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인장은 고구려의 경상도 지배가 갖는 의의에 대해서 잠깐 논해보려고 한다.
고구려의 남진은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보인다. 주인장은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영토를 강원도나 충청도 지방까지 넓히지는 않았어도 그 지역의 세력들을 휘하에 어느정도 복속시키고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백제, 신라사에는 초기부터 말갈이라고 하는 세력들이 뻔질나게 등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1세기 이후 국조태왕 시절을 거치면서 고구려는 평안도 지역을 접수했다고 보는데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한반도 중부까지 크게 내려오게 되었고 동천태왕 시절에는 황해도 남, 북부를 경계로 비류백제와 접경하고 있지 않았을까 한다.
동천태왕 19년(245) 겨울 10월에 고구려는 군사를 내어 신라 북쪽 변경을 침입하고 동천태왕 22년(248)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는다고 고구려본기는 적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는 이유없이 신라를 갑자기 공격한 것이 되고 신라는 이유없이 전쟁의 결과는 알수 없는 채 3년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는 소리가 돼서 굉장히 불합리한 기록이 된다. 이 19년조를 일도안사님은 21년(247) 조에 들어가야 하는데 인쇄상에서 잘못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신라본기 역시 조분이사금 16년(245)은 보면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서불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으나 이기지 못 하고 마두책으로 물러나와 지켰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이것을 보면 인쇄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아마 신라측에서 이를 고의로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분이사금 시절의 석씨 신라는 막 팽창하려는 과도기였으며 골벌국, 감문국, 고타군 등등 당시 신라는 주변 소국들을 계속 병합하고 있었다. 당연히 관구검의 세력들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함구무언 했을 것이다.
어찌했든 이때 <갑자기>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이유는 바로 관구검의 잔병들을 고구려가 추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고구려군은 지상군뿐만 아니라 수군도 같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신라는 결국 강원도에서 넘어오는 고구려군을 막아내지 못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경북 지역에서 강국으로 소문난 신라였지만 고구려는 대륙에서 활동하던 대국이었으니 이미 얻어터진 고구려군이라 해도 신라군이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후 경상도 지역에 부여계와 오환-선비계통의 유물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북방에서 남하한 세력이 신라로 유입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고구려에게 있어서 신라는 일종의 애물단지化한 것은 아닌가 한다. 한반도 동남부에 고구려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바로 선비족의 국가인 신라였으니 이 선비족이 미추이사금으로 부활하였던 것 같다. 이후 미추이사금 시절 고구려는 동북방의 신성에 순수하고 숙신을 정벌하는 등 동북방 후방을 안정시킨다. 이미 신라와는 더 이상 관구검의 잔병에 대한 신병처리에 대해서 협상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이후 북방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고국원태왕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전연의 모용선비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다. 전연이 비록 강국이긴 하였지만 당시 전연이 군사력이 강력해서 고구려를 이긴 것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력은 고구려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고구려는 군전략을 잘못 택해서 결국 치욕스런 역사를 전개했던 것이고 전연의 급성장이 고구려 정벌 성공 이후 이뤄진 것만 봐도 전연이 만약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 했다면 그 결과는 뻔히 보인다.
그리고 이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이상한 기록이 나온다. 내물이사금 37년(392)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이유는 고구려가 <강성(强成)> 하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고구려는 이미 강성했던 나라였다. 물론 고국원태왕때 한차례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이후 소수림태왕과 고국양태왕때는 비약적인 국력 신장을 이룩했었다. 그런 고구려가 강성하니깐 갑자기 신라가 볼모까지 보낼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고구려는 자신들을 관통한 모용선비가 한반도 동남부 문제의 경상도 지역에서 새롭게 정권을 이루자 이들을 위협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광개토호태왕이 등극해 막 성장할 시기였다. 그 결과 내물이사금의 신라는 고구려에 자진 복속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조분이사금때처럼 신라는 이제 강국이 아니라 막 한제국에서 이탈한 신흥국가일 뿐이고 군사력은 물론 국력 자체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런 신라가 고구려와 맞선다는 것은 자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라는 볼모까지 바치면서 급하게 고구려와 협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는 토내당주를 주둔시켜 신라 경주 일대를 지배하고 경상도 일원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는 등 경상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지배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지배는 5세기 내내 이뤄지게 되었고 결국 고구려는 전성기의 국력을 바탕으로 경상도 지역에 대해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각 기록을 보면 왜 열도의 세력이 남동 해상에서 고구려 순시선에게 걸릴 정도였으니 경상도 지배가 고구려에 의해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알 수 있다.
한때는 신라매금(왕)이 고구려 토내당주 장군에게 나아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던 적도 있었던 신라지만 결국은 마지막에는 고구려, 백제가 아닌 신라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주인장은 오늘 고구려의 경상도 지배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봤다. 주인장이 보기에 경상도 지역은 고구려의 최후방으로서 여기를 지배하게 된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서 영구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장수태왕때 토내당주에 속한 장수의 말실수로 신라는 경주내의 100여명이나 되는 고구려군을 죽이게 되고 고구려의 신라 지배는 마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영원히 후국으로만 남기려고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윤명철님은 고구려의 전성기 지도를 전 경상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그린다. 아마도 이 지도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도가 고구려 말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에게는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장수태왕때의 유일한 실책이었다면 신라 병합을 하지 못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제야 이미 한강 유역에서 무너지고 금강 유역에서 재건하는 시기였지만 신라는 아니었다. 가장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던 신라를 경주에서부터 붕괴시켰더라면 고구려는 신라를 영구히 지배할 수도 있었고 그럼 고구려, 백제의 이국(二國) 시대가 찾아왔을 것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경상도 일대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면 남해안과 왜 열도를 아우르는 중심부라고 생각한다. 이 지역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고구려는 신라의 왕권을 마음대로 부리고 남으로 왜 열도의 외교까지 차단하였으며 제주도와 백제 남부에 이르는 해상권까지 아울렀던 것이다. 하지만 경주 일대는 커녕 고구려의 영토가 충청권 이북으로 올라가면서 고구려는 확실히 한반도에서 그 세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는 결국 신라라고 하는 작은 나라이자 애물단지를 처리하지 못 하고 스러져갔다.
주인장이 보기에 '거란' 지배가 고구려 성장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면 고구려의 경상도, '신라' 지배는 고구려 제국 유지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나 한다. 이것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마찬가지였으니 경상도 지배가 잠잠한 시기에 고구려, 백제가 크게 성장하고 제국을 유지해 나갔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남진은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보인다. 주인장은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영토를 강원도나 충청도 지방까지 넓히지는 않았어도 그 지역의 세력들을 휘하에 어느정도 복속시키고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백제, 신라사에는 초기부터 말갈이라고 하는 세력들이 뻔질나게 등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1세기 이후 국조태왕 시절을 거치면서 고구려는 평안도 지역을 접수했다고 보는데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한반도 중부까지 크게 내려오게 되었고 동천태왕 시절에는 황해도 남, 북부를 경계로 비류백제와 접경하고 있지 않았을까 한다.
동천태왕 19년(245) 겨울 10월에 고구려는 군사를 내어 신라 북쪽 변경을 침입하고 동천태왕 22년(248)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는다고 고구려본기는 적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는 이유없이 신라를 갑자기 공격한 것이 되고 신라는 이유없이 전쟁의 결과는 알수 없는 채 3년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는 소리가 돼서 굉장히 불합리한 기록이 된다. 이 19년조를 일도안사님은 21년(247) 조에 들어가야 하는데 인쇄상에서 잘못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신라본기 역시 조분이사금 16년(245)은 보면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서불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으나 이기지 못 하고 마두책으로 물러나와 지켰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이것을 보면 인쇄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아마 신라측에서 이를 고의로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분이사금 시절의 석씨 신라는 막 팽창하려는 과도기였으며 골벌국, 감문국, 고타군 등등 당시 신라는 주변 소국들을 계속 병합하고 있었다. 당연히 관구검의 세력들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함구무언 했을 것이다.
어찌했든 이때 <갑자기>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이유는 바로 관구검의 잔병들을 고구려가 추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고구려군은 지상군뿐만 아니라 수군도 같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신라는 결국 강원도에서 넘어오는 고구려군을 막아내지 못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경북 지역에서 강국으로 소문난 신라였지만 고구려는 대륙에서 활동하던 대국이었으니 이미 얻어터진 고구려군이라 해도 신라군이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후 경상도 지역에 부여계와 오환-선비계통의 유물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북방에서 남하한 세력이 신라로 유입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고구려에게 있어서 신라는 일종의 애물단지化한 것은 아닌가 한다. 한반도 동남부에 고구려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바로 선비족의 국가인 신라였으니 이 선비족이 미추이사금으로 부활하였던 것 같다. 이후 미추이사금 시절 고구려는 동북방의 신성에 순수하고 숙신을 정벌하는 등 동북방 후방을 안정시킨다. 이미 신라와는 더 이상 관구검의 잔병에 대한 신병처리에 대해서 협상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이후 북방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고국원태왕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전연의 모용선비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다. 전연이 비록 강국이긴 하였지만 당시 전연이 군사력이 강력해서 고구려를 이긴 것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력은 고구려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고구려는 군전략을 잘못 택해서 결국 치욕스런 역사를 전개했던 것이고 전연의 급성장이 고구려 정벌 성공 이후 이뤄진 것만 봐도 전연이 만약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 했다면 그 결과는 뻔히 보인다.
그리고 이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이상한 기록이 나온다. 내물이사금 37년(392)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이유는 고구려가 <강성(强成)> 하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고구려는 이미 강성했던 나라였다. 물론 고국원태왕때 한차례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이후 소수림태왕과 고국양태왕때는 비약적인 국력 신장을 이룩했었다. 그런 고구려가 강성하니깐 갑자기 신라가 볼모까지 보낼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고구려는 자신들을 관통한 모용선비가 한반도 동남부 문제의 경상도 지역에서 새롭게 정권을 이루자 이들을 위협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광개토호태왕이 등극해 막 성장할 시기였다. 그 결과 내물이사금의 신라는 고구려에 자진 복속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조분이사금때처럼 신라는 이제 강국이 아니라 막 한제국에서 이탈한 신흥국가일 뿐이고 군사력은 물론 국력 자체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런 신라가 고구려와 맞선다는 것은 자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라는 볼모까지 바치면서 급하게 고구려와 협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는 토내당주를 주둔시켜 신라 경주 일대를 지배하고 경상도 일원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는 등 경상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지배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지배는 5세기 내내 이뤄지게 되었고 결국 고구려는 전성기의 국력을 바탕으로 경상도 지역에 대해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각 기록을 보면 왜 열도의 세력이 남동 해상에서 고구려 순시선에게 걸릴 정도였으니 경상도 지배가 고구려에 의해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알 수 있다.
한때는 신라매금(왕)이 고구려 토내당주 장군에게 나아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던 적도 있었던 신라지만 결국은 마지막에는 고구려, 백제가 아닌 신라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주인장은 오늘 고구려의 경상도 지배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봤다. 주인장이 보기에 경상도 지역은 고구려의 최후방으로서 여기를 지배하게 된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서 영구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장수태왕때 토내당주에 속한 장수의 말실수로 신라는 경주내의 100여명이나 되는 고구려군을 죽이게 되고 고구려의 신라 지배는 마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영원히 후국으로만 남기려고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윤명철님은 고구려의 전성기 지도를 전 경상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그린다. 아마도 이 지도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도가 고구려 말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에게는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장수태왕때의 유일한 실책이었다면 신라 병합을 하지 못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제야 이미 한강 유역에서 무너지고 금강 유역에서 재건하는 시기였지만 신라는 아니었다. 가장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던 신라를 경주에서부터 붕괴시켰더라면 고구려는 신라를 영구히 지배할 수도 있었고 그럼 고구려, 백제의 이국(二國) 시대가 찾아왔을 것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경상도 일대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면 남해안과 왜 열도를 아우르는 중심부라고 생각한다. 이 지역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고구려는 신라의 왕권을 마음대로 부리고 남으로 왜 열도의 외교까지 차단하였으며 제주도와 백제 남부에 이르는 해상권까지 아울렀던 것이다. 하지만 경주 일대는 커녕 고구려의 영토가 충청권 이북으로 올라가면서 고구려는 확실히 한반도에서 그 세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는 결국 신라라고 하는 작은 나라이자 애물단지를 처리하지 못 하고 스러져갔다.
주인장이 보기에 '거란' 지배가 고구려 성장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면 고구려의 경상도, '신라' 지배는 고구려 제국 유지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나 한다. 이것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마찬가지였으니 경상도 지배가 잠잠한 시기에 고구려, 백제가 크게 성장하고 제국을 유지해 나갔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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