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글을 길게 쓸수 없는 상황이라서 짧게 내 생각을 적을까 한다.
주인장이 이렇게 고구려에 대한 글을 쓴지 정말 오랜만이라서 떨리는 점 먼저 말씀드릴까 한다.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에 대해서 주인장은 상당히 오래전, 그러니깐 고구려 건국초부터 상당히 일찍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리명태왕때 선비를 정벌해 복속시킨 사실은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에 대한 일단락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광개토태왕때는 분명 거란을 정벌했고, 후연까지 정벌해 멸망시켜 버렸다. 주인장이 고구려와 북방 문화의 관계를 고구려 발전의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있음은 앞서 다른 글에서 살펴봤을 것이다. 그렇게 따졌을때 고구려는 4세기때 북방 초원에 대해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다고 생각되어 진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고구려는 북방으로 진출했지만 그것들은 단기적이었고 피상적이었고 크게 효과적이지 못 했다. 즉, 고구려가 초기에 북방으로 진출해서 분명히 어떤 변화, 발전을 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지속적이고 천하를 뒤흔들만큼 중요하지는 못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때 광개토태왕때 고구려의 서경(西警)이 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 서부, 거란의 지배 영역이었던 대릉하 상류부터 내몽골 고원 동부까지 뻗친 것은 분명히 획기적이고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이때부터 동양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에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등장한 시기가 이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당시 인구 1000만 이상에 동아시아에서 제일 가는 문명대국, 최강대국, 선진국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구려의 서경은 장수태왕때 더욱 사방으로 넓어졌다고 보는데 지두우를 분할하는 등 고구려는 그 위세를 사방에 떨친다. 고구려의 북변을 주인장은 대강 시베리아 고원 근방, 혹은 그 이상으로 잡고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적고 가능성만 있기 때문에 발해를 표본으로 어느정도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암튼 4~5세기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고 보는데 내몽골 고원과 외몽골 고원까지 그 영역을 넓히지 않았나 막연한 추측을 한다.
한때 주인장이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부터 우리 한민족이 기원했다는 것에 대해 공부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바이칼호에서 전해지는 전설이 그것 중의 하나인데, 과거 고구려의 한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 바이칼호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섬인 올혼섬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혹시 옆에 지도가 있으면 몽골공화국에 있는 바이칼호가 요동이나 만주, 요하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살펴봐라. 고구려의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바이칼호까지 진출했다면 과연 언제 그랬을까?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 지역으로 투르크족이 쳐들어 왔는데 고올리족이 막아냈다고 한다. 고올리? 고리국? 한번 잘 생각해보자~돌궐칸 비문에 나오는 맥고올리와 이들 단어, 고구려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과연 오늘날 우리가 잘못 알고 있고 중국에서 그렇게 목숨 걸고 왜곡시키려는 고구려라는 나라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실제 내몽골 고원에는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성터와 석상이 남아 있다. 우연일까?
왜 고구려의 지배층은 고구려 멸망시 돌궐로 도망쳤고 어떻게 그 지역에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지배하고 스스로 '고려왕 막리지' 라고 칭할 수 있었을까? 고구려는 과연 북방 초원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고구려는 정말 우리에게 막연히 자랑스러웠고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역사로만 반길 수 있을까?
고구려의 내몽골 고원 경계...
이상...그에 대한 주인장의 짧은 생각을 한번 적어봤다.
나중에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생각을 글로 옮길까 한다.
그럼 이만...
주인장이 이렇게 고구려에 대한 글을 쓴지 정말 오랜만이라서 떨리는 점 먼저 말씀드릴까 한다.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에 대해서 주인장은 상당히 오래전, 그러니깐 고구려 건국초부터 상당히 일찍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리명태왕때 선비를 정벌해 복속시킨 사실은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에 대한 일단락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광개토태왕때는 분명 거란을 정벌했고, 후연까지 정벌해 멸망시켜 버렸다. 주인장이 고구려와 북방 문화의 관계를 고구려 발전의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있음은 앞서 다른 글에서 살펴봤을 것이다. 그렇게 따졌을때 고구려는 4세기때 북방 초원에 대해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다고 생각되어 진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고구려는 북방으로 진출했지만 그것들은 단기적이었고 피상적이었고 크게 효과적이지 못 했다. 즉, 고구려가 초기에 북방으로 진출해서 분명히 어떤 변화, 발전을 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지속적이고 천하를 뒤흔들만큼 중요하지는 못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때 광개토태왕때 고구려의 서경(西警)이 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 서부, 거란의 지배 영역이었던 대릉하 상류부터 내몽골 고원 동부까지 뻗친 것은 분명히 획기적이고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이때부터 동양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에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등장한 시기가 이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당시 인구 1000만 이상에 동아시아에서 제일 가는 문명대국, 최강대국, 선진국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구려의 서경은 장수태왕때 더욱 사방으로 넓어졌다고 보는데 지두우를 분할하는 등 고구려는 그 위세를 사방에 떨친다. 고구려의 북변을 주인장은 대강 시베리아 고원 근방, 혹은 그 이상으로 잡고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적고 가능성만 있기 때문에 발해를 표본으로 어느정도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암튼 4~5세기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고 보는데 내몽골 고원과 외몽골 고원까지 그 영역을 넓히지 않았나 막연한 추측을 한다.
한때 주인장이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부터 우리 한민족이 기원했다는 것에 대해 공부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바이칼호에서 전해지는 전설이 그것 중의 하나인데, 과거 고구려의 한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 바이칼호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섬인 올혼섬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혹시 옆에 지도가 있으면 몽골공화국에 있는 바이칼호가 요동이나 만주, 요하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살펴봐라. 고구려의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바이칼호까지 진출했다면 과연 언제 그랬을까?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 지역으로 투르크족이 쳐들어 왔는데 고올리족이 막아냈다고 한다. 고올리? 고리국? 한번 잘 생각해보자~돌궐칸 비문에 나오는 맥고올리와 이들 단어, 고구려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과연 오늘날 우리가 잘못 알고 있고 중국에서 그렇게 목숨 걸고 왜곡시키려는 고구려라는 나라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실제 내몽골 고원에는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성터와 석상이 남아 있다. 우연일까?
왜 고구려의 지배층은 고구려 멸망시 돌궐로 도망쳤고 어떻게 그 지역에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지배하고 스스로 '고려왕 막리지' 라고 칭할 수 있었을까? 고구려는 과연 북방 초원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고구려는 정말 우리에게 막연히 자랑스러웠고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역사로만 반길 수 있을까?
고구려의 내몽골 고원 경계...
이상...그에 대한 주인장의 짧은 생각을 한번 적어봤다.
나중에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생각을 글로 옮길까 한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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