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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보의 변과 북경 전투(1449.7~10) / 사르후 전투(1619) / 이자성의 난~하남 전역(1641~44)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9.23|조회수1,617 목록 댓글 0
토목보의 변과 북경 전투(1449.7~10)

1. 우왕좌왕하는 원정군

15세기, 명 제국과의 교역은 막대한 부를 낳았기 때문에, 몽골 고원의 패자인 오이라트 부(몽골 부족 중의 하나)의 에센은 명에 교역을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통(正統) 14년(1449년) 여름, 무역 교섭이 결렬되자 에센은 지배하에 있는 몽골 각 부족의 병마를 동원하였고, 4개의 경로를 통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은 서녕후 송영(宋瑛)을 대동병마총독으로 임명하고, 증원군으로서 평향백 진회(陳懷), 부마도위 정원(井源)이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을 대동(大同, 산서성 대동시)으로, 도독 왕귀(王貴), 오극근(吳克勤)이 이끄는 1만 5천명의 병력을 선부(宣府)로 파견하였다.

침공을 알리는 보고가 잇따르자, 명의 최고 실력자였던 사례태감(환관) 왕진(王振)은 정통제(正統帝, 朱祁鎭)에게 친정을 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병부상서 광야(鄺埜), 이부상서 왕직(王直) 등은 위험이 큰 친정을 중지할 것을 강하게 간언하였지만, 황제는 왕진의 의견에 따라 친정을 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친정을 위하여 50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왕진은 대군으로 위협하면 싸우는 일 없이 에센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센 자신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주력은 대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 선봉대는 묘아장(猫兒庄)에서 참장 오호(吳浩)를 패사시켰다. 패전 소식을 들은 서녕후 송영은, 무진백 주 면(朱冕), 참장 석향(石享)과 함께 양화구(陽和口, 산서성 양고북)에서 에센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7월 15일, 명군은 군대를 감독하는 태감 곽경(郭敬)의 잘못된 지휘로 인해 대패하여, 송영, 주면은 전사하고 전 군이 거의 전멸하였다.

양화에서의 대패 소식을 듣고서도 왕진은 친정을 강행하였고, 7월 16일에 다수의 대신 및 차관 급의 고위 관료들을 포함하는 대군이 북경을 출발하였다. 종군하고 있던 병부상서 광야, 호부상서 왕좌(王左)는 원정을 중단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지만, 왕진은 이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이들을 처벌하였다. 28일 원정군은 선부를 지나 양화에 도달하였다. 그 곳에서 왕진 이하의 장병들이 본 것은, 명군의 시체가 들판을 가득 뒤덮고 있는 광경이었다. 적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알고서 겁에 질린 왕진은, 장성을 넘지 않은 채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동으로 들어간 뒤, 북경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 경로에 대한 최초의 안은 적에게 추격당하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하기 위해, 울주(蔚州)에서 자형관(紫荊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왕진의 고향이 울주였으므로, 왕진은 황제를 자택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 안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고향의 한 해 수확이 대군의 행군에 의해 짓밟힐 것을 두려워한 왕진은, 철수 경로를 선부에서 거용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변경하고 말았다.

2. 토목보의 변

8월 10일에 명군이 선부에 도착할 무렵, 에센의 군대는 명군의 후미를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명에서는 몽골 출신의 용장인 공순백 오극충(吳克忠), 도독 오극근(吳克勤) 형제를 파견하여 후위 부대로 삼았다. 오씨 형제는 분전하였지만, 에센의 군대를 격퇴하지 못한 채 전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후위 부대를 증원하러 가고 있었던 성국공 주용(朱勇), 영순백 설수(薛綬, 몽골 출신의 용장)의 군대는, 주용이 무모하게도 경솔히 진격하였기 때문에, 에센이 요아령(鷂兒嶺)에 배치시켜 둔 복병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14일, 황제 일행은 토목보(土木堡, 하북성 회래 서북쪽 약 10Km 지점)로 들어갔다. 주력을 회래성(懷來城)에 배치하여 오이라트의 진격을 차단한다는 것이 명의 작전이었지만, 왕진은 치중(輜重) 천여 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들어 토목보에 머무르면서 치중을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광야는 황제 일행을 안전한 거용관으로 먼저 보내는 안을 주장하였지만, 왕진은 「썩은 유학자가 어찌 군대의 일을 말하는가! 두 번 다시 허튼 소리를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노성을 지르면서, 토목보 주둔을 강행하였다.

토목보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완전한 실수였다. 명군은 그 곳에서 오이라트 군에 의해 느슨하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토목보에는 대군을 먹일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없어서 우물을 6m 가까이 팠는데도 물이 나오지 않았고,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강은 이미 오이라트에 의해 제압되어, 명군은 갈증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15일, 에센은 사자를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명에서는 즉시 강화를 허가한다는 답서를 사자에게 주었다. 화평이 성립된 것으로 오해한 왕진은 전진 명령을 내렸지만 갈증과 피로에 지친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대군은 대열을 흐트러뜨린 채 물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채 2Km도 가지 못하였을 때 몽골 기병들이 나타나서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사방에서 습격을 가하였다. 명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저항하는 자는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처럼 되어 죽었다. 황제는 친정군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말에서 내려 혼자 땅바닥 위에 앉은 채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진은 「썩은 유학자」만큼의 군사적인 식견도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서 혼란 중에 죽게 되었다.

명군의 장병의 사상자는 수십 만 명에 달하였고, 고위 관료로서 사망한 자는 영국공 장보(張輔)를 필두로 하여 50명 이상에 달하였으며, 50만 대군은 소멸해 버렸다.

명군의 패인은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왕진이 총지휘를 맡아서 잘못된 작전 행동을 반복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당시 황제를 수행하고 있던 고위 관료 중의 한 명인 영국공 장보는, 비록 고령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명장으로서 누구나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보는 예전부터 왕진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왕진은 그에게 지휘를 맡기는 건 고사하고 작전에도 전혀 참가시켜 주지 않았다.

또 하나의 패인은, 명군이 화기를 비밀 병기로 간주하여 병사들에게 화기 훈련을 충분히 시키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토목보에서는 화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대량의 대포, 총, 화전(火箭)이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채 버려졌던 것이다.

3. 북경의 혼란

토목보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의 명 정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침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는 자까지 나왔다. 이 때 「남천(南遷, 남경으로의 천도)을 말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경사(京師, 북경)는 천하의 근본이니 한 번 옮기게 되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북경을 사수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 이가, 바로 병부시랑(국방차관) 우겸(于謙)이었다. 감국 성왕(郕王), 황태후, 그리고 신하들 중 최고위인 이부상서 왕직이 사수에 찬성하였고, 이들은 일치하여 북경 방위의 총지휘를 우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역사에 만약(if)이란 금물이지만, 토목보 전투 직후 북경에는 10만 명을 밑도는 장병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이때야말로 에센에게 있어서는 북경 침략의 최대의 호기였다. 하지만 에센은 북경이 아닌 변경의 요충지로 향하였고, 황제를 이용하여 그 곳들에 무혈 입성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곳을 지키는 장수들은 성문을 열지 않았고, 성문을 연 요충지는 없었다. 에센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였고, 우겸은 북경 방비를 재조직하기 위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4. 북경 방위 체제의 재건

병부상서(국방대신)로 승진한 우겸은 우선 최대의 과제인 군대, 즉 경영(京營, 북경 주둔군)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북경·남경·하남의 비조군(備操軍), 산동과 남방 연안의 대(對) 왜구군, 강북 및 북경 각 부의 운량군(運糧軍, 군량 운송 부대) 등을 북경으로 집결시키고 훈련을 실시하였다. 등무칠(鄧茂七) 토벌에 임하고 있던 영양후 진무(陣懋)가 이끄는 군대도 불러들였다. 북경의 병력은 10만 명을 밑돌고 있었지만, 재건된 병력은 20만 명을 넘었다.

재건된 대군을 재무장시키는 데에는 많은 양의 무기가 필요하였다. 무기 생산을 관할하는 공부(工部)에서 증산에 임하는 한편, 남경에 저장되어 있던 무기의 3분의 2를 북경으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토목보 부근에 버려져 있던 무기를 회수하도록 하였다. 토목보에서 회수된 무기만 하더라도 투구 9,000개, 갑옷 5,000벌, 신창(神槍, 화창[火槍], 화염방사기) 11,000정, 신총(神銃, 화총[火銃]) 2만 정, 신전(神箭, 화전, 로켓 화살) 44만 개, 화포 800문에 달하였던 것이다. 기병에 대한 명군의 비장의 수단은 화기였고, 우겸은 북경에 대량의 화기를 긁어모아 두었다.

대군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필요하였다. 통주(通州)에는 경영에서 1년간 쓸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기에, 이것을 북경으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토목의 변에서 다수의 고위 장수들과 관료들이 전사하여 지휘관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우겸은 도독 석향을 발탁하여 무청백으로 임명하여 경영의 지휘를 맡게 하는 등, 유능한 인물들을 다수 발탁하였다. 그 외에도 면직되어 있다거나 투옥되어 감금 중에 있는 장군들을 사면하여 재기용하기까지 하였다.

우겸은 당면 과제였던 북경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독 손당(孫鏜), 위영(衛穎), 장월(張軏), 장의(張儀), 뇌통(雷通)을 북경의 성문을 지키는 요충지에 포진시켰다.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급사중 왕(王)이 이들 각 부대를 지원하였고, 성 밖의 주민들은 성 안으로 피난시켰다. 북경의 수비를 단단히 할 뿐만 아니라, 우겸은 변경 방위망의 재건에도 나섰다. 대동은 곽등(郭登)을 총병관으로 삼아 군의 재건과 방위에 임하게 하였고, 선부는 양홍(楊洪)을 창평백으로 삼아 방위에 임하게 하였다. 북경의 침공 경로상에 위치하고 있는 거용관에는 병부원외랑 나통(羅通)을, 자형관에는 우부도어사 손상(孫祥)을 파견하여 방위의 강화에 임하게 하였다.

군을 재건하는 한편, 우겸은 다른 중신들과 도모하여 감국 주기옥(朱祁鈺)을 황제(경종[景宗] 경태제[景泰帝])로 옹립함으로써 인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효과도 있었다. 에센은 황제를 북경으로 보낸다는 것을 침략의 대의명분으로 삼고, 황제의 이름을 빌려 명의 방위 거점을 항복시킬 뿐만 아니라, 외교 교섭에서 비장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의해 정통제는 상황(上皇, 전 황제)이 되었기에, 그 가치가 크게 저하되었던 것이다.

5. 명군의 포진

10월에 에센은 오이라트에 항복한 태감(환관) 희영(喜寧)의 계책에 따라, 북경 진격의 의지를 굳혔다. 에센은 전군 약 20만 명을 셋으로 나누어, 2만 명을 고북구(古北口)로, 5만 명을 거용관으로 보냈으며, 스스로는 나머지 주력을 이끌고 자형관으로 향하였다(오이라트 군의 총 병력에 대하여는 사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본고는 「중국고대전쟁전례선편」 제 3권 237쪽의 설을 따른다).

대동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해 오이라트의 침입을 알게 된 우겸은,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22만 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북경의 9개의 성문 밖에 포진하였다.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그 외에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지키고 있었다.

우겸은 성문을 닫아 장병들의 퇴로를 끊은 뒤, 전군을 사지에 두었다. 하지만 우겸은 안전한 성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두에 서서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진(陣)에 임하여서 장교가 군대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그 장교의 목을 베어라! 군대가 장교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뒤따라오는 부대가 그들의 목을 베어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장병들은 필사의 각오를 다졌고 사기가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선부의 양홍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시기의 북경성은 오늘날의 북경의 성 안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당시 북경성의 남쪽에는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성벽이나 문이 남아 있어서 남쪽 외성(外城)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창의문이라는 것도 중도성의 성문이었다. 사료에는 「토산(土山)」이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이것은 고유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매몰되려고 하는 대도성(大都城) 혹은 중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6.북경 전투

자형관을 비롯한 명의 저항 거점을 돌파한 오이라트의 주력은, 10월 11일에 북경 교외에 출현하여 서직문에서 덕승문에 걸쳐 포진하였고, 상황을 덕승문 밖에 두었다. 창의문 북쪽에서 최초의 전초전이 벌어졌다. 우첨도어사 왕횡의 지휘 아래에 있는 도독 모복수, 고례가 오이라트의 선봉과 접촉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수백 명을 죽임으로써, 북경 전투의 최초의 교전은 명의 승리로 끝났다. 에센은 상황을 이용하여 우겸, 석향, 왕직 등 명의 수뇌부를 꾀어내어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우겸 등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일은 화기에 불리한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에센은 악천후를 틈타 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고, 정찰 기병들을 풀어서 수비의 약점을 찾도록 하였다. 우겸은 덕승문 밖의 빈 집들에 복병들을 배치하였고, 기병들을 풀어 오이라트의 정찰대를 도발하여 자신의 함정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유인책에 말려든 에센은 1만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덕승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곳의 빈 집들 안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출격하였고, 신기영(神機營, 화기를 전문으로 하는 포병대)은 화기 사격을 개시하였다. 지붕 아래에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화기는 예전과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오이라트 군이 이러한 반격에 기가 꺾여 있을 때, 범광이 이끄는 기병이 돌격하여 오이라트 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화기는 악천후에도 아랑곳없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고, 에센의 동생 우량타하이 등의 간부들을 포격으로 쓰러뜨리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덕승문에서 패퇴한 에센은, 서직문으로 공격의 예봉을 돌렸다. 그 곳에 포진하고 있던 도독 손당은 분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에서 앞서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버렸고, 성 안으로 퇴각하고자 하였다. 서쪽 성벽을 수비하고 있던 급사중 정신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성벽 위에서 오이라트 군에 대하여 화전과 포격을 퍼부어 성 밖의 명군을 지원하였다. 그 때 남쪽으로부터 모복수, 고례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였고, 뒤이어 북쪽으로부터 석향이 파견한 지원군이 도착하여 전투에 가담하였다. 형제는 역전되어 오이라트군은 패퇴하였다.

14일, 에센은 남서쪽의 창의문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창의문 부근의 수비에 관해 우겸은 모복수 등에게 명하여 기병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 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요소요소에 화기를 배치해 두도록 하였다. 우겸은 부총병 무흥, 도독 왕경(王敬) 등을 파견하여 창의문 밖에 두어 오이라트 군에 맞서 싸우게 하였다. 명군은 서반(序盤), 신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우위에 서 있었지만, 군의 감독을 맡아야 할 태감 약 100명이 전공을 탐내어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여 진이 혼란스러워졌고, 무흥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등 형세가 역전되었다. 오이라트 군은 퇴각하는 명군을 토성(土城, 금의 중도성의 성벽)으로 몰아갔다. 그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이것을 보고, 지붕 위에서 오이라트 병사들에게 돌이나 벽돌 등을 던지면서 명군을 도와주었다. 이 때 왕이 모복수, 고례 등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이 나타나면서 전세는 다시금 역전되었고, 오이라트 군은 격퇴되었다.

연전연패란 에센에게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에센의 최대의 오산은, 약체였을 터인 명군이 병력, 사기, 지휘,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였다는 점이다. 이 무렵 거용관을 노렸던 오이라트 군은, 화기의 위력과 나통의 교묘한 지휘로 인해 7일간의 전투에서 격퇴된 상태였다. 게다가 선부에서 출격한 창평백 양홍이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필두로 하여, 각지에서 지원군이 북경을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기세가 오른 명의 주력과의 결전을 피하고 명의 지원군에 의해 퇴로가 끊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에센은 북경으로부터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5일 밤, 에센은 상황과 함께 몽골 고원으로 도주하였다. 첩자들로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우겸은, 그날 밤 오이라트 진영을 향하여 포병대를 집중시켰다. 지금까지 명군은 상황이 다칠까봐 두려워 감히 적진을 겨누지는 못하고 있었다. 적진을 때리는 명군의 집중 포화는 맹렬하였고, 1만여 명의 오이라트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명군이 북경 전투에서 사용한 대포의 수는 토목보에서 회수된 것만 하더라도 800문을 헤아렸고, 원래 북경에 배치되어 있던 것과 남경으로부터 수송된 것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1,000문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5일간에 걸친 북경 전투는 명의 승리로 끝났다. 명군의 승리의 원인은 토목보 전투와는 대조적이어서, 우수하고 용감한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단기간에 잘 훈련되었으며, 대량의 화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16~121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by 문제청년 | 2005-07-19 11:13 | 역사/전쟁사 게시판 | 관련글 | 덧글(7)
 
 
사르후 전투(1619)

(만주어 인명·지명을 가타카나로 음사한 것의 경우 번역이 부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리며 정정할 곳이 있을 경우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누르하치의 건국

명 제국의 요동진에 인접한 지역에는, 일찍이 12세기에 금을 건국하였던 여직(女直, 여진[女眞] - 이후 여진으로 통일[옮긴이 註])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건주여진(요동 부근)의 누르하치는, 1583년(23세)에 거병한 이래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병의 천재였다.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다른 모든 부의 여진족을 항복시켜 휘하에 포함시킨 누르하치는, 1616년에 「열국(列國)을 자애롭게 다스리도록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은 스레 겡기옌 칸(영명한[英名汗])」에 즉위하고서 대외적으로 금(金, 후금[後金])을 칭하는 여진족 국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후금과 명의 관계는 교역 문제와 국경 문제 때문에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명의 지금까지의 도의를 벗어난 행위들을 하늘에 고발하고(칠대악[七大惡]), 요동의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무순(撫順)을 공격하였다. 수비대장인 이영방(李永芳)은 항복하였고, 요동총병관 장승음(張承蔭)이 이끄는 구원군은 대패하였다. 양국의 장기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2. 후금의 팔기 제도

후금의 통치 제도이자 군대 동원 제도는 「팔기(八旗)」라고 불리었다. 이것은 수렵민의 사회 제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인민을 8개의 구사(固山, 기[旗])라고 불리는 집단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8개의 군단으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팔기는 깃발의 색깔에 따라 정황(正黃), 정홍(正紅), 양홍(鑲紅), 정남(正藍) (이상 좌익), 양황(鑲黃), 정백(正白), 양백(鑲白), 양남(鑲藍) (이상 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양[鑲]’은 깃발의 테두리를 가리킨다).

팔기 제도의 최소 단위는 니루(牛彔, 좌익)라고 하며, 각 니루로부터 명목상 최대 300명의 갑사(甲士)를 동원할 수 있었다. 니루 다섯에 잘란 하나를 두고, 잘란 다섯을 모아서 구사 하나가 두어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대로 되지는 않아서, 각 구사 휘하의 니루의 수가 반드시 25개였던 것은 아니었다.

니루에는 지도자로서 니루 어전(牛彔額眞)이, 잘란에는 잘란 어전(甲喇額眞)이, 구사에는 구사 어전(固山額眞)이 두어져 있었다. 이들은 행정의 장이면서 동시에 군대의 장교이기도 하였다. 또한 각 구사는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손자, 조카인 버일러(貝勒, 기왕[旗王])에게 속해 있었고, 버일러는 구사 하나의 병력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 군의 부사령관으로서 분견대를 지휘할 때도 있었다.

얼마만큼의 군대를 동원할 것인가는, 각 니루로부터 몇 명의 갑사들을 동원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명목상의 상한선은 300명이었지만, 실제로는 건국 초기에는 각 니루로부터 50명의 갑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심양(瀋陽)·요양(遼陽) 전투 이후에는 100명의 갑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외에 구사의 버일러는 구사 휘하의 니루로부터 선발된 바야라 병(兵)이라고 불리는 100여 명의 정예 병사들을 친위대로서 보유하고 있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에 얼마만큼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1만 명에서 6만 명에 이르기까지 제법 편차가 있지만, 이 전역(戰役)에는 후금의 존망이 걸려 있었던 것만큼, 최대한의 동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하나의 니루로부터 동원된 병사들의 수는, 동고로(路)에 배치된 500명의 병사들을 세 명의 니루 어전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100명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 후금이 동원한 병력은 약 2만 몇 천 명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후금군은 아직 화기를 장비하고 있지 않았고, 냉병기(冷兵器)를 주 무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주력인 갑사는 중장기병으로 병사들은 갑옷을 착용하였고(마갑은 없었음), 활과 화살을 반드시 장비하였으며, 긴 무기로서 큰 칼과 창을, 짧은 무기로서 단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후금군이 장기로 하는 전술은 기병에 의한 포위 전술과, 화살을 연사하면서 기병 돌격을 실시하는 것이었지만, 누르하치는 명군이 사용하는 화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중무장을 한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도보 전투 공병으로서 이용한다는 전술을 고안해 두었다.

3. 명의 누르하치 토벌 작전

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지원군을 지휘하였던 양호(楊鎬)를 병부시랑 겸 요동경략으로 기용하여 대 후금 전쟁의 총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누르하치를 토벌하기 위해, 양호는 요동이나 조선에서의 작전 경험이 있는 두송(杜松), 유정(劉綎), 이여백(李如柏), 관병충(官秉忠), 시국주(柴國柱) 등과 같은 노련한 장수들을 기용하였다.

그러나 예정된 10만 명의 병력은 예산 부족으로 인하여, 그 해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집결할 수 있었다. 양호는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조선과 여허(南關, 누르하치에 적대적인 여진 부족)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대해서는 화승총 부대가, 여허에 대해서는 기병 전력이 기대되었다.

군대가 모이자 양호는 요동총독 왕가수(汪可受), 요동순무 주영춘(周永春), 순안어사 진왕정(陳王庭)과 작전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결정된 작전은, 47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전군을 4개 집단으로 나누어 반원형의 4개 경로로 진격하여, 누르하치의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포위하는 식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하는 명군은 8만 8천 명, 조선군은 1만 3천 명, 여허군은 2천 명으로서, 총 병력은 예정된 10만 명에 달하였다. 각 군의 부서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다(명군의 병력은 추정치임).

① 좌측 북로군

사령관은 개원총병관 마림(馬林), 감군(監軍)은 개원병비첨사 반종안(潘宗顔)이었다. 좌측 북로군은 개원로의 요동병을 주력으로 하는 약 2만 명의 병력에, 여허의 지원군 2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전군은 3개 부대로 나뉘어져서 제 1진은 마림이, 제 2진은 반종안이, 여허군을 포함하는 제 3진은 유격 두영징(竇永澄)이 지휘하였다. 주력인 좌측 중로군과 사르후 부근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② 좌측 중로군

사령관은 산해관총병관 두송, 감군은 광녕병비사 장전(張銓)이었다. 좌측 중로군은 산해관이나 보정 등 계진(薊鎭)의 각 부대와, 조몽린(趙夢麟)이 이끌고 온 고원(固原), 감주(甘州), 섬서(陝西)의 지원군 등 약 3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력은 두송과 보정총병관 왕선(王宣), 원임총병관 조몽린이 지휘하였고, 제 2진은 유격 공염수(龔念遂), 이희필(李希泌)이 지휘하였다. 이 부대가 전군의 주력으로서, 무순을 출발하여 사르후를 경유한 뒤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③ 우측 중로군

사령관은 요동총병관 이여백, 감군은 요동병비참의 염명태(閻鳴泰)였다. 우측 중로군은 요동진의 약 2만 5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부총병 하세현(賀世賢)이 부장이었다. 이 부대는 청하(淸河)로부터 아골관(鴉鶻關)을 나선 뒤 후란로(路)를 거쳐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④ 우측 남로군

사령관은 총병관 유정, 감군은 해개병비부사 강응건(康應乾)이었다. 우측 남로군은 산동(山東), 절강(浙江)의 지원군과 관전(寬奠), 진강(鎭江), 애양(靉陽) 등의 요동병으로 이루어진 약 1만 3천 명의 병력에, 조선의 지원군 1만 3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주력은 유정, 강응건이 지휘하는 명군이었고, 여기에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지휘하고 명의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감독하는 조선군이 뒤를 이었다. 이 부대는 관전에 집결한 뒤 동고로를 따라 진격하여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 외에 원임총병관 관병충이 요양에, 총병관 이광영(李光榮)이 광녕(廣寧)에 예비 병력으로서 주둔하고 있었고, 양호는 심양에 머무르면서 총지휘를 맡았다.

명측의 움직임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점령하고 있던 성곽과 요새를 포기한 채 명군의 주 침공 경로상에 있는 사르후와 자이피안 산 정상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는 내선(內線)의 이점을 살리는 각개격파였고, 항복한 명의 장수인 이영방은 명군이 복수의 경로를 취할 경우, 병력을 집중시켜 그 중 하나의 경로만을 두들기면 된다고 누르하치에게 진언하였다.

4. 사르후 전투

침공 예정일은 2월 21일이었지만, 폭설로 인하여 출발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력을 지휘하는 두송은 전공을 탐낸 나머지, 다른 부대와 연계하지 않고 먼저 행동을 개시하였다. 두송은 북쪽 변방에서 공적을 세운 장군으로서,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문관의 통제를 듣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었다.

3월 1일 두송의 부대가 접근하자, 후금의 축성 부대는 자이피안 산에서 철수하였다. 두송은 물이 불어난 혼하(渾河)를 건널 수 없는 차영(車營)을 후방에 남겨둔 채, 차가운 강을 건너 사르후 산을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한 번 혼하를 건너 자이피안 산을 공격하였다. 후금의 호위 부대는 저항하면서 후방의 키린하다로 후퇴하였다.

8시경, 명군이 침공해 왔다는 보고를 받은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 집결한 주력에 출격을 명하였다. 후금군은 다이샨의 정홍·양홍기를 선두로 하여 속속 팔기의 각 부대가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 누르하치가 사르후와 키린하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레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한 다이샨과 버일러, 그리고 중신들은 키린하다를 구원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키린하다에 증원 부대로서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들의 작전을 들은 누르하치는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하면 다른 명군도 동요할 것이라고 보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한다고 결정하였다.

사르후 공격 부대는 좌익의 4기에 우익의 2기(양황, 양남)를 더한 것이었고, 정백과 양백의 2기는 자이피안의 명군을 감시하였다. 6기의 장병들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것을 틈타, 사르후 산을 습격하였다. 사르후의 명군은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은 데다 시계가 저하된 시간대에 습격을 받았기에, 화기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근접전에 말려들어 괴멸되고 말았다.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한 뒤, 사르후를 공격하였던 6기와 감시를 맡았던 2기, 그리고 키린하다의 부대가 세 방향에서 두송의 부대를 합동 공격하였다. 세 방향에서 기병의 습격을 받은 두송의 부대는 혼하를 두 번이나 건너면서 전투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피로한 상태였고, 어스름한 어둠 중에는 역시 화기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괴멸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두송, 왕선, 조몽린 등 간부들도 전사하였다.

5. 샹갼하다 전투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을 무렵, 마림의 부대는 샹갼하다로 진출해 있었다. 마림은 명장 마방(馬芳)의 아들로서 요동총병관을 맡은 경험이 있었지만, 시나 글씨에 뛰어난 문인으로서 알려진 장군이었다. 반종안은 마림이 겁쟁이이기 때문에 다른 장군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양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마림의 용병술은 신중하고 견실하였기에 이 점이 반종안에게는 다른 맹장들에게 비교해 보았을 때 겁쟁이라고 비쳤던 것이었겠지만, 마림에게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강적과 맞선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2일 북로군의 접근을 알게 된 후금군에서는, 다이샨이 300명을 이끌고 먼저 출발하였다. 마림은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날 밤의 숙영지까지 후퇴하였다. 그 곳에서 3중의 참호를 파고 호 밖에는 대포를 배치하였으며, 그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배치하여 사방 어디로부터의 습격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엄중한 진형을 펼쳤다. 이와 같이 엄중한 포진을 본 다이샨은 누르하치에게 지원군을 계속 요청하였다. 제 2부대를 지휘하는 반종안은 1.6Km 정도 떨어진 피에훈 산에 진형을 펼쳤다.

그 날 아침, 혼하를 건너지 않았던 좌측 중로군의 공염수, 이희필이 이끄는 차영과 기병 등 약 2천 명의 부대가 와훔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은 마림의 부대와 맞서게 한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정백기)와 함께 1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이 부대를 급습하였다. 명군은 참호를 파고 전차와 화기를 배치하여 수비를 단단히 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공병으로서 투입하여 전차의 방어선을 돌파하도록 하였고, 그 뒤를 이어 기병으로 습격하여 중로군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다이샨으로부터의 급보를 받은 누르하치는 병력을 뒤에 남겨둔 채 소수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곧바로 달려왔다. 누르하치는 명군의 진형을 관찰한 뒤, 근처의 산을 점령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를 알아챈 마림이 병사들을 그 산으로 이동시키면서 양군이 격돌하기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좌익의 2기를 말에서 내리도록 하였지만, 명군의 움직임이 빨랐기에 다이샨은 말에 올라탄 채 명군에 대하여 돌격을 감행하였고, 전투는 격렬한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승패를 판가름한 것은 증원군이었다. 후금군의 경우 6기가 대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전장에 도착하는 자부터 속속 전장에 투입된 것에 반해, 명군의 경우 지원군이 없었고 피에훈 산의 명군은 그저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패주하였고, 극심한 추격을 받았다. 마림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유격 마암(麻岩) 등 다수의 장수와 병사들이 쓰러졌다.

반종안은 용기는 있었지만 장수로서의 자질이 없었고, 교전 중의 마림군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산 속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은 채 단지 전차를 늘어세운 방어진만을 펼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력을 재집결시킨 뒤 피에훈 산을 공격하였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먼저 나아가게 하고, 말을 탄 병사들이 그 뒤를 잇도록 하였다. 전차 뒤에서 사격을 퍼붓던 명군에 대하여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돌입하여 전차를 제거하였고, 그 곳으로 기병들이 돌입하여 반종안의 부대를 섬멸하였다.

여허의 지원군은 중고성(中固城)까지 진출한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서 철수하고 말았다.

6. 아부다리·후챠 전투

북로군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누르하치가 병력을 재집결시키고 있을 무렵, 명군이 동고·후란로를 따라 진격중이라는 보고가 도달하였다. 누르하치는 전군을 허투알라로 철수시킨 뒤 다음 목표를 남로군으로 잡았고, 우측 중로군에 대응하기 위해 허투알라에 4천 명의 정예 병력을 배치하였다.

좌측군의 괴멸을 알게 된 양호는 우측의 양군에 대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남로군을 이끌고 있던 유정에게는 명령이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정은 임진왜란이나 사천(四川) 지역의 반란 진압에서 활약한 인물로서, 무게가 120근(약 72Kg)에 달하는 큰 칼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도(劉大刀)」라는 별칭을 가진 맹장이었다. 유정이 평소에 구사하는 전술은 부대에 녹각목(鹿角木)을 보유하도록 한 뒤 순간적으로 녹각목을 늘어세워 적의 습격을 저지하고, 이렇게 하여 벌어둔 시간에 배치한 화기를 사용하여 적의 전위 부대를 격파한 뒤 기병으로 역습을 가한다는 것으로서, 그는 화기의 운용에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였다.

남로군의 이동 경로는 다른 부대와 비교할 때 길었고, 유정은 신중한 인물이었으며, 조선군의 보급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기에,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유정의 부대는 마을을 불태우며 전진하였고, 2일에는 동고로에서 토보 등이 이끄는 후금의 경계 부대 500명과 교전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를 거둔 뒤, 두송이 허투알라로 앞서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두송이 전공을 독차지하지 않을까 하고 유정은 초조해 했고, 4일 녹각목을 버린 채 포위 공격 장비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먼저 나아갔다. 강응건의 부대, 강홍립의 조선군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무렵 다르한 히야(정황기)가 이끄는 후금군의 선발대가 토보의 패잔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서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과 만났고, 유정은 조금 후퇴한 뒤 아부다리 언덕 위에 포진하고서 다른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 다이샨은 홍타이지(정백기)에게 우익의 지휘를 맡긴 뒤 언덕과 이어지는 산 위로부터 아부다리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자기 자신은 좌익을 이끌고 서쪽으로부터 진격하였으며, 후방으로부터는 다르한 히야의 복병이 습격을 가해 왔다. 명군은 삼면으로부터의 돌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전멸하였고, 유정은 전사하였다.

유정의 부대가 전멸하였을 무렵, 강응건의 부대는 조선군과 함께 후챠 들판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다이샨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홍타이지를 선두로 하여 후챠로 나아갔고 강응건의 부대와 대치하였다. 강응건의 부대는 명군과 조선군의 혼성 부대로서, 장창(낭선[狼筅])과 화기가 층을 이룬 채 포진하고 있었다. 명군의 화기 사격이 시작되었을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고, 화약 연기가 명군에게 불어 닥쳤다. 이것을 호기로 삼은 후금의 기병들이 화살을 연발하면서 돌격하여 명군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강응건은 수백 기를 이끌고 달아났다. 누르하치는 아민(양남기)과 다르한 히야(정황기)로 하여금 교일기가 감독하는 조선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광경을 조선측의 사료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기 속에서 적(후금)의 기병의 대군이 들이닥쳤고, 양 날개로 갈라져서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오면서 좌영(左營)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강홍립은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하면서 좌영과 함께 진을 펼쳤다. 간신히 대열을 정비할 수 있었지만, 적의 기병이 빠르게 돌격을 감행하여,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대포와 총을 한 번은 사격할 수 있었지만, 다음 탄환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이 진 안으로 들어왔고 순식간에 좌·우영 모두 전멸당하고 말았다」

좌영의 장수인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는 선전한 뒤 전사하였고, 우영의 장수 순천군수 이일원(李一元), 교일기는 조선군의 중영으로 달아났다. 중영의 5천 명밖에 남지 않게 된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와 협의한 뒤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였다. 절망한 교일기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우측 남로군도 소멸되었다.

7. 사르후 전투의 결과

양호가 내린 퇴각 명령은 이여백에게는 도달하였다. 부장 하세현은 남로군을 구원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이여백은 퇴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여백의 부대는 후금의 초계 부대 20명을 보고 도주하는 등 동요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온전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명군의 4개 부대 중 3개 부대가 누르하치의 내선을 이용한 교묘한 작전 지휘로 인해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후금의 전과는 명이 공식 발표한 것만 하더라도 잃은 장수들의 수가 314명, 병사들이 약 45,870명, 말이 약 28,400필, 무기의 손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며, 살아남은 조선군은 부대 전체가 후금에 투항하였다.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약 42,360명이었다고 한다. 명과 후금의 최초의 결전은 후금의 대승리로 끝났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22~127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by 문제청년 | 2005-07-20 22:30 | 역사/전쟁사 게시판 | 관련글 | 덧글(2)
 
 
이자성의 난~하남 전역(1641~44)

1. 이자성(李自成)의 재기

1637년 4월, 명 제국에 대한 대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학사(재상) 양사창(楊嗣昌)이 입안한 작전이 개시되었다. 병부상서 웅문찬(熊文燦), 섬서총독 홍승주(洪承疇), 섬서순무 손전정(孫傳庭) 등이 지휘를 맡아 병력 12만 명을 투입한 대작전은 반란군(유적[流賊])을 확실하게 몰아붙여서, 어떤 이들은 이자성 군과 같이 전멸하였고, 어떤 이들은 장헌충(張獻忠)이나 조조의 이명을 딴 나여재(羅汝才) 군과 같이 투항하였다.

그러나 장헌충이나 나여재는 진심으로 투항했던 것이 아니라, 진압 작전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위장 투항하였을 뿐이었다. 1639년 5월에 장헌충이 봉기하자 대반란의 불길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자성도 재기하여 하남을 중심으로 전전하였다. 이 기간 중에 우금성(牛金星) 등의 독서인들을 막료로 받아들인 이자성 군은 슬로건을 갖추고 엄격한 군율을 지키는 혁명군에 가까운 존재로 변신하였다.

1641년 2월, 세력을 확대시킨 이자성 군은 하남의 중심 도시인 개봉(開封)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개봉의 성벽은 견고하였고 수비군도 강력하였기 때문에, 7일 밤낮에 걸칠 사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성을 공략하지 못한 채, 이자성 군은 귀덕(歸德)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자성은 『명사』「유적전(流賊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는 것처럼 명 조정으로부터 유적이라고 불리었다. 유적이라는 이름이 그 전술을 말해주고 있으니, 기동전으로써 토벌군을 농락하였다는 것에 따른 것이다. 유적이 그 힘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은 하남을 중심으로 작전을 하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하남 땅은 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기동전에 유리하였다. 유적의 특수한 성격에 대하여 『예변기략』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유적은 만나는 성인들을 모조리 병사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징병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다.
② 유적은 발견하는 저장물을 모조리 보급품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보급품을 운송할 필요가 없다.
③ 적에 비해 우세하다고 판단하면 싸워서 적의 성을 공략하고 적군을 격파한다. 그 결과 유적의 세력은 점점 더 강력해져서 진압할 방법이 없어져 버린다.
④ 적에 비해 열세하다고 판단하면 도주하는데, 보급 부대가 버려지고 남겨진 노약자가 죽거나 포로가 되더라도, 도주 중에 약탈을 2~3일 행하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와 버린다. 그 때문에 적은 유적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⑤ 토벌을 맡은 장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 유적을 존속시키고 유적을 모두 죽이는 경우가 없다. 군대를 감독하는 이는 서생 출신으로서 시석(矢石)을 두려워하고, 안장을 얹은 말 위에 올라타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군인들은 그를 가벼이 여기고 명령을 준수하지 않는다. 한 두 차례 승리한다 하더라도 결국 토벌에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

유적은 근거지를 가지지 않는 것이 강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음 단계인 정권의 확립에는 약점이기도 하다. 이자성이 하남에서 기동전을 수행하면서 언제나 개봉을 노렸던 것은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유격전에 있어서 반드시 근거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역설한 모택동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었다.

2. 화소점(火燒店) 전투

명 제국의 유적 토벌의 책임자는 독사(督師, 병부상서로서 군을 지휘하는 자) 정계예(丁啓睿)였다. 정계예는 강대한 이자성 군을 두려워하여 직접적인 대결을 피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명 조정은 이자성 토벌을 진척시키기 위해, 1641년 5월 옥중에 있던 전 병부상서 부종용(傅宗龍)을 석방하여 병부시랑 겸 섬서삼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섬서순무 왕교년(汪喬年)의 협력을 얻은 부종용은 섬서의 정예 병력 2만 명을 이끌고 동관(潼關)을 출발하여, 먼저 총병관 하인용(賀人龍)과 이국기(李國奇)가 이끄는 사천·하남의 병력 2만 명을 받아들였고, 다시 신채(新蔡)에서 보정총독 양문악(楊文岳)과 총병관 호대위(虎大威)가 이끄는 보정의 병력 2만 명을 받아들였다. 9월 5일에 명군은 이자성, 나여재와 대결하기 위해 홍하(洪河)를 건넜고, 항성(項城)을 향하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이자성과 나여재는 토벌군의 움직임을 알고서 맹가장(孟家莊, 하남성 평여[平輿] 동북쪽) 부근의 숲에 정예 병력을 매복시켜 두었고, 나머지 병력으로 하여금 홍하를 건너게 하여 서쪽의 여녕(汝寧, 하남성 여남[汝南])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6일 아침, 부종용은 도하 중인 유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약 17Km의 거리를 강행군으로 이동하였고, 낮이 되어 맹가장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병사들이 갑주를 벗고 막 휴식에 들어갔을 무렵, 이자성이 배치해 둔 복병이 기습을 가하였다. 하인용과 호대위는 즉각 도주하였고, 이국기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역시 도주하였다. 부종용과 양문악은 직속 병력을 이끌고 맹가장 근처의 화소점에 포진하였고, 대포 사격으로 수백 명을 쓰러뜨려 유적군을 격퇴하였다. 부종용은 서북쪽에, 양만악은 동남쪽에 참호를 파서 숙영지를 건설하였다. 그 날 밤 보정군이 도주하였고, 양문악은 부하들에게 억지로 이끌려 항성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부종용은 동남쪽의 진영에 병사들을 분산 배치하였고, 축성을 행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9일, 부종용은 침구(沈丘)로 도주한 하인용, 이국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거절당하였다. 이자성은 참호를 이중으로 파서 부종용을 포위하였다. 11일에는 명군의 식량이 바닥나서 가축을 잡아 식량으로 삼았지만, 다음 날에는 그것조차 다 떨어져서 적 병사를 죽여서 그 고기를 식량으로 삼았다. 18일에는 화약, 탄환, 화살이 다 떨어졌다. 부종용은 살아남은 병사 6,000명을 이끌고 야밤에 출격하여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낮 무렵에 부종용은 항성까지 4.5Km를 남겨둔 지점에서 유적들에게 포로가 되어 처형당하였다. 이자성은 재기한 이래 처음으로 명의 대규모 토벌군을 격파하였던 것이다.

이자성 군은 이 승리 이후 항성 등 하남의 여러 성을 공략하였고, 12월에는 개봉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좌양옥(左良玉)은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자성의 거점이 되어 있었던 임영(臨潁)을 공략하여, 도성(屠城, 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여 민가를 불태워 버리는 것)을 행하였다. 이자성은 분노하여 개봉의 포위망을 풀고 좌양옥 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좌양옥은 언성(郾城)으로 달아났고, 이자성은 언성을 포위하였다.

3. 양성(襄城) 전투

병부우시랑 겸 총독삼변군무로서 부종용의 후임으로 임명된 이는 왕교년이었다. 왕교년은 문관이었지만, 자신은 무에 더욱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는 인물이었다. 관중(關中)의 정예 병력은 화소점 전투에서 전멸당하였기 때문에, 왕교년은 군을 재건하는 일부터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교년은 패잔병들을 수용하고 변경 방위를 맡고 있던 장병들을 긁어모아서 기·보병 3만 명의 군대를 편성하였다.

1642년 정월, 왕교년은 총병관 하인용, 정가동(鄭嘉棟), 우성호(牛成虎)를 이끌고 동관을 나섰다. 목표는 언성에서 포위된 좌양옥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왕교년의 작전은 이자성의 거점인 양성을 정예 병력으로 공격하여 이자성으로 하여금 언성 포위를 풀도록 하고, 그것을 왕교년과 좌양옥의 군으로 협공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장수들도 이 작전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왕교년은 보병과 화기를 낙양(洛陽)에 남겨두고, 정예 기병 1만 명만을 이끌고 급진하였다. 양성 주민들의 협력을 얻은 왕교년은 2월 2일에 양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왕교년은 하인용, 정가동, 우성호의 세 명의 총병에게 기병 9,000명을 주어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자성은 언성 포위를 풀고 양성을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여기까지는 작전대로였지만, 요격에 나서야 할 세 명의 총병들은 도주해 버리고 말았고, 배후에서 습격해야 할 좌양옥은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왕교년은 고작 1,000명의 병력으로 양성의 관민들과 함께 양성을 사수하게 되었다.

2월 13일, 이자성은 양성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15일에는 이자성 군의 남서쪽 모서리에 대한 공격으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러나 방어측은 즉시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고쳐 쌓았다. 이자성은 포격으로 왕교년의 깃발을 겨누도록 하였지만, 왕교년은 포탄이 쏟아져들어지는 와중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였다.

이자성은 방어측의 도주를 유도하기 위해 남서쪽 모서리의 공격 진지를 철거하였다. 이 때 출격할 것을 진언한 자가 있었지만, 왕교년은 적의 계략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서 장작과 수레 등을 이용하여 문을 틀어막고 방비를 강화하면서 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원군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7일, 방어측의 화살이 다 떨어지고 원군도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유적군은 성벽을 돌파하였다. 왕교년은 병사들을 이끌고 시가전을 벌였고, 몸소 달아나려는 병사 두 명을 베었으며, 유적병 3명을 베었다. 왕교년은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산 채로 포로가 되어 책형(磔刑)에 처해졌다.

4. 주선진(朱仙鎭) 전투

이자성은 두 차례의 도전을 물리친 이후, 이리저리 전전하면서 하남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였고, 4월에는 다시금 개봉을 포위하였다. 명 조정은 왕교년의 후임으로 병부우시랑 손전정을 발탁하였다. 관중의 군은 두 차례의 출진으로 거의 소진되어 버렸기에, 손전정 역시 군을 재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명 조정은 정계예에게 개봉을 구원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15일에 정계예는 보정총독 양문악, 총병관 좌양옥, 호대위, 양덕정(楊德政), 방국안(方國安)의 부대를 개봉 남쪽 수파집(水波集)에 집결시켰다. 그것은 참으로 대규모여서, 40만 대군이라고 일컬어졌다. 이자성은 정찰 기병 3,000명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였지만, 명군의 선봉과 조우하여 전멸당하고 말았다. 16일, 이자성은 정찰대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숙영지에 재보와 식량을 남겨둔 채 주선진으로 이동하여 명군과 대치하였다. 이자성은 개봉의 수비군을 속여서 그들이 출격해오지 못하도록 공작을 벌였다.

전투는 6일간 계속되었지만, 이자성측이 불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무기도 다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자성은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명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폭 약 5m, 깊이 약 5m, 길이 약 56Km에 달하는 긴 참호선을 구축하였다. 이 무렵 명군에서는 대군을 집결시켰기 때문에 보급에 곤란함을 겪고 있었고, 총공격을 주장하는 정계예와 철퇴를 주장하는 좌양옥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계예가 실수로 섞여 들어간 좌양옥의 말을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좌양옥은 분노하면서 독단적으로 퇴각을 결정하였다.

22일 밤, 좌양옥 군은 양양(襄陽)을 향하여 철퇴를 개시하였다. 여러 군들 가운데에서도 최강인 좌양옥 군이 도주하였다는 점을 알게 된 다른 군들 역시 연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면서, 누구도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정계예는 말에 올라탄 채 군대를 쫓아갔지만, 부대를 따라잡지 못한 채 허주(許州)로 달아났다.

이자성은 좌양옥 군의 뒤를 추격하였다. 다행히도 유적군이 빠르게 추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양옥은 강행군으로 약 45Km를 이동하여 참호에 도착하였다. 참호를 건너느라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유적군이 공격을 가하였다. 좌양옥은 기병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려서 참호를 건너도록 하였지만, 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말, 수레, 무기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정예 병력 및 옛 부하들이 다수 전사하면서, 좌양옥 군의 전력은 대폭 저하되었다.

하남에서 최강이라던 좌양옥 군을 격파한 이자성은 개봉 포위를 재개하였다. 이자성은 전술을 바꾸어 단지 포위하는 것에 그쳤다. 이 포위로 인하여 개봉에서는 식량이 바닥났고, 수많은 아사자들이 발생하였다. 양군 모두 전국을 타개하기 위해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적에게 수공을 가하고자 하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월 17일에는 물이 불어난 황하의 제방이 터지면서 개봉이 수몰되어 버렸다. 개봉이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되자, 이자성은 황하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때 이자성 군은 보병 7만 명, 기병 3만 명, 위협을 받아 억지로 따르고 있는 이들 약 10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5. 겹현(郟縣) 전투

개봉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손전정은 관중의 여러 부대를 집결시켰고, 이전에 몇 차례 도주하여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던 하인용을 처형하니, 관중의 장병으로서 전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손전정은 유적군으로부터 투항해 온 고걸(高傑)을 발탁하여 중군 총병관으로 삼았다.

9월 22일, 손전정은 고걸, 좌양(左勷), 백광은(白廣恩), 정가동, 우성호 등의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동관을 나섰다. 이 군대의 병력은 약 2만 명이었지만, 군마와 병기 등의 장비는 우수한 것이었다.

손전정은 개봉이 수몰되었기 때문에, 이자성측의 거점인 남양(南陽)으로 진격하였다. 손전정은 우성호를 전군, 좌양을 좌군, 정가동을 우군, 고걸을 중군으로 삼았고, 우성호에게 적군을 유인하도록 하였으며, 나머지 세 부대를 매복시켰다. 우성호는 이자성 군과 조우한 뒤 패배한 척 하면서 적군을 복병의 한가운데로 유인하였다. 먼저 고걸의 부대가 역습을 개시하였고 양 측면에서 좌양과 정가동의 부대가 덮쳐들었다. 이자성 군은 대패하였고, 이자성의 본영의 독(纛, 깃발)이 꺾이고 이자성의 말이 쓰러질 정도였다.

이자성 군은 패주하였고, 명군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재보, 부녀자, 말 등을 남겨두었다. 우성호, 고걸, 좌양의 부대는 재보를 약탈하느라 전열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때 나여재가 이끄는 유적군이 명군을 덮쳤다. 전황은 단숨에 뒤집혀서 명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백광은과 정가동의 부대는 온전하였기에 손전정은 등봉(登封)으로 후퇴하여 군을 재편성하였고, 11월에 관중으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자성 군은 정예 병력 약 8,000명을 잃었고, 손전정 군은 여전히 강력하였기 때문에, 이자성은 추격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향하였다.

6. 양양 공략

손전정 군이 귀환한 이후, 하남의 유력한 명군에는 양양의 좌양옥 군과 여녕의 양문악 군이 있었다. 이자성은 근거지로 삼을 목표로서 양양을 선택하였다. 양양 공략의 전 단계로서 이자성은 11월 13일에 여녕을 공격하여 이틀간의 전투에서 양문악 군을 격퇴하였다.

양양을 지키고 있던 좌양옥은 2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정예 부대도 유능한 장교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군의 내용은 양양 부근에서 강제로 징병한 신병들과 투항한 예전 유적들과 토적(土賊, 토착 반란군)들로서, 군율도 느슨해져 있었다. 좌양옥 자신도 자주 병을 앓게 되었고, 계속된 패전으로 인하여 전의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자성 군의 접근을 알게 된 좌양옥은 전함에 전군을 태우고 양양을 빠져나가, 무창(武昌)에 입성하여 모조리 약탈하였다.

12월 4일, 이자성은 양양에 입성하여 그 곳을 양경(襄京)으로 개칭하였다. 이자성은 그토록 염원하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7. 손전정 군의 궤멸

양양이 함락된 이후 하남의 명의 병력은 채 1만도 남지 않았고, 이 병력으로는 유적들에 대항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사실상 하남은 이자성의 손에 떨어졌다.

명에 있어서는 손전정 군이 하남에서 작전이 가능한 유일한 병력이었다. 겹현에서의 패전 이후 손전정은 전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마지막 수단이란 화기를 탑재한 전차인 화차(火車)를 제조한 것으로, 백광은이 그 지휘를 맡았다.

손전정은 동관 방위를 전략의 방침으로 삼고 있었지만, 명 조정은 출격할 것을 바라고 있었고, 그를 병부상서로 진급시키는 한편 독사로 삼았다. 1643년 8월 6일, 손전정은 재건 중에 있던 관중의 부대들을 이끌고 동관을 나섰다. 손전정 군은 우성호, 노광조(盧光祖)가 선봉을, 고걸이 중군을, 백광은이 화차영(火車營)을 이끌었고, 왕정(王定), 관무민(官憮民)이 이끄는 연수(延綏)·영하(寧夏)의 병력이 후원으로서 그 뒤를 이었다. 작전은 손전정 군이 낙양으로 들어가고, 사천총병 진익명(秦翼明)이 상락(商洛, 섬서성 남동부)으로 진출하며, 좌양옥이 남쪽으로부터 하남으로 진격하여, 여녕 부근에서 이자성을 세 방향에서 협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양옥과 진익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전정은 진영복(陳永福) 등이 이끄는 하남 군과 합동으로 낙양으로 진격하였다. 16일, 우성호의 선봉은 낙양 부근에서 유적군을 연파하였고, 여주(汝州)로 추격하였다. 그 때 이자성은 정예 병력은 양성에 집중시켰고, 여주, 보풍(寶豊), 겹현 등지에 부대를 배치하였으며, 후방의 당현(唐縣)에 그 가족들을 남겨 두었다. 손전정은 여주를 공략하였고, 사천왕 이양순(李養純)의 투항을 받아들여 이자성 군의 배치를 파악하였다.

9월 8일, 손전정은 보풍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11일, 이자성은 보풍에 구원군을 파견하였지만 노광조, 고걸, 백광은의 부대에 의해 격퇴되었고, 12일에는 이자성의 정예 병력마저 격퇴되었다. 손전정은 협공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맹공격을 가하여 보풍을 공략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손전정은 별동대로 하여금 당현을 급습하여 이자성 군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도록 하였다. 명군은 연전연승하고 있었지만, 큰 비가 6일 동안 계속 내리면서 보급 부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은 굶주리기 시작하였다. 퇴각을 진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손전정은 적의 거점을 공략하여 그 식량을 빼앗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그에 따라 13일에는 겹현을 공략하여 양(羊) 등을 부대에 나누어주었고, 진영복에서 수비를 맡겼다.

이자성은 양성의 방비를 굳혔지만, 연전연패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적군들 중에는 투항하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이자성은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후방으로 별동대를 파견하여 명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것을 꾀하였다. 17일 밤, 명군은 전투에는 승리하고 있었지만 굶주림으로 인하여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손전정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지시를 기다릴 수 없었고, 각자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였다.

이자성은 전군을 출격시켜서 추격을 개시하였다. 명군은 조직적으로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200Km 이상 추격을 받았고, 4만 명이 넘는 장병을 잃어서 거의 전멸하였다. 18일, 손전정은 황하의 도하점인 맹진(孟津)으로 달아났고, 자살하고자 하였지만 부하들에 의해 저지당한 채 동관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 명에 남겨진 유력한 기동 병력으로는 영원(寧遠)을 지키고 있는 오삼계(오삼계) 군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군은 청군의 침공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세가 오른 이자성은 손전정이 군비를 재건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관중을 공격하였다. 손전정은 동관에서 이자성 군을 막아내고자 하였지만, 이미 양군의 전력 차는 압도적으로 벌어져 있었다. 10월 6일, 손전정은 동관에서 전사하였고, 백광은은 고원(固原)으로, 고걸은 연안(延安)으로 도망갔다. 서안(西安)을 공략한 이자성은 1644년 정원, 서안을 서경(西京)으로 개칭하였고 국호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 원년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자성은 산서 방면으로 진격을 개시하였고, 산서총병 주우길(周偶吉)의 격렬한 저항을 격파하자, 선부(宣府), 거용관(居庸關) 등의 중요한 진지를 지키는 장수들이 차례차례 이자성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것을 호기로 삼은 이자성은 북경(北京)을 공략하여, 3월 19일에 명의 숭정제(崇禎帝)를 자살로 몰아넣게 된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28~133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by 문제청년 | 2005-07-24 15:21 | 역사/전쟁사 게시판 | 관련글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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