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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인구 변화 추이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18|조회수34 목록 댓글 0
과거는 물론 지금도 국력을 평가하는 하나의 지표가 바로 인구다.
물론 인구가 국력을 가늠하는 지표 중 하나가 될수 있을지언정 국력 그 자체로 대변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중국의 강국의 면모를 고루 갖추었지만 과거에는 중국이 인구만 많고 땅만 넓은 나라로 인식되기도 했다. 아울러 인도 역시 지금 핵무기를 보유하고 파키스탄과 국경 분쟁을 자주 일으키는 등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중국 다음으로 인구만 많고 땅 넓고 정말 가난한 국가로 인식됐었다.

주인장이 보기에 반드시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다고 해서 강국이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나라일수록 강국, 선진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 나라의 현재 남북한 인구는 7천만이다. 지금 우리 나라 경제가 IMF 체제 속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에 휩쓸리고 있음을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런 우리 나라가 지금 정도의 국력을 유지하고 인구를 1억까지 불린다면 국내 수요만으로도 얼마든지 경제 유통이 가능해진다. 고로 주인장이 주장하는 고토 회복은 이런 장기적인 경제적 효과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도 이런데 고대에는 인구라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인구라는 것은 곧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이며 등용해서 국가 통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를 얻을 확률이 많다는 소리이며 군대에 징집할 대상자가 많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하물며 세금과 군대가 고대에는 국가 통치에 절대적이었던 것만큼 고대 국가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인구 증가는 곧 국력 증강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고 항시 그들이 고심해야 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동명성왕에 의해 기원전 37년 요동과 만주벌에서 건국되었다. 물론 그들은 졸본부여를 흡수하고 비류국을 정벌해 후국으로 삼으면서 강력한 대외 확장 정책을 펼친다. 이것은 곧 영토 확장과 아울러 인구 증가를 나타낸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끊임없이 대외 확장 정책을 펼치는데 특히 인구가 많은 중국 대륙을 표적으로 삼는다.

'후한서' 를 보면 국조태왕이 죽은 이듬해(122) 후한의 효안제(孝安帝)가 조서를 내려 선비와 예맥이 해마다 와서 백성들을 노략하는데 수천명이 움직이고 수백명을 제재하는데 그들이 스스로 와서 포로를 돌려보내면 어른은 비단 40필, 어린이는 그 반을 준다고 공표한다. 당시 차태왕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예맥, 선비 등이 어느 정도로 후한을 자주 침공했고 그 피해가 국경에서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반증하는 기록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 세력인 선비는 후한의 국경을 공격해 끊임없이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또한 물품들을 약탈해 갔을 것이다. 고구려는 확실히 국조태왕때 한차례의 업-그레이드(Up-grade)를 이루었고 차태왕때는 후한을 정벌해 화근의 싹을 잘라버릴 계획을 세울만큼 그 국력이 크게 성장한다. 주인장은 이 국조태왕-차태왕 시절을 고구려 성장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게 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주인장은 차태왕때 고구려의 수군이 조직적으로 정비되었다고 본다.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교류를 할 정도였다면 그 교역력은 결코 육로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국초부터 고구려가 해상력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조직적인 수군력은 이때부터 정비됐었다고 생각한다.

2. 또한 이 시기 고구려에 본격적으로 정보 담당 부서가 정비되었을 것이다. 한때 주인장은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를 비롯한 중국 각 왕조의 정보 담당 부서(오늘날의 안기부나 국정원, CIA 정도의 규모를 가진 관청)가 존재했다는 가정하에 역사 소설을 쓰기도 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에서 이때 고구려의 '선배 제도' 가 있었고 그로 인해 고구려가 강성해졌다고 하는데 그것에 어느정도 동조하는 바이다.

3. 대단히 활발한 대외 정복으로 인해 이 시기 고구려는 북부여를 누르고 확실하게 동북방 유일의 강자로 부상한다. 영토 확장과 국토 개척은 곧 인구 증가를 의미하며 후한측에서 인구를 비단을 주고 살 정도였다면 고구려가 약탈해간 인구(포로일 가능성도 높다)가 엄청난 숫자였음을 알 수가 있다. 즉, 고구려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이다.

1세기 유리명태왕때 이미 2만의 대병을 동원했던 고구려다. 그 말은 유목민족의 군제에 의하면 최소한 고구려의 인구가 15만 정도였다는 소리가 된다. 거기에 유리명태왕 역시 주변 제국(諸國)을 차례로 정복하고 선비를 복속시켰으며, 대무신태왕때는 동부여를 정벌하기도 하는데 그것만 봐도 고구려의 당시 인구는 30~40만에 거의 육박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구려는 지방 소국 혹은 단군조선 해체 이후 지방 거수국(열국)의 수준에서 벗어나 당당히 구심점으로 떠오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여러번 말했지만 고구려는 국조태왕-차태왕 기간에 급격한 국력 신장을 이루고 있기에 유리명태왕때와 비교하면 월등한 국력을 자랑했었다. 고로 주인장은 2세기 초 고구려의 인구를 약 100만 정도로 본다. 2세기 중엽 북방의 강자가 된 선비의 당시 인구를 약 100~150만 정도로 추정하는데 그에 비등할 정도의 국력임을 알 수 있지 않나 한다. 또한 당시 고구려가 외교권, 군사권에서 주도적인 세력임을 봤을때 고구려의 국력이 그만큼 뒷받침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세기 말 산상태왕때가 되면 발기가 휘하 3만호(최하 15만)를 이끌고 공손도에게 투항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으로 봐서 당시 고구려의 귀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인구 역시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공손씨는 대륙 동북방 요서 지역에 웅거한채 50여만의 인구와 수만명의 군대를 보유한 지방 군웅이었는데 그런 공손씨에게 3만군을 빌려 고구려를 공격한 발기는 결국 패한다. 당시 공손씨는 지방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국력을 과시했는데 동북방의 패자라 할 수 있는 고구려가 그보다 더 강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3세기 동천태왕때로 오면서 관구검과의 대전에서 동천태왕이 직접 거느린 친위군은 2만이다. 하지만 병종에 있어서 기병이 혼용되어 있고 철기도 5천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고구려가 괄목할만한 국력 신장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고구려는 이때 북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교류로 이미 무서울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평양으로 천도하고 신라까지 공격하는 등 활발한 대외 팽창으로 각지를 고구려의 영역권으로 확고히 하면서 아울러 국가 통치력을 다졌다고 본다.

당시 위의 인구가 대략 500여 만인데 이것은 한 가구당 7~8명으로 계산한 수치다. 당시 고구려의 한 가구당 인구가 몇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관구검과의 전투가 적의 방진에 철기만으로 돌격한 무모한 군전략이었던 점을 봤을때 고구려는 위에 비해 군사력이 약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물론 당시 관구검은 북부여는 물론 오환의 군대까지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했었다. 연합군이 아니었다면 고구려가 결코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때 고구려의 인구는 위나라 인구의 반 정도인 150~200만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서천태왕때는 숙신을 부용국으로 삼고 미천태왕, 고국원태왕때는 모용씨와의 끊임없는 대결로 경쟁적으로 국력을 신장시켰다. 특히 미천태왕때는 중국 군현들을 격파하면서 대륙쪽으로 적극 진출을 기도하는데 당시 동원된 고구려군은 3만 이상의 대군이었다. 이 당시 고구려는 20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대국으로 성장했다고 보여지는데 태왕 직할군의 규모가 점점 증가하고 있고 대외 정복에 동원되는 군대의 규모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인구(군대)가 늘었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4세기 중엽 드디어 고구려와 모용씨는 각각 6만과 5만 5천의 대병으로 맞붙게 된다. 여기서 고국원태왕은 전략을 잘못 채택해 대패하고 앞서 동천태왕때 관구검의 침입을 받았던 것 이상으로 크게 타격을 받는다. 우문부 격파에 앞서 고구려를 공격한 모용부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이후 우문부 격파는 물론 화북 지역으로 진출해 전연을 세우고 인구 1,000만의 대국으로 발전시킨다. 전연(前燕)은 당시 화북 제일의 대국이었다.

이로써 고구려가 한동안 전연에 칭신하며 치욕스런 역사를 전개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후 서쪽에서 강족이 중심이 되어 성장한 전진(前秦)이 전연을 멸망시키고 장강 이북을 전부 통일한다. 인구 1,500만 이상의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전진은 이후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는다. 소수림태왕때 고구려가 유주를 지배했다고도 하는데 주인장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당시 고구려는 거란의 침입을 받기도 하는 등 그 세력권이 그리 넓지도,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지도 못 했다.

4세기 말 고국양태왕이 즉위하면서 대륙에는 다시 전진이 무너지고 후연이 들어선다.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전진도 부견이라는 걸출한 영주 밑에서 통일된 힘을 보였지만 결국 이민족끼리의 혼성군이라는 약점을 이기지 못 한채 90만의 대군으로 동진을 공격했다가 10여만의 동진군에게 대패하고 군대는 와해, 나라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화북에 재등장한 세력은 전연 모용부의 모용수, 그는 후연을 세워 다시금 고구려와 패권을 놓고 다툰다. 이때 고국양태왕은 4만의 대군으로 요동을 공격하고 1만의 포로를 잡아 온다.

그리고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의 즉위를 맞이한다. 391년 즉위해 413년 죽을때까지 그 기간은 비록 20여년으로 짧지만 그 기간 변화한 고구려는 앞선 수백년의 변화보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비류백제 공격에 동원된 왕당(직할군)만 해도 5만이었으며 여기에는 수군과 보병, 기병(경, 철기)이 모두 운용되고 있었다. 또한 낙동강 유역 정벌전에도 5만의 대군을, 후연 정벌전에도 수만의 대군을, 영산강 유역 정벌전에도 수만의 대군을 동원했다. 아울러 동부여와 숙신 재정벌은 그렇다 치고라도 비려와 거란 정벌시에는 상당수의 기병을 주로한 대군을 동원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주인장이 보기에는 소수림태왕, 고국양태왕대의 국가 안정기를 거치면서 고구려의 국력이 급속히 신장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연과 전진의 교체시에 접경 지대의 인구가 고구려로 흘러 들어왔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으며 고국양태왕때도 전진과 후연의 교체로 인해 국경에서 적지 않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구려로 흘러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고구려와 화북의 상황을 보면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상황이 훨씬 안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호태왕때 고구려는 그 영토가 수배 이상 불어난다. 특히 한반도 중남부, 왜 열도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함으로써 세력권을 크게 강화했으며 후연 정벌로 인한 유주 지배로 화북에도 막강한 지배력을 과시했다. 화북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유주 지배에 대해 주인장은 고구려가 이후 백년이 넘도록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봤을때 광개토호태왕의 인구는 두배 이상으로 크게 불어 과거 전연이 고구려 격파 이후 화북에 진출해 1,000만의 인구를 자랑했던 것처럼 거의 1,000만에 육박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광개토호태왕을 정복 군주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는 진정 위대한 정복 군주였다.

5세기 초 장수태왕이 즉위하고 100여년간 그의 치세가 계속 된 상황에서 고구려는 더욱 성장하게 된다. 바로 후연 이후 들어선 북연을 그대로 흡수하고 한성백제를 멸망시킴으로서 한강 유역은 물론 충청도 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토로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방 초원의 지두우까지 유연과 분할 통치하고 실위, 물길 등의 세력을 고구려의 천하관 아래 집어넣으니 광개토호태왕대에 비해 다시 한번 성장한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인구를 주인장은 대강 1,500만에 가까웠다고 보고 있다. 당시 북위의 인구가 1,500~2,0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대국이었는데 그런 북위가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상황이라면 고구려의 국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나 한다. 하물며 삼국유사는 고구려가 가장 융성했을때 인구가 21만 508호였다고 적고 있는데 대략 110여만에 달하는 수치다. 그렇지만 이미 인구 100만은 2세기 이후로 보유했었다고 보여지는 바 이 숫자는 4~6세기 고구려 수도권의 인구가 아닌가 한다.

단, 이 1,500만의 인구 중 고구려인이라고 불릴만한 인구는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단순한 후국, 부용국의 인구는 고구려인이라고 할 수 없는 수치다. 순수한 고조선 - 북부여 - 고구려+졸본부여의 계통을 잇는 인구는 채 100만도 안 되었을 것이며 점차 고구려의 정복 범위가 넓어지면서 고구려인으로 동화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북방 초원과 화북 지역은 들어서는 세력에 따라 유동 인구가 많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인구 계산이 힘들지 않을까 한다. 암튼 이 당시 고구려가 대국으로 성장해 동북아가 아니라 동아시아를 주도해 나갔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후 고구려는 문자명태왕, 안장태왕, 안원태왕, 양원태왕, 평원태왕, 영양태왕대를 거치면서 비록 한반도에서는 그 세(勢)가 많이 줄어들지만 여전히 북방에서는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거란으로 대표되는 서요하 상류와 내몽골 지역의 지배권(이는 곧 북방 초원으로의 입구를 뜻한다)을 고구려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대릉하 주변에 10여만이 교류하는 거대 시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천하의 상권까지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대륙에서 수, 당이라고 하는 인구 5000만~1억에 달하는 유례가 없던 대제국이 들어서고 고구려와의 파워 게임(Power Game)에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수, 당과 고구려의 문명 대전(김용만님의 표현)' 이라 할 수 있겠다. 무려 7~10배 이상의 국력(인구)을 가진 대제국과 맞서는 고구려는 무려 6차례나 승리한다. 물론 고구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끝까지 막아냈다는 것에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로 대표되는 동북아 문명권, 고구려 문명권의 자존심이고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시 인구는 5부, 176성, 69만여호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 가구당 5명으로 치면 350여만의 인구로 계산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당이 인구 추산이 가능한 지역만 추스렸던 것을 봤을때 수도권을 위시한 중요 지역의 인구일 뿐 고구려 전체의 인구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 장안성에서 20여만의 인구가 당으로 끌려갔던 점 등을 미루어 봤을때 고구려 말기 수도권의 인구는 최소한 15만 호정도는 됐을 것이며 고구려의 전체 인구 역시 *700~1000만 정도였다고 보여진다.

* 앞서 말했지만 인구의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를 주인장은 유동 인구의 수치가 높음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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