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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담비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07|조회수49 목록 댓글 1

제목이 좀 자극적이지만, 담비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내용은 아닌 듯 합니다. 단순히 기존의 전통적인 의미의 "실크로드"를 강조하고 나아가 됫분들은 위대하다는 내용인듯. 몇군데 작자의 오류가 보이긴 한데 전체 논지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눈여겨 볼 것은 고대 소그드인 내지 중앙아시아 출신 사람들의 동북아시아 활동입니다. 참고로 현재까지 소그드인의 활동에 대한 중국의 일부 연구성과를 보면 그 주요 거점은 낙양으로부터 한줄로 쭉 산서성 대동을 거쳐 요녕성 조양까지 이어집니다. 개인적으론 아직 물증이 없어서 그렇지 계속해서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고 봄니다. 참고문헌 및 주석에 대한 번역은 생략합니다.

 

 

 

 

 

《역사연구(歷史硏究)2001년 제3기,(중국사회과학잡지사)

 

 

“검은담비길”질의

——고대동북아시아와 세계문화 연계에 대한 사견

 

 

 

왕소보(王小甫)

(북경대학 중국고대사연구센터)

 

 

개요:

일부 러시아 학자는 근년 들어 이른바검은담비길을 구상하여 고대 북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루트를 가리키는데 이용했다. 아울러 이것은 전통적인 실크로드보다 더욱 안전하고 신뢰성이 있다고 여겼다. 본문에선 이 설법이 아직 사람을 수긍케 하기 어렵다고 본다. 고대 동북아는 세계문화와 연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는데, 이 네트워크의 기초와 근간은 중원을 센터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교통체계에 있었다. 넓디 넓고 풍요로운 중화대지(中華大地)는 고대 동북아시아를 세계문화에 연계시키는 최고의 루트를 제공했으며, 이는 오아시스 각국의 정치 관계의 변동에 따라 뒤바뀌곤 하는 법이 없었다.

 

주제어: 검은담비길[黑貂之路], 소그드상인[粟特商胡]. 동북아시아[東北亞], 실크로드(絲綢之路), 유라시아초원[歐亞草原]

 

 

90년대에 들어서자 전세계적으로 중대한 정치변화가 잇달아 일어났고, 때문에 세계는 다극화 발전 및 지역합작의 경향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세계화 문제를 낳아 동아시아 각국 학계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민족독립 실현을 위해 민족사(民族史) 구상에 힘써서 역사를 민족국가형성사(民族國家形成史)에 한정시키는상황은 크게 변화되었다. 현재, 우리는 민족국가의 한계를 돌파하여 지역으로부터 세계까지 넓은 시야에서 상관역사를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지역에서 세계역사에 이르는 발전적 각도에서 본국의 역사 변화를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새 역사조건하에 신세기 인류사회의 진보를 위한 유익한 참고자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는 근년 들어 러시아 학자가 제기한 이른바 검은담비길[黑貂之路, Sable-Road]”문제를 안건으로 삼아 중국이 동북아시아와 세계문화 네트워크 속에 차지하는 지위에 대해 대략 토론하였다. 착오가 있는 곳이 불가피 할 터인즉, 전문가는 아낌없이 바로잡아 주었으면 한다.

 

 

                            (1)

 

한반도[朝鮮半島] 남부를 거쳐 일본 큐슈[九州]지방으로 이어지는 교통노선은 예로부터 고대 대륙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지는 대동맥이라고 여겨졌다. 근년 들어 학술의 발전과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이 밖에도 한줄기 노선, 즉 중국동북-한반도북부-러시아 연해주(Primorye)의 광대한 지역과 일본열도 사이에 동해[日本海]을 매개로 한 교통도로가 역사학계에 더욱 큰 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담비길이란 일부 러시아학자가 이 교통로를 묘사한 말이다.

 

러시아학자가 지칭한 이른바 담비길의 주요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발해(渤海), 여진() 등의 동북아시아 고대민족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북아시아의 무역로인데, 전통적인 실크로드와는 별도의 것이다. 러시아 학자에 의하면 중국 동북의 담비가죽 무역은 일찍이 동한(東漢) 시대에 발전되어 나왔는데 당시에는 담비가죽을 읍루담비(挹婁貂)”라고 불렀다. 당대(唐代, 7-10세기)에 이르러 흑룡강(黑龍江)과 우수리강(烏蘇里江) 유역의 민족이 외국시장에 판매한 검은담비 모피는 크게 환영받았다. 이들 민족과 직접 교역을 벌렸던 소그드인(지금의 타지크인의 선조)이 전파한 읍루담비는 중앙아시아 이란계 종족 중에서 또 바뀌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의 무역노선을 개척한 소그드인은 이 길을 당시에 담비길이라 불렀을 수도 있다. 그때의 무역도로의 주된 쓰임새는 소그드인이 현지민족으로부터 극히 귀중한 검은담비 가죽 등의 상품을 획득한 뒤에 (중앙아시아) 본국으로 도로 가져가는 통로였다.

 

검은담비길의 대체적인 주요 루트는 다음과 같다.: 세미레체(Semirechye, , ‘일곱 하천의 지방으로 중앙아시아 발하슈호(Balkhash) 유역, 지금의 카자흐스탄 동남부 및 키르키즈스탄 북부)을 출발하여 알타이 산악지대, 남시베리아, 몽고 서부를 거쳐 셀렝가강(Selenga) 유역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오르혼강(Orhon) <필자가 셀렝가강 지류인 치코이(Chikoj)강이어야 할 것이다. 그 합류지점에 정확히 청대(淸代)의 매매성(買賣城, 지금의 Kyakhta 부근)이 자리한다.> 상류지대로 모이고, 오논강(Onon)이나 케루렌강(Kerulen) 상류 쪽으로 나아간다. 이런 강줄기를 따르면 물길로 실카강(Shilka)이나 아루구나강(Aruguna)에 통할 수 있고, 따라서 흑룡강, 송화강(松花江), 우수리강을 통해 동북아시아 내륙까지 들어가게 된다. 소그드인은 도착한 곳에 콜로니(colony, 移居地)를 세워서 유목민 습격시 방위를 위한 피난, 캐러밴(caravan)에게 필요한 물품 보급, 회득한 상품의 선별, 포장발송 등등을 벌였다. 이런 콜로니 유적에 대한 추적은 고대 교통도로를 탐색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러시아 학자도 이것을 통해 이른바 검은담비길및 그 주요 루트의 추정을 시도하였다. 근년 들어 이 루트의 존재에 관련된 주요 논거는 다음과 같다.:

 

1.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주에서 발견된 중앙아시아 은화[銀幣]. 현재 하바로프스크주립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 은화는 솔리두스(solidus) 바람 5(Bahram V) 시대 사산조(Sasanid) 은화의 모조품인데, 7-12세기 중앙아사아에서 실제로 유통되어 화폐로서 쓰였다.

2.       치타(Chita)시립박물만에 수장된 중앙아시아 청동거울[銅鏡]. 치타주 프리알간(Priargun) 지역 쿠치마을에서 출토했는데 이곳은 실카강과 아루구나강의 합류지역이다. 청동거울 뒷면엔 말을 탄 사람이 도안되어 있으며 소그드어 혹은 이란어와 닮은 문자가 새겨져 있다.

3.       상술한 것과 같은 청동거울이 남시베리아 미누신스크(Minusinsk) 분지에서도 발견되었다.

4.       연해주(Primorye) 하산(Khasan)지역 크라스키노(Kraskino)마을의 토성유적에서 출토한 공예품. 연구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산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산 제품의 모조품이다. 같은 유적에서 또한 당나라산 오지그릇[瓷器] 파편과 신라(新羅)의 질그릇[陶器]이 발굴되었다. 그 토성은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소속인 염주(鹽州) 용하군(龍河郡)의 주치(州治)유적으로 여겨지는 데, 그 근거는 크라스키노가 있는 땅은 청나라때 안초(), 안춘(眼春)라는 한어(漢語) 이름이 있었고 근대에는 규연추(叫煙秋)라 했는데 모두 염주(鹽州)란 이름의 소리값이 변한 것이다. 크라스키노 토성은 포시에트(Posyet)만을 바라보고 있어 토성 앞은 바닷가(항만)의 바닷길로 통했음을 어렴풋이 판단할 수 있고, 만을 나가 바다로 나가면 동해[日本海]에 이른다. 《신당서·북적·발해전》에 용원(龍原)동남쪽은 바닷가인데 일본도(日本道) [龍原東南瀕海, 日本道也]”라고 쓰여있다. 그래서 일본학자는 크라스키노 토성은 고대 발해국과 일본의 바닷길 교통 및 무역의 출발지라고 여겼다. 러시아학자는 곧 말갈의 국가인 발해가 형성된 이후, 검은담비길의 바닷길 부분은 일본도(日本道)’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5.       1995 10, 러시아학자는 또 연해주 아르센예프(Arsenyev)시에서 압바스조[黑衣大食]시대의 중앙아시아 은화를 하나 수집했다. 이 은화는 우수리강 지류인 아르센예브카강(Arsenyevka) 유역의 노보고르데예브카(Novogordeevka)마을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이 일대는 중세기의 성채촌락 유적이 집중되는 곳이고, 때문에 관광객은 늘 이곳에 찾아온다. 이 은화는 직경은 25mm이고 하반부는 불완전하다. 디테일면에서 중앙아시아 고성(古城) Pjandzhiken유적에서 출토한 은화와 유사한데, 고대 중앙아시아 부하라(Bukhara, 安國,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속함) 은화의 Darahim도안을 모방한 제품이다. 은화의 표면에는 왕()의 정면흉상이 점선으로 주출(鑄出)되어 있는데, 왕관의 상부에 반달과 별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왕관 좌측에 아랍어로 al-Mahdi라고 쓰여 있고, 또 왕의 얼굴 우측에 부하라 글자가 있는데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그 뜻은 “부하라왕[安國王]”이다. 이 때문에 이 은화 1매는 압바스조 코러썬(Khorasan,)총독인 무하마드 알-마디(Muhammad al-Mahdi, 758-768) 재임시에 주조된 것이다.

 

러시아학자는 매우 좋은 작업을 했으며 이 고고학 자료의 진실성과 과학성은 의심할 바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료의 진실이 반드시 논점의 진실을 표명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하다. ,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런 중앙아시아 기물은 어떤 길을 거쳐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2   

 

소그드인은 유라시아대륙 곳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거쳐가는 길에 그들의 콜로니를 세웠는데, 이는 일찍부터 학계에서 연구되었고 게다가 성과도 주렁주렁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연구는 사람들의 시야와 지식 영역을 넓혔고, 고대세계를 동서양으로 엮은 실크로드의 인식을 크게 깊게 했다. 실제로 국제학술의 발전에 따라 실크로드가 의미하는 바는 안으로는 고대 동서방 경제문화교류의 통칭으로 확대되었고, 밖으로는 예로부터 있던 오아시스길로부터 초원길, 남해길[南海道], 심지어 아메리카의 은의 길[白銀之, Silver-Road]까지 이어져 뻗어나갔다. “실크로드연구의 대상은 단순히 도로만이 아니라 고대 동서방교류의 갖가지 루트이다. 하지만 이런 루트 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자료도 가장 풍부해서 연구성과가 가장 많은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전통적 의미의 실크로드, 즉 고대 중국 및 그 부근지역을 경유하는 교통도로다. 바꿔 말하면, 고대 동아시아 교통 네트워크의 중심은 중국의 중원지구이다. 이 관점은 두말할 것 없이 문헌에 기재된 교통상황 또는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생산품의 유포에서 다 유력한 증명을 얻는다.

 

근년 들어 고고문물의 출토에 따라 문서, 비문의 새 자료가 간행, 배포되면서 소그드인의 중원활동에 관한 연구가 바야흐로 일어났으며 또한 중대한 진전을 얻었다.예를 들어, 중국 전통 문헌사료 속의 소그드인은 “소무9(昭武九姓)”이라 불렸는데 여기에는 강(, Samarkand), (, Bukhara), (, Tashkent), (, Kaputana), (, Maymurgh), (, Kushanik), (, Kishsh) 등등이 있다. 국내학자는 새 자료를 이용하여 고향을 떠나 중국에 온 안씨(安氏)가족과 사씨(史氏)가족을 따로 떼어 계통연구를 진행했다. 소그드인의 중원 이주 분포상황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의 새 성과도 곧 간행되어 세간에 퍼질 참에 있다. 새 연구성과에 따르면 고대 소그드인의 중국활동 발자취는 북방 전체에 고루고루 퍼져있고, 동북의 영주(營州, 지금의 요녕성 조양)는 그들의 정착[聚居]활동의 한 중심이었다. 사료에는 당나라 전성시 안사(安史)의 난의 수괴인 안녹산과 사사명을 다 “영주의 잡종 호[營州雜種胡]”라고 적었는데, 연구에 의하면 두 사람은 실제로 고향을 떠나 그 땅에 온 소그드 부족의 추장이었다.

 

영주(營州) 16국시대의 여러 연()이 거점으로 하던 용성(龍城)인데 또한 유성(柳城), 화룡(和龍), 황룡(黃龍)이라고도 불렸다. 이 땅은 요서주랑(遼西走廊)에 자리하는데, 동으로 발해에 통하고 북으로 거란에 접하며 서로는 돌궐에 가까워서 지리형성 및 전략위치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고대 동서교통은 물론이거니와 중원과 동북의 교통에서도 요서주랑의 중심인 영주는 역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비교적 일찍 발견된 동서교류의 문물을 반영한 문물로는 로마풍의 유리기물이 있다. 1965, 요녕성박물관은 북표현(조양시 동북쪽) 서관영자촌(西官營子村)에서 북연(北燕) 귀족인 풍소불(馮素弗, 415년 사망)의 무덤에서 5점의 유리기물을 출토했다. 샘플분석에서 이들 유리의 기본성분은 로마유리와 유사함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엷은 녹색의 투명한 오리모양 주() 1건의 기형은 서기 1-2세기 지중해 지역에서 유행한 일종의 새모양 유리기물과 유사했다. 한국 경주박물관에도 유사한 기물이 있다. 중국학자는 모용선비-삼연(三燕)문화 무덤의 기마유물(騎馬遺物) 및 금화보요관(金花步搖冠), 그리고 유리기물 등이 계열을 이루며 발견되는 것은, 그 동쪽으로 조선, 일본에 전해진다는 제안을 사람들이 믿게끔 고고학적 실물로 뒷받침한 것이다.”고 했다. 일본학자는 이를 유리의 길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중원지역으로부터 영주를 거쳐 흑룡강,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은 훨씬 이른 시기에 발전되어 있었다. 선진(先秦) 사료에 “숙신씨가 호나무살과 돌촉을바쳤다.”고 적혀있는데, 중국민족사학자는 숙신(肅愼)은 바로 한·진의 읍루(挹婁), 북조의 물길(勿吉), 수·당의 말갈(靺鞨)인데 뒷날 여진(女眞)”으로 소리값이 바뀌었다고 여긴다. “검은담비길”을 제안한 러시아학자 샤꾸프노프 본인도 중국 동한(東漢)시대에 ‘읍루담비(挹婁貂)’라 불리던 모피는 몹시 환영 받았고, 당시 중국인은 읍루민족(지금의 중국 동북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살았다.)으로부터 이런 모피를 대량으로 수입했던 바, 나는 검은담비길이란 이름으로 이 한줄기 무역라인을 부른다.”고 말했다. 《위서(魏書)·물길전》은 지난 연흥(延興, 471-476)중에 을력지(乙力支)를 사자로 보내 조공했다. 태화(太和, 477-499) 초년에 또 말 5백 마리를 바쳤다. 을력지가 말하길, 그 나라에서 처음 나와 배를 타고 난하(難河)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태니하()에 이르렀고, 물에서 배를 버리고 남쪽으로 나와 땅길로 가서 낙고수(洛孤水)를 건너 거란의 서쪽 경계를 따라 화룡(和龍)에 다다랐다고 했다. 스스로 말하길 그 나라는 앞서 고구려의 10 ()을 깼던 적이 있으며, 몰래 백제와 꾀하여 물길[水道]을 따라 힘을 함께하여 고구려를 얻으려 했다고 한다. 을력지는 돌아가면서 그 왔던 길을 따라가 원래 (타고왔던) 배를 얻어 띠워서 그 나라에 다다랐다.”고 써있다. 이는 교통도로에 관해 명확하게 쓴 것이다. 난하(難河)는 바로 지금의 송화강 및 그 상류인 눈강(嫩江)이고, 태니하()는 바로 눈강(嫩江)의 지류인 타오얼강(洮兒河)이며, 낙고수(洛孤水)는 지금의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이다. 당대(唐代)로 내려오면, 사료에 발해국에는 다섯 대외교통로가 있다고 명확히 써있는데, 바로 일본도(日本道), 신라도(新羅道), 조공도(朝貢道), 영주도(營州道), 거란도(契丹道). 마지막 세가지 도로는 다 중원내지로 통하는 것임이 몹시 명확하다. 정원(貞元, 785-805)에 재상 가탐(賈耽)은《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에서 당조(唐朝)의 변주(邊州)에서 사이(四夷)로 들어가는 일곱가지 큰 길의 역수(歷數)를 정리해 놓았다. 먼저 영주(營州)로부터 들어가는 안동도(安東道)가 기술되어있는데, 영주로부터 안동도호부를 거쳐 평양, 발해왕성, 흑수말갈까지의 몇 천리 노정과 맞물려 있는 주요 성·진()이 적혀있다. 발해국과 당조(唐朝)의 밀접한 관계는 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있었던 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여기서 단지 두 가지를 지적하려 한다.

 

첫째, 중국학자의 연구와 《속일본기》등의 사료가 뒷받침하건대, 발해국과 일본간의 직접 해로는 사실상 중원내지로 통하는 동북도(東北道)의 연장선이며, 일본의 견당사(遣唐使)는 이른바 발해로(渤海路)”의 두가지 루트를 따랐는데 한가지는 상술한 영주도(營州道)고 또 한가지는 바로 상술한 조공도(朝貢道)였다.

 

둘째, 앞에서 썼듯이 러시아 연해주 하산지역의 크라스키노 토성은 발해의 일본도(日本道) 출발지인 동경용원부 소속 염주 용하군의 주치소 유적지로 생각되며, 이곳에서는 중앙아시아 공예품의 모방품과 함께 당나라산 오지그릇 파편과 신라 질그릇도 동시에 출토했었다.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주에선 또한 모두 북송(北宋)의 동전[錢幣]과 묘화자기(描花瓷器), 심지어 누에고치도 발견되었다. , 상술한 바가 설령 압바스 시대의 중앙아시아 부하라 은화의 모방품이라 해도 중원문화 영향의 흔적도 또한 강렬하다. 발표자의 말에 의하면 이 은화의 정면에 왕관 상부에서 반달과 별 모양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당나라 동전인 개원통보(開元通寶)의 전형적인 표기로서 속칭 배월문(背月紋)이란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밀납으로 본을 떠 동전을 만들 때 좋은 문양이 나오자 나중에 (밀납을) 궁으로 보냈는데 양귀비가 손톱으로 찔러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또한 뒷면에는 이른바 직각 테(사각형 창문틀)”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상 중국 고대 동전에 있는 사각형 구멍[方穿]의 흔적이다.

 

분명히, 고대 교통과 유물은 다 흑룡강 및 우수리강 유역과 중원지구에는 전통적으로 유구한 링크가 있었다. 중원을 통해 동북으로 가는 도로는 고대 동서방교통의 중요 구간의 하나였고, 그러므로 이것은 당연히 소그드 상인[商胡]에게 이용될 수 있었다.

 

안록산 및 사사명이 다 “영주의 잡종 호[營州雜種胡]”란 것은 진인각(陳寅恪)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잡종호(雜種胡)란 바로 중앙아시아의 소무9성호(昭武九姓胡).당나라 사람은 습관적으로 9성호를 잡종호라고 불렀다. 잡종이란 항(term)은 뒤섞였음을 통틀어 뜻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전적으로 어떤 한가지 종류의 종족에 대한 말이다.” 실은 잡호 혹은 잡종호란 명칭은 일찍이 한대(漢代)에도 출현해 있었다. 조위(曹魏)때 “서역잡호(西域雜胡)”란 이름이 나와 있었다. 비록 위·진(魏晉)시대엔 잡호 혹은 잡종호란 이름으로 흉노(匈奴)와 유관한 각 부족을 습관적으로 불렀고 진()나라 사람은 언제나 그 중에서 갈호(羯胡)을 잡호의 범칭으로 썼지만 석갈(石羯 =Tashkent)과 같은 갈호는 분명히 중앙아시아에서 온 소그드 호인(胡人)이었다. 연구에 의하면 갈호중에는 또한 수많은 서역성씨가 있는데 이들은 일찍부터 동북지역에 왔었다.《진서(晉書)》권107《석계룡재기 부 염민(冉閔)》에서, “항복한 호()인 소그드[粟特], () 등은 염윤(冉胤) 및 복사 유기(劉琦) 등을 붙잡아 석지(石祗)에게 보냈다.”고 했다. 석륵(石勒)이 처음 일으킨 18 기병 중에는 서역성씨인 기안(夔安)이 있었다.《고금씨성서변증(古今姓氏書辯證)》권3 지운(脂韻) 기씨조(夔氏條)에서 “석호(石虎)한테 태보 기안(夔安)이 있었는데 천축(天竺)으로부터 요동(遼東)으로 이주해갔다. 현손인 일()은 요진(姚秦)의 사공(司空)을 지냈으며 뛰어나게 후연(後燕)을 섬겼다.”고 했다.《위서(魏書)》권30 《안동전(安同傳)》에, “요동 호인(胡人)이다. 그 선조인 세고(世高)는 한()때 안식왕(安息王)의 시자(侍子, 볼모)로서 낙()에 들어왔다가 위()를 거쳐 진()에 이르러 난리를 피해 요동에 들어와 드디어 집안을 이루었다.”고 했다. 당장유(唐長孺)선생에 따르면, 안세고는 한() 말의 고승(高僧)으로 이미 중이 된 사람이라 후손을 두기가 너무나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안동(安同)의 세계(世系)는 틀림없이 꾸며낸 것이다. 그러나 서역호(西域胡)가 요동으로 갔다함은 오히려 이것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오옥귀(吳玉貴)는 “안동(安同)의 신분은 분명히 외교사명을 띤 상호(商胡). 안도의 부친은 비록 작은 관리에 불과했지만 그의 가족은 그래도 최초로 상호의 면모를 나타낸 가족이다.”고 했다. 당장유 선생은 다만 석륵(石勒) 18기병의 하나인 기안(夔安)이 천축으로부터 (직접) 요동으로 이동할 순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기씨의 이주는 석조(石趙)가 멸망한 후에 이주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에 깨달음을 받은 바, 나는 소무9(소그드 商胡)이 동북으로 들어가 산 가장 이른 시기는 석조(石趙)의 흥망활동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석씨는 먼저 양국(襄國, 지금의 하북 형대(邢台))에 도읍했고 나중에 업성(鄴城, 지금의 하북 임장(臨漳) 서남)에서 도읍했는데 동북으로부터 꽤 가까운 편이었다. 염민(冉閔)이 갈()을 멸하고 “지나가는 호갈(胡羯)을 문에서 막으니”,“이때부터 코가 높고 수염이 많아서 마구잡이로 죽은이가 반수나 되었다.. 이에 그들은 핍박을 피해 새외(塞外)로 달아났다. 당나라 초가 되자, 영주(營州) 석씨(石氏)는 또 대단히 큰 세력이 되어있었다. 무덕(武德)4 (621), 6경자(庚子), 영주 사람 석세칙(石世則)이 총관 진문연(晉文衍)을 붙잡아 주()를 배반하고 말갈 돌지계(突地稽)을 주인으로 모셨다.” 돌지계는 (당나라에) 귀부했던 속말말갈의 수령인데 옛땅에 남아서 살던 그 부족은 후에 발해국의 주체가 되었다.

 

연구에 의하면, 소그드인은 또한 말갈의 거주지에도 정착지[聚居地]를 세웠다. 한문사료에 요·금(遼金)시대의 송화강 하류에 5국부(五國部)가 있었다고 적혀있다. 러시아학자는 5국부 민족의 언어, 복식, , 농경 등의 방면은 그 남쪽에 접한 여진족과 다 다르다고 보았다.《거란국지》에 5국부 사람은 자유지(自由地)로서 북방만족과 교류 및 무역을 벌렸다고 적혀있고, 따라서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소그드 상호(商胡)일 가능성이 몹시 크다. 특히 그 으뜸부[頭部]의 수령이 살던 오국성(五國城, 지금의 흑룡강성 의란(依蘭), 목단강(牡丹江)과 송화강의 합류점에 위치)은 또한 오국두성(五國頭城)이란 이름도 있었는데, 이는 소그드어의 성 이름인 Pjandzhiken(다섯 성이란 뜻)의 한역(漢譯)일 가능성이 몹시 크다. Pjandzhiken는 중고(中古) 중앙아시아의 유명한 성진()의 하나인데, 소그드인이 동북아시아의 한 큰 이주지에 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특별히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가능성이 퍽 높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역사가도 성진()의 이름을 한역(漢譯)하여 써 내린 점이다. 소그드의 성진() 및 그 콜로니[移民聚落]에는 Pjandzhiken[五城], Nowkat[新城]이란 이름이 많은데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나는 여기서는 다만 한 동북민족의 성진()이 한역(漢譯) 명칭으로 중국사가에 의해 기재되었음을 지적할 뿐이지만, 이 자체가 당시 동북과 중원내지간의 전파·교류의 방향 및 루트 문제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소그드 상호(商胡)는 동북에 들어와 살면서도 여전히 주요하게 다룬 것은 소그드의 옛 업종 즉 동서왕래 및 장사를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영주 석씨와 속말말갈의 특수한 관계에 주목하는데, 그 실체는 소그드 상호(商胡)가 줄곧 중앙아시아에 있는 자기의 고국과 밀접한 연계를 유지한 것이다. 1906, 영국의 탐험가인 스타인(M.A. Stein, 1862-1943)은 돈황으로부터 서쪽 TXIIa호 고대 봉수대 밑에서 “소그드어 고대 서신”을 9통 발견했다. 연대는 4세기 초로 단정되었는데 그 중 몇 통의 내용은 소그드인이 고장(姑臧, 양주(涼州)에 속함, 지금의 무위(武威)) 혹은 돈황으로부터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 Samarkand)와 안국(安國, Bukhara)에 장사의 상황과 어려움을 종합해 보고한 것이었다. 태연(太延)5 (439), 북위(北魏)는 고장(姑臧)을 깨고 북량(北涼)을 멸했는데, () 땅에서 장사하던 소그드 상호(商胡)는 모조리 사로잡혀 당시 북위의 수도인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 대동)으로 끌려갔다. 후에 소그드왕이 사자를 보내 이들을 찾자 비로소 속죄금을 내고 포로신분에서 벗어나도록 허락되었다. 연구자는 소그드왕이 북위에게 속죄금을 내고 상호(商胡)를 되돌아가게 한 것은 양주(涼州)에 살던 소그드인이 줄곧 조상이 살던 곳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설명해 준다.

 

근년에 중국북방에서 중서교통의 유적 및 유물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어 소그드 상인이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한 각종 교류가 실증되었는데 내용이 풍부하고 활발하다. ”문헌기재와 실크로드 상의 어떤 문화유적을 볼 때, 그들은 동서 무역발전의 관건이 되는 작용을 했을 뿐 아니라 문화의 전파 및 다국간의 정치 왕래 촉진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이 길을 거쳐 서역으로부터 신라에 전해진 상술한 유리기물 외에도 또한 각종 향료, 슬슬(瑟瑟), 옥석옥기(玉石玉器), 구수탑등(氍鎪毾), (), 공작꼬리(孔雀尾), 비취모(翡翠毛), 목숙(), 화수대금문금구(花樹對禽紋金具), 입수쌍조문각석(立樹雙鳥紋刻石), 상옥금식단검(嵌玉金飾短劍)이 있으며 심지어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앞의 호인(胡人)석상 등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서역의 수많은 악기, 잡기(雜技), 공예기법도 다 신라에 전해 들어왔다. 중일(中日)문화교류사 방면의 유사한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이라 말할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중국학자가 지적한 한 사실이다. , 일본과 신라의 묵은 원한은 몹시 깊은 탓에 일본조정이 신라정벌을 논의한 적이 있었고, 때문에 발해국 건국 이후, 특히 개원(開元) 25(737)에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하여 방향을 틀어 당()제국과 밀접한 관계에 서자 일본조정은 당제국과의 연계를 유지키 위한 다리를 발해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학자는 일찍이 조로아스터교의 일본 전입 및 그 일본에서의 영향문제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학계에 공인되었다. 이 한 페르시아 종교의 폭넓은 동아시아 유포는 소무9성 즉 소그드인의 활동과 관계가 있는데, 근년에 발해국의 일본사절단 명단에서 사국(史國) 출신 소그드 호인(胡人) 사도몽(史都蒙) 및 안국(安國) 출신 소그드 호인 안귀보(安貴寶)란 이름자가 발견되어 더욱 조로아스터교의 일본전파 및 그 루트에 증거를 더했다.

 

당연히, 상술한 문화교류의 성취가 반드시 모두 소그드인의 공로가 아니라 당조(唐朝)의 상인, 발해의 상인, 신라의 사자, 일본의 사자 등도 다 적극적으로 그 사이에 끼었는데, 심지어는 중앙아시아 강국(康國)의 도성유적인 아프라시압(Afrasiab)의 벽화에서 조선인 사자의 형상이 출현하였다. 어쨌든, 전파·교류의 주요루트는 전통적 실크로드의 동쪽 연장에 있음은 응당 의심할 바가 없다.

 

 

                                 3

 

동북아시아 지역을 포괄하는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교통노선은 실크로드가 만들었음을 최초로 승인한 이는 사실 러시아학자였다. 앞서 기술했듯이 “검은담비길이란 이름을 최초로 불렀던 샤꾸프노프 본인은 일찍이 이 이름을 동한시대 읍루담비가 중원내지로 수입되는 무역노선을 가리키는 데 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생각을 바꿔, 6세기 초부터 14세기 말까지, 직접 현지 민족으로부터 검은담비 등 극히 귀중한 상품을 획득하기 위한 이유 외에도, “소그드인이 어쩔 수 없이 실크로드와는 별도의 무역도로를 통해 동북아시아로 향했던 까닭은, 실크로드는 수많은 국가의 영토를 거쳐가는데 이들 국가간의 관계는 늘 화목한 것은 아니어서 캐러밴으로선 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한편, 검은담비길에선 대부분 정치관계가 평온하여 통행이 안전해서 끊임없이 운행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 실크로드 라인상의 정국변화가 도대체 얼마만큼 교통무역에 영향을 주었을까? 동시에 유라시아초원의 정치관계는 반드시 평온하기만 했을까?

 

먼저 첫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진남북조와 송·요·금 시대에는 중국의 남북 정치가 대립했기 때문에 실크로드의 루트는 중국 경내에서 다소 변화가 있었는데, 주요한 것은 하서주랑과 청해(靑海)을 경유하는 하남도(河南道)”로의 교체였다.

 

일찍이 한대(漢代) 장건(張騫)이 처음으로 서역으로 외교사절로서 나갔다가 귀국할 때, 당시 하서주랑을 점거하고 있던 흉노를 피하기 위해 남산(南山)을 따라 강() 중으로부터 돌아오려고했는데 이는 당시 남산(곤륜산 및 그 산줄기)을 따라 동서로 분포한 여러 강() 사이에 이미 수없이 연접한 운송 교통노선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북조시기, 요서로부터 이주한 토욕한은 여러 강()을 밀쳐내고 지금의 청해성 황하 이남지역을 점거했고 남조(朝封)로부터 하남왕(河南王)에 봉해졌다. 남북이 대립했던 탓에 동진(東晉) 남조는 토욕혼을 경유해서 서역 및 막북(漠北)의 유연(柔然)과 연계했고, 따라서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로부터 선선(, 지금의 신강 약강(若羌)) 사이와 하서주랑에 병행하는 하남도가 발전했다. 대체로 이 라인은 상대적으로 다소 안정했기 때문에 송운(宋雲), 혜생(惠生)같은 북조인(北朝人)도 이 길을 거쳐 불경을 구하러 서행(西行)했었다. 1956, 청해성 서녕(西寧)의 옛 성()내에서 대략 5세기말에 매장된 금속화폐가 가득 담겨있는 도관(陶罐)을 하나 발견했다. 그 중에는 은화[銀幣]가 대략 100매 이상 있었으며 나중에 76매를 수집했는데, 모두 사산조 페르시아 국왕 Pirus시대(459-484)에 주조된 것이어서 5, 6세기때 하남도에서 동서교류가 번창했음을 뒷받침할 수 있다.

 

북위(北魏) 후기의 도성인 낙양(洛陽)은 당시 외국[中外]의 인사(人士)가 한데 모이는 문화교류의 최대 중심이었다. 당시 사람인 양현지(楊衒之)가 쓴《낙양가람기》에, 낙양의 영교(永橋) 이남, 원구(圜丘) 이북,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의 어도(御道) 양 갓쪽에 사방에서 온 손님이 거주하는 영빈관[賓館]과 주택단지가 안치되어 있다고 써있다. 어도 동쪽에는 4(四館, 네 숙소) , 금릉관(金陵館), 연연관(燕然館), 부상관(扶桑館), 구자관(龜茲館)이 있고, 어도 서쪽에는 4(四里, 네 마을), 즉 귀정리(歸正里), 귀덕리(歸德里)、모화리(慕化里), 모의리(慕義里)가 있었다. 동방 내빈[來客]은 부상관에 안치하고 모화리에 주택을 내려주었으며, 서방 내빈은 구자관에 안치하고 모의리에 주택을 내려주었다. “총령(파미르) 이서로부터 대진(大秦)까지의 백국천성(百國千城)이 기뻐하며 내부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상호(商胡)가 손님에게 장사하는 (동안) 날은 새() 밑으로 저물었으니, 이른바 천지의 구역이 다 있었다.” 이런 《낙양가람기》의 말은 비록 큰 과장이 없진 않지만 당시 중외 경제문화교류의 성황을 반영한다. 여기에 따르면 당시 낙양에서는 중국의 풍토와 민심을 좋아하고 즐겼기 때문에 눌러 사는 외국인이 헤아릴 수 없었고, 그래서 귀화하여 교민(僑民)이 된 집[] 1만이 넘게 생겼다고 한다. 또한 이들이 거주하는 지방의 가도와 골목은 단정하고 깨끗했으며, 주택은 가지런하고, 인가는 빽빽했으며, 푸른 나무[綠樹]가 그늘을 만들었다고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천하의 얻기 힘든 귀중한 화물(貨物)이 이곳에 집중된 점이다. 이런 까닭에 낙수(洛水) 이남에 전문적으로 한 “사통시(四通市)”를 설치했는데 이름 그대로 천하사방으로 통하는 시장이다.

 

남북분리 시기마저 이와 같거늘, 중국이 통일된 수·당때는 교통안전이 뒷받침되어 실크로드 상의 경제문화교류는 공전의 성황을 누렸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이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주로 언급하는 것은 막북 몽고고원, 알타이 산악지대와 남시베리아다.

 

북방의 광활한 유라시아초원은 고대유목민족이 나라를 세웠던 지역이며, 또한 유목민족이 늘 옮겨 다니던 곳이고, 아울러 세계역사상 여러 민족대이동의 물결을 일으킨 통로이다. 흉노의 서천(西遷) 이후, 동호 선비족은 흉노의 옛땅으로 이주하여 점차 강성하게 되었다. 위진(魏晉)시기, 북방초원에서의 활동 주역은 선비의 각 부()였다. 시베리아(Siberia)란 이름은 당시 선비의 활동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선비 탁발부(拓拔部)가 남천(南遷)해서 북위를 세우자, 동호 유연(柔然)의 세력이 북방초원에서 일어났다. 4, 5세기 교차기에 유연의 수령인 사륜(社侖)이 북쪽으로 고차(高車)에 쳐들어가 여러 부()를 합쳐 세력을 확장했고, 동시에 북위와 대립하였다. 북위는 일찍이 여러 차례 대군을 멀리 보내 유연을 덮쳐 유연의 부락을 끊임없이 서쪽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유연은 확장되면서 흉노의 여종(餘種)인 에프탈(, Ephthalites)을 핍박하여 알타이산으로부터 남쪽으로, 호탄(Khotan)으로부터 서쪽인 총령(파미르)지역으로 이주하게 만들었고, 에프탈은 5세기 중엽에 대하(大夏, Bactria)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던 후기귀상(後期貴霜, Kushan)을 쳐 멸했다. 고차(高車)는 본래 대막 남북(지금의 내·외몽고)에서 유연과 섞여 살았는데 쌍방에 전쟁이 일어났었다. 486, 고차는 분열되어 부복라부(副伏羅部)의 아복지라(阿伏至羅) 10 여 만 락()을 이끌고 고창(高昌, 지금의 신강 투르판) 서북으로 가 자립하여 왕이 되었고, 고창 역시 유연의 통제로부터 이탈하여 고차에 달라붙었다. 고창 서북은 본디 열반인[悅般人]이 분포하던 지역으로 열반은 448년에 북위에 사자를 보냈던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서에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고차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6세기 중엽, 본디 유연에 복속되있던 돌궐(Turk) 부락이 알타이산 남쪽 기슭에서 일어났다. 546, 돌궐은 고차를 멸했다. 552, 돌궐은 유연을 깨고서 강대한 돌궐한국(突厥汗國, Turk Khanate)을 세웠다. 567, 돌궐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함께 에프탈을 멸했다. 이때부터 동쪽의 요하 상류로부터 서쪽으로 아랄해(Aral Sea)까지, 남쪽으론 파미르 산악지대까지 달했고, 북쪽으론 바이칼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다 돌궐한국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그러나,《중세 유라시아초원[中世紀歐亞草原]》의 편자는 전체적인 돌궐한국의 역사는 전쟁과 내란으로 가득 찼다.”고 지적했다. 581, 돌궐의 Taspar Khan[佗鉢汗]이 병사하자 돌궐한국은 다섯 칸이 병립하는 국면이 나타났고, 몇 년의 혼전을 통해 583년에 정식으로 북돌궐과 서돌궐 2개의 한국(汗國)으로 분열하였다. 이후쌍방은 지루한 싸움이 그치질 않았는데, 북돌궐은 남하하여 수조(隋朝)에 의지했고 서돌궐도 내란 탓으로 수조(隋朝)에 신복(臣服)을 표시했다. 이로써 알타이 산악지대와 몽고고원은 돌궐에 반발한 철륵(鐵勒)의 여러 부()가 차지하였다. 수말당초, 돌궐은 한때 강성해졌으나 원기를 회복한 당조(唐朝)와 막북 설연타(薛延陀)의 재빠른 연합에 의해 630년에 북돌궐한국은 소멸되었다. 646, 당조(唐朝)는 또 막북에 출병하여 9성철륵(九姓鐵勒, Toguz-Oguz)의 협력하에 설연타한국을 소멸했다. 650, 당조의 추격병은 알타이산까지 이르러 북돌궐의 잔여세력을 소멸했다. 서돌궐 10성부락은 해를 거듭한 내전 끝에 마침내 657년에 한국(汗國, Khanate)은 당조(唐朝)에 의해 소멸되었다. 그러나 일은 이것에 그치지 않았다. 토번(吐蕃, 629-846) 세력이 잇달아 다가왔거니와 서역과 서돌궐의 남은 부()가 통모하여 병사를 함께하니 당조(唐朝)의 안서4(安西四鎭)은 얼마 안가 폐지되었다. 7세기말에 서돌궐 여러 부의 세력이 재편성하여 돌기시(突騎施, Turgish)를 따라 다시 일어났다. 이들의 동쪽 변방에서도 당조(唐朝)가 안치해 두었던 돌궐 항부(降部)682년에 거듭 새로 일을 일으켜 막북9성을 정복하고, 아울러 711년 무렵에 돌기시한국을 한때 병탄했다. 그러나 호경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716년 카파간가한[默啜可汗, Kapaghan Khaghan]이 막북9성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죽자 동돌궐은 이로부터 한 번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734년에 빌게가한[毗伽可汗, Bilge Khaghan]이 독살되자 한국(汗國)은 장기간의 내전에 빠지고, 단명한 몇 명의 가한(可汗)을 거친 후, 744年에 9성회홀(九姓回紇), 카르룩(Qarlugh, 葛邏祿), 그리고 바스밀(Basmil, 拔悉密)이 몰래 연합하여 활활 일어났고, 이듬해를 마지막으로 동돌궐은 소멸되었다.

 

회흘(回紇, 후에 회골(回鶻)로 개칭됨, Uighur)한국은 이제까지 전 북부초원의 패자가 된 적이 없다. 알타이산으로부터 서쪽의 3성카르룩(三姓葛邏祿)이 자립하여 엽호(葉護, Yabgu)가 되어 회홀과 강함을 다투었는데 870-880 년대에 돌기시를 정복하여 남천하여 세미레체 지역(일곱 하천의 지방)으로 갔다. 남시베리아에 있던 키르키스[]는 줄곧 회흘과 적대적이였는데, 《신당서·회골전 부 견곤(堅昆)》에 키르키스는 늘 대식(大食, 아라비아), 토번(吐蕃, 티벳), 갈록(葛祿, 카자흐)과 서로 의지한다. 토번에 갔다가 오는 이들은 회골의 표독한 노략질을 무서워하여 반드시 갈록에 머무르면서 힐극사(, 키르키스)의 호송을 기다렸다.”고 했다. 회골은 키르키스와의 20년에 걸친 분쟁의 결과 마침내 840년에 후속주자에 의해 소멸되어 몽고고원에서 추출되었다.

 

회골한국(回鶻汗國)의 붕괴는 시르다리야강(Syr Darya) 유역의 오구즈(Oguz)부락연맹과 이르띄슈강(Irtysh)유역의 키막(Kimak)부락연맹의 발전이 계기가 되었다. 키막은 본디 이르띄슈강 상류일대에 살았는데 9세기말 그 세력을 남쪽으로 뻗어 세미레체(일곱 하천의 지방) 동북과 중가르-알라타우(Jungar-Alatau) 지역까지 이르렀고, 동시에 아랄해 일대 우크라이나 동북변에는 킵차크(Kipchak)인이 출현하였다. 11세기 초가 되자 키막의 정치권위는 킵차크인도 아우르게 되었고, 이 키막-킵차크 부락연맹은 이르띄슈강과 오브강(Ob) 연안의 대부분의 초원을 차지했다. 동쪽의 몽고고원에는 10세기부터 거란인이 세운 요조(遼朝, 916-1125)의 치하에 떨어져있었다.

 

이로부터 보듯이, 중세 유라시아초원의 정치관계는 남부 오아시스를 거치는 전통적인 실크로드에 비하여 그다지 평온하지 않았다.

 

사실, 소그드인이 반드시 중앙아시아로부터 직접 동북아시아 민족까지 가서 검은담비 가죽을 입수할 필요는 없으며, 더 많은 상황하에 그들은 또한 길을 따라 장사를 하고 무역을 벌일 수 있었다. 몽고고원 북부와 남시베리아에서 발견된 중앙아시아 기물은 기타 루트를 통해 거기에 도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당서·지리지7하》에 실려있는 가탐(賈耽)의《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의 일문에는 당조(唐朝) 변주(邊州)로부터 사이(四夷)로 들어가는 큰길[大道]이 열거되어 있는데, “넷째는 중수항성으로부터 들어가는 회골도(回鶻道)라고 한다 [四曰入中受降城回鶻道]”라고 적혀있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이 상세히 써있다. 중수항성(지금의 내몽고 포두(包頭) )으로부터 오덕건산(烏德鞬山 = Otukan, 지금의 몽고 항가이산)의 회골 캠프[衙帳]를 거쳐 선아하(仙娥河, 지금의 셀렝가강) 북안의 부귀성(富貴城)에 이른다. 다시 북으로 골리간(骨利幹, 지금의 러시아 Buryat몽고자치공화국)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도파(都播, 지금의 러시아 Turan자치공화국)에 이르고, 다시 북쪽으로 견곤(堅昆, 지금의 남시베리아)에 이른다. 이렇게 몇 천리의 노정과 라인상의 주요지점 및 역참이 자세하다. 그리고 회홀한국(回紇汗國)의 제2대 가한인 갈륵가한(葛勒可汗) 마연철(磨延啜)의 기공비(, 고대 돌궐문《tengride bolmish il itmish bilge qagan[英武威遠毗伽可汗]비》)나는 닭의 해(757)에 소그드인과 한인(漢人)에 일러 선아하(仙娥河) 강변에 부귀성(富貴城)을 짓도록 했다.”고 써있는데, 아마도 소그드인은 중원으로부터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러시아학자 샤꾸프노프는 또한 말하기를, 소그드 호인(胡人) 안록산의 반란 때, 실크로드는 대부분 당() 조정의 통제 하에 있었는데도 그는 장비가 충실한 당조(唐朝)와 대등한 대군으로 작전을 벌였는데,그 무기와 장비, 군수물자 심지어 병력보충은 단지 담비길을 거쳐 중앙아시아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안녹산은 병사를 일으키기 전에 소그드 상호(商胡)를 각지에 보내 무역을 했으며, 아울러 각지의 상호(商胡)를 불러들여 외국의 진기재화를 운송해왔다. 《사적(事跡)》에 안록산은 현종(玄宗)에게 여러 차례 금은그릇 등 물건을 바쳤는데 현종은 가치를 가벼이 매길 수 없는 물품은 되돌려 주었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모은 재물이나 되돌아온 공물을 되파는 상업이 유행했는데, 이는 다 안사(安史)의 난의 경제적 바탕을 이루었다.” 덧붙여, 안사의 반란 때 이른바 검은담비길은 대부분이 회흘인의 손에 통제되어 있었다. 주지하듯이, 회흘인은 두차례나 출병하여 결국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당조(唐朝)를 도왔던 적이 있는데, 이는 안사(安史)가 회홀을 거쳐 병력을 조달했다는 설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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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문의 결론은 이러하다.:

 

1.       검은담비길은 “고대 동북아시아가 세계문화에 연결되는 루트에 대한 한 설명이다. 그러나 아직 사람을 납득시키기 어려우며 더군다나 전인(前人)의 설명을 대체할 수 없다.  

2.       고대 동북아시아가 세계문화에 연결되는 루트는 한 네트워크를 이루는데, 이 네트워크의 바탕과 뿌리는 중원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교통체계다.

3.       《구당서·서융강국(康國)전》에 소그드인은 남자가 20살이 되면 바로 먼 이웃나라로 가는데 여름이 한창때면 돌아온다.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못 가는 곳이 없다.”고 적혀있다. 드넓고 풍요한 중화대지(中華大地)는 고대 동북아시아를 세계의 문화로 연결해 주는 최고의 루트였으며, 이는 또한 오아시스 각국의 정치관계에 변동이 있더라고 대체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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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8.07 파오긴 퍼왔는데..왠지 미덥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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