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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직 정리 안했어요..읽지 마세요.그래서 저도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글 입니다.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07|조회수3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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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6세기 스페인이 명나라를 침공했다면? | 토론게시판  2005.09.0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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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가소로운 일이겠지만 16세기 말에 그런 공식적인 계획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들이 쌍쌍히 모여앉아 중국을 정복하자고 떠들던 세비야 회의의 대화록을 보면 그 땅을 정복하고 콩키스타도르 귀족의 목양지를 넓힌다던지...연옥과 지옥에 빠진 중국 백성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떠드는 도미니카 수사들 등...

 

 

 

 

 

 

이 작자들은 서양인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던 일본에 대해서는 주워들은게 있어서 1580년 무렵이 되면 이미 경외심 비슷한 것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회 동방교구의 감독자인 바리냐노나 프로이스 등이 본국에 보낸 보고를 통하여 일본의 지도자들이 스페인 본국의 필리페 대왕처럼 수만에서 수십만의 정예병력을 동원할 능력을 가졌다는 점. 무와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식으로 인식하였기에 행여 일본을 정복한다는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죠. 1580년 포르투갈을 합병한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590년대에 스페인 선단이 일본에 표류했을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음모죄로 걸어 모두 처형시켜 버렸고 이 소식은 필리핀과 멕시코를 경유하여 스페인 본국에 전해집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항의조차 포기했습니다. 행여 무역관계에 먹구름이 낄까 해서였죠. 1630년대에 일본의 쇼군이던 토쿠가와 이에미쓰가 포루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쇄국을 단행하자 스페인은 포루투갈의 주권국 자격으로 이의 재고를 간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에 대한 이에미쓰의 회답은 사절단 전원의 처형이었죠. 스페인은 분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일본과의 통상을 포기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스페인은 일본의 쨉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일본 해적만 하더라도 남중국해에서 포루투갈과 스페인 상선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던 처지에 어찌 일본 본토의 정규군과 상대할 마음을 언감생심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즈텍이나 잉카와는 달리 거기에는 고도의 정밀한 관료-재정-군사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스페인은 의외로 일본에 대해서와는 달리 중국을 상당히 얕잡아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지리적으로 중국이 얼마나 거대한 제국인지를 스페인은 알지 못했습니다. 16세기에 스페인에 의해 작성된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일본이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고, 중국은 일본보다 약간 큰 정도로 묘사됩니다. 이 지리지식은 17세기가 되어야 수정됩니다. 두번째로, 중국의 서양인에 대한 내륙 봉금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자세한 내막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수회 창립 멤버였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1549년 중국 동남부의 한 섬에 상륙합니다. 이미 성공적인 선교사업을 일본에서 행한 그였기에 미래에의 자신감은 충만했죠. 그러나 중국인들은 특유의 무관심으로 이제나 저제나 본토로 들어갈 생각만 하던 사비에르를 그곳에서 병들어 죽게 했습니다. 그 후 중국의 철저한 방해로 예수회는 16세기의 마지막 십년에 가서야 마테오 리치라는 선교사를 본토로 진입시키는데 성공하죠. 스페인의 중국 지식은 그가 유럽에 보내던 보고문에 이르러서야 충실해 집니다.

 

 

 

 

 

 마테오 리치의 보고는 어떤 의문점을 스페인 정부에 제시합니다. 마테오 리치에 의하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나라로 지목한 <키타이>를 가리킬지도 모른다는 거였죠. 마테오 리치는 북경 근처의 한 페허를 방문하고 그곳이 과거 몽고의 군주들이 살던 도읍지였다는 말을 듣고 동방견문록에 자주 등장하던 쿠빌라이가 키타이에 세운 도읍지 칸발릭(따뚜)을 연상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중국 동남부의 거대 항구들도 마르코폴로가 말한 몽고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망했다는 키타이의 구 도읍지일 가능성이 커 보였습니다. 

 

 

<설마 중국이 마르코폴로가 방문했던 위대한 대칸의 나라 키타이란 말인가? 10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와 100만의 군대를 보유한 나라라니...도저히 믿을 수 없다> 스페인에 만연하던 중국 멸시가 이런 회의를 더욱 부추깁니다. 중국은 한동안 아즈텍이나 잉카처럼 스페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정복 가능한 땅으로 간주되던 못난이들의 나라로 치부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예수회는 고에즈라는 청년 수사를 인도로 파견하죠. 비밀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말이죠. 무굴제국의 황제 악바르의 환대를 받은 고에즈는 아랍인으로 변신한 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서투르키스탄으로 나아갑니다. 그 곳에서는 해마다 <지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나라인 키타이>로 떠나는 대상들의 행렬이 있었고 고에즈는 거기에 합류하죠. 고에즈는 온갖 고초를 다 겪습니다. 사기꾼 대상들에게 도둑맞고, 살해당할 뻔 했으며, 산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이슬람 신자들의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그의 에너지를 차츰 앗아갑니다.

 

1602년 무렵 고에즈는 드디어 동투르키스탄을 거쳐 지금의 가욕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중국 명나라의 서쪽 변경이었죠. 그곳에 도착한 고에즈는 자기의 사명이 끝났음을 알게 됩니다. 아랍 대상들이 키타이로 부른 그 땅은 바로 마테오 리치가 거주하는 나라 중국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마테오 리치에 전해야 했지만 1년에 걸친 사막여행과 이슬람 신자들과의 알력이 이미 그를 반죽음으로 만들었기에 내지 여행은 불가능했죠. 너무나 쇠약해져 보행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그는 혼신의 힘으로 북경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마테오 리치에 편지를 보냅니다. 마테오 리치의 중국명인 리마두(利馬竇)라는 이름도 알지 못했고, 마테오 리치가 거처하는 주소도 알지 못한 채 보내진 편지였기에 수신자에게 전달될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마테오 리치는 이 편지를 반년만에 받습니다. 놀란 리치는 동료 수사를 가욕관으로 급히 파견하죠.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고에즈는 절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수사님. 저는 확인했습니다. 키타이는 바로 중국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최후의 의지로 생명을 이어가던 고에즈의 몸에 영혼이 머무를 이유는 더이상 없어졌습니다. 온 몸이 해골처럼 변한 채 반년 이상을 버텨오던 고에즈는 북경에서 파견된 수사와 만난 며칠 후에 숨을 거둡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한 채 말입니다. 이 놀라운 뉴스가 스페인에 전해졌을 때 유럽 전체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중국이 바로 세계 최강의 제국인 키타이였다> 유럽의 중국관은 크게 바뀌어 갔고 유럽인들은 중국으로 속속 상인과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합니다. <중국문명의 유럽 침투>라 불리운 현상이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을 풍미합니다. 이런 사실과 더불어 이미 유럽에서조차 쇠퇴하기 시작한 스페인은 두번 다시 중국 정복과 같은 시도는 하지 못하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중국사정에 아직 무지했던 16세기의 스페인이 동방 원정군을 소집하여 중국에 원정갔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펠리페 2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세계 최강국인 스페인과 일본이 전 세계를 나눠먹자고 제안했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다는데..(일본 극우파들이 만든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 안 그래도 도요토미가 중국을 정복하려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니 그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스페인군하고도 싸울뻔 했습니다.

 

 

 

출처-다음카페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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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여우(ultravox)

포트폴리오의 다양화는 변동성이 줄어들때 돌아 오는 수익을 그만큼 증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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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왜 동아시아를 발견했으면서도 300여년간 전쟁시도를 안했을까?


 
[펌] 일본 種子島에 전래된 鐵砲(조총) | 아시아* 태평양사  2005.10.0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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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 3國의 命運을 가르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鐵砲는 일본 열도에선 100여 년간 지속된 戰國시대를 마감시킨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는
鐵砲의 위력을 과신한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도발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朝·明·倭의 3國이 7년에 걸쳐 피투성이의 소모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
滿洲에서 흥기한 女眞族은 중국 대륙의 征服王朝(淸)로 떠올랐다.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鐵砲의 섬―다네가시마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철포가 전래된 門倉岬(가도쿠라미사키). 아래쪽 해변(마에노하마)에「南蠻船」이 표착했다.>
 
 
 지난 12월21일 오전, 필자는 다네가시마(種子島)의 니시노오모테(西之表)港에 상륙했다. 다네가시마라면 1543년 포르투갈의 상인들에 의해 신무기 鐵砲(철포·조총)가 전래되었던 섬이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일본에서 양산된 철포에 의해 엄청난 파문과 변화를 겪는다.
 
  다네가시마는 규슈(九州) 남단 오스미(大隅) 반도 동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동서는 4~10km에 불과한데 남북은 72km이나 된다. 면적은 475km2. 제주도보다는 작지만 거제도보다 큰 섬이다. 현재의 인구는 약 3만5000명.
 
  니시노오모테市의 중심가 中目에는 철포박물관이 있다. 뱃머리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이 박물관에는 포르투갈 사람이 전래한 철포와 그것을 모델로 다네가시마에서 제작된 種子島銃 제1호 등 90여 정의 화승총이 전시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박물관의 건물이 철포를 싣고 입항한 「南蠻船(남만선)」의 모습처럼 지어진 점이다.
 
  철포박물관을 둘러보고 이와사키 호텔 전용버스에 올라 58번 국도를 타고 南進했다. 필자는 이와사키호텔그룹의 홍보행사에 초청을 받아 2004년 12월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간 가고시마 공항-이부스키市-야쿠시마-다네가시마-가고시마를 여행했다.
 
  니시노오모테港에서 해변길을 따라 10여 리 내려오면 요키노(能野) 포구와 스미요시(住吉) 소학교가 보인다. 이 소학교는 철포 전래 당시 島主의 居館(거관)이 있었던 자리다. 버스는 곧 나카타네초(中種子町)로 접어들어 東進했다. 도로변으로 조그마한 種子島공항이 보인다. 이제 호텔버스는 다네가시마의 동쪽 해변길을 들어서 南進했다. 곧 미나미타네초(南種子町)이다. 미나미타네초의 동남단 다케자키(竹崎) 해안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우주센터 NASDA가 자리 잡고 있다. NASDA에서는 1966년 건설 이래 매년 2~3회씩 우주 로켓을 발사해 왔다. 이곳 우주과학기술관에는 실물 크기의 로켓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우주실험 시뮬레이션도 체험할 수 있다.
 
  NASDA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3km쯤 西進, 種子島 이와사키호텔에 도착했다. 여기서 필자는 일행과 잠시 헤어져 서남단에 위치한 가도쿠라미사키(門倉岬)로 직행했다. 가도쿠라미사키는 철포를 전래한 남만선이 표착한 해변(마에노하마)을 조망할 수 있는 곶(岬·미사키)이다. 이곳 약 100m 절벽 위에는 鐵砲傳來紀功碑(철포전래기공비)가 세워져 있다.
 
 
  남만선의 漂着
 
  1543년 8월25일 未明,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시마의 서남단 가도쿠라岬에 표착했다. 당시의 상황은 16대 島主 히사토키(久時)의 지시에 따라 승려 南浦文之가 쓴 「鐵砲記」(1606)에 기술되어 있다.
 
  정체불명의 괴선박 출현-. 이 소식은 다네가시마의 治所가 위치한 니시노오모테(西之表)로 급보되었다. 이때 다네가시마의 치안책임자는 니시무라(西村直部丞)였다.
 
  당시, 다네가시마는 그렇지 않아도 비상사태에 들어가 있었다. 불과 5개월 전, 오스미(大隅) 반도에 웅거한 네지메氏의 기습공격을 받아 다네가시마內 城의 함락으로 島主가 할복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島主 할복의 위기는 야쿠시마(屋久島)를 네지메氏에게 할양함으로써 겨우 해소되었다. 그러나 다네가 島民들은 네지메氏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야쿠시마의 면적은 500km2로서 다네가시마보다 오히려 조금 크다. 1993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필자는 다네가시마 상륙 직전에 야쿠시마를 들러 하루를 묵었다. 야쿠시마에는 규슈 최고봉인 표고 1935m의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를 중심으로 1000m 이상의 산이 대여섯 개나 솟아 있고, 그 속에 수령 1000년 이상의 삼나무, 즉 야쿠스기(屋久衫)가 우거져 있다.
 
  야쿠스기는 목조건물의 지붕을 이을 때 사용되는 최고급 목재로 이름 높다. 야쿠스기는 유달리 樹脂(수지) 성분이 많아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다고 한다. 다네가시마 島民들에게는 야쿠시마는 꼭 탈환해야만 할 보물섬이었던 것이다.
 
  치안책임자 니시무라는 니시노오모테로부터 130여 리의 길을 달려 가도쿠라岬의 둔치에 도착했다. 마침, 5명을 태운 보트가 대선을 떠나 해변 가까이로 접근하고 있었다. 니시무라는 敵은 아니라고 직감했다.
 
  보트는 파도에 떠밀려 모래밭에 닿았다. 보트를 탄 5人은 조심스럽게 해안을 살피고 있었다. 승마용 채찍 하나만 지니고 있던 니시무라는 천천히 다가가면서 상륙하도록 손짓했다. 경계심을 풀도록 미소까지 지었다.
 
  가도쿠라岬 해안으로 표착했던 괴선박은 南·東중국海를 무대로 밀무역에 종사하던 安徽省(안휘성) 출신의 「대두목」 王直의 소유였다. 王直의 배가 마에노하마(前之浜)에 닻을 내린 것은 바로 네지메 전쟁의 굴욕으로부터 아직 5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먼저 王直이 모래사장에 뛰어내렸다. 이상한 모습을 한 3명이 뒤따랐다. 니시무라의 눈길은 이 3명에게 못박혔다. 복장, 머리색, 눈 색깔, 높은 코, 이런 것들은 니시무라의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王直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시하며 니시무라에게 접근했다. 이어 승려를 만나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당시 일본에서 漢文으로 필담을 나눌 수 있었던 지식인은 대개 승려들이었다.
 
  그러나 니시무라는 漢文을 아는 사무라이였다. 그는 모래바닥에 채찍으로 다음과 같이 써 보였다.
 
  「船中之客不知何國人也 何模形之異哉(배 안의 손님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왜 모습과 형태가 이상한 것인가)」
 
  이 글자 하나하나를 살피던 王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는 니시무라의 채찍을 빌려 다음과 같은 답변을 모래 위에 썼다.
 
  「此是西南蠻種之賈胡也 非可怪矣(이들은 서남방 미개국 종족의 상인들로서 별로 괴이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船主 王直의 정체
 
  그렇다면 王直이란 이름의 明國人은 어떤 존재였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王直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倭寇(왜구)의 존재부터 추적해야 할 것 같다.
 
  明國 기록에 의하면 왜구의 출신지로는 薩摩(사쓰마)·豊後(붕고)·長州(죠슈)가 주류를 이뤘고, 이어 大隅(오스미)·筑後(치쿠고)·博多(하카타)·日向(휴가)·種子島 등이었다. 죠슈 한 곳을 제외하면 일곱 곳 모두가 규슈에 있다. 이렇게 규슈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이런 왜구들이 중국의 東海岸 지역을 침입할 때 앞잡이 노릇을 한 明國人들은 「王直·抗虎(항호)·陳東(진동)의 패거리」로 기록되어 있다. 王直의 패거리는 밀무역에 종사하면서 때로는 왜구에게 협조했던 것이다.
 
  明國 정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국비의 태반을 투입, 해안경비를 강화했다. 그런 해안 요새 중 가장 유명했던 곳이 金山衛(금산위)였다. 이 밖에도 昌國衛(창국위)·太昌衛(태창위) 등 해안 요새가 많았다. 이렇게 단속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王直 등이 明國 연안에 기지를 유지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었다. 王直 등은 규슈 서쪽 해안에 떠 있는 하라도(平戶島)에 기지를 두려고 했던 것 같다.
 
  1543년 8월 초, 王直은 그가 보유한 船團(선단)을 이끌고 廣東을 출항했다. 배는 길이 45m에 달하는 대형선이었다. 그들은 廣州灣 입구에 떠 있는 上川島에 기항했다. 王直은 上川島에서 일본行의 선편을 기다리고 있던 8명의 포르투갈人을 승선시켰다. 王直은 자기가 탄 「南蠻船」에 포르투갈人 3명을 태웠다. 나머지 5명은 다른 배를 탔다.
 
  이 船團은 해적과의 전투에 대비, 뱃전이 높았다. 3매의 돛을 단 이외에 삼각 및 사각 깃발 20여 매를 펄럭이며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의 「西勢東漸(서세동점)」은 포르투갈이 선도했다. 1487년부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과 동해안의 대부분을 장악한 데 이어 아라비아로부터 페르시아의 일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해협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15세기 마지막 10년간에는 明나라의 마카오를 거점으로 삼았다. 포르투갈人들은 양자강 하구 교통의 요지 寧波(영파)까지 진출했다. 당시 중국에 있던 포르투갈 거류민이 1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王直으로서는 이런 포르투갈 해상세력과의 친선을 위해 선편을 제공했던 것 같다.
 
  王直의 선단은 8월10일경 廣州灣 입구의 上川島를 떠났다. 그 이틀 후 투르크(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아 王直의 선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王直이 승선한 배는 해적의 공격을 겨우 뿌리친 직후에 이번에는 태풍의 直擊(직격)을 받았다.
 
  王直의 남만선은 류규(琉球·오키나와: 당시 류규王國은 독립국이었음)열도로 북상하면서 섬마다 들러 기항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上川島 출항 10일째인 8월25일, 王直의 남만선은 다네가시마의 가도쿠라岬 앞바다에 겨우 닻을 내렸던 것이다.
 
  가도쿠라岬의 하얀 백사장에서 니시무라와 王直의 필담이 계속되었다. 기괴한 세 사람이 南蠻國(남만국)의 상인이라는 점, 배는 태풍으로 표류를 계속하다가 겨우 이 섬에 표착했다는 점 등이 파악되었다. 배는 赤尾木(아코우기: 지금의 니시노오모테)港으로 회항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노를 대부분 잃어버린데다 서풍까지 불고 있었기 때문에 自力 회항은 무리였다. 이 대형 남만선을 曳船(예선)하기 위해서는 소형선 10척이 필요했다.
 
  王直과 충분한 타협을 한 니시무라는 서둘러 말을 달렸다. 赤尾木까지 52km의 길이었다. 어떻든 조난선 구조 여부는 극히 중대한 사항이었다. 약 3시간 동안 말을 달린 니시무라는 島主 토키타카(時堯)에게 상황을 보고, 예선의 허락을 얻었다.
 
  이번에는 니시무라가 예선의 책임자로 命을 받았다. 그는 급히 선박 몇 척을 수배하여 赤尾木을 출항, 인근 포구인 能野(요키노)·住吉(스미요시)·島間에도 들러 배를 조달했다. 12척의 예선대가 남만선의 표착 현장에 도착한 것은 하룻밤이 지난 8월26일이었다.
 
  예선들이 明國船에 밧줄을 걸고, 다시 예선끼리 엮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날씨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가을철이라 철야의 예선이 개시되었다. 별빛이 밝았다. 8월27일 아침, 남만선은 赤尾木에 입항했다. 항내로 들어와 계류된 남만선에 니시무라가 먼저 승선한 데 이어 준수한 모습의 소년이 승선했다. 이 소년이 다네가시마의 島主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남만선에 탄 110여 명은 비로소 「살았다」고 실감했다고 한다.
 
 
 
 
  사격시범을 보인 포르투갈人
 
  아코우기(赤尾木)에 입항한 明國船은 島民들에게 「南蠻船」이라고 불렸다. 연일 해변에는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남만선은 돛줄이 끊어지고, 노가 부러지고, 선창도 크게 손상을 입어 수리하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승선자 110명은 항만 인근 慈遠寺(시온지)의 宿坊(숙방)에 출항 때까지 기거하게 되었다.
 
  慈遠寺는 島主인 種子島氏의 祈願寺(기원사)였다. 숙방은 36坊을 구비, 승선자 전원을 수용하기에 충분했다. 이 숙방엔 전년부터 사카이(堺: 지금의 오사카)의 화가 株幸(주행: 주코우)와 日向(휴가) 禪寺의 주지 住乘院(주승원)이라는 학승도 머물고 있었다. 住乘院은 중국의 구어체인 白話도 구사했다. 株幸은 남만선과 남만인을 寫生(사생)하는가 하면 그들의 진귀한 생활 및 일용품에 관해 기록하기도 했다. 승선자 중에는 南蠻語를 구사하는 玉城(타마구스쿠)란 이름의 琉球(유구) 여성도 있었다. 島主 토키타카는 住乘院의 통역으로 王直과, 玉城의 통역으로 남만인과 매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토키타카는 남만인이 가지고 있던 筒狀(통상)의 철봉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타마구스쿠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남만인 하나가 웃으면서 그 철봉을 토키타카에게 건넸다. 남만인은 둥근 납구슬과 검은 가루를 보이면서 설명했지만, 타마구스쿠의 통역만으로는 토키타카의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남만인은 그 둥근 구슬이 날아가 사슴이나 산돼지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남만인은 實演(실연)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토키타카는 家老, 니시무라, 株幸, 住乘院 등을 거느리고 慈遠寺 뒤편 언덕에 올라갔다.
 
  남만인은 들판의 좀 높은 곳에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큼직한 조개껍질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철봉에다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집어넣은 다음, 불 붙인 끈을 끼웠다.
 
  사격거리는 50보였다. 남만인은 철봉의 한쪽에 오른 뺨을 대고 왼눈을 감은 채 조개껍질을 겨냥했다. 다음 순간, 철봉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과 굉음…. 모두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눈들은 발사된 구슬의 방향을 쫓았다. 표적의 조개껍질이 산산히 부숴졌다. 토키타카의 눈빛이 홀린 듯 반짝거렸다. 남만인이라고 얼마쯤 멸시하던 마음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 등장한 최초의 철포는 가마쿠라 막부 때 몽골군이 침입했을 당시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것은 이름만 철포일뿐 화약을 가득 채운 鐵球(철구)였다. 그후 중국계의 소총도 전해졌으나 이것은 대포를 소형화한 것에 불과하여 명중률이 극히 낮았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한 철포는 명중률이나 사정거리, 파괴력에 있어 중국제 무기를 훨씬 능가했다.
 
 
  鐵砲에 매료된 젊은 島主
 
  토키타카는 남만인으로부터 빌린 철포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무기의 기능과 조작법을 열심히 배웠다. 사격의 비법에 대해 남만인은 성의껏 가르쳤다. 불의의 사고를 우려하여 소년 島主에게 新무기 조작을 만류하던 家臣들도 이제는 호기심 이상의 정열에 휩싸였다.
 
  남만인의 입항 12일째인 9월9일, 토키타카는 철포 試射(시사)를 자원했다. 그동안 그는 사격 예비훈련에 몰두했었다. 장소는 역시 春日山으로 이어지는 언덕. 한복판에 검은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판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거총에 이어 조준. 家臣들뿐만 아니라 남만인들도 숨을 죽였다. 토키타카는 방아쇠를 가만히 뒤로 당겼다. 발사와 동시에 굉음…. 표적판은 두 개로 갈라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토키타카는 그동안 궁술을 연마해 왔지만, 아직은 미숙한 상태였다. 그런데 철포는 달랐다. 단 한 방에 표적판이 두 조각 나버리는 데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철포야말로 야쿠시마 탈환을 몽매에도 잊지 못했던 그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던 것이다.
 
  토키타카는 남만인에게 철포를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남만인도 호의적이었다. 토키타카는 家臣들과 상의해 총값으로 永樂錢(영락전) 2000疋(필)을 지불했다고 한다. 永樂錢이라면 明의 永樂帝 때 주조된 돈으로서 오늘날의 달러화처럼 국제적 신용을 누렸다. 당시 일본에서는 永樂錢을 수입하여 국내 통화로 사용했다.
 
  영락전 2000필을 오늘날의 엔화로 환산하면 1억 엔(韓貨 10억원)에 상당한다. 거금의 총값을 받은 남만인은 토키타카에게 철포 1정을 더 증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총 하나의 값이 한화 5억원에 달했던 셈이다.
 
  生殺與奪權(생살여탈권)을 가진 島主가 표류인들이 소지한 조총 하나를 매입하면서 과연 그런 거금을 지불했겠는가―최근 일본의 연구자들도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포르투갈人들이 타고 온 남만선의 수리비와 慈遠寺에서의 숙박비용은 어떻게 계산되었는가―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種子島銃의 완성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의 국산화를 위해 섬의 全기능이 집중되었다. 원래부터 다네가시마는 砂鐵(사철) 산지가 해안을 따라 널리 분포되어 있어 제철업이 발달했던 섬이다. 제작 책임은 刀匠(도장)이었던 야이타 킨베(八板金兵衛)에게 떨어졌다.
 
  철포 제작은 모루(대장간에서 사용하는 쇠 받침대)부터가 연구 대상이었다. 일본도를 만들어 온 경험, 感, 솜씨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異質의 세계였다. 제1의 난관은 80cm 길이의 筒(통) 제작이었다. 결국 짧은 筒을 깎고, 그것을 용접하여 하나로 붙였다.
 
  제2의 난관은 銃身의 筒底(통저)를 수나사와 암나사로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암나사 깎는 법을 알지 못해 그냥 붙이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이런 초보단계의 철포라도 만들 수 있었던 데는 킨베의 딸 와카사(若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16세였던 와카사는 아버지의 기술적 난관을 해결하려고 포르투갈人 牟良叔舍에게 몸을 바쳤다. 현재, 니시노오모테市의 구모노시로(雲之城) 묘지에는 「와카사 忠孝碑」가 세워져 있다.
 
  種子島銃은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이것은 1544년 1월4일에 시작된 야쿠시마 탈환작전에서 기대 이상의 戰果를 올렸다. 그렇다면 왜 다네가시마 島民들이 야쿠시마를 탈환하려 했는지 잠시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야쿠시마 탈환 작전
 
  야쿠시마는 다네가시마(種子島) 서남쪽에 위치한 섬이다. 섬의 크기는 야쿠시마가 種子島보다 오히려 조금 크지만, 인구는 種子島가 야쿠시마보다 2배 이상 많다. 種子島의 13대 島主 시게토키(惠時)에게서 야쿠시마를 탈취했던 네지메 타카시게(寢尊重)는 규슈의 남단 오스미 반도의 領主이다. 시게토키의 딸은 네지메 타카시게의 부인이기도 하다.
 
  당시 규슈의 남부지역에선 사쓰마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가 최대 세력이기는 했지만, 肝付씨·寢씨·本田씨 등이 反시마즈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규슈 북부지역의 최강자인 豊後(붕고)의 大友宗麟(오토모 소린)은 사쓰마 정벌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네지메씨는 種子島의 시게토키에게 反시마즈 연합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시마즈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種子島의 시게토키로서는 反시마즈 연합에 가담하기 어려웠다.
 
  1543년 3월23일, 네지메氏는 兵 300을 이끌고 種子島의 북단 우라다(浦田)에 기습 상륙했다. 다음날에는 種子島 측에게 방어전의 틈도 주지 않고 일거에 內城으로 진공, 점령해 버렸다.
 
  島主 시게토키는 배를 타고 야쿠시마로 도주했다. 뒤처리는 그의 장남 토키타카(堯時)가 맡았다. 14대 島主가 된 토키타카는 네지메씨에게 야쿠시마를 할양해 주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따라서 토키타카로서 1544년 1월의 야쿠시마 진공은 복수전이었다. 토키타카 軍은 야쿠시마에 기습 상륙하여 나카다-요시다-미야노우라-구스카와로 진격, 야쿠시마에서 네지메氏 세력을 몰아냈다. 이때 種子島 조총은 그 발사음만으로도 네지메 세력을 압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완성도가 낮은 鳥銃이었던 만큼 총저에 화약의 찌꺼기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導火孔(도화공)이 잘 막혔고, 連射할 때는 화약재가 타다 남아 불발 또는 폭발의 위험까지 있었다. 결함투성이의 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철포의 위력은 곧장 주목을 받아 그 일부가 사쓰마(가고시마)로 전파되었다.
 
  남만인 중의 하나인 「핀트」는 豊後의 영주(大名)인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에게 초대받기도 했다. 「핀트」가 種子島로 歸島할 무렵에 남만선은 수리를 끝내고 중국 양자강 하구의 寧波를 향해 닻을 올렸다.
 
  種子島에서 돌아온 핀트 등 3명은 곧 寧波에 거주하던 포르투갈人들 사이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지금까지 상품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철포가 예상 이상으로 환영받았다는 것, 南蠻상품이라면 무엇이든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寧波의 포르투갈人들은 種子島를 다시 방문하기로 작정했다. 이번에는 復航船(복항선)을 포함, 16척의 대선단이 조직되어 種子島로 출항했다. 그러나 그중 15척은 풍랑 때문에 실종되고 1척만 種子島의 能野(요키노)에 입항했다. 이 배에는 남만인과 결혼했던 八板金兵衛의 딸 와카사(若狹·약협)도 타고 있었다.
 
  전년에 토키타카가 입수했던 총의 탄환은 13g짜리였지만, 이번에 남만인들이 상품으로 가져온 총의 탄환은 30g짜리였다. 이번의 승선자 중에는 철포 제작기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술자로부터 암나사를 깎는 방법, 短冊型(단책형)의 細長한 철판을 비스듬히 말아서 筒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드디어 완전한 일본판 철포가 제작되었다.
 
 
  亂世를 살아가는 지혜
 
  철포가 다네가시마에 전래될 무렵, 일본은 각지에 군웅이 할거한 戰國시대였다. 다네가시마의 島主 토키타카는 철포 제작기술이나 화약 調合法을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포르투갈人에게 입수한 철포를 규슈의 最强 사쓰마의 시마즈 다카히사에게 헌납했다. 이것이 난세에서 살아남는 小영주의 지혜였다.
 
  사쓰마의 다카히사는 바로 이 철포를 인근의 加治木城 공격 때 사용, 그 우수성을 입증했다. 雄藩(웅번) 시마즈氏의 客臣으로서의 다네가시마氏가 明治維新 때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토키타카의 선견력·정치력의 교묘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44년,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포르투갈 철포 2정 중 1정은 당시 僧兵의 지휘자로 이름을 떨치던 기슈 네고로사(紀州 根來寺)의 스노기노보(衫坊)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네고로도 철포의 명산지가 되었다. 1545년, 다네가시마에 체류하고 있던 사카이의 상인 다치바나야(橘屋又三郞)도 철포의 구조와 제조법 등을 습득한 후 사카이로 돌아왔다. 원래 사카이에는 鑄物師(주물사)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카이는 철포의 양산체제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오미(近江)의 구니토모(國友)촌에도 제조기술이 전해져 철포 명산지가 되었다. 이렇게 사카이, 네고로, 구니모토의 3大 철포 생산지가 형성된 것은 포르투갈 사람이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지 겨우 2~3년 사이의 일이었다.
 
  철포는 차츰 일본 전국으로 유포된다. 그러나 아직은 활의 효용성에 미치지는 못했다.
 
 
  노부나가의 新전술-연속파상사격
 
  철포의 전략전술적 가치에 눈뜬 일본 최초의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長) 싸움에서 철포대의 운영으로 일본 최강이었던 다케다(武田)씨의 기마부대를 격파했다. 철포의 압도적 위력이 발휘된 결전이었다. 나가시노 싸움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1575년 5월21일,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은 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쓰요리의 기마부대와 격돌했다. 전투가 벌어진 나가시노는 미카와 동쪽의 이마가와(今川)·다케다(武田)·오다(織田)·도쿠가와(德川)씨가 인접한 지역이었다.
 
  나가시노城은 원래 이마가와氏 소유였는데,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戰死 후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572년 「戰國 제1의 武將」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공격을 받고 다케다氏가 소유하게 되었다. 신겐은 계속 공격하여 이에야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는데, 불운하게도 이에야스軍의 소총수에게 저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고 본거지 고슈(甲州)로 회군 중 사망했다.
 
  신겐의 사망 후인 1573년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勝賴)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서쪽 영지의 확대를 위한 공세를 벌였다. 1575년, 가쓰요리는 1만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이에야스의 소유가 된 나가시노城을 공격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 3만8000명의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노부나가 軍은 馬防冊(마방책)으로 진지를 굳힌 나가시노 들판으로 가쓰요리의 기마대를 유인했다. 이때 노부나가는 3000정의 조총으로 무장된 철포대를 3개조로 운용, 연속파상사격으로 가쓰요리의 기마대를 궤멸시켰다.
 
  新무기 철포의 출현으로 이제까지의 전투방식이 일변했다. 교전 양측의 무사가 하나씩 말을 타고 나서 창과 칼로 맞겨루던 싸움은 이제 구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싸우는 일이 없어졌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서로 죽이게 되었다. 이후 戰國武將들은 철포의 조달에 혈안이 되었다.
 
  일본어에서 앞뒤 생각 없이 무턱대고 저지르는 경솔함 또는 무모함을 나타내는 낱말은 無鐵砲(무데뽀)이다. 결국, 鐵砲 없이 전투하는 것은 경솔하거나 무모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다네가시마로부터 철포 제조방식을 전수해 양산체제로 들어간 지역은 사카이(堺)·쿠니토모(國友) 등 近畿지역이었다. 사카이와 쿠니토모를 장악한 노부나가가 新무기 확보에 유리했음은 물론이다.
 
  아시카가 幕府의 마지막 쇼군(將軍)도 추방해 버린 노부나가는 전국통일의 문턱에 섰다. 그런 절정기의 노부나가도 1982년 6월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하루밤을 묵다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아 토멸되었다. 이를 「혼노지의 變」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下剋上(하극상)의 시대였다.
 
  「혼노지의 變」 발생 10여 일 후 노부나가의 副將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야마사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 軍을 격파하고 최강자로 부상했다. 히데요시는 1585년 關白, 1586년 太政大臣에 임명되고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臣)란 성을 받았다.
 
  그는 1587년 규슈, 1590년 關東·東北지역을 평정해서 전국통일을 달성했다. 일본 전국통일을 이룩하는 오다하라(小田原) 전투 직전에 히데요시는 이미 총병력 30만 명에 鐵砲 수만 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후 論功行賞(논공행상)으로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당했거나 그 일부를 빼앗긴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또한 恩賞을 받은 다이묘(大名)와 호족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충성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히데요시의 구상이었다. 그 위에 히데요시는 朝鮮·中國·印度를 아우르는 일종의 大아시아제국 건설을 꿈꾸는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었다.
 
 
  임진왜란 初戰의 승패 결정한 鳥銃
 
  1592년 4월13일 저녁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 1만8000명이 800척의 배에 분승, 부산포에 상륙했다.
 
  4월14일, 고니시軍은 부산진성을 공격, 3시간 만에 함락시켰다. 조선군이 쏜 화살은 맞아도 즉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일본군이 쏜 철포, 즉 鳥銃(조총)을 맞으면 그대로 즉사했다. 처음 보는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의 사기는 여지없이 떨어졌다. 4월15일, 東萊城은 공격개시 후 2시간 남짓 만에 함락되었다.
 
  히데요시는 히젠(肥前: 규슈 西岸)의 나고야(名護屋)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고니시의 제1군에 이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제4군 등을 차례로 출정시켰다. 마지막 부대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제8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날은 5월3일. 8개 軍의 총병력은 15만8000명이었다.
 
  고니시의 제1군은 이후에도 無人之境(무인지경)을 가듯 北上했다. 尙州에서 순변사 李鎰(이일)의 부대를 일축한 고니시軍은 이틀 후인 4월27일 천험의 요새 鳥嶺(조령: 새재)를 넘어 都순변사 申砬(신립)이 거느린 3000명과 충주의 彈琴臺(탄금대) 앞 벌판에서 맞붙었다. 다음은 「懲毖錄(징비록)」의 관련 기록이다.
 
  <신립의 군사들은 충주 서쪽 탄금대 앞,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강물 좌우에는 논이 있어 벼가 무성하게 자라고, 또 길길이 잡초가 우거져 사람과 말이 내달리기에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얼마 있다가 왜병이 단월역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길을 나누어 진격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적의 한 무리는 산을 넘어 동쪽으로 몰려오고, 또 한 무리는 강을 끼고 달려왔다. 먼지는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총소리는 땅을 울렸다>
 
  신립은 탄금대 앞에서 기마부대를 거느리고 背水陣(배수진)을 쳤다. 그는 고니시의 보병부대를 기마부대로 짓밟을 작정이었다.
 
  <신립은 말을 몰아 적진으로 쳐들어가려고 두 번씩이나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쳐들어갈 수 없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그는 말머리를 돌려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忠州의 敗報가 서울에 전해진 것은 4월28일 저녁. 4월30일 새벽, 宣祖 임금은 피란길에 올랐다. 5월3일, 고니시軍은 서울에 입성했다. 일본軍은 破竹之勢로 북상했고,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鐵砲隊(철포대)였다. 種子島에 철포가 들어온 지 50년. 이때 이미 일본은 鐵砲를 양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기병과 보병(足輕·아시가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철포대를 주력으로 한 사격과 기동의 戰法은 전국시대를 통해 이미 단련되어 있었다.
 
  朝鮮 정부도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鐵砲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590년 3월, 대마도의 島主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사신으로 와서 宣祖에게 공작 두 마리와 조총 등을 진상했다. 試射(시사)를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발사음이 크고 탄환이 200m쯤 날아갔지만, 50m의 지근거리가 아니면 치명상을 가하지 못한다. 더욱이 비 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으면 화약의 調合이 어렵고, 발사까지에 시간이 너무 소요된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조선의 활은 200m 상거한 적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으며 20~30발의 화살을 계속 날릴 수 있다.
 
  柳成龍(유성룡)의 「懲毖錄(징비록)」에 따르면 요시토모가 宣祖에게 진상한 철포는 그 후 軍器司(군기사) 창고에 처박혀 버렸다. 일본의 철포는 전래 50년 만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병기로 발전해 있었다. 이 철포가 「鳥銃(조총)」이라고 불린 것은 날아다니는 새도 명중시킬 수 있다고 하여 명명된 별칭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에야 조선 정부도 훈련도감을 설치, 날쌘 병졸 수천 명을 뽑아 조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李舜臣의 함대가 일본 水軍을 압도한 까닭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인 1592년, 朝鮮 육군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했으나 李舜臣(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水軍은 일본 水軍에게 옥포해전(5월2일)에서부터 부산포해전(9월1일)에 이르기까지 10戰10勝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군의 개인 화기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것은 물론 조총이었다. 일본 水軍이 언제부터 조총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578년의 이시야마(石山) 전투 때부터 해전에서도 조총 사용이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2차 이시야마 전투 때 오다 노부나가 휘하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의 水軍이 사용했다는 大鐵砲(대철포: 대형 조총)는 주목되는 병기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 水軍의 大鐵砲도 조선 水軍이 보유한 銃筒(총통: 대포)의 위력이나 사정거리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海戰에서는 육지에서와는 달리 조총의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선 水軍의 승리에는 물론 李舜臣 장군의 탁월한 전략·전술에 힘입은 바 크지만, 병기와 軍船의 우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壬亂 시기에 조선의 板屋船(판옥선)에 맞선 일본의 軍船은 세키부네(關船)와 아타케(安宅船)였다. 그러나 판옥선은 强度面에서 일본의 군선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뱃전이 높아 일본 수군이 長技로 삼아온 登船肉薄戰(등선육박전)을 어렵게 했다.
 
 
  兵站線 유지 못해 후퇴하는 倭軍
 
  조선 水軍이 임진년(1592) 해전에서 거둔 全勝은 전체 전쟁국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이 분쇄됨으로써 西海연안 항로를 통한 병참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또한 陸路에 의한 병참선 유지도 전국 곳곳에서 봉기한 義兵의 활약으로 왜군에겐 至難한 일이 되었다.
 
  1593년 1월7일, 李如松이 이끄는 明軍 4만, 조선군 1만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의 고니시軍은 보급선이 막혀 굶주리고 있었다. 원래 히데요시는 육군이 북상하는 속도에 맞춰 補給船도 서해를 통해 우회시켜 군량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때의 전투 모습을 「懲毖錄(징비록)」은 『明나라 군사는 대포와 불화살로 공격하는데, 대포 소리는 땅을 울리고 몇십 리 안에 있는 산악이 모두 흔들리는 듯 요란하였다』고 표현했다. 明軍의 대포가 倭軍의 조총을 압도한 전투였다.
 
  그날 밤 고시니의 부대는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러나 후퇴의 강행으로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부르터서 제대로 걸음을 옮기는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니시軍은 황해도 방면에 포진해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대의 구원을 받아 겨우 서울로 후퇴했다.
 
  李如松의 明軍은 평양성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서울로 남진하여 왜군의 주력부대를 격멸할 작전을 세웠다. 이후에 전개되는 벽제관 싸움은 그 후 東아시아史의 진전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전투이다.
 
  서울에 집결한 왜장들은 숙의 끝에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을 선봉으로 삼아 총력의 반격을 시도했다. 고바야가와 軍은 礪石峴(여석현)에 진을 쳤다.
 
 
  왜군의 鳥銃 공격에 혼이 난 李如松
 
  1월27일 오전 7시경 礪石峴에서 쌍방의 선봉대가 조우, 전단이 열렸다. 明의 선봉장 査大受는 왜군 선봉대의 조총 공격을 받고 벽제역까지 후퇴했다. 이 소식을 들은 李如松은 기마부대를 이끌고 惠陰嶺을 넘어 벽제관으로 급행, 望客峴(망객현)으로 진격했다. 여기서 明·倭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왜군은 왜군의 대부대는 3隊로 나뉘어 明軍을 공격했다. 砲軍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기병만으로 싸우던 李如松 軍은 결국 왜군에 포위되어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대패했다. 뒤늦게 도착한 부총병 楊元(양원)이 거느린 火軍의 도움을 받아 李如松 軍은 死地에서 벗어나 파주-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후퇴했다.
 
  李如松은 평양에서의 승전에 고무되어 왜군을 얕잡아 보고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 진격하다가 왜군의 조총 전술에 결정타를 얻어맞았다. 이 싸움에서 李如松은 李備禦(이비어)·馬千摠(마천총) 등 직속 맹장과 요동병을 다수 잃었다. 이후 李如松은 倭軍과의 전투를 회피, 倭軍의 주력부대를 섬멸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싸움에 동원된 明軍 병력은 4만3000명이었고, 倭軍의 병력은 7만1000명이었다.
 
  패전 직후 李如松은 대성통곡을 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왜 그랬을까.
 
  李如松이 거느린 明軍은 요동병과 절강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것은 대포를 능숙하게 구사한 절강병이었다. 李如松으로서는 절강병보다 자기의 직속부대인 요동병의 戰功이 더욱 바람직했다. 그런데 백제관 싸움에서 직속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요동병의 핵심은 李如松과 擬制的(의제적) 혈연관계를 맺은 家兵들이었다. 많은 家兵의 戰死는 요동병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李如松은 1597년 遼東總兵官(요동총병관)이 되었으나 이듬해 吐蕃(토번: 티베트)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는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흥기하고 있었다. 李如松의 요동병은 여진족의 대두를 막는 明나라의 최전선 부대였다. 여기서 李如松의 家系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女眞族의 興起
 
  李如松의 조부는 평안도 江界 출신으로 요동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李成梁은 요동의 左都督으로 출세했던 인물이다. 만주 全域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李成梁은 나중에 淸 태조로 추존되는 建州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에 대해 견제와 협력의 관계를 유지했다.
 
  누르하치는 李成梁에게 공물을 바치는 한편, 가만히 여진족을 결속시켜 세력을 키워 갔다. 누르하치가 견제를 받아야 할 시점에 공교롭게도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감행되어 明國으로선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한반도에서 東아시아 3國이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정황에서 누르하치는 조선 정부에 원군을 파견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그만큼 강성해졌음을 나타낸 일이었다. 누르하치의 제안은 조선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백제관 전투 이후 李如松은 평양에 주둔하면서 沈惟敬을 倭軍 진영에 파견, 화의를 교섭했다. 왜군은 조선 水軍의 활약으로 본국과의 병참선이 위협받고 의병들의 유격전에 시달린데다가 惡疫(악역)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했다.
 
  그러나 明國과 倭國의 화의교섭은 히데요시의 무리한 화의조건(조선 8道 중 4道의 할양 등)에 의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1597년 1월 倭軍의 재침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丁酉再亂(정유재란)이다. 이때 李舜臣은 왜군의 反間之計(반간지계)에 넘어간 宣祖의 미움을 받고 투옥되었다. 李舜臣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元均은 동년 7월15일 왜적의 유인에 빠져 칠천양 해전에서 대패했다.
 
  倭軍은 동년 8월16일 남원을 함락시키고 공주·직산까지 점령하였으나 9월7일 직산 북방 소사평에서 朝·明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9월15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李舜臣이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을 명량해전에서 격파했다. 倭軍은 남해안 일대로 후퇴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1598년 7월, 조·명軍은 4路軍을 나뉘어 총공격을 개시했다. 麻貴(마귀)는 울산의 가토를, 董一元(동일원)은 사천의 시마즈를, 劉綎(유정)은 순천의 고니시를, 李舜臣과 진린은 倭의 수군을 공격했다.
 
  이 총공격에서 특히 董一元의 中路軍은 사쓰마의 藩主(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궤멸적 타격을 당했다. 시마즈 휘하에서는 種子島의 16대 島主 히시토키(久時)가 복무했다.
 
  1598년 8월18일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病死했다. 倭軍은 히데요시의 사망에 따라 철군을 시작했지만, 순천의 고니시 軍만은 李舜臣에게 퇴로를 봉쇄당했다. 고니시는 사천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와 창선도에 주둔해 있던 요시토모(宗義智: 고니시의 사위)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요시토모의 왜군 함대 500척은 고니시를 구출하기 위해 西進했고, 李舜臣·진린의 연합함대는 이를 迎擊하기 위해 東進했다. 여기서 7년 전쟁의 최후 결전인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이 결전에서 李舜臣은 200여 척의 적선을 격침시켰으나 불행히도 敵 조총의 유탄을 맞아 전사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고니시는 탈출에 성공했다.
 
 
  東아시아 3國의 운명
 
  前後 7년간에 걸친 왜란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대변혁을 가져왔다. 조선 8道가 거의 전장화하여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중국대륙에서는 임진왜란의 휴유증으로 明國이 멸망하고 그 틈을 타 창업한 여진족(만주족)의 淸國이 새로운 정복왕조로 군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死後에 도요토미 정권이 패망했다. 1600년 7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東軍 10만 명과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를 받드는 西軍 8만 명이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당초 西軍에 가담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秋秀)가 갑자기 배신하여 西軍을 공격는 바람에 東軍이 압승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왜장들도 세키가하라 전투에 의해 그 운명이 엇갈렸다. 東軍에 가담했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다이묘(大名)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西軍을 지휘했던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전 후 도주했으나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역시 西軍에 가담했던 우키다 히데이에는 약 50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病死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히데요리의 편에 섰던 모리 테루모토는 83만5000석 大名에서 37만 석 다이묘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西軍에 참전했으나 예외적으로 감봉처분을 받지 않고 石高 60만 석 大名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것은 사쓰마에 온존되어 있는 시마즈家의 전투능력을 이에야스로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승리로 정권 장악에 성공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에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이 되어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염려스러웠던 일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정권 만회를 노리는 오사카 세력이었다. 이에야스는 2차에 걸친 싸움을 벌여 1615년 마침내 오사카城을 함락시켰다. 오사카城이 불타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기미(淀君)와 히데요리가 자결함으로써 도요토미家는 멸망했다.
 
  필자는 12월22일 오전 8시, 쾌속선 「토피」에 승선, 다네가시마의 관문인 니시노오모테港을 출항했다. 「토피」는 오전 10시40분 가고시마港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우연히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鐵砲는 바로 이 항로를 따라 일본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다네가시마-가고시마 항로가 鐵砲의 北上路였던 만큼 필자에게는 결코 그것이 단순한 바닷길이 될 수 없었다. 철포가 東아시아 3國의 命運을 바꿔 놓지 않았던가.● 

출처: http://blog.naver.com/redjack33/40012648698
 
 
 
 
 


  
[펀글]일본에 전해진 포르투갈 문물 - 화기와 갑옷 
 
번호 : 7042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28   스크랩 : 0   날짜 : 2006.05.14 00:09
 
이정훈 (cfghh, hanmail.net)
2004/12/09 (16:38)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2162
Access : 2734 , Lines : 67   
일본에 전해진 포르투갈 문물 - 화기와 갑옷 

철포(鐵砲) - [조총鳥銃,Arquebus]


*** 철포 전래에 관한 아래 글은 예전 디펜스코리아 고대전쟁사 게시판에 육개장님이 올리신 글을 부분 인용한 것입니다. ***


일본에서의 철포(鐵砲)- Arquebus - 의 전래는 날짜까지도 분명히 기록된 1543년 8월 25일 규슈 남부의 외딴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인이 탄 남만선 한 척이 태풍에 의해 표착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파에서 출발한 이 배의 선장은 왕직(王直)이라는 중국인 이었는데, 배의 나포를 염려해선지 포르투갈인의 배로 주장하며 자신은 오봉(五峯)이라는 가명으로 선장이 아닌 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체 선원중 포르투갈인은 항해사 등 단 3명, 나머지는 중국인과 류큐인으로 총 백수십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아직 왕직이 일본 내에 근거를 확보하기 이전이므로 거기까지 뭐하러 갔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지만 적어도 외딴 섬 다네가시마가 목적지가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어쨌거나 태풍으로 손상이 심한 이 배의 수리를 위해 6개월 정도 이 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유는 쇠못이 없어 이를 조달하는데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함) 그 동안에 이들은 다네가시마 도주나 도민 뿐아니라 규슈의 번주에게도 빈번히 왔다갔다하며 교류를 합니다. 왕직이 나가사끼에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협상을 한 시기도 이 시기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철포의 전래일 것입니다. 다네가시마 도주인 다네가시마 도키사다(種子島時堯)는 자신과의 면담 자리에 들고 나온 포르투갈인의 철포를 보고 시험사격을 시켜본 뒤, 그 위력과 상품적 가치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인을 꼬셔 그 중 프란치스코 제이모트라는 친구에게 거금 금 2000량(지금 돈으로 한 10억)을 주고 철포의 사용법을 사들였습니다.

그런 후에 다네가시마에서 가장 유능한 대장장이 八板金兵衛淸定 에게 이 철포를 주고 복제생산을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다음 해인 1544년 1월 배는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는 이미 발사가능한 철포가 완성되어 포르투갈인들도 그 복제실력에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1544년말쯤에 다네가시마는 약 50정의 조총을 만들어 규슈에 수출을 개시합니다. 이것도 굉장한 장삿속이었던 것이 처음 다네가시마 도주가 프란치스코에게 산 조총은 2정이었는데 하나는 복제의 원형으로 쓰도록 남겨두고 하나는 즉시 사쓰마 번의 시마즈(島津)에게 바쳐 화력시범을 합니다. 시마즈는 또 이를 쇼군 아시카가(足利)에게 바칩니다. 즉 생산도 하기 전에 샘플을 먼저 돌려 구매력을 확보해놓은 셈입니다. 그러나 시마즈도 아시카가도 다네가시마에 사람을 보내 제조법을 배워 자체 생산을 하게 하니까 다네가시마의 독점생산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때까지 다네가시마 도주는 투자한 밑천의 수백 배를 뽑고도 남았을 겁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철포가 끼친 영향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는 군비 경쟁의 시대에 들어갔다는 것일 겁니다. 그 이전에야 규모가 다이묘도 깡다구로 버틸 수 있었겠지만 철포의 등장 이후에는 값비싼 화승총으로 무장한 철포대를 갖출 만큼의 경제력을 가지는 대규모 다이묘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철포는 일본의 전국시대 종료의 큰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무기기술과 이를 취득할 수 있는 경제력의 차이에 의해 전투력의 차이를 극명히 벌려놓게 되니까.

 


 

 

 

 

 

남만 갑옷과 투구


화승총과 함께 당시 일본이 관심을 가졌던 포르투갈제 무기는 강철제 판금갑옷과 투구였습니다.작은 철판이나 가죽조각을 끈으로 복잡하게 연결해서 만드는 오오요로이나 당세구족밖에 모르던 일본인들에게 철판을 통째로 두드려서 만드는 유럽식 갑옷의 방호력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전국시대 무장들의 상당수가 판금 갑옷을 입고 다녔고 오다 노부나가도 선교사를 통해 유럽에서 수입한 강철제 흉갑을 자주 착용했으며 그 모습이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 나오는 노부나가의 모습입니다. 다만 일본인의 체격으로 30킬로그램에 가까운 유럽제 판금갑옷을 모두 착용하는건 무리였는지 흉갑과 투구는 남만식, 팔다리를 보호하는 갑옷은 기존의 당세구족 방식으로 절충해서 만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진의 갑옷은 우에스기 겐신의 남만갑입니다. 동체를 비롯하여 투구가 판금갑옷화 되었고 나머지 철판들도 튼튼한 남만갑으로 준비되었습니다. 다만 형식은 일본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갑옷은 겐신의 진짜 갑옷은 아닙니다. 영화용으로 창작된 갑옷이죠. 그 영화의 이름은 ten-to-chi-to(天과地)..saionji氏의 同名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감독은 kadokawa氏)

 

 

 

아래는 포르투갈식 모리온 투구를 개량해서 만든 가부토 입니다.목 보호대를 추가하고 앞부분에 챙을 달고, 양측면에 황금색 용을 그려넣었으며 제작연대는 1580년대입니다.

 


 


비도(승우)  귀중한자료 감사드립니다^^~~스페인식갑옷의 일본변형버전..와우~정말특종이군요^^~모리온투구주변의 벗꽃무늬가 좀거슬렸다는.ㅋㅋ 아무튼 귀중한자료감사드리고 철포의경우 사이가의 철포제작,운용도유명하죠.그사이가의 철포대 우두머리 스즈키마고이치로가  2004-12-09 18:29:15
220.76.3.81 
비도(승우)  임진왜란때 1호항왜 사야가 김충선장군이란 추즉도있죠.그만큼 사이가의 철포도유명했고 사쓰마번과 높은교류가 있었죠.암튼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2004-12-09 18:31:15
220.76.3.81 
그런데, 설마...  \"베니치아의 개성상인\"에서 나오던 내용... 즉, \"다네가시마라는 이름의 일본제 조총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었고, 또한 그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았다\"는 내용... 설마 진짜 아니겠죠? *^^;;;  2004-12-09 20:44:08
spartacus2 
뭐,  바사호가 스웨덴 국왕 앞에서 시험항해 및 발포시범 도중 배가 전복되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나... 베네치아 공화국이 민간에게 조선소를 매각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사람 좀 멍~하게 만들지만요... =..=;  2004-12-09 20:45:41
spartacus2 
슈타인호프  다네가시마하고 조선소 이야기는 분명 100% 구랍니다. 하지만 바사호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이면공작에 관한 이야기야 분명 구라지만 바사호가 첫 시험항해에서 전복, 침몰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2004-12-09 20:59:08
steinhof 
이정훈  화승총의 원조인 유럽에서 복제품을 수입할 이유가 없죠..^-^  2004-12-09 21:52:25
222.108.104.212 
이미 이 당시  부터 아시아는 유럽의 무기를 필요로 했지만 유럽은 아시아의 무기를 필요로하지 않았습니다.  2004-12-09 21:53:37
222.108.104.212 
김수영  뭐 주로 당시 유럽에서는 일종의 양각대가 필요한 대형 머스켓위주였는데 다네가시마같은 총이 선호될 상황은 아니었지요. 프랑스 앵발리드박물관에서 봤는데.. 정말 크더군요.. 당시 머스킷은.. 한명이 쏘기엔 벅차보일 정도로...  2004-12-09 22:10:31
211.204.117.55 
spartacus2  으음... 시험항해가 아니라 \"첫 출격 도중\" 이었는 줄 알았거든요. ㅡㅡ;  2004-12-09 22:51:49
spartacus2 
모내기  일본에 전래된 총은 군용이 아닌 민간용 사냥총이었다는데 사실인지요...  2004-12-09 23:27:56
211.216.116.159 
정호찬  좋네요. 판금형 일본 갑옷도 색다른 멋이 있네요. 바사호는 근래에 와서 건져내 복원하지 않았나요? 어디서 컬러 사진을 본 듯 한데. 그리고 당시 유럽의 군용총을 수석총이고 그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화승총을 사냥용으로 썼다고 들었습니다.  2004-12-09 23:55:42
bebop 
code  일본의 조총이 동남아시아의 조총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사실일까?)  2004-12-10 00:17:50
211.107.149.246 
김수영  당시라면 구스타부스와 빌렌슈타인의 시대인데 아직 수석총이 군용총은 아닐겁니다. 머스켓과 장창병의 시대니까요. 아직은 화승총이 주력으로 운용되니까요. 그시대 유럽 군용총에 비해 일본조총이 새총같은건 사실이죠.  2004-12-10 00:45:44
211.204.117.55 
매드닥터  한가지 더 사족을 달자면 왕직의 왕자에 삼수변을 붙여주셔야 합니다 汪이에요 ㅎㅎ  2004-12-10 02:35:22
220.80.6.189 
날으는돈까스  바사호는 건져내서 바사호 전용 박물관에 전시되어있읍니다. 그런데 특별한 이벤트가 있으면 바사호 옆에서 식사(!)도 할수 있읍니다. 안내/설명하는 아가씨가 무척 이뻐요.  2004-12-10 20:26:35
161.122.34.98
 


 
  
[펀글]퍼온 글) 1585년경 스페인이 일본을 침공한다고 가정해보면? 
 
번호 : 6906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0   스크랩 : 0   날짜 : 2006.04.30 01:10
 
이정훈 (cfghh, hanmail.net)
2004/12/30 (08:53)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09
Access : 1224 , Lines : 131   
퍼온 글) 1585년경 스페인이 일본을 침공한다고 가정해보면? 

*** 일본의 역사관련 토론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1.당시 스페인은 유럽 최강으로 온 세상을 석권했었습니다만,  당시 일본과 충돌하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됩니까?
 덧붙여서 1585년이라고 하면 혼노지의 변 3년 다음입니다.


***답글 ***


2.일본은 져서 일왕, 히데요시, 이에야스는 아즈텍 황제 같이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3.펠리페 2세도 일부러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전쟁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남만 무역에 주력해서 양국이 모두 반영할 것 같다.


 

 

 


4.우선 해전에서는 일본이 스페인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육상 병력으로 극동에 돌릴 수 있던 것은 겨우 5~7만 정도.
이것으로는 일본의 제압은 무리. 일본육군의 화승총 보유량은 유럽 이상이었고, 실현되었다고 해도 겨우 인도의 고아와 같이 나가사키를 요새화하는 것이 한도였던 것이 아닐까?


 
 
 

 

 

 

 

 

5.스페인에 동조하는 영주 VS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이 격돌 결과 히데요시군은 에조로 퇴각 , , , 여기서 휴전.
스페인은 나가사키, 히라도등의 항구를 반식민지화해 무역을 독점.

 

 


 

 

 

6.수만명 규모의 파병은 어떻게 생각해도 무리일 것이다. 잉카 제국도 수백명 단위의 군세로 공략했었다. 정성공은 대만을 네델란드에서 빼앗았다. 스페인이 일본의 일부를 점령해도 결국 격퇴되고 말것은 뻔한일이다.


 
 


7.나도 상당히 어설픈 기억이지만 확실히 스페인은 이 시기에  네덜란드를 공략하기 위해 5만 이상의 군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등에서도 군사를 지원하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필리핀에도 수천 단위의 군사가 상주하고 있었고.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적대하고 있던 영국이나 오스만 투르크와의 강화라고 하는 큰 문제의 해결이 불가결하지만.


  


또한 프란시스코 카브랄 같은 「악마의 나라」일본을 「신의 나라」로 만들수 있도록 암약 하고 있던 선교사도 존재했다. 거기에 동조해도 이상하지 않을 크리스찬 다이묘나, 농민, 상인들도 있었다. 게다가 이 가상전쟁이 벌어지는 시기인 1585년 당시에는 아직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은 완결되지 않은 상태였다.도요토미에 대항해서 스페인과 결탁하는 세력이 있다고 가정해도 이상하지 않다.


8.유럽내의 전쟁에서는 수만명의 병력동원이 가능해도 극동까지 그 정도의 병력을 보내는 일은 불가능하겠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다해도 극동까지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은 충분하지 않다. 극동까지 원정가는 경우에는 보급 물자가 현저히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9.나도 수만의 병력이 한 번에 바다를 건너 수개월 이내로 일본과 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수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필리핀에 병력을 증강시키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게다가 스페인의 근원지는 아시아 각국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가사키등의 지역에다 포나 물자를 옮겨 들여 요새화해 둔다. 장기적인 전략으로서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겠는지?


10.당시의 스페인은 브라질 이외의 남미를 영유하고 있었으므로 드림 팀이 결성되어  일본은 압도적으로 불리해져 0-3 으로 패배.


11.시간이 흘러 일본은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고 이미 때가 늦게 됩니다. 현실의 역사에서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려 스페인의 야망이 무너지고 말았다. 

 

 

12. 나가사키등을 요새화해 조기에 거점을 쌓아 올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단지 그렇게 되면 시마즈와 협력 체제를 취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반대로 히데요시가 먼저 시마즈와 손잡으려고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은 일본과의 전쟁을 펠리페 2세가 선택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13.일본이 극동, 동남아시아의 스페인의 거점을 제압해 스페인 세력을 아시아로부터 일소 한다라고 하는 일은 무리인가?
노부나가가 살아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에도막부 초기에 마카오 공략이 논의되었다고 하는데  진짜인지? )

 

 


14.원양 항해 가능한 군선을 건조할 수 있다면 동남아시아의 스페인 거점을 공략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하던 당시의 일본수군 수준으로는 그런 작전은 무리이다.


15. 그 당시 일본의 해군력으로는 해외 진출은 어렵다.그리고 스페인이 나가사키에 요새를 쌓아 올리는 가정도 무리한 이야기이다.
   우선 어떻게 상륙할 것인가?

 

 

 

16.예를 들면, 오오무라는 나가사키의 일부를 예수회에 기부하고 있었고 주변 주민들의 대부분은 크리스찬이었다. 그러니까 상륙하기 전에 협조하는 세력을 사용해 거점을 만들어 두면된다. 접근전 중시의 일본해군과  비교해 화력과 속도를 중시한 스페인선에 걸리면 해상권은  용이하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후에 병력의 상륙을 실시하면 되지않을까?

 


Princeps  TV다큐에서 본 것 같은데(내용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중남미 제국들은 전쟁에서 [적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던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스페인이 여길 제압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을것이라는 내용도 들었던것 같구요(디스커버리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2004-12-30 11:21:58
Princeps 
Princeps  만약 그런 것이라면 중남미를 집어삼킨 스페인군은 운이 좋았을 수도 있는것이고, 일본에 그대로 통하기는 힘들었겠죠.  2004-12-30 11:23:52
Princeps 
Princeps  또 어설프게 기억나는것도 같은데, 아즈텍이나 그쪽 동네는 금속무기나 방어구를 거의 안썼다고 한 듯 싶습니다.(사실확인좀 부탁드립니다) 만약 그랬다면 근세, 근대까지 동銅이 주력수출품이였던 일본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2004-12-30 11:26:18
Princeps 
이정훈  아스텍이나 잉카제국의 주요무기는 나무곤봉이나 창에 흑요석칼날을 붙인 것 정도였습니다. 고대전쟁사 게시판에서 제이름으로 검색해보시면 아스텍 정복당시 스페인과 남미원주민의 무기를 묘사한 사진과 그림을 보실 수 있으실겁니다.  2004-12-30 15:15:48
222.108.104.151 
비도(승우)  1585년경 스페인이 일본을 침공해도 제가보기엔 스페인은 일본을정복하지 못합니다.일단 1588년플리머스해전때만 봐도 영국침공군이 1만명을 넘지안았습니다.물론 해군위주고 영국해군을일단격파한다는 취지의 전투였으나 수만명을 스페인으로부터 지구를 반바퀴돌아  2004-12-30 15:18:42
218.153.90.156 
비도(승우)  일본에투사할 운반력이 스페인에게 무리라고봅니다.플리머스해전때만 아르마다의 80프로는 투입되었다고보니까요.게다가 길어지는보급선과 나가사키등을 요새화하고물자를비축.필리핀에서 보급및병력점진적증파라는 수도 결국은본국에서부터 물자가필리핀으로당도해야  2004-12-30 15:21:07
218.153.90.156 
비도(승우)  가능한것이므로 보급의어려움이 크게작용합니다.물론 혼노사의변이후아직혼란스러우나 오사카성이완성되어가고 시즈카타케전투의승리로 히데요시의천하지배력이확고해자는상황이라 스페인에붙어도기껏해야규주의시마즈씨정도죠(3만5천규모병력).스페인일본정복-무리죠  2004-12-30 15:24:55
218.153.90.156 
들러갑니다  대항해시대의 대서양연안국가들의 중남미지배가 무력에 의한 정복에 의해서가 아닌 비전투적인 부분(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 중남미에 널리퍼져있었던 비라코차신앙등)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2004-12-30 19:15:26
aukuso 
들러갑니다  콩기스타도르들이 지닌 전염병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완전정복이 아닌 분할영유도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 상인이 무역을 위해 드나들었던 만큼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요.  2004-12-30 19:18:43
aukuso 
서봉덕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당시의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중국, 일본과는 싸우기보다는 협력하는 편이 더 이익이었던 상황이 더 우세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당시 서양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과 일본은 서구인이 장악한 남방지역의 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이기도  2004-12-30 20:31:14
222.99.229.165 
했습니다.  게다가 양국 모두 서구인들이 긴요하게 여기는 차와 도자기의 중요한 생산국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도 일부러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전쟁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남만 무역에 주력해서 양국이 모두 번영할 것 같다. \"이게 딱 이개념이죠.  2004-12-30 20:34:18
222.99.229.165 
과객  당시의 스페인은 1만명은 고사하고 5천명도 일본에 상륙시키는건 불가능했습니다. 계절풍에 의지하여 유럽에서 일본까지 가는데만도 최소 6개월 이상이 걸립니다. 이 정도 병력을 동아시아에 보내기 위해서만도 아르마다 절반규모의 대함대가 필요합니다.  2004-12-30 21:27:14
211.47.111.227

 

이정훈 (cfghh, hanmail.net)
2004/12/31 (01:28)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13
Access : 668 , Lines : 10   
역시 거리가 너무 멀다는게 문제겠죠 

16세기 당시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리스본에서 출발해 필리핀을 거쳐 일본까지 도달하는데 짧으면 6개월, 길면 거의 1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물론 여행 도중에 풍랑이나 그밖의 악천후를 만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지요. 1630년경에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령을 선포한 후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일본내의 크리스찬들을 학살, 탄압하는 사태도 벌어져도 유럽내에서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스페인이 구원병을 보낼 엄두도 내지 못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지리적 격차가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1580년경의 일본군사력을 전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동시대의 유럽보다는 확실히 뒤쳐집니다. 대포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고, 해군전술은 여전히 상대의 배에 올라타 백병전으로 상황을 이끄는 해적방식의 전술을 사용했으며, 갑옷같은 경우도 가죽조각을 끈으로 엮어만든 당세구족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죠.

하지만, 수백명 단위의 군사력으로 정복이 가능했던 아스텍이나 잉카와는 역시 차원이 다른 적수라는게 문제였습니다. 석기시대 수준의 기술력에 머물러있던 남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당시 일본은 화승총과 철제무기로 무장한 수십만의 병력이 상주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능력을 갖춘 군사강국이었으니까요.

P.S - 일본에 화승총이 전래되기 이전이라면 어땠을지가 궁금해지는군요.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남아메리카 정복을 완수한 시기가 1520년에서 1530년경인데 말입니다. 다네가시마에 철포가 전래되기 이전에도 일본애들이 화약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합니다. 핸드 캐논(Hand Canon)류의 무기는 이미 도입되어 있었고, 세토 내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같은 경우는 소승자총통류의 무기를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비도(승우)  1467년응인의난때 동군의 호소카와군에서 화창,비포라는 화약무기를사용했다는기록이 일본사에전합니다.최초의철포전래는 1543년다네가에서 포르투갈상인으로부터로 흔히들알려져있고 최초전투사용이 제가알기론1550년 관령이던호소카와가 교토에서 미요시군과공방전을  2004-12-31 16:18:56
220.76.3.74 
비도(승우)  벌일때 사용했다고 알고있는데 11520년경이나1530년경이라면 물론상황이 많이달라지겠죠.일단 스페인의원거리로의 수송및병력투사력을제외하고 순수전투의관점에서 본다면 응인의난후 무로마치막부가쇠퇴해가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무렵이라 스페인의침공에 일본은고전  2004-12-31 16:21:53
220.76.3.74 
비도(승우)  했겠죠.허나 병력의차가 압도적이라.(기껏해야 스페인은 3000이하를투사하기도 힘들듯)초반에 철포의위력과 분열된전국상황에 고전해도 이내는 일본이 승리할듯싶네요.어차피포르투갈이 무역으로얻는이득이더크니 침공할이유자체가 역사적으로 없지만 침공도불가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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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1615년에 로마를 방문했던 사무라이 외교관 
 
번호 : 6918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4   스크랩 : 0   날짜 : 2006.04.30 01:48
 
이정훈 (cfghh, hanmail.net)
2005/02/11 (17:02)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50
Access : 4474 , Lines : 163   
1615년에 로마를 방문했던 사무라이 외교관 
 Download : inoki.jpg (13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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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번(仙臺藩)의 다이묘(大名)이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도 건너왔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1613년 10월28일,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常長)가 포함된 일행을 스페인령 멕시코를 경유해서  스페인, 로마로 파견했습니다. 마사무네는 멕시코와의 무역을 바라는 막부측과도 연락을 했으므로 막부도 인정한 정식 외교사절단이었습니다. 사절단의 목적은, 스페인 국왕을 만나 멕시코와 직접 무역 허가를 얻는 것과 로마 교황을 만나 센다이 영내에서의 포교를 위해 선교사의 파견을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하세쿠라 츠네나가가 유럽에서 가지고 돌아간 자기 자신의 초상화로, 하세쿠라 츠네나가의 초상화로서는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검은 옷을 입고 로사리오를 손에 쥐고있는 츠네나가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향해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사절단의 유럽 방문을 위해서  도쿠가와 막부에서 파견한 선박 기술 목수를 포함해서 4,400명 가량 되는 일꾼들이 스페인 사람 비스카이노의 감독하에 6개월의 작업기간을 거쳐 500톤급 갈레온선 산 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호를 건조합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 일행은 현재의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에서 1613년 10월28일에 출항해 멀고 먼 스페인과 로마로 향합니다. 이  유럽 파견단 사절이 탄 배는  스페인측의 기록에서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로 불렸고 총 인원 180명을 태웠다고 합니다. 편서풍과 북태평양해류에 올라 태평양을 횡단해서 일본을 벗어나 3개월 후에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에 기리시탄(吉利支丹) 금지령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교섭에는 최초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끼여있었습니다.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에서 내린 승무원의 대부분이 멕시코에 머물렀습니다만,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에게 서신을 보낼 임무를 맡고있는  사절단은 1614년 6월10 스페인 함대에 편승해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쿠바의 하바나를 경유해, 스페인에 상륙한 것은 그 해의10월5일. 당시의  일행의 인원수는 최초의180인에서 30명 가량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소테로의 출신지인 세비야에서 대환영을 받아12월20일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도착합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 일행은 로마로 가기위해  두개의 대양을 건너고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베라크루스를 거치는 기나긴 여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가 보낸 서신


위의 사진은 다테 마사무네가  소테로의 고향인 스페인의 세비야시에 보낸 편지의 복사본입니다. 금박,은박을 입힌 종이에 먹으로 쓰여져 있습니다만, 은은 산화했기 때문에 거무스름해져 보입니다. 서신의 내용은 소테로의 출신지인 세비야와 우호 친선관계를 갖고 싶으며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의 힘을 빌리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원본은 세비야시 문서관에 소장되고 있습니다. 

 

루이스 소테로(1574-1624) - 스페인의 세비야 출신.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1603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포교 활동과 함께 어학의 재능을 살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등 막부의 유력자와의 교섭도 실시한다. 이윽고 다테 마사무네의 지원을 받아  오우슈에서의 포교 활동이 허락된다. 1613년에 유럽에 파견함 사절의 하세쿠라 츠네나가와 함께 멕시코를 거쳐 유럽으로 향한다. 1622년 금교하의 나가사키에 밀입국했지만 붙잡혀서 1624년에 순교한다.

 

비스카이노(1551-1615) - 스페인의 웨르바 태생.


1611년에 스페인령 멕시코의 대사로서 일본을 방문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다테 마사무네등과 접촉. 배가 폭풍우로 파괴돼 귀국할 수 없게 되자, 다테 마사무네가 새로 건조한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를 타고 유럽에 파견되는 사절단과 함께 태평양을 횡단함. 비스카이노의 뛰어난 항해방법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615년 1월30일  마침내 츠네나가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사무네의 편지를 건네주고 선교사의 파견과 멕시코와의 무역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합니다. 그해 2월 17일 츠네나가는  왕립 수도원 부속 교회에서 스페인 국왕과 프랑스 왕비의참관아래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명은  국왕과 성인의 이름을 빌린 [돈 필리포 프란시스코 하세쿠라 로쿠에몬 DON PHILIPPO FRANCISCO FAXECVRA ROCVYEMON」이었습니다.

그러나  소테로와 대립하는 입장인 비스카이노나 예수회측으로부터 일본내에서의 금교와 탄압, 소테로의 사실과 다른 보고 , 사절의 목적이 사실은 무역 뿐이라는 것, 마사무네가 겨우 일본의 일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에 불과하므로 일본을 대표할만한 자격이 없다는 점 등 츠네나가 사절단에게  불리한 정보가 차례차례로 밝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화려한 환영과는 정반대로 국왕으로부터 좋은 대답도 얻지 못한채 사절단은 8개월이 넘게 마드리드에 체재해야만 했습니다.

교섭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1615년 8월22일, 일행은 예정대로 로마로 출발합니다.


 

 

아마치편 다테 마사무네견사록(독일어판)


아마치편 「다테 마사무네견사록」(이탈리아어판)은 1615년에 로마에서 출판된 서적으로  하세쿠라 츠네나가 일행의 유럽에서의 움직임이 자세하게 적힌  책으로 유명합니다. (사진은1617년에 독일어판으로서 출판된 것) 저자인 시피오네 아마치는 로마의 역사학자로 , 통역겸 교섭자로서 마드리드로부터 로마까지 사절단과 같이 움직였습니다. 마사무네와 소테로의 만남으로부터 사절단의 파견을 결정하기까지의 결과 펠리페 3세나 교황 바오로 5세와의 알현과 그 후의 사건까지 매우 상세하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1615년 10월25일 사절단은 로마로 들어와서 29일에 츠네나가 일행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행진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11월3일에는기독교의 정점인 로마 교황 바오로 5세를 만났습니다. 그 때 교황에 건네진 다테 마사무네로부터의 편지에는 센다이번에서의 기독교 포교를 위해 프란시스코회 선교사의 파견과 멕시코와의 무역과 관련해서  스페인 국왕의 중재를  부탁하는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 금박·은박을 입힌  일본 종이를 사용한 일본어·라틴어2종류의 쓰여진 편지는 현재도 바티칸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로마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

 

 


1615년 하세쿠라가 로마에 머물때 그린 초상화


로마에서는 츠네나가의 고결한 인품을 칭찬하고 그에게  로마시 공민권을 수여했습니다.

 

 

 

로마시 공민권 증서


양피지를 이용해 상부와 좌우에는7개의 문장을 늘어놓아 왼쪽에는 하세쿠라 츠네나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본문은 라틴어로 , 로마 시의회에서 하세쿠라 츠네나가에게 로마 시민의 권리를 주고 귀족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금글씨로 쓰여져 있습니다. 먼 나라로부터 건너 온 하세쿠라 츠네나가 일행이 로마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은 것을 알수있는 자료입니다. 4단째에는 , 「PHILIPPO FRANCISCO FAXECVRA ROCVYEMON」, 중앙의 오른쪽을 보면 「IDATE MASAMVNE」라고 쓰여진 문자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선교사 파견의 허가를 얻은 사절단은  다시 스페인과 무역 교섭을 하기 위해서 마드리드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사절단은 그곳에 머무는 일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국을 위해서 세비야로 옮겨집니다. 츠네나가와 소테로는 사절단 일행 대부분을 귀국시킨 후에도 국왕 펠리페 3세의 답장을 얻기 위해서 세비야에 머물며 교섭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1617년 7월4일, 답장을 얻지도 못하고 쫓겨나듯이 유럽을 떠나 멕시코로 향합니다. 그리고 아카풀코로 맞이하러 온 산후안 바우티스타호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합니다.

츠네나가는 마닐라에 도착 직후  장남에게 편지를 보내  내년에는 반드시 귀국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츠네나가는 결국 2년간 마닐라에 체재하게 됩니다.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체 실의에 빠진 츠네나가가 센다이에 돌아온 것은 1620년 8월26일, 출항하고 나서 7년의 세월이 흐른 직후였습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가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장남에게 쓴 편지의 복제본입니다. 편지에는 사절에 동행한 3사람의 하급 무사들에서 시작해 츠네나가의  하인들은 모두 건강한 지의 여부, 시종 3명이 멕시코에서 도망친 일, 영주(다테 마사무네)를 하루빨리 만나뵙고 싶다는 내용,  선박안에서의  바쁜 일정등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반드시 돌아가므로  그때까지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아무쪼록 부탁한다는 당부와 그리고 영주에 대한 봉공을 확실히 하라는 내용을  써서 덧붙여 가족에대한 자상한 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단검


위쪽의 사진은 스리랑카 특유의 칼로 「카스타네」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무늬의 부분은 상아로 되어 있고 , 신화상의 동물인 싱하(사자) 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양날검은 인도네시아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크리스」라고 부르는 단검입니다..  이 검들은 펠리페 3세의 수집품 중에서 선물로 받은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츠네나가가 마사무네에게 바칠  선물로서 필리핀에서 구입한 건지도  모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무역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 포교를 묵인했었습니다만, 그 사이에 기리시탄의 숫자는 증가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이에야스는 기독교도가 단결해 큰 힘이 되는 것을 무서워 해서 1612년경에 막부의 직할령 ,1614년 2월에는 전국에 금교령을 내려 기독교 신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합니다. 센다이번도 츠네나가의 귀국 직전에 영내에 기독교 금지령을 내린 후 단속 강화에 착수합니다. 1624년에 카르바리오 신부(포르투갈인 선교사)로 시작해 센다이 영내의 기리시탄들이 파악되어 히로세가와에서 물 고문을 당해 전원이 순사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결국 선교사를 부르기 위해서 사절을 파견한 마사무네도 막부의 방침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로사리오 성모상


위의 사진에서는 초승달 위에 경과하는 성모 마리아가 오른손에 어린 그리스도를 안고 왼손에는 로사리오를 쥐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장미꽃이 붙은 로사리오에 둘러싸여 천상에는 아버지 되는 하나님과 천사가 지상에는 4사람의 성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마사무네는 귀국한 츠네나가로부터 7년간의 해외 경험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 후 막부에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막부의 엄격한  금교 정책 아래서 츠네나가가 가지고 돌아간 물건들은 기독교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번에 몰수되어 결코 외부로 유출되지 않게 엄중하게 보관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후 250년간 유럽에 파견되었던 사절단의 존재는 잊혀지고 묻혀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1873년에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에 파견한 이와쿠라 토모미등의 사절단들이  방문한 이탈리아(베네치아)에서 츠네나가의 서신이 발견되서 겨우 그들의 실적이 인정되게 되었습니다.

 

 


 


..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  2005-02-11 18:27:47
221.158.56.12 
첫번째 짤방...  오우~. 오호~. 붸이베~! -.-;  2005-02-11 18:49:11
bebop 
저런 것을 볼때마다...  마음만 부풀어 올라서 큰일입니다. =..=; 울 동갑공주는... 죽어라 스컬리 치미만 입는지라... *ㅠㅠ*  2005-02-12 07:20:06
spartacus2 
이정훈  다들 글은 안 읽으시고 오구라 유코랑 수영복 미녀들 사진만 보고 계시나보네요...^-^  2005-02-12 08:42:50
222.108.104.107 
..노세  이정훈님. 사진 잘보았습니다.^^히힛~  2005-02-12 12:21:20
anosenose 
bleuluna  저도 짤방만 -0- 근데 싱하가 상상의 동물 이었네요. DC 겔의 싱하형 생각나네.... 형왔다...  2005-02-12 22:51:03
220.75.207.106 
지나가다  오오 좋은 정보입니다. 정말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은 어디서 얻으시나요?인터넷?서적? 궁금하네요~  2005-03-01 01:03:04
211.176.186.145 
고일권  읽어도 읽어도 참으로 신기한 글입니다^^유럽사람들이나 중동 아랍인들이 동아시아를 방문한 기록은 많지만 동아시아사람들이 유럽을 방문한 기록은 별로 없어서 그런가요?하하..게다가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자체에 신선함이 느껴지네요^^잘 읽었습니다.  2005-03-10 01:44:00
220.74.2.83 
장지형  무진장 배가아파오는 내용입니다..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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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공개]    최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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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도쿠가와 막부와 포르투갈 상선의 해상전투 사례 
 
번호 : 6930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0   스크랩 : 0   날짜 : 2006.04.30 02:12
 
이정훈 (cfghh, hanmail.net)
2005/03/25 (19:24)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68
Access : 5530 , Lines : 54   
도쿠가와 막부와 포르투갈 상선의 해상전투 사례 
 Download : WTGAL-Galleon.jpg (6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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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일스 밀턴이 저술한 '사무라이 윌리엄'중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

 

바다에서는 나가시키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는 아찔하게 높은 산들로 둘러쌓여 있었고,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배가 아름다운 천연항으로 들어오기전에는 선상에서 나가사키의 미로같은 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580년 예수회 신부들이 이곳에서 자체적인 농장과 통나무집을 소유한 이래 그 지역은 번영을 누렸다. 나가사키는 중국과 비단을 교역하면서 많은 수익을 거두어 이제 부유한 항구가 되었고 거리에는 교회와 신학교, 기숙사가 형형색색 줄지어 들어섰다.

하지만 전형적인 포르투갈 식민지 마을을 기대한 사람들은 이 지역의 분위기가 오히려 규슈 해안 근처의 여러 마을과 유사하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상인들의 저택은 일본식의 오목한 지붕으로 덮여있었고 변변찮은 주택에도 반투명 창호지를 바른 대나무 미닫이문이 있었다. 가장 이색적인 곳은 예수회 교회였다. 육각형의 건물에 지붕은 탑 모양으로 쌓아올려 기독교 성전이라기보다 절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


마카오에서 출발한 배가 일년에 한번 입항할 때는 여기저기 그늘진 거리에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선원들은 사창가와 술집을 찾아들었고 구레나룻을 기른 포르투갈 귀족(이달고)들은 펑퍼짐한 판탈롱에 버클이 달린 구두, 펄럭거리는 모자로 치장하고 거들먹거리며 다녔다. 이들 중 다수는 고귀한 이상과 가톨릭 신앙을 공유하는 신부들과 평신도를 위한 친목회인 자비 신도회(Misericordia Fraternity) 소속이었다.

 

일년에 한번 마카오를 떠난 포르투갈 선박이 일본에 입항하는 날은 축제와 기념행사가 치루어졌다. 1609년은 축제의 명분이 어느 때보다 더욱 뚜렷한 해였다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은총의 성모'라는 뜻) 호가 지난 수년동안 나가사키에 입항한 배 가운데 가장 많은 보화를 싣고 들어온 것이다. 배에는 60만 크루자도에 달하는 200톤의 비단과 어마어마한 양의 은괴가 실려있었다. 중간상 노릇을 하는 예수회 신부들은 배가 들어오자 매우 기뻐했다. 뱃짐의 매매를 성사시켜주는 댓가로 짭잘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보화를 가득실은 배는 선망과 탐욕의 대상이 되는 법이었고, 곧이어 그런 일이 발생했다. 나가사키의 촌장이 자신의 권리대로 무장경비대를 보내 뱃짐을 검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선장은 경비대의 승선을 불손하게 거절했다. 촌장은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배에 오르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그 역시 승선을 거부당했다. 촌장은 선장의 신원을 알게되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선장은 마카오의 안드레 페소아(Andre Pessoa)로 몇달전 마카오에서 보여준 행동으로 완전히 신임을 잃은 인물이었다. 당시 마카오에서 일본 선원들이 소동을 벌인적이 있었다. 그러자 페소아는 그들의 숙소까지 난입해 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포로가 된 일본 선원들은 유혈사태가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내용의 진술서에 억지로 서명한 뒤 석방되었다. 그리고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 상처를 안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페소아가 마카오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한 소식은 이에야스에게 금방 전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포르투갈인들에게 벌금형을 내리는 것으로 사안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페소아기 나가사키의 촌장을 모욕했다는 전갈을 듣자 이번에는 아주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에야스는 '선장과 포르투갈인들을 처형하고 모든 화물은 선박과 함께 압류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페소아에게는 일본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해 사면해줄테니 이에야스의 궁으로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상륙을 거부한 채 안전한 중무장 선박내에 머물렀다. 이에야스는 페소아의 불복에 분노하여 현지 영주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에게 선장을 체포하고 선박을 압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리마 영주는 신이나서 임무를 수행했다. 일부 부하들이 마카오 사건에 연루되어 복수를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 1200명의 사무라이들을 소집한 뒤 1610년 1월 첫째주에 야간습격을 감행할 준비를 했다. 무사들은 30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나가사키만을 따라 정렬했다. 성공을 확신한 그들은 페소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밤하늘에 머스킷총을 쏘아올렸다. 페소아 선장은 무사들이 선박바로 앞으로 접근해 올 때까지 기다린 뒤 두 차례 일제포격을 퍼부었다. 일본의 소함대는 완전히 박살났고 여기저기 시체들이 떠다녔다.

포르투갈 배에서는 다친 상처에 소금까지 뿌리려는 듯 '일제사격을 할 때마다 나팔을 불어댔다.'

아리마 영주의 부하들은 퇴각한 뒤 부대를 재편성해야만했다. 그리고나서 만을 향해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호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3일밤을 연달아 페소아의 함포에 무릎을 꿇었다. 1월 6일 포르투갈 선장은 자신의 무장상선을 항구 바깥으로 둘려 안전한 공해로 빠져나갔다. 아리마 영주는 더욱 필사적으로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부하들이 상선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목재탑을 만든다음 '큰 배 두척으로 그것을 운반했다.' 탑은 포르투갈 상선의 돛대만큼 높았고 화재에 대비해 젖은 짐승 가죽으로 덮었다. 게다가 영주는 반드시 승리하고자 1,800명의 용병무사까지 고용했다.

 

최후공격은 밤 9시쯤 시작되었고, 이전보다는 성공적이었다. 가장 용맹스러운 일본무사 몇명이 마침내 무장상선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커다란 일본도를 미처 휘둘러보기도 전에 수비수들의 칼에 토막나 죽었다. 페소아 선장의 손에도 두명의 무사가 죽임을 당했다.

상선의 선원들은 기쁨에 들떠 때이른 승리를 선언했다. 이 때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포르투갈군이 일본군에 수류탄을 던지려던 찰나 한 무사가 발사한 머스킷 총탄이 그 수류탄에 박혀버렸다. 수류탄에 붙은 불이 갑판위의 대포화약에 옮겨 붙었고 곧이어 뒷돛대의 세로돛까지 불타기 시작했다. 순간 페소아 선장은 모든 것이 끝장났고 이 거대한 배도 운이 다했음을 감지했다.

극도의 흥분과 광란상태에 빠진 페소아 선장은 극적인 최후를 선택했다.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있다. '용맹스러운 선장은 자신의 검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선실로 내려갔다. 그는 한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손에는 횃불을 들고 창고로 내려가 화약고에 불을 붙였다.'

 

곧바로 재앙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폭발이 이어졌다.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호는 위로 약간 뜨는 듯 하더니 화염에 휩싸여 두동강으로 갈라져서 깊은 바다밑으로 침몰해 버렸다. 페소아 선장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자초지종을 듣고 격분했다.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상인을 모조리 처형하고 일본의 예수회 관련자를 모두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가신들 사이에 신중론이 우세하자 권고를 받아들여 그러한 위협은 거두어들였다.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호의 침몰은 예수회의 명성에 큰 타격을 가했다. 예수회가 입은 손해는 약 3만 크루자도에 달했고, 예수회는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도 좌절했다. 상선이 침몰하면서 한 해의 수입도 가라앉아버린 것이다.


가장 용맹스러운 일본무사 몇명이 마침내 무장상선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커다란 일본도를 미처 휘둘러보기도 전에 수비수들의 칼에 토막나 죽었다. 페소아 선장의 손에도 두명의 무사가 죽임을 당했다.
 
===>왜군은 백병전에 강하기로 유명해서 '왜병이 한명이라도 판옥선안으로 들어오면 갑사(甲士)10명이 당해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실제로 정유재란 당시에도 거제도에 나무 베러왔던 왜병 20여명이 고성현령 조응도가 지휘하는 판옥선에 기어올라 사부와 격군을 포함한 140여명을 모두 몰살시킨 사건도 있었는데  만약 위의 기록대로라면 왜인들의 단병접전 능력은 남만인보다는 몇수 아래라는 추측이 가능할지도?
 


...  고작 몇명이 건너간 정도로는 그런 추측을 내리기에는 그렇네요. 그런 고립된 상황에서는 사무라이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고 1 대 10 정도의 격투였을테니 말이죠...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마무리 하심이...^--^  2005-03-25 19:32:06
211.47.112.185 
이정훈  왜군 20명이 7배에 달하는 조선수군 병력을 몰살시킨 경우는 어떻게 봐야할까요?  2005-03-25 19:48:18
222.108.104.89 
이재우  모 작가의 소설 한 부분에서 나오는 선박의 모티브 같군요. 예수회와 관련있고, 마카오에서 왔다든가......  2005-03-25 19:50:18
211.107.231.15 
슈타인호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무적은 아니다....정도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요?^^  2005-03-25 19:53:07
steinhof 
이정훈  아니면 조선군의 단병접전 능력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왜병이 상대적으로 돗보였다라고 볼 수도 있겠죠?  2005-03-25 19:58:35
222.108.104.89 
spartacus2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이 4강에 들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사람들 전체가 축구를 잘하는 것은 아니죠. (먼~산) 그리고, 일단 비단은 몰라도... 은은 건져낼 수 있었을 터인데... 아무튼, 어처구니없는 최후라는...(먼~산)  2005-03-25 20:49:56
spartacus2 
슈타인호프  이정훈//단병접전을 할 능력도 인원도 없었다는 게 정답이겠죠. 스2//아마 건져낸 은이 있었더라도 일본측이 몽땅 몰수해버렸지 싶습니다~  2005-03-25 20:55:03
steinhof 
조준보  당시 그 조선 수군이 잠을 자고 있던가? 쉬고 있던가? 밥 먹고 있지 않앗을까요?즉 경계를 소홀히해서 기습을 당한 것이 아닌지...^^  2005-03-25 21:31:14
211.171.16.28 
이정훈  하루노부의 병사들과 맞서싸웠던 포르투갈인들은 군인이 아니라 상인들이었으며 그 배조차 전함이 아닌 상선이었습니다. 상선 한척을 당해내지 못해 3000명을 동원해야 하나요?  2005-03-25 21:51:07
222.108.104.89 
슈타인호프  음...제 생각을 일단 별도 글로 달겠습니다.  2005-03-25 22:01:52
steinhof 
spartacus2  시대가 시대였으니만치, 상선이라고 하더라도 해적 혹은 적국 해군이나 사략선(국가의 밀명?을 받고 해적질하는 배로 \'캡틴 키드\'도 원래 사략선 선장하다가 때려치고 해적으로 전업? 했다죠...) 등에게서 방법당할 위험 때문에 사실상 군함이나 마찬가지였죠.  2005-03-25 22:17:01
spartacus2 
spartacus2  대표적인 사례가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선들로 전쟁 발발하면 그대로 군함이 되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개념인 \"개장함선\"(상선을 뜯어고쳐 항모 등 만든 것) 혹은 \"가장함선\"(상선에다 대포 달고 포쏘는 요원 배치한 것) 개념이 아니었죠. 막바로 군함.  2005-03-25 22:18:34
spartacus2 
이두선  걍 갑판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겨오르는 적병을 그대로 콕콕 내찌른거 아닐까요?^^;;;  2005-03-25 22:54:17
211.30.177.131 
서봉덕  결국 한발의 눈먼 머스켓 총탄이 일이천명의 사무라이가 못한 일을 해 낸 셈이군요. 무척 억울하겠어요.  2005-03-25 23:15:05
222.99.229.47 
그리고  서양애들도 단병접전 무지 잘합니다. 당시 돌아다니는 서구인들의 무장상선 선원들의 부업이 해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죠.  2005-03-25 23:16:15
222.99.229.47 
그러고보니  일본애들도 조선에서 이순신에게 무쟈게 당하고도 함포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지 못했다봅니다. 서양배들도 판옥선만큼이나 무쟈게 높습니다. 이거 공격하려면 거의 공성수준이죠. 거기다 대량의 함포라면 이와 같은 전투결과는 너무나 당연하죠.  2005-03-25 23:23:37
222.99.229.47 
비도승우  일단 서양범선들은 높이도높고 화포와 머스킷이라는 강력한화력의뒷받침이 있는데다 서양애들 덩치로보나 근력으로보나 백병전에능하며 특히 지구력이 뛰어나 단병접전도 강합니다.윗분말대로 공성수준인걸 감안해야하고 조선수군이야기는 그만큼조선군이약체라는거죠  2005-03-25 23:29:55
220.75.217.239 
흠...  개별 훈련의 차이 및 무장의 차이라 생각합니다. 징집당한 민간인과 전문적 직업군인간의 싸움이라면 결과가 예측된다는...-oㅡ;  2005-03-26 09:57:36
210.124.41.46 
흠...  개별 훈련의 차이 및 무장의 차이라 생각합니다. 징집당한 민간인과 전문적 직업군인간의 싸움이라면 결과가 예측된다는...-oㅡ;  2005-03-26 09:57:37
210.124.41.46 
준이치  \"조선병사들이 휘두르는 칼은 빗자루와 같은지라 겁낼바가 못되고\" 라는 일본의 보고가 임진왜란전에 풍신수길에게 간 바도 있답니다.  2005-03-26 10:20:54
210.206.46.4 
조선수군은  전선 1척당 사부가 14명뿐 입니다. 나머지는 포수와 격군들로 근접전에 쓸모가 없습니다. 실제 전투원이 적으니 왜구 20명에게 충분히 뺏길 수도 있습니다.  2005-03-26 14:26:34
211.211.65.31 
B&D  \'지방 영주가 동원한 사무라이+용병\'몇명이 승선, 기다리고 있던 (거의)해적 아저씨들이 콕콕-->(*_*);; 뭐 대강 이런 상황 아니었을까요? 어이없는 최후... 가장 무서운 무기는 내 옆의 동료가 들고 있는 무기라더니-_-;;  2005-03-26 14:36:07
211.208.245.92 
마루  그 당시 유럽의 뱃사람들은 예비군? 한국의 예비군도 무적이라는 숨겨전 전설이......  2005-03-26 23:01:40
61.35.162.199 
예비군  아마도 간신히 배로 올라간 10여명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가 아니었나 합니다.  2005-03-29 10:28:20
203.244.197.254 
young026  무엇보다 위 기록의 신빙성부터 확인해 봐야겠죠.  2005-03-30 20:17:03
221.151.61.204 
윤형진  아리마 하루노부의 석고가 얼마죠? 1400명의 사무라이를(만약 그게 아시가루를 뺀 숫자라면) 저정도 사무라이를 동원하려면 20~ 30만석 이상의 대 영주일거 같은데요. 그리고 그 번의 가풍이 강한 무사들인가도..  2005-05-19 17:56:08
203.235.68.15 
서양배가  판옥선만큼 높은게 아니라 당시 갈레아차같은 경우는 판옥선 보다도 훨씬 높았죠-_-;  2005-05-23 01:35:08
211.224.132.203 
한니발  아마도 조선군은 갑사위주 궁사 위주로 훈련했기 때문에 접근전이 응당 약한건 사실이죠.. 게다가 접근전 하는 군인 역시 대부분이 창을 쓰는 사람이였고 방패와 검과 완전무장한 정예병급 무사는 거의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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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남만(南蠻)시대의 시작과 끝 
 
번호 : 6940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7   스크랩 : 0   날짜 : 2006.04.30 02:25
 
이정훈 (cfghh, hanmail.net)
2005/04/03 (10:45)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87
Access : 3618 , Lines : 335   
남만(南蠻)시대의 시작과 끝 
 Download : MeagPortCarrack1521.gif (50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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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일본에 거주하던 포르투갈인들을 묘사한 그림

일본역사에서 남만시대란 유럽인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1543년부터
쇄국령 선포후 거의 모든 유럽인들이 열도에서 추방당했던 165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남만(南蠻 - 남쪽의 오랑캐)이라는 한자어는 원래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에서 온 사람들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오랑캐'들을 동서남북 네가지 방향의 명칭으로 구분해서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 일본에서 이 남만이라는
단어는 1543년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포르투갈인들과 다음으로 에스파냐인,
나중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인을 지칭하는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남만(남쪽의 야만인)이라는 단어는 유럽인들이 남쪽에서 배를 타고 왔으며 그들의
태도가  일본인들에게는 대단히 투박하게 보였으므로 새로운 방문자들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명칭이라고 생각되었다.

당시의 일본기록은 이렇게 전하고있다. "남만인들은 우리처럼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을 사용해 먹는다. 그들은 자제심없이 감정을 드러낸다. 그들은 문자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일본의 제지산업도 유럽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본인들은 화지(和紙)로 만든
부드러운 일회용 "화장지"로 코를 푸는데 반해 서양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옷소매를 이용해 코를 풀었다.

 

알레한드로 발리냐노는 1539년 나폴리 왕국에서 태어났으며 극동아시아, 특히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공로가 큰 이탈리아인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는 1566년 예수회에 가입했으며 1573년 극동으로 파견됬다.  이 이탈리아 선교사가
당시 여론이 시끄러웠던 포르투갈 지배하의 아시아 지역을 감독하게 된 이유는 식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로마 교황청의 의도였다고 해석된다. 

발리냐노는 마카오에 예수회 대학을 세운다. 그는 고아를 떠나 1579년, 1590년,
그리고 1598년 총 3번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발리냐노는 일본사람들을 대단히 존경했으며 장래 일본이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는 일본인에 대해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일본인들이
"다른 동양인들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유럽인도 능가한다."
(동인도 제도에서의 예수회 출범과 발전과정사 1542-64)

발리냐노는 만치오 이토가 이끄는 4명의 일본 귀족을 유럽으로 보냈고 그들은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예수회 성직자로 서품받았으며  그로인해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본토 출신 성직자를 양성해낼 수 있는 조직이 세워지게 된다. 

발리냐노는 1606년 마카오에서 사망한다.

 

일본인 사절단을 유럽에 보내자는 구상은 원래 알레한드로 발리냐노가 내놓았으며
크리스찬 다이묘인 오오무라, 오오토모, 아리마 3인이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규슈
붕고지역의 다이묘였던 오오토모 소린은 만치오의 아버지인 이토 슈리노스케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만치오 이토가 일행을 대표하는 대변인 역할을 맏기로 했다.
1582년 만치오 이토는 다른 3명의 귀족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출발한다.

일행의 후원자인 발리냐노 역시 두명의 하인과 가정교사, 통역원인 디에고 데
메스퀴타를 데리고 같이 동행했다.


 

그들이 리스본에 도착했던 날짜는 1584년 8월이었으며 항해 도중 마카오, 코친,
고아에서 9개월 정도 머물렀다. 리스본에 도착하여 사절단은 여정의 원래 목표
였던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서 만치오 이토는 명예 시민으로 임명되며 Cavaliere
di Speron d’oro라는 이름의 유럽 귀족 작위도 받게된다. 사절단이 유럽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 프란시스코 데 메디치,
투스카니의 대공작, 교황 그레고리 13세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 식스투스 5세를 만났다.

사절단은 1590년 7월 21일 일본에 돌아왔다. 사절단 일행은 8년동안이 긴 여정을
모두 서적으로 남겼다. 이 4명은 얼마후 알레한드로 발리냐노에게 최초로 서품을
받은 일본인 예수회 사제가 된다.

 


1586년 최초로 유럽을 방문했던 일본인 사절단

위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줄리오 나카무라, 마스퀴타 신부, 만치오 이토.

아래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마르티나오 하라, 미구엘 치지와 


남만 총포 

 

일본인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물건은 오랑캐들의 총이었다.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유럽인들은 중국선박에 타고 일본의 남쪽섬 다네가시마에 도착한 3명의 포르투갈인들
이었으며 그들은 화승총(Arquebus)과 탄약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라고
부르는 내전상태의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일본인들은 이미 화약에
익숙한 상태였으며 포르투갈인들이 오기 270년전부터 중국제 총통과 화창을 전장에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의 총은 가볍고, 화승으로 격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조준하기가 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대장장이들은 화승총 작동의 메카니즘을 터득하여
총포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당시 화승총을 전해준 상인들 중 한명인 멘토스 핀토가 일본땅을 밟게 되었을때가
떠난지 13년후인 1556년이다. 산간벽지에 있는 한촌이라 할지라도 총포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보급된 상태였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멘토스 핀토는 일본인들이
본능적으로 무기나 군사문제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거의 50년이 지난 후 "16세기 말경 세상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총은 일본에서 가장 흔한 물건이 되었다."  일본군대는 동시대의 어떤 유럽
군대도 초라해 보일정도로 많은 양의 총으로 무장했다.

 

총은 일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아래 통일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1592과 1597년에 조선을 침공한 임진왜란
에도 주력화기로 사용되었다.   

전국시대 말기인 1583년 발리냐노는 다음과 같은 문서를 에스파냐 국왕인
펠리페 2세에게 보냈다.

 

"일본은 외국인이 지배할 수없는 나라이다. 외국인의 지배를 견뎌낼 만큼
일본인은 무기력하고 무지하지 않다. 따라서 에스파냐 국왕은 일본에 대한
어떤 지배권이나 관할권도 갖지 못할것이며,앞으로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에스파냐는 유럽최고의 군사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에스파냐 국왕이
당대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국왕한테 이 천주교 사제는
일본은 외국인이 지배할 수 없는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 선교사는 일본인의 호전적인 성격을 예로 들었으며 또한 일본
국토의 견고함도 들었다. 일본이 길고 거친 항해를 지나지 않으면 도달할
수없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강철 단조법은 세계최고 수준이었으며, 병장기는 예리했고, 군사력은
눈에 띄게 강했다. 이 보고서가 유효했는지 모르겠지만, 가는 곳마다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식민지로 삼던  에스파냐였지만 유독 일본에 대해서는 군사적
공격을 하지 않았다.

 

 


 
 

1609년에 에스파냐 왕실은 태평양 방면의 에스파냐군 사령관에게 "일본군대와
충돌해서 우리의 군대와 국가의 명성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게하라." 라는
특별한 포고를 내린적도 있다. 거꾸로 이들은 1630년대에 일본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남만 선박 

남쪽 야만인들의 선박은 일본의 선박제조산업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으며, 실제로
당시 상당수의 일본상인들이 남만선을 타고 해외로 나갔다.

 

서양식의 가로돛과 삼각돛, 방향타, 후미를
모방한 1634년의 일본 주인선이다. 이 배들은 일반적으로 6에서 8문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다.

막부는 허가장을 내준 주인선(朱印船)이라고 불리는 선박을 통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항해하며 통상활동을 하는 해외무역체제를 구축했다. 주인선
들은 돛과 방향키, 대포의 배치등에서 남만선의 구조를 많이 도용하고
있었다. 주인선은 다수의 일본인 정착자들을 동남아의 항구로 데려갔으며
때때로 시암(태국)의 일본인 모험가로 잘 알려진 야마다 나가마사의 예와
같이 정착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큰 영향을 끼칠 능력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1613년 만들어진 일본 갈레온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의 리플리카

17세기 초에 막부는 대부분 외국인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사절단을 태우고
태평양을 건너 누에바 에스퍄냐(멕시코)로 향했던 갈레온선 산 후안
바우티스타같은 순수한 남만 디자인의 선박들을 여러척 제작하기도 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常長) 일행의 행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생생한 기록이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절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그 대신 두 개의 작은 막대기를 세 손가락으로 쥐고 식사를 한다."

 

"그들은 손바닥 크기에 비단같이 부드러운 종이로 코를 풀며 결코 두번
사용하지 않고, 코푼 종이는 땅에다 버리는게 관습이었으며 일본인 일행
주변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빨리 버려진 종이를 집어드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는 했다."  

 

 

"일본인들의 검은 매우 예리해서 부드러운 종이를 날위에 올려놓고 입으로 불면 그대로 잘릴 정도였다."

 

 

로마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

 

1615년에 교황이 센다이 번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에게 보낸 서한

 

센다이번의 다이묘(大名) 다테 마사무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1598-1621) 디에고 벨라스케스

 

 

하세쿠라 츠네나가의 기독교 대부인 레르마 공작 (1603년 페드로 파울 루벤스 시라카)

1615년 로마를 방문했던 사무라이 외교관


그 밖의 일본에 영향을 끼친 남만문물


 
 


 


난반도구소쿠(南蠻胴具足) - 유럽에서 수입한 판금 동체갑옷을 일본식 도세이구소쿠(當世具足)와 절충한 방식 

 

 

 

 

 

 

 


 

 

 


남만미술 - 유럽에 관련된 주제나 유럽식 화풍에 영향을 받은 일반적인 일본미술 풍조를 가리킨다. 

 

 


남만칠기 - 가구의 겉표면을 포르투갈풍으로 칠하거나 세공하는 방식을 가리키며,
일본에서 16세기 말에 대단히 인기있는 품목이었다.


 

 

 


남만과자 -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과자를 본따 만들어진 케이크이며 대표적으로
카스티야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카스테라(カステラ)가 명하다. 이 "남쪽 야만인"
들의 케이크에 기원해서 만들어진 과자들은 오늘날 일본의 슈퍼마켓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남만사는 교토에 처음 세워진 천주교 성당을 말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에
힘입어 예수회 신부였던 그네치 솔도 오르간티노는 1576년에 처음 성당을 세웠다.
11년후(1587) 남만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파괴된다.


남만 시대의 종말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일본은 통일되었으나 일본은 증가하는 기독교의
위협때문에 남쪽 야만인들에 대해서 급격하게 문호를 걸어잠그게 된다.

 


1650년이 되자 네덜란드와의 통상을 위한 나가사키의 외부항구인 데지마와 중국과의
약간의 교역을 제외하고는 일본을 떠나지않은 외국인들은 처형하겠다는 경고를 했고,
기독교인들은 고문에 의해 신앙을 버리게 했다. 총의 생산과 유통은 철저히
금지당했으며 보다 '문명화'된 칼이 그 위치를 대신했다. 여행과 대형선박들 만드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에도시대로 알려진 폐쇄적이고 평화로우며, 풍족한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야만인"들은 그로부터 2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산업혁명으로 국력을 키운 뒤
다시 일본을 찾아왔으며, 1854년 미 해군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의
전함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쇄국정책도 막을 내리게 된다. 
 


이두선  이번엔 읽기 편하게 글을 쓰셨군요^^ 잘 읽었고요 이정훈님은 특히 일본과 스페인에 관한 글을 자주 올리시던데 일본어랑 스페인어 하실 줄 아시는지요?  2005-04-03 17:08:00
211.30.179.201 
아리아리랑  약100년동안의 교류가 일본에게 미친 영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조총이 겨우 13년만에 일본전국에 퍼졌다는게 좀 믿기어려운 일이네요. 카스테라, 어릴떄 좋아하던 케익빵이었는데 스페인과 포루투갈에서 건너온 것이었네요...  2005-04-04 08:56:10
68.47.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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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들의 조선을 향한 실버 러쉬(Silver R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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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광해군(역사인물 다시읽기),  저자 - 한명기  출판사 - 역사비평사> 중에서 부분 인용한 글입니다.*** 

 

16세기 중반까지 중국은 서양인들에게 '은(銀)의 나라'라고 불리고 있었다. 명나라에 은생산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외국으로 부터 무역을 통해 은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은 가운데 상당량이 일본에서 채굴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세계 굴지의 은 생산 국가로 발돋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배경에 두 명의 조선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노비 김검동(金儉同)에 이 바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16세기 초반 세계최초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란 것을 개발해냈다. 은광산에서 채굴되는 은광석에는 은 뿐만이 아니라 다량의 납도 포함되어었다. 따라서 은광석에서 은과 납을 분리하는 제철기술이 없이는 은 생산이 늘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검동과 김감불이 그 기술을 개발했던 것이다.

그 방법은 먼저 용로(鎔爐)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열화(烈火)를 쌓고, 용로에 납조각을 넣은 다음 생은을 그 위에 깔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숯불을 피운다. 그 위에 소나무를 덮어 불을 일으키면 납이 먼저 녹아 아래로 내려가고 생은은 빙빙돌면서 용솟음치며 녹다가 갑자기 표면이 갈라져 은은 위에 모이고 연재(鉛滓)는 재에 스며든다. 거기에 물을 뿌려 연판(鉛版)이 응고하면 집어내고, 재에 스며든 연재를 녹이면 납만 남게 된다.

 


 

그런데 이 기술이 빛을 본 곳은 정작 조선에서보다 일본에서였다. 조선에서 전수받은 이 기술을 통해 일본의 은생산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연은분리법이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은을 매개로 하는 동북아시아 국제무역 구조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543년 다네가시마에 표류했던 포르투갈 선원들은 일본인들에게 조총을 전해준다. 일본어로 '뎃포(鐵砲)' 라 불리던 조총은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에게 새로운 무기로 받아들여졌고 그들의 세력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뎃포를 보유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사이에는 군사적 우열관계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각 다이묘들이 뎃포로 상징되는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부를 쌓아야 했다. 따라서 그들이 은광개발이나 해외무역에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했다. 바로 그 같은 상황속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무역에 매달렸다. 해외무역을 통해 조총과 향료뿐만이 아니라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가 들어왔다. 그 대금은 당연히 은으로 치뤄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에서 획득한 은을 중국으로 가져갔고 다시 그것으로 중국산 도자기나 비단등을 사서 유럽으로 실어갔다.

 

참으로 짭잘한 중개무역이었다. 중국상품을 유럽으로 가져가면 네다섯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의 궁정귀족들은 중국산 도자기에 그야말로 '환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중국 상품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은이 필요했고 일본에서 채굴한 은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스페인 상인들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막 개척했던 남미의 은광산 개발에 눈을 돌렸다. 멕시코에서 채굴된 막대한 양의 은이 태평양 연안의 항구 아카풀코에서 배로 실려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쏟아져 들어오는 은을 바탕으로 명나라 경제는 번영을 구가했다. 강남의 경제 중심지로 들어온 은은 명나라 구석구석까지 유통되면서 화폐가 되었고 그와 함께 상품화폐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명나라가 세계 최초로 '은 본위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도 무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재정지출이었다. 16세기 후반 명은 몽골족과 여진족을 막기위한 국방비로서 총세출 가운데 3분의 2 이상의 금액을 투입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1592년 3월에 일어난 영하(寧夏)의 몽골인 보바이(?拜)의 반란, 1592년 4월의 임진왜란 그리고 1597년 7월부터 1600년까지 계속된 귀주의 양응룡의 반란이 일어난다. - 만력삼대정(萬歷三大征) - 1596년과 1597년에는 자금성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다. 전쟁을 치루고 화제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수천만냥의 은이 들어갔다. 곧이어 신종황제는 황세자의 혼례를 치뤘다. 혼례식에 쏟아부은 비용 역시 만력삼대정을 치르는데 들어간 비용에 버금갔다. 아무리 무역을 통해 은이 넘쳐난다해도 그것은 분명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1588년 아르마다(Armada)로 불리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함대에게 완패했다. 그것은 해상왕국 스페인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중국과의 동방무역도 쇠퇴하는 조짐을 보였다. 이윽고 스페인 상인들에 의해 명나라로 흘러들더 은의 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규모가 커질대로 커진 재정지출은 줄지 않았다. 재정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한편에서 은이 부족하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은이 줄어들면서 상인들은 은을 숨겨놓고 내놓치 않았으므로  자연히 물가가 폭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중국경제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재정위기를 맞아 신종황제가 내놓은 대책은 희한한 것이었다. 인색하기로 소문난 그는 자신의 개인금고, 즉 내탕(內帑)에 어마어마한 양의 은화를 챙겨두고 있었다. 그는 금고속의 은화를 푸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은을 모았다. 그것은 궁정의 환관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태감(太監)이라 불리던 그들은 광세(鑛稅),상세(商稅)라는 명목을 대고 마구잡이로 은을 수탈했다. 황제로부터 '어명을 받은'그들의 횡포는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심지어 미세한 양의 은을 거두기 위해 민간의 가옥을 철거하고 무덤까지 파헤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연히 광세는 광산을 개발하는 자에게, 상세는 장사하는 상인에게 거두어야 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거부하거나 반발하는 사람에게는  가차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것은 명목도 명분도 없는 무조건적인 수탈이었다. 바야흐로 중국사에서도 악명높은 '광세지폐(鑛稅之弊)'가 시작되고 있었다.

광세를 거두는데 반드시 은광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상세를 거둘 때 반드시 상인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민간의 모든 농토가 은광이요, 관리와 농민, 수공업자가 모두 상세를 내야할 사람들이다.

요동에 파견되었던 태감 고회란 자로부터 무지막지한 수탈에 시달려야 했던 백성들 사이에 유행했던 비아냥이었다.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다. 각지에서 환관들의 수탈에 반발하여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정부의 '은 사냥'에서 비롯된 저항은 곧 전국적인 반란으로 비화되어갔다. 그런 와중에 명은 서서히 병들고 있었다.

은과 관련하여 명에서 불던 열풍은 곧 조선으로 불똥이 튀었다. 은 수탈에 관한 한 '흡혈귀'로 불리던 명의 태감들이 조선이라 해서 그대로 놓아 둘리가 없었다. 조선은 명의 태감들이 손쉽게 은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나라였다. 더욱이 조선은 왜란 당시 명의 은혜까지 입지 않았는가? 이제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할 참이었다.

그 서막은 1602년 (선조 35년) 3월, 명에서 황태자가 책봉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러 왔던 고천준(顧天俊)이란 자에 의해 열렸다. 그의 엄청난 수탈때문에 조선은 그가 황태자 책봉사실을 알리러 온 것인지 아니면 조선에서 은을 거두어가려고 온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압록강을 건너와 서울로 올 때까지 그는 들리는 곳마다 은을 내놓아라고 강짜를 부렸다. 은에 대한 그의 탐욕을 '선조실록'은  "의주에서 서울로 이르는 수천리에 은과 인삼이 한줌도 남지 않았고 조선 전체가 전쟁을 치룬 것 같았다." 라고 묘사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탐욕에 놀란 부하마저 풍자시를 남겼다.

올 때는 사냥개처럼, 갈 때는 바람처럼.

모조리 실어가니 조선 전체 다 비었네.

오직 청산만은 옮길 수 없으니

다음에 와서 그림 그려 가져가리.

 


본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한양에 올 경우 그들에게 모시나 부채, 화문석과 같은 토산물을 예물로 주었지만, 왜란을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왜란중의 경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은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게된데다, 은이 부족해지고, 은가격이 치솟던 명 내부의 사정때문에 명사들은 은만을 요구했고, 토산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색은 광해군대에 들어와 절정에 달했다. 그 액수는 거의 10만냥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임해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광해군의 국왕자격을 심사하겠다고 왔던 엄일괴와 만애민이 수만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이야기가 전해지자 이후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봉'이 되었다.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는 '조선에 가서 한 밑천 잡자'라는 풍조가 생겨났다.

1609년 광해군을 조선 국왕으로 승인하는 예식인 책봉제를 주관하기위해  왔던 태감 유용과 광해군의 맏아들을 왕제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주관하기 위해 왔던 태감 염등의 행태는 분명 광기 그 자체였다. 조선측의 사정은 애초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유용은 북경을 출발할 때부터 "조선 국경에 발을 들여놓으면 10만냥의 은자를 얻으리라."고 공공연히 떠벌였다. 의주에서 한양에 이르는 동안 자신에 대한 접대를 위해 책정했던 비용을 전부 은으로 환산하여 받았는가 하면 "은만 준다면 식사나 차는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긁어모았다.

 

유용이 6만냥을 챙겼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염등 역시 입맛을 다셨다. 의주와 평양에서 수천 냥의 은을 챙긴 뒤 개성까지는 순순히 내려왔다. 그런데 개성에서는 은의 액수가 적다는 이유로 눌러 앉아버렸다. 초조해진 조선 조정은 결국 그에게 수천냥의 은을 더 주었고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서울로 오는 도중 홍수때문에 임진강의 다리가 떠내려가 자신의 행차가 지체되자 그 댓가로 은 1천냥을 요구했다. 심지어 한양에서는 '천교(天橋)'라는 이름의 은 사다리를 만들어 달라고 때를 썼다. 명나라 사신들이 도착하면 관례적으로 열기 마련인 잔치도 필요없다고 했다. 한강에 나가 뱃놀이를 하자고 권해도 듣지 않았다. 오로지 은만 주면 된다고 했다. 광해군에게 은으로 300냥 어치의 예물을 바친 후 그에 대한 사례로 은 9천냥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전전긍긍했다. 호조의 신료들은 호조가 1년동안 모아놓은 은을 염등 때문에 열흘만에 전부 써버렸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했다.

 

광해군 - 명사가 비록 무례하다고는 하지만 황제의 명을 받아왔으니 우리가 그를 대할 때는 마땅히 성의를 다해야 한다. 경들이 잘 조치하도록 하라.

이항복 - 성의와 정성이란 모두 빈말일 뿐 단지 은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을 잘 접대하는 대책이란 다만 은을 더 주는데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명 사신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면 그 부담은 누가 지겠는가?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민간의 몫이었다. 조선 조정은 명사들에게 줄 은을 마련하기위해 곡물이나 면포를 풀어 은을 소지한 상인들과 바꿨다. 때로는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자 농미들에게서 부가세를 징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임진왜란이 남긴 후유증 때문에 신음하는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보다 못한 곽재우는 상소를 올려 광해군을 맹렬히 비난했다.

전하는 접대를 맡은 신하들의 계책과 역관들의 술수에 속아 은화로써 한갖 명나라 사신들의 욕심만을 채워주려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생령들의 고혈이 모두 말라버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데는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보이니 나라일은 이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곽재우는 광해군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즉위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고, 즉위 이후에도 왕권이 여전히 불안하다고 여겼던 광해군은 명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전을 받는 것이  중요했다. 그 때문에 무리인 줄을 알면서도 명사신들의 요구에 순응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 같은 추세는 광해군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1621년(광해군 13년)태창제(泰昌帝) 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왔던 명사 유홍훈과 양도인은 은 약 8만냥을  거두어갔다. 1622년 후금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달라고 독촉하기 위해 왔던 감군어사 양지원 역시 수만냥을 수탈해 갔다.

 

유홍훈은 조선에서 챙긴 한 밑천으로 자신의 고향인 산동에 거대한 저택을 마련하여 명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원병을 불러가는 대신 은으로 사복을 채웠던 양지원의 경우 귀국한 뒤에 문제가 되었다. 그는 결국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7만냥의 은을 추징당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명사들의 입장에서 조선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자 '엘 도라도(El Dorado)'였던 셈이다.

광해군 당시 은화 수만냥은 1년 재정의 거의 3분의 1이 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같은 액수의 은이 명사들이 행차할 때마다 흘러나갔다. 속이 쓰리긴 하지만 명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위해 바쳤던 '백성들의 고혈'이자 '눈물'이었다.

왜란이 끝난 이후 명은 조선에게 그 만큼 버거운 존재였다. '명이 도와주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식이 퍼져가면서 명은 더욱 '생색'을 내고 조선은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그 와중에 명에서 심각해지고 있던 '광세(鑛稅)의 폐(弊)'가 조선에서 변형되어 재현되었다. 요컨대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은(銀)으로 갚아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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