽골 쥬신들이 반도쥬신(고려) 음식을 보았을 때 그 느낌이 어떠했을까요? 무엇인가 공통적이고 비슷한데 그 재료가 좀 달라져서 새롭게 어우러진 느낌이니 얼마나 음식궁합이 맞았겠습니까?
  
  고려의 상추쌈을 먹어본 원나라 시인 양윤부(楊允浮)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이성우, 『韓國食生活의 歷史』(修學社 : 1996) 58쪽 참고].
  
  "해당화는 꽃이 붉어 아름답고 살구는 노랗게 익어 보기 좋구나,
  더 좋은 것은 고려의 상추,
  마고(麻姑) 향기보다 그윽하네."
  
  꼬우리족이나 몽골족들은 소의 갈비를 구워서 뜯어먹거나 소와 같은 가축의 뼈를 푹 삶아서 그 물에 소금과 파를 넣어서 간편한 식사를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슐렝'이라고 하는데 설렁탕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겠지요. 『몽골비사』에 보면 고대 몽골인들이 슐렝(sulen)으로 아침식사를 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몽골비사』229절). 조선 영조(1724~1776) 때 간행된 몽골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空湯)'이라고 적고 '슈루'라고 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한국이 원조(元朝) 같았던 곰탕이나 설렁탕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시겠죠.
  
  어떤 분은 몽골시대의 풍습이 남았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중국은 1백년 이상 직접 지배를 받았는데도 왜 설렁탕을 먹지 않습니까?
  
  관련 전문가에 따르면, 조선 시대 요리서의 기본인 『산림경제』(1715)의 요리편의 고기 요리는 60%가 원나라 초기의 가정백과사전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서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고기요리법은 80~90%가 굽는 요리라는 것이지요(이성우, 앞의 책, 61쪽).
  
  이것은 과거 수천 년 전의 맥적(貊炙)의 전통을 이은 것이지요. 적(炙)이란 한국인들이 즐겨먹는 것으로 미리 조미하여(『儀禮』) 꼬챙이에 꽂아서 불 위에 굽는 것(『禮記』)이라고 합니다. 한족(漢族)들은 미리 조미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무쳐먹는 데 반하여 예맥은 미리 조미하여 구어서 먹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같습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상하기 쉬운 고기는 부추나 마늘로 조미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이성우, 앞의 책 24쪽).
  
  그런데 반도쥬신은 오랫동안 농경생활을 하다 보니 '고기 잡는 법'도 다 잊어 먹어버린 모양입니다. 고려시대 때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의 말이 걸작입니다(이성우, 앞의 책, 60쪽 참고).
  
  "고려에 와보니 사신을 대접한답시고 양이나 돼지를 도살하는데 네 다리를 묶고 불 위에 내던지고, 만일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때려죽인다. 이러니 뱃속의 창자가 온통 갈라져 오물이 흘러나와, 이 고기로 요리한 음식에 고약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 제국 시대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살법이 고려에 많이 전수된 것으로 보입니다.
  
  몽골인들이 즐겨먹는 전통요리인 랍샤는 신기하게도 우리의 칼국수와 제작과정이나 맛이 거의 동일합니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파나 야생마늘과 같이 다른 민족들, 특히 한족(漢族)들이 피하는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몽골의 경우 중국과는 달리 남녀의 역할 구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요리를 포함한 부엌의 일이나 가사 일은 철저히 여성의 몫입니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몽골 남성들이 매우 게으른 것으로 보이지만 대가축의 방목(放牧)이나 야생짐승들로부터, 또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거나 수렵의 일이 남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가사(家事)를 돌볼 틈이 없지요. 몽골의 남자들은 밖에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겔(이동식 가옥)에서는 그냥 쉬고 있는 것뿐이지요. 외부인들이 볼 때는 아내가 열심히 일하는데 그저 가만히 빈둥거리는 남자만 보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유풍은 한국이나 일본에 그대로 남아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오래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사회로 정착해온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이 같은 유풍이 남아서 남녀간의 역할분담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지요. 즉 현재의 한국 사회는 돌볼 가축이 없는 상태인데도 남녀의 역할은 변함이 없어 (맞벌이 부부라도) 여성의 가사분담이 매우 심한 고통이 되고 있죠. 특히 극단적인 경우 명절날에 여자들만 일을 하여 한국 여성들은 심각한 정도의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같은 형태의 농경민족인 중국인들은 남자들도 요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요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德目)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모든 것은 중국인 흉내를 내면서 어찌 이 부분만은 안 따라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사(家事)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라 이런 점에서만은 비쥬신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한(恨)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차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살율(自殺率)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일본도 마찬가지지요). '한(恨)'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일종의 쥬신이 가진 '집단 무의식'으로 '집단 우울증'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쥬신은 어떤 지역에 있든지 유목생활에서 오는 어떤 집단 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단한 유목생활과 떨어져 살아가야 하니 외롭고 쓸쓸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울증 같은 것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사람을 보는 게 더없이 반갑고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따뜻함을 나누려 하지요. 반면 전형적인 농경민인 중국인의 경우에는 사람의 살이 맞닿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국의 한(恨)과 몽골 쥬신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염세사상(厭世思想)은 일맥상통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오고타이칸의 언행입니다. 오고타이칸은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寡婦)들을 위해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오고타이칸은 "재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돈은 무엇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사라지는 존재인 것을 …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 다만 인간의 기억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고타이칸은 만호장 가운데 재물을 모으는 자가 있자 훈시하여 말합니다.
  
  "그대는 물질의 진가를 구분하는 눈이 없군 그래. 사람은 멋있게 살고 멋있게 죽어야 하는 것이오. 그대는 그대의 재산이 그대의 죽음으로부터 그대를 지켜줄 것으로 보는가?"
  
  당시 몽골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기 때문에 오고타이칸의 훈시는 불교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몽골의 고유사상으로 봐야겠지요.
  
  몽골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한자어(漢字語)나 한문(漢文) 표현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몽골에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 문화를 숭상하는 전통이 없지요. 그래서 몽골어는 한문을 가공하여 배우고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일본어와도 다릅니다.
  
  그러나 몽골어는 기본적으로 어순이 우리말이나 일본어와 같고 문법관계를 조사와 어미로 나타내는 것도 우리말과 동일하고 관계대명사·관사·부정관사·성(性)과 수(數)의 일치가 없는 것도 우리말과 같습니다. 몽골어는 성조의 강세가 없지요. 이 또한 한국어와 같은 것이죠. 몽골 사람들은 120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거의 7백여 년을 전통 몽골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문자는 우리말과 같이 실제 생활에 나타나는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발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키릴문자에 두 글자를 첨가하여 오늘날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의 나이 관념은 우리와 흡사합니다. 우리나라는 '한국 나이'라는 이상한 나이 개념이 있죠? 그런데 이런 한국 나이 개념이 몽골과 똑같다는 거죠. 몽골은 여자가 임신하는 순간부터 태아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간주합니다(천손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몽골인의 나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사람들보다 한 살이 많게 됩니다. 중국과는 다르지요. 아이를 기를 때는 실이나 천으로 천막의 기둥과 기둥을 묶어서 흔들거리는 장치(요람)에다가 둡니다.
  
  의복 생활에 있어서도 몽골은 한국과 유사한 측면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몽골은 외투도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어서 매우 간편합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말 타기에 편하게 만든 것이죠. 여자의 치마도 주름을 잡아서 둘러 입는데 이것은 한족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과는 달리 주름치마를 즐겨 입죠.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상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몽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쥬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몽골은 설날이면) 서로 껴안고 인사를 나눈다."라고 말합니다.
  
  이 점은 만주 쥬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주 쥬신의 인사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이것은 요즘 한국인들이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둘째, 친구나 연인을 만났을 때 반드시 얼굴을 껴안고 얼굴을 맞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이것을 포견례(抱見禮 : 허리를 끌어안고 서로 좋아하는 것)라고 하지요. 셋째, 부녀자가 집안에서 서로 만나면 무릎을 꿇어 앉아 오른 손가락을 눈썹 끝에 갖다 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이 가운데 만주쥬신의 가장 보편적인 전통 인사법은 바로 포견례(抱見禮)라고 합니다(『世宗實錄』59 15年 2月).
  
  이 포견례는 요즘 한국에서는 많이 사라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손님들이 오면 버선발로 나가 손을 잡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고 부둥켜 안고 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일을 집안에서 흔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10~20년 전만 해도 우리의 가구들을 보면 작은 가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붙박이 농경민들에게는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죠. 즉 우리는 오래전에 농경생활을 시작했는데도 이동이 쉬운 작은 가구들이 많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이죠. 이 또한 유목민의 생활습관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에이 설마,"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요즘 한국을 보세요. 아파트문화가 고도화되었는데도 한국인들은 아직도 맹목적으로 가구(家具)들을 들고 다닙니다. 그래서 30층, 또는 그 이상이나 되는 아파트도 이사할 때 무거운 가구를 올린다고 아슬아슬한 광경이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 가구를 없애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집안사람들도 설득을 못하고 있습니다. 농경을 한 지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몽골인들은 우리와 같이 손님을 잘 접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 쥬신족들은 이방인(異邦人)을 가장 환영하는 민족일 겁니다. 이것은 외롭고 고단한 유목생활에서 오는 전통이겠지요. 어느 곳을 가든지 여행객들은 큰 대접과 환영을 받지요. 몽골은 이방인들이나 여행객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언제든지 우유를 주어 여행에 따른 피로를 식혀주지요.
  
  이 점과 관련해서 저는 한국에서는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저는 1980년대 초 대학 다닐 때 돈 한 푼 없이 한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은 우리나라는 참으로 인심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환영을 받았습니다. 생긴 몰골은 오랜 여행으로 '상거지'였는데도 음식이나 잠자리는 어느 때나 다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마을을 찾아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입니다. 당시의 여행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관찰해본 결과 도시화(都市化)나 자본주의화가 느리게 진행된 곳일수록 예외 없이 인심이 좋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이 달라집디다. 요즘 대학생들은 무전여행을 하면 안 됩니다. 굶어죽기 알맞지요. 그런 점을 보면 한국은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제가 일일이 경험한 것이라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불과 20년 전만해도 한국은 무전여행이 가능한 나라였습니다. 언젠가 세월이 조금 흐른 뒤 미국인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가 제가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놀이는 씨름입니다. 우리나라도 30~40년 전까지는 가장 일반적인 놀이였죠. 씨름은 흉노나 고구려의 벽화에도 등장하는 북방고유의 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씨름은 북방 기마병들이 육탄전을 벌일 때 쓰는 무술입니다. 일본의 스모나 한국의 씨름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죠. 몽골어에서 '쉬룬'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뜻은 "격한, 포악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쉬룬(몽골) - 씨름(한국) - 스모(일본) 등의 변화 과정 속에서 씨름은 다소 변형되어 정착합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129쪽].
  
  오늘날 몽골씨름의 원형은 일반적으로 요(遼 : 거란)의 씨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1931년 요나라 동경(東京遺址)에서 팔각형 백색 도관(陶罐)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요. 그리고 이 씨름은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금(金)나라 때는 주류민족이었던 만주쥬신(여진)은 물론 피지배층이었던 한족(漢族)들도 씨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씨름이 일종의 전투무술이었기 때문에 한족들이 씨름에 몰두하는 것을 금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우려합니다. 그리고 전투무술의 비결들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겠죠. 그래서 금나라의 장종(章宗 : 1189~1208)은 '여진인들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여 중국에서는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금나라에서 씨름은 현재의 태권도와 같은 국기(國技)였던 것이죠[장장식,『몽골민속기행』(서울 : 자우출판, 2002) 311쪽]. 그 후 이 씨름의 전통은 몽골이 계승하게 되지요.
  
  결국 거란 - 금 - 몽골 쥬신족에게 있어서 씨름은 오늘날의 씨름과 같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전투무술을 포함한 상무적인 무술로 생각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법도 포함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의 장종이 한족들이 씨름을 하는 것을 금할 까닭이 없지요.
  
  그런데 요나라의 씨름도 결국 그 근원에는 고구려의 수박(手搏)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다소 특이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서로 엉켜서 하는 씨름 장면도 있고 마치 두 사람이 태권도 대련을 하듯이 거리를 두고서 손바닥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화에는 게임의 내용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죠. 그래서 지금의 씨름과는 조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이 무술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 "충청도 은진현에 매년 7월 15일 인근의 사람들이 모여 수박을 즐기고 승부를 다투었다(忠淸道恩津縣界每歲七月十五日 傍近兩道居民聚爲手搏戱以 爭勝負 : 『新東國與地勝覽』卷34)"는 기록이 보입니다.
  
  고구려의 멸망(668)·발해의 멸망(926)·통일신라의 멸망(935)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의 유민(遺民)이 발생하고 이들이 이 같은 맨손무술, 또는 씨름을 확산시켰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발해·요(遼 : 거란)·금(金)·몽골·후금 등과 한반도(고려)의 씨름이 동시에 발전하였겠죠. 그렇다면 씨름은 쥬신 전역에 걸쳐서 독특하게 현지에 맞게 적용되고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신체적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은 소림무술(少林武術)과 같은 권법(拳法)으로 발전했겠고, 쥬신족들은 서로 엉켜서 하는 유도(柔道)나 레슬링·씨름 쪽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몽골과 우리 사이에 놓여진 많은 쥬신적인 요소들을 보았습니다. 몽골은 어떤 의미에서 오래 전에 우리가 떠나온 고향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긴 세월 동안 변화하지 않으면서 고향을 묵묵히 지켜온 그들에게 저는 경의를 표합니다. 비록 그 동안 우리가 중화의 그늘과 늪에 빠져 그들을 형제로 대하지 못했지만 이젠 그들과 함께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열어가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환국(桓國)·칸국(汗國)·한국(韓國)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1> 김누루하치와 산채나물
  2005-08-17 오후 3:37:25
  대부분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저는 야구(baseball)를 좋아합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타자가 홈런을 치고, 미국 메이저 리그 최초의 한국인 투수 박찬호 선수가 공을 잘 던지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외야 수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젠 나이가 좀 들어서 잘하기는 어렵지만 말입니다.
  
  높이 솟아오른 공을 보면서 그 공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나 명상(冥想)을 하는 것이나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먼저 수비하는 곳에 무슨 다른 장애물은 없는지를 확인하고 오직 그 공만 보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들리면 이내 공의 위치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달려가야 하는데, 이때 잡념이 생기면 으레 그 공을 놓치게 됩니다.
  
  요즘은 하도 놀이도 많아서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광경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야구광(野球狂)들도 실제로 경기하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므로 그저 야구경기를 TV로 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사실 야구는 장비도 많아야 하고 사람도 많아야 하니 동호회(同好會)를 하지 않은 다음에야 하기가 어렵죠.
  
  그런데 TV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보면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면 포수(catcher)가 투수(pitcher)에게 가서 뭔가 소곤소곤 의논하곤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야구 해설가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래요, 포수는 인코스(타자 몸쪽으로 가는 공)가 아니라 아웃코스(타자 몸 바깥쪽으로 가는 공)를 요구했는데 그 사인이 제대로 안 맞으니까 투수에게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라거나, "커브(휘는 볼)로 승부를 해야 하는데 선남렬 투수가 자꾸 직구(直球)를 주니까 이민수 포수가 일단 브레이크를 건 것 같습니다."등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해설을 들을 때마다 저는 좀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늘 공을 주고받는 투수와 포수가 서로 주고받는 수신호(사인)를 제대로 모를 리는 없을 것인데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저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야, 너 제수씨(弟嫂氏)하고 싸웠냐? 잊어버려라. 오늘 경기 마치고 제수씨가 좋아하는 장미꽃이나 보내라."
  "어제 우리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힘내자."
  "야, 신경 좀 쓰라. 저 감독과 코치 얼굴 한번 봐라. 눈을 부라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지 않니? 오늘 밤 감독에게 시달릴 생각을 해봐라. 그리고 다음 경기에 제대로 출장하려면 이번 위기를 잘 넘겨야 해."
  
  (1) 이상한 논리, 『요동사』: 신삼한정통론(新三韓正統論)
  
  최근 들어서 '국사해체론'이니'요동사(遼東史)'니 하는 관점들이 대두하여 마치 중국의 동북공정(쥬신사 말살 프로젝트)의 하나의 대안(代案)이 되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사'의 입장은 요동(遼東)의 역사는 한국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라는 것이죠.
  
  '요동사'적인 관점은 변경사(Border history)적인 시각으로 요동의 역사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즉 연구 대상이 어느 하나의 국민이나 민족국가의 단위에 포섭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요동사'의 관점은 그 내용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요동사'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바는 마치 신판(新版)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골자는 요동은 한국도 아니요 중국도 아닌 또 하나의 역사공동체라는 관점입니다. 이 이데올로기는 한국과 북방 유목민(범쥬신)과의 연계를 단절하고 단순히 '삼한(三韓) = 한국'이라는 등식으로 엮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고구려를 완전히 한국의 역사에서 배제하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마치 큰 강의 흐름을 잘라서 둑을 쌓아 작은 저수지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역사의 단절을 시도하는 것이죠. 물론 이런 종류의 시도는 그 동안 한국의 사학계가 줄기차게 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한족(漢族)들의 동북공정을 크게 도우는 행위지요.
  
  그렇다면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고구려·왜·삼한·동옥저·읍루·예 등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들 나라들을 다시 요동과 한국이라는 식으로 나눠야 하겠지요. 반도 쥬신의 현실 안주적이고 축소 지향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동사'적인 관점은 요동 지역과 한반도 사이의 인종적 특성이나 문화적 공통성과 유기적인 관련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단지 중국 - 한국 이라는 현대 시점의 논리를 과거에 적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죠.
  
  '요동사'에서는 "한(漢)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에는 동이(東夷)는 요동·한국·일본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김한규, 『요동사』(문학과 지성사 : 2004)]."고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매우 애매하고 황당한 논리가 됩니다. 이 때 한국(韓國)은 삼한(三韓)이 되고 그 삼한이 오늘날 한국 민족의 원류라는 말밖에 되지 않지요[그러면 이후 요동 지역까지 지배했던 고구려와 백제(부여)는 어찌 됩니까? 그들의 영역은 요동과 한반도에 걸쳐 존재했지 않습니까? 또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대고구려, 또는 후고구려)는 또 어떻게 됩니까?].
  
  한족(漢族)의 동북공정의 대안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하는 '요동사' 개념이 가진 가장 위험한 점은 우리 민족사의 진원지(震源地)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은 모두 요동을 근거지로 하거나 요동을 주요 세력권으로 한 국가들입니다. 특히 백제는 남부여(南夫餘)라고 하기도 하여 충실한 부여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동과 만주에서 건국한 금나라나 청나라는 신라(新羅)에서 나왔다고 하고 몽골은 고구려(高句麗)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요동의 국가라고만 한다면 상식적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요동사'적 관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류는 한국(韓國)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 점을 조목조목 살펴봅시다.
  
  (2) 환국(桓國)·한국(汗國)·한국(韓國)
  
  '요동사'를 포함하여 보수 사학계는 '한국(韓國) = 삼한(三韓)'이라는 식으로 한국을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즉 이 한(韓)이라는 말이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三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한국(韓國)이라는 말이 중국 사서(史書)의 삼한(三韓)에서 온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동사'적인 시각은 한국의 역사가 삼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요동의 역사는 다른 역사공동체의 역사라고 우깁니다. 이것은 실증사학자들이 가지는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제 구체적으로 이 점들을 󰂛 언어적 관점, <가> 지리적 관점, <나> 수장적(首長的 ) 관점, <다> 유목민들의 일반적 명칭으로서의 한국, <라> 종합고찰 등으로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가> 언어적 관점
  
  한국(韓國)에서 말하는 한(韓)은 중국의 한(韓)을 의미하거나 한반도의 삼한(三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쥬신의 고유어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쥬신의 고유한 말을 한자(漢字)를 빌려서 표현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각종 사서에는 고구려만 해도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즉 고구려는 高駒麗(『漢書』), 高麗(『舊唐書』;『新唐書』), 高離·豪離(『三國志』), 句高麗, 句麗(『三國史記』;『大東韻府群玉』) 등으로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라는 말은 한자의 뜻으로는 알 수 없는 말이라는 얘기지요. 즉 고(高)·구(句)·호(豪)·고구(高句)·고구(高駒) 등의 말을 '가우리', '코리', '꼬리', '고리', '구리' 등의 말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된 것이죠.
  
  『상서(尙書)』에는 "『한서(漢書)』에 '고구려', '부여', '한(韓)'이 있는데,'馬干'은 없으나, '馬干'이 곧 저 '韓'이라, 음은 같고 글자가 다를 뿐"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尙書』卷18 周官 弟22 孔穎達疏 참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는 쥬신족들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는 이 '韓'이라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의 한(韓)나라가 아니라 단지 그 음을 빌려서 표현한 말이라는 것인데 [마간], 또는 [ㅁ 가흔]·[한]·[카흔]·[카안]·[칸] 등으로 발음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정재도,「'한'이냐 '韓'이냐 '馬干'이냐」『한글 새소식』365호(한글학회 : 2003. 1)].
  
  쉽게 말해서 우리 민족의 강역을 지칭하는'한(韓)'이라는 말은 분명히 한자(漢字) 말은 아니고 다만 음을 빌려 쓴 것이므로'馬干'으로 적어도 된다는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칭기즈칸(成吉思汗, 또는 成吉斯汗)에서 사용된'한(汗)'으로 사용해도 되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이 한(汗)은 Kahn 이나 Han 등의 발음이 나는 말을 한자 말로 표기한데 불과합니다. 일단 여기서는 마한(馬韓)과 혼동하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잉글랜드(England)를 영국(英國 : 빼어난 나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비하하여 영국(嬰國 : 애송이 나라)으로 쓸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발음은 모두 [잉꾸어]로 똑같습니다. 한족(漢族)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주변민족들을 설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요동사'의 시각은 한국이라는 대상을 철저히 한반도 지역에만 국한 시킵니다. 그 근거로 든 것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末王)인 준(準)이 그 스스로를 한왕[自號韓王]"이라고 하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한'의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즉 이 '한왕'이라는 말은 중국의 사가들이 '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지요. '한왕'은 동의 반복된 말로 '초가[草家]집'이라는 식으로 표현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이라는 말 자체가 왕(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국어 학자들도 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기문의 『국어사개설』에서 부여관명(夫餘官名)의 ka, 가(加) 등과 몽골고어 qan, 또는 신라어 관명의 한(翰)·간(干)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먼저'한'이 고유어로서 가지는 주요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한'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말로 보통 서양에서는'칸', 동양에서는'한'(일본에서는'간')으로 쓰이고 한반도에서도 '한'으로 사용합니다.
  
  ① 하늘[天]을 의미하는 경우 - 한인, 한웅 등, 한우물(하늘에 제사 지내는 우물)
  ② 우두머리[首長]를 의미하는 경우 -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마립간)
  ③ 크다[大]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밭[大田], 한길[大路] 등
  ④ 하나[一]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 나라 (하나의 나라), 한 아버지
  ⑤ 같다[同]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 핏줄, 알타이는 한 핏줄, 한 겨레 등
  ⑥ 바르다[正]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복판'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韓國)에서 사용된 한국이라는 말은 위의 여러 가지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사용된 것이지 구체적으로 고조선의 왕 이름이 한왕(韓王)이어서 한국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요동사'적인 시각에서 한국(韓國)을 단순히 한왕(韓王)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은 한국에 대해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동사'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잘못되었으니 그 위에 지어놓은 모든 이론적 작업도 잘못되었다는 말이지요.
  
  <나> 지리적 관점
  
  여러분들 가운데는 언어적 관점으로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실제로 한국(韓國)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봅시다.
  
  첫째, 신라 말기나 고려시대에도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하나로 보는 관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왕융(王隆)이 궁예(弓裔)에게 말한 기록이 그것이죠(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高麗史』太祖紀). 이 점은 앞부분에서 이미 검토한 사항입니다('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 참고). 즉 한반도와 만주 및 요동을 하나의 범주로 사고하는 시각이 과거에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둘째, 요동과 만주 지역을 삼한(三韓)으로 말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숙신(肅愼)에 대하여 "한(漢) 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고 하고, 위진시대(魏晋時代)에는 읍루(挹樓)라고 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權兌遠,「濊·貊文化圈과 肅愼문제」,『論文集』43,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 숙신이라면 주로 만주 지역인데 이것도 삼한(三韓)으로 보는 관점이 있죠. 즉 삼한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반도 중남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셋째, 요동의 북쪽도 한주(韓州)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고구려 때 요동의 북쪽에 막힐부(鄚頡府)가 부여의 옛 땅이었고 (扶餘之故地 : 『新唐書』「渤海傳」), 이 땅을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불렀다는 것입니다(韓州 … 高麗置 鄚頡府 都督鄚·高二州 渤海因之 : 󰡔遼史󰡕「地理志」). 그리고 송(宋)나라 때의 기록을 보면 이 한주가 삼한의 땅(三韓之地)라고 합니다(曾公亮,『武經總要』卷16,「北蕃地理」).
  
  이상의 기록들만 보아도 삼한이라는 말이 단순히 한반도, 또는 한반도 남부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삼한이라는 것이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좀 더 심한 예를 볼까요?
  
  일본(日本) 규슈(九州)의 높은 산 가운데 가고시마와 미야자키에 걸쳐 있는 산 '가라쿠니다케(韓國岳)'가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큰산(韓國岳)'이라는 뜻입니다. 이상하죠? 웬 한국산이 일본의 규슈에 있는가 말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도 확실히 아시겠죠? 여기서 사용된 한(韓)이 한반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쥬신족의 오랜 언어적인 전통에서 나온 말임에 유의해야합니다. 즉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해가서 이름을 붙였거나 아니면 일반적인 쥬신적 의미의 한국의 뜻으로 사용했겠지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제 신채호 선생의 말씀을 한번 들어봅시다.
  
  "왕성(王姓)을 '해(解)'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함이요, 왕호(王號)를 '불구래'(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광휘(光輝)에서 뜻을 취함이요, 천국(天國)을 '환국(桓國)'이라 함은 광명에서 뜻을 취함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을 명월(明月)이 출입하는 곳 - 곧 광명신(光明神)의 서숙(棲宿)으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朝鮮)'이라 칭하니 조선도 고어(古語)의 광명이란 뜻이니[신채호, 『註解 朝鮮上古史』(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 1994) 104쪽]."
  
  신채호 선생은 단순히 한반도의 남쪽인 현재의 남한 지역이 우리 민족의 중심무대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여·고구려만 보더라도 우리의 역사가 남한 지역에 국한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지요.
  
  <다> 수장적(首長的) 관점
  
  우리는 한국이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이라는 점을 분석했습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도 '한'이 우두머리로 쓰이는 경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이병도,『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 1979) 53~54쪽].
  
  ①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의 경우에도 대인(大人)을 가(加[Kha])라고 한다. 그리고 만주나 몽골어에서 군장[君長(大人)]을 한(汗[Han]), 혹은 가한(可汗[Khan])이라 한다.
  
  ② 신라에서도 군장(君長), 또는 대인(大人)을 간(干[Khan]), 금(今[Khum]), 감(邯[Kham])이라 했고 신라 관직명(官職名) 중에 대아찬(大阿飡)을 한아찬(韓阿飡), 혹은 한찬(韓飡)이라고도 하고 대나마(大奈麻)를 한나마(韓奈麻), 대사(大舍)를 한사(韓舍)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대쥬신들은 우두머리나 임금을 한(칸)이라고 씁니다. 이 뜻은 어원적으로 주로 '하다[多 : 많다]'라는 형용사나 '크다[大]'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것이거나 종교적 지도자나 신(神)을 의미하는 감() 또는 가미, 신조(神鳥 : 신의 전령, 샤먼)인 까마귀[烏], 나아가서는 하나[一], 중간[中]이라는 의미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알타이 계열의 종족들은 하늘[天]과 관련된 말들을 지도자의 호칭에 붙이기를 즐겨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병도 박사는 우두머리의 명칭에 하늘[天]과 관련된 것을 붙이는 것은 그들이 다스리는 지상의 국가들을 하늘의 국가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이병도,『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 1979]. 그리고 환인(桓因)이라는 한문 용어는 불교의 '동방호법신 (東方護法神)'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후일 불교가 자리 잡으면서 생긴 일일 듯하고 오늘도 흔히 쓰이는 '하느님'과 같은 단어로 생각되고 있지요.
  
  앞서 본대로 백제어로 왕을 어라하(於羅瑕), 건길지(鞬吉支)라고 존칭하였고 『위서(魏書)』에는 고구려의 유리왕(누리왕)을 노려해(奴閭諧[누리해] : 온 누리를 비치는 해 = 東明)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어로는 임금을 '개~해'(諧)라 불렀고 수장(首長)을 의미하는 말로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땅 이름에서도 왕을 의미하는 '개'(皆)가 여러 군데 나타납니다. 즉 칸(큰, 한)이 다스리는 땅의 이름에 칸(汗)을 의미하는 말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건륭황제 가로되,'삼한(三韓)은 삼한(三汗)이요 삼한제국(三韓諸國)의 비리(卑離)는 곧 貝勒(패리)이니, 한(韓)이 패리(貝勒)를 통솔함은 동방제국(東方諸國)의 체례(體例)가 그러하다'하였으니 이 풀이가 가장 이세(理勢)에 합당하다 하노라. 신라에 거서간(居西干)·각간(角干) 등의 칭호가 있고 고구려와 백제에 가한(可汗) 등 신(神)에 대한 제례(祭禮)가 유(有)하니, 우리 고대에 '한(汗)'이란 관명(官名)이 있던 증거라, 고구려 때는 전국을 삼경(三京)에 나누고 경(京)마다 '한(汗)'을 두었기에 … [중략] … 진번(眞番)은 곧 진변(辰卞)이요, 三韓(삼한)은 곧 三汗(삼한)이요, 三汗(삼한)은 곧 三京(삼경) 장관(長官)의 이름이니 원(元) 태조(太祖) 성길사한(成吉思汗)의 분봉(分封)한 사한국(四汗國)의 사한(四汗) 같은 자일 것이라, 모두 후세의 창조한 국명(國名)들이 아니라 하노라[신채호,『註解 朝鮮上古文化史』(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 1994)]."
  
 
신채호 선생. ⓒ김운회  

  즉 신채호 선생은 한국(韓國, 또는 汗國)이라는 말은 '칸의 나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건륭제나 신채호 선생이나 '한국 = 韓國 = 칸국(汗國)' 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韓國)이라는 말은 몽골의 오고타이 한국, 차가타이한국, 킵자크 한국 등에서 말하는 한국(汗國)과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위의 내용 가운데 패리(貝勒), 즉 '버일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왕(王), 또는 부족장(部族長)을 뜻합니다. 일찍이 청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1587년 건주(建州)를 통일하고 허투알라(赫圖阿拉) 부근인 퍼알라[佛阿拉 : 현재의 얼따허쯔춘(二道河子村) 동남쪽]에 성을 구축하고 스스로를 수러버일러(Sure Beile - 淑勒貝勒)라고 칭하였습니다[임계순,『淸史』(신서원 : 2001) 24쪽]. 위의 내용을 보면 한(韓, 또는 汗)이나 버일러(貝勒)는 모두 수장(首長)이나 군주(君主)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 청나라의 성군 건륭제가 말하는 것도 한국이라는 말이 단순히 한반도 중남부(현재의 대한민국)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만기(萬機)를 관장해야 하는 황제(건륭제)도 아는 사실을 평생을 역사학(歷史學)만 들고 파는 우리나라 사학자(史學者)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사실 이것은 상식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굳이 논증을 해야 하는 제 처지도 한심합니다. 그만큼 우리 학계의 중국 병이 깊은 것이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삼한(三韓)을 단순히 나라를 나타내는 말로만 파악하고 있는 범엽(范燁)의 『후한서(後漢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 나라에는 삼한(三汗 : 세 명의 칸이라는 뜻)이 있었다. 그래서 한 나라씩 통치를 한 것이다. 역사가라는 자가 한(汗)에 군장(君長)의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음이 같다는 것 때문에 결국은 오역하고 만 것이다."
  
  즉 삼한(三韓)이라는 의미를 지역적으로 국한하여 충청·경상·전라에 있던 나라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삼한(三韓)이라는 말은 세 명의 칸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이지 그것이 한반도 중남부 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아시겠죠?
  
  여기서 잠시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갑시다.
  
  지금까지 보면 칸이나 거서간(居西干)·마립간(麻立干)의 간(干)이나 단군왕검(檀君王儉)도 같은 종류의 말인데 한족(漢族)들은 무슨 연유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쥬신의 군주(텡그리 옹군)를 선우(單于)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① '단간(單干)'을 잘못 읽었거나 ② 몽골어로 하늘[天], 또는 천신(天神)을 의미하는 텡그리(Tenggeri)와 하늘의 자손, 즉 천손(天孫)을 의미하는 '텡그리고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단군왕검(檀君王儉)에서 왕검(王儉)이라는 말도 쥬신의 용어라는 점을 알아둡시다. 이 왕검이라는 말은 성스러운 인물이나 물체, 또는 장소를 의미하는 몽골의 샤먼 용어인 '옹군(Onggun)'과 음이 일치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산꼭대기나 큰나무를 통해 내려온다는 몽골 - 만주의 샤머니즘 세계관들은 한반도에서도 여러 군데서 나타납니다.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석탈해(昔脫解)·김알지(金閼智)는 대표적인 예입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314쪽).
  
  따라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이란 앞으로 '텡그리옹군(Tenggeri Onggu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라> 유목민들의 일반적 명칭으로서의 한국
  
  그러면 이 한(韓), 또는 칸(汗)이라는 말은 쥬신의 전유물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한(큰)'이라는 말은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등에까지 널리 쓰이는 말이라는 것이죠. 대체로 그 뜻은 ① 하늘[天], ② 추장[군장(君長)], ③ 나라 이름[국명(國名)], ④ 벼슬 이름[관명(官名)]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몽골이나 터키 등지에서 '임금'의 뜻으로 쓰이는 ㅋ한(Khan)이라는 말을 중국인들은 '한(汗)'으로 나타냅니다. 발음이 [칸]과 [한]의 중간 발음인 듯합니다. 이 한(汗)이라는 중국 문자의 뜻은 땀(sweat)이라는 것이지만 단지 음만 빌려 쓴 말이죠. 예를 들어 『훈민정음』에도 'ㄱ'은 군(君)자의 첫소리라는 말이 있듯이 한(汗)은 발음만 빌린 것입니다. '오고타이한국'의 경우 오고타이한은 임금의 명칭이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오고타이한국'이지요.
  
  그런데 애초에 이 '한'이라는 말을 표현할 문자가 없던 중국의 주변민족들은 어떤 식으로 표현했을까요? 대체로 환(桓)·한(翰)·한(韓)·한(汗)·간(干)·감(邯)·한(漢) 등이 이 Khan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한족(漢族)들은 주로 땀(sweat)을 나타내는 한(汗)이라는 글자로 쥬신의 제왕(칸)을 표현하는군요.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족(漢族)들은 쥬신의 제왕조차도 이 모양으로 무시를 하니 하물며 일반인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겠습니까?
  
  양주동 선생은 『고가연구(古歌硏究)』에서 하늘[天]의 어원은 '한밝' 이고 이 말은 산의 이름에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동방의 옛 민족들이 하늘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산[高山]은 바로 하늘의 연장이며 제천의식이 행해지는 장소였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천산(天山)의 관념들은 조선과 부여는 물론이고 북방(北方) 여러 부족과 서장(西藏) 및 중앙아시아 민족들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사용해 온 '한'이라는 말은 '밝'과 더불어 알타이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신앙이자 정체성을 파악하는 근거가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 종합고찰
  
  지금까지 한국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내용은 상식적인 내용인데 이것을 고증하려는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하면 조선(朝鮮)·쥬신(諸申)·한국(韓國)·코리아(Korea) 등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말도 고증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이런 논의는 접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한국(韓國)이라는 말은 '쥬신의 나라', 또는 '칸의 나라', '큰 나라', '중심이 되는 나라' 등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이라는 말 자체가 가진 의미를 보더라도, 한국(Korea)의 역사를 요동(遼東)과 알타이에서 분리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죠?
  
  '요동사'의 관점은 고구려의 역사를 쥬신사에서 떼어 내려는 시도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습니다. 발해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이 견고하고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였는데 고구려를 한국사의 무대에서 제외하다니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한족(漢族)과 알타이에서 백두산 - 한반도에 이르는 민족, 즉 쥬신 간의 대립과 투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따라서 그 동안 최남선 선생이 동아시아 문화의 양대 주역으로 '지나문화권(支那文化圈 : 중국 문화권)' '불함문화권(不咸文化圈 : 범알타이계 문화권)'으로 중국과 알타이계가 항상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 투쟁해왔다고 했듯이 이 같은 쥬신 - 한족의 대립구도는 지극히 당연한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큰(한) 사상
  
  지금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본다면,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한'이란 순 우리말이며 ① 하나라는 의미, ② 크다는 의미로 몽고어나 만주어에서 사용하는 한[汗, 王] 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칸[한(汗)] 사상', 또는 '한(큰)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칸(한, 큰) 사상은 쥬신이 가진 집단 무의식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쥬신의 신화에 따르면, 쥬신족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천손(天孫)이라고 합니다. 즉 하늘나라[천국(天國), 또는 환국(桓國)]가 있어 그 후손들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들이 바로 쥬신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한족(漢族)도 하늘을 중시하여 그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하지 않나?"라고 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그 내용이 분명 다릅니다.
  
  예를 들면 한족(漢族)의 경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천명사상(天命思想)이 강하기는 합니다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사고는 철저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요소가 강하고 운명론적인 요소가 약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天孫)의 후예(後裔)가 아니고 여와가 진흙으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지요. 한족(漢族)에게 천자(天子)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 천명(天命)을 수행하는 대리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탄생에는 하늘이나 태양과의 감응현상(感應現象)이 필요가 없지요. 오히려 하천(河川)이나 대하(大河)를 의미하는 용(龍)과의 결합이 더욱 중시됩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신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이에 비하여 쥬신은 대개 태어날 때부터 삼신(샤먼) 할머니가 점지를 해줍니다. 그리고 쥬신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하늘의 자손이라야 칸(Khan)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 한국인(汗國人 : 칸국인)들도 모두 천손의 후예들이지만 좀 더 혈통적으로 하늘에 가까이 닿아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화가 필요합니다. 한국인(칸국인)들에게 역사 시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천손 신화가 존재했던 것도 그들이 바로 천손(天孫)이라야만 한국인(칸국인)을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래서 쥬신 사회에 있어서 천손강림(天孫降臨 :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옴) 신화가 존재하는 것은 미개(未開)하거나 비문명적(非文明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쥬신 사회를 통치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쥬신의 통치자들에게는 태양의 빛을 받거나 신조(神鳥)의 알에서 나거나 하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13세기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한 세계의 주인 칭기즈칸조차도 알랑고아의 신화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정 안 되면 태몽(胎夢)이라도 천손(天孫)과 관련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족(漢族)들은 실력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릴 수도 있지만 쥬신을 다스리려면 실력은 기본이고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족(漢族)들의 역사를 보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많습니다. 물론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힘의 유무에 따라 힘이 있는 자가 바로 권력을 차지하고 황제가 됩니다. 그러나 쥬신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칸(왕)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천손 증명서가 없이는 곤란하죠.
  
  그래서 고려시대 때나 일본(日本)의 경우 실질적인 모든 권력을 장악한 군벌(軍閥)의 우두머리라도 왕을 칭하지는 못합니다. 고려의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무신정권(武臣政權)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권력을 잡은 후에도 오랫동안 고려 귀족들의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후일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편찬하게 됩니다.
  
  일본(日本)의 경우는 천년이나 바쿠후[막부(幕府)]라는 이상한 형태의 권력이 생성됩니다. 실질적인 모든 권력은 쇼오군(將軍)이 장악하고 천황(天皇)은 때로 식솔들의 끼니도 걱정하는 상태이기는 해도 쇼오군은 이론적으로는 천황 아래의 존재였던 것이지요. 쇼오군이 천황이 되려고 했으면 아마 그 쇼오군은 2대를 넘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도 쥬신(일본)이 가진 천손사상은 2차 대전 당시 그 많은 일본 국민들이 큰 불평도 없이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자손이 하는 일이니 사람이 어찌하겠습니까?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중국 같았으면 벌써 황제가 바뀌었겠죠.
  
  쥬신의 칸들이 천손인 것을 증명해야만 칸이 될 수 있는 점을 보다 실질적인 각도에서 살펴봅시다.
  
  무엇보다도 유목민(遊牧民)들은 "자신이 경작하고 있는 농토를 떠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농경민(農耕民)들과는 다릅니다. 즉 유목민들에게 특정 지배집단의 의지를 지나치게 강요하면 그 초원을 떠나면 되기 때문에 특정한 유목민을 지배할 수 있는 통치능력의 정도는 그 지배부족의 무력적 우위(physical overwhelming)와 부족들이 가지는 자유(freedom) 사이에서 균형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김호동, 「고대유목국가의 구조」『강좌중국사Ⅱ』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편 (지식산업사 : 2004) 참고].
  
  다시 말해서 대부분 유목민들은 국가라는 대규모 구속적인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국가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유목생활은 여러 가지 부족한 물품들이 많기 때문에 그 부족한 물품들을 농경민 사회로부터 교역과 거래, 또는 전쟁을 통해 획득해야만 합니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유목민의 군주(칸)들은 이들 유목민의 생필품(necessaries of life)의 공급 경로를 장악한 사람들(supply chain managers)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칸들은 이 생필품들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과 그 물자들의 유통과정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유를 포기(alienation of freedom)하는 것보다도 생필품의 공급에 따른 편익(benefit from necessaries' supply)이 더 클 경우에는 칸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목민들의 생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류의 성공적인 생필품의 공급자가 바로 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매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러 부족의 유목민들을 하나의 국가 체제로 통일적으로 묶어내는 데는 충분한 무력(physical power)이 있어야 하고 그 무력을 통해 유목민들의 자유(freedom)를 구속할만한 충분한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칸은 단순히 무력의 우위나 훌륭하고 값싼 대형 마트(Mart)의 건설자일 뿐만 아니라 보다 신성한 권위(dignity)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휴우, 정말 칸이 되기가 힘들군요).
  
  즉 칸은 여러 개의 평등한 부족들 가운데 우둑 솟은 초부족적(超部族的) 수령(首領)의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엄청난 유목국가들은 하나같이 초부족적인 유목국가였습니다. 웬만한 논리로 자유로운 유목민들을 통제하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나타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손 사상(天孫思想)이라는 것입니다.
  
  천손사상이 유목민들에게 쉽게 먹히는 것은 유목민들은 대부분 하늘과 관련하여 사고하고 목축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유목민들의 삶이 자연의 변화에 종속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과 무슨 관계라도 있으면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이런 점에서 칸은 유목민들이 자연재앙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하늘의 전령, 즉 샤먼적 존재라는 의미도 되겠죠?
  
  그러니까 칸은 '중국식의 물리적 황제와 신의 전령(샤먼)' 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단군왕검(檀君王儉), 즉 텡그리옹군(Tenggeri Onggun)이 가진 실존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쥬신의 고유 신앙에는 하늘, 또는 그 하늘을 상징하는 태양 숭배 사상이 있고 그것으로 쥬신들은 나라 이름을 만들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하늘님·(하늘은 환하니까) 환한님·환님·한님 등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이 한자로 표현되면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들이 바로 나라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죠. 또 태양은 불[火]로 표현되지요. 그래서 불과 관련된 말들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양은 황금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므로 황금 또한 중요한 나라의 이름이 됩니다. 이것도 분명히 중국과는 다릅니다. 중국의 나라이름들은 대부분이 그 땅 이름입니다.
  
  쥬신은 하늘나라 임금(天帝)을 의미하는 말로 환님(桓仁 : 환한 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말이죠. 쥬신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고(高 : 뜻으로 사용)' '환(桓 : 음으로 사용 - 환한 빛을 의미)' '백(白 : 뜻으로 사용 - 환한 빛을 의미)' '불(不 - 음으로 사용 : 태양 또는 불[火])' 등의 글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몽골이나 한반도의 쥬신들이 흰색을 광적으로 숭상하는 것도 바로 태양숭배 나아가 하늘 님의 숭배 사상인 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칸이 천신(天神)의 자손이라지만 그 권위는 한족(漢族)의 황제(皇帝)보다는 매우 허약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사회가 기본적으로 부족 연맹체와 같은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 초기에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청태조)는 한족(漢族)의 종법제도(宗法制度 : 장자상속제)를 받아들여 맏아들을 후계로 삼았으나 불화(不和)가 심하자, 아예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8명의 왕(王)이 사이좋게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려 라고 유언합니다(1626).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너무 강력한 권력을 가진 한족(漢族)의 황제 같이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하늘에 죄를 범하게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李鴻彬, 『淸代開國史略』(濟魯書社 : 1977) 118~119쪽 ;『淸太祖實錄』卷1].
  
  그러면 한(큰) 사상이 현실 정치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적용이 되는지를 알아봅시다.
  
  한(汗, 또는 韓)은 순 쥬신의 말로 '크다[大]', 또는 '많다[多]'는 것입니다. 나아가 한(汗, 또는 韓)은 하나[一]이고 바르고[正] 가운데[中]이기 때문에 우두머리[임금]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韓(우물, 또는 땅 이름)이나 汗(땀)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한'이라는 순 우리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韓이나 汗이라는 글자는 한(큰)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한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앞으로는 한(큰)이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한(큰) 사상은 가장 큰 것은 하늘[天]이고 그 하늘의 자손[天孫]이 세상을 지배하는데 가장 큰 것이 가장 옳고 정통성을 가졌다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결국 가장 큰 것은 하늘의 명령[天命]이 임한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一]'라는 것이 '한(큰) 사상'의 본질입니다.
  
  한(큰)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쥬신의 전쟁 문화일 것입니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북방계 유목민(쥬신)들은 무를 숭상하고 힘센 젊은이를 우대하는 수렵사회의 가치관과 하늘[天]은 힘이 있는 큰 나라[大國], 또는 큰 임금을 돕는다는 천명(天命)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東亞硏究所編 『異民族の支那統治史』(東京 : 講談社 : 1943) 288쪽, 292쪽]. 물론 아무 나라나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천손의 나라 중에 큰 나라[大國]라야 하겠죠.
  
  여기에는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만약 쥬신 부족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합시다. 그러면 부족들은 항복하거나 끝까지 싸우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쥬신은 많지도 않은 인구로 기병(騎兵)을 위주로 전쟁을 하기 때문에 쥬신 간의 전쟁은 쌍방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 쉽습니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막심할 수 있지요. 마치 사자나 호랑이가 서로 만나면 가급적 피하듯이 이들도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쥬신 간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어떤 구실이 필요합니다.
  
  이 때 바로 샤먼이 제 구실을 합니다.
  
  쥬신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군장들은 샤먼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졌거나 샤먼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는 샤먼은 점(占)을 치는 시늉을 해서 "하늘(신)이 당신을 선택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민속원 : 2001) 21쪽]"는 식으로 결정함으로써 하나의 부족이 이내 보다 큰 세력 하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쥬신은 싸움도 없이 쉽게 엄청난 세력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바로 이 같은 한(큰) 사상이 원(元)나라나 청(淸)나라와 같은 세계적인 대제국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일반적으로 한족(漢族)들은 효(孝)를 중요시하며 노인을 공경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하늘[天]은 중화문화를 수호하고 성인(聖人)을 돕는다는 천명관(天命觀)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한족(漢族)과 쥬신이 가진 이데올로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족(중국인)들은 특정한 중원 문화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쥬신은 시대적이고 세대에 순응(順應)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쉽게 말해서 중국인들은 무조건적으로 가장 중국적인 것(상당히 주관적 요소가 강하겠죠?)을 지켜야 한다고 보는 반면, 쥬신들은 시대적으로 가장 강력한 집단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농경민과 유목민의 차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이 같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조차도 중국의 문화(文化) 속으로 녹여버리려고 합니다. 이 같은 특성은 모든 새로운 학술적인 용어도 우리처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번역해서 중국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죠. 이 안에는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것을 몸체로 삼고 서양의 기술들은 단지 필요에 따라 사용할 뿐)'의 생각이 뿌리깊이 박혀있습니다. 즉 중국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데에 대하여 조금도 생각을 바꾼 것 같지가 않습니다[이것은 제가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지적했던 중국인들 고유의 불패사상(不敗思想)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 혁명을 보면 기라성(綺羅星)같은 수많은 외국 유학파들을 물리치고 중국밖에 모르는 중화국수(中華國粹) 민족주의자 모택동(毛澤東)이 권력을 장악한 것도 다 그런 이유지요].
  
  예컨대 현대의 대표적인 코드인 '디지털(digital)', 또는 '아날로그(analog)'라는 용어를 한국이나 일본은 그대로 사용하는데 반하여 중국인들은 '수마(數碼)'와 '모의(模擬)'라는 조금은 이해가 안 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디지털(digital)이라는 것이 수(數)를 의미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단순히 수(數)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은 아니지요. 우리가 DB(데이터베이스)를 그저 DB(데이터베이스), 컴퓨터(computer)를 그저 컴퓨터라고 해야지 전산기(電算機)라고 하면 안 되듯이 말입니다(요즘 컴퓨터를 계산기로 사용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한편으로 학생들의 현대 기술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한(큰) 사상은 문제가 없을까요? 만약 이 사상 체계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쥬신의 위기도 없었겠지요.
  
  한(큰) 사상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동화력(同化力)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과 일본에서는 '냄비근성'이니 하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즉 쥬신은 그 특유의 '한(큰)' 사상으로 인하여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큰 것에 쉽게 동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오늘날 한족(漢族)과 같은 정체성(ethnic identity)을 유지하기 힘들죠. 특히 농경화(農耕化)된 쥬신 사회는 특히 중국에 쉽게 동화되려는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동아시아에서 하나의 사회가 농경화되면서 중국 문물을 가장 따르고 싶어 하는 사회가 되어버리면 중국과의 무슨 차이가 생깁니까? 결국은 중국에 동화(同化)되고 말지요.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쥬신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보면 실제로 한족(漢族) 스스로 통치한 적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한족(漢族)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질 않습니까?
  
  '한족(漢族)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쥬신의 핍박에 묵묵히 순응(順應)하고 참고 견디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국의 쥬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한족(漢族)만이 남는 것이지요. 힘을 기른 한족(漢族)들은 남은 쥬신들을 없애나가기 시작하지요. 중국을 대부분 지배한 사람들은 쥬신이지만 결국 바람처럼 사라져 가고 끈질긴 '땅의 아들'들, 즉 한족(漢族)들만 그 땅의 주인으로 남아있는 것이죠.
  
  이 점 쥬신들은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남은 쥬신이라고는 (몽골에 극소수가 있지만) 사실상 한국과 일본뿐인데, 이들도 스스로 쥬신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4) 산채 요리
  
  지금까지 우리는 큰(한) 사상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상은 우리 핏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반도쥬신과 만주나 몽골쥬신의 경우에는 그 환경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큰(한) 사상이 현실적으로 구현되는 모습을 이제 한 번 추적해봅시다. 큰(한)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쥬신은 만주와 몽골 지역입니다. 몽골은 이미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만주 쥬신들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만주 쥬신은 흔히 여진(女眞 - [뉴신], 또는 [쥬신]으로 발음)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여진이라는 말은 쥬신을 음차(음을 빌어 표현)한 말입니다. 가장 저질이고 자극적으로 표현된 욕설이죠? 성적(性的)으로 이 만큼 큰 모욕감을 주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그 민족명으로 사용했다니 기가 찹니다. 사실 여진은 쥬신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를 빌려온 말인데 한족(漢族)들이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거란(동호계)이 세운 요(遼)나라 때 여진은 숙여진(熟女眞 : 잘 익은 여진 - 말 잘 듣는 여진)과 생여진(生女眞)으로 분류됩니다.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대체로 보아 요나라에 복속되어 살아간 사람들을 숙여진(熟女眞)이라 하고 그 나머지 몽골 만주 일대를 떠도는 사람들을 생여진(生女眞) 정도로 부른 것 같습니다.
  
  숙여진이나 생여진이나 같은 민족이지만 특정한 군장이나 수령의 통일적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많아야 그저 1백호 정도 적은 경우는 한두 집 정도가 무리를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여진의 경우에는 그들의 거주지가 동북으로는 그 끝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나라 정부도 여진에 대한 군사적인 방비를 하지도 않았습니다(『契丹國志』 22). 이것은 유목민들이 속성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당시 만주 쥬신(여진)은 일정한 사회적 법률도 없으며 정치적으로 국가적인 체제를 정비할 수가 없었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금의 시조였던 김함보의 증손자 헌조(獻祖)에 이르러 땅을 개간하고 가옥도 지어서 정주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金史』1 「世紀」)
  
  그런데 어째 명칭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아주 옛날 한족(漢族)들은 사람을 짐승취급을 하더니 이젠 아주 산나물[山菜] 취급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살다가 보니 별일이 정말 다 있습니다.
  
  문제는 거란입니다. 거란은 같은 쥬신 계열의 민족이면서도 한화정책을 심하게 추진하여 같은 민족들을 아예 식물 취급을 한 것이죠(마치 한국인들이 중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캐 취급하는 것과 유사하죠?). 그러니 거란은 북부의 몽골과 북만주 생여진의 미움을 산데다가 특산물 조공을 지나치게 요구하니 이제 그 분노가 폭발합니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여진은 요나라 사람들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宋史』472). 몽골도 거란을 같은 민족이지만 "한족(漢族) 트기"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거란'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남부에 있는 여진을 숙여진이라 하고 북부의 여진을 생여진이라고 했는데, 이 생여진 가운데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 : 흑수) 부근에서 아골타(阿骨打)라는 영웅이 나타나 부족들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설합니다(『契丹國志』9). 이 생여진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입니다. 그리고 힘을 몰아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반도 쥬신(고려)을 신복(臣服)시킵니다.(『金史』60 「招聘表」; 『金史』135 「高麗傳」)
  
  금나라의 태조(아골타)는 요나라(거란)를 멸망시킨 후 "여진과 발해는 모두 물길(勿吉)에서부터 나온 한 집안"이라고 말합니다(『金史』卷1 本紀1). 그러니 결국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앞에서 보시다시피 '발해 = 고구려'이지 않았습니까?
  
  의식이 있는 쥬신의 제왕들은 쥬신의 풍속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전을 기합니다(후일의 청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은 요나라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나라 세종은 "회령(會寧)은 국가 흥왕(興王)의 땅인데 영안으로 도읍을 옮긴 후 우리는 차츰 우리의 풍습을 망각하고 있다. [……] 그러니 자손들을 회령으로 보내어 그 풍속을 익혀야 한다."(『金史』卷7 世宗紀)고 하면서 여진인들의 성(姓)을 한자(漢字)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고 한족(漢族)의 의복과 장식을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개·돼지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산나물로 취급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쥬신의 입(거란)에서 나와서 전체 동아시아에 퍼져나갔으니 말입니다.
  
  (5) 황금(黃金)의 역사
  
  금나라는 가장 알타이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알타이 문화의 특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무엇보다도 국호(國號)가 그렇지 않습니까? 금나라(청나라의 전신)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아이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아이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2卷 太祖紀)."
  
  이를 보면 쥬신족들은 알타이(金)라는 말이 가진 의미들, 즉 ① 금(金)이나 쇠, ② 해 뜨는 곳 즉 동쪽(東), ③ 시작하다(始), ④ 밝다[明], ⑤ 하늘을 나는 새[鳥] 등의 의미들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채혁 교수에 따르면, 북방의 유목민들 가운데는 황금 곧 쇠(金)에 대한 신앙이 있는데 쇠 소리가 나쁜 귀신을 쫓아준다는 믿음이 있어서 신앙의식에 쇠 소리가 따른다고 합니다[주채혁, 『몽고민담』(정음사 : 1984)]. 그래서 쇠를 오보에 바치기도 합니다.
  
  금나라의 사람들은 원나라 때는 원나라에 완전히 흡수되어 원나라 국민으로 살아갑니다. 그 후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다시 ① 해서여진(海西女眞 : 해서 지방에 거주), ② 건주여진(建州女眞 : 건주 지역에 거주), ③ 야인여진(野人女眞 : 극동에 거주하는 여진)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大明會典』107). 이들 가운데 조선과 인접해있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흥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가장 강성했으며 선진적이었습니다.『요동지(遼東志)』에 따르면, 건주여진은 이미 의식주 생활이 조선이나 중국과 유사할 정도로 발전한 단계였다고 합니다(『遼東志』7).
  
 
  명나라 때의 여진족(만주쥬신). ⓒ김운회

  건주여진(建州女眞)과 조선(朝鮮)은 바로 연접하여 있었기 때문에 인적 물적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물론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건주여진은 회령(會寧) 사람들과 함께 경작하여 먹었고 조선인과 대대로 혼인하며 살았기 때문에 "조선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世宗實錄』11, 19, 77, 84). 제가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여진의 말은 함경도 말과 유사하여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제가 건주(建州), 건주(建州)하니까 낯설게 느껴집니까? 바로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북간도(北間島)입니다. 현재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延辺朝鮮族自治州)입니다. 한국(반도쥬신) 민족문학의 대명사인 『북간도(北間島)』『토지(土地)』의 중심 무대인 곳이죠. 건주, 즉 북간도는 반도 쥬신의 독립의 터전이자 쥬신의 제 2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는 장백산(백두산) 지역이죠.
  
  이제 아시겠죠? 제가 청나라를 그저 동족(同族)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죠 ?
  
  건주여진은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 : 1559~1626)라는 반도 쥬신(신라) 출신의 희대(稀代)의 영걸(英傑)이 나타나서 만주 쥬신의 운명이 바뀝니다.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는 한국식으로 표기하면 김누루하치가 됩니다. 즉 아이신자오뤄는 경주 김씨라는 의미의 김(金)이고, 누루하치는 쥬신 고유어이므로 김누루하치가 맞지요.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명나라의 술책으로 잃고 만주와 몽골을 심하게 이간질하는 명(明)나라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다가 저 유명한 싸얼후(薩爾滸) 대전(1619)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중국경영에 나서게 됩니다.
  
 
싸얼후 대전과 청군의 진출로. ⓒ김운회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싸얼후 대전에 대해서 한 번도 들으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들었다면 쥬신의 역사도 바로 섰겠지요. 그러나 이 전쟁이야말로 쥬신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족(漢族)과의 한판 승부였습니다. '싸얼후'란 만주어로 울창한 숲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현재는 푸순(撫順) 인근의 오지(奧地)입니다.
  
  싸얼후 대전은 역사상 한족(漢族)과 쥬신 사이에 벌어진 최대 전쟁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싸얼후에서 2만의 정예 병력으로 명나라의 27만 대군을 격파하였습니다(『滿文老檔』「太祖」,『滿洲實錄』5). 싸얼후(薩爾滸) 대전은 동아시아의 역사상 3대 전쟁이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이 전쟁이 중요한 것은 쥬신 기병전술의 우수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 태조 김누루하치는 늘 쥬신 기병 1만이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 만주와 몽골에는 크게 만주인(만주 쥬신)과 몽골인(몽골 쥬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몽골이란 민족적 의식은 칭기즈칸의 원나라 이후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 때까지도 여진(만주 쥬신)은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통일적인 구심체가 없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요동 - 만주 - 몽골의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한 분이 바로 청태조(김누루하치)입니다.
  
  몽골이나 여진은 민족적으로 다르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워낙 광대한 영역인 몽골 - 만주 지역에 소수가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통합되기 어려웠던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 이후 이 지역은 두 영걸에 의해 통합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견고하게 가지게 됩니다. 한 분은 칭기즈칸이요, 다른 한 분은 청 태조입니다.
  
  한 가지 꼭 알아 두셔야 할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몽골이나 만주인들이 별로 다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은 같지 않지만(중국도 지역별로 말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특히 광동어는 완전히 외국어입니다. 우리도 전라도 사투리나 경상도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는 서로 잘 통하지 않잖아요) 의복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청태조는 몽골도 만주와 같은 민족으로 간주합니다(『滿文老檔』「太祖」10, 13, 14). 결국 만주와 몽골은 청나라 태종에 이르러서는 하나로 통합되어 중국을 경영하게 됩니다.
  
 
  청 태조(김누루하치). ⓒ김운회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1600년경에 이르면 만주쥬신(여진족)의 공동체는 혈연적인 유대가 느슨해지고 지역공동체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혈연적 유대가 강한 일부의 명문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매우 적었다는 것이죠. 즉 17세기의 만주쥬신 사회는 '씨족공동체', 또는 '씨족공동체연맹'이라기보다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입니다[三田村泰助, 『淸朝前史の硏究』(東洋史硏究會 : 1973) 218쪽, 245쪽].
  
  물론 만주 쥬신 공동체라고 하면 그것이 혈연이든 지연이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혈연적 유대가 약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쥬신 간의 차이도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혈연적 유대의 약화를 보여주는 예를 봅시다. 1595년 청 태조의 허투알라성(赫圖阿拉城)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의 기록에 따르면, 내성(內城)에는 청태조의 친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외성(外城)의 바깥쪽에는 각종 장인(匠人)들이 거주했다고 합니다(申忠一, 『建州紀程圖記』).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거 몽골과 만주 지역에는 수십 개의 민족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의 차이는 매우 확연하다는 점을 배우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차이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 듯이 한족(漢族)과 새끼중국인들은 떠들어댑니다만 실제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몽골과 만주 쥬신들은 동족(同族)내에서 지역적 차이로 발생하는 특수성(特殊性)들이 소멸되고 보다 공통성(共通性)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몽골·만주 지역에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활성화되어 그나마 존재하던 이질성(異質性)이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건주(建州), 즉 북간도 지역의 농업생산력 증대에 따른 전반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통합의 핵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의 국가간의 통합이론(統合理論 : Integration theories)들 가운데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지속적 활성화가 국가간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강력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은 유럽연합(EU)의 결성에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청 태조가 만주 쥬신들을 팔기(八旗)로 조직하면서 이제 만주 지역은 왕족(王族) - 자유기인(自由旗人 - 평민) -보이(Booi : 包衣 - 노비) 등으로 엄격히 구분됩니다.
  
  이 자유기인(이전의 일반 여진인 후금 이후 여진족 평민)이 바로 제신(諸申)이죠. 즉 일반적인 만주인, 즉 여진족(쥬신족)을 부르는 말인 제신[諸申 : 이 말은 쥬신(Jüsin), 또는 쥬션(Jusen)으로 발음 됨. 조선(朝鮮)이나 숙신(肅愼)·직신(稷愼)의 중간 발음]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건주부(建州部) 이외의 지역에서 후금(청나라)으로 귀순한 일반적인 여진족을 부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는 일건(Irgen : 伊爾根)이라고 하였습니다. 몽골인, 만주의 조선인 등도 모두 자유기인에 속하게 됩니다.
  
  제신(諸申), 즉 쥬신들은 이전에는 촌장이나 족장에 속하여 농업이나 유목 등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하였지만 후금(청나라)이 건국될 즈음에는 행동의 제약도 받으면서 납세의 의무도 지게 된 것입니다[安部健夫,『淸代史の硏究』(創文社 : 1971) 147~153쪽]. 이것이 건주(建州)의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으며 중국경영의 경제적 기반이 된 것입니다.
  
  실제 초기 청나라가 의지할 수 있는 혈연적인 공동체라고 해봐야 30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소 1억 이상의 한족(漢族)을 다스리는 그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국력의 누수를 방지하고 권력을 최대한 집중시키고 쥬신들 간의 연계를 강화합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몽골 쥬신과 여러 형태로 민족 통합(ethnic integration)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통한 민족 통합정책입니다.
  
  예를 들면 청나라의 경우에는 만주족 여인이 한족(漢族)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으며 만약 이를 어기고 결혼한다면 족보(族譜)에서 삭제하였습니다. 즉 만한통혼(滿漢通婚)을 금지한 것이죠. 그러나 몽골에 대해서는 철저히 혼인을 장려하는 연혼정책(聯婚政策)을 사용했습니다. 청나라 황제마다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后妃)로 삼고 청 황제의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의 왕공의 자제와 결혼을 합니다. 이것은 만주족과 몽골족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쥬신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의식(민족형성의 주관적 요소)'이 상당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민족의식이 오늘날 '일본인', '한국인'과 같이 형태는 아니겠지요. 청나라가 1억이 넘는 중국대륙을 지배하면서 주축이 된 민족(만주족)은 순수한 의미의 극소수 만주족(10만여 명 : 1577년 기준)이라기보다는 몽골 - 만주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민족들이며 이들을 사실상 하나의 민족[쥬신, 또는 제신(諸申)]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중국을 경영한 것이죠.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천도(遷都)한 이후 흉노·거란·동호·몽골 등 여러 이민족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각종 서적들을 모아서 불태웁니다[임계순,『淸史』(신서원 : 2001) 110쪽].
  
  1636년 3월, 심양(瀋陽)에서는 몽골의 대칸(大汗)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부족장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때 몽골, 전체 만주인, 요하의 한족(漢族) 들이 모여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愛新覺羅皇太極), 즉 김홍타이치를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합니다. 이때 몽골의 16부 49추장들은 김홍타이치(청태종)에게 칭기즈칸(成吉思汗)의 천명(天命)이 내린 것을 인정하고 성스럽고 현명하고 인자한 황제라는 뜻으로 '복드세첸칸(Bogda-Sechen Khagan)'이라는 존호(尊號)를 바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 부족들은 김홍타이치(청태종)에게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의 존호를 바칩니다. 결국 같은 말이죠.
  
  이 존호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단군왕검(檀君王儉), 즉 텡그리(고도)옹군(Tenggeri Onggun)입니다.
  
  이로써 김홍타이치(청태종)는 전체 쥬신[제신(諸申)]을 아우르는 텡그리옹군, 즉 대칸(大汗)이 되었고 대칸의 자격으로 국호를 청(淸)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그는 대칸이라는 칭호대신에 황제(皇帝)로 바꾸어 중국을 통치합니다.
  
  (6) 황혼의 쥬신
  
  지금까지 보았듯이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한'이란 순 우리말이며 ① 하나라는 의미, ② 크다는 의미로 몽고어나 만주어에서 사용하는 한[汗, 王] 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1635년 청태종은 여진(女眞), 또는 제신(諸申)이라는 말 대신 만주(滿洲 : [만슈])를 사용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즉 16세기경부터 한반도의 북방의 쥬신족들은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불교에서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신앙에서 나온 말로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岸本美緖, 『'東アジアの世界』(山川出版社 : 1998)]. 그리고 누루하치의 근거지였던 허투알라(赫圖阿拉)를 흥경(興京)으로 개칭합니다. 청태종은 귀순한 한족(漢族)들을 왕으로 봉하여(『淸史稿』卷2 太宗本紀 2), 쥬신과 한족(漢族)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중원통치를 본격화합니다.
  
  1636년 드디어 김홍타이치는 몽골-만주 전체 쥬신의 텡그리옹군(단군왕검)의 지위에 오릅니다. 그는 전체 쥬신을 아우르는 텡그리옹군[대칸(大汗)]의 자격으로 국호를 후금에서 청(淸)으로, 군주 명을 칸에서 황제(皇帝)로 바꾸게 됩니다. 중국 경영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로 생각됩니다. 이로써 부족사회(또는 만주·몽골 귀족연합체)에 불과했던 만주 쥬신이 불과 20~30년 만에 세계적인 대제국(大帝國)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죠.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점은 만주인(滿洲人)이라는 것은 단순히 전체 여진인들을 의미하는 제신(諸申 : 쥬신)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몽골까지 통합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말이라는 것이죠. 즉 "지금부터 모든 사람들은 오직 만주(滿洲)라는 이름만을 칭한다(『淸太宗實錄』25)"라는 청 태종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주는 이른 바 범쥬신을 의미하는 용어라는 것이죠.
  
 
청 태종(김홍타이치). ⓒ김운회  

  칭기즈칸이나 청 태조와 같은 영웅들은 제신(諸申 : 쥬신)이라는 산만한 집단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여 새로운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들이 다른 민족 집단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쥬신이라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산업구조를 포함한 경제 환경 및 지리적 차이로 인하여 그 공통성이 약화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한반도의 쥬신(한국인)입니다. 이들은 유목민으로서의 쥬신의 동질성보다는 보다 발달되고 세련된 세계적인 중국문화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합니다. 쥬신족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문화를 이룩한 종족은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쥬신족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반도의 쥬신인(한국인)들은 일찌감치 세계화(globalization)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국인들은 스스로가 가진 쥬신적인 특성들을 인위적으로 억압하고 정서적으로 중화민족(中華民族)이 되기를 염원하여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의 본질입니다. 만약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공자(孔子)에 대하여 욕설을 퍼붓는다면 중국에서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한국에서는 아마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찰 일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같은 소중화주의가 이제 그 대상이 미국(美國)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세대(new generation)는 구세대(old generation)가 가진 중국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고 "중국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많이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러 면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대단히 반가운 일이지요.
  
  하지만 세계 최고를 향하는 맹목적인 추종의식은 바로 소중화주의를 만들어낸 한반도 쥬신족들의 역동적인 성격으로 볼 수 있지요. 이것은 사실은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한(큰) 사상의 변질된 모습입니다.
  
  한국인들의 그러한 역동성은 사실 따지고 보면 유목민들이 가진 성격이기도 합니다. 천손(天孫)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유목민들은 대영걸이 나타나면 그 천명이 그 영웅에 임했다고 쉽게 인정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칭기즈칸이나 청 태조가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단시간에 쉽게 범쥬신 연합체제를 결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유목민들의 이 같은 특성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쥬신들은 그 대상이 중국이고 미국이었던 차이 밖에는 없는 일입니다. 모르죠. 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 샤먼의 지시에 따라 겔(이동식 가옥)을 철거하고 이미 풀이 부족해진 곳을 떠나 목초가 풍부한 다른 장소로 가듯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韓國)이라는 말이 단순히 한반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한국이라는 말은 천손사상(天孫思想)을 나타내는 환국(桓國)과 그 우두머리의 나라 칸국(汗國), 나아가서는 쥬신의 이상국(理想國 : ideal state)을 나타내는 말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는 요동을 비롯한 몽골·만주·한반도·일본 등 쥬신의 땅들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한국에서부터 쥬신의 큰(한) 사상이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아가 이 생각들이 현실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쥬신을 단합시키고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쥬신의 부정적인 특성도 동시에 나타나 쥬신의 황혼(黃昏)이 서서히 우리 곁에 다가온 것도 여러분들이 아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황혼에 온 단군왕검의 편지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2> 조선사 5백년 최악의 쿠데타 : 인조반정
  2005-08-24 오전 10:51:45
  쿠메의 한 무녀(巫女)가 독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때 아이들이 "무녀,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오?"라고 묻자, 그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죽은 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위의 시는 유명한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荒蕪地 : The Waste Land )』입니다.
  
T. S. 엘리어트와 황무지의 이미지. ⓒ김운회

  이 시에서 4월이 가장 잔인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4월은 쓸데없이 비가 내리고 바람도 불고하면서 마치 뭔가 살아 있는 듯 하지만 참된 재생(再生)과 부활(復活)을 가져오지 않고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4월은 재생과 부활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재생과 부활을 요구하기 때문에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해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습니다."
  
  (1)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위에 앉아
  
  다음의 글들을 서로 비교하여 봅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4)]에 실린 글입니다.
  
  ㉮ 국사책 속의 병자호란(114쪽)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심양을 수도로 하였다. 군신관계를 맺자는 청의 요구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청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전쟁까지도 불사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청군의 침입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이 짧았고 지역적으로도 일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그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 양반 사대부의 충성가(115쪽)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서 부모를 저버리겠습니까?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중국과의)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윤집의, 「척화론(斥和論)」]"
  
  어떤가요? 중국이 부모(父母)고 우리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외교를 했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사람은 조선의 대표적 충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람은 조선의 충신이 아니라 중국의 충신입니다. 이 사람은 중국인보다 더 중국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기특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중국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이죠.
  
  다음은 한국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사람의 글을 한번 봅시다.
  
  ㉰ 동방거유(東方巨儒) 송자(宋子 : 송시열)의 가르침(『肅宗實錄』)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肅宗實錄』9-2-12)."
  
 
송시열. ⓒ김운회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는 식입니다. 이 사람이 살아서 예전처럼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동북공정(東北工程 : 쥬신사 말살 프로젝트)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사약(賜藥)을 내려 죽게 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작태를 민중들은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럼 다시 다른 글 한편을 봅시다.
  
  ㉱ 서글픈 백성들의 노래(『眞本 靑丘永言』)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위에 치다라 앉아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리닫다가 두험 아래 자빠졌구나
  모쳐라, 날랜 나이기에 망정이지 어헐질 번 하괘라(『眞本 靑丘永言』)
  
  [해설] 두꺼비(조선 정부, 또는 양반 사대부)가 파리(백성)를 물고 똥거름 위에 달려 올라가 앉아 건넌 산을 바라보니 하얀 송골매(청나라, 또는 일본)가 떠있었네. 두꺼비 깜짝 놀라서 뛰어 내리다가 똥거름 아래 자빠지고 말았지. 그러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라. 두꺼비 왈 "내가 이처럼 동작이 빨랐기에 이 정도였지. 다른 짐승 같으면 살갗이 터지고 크게 다칠 뻔 하였지 뭐야."
  
  이 시조는 병자호란(1636) 당시의 조선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풍자를 담은 시조라고 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중화사상에 찌든 조선의 사대부들이 (백성들에게는 온갖 고혈을 다 빼먹으면서) 마치 '두꺼비가 파리를 문 채로 똥거름에 빠지고서도 자기니까 그 정도였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모습 속에서 오는 절망을 희화적으로 묘사한 것이죠.
  
  다시 쥬신의 역사로 돌아가 봅시다.
  
  쥬신족들은 한족(漢族)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민족적 공통성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도 쥬신(조선)들은 철저히 이들을 외면하고 중국에 사대(事大)하고 '작은 중국인' 행세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쥬신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거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란이나 몽골은 같은 쥬신으로 하나는 남부, 하나는 북부에 머무른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힘이 강성해지자 쥬신을 무시하고 깔봅니다. 한족(漢族)의 나라들과는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맺기도 하면서 말이죠. 이 때부터 몽골은 거란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 거란'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앞서 본 대로 한족(漢族)들에게, 또는 한족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숙신·쥬신·쥬신·루씬 등은 모두 비하하는 말로 인식됩니다. 앞에서 본 대로 여진(女眞)도 욕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만족 대사전(滿族大辭典)』에 따르면, 여진(女眞)이란 거란인들이 고구려·발해 계열의 유민들을 부르던 이름으로, 만족(滿族 : 만주족)의 선세(先世 : 선조들)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쥬신[朱先·朱里·諸申, 혹은 珠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청태종은 쥬신(諸神 : Jusen, 또는 Jüsin)을 대신하여 만주(지혜로운 자)라고 부르게 합니다.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쥬신이라는 말은 한족들에게 욕처럼 사용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반도 쥬신(조선인)이 쥬신을 욕하는 마당이니 오죽 하겠습니까?
  
  과거에 김병연(김삿갓)은 그 조상을 욕하여 평생을 벼슬을 마다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도 쥬신들이 과거를 몰라서 그들을 비하했다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제 쥬신의 역사를 알고서는 그런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반도 쥬신의 만주 쥬신에 대한 경멸과 천시는 쥬신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쥬신의 영걸 김누루하치(후일 청태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중국과 조선(반도쥬신)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 그리고 몽골과 쥬신[諸申 : 모든 쥬신족 - 일반적으로는 만주 일대의 쥬신인]은 언어는 다르지만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檔』「太祖」10, 13, 14)."
  
  이 말은 같은 민족이면서 반도쥬신(조선)은 새끼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만주 쥬신을 오랑캐나 개·돼지 취급을 하는 데에 대한 커다란 실망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반도는 청나라 건국의 주체였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의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 말입니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보면 몽골과 우리가 한 뿌리라는 식의 수많은 칼럼과 기사를 접합니다만, 실망스러운 것은 만주 쥬신이 실제로 우리와 더 가까운 존재인데 이것을 제대로 다룬 기사를 아직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후금을 건국한 주체세력인 건주여진은 백두산 - 두만강 -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을 바탕으로 발흥해온 세력이었으므로 한반도 북부인들과는 많은 혈연적인 교류(결혼)도 있었고 경제적 교류도 활발했기 때문에 반도쥬신(조선)의 태도는 상당히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면서 반도쥬신(조선)은 스스로 '새끼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만주 쥬신인들을 오랑캐나 개·돼지 취급을 했으니 말입니다(『朝鮮世宗實錄』84 21年).
  
  (2) 단군왕검(텡그리옹군)의 편지
  
  반도 쥬신이 만주 쥬신에 대해서 얼마나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는 소중화 사상에 젖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불행한 예를 봅시다.
  
  반도쥬신(조선)의 훌륭한 임금이었던 광해군이 '새끼 중국인'들의 쿠데타(인조반정 : 1623)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자 반도 쥬신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들이 밀어 닥칩니다.
  
  현군(賢君) 광해군의 실각은 조선사(朝鮮史) 왜곡의 절정을 초래합니다. 제가 보건대 이 사건이야말로 5백년 조선사(朝鮮史) 가운데 "가장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지요. 당시 광해군은 선조로부터 일종의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아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국난 극복에 중심역할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되자 군무사(軍務司)를 주관하고 정유재란(1597) 때는 군량조달·모병 등으로 국난극복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광해군은 전후 복구사업에 총력을 기울여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불타거나 무너진 궁궐들을 재정비합니다.
  
  광해군은 이 같은 대내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신중한 외교정책을 시행합니다. 물론 임진왜란을 적극적으로 도운 명나라를 외면할 수도 없지만 엄청난 세력으로 확장되고 있는 청나라와 적대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나라를 도왔으나 명나라가 전투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등거리 외교를 수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日本)과도 외교(外交)를 재개하여 전후 수습에 국력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능양군(인조)을 옹립하자(인조반정)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ㆍ제주도 등지로 유배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인조반정은 조선사 5백년을 통틀어 최악의 쿠데타였습니다. 이들 쿠데타 세력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나라에 30년도 채 안되어 다시 전쟁을 스스로 불러들입니다.
  
  이들 쿠데타 세력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하였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광해군을 폭군(暴君)의 대명사로 치부하게 합니다. 다행한 것은 최근 들어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 작업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도 광해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라한 광해군의 묘소(경기도 남양주). ⓒ김운회

  물론 국난(國難)을 당하여 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무엇이든지 지나치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우리가 망하더라도 명나라를 구해야한다는 것은 심하지 않습니까?
  
  냉정히 따져봅시다. 임진왜란은 당시로 보면 매우 큰 국제전쟁(international war)입니다. 명나라가 반드시 조선만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은 더구나 아니지 않습니까?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은 국제 정치역학과 관련된 문제이지 단순히 조선을 아끼고 사랑해서 파병(派兵)한 것은 아니죠. 실제로도 일본군은 명나라를 친다는 것이 전략의 목표가 아니었습니까?
  
  만약 명나라가 조선을 지키지 않았으면 어떤 결과가 왔을까요? 전선(戰線)이 중국 북부로 확대되고 결국은 곧바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이 위태롭게 됩니다. 실제로 일본군이 올라오는 속도를 감안해 보면 일본군의 국제적인 도발이 명나라에는 상당한 충격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전선을 외국(조선)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죠. 명나라에 있어서 조선은 일종의 안전핀(safety valve)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조선이 해외에 파견할 수 있는 군대가 보병(步兵)을 주축으로 한 1~2만 정도에 불과합니다(실제로 보낸 병력도 이 정도 수준입니다). 앞서 본대로 명나라의 보기병(步騎兵) 30만도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이 정도의 병력으로 전체적인 대세를 좌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새끼중국인(소중화주의자)'들은 아예 북벌(北伐)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발전합니다. 하기야 죽는 사람 따로 있고 정책 입안자가 따로 있으니 무슨 정책이든 해놓고 보자는 식이 아닙니까?
  
  후금(後金 : 청나라)이 크게 일어 설 당시 조선의 혼군(昏君) 인조(仁祖)와 새끼중국인들은 끊임없는 후금(청)의 화친요청을 거부하고 국가적인 위기를 자초합니다. 당시 몽골과 만주의 지배자로 칭기즈칸의 천명을 받은 청 태종은 인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내립니다[『산성일기(山城日記)』(서해문집 : 2004)].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①]
  
  "조선 국왕은 들어라. 짐이 요동을 점령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끌어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1627)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어찌 강대하다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인조)가 섬(강화도)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겠느냐 ![『산성일기』58쪽]"
  
  즉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과는 다릅니다. 병자호란(1636)의 원인을 상당한 부분 반도 쥬신(조선)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행 한국의 고교 국사교과서를 한번 봅시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와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이르렀다(1627 : 정묘호란). …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 군신관계(君臣關係)를 맺자는 청의 요구에 … 주화론(主和論)과 … 주전론(主戰論)이 대립하였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다(1636 : 병자호란)[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113~114쪽]."
  
  사실 청나라가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욕심이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될 터인데 굳이 무리해서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청나라의 비위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조선이 "후금의 백성을 끌어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와 같은 구체적 상황들은 나타나지는 않죠. 즉 그저 외교정책의 실패 때문이라고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실제의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조선이 국체(國體)를 유지한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쥬신계의 국가들이 같은 쥬신계인 조선반도를 직할령으로 지배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거란의 요(遼)나라, 여진의 금(金)나라 청(淸)나라, 몽골의 원(元)나라 등이 한반도까지 직접 지배하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 지배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반도까지 신경을 집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요.
  
  합리성이 결여된 국가는 항상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가 파국(破局)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 이상한 정책을 내세웁니다. 이 과정에서 죽어나는 것은 민중들이죠.
  
  물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반도쥬신(조선)을 크게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약소국이 단지 그것만 가지고 외교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명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파병을 한 것이지 조선을 수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요. 조선이 몽골·만주·중원(중국북부)을 평정하고 있는 강대한 국가(청)에 대하여서 끊임없이 오랑캐로 멸시한다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죠.
  
  그러면 조선과 살을 맞대고 사는 만주 쥬신은 임진왜란(壬辰倭亂 : 朝日戰爭) 당시에 강 건너 불구경만 했습니까?
  
  임진왜란(1592) 때 후일 청 태조가 되는 김누루하치는 조선의 임금 선조(宣祖)를 위하여 군대를 파병할 것을 제의합니다. 즉 당시 조선의 병부(兵部)가 요동 도사(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에는 김누루하치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조선을 위하여 구원해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선조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조는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열도 쥬신(일본)의 군대를 피해 명나라로 가고 싶었으나 그것도 명나라가 거절하는 상태에서 오직 명나라의 원군(援軍)만을 기다리며 평안도 의주에서 기약 없이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김누루하치(후일 청 태조)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의 입을 통하여 원군 파병을 제안합니다. 그 내용을 직접 보시죠.
  
  "우리(여진) 땅은 조선과 서로 접해 있어서 조선이 일본군[왜노(倭奴)]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대버일러이신)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의 휘하에 기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전투에는 매우 능한 군대입니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대버일러[원문에는 도독(都督) - 후일 청 태조 김누루하치를 말함]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좋은 분이니 반드시 정병을 뽑아 한 겨울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일본군을 정벌 살육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입니다(『宣祖實錄 』卷30 25年 9月 17日 甲戌)"
  
  이에 대해서 조선의 피난정부는 이들이 "천한 오랑캐인 데다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하여 나라 전체가 환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김누루하치의 군사지원을 거절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군대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민중의 고통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명나라와 손잡고 오히려 청나라를 치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후금(청)에 사신을 보내면서 가짜 왕자, 가짜 형조판서를 보내기도 하고, 후금(청)에 보내는 글에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청태종의 즉위식에서도 조선의 사신들(나덕헌·이확)은 절을 하지도 않았으며[『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청나라 대신들이 조선 사신들을 죽이려 하나 청태종은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고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에 돌아오자 자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냅니다], 후금(청)에서 보내는 사신을 철저히 박대하여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양국의 무역에 있어서도 명나라에는 최고급 예물(禮物)을 보내면서도 후금(청)에는 저질의 물품으로 교역하는 등 후금(청)의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게 합니다. 후금(청)은 끊임없이 조선을 끌어안으려 하는데 조선은 이를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습니다.
  
  (3) 그 임금에 그 신하
  
  다시 청 태종의 편지를 봅시다.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 ②]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皇帝)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인조)가 '이런 말을 조선의 군신들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그 같이 말한 저의가 무엇이냐? 대저 누구를 황제로 칭하는 것이 옳은가 틀린가 하는 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天子)라도 외로운 필부(匹夫)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식으로 짐에게 말한다는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明)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를 한번 두고 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 된 자가 어찌 구하러 오지 않겠는가? 만일 명나라가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만백성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겠느냐? [『산성일기』58쪽]"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조선의 임금 인조는 만주 쥬신을 오랑캐들이라 세상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왕으로서는 편협하기 이를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인조를 포함한 당시 반도 쥬신(조선)들의 집권층의 생각이 이상합니다. 세상에 천자(天子)는 오직 한족(漢族)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숭상하는 유학의 기본도 모르는 행위입니다. 그러고도 이들이 유학(儒學)을 국시(國是)로 삼았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이들은 중국(한족)의 종복(從僕)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습니다.
  
  제가 누차 말씀드리지만 새끼중국인 근성을 청산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동북공정(쥬신사 말살 프로젝트)에 대비하면 안 됩니다. 보시다시피 이런 새끼중국인 근성을 가진 자들이 조선 후기의 정권을 장악하여 중국[한족(漢族)]의 머슴 노릇을 하려는 기록들이 산처럼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어찌 씨[種]가 있을 것이며,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베 짤 때 귀족(貴族)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나아가 세상에 중화(中華 : 세계의 중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선 인조 시대의 정치 지배층들은 한마디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지요. 원래 유학에서 가르치는 바도 "원칙적으로는" 천자(天子)가 따로 씨[種]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원칙적으로" 유학의 기본은 누구든지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하면 천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죠.
  
  제왕학(帝王學)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다 제왕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인식입니다. 이것을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합니다. 즉 누구라도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격을 도야하여 군자(君子)가 되면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후일 청나라의 옹정제(雍正帝)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에서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반한 화이론(華夷論)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합니다. 옹정제는 중화와 오랑캐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보고 만주족도 중국의 황제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옹정제는 황제(皇帝), 즉 천하의 군주가 되는 것은 혈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덕(德)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린 것이라고 강조합니다[小野川秀美, 「雍正帝と大義覺迷錄」『雍正時代の硏究』東洋史硏究會編 (同朋舍 : 1986) 309~321쪽].
  
  그런데 말이죠. 인조나 당시의 집권층과 같은 편협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왜곡됩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청태종(김홍타이치)의 편지와 관련된 사건인 병자호란 당시 이 집권층들의 행태는 『산성일기(山城日記)』에 상세히 나옵니다.『산성일기』는 병자년 당시 왕을 수행한 성명 미상의 고위 관리(김상헌의 아들, 혹은 조카?)가 조선의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때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사료가치가 매우 높은 책입니다. 다만 이 책은 철저히 인조반정 세력의 시각에서 쓰인 책입니다.
  
  병자호란은 지나친 소중화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새끼중국인들은 실질적인 수습을 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당시 조선(朝鮮) 조정(朝廷)의 모습은 가관입니다.
  
  1636년 12월 16일, 청나라 병사들이 남한산성에 당도하자 장수들이나 병사들은 겁을 먹어서 아예 싸울 의사조차도 없습니다[『산성일기』41쪽].
  
 
남한산성의 여러 모습. ⓒ김운회  

  자기 가족들을 피란시키기 위해 아들을 피란지인 강화도 감찰사를 시킨 자도 있고, 그 자의 아들은 왕의 식솔들을 팽개치고 강화로 피난한 후 배를 내어주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수들은 임금이 있는 지척에서 척화신(斥和臣)을 내놓으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어 이를 승지(承旨)가 "도대체 어느 안전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느냐"고 말리자 군병(軍兵)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크게 노하여 장차 난동이 일어날 지경입니다.
  
  인조(仁祖)는 국서(國書)를 보내어 청태종에게 잘못을 빕니다.
  
  "제 나라가 대국(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이 형제의 나라가 되어 비록 땅을 나눠있어도 정(情)이 두터웠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것을 자손만대의 가없는 복이라고 했는데 그 맹세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 뜻을 거슬렀습니다. 제 천성이 유약하여 여러 신하에 속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즉 신하들에게 속아서 전쟁을 자초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청 태종이 황제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서 인조가 "이런 말을 조선의 군신들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던 기상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요. 원수처럼 대하던 청 태종에게 "자손만대의 가없는 복이라"는 둥 아부가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의연한 모습은 볼 수가 없군요. 그저 살기 위해 애걸합니다. 애초에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요량이었으면 아예 순사(殉死)를 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하지 말든가 해야지요. 이전의 그 높고 고결한 정신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정말 나라꼴이 갈 만큼 가버렸습니다. 그 위대한 반청(反淸)의 의로운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젠 감히 임금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알아서 기는" 조선의 신하들이 임금(인조)의 명도 없는데도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신하(臣下)를 칭하기도 합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입니다.
  
  "조선국왕 신(臣) 이종(李倧 - 인조의 휘)은 삼가 대청관온인성황제(청 태종)께 글을 올립니다. 신(臣)이 하늘에 죄를 얻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 척화(斥和 : 청나라와 전쟁을 하자는 주장)를 주장하는 신하들은 제 나라의 사대간(司臺諫)들이며,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 그 놈들의 죄입니다. 지난 해 그 자들을 모두 벌 주어 내쳤사옵니다[『산성일기』78쪽]."
  
  그러자 이조참판 정온(鄭蘊 : 15679~1641)은 이 국서(國書)를 쓴 자를 죽이거나 내쫓아서 매국(賣國)의 죄를 밝히라고 핏대를 높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행궁(行宮 :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에 (청나라) 대포알이 날아들어서 3층 자리 기와들을 두들겨 부수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망(存亡)의 기로(岐路)에 있는데 참으로 점입가경입니다.
  
  체찰사(體察使 : 전란시 임금을 대신하여 군무를 관할하는 임시직으로 재상이 겸직) 김류(金鎏 : 1571~1648)의 행적은 더욱 가관입니다. 김류는 인조의 측근 중의 측근입니다(야사에 따르면 인조가 능양군 시절에 왕이 될 것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이 바로 김류의 아내라고 합니다). 청나라가 위장전술로 우마(牛馬)를 두고 가자 김류는 군사들을 내몰아서 싸우라고 독촉하나 군사들은 위장전술이라고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김류는 비장(裨將)을 시켜 병사들을 칼로 마구 찌르니 병사들은 할 수 없이 나가서 싸우다 순식간에 3백여 명이 전멸합니다. 그러자 김류는 전사자가 40여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면서 다른 장수가 호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남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이 전멸한 마당에 퇴각 깃발을 늦게 들었다고 초관(哨官 : 대대장급)을 베어 죽입니다[『산성일기』52쪽].
  
  뒤에 김류는 자신의 애첩과 딸이 청나라에 포로가 되자 청나라 장수에게 "천금(千金)을 줄 터이니 빼내어 달라"고 조릅니다. 이 때부터 포로 값이 올라서 또 한번 조선은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산성일기』99쪽]..
  
  조선의 국왕이라는 인조의 행동은 더욱 한심합니다. 청나라에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인조는 스스로 왕의 의복을 벗고 천민(賤民)들이나 입는 청의(靑衣)를 입고 진흙 바닥에서 절을 합니다.
  
  즉 청 태종이 황금걸상에 앉자 인조는 걸어 들어가 삼공육경(三公六卿)과 함께 뜰 안의 진흙 위에서 절을 하려 하는데 신하들은 돗자리를 깔기를 청하지만 인조는 "감히 황제 앞에서 어찌 스스로를 높일 수 있겠는가?"라고 합니다[『산성일기』52쪽].
  
  그리고 난 뒤 조선의 조정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삼전도(三田渡)에 세웁니다. 그런 후에 다시 또 북벌(北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부산을 떱니다.
  
 
  삼전도비(三田渡碑). ⓒ김운회

  그리고 한국에서는 요즘도 이 병자호란을 두고서 "나라가 외침을 당했을 때, 이 임금이 당하는 치욕적인 장면을 보라! "고 핏대를 높입니다.
  
  그런데 뭔가 지나치고 이상합니다.
  
  인조(仁祖)가 청나라에 항복할 당시의 사건을 매우 극적으로 그려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국사 선생님들이나 홍보활동에 종사하는 분들이 하나같이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인조를 위협하여 인조는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땅에 찧어야 했기에 인조의 머리는 피범벅이 되었고 옆에 있었던 신료들이 모두 피눈물을 흘렸다고 가르칩니다.
  
  즉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인조가 한번 절하고 머리를 땅에 찧을 때마다 청나라 관원이 성의가 없고 머리를 땅에 박는 소리가 적으니 다시 하라고 하였고, 이를 지켜보는 왕자들과 신하들은 차마 처참한 광경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았으며 한참 후에 보면 아홉 번이 어느새 수십 번이 되고 뒤돌아선 임금의 이마엔 어느새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는 식입니다.
  
  제가 학창시절부터 군대생활을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렇게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만 키웠지요.
  
  그러나 어떤 공식적인 기록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당시의 공식기록을 봅시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는 만약 황제가 남한산성까지 오지 않았다면 그저 항복문서만 보내도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용골대(청의 장군)가 말하기를'황제께서 심양(瀋陽)에 계셨다면 (항복)문서만 보내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황제께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국왕이 성에서 나오셔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仁祖實錄』15年 1月21日)."
  
  그리고 용골대(청의 장군)는 조선 정부에 대해 실제 군대들간의 충돌로 인한 패전 상황에서의 항복 방식(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은 너무 참담하므로 이 방식에는 따르지 말고, 그저 조선왕은 (황제 경호상의 문제 때문에) 군사의 호위나 왕의 위엄을 갖추는 행위는 하지 말고[원문에는 "위엄 있는 차림(용포)은 없애고"] 5백여 명의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항복하라고 주문합니다(『仁祖實錄』15年 1月28日).
  
  그리고 실제로 항복한 날의 모습을 봅시다.
  
  「상(임금 : 인조)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 칸(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인조)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
  
  -『인조실록(仁祖實錄)』15년 1월 30일 -
  
  당시 이 광경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황제에 대한 예[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자 청나라 관리가 전하(인조)를 인도하여 단에 오르게 하고 서쪽으로 제왕의 오른쪽에 앉게 하고 칸(청태종)은 남쪽으로 앉아서 술과 안주를 내어 잔치를 베풀었다. 칸(청태종)은 전하(인조)에게 단비가죽[獤皮(돈피)] 옷을 2벌 선사하고 육경과 승지들에게는 각각 1벌씩 선사했다[『산성일기』96쪽]."
  
  이 기록은 앞서 본 『인조실록』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철저히 새끼중국인의 시각을 가진 (인조반정을 옹호하는) 사람이 쓴 글로 추정이 되기 때문에 위의 내용은 사실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청나라의 장수나 관원이 인조를 향해 모욕적인 언동을 했다거나 윽박질렀다거나 하는 일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보면 새끼 중국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인조(仁祖) 이후의 조선 시대는 얼마나 극심하게 역사를 왜곡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라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정작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패전의 책임을 져야할 권력자들은 오히려 북벌(北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온갖 역사 기록을 이상한 방향으로 호도하여 국민들의 적개심을 키워 그것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송시열(宋時烈)은 당시 삼전도비(三田渡碑), 즉 대청황제 공덕비의 비문을 쓴 이경석(李景奭 : 1595~1674)을 지목하여 또 공격하기 시작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116쪽 참고]. 송시열은 아마 끝까지 명나라와 의리를 지켜 전 국민이 모두 전멸 당하기를 고대한 모양입니다. 정히 그럴 의도라면 자기 홀로 나서서 순사(殉死)하면 될 일인데 왜 모든 국민을 다 죽이려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새끼 중국인들로 인하여 병자호란을 자초하게 되니,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여 수습한 국가기강과 경제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민중의 생활이란 비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도처에 민란(民亂)의 위기가 상존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仁祖)는 청에 대한 개인적 원한으로 새로운 국가 비전을 가지고 있던 자기 아들 소현세자 부부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으로 북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이런 사람이 왜 청나라에 그 만큼 아유(阿諛)가 넘치는 국서(國書)를 보내고 비굴한 항복을 했는지 알 수가 없군요.
  
  인조를 옹립한 서인들의 쿠데타[인조반정(仁祖反正)]는 조선사(朝鮮史) 5백년의 가장 참담하고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었습니다.
  
  쥬신의 역사에서도 불행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이었을 뿐만 아니라 쥬신이 곧추서는 데 결정적으로 실패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청나라는 쥬신의 문화를 철저히 수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조선이 그저 청나라가 믿는 대로 "조선은 만주 쥬신 부모의 나라"로만 가만히 있기만 해도 쥬신 문화(文化)를 수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으로서도 제2의 흥기(興起)를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에이, 그 일이 실제로 가능해?"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당시 만주의 인구가 극소수라서 대부분 만주 쥬신이 중국통치를 위해 중국의 중부까지 대거 내려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간격을 반도 쥬신들이 메워주었다면 만주 쥬신이 거의 소멸될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조선은 자연스럽게 만주의 고토를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면 반도 쥬신(한국)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만주 쥬신(만주족)도 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조선의 새끼 중국인들이 반도쥬신(한국)을 "부모(父母)의 나라"로 부르던 만주 쥬신을 오랑캐 취급을 하면서 무모하게 굴다가 청나라의 정묘년 1차 침공(1627)을 받고 형제(兄弟)의 나라로 격이 떨어지더니, 병자년에 다시 2차 침공(1636)을 자초하여 이제는 아예 황제와 신하(臣下)의 격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어리석은 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내부적으로 조선은 청나라를 철천지원수로 보고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1%도 없는 북벌(北伐)정책을 추진하지를 않나, 이제는 아예 "조선이 새끼 중국[小中華]"이라는 행태로 발전합니다.
  
  그러면서 쥬신의 황혼이 깊어집니다.
  
  이 사건을 쥬신의 큰 범주에서 한번 다시 볼까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1636) 때, 남한산성에 머무를 당시 백제의 온조대왕이 꿈에 나타나 인조를 격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 뒤 2년 후에 인조는 엉뚱하게도 직산(稷山)에 있는 백제시조 온조대왕의 사당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인조는 조선(朝鮮)의 정체성(identity of dynasty)과 그 뿌리를 백제(百濟)에서 찾아서 백조 시조의 사당을 남한산성으로 옮겼던 것이라고 합니다(인조가 쥬신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아마 울구태나 동명성왕을 사당에 모셨겠죠. 온조왕이란 그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그저 소국의 왕에 불과한데 말이죠 : '백제는 없었다' 참고). 이후 정조는 사당의 이름을 숭렬전으로 하고(1795) 국가 주도로 제사를 올립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109쪽~110쪽].
  
  즉 인조 이후 조선(朝鮮)은 백제(百濟)의 계승자임을 표방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지금까지 저의 글을 읽어보신 분들이면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후금, 즉 청나라는 바로 신라계(新羅系)이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금나라를 건국한 시조가 신라 출신이라는 점을 이미 말씀드렸죠?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라고 하기도 하고, 신라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신라(통일신라)가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대금국지(大金國志)』는 금나라의 시조(완안부의 시조를 의미)가 본래 신라에서 왔고 성씨가 완안(完顔)이었다고 하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금사(金史)』와 『요사(遼史)』가 신라와 고구려를 혼동했다고 지적하면서 신라의 왕의 성씨인 김(金)은 이미 오랜 세월을 걸쳐 전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 신라 왕성인 김씨의 성을 따라서 나라 이름을 금(김)으로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金之始祖 初從高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云 本自新羅來 姓完顔氏 考新羅 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往往 二國互稱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그리고 김누루하치를 비롯한 청나라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바로 금나라의 시조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金始祖居 完顔部 其地有白山黑水 … 與大金正同 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古肅愼地 … 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爲金曰愛新 可爲金源同派之證 :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그리고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도 명확히 인지하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自天聖後屬契丹世襲節度使兄弟相傳 其帥本新羅人 號完顔氏 女眞服其練事以首領推之自哈富 … 哈富生 … 次太祖次太宗 … 國號大金 金始祖 本從 新羅來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자 이상의 사실들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지나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진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나 해야 됩니까? 반도쥬신(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마치 발해와 백제 이후 한반도 역사는 쥬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저 '역사의 섬'처럼 떠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가지고 있는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관련성을 도외시하고 너무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결과입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다소 지나친 듯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쥬신의 역사를 쥬신의 관계사를 토대로 보면, ① 삼국시대 이전 : 고조선·부여 → ② 삼국시대 : 고구려(반부여계)·백제(부여계)·신라(선쥬신[흉노] + 고조선 + ?)·가야(선쥬신[흉노?] + 부여계 + ?) → ③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발해(고구려계)·일본(백제계 = 부여계) → ④ 고려초기 : 고려(고구려계)·금(신라계·고구려계 연합)·일본(부여계) - ⑤ 고려후기 : 고려(고구려계)·몽골대제국(元 : 고구려계) - ⑤ 조선 초기 : 조선(신라계·부여계 연합 - 반고구려계)·일본(부여계) - ⑥ 병자호란 이후 : 조선(부여계)·청(신라계·고구려계 연합)·일본(부여계) 등으로 쥬신의 정치관계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북위(北魏)와 요(遼 : 거란) 등 지나치게 한화(漢化)된 국가들을 제외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야하겠지만 일단 제가 개략적으로 나눠본 것입니다. 따라서 좀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되면 제가 하는 분석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저 복잡한 쥬신의 관계사의 가장 중요한 축은 아무래도 부여와 고구려라고 봐야겠지요. 이들 쥬신 역사의 호수를 거쳐서 몽골·만주인·일본인·한국인들은 몽골 쥬신·만주 쥬신·반도 쥬신·열도 쥬신들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물론 쥬신의 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고구려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거란(요나라)이 한반도에 침입(993)했을 때 고려가 집어든 카드도 바로 고구려지요. 어떤 의미에서 고구려는 낱낱이 흩어져 가던 쥬신들을 연결해주는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장군 서희(940~998)는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므로 거란이 점령한 땅도 사실은 과거 고려 땅이라고 합니다. 즉 단순히 영토만 점령하는 것으로 역사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 점을 좀 더 봅시다.
  
  고려 왕조 건립의 주체세력은 개성·평양·정주 등 조선반도 중북부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있으며 고구려에 대한 향토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 993년 (성종12년) 요나라의 침략이 있었을 때, 서희는 요나라 장군 소손녕과 회담을 벌입니다. 당시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하고, 평양을 서경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로써 이 두 국가는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고려의 압록강 이남의 영토권을 승인하게 됩니다. 쥬신의 문제에 있어서 고구려는 마치 문제 해결을 위한 블랙박스(Black Box) 같이 보입니다.
  
  고려의 태조(왕건)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고구려(발해)가 멸망(926)한 후 대고구려(발해)의 마지막 태자를 왕족(王族)으로 받아들이고 수만 명의 유민(遺民)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을 지적할 수 있겠군요. 발해 역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는 발해와 고려이죠.
  
  그리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따르면, 청나라의 황족들은 본래 신라에서 와서 그 성이 완안씨이고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 또한 이미 수십 세에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지요(本自新羅來姓完顔氏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뿐만 아니라 금나라는 말갈과 옛 숙신의 땅이기 때문에 바로 고구려의 영역 속에서 건설된 것이지요. 금나라의 태조는 "여진과 발해는 모두 물길(勿吉)에서부터 나온 한 집안"이라고 말합니다(『金史』卷1 本紀1). 결국 금나라는 발해(대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위에서 금(금나라·청나라)을 고구려와 신라계의 연합세력으로 본 것이죠.
  
  그리고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칭기즈칸의 지위도 최초에는 고구려 족장, 또는 고구려의 왕을 의미하는 '자오드 코리(札兀忽里)'였습니다(『몽골비사』134절). 당시 칭기즈칸은 금나라에 제후급인 '제후타오(招討) 코리(忽里)'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코리족의 족장(칸)이라는 것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고구려계로 분류한 것이고 이들이 고려와 동족의식을 가짐으로 해서 원나라 때는 고려 - 원의 밀월관계가 지속된 것이고요.
  
  일본의 경우 야마도(大和) 왕조의 쇠퇴 이후 나타난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정권을 열어간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 : 1147~1199)도 백제인(남부여인) 세이와 천황(淸和天皇 : 858~876)의 직계후손이었습니다[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효형출판 : 2000) 34쪽]. 그리고 미나모토 가문의 직계 손이 끊이자 일시적으로 미나모토의 처족(妻族)이었던 호조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 1305~1358)로 그는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 정권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스스로 미나모토와 같은 씨족임을 밝히고 그 계승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부여계로 면면히 이어진 것입니다.
  
  현재 일본(日本)에서는 정치(政治)를 '마쯔리고도(まつりごと)'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우 특이한 말이기도 합니다. 즉 원래 이 말은 제사(祭り事)에서 나온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이 정사(政事), 즉 정치(政治)라는 말로 전화된 것입니다.
  
  결국 '마쯔리고도(まつりご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죠. 하나는 일본의 총리대신(수상)을 위시한 실제로 정무를 담당하는 신하들이 천황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정(政 : 정치)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천황이 신(神)을 다시 모시는 것을 제(祭 : 제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석학 쿠메 쿠니다께(久米邦武 : 도쿄대학 교수)에 따르면, 이 제사는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죠[久米邦武, 「神道は祭天の古俗」『史學會雜誌』1891].
  
  그리고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합니다.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무수히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입니다. 일본인들은 성명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로 높여 부릅니다. 바로 쥬신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죠. 참고로 조선의 왕조도 목기(木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죠? [놀랐죠? 이제는 일본과 한국의 은원관계(恩怨關係)를 좀 아시겠죠?]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아직까지도 쥬신의 텡그리옹군[단군왕검(檀君王儉)]의 전통, 즉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본의 수상도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천황의 신하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런 물고 물리는 복잡하고 유기적인 쥬신의 역사에도 황혼이 깊어집니다. 쥬신의 쇠퇴에 대한 책임은 앞으로도 중요한 연구의 과제입니다.
  
  (4) 유조변(柳條邊)
  
  만주 쥬신들은 쥬신의 불꽃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에는 틀림없지만 쥬신의 역사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쉽게 말해서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중원으로 만주인들이 대거 들어가면서 만주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황폐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여기에 중국으로 들어간 만주족들도 심각할 정도로 한족화(漢族化)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청나라 조정은 쥬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극소수의 인구로 한족(漢族)의 강력한 동화작용(同化作用)을 견디기는 힘이 들었습니다.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던 청나라 조정은 만주 쥬신들이 중국에 동화되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따지면 최소 10만에서 최대 1백만이 제대로 안 되는 만주 쥬신이 거의 수억(數億)에 달하는 중국인들을 지배해야 했으니 그 고충이 오죽 하겠습니까? 상당한 부분의 중국 문화를 수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중국을 통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청나라 조정은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군인들이나 한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한족들의 복종의 징표(徵標)로 치발(薙髮 : 쥬신 고유의 머리양식)과 만주 옷[滿洲服]을 입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이 남지 않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남지 않는다[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는 유명한 포고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들의 특성, 즉 중국의 문화가 세계 최고라고 하는 '중화사상'과 "중국인들에게 패배는 없다. 단지 일시적으로 고개 숙이는 것일 뿐"이라는 '불패사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발령(薙髮令)과 만주 옷의 착용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면 으레 나타나는 한족(漢族) 특유의 쥬신에 대한 욕설, 경멸적인 서술이나 패러디와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장정롱(莊廷鑨)이 편찬한 『명사집략(明史輯略 : 1660)』에서 청 초기의 황제들을 묘호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부르고 만주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사람 70여명은 물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의 책에도 예외 없이 청 태조에 대해서 그저 '누루하치'라고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한국의 역사책에서 중국 황제를 이름만 부르는 예를 아직은 못 보았습니다. 어느 책을 뒤지어 봐도 명나라 태조(주원장 : 朱元墇)를 '원장(元墇)'이라고 부르는 예는 못 보았습니다.
  
  만주 쥬신(청나라)은 그 수 자체도 극소수인데다 청나라 건국 이후 중국을 경영하기 위해서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것을 흔히 입관(入關)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쥬신의 본향인 만주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땅으로 바뀌고 맙니다(『皇朝經世文編』).
  
  이것은 쥬신의 역사에 가장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성벽은 무너지고 우물도 말랐으며 비옥한 경작지들은 모두 '황무지(荒蕪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잘 지은 집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황폐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튼튼한 벽조차 무너집니다. 저는 걸어서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많이 다녔는데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주인이 떠난 곳엔 이상하게도 그 튼튼한 담벽들도 무너져 내린 경우를 말입니다. 그리고 흉가(凶家)처럼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인간의 기운도 사라지게 되어 땅이 우리에게 주던 어떤 친근감(親近感)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꼭 고향(故鄕)을 지켜야 하나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할 뿐이지요.
  
  청나라 조정은 한족(漢族)들이 절대로 만주의 성역(聖域)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한 봉금정책(封禁政策)을 실시합니다. 그래서 천리에 이르는 거대하고 긴 유조변(柳條邊 : 버드나무 방책)을 설치합니다. 봉금정책을 쓴 의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는 ① 쥬신족들이 중국인(한족)들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② 중원에서 패망하게 되면 언제든지 고향인 만주로 돌아가려는 목적 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봉금정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조변(柳條邊)입니다. 이 유조변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봅시다.
  
 
청나라 때 설치한 유조변(柳條邊). ⓒ김운회  

  청나라 조정은 한족들이 동북지방(東北地方 : 만주)에 왕래하지 못하도록 1667년 이후부터 산해관·희봉구 등 9곳에 변문을 설치하고 버드나무를 심어 경계로 삼아 한족의 출입을 금지합니다.
  
  이 버드나무 방책은 산해관을 시작으로 동북으로 흥경(興京 : 씽징)을 지나 압록강 하구에 이르는 약 975km에 이릅니다. 이후 다시 345km의 버드나무 방책이 다시 만들어집니다. 청나라는 유조변을 통하여 쥬신의 고향이 한화(漢化)되는 것을 막고 몽고의 유목구역을 확정하여 이들이 요동의 농경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청나라가 중국으로부터 철수할 경우를 대비한 것입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이 만주로 들어오는 것을 엄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많고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버드나무를 심었을까요?
  
  그것은 버드나무가 바로 쥬신의 신령스러운 나무, 즉 신목(神木)이기 때문이죠. 한국(Korea)에서도 무당이 귀신을 쫓을 때 버드나무를 사용하고, 사람이 죽으면 버드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입에 물리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부여나 고구려의 시조의 어머님이 유화부인(柳花夫人)으로 역시 버드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에 있어서도 버드나무는 신목(神木)입니다. 버드나무를 통해 복을 비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만주족(만주 쥬신)입니다. 금과 후금을 건국한 만주족의 삼신할머니인 포도마마(佛多媽媽)도 버드나무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이 버드나무는 진통제나 마취제의 기능을 가진다고 합니다. 몽골계 민족의 발원지인 흑룡강 중상류 일대나 동몽골 일대에는 버드나무 이외의 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이 버드나무 방벽, 즉 유조변(柳條邊)을 보면 현재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쥬신사 말살 프로젝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중화민족의 일원이 아니고 이들 고유의 정치 문화 역사적인 영역이 존재함을 명백히 한 것이니까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궁금할 것입니다. 이 유조변이라는 것이 정말로 의미가 있나 하는 점이죠. 만주족들이 정말 아무런 미련 없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까 말입니다. 상당수의 만주족(滿洲族 : 만주 쥬신)이 현실적인 지위와 부를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 한족화(漢族化)된 경우도 많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의문들을 정확히 해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족(漢族)에 의해 청나라가 망했다기보다는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죠. 바로 몽골 원나라의 경우입니다.
  
  몽골 대제국 가운데 중국을 통치했던 원나라가 멸망했을 때 몽골은 중국에 대한 일체의 미련을 버리고, 한족(漢族)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게 "그저 몽골의 초원"으로 돌아가더랍니다.
  
  당시 한족(漢族)들은 몽골이 "아무런 미련 없이" 그저 초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기가 질려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표현하여 '원(元)의 북귀(北歸)'라고 했습니다.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죠. '북귀(北歸)'란 동물의 습성을 표현하는 말로 가을에 날아온 기러기가 봄이 되면 북으로 날아가듯이 몽골은 그저 북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이죠(물론 각종 귀금속들은 가지고 갔겠지만요). 이 같은 속성은 『한서(漢書)』에 기록된 흉노의 속성과 그대로 일치합니다[司馬遼太郞, 『몽골의 초원』(고려원 : 1993) 88쪽].
  
  쥬신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병(騎兵)과 활쏘기는 중국인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군사적인 탁월성으로 중국을 지배했다고 생각합니다.
  
  쥬신이 초원을 보호하고 한족(漢族)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했던 이유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땅이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힘의 원천이 되는 대초원을 한족들이 차지할 경우 자기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점을 좀 알아봅시다.
  
  (5) 쥬신의 영광과 좌절
  
  청나라 지도부는 만주 쥬신이 극소수의 인구로 중국을 지배한 것은 말 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에 능하기 때문인데, 만약 한족(漢族)이 만주로 오면 그들도 이 같은 무예를 갖추게 되어 중국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청나라 역사서 도처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건륭제(乾隆帝)는 "성경(盛京)과 길림(吉林)은 우리 조정이 일어난 용이 흥하는 땅[興龍之地]인데 한족이 유입되면 만주의 풍속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東華續錄』48)"라고 하여 영구히 한족들의 이주를 금하여 봉금정책을 강화합니다(『吉林通志』1「聖訓志」). 여기에는 농업이나 장사에 서툰 만주인들이 사업수완이 좋고 땅 개간에 능한 한족(漢族)과 경쟁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건륭제. ⓒ김운회

  그러나 쥬신의 전통을 지키려는 청나라 조정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한족(漢族)들은 끊임없이 만주로 유입됩니다. 청나라 조정은 궁여지책으로 만주 쥬신을 다시 이주시켜도 보지만 이미 대세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제 만주 쥬신은 심각할 정도의 위기에 봉착합니다. 만주는 비어 있었는데 이 지역을 한족들이 대거 밀려오고 중국 땅에 있던 만주족들은 원래의 강건한 기풍도 약화되어 사실상 중국인이 되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죠.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만주족이 급속히 한족화(漢族化)되어버리자 만주족의 자제와 결혼한 몽골인들조차도 다시 한족화(漢族化)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반도에 들어선 조선(朝鮮) 왕조는 철저히 중국화(中國化)를 자청하고 형제들을 오랑캐로 부르고 천시합니다.
  
  이제 쥬신은 몽골과 만주에서 급격히 쇠퇴·사멸하고 있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여기에 현대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내몽골에서 대량으로 쥬신족들을 학살하고 한편으로는 한족(漢族)을 만주 전역에 대대적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이제 쥬신의 미래는 기약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족(漢族)의 고유 영역과 쥬신의 영역(알타이 동부 - 몽골 - 만주), 티벳 등 청나라가 확장했던 영역들이 모두 현대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동북공정(東北工程 : 대쥬신 역사 말살)'이라는 프로젝트가 필요하게 된 배경이 되었지요.
  
  쥬신의 본고향인 요동과 만주가 이제는 쥬신의 무대에서 거의 사라져갑니다. 대부분의 만주 쥬신들은 사실상 한족(漢族)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한족(漢族)들은 가급적이면 다른 민족이 한족과 조금만 피가 섞여도 한족으로 포괄적으로 부르는데, 흉노의 경우는 2백만이 되지 않았고 만주족은 (최소로 잡으면 10만) 1백만도 되지 않는데 굳이 이를 잘게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국 적(상대)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제압해버리는 소위 "분할하여 통치하려는 전략(Divide and Control)"의 일환입니다.
  
  그 결과 세월이 흐를수록 한족(漢族)들은 나라가 망해도 점점 그 영역이 확대되는 반면에 주변민족은 중국을 통치해도 그 수가 줄어들거나 동화되기 일쑤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면 거의 대부분이 결국은 한족(漢族)에 동화(同化)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죠. 현재 중국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만주족은 겨우 20만 정도가 명맥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 인구 13억 가운데 94% 정도가 한족이고 나머지 6%에 좡족·몽골·휘·마오·조선족 등 55개의 민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좡족이 전체 인구의 1.33%이고 가장 적은 종족은 2천명이 채 안되지요. 참고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의 화합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수십만 명의 몽골인들을 학살하고 쫓아내어 현재 내몽고자치주에서 원주민이었던 몽골인은 6%에 불과하다고 합니다(티베트도 대동소이하지요).
  
  이제 우리가 쥬신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는 몽골의 2백~3백만, 만주의 1백만 이하(어떤 전문가는 쥬신의 특성을 제대로 유지하는 만주인은 20여만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7천만, 일본의 1억 5천만 등으로 이제는 주로 한국과 일본 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거의 원수지간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불화의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일본에 있습니다. 특히 일본은 임진년의 국제전쟁(1592)을 도발했고 36년간 한국을 강점(强占)하여 국체를 없앴습니다. 쥬신의 역사에서도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일단 일본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결단을 내려 진심으로 사과하고 한국은 기꺼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화합(和合)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나마 궁벽하게 웅크리며 남아있는 마지막 쥬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두 나라는 앞으로 쥬신의 보존과 회복이라는 원대한 문제를 생각해야지 지엽적인 작은 문제들에 집착하여 쌍방이 국력을 낭비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6) 쥬신의 황혼
  
  찬란한 역사를 뒤로 하고 쥬신의 황혼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제가 쥬신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즉각적으로 민족적인 벨트를 구성한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의 공유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여러 가지의 원인으로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 분리되어 민족적 동질성을 많이 상실했다고 한다면 단순히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민족 동질성 회복 운동의 당위성도 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찾아가는 행위 또는 그 역사적 진실을 알려고 하는 노력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삼국지 바로읽기』를 통하여, 『나관중 삼국지』가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중화사상을 오히려 우리가 옹호하려는 태도를 비판하듯이 지난 수백 년간의 한국사의 교육방식이나 이데올로기의 옹졸성을 지적하는 것은 시대적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쥬신이 고유하게 가진 동질성을 회복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단지 꿈만은 아닙니다. 만약 과거처럼 중국만이 아시아의 패자인 상황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현대는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많은 다양한 변수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동아시아에는 오직 한족(漢族)만이 남게 되는 이 현실에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보존하려는 것을 지나친 생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같은 쥬신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은 범쥬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협소한 일본이라는 섬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자신의 뿌리를 지켜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일본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원죄(原罪)를 지고 있기 때문에 범쥬신적인 전통을 부활시키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일본은 2차 대전에 패한 후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 : 경제학)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 정치학),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 역사관) 등을 중심으로 일본의 새로운 부활을 희망했습니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합니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에 대하여 면죄부를 줌으로써 다음 세대의 운신의 폭을 넓힙니다.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는 비교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일본 사회의 전근대성을 철저히 추적함으로써 일본이 세계 경제대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학문의 천황(學問の天皇)이라고도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를 수립한 '계몽'의 기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쓰카 히사오·마루야마 마사오·시바 료타로. ⓒ김운회  

  특히 이 가운데 쥬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몽골어를 전공한 시바 료타로인데, 그는 이 문제에 무관심하였고 오히려 열도 쥬신의 편협한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더욱 부채질하였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 1666~1728)와 과거 일본 근대화의 영웅들인 사까모토 료마(坂本龍馬)·요시다 쇼인(吉田松陰)·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죠.
  
  제가 보기에 일본은 범쥬신의 전통을 회복할 만한 학문적 전통이 새로이 수립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쥬신의 전통이 회복될수록 일본이라는 구조가 범쥬신의 구도 속에 함몰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일본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안주하여 사까모토 료마(坂本龍馬)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안주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들처럼 시대를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사상이나 사상가도 없었다는 것이 반도 쥬신(한국인)의 문제입니다. 그만큼 많은 문제들이 반도쥬신(한국)에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스스로의 인식의 틀로써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조선시대 5백년을 통해서는 오직 중국을 부모의 나라라고 하면서 그 시각에서만 세상을 보더니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한국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시각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적 시각에서만 세상을 또 봅니다. 도대체 한국인(Korean)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궁구하는 데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쥬신의 황혼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몽골에서 나와야 합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일본은 쥬신적인 전통보다는 일본 고유의 새로운 역사공동체를 모색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있어 중화 패권주의와 그의 부산물인 동북공정에 "실질적으로" 대항하는 세력은 남한 지역의 극소수 지식인에 불과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별로 남지 않은 쥬신이 13억 한족(漢族)과 대항하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정말이지 동아시아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쥬신의 위기가 이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금관의 나라, 신라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3>
  2005-08-30 오후 7:08:46
  옛날, 바닷가 작은 마을에 마음씨 곱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꺼비 한 마리가 이 아가씨를 찾아와 결혼해달라고 졸랐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 아가씨, 두꺼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결혼한 바로 그 날 밤에 신랑은 두꺼비 허물을 벗고 얼굴은 해사하고 몸은 커서 씩씩한 사나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아가씨는 이 두꺼비 신랑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아가씨를 두꺼비에게 빼앗긴 동네 총각들이 두꺼비 신랑을 자꾸 못 살게 구는 겁니다. 동네 총각들은 두꺼비 신랑을 혼내주려고 쉬운 물고기잡이보다는 힘든 사냥내기를 해서 두꺼비 신랑의 콧대를 꺾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하얗고 말도 없는 녀석이 덩치만 컸지 무슨 사냥을 하겠냐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가까운 야산에서 사냥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꺼비 신랑, 말에 오르자마자 활을 날려서 여우·노루·오소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냅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저렇게 날렵한 사냥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날 이후 두꺼비 신랑은 이 마을의 스타(star)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어촌마을이면 흔히 나타나는 '두꺼비 신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술 해부학의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는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석합니다. 두꺼비는 북방계 사람들이 남방으로 오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피부 질환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피부병이 나으니 흰 얼굴이 나타나고 체격이 크니 씩씩한 남자로 보일 수밖에요.
  
  사냥 일도 마찬가지죠. 남방계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 쉬운데, 그래서 남방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사냥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두꺼비 신랑에게는 그것이 북방에 살 때의 본업이었죠. 그러니 쉬울 수밖에요.
  
  결국 이 같은 경로를 거쳐서 북방계 두꺼비 신랑들이 힘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용진 교수는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임금들의 얼굴은 북방계의 형상을 하고 있고 북방계의 관상을 좋은 관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마가 높으면(북방계) 관운(官運)이 있다거나 이마가 좁으면(남방계) 부모덕 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피부가 검다든가 쌍꺼풀이 있다든가 눈이 크면(남방계) 천한 관상이라고 하는 식이죠.
  
  (1) 신라,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우리의 뿌리와 관련하여 특이한 나라 중의 하나가 신라입니다. 부여 - 고구려 - 백제 - 일본 등은 여러 가지의 기록들이나 사료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신라는 좀 다릅니다. 신라(新羅)의 기원이 어딘지를 알기도 어렵고 이들의 고분들 속에서는 기원이 불투명한 유목민 유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유물은 로마나 유럽에서 출몰한 훈족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라에 결국은 병합되었지만 한반도 남단의 가야고분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흔적도 있고 말들도 묻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출토 유물 중에는 기마부족이 사용하던 마구가 고구려벽화의 실물과 유사한 경우가 있었죠.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4세기 경 고구려군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을 때 울주·동래 등에서 6세기 중반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장기간 상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이도학, 「고구려의 낙동강유역진출과 신라·가야경영」 『국학연구』 1988). 그리고 신라의 김씨 왕실이 시베리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하였다거나 선비의 한 부족인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모용황의 군대 중의 일부가 남하하여 신라를 지배하고 가야 지역까지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금관가야 건국도 흉노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일단 신라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아봅시다.
  
  『삼국사기』에 신라를 구성한 6부족은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이 부족 가운데 고허촌장(高墟村長 : 후일 최씨)이 숲에서 말울음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이 있어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훌륭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시조(박혁거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라는 외래 유이민이 건설한 나라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한 세력이 신라를 구성했을 것이라는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력은 부여계의 이동만큼 조직적이지 못하고 고조선이 쇠망한 이후 그 유이민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부족공동체 사회로 판단됩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조선의 멸망이 B. C. 108년 정도이고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건국이 B. C. 57년경(漢 宣帝 五鳳元年)으로 돼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신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나 고구려계의 국가보다는 고대국가 형성이 다소 느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고조선의 직계 왕가를 주축으로 그 주류세력이 남하했다기보다는 여러 호족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조 박혁거세라는 분도 신화(말과 알, 버드나무[楊山])로 판단해 보면 역시 외부(북방)에서 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잠시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말을 한번 봅시다. 박(朴)은 '밝다[明, 또는 東]'는 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혁(赫)이라는 말도 역시 '밝다'는 말인데 이 말은 한자의 뜻을 빌려서 쓴 말입니다. 이병도 박사는 거세(居世)는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으며 이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는 거슬감(居瑟邯 : 여기서 邯도 干의 뜻)의 거슬(居瑟)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본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와 일본에서 사용하는 고니키시(コニキシ : 鞬吉支)의 키시(キシ)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 2001) 1쪽]. 따라서 박혁거세라는 말은 동명성왕(東明聖王)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박[東 : 밝]혁[明]거세[聖王]이라는 말이지요.
  
  부지영 선생(『일본, 또 하나의 한국』저자)은 박혁거세를 '비치세'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당시의 한자말을 읽는 방식은 이두식으로 읽었는데 이 점은 일본편에서 이미 일부를 보셨을 것으로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혁거세 역시 이두식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박(밝다) + 혁(빛) + 거세(居世)'에서 거세(居世)에서 거(居)가 일본 말로는 '이루(いる)'이므로 居는 '이'이고 世는 그대로 우리말로 세라는 것이죠. 그래서 '赫(빛) + 居(이) + 世(세)'로 '비치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제가 보기엔 '비치세'의 의미를 확장하여 '(세상을) 밝히세'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차이가 없는 말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는 세상을 밝히는 임금[東明聖王]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따라서 부여계의 군주 이름과도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 역시 쥬신의 성격을 가진 나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고대의 한문을 읽는 방식은 일본어의 발음과 대조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19세기 이전까지 박혁거세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일본에는 2천 7백여 곳이 있었고 아직도 2천여 곳이 있다고 합니다[부지영, 『일본, 또 하나의 한국』(한송 : 1998) 75쪽].
  
  신라 초기의 국호는 서나벌(徐那伐)인데 이병도 박사는 서(徐)는 '솟다[高, 또는 上]', 나(那)는 '나라(國)', 벌(伐)은 '성(城)', 또는 도시(capital)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서나벌은 '높은 나라의 도읍', 또는 '해가 솟는 나라의 도읍(the capital of rising sun)'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의 서울(Seoul)이 나타난 것이지요. 참고로 나라[國]의 고어로 사용된 한자어는 나(那)·라(羅)·야(耶)·로(盧) 등이고 도읍지를 의미하는 한자어는 불(弗)·화(火)·비리(卑離)·부리(夫里) 등입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1쪽]. 그러니까 부여와 고구려는 불[火 : 해가 타오르는 모습을 상징]을 신라는 태양[日 :히···]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신라는 그 세력이 미약하여 여러 소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익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다(『성호선생전집』46)."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이 때의 진한과 변한은 신라와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당시에 신라는 남부여(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단히 허약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남부는 마한 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한왕은 그들이 진한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기록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246) 초기에는 고구려가 잘 막아내었으나 수도가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를 받아 고구려의 지도부가 남으로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당시 옥저로 달아났던 일부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라 김씨들의 특유한 묘제(墓制)로 이해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등장하는 것도 이 사건 및 미추왕(262~284)의 등장과 모두 시기가 비슷하여 어떤 큰 변화가 신라사회에 나타났다는 것이지요[정경희, 『한국 고대사회 문화연구』(일지사 : 1990)]. [그림 ①] 제 2 차 요동전쟁(고구려-위나라 전쟁)
  
 
[그림 ①]은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 상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지명들, 죽령은 현재의 황초령, 미구루는 현재의 문천이라고 합니다(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하 제 35장 참고) ⓒ김운회  

  이 시기는 석씨에서 김씨로 왕위가 바뀌는 시기인데 신라의 외교노선이 친백제(親百濟 : 친부여)에서 친고구려(親高句麗)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영락대제 비문 가운데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영락 9년(399) …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여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이에 대해 대비를 시켰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수많은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고 이에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라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영락대제 시기에는 사실상의 속국, 또는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신라의 왕계가 관구검의 침입으로 남하한 고구려의 장수들이나 호족 세력일까 하는 것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2) 금관의 나라, 신라
  
  초기 신라에 대한 기록은 많이 부족한 편이라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기원전 57년경에 건국한 다음 기원후 1~2세기 경 지금의 경북지방과 경남일대를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넓혀갔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기록들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신라가 진한(辰韓)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작은 나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세기 초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대외적인 성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통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후 6세기에 들면서 우경(牛耕)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불교가 공인(527)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입니다. 이 책에서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日本書紀』卷八 「仲哀紀」)"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에는 "(삼한의 생활상을 보면)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三國志』魏書 東夷)."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공식적인 복장에서는 금·은으로 장식하고 부여의 경우에도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기의 신라와 중기 이후의 신라에는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고구려계가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앞서 본 영락대제의 비문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그림 ②] 신라 천마총의 금관(왼쪽)과 백제 무령왕릉의 금관 장식(오른쪽) ⓒ김운회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금(gold) 문화에 관한 한, 신라는 고구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으로만 영향을 받은 듯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세련된 '황금(黃金)의 문화'가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이 금(金)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유목민들의 대표적인 브랜드(상표)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보면 금관은 마립간 시대(417~514), 즉 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고 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88쪽]. 그러니까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신라의 지배층의 변화가 있었고 그 지배층이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유난스러울 만큼 금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출토된 금관총의 금관을 비롯,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 출토지가 분명한 것과 나머지 3개는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호암 미술관 소장 가야금관, 도쿄의 오쿠라 컬렉션(도굴품) 등이 있습니다[조유전·이기환, 앞의 책, 88쪽].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흉노족이나 선비족, 거란족의 무덤에서 황금 유물, 또는 머리장식이나 금관 등이 자주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금관은 알타이 문화권인 만주·몽골·알타이·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서 금으로 장식한 모자가 많이 발견되지만 인디아·태국·인도네시아·라오스·베트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김병모,『금관의 비밀』(푸른 역사 : 1998)].
  
  아시다시피 신라의 금관(金冠)은 나무와 사슴의 뿔 모양처럼 생겼는데 흑해 북쪽 해안 지방인 사르마트(Sarmat)에서 발견된 금관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르마트 금관은 그리스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있고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중심으로 생명수를 표시하는 나무와 사슴 등이 만들어져 있고 신라의 금관처럼 수많은 나뭇잎이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라 금관을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그림 ③] 사르마트 금관(흑해 북안의 로스토프 지역)    국립중앙박물관 『스키타이 황금』(276-267쪽에서 재구성) ⓒ김운회

  또 신라 금관과 유사한 다른 것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나무 장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금테두리를 금꽃(金花) 스무 송이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높이는 13cm 정도로 작은 것이라 여성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림 ④] 아프가니스탄 금관(틸리아 테페) ⓒ김운회

  내몽골의 아로시등(阿魯柴登)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금관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독수리를 숭상하는 일면을 볼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쥬신의 토템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라 금관 가운데서도 새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뒤에 설명).
  
[그림 ⑤] 아로시등(阿魯柴登) 유물(내몽골 지역) ⓒ김운회

  그리고 고구려와 기원이 동일한 탁발선비족(타브가치 : 북위 건설)의 금관 장식은 신라의 금관과 이미지가 대단히 유사합니다. 타브가치는 몽골쥬신 계열로 그들의 유적지인 서하자향(西河子鄕)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은 소머리, 또는 사슴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의 형상을 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신라 금관과 같이 샤먼적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그림 ⑥] 선비족[타브가치(拓跋鮮卑)]의 금관 장식 ⓒ김운회

  고구려의 경우 평양의 청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속에 인동초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림 ⑦] 고구려 금관(청암리 토성 금동관) ⓒ김운회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동양대)에 따르면 신라 금관의 기원이 정확히 어딘지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신라와 가까운 고구려만 해도 금동관에 신라 금관의 특징인 곡옥이나 세움 장식이 없죠. 다만 선비족들의 금제 관식이 금이라는 재질과 나뭇가지를 머리에 장식한다는 측면에서 그 유사점을 찾아서 최병현 교수(숭실대)는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기마민족들에 의한 왕족 교체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신라시대의 김씨 왕족들이 등장하던 4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의 왕호는 마립간(麻立干)인데 이 말은 마루(宗) + 칸(王)의 의미로 추정되며 여러 부족 가운데 중심이 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신라의 금관은 이러한 금관들의 영향을 모두 받은 듯하면서도 각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시킨 듯합니다.
  
  신라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는 녹각수지형(鹿角樹枝形 : 사슴뿔 모양)과는 달리 사슴의 뿔과 나무를 동시에 형상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요즘 고고학자들은 신라 금관의 형식을 직각수지형(直角樹枝形 : 나무 가지 모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단순히 나무만을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순록의 뿔도 함께 형상화하여 우두머리[長]를 동시에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금관은 수목숭배(樹木崇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브가치의 금관 장식[서하자향(西河子鄕) 출토]의 경우를 봐도 사슴의 뿔과 나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유물에서 사슴의 뿔 가운데 나무가 있죠? 그런데 신라의 금관도 같은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림 ⑧] 선비와 신라의 금관 ⓒ김운회

  신라 금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윗부분은 나무와 사슴의 뿔을 추상화 시켰고 금관을 지탱하는 관(冠)은 사르마트와 틸리아테페의 형태와 유사하고 금관을 고정하는 것은 고구려의 금관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선비족들의 보요관도 추상화되어 나무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러시아 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러시아 돈강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도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금관에 붙어있는 둥근 잎새 모양의 구슬을 꿴 장식들[영락(瓔珞)]도 동아시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서봉총(瑞鳳塚)은 조생부인(鳥生夫人)의 무덤으로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총의 금관 장식도 새의 날개 모양이 있습니다. 새는 쥬신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 조생부인은 신라 왕통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생부인은 지증왕의 어머님으로 눌지 마립간의 따님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님으로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골(聖骨) 중의 성골(聖骨)이라고 합니다(혹시 샤먼은 아니었을까요?).
  
  신라 금관은 하나같이 많은 곡옥(曲玉)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은 태아(胎兒)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명과 다산(多産)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 곡옥은 알타이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신라 금관들이 만들어진 의도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신라 금관이 출토되고 있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신라가 쥬신의 선주민(흉노)들의 후예들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나 알타이 몽골 만주 지역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⑨]입니다.
  
 
[그림 ⑨] 세계 금관의 총화, 신라금관 ⓒ김운회  

  여기서 한 가지, 신라 금관의 모습은 가야의 금관과도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는 같은 계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전기가야 토기문화와 신라의 4세기 이전 토기문화가 대체로 일치하며, 철기문화의 특징도 두 지역이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상 남·북도지역의 진한과 변한에 문화의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쥬신족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의 문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나무와 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얘기했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나무 이야기입니다. 쥬신의 나무와 관련하여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가 있었죠? 바로 존 코벨 선생입니다.
  
  존 코벨 선생은 북방 유목민들은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陽]가 빛나고 순록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 선생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합니다[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 1999), 150~155쪽.].
  
  그런데 경주나 가야 지역은 흰 자작나무가 자랄만한 곳은 아니죠. 그런데 그 금관에는 이 흰 자작나무의 장식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이들이 북방에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작나무는 타이가 지대나 그 주변지역에서 신목으로 숭배되는 나무라고 합니다(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한반도, 버드나무는 초원지대나 초원과 삼림이 혼재된 지역에서 주로 숭배된다고 합니다).
  
  존 코벨 선생은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금관은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는 것입니다.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냅니다.
  
  둘째, 새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새가 등장합니다. 유네스코 국제 박물관 협의회(ICOM)의 서울 총회 기념로고(2004)는 솟대였지요. 이것은 바로 일본의 '도리'와 같은 형태입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일 것입니다.
  
  김병모 교수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김병모, 「고고학 여행」)."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동쪽 이시크(Issyk) 고분(B. C. 3세기경)에서 발견된 여인은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다고 합니다.『삼국지』에는 "변진(弁辰)에서 대가(大家)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의미겠죠. 경주 서봉총(瑞鳳塚) 신라 금관도 머리 부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이 또한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은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새와 태양에서 알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도 되지요. 그렇다면 부여·고구려·신라·가야 등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알의 이미지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쥬신의 종교 및 정치적 수장인 샤먼의 지팡이의 머리에 달린 장식은 바로 솟대라는 것이지요. 솟대 위의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라는 애깁니다.
  
 
  [그림 ⑩] 쥬신 신앙의 상징 솟대의 모습(경복궁) ⓒ김운회

  신라의 금관은 바로 신라인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 등 쥬신의 어떤 나라보다도 알타이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도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미추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들의 무덤[천마총(天馬冢)이라든가 황남대총(皇南大冢) 등]은 전형적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데 이러한 양식은 알타이를 역사적 무대로 삼았던 이른바 흉노의 무덤과 흡사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목곽분이 이전에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금관의 제작 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김(金)씨계 인물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최병현,『新羅古墳硏究』(일지사 : 1988)]"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사마염이 건국한 진(晋)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약화되면서 쥬신족들이 대규모로 남진해 오고(5호16국 시대), 그들의 일부가 경주까지 내려와 김씨(알타이, 또는 아이신) 왕조를 세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라는 흉노계로, 오르도스 철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부는 유럽 쪽으로 가서 헝가리 건국의 주체가 되고 동쪽으로 이동해가서 한반도와 일본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고 합니다[이종선,『古新羅 王陵硏究』(학연문화사)].
  
  글쎄요. 이런 분석들은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보기엔 4세기에 벼락처럼 나타난 것은 아닌 듯한데요. 일단 이 의문들을 푸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계속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지요.
  
  이종호 박사는 신라와 흉노의 유물은 서유럽 훈족에게서 발견되는 유물들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독일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이종호,「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백산학보』66호].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인 PD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가 한민족과 훈족의 직접적인 연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엉뚱하게도 청동으로 된 솥입니다.
  
  청동 솥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인데 가야 지방에서 발견되고 그 형태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훈족은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기마인물상(국보 91호)이 바로 그 형태라는 것입니다(요즘으로 치면 차 뒤 트렁크에다 버너와 코펠을 싣고 다니는 것이지요). 청동 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그림 ⑪] 기마 인물형 토기(국보 91호) ⓒ김운회  

  제가 보기에 이것은 신라인들이 서유럽까지 갔다기보다는 흉노의 일부는 서유럽 쪽으로 가고 일부는 남진하여 경주·가야 등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흉노가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로 들어 왔다고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둘러싸인 마치 섬과도 같은 지역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의문들이 최근 들어서 많이 풀리고 있습니다.
  
  최근 신라 건국의 비밀을 풀기 위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바로 사천왕사에 있는 문무대왕의 능비(陵碑)에 있는 비문의 내용입니다.
  
  (4) 흉노의 나라, 신라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秺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磾)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霍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이 김일제의 일대기는 『한서(漢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漢書』金日磾傳 ).
  
  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秺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김씨 시조」『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秺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秺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림 ⑫] 휴도왕의 지배영역 ⓒ김운회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재)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秺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이 시기부터는 금관도 사라집니다(아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쥬신 고유의 샤머니즘 전통도 약해져갔을 것입니다).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롤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 것은 유목민들의 습속이기 때문에 『남사(南史)』의 기록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쥬신의 나라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족(漢族)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기록과 같이 진(秦) 나라에서 이주해온 신라의 일부 유민들도 진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므로 신라와 한족(漢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여기서 신라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과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니 한번은 거론해야겠군요.
  
  『삼국지』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괴로운 노역을 피해 한(韓)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城)과 울타리(柵)가 있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는 다르고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三國志』魏書 東夷傳 辰韓)"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진나라 유민들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後漢書』東夷傳 辰韓)."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 난리가 나서 시달려서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의 동쪽 땅으로 몰려들어 진한과 어울려 살더니 점차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이 이를 꺼리어 신라에 대해 책망하였다(『三國史記』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죠? 『삼국사기』(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의 기록으로 보면 『후한서』의 기록과는 달리 진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주 세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6부 촌장들에게 신라건국의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姓)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산촌장은 이씨(李氏), 고허촌장은 최씨(崔氏), 대수촌장은 손씨(孫氏), 진지촌장은 정씨(鄭氏), 가리촌장은 배씨(裵氏), 고야촌장은 설씨(薛氏) 등으로 성씨를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儒理尼師今).
  
  그런데 위의 기록(진 나라 사람들의 이주)과 관련한 문제는 시기적으로 진나라 말기라면 B. C. 3세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김일제와는 일단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진(秦)나라는 정통 중화를 표방하는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민족입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아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신라 왕족인 김씨들도 진시황(秦始皇)과 연계를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나라 자체가 흉노의 계열인 점도 있겠지만 이것은 간단히 해명될 문제만은 아닌 듯도 합니다.
  
  즉 신라 건국의 비밀을 밝히는 많은 견해 가운데 휴도왕을 진시황(秦始皇)의 아들인 부소와 연계를 시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扶蘇)는 당시 정치적 정변의 희생물이었지만 총명하고 용맹하며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참고로 전등사의 삼랑성(정족산성)을 쌓은 단군의 세 아들의 이름도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라고도 합니다. 머리 아프죠? 일단 넘어갑시다].
  
  간단히 말하면 진(秦)과 신라(新羅) 및 금관가야(伽倻)의 지도층은 공교롭게도 그 조상을 모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동일하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호씨(少昊氏)는 원래 동방의 큰 신으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해 밖의 먼 곳에 소호의 나라가 있고 그의 왕국은 온갖 새들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64쪽]. 한 마디로 '새의 나라'지요. 소호씨는 산동반도 - 요동 - 한반도 등(일반적으로 보는 동이의 영역)에 이르는 쥬신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신입니다.
  
  후일 소호씨는 서쪽으로 가서 서방의 신이 됩니다. 그래서 가을의 신인 욕수와 더불어 서방을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 사는 외눈박이 일목국(一目國 : 눈이 작은 흉노로 추정됨) 사람들도 소호씨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소호씨는 동이(東夷)와 서융(西戎), 북적(北狄)의 신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대부분 쥬신의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나시는 모양이죠?). 소호의 후손이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기도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163~165쪽]. 영락없는 쥬신의 신입니다. 이 점을 좀 살펴봅시다.
  
  먼저『좌전(左傳)』에 따르면 "진(秦)은 소호(少昊)씨의 후예다."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시죠.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성(姓)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三國史記』百濟本紀 義慈王)"
  
  이 기록은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삼국사기』편찬자)이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록만으로 나타난 것을 토대로 퍼즐을 맞추어 보면
  
  진시황(秦始皇) → 부소 → 휴도왕 → 김일제 → 김알지 → 내물왕 → 문무왕
  
  등의 계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인데 황제(黃帝)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와 신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강조합니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三國史記』金庾信列傳). 그런 면에서 보면, 김일제의 후손이 한쪽으로는 가야로 가고 한쪽은 신라로 왔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군요.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갑시다. 즉 위에서 말하는 황제(黃帝)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황제는 농경민인 한족의 신인데 소호씨는 이미 보셨다시피 쥬신의 신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왜곡이나 해석상의 오류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황제가 동방의 신들을 낳은 것처럼 묘사한다는 말이죠. 즉 황제 이후에 쥬신이 있는 듯이 묘사한단 말입니다('황하문명의 주역, 쥬신' 참고). 이런 식의 신화 조작은 중화사상이 구체화되는 한(漢)나라 이후의 일로 생각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소호씨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말은 없지요(『史記』第一 五帝本紀).
  
  일단 제가 보기에 김일제 이전은 고증 및 연구가 어렵기 때문에 김일제 이후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을 토대로 나타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가 알타이 지역의 쥬신 선민족(흉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겠죠.
  
  그래서 일단 신라는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으로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더 깊이 있는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게 되면 다소 수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신라와 흉노의 관계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예로 제철기법과 편두로 나눠 살펴봅시다.
  
  먼저, 2000년 「황남대총 발굴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장식ㆍ정광용 두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경주지역에 유행한 대표적인 기술체계는 저온환원법에 의한 제강법이었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 백제지역에서 유행하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하다고 합니다.
  
  박장식 교수(홍익대)는 B. C. 1500년부터 사용된 철의 제강법은 크게 두 가지, 중국식과 유럽식으로 나뉘는데 유럽식은 액체상태의 주철(탄소함량이 많아 단단하나 쉽게 부서지고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로 도구를 제작한데 반해 중국식은 탄소를 거의 함유하지 않은 순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이 두 가지 철강법이 동시에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라에서는 유럽식 기술이 쓰인 반면 백제는 전통 중국식으로 철을 다뤘다 합니다.
  
  보존과학자인 정동영 박사 또한 황남대총 출토 금동제품의 분석을 통해 신라의 금동제품이 금순도 98% 이상의 아말감도금의 방법을 이용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여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신라와 흉노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를 봅시다.
  
  편두(扁頭)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두개골이 인위적으로 변형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편두를 하면 말 타고 투구를 쓰고 전투하기가 쉬워 생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편두와 같은 습속은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습속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편두라는 것이 마치 흉노족의 자취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흉노의 이동경로로 추정되는 몽고에서부터 프랑스까지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편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해보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서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제2권)"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흉노의 일반적인 습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지󰡕 에서도 "진한(辰韓) 사람들은 편두(󰡔三國志󰡕 魏書 東夷傳)"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라의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인데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여 개의 변형두개골 즉 편두가 보고 되었습니다. 아니, 금령총은 그렇다 쳐도 김해라면 한반도의 남단인데 그 곳까지 이 습속이 나타나고 있다니오?
  
  놀라운 일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신라인들이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이 왜 유달리 작은지를 알 수 있게도 하는 것이지요. 편두가 아니면 이 왕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두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족이나 왕족들은 편두라는 얘기지요. 최치원도 봉암사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편두(扁豆)는 지존(至尊)의 상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편두는 북방계의 남하를 보여주는 예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後漢書)』는 "진한 사람들이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판판하게 만들려고 유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아이를 낳으면 이내 돌로 머리를 누르는데 이것은 머리를 작게 만들려는 것이다" : 『三國志』魏書 東夷傳 弁辰)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두를 마치 '몬도가네'식(엽기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의 명군(明君) 건륭제(乾隆帝)는 분통을 터뜨리며 한족(漢族)의 역사가(歷史家)들이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건륭제는 기본적으로 만주 쥬신들이 자신의 습속에 대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개탄하면서 "만주 땅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나무로 만든 요람에 넣어두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요람 속 유아의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게 되는 것이고 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똑같은 관습을 가졌을 것(『欽定 滿洲源流考』卷首 諭旨)"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한족들은 이민족들을 엽기적으로 몰아가서 야만인으로 몰아 부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류의 일은 명나라가 가장 심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장에서는 편두라는 만주의 풍속이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멀리 전하여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라와 북방의 연계성을 더욱 쉽게 분석할 수 있지요.
  
  신라가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의 고분 발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과 2003년 각각 발굴된 삼연(三燕) 시기 선비족의 무덤인 랴오닝(遼寧)성 베이퍄오(北票)시 라마(喇口麻)동 묘지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고구려 태왕릉이 바로 그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연(三燕) 시기란 4세기 초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 붕괴하고 쥬신이 남하하여 세운 전연(前燕 : 337~370)·후연(後燕 : 384~409)·북연(北燕 : 409~438)의 시기를 말합니다. 전연과 후연은 모용(慕容)씨의 나라입니다.
  
  전문가들은 2004년 4월 출판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학보(2004년 제2기)』에 나타난 라마동 묘지 출토 각종 마구(馬具)들은 신라고분의 출토품뿐만 아니라 가야와 백제, 왜의 마구의 연원까지 추적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300여기에 달하는 라마동 묘지에서 나온 부장유물은 3670여 점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생활용품·무기류·마구 등 매우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토기는 고구려와 유사하고 각종 마구들은 신라초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는 전체 형태가 왜의 5세기경의 대표적인 금제품인 오사카(大板)부 하비키노(羽曳野)시 곤다마루야마(譽田丸山) 고분의 출토품과도 흡사하다고 합니다.
  
  미술사가인 권영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당시 고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세력권에 있었으며 황남대총 유물은 그 문화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라는 고대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과 동해안 통로를 통해 4~5세기 국제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황남대총 축조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의 전기 초원문화와 이후의 후기 초원문화로 나누고 중앙아시아 흉노족이 한나라 멸망직후의 국제정세 혼란을 틈타 신라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풀이합니다.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 가지형의 모양새는 알타이 주변과 중앙아시아 수렵민족의 신앙적 상징과 거의 같고 금장식편(영락)이 달린 형식은 중국에 없고 러시아 돈강 유역이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출토된 기원 전후의 유물과 비슷한데다 얇은 금판을 새 날개 형태로 오리고 수많은 영락을 단 금관 장식이나 금제 귀고리, 허리띠 조형 등은 로마와 터키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라고 합니다[권영필,「황남대총과 신라의 국제교류」『황남대총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자료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00)].
  
  저는 이 견해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있어왔던 흉노 세력(김일제 후손의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선택적으로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서 중앙아시아나 유럽의 금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5) 북으로 가는 신라, 남으로 가는 부여
  
  황남대총의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 속에는 뜻밖의 유물이 있었죠. 바로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바로 유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리 목걸이에서 발견된 사람의 얼굴은 동양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인숙 박사는 유리 분석실험을 통해 황남대총의 유리는 중국계 유리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로마계 유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로마의 유리가 신라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로마의 유리는 중국이나 바다가 아니라 초원의 길을 통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4~5 세기 신라 지배자급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묘제, 적석목곽분이라고 합니다. 적석 목곽분은 남러시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스키타이 민족(기마민족)의 매장 풍습인데다 유물들도 기마민족들의 애호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초원의 길에는 이들 스키타이인들과 또 다른 주인공, 흉노(쥬신의 선민족)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체로 초원길 서부지역은 스키타이, 동부 지역(알타이)은 흉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B. C. 2세기경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초원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세력에 의해 동과 서로 교역은 계속 유지됩니다.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신라는 로마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의 환경에 걸맞게 변형·발전시킴으로써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을 로마와 공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수일 교수는 로마의 누금감옥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 장식품들이 신라에는 흔하게 나오지만 당시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고 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계통과 부여-고구려-백제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신라 쪽이 보다 고조선계와 흉노(쥬신 선민족) 쪽에 더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쥬신이라도 한족(漢族)과의 교류와 그 영향력의 강약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라가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좀 더 흉노적이라는 말이지 근본적으로 이들이 다르다는 말은 아니지요. 희한한 말이겠지만 한족(漢族)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보다는 경제력·제도·문화의 면에서 세련되지는 못하면서도 금은 세공 기술이나 유물들은 훨씬 더 발달해 있는 나라가 신라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금관의 나라, 신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웠지만 여명기의 신라에 대하여 개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연구들이 있었고 분석 범위도 광범위하여 매우 복잡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모두 종합하고 여러분들이 보다 읽기 쉽게 요약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신라의 금(金)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신라의 후예(後裔)들에 의해 후일 나라 이름이 금(金)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후예 만주 쥬신은 금(金)이라는 같은 이름의 나라를 만들어 두 차례나 중국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이미 본 대로, 금나라를 세운 시조는 경주 김씨로 대립하는 부족들을 화해시킴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었고 현지인과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고서 정착합니다. 후금은 바로 이 나라를 이은 나라지요. 금나라는 신라와의 연계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비롯한 다른 여러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려사』에도 금나라 태조(아골타) 계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의 태조가 고려 예종에 국서를 보냈는데 그 국서 내용은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금나라의 태조가 요나라를 공격하면서 발해 유민들을 포섭하여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 渤海 同本一家)"라고 하고 있지요.
  
  금나라 태조의 말씀에서 금나라(금·청)가 바로 신라계와 고구려의 후예(신라·고구려 연합세력)이며 고구려 - 발해 - 금(반도에서는 고려) - 후금(청) 등으로 이어지는 쥬신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금(금·후금)나라를 건설한 만주쥬신은 황족의 성은 경주 김씨로 반도 쥬신과는 항상 친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17세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몽골 칸국의 황실인 보르지긴 씨족도 알탄오락(黃金氏族), 즉 김씨(金氏)로 되어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부여·고구려·백제 등과 마찬가지로 쥬신의 공통된 특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성격이 일부 알타이 서부 지역과 유사한 형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조선계와 선쥬신계(흉노계)의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문화는 토착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쥬신의 대륙문화에 중앙아시아·로마 문화까지 수용하여 융합시킨 하나의 복합적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쥬신의 전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즉 부여는 남쪽으로-반도부여(백제)로-열도부여(일본)로 향하는 동안, 신라는 북쪽으로-만주(금)로-중국(청)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몽골-만주-한국-일본은 한 뿌리…'쥬신사' 복원해야"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연재 끝…3월부터 24회 대장정
  2005-09-07 오전 10:57:19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 같이 태양 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咸亨洙 : 1914~1946)
  
  
  
  이제 '대쥬신을 찾아서'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제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떠나온 기나긴 여정을 일단 여기서 잠시 멈추어야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아시아 고대사, 특히 쥬신사를 홀로 연구한다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안개 속에, 어둠 속에 감추어진 쥬신사를 붙들고 밤새워 씨름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을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쥬신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저는 이 일을 가장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그저 객기(客氣)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동북공정이라는 쥬신사 말살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저는 아마 이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일이 많고 제 능력이 따라가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쥬신사의 구체적인 복구 작업은 한국과 일본, 몽골의 많은 연구자들이 여러 분야로 나누어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매달려야 할 사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과 일본의 사학계는 얼마나 국수적(國粹的)이고 묵수적(墨守的)입니까? 쥬신의 역사는 고대사(古代史)를 전공하는 분들이 맡아서 밝혀내어야 할 일인데 저 같은 '아웃사이더'가 하고 있으니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쥬신'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온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쥬신'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것이 저를 가장 답답하게 했습니다. 주변을 돌아봐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단체는 물론이고 연구자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쥬신의 각 분야별로는 적지 않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조교도 없는 제게 유일한 조력자(助力者)라고는 생물학(生物學)을 전공하고 웹디자인(web design)을 연구하고 있는 아내 김현주(金賢珠)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내는 그 동안 저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해 왔으며 저의 홈페이지(www.ebiz114.net)를 구축·관리해 왔고 제가 쓰는 글에 각종 그림 작업을 해줌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높이고 시간을 절약해 주었습니다(그림들 중에 시원찮은 것은 제 작품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제가 처음 이 일에 관심을 두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아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두 손을 들고 말렸습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좀 시끄러운 나라입니까?
  
  그렇지만 동북공정은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고 시간은 흐르는데다 북한(North Korea)에 언제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차일피일 미루면 더 이상 하기도 어려울 듯하여 일단은 밀어붙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연재가 시작되고 시간이 갈수록 아내는 이 사안의 중대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어떤 형식으로든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내는 역사(歷史 : history)를 가장 싫어하고, 학문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란 증명하기 힘든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내의 지론(持論)이었습니다. 아내는 저와는 달리 자유로운 독서를 즐기고 추리소설 마니아이기도 하지만 동ㆍ서양의 철학에 밝아서 저는 아내로부터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이해도 부족한 상태에서 유일한 조교이자 개인 비서인 '역사의 문외한(門外漢)'을 데리고 외롭고 고단한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하니 저 자신 한심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고대사(古代史)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꼼꼼하고 정치(精緻)한 작업을 요하는 일입니다. 사회과학을 하는 저에게는 역사적 고증작업을 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하나의 기록을 찾기 위해 허다한 사서(史書)들을 뒤지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 자신 일천한 학문적 수준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때로 제가 모든 삶을 바쳐 역사학을 해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한문(漢文) 실력도 큰 문제 거리였습니다. 한문을 깊이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한문 실력이 있는 분들이 번역을 한다 해도 그 분들이 보는 시각이 저와는 많이 달라 한문의 대가들도 놓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저 자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제게 닥친 수많은 난관들을 돌파하게 해준 것은 엉뚱하게도 바로 "역사라고는 '사실상' 평생 처음 공부해 보는" 아내였습니다.
  
  처음에 아내는 "발해만(渤海灣)이 어디 있어?", "흑룡강(黑龍江)은 어디야?", 심지어 "마립간(麻立干)은 뭐지?", "몽골이 조선 시대 때 쳐들어 왔지?", "후금이 청나라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을 나누는 강 이름이 뭐냐?" 등 이것저것 막 묻는 통에 연구 작업과 글쓰기에 상당히 방해가 되었습니다. 속으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꾹 참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저는 아내를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에 밝고 추리소설 마니아인 아내 특유의 분석력이 점차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역시 '아웃사이더'의 눈이 상당히 정확하고 예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학(Economics)의 경우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도덕철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 1723~1790)가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쓴 것은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죠. 잘 아시다시피 이 책은 고전 경제학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어를 못하는 상태에서 1764∼1766년 청년 공작 바클루의 개인교사로서 프랑스 여행에 동행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던 것이죠. 소위 '자본주의 경제학'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 : 1842~1924)도 철학자였지요.
  
  나아가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 1473 ~1543)도 신부(神父)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이단자로 몰려 화형(火刑)에 처해지는 것을 피해 유언(遺言)처럼 발표한 것이 바로 '지동설'이었죠.
  
  코페르니쿠스는 프라우엔부르크성당의 신부로 취임(1512)하였고 엘름란드교구 회계감사역 겸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이 되어 전임(1516)하였으며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으로 귀임(1520)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분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저서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 전 4권)』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훨씬 전에 저술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저와 제 아내가 한 일이 이런 위대한 분들의 업적과 감히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아웃사이더들은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고 그 이전에 다른 공부들을 두루두루 많이 했기 때문에 테오리아[theoria : 열병(閱兵), 또는 관조(觀照), 주유(周遊)]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사실 진리에 근접할 수 있는 이론(theory)이라는 것은 사심이 없는 상태에서 관조(觀照)함으로서 더 잘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철학한다(philosophein)'라는 말은 결국 주유(周遊)와 관조(觀照)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말입니다.
  
  제가 쓴 글 가운데 후반부인 쥬신의 개별사(個別史) 부분은 아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곧 출판될) 책의 저자에다가 아내의 이름을 같이 넣자고 하니 아내는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가 중학교 국사책에 나오는 내용도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결국 이 『대쥬신을 찾아서』의 내용이 의심받는다는 것이지요.
  
  아내는 지난 몇 달 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도 생각보다는 재미있다."고 이야기해서 저는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제가 이 일을 계속하려면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가 이 일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를 '비서(秘書)' 대신 연구사(硏究士)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아내가 극심하게 반대했던 이 일을 하면서 그 반대자를 주요한 연구자로 얻게 된 것은 앞으로 제게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중년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여행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어떤 아리따운 처녀가 다가오더니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여 칼을 들이대고 돈을 요구합니다. 당황했지만 남자가 이를 거절하니 그 처녀가 사정없이 그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가슴 주머니를 만져보니 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남자, 가슴 쪽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더랍니다. 이 후 갈비대도 수술하고 가슴에 생긴 고름도 짜야 했습니다. 이 남자는 그 처녀 귀신(鬼神) 때문에 병이 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은 미신(迷信)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저는 이 처녀의 이야기가 귀신도 미신도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보기엔 이 처녀는 우리의 몸에 침투하는 무서운 질병에 대하여 무의식이 만들어낸 질병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처녀의 칼에 찔리는 그 순간이 바로 몸에 그 병균이 강하게 번지기 시작한 시점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여자는 그 만큼 돈이 들어가고 고민을 생기게 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귀신이라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 남자가 차안에서 꾼 꿈은 그의 존재를 위협하는 심각한 질병이 침투하여 치료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 각종 고민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그의 몸이 그에게 보내는 경고라는 이야기이죠.
  
  이 남자가 꾼 꿈과 같이 동북공정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아웃사이더'로서 능력도 없으면서 이 일에 굳이 뛰어든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에 대한 갈등과 중국의 역사도발인 동북공정(쥬신사 말살 프로젝트) 때문이었습니다.
  
  반도쥬신(한국)과 열도쥬신(일본)의 역사 갈등은 지금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반도쥬신이나 열도쥬신은 쌍방이 자기 주장만 늘어놓는데다가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들이 있어 진실을 말해도 곡해(曲解)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최후로 남은 쥬신의 보루인 이 두 나라가 이렇게 한심한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중국은 없어져도 한족(漢族)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족(漢族)의 위대성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실제로 한족(漢族) 스스로 통치한 적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한족(漢族)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겉으로는 '하늘의 아들' 쥬신의 핍박에 묵묵히 순응(順應)하고 참고 견디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국을 지배하는 쥬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한족(漢族)만이 남는 것이지요. 힘을 기른 한족(漢族)들은 남은 쥬신들을 철저히 응징합니다. 그래서 중국을 대부분 지배한 사람들은 쥬신이지만 결국 바람처럼 사라져 가고 끈질긴 '땅의 아들'들 즉 한족(漢族)들만 그 땅의 주인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점 쥬신은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쥬신은 멀쩡하게 있어도 국체(國體)가 소멸되면 쥬신은 소멸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쥬신들이 그렇게 사라져갔습니다. 세상에 남은 쥬신이라고는 (몽골에 극소수가 있지만) 사실상 한국과 일본뿐인데, 이들도 스스로 쥬신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노골적으로 쥬신사를 말살하려는 동북공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쥬신사를 영원히 해체하려는 동북공정의 이상한 논리를 이기는 길은 고구려 역사만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역사가 만주족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역사적 공통성이 존재했음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중국과 한국이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① 고구려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인가 하는 점, ② 고구려는 지역적으로나 혈연적으로 현재 반도의 쥬신족들과는 일치하는가 하는 점 등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나오더라도 동북공정에 대한 아무런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고구려는 역사에서 사라진 지 이미 1천 4백년도 더 지난 나라입니다. 토지 대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설령 그 토지대장이 있다한들 그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①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이 우리민족에게 강하게 유지되었는가 하는 점, ② 고구려가 끊임없이 몽골쥬신, 만주쥬신, 반도쥬신 까지 역사적 공동성이 연속되었는가 하는 점 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후 반도 쥬신(한국)은 만주 쥬신과 몽골쥬신을 항상 오랑캐 취급을 하여 우리와는 다른 종족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반도쥬신의 사학계가 맹목적으로 고구려만 지키고 만주에 거주한 제 종족들을 우리와 무관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한족(漢族)들에게만 유리한 입장을 만들어 줍니다. 결국 혈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고구려의 많은 부분을 계승하고 있는 만주 쥬신이나 몽골쥬신을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한 이민족으로 취급하게 되면 그것은 만주와 몽골(특히 내몽골)에 대한 역사적 지분을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중국에게 그 지분을 고스란히 넘겨주는 꼴이 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에 맞서기 위한 기존의 반도쥬신(한국) 사학계가 개발하는 대응논리라는 것이 ① 고조선과 부여의 주민 구성 및 국가형성, ②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성, ③ 한중 외교관계에 대한 연구(조공과 책봉을 중심으로), ④ 근대 동아시아 국경 획정과정 등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 이면에는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한 국가이고 부여는 다시 고조선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고리이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반도쥬신(한국) 사학계의 논리는 동북공정의 먹이사슬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학계가 동북공정을 학술적으로 해결하려면 할수록 만주(滿洲)는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에서 제외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죠.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우리 스스로 소중화주의적 인식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사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중국 측에 유리한 증거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우리 형제들인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을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발해 이후의 만주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한들 누가 그것을 받아들입니까? 지금 사학계에서 추진하는 방식이 최고로 성공을 해도 고구려와 발해까지만 우리의 역사고 요, 금, 몽골, 후금(청)의 역사는 당연히 우리 역사에서 제외됩니다. 발해가 멸망한 것이 926년입니다. 이미 1천 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1천 년 동안 만주는 이제 우리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죠. 결국 우리 사학계는 만주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중국의 논리를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셈이죠.
  
  지금 반도쥬신(한국)의 사학계는 지나친 소중화 의식이 가져온 뫼비우스의 띠 속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반도쥬신의 사학계는 마치 바다에 엄청난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데 배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는 않고 선실(船室) 속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이들은 고구려 역사만 방어하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고구려 역사의 방어는 물론이고 만주 전역의 역사의 영속성과 우리의 역사와의 연계성을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사실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연속성(連續性) 즉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가 중요한 것이지요. 저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를 동족이라고 생각했다거나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를 역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를 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형제라는 인식이 있든 없든 형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죠. 어릴 때 헤어져 서로 모른다 한들 그 핏줄이 변할 리가 있겠습니까? 역사상 돌이킬 수 없는 형제 간에 살육으로 점철된 한국전쟁(1950)이 있었지만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꼭 아셔야 할 것은 신라(新羅)는 실제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을 완전히 통일하지도 못했고, 삼국 통일을 강조한 것은 당대나 또는 후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을 뿐입니다. 신라는 단지 한반도 일부를 점령한 것이지 전체 쥬신사에서는 그저 발해와 남북국(南北國)을 이루고 있었을 뿐이지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남한 지역으로 국한시키려고 하는 축소지향(縮小指向)형의 반도사관(半島史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반도쥬신(한국)의 보수적인 사학계가 멀리 떨어진 부여(夫餘) 지역이나 요서 지역(遼西 : 고조선의 영역의 일부)을 우리 민족 역사의 일부로 인정해온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부여는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보면서도 바로 백두산 주변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바로 인근의 만주인(만주쥬신 : 청의 건국세력)조차도 우리 민족의 구성원에서 배제한다는 것이죠.
  
  도대체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학문적·국가적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것인 지를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제가 보기에 동북공정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쥬신의 관계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역사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쥬신 관계사의 입장에서 보면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식한 논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점들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첫째, 중국의 주변민족들이 한족(漢族)과 함께 하기에는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이 너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이후에는 중화사상이 매우 견고히 형성되어 한족(漢族)은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를 표방하면서 대부분 주변민족들을 그들의 통치 및 교화 대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중국의 주변민족의 이름들이 모두 개·돼지·승냥이와 같은 욕설로 지칭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한족이 주변민족들을 사람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명백히 한족(漢族)이 아니고 한족과 어울릴 수도 없는 민족이지요. 그런데 중국은 과거에는 개·돼지·승냥이 취급을 하다가 이제 와서는 왜 그들을 중화민족이라고 강변합니까? 필요하면 중화민족이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오랑캐로 돌아갑니까?
  
  현재에도 중국인들은 중화(中華)를 입에 달고사는데 그 중화가 원래부터 오랑캐가 포함되던 개념이었던 적이 있나요? 한족(漢族)의 중화(中華)일 뿐이지요.
  
  한족(漢族 : 중국)은 동북공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전에는 한족부흥(漢族復興)식의 분위기를 만들다가 동북공정이 시작된 후로는 비한족(非漢族)들도 모두 중화민족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저 중국이 다민족 국가(多民族國家)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중국내의 다민족을 모두 결국은 한족과 같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명백히 잘못입니다.
  
  여러분들도 시간이 있으시면 이전에 만들어진 『원숭환(袁崇煥)』(한국에서는 '누루하치'로 소개됨)과 같은 대국민용 계몽 드라마나 영화를 보세요. 『삼국연의(三國演義)』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한인(漢人) 즉 한족(漢族)의 정체성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세째, 한족(漢族)들과 그 주변민족들의 문화적인 특성이 워낙 다르고 지역적인 경계 또한 분명히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실 한족(漢族)과 사이(四夷)를 나눈 것은 쥬신이 아니라 바로 한족(漢族) 자신입니다. 한족은 그들과 주변민족(사이 : 四夷)을 분명히 분리시켜 "결코 융합할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임을 누누이 천명해 놓고서 이제와서는 그들이 결국인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대로 몽골 - 만주 - 한국 - 일본 등에 이르는 쥬신 벨트를 보면 중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특히 언어는 물론이고 각종 문화적인 요소들도 다르고 산업기반도 다릅니다. 동북공정은 궁극적으로 이들 주변민족의 영토를 되돌려 주지 않고 항구적으로 장악하려는 정치적 시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네째, 지리적으로도 만주와 요동 등은 중국 고유의 영토와는 무관한 지역입니다. 산해관(山海關)을 정점으로 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됩니다. 산해관이나 만리장성 등은 중국과 쥬신과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해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조변(柳條邊)은 한족(漢族)과 쥬신을 나누는 중요한 경계선입니다. 만약 만주 쥬신(만주족)이 한족(漢族)과 차이가 없다면 청나라는 왜 지속적으로 봉금정책을 실시했겠습니까? 그리고 또 다시 유조변을 설치한 것은 도대체 어떤 연유입니까?
  
  그리고 중국공산당 이전에는 요동과 만주를 한족(漢族)이 직접 지배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요동과 만주의 역사가 현대 중국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합니까? 그러면 과거 몽골(원나라)이 중국 전토를 지배했으니 그 이전의 한족의 역사가 모두 몽골의 역사가 되어야지요. 그러면 청나라 때에는 춘추전국은 물론이고 한(漢)나라의 역사도 모두 청나라의 역사가 되겠군요. 중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가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야 하겠군요(요즘 TV 광고에 유행하는 말로 "사랑은 움직이는거야"라고 하더니 역사도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이런 황당한 논리가 중국이 동북공정에 임하는 논리입니다. 중국의 수준 미달의 엉터리 논리에는 반박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그들의 논리에 말려들게 됩니다.
  
  그러니 아예 상대하지 않고 쥬신사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중국의 엉터리 논리를 상대하지 않는다고 세계가 중국편을 든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보들입니까? 우리는 그 엉터리 논리에 대응할 다른 합리적인 논리를 세계에 알리면 됩니다.
  
  쥬신의 역사를 국제적인 언어로 번역해서 세계에 알리고 홍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입니다.
  
  다섯째, 발해는 분명히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금과 후금은 발해 또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그들의 실록이 그렇게 밝히고 있는데 왜 그것이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인종적으로 한족과는 명확히 차이가 납니다. 금의 건국자들은 흑룡강 유역을 근거지로 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죠. 그리고 청나라의 건국자들이 흥왕(興王)의 땅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장백산(백두산)으로 명백히 한국인들과 그 신성(神聖)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산해관이 중국의 땅이듯이 백두산을 비롯한 요동 만주도 쥬신의 땅이지요.
  
  여섯째, 중국은 조공(朝貢)을 가지고 정권의 종속성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본대로 황당한 논리에 불과합니다. 즉 중국은 각 주변 나라들이 행했던 과거의 외교적 레짐(regime)을 그 국가들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지배권 확립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중국에게 공식적으로 물어봅시다.
  
  고구려가 번성하던 남북조 시대에 일본(日本)도 성실하게 조공을 했는데 현재 중국은 일본에 대한 과거 지배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은 중국(한족)의 본류인 남조(南朝)에 대하여 성실히 조공을 했지 않습니까?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중국은 일본처럼 건드리기 신경쓰이는 나라는 그대로 두고 눈치만 보면서, 한국처럼 호락호락해 보이는 나라는 끊임없이 그 지배권을 주장하는 건가요?(물론 이것은 한국의 지배층에도 책임이 큽니다). 모르죠. 중국은 아마 일본이 약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지도. 한족(漢族)은 『삼국연의』의 유비(劉備)처럼 기다리는 것 하나는 세계 최고가 아닙니까?
  
  그리고 조공을 받은 국가들이 한족(漢族)의 나라인 경우가 도대체 몇번 있었습니까? 제가 보기엔 중국을 통치한 대부분 정권이 오히려 쥬신입니다. 그런 논리로 치자면 현재 대부분의 중국 땅은 몽골이나 만주족들에게 다시 돌려줘야합니다.
  
  지금 중국의 논리는 고대 로마 영토는 모두 현재의 이탈리아 영토이니 돌려줘야한다는 식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바보입니까? 국제사법재판소가 이런 논리 하나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식의 중국의 논리는 아예 무시해야지 여기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은 오히려 우둔합니다.
  
  지금까지 본대로 동북공정에 대한 대안은 쥬신의 관계사를 중심으로 보면 너무 간단합니다. 국사해체론이나 요동사 개념은 학문적인 지평을 넓히는 중요한 시도이기는 하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는 제 구실을 하기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습니다. 국사해체론이나 요동사적 관점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국가간의 불균등성이나 비대칭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먼 여행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우리 민족의 원류인 예맥(濊貊), 숙신(肅愼), 동호(東胡) 등을 검토하고 이들과 몽골, 왜, 말갈(靺鞨)의 관계는 물론 알타이 신화, 쥬신의 호수 고구려, 몽골, 백제, 일본, 신라 등의 국가간의 관계를 쥬신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쥬신의 고향을 찾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이 내재한 삶의 뿌리에 관해서 그리고 그 정신의 '고향(故鄕)'을 찾아간다는 것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림 ①] 한국의 이미지 - 아름다운 자연. ⓒ김운회

  쥬신에게 심각한 위기가 오고 있지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고 슬퍼만 하기에는 우리 갈 길이 멉니다. 다행스럽게 쥬신에게는 새로운 무기가 있습니다.
  
  과거 쥬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은 바로 말[馬]을 이용한 기동성입니다. 그리고 정교한 활쏘기 기술이었습니다. 이 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서에서 지적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청나라의 옹정제(擁正帝)는 "우리가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은 내실(內實)이 없는 헛된 문예(文藝)가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무술실력과 실천하는 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몽골의 라마교 경전(經典)이나 한족들의 문예(文藝)보다도 무략(武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東華續錄』48)" 즉 몽골을 포함하는 만주인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있어서는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당시 세계를 제패(制覇)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나 활은 과거에는 매우 훌륭한 무기였지만 이제는 사라진 무기입니다. 말타기나 활쏘기는 올림픽 경기에서나 빛을 발할 뿐입니다. 그것이 다시 무기가 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쥬신은 다시 그 같은 무기를 가지지 못할까요?
  
  자, 이제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말타기(기동성)와 활쏘기(정교함)를 대신하는 강력한 무기를 쥬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터넷(Internet)과 정보통신 기술(IT)입니다. 이 분야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반도쥬신(한국)이요 열도쥬신(일본)입니다. 열도쥬신은 아날로그와 IT 기반 기술에 강하고 반도쥬신은 디지털과 인터넷이나 이동통신 기술에 특히 강합니다.
  
  특히 멀티미디어(multimedia) 기술이 아날로그(신호)에서 디지털(데이타)로 바뀜으로써 반도쥬신(한국)은 디지털 소자(素子 : 칩) 부분을 제외하고서는 미국(USA)과 열도쥬신(일본)을 능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물론 반도쥬신은 메모리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입니다). 그 동안 열도쥬신은 아날로그 부분에서 막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전자부문을 이끌어 왔고 전자부문에서 그 역량은 앞으로도 상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도쥬신과 열도쥬신이 디지털 부문에서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한다면 이 기술을 웬만한 나라가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Digital Age)의 개막은 반도쥬신(한국)에게는 매우 큰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반 기술들의 기본 구조는 "사실상" 표준에 가깝기 때문에 그것을 얼마나 사용·운영하고 컨텐츠(contents)를 개발하는가에 따라서 그 승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물론 소자의 개발이라는 문제들이 있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그것은 경제성의 문제이지 딱히 기술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도쥬신(한국)은 기마민족(騎馬民族)답게 남들이 하면 무엇이든지 빨리 써봐야 적성이 풀리는 특성이 있습니다(이에 관한 많은 속담들도 있습니다). 한집에서 TV를 바꾸면 온동네 전체가 TV를 바꾸기도 합니다. 어느 아파트에 초고속 인터넷이 설치되면 몇 달이 되지 않아 그 지역 전체가 같은 초고속 인터넷이 설치됩니다. 이런 민족성은 산업시대에서는 부정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오히려 기술 개발을 크게 앞당기는 효과가 있습니다. 열도쥬신(일본)은 반도쥬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신중한 면이 있는데 이것이 아날로그 시대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이제 시작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한번 써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많이 해보고 실험하고 그 결과를 빨리 볼 수 있는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구성하고 있는 나라가 미래 기술을 개척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반도쥬신(한국)은 매우 모범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4년 2월 현재 반도쥬신(한국)은 이미 인구의 75%인 3천만 명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고 10대·20대 이용률은 94%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에 유례(類例)가 없는 일입니다. 인터넷 이용 용도에서는 자료 및 정보 검색이 72.8%로 가장 많았고 게임(52.5%)과 전자우편(51.3%) 등이 뒤를 이었고 85.3%는 e메일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사람들이 영어(English) 연수를 한답시고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캐나다로 미국, 영국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서 저는 "앞으로 그런 나라에 살려면 좀 답답할테니 잘 견뎌라. 인터넷이 없는 세상은 한국의 산골보다 못하니 감안을 하도록."하고 말해주곤 합니다.
  
  반도쥬신(한국)과 같이 이렇게 국민 절대 다수가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반도쥬신의 인터넷은 IT의 대표적인 실험장의 하나이기도 하고 미래 이동통신의 방향에도 매우 큰역할을 하였습니다. IMT 2000이 바로 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미래 IT는 반도쥬신을 떠나서 생각하기는 어렵지요.
  
  2004년 9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9월20일자)은 "한국, 디지털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은 앞으로 펼쳐질 디지털의 세계에서 미국을 제치고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포천』지가 제시하는 바는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한국은 브로드밴드(broadband : 주파수 분할 다중화 기법을 이용하여 한 개의 전송매체에 여러 개의 데이터 채널을 제공할 수 있는 정보통신 체계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그저 초고속인터넷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급률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유무선 고속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으로 한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이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미래 인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가정의 브로드밴드 보급률은 20%를 조금 넘는 수준인데 한국은 이미 75%에 달하고 있어서 미국은 한국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포천』은 지적합니다. 미국인들은 2003년 비로소 시작된 음악파일 다운로드 서비스를 자화자찬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몇 초 만에 한편의 영화나 TV쇼를 다운받는 서비스가 시행되고 있다고 『포천』은 부러워합니다.
  
  한국은 2012년까지 초당 100 메가비트의 초고속 케이블을 설치하고 2007년까지는 1천만 명이 인터넷으로 가전제품을 자동 조절하는 '스마트 홈' 네트워크에 편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디지털의 장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포천』은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을 공연한 허언(虛言)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힘이 국토의 넓음으로 말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습니다.
  
  2002년 OECD가 만든 『IT분야 국제화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IT 제조업분야 경쟁력은 세계 최고라는 것입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평균(1점)의 2배가 넘는 점수(2.43점)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이 세계 최고가 된 것은 전체 수출에서 IT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OECD 국가 중 제일 높기 때문입니다(『조선일보 』2004.5.16).
  
 

  위의 경우를 보면 아일랜드나 헝가리 멕시코는 주로 해외 기업을 좋은 조건으로 국내에 유치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IT 부문의 국내총생산(GDP)이 높은 것이므로 실제 IT 경쟁력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핀란드는 매우 작은 나라입니다. 결국 미래의 IT 산업과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나라는 결국은 한국·일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것이지요. 이들 나라들 중 두 나라가 바로 쥬신입니다.
  
  한국은 온라인 게임의 세계 최고 강국입니다. 온라인 게임 즉 인터넷 게임은 인터넷 기술의 총화(總和)입니다. 마치 항공기가 기계공학의 총화이듯이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게임을 할 경우 서버(server)를 관리하고 그에 맞는 프로그래밍을 하는 작업은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그리고 게임상의 아름다운 성(castle)이나 건물, 캐릭터, 불꽃, 광선, 전투 장면 등은 3차원 그래픽의 최고 수준의 기술이 동원되어야 합니다(데이터 용량이 적으면서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채팅 기술이 동시에 구현되고 있습니다.
  
  이 우수한 기술과 상품들이 현재는 다른 나라에서 초고속통신망이 구축되지 않아서 빛을 발휘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이것은 밀레니엄 시대에 전세계적인 가공할 한류(韓流)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IT는 현재 반도쥬신(한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돌파구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 반도쥬신과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인터넷과 IT는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국민경제 전체의 발목을 잡고 있는 망국적인 부동산 가격으로 큰 그늘이 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높아진 임금으로 (고용 능력이 큰) 제조업 기반이 와해되어 해외(중국, 동남아)로 빠져나가 실업이 증대하고 물가는 뛰면서도 불경기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불경기가 지속되니 기업이나 가계가 상환능력이 떨어져 은행이 또 부실화됩니다. 은행이 부실화되어 제 기능을 못하니 외국자본들 가운데서도 악성 투기자본이 활개를 치고 다닙니다. 이 문제는 비단 반도쥬신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지요. 어제의 일본 문제가 오늘의 한국 문제가 되고 오늘의 한국 문제가 내일의 중국 문제가 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IT 기술의 발달과 함께 경영정보시스템(MIS)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개방형(open network)으로 고도화되고 인터넷 비즈니스가 확산되면서 재택근무(在宅勤務 : home office)가 활성화되면 대기업의 본사가 굳이 서울의 도심에 있을 필요도 없고 매일 출근에 따르는 사회적 비효용(고통)을 부담할 필요가 없어지지요. 물류(物流 : logistics) 전체가 IT를 이용하여 하나의 공급 사슬(supply chain) 아래에 놓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아름다운 전원(田園)에 살지만 인터넷을 이용하여 서울에 사는 만큼이나 "싸면서도 빨리" 제가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환경 오염도 그 만큼 줄게되고 굳이 서울에 있지 않아도 되니 부동산 가격이 오를 이유도 없지요. 또 현재의 망국적인 수도권 집중 사태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요. 제 생각에는 한 20~30년 후에는 서울의 부동산 가격도 지금과는 달리 많이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 반도쥬신(한국)의 상황을 감안해 보건대 해외로 이탈해 나간 제조업을 대신하여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부가가치 생산성을 가지며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는 거의 유일한 원동력이 IT요 인터넷비즈니스입니다. 제조업의 "사실상" 붕괴 이후 그래도 반도쥬신이 굳건한 것도 바로 IT와 인터넷 때문이라고 봐야합니다.
  
  이와 같이 이제 말과 활을 대신하여 IT와 인터넷이 쥬신의 새로운 브랜드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데이터베이스(DB)에서 지식베이스(KB)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지식사회의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정보통신의 수준을 넘어 한층 고양된 지식기반 사회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이지요.
  
  현대는 지적(知的) 유목민(遊牧民)의 시대입니다. 무한한 사이버의 세계를 이제 한국과 일본은 질주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물리적인 땅의 공간이 아니라 무한히 펼쳐진 사이버 공간의 시대입니다. 쥬신의 부활은 칼이나 철갑기병으로서가 아니라 인터넷과 IT로부터 시작되어갈 것입니다.
  
  
  
  지난 30여 년 간 저의 화두(話頭)는 '한국(Korea)'입니다. 한국과 관련된 것은 정치 경제는 물론 사회 심리 역사, 자연과학, 공학까지도 다 저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제가 인터넷비즈니스와 디지털 경제를 깊이 연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현대 쥬신의 대표적 브랜드가 아닙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죽음'에 대한 연구(Thanatology)였습니다.
  
[그림 ②] 한국의 이미지 - 산과 구름. ⓒ김운회

  제 공부의 시작은 경제학(Economics)이었습니다. 저는 젊은 날 마르크스 경제학, 근대 경제학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시작은 마르크스(Marx)였지요. 그런데 거의 6~7년을 마르크스에 침잠을 했는데도 경제(Economy)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근대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니 경제 현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진리는 전체적으로 봐야만 보인다는 생각을 그 때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경제현상은 바로 정치와도 깊이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경제정책이라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정치적 여건도 맞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정치라는 것은 결국 역사의 산물입니다.
  
  정치가 뭡니까? 바로 현대의 역사(present history)지요. 역사는 바로 과거의 정치(past politics)입니다.
  
  이와 같이 학문이라는 것은 요즘과 같이 파편화되어서는 진실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제 학문이 파편화되어서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저는 현재 우리가 알고 의지하고 있는 패러다임(paradigm)이 산산 조각나고 있는 것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수백 년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온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구조는 아마 수 십 년을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은 웬만한 것은 모두 파괴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는 시장(market)의 하드코어(hard core)인 수요(demand)-공급(supply)-가격(price)의 체계도 디지털 재화(digital goods)의 등장으로 붕괴되고 있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기존의 경제학 이론들도 버티어 내기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기존의 경제이론들은 2백년 이상 지나는 동안 사실 너덜너덜해지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화두는 '퓨전(fusion)'과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퓨전은 단순한 패러다임의 현상이 아니라 진리를 보다 실존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학문적 태도로 전환되어야할 중요한 인식론적 토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도 단순히 역사학적인 시각만으로 봐서는 그 실존적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every resource available)을 동원해야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사라져간 수많은 쥬신의 역사와 전통을 복원하여 내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전쟁을 종결시키고 밖으로는 한족(漢族 : 중국)의 집요한 쥬신사 말살 프로젝트를 막아야 합니다. 사실 동북공정은 작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이후에는 백제공정(百濟工程)이 나올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신라공정(新羅工程)이 나올 것입니다.
  
 
[그림 ③] 한국의 이미지 - 한국인의 삶. ⓒ김운회  

  제가 여러 국가기관이나 기업 등의 여러 관계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불필요한 데 돈을 탕진하지 말고, 중국과는 다른 쥬신의 역사를 국제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리고,『북사(北史)』『요사(遼史)』『금사(金史)』『원사(元史)』『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등을 번역하여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쥬신에 대한 이해를 높혀 "우리 세대 안에" 우리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통일한국(unified Korea)'을 위한 새로운 비전(new vision)이 될 수도 있으며 쥬신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보다 더 많은 분들이 우리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동참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단순히 영락대제의 영광이니 고구려 지키기니 하는 식으로 잠시 온 누리에 활짝 피었다가 이내 지는 벚꽃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족(漢族)들은 대개 정책들을 수십 년 또는 1백년을 각오하고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런 점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 권력이 바뀌면 대부분 정책들이 난관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에 대한 연구만은 정치권력과 무관하게 연구되어야할 사안임을 우리 모두는 인식하여야 합니다.
  
  말이 길었습니다. 그 동안 『대쥬신을 찾아서』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제게 용기를 북돋워주신 많은 분들께 고마운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 글에 대하여 매서운 질정을 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 능력의 부족으로 그 분들의 생각들을 제대로 반영해드리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그 동안 수고해 주신 프레시안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에 다시 어떤 주제를 두고 여러분을 뵙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성공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쥬신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005년 9월 7일
  
  한국연구가 淸鏡 金 雲 會 드림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