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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국가: John of Salisbury의 교속이원론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9.09|조회수159 목록 댓글 0
 

교회와 국가: John of Salisbury의 교속이원론


김       중       기*



Ⅰ. 머리말                                     Ⅱ. 교속이원론의 연원

Ⅲ.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케트 사이의 갈등       Ⅳ. 교권과 속권의 역할과 관계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c. 1115-1180)이 활동하던 12세기의 서유럽에서는 교황권이 유례없이 강화되고 있었다. 11세기에 추진되었던 교회의 쇄신 운동과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y Ⅶ, 1073-1085)의 개혁정책에 힘입어 교회의 권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1) 그리하여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교황권 지상주의자들은 교회측에서 그 동안 견지하였던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세속의 권력이 교회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과감한 이론을 펼쳐 나갔는데,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나 아우구스부르그의 호노리우스(Honorius of Augusburg, 12세기 초) 등은 바로 그러한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존은 12세기 교황권 지상주의 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베르나르나 호노리우스 등과 함께 크게 주목받고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主著인 󰡔폴리크라티쿠스󰡕(Policraticus, 1159)2) 속에서 세속 정부가 받은 물질적인 검은 교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함으로써3)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월성을 인정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나아가 “적법하게 수여할 수 있는 자는 적법하게 박탈할 수도 있다”라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경구를 인용함으로써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파면권까지를 공공연히 옹호한 것으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4)

본고에서는 교권과 속권에 대하여 존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필자는 존이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5) 적극적 교권옹호론자는 아니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음에서는 먼저 12세기경까지 교권과 속권이 대립해 온 과정과 그 과정에서 兩者가 펼친 견해들을 간략히 서술하겠다. 그런 다음 존이 활동하던 무렵의 영국 국왕이었던 헨리 2세(Henry Ⅱ, 1154-89)와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162-70)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당시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살펴본 후,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의 관련하에 행하여진 교권과 속권의 역할과 관계에 관한 존의 여러 언급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교속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과 태도를 검토하고자 한다.


Ⅱ. 교속이원론의 연원


영적인 사항과 영원한 구원에 관한 일은 교회가 관장하는 것이고, 현세적 또는 세속적 이해, 평화, 질서 및 정의의 유지는 세속 정부의 관장 사항이라는 양면적인 원칙은 중세 기독교 사회의 기본 원리였다. 이처럼 두 관할권에 대한 정의가 다소 애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兩者는 각각 神이 상대방에 부여한 권리를 존중하면서 상대방을 유린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중세인들은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개념은 흔히 ‘두 개의 劍’(two swords) 혹은 ‘두 가지 권위’(two authorities)의 이론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러한 이론은 5세기 말의 교황 겔라시우스 1세(Gelasius Ⅰ, r. 492-496)가 행한 권위있는 성명(Duo sunt)으로 뒷받침되었다. 그는 “세상을 지배하는 두 권력이 있는데 그 하나는 司祭의 신성한 권위(auctoritas sacrata pontificum)이고, 또 하나는 王의 주권적 권력(regalis potestas)이다”라고 교권과 속권의 분리론을 폈다.6)  그리고 교부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는 “궁전은 皇帝에게 속하고 교회는 司祭에게 속한다”라고 말하여 성직자의 독립적 권리를 주장한 바 있다.7) 이것은 중세의 공인된 전통이 되었고, 교황과 황제 사이의 경쟁으로 인하여 정신계와 세속계의 관계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 양편 모두의 논리의 출발점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나 겔라시우스가 활약하던 시기에 교회는 제국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질적인 과업으로서 이들은 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적극적인 역할에 힘입어 샤를마뉴 제국이 창설된 이후에 교황청에서는 교황의 일원론적 지배권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D. M. 니콜은 “교회측에서는 서임권투쟁 이전까지 교황권과 황제권이 서로 다른 독립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라고 주장하나,8) 당시 교황들이 현실적으로 강력한 황제권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황권과 황제권의 독립성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황제권을 교황권과는 별개의 실체로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성직서임권 투쟁을 계기로 세력이 강화되자, 교황은 본래의 의도대로 서유럽 공동체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교황권 지상론자들이 교황 일원론적 통치론을 확립하게 된 것은 바야흐로 12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 시기의 저명한 교회법학자들 가운데에는 피사의 후구치오(Huguccio of Pisa, d. 1210)와 같이 “황제와 교황의 권한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파생한 것이 아니라 각각 그 권한을 직접 신으로부터 받았다. 성서의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라는 구절은 두 권한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9)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히 교속 권한의 분리론을 주장한 학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교황권주의자들은 기독교계에는 오직 하나의 최고권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교황권 지상론자들은 영적, 세속적 권한이 모두 교황에게 속한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두 검의 이론’을 원용하였다.10) 이 시기의 대표적 교황권주의자였던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가 “교황이 영적, 세속적 두 검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하나는 司祭로서의 권한을, 다른 하나는 王으로서의 권한을 의미한다. 대관식에서 교황은 후자를 황제에게 위임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 황제가 소유한 제국 지배권은 교황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11)

세속 권력이 영적 권력에서 연유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1123년경 아우구스부르그의 호노리우스가 쓴 󰡔최고의 영광󰡕(Summa Gloria)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는 유대의 역사에서 사무엘이 초대 이스라엘 왕 사울에게 기름 부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속권의 기원은 교회에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12) 그러나 이론면에서 이렇게 급진적이긴 하였지만 그는 그 적용면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엄밀하게 세속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성직자들도 왕을 명예롭게 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존이 활동하던 12세기의 유럽은 바야흐로 교권이 크게 신장되어가던 시대였다. 개혁적인 교황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권위는 점차 높아지게 되었고, 교황들은 속권에 대하여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속권에서 행사해오던 성직서임권을 교회의 권리로 확보하는데 성공하게 되고, 13세기 초의 인노센트 3세(Innocent Ⅲ, 1198-1216)에 이르게 되면 명실공히 교황권의 절정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가 높아가고 있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이와는 색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교회에 대한 국왕의 권한이 어느 곳에서보다 크고 강했던 영국에서는 왕권이 크게 신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 1066-1087)의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이후 효율적인 중앙정부가 구성되었고, 그의 아들 헨리 1세(Henry Ⅰ, 1100-35)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왕권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존의 시대인 헨리 2세의 치하에서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으로 인하여 兩者 사이에 커다란 갈등이 생기게 된다.

교권과 속권에 대한 존의 견해가 표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기의 일이다.  이제 교회와 국가에 대한 존의 태도를 살펴보기에 앞서 당시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Ⅲ.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케트 사이의 갈등


󰡔폴리크라티쿠스󰡕에 나타난 교권과 속권에 대한 존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존이 처해 있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폴리크라티쿠스󰡕가 존이 그 시대 영국의 정치와 종교상을 목도하고 또 직접 현실에 참여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저술할 무렵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어떠했고, 그는 국가의 수장인 국왕과 영국교회의 지도자인 캔터베리 대주교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에 있었는가?

존이 활동하던 무렵의 영국은 노르만 왕조로부터 플란타제넷 왕조로 교체되는 혼란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혼란은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외동딸 마틸다(Matilda)와 그의 누이의 아들인 스티븐(Stephen)이 왕위 계승권을 놓고 대립하면서 비롯되었다. 헨리 1세는 생전에 모든 귀족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후에 마틸다를 국왕으로 옹립하도록 조처하고 그녀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왕의 사망 직후 신속히 정권을 장악한 스티븐은 그 충성서약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대귀족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스티븐이 왕위를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통치기간(1135-54) 내내 영국은 두 세력 사이의 치열한 대립으로 온통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다.13) 이러한 혼란은 1153년에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가 스티븐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기로 하는 양측간의 타협이 이루어지고, 이듬해에 그가 헨리 2세로 즉위하여 플란타제넷 왕조를 열게 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헨리 2세는 왕위에 오를 무렵 이미 상속과 결혼을 통해 앙주伯, 노르망디公, 아키텐公을 겸하게 된 당시 유럽 최고의 권력자로서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14) 그는 즉위 후 스티븐의 통치 기간에 빚어진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고 사법제도를 개혁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영국을 안정적인 국가로 성장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이처럼 왕권을 강화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그를 적극 보좌했던 핵심 인물은 토마스 베케트였다. 그는 대법관(chancellor)의 직책을 맡아 헨리 2세와 함께 왕권강화를 적극 추진하던 중15)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Theobald, 1139-61)가 사망하자 왕의 지명을 받아 대주교(1162-70)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대주교에 취임한 베케트는 갑자기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두드러지게 경건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고, 교회의 권한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왕과 사사건건 격렬하게 맞섰다. 이와 같은 그의 돌연한 태도변화는 영국의 교회와 왕실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왕권강화를 위해 최선봉에 서왔던 그가 대주교로 취임한 이후에는 국왕과 대립하며 교회의 권리를 열렬하게 수호하고 나서게 됨으로써 국왕과 대주교간에 커다란 알력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된 것은 1164년에 헨리가 ‘클라렌든 규약’(Constitutions of Clarendon)16)을 선포한 때였다. 당시 국왕의 재판권을 강화하고 그것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일련의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던 헨리의 의도는 교회에 대한 국왕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는데, 그가 성직자에 대한 국왕의 사법권을 인정하는 이 법을 선포하자 베케트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격분한 헨리는 베케트를 소환하였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는데, 존은 이때에 교황과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베케트의 입장을 옹호하고 도움을 호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17)

헨리 2세와 베케트 사이의 반목은 6년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은 이 기간 동안 망명지를 떠돌며 싸워야 했던 베케트와 존 두 사람에게 외롭고 힘든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케트는 주위에 존과 같이 탁월한 옹호자가 있었고 국내의 성직자들 다수로부터도 계속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1170년에 이르러 국왕과 일련의 타협에 이르게 되었고 베케트와 존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베케트는 귀국 직후 자신의 망명기간에 헨리 2세의 편에 섰던 성직자들을 파문함으로써 다시 국왕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그 해 12월 29일에 헨리 2세의 기사들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베케트의 암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王權, 즉 俗權에 의한 敎權의 침해에 대하여 크게 분개하였던 존에게 헨리 2세에 맞선 베케트의 저항은 한없이 義로운 투쟁이었다. 베케트가 분연히 일어섰을 때 서슴없이 그와 함께 고난의 길을 택했던 존은 베케트가 살해되자 그를 순교자 명부에 올려야 한다고 즉각 주장하고 나섰으며, 그를 聖人으로 추대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그러한 목적으로 聖人錄의 형식을 갖춘 베케트의 傳記를 집필하였다.18)

그러나 이와 같이 존이 국왕과 대주교와의 대립 구도에서 베케트의 명분을 지지했다고 해서 그가 국왕의 지위나 역할을 가볍게 보거나 국왕이 교회에 종속된 것으로 여겼다고 간단히 단정해서는 안될 것이다.19) 그는 교권을 수호하려는 베케트의 충실한 시종이자 동료로서 그의 명분에 기꺼이 동의하고 그를 적극 지지하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 국가의 수장인 국왕 헨리에 대한 충절과 기대감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은 󰡔폴리크라티쿠스󰡕를 집필할 당시 헨리의 왕권강화 정책에 대하여 이미 불만을 표출하였고 또 그로 말미암아 국왕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지만,20) 그 책 속에서조차 그는 헨리에 대하여 큰 호의와 찬사를 표명하고 있는 점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헨리의 전제화 경향을 우려하면서도 그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주기를 기대하는가 하면,21) 헨리가 성품과 재능과 위용 등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라고 극찬하면서 헨리가 스티븐 치하의 혼란상을 극복한 인물이자 영국을 위대한 국가로 이끌어 갈 적임자라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헨리 1세]의 외손자[헨리 2세]는 그의 덕성스런 업적들이 이미 주어진 은총과 끝까지 결부되기만 한다면 모든 시대를 통틀어 브리튼의 가장 훌륭한 왕이요, 노르만과 아키텐의 가장 운이 좋은 공작이 될 것이며, 영토의 광대함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유년시절로부터 그가 지녔던 활력과 도량과 신중과 겸손과 같은 덕성의 광채에 있어서도 첫째가 될 것이다.22)


존은 심지어 베케트가 헨리와 대립하여 국외로 망명하고 있던 무렵에도 헨리에 대하여 기대 어린 찬사를 보냈다. 그는 만약 헨리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되고 교회에 대하여 합당한 경의를 표하기만 한다면, “내가 보기에 헨리는 자연과 은총으로부터 받은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주저함 없이 단언컨대, 어떤 군주도 그에게 필적할 수 없거나 또는 극소수의 군주들만이 그와 필적할 수 있을 것이다”23)라고 그의 성품과 능력을 한층 신뢰하는 발언을 남겼다. 요컨대 그는 베케트의 명분을 지지하였던 만큼이나 헨리가 속히 교화되기를 바랐으며 결국 국가를 훌륭하게 이끌어 이 땅에서 신의 섭리를 구현할 인물은 다름 아닌 국왕임을 확고하게 인정하였다.24) 그가 󰡔폴리크라티쿠스󰡕의 집필을 계획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헨리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이 책을 당시 대법관이었던 베케트에게 헌정하였던 것이다.

존은 헨리가 교회의 권리를 짓밟고 폭군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바로 그러한 조치에 항거한 베케트의 명분에 흔쾌히 동조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영국의 정치적 혼란상을 극복하고 국가를 안정되게 이끌어 갈 책임이 헨리에게 있음을 인정하였으며,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헨리가 왕권을 올바르게 행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음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교권으로부터 독립된 속권, 교회와 국가의 상이한 역할과 기능, 군주의 지위와 책무 등에 대한 존의 견해는 바로 이러한 영국의 정치 상황 속에서 표출된 것이었다.


Ⅳ. 교권과 속권의 역할과 관계


교권과 속권의 관계에 대하여 존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그의 발언들은 󰡔폴리크라티쿠스󰡕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한 그의 태도는 한마디로 단정하여 말하기 어려울 만큼 미묘하다.25) 그는 이 책 속에서 속권은 전적으로 교권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였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속권의 수장인 군주가 국가의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神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자율권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이러한 발언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존이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월성을 명료하게 인정하였다고 보이는 대목은 국가를 인체에 비유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26) 그는 성직자를 인간의 영혼에, 그리고 군주를 인체의 머리에 비유하며 그 각각의 지위와 역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神聖한 일을 맡은 자들이 그 분의 代理者(uicarii)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더 나아가, 영혼이 온 몸을 지배하듯이 하나님께서 종교의 감독자(religionis praefectos)가 되도록 부르시는 이 분들이 온 몸을 통할한다. … 군주는 실로 국가에서 머리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地上 代理者들에게만 종속된다.27)

  

위와 같은 존의 설명에 따르면 인체의 영혼에 비유되는 성직자들은 神의 대리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국가에 대한 통제권, 즉 세속사에 대한 주도권을 갖는다. 그리고 머리인 군주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직무를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신의 대리인인 성직자들에게 예속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권과 속권을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한편,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속권은 교권으로부터 그 지위와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따라서 군주는 성직자의 대리인이라고 단정하였다.28) 아울러 그는 교회는 세속의 잘못을 바로잡을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였으며,29) 심지어 로마법의 경구를 인용하여 물질적 검을 세속 권력에 부여한 교회는 그 검을 받은 자의 지위를 박탈할 권리까지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까지 하였다.  


법률적 논법에 따르면 원할 권리가 있는 자는 원하지 않을 권리도 있고, 적법하게 수여할 수 있는 자는 적법하게 박탈할 수도 있다.30)


이상과 같은 존의 말들은 그가 강경한 교권우월론자라고 주장되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속권이 교권으로부터 파생하였기 때문에 교권은 속권을 감독할 당연한 권한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군주를 폐위할 자격까지를 가지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일부 구절들만을 근거로 하여 존이 교권의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했다고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폴리크라티쿠스󰡕의 다른 부분들에서 그는 오히려 속권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교권과 속권의 서로 다른 기능과 역할 등을 강조하면서 속권이 교권에 일방적으로 예속된다고 하기보다는 兩者의 상호 협동을 통한 조화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이 속권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던 점은 그가 속권의 수장인 군주를 어떠한 존재로 여기고 그의 역할이 어떠해야 한다고 보았는지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먼저 속권의 기원과 역할에 관한 그의 생각을 알아보자.  그는 교권과 속권에 관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至高하신 慈悲에 의하여 주어진 선물들 중에 가장 큰 것들은 司祭權(sacerdotium)과 皇帝權(imperium)인데, 전자는 하나님께 관한 일들을 주관하고 후자는 인간에 관한 일들을 통할하여 힘써 일한다. 두 가지 다 하나의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삶을 향상시킨다.31)


존이 인용하고 있는 이 말에 따르면 교권과 속권은 모두 神으로부터 기원하였으며 그 목적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兩者는 각기 다른 영역의 임무를 부여받았던 바, 사제는 종교적인 일을 관장하고 황제는 인간사를 맡아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인간사 즉 세속적인 일에 관한 한 엄연히 황제가 신의 뜻을 대행하는 대리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속사에 관해서 군주가 갖는 지위와 책임을 인정하는 대목은 󰡔폴리크라티쿠스󰡕의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볼 때 군주는 “국가 전반에 걸친 업무를 관장하는 자”이며, “공익의 수호자”이고,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후견인”이었다. 국가 내에서 이러한 군주의 역할은 특별히 막중하여 한 국가의 안정과 번영은 오직 훌륭한 군주 아래에서만 보장될 수 있고,32) 이러한 점에서 군주의 안전과 건강은 전 백성의 행복과 직결되리 만큼 중대한 것이었다.33)리하여 그는 자신의 정치사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체비유 속에서 군주의 지위를 “국가의 머리”(caput rei publicae)로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34)

존은 교권에 대한 속권의 독립성을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神의 형평(aequitas)을 준수하는 이상적 군주는 神과 人間 사이의 중재적 기능을 감당하는 자이며 그에게는 교권의 간섭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가 말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35) 물론 그가 이 대목에서 군주에게 성직자의 조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직자의 역할이 속권에 대해서 간섭하거나 감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군주는 세속사를 관장하는 분명한 神의 대리인이며 인간의 법과 정의에 대한 중재적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었다.36)

요컨대 존이 끌레르보의 베르나르의 견해에 동조하여 모든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지상권을 강조하고, 神의 대리인으로서의 교황과 성직자들의 역할을 중시하며,37)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월권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볼 때 교권이 속권에 비해 우월한 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도덕적 영역에서이지 세속적, 법률적 영역에서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교권과 속권을 지배와 종속이라는 구속적 관계로 파악하기보다는 교권과 속권이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이라는 상이한 분야에서 각각에게 부여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상호 협동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조화로운 공동체를 구현할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司祭權이 모든 면에서 흠이 없어 하나님의 완전한 신임을 받고, 또 한 편으로 皇帝權이 자기에게 양도된 국가를 올바르고 적절하게 향상시키면, 일종의 훌륭한 調和(consonantia quaedam bona)가 이루어져서 人類에게 온갖 유익을 끼치게 될 것이다.38)


위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바처럼 존은 교회와 국가가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神으로부터 각각 다른 영역의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이들 양자는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神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교회와 국가를 상호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고, 그 각각이 神에 의하여 상이한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그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위의 인용문에 있는 “사제권이 모든 면에서 흠이 없어 하나님의 완전한 신임을 받고 …”라는 구절은 교권과 속권이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교회가 갖추어야 할 전제 조건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을 이끌어 갈 한 축으로서의 교권은 그 자체로서 정화된 자세를 유지할 책무가 있으며, 그러한 전제하에서만 속권에 대하여 도덕적, 정신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존은 교회가 교회다울 때에 한해서 국가와 군주는 교회와 성직자에 종교적, 도덕적으로 예속된다는 것과, 세속사에 관한 한 속권의 통치권과 자주권을 분명하게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존이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위를 인정하는 강력한 발언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다른 한 편으로 세속사에 있어서의 속권의 자주권과 독자적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던 점도 결코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폴리크라티쿠스󰡕가 헨리를 교화하기 위하여 집필된 군주교육 지침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이 책 속에서 교회에 대하여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헨리의 정치적 과욕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위를 보다 강한 어조로 언급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왕권에 의해 유린된 교회의 권리를 적극 옹호하는 한편, 군주의 권력남용을 효율적으로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교권의 도덕적 우월성과 속권에 대한 조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존이 국가의 군주를 인체의 머리에, 그리고 성직자를 영혼에 비유한 것은 그 각각이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를 관리하고 향상시킬 책임과 권리를 지녔음을 적절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그가 속권은 교권으로부터 파생되었으며 따라서 교권에 예속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볼 때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월성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도덕적 분야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가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神으로부터 각각 다른 영역의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이들 양자는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신의 뜻을 이 세상에 구체화하여 나가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존은 古典에 관한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균형잡힌 사고와 사려깊은 판단을 하는 것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그는 키케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스스로 “아카데미의 학자”(Academicus)라고 자주 칭하면서 무엇이 옳은 지를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추정하지 않으려 하는 절충주의적 취향을 보였다.39)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여러 사상이나 언급, 예컨대 고전과 성서에 나타난 가르침을 적극 결합시키려는 노력이나 폭군살해에 대한 상충적 언급을 통하여 군주를 교화하려는 태도 등에 뚜렷이 나타나는데,40)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교권과 속권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 편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이들 양자간의 역할 분담과 상호협동을 통한 조화를 최상으로 생각하였던 점도 그 좋은 예 중의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존의 태도는 신앙 속에서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개선해 나가려는 실용적, 합리적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교권이 정신세계의 지도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도덕성을 갖추고 신앙을 지도하며, 속권이 세상사를 적법하고 적절하게 관리해 나가는 사회를 神의 뜻에 합당한 것으로 규정하였던 바, 이처럼 교권과 속권의 협동을 통한 이상 사회 건설을 희망하였던 그는 J. 호이징하의 지적처럼41) 종교인으로서의 信念과 학자로서의 知性을 결합하여 현실 세계에 참여하고 봉사하려는 ‘크리스찬 휴머니즘’의 전형적인 구현자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 전북대학교 사학과 강사

1)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11세기의 교회 쇄신 운동의 결과, 성직매매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모든 성직자들에게 독신생활이 요구되는 등 세속 성직에 대한 일대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러한 쇄신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가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창출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확신 아래 세속 통치자에 대한 교황의 우월성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George H. Sabine,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4th ed., rev. by Thomas Thorson (Illinois: Dryden Press, 1973), pp.218-225 참조.


2) 이 책은 흔히 ‘정치가의 書’(the Statesman's Book)라고 번역되며 모두 8권으로 되어 있다.  Policraticus라는 書名은 ‘도시’나 ‘국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πόλις’와 ‘통치’를 의미하는 ‘κράτος’의 합성어를 라틴어 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어를 차용하여 책의 제목으로 삼는 것은 12세기에 널리 유행하던 방식인데 그러한 예는 존의 다른 저술 Metalogicon이나 꽁셰의 윌리엄(William of Conches)이 쓴 Dragmaticon 등에서 쉽게 확인된다.

    본고에서는 Clement C. J. Webb의 본문교정판(Critical Edition)인 Ioannis Saresberiensis Episcopi Carnotensis Policratici sive de nugis curialium (Oxford: Oxford Univ. Press, 1909, 이하 Policraticus로 약칭함) 및 이 책으로부터 英文 抄譯한 다음의 두 권을 함께 이용하였다. The Statesman's Book of John of Salisbury, ed. and tr. John Dickinson (New York: Russell and Russell, 1963); Policraticus: Of the Frivolities of Courtiers and the Footprints of Philosophers, ed. and tr. Cary J. Nederman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90). (이하 각각 Dickinson과 Nederman으로 약칭함).


3) Policraticus, Bk.Ⅳ, Ch.3; Dickinson, p.9.


4) Sabine,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pp.225-226; E. F. Jacob, “John of Salisbury and the Policraticus,” in F. J. C. Hearnshaw, ed., The Social and Political Ideas of Some Great Medieval Thinkers (New York: Barnes & Noble, 1928), p.69, 79. 특히 제이콥은 존과 호노리우스가 교권과 속권은 모두 영적 권력(spiritual power)에 속한다고 최초로 단정한 인물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5) J. B. 모랄은 존이 속권이 교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한 점을 강조하여 그가 교황권 지상주의자들의 견해를 지지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J. J. N. 맥궈크도 존의 사상이 모든 정치적 조치는 교회사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고 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교권지상주의와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John B. Morrall, Political Thought in Medieval Times (New York: Harper & Brothers, 1962), 박은구 譯, 󰡔중세 서양의 정치사상󰡕 (탐구당, 1983), pp.55-56; J. J. N. McGurk, “John of Salisbury,” History Today, XXV (1975), p.45.


6) “A Letter to Emperor Anastasius in 494,” in Brian Tierney, ed., The Middle Ages, Vol.Ⅰ: Sources of Medieval History (New York: Alfred A. Knopf, 1970), p.31. 겔라시우스의 敎令 Duo sunt의 작성 배경과 그 내용에 대한 中世 및 現代 史家들의 해석에 관해서는 장준철, 「교령 Duo sunt에 나타난 두 권력 이론」, 󰡔서양중세사연구󰡕, 제 1집 (1997), pp.51-82 참조.


7) Robert W. Carlyle and A. J. Carlyle, A History of Mediaeval‎ Political Theory in the West, Vol.Ⅰ: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from the Roman Lawyers of the Second Century to the Political Writers of the Ninth (New York: Barnes and Noble, 1909-36), p.183.


8) D. M. Nicol, “Byzantine Political Thought,” Journal of the Warburg and Courtauld Institutes, 6 (1943), p.10.


9) Huguccio, “Commentary on Dist. 96 c.6 (1189-91),” in Brian Tierney, ed., The Crisis of Church & State 1050-1300 (Englewood Cliffs: Prentice-Hall, 1964), p.122.  여기에 인용된 성서의 구절은 누가복음 22:38.


10) E. F. Jacob, “Political Thought,” in C. G. Crump and E. F. Jacob, eds., The Legacy of the Middle Ages (Oxford: Clarendon Press, 1951), p.515.


11) Walter Ullmann, Medieval Political Thought (Penguin Books, 1975), p.110.


12) M.G.H., Libelli de lite, Vol.Ⅲ, pp.3-5. Carlyle, A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eory in the West, Vol.Ⅰ, pp.286-288에서 재인용.


13) 스티븐 치하의 혼란한 정치상황에 관해서는 Edmund King, “The Anarchy of King Stephen's Reign,” Transactions of the Royal Historical Society, 5th Ser., XXXIV (1984), pp.133-153 참조.


14) 이 당시 헨리 2세의 통치권이 미쳤던 광대한 지역을 가르켜 흔히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Brian Tierney and Sidney Painter, We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300-1457, 5th ed. (New York: McGraw-Hill, 1992), 이연규 譯, 󰡔서양 중세사: 유럽의 형성과 발전󰡕 (집문당, 1989), pp.326-328 참조.


15) 베케트는 본래 테오발드 써클의 일원으로서 테오발드 家에서 존과 두터운 교분을 맺어왔었다.  그러나 그는 대법관이 된 후에 왕권 강화를 위한 최선봉에 섰으며, 세속의 권력과 궁정의 향락에 심취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존과 테오발드 모두를 실망시켰는데, 로우즈는 존이 󰡔폴리크라티쿠스󰡕의 여러 곳에서 궁정인들의 천박함을 통렬히 공박한 것은 바로 베케트에게 우정어린 충고를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Richard H., and Mary A. Rouse, “John of Salisbury and the Doctrine of Tyrannicide,” Speculum, XLII (1967), pp.705-706 참조.


16) 이 규약은 헨리 1세가 행사하였던 권한을 재천명한 것으로 교회에 대한 왕의 통제권을 크게 강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주교들은 축성받기 전에 먼저 왕에게 臣誓를 해야하며, 영국 교회는 왕의 허락없이 교황에게 상소할 수 없고, 범법행위로 고소당한 사제는 우선 교회법정에 의하여 사제직에서 추방된 다음 왕의 법정에 의하여 처벌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The Constitutions of Clarendon, 1164,” in Norton Downs, ed., Basic Documents in Medieval History (Princeton: D. Van Nostran Company, 1959), pp.89-92. 베케트는 이 규제 조항들이 교회법에 어긋난 것으로 규정하여 이를 거부하였는데, 특히 세 번째 조항은 사제에 대한 이중 처벌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 규약의 성격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Harold J. Berman, Law and Revolution: The Formation of the Western Legal Tradi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ess, 1983), Ch.8 참조.  


17) 베케트의 입장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존이 클라렌든 규약에 대해 보인 반감은 매우 큰 것이었다. 그는 이 규약이 신성한 법에 위배되는 ‘인간적 전통의 새로운 복음’이라고 성토하는 한편, 영국의 성직자들이 헨리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조언하는 자는 異端이요 敵 그리스도의 선구라고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J. C. Robertson and J. B. Sheppard, eds., Materials for the History of Thomas Becket, Archbishop of Canterbury (London, 1875-85), Vol.5, p.349; Vol.6, pp.367-8. Beryl Smalley, The Becket Conflict and the Schools: A Study of Intellectuals in Politics (New Jersey: Rowman and Littlefield, 1973), pp.104-105 참조.


18) Reginald L. Poole, “John, Called of Salisbury,” in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London, 1949-1950 ed.), p.881. 베케트는 살해된 지 3년 후에 聖人으로 추대되었고, 캔터베리에 있는 그의 무덤은 중세 말까지 끊임없이 순례의 대상이 되었다.


19) 존이 교황과 교회의 명분에 무비판적으로 찬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의 여러 발언을 통해서 입증된다. 찬동은커녕 오히려 세속사에 대한 교회의 부당한 간섭과 탈선을 그는 심하게 질책하였는데, 실제로 그는 교황청의 타락과 교회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도높게 비난하였던 인물이었다. Policraticus, Bk.Ⅴ, Ch.16; Dickinson, p.148 참조.


20) Giles Constable, “The Alleged Disgrace of John of Salisbury in 1159,” English Historical Review, LXIX (1954), pp.67-76. 이와 관련하여 당시 존이 헨리 2세에 대해 취한 태도가 적절하지 못하였다는 견해들이 근래에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E. Türk는 존이 현실 정치를 敎父的이고 聖書的인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헨리 정부의 실용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으며, B. Smally는 헨리와 베케트의 대립 과정에서 존은 자신이 그토록 예찬하던 온건함과 균형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필요 이상으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David Luscombe, “John of Salisbury in Recent Scholarship,” in Michael Wilks ed., The World of John of Salisbury (Oxford: Basil Blackwell, 1984), p.31 참조.  


21) 존은 세인들의 일부가 이 즈음에 헨리가 취한 행동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선량한 사람들의 이러한 우려가 부디 근거없는 것이 되기를!”이라고 기원하고 있다. Policraticus, Bk.Ⅵ, Ch.18; Dickinson, p.237.


22) “… nepos illius, totius eui, si collatae iam gratiae uirtutum in fine coheserint merita, rex optimus apud Britannias, Normannorum et Aquitanorum dux felicissimus et primus tam amplitudine rerum quam splendore uirtutum, quam strenuus, quam magnificus, quam prudens et modestus ab ipsa, ut ita dicam, infantia fuerit ….” Policraticus, Bk.Ⅵ, Ch.18; Nederman, p.119.


23) “... he[Henry] has such remarkable gifts of nature and grace(!), that no prince, I would think, or certainly very few princes, as I would say without hesitation, is his equal.” Materials for the History of Thomas Becket, Archbishop of Canterbury, Vol.6, p.500. David Knowles, Thomas Becket (Stanford: Stanford Univ. Press, 1971), p.34에서 재인용. 노울즈는 헨리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비단 존뿐만 아니라 헨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 예컨대 월터 맵(Walter Map)이나 블로아의 피터(Peter of Blois) 등의 공통된 견해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24) 이 시기에 존이 헨리 2세에 대하여 여전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필자의 견해와는 달리 C. J. 니더맨은 존이 그를 폭군의 典型으로 보았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C. J. Nederman, “The Changing Face of Tyranny: The Reign of King Stephen in John of Salisbury's Political Thought,” Nottingham Medieval Studies, 33 (1989), pp.16-20.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John of Salisbury의 폭군론」, 󰡔전북사학󰡕, 제18집 (1995), pp.96-97 참조.


25) 이러한 모호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E. 슈베르트가 잘 지적한 바 있다. Ernst Schubert, “Die Staatslehre Johann's von Salisbury,” Inaug. Diss. (Berlin, 1897), p.36. 한편 이러한 모호성 때문에 교회와 국가에 관한 존의 견해를 아예 검토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경향도 눈에 띤다. 예컨대, 존이 “교회와 국가에 관하여 뚜렷한 구분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J. 캔닝의 견해가 그것이다. Joseph Canning, A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300-1450 (London: Routledge, 1996), p.113 참조.


26) 국가의 구성과 기능을 인체의 각 지체에 견주어 설명한 존의 유기체 비유(organic metaphor)에 관해서는 필자의 논문 “국가와 인체: John of Salisbury의 유기체론,” 󰡔서양중세사연구󰡕, 제2집 (1997), pp.31-52 참조.


27) “Quis enim sanctitatis ministros Dei ipsius uicarios esse ambigit? Porro, sicut anima totius habet corporis principatum, ita et hii, quos ille religionis praefectos uocat, toti corpori praesunt. … Princeps uero capitis in re publica optinet locum uni subiectus Deo et his qui uices illius agunt in terris ….” Policraticus, Bk.Ⅴ, Ch.2; Dickinson, pp.64-65.


28) Policraticus, Bk.Ⅳ, Ch.3; Dickinson, p.9 참조. R. L. Poole은 존의 이러한 언급이 교속문제에 관한 그의 태도를 대변한다고 본 대표적 학자이다. Reginald L. Poole, Illustrations of the History of Medieval Thought and Learning, 2nd ed.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20), p.206.


29) Policraticus, Bk.Ⅴ, Ch.1; Tillman Struve, “The Importance of the Organism in the Political Theory of John of Salisbury,”  in The World of John of Salisbury, p.315 참조.


30) “Porro de ratione iuris, eius est nolle cuius est uelle, et eius est auferre qui de iure conferre potest.” Policraticus, Bk.Ⅳ, Ch.3; Dickinson, p.10. 여기에서 인용되고 있는 로마법 구절은 Digest,Ⅰ. 17, §3이다.


31) “Maxima in omnibus sunt dona Dei a superna collata clementia sacerdotium et imperium, illud quidem diuinis ministrans, hoc autem in humanis praesidens ac diligentiam exhibens; ex uno eodemque principio utraque procedentia humanam exornant uitam.” Policraticus, Bk.Ⅶ, Ch.20; Dickinson, p.302. 이 인용문 첫째 줄의 ‘superna’는 ‘suprema’의 誤植이 아닌가 생각된다. 前者는 ‘위에 있는’ 또는 ‘하늘의’ 라는 의미이고 後者는 ‘가장 높은’ 또는 ‘가장 위대한’ 이라는 의미인 바, 필자는 후자의 의미로 이해해야 문맥이 보다 잘 통하는 것으로 여겨 ‘至高하신’으로 번역하였다.


32) Policraticus, Bk.Ⅶ, Ch.26; Dickinson, p.263.


33) Policraticus, Bk.Ⅳ, Ch.22; Dickinson, pp.247-248.


34) 이 점과 관련하여 국가에 대한 존의 유기체 비유가 교권에 못지 않게 군주권 이론의 강화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는 스트루베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Struve, “The Importance of the Organism in the Political Theory of John of Salisbury,” p.317. 슈베르트도 역시 󰡔폴리크라티쿠스󰡕에 나타난 존의 사상이 교회의 권위를 높이는 데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크고 독립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하였다고 지적하였다. Schubert, “Die Staatslehre Johann's von Salisbury,” pp.36-37.


35) Policraticus, Bk.Ⅳ, Ch.6; Dickinson, pp.24-25.


36) 위와 같음.


37) Dickinson, “Introduction,” in The Statesman's Book of John of Salisbury, pp.lx-lxiii.


38) “…si hoc quidem inculpabile sit undique et apud Deum fiducia erit plenum, imperium autem recte et competenter exornet traditam sibi rem publicam, erit consonantia quaedam bona, omne quicquid utile est humano conferens generi.” Policraticus, Bk.Ⅶ, Ch.20; Dickinson, p.302.


39) Policraticus, Bk.Ⅶ, Chs.1-2; The Metalogicon of John of Salisbury: A Twelfth-Century Defense of the Verbal and Logical Arts of the Trivium. tr. by Daniel McGarry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55), Bk.Ⅱ, Ch.20 및 Bk.Ⅳ, Ch.31 등 참조.


40)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John of Salisbury와 서유럽 정치사상의 형성,” 전북대학교 대학원(1999), 제Ⅰ장과 Ⅳ장 참조.


41) Johan Huizinga, “John of Salisbury: A Pre-Gothic Mind,” in Men and Ideas. tr. by James S. Holmes and Hans van Marle (New York: Meridian Books, 1959), pp.17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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