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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07|조회수255 목록 댓글 0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35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88)신 용 철*
1.머리말
2. 사료에 대한 개관
3. 서술 체제-목록학(目錄學)
4. 역사관
1) 역사에 임하는 태도
2) 육경이 모두 역사라는 학설
(六經皆史說)
3) 순환사관(循環史觀)
4) 시비의 표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논의(是非無定論)
5) 역사인물론
5. 이지의 역사이론(史論)에 대한 비평
6. 맺음말
1. 머리말
탁오 이지(李贄, 1527~1602)는 16세기 중국의 유교전통에 대해 신랄한 비
판을 가한 사상가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정치와 학문은 물
론 사회윤리의 형식과 허위를 예리하게 공격한 내용으로 가득 찬 그의 수많
은 저서 속에서 그의 다양하고 합리적이며 또는 근대사유의 사상적 요소들
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반유교적 사상을 비롯하여 낭만주의적 자유사상, 반봉건사상, 남녀평등사
*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136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상, 법가사상, 유물사상, 자본주의의 맹아적 요소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이 그의 역사관과 모두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이나 역사관을 고찰하는 것은 그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실 중국에 있어
서 역사서술이 정신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 경우 우리는 이지를 역사가로서 볼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지는 사마천(司馬遷, BC. 149~90), 반고(班固, 32~92) 같은 중국 역대
의 유명한 사가들처럼 일찍이 역사서술을 위한 교육이나 훈련의 기회를 갖
지 못했으며 사관(史官)의 직에 종사하여 정통의 사서를 쓴 적은 없다. 그러
므로 그에게는 역사서술에 대한 직업적인 사명감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관직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매우 자유로운
입장에서 역사를 읽고, 역사를 서술했다. 실망과 좌절, 박해와 분격 속에서
‘거침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從容)'하는 생활을 통해서 비판적이고 독자적
인 안목으로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서술하며 평가하였다.
그의 역사서로서 68권의 장서 나 27권의 속장서 는 물론 분서 권5의
「독사(讀史)」, 속분서 권3의 「독사휘(讀史彙)」가 있다. 위서(僞書) 문제가
논란이 되는 사강평요(史綱評要) 를 포함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매우 방대
한 사서를 남겼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역사가라고 부르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퍼부은 그의 역사서나 역사평은 그의
생전이나 사후에 수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청대의 역사가 기윤(紀昀,
1724~1805)이 쓴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중 이지의 장서 에 대한
혹(독한 비)평은 그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에게 죄를 씌워 “이 책은
오직 공자를 배격하고 별도의 높이고 낮추는 기준(褒貶)을 세워 무릇 옛날
로부터 전해오는(千古相傳)의 선(善)과 악(惡)이 그 위치를 뒤집어 엎지(顚
倒) 않은 것이 없다”1)고 하였다.
1) 「欽定四庫全書總目」 권50, 장서 68권, “… 惟此書 排擊孔子別立褒貶 凡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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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죄 된 이지가 살았던 명왕조는 몽고족의 지배를 벗어나고 특히
“전제정치가 더욱 심각해졌다”2)고 일반적으로 평가된다. 명의 태조 주원장
(朱元璋, 재위 1368~1398)의 개국이래 ‘명초 文字의 화(文字의 獄)’나 ‘호람
의 옥(胡藍의 獄)’ 등으로 호유용(胡惟庸, 14세기), 이선장(李善長, 1314~1390),
남옥(藍玉, 14세기) 등 많은 공신, 문인들이 참혹한 화를 당한 후3) 역사에
대한 흥취가 일어나지 않아 관방사학(官方史學)이 크게 부진하여 “명의 일
대에는 실록(實錄)은 있어도 국사는 없었다”4)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개인이 역사를 다루는 풍조(修史風)는 매우 성해서 ‘역사’의 개념,
특히 사관방면에 시대를 긋는 창조적 업적(創擧)”5)이 있었는데 그 중의 저
명한 인물로서 이지가 먼저 거론된다.
그런데 이지에 관한 연구는 민국 초 이래 중국에서는 물론 일본, 서구에서
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으나 그의 역사관에 대한 것은 그리 큰 진전을 보이
지 못하였다.6) 이것이 필자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동기이다.
그동안 이지의 여성관을 통해 본 사회비평(독문) 7)과 「중공에 있어서
이지상의 정치적 수용」8) 이래 계속 이지를 연구해 온 필자9)는 그의 사상을
古相傳之善惡 無不顚倒易位”
2) 蕭公權, 中國政治思想史, 臺北, 中華文化出版事業委員會, 1961, 561쪽.
3) 蕭公權, 中國政治思想史, 臺北, 中華文化出版事業委員會, 1961, 580쪽.
4) 趙令揚, 「李贄之史學」 史論集, HongKong, 史學硏究會, 1975, 14쪽.
5) 趙令揚, 「李贄之史學」 史論集, HongKong, 史學硏究會, 1975, 14쪽.
6) 蕭公權, 中國政治思想史, 臺北, 中華文化出版事業委員會, 1961, 31쪽.
7) Yong-chul Shin, Die Sozialkritik des Li Chih(1527~1602)-am Beispiel
seiner Einstellung zur Frau-Frankfrut am Main․Bern, Peter Lang, 1982.
Europäische Hochschulschriften 27. 1982.3.
8) 「中共에 있어서 李贄像의 政治的 受容」 경희사학 제9․10합집, 1982,
199~216쪽.
9) Yong-chul Shin, Li Chih und Seine Philosophie in der chinesischen Presse
zwischen den 1. Sept. 1973 und den 31. Dez. 1974(1974, Univ. HD.
Fakultät für Orientalistik und Alterumswissenschaft) , 1974.12.
Yong-chul Shin, Die Sozialkritik des Li Chih(1527~1602)-am Beispiel
seiner Einstellung zur Frau-Frankfrut am Main․Bern, Peter Lang,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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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사론을 탐구해 보려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Europäische Hochschulschriften 27. 1982.3.
「明代 李贄와 그의 生涯」 고황 26, 경희대학교, 1982, 130~152쪽.
「中共에 있어서 李贄像의 政治的 受容」 경희사학 제9․10합집, 1982,
199~216쪽.
「李贄의 歷史觀試論」 경희사학 제11집, 1983, 180~201쪽.
「李贄의 社會批評」 동양사학 연구 제19집, 1984, 51~80쪽.
「이탁오와 그의 역사시비론」 대학주보 , 1986.
「한국에 있어서 이탁오 연구」 한국사상사학 4‧5 합집, 1993, 493~509쪽.
「이탁오와 마테오 리치의 交友에 관하여-16세기 동서문화 접촉의 한 가교」
明淸史 硏究 제3집, 1994, 41~55쪽.
「유교개혁의 사상적 선구자 이탁오」 동아시아의 인간상 , 황원구 교수 정
년기념논총 1995, 495~518쪽.
「이탁오의 진보적 교육사상」 동양학 연구 제3집, 1997.
「이탁오와 중국 여성사」 여성문화의 새로운 시각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
소 여성문화총서, 1999. 85~123쪽.
「16세기 중국 문화의 서민화 경향-이탁오 역사서술의 수필화를 중심으로-」
경희사학 23집, 2002 등의 논문이 있고, 문학잡지에 연재한 에세이로서
아래와 같은 글들이 있다.
「이탁오(李卓吾, 1527~1602) 유교의 성인인가, 반역자인가」 문예비전 ,
2000.5. 181~185쪽.
「이탁오(李卓吾, 1527~1602) 열렬한 구도자와 격렬한 비판자」 문예비전 ,
2000.6~7, 4549쪽.
「이탁오(李卓吾, 1527~1602) 태워버려야 할 책, 분서(焚書) 」 문예비전 ,
2000.8~9, 41~45쪽.
「이탁오(李卓吾, 1527~1602) 감춰야 할 책, 장서(藏書) 」 문예비전 ,
2000.10~11, 37~41쪽.
「중국의 이탁오(李卓吾)와 조선의 허균(許筠)」 문예비전 , 2000.12, 37~42쪽.
「자유낭만적 문학이론의 정수-동심설(童心說)」 문예비전 , 2001.1~2, 29~33쪽.
「자유낭만적 문학이론의 정수-동심설(童心說)」 문예비전 , 2001.3~4, 29~32쪽.
「자유낭만적 문학이론의 정수-동심설(童心說)」 문예비전 , 2001.5~6, 42~46쪽.
「여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구요」 문예비전 , 2001.7~8, 40~43쪽.
「책을 읽으면서도 글자를 모른다(讀書不識者)」 문예비전 , 2001.9~10, 39~43쪽.
「맨 손으로 공자의 상점을 때려 부수려 든 사천성의 노 영웅 오우(吳虞)」
문예비전 , 2001.9~10. 205~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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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말이란 전환기에 있어서 중국 역사학의 성격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디
딤돌이 됨은 물론 이지의 사상 전반을 탐구하는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연구
가 아닐 수 없다.
2. 사료에 대한 개관
역사가로써 이지의 역사서술이나 사론 또는 그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고찰하기 위해서 그의 저서 중 역사서의 성격을 가진 중요한 저서들을 간략
히 개관하고자 한다.
(1) 초담집(初潭集)
관직을 떠난 후 이지가 가족과 함께 호북의 황안(黃安)에서 경정향(耿定
向, 1524~1596)의 집에 머물다가 도학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에 격렬한 충돌
로 호북성 마성(麻城)의 용담호(龍潭湖) 옆의 불사인 지불원(芝佛院)에 주
거를 정하고 난 1588년(62세) 때의 저서이다.
이지는 남조 송(420~479)대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신어(世說新語)
와 이지를 존경하여 친숙하게 지냈던 초횡(焦竑, 1540~1620)의 초씨유림
(焦氏類林) 을 읽고 그것을 독자적인 안목으로 분류하고 합집 한 것이다.10)
그런데 그의 분류는 세설신어(世說新語) 처럼 많은 짧막한 이야기들을
인간의 오륜관계에 따라서 ① 「부부」(1~4권)에 13개의 소제목, ② 「부자」
(5~8권)에 10개의 소제목, ③ 「형제」(9~10권)에 2개의 소제목, ④ 「사우」
(11~12권)에 41개의 소제목, ⑤ 「군신」(21~38권)에 38개의 소제목으로 총
30권 100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다.
10) 이지, 「又敍」 初潭集, 中華書局, 1974, 3~4쪽. 그런데 李卓吾批點世說新
語補 20권도 오늘날 전하고 있다
140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여기서 「부부(夫婦)」를 제일 먼저 놓고 「군신(君臣)」을 끝으로 한 것은
당시의 사회윤리로서는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이 저서의 특징은 어떤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에 대해 자기 나
름대로 비점(批點)이나 방점을 가하고 인물이나, 이야기, 소제목 및 각 편의
끝 또는 앞에 총론이나 짧은 평론을 하고 있다.
문학의 이론이나 비평은 물론 통속문학에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적지 않
은 기여를 한 이지가 인물평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을
보인 세설신어 를 좋아한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은 후한에서 동진에 이르는
사이 즉 2세기 말로부터 4세기 말까지의 살았던 이름높은 풍류 인사들의 언
동에 관한 것을 모아 엮은 철사(轍事)소설이다. 그리고 유교의 쇠약, 정치의
문란, 노장철학의 부활, 도학, 불교의 전파 등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 예
리한 지식인의 생활기록이 되는 이 저서 속에는 기지와 해탈, 반항과 해학,
고뇌와 수양, 인간본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 등이 담겨져 있다.11) 따라서 이
러한 책을 다시 분류하고 출간하게 된 이지로서는 수많은 인물과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특징에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와 접촉은 뒷
날 그의 명저인 분서 , 속분서 나 역사서인 장서 , 속장서 등에 내용과
형식 양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유교적, 노장학적인 사상과 기지와 예리함으로 가득 찬 그의 역사평 또
는 인물평은 세설신어 와 상당한 관련이 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한 예로서 초담집 속의 「부부편총론」,12) 「석교(釋敎)의 후평(後評)」,13)
「독의(篤義)의 공융평(孔融評)」14)은 뒤에 그의 분서 , 속분서 속에 그대
11) 이병한, 「세설신어-중국의 고전 100선」 신동아 , 1980.1. 부록, 24~26쪽.
12) 이탁오, 초담집 , 「부부편총론」 ; 「부부론」, 분서 권3, 90쪽.
13) 이탁오, 「석교(釋敎)의 후평(後評)」 초담집 권11, 143쪽 ; 「삼교귀유설」
속분서 권2, 75~76쪽.
14) 이탁오, 「독의(篤義)의 공융평(孔融評)」 초담집 , 권19, 328쪽. ; 「孔融自
然之性」 속분서 권3, 92쪽. 전 저서를 비교하지 못했으나 아마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41
로 전재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전기소설적인 문학비평서인 초담집 을 이지 자신은 진정한 “유교의
서적(儒書)”이며 자신을 “실제적 유자(實儒)”15)라고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
으나 청대의 정통사가는 사고전서총목 에서 그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대체로 유교와 불교가 하나임을 주장하는 설로서 광폭하고 많이
부족하여 비록 글의 뜻을 서투르게 이해하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그의 (허)망함
을 알았지만, 명 말에 있어서 그 책은 성행했으니 당시 인심과 풍속이 무너졌
음을 역시 가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16)라고 정죄하고 청대의 ‘금서목록(禁書
目錄)’에 포함시켰다.
(2) 분서(焚書) 와 속분서(續焚書)
1590년 이지가 64세 때 마성에서 그의 대표작인 분서 가 출간되었다. 이
저서에는 저자의 「자서(自序)」와 초횡(焦竑)의 「이씨분서서」17)가 있다. 분
서 는 1권에 「서답(書答)」, 3권에 「잡술(雜述)」, 4권에 「잡술」, 5권에 「독사」,
6권에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권의 「독사」는 48개의 소제목의 인물평, 문학평, 혹은 역사평이 들어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서신, 잡술 등에도 그의 사론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 책의 성격은 그의 「자서」에서 이미 명백하니,
“하나는 분서 이니 곧 지기들의 서문에 답한 것으로 말한 바는 모두 근세
학자들의 고질에 절실한 것으로서 이미 그 속에 그들의 고칠수 없는 병이 들어
있은 즉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를 태우려 한다. 즉
15) 이탁오, 「초담집서」 초담집 , 1쪽.
16) “大抵主儒釋合一之說, 狂誕謬戻, 雖粗識字義者, 皆知其妄而明季乃盛行其書,
當時人心風俗之敗壞, 亦大槪可睹矣”
17) 이것은 이지의 사후 쓰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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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마땅히 이를 태워버려서 (이 세상에) 남겨 둬서는 안 된다.”18)
라고 단언하였다.
속분서 는 그의 사후 만력 무오(1618)에 제자 왕본아(王本雅)에 의해서
출간된 것으로 초횡의 「이씨속분서서」, 장일의 「탁오노인의 책을 읽고 나서
씀(讀卓吾老子書述)」, 왕본아의 「계속 출판된 이씨 서에 대한 서문(續刻李氏
書序)」이 있다.
이 저서는 모두 5권으로 구성되었는데 1권에는 「서휘(書彙)」, 2권에는 「서
휘(序彙)」, 3권에는 「독사휘(讀史彙)」, 4권에는 「잡저휘(雜著彙)」, 5권에는
「시휘(詩彙)」인데 3권 중의 「독사휘」에는 24명의 명대인물품평과 고사 8가
지를 부가하고 있다.
어쨌든 그의 이 저서는 매우 스스로 찾은 독창적인 언어로서 그의 생활
중 불교언어, 분하여 격해진 언어로서 가득 차 있었으며 특히 자유롭고 분방
한 그의 사생활이나 인생철학, 역사관 등이 매우 생동하게 기술되고 있다.
위의 「자서」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그는 당시의 정치, 사회의 윤리와 권력
을 잡은 자들의 허위와 형식을 날카로운 표현으로서 통쾌하게 공격하고 있
다. “굉보(이지)는 거침없이 곧은 언어로 설파하고 눈은 한 시대를 꿰뚫어
보며 분격이 너무 심해서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거슬림에 전혀 유의하지 않았
다”는 초횡의 평19)은 분서 , 속분서 속에 나타난 이지의 태도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사고전서총목 에는 “성인을 무시하고 법을 어기며 감히
다른 논의를 일으켰다(非聖無法, 敢爲異論)”라고 하며 “사회 윤리의 죄인으
로 백성을 속이는 그릇된 학설을 주장했다(名敎之罪人, 誣民之邪說)”20)고 혹
독히 비난하고 있다.
18) 이지, 「자서」 분서 , 1쪽.
19) 초횡, 「이씨분서서」 분서 , 2쪽.
20) 기윤, 흠정사고전서총목 , 권174.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43
(3) 장서(藏書) 와 속장서(續藏書)
장서 68권은 전국시대에서 원대에 이르는 역사 인물의 비평서이고 속
장서 27권은 명대 인물의 평론집이다.
장서 는 이지의 저서 중 가장 방대하고 역사서의 형식을 갖추었으며 그
의 내용이 가장 격렬하여 뒷날 박해를 받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저서이다.
이 책에는 그의 가까운 친구들인 초횡, 유동성, 매국정, 축세록, 경정향 등의
서문이 모두 들어 있고, 그의 「세기열전총목전론(世紀列傳總目前論)」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가진 글이다.
장서 는 「세기」 9권과 「열전」 59권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열전」에 큰 비
중을 두고 있다. 그런데 장서 , 속장서 두 저서의 서술은 주제별 또는 역
사사실에 대한 집중적 기술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술 및 인물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의 「열전」은 대신(大臣), 명신(名臣), 유신(儒臣), 무신(武臣), 적신(賊
臣), 친신(親臣), 근신(近臣), 외신(外臣)으로 나뉘고 이 아래 다시 각 문
(門)으로 세분되어 있는데 이 분류가 당시의 통념에 어긋나는 예가 많았다.
속장서 는 개국제신(開國諸臣), 개국명신(開國名臣), 개국공신(開國功臣),
손국공신(遜國功臣), 정난공신(靖難功臣), 내각보신(內閣輔臣), 훈봉명신(勳
封名臣), 경제명신(經濟名臣), 청정명신(淸正名臣), 이학명신(理學名臣), 충
절명신(忠節名臣), 효의명신(孝義名臣), 문학명신(文學名臣), 군현명신(群縣
名臣) 등으로 분류했으니 이 두 저서에서 대신열전(大臣列傳)을 다루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지의 역사평론집은 모두 그에 의해서 쓰여진 것과 전통적 사서
에서 뽑거나 요약하여 서술한 것으로, 나름대로 중요 인물에 대한 해석과 평
가를 덧붙였다. 평가나 해석이 많은 경우 종래의 일반적인 평가를 뒤집거나
개정했다는데 그 의의가 크며, 이것이 바로 전통적 사관에 반역한 것으로 간
144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주되어 비난과 박해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후 명대는 물론 다음
의 청대에 이르러서는 그의 저서가 모두 금서목록에 편입되었으며 속장서
도 “털끝만큼도 의례(義例)가 없으며 총체적으로 취할 바가 하나도 없다”21)
고 비난받게 되었다.
3. 서술 체제-목록학(目錄學)
한 시대의 성격이나 또는 역사가의 사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날에도 시대의 구분문제나 그의 서술체제, 특히 목록의 세분이나 주제의 선
정에 커다란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도 이지의 역사서인 장서 와 속장서 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보다 접근해 보려 한다.
우선 시대구분을 보면 두 책 모두에서 권 1, 2, 3 … 으로 나누고 장서
의 세기에서는 왕조중심으로 다루지 않고 「구국병쟁(九國兵爭)」, 「혼일제후
(混一諸候)」, 「필부수창(匹夫首創)」, 「영웅초창(英雄草創)」, 「신성개기(神聖
開基)」, 「영웅계창(英雄繼創)」, 「남북병쟁(南北兵爭)」, 「화이일통(華夷一統)」
등으로 그 시대의 특징적 성격을 제목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세기열전의 총목이 근 60페이지나 되고 속장서 에서도 근 30페이지가 되
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위에서 몇 개의 주제를 보았거니와 전국의 7국인 진, 초, 연, 제, 한, 위, 조
와 동주, 서주를 합쳐 「구국병쟁」이라 하고, 진시황을 “千古의 一帝”라 하여 혼
일제후(混一諸候)로 진승(陳勝)을 필부수창(匹夫首創), 항우(項羽)를 영웅초창
(英雄草創)이라 하여 「세기」에 넣은 것은 대담하고 특색있는 시도이다.
세기열전총목에는 전론과 후론이 있고, 「世紀總論」을 비롯하여 「대신총론
21) 기윤, 「속장서 27권에 대한 평」 흠정사고전서총목 권50.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45
(大臣總論)」, 「용인대신론(容人大臣論)」, 「부국명신총론(富國名臣總論)」, 「덕
업유신전론(德業儒臣前論)」, 「덕업유신후론(德業儒臣後論)」, 「행업유신론(行
業儒臣論)」, 「무신총론(武臣總論)」, 「현장론(賢將論)」, 「외신총론(外臣總論)」,
「이은외신총론(吏隱外臣總論)」 등의 총론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열전의 인물로서 「맹가론(孟軻論)」, 「굴원론(屈原論)」, 「한신론(韓信
論)」, 「사마천론(司馬遷論)」, 「남조론(南朝論)」, 「이적론(李勣論)」, 「풍도론(馮
道論)」 등의 중요한 인물에 대한 그의 독특한 견해가 잘 표현되고 있다. 따
라서 이 부분들은 목록의 독자적인 분류와 함께 그의 사관을 엿볼 수 있는
값있고 중요한 부분이다.
열전의 인물서술의 끝에는 역사평가(史贊)가 있는데 「이온릉이 말하기를
(李溫陵曰)」, 「이온릉장자가 말하기를(李溫陵長子曰)」, 「이탁오노인이 말하기
를(李卓老曰)」, 「탁오선생이 말하기를(卓吾子曰)」, 「탁오가 말하기를(卓吾曰)」,
「이생이 말하기를(李生曰)」, 「내가 말하기를(余謂)」, 「내 일찍이 이를 말해(愚
嘗論之)」, 「그러므로 내가 이를 말하기를 (我故謂)」 등으로 시작된다.
어쨌든 이러한 이지의 목차분류는 역사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목록학
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믿는다.
목록학은 원래 한대 유향(劉向)-유흠(劉歆) 부자로부터 그 전통을 가지
며 송대의 숭문총목(崇文總目) 이 나온 이래 계속 발전되어 온 학문이다.22)
초횡의 국사역적지(國史經籍志) 는 명대의 목록학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나
이또 도라지로(內藤虎次郞)는 이 저서가 사고전서 에서 부실하다고 공격을
받지만, 사고제요(四庫提要) 야말로 송대의 숭문총서 및 이 국사경적지
를 함께 그 본으로 했다23)고 주장한다.
초횡은 바로 이지의 가장 친근한 생활과 학문의 벗이었고, 또한 이지의 거
의 모든 저서에 서문을 썼고, 그를 성인으로 숭배하였다.
특히 이지가 그의 초씨유림 과 세설신어 를 합쳐 초담집 을 쓴 것이
22) 內藤虎次郞, 支那史學史, 306~307쪽.
23) 內藤虎次郞, 支那史學史,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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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24) 수없이 자주 만나고 서신을 교환한 것 등을 고려하면 초횡의 목록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역사관
1) 역사에 임하는 태도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를 서술하며 평가하는 역사가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
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지의 사서를 읽을 때 느끼는 것은 그의 근면성과 역사를 쓸 때
의 정밀함이다. 그가 다룬 인물은 초담집 에서 2천여 명, 장서 에서 1,100
여 명, 속장서 에서 640여 명이니 그 밖의 분서 , 속분서 등 다른 저서
까지 합치면 실로 대단한 숫자가 될 것이다(물론 이들 중 서로 중복되는 것
도 있다). 따라서 그 많은 저서의 분량과 수많은 인명에서 우리는 그의 부지
런함을 엿볼 수 있다.
둘째로 그의 역사서술은 타협의 여지가 없이 매우 비장하고 격분된 어사
로 아주 명쾌하게 구사되고 있다. 그의 문장은 우리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며 또는 아픈 곳을 정확하게 콱 찔러주는 후련함이 있다.
“참된 영웅은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고 참으로 풍류롭고 유명한 사람(眞風
流名世者)은 속된 보잘것없는 세속의 선비(俗士)로 그려지며(반대로) 실로
이름이나 팔고 세상일을 제대로 처리할 줄도 모르는 사람은 훌륭한 옷과 관
을 쓰고 당당히 뽐내도록 있으니 이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25)라고 역
사의 그릇된 서술, 평가를 공격하면서 “예부터 지금까지 그 많은 잘못되어진
원통함을 누구와 더불어 사리를 따져 밝혀낼 것인가, 그러므로 역사를 읽을
24) 이지, 「우서」 초담집 , 4쪽, 주 9) 참조.
25) 이지, 「답초의원」 분서 권1, 8쪽.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47
때에는 백천 만인의 적과 대하는 것처럼 하겠다”26)는 것은 실로 오늘날에도
아주 정확하고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내 스스로 4 종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장서 로서 상․하 수
천 년의 시비를 맨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이를 감추어 두고자 한
것이다. 말하자면 산중에 감추어 두었다가 후세에 한나라의 자운, 양웅과 같
은 사람을 기다린다는 말이다”27)라 한데서 수많은 적과 대하듯 쓴 역사가
뒷날 子雲(揚雄 BC. 53~AD. 18)같은 대학자를 만나서 올바르게 평가되기
를 바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철학과 학문 또는 어떤 중요한 일을 성취하는 마음의 상태를 “소위
작자(作者)는 느낌이 있어(有感) 흥이 일어나고 뜻(志)이 자기 자신을 억누
를 수 없음(不容己)을 말한다. 혹은 정(情)이 (너무) 격해서 말(사)이 부드
러워 질 수 없음을 말한다”28)고 하여 작품을 쓰는 작가의 마음을 아주 인상
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셋째로 그가 구사하는 언어나 문장은 직선적이며 조소적이면서도 예리하다.
그에 대한 몇 개의 예를 보면 공자가 논어에서 “밥은 정갈한 것을 싫어하
지 않았으며 회는 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술은 많이 마시되 어지
러움에 이르지는 않았다(食不厭精, 膾不厭細 … 惟酒無量, 不及亂)”이라 한
데 대해서 “큰 성인이여! 큰 성인이여!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두 대중 일반과
똑같구먼”29)이라고 비꼬았다. 공자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이 암흑이었을 것이
라는 송대 유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하늘이 공자를 내지 않았다면 예부터
오늘날까지 그 오랜 시간이 그저 긴 밤이었을 뿐이란 말인가(天不生仲尼, 萬
古長夜)”30)라고 한 것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6) 이지, 「與焦弱侯」 속분서 권1, 41쪽.
27) 이지, 「자서」 분서 , 1쪽, “自有書四種 一曰藏書 上下數千年是非 未易肉眼
也 故欲藏之 言當藏於山中以後世子雲也”
28) 이지, 「사마담, 사마천」 장서 권48, 692쪽.
29) 이지, ‘大聖人! 大聖人! 其余都與大衆一般’, 「논어의 鄕黨편」 사서평 , 90쪽.
30) 이지, 「贊劉諧」 분서 권3,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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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가전반에 대한 비판에서도 “보잘 것 없는 유자들은 무식하고, 저속
한 유자들은 알맹이가 없으며, 엉성한 유자들은 죽지 않아도 냄새가 나고,
유명하다는 유자들은 절개와 이름을 위해 죽어버렸다”31)고 하여 유가의 실
속없음을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한편 당대의 측천무후가 “남편 고종보다는 열 배나 낫고, 아들 중종보다는
일만 배나 낫다(勝高宗十倍, 中宗萬倍)”32)고 격찬하였으며 송대 사마광(司馬
光, 1019~1086)이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을 비판한 것에 대하여 “그것
은 왕안석의 턱 한 번 움직이는 것만도 못하다(不足以動安石之一頷)”33)이란
표현들은 극히 통속적인 표현을 통해 상대의 허점을 기막히게 찌르고 있으
니 그의 문장은 당시 독자들에게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
분하였다.
그러한 문체상의 문제뿐 아니라 그의 학문적이고 도학적인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공격은 체면과 점잖음을 유지해야 하는 지식인들을 실제 이상으로
격분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이지는 뒷날 5‧4운동 때(1919) 중
국전통에 대해 예리하고 조소적으로 비판했던 노신(魯迅, 1881~1936)의 선
구자라고도 불린다.
넷째로 역사의 서술이나 평가에 사가 자신의 독자성을 매우 중히 여겼다.
따라서 공자의 춘추 를 그가 높이 평가한 것도 공자는 “일찍이 옛 성인을
是非(의 표준으)로 한 적이 없었다(未嘗案古聖人以爲是非也)”34)는 독자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유교적 전통사가들이 낡은 옛말을 모방하거나 지난날의 자취를
따라가기만 하는 것을 비난하여 그의 역사인물비평서인 장서 의 독자들에
게 “공자의 정해진 본(本)으로 상과 벌을 행하지만 않으면 좋겠다”35)고 전
31) 이지, 「與焦漪園太史」 속분서 , 권1, 28쪽, “鄙儒無識 俗儒無實 迂儒未死而
臭 名儒死節殉名”
32) 이지, 「唐太宗才人武氏」 장서 권63, 1050쪽.
33) 이지, 「사마광」 장서 권34, 587쪽.
34) 朱維之, 「李卓吾與新文學」 福建文化 제3권 제18기, 1935.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49
통적 역사평가로부터의 해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수대의 왕통을 비판하여
“남의 발자취나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린 아이들일 것이니, 반드시 앞선
사람들로부터 힘입어서만이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들로 대인(大人)의 일이
못된다”36)고 하여 전통적 형식 및 선입관에 따르는 것을 배격하였다.
물론 이 경우에 있어서 역사관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합리적인 배합이 어
느 정도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역사관의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가 제기된
다. 그러나 그 문제는 여기서 보다 깊이 접근하지 않고, 이지의 형식과 전통
및 선입관을 벗어나서 자기 나름대로 역사가가 역사를 위한 작업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을 특히 중요시 하고자 한다.
2) 육경이 모두 역사라는 학설(六經皆史說)
이 학설은 간단히 말해서 육경이 모두 역사(서)가 된다는 것으로 다시 말
하면 경(전)은 역사(서)이며, 역사는 곧 경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육경개사설’은 이미 맹자이래 계속 논의되어 왔으니 수의 왕통
(王通), 북송의 구양수(毆陽修, 1007~1072), 명대의 송염(宋濂, 1310~1381),
왕양명(1472~1529) 등을 거쳐 청대의 장학성(章學誠, 1738~1801)에 이르러
“특히 그 뜻을 천(명)하여 더욱 정(밀)해졌다”37)고 김육불(金毓黻)은 그의
중국사학사 에서 주장하고 있다. 즉 그는 “육경은 모두 사이다. (따라서)
옛날 사람들은 사(史)를 떠나서 이(理)를 말한 적은 없으니, 육경은 모두 선
왕의 정치적 법전(政典)이다”38)라고 말한다.
이 ‘육경개사설’은 경전을 중시하는 학자들로부터 오해와 반감을 초래하는
35) 이지, 「세기열전총목전론」 장서 권1, 1쪽.
36) 이지, 「王通」 장서 권32, 526쪽.
37) 김육불, 「중국사학사」, 23쪽.
38) 위와 같음. 장학성의 ‘육경개사설’에 대해서는 서강대학교의 석사논문으로
전용만의 「장학성의 역사관에 대한 일고-‘육경개사설’과 관련하여-」(1982)가
있다.
150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경우가 흔히 있다. 왜냐하면 그들 경학자들은 “경(經)”은 모든 저술보다 높
은 단계에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사(史)”로 보는 것은 어딘가 경의 권위를
낮추고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인이 세운 말씀(立言)을 후세의 문인
들의 책인 “사(史)”와 같은 위치에 놓는데 불만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지의 저서인 분서 속에서도 이미 ‘육경개사’에 대한 주장이 보
인다. 그의 전문을 살펴보면
“경(전)과 (역)사는 (본래) 같은 것(一物)이다. 역사(史)이면서 경건스러움
이 없은 즉 (이는) 거칠은 사(穢史)가 되니 어찌 그것으로서 경계의 거울(戒
鑑)을 삼을 것인가? (반대로) 경(전)이면서 (역)사성을 갖지 않는다면 단순한
이야기(白話)가 될 뿐이니 어찌 사실을 빛내겠는가? 춘추 는 하나의 경서이면
서 춘추란 한 시대의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시경 , 서경 은 2제(二帝 ; 당
요, 우순) 3왕(三王; 하의 우왕, 은의 탕왕, 주의 문왕) 이래의 역사(서)이다.
그러므로 역경 도 역시 경서로서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역
사가 출발해온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도의 올바른 道됨은 여러 번 바뀌어 변
화와 바뀜(變易)이 비상하므로, 반드시 하나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육경이 모두 역사라고 해도 가할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39)
라고 말하고 있다.
경전과 역사가 서로 표리를 이룬다는 이지의 ‘육경개사설’에 의하면 역사
가 경계의 거울(戒鑑)이 되는 의미를 갖지 못하면 진정한 역사는 될 수 없
으며, 반대로 계감만 강하고 사실이 없으면 진정한 경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모든 경서는 모든 시대의 역사이며 다른 시대의
서적들(典籍)이 모두 마땅히 역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지의 ‘육경개사설’의 이해를 위해서 청대의 장학성의 관점을 조
금 비교해보면 그는, “나의 소견으로는 천지간에 가득 찬 모든 저작의 숲
(林)을 모두 사학으로 생각한다. 육경이란 특히 성인들이 이 여섯 종류(六
種)의 역사(史)로서 훈계를 하려 했을 뿐이니 자(子), 집(集), 제가(諸家)는
39) 이지, 「經史相爲表裏」 분서 , 214쪽.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51
그의 원천이 모두 역사에서 나온다”40)라고 하고 있다.
장학성이 말한 천지간에 꽉 찬 저작의 숲이 모두 역사라는 것은 위에서
본 이지의 관점과 비슷하다. 그에 의하면 거울(垂鑑)과 사실(事實)을 빛내는
목적은 사실(史實), 사평(史評), 사관(史觀)의 상호배합에 있으며 역사의 연
구가 완전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판단의 옳고 그름과 잘
잘못의 바뀜, 경, 사는 서로 호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에 대한 관념은 다음 글에서 더욱 명쾌해진다.
“산중은 한적하고 벗이 없어 때때로 역사책을 펼쳐보면서 그 책 속의 인물
을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스스로의 쾌락을 얻었을 뿐 널리 배워 과거를 지향
하는(博學宏詞科)데 뜻을 둔 것은 아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 많은 원한
과 그릇됨을 누구와 더불어 밝혀낼 것인가! 그러므로 역사책을 읽을 때에는 실
로 백천만 인과 대적하는 것처럼 한다.”41)
역사를 읽는 것과 역사를 아는 것이 백천만 인과 대적하는 것처럼 어렵다
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태도는 왕조의 초기부터 문자옥(文字獄) 등
극심한 사상과 학문의 탄압으로 실록은 있어도 국사는 없고, 전통에만 귀의
하여 새로운 이론이 거의 없던 시대에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명대에는 또 야사(稗史) 등이 성행하고 잘못 쓰거나(曲筆), 불필요한 서
술, 옛일을 빌어 현재를 풍자하는(借古諷今) 수법이나 옳은 것 같으면서 옳
지 못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지는 육경개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
다. 즉 단편적 역사책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조영양(趙令揚)은 육경개사설이 이지에서 강조되었음에 주의하
고 “이 때문에 이지 혹은 장학성이 없이는 明淸의 사학연구는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없으며 또한 새로운 이론의 건립은 없었을 것이다”42)라고 높이 평
40) 김육불, 「논육경개사」 중국사학사 , 281쪽.
41) 앞의 주 25), 26) 참조.
42) 조영양, 「이지지사학」 명사논집 , 28쪽.
152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가한다. 즉 시대 및 전통적 형식에 거역하고, 또는 은밀하게 공개적이 아닌
모든 값있는 역사성의 서술을 중요시하는 것이 이지의 육경개사설로 나타나
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3) 순환사관(循環史觀)
역사순환관은 역사는 순환하면서 전진한다는 것으로 중국 또는 서양에서
옛날부터 자주 논의되었다.
중국에서 추연(鄒衍)은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천지가 갈라져 생겨난
이래 오덕(五德)이 바뀌어지고 시대의 통치는 그 때마다의 올바름을 가져
때에 맞게 적응해 왔다”43)고 하였고, 맹자 역시 “천하가 생겨난 지 오랫동안
나라가 한 번 잘 다스려지면 한 번은 혼란에 빠졌음”44)을 말하였다.
사기 의 「평준서(平準書)」에서도 “이로써 사물이 성하게 되면 쇠하여 지
고 때가 극에 이르면 다시 바뀌어져 한 번 질박하고 나면, 한 번은 다시 개
화 번영하여 문약해지고 처음과 끝이 항상 변화하였다”45)고 한 것이 발견된
다. 훨씬 뒤 송대의 주희도 “기운이 종래 한 번 성하고 또 한 번 쇠하였으며
한 번 쇠하면 또 한번 성했다. 무릇 한 번 잘 다스려지면 한 번은 혼란에 빠
지고, 한 번 혼란에 빠지면 또 한 번은 잘 다스려진다”46)고 하였다.
위에서 우리는 중국의 순환사관에서 오덕(행)의 순환, 일치일란(一治一亂),
성쇠(盛衰)의 순환, 일질일문(一質一文)의 순환이 자주 논의되었음을 보았다.
이것은 서양의 근대문명비판사가인 독일의 O. Spengler가 그의 유명한 저
서인 서구의 몰락(Untergang des Abendlandes) 에서 문명의 유기체적인 사
43) 풍우란 저, 정인재 역, 중국철학사 , 191쪽, “天地剖判以來 五德轉移 治各
有宜 而符應若玆”
44) 맹자 , 「등문공」 하,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
45) 사마천, 「평준서」 사기 , “是以物盛則衰 時極而轉 一質一文 終始之變也”
46) 주희, 語類 권1, “氣運從來一盛了又一衰 一衰了又一盛 蓋一治必又一亂 一
亂必又一治”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53
관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나, A. J. Toynbee 역시 그의 역사의 한 연구(A
Study of History) 에서 비슷한 이론을 다루고 있는 것들과도 흥미있는 대조
가 된다.47)
이지는 그의 장서 중 「세기총론」에서 “한 번 잘 다스려지면 한 번 혼란
에 빠지는 것은 순환한다(一治一亂若循環)”48)고 전제하고 한 번 배부르게
되면 족하여 어려울 때를 생각 못하니 이는 극질(極質), 극야(極野), 무문
(無文)의 시기로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단 편안하고 배부르게 되면 극히 번화한 문(文弱)에
이르지 않을 수 없으니 “그의 시작에는 간(소)하나 결국은 반드시 커(번잡
해)지니, 비록 신성(한 군주)이 위에 있더라도 질(質)과 야(野)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이 극하게 되면 천하의 난이 다시 일어나며 영웅
들도 함께 (도처에서) 생겨나 서로 싸우게 된다”49)고 하고 있다.
그러한 문, 질 및 통치와 혼란의 본질에 대해서 “무릇 이 세상의 인생에
오직 질(質)과 문(文)의 양자만 있을 뿐이고, 이 양자는 원래 통치와 혼란에
서 생겨난다. 즉 혼란의 끝은 통치의 시작이며 … 통치의 극은 혼란의 (징)
조이다”50)고 해석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릇 진(秦) 왕조의 때는 그의 문이 극에 이르렀다.
고로 천하는 드디어 크게 어지러워져 한(漢) 왕조가 일어났다”51)고 해석한다.
이지에 의하면 역사의 순환은 통치, 혼란과 문, 질에 연결되며 이러한 순
환은 특히 숙명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 있어도 그러
한 흐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지의 역사관은 결국 인간의 질적 생활을 매우 중요시한다. 이 점
47) G. E. 케인즈, 동양과 서양의 만남(Philosophies of History) (이성기 역)에
서 이 문제들이 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48) 이지, 「세기총론」 장서 권1, 2쪽.
49) 이지, 「세기총론」 장서 권1, 2쪽.
50) 이지, 「세기총론」 장서 권1, 2쪽.
51) 이지, 「세기총론」 장서 권1, 2쪽.
154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에 있어서 자연생활을 위주로 하는 도교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물론 이것
은 실제와 어긋난 사상이란 비난도 있지만 잘 다스려지면 혼란이 없다(有治
無亂)고 주장하고, 이를 일으키고 해를 제거하며 민중의 군대와 식량 문제
(兵食)의 해결을 그의 이상으로 하고 있으니 그의 진보적 성격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역사순환론은 그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고 전통적인 것이다.
그 나름대로 해석하고 정리해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훌륭한
하나의 문명비판론이라 하겠으며 변화를 중시하는 중국철학의 전통이란 테
두리에서도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4) 시비의 표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논의(是非無定論)
종교나 사회의 인간생활에서 선악의 기준은 언제나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객관성이 자주 분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사실이나 역사상의 인물에 대한 시비의 평가문제도 시대
가 바뀜에 따라 변화되며 새로운 시대적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므로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이지의 역사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사람들이 찬반으로 엇갈려 가장
많은 논의를 하는 것이 바로 시비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하나에 고착된 시비의 표준을 반대하는데 그 특징과 중요성이 있다. 즉 시
비(是非)는 정해지지 않았다(無定)는 태도의 견지이다.
이러한 이지의 역사관은 주로 그의 주저인 장서 속의 많은 곳에서 나타
나는데 분서 속에 들어 있는 서문인 「자서(自序)」에는 “스스로 네 종류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장서로서 상하 수천 년의 시비를 맨 눈으로 쉽게 볼 수
없다”52)라던가 “최근에 오면서 세 종류의 책이 있는데 오직 이 한 권의 책
52) 이지, 「자서」 분서 권1, 1쪽, “自有書四種 : 一曰藏書 上下數千年是非 未
易肉眼視也”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55
만이 천 백년의 시비와 관계된 것이다”53)고 한데서 그러한 역사시비를 바로
잡기 위해 장서 를 저술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잘 알려진 그의 「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에서 “사람의 시비표준은 처음부
터 정해진 바탕이 없으며 사람의 다른 사람을 시비하는 것 또한 역시 정해
진 논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54)이란 대명제를 제기하고, “내 이탁오 일인
의 시비라해도 좋고 내가 (지금까지)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한 것을 다시
틀리다고 해도 좋다”55)고 시비평가에 있어서 자유로운 입장을 견지하고 또
한 매우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는 “후삼대(後三代)인 한, 당, 송의 중간 천백여년에는 시비가 없
으니 그 까닭은 모두 공자의 시비로서 시비를 삼았기 때문”56)이라고 단정한
다. “시비(표준)에 대한 (분)쟁은 해나 때와 같이 바뀌며(如歲時焉)이며 주
야로 경질되어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57)고 주장하고 이 전론의 결론처럼
독자들이 “다만 공자의 정본으로서 상벌을 행하지만 않으면 좋겠다”58)고 하
여 전통적인 시비평가의 묵묵히 지키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비판에 있어서 우상숭배를 반대함으로써 공자가 모든 시대의
영원한 스승의 모범(萬世師表)으로 여겨지는 풍조를 배격하고 종래의 교과
서처럼 굳어진 정설들을 자주 부정하고 있다.
이지는 공자의 학설을 성공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맹자에 대해서도 “일정한
학설만을 고집하고 그러한 죽은(생명력 없는) 本으로써 천하의 후세에 통용되
게 하려면, 이는 하나에의 집착이며 이처럼 하나에 집착함(執一)은 도(道)를
해친다”59)고 비난하며 하나의 정설만을 고집하는 시비평가를 배격한다.
53) 이지, 「답초의원」 분서 권1, 7쪽, “年來有書三種 惟此一種繫千百年是非”
54) 이지, 「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 장서 , 1쪽, “人之是非 初無定質 人之是非人
也亦無定論”
55) 이지, 「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 장서 , 1쪽.
56) 이지, 「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 장서 , 1쪽.
57) 이지, 「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 장서 , 1쪽.
58) 이지, 「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 장서 , 1쪽.
59) 이지, 「孟軻」 장서 권32,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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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대의 역사가 반고가 사마천 부자를 공격한 것을 변호하여 “(사마)
천이 피폐하여 지저분(殘陋) 하지 않고, 가벼이 믿지 않고 성인으로부터 어
긋나지 않았다면 어찌 족히 (사마)천으로써 (위대함이) 거론되겠는가? 그런
즉 위대한 역사는 실로 그에게서 기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마천의 뛰어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춘추 라는 것도 공자의 사서이다. 따라서 그는 쓸
것은 쓰고 깎을 것은 깎아 처음부터 옛 성인을 시비의 표준으로 삼지 않았
다”60)고 명쾌하게 지적한다.
이지는 그의 친구였고 은인이기도 했던 경정향(耿定向)과 벌인 대논전에
서 위의 공자를 모방하여 따르는(法孔子) 문제는 더욱 치열해졌으니 “무릇
하늘이 한사람을 낼 때 스스로 그 한사람의 쓰임(用)이 있게 했으므로 공자
로부터 그것을 받은 후에 족함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만약 우리가 반드시
공자로부터 족함을 기다린다면 천고이전 공자가 없던 때에는 사람다운 사람
이 될 수 없었단 말인가?”61)
위에서 본 시비의 객관성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개인의 독자성을 중시하
는 주관을 지니는 모순을 내포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공자평가는 매우 흥
미로운 의미를 갖는다.
즉 그는 그의 저서 중 도처에서 공자와 공자시비를 정해진 본으로 삼는데
반대하면서도 공자가 춘추 를 쓴 방법이나 정신이야말로 그가 추구한 가장
바람직한 이상적 모범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공자 그 자체보다도 공자의 학설을 어설프게 그 겉껍데기
만 전하여 계승하는 시비표준을 반대한 합리적 객관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뜻한다.
60) 이지, 「사마담, 사마천」 장서 권40.
61) 이지, 「답경중승」 분서 권1, 16쪽.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57
5) 역사인물론
역사가의 역사평가는 역사적 사실 또는 역사 자체에 대한 평가와 함께 역
사를 이끌어 온 인간에 대한 평가가 항상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 서양의
고대사에 있어서 플루타르크 영웅전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
시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동양에 있어서 역사서술이 특히 전기 면에서 전기가 두드러지게 많고 중
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마천의 사기 에서부터 70권이나 되는
전기와 그로 해서 붙여진 동양의 역사서적을 ‘기전체(紀傳体)’라고 하는 것
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탁오가 그의 장서 나 속장서 속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또 노력을 집
중시킨 것도 바로 역사 속에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즉 대부분 인물들의 전기
였고 그에 대한 스스로의 직접평가 내지 암시적인 인물평이었던 것이다. 그
의 사상이 독특하고 독창적이었던 것처럼 그의 역사인물론은 당시인들의 상
식을 초월하는 예리하고 또 독특했으며 많은 경우 그 사회와 주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제자겸 친구였던 유동성(劉東星, 1538~1601)은 장서 속의 한 서문
에서 “선생은 종일 할 일 없는 듯 천고의 인물들과 벗하였다”고 말하였다.
“인물평에 있어서 그는 실로 옛날의 공적인 평가와 같지 않게 인물들을 평
가했다. … 내 이 책을 얻어 읽어보니 그것은 천고의 인물들을 모두 포함하
면서 많은 사람들의 형태를 감별했다. 따라서 옛날부터의 철인, 제후, 큰 인
물들은 물론 유명한 유학자, 대장들이 그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일의 공적이 아름답게 빛나고, 찬탈하거나 반역하여 도덕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드러내고 예술과 풍자, 간언에 이르기까지 실리지 않은 것이 없었
다. 따라서 중간의 통치 및 혼란과 흥륭과 패배, 현인과 간인, 정절을 지킨
사람과 그를 팽개친 사람들이 그의 가슴속으로부터 점철되어 나온 기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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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품계를 정하고, 구별하며 사실에 의거해 곧바로 쓰여졌으니 참으로 그
의 본심대로 평가를 단행하여 남의 판단기준을 따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
다”62)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지의 인물평에 대해 유동성이 아주
잘 정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1) 치양지(致良知)를 따랐던 양명학의 태주학파
그가 추앙하고 높이 평가하며 따르던 사람들은 우선 학문적으로 그들로부
터 영향을 받고 그 자신이 그에 속해 있는 양명학의 급진적 좌파인 태주학
파(泰州學派)의 인물들이다. 즉 태주학파의 시조로 불리우는 심제 왕간(王
艮)을 비롯하여 왕기는 물론 장거정과 불화하여 곤장을 맞아 죽은 하심은,
독특한 행위로 유명한 안산농등이 모두 그가 숭배한 인물들이다.
특히 하심은의 경우 이탁오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생명을 애석히 여기
지 않았으며 공자의 법을 겉껍데기만 본받으려 하지 않았고 천하를 한 집으
로 하며 어진 사람들을 그의 명으로 삼는 것을 배우려 한 사람들이다. 따라
서 이러한 사람들은 자아를 존중하며 지나간 사람들에 의지하여 그의 발자
취만을 따르려 하지 않아 공자같은 성인이라도 그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스스로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실행한 사람들이다”63)라고 하였다.
(2) 사회의 전통을 따르지 않으면서 목표를 추구하는 광견(狂狷)의 인물
한편 이탁오가 매우 존경한 사람은 이른바 미친 듯이 맡은 일에 열중하는
광자와 확고한 신념으로 맡은 일을 추진하는 견자이다.
62) 신용철, 「李卓吾의 歷史人物批評-明代 史評에의 한 공헌」 역사와 인간의
대응 , 고병익 선생 회갑기념논총, 서울, 한울출판사, 1984.
63) 신용철, 「李卓吾의 歷史人物批評-明代 史評에의 한 공헌」 역사와 인간의
대응 , 고병익 선생 회갑기념논총, 서울, 한울출판사, 1984.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59
미친 듯이 자기 일에 열중하는 사람(狂者)이란 지난날의 인습(故襲)을 따르
지 않고, 지난 자취를 밟지 않는 식견이 높은 사람이다. 그는 이른바 봉황(鳳凰)
처럼 천길의 위(千仞之上)를 날아 아무 새도 그를 당할 수 없으나 다른 모든 새
들도 자기와 같은 물류(物類)란 것을 믿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그의 견식이
비록 높지만 부실하고, 부실한 즉 중정(中正)의 道64)를 얻을 수 없게 된다. 狷
(者)이란 하나의 불의를 행하지 않으면서도 천하를 얻은 자이다. 그는 백이(伯
夷), 숙제(叔齊)처럼 그의 정해진 윤리를 지켜 소위 산에 있는 호랑이나 표범
(虎豹)처럼 여러 짐승(百獸)가 다 두려워하여 어느 짐승도 감히 그를 침해하지
못하나 다른 짐승들도 같은 부류임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그의 지킬 바
를 정하고 있지만 허락하지 않으니 불허하면 中正의 道를 얻을 수 없게 된다.65)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광(狂)은 뜻이 높고 행함에 거리낌이 없
는 사람이며, 狷이란 知는 설사 못미처도 지킴(守)에는 남음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중도의 사람(聖人)을 얻을 수 있으면 다행이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
우 그 다음 단계로 광․견(狂․狷)의 인물을 얻어 그의 뜻(志)과 절개(節)
을 통해 격려하고 억제도 함으로서 道에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전형적인 광견관(狂狷觀)은
내 이를 극단적으로 말하면 보통사람의 삶은 음(陰)을 지(負)하고 양(陽)을
안으(抱)하니 양이 가볍고 맑으면 곧바로 올라가 이를 얻은 즉 광(狂)이다. 음
이 엉겨 굳어져(凝固)하여 뭉치고 이를 얻은 즉 견(狷)이 된다. … 지금 이를
관찰하건대 성인은 중행의 광(狂)․견(狷)이며, 군자는 크면서도 다 이룩되지
못한 성인이다. 선인(善人)이란 광사(狂士)의 빛나는 호칭(徽稱)이며 변함이
없는 사람(恒者)이란 견자(狷者)의 별명이다.66)
즉 자기 일에 대해 확신을 갖고 두려움 없이 몰두하여 추진하는 그러한 류
64) 中行은 論語의 「子路」에 보이는데 原文은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
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의 注에는 “狂者志
極而行不掩狷者知未及而守有餘”라고 설명이 되어있다. 이로 보아서 中道之人
이 最上이고 그를 못얻었을 때 狂人, 그리고 狷人을 擇하게 된다고 한다.
65) 이지, 「與耿司寇告別」 분서 권1, 27쪽.
66) 이지, 「德業儒臣, 孟軻」 장서 권32, 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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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간들을 그는 존경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와 관계되면서도 이탁오는 또
“이른바 어떤 작품을 쓰거나 일을 한다는 사람은 그의 흥(興)이 감(感)에서
일어나고 뜻이 자기 자신을 억누를 수 없거나(不容己) 혹은 정(情)이 너무 격
(激)하여 말이 완화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고 했다.
이 역시 위의 그가 주장한 광견관(狂猏觀)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이는 바
로 양명학의 중심사상인 양지의 테두리 안에서 순진하여 가식이 없는 인간
성으로 자기 일에 매진하는 인간인 것이다.
(3) 동심을 잃지 않은 사람
그런데 이러한 인간은 바로 그가 주장한 유명한 동심설(童心說) 속에서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무릇 동심이란 진심인 것이다. 만약 동심을 옳지 않은 것으로 하면 이것은
참된 마음(眞心)을 옳지 않은 것으로 하는 셈이 된다. 무릇 동심이란 가식이
전혀 없고 순진한 최초의 한 마음의 본심이다.
만약 동심을 잃어버리면 이는 곧 진심을 잃는 것이니, 진심을 잃게되면 이는
곧 참사람(眞人)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67)
고 하여 동심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사실 이 동심은 이탁오의 가장 핵심적
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전 사상을 파악하려는 사람들
도 있다. 그는 이어서
“이미 동심이 장애를 받으니 이로부터 언어가 나와도 그 언어는 충심을 통
해서 나올 수 없으며 정치적인 업무를 수행해도 그 정사는 뿌리가 없으며 문사
67) 이지, 「童心說」 분서 권3, 98쪽.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61
(文辭)를 통해 저술하되 그 문사가 진실로 통달할 수가 없다. 그 문장 안에 아
름다움을 포함하지 않으면 독실하게 그의 빛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한 구
절에 덕 있는 말을 얻으려 해도 결국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
면 동심이 이미 장애를 받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온 것 곧 보고들
은 것이 도리로서 우리 마음 안에 자리를 잡아 버렸기 때문이다.”68)
라고 하여 동심에 바탕을 두지 않는 우리 인간의 여러 행위들 즉 공자학파
에서 강조하는 언어(言語)와 문학(文學), 정사(政事)들의 교과과목이나 행동
의 덕목들이 다 헛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도학을 부정하고(非道學)과 일의 공적을 쌓은 사람(事功)
도학이란 도의의 학문, 유가의 학문, 도가의 학문 등 여러 의미가 있으나
이 경우는 송의 이학(理學)을 가리킨다.
이지 자신은 도(道)나 도학(道學)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
러나 위에서 본 공자의 시비표준의 정통적 지위를 부정한 것처럼 특히 송대
이래 확립된 성리학의 형식화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그의 도학에 대한 태도는 ‘왕양명선생도학초부양명선생년보후어(王陽明先
生道學鈔附陽明先生年譜後語)’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강하고 굽히기 어려운
성격으로 도를 믿지 않고, 불교(禪釋)를 믿지 않으며, 도인을 만나면 미워하
고 승(僧)을 보고 미워하며, 도학선생(道學先生)을 보면 더욱 미워했다”69)고
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전통적 유가의 대표적 인물인 공자, 맹자, 동중서, 정이, 주희 등을
공격함은 물론 경전의 신성을 부정하여 감히 사서를 비평하는 사서평(史書
評) 을 저술하고,
68) 이탁오, 「동심설」 분서 권3, 98~99쪽.
69) 용조조, 이지연보 , 삼연서점, 1957,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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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경 , (논)어 , 맹(자) 은 사관(史官)이나 신자(臣子)등이 기리고 높인
(褒崇) 말(詞)이나 찬미한 언어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흐릿한 문도
(門徒)나, 제자들이 스승의 학설을 기억하되, 머리는 있으나 꼬리가 없으며, 뒷
부분은 얻었으나 앞부분은 잃어버려 그의 소견대로 책에 써놓은 것이다.
그런데 후손들은 (이런 점을) 살피지도 않고 그것은 바로 성인의 입에서 나
온 것이라 하여 경전으로 결정하니 그의 태반이 성인의 말이 아닌지 누가 알겠
는가? 그러니 어찌 이 (경전)으로써 영원히 지당한 논으로 여기겠는가? 그런즉
육경 , (논)어 , 맹(자) 은 곧 도학의 구실일 뿐이며 가식적인 사람들의 소
굴인 것이다.”70)
라 하여 유교 경전의 권위와 내용에 회의를 표명했다.
그는 도학의 중심 주제가 되는 태극(太極)도 공격하여 “무릇 초기에 사람
이 날 때 오직 음양의 이기(二氣)와 남녀의 두명(二命)만 있었지 처음에 소
위 ‘일(一)’과 ‘리(理)’란 없었는데 어찌 ‘태극’이 있었는가! 지금 보건대 소위
‘일(一)’이란 무엇이며, 소위 ‘리(理)’란 어디 있으며, 소위 ‘태극’이란 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71)라고 대담한 공격을 시도한다.
그는 송대의 지도적 유학자들에 대해서 “그들 주(돈이), 정(이), 장(재),
주(희)를 떠받드는 자들은 모두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면서도 마음은 고관에
있고 뜻은 거부에 있는데, 이미 고관, 거부가 된지라 도덕을 강하고 인의를
말하며 태연(자약)하고 있다”72)고 조소한다. 그의 조소는 유자들이 “겉(陽)
으로는 도학을 하는 척하면서 속(陰)으로는 부귀만을 추구하니 의복에는 유
자의 우아함이 있으나 행위는 개, 돼지와 같다”73)고 통속적인 표현을 통한
욕설에서 극에 이른다.
공자가 죽은 후 증자, 자사자를 거쳐 맹자에 의해 접해지고 맹자의 사후에
는 도(道)의 통(統)이 끊겼다가 송대에 와서야 주돈이에 의해 다시 이어져
정이, 주희 등이 크게 발전시켰다는 유가들의 도통론(道統論)74)에 대해서
70) 이지, 「童心說」 분서 권3, 99쪽.
71) 이지, 「부부편총론」 초담집 , 1쪽.
72) 이지, 「又與焦弱侯」 분서 권9, 49쪽.
73) 이지, 「삼교귀유설」 분서 권2, 76쪽.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63
“도가 사람에게 있음은 물이 땅에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람의 도를 구함
은 땅을 파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다. 그런즉 땅에 있지 않은 물은 없고, 도
를 싣지 않은 사람은 없다”75)라 하여 도통론을 부정하고 도통이 끊겼던 한,
당이 도통이 성했던 송대보다 훨씬 더 융성했음은 어찌된 일이냐고 비웃었
다. 이러한 도학자들을 통틀어 이지는 “유자(儒者)는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76)고 못박고 이에 반해서 역사상 도덕과 절의에 어긋나더라도 국가나
사회를 위해 공적을 이룩한 인물들을 높이 평가한다.
즉 그에 의하면 간단하고 쉬우면서도(簡易) 자연에 임하려는 사상은 민중
성을 갖게 되고 이러한 소박한 정서가 바로 도에 접근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곧 인간 윤리의 실질적인 이
치(物理)이니, 이 옷 입고 밥 먹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의) 윤리(倫物)란 없
다”77)라는 주장이 가능해지고, 당시 유교적 봉건 사회에 있어서 심한 차별대
우를 받았던 여성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그들의 능력과 평등을 인정하였
다. 따라서 그는 “사람에는 남녀가 있다고 하면 옳지만, 남자의 견식이 모두
뛰어나고(長) 여자의 견식이 모두 모자란다면(短) 어찌 옳을 것인가?”78)라
고 당시 여성의 능력을 경시하는 관습적인 견해를 공박한다.
그는 또 “정의와 밝은 도(正義明道)” 및 “일의 공적을 계산하지 않고 이
익을 꾀하지 않는다(不計功謀利)”고 주장한 전한 시대의 동중서(董仲舒)보
다는 북송의 어려운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신법(新法)을 실시한 송대의
왕안석(王安石)을 보다 높게 평가한다. 즉 그의 역사인물평가의 특징은 오륜
(五倫)보다는 실용(實用)과 일의 공적(事功)을 중시한 데 있다. 그가 진시황
이나 이사(李斯), 장의(張儀), 여불위(呂不韋) 등 지혜와 계략의 명신을 찬
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74) 「도학전서」 송사 권427.
75) 이지, 「덕업유신전론」 장서 권32, 517쪽.
76) 이지, 「세기열전총목전론」 장서 , 61쪽.
77) 이지, 「答鄧石陽」 분서 권1, 4쪽.
78) 이지, 「答以女人學道爲見短書」 분서 권2,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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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왕조의 12 군왕 및 이민족의 군주까지 섬겨 불충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오대(五代)의 풍도(馮道, 881~954)야말로 “맹자의 사직 ((社稷) 즉 국가는)
중요하고 군주는 덜 중요하다(輕)고 한 말을 믿으면, 그는 맹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고 찬양하는데서 그의 공적을 중요시하는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지의 생각에 의하면 풍도가 군왕에게 충성을 여러 차례 바꾸었지만, 전쟁
의 화로부터 민중의 고통을 면하게 해준 역사적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당의 명장 이적(李勣)에 대한 평가에서도 보이는데
“( 대학(大學) 에 나오는 유교의 중요한 덕목인)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
설로 천하에 해를 끼침”을 말하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殺身成仁)는 미
명으로 성인의 윤리적 가르침(名敎)만을 굳게 지키는(拘守) 어진 사람으로
서 (현실에) 적응할 줄 몰라” 당시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반대하다 희생
된 장손무기(長孫無忌 7세기 전반) 등 여러 대신을 비난하지만, 후환에 구애
받지 않고 대공을 세운 춘추 전국시대의 법가적 인물들인 관중(管仲), 상앙
(商鞅), 신불해(申不害), 한비자(韓非子), 소진(蘇秦), 장의(張儀), 오기(吳
起) 등을 크게 칭찬하고 있다.
그가 도학이나 오륜 또는 사회의 윤리를 비난하고 공격하므로 반윤리적,
반사회적이라는 정죄를 받게 되지만, 도나 윤리의 본원을 반대하는 것이 아
니고 그 당시에 통행하는 외형적이고 허위로 가득 찬 학문과 윤리를 배격했
을 뿐이다.
따라서 그로서는 보다 실제적이며 실용적인 보다 통속적인 수준에서의 새
롭고 참된 윤리를 생각하고 강조한 것이다. 이 점이 바로 그의 도학에 대한
반대나 일의 공적에 대한 높은 평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풍도는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최근(2002년 10월) KBS
의 대하사극인 「제국의 아침」에 그의 이름이 몇차례 간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즉 고려 광종때 과거제도 등 개혁을 건의한 오대의 후주인 쌍기(雙驥)
가 바로 풍도의 밑에서 봉사하던 관료였다고 하니 흥미롭다. 즉 이러한 경향
은 난세를 통일하는 송과 고려의 시대적 사조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65
5. 이지의 역사이론(史論)에 대한 비평
이지의 역사서술과 역사이론은 당시와 그 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관료적 성격을 띤 사가나 지식계층에 의하여 완전히 배격, 정죄되었다. 보는
견해에 따라서 많은 차이는 있겠지만, 관료적인 지식인만이 아니라 보수적이
거나 아니면 진보적 성격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서도 대부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생존시 같은 양명학의 태주학파(泰州學派)인 경정향의 비난을 받은
것은 앞에서도 보았거니와 1602년 장문달에 의한 탄핵문이 그의 대표적인 예
가 될 것이다. 당시의 황제도 그의 죄를 “세상과 백성을 속인 것(惑世誣民)”
으로 처리했다든지, 명말, 청초의 진보적 학자인 고염무(顧炎武, 1613~1681)
조차도 그의 일지록(日知錄) 에서 “옛날부터 소인으로서 거리낌없이 성인
을 반역한 자로 이지보다 더 심한 이는 없었다”79)고 한 것이나, 명사 에는
그의 열전이 들어 있지 않고 다만 「경정향전(耿定向傳)」에서 “공자와 맹자
를 낮추고 모욕했다(卑侮孔孟)”80)고 한 것은 좋은 예이다. 부유린(傅維麟,
?~1667)의 명서(明書) 에서도 “공자의 도(道)가 한 차례 큰 액운을 만났
다”81)고 있다. 특히 사고전서(四庫全書) 에서 “예부터 전해 오는 선과 악의
기준이 그 자리가 뒤바뀌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은 가장 혹독한 그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명말 청 초의 또 다른 위대한 진보적 사상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조차도 “근세의 이지, 종성과 같은 부류들(鍾惺之類)은 천하를 잘못되고 음
탕한 쪽(사음)으로 이끌어 한 여름에도 두터운 겨울옷(의관)과 같은 화를
79) 고염무, 「이지」 일지록 권68, 29쪽(四部備要).
80) 「경정향」 明史 열전 109.
81) 부유린, 明書 권160, 116쪽(百部叢書).
166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길렀다. 이 어찌 홍수보다 심하고 맹수보다 고통스럽지 않겠는가?”82) 또는
“근세에 천백년안(千百年眼) , 사회(史懷) , 사취(史取) 등의 여러(해로
운) 저서가 있는데 …. 이지의 장서 의 해가 가장 심하다”83)고 격렬히 비판
했다.
특히 근대의 저명한 문인 임서(林舒, 1892~1924)가 이지를 들어 당시 북
경대학교장 채원배(蔡元培, 1868~1940)에 보낸 공개서신에서 진독수(陳獨
秀) 등을 공격한 것84)을 보더라도 그에 대한 정죄가 청대에 금서목록에 편
입되어 5‧4운동 때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지의 생존시 그와 그의 저서를 알던 사람의 평을 좀 살펴보자.
그의 친구 초횡은 “나는 선생의 저서가 반드시 전해질 것으로 알며 오래되
면 학자들이 그의 저서에 익숙해져서 그를 모범과 기준(衡鑑)으로 할 것이
다”85)라하고 유동성(劉東星, 1538~1601)은 “내가 말하여 선생의 이 책은 천
백세가 지난 뒤에도 황제에게 학문을 강연하는 경연(經筵)의 교재로 채택
(進讀)되어 과거장에서도 그의 문장(詞)을 취하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
다”86)고 극찬하였다.
그의 다른 친구 매국정도 “그 당시 선비들이 … 옛 것만을 쫓아 성명의
학(性命之學 : 성리학, 유학)의 찌꺼기만을 떠들고 있었는데 오직 한사람 그
만이 그의 참된 뜻(趣)을 알고 논의하였다”87)고 평가한다. 그런데 명 말을
지나 청대에 와서는 그에 대한 평가는 전혀 불가능했고 5‧4 신문화 운동시
기에나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후 중국이나 일본, 서양에서 그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많이 이
82) 왕부지, 「서론」 독통감론 권말.
83) 왕부지, 「侯解」 독통감론 .
84) 「中共에 있어서 李贄像의 政治的 受容」 경희사학 제9․10합집, 1982,
199~216쪽.
85) 초횡, 「초서」 장서 , 1쪽.
86) 유동성, 「劉書」 장서 , 2쪽.
87) 매국정, 「梅書」 장서 , 3쪽.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67
루어졌다. 오택(吳澤)은 그를 ‘유교반도(儒敎叛徒)’88)라 했고 주겸지(朱謙之)
는 ‘16세기 중국 반봉건사상의 선구자(十六世紀中國反封建思想的先驅者)’89)
라 부르고 일본의 시마다 겐지(島田虔次)는 ‘유교의 반역자(儒敎の 叛逆者)’,90)
나이또 도라지로(內藤虎次郞)는 ‘고금에 그 예가 없었던 과격한 사상의 사학
이론(古今未曾有 の 過激思想の 史論)’91)이라 불렀다.
학위논문으로 이지를 다룬 Cheang Eng chew는 “역사학 분야의 비판력
(Critical power in the field of Histography)”라고 평하고 독일의 유명한 중
국학자 O.Franke는 “16세기 중국사상 투쟁사에 대한 한 공헌(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Chinesischen Geisteskampfe in 16, Jahrhundert)”92)이라
불렀다.
어쨌든 이지나 그의 전반적 사상과 함께 사론에 대한 평가는 특히 5‧4운동
이후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즉 변화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
통의 평가와 개혁 또는 파괴라는 어려운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인 논쟁들과
함께 그의 사론은 오늘날까지 대부분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난 1973~1974년에 중국에서의 공자와 림표를 비판하는(批林批孔) 운동
때 그가 법가사상가 내지 법가사관(法家史觀)으로 평가된 것은 그러한 시대
적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93)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또는 영향 때문에 중국 밖에서의 그의 사관에 대한
평가는 역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8) 吳澤, 儒敎叛徒李卓吾, 上海 華夏書店, 1949.
89) 朱謙之, 李贄-十六世紀中國反封建的先驅者, 武漢, 1957.
90) 島田敬虔, 「儒敎の 叛逆者, 李贄(李卓吾)」 朱子學と 陽明學, 東京, 1975.
91) 內藤虎次郞, 「李摯の 史論」 支那史學史, 東京, 1967.
92) O. Franke,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Chinesischen Geisteskanpfe im
16, Jahrhundert, 프러시아 학술원 No. 10, Berlin 1938.
93) 「中共에 있어서 李贄像의 政治的 受容」 경희사학 제90집, 1982, 209~215쪽.
168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6. 맺음말
이지는 사마천이나 반고처럼 역사가의 가정적 분위기에서 역사연구나 역
사서술 등을 접하며 성장하지 않았으며 많은 전통적 중국 사가들처럼 역사
를 서술하는 사가의 직에 종사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가 54세 때 마지막 관
직인 요안현의 지부를 사임하고 체포되어 자결할 때까지 20여 년 간 많은
사서를 두루 읽고 분량과 내용 면에서 놀라운 역사를 쓰고 평가했다. 따라서
그의 역사 서술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매우 자유로운 입장에서 이루어
졌다. 그리고 정치, 사회, 사상 등의 당시 전환기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비장하리만큼 정의감에 꽉 차 있었다. 즉 그에
게는 역사서술이 직업적인 사명감이 아닌 그가 좋아하던 “자기 자신을 억제
(용납) 할 수 없는 불용기(不容己)”로서 백천만인을 대적하는 내면적 정감
의 발현이였다.
그의 역사관 중 중요한 것은 서술체제로서의 목록설정 및 분류에도 나타
난다. 이미 고대부터 자주 논의되던 ‘육경개사설’도 이지에게서 ‘경전과 역사
는 서로 겉과 속을 이룬다(經史相爲表裏)’는 매우 명료한 개념을 형성한다.
한편 그는 역대 중국인들의 역사관과 같이 역사는 순환하는 것으로 보았
다. 역사발전과 순환의 요인을 질박한 상태의 질(質)과 번화 발전된 상태의
문(文)이 상호교체하면서 일치일란이 거듭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확실히 문
명론의 본질이며 근현대에 있어서 독일의 슈팽글러나 영국의 토인비 같은
문명비평가들의 논의와 비교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역사서술과 사상적 비판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은
결핍된 역사에의 새로운 이론과 내용을 보충해준다. 특히 그의 시비가 정해
지지 않았다는 논의(是非無定論)는 역사 및 역사 평가의 객관성 및 합리성
을 강조하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바로 그의 순환사관과도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69
관계되는데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변화가 매우 중요하며 숙명적인 성격이
있음을 주장한다.
어쨌든 그가 전통과 형식으로부터 탈피하여 독자적인 역사평가를 강조한
것은 매우 값있는 사관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평가나 가치표준의
한계라는 어려운 과제를 남겨 놓는다. 이것은 바로 양명학에서 중요시하는
情과 주관성의 문제가 객관적인 사회 윤리와 어떻게 공통분모를 찾아야 하
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의 도학에 대한 태도도 바로 여기에 연결되며 시
비의 표리양면을 이루고 있다.
그의 사관으로 또 다른 특징은 형식적 윤리보다는 역사적 공적에 대해 보
다 높은 찬양과 평가를 주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남녀들(匹夫匹婦)의 일생
생활(通常生活)과 동양유교문화권에서 외면적으로 크게 경시된 개인(私)과
개인 소유(私有)가 바로 도(道)이며 참된 사회윤리로 보는 그의 사관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선진 시대의 법가사상
가나 진시황의 통일사업, 진승(陳勝), 항우(項羽) 등의 활약, 탁문군(卓文君)
의 자유결혼, 풍도(馮道)의 12군왕에 대한 충성이 설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이 문제는 바로 우리 동양사회에 있어서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라는 대
립되는 견해 아래 사회 윤리적인 내면적 세계의 강조 즉 명교(名敎)를 중요
시하는 주자학적 전통에 대해 그는 매우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리를 도
모하지 않고 명교를 중요시하는 것보다 실제적 이익과 일의 공적을 쌓아 실
용적 사회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즉 명교 보다
는 일의 공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서술이나 평가는 내용이나 방법 면에서 매우 과격한 표현과 언
어를 통해 전개된다. 이 점이 보수적 지식인들로부터는 물론 당시 상당한 진
보적 사상가들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다. 특히 그는 역사인물
론에서 동심을 잃지 않고 옛날 사람들의 자취를 따르기를 거부하며 이상적
목표를 세워 생명을 아끼지 않은 강건하고 능력 있는 불굴(狂狷)의 인물들
을 높이 평가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명교(名敎)를 중시하여 통속적 사회윤리
170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에 얽매인 성리학자들을 비교하면서 그들이 이룩한 일의 공적을 찬양하는
공리적 입장을 취하였다.
끝으로 그의 역사관이 자리하는 사상적 바탕은 양명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양명학의 주제인 절대적인 지식에 도달하는 ‘치양지(致良知)’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에 근거하
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 속에 절대적으로 옳은 지선의 상태에서는 사회
윤리나 어떠한 비판에 상관없이 그의 본 마음을 밖으로 표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양지현성(良知現成)’이며 이에 따라 남의 흉내나 자취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안목에서 행동하고 생각하며 평가하는 것을 높이 찬
양하였고 그 자신 또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송대 이래 외부 세계와 교역이 활발하며 이슬람교 등 외래종교
를 받아들였던 천주에서 나서 성장함으로써 유교나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
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또 불교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이 모두 부처(人
人是佛 則心卽佛)’라는 말과 도교에서 모두가 하나의 도로 화합되는 ‘치일
(致一)의 도(道)’로서 평등의 기반 위에 그의 역사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송대를 거치면서 집대성되었던 유학의 성리학과 그의 전통에 의해 형식화
된 사회윤리에 대해 가차없는 공격을 가하였던 이탁오는 정통의 역사가가
아니면서도 역사 서술이나 역사비평에 있어서 새롭고 뚜렷한 성과를 이룩했
다. 한 시대와 전통에 대해 무모하리만큼 투쟁했던 그는 특히 비평가로서의
예리하고 독창적인 면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은 낡은 시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는 300여 년 후에
다가 올 5‧4 신문화운동 시기에 이 점에 있어서 크게 공헌했다고 할 것이다.
유교를 포함한 중국의 전통에 대해 서양문명의 충돌을 받으면서 ‘공자의
상점을 부시자(打孔家店)’94)고 외쳤던 진독수(陳獨秀)나 호적(胡適), 오우
(吳虞), 노신(魯迅) 등의 사상적 선구자로서 크게 숭배되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94) 胡適, 「吳虞文錄序文」 吳虞文錄, 상해, 아동도서관, 1921, 7쪽.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71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16세기 명 말의 이탁오야말로 자기의 시대를 훨씬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고 준비한 진보적 사상가이며 또 역사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172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Li Cho-wu(1527~1602)'s Historical
Perception
Shin, Yong-chul
Li Cho-wu(李卓吾), who lived in China in the late 16th century, is
widely known as anti Confucius(孔子) and Confucianism(儒敎).
He was a shrewd and profound thinker, a critique and a historian as
well. He did not write China's orthodox history books like other historians
such as Su-ma Chien(司馬遷, BC. 149~90) or Pan Ku(班固, 32~92).
However, in many of his books, such as Fenshu, 焚書)Zhansu(藏書),
Shikang pingyao(史綱評要), he wrote and criticized the history with his
personal view.
Many of his history books were attacked by other historians in his days
or the orthodox historians in the future, because the books were
unorthodox, and criticized Confucius. Ku Yen-wu(顧炎武, 1613~1681), a
great scholar in the end of Ming(明末) and the early time of Ching,
accused Li Cho-wu of disobeying the saint, and a famous historian of
Ching Dynasty, Chi-yuen(紀昀, 1724~1805) reprimanded him for reversing
the criteria for historical judgement.
Then how did Li Cho-wu write the history?
He asserted that writing history was very important, and that one had
16세기 이탁오(李卓吾)의 진보적 역사관 173
to have the struggling attitude just like when he/she was fighting with the
enemies. Also, he reproached the Confucianism, the crucial ethics of his
time, and the followers of the Confucianism, for lacking ability in ruling the
country.
He said that the six classical cannon(六經) could all be history. He
thought the sacred books of the Confucianism should be history as well,
and history books should also have some sacredness. Therefore, he claimed
that the sacred books and the history books are originally the same.
Next, he thought the history was circulating. In historical perception,
Chinese considered Five Elements(五行) as crucial, and the elements were
believed to be circulating(循環). Chinese people thought when a country
was ruled over successfully(治) once, it would be in a state of disorder(亂)
the next time, and that success and failure were believed to be repeating.
Also, Li thought that an individual's fate and the human history changed
just like the four seasons changed.
It shows that Li thought when a thing reached the extreme, it declined,
and when it had declined for too long, it started to prosper again. This
view is similar to the view of A. J. Toynbee in England, or O. Spengler in
Germany.
He said that the criteria for historical judgement was changeable as the
time went by. Therefore, he thought it was not right to consider
Confucius's old discipline as the one and only standard for people's lives.
In addition, commenting on the historical people, he respected people who
was original; he did not care for the people who just followed the track of
the others. He respected people who had a great achievement in their work,
not the ones who achieved social ethics.
Also, he respected people whose minds were innocent like children. With
174 韓國史學史學報 6 (2002. 9)
such an innocent mind(童心), one could have great achievements in every
field, he thought. So his historical perception praised the people who were
practical and had a lot of achievements in their lives.
After he died, his writings and ideas were burned and banned by the
rulers. But 400 years later, when Ching Dynasty(淸王朝) was collapsed and
the Republic of China(中華民國) succeeded the dynasty, when China was
trying to reform the old traditional chinese culture to build a new culture,
Li's ideology got into the spotlight as one of the good examples. In other
words, in the new society, it was highly estimated that he admired social
justice and political achievement through rational criticism, and that he
raised objections against the Confucianism.
His ideas influenced the New Cultural Movement of the 4th of May(五.四
新文化運動) in China, and the Meiji Reform(明治維新) in Japan, through
Yoshida Shoyin(吉田松陰). In fact, it put some influence on Huh Gyun(許
筠) in Korea, who planned an innovative society after the Invasion War of
Japan(壬辰倭亂). As a result, Huh Gyun wrote a novel in Korean,
Biography of Hong Kildong(洪吉童傳).
Li Cho-wu's historical writing and historical perception could not be
accepted in the 16th century, but it had great praise and interest from the
people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China. His ideas were rational,
individual, and radical. His historical perception can be considered
progressive in this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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