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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국과 에스파냐, 위그노, 네덜란드 독립전쟁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9.18|조회수180 목록 댓글 0

나. 신, 구 교도간의 갈등

 

(1) 에스파냐의 구교(카톨릭) 옹호

 

이베리아반도는 9세기 이래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그들을 축출하고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면서, 이들 이슬람인 을 비롯한 비기독교도를 처벌할 목적으로 국왕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국민 모두에게 이교도를 고발할 의무를 강제로 부과, 부모형제간에 고발해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칭찬했으며, 피고에게 유리한 증언은 불허, 불리한 증언만을 허용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최초의 심문관이었던 토르케마다(Tomas de dorquemada ? ~ 1498)는 18년간 11만 명을 고발케 하여, 그 중 1만 여명을 화형에 처했다고 전해지며 국왕 직속의 이단 심문과 종교재판은 이후 약 백년동안 무려 1백만 명이 회생되었다. 무어 인(아프리카 출신 이슬람 교도) 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유럽인이라 할지라도 이단의 냄새만 풍기면 가차없이 처벌했던 것이다.

 

이런 살벌한 가운데서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마젤란의 세계 일주가 이룩되었다는 것은 경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베리아 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저질은 만행(?)은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아즈텍 문명과 잉카문명 파괴에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나 최초의 세계일주를 했다는 마제란도 정도만 달랐을 뿐 사정은 마찬가지었다. 마젤란 자신은 필리핀에서 전사하였지만, 그가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에스파냐 왕의 신 종례를 요구하고 카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유럽의 수도원이나 교회가 부패되어 있을 때, 에스파냐에서는 이런 종교적인 영향으로 이상하게도 매우 청렴하였고, 이런 배경에서 로욜라가 태어나 예수회를 조직하고 구교부활에 공헌했다는 것이 이런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스파냐의 구교 옹호 운동은 드디어 영국과도 충돌,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가 출동하였으나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배하고 에스파냐의 국운은 극도로 쇠퇴, 역사의 전면무대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어쩌면 신의 뜻인지도 모를 일이다.

 

(2) 영국과 에스파냐의 싸움

 

영국의 북쪽에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5세가 죽고 그의 딸 메리(Mary / 1542 ∼ 87)가 생후 1주일만에 즉위, 1548년 6세 때 프랑스 황태자와 약혼한 후 카톨릭 적인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다가, 16세가 되어 결혼식을 올리고(1558), 이듬해 황태자가 왕위에 올라 프랑수아 2세가 되었고 메리 스튜어트(같은 시기 영국왕 메리 1세와 구분하기 위해서 가문을 표시함)는 스코틀랜드의 왕이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나, 결혼 후 1년만에 프랑수아 2세가 병사하였기 때문에, 1561년 과부가 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제네바에서 칼뱅 파의 열렬한 설교사가 되어 돌아온 존 녹스(John Knox)와 그 일파들이 장로들 구성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만들고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메리는 1565년 구교도인 사촌동생 단리와 재혼하자, 신교파가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반감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 단리경이 보스웰에게 암살되고, 박복했던 그녀가 다시 단리를 암살했던 백작 보스웰과 재혼하자 신교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메리에게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들 제임스 6세(영국왕 제임스 1세)에게 강제로 양위(讓位) 시키고, 메리를 로크리븐성(城)에 감금했다. 그러나 이듬해 성을 탈출한 메리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영국으로 피신하여 엘리자베스 1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1568)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으로 망명해 오자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엘리자베스 1세, 국민저항이 거세어 결국 그녀를 체포 구금하였는데, 메리 스튜어트가 헨리 7세의 증손녀에 해당하고, 모계로는 프랑스 구교 파의 우두머리 기즈가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런 메리 여왕의 처리문제를 두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몹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 취해진 신교도의 탄압으로 많은 신교도들이 영국으로 망명해 왔고, 영국에서는 이들을 따뜻이 맞아 들이자, 구교측에서는 에스파냐를 충동 해서 이를 응징코자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 프렌시스 드레이크 같은 자들에게 특허장을 주어 신대륙에서 귀항하는 에스파냐 보물선을 약탈하기도 하였고, 1580년대에는 국내에서 구교도를 마구 잡아 처형하고, 반 에스파냐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원조하여, 에스파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배빙턴 음모사건(Babington Plot)이라는 것이  발생하여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 음모사건은 배빙턴을 중심으로 런던에서 예수회를 지지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고 메리를 영국 여왕으로 추대하여 카톨릭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이들은 처형되고 결국 영국 국민들의 격분은 메리에게까지 화살이 미치어 그녀 역시 처형당하고 말았다(1587)

 

이에 이르자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그의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를 영국에 보내어 버릇없는 여왕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 이미 레판토 해전(1571)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을 격파한 무적함대의 위용은 글자 그대로 무적(無敵), 군함 130척, 대포 2천 5백문, 해군 7천명, 보병 1만 6천을 1588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출발시키고, 다시 네덜란드 육군 1만 8000 명이 중간에서 합류,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상선(商船)을 개조하거나 드레이크 등의 해적선(?)으로 편성된 80척의 전함과 8,000명의 병력을 동원, 모든 것이 열세였으나 해적출신답게 기동력이 뛰어나고 선원들은 잘 훈련되고 용감하여 전투력은 스페인 함대를 능가 하였다.

 

무적함대가 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함대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 8월 7일 대륙과 가장 가까운 도버해협의 칼레 연해에서 영국군의 화공(火攻)에 의한 야습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 후 그라블리느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무적함대의 위용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겨우 54척만이 허겁지겁 본국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 전쟁으로 영국은 해상국가로 급 부상하게 되었고, 에스파냐는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사이는 우리 식의 촌수로 따지면 7촌 숙질 간, 펠리페 2세와는 형부와 처제사이,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대략 이런 것들이 당시 유럽 왕가의 집안 사정이다.

 

(3)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 1562 ~ 1598)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신교파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540년대 이후, 이는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스위스 제네바에 자리잡은 칼뱅은 그의 조국 프랑스의 신교도들과 수시로 연락하고 필요한 지시를 때 맞추어 내려서 앙리 2세(Henri Ⅱ / 1547 ~ 1559) 때 이미 칼뱅파 신교도의 숫자가 프랑스 인구의 1/6에 육박했다. 그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는데 왜 위그노라고 했는지 그 어원은 분명치 않다.

 

당시의 프랑스 국왕 앙리 2세(Henri II)는 강직하고 기사의 풍모를 지닌 호걸로서, 부왕 프랑수아 1세 때부터의 외교정책을 답습하여 독일황제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에스파냐왕 펠리페 2세와의 싸움을 계속하였다. 두 나라의 앙숙간게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물림을 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1559년 국내 신교도를 억압하기 위해서는 에스파냐와의 동맹이 필요했고 결국  카토캉브레지화약을 맺고 에스파냐와는 화해했다. 그러나 이 조약을 경축하기 위해서 1559년 7월 신하인 몽고메리 백작과의 토너먼트(기사들의 마상경기) 시합에서 눈에 창을 맞고 부상당한 것이 악화되어 곧 이어 파리에서 죽었다.

 

앙리 2세가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 출신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 1519 ~ 1589)와 결혼하여(1533)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카트린은 20세의 연상인 정부(情婦) 디안 드 푸아티에를 사랑하였고 총신 기즈공을 신임하였기 때문에 정치는 그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왕비는 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다가 그의 아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등이 잇달아 프랑스 왕위를 계승, 모후로서 프랑스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아슬아슬한 곡예을 연출하게 되었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메리 스튜어트의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였으나 일 년만에 죽고(1560) 차남 샤를 9세가 열 살의 나이로 즉위, 이때부터 카트린은 모후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의 출신이 피렌체였고, 따라서 그는 철저한 마키아벨리스트(군주는 목적을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도 용납)로서, 종교를 위해서 정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였다.

 

그의 정적인 구교파 기즈가(家)의 전횡을 억제할 필요에서 때에 따라서는 신구 양 교도의 충돌을 부채질하고, 때로는 조정하여, 종교전쟁하의 동란 중에서도 왕권 유지와 신장에 진력하여 신교도에게 관용을 보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비린내 나는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카트린의 이런 2중적인 줄다리기는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했다.

 

1562년 동부 프랑스의 프왓시(Poissy)라는 작은 도시에 모여있던 신교도들을 구교파의 우두머리 기즈공 일파가 습격, 300 여명을 살해하면서 37년간(1562 ~ 98)의 길고 지루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내란이 종교전쟁 이전에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혹은 신 항로의 개척과 무역의 확대로 화폐경제가 진전되고,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순들이 종교적 대립 항쟁과 아울러 나타났다고도 보고 있다.

 

이 싸움에서 구교파의 우두머리는 기즈가(Guize 家), 이에 맞서 신교파의 우두머리는 프랑스 왕가의 방계에 해당하는 나바르 왕국을 지배하고 있던 부르봉가(Bourbon 家)와 그에서 파생된 명문 콩데가(Conde 家), 이들은 각각 독일과 에스파냐 혹은 영국의 원조를 바랐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외세의 개입을 초래하여 프랑스의 분열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위그노 전쟁이 37년간 쉴 틈 없이 계속된 것은 아니고, 중간에 화의가 성립되어 중단되기도 했다가 다시 일어나는 등 단속적(斷續的)인 양상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불행한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피해를 보는 것은 수적으로 열세인 위그노 쪽, 카트린 역시 구교의 옹호 입장에 있었기에 그 피해는 더욱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위그노의 피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이른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으로서,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前夜)인 8월 22일 밤부터 이튿날까지 있었던 이 사건으로 파리에서 학살된 신교도는 약 2만, 다른 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숫자의 신교도들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2년전인 1570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신 구교간의 화의가 성립되었고, 다시 양측은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신교파의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후일 앙리 4세)와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Marguerite de Valois / 1553 ~ 1615)와 정략 결혼이 이루어졌다.

 

이때 신교파는 국왕 샤를 9세를 포섭, 구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에스파냐와 싸울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알게 된 모후 카트린은 이를 막기 위해서, 그의 숙적이었던 기즈와 다시 결탁, 자기 딸의 하객으로 참석하기 위해서 파리를 찾아온 신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렇게 위그노의 대량 학살로 신교파는 굴복할 줄 알았으나, 이때 신랑으로 파리에 갔다가 궁정에 연금되어 구교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던 문제의 주인공 앙리 드 나바르는 4년 뒤인 1576년 2월에 탈주에 성공,

 

고향인 베아른으로 돌아온 뒤 다시 신교도의 수령으로 활약하고, 신교파의 나머지 세력들을 모아 폭동과 농성으로 저항 하였다. 샤를 9세(Charles IX / 1560∼74)는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결핵으로 죽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카트린의 셋째 아들 앙주공, 이때 그는 폴란드 왕으로 있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앙리 3세(Henri III / 1574 ∼ 89)가 되었다. 즉위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 모후 카트린의 섭정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어 끝났다.

 

앙리 3세가 모후의 섭정에서는 벗어났으나 천성이 여성적이고 총신들을 총애하였으며 네덜란드를 지원하여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루기도했고 1582년 신교파에 화의를 제의, 프랑스는 한 때 평온을 찾았다.

 

그러나 1588년 구교동맹의 세력이 강한 파리시민은 신교파에 이런 미온적 태도를 보인 앙리 3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다시 기즈를 중심으로 에스파냐의 원조를 얻어 앙리 3세를 파리에서 추방하자, 앙리 3세는 블루아에서 삼부회(프랑스의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고 기즈공을 암살하였다.

 

이에 격분한 구교동맹이 반격을 가해 오자 다급해진 앙리 3세는 신교도 영수인 앙리 드 나바르에 접근하여 그를 왕위계승자로 정하고(앙리 3세에게는 자녀가 없었음) 함께 파리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미니크파의 광신적인 수도사 클레망의 칼에 찔려 죽음으로써(1589. 8) 1328년 필리프 6세 이래의 발루아왕조(1328 ~ 1589)의 직계는 이로써 단절되었다.

 

앙리 3세의 죽음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자는 부르봉가의 앙리 드 나바르뿐이었고, 이때를 기다려 그는 즉시 즉위하고 앙리 4세 (Henri IV / 1589∼1610)라 하였다.

 

그러나 구교측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딸을 프랑스 왕으로 추대코자 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앙리 4세는 그의 종교적인 신념을 포기하고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도유(塗油) 의식을 행하고 카톨릭으로 개종, 구교파가 인정하는 국왕으로 파리에 들어갔다(1594)

 

그런 후 1598년 4월 13일, 이른 바 낭트칙령 (Edit de Nantes)을 발표,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므로써, 공식적으로 신교의 예배가 인정되고 신교파 도시 200 여 개에 자치권이 부여되는 등 외견상 신구교도의 차별을 없애고 지루한 종교 내란은 일단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국교를 카톨릭으로 정한 것이기에 신, 구 교도간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의 손자 루이 14세 때는 절정에 이른다.

 

(4) 네덜란드(Netherlands)의 독립전쟁

 

신대륙과 인도항로가 개척되고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 쪽으로 옮겨지면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쇠퇴한 반면,

 

이를 대신해서 대서양 연안국가들이 부상하기 시작하고, 그 중심에 우뚝 선 것은 중세이래 유럽에서 가장 상공업이 발달했던 네덜란드.

 

지금은 꽃과 풍차(현재는 관관용으로 몇 개만 보존)로 대변되는 이 네덜란드가, 당시는 유럽경제의 심장과 다름없었던 관계로 자연적으로 이를 노리는 세력들이 도처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네덜란드는 홀란트가(家)를 비롯한 몇몇 봉건국가의 영유지가 되었으며, 13세기말에는 부르고뉴가의 필리프 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제후로부터 정치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한자동맹에 가입, 스스로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1477년 부르고뉴가의 상속자 샤를 용담(勇擔)왕의 딸 마리아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家)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후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아들 (에스파냐 왕 펠리페 1세), 손자 (카를 5세)의 영지가 되고 그 지배를 받았다.

 

1516년 카를 5세가 에스파냐의 펠리페 1세의 뒤를 이어, 혈연관계로 (그의 어머니가 에스파냐 상속녀 후아나) 에스파냐 왕위를 차지하였고, 다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경합, 1519년에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다.

 

이에 카를 5세가 지배했던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속령(屬領)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17개 주는 이미 15세기이래 자치권을 획득, 지배자가 누구든 정치적으로 별로 속박 받지 않았기에 이런 자치권이 침해당하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루터파가 들어오고 뒤이어 칼뱅파가 들어와 신교도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사정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카를 5세는 네덜란드의 신교도를 압박, 그가 은퇴한 1556년까지 처형된 신교도의 숫자는 1천명을 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카를 5세 자신은 독일의 신교도들이 프랑스 앙리 2세의 지원을 받아 유리한 가운데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1555)가 성립되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황제자리는 동생에게 에스파냐 국왕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고 말았다.

 

이제 네덜란드는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다스리는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신교도 탄압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으며, 자치권은 손상당하기 시작하였다.

 

펠리페 2세는 그의 의매(義妹) 파르마공 마가렛(Margaret of Austria, duchess of Parma / 1522 ~ 86)을 네덜란드 총독에 임명하고, 그를 통해서 에스파냐식 종교재판을 강화, 정치적 종교적 압박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네덜란드측에서는 1565년 320 여명의 귀족이 단결, 에스파냐의 압정에 반기를 들었고, 1566년에는 신교도의 탄압과 종교재판의 중지를 총독에게 청원, 총독은 이들을 거지(Goizen, Goisen)의 무리로 매도하고 거절 하였는데, 이후 네덜란드의 칼뱅파에게 고이젠(거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원이 거절되고 에스파냐 상류 층으로부터 거지소리를 듣게 된 일부 과격한 신교도들이 교회에 난입, 성상(聖像)과 기물등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키자, 민중들이 여기에 가세, 삽시간에 폭동은 확대되었다.

 

펠리페 2세는 알바공(duque de Alba. Don Fadrique de Toledo)에게 1만명의 군대를 주어 네덜란드에 파견, 더욱 가혹한 탄압을 명령, 67년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알바공은 "혈(血)의 평의회(評議會)"라는 심문소(審問所)를 개설하여 그가 총독으로 머문 6년간 ,지도자인 에그몬트와 호른 등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宗敎裁判)으로 처단하고, 이를 피해 10만명 이상이 영국, 독일 등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사이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 오라녜공 빌렘(영; William 1, prince of Orange / 1533 ~ 84)은 네덜란드 인의 자유와 자치권 회복을 위한 독립전쟁의 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서전(序戰)에서 계속 패배하고, 총독 알바공은 전쟁비용을 조달하려고 네덜란드 인에게 중세를 부과(1569), 모든 동산과 부동산에 대해서 1 %, 상품매출 10%, 부동산 매각 5 %의 세금을 물게 하자, 대부분 상업에 의존하고 있던 네덜란드 인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경제는 급속도로 곤두박질 쳤다.

 

이래서 네덜란드는 1572년부터는 종교투쟁에서 독립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그후 에스파냐에서는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하지 않자, 이에 병사들은 봉급 대신 안트베르펜 시가지를 마구 약탈, 이 과정에서 시민 7천여 명이 회생되었으며, 삽시간에 도시는 유령 화되고 말았다. 당시 에스파냐 왕실은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은화가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벙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576) 안트베르펜(Antwerpen)을 영어에서는 앤트워프(Antwerp), 프랑스어로는 앙베르(Anvers)라고도 하며, 지금은 벨기에의 땅으로 번영되고 있지만 당시는 유럽 제1의 무역항으로서 동시에 금융업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고, 세계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생긴 곳이다

 

(1531), 이런 안트베르펜의 약탈이 있고 나서 네덜란드 17개 주는 공동의 독립투쟁을 결의, 간의 협약(브뤼셀동맹)을 체결하고 공동으로 에스파냐에 대항, 독립전쟁을 본격화 시켰다.

 

그러나 본래부터 종교적으로 대립해 있는데다가, 경제적으로도 이해관계를 달리한 남, 북 간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고, 여기에 새로 부임해 온 총독 파르마공(公)의 이간 책으로 1578년 남부 10개 주(벨기에)는 에스파냐와 화평하고, 독립전쟁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북부 7개 주는 더욱 단결을 강화하여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고, 항전을 계속, 81년 7월 독립을 선언하고 빌렘(윌리엄)을 초대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설립하였다.

 

1584년 빌렘(윌리엄)이 카톨릭 교도에게 암살되었으나, 이후에도 항전을 계속, 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되어 국제적 지위가 하락되고 재정적으로 궁핍한 데다 펠리페 2세가 사망함으로써(1598),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펠리페 3세가 즉위한 이후 1609년 에스파냐와 네덜란드는 12년간의 휴전조약(休戰條約)을 체결했다가 휴전이 만료된 이후 전쟁은 재개되었으나, 결국 15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국제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독립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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