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할듯 하다. 왜냐하면 발해의 건국과 맞물려서 삼국시대가 종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유일하게 정권을 잡고 영역권을 재편하고 있었으며 그 북쪽으로는 당의 영향력과 신라의 영향력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당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훗날 발해라고 하는 제국이 탄생하는데 이 발해의 건국이 과연 시대적인 흐름의 부산물인지, 민족적 의지가 가지고온 필연적인 것인지 이에 대해서 한번 간단하게 생각해보도록 하자.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해의 건국을 두고 주인장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말은 곧 그 당시 상황이 실제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발해(혹은 그 외의 제 2, 제 3의 발해)라고 불릴만한 세력이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발해의 건국이 운이 좋았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1.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고구려 舊土에 대한 지배력 약화
2. 돌궐의 발흥과 당 내부의 통치력 약화
3. 신라의 정지된 북진 계획과 北土에 대한 힘의 공백 상황 발생
대강 이 정도다. 하지만 우연히 이런 상황들이 맞았기 때문에 발해가 힘의 공백 상태인 만주에서 건국해 단숨에 동북방을 아우를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고구려 멸망 이후 확실히 당은 요양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 대해서 통치력을 행사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고구려 멸망은 668년, 발해 건국은 698년이다. 30년의 기간동안 당이 고구려의 구토에 대해서 어떻게 통치력을 발휘했는지를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그간 발해의 건국과 맞물려서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옛 지방 세력들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지 않았나 주인장은 생각하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가 바로 발해 건국과 필수적으로 맞물리는 것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보장태왕 27년(668) 2월에 이적 등이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부여주(扶餘州) 일대의 성 40개가 당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고구려의 오랜 북방 기지이자 후방 기지였던 만주 북부 일대가 붕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연남건이 5만의 구원군을 주어 부여성을 되찾으려고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고 고구려군은 3만의 사상자를 내고 쫓겨가고 만다. 평양성이 함락된 것은 이로부터 채 반년밖에 안 지난 9월이다.
그럼 연해주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주인장이 보기에 연해주 일대와 대흥안령 근방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거의 전무(全無)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기록 상으로도 30년의 만주 일원 지배도 확고하지 못 해 안동도호부 등을 결국 대륙 내지로 깊숙히 옮긴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요양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당의 직접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 지역은 이후 30년간 어떤 상태였을까? 주인장은 이 문제를 두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만에 등장한 발해는 건국 직후 20년도 돼지 않아 동북방을 단숨에 휘어잡는다. 이유는? 바로 그 지역에 건재하게 남아있는 옛 고구려 세력들과 손 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건국한지 100년도 안 된 발해는 무소불위의 국력을 자랑하며 해동성국(海東聖國)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한때 온라인상에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고구려 휘하의 말갈이 훗날 발해 건국과 동시에 말갈부(部), 즉 '민족적-부락적' 인 집단에서 한단계 승격해 '정치적-군사적 조직체' 로 재편되어 발해에 흡수된 것이 아닐까 말했던 적이 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가 동북방에서 패권을 다지고 있을때 그 지역에서 갑자기 강력한 지방 세력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바로 흑수말갈(黑水靺鞨). 당과 발해 사이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곧 발해에 복속되어 이후 철저한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발해의 지배를 받기 이전의 흑수말갈이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흑수말갈이 바로 조직체로서 성장한 대표적인 지방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주인장은 단순한 말갈세력의 집합체가 아닌 과거 고구려의 지방 세력들과의 연합체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흑수말갈은 그 정예병만 1만이 넘을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한만큼 단순히 말갈들의 집합체라기보다는 만주 일원은 옛 고구려 세력들의 부활적인 모임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말은 곧 당이 이 지역에서 지배력이 약해졌으니깐 거기서 발해가 생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당의 지배력이 약해져서 발해가 그 힘의 공백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옛 세력들 때문에 당의 지배력이 약해졌고 그로 인해 그 옛 세력들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조영 부자가 영주 근방에서 동으로 이동해 동쪽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마침 빈 땅에 새 주인이 나타났다는 식으로 발해 건국을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옛 세력들이 규합해 어떤 일원화된 통일체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고구려 멸망 이후 진행되고 있었고 대조영 부자는 그 중심에서 구심점이 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간단한 문제일 뿐이다. 즉, 대조영 부자가 동으로 이동하지 않았었더라도 만주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이 지역에서 통일된 반당(反唐)적인 집단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고(古) 박시형을 위시한 북한사학계에서는 발해史를 굉장히 민족적,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대조영 부자가 동모산으로 이동하기 이전에 이미 요양 서부 일대에서는 거란과 말갈 세력이, 동부에서는 고구려계 세력이 당에 대항해 군사적인 행동을 감행하고 있었고 안동도호부 역시 이때 습격당했었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당에 대해 여러 지역에서 피지배층이 저항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들 역시 그런 세력들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는 고구려계, 즉 고구려 멸망 이후 그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의지나 목적 의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대조영 부자는 분명 고구려의 후손이었고 그들은 당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돌궐의 발흥과도 맞물리는데 발해가 건국될 무렵, 묵철가한의 돌궐 제 2 제국이 발흥했고 당은 돌궐과의 관계 속에서 발해를 무방비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발해가 건국후 돌궐에게 사신을 보내 통교했다는 기록들, 이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발해의 건국에서 그들은 주체적으로 돌궐과 연합 세력을 형성했다는 소리가 될 것이며 그 결과 돌궐과 발해라는 두 세력 사이에서 당은 두가지 전선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발해가 건국할 당시 돌궐이 발흥하지 않았다해도 발해가 신생국인만큼 다른 세력들과 연합 전선을 펼쳤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훗날 발해가 왜(倭)와 저 멀리 서역에까지 교통로를 확보하고 통교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신라의 삼국시대 종결 직후, 북방 한계에 대한 논쟁이 많은데 대개는 국사책에 나온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신라의 북계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당이 30년간 한반도 북부부터 만주 일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 했던 것 만큼, 신라가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 지역에 대한 신라의 욕심이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주인장은 고구려의 구토의 토착 세력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당과의 관계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미 나-당 전쟁으로 피는 실컷 흘리고도 남은 양측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전쟁쯤은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라가 당의 국력을 상회하지 못 한만큼, 계속적인 전쟁은 신라의 멸망마저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른다.
신라는 토번의 20만 대군이 당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장안까지 진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당 전쟁을 힘겹게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 북방 지역에 잔존하는 강력한 고구려 지방 세력들, 국력 방출의 한계 등등을 이유로 북방 영토를 적극적으로 경영하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북방 지역은 힘의 공백지 아닌 힘의 공백지가 되어 버렸고 그 자리에는 발해라는 이름의 국가가 건설된 것이다.
다시 말해 발해의 건국은 우연히 겹친 여러 상황들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생겼다고 주인장은 본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북방 유목민들의 제국들을 한번 살펴보자. 흉노, 선비, 거란, 몽골 등등의 민족들을 말이다. 한번 이상 세계사에 이름을 떨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유목제국을 건설한 이들을 말이다. 흉노 제국은 흉노족들로만 이뤄진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럼 선비는? 거란은? 몽골은? 북방 유목민들의 혈통과 가계만큼이나 복잡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인 흐름과 상관없이 강력한 지도자가 있으면 모였고 그들을 흉노니 선비니 하는 식으로 불렀을 뿐이다.
주인장이 보는 발해 건국도 이와 비슷한 발상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수많은 고구려 지방 세력들 중에서 영주에서 쫓겨나온 대조영 부자 세력이 중심이 되어 발해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 멸망의 연장선상에서 발해 건국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0년이 넘도록 북방을 경영한 고구려계(系)의 역사가 바로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한국사 북조(北祖)의 역사인 것이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의 요나라가 들어섰을때, 우리는 요사에서 얼마나 많은 발해인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해의 건국을 두고 주인장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말은 곧 그 당시 상황이 실제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발해(혹은 그 외의 제 2, 제 3의 발해)라고 불릴만한 세력이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발해의 건국이 운이 좋았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1.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고구려 舊土에 대한 지배력 약화
2. 돌궐의 발흥과 당 내부의 통치력 약화
3. 신라의 정지된 북진 계획과 北土에 대한 힘의 공백 상황 발생
대강 이 정도다. 하지만 우연히 이런 상황들이 맞았기 때문에 발해가 힘의 공백 상태인 만주에서 건국해 단숨에 동북방을 아우를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고구려 멸망 이후 확실히 당은 요양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 대해서 통치력을 행사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고구려 멸망은 668년, 발해 건국은 698년이다. 30년의 기간동안 당이 고구려의 구토에 대해서 어떻게 통치력을 발휘했는지를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그간 발해의 건국과 맞물려서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옛 지방 세력들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지 않았나 주인장은 생각하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가 바로 발해 건국과 필수적으로 맞물리는 것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보장태왕 27년(668) 2월에 이적 등이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부여주(扶餘州) 일대의 성 40개가 당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고구려의 오랜 북방 기지이자 후방 기지였던 만주 북부 일대가 붕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연남건이 5만의 구원군을 주어 부여성을 되찾으려고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고 고구려군은 3만의 사상자를 내고 쫓겨가고 만다. 평양성이 함락된 것은 이로부터 채 반년밖에 안 지난 9월이다.
그럼 연해주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주인장이 보기에 연해주 일대와 대흥안령 근방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거의 전무(全無)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기록 상으로도 30년의 만주 일원 지배도 확고하지 못 해 안동도호부 등을 결국 대륙 내지로 깊숙히 옮긴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요양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당의 직접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 지역은 이후 30년간 어떤 상태였을까? 주인장은 이 문제를 두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만에 등장한 발해는 건국 직후 20년도 돼지 않아 동북방을 단숨에 휘어잡는다. 이유는? 바로 그 지역에 건재하게 남아있는 옛 고구려 세력들과 손 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건국한지 100년도 안 된 발해는 무소불위의 국력을 자랑하며 해동성국(海東聖國)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한때 온라인상에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고구려 휘하의 말갈이 훗날 발해 건국과 동시에 말갈부(部), 즉 '민족적-부락적' 인 집단에서 한단계 승격해 '정치적-군사적 조직체' 로 재편되어 발해에 흡수된 것이 아닐까 말했던 적이 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가 동북방에서 패권을 다지고 있을때 그 지역에서 갑자기 강력한 지방 세력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바로 흑수말갈(黑水靺鞨). 당과 발해 사이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곧 발해에 복속되어 이후 철저한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발해의 지배를 받기 이전의 흑수말갈이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흑수말갈이 바로 조직체로서 성장한 대표적인 지방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주인장은 단순한 말갈세력의 집합체가 아닌 과거 고구려의 지방 세력들과의 연합체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흑수말갈은 그 정예병만 1만이 넘을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한만큼 단순히 말갈들의 집합체라기보다는 만주 일원은 옛 고구려 세력들의 부활적인 모임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말은 곧 당이 이 지역에서 지배력이 약해졌으니깐 거기서 발해가 생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당의 지배력이 약해져서 발해가 그 힘의 공백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옛 세력들 때문에 당의 지배력이 약해졌고 그로 인해 그 옛 세력들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조영 부자가 영주 근방에서 동으로 이동해 동쪽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마침 빈 땅에 새 주인이 나타났다는 식으로 발해 건국을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옛 세력들이 규합해 어떤 일원화된 통일체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고구려 멸망 이후 진행되고 있었고 대조영 부자는 그 중심에서 구심점이 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간단한 문제일 뿐이다. 즉, 대조영 부자가 동으로 이동하지 않았었더라도 만주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이 지역에서 통일된 반당(反唐)적인 집단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고(古) 박시형을 위시한 북한사학계에서는 발해史를 굉장히 민족적,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대조영 부자가 동모산으로 이동하기 이전에 이미 요양 서부 일대에서는 거란과 말갈 세력이, 동부에서는 고구려계 세력이 당에 대항해 군사적인 행동을 감행하고 있었고 안동도호부 역시 이때 습격당했었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당에 대해 여러 지역에서 피지배층이 저항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들 역시 그런 세력들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는 고구려계, 즉 고구려 멸망 이후 그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의지나 목적 의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대조영 부자는 분명 고구려의 후손이었고 그들은 당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돌궐의 발흥과도 맞물리는데 발해가 건국될 무렵, 묵철가한의 돌궐 제 2 제국이 발흥했고 당은 돌궐과의 관계 속에서 발해를 무방비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발해가 건국후 돌궐에게 사신을 보내 통교했다는 기록들, 이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발해의 건국에서 그들은 주체적으로 돌궐과 연합 세력을 형성했다는 소리가 될 것이며 그 결과 돌궐과 발해라는 두 세력 사이에서 당은 두가지 전선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발해가 건국할 당시 돌궐이 발흥하지 않았다해도 발해가 신생국인만큼 다른 세력들과 연합 전선을 펼쳤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훗날 발해가 왜(倭)와 저 멀리 서역에까지 교통로를 확보하고 통교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신라의 삼국시대 종결 직후, 북방 한계에 대한 논쟁이 많은데 대개는 국사책에 나온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신라의 북계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당이 30년간 한반도 북부부터 만주 일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 했던 것 만큼, 신라가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 지역에 대한 신라의 욕심이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주인장은 고구려의 구토의 토착 세력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당과의 관계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미 나-당 전쟁으로 피는 실컷 흘리고도 남은 양측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전쟁쯤은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라가 당의 국력을 상회하지 못 한만큼, 계속적인 전쟁은 신라의 멸망마저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른다.
신라는 토번의 20만 대군이 당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장안까지 진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당 전쟁을 힘겹게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 북방 지역에 잔존하는 강력한 고구려 지방 세력들, 국력 방출의 한계 등등을 이유로 북방 영토를 적극적으로 경영하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북방 지역은 힘의 공백지 아닌 힘의 공백지가 되어 버렸고 그 자리에는 발해라는 이름의 국가가 건설된 것이다.
다시 말해 발해의 건국은 우연히 겹친 여러 상황들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생겼다고 주인장은 본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북방 유목민들의 제국들을 한번 살펴보자. 흉노, 선비, 거란, 몽골 등등의 민족들을 말이다. 한번 이상 세계사에 이름을 떨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유목제국을 건설한 이들을 말이다. 흉노 제국은 흉노족들로만 이뤄진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럼 선비는? 거란은? 몽골은? 북방 유목민들의 혈통과 가계만큼이나 복잡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인 흐름과 상관없이 강력한 지도자가 있으면 모였고 그들을 흉노니 선비니 하는 식으로 불렀을 뿐이다.
주인장이 보는 발해 건국도 이와 비슷한 발상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수많은 고구려 지방 세력들 중에서 영주에서 쫓겨나온 대조영 부자 세력이 중심이 되어 발해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 멸망의 연장선상에서 발해 건국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0년이 넘도록 북방을 경영한 고구려계(系)의 역사가 바로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한국사 북조(北祖)의 역사인 것이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의 요나라가 들어섰을때, 우리는 요사에서 얼마나 많은 발해인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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