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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세기, 미천태왕대 고구려의 영토 확장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10.10|조회수147 목록 댓글 0

松花江님, 답변이 조금 늦었죠...양평에 대한 답변은 '[뿌리아름]동방사회' 게시판에 올렸는데 쓰다 보니까 내용이 길어져서 양평의 위치 비정 이외의 내용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암튼, 이번 답변은 님이 필요로 하는 것만 간단하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미천태왕은 300~330년까지 장장 31년간 재위하면서 고구려 중기 크게 영토 확장을 시도한 분입니다. 이건 잘 아시죠? 그럼『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미천태왕의 치적 중에 영토 확장과 관련된 부분만 한번 찾아볼까요?

 

『삼국사기』권17「고구려본기」제5〈美川王〉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五年,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314)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16년(315) 봄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史{刺使}󰄲<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廆>, 三國進攻<棘城>. <廆>閉門自守, 獨以牛酒, 犒<宇文>氏. 與國疑<宇文>氏與<廆>有謀, 各引兵歸. <宇文>大人<悉獨官>曰: “二國雖歸, 吾當獨取之.” <廆>使其子<皝>與長史<裴嶷>, 將精銳爲前鋒, 自將大兵繼之, <悉獨官>大敗, 僅以身免. <崔毖>聞之, 使其兄子<燾>詣<棘城>僞賀. <廆>臨之以兵, <燾>懼首服, <廆>迺遣<燾>歸. 謂<毖>曰: “降者, 上策; 走者, 下策也.” 引兵隨之. <毖>與數十騎, 棄家來奔, 其衆悉降於<廆>. <廆>以其子<仁>, 鎭<遼東>官府, 市里案堵如故. 我將<如孥>據于<河城>, <廆>遣將軍<張統>掩擊擒之, 俘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廆>遣<慕容翰>․<慕容仁>, 伐之, 王求盟, <翰>․<仁>乃還.

20년(319) 겨울 12월,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비는 비밀리에 우리 나라, 단씨, 우문씨를 회유하여 모용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으로 진공하였다.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 사이에 남모르는 계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대인 실독관이 말했다.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빼앗을 수 있다.”

모용외가 그의 아들 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옆에 세우고 도를 접견하였다. 도는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자복하였다. 모용외는 곧 도를 돌려 보내면서 최비에게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의 뒤를 따랐다. 최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인으로 하여금 요동 관부에 진을 치게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을 보내 습격하여 사로잡고, 주민 1천여 호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시켜 우리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동맹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한과 인이 바로 돌아갔다.

 

二十一年, 冬十二月, 遣兵寇<遼東>, <慕容仁>拒戰破之.

21년(320) 겨울 12월,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인이 항전하여 우리가 패배하였다.

 

三十一年, 遣使<後趙><石勒>, 致其楛矢.

31년(330),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

 

휴우...정말 대단하네요. 만약 광개토호태왕의 치적을 정리한 비문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언뜻 봤을때 미천태왕의 영토 확장 기록이 더 많다고 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영토 확장 및 외교 기록이 등장합니다. 미천태왕은 재위의 대부분을 요동 지방으로의 강력한 진출에 투자하신 분 같습니다.

 

님이 물어보신 질문이 "미천왕의 도약은 모두 평양, 재령, 丹東(서안평)등..반도지역이었었나요?" 였죠? 이 중에서 평양은 낙랑군을 말씀하시는 것일테고, 재령은 대방군을 말씀하시는 것 같고 단동은 서안평을 말씀하시는 것 마죠? 무슨 책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책에서 이런 식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학계에서 전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다음 기록을 한번 볼까요?

 

『자치통감』권88「진기」제10〈효민제〉조.

 

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건흥 원년(313) 4월,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여 매년 그칠 사이가 없었다. 낙랑왕 준은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회에게로 갔다. 회는 (장)통으로 태수를 삼고 (왕)준으로 하여금 참군사를 삼았다는 내용입니다. 서병국은 314년, 고구려가 남쪽으로 대방군을 쳤다는『삼국사기』의 기록에 의거해 313년 고구려가 장통 세력을 낙랑군에서 격파한 여세를 몰아 그 남쪽 대방군으로 진출하여 발버둥치는 장통의 세력을 무찔러 그 지역을 점령한 사실을 말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즉, 궁지에 몰린 장통이 요동반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 모용회에게 달아났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이때의 낙랑군 · 대방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315년 고구려가 현도군을 쳐부수고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의 현도군은 요하와 혼하 사이에 이었던 제 3현도군으로 판단되며 일련의 영토 확장 결과, 고구려는 4세기 초, 낙랑 · 대방 · 현도군과 요동군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함으로써 요하 일대까지 영토를 넓혔다고 합니다(1997,『고구려 제국사』, 혜안, p.88). 이는 저와 상당히 비슷한 견해로서 예전에 미천태왕이 정벌한 낙랑군 · 대방군에 대해서 썼던 글이 있는데 '[뿌리아름]일반역사' 게시판 12, 13번이 그것들입니다. 같이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양서』권54「열전」제48〈고구려전〉

 

<晉><永嘉>亂, <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 <元帝>授<平州>刺史. <句驪王><乙弗利>頻寇<遼東>, <廆>不能制.

 

위의 기록은 양서에 있는 것인데, 진 영가의 난때, 선비족 모용괴가 창려현의 대극성에 거처를 정하자 동진의 원제가 모용외를 평주자사로 임명하였는데(320), 고구려왕 을불리(미천태왕)가 자주 요동을 침구하니 외가 이를 제어하지 못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천관우 역시 위와 같은 내용을 예로 들면서 당시 미천태왕이 공격해 남녀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아온 낙랑군은 오래전부터 대릉하 방면에 위치한 것이라 지적되어 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치는 불명이며 이와 더불어 대방군 또한 위치는 불명이지만 모용외의 뒤를 이은 모용황이(333) 현도태수, 대방태수, 요동태수 등을 임명한 기록을 봤을때 333년 이전에는 이들 3 개군현이 모용씨 휘하에 들어갔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봤을때 이때의 낙랑군은 금주(錦州) 일대로 볼 수 있으며 대방군 또한 그 근처에 있었다고 봐야하니『수서』「지리지」에 柳城 有帶方山이라는 기록이 참고가 될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서병국은 요동반도에 있던 것을 고구려가 공격해 차지했다고 파악한 반면, 천관우는 본래 한반도 중부에 있던 것이 313년을 기점으로 대릉하 일대로 옮겨갔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본래는 한반도 중부에 있던 것이지만 고구려의 영토확장에 발맞춰 미천태왕 시절에는 모두 대릉하 일대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입니다(1997,「난하 하류의 조선」『사총』21, 역사학연구회, p.27~31). 공석구 또한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으며(1999,『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서경문화사, p.55~75) 더 나아가 미천태왕 16년(315)의 현토성 공략과 313년 현토태수 '배무'의 죽음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죽고 더이상 진나라에 의한 현토태수 임명 기사가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더 이상 진나라에 의한 현토군 지배가 지속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고구려는 그것을 노리고 현토군을 공격했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한편 김용만은 이에 대해서 고구려가 중국측 문물을 군현을 통해 간접 수입하기보다는 직접 수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리했고 이 지역의 농업생산력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이같은 영토확장이 이뤄진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학계 대부분의 견해가 아닐까 합니다(1998,『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p.152). 실제 저 역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대방군과 낙랑군에 대해서는 기존 학계와 견해가 조금 다르기도 하지만 말이죠. 전 동천태왕때 천도했다는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기 때문에 이미 그 전에 공식적으로 한반도 안에서 낙랑군은 소멸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이 시기 대방군 역시 거의 소멸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현토군, 낙랑군, 서안평 등을 서쪽으로 가는 길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봤을때 낙랑군은 요동 반도 어딘가에 있다는 견해와 한반도 중부 평양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대방군의 경우는 전 요서 일대와 황해도 일대로 이원화해서 보지만 현재 학계의 대다수 견해는 황해도 일대로 파악하고 있죠. 마지막으로 서안평에 대해서는 압록강 하구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윤명철, 2004,「해양에서 본 고구려의 흥망과 동북공정의 비판」『대고구려 역사 중국에는 없다』, 예문당, p.168~171) 오늘날 대부분은 요하 하구로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요하 하구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현토군, 낙랑군, 서안평이라고 지역들이 차례로 고구려의 군사 작전 범위 아래 들어올테니 말이죠. 하지만 이에 대해서 다르게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강선은 당시 미천태왕은 312년 무렵부터 요동에서 모용외와 수없이 다퉜으며 모용외와의 대결에서 힘의 우위를 확인한 고구려가 서부 국경의 안전을 발판으로 남쪽의 낙랑군을 몰아내는데 전력을 다 했다고 보기도 합니다(2001,「고구려와 전연의 관계에 대한 고찰」『고구려연구』11, 고구려연구회, p.11~12).

 

이렇게 봤을때 당시 미천태왕은 요동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중부에 대한 전방위적 영토확장을 꾸준히 진행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 답변이 좀 늦었는데...암튼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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