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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중에서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16|조회수18 목록 댓글 0

중일전쟁 초기만 해도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 독립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배하면 독립이 올 거라는 희망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에 수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합류해 일본군과 싸웠던 것인데, 무한 삼진이 함락되자 조선의 독립은 이제 물건너갔다는 패배주의적 인식이 퍼졌다.

 

지식인들이 친일협력에 나서게 되는 또하나의 극적인 계기는 '파리 함락'이다. 1940년 6월 히틀러의 독일군이 애초에 팽팽한 공방이 예상되었던 프랑스와의 전투를 불과 보름 만에 끝내고 파리를 점령한 것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서구 근대의 몰락으로 인식되었다. 독일 나치즘은 부르주아적 서구를 깨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정치운동이었기 때문에, 나치즘의 승리는 근대적 서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파리 함락'이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는데, 그것이 바로 '동양의 부흥'이다.

 

조선 민중은 이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신체제를 향해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서구가 만들어낸 '근대'를 '극복'하고 열리는 '신체제'란 바꿔 말하면 군국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다. 조선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전체주의 체제를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혁파한 '새로운 질서'로 받아들였다. 이 새질서는 근대를 극복한 질서이자 동양의 승리를 알리는 질서였다.

실제로 이런 흐름 속에서 근대 극복의 문제를 들고 나온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채만식은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멸사봉공'을 외치면서 이를 근대 극복의 새로운 경지로 봤고, 서정주는 서양의 정신세계에서 탈출해 동양의 정신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동안 서양의 정신이 보여줬던 한계를 넘어서는 근대 극복의 장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무한 삼진 함락으로 득세한 '근대화론'이 '파리 함락'을 계기로해 '근대 극복론'으로 진화한 것인데,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이 연합하던 '국공합작'이 1927년 4월 결렬된 뒤 이듬해 열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사령부 코민테른의 6차대회는 식민지 부르주아지의 진보성을 인정하던 기존의 입장을 수정해 식민지 민족주의자를 타격의 대상으로 돌렸다.

허수열은...1912~37년 사이 조선 국내총지출의 연평균 성장률은 4.0~4.2%에 이르렀으며, 이런 성장률은 당시 세계경제 전반의 일반적 성장률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외형적 성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출발점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은 정반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르다. 일제하 조선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해방과 함께 그 성장의 내요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조선경제는 일제 강점기 초기 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또다른 통계에 따르면, 1911년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할 때 777달러였다. 이 1인당 국내총생산은 1937년에 1482달러로 정점에 도달하는데,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감소추세로 돌아선 뒤 1944년에는 1330달러로 줄어들고, 1945년에는 616달러까지 급락했다. 1945년 1인당 국내총생산이 1911년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이 되었을 때 조선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의 하나로 되돌아갔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허수열은 그 비밀이 조선경제권 내 '민족간 소유,소득 격차'에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배자인 일본인과 피지배자인 조선인 사이에 엄청난 서유와 분배의 차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런 '민족문제'를 배제한 채 조선이라는 지역 안에서 이뤄진 '개발'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실증적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그는 말한다. 일제하 개발의 관실은 일본인이 모두 따먹고 조선인에게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겨졌던 것인데, 이를 두고 허수열은 '개발 없는 개발'이라고 이름짓는 것이다. 민족간 소유,소득 격차가 어느 정도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광공업 회사자산의 경우 1942년 초를 기준으로 할 때 일본인 소유가 전체의 95%에 이르는 반면, 조선인 소유는 겨우 5%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조선인 광공업의 경우 근대적 대공업은 거의 없고 대부분 중소공업이었다. 이런 소유의 격차는 일제 강점기 후기로 갈수록 높아진다. "요컨데 조선에서 공업개발이 이뤄지면 이뤄질수록 또 그 개발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조선의 광공업 부문 생산수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일본인들의 수중에 집중되어 갔던 것이다."  일제하 주력산업인 농업의 경우도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1941년을 기준으로 볼 때 조선 내 일본인 농업인구는 전체 농업인구의 0.2%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인 소유 논의 비중이 전체 논의 54%(경성상공회의소 추계)에 이르렀다. 또 조선 내 미곡생산량은 1910~41년 사이 52.3%가 증가했지만 조선인 미곡소비량은 오히려 감소했다. 일본인 지주들이 증상된 양보다 더 많은 쌀을 밖으로 빼돌렸던 것이다. "그 결과 1941년이 되면 일본인 농업인구의 1인당 농업수입은 조선인의 96배에 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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