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史正綱』과 經世 -尹貞粉-
한세사-삼국세사-동진세사-남북조세사-당세사-오계세사-송세사-원세사-
국호의 표기는 '기미 漢 원수원년'과 같이; 해당 연도의 간지를 국호 위에 표기하고 그 아래 기년을 표시하는한편, 正統의 소재에 따라 빈 원이나 원 안에 국호를 써넣는 것으로 표시하였다. 이에 따라 천명에 의해 개창된 정권인 '有統之世'의 경우에는 진,한,위,수,당,송,명과 같이 원안에 국호를 표시하는 반면, '무통지세'일 경우에는 빈 원으로 남겨둠으로써 왕조의 정통 유무를 반영하고자 하였다.
또한 '유통지세'에 대해서도 '대일통'의 원칙에 따라 全統왕조는 한과 같이 朱書, 偏統왕조는 한과 같이 墨書로 대변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무통지세'에 대해서도 흑색 원과 백색 원으로 구분함으로써 世運과 陰陽의 消長을 표시하고자 하였다. 즉 '무통지세'이면서 이적인 음도가 흥하는 元의 경우는 국호없이 흑색 원으로 표시함으로써 음도가 성하여 화이가 불분하는 '大變之世'임을 표현하는 동시에, 특히 그 국호를 몽고라 칭함으로써 이적인 음도(元)의 쇠퇴와 중국인 陽道의 출현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1.삼국시대 촉이 멸망하고 위와 오가 대치되고 있던 시기인 위 함희 원년(264)부터 서진이 통일한 태강 원년(280)까지, 2. 남북조시대(421년)부터 수의 통일시기인 개황 9년(589)까지, 오대 십국시대(906~960), 한림아가 송제를 칭할 때인 용봉원년(1366)부터 명이 건국되기 전해인 지정 27년(1367)까지의 시기 등 네 시기에 대해서는 힌색의 공백 원으로 처리함으로써 '무통지세'이지만 세운에 있어서는 양도가 일어나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국호 표기법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용봉원년(1366) 이후의 시기에 애해서는 '무통지세'이자 음도가 성하는 元世史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흑색 원으로 표시하지 않고 휜색 원으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구준은
원대로 들어온 이래 년대 아래의 원은 모두 흑색으로 칠했다. 그런데 이해는 백색으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운이 변하여 양도가 회복되고 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국호의 흑백에는 역시 本이 있게 마련이다. 본이라함은 태극도의 음양을 뜻한다. 중국은 양이고 이적은 음이다. 라고 설명함으로써..
『世史正綱』에서 나타난 국호의 표기는『춘추』의 정명론에입각하여 '유통지세'와 '무통지세'로 대별하고, '유통지세'에 대해서는 주,묵서로 전통과 편통을 표시하는 한편, '무통지세'의 경우에는 흑,백색의 원으로 구별함으로써 세운과음약의 소장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한편, 연호의 표기법에서도 大書와 小書로 구분하여 정통지세에 대해서는 '한 원수원년'과 같이 국호아래 연호를 대서로 쓰는데 비해, 정통지세가 아닐 경우에는 국호아래 연호를 소서로 서술함으로써 정통의 유무를 반영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왕망의 신과 측천무후의 주의 경우는 (전)한, 당과 같이 흑색 원으로 편통을 표시하는 한편, 국호의 아래 신과 주의 국호와 연호를 '신망시건국 원년, 무씨수홍원년'과 같이 소서로 펴시함으로써 통치권의 귀속여부를 반영해 주고 있다.
몽고의 신하들의 경우는 모두 '死'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톡 애울초재에 대해서만 '卒'로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한인 지역의 목지화와 변량도륙을 막능등 민을 위해 애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조 송의 이적출신인 무도왕 양성에 대해 '사'라 하지 않고 '졸'로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동진을 멸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인 현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의희라는 연호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신하로 자청하여 모화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북위의 풍태후에 대해서도 殺君의 죄와 아들을 죽인 죄를 들어 '졸'이라 하지 않고 '사'로 기술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구준은 진수의『삼국지』에서 위를 정통으로 삼고 있는데 반대하는 한편, 한,위,오로 분기하고 천하의 통은 한에 귀속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한과 같이 국호에 묵서로 원을 표시함으로써 편통지세를 나타내고, 그 아래 대서로 촉한의 영호를 표기하는 동시에, 소서로 위,오의 연호를 분서하였다. 뿐만 아니라 위의 조비가 칭제했다고는 하지만 천도와 인륜에 입각하여 그 시비를 논했기 때문에 (謚號를 쓰재ㅣ 않고) 그의 이름과 함께 '사'라고 직필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진에 대해서도 진과 같이 국호에 묵서로 원을 그리는 한편, 연호를 소서로 分書함으로써 서진의 건국과정이 천리와 인류에 합당한 정통지세가 아님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서진의 창업군주인 사마염에 대해서도 위의 조비와 마찬가지로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군신지의 강상에 입각하여 '사'라고 직필하였다.
오대말 유숭이 세운 (북)주에 대해 구준은 (북)한의 은제 유승우의 건우 4년(951)에 곽위가 감국자립하여 국호를 주, 연호를 광순이라고 했는데, 이때 하동절도사겸 중서령 유숭이 진양에서 즉위했기 때문에 사마광이『자치통감』처럼 구한이라고 칭하는 것을 바대하고 한으로 칭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당 무종에 대해서도 환관 구사량의 옹립으로 황제에 즉위한 사실에 들어 연호를 대서하지 않고 소서로 분서함으로써 왕위의 계승이정통에 어긋남을 표현해주고 있다. 또한 당 선종의 연호에 대해서도 부왕인 무종이 태자를 봉하여 후사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서하면서도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이유로 '즉위'라 하지 않고 '立'이라고 씀으로써 정통에 의한 왕위계승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조광윤이 송을 건국하고 통일천하를 이룬 태평흥군 4년(979)까지 송의 연호를 소서로 분서함으로써 편통으로 표시하였다.
오대의 (북)한 ㅇ름제 유승우가 곽위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기록에 대해『자치통감』,『통감강목』,『오대사』,『고이』의 기록을 비교 검토하여 은제가 조촌에서 죽은 것은 곽위가 직접 시해한 것은 아니더라도 실제로 시해한 죄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송 태조의 죽음에 대해서도 호일계의 『사산통요』와 진경의『통감속편』에서 말하는 조광의 왕위 찬탈 운운하는 기사가 '고증이 정밀하지 않고 견문이 넓지 않으며 소문으로 전해지는 말을 경솔하게 믿음으로써 한 사람의 사견에 의존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한편, 이러한 기사는 이수의『통감장편』에 기인한다고 밝힘으로써 당시 사서의 기록을 실증적인 고찰을 통해 사실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남송의 악비의 죽으메 대해서도 다순히 진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종의 뜻을 받들어 그를 죽인것일 뿐만 아니라, 설사 진회가 고종의 조서를 함부로 꾸며 악비를 죽였다 하더라도 이는 필시 고종이 한 것이라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송의 이종의 익호는 理學을 숭상했기 때문이라는 종전의 사서의 평가에 대해, 고종이 당시 유명한 이학자인 진덕수와 위승옹을 사미원의 견제 때문에 기용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 반박하고 있다.
『세사정강』의 저술은 이 책의 제목에서 뜻하는 바와 같이 世-國-家에 이르는 천하의 강상을 바르게 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구준은 '세'는 화이를 포함하는 천하를 지칭하는 것인 동시에, 천하의 치란은 당연히 화이의 엄곃한 구별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세도는 천도의 변화에 상응하여 흐앙성쇠가 결정되며, 천도는 음양의 원리에 따라 양도인 중국,굱,천리와 음도인 이적,소인,인욕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세도의 치란은 음양의 소장에 따라 1.화하순전지세(한,당),2.화하할거지세(삼국),3.황이분열지세(남북조,남송),4.화이혼란지세(동진,오대),5.이적순전지세(원)로 대별하는 한편, 세도의 치란은 무엇보다 먼저 화이의 세력 균형 여하에 다려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구준은 특히 '夷夏之防'을 중시하여 이를 세도성쇠의 관건이라고 파악하는 한편, 이적의 화를 초래한 역사적 추이와 그 원인에 대해 평가하였다. 그는 춘추이래 이적의 화는 1중국인을 오랑캐 지역에 거주케 하여 함부로 중국을 분열케 한 삼국시대인 오,초의 시작단계, 2.오랑캐 사람들이 중국지역에 성장하여 중국의 해가 된 유연의 북한과 석륵의 북주시대인 중간단계,3.오랑캐 사람들이 오랑캐 지역에서 성장하여 중국인을 해친 거란의 마지막 단계 등 '三變'의 발전단계를 거쳤는데, 앞으로도 그 화의 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심화되면 될수록 중국의 *륜을 없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이와 같이 구준은 천하가 분열되고 인류가 혼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천면을 받은 군주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소임을 맡기도 화이가 서로 침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이로써 볼 때 구준의 화이론은 중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이적에 대한 적극적 경략을 주자하기보다는 화이의 강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세력군형을 통해 공존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진의 만리장성 축성에 대한 쳥가에서, 이적의 방비는 무엇보다 내정 정비가 중요함을 강조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구준은 방정학(방효유)이 주장하는 정통론의 내용중에서 특히 '夷狄而替中國'하는 '변통'에 주목하여 이적은 中國之主로 인정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요,금,원 등 이민족의 왕조에 대해서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거란,여진,몽고라 칭하는가 하면, 여진의 군주 오걸매의 죽음에 해해서도 舊史에서 '졸'로 쓴 것과는 달리 특별히 '死'로 폄하함으로써 화이지분을 특별히 강조한 그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불교의 중국 유입에 대해 "천지가 개벽한 이래 오랑캐의 화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척불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당시 宋史의 重編을 둘러싸고 요,금,송사를 함께 열거하는 일부 사가들의 역사 서술태도에 대해 "공자의 가법을 어기고 성스런 춘추의 鑑戒를 잊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송겸과 왕위 등이 편찬한 『원사』가 원 왕조의 역사를 정사로 달고 있는데 반감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구준은 히적의 역사인 요,금사를 송사 뒤에 分書함으로써 한족의 정통을 그의 화이론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확립함으로써 한민족중심 사학의 재정립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잘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방정학의 ...정통론에 따르면, 각 시대의 왕조와 왕위는 '정통'과 '변통'으로 대별되면 특히 '변통'은 1取之不以正, 2守之不以仁義, 3夷狄而替中國,4女后而확天位의 네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화이론은 이적에 대한 적극적인 經略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강역을 정하여 상호 침법하지 않고 공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잇다
이에따라 『세사정강』에서는 구본인 왕위의 계승에 대해, 먼저 천의에 입각한 선양을 가장 이상적이고 정당한 왕위 계승법이라고 생각하였다...구준은 삼국 중 위의 조비가 후안의 마지막 군주인 헌제 유협에게 왕위를 자신에게 선위하도록 강요한 사실에 대해, 이는 "선위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의 악함을 가리는 것"인 동시에 "사람들과 하늘을 속이는 행위"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당 목종 이후 환관에 의해 옹립된 7명의 군주에 대해 '즉위'라고 칭하지 않고 '立'이라고 쓴 것에서도잘 반영되고 있다.
(구준은 도교나 불로장생의 신선사상,巫관 등도 비판하였다. )
북위 태무제 태평진국 7년(446)의 훼불령에 대해 "정교를 복둗우고 사설을 물리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함으로써..
진 이후 명대에 이르는 12세(진,한,삼국,진,동진,남북조,수,당,오계,송,원,명등)....
구준은 『세사정강』의 저술 목적이 '著世變也, 紀事始也'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 바와 같이 강상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변'의 출발점을 진시황제기로 설정하는 한편....그는 진시황제시기에 세도가 대변한 구체적인 징조로서, 먼저 봉건제의 폐지를 들고 있다. 왜냐하면 봉건제는 천지가 개벽한 이래 성왕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로서, 시황젝 이를 페지함으로써 이후부터 "事君者無世祿, 治民者無恒政"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황제의 명령을 '조'라 하고 자신을 '짐'이라 칭했던 사ㅣㄹ을 들고 있다. 이러한 칭호 때문에 군도는 날로 존중되는데 비해 신도는 상대적으로 점점 낮아짐으로써 상하가 서로 단절되고 신하를 존중하는 예가사라져서수양을 닦는 정통 학문(유학)을 시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준은 진시황제의 정치가 강상을 문란케 함으로써 역사상 세도가 대변하기 시작한 시기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세사정강』에서는 진세사로부터 기술하고 있으며, 이 시기 대변의 실례를 통해 당대 사람들에게 감계함으로써 국기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구준은 역대 중국 왕조에서 나타난 환관의 폐단에대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환관에 의한 군주 시해와 옹립, 정치 농단 현상, 그리고 환관의 군사지휘권 장악 등에 대한 역사적 연원과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구준은 환관정치의 폐단을 초래한 당 현종을 비록한 숙종,대종,덕종등 4왕에 대해 선왕인 ;테종의 죄인'이라고 평가함으로써 환관의 폐단을 강조하였다.
대신의 간신의 濫殺을 망국의 주요한 원인으로 들고 있다. ...동진의 안제 융안 4년(400)에 사마원현이 당시의 이부상서 차란과 어사중승 강적을 살해한 사실에 대해 葉適의 평가를 빌어 "私意로 두 대신을 함부로 죽였으니, 동진이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라 하여 간신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 현종 개원 25년(737)에 감찰어사가 우선객을 탄핵했다가 피살된 사건에 대해, 범조우의 말을 이용하여 망국과 대란의 징조라고 평가한 데에서도 잘 엿볼수 있다.
이처럼 구준이 대신과 간신등 師儒를 강조한 것은 정통 유학의 內聖과 外王의 두 가지 영역 중 특히 외왕의 실현을 강조하는 당시 유학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왕안석의 신법의 시행..에 대ㅔ해 이는 왕안석 개인의 뜻에 영합한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신법시행으로 "士風이 크게 나빠지고 인물의 선발 또한 예전과 같지 않다"고 지적함으로써 신법의 取士法이 왕안석 개인에게 영합하는 인물을 위주로 선발하여 공종성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하였다.
義보다 利를 주이하는 與民爭利의 당시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당시 풍미하는 여민쟁리의 풍조에 대해 구준은 그 원인을 한 무제 원봉 원년에 시행된 균유,평균법에서 찾고, 조정이 상인을 포함하여 일반 민과 쟁리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처럼 구준은 국각가 경제에 개입하는 전매정책이나 고의적인 여리정책에 반대하고 당시에 이미 보편화된 민간의 경제활동을 보장할 것을 강조한 점에서 현실적인 그의 상업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1/10세를 많지도 적디조 않은 "中正"이라고 평가하여 삼대를 존중하는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