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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말갈족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10.20|조회수730 목록 댓글 0

  요동태수 (2006-10-12 23:46:15, Hit : 378, Vote : 1
 고구려는 말갈족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후계국가 발해의 건국지도자들인 걸걸중상,걸사비우는 말갈족의 추장들입니다.
발해가 본래 고구려인이 아닌 이들이 이끄는 말갈족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것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발해의 초대왕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렇게된 이유는 대부분의 고구려유민들이 앞서 말한바와 같이 쪼개져서 돌궐,당,신라등지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며 반면에 말갈족은 비록 고구려라는 국가에 소속됨으로 인해 멸망이후 영주등지로 강제이주되는 사민정책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비교적 그 세력이 고구려인들과 같이 조각조각 분열되는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고 어느정도는 결집상태를 이룬것으로 보입니다.또 말갈족이 거주하는 영내에 고구려유민들이 유입할 여지는 있으나 걸걸중상,걸사비우와 같은 지도자들이 고구려유민중에서 특별히 드러나는 바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은 미미하며 시기에 있어서도 대부분 건국이후의 산발적인 유입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발해는 말갈족이 건국한 말갈족의 국가라고 볼수있습니다.

그러나 그사실이 발해가 말갈족이라는 종족의 전민족적인 국가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말말갈(1)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말갈족들이며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일부의 말갈족들은 스스로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했던(3) 속말말갈들과는 달리 종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시한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고구려가 존속했을 당시에도 복속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본토와 근접하지는 않아서 속민화의 강도는 낮은 것으로 보이며 그랬기에 그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본래 그들이 살고있던 지역에서 다른곳으로 강제이주되는 일없이 그지역에 그대로 살게된 토착세력이었습니다.

발해는 건국이후 고구려의 전통적인 발전방향인 요동,한반도북부가 아닌 만주동북부로 영토를 확장하여 토착말갈인들의 영역을 복속시켰는데 이는 발해가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과 충돌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종족적인 동질성에서도 기인하지 않나 싶습니다.그러나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하는 토착말갈인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며 일시적인 복속관계에 있기도 했으나 발해가 멸망하기까지 동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200년동안 존속하고 번영하였으며 그 국력이 강성하여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고까지 불렸던 발해는 결국 국력이 약화되어 거란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합니다. 유민들의 일부는 부흥운동을 펼치지만 후계국을 성립시키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때마침 건국한 역시 고구려계승을 표방한 고려로 유입되었으며 나머지는 발해변방의 토착말갈인들에 흡수되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요는 영토점유를 이유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기도 하였으나 요는 중국의 정복을 지향하고 한화(漢化)하는 정복왕조이며 발해와 같이 고구려의 계승에 대한 정치적,문화적인 실천성(2)을 가진바는 없었기에 그것이 지역적인 의미 이상의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토착말갈인들은 여진족으로 불리며 발해를 섬긴것과 같이 거란의 요를 섬겼으며 후에 스스로 금을 건국하는데 이 금나라는 거란의 요와 같은 정복왕조이며 그들의 후신인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역사서 <만주원류고>에서는 발해이전에 이미 범 퉁구스적으로 팽창했던 고구려를 숙신-말갈-여진퉁구스의 만주역사에 대한 주도권을 주장하기위해 배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건국이후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으며 이과정에서 유입한 고구려유민들을 같은 고구려를 정체성으로 하는 발해인으로서 동화시킨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말갈인이었지만 또한 고구려인이었으며 그들이 가진 정치적,문화적인 실천성은 상당하였습니다. 이에반해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하는 토착말갈인들은 종족적인 정체성을 중시하였으며 발해가 멸망한후에는 이들은 더이상 고구려에 대한 관계성을 가지기는 힘들었다고 봅니다.

결국 고구려는 정치적,문화적계승자인 속말말갈 중심의 발해에 의한
말갈족의 역사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갈족이었지만 고구려와의 관계성을 상실하고 중국의
정복왕조를 건설한 여진족의 역사인것은 아닙니다.


(1) <신당서> 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2) <속일본기> 권10
大武藝啓...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대무예의 계에...고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고려의 유속을 가지고 있다)

(3) <속일본기> 권22
高麗國王大欽茂言
(고려국왕 대흠무가 말한다)

*사서의 기록은 스스로 해석한바는 아니고 웹서핑으로 인용하였습니다.
*청나라가 <만주원류고>에서 고구려계승을 표방했다고 적었으나 오히려 배제했기에 수정합니다.
*맺음말에 말갈족의 "역사"를 "나라"라고 오기하였고 적절하지 못한부분이 있기에 전체적으로 맺음말을 수정하였습니다.



요동태수 (2006-10-12 23:57:19)
개원 3년(715)에 돌궐에 유입되었던 고문간·고공의 등이 다수의 유민들을 이끌고 당에 내항한것은 발해가 말갈인들의 주도로 건국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서병국교수님은 "발해건국의 배경"이라는 논문에서 돌궐내의 유민들은 고구려의 멸망 이래 30년 이상 돌궐에서 거주하여 생활의 기반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므로 발해가 아무리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고 할지라도 안정된 생활의 터전을 버리고 발해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리라고 하셨으나 이들이 돌궐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특정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가지지 않은이상 피난처삼아 들어간 돌궐에서 멸망한조국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가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나중에 당으로 내항했다는데서 더욱 그렇습니다.

돌궐내의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로 들어오기를 거부한 이유가 서병국교수님은 사회.경제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저는 말갈인주도로 인한 건국이라는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박주영 (2006-10-12 23:59:55)
발해는 스스로 부여에서 나왔고, 고구려라 하였습니다. 전적으로 고구려인임을 자부했고, 요사에도 발해를 고구려로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발해를 말갈족의 나라로 기록한 최초의 기록은 최치원의 당에 보낸 표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고구려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흡수하였다고 여긴 신라에서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모함하기 시작하면서 신당서에 비로서 발해가 말갈족이란 기록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전의 구당서에는 발해를 고구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신당서는 구당서를 DOWN GRADE(왜곡)한 사서로 유명합니다.
요동태수 (2006-10-13 00:10:22)
그래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말갈족의 추장이 아니었습니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고구려의 강역과 인구를 다 흡수했습니까?

그뒤를 이은 고려가 옛 고구려의 인구와 영토를 몇퍼센트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오랫동안 같은국가의 테두리에서 함께 살아온 말갈족이 건국한 발해가 그 계승성에서 왕건의 고려보다 못할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이 원고구려인이 아닌 말갈족일지라도 스스로 고구려인을 칭함이 부족할것이 어디있습니까?

적어도 왕건의 고려보다는 나을것입니다.
딴지맨 (2006-10-13 00:28:01)
고구려의 기층민족은 한,예,맥의 혼혈입니다.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말갈족의 입장은 한나라의 지배를 받은 한사군의 조선유민과 하등 다를바가 없습니다.

일제시대 우리는 나라가 없었지만, 일제시대를 우리의 역사로 배웁니다.

고구려는 말갈족의 역사일수는 있으나, 말갈족의 나라는 아니죠.
요동태수 (2006-10-13 00:36:41)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는 발해이며 발해를 건국한 민족은 말갈족입니다.

그들의 고구려 계승국으로서의 정치적,문화적인 실천성은 왕건의 고려에

비할바가 아니며 따라서 나중에 금,청을 세운 여진족의 나라라고 할수는

없으나 말갈족의 나라가 아닌것은 아닙니다.

발해당시에는 어느누구도 그들보다 고구려인이라고 지칭할만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딴지맨 (2006-10-13 00:47:59)
발해의 경우는 저는 이렇게 봅니다.

한나라가 망한 뒤, 한사군으로 탈출하여 온 한나라 장수가 한사군을 중심으로 한을 재건하겠다고 하는데, 한나라의 문화에 동화되어버린 조선유민들이 적극협력하여 후한을 세우는 식,,,

본래 한나라의 중심강역에서도 벗어난데다, 민족구성도 한족의 비율이 작아져 버렸지만, 도데체 이런 경우 어느 민족의 나라라고 해야 하는지요?

'발해는 말갈족의 역사다'라고는 얘기 할수 있지만, 여전히 '발해는 말갈족의 나라다'라고는 얘기하기 힘듭니다.
딴지맨 (2006-10-13 00:54:46)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고구려의 중심강역인 한반도북부와 요동지역의 종족성분과 백두산이동지역의 종족성분은 거의 별천지에 가깝습니다.

전자는 한민족의 기층민족인 한,예,맥이고 후자는 말갈족입니다.

고구려의 인구분포는 그 자료가 충분치 않아 섵불리 말하기 힘들지만, 농경생활에 용이한 요동일대와 한반도 북부가 그 중심이지, 오늘날 길림성 북부나 동부는 아닙니다.

고구려의 건국에 있어서 말갈족은 주체가 아닙니다.

발해의 경우는 말갈족의 적극 참여가 있었지만, 지배계층을 형성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요동태수 (2006-10-13 00:55:30)
딴지맨// 고구려유민들은 이미 대부분 돌궐,당,신라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말갈족들이 발해건국을 주도하고 복속한 영역과 속민들이
대부분 말갈족인 것이지요. 그런 발해가 말갈족의 나라가 아닐수가
있습니까? 왕과 지배층이 말갈족이거늘..........
요동태수 (2006-10-13 00:58:16)
딴지맨//사서를 무시하는 고고학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도 없는 유골조각이 의미를 가진다고 보십니까?

(1) <신당서> 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딴지맨 (2006-10-13 01:06:10)
요동태수/

사서를 무시하는 고고학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도 없는 유골조각이 의미를 가진다고 보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전 유골조각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유물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치적 성격의 유물이라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쓰여지는 생활도구들이 요동,한반도지역과 만주동부지역이 그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한반도북부와 요동동남부를 중심으로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이 지역은 말갈인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딴지맨 (2006-10-13 01:08:47)
요동태수/

구당서에 나와있지 않은 내용이 신당서에 등장하였음을 생각해서 사료인용을 해주십시요.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유민이라 말합니다.
요동태수 (2006-10-13 01:13:02)
딴지맨// 한반도북부와 요동동남부를 중심으로 고구려가 주변의
말갈족들을 복속하여 지배하였으며 그중 속말말갈의 중심으로
일부 말갈족은 고구려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반도북부와 요동동남부의 고구려유민들은
대부분 돌궐,당,신라등지로 유입되었으며 그래서 말갈족들이
발해건국을 주도하였고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고구려인을
자칭하였습니다. 원고구려인들은 다른민족과 국가에 흡수되어서
되어서 동화되었지만 그들은 남아서 고구려의 정치적,문화적인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고구려와 무관한 존재입니까? 고구려라는 가문을
계승한 존재가 아닙니까?

(2) <속일본기> 권10
大武藝啓...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대무예의 계에...고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고려의 유속을 가지고 있다)
요동태수 (2006-10-13 01:16:25)
딴지맨// 속말말갈은 고구려라는 국가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고구려유민이자 말갈족인 것이지요.
대조영이 고구려유민이라고 해서 말갈족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딴지맨 (2006-10-13 01:30:11)
그럼 요동태수님의 주장의 요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대조영은 속말말갈인이다.

2. 고구려의 진정 계승한 나라는 발해다.

3. 발해건국의 주체는 속말말갈이다.

4. 고로 고구려,발해는 말갈인의 역사이자 말갈인의 나라다.

인걸로 이해가 됩니다만,
딴지맨 (2006-10-13 01:52:44)
일단 1번은요, 신당서에 나온 기록을 믿어버릴때만 가능한 결론입니다. 사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서의 내용을 100프로 믿으면서 공부하는건 아니거든요. 검증을 거치지 못한 사서의 내용은 하나의 시각으로 존재할 수 있을뿐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2번은 사실이긴 합니다만, 숙지하셔야 할게 있습니다. 그 고구려를 계승하여 발해를 건국했을지도 모를 속말말갈인들의 정체성은 요,금,원을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3번, 이건 좀 애매합니다. 요동태수님이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을 구분하여 말씀하시는게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된 말갈이고 흑수말갈은 그렇지 않은 말갈을 말씀하시는거 같습니다만,,,

속말말갈과 흑수말갈로의 구분은 발해건국이후에 중국인의 관점에서 발해에 속한 말갈과 그렇지 않은 말갈을 구분해서 칭한겁니다.

고구려시기에는 말갈에 7부가 있었으며, 그 7부중 속말말갈은 오늘날 송화강일대를 중심으로 있었던, 고구려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미미한 말갈족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유민이 당,돌궐,신라로 뿔뿔이 흩어졌다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에 끌려간 유민의 수는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사서에 나온 기록들만 볼때 50만이 안되는거 같고요, 돌궐은 유목민족국가로서 정주국가출신의 고구려인들이 돌궐로 투항하는데는 그 수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신라로 투항해온 고구려인의 수는 생각보다 작습니다. 신라에 투항한 황해도일대와 금마국의 유민들이 그 대부분인 정도니,

순수 고구려 유민들중 일반인들은 거의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고 보여지는데요.

발해의 건국에 이들도 말갈인들 못지 않게 기여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4번은요, 역사는 공유하는 것이지 독점하는게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고구려,발해는 말갈족의 역사일수는 있으나, 말갈족의 나라는 아닙니다.
딴지맨 (2006-10-13 02:56:08)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역사, 발해를 고구려유민과 건국한 역사는 말갈족 역사의 본류가 아닌 지류라는 것입니다.

본류는 고조선-고구려-발해와는 관계없이 독립을 유지해오며 후에 금을 건국한 숙신-읍루-흑수말갈-생여진입니다.
요동태수 (2006-10-13 05:16:38)
딴지맨//일단 저의 처음논지도 "고구려가 말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라는 제목처럼 나라가 아니고 역사라는 개념이었는데 마지막 맺은말에서 나라라는 말을 쓰는 바람에 오류가 생긴것 같군요.댓글을 제대로 안읽고 반론을 말한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나라를 역사로 수정합니다.

그렇지만 원고구려유민이 대부분 돌궐,당,신라로 흩어져서 유입된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건국을 말갈족이 주도하였으며 속말말갈족의 추장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발해의 초대왕이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원고구려유민의 수가 많고 세력이 강하다면 말갈족이 고구려계승국의 왕이 될수는 없는 것이지요.또한 돌궐에 유입된 원고구려유민들이 발해에 들어오기를 거부한것으로 보아 이들이 발해를 말갈족의 나라로 여긴것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만약 원고구려유민이 주도라면 멸망한조국을 계승한 나라를 버리고 당에 내항할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당은 물론이고 신라로 귀속된 황해도와 보덕국의 고구려유민들은 신라사회에 동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계승을 표방한 고려마저도 신라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정치적,문화적인 실천성을 가지고 계승한 말갈족주도의 발해가 고구려의 정통계승국이며 고려의 고구려계승성도 발해가 후계국을 만들지 못한점과 발해유민이 고려에 유입된점으로 성립한다고 볼수있으며 삼한통일의 개념만으로는 고구려자체를 아우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말갈족은 속말말갈중심의 발해인을 말하며 이들의 후신의 국가는 성립하지 않고 유민들은 발해변경의 토착말갈인과 고려에 유입되었습니다. 토착말갈인은 여진족이며 이들은 발해를 통한 고구려와의 관계성을 잃어버렸으므로 고구려를 계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이 남아있다고 해서 주류라고 할것은 없으며 고구려를 계승한 말갈족은 속말말갈의 발해인이며 그들이 남지 않았더라도 지류라고 말할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본래의 종족으로부터 분화되어 역사를 남겼으며 그것을 본류와 지류로 구분할 존재들은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들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서의 내용을 반박할 근거가 없으면 무조건 믿을게 아니라는 말은 쓸게 못됩니다.
궁금이 (2006-10-13 11:54:08)
(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는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부여 옥저 동예 등
그리고 고구려는 5개부족의 연맹체라고 합니다.
도대체 말갈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부여 옥저 동예 등 만주에 있는 모든 나라가 고구려의 5부안에 녹아들어간겁니까?

말갈은 그 후에 유입된 이민족이라는 말입니까?

고구려 5부 이외를 몽땅 말갈이라 부른것은 아닌지?
말갈은 결국 부여 옥저 동예의 망국의 유인을 아닌지

물론 흥안령 산맥을 넘어 북만주로 들어오는 원시적이고 이질적인 유목씨족과 산림사냥 씨족의 유입은 있었겠지만 소수일거고....

특히 고구려가 강성할 때는 더더욱 힘들지 않을까요.

특히 부여같은 나라 유민을 말갈족이라고 불렀다면
고구려라는 나라의 지배 5부족과 그외 만주의 망국의 유민을 말갈족이라 해석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말갈족이 고구려인이냐 아니냐의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고구려를 많은 부족으로 이루진 국가이며 그중 5부가 지배부족이고 나머지는 고구려와 원뿌리가 같았지만 그 때는 경쟁에서 져 피지배자가된 부족(말갈) 본다면

이것이 본질이라면 형식상 말갈 고구려인 구별은 본질에 벗어난 오해가 아닌지....

고구려 안에서 말갈과 5부와 관계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생산활동(수렵 농업 유목 목축)의 차이 등 관계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전 사학 근처에도 못간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냥 평소 의문스러운 점을 올리니 비웃지나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요동태수 (2006-10-13 13:59:23)
사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말갈을 구분하여 부릅니다.
같은 국가의 태두리에 있더라도 동화되지 않은 이상 다른민족입니다.

(1) <신당서> 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요동태수 (2006-10-13 14:23:48)
이종욱 교수님이라는 분이 이미 저하고 같은 주장을 하신바가 있군요.
내용도 알고싶은데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
궁금이 (2006-10-13 15:56:44)
고구려가 정복한 부여와 동예 옥저 등 나라가 있었던 곳의 유민(부족)을 전부 무슨 무슨 말갈족이라 하는데
그럼 말갈족은 고구려의 피정복국가의 부족을 지칭하는 것 아닌지?
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여와 옥저 동예는
우리민족의 원형을 이룬 고대 부족국가이고 이들이 이후에 말갈로 불렸다면 말갈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 발해는 고려에 복속되었던 옛옥저(?예를 들자면)의 속말(?)부족의 출신으로 고려 조정에 출사하였던 자로 성이 걸출씨이다.
요동태수 (2006-10-13 15:57:18)
위에 제가 고려의 고구려계승성을 잘못규정한 것 같습니다.
고려는 발해보다는 문화적인 실천성면에서 부족하지만
서경을 중시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며 발해유민을 우대하는등
나름대로 계승국으로서 정치적면에서는 정체성인식면에서 볼때
발해가 없는 이상 고구려계승국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봅니다.
단순히 발해유민 유입만으로는 가치가 없지요.그것은 잘못 말했습니다.
요동태수 (2006-10-13 16:00:15)
궁금이//고구려의 영향권에는 말갈말고도 거란이 있으며 말갈족은 만주동북부에 흑수말갈 같은 고구려의 영향아래 있지않은 말갈족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안에 말갈이 속민화된 이민족을 지칭하는 뜻이 될수없습니다.
궁금이 (2006-10-13 16:16:40)
고구려가 건재할 때 옛 부여와 동예 옥저 땅에는 무슨 말갈 족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나요?
요동태수 (2006-10-13 16:34:06)
궁금이//글쎄요 모르겠군요.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주장하고 있으나
전문역사학도인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여,옥저,동예는 고구려인과 같은 예맥계통으로 알고있습니다.
숙신-읍루-물길-말갈로 이어지는 숙신계통과는 다른것으로 압니다.
딴지맨 (2006-10-13 21:42:47)
신당서는 북송 중기에 쓰여진 책으로, 구당서보다 정확한 기록이라 보기 힘듭니다.

신당서의 기록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대조영이 진짜 속말말갈인지 아닌지 신당서의 기록만 보고는 뭘 근거로 한 기록인지 알수가 없다는게 제 생각이고요,

설사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라 쳐도, 위에 제가 든 예처럼 조선출신 한나라장수가 한사군의 조선유민을 이끌고 한나라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한나라 멸망후, 후한을 건국한 꼴이니 말갈족의 입장에서는 별로 자랑스러운게 되질 못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당시의 인구는 호당 5인으로 봤을때 350만입니다.

수,당과의 전쟁으로 죽거나 끌려간 인구 수십만에, 신라에는 그보다 적은 인구가 유입된 걸로 보여지고요, 돌궐은 유목민족국가입니다.

유목민족국가는 경제활동에 제약이 많아 생산력에 한계가 있을때마다 정주문명을 약탈해가는 그렇게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들도 징기스칸 활동시기 몽골족 인구를 100만정도로 보고 있는 걸로 압니다.

수십만에 이르는 고구려난민을 수용할 능력이 없는 국가입니다.

신라로 유입된 인구보다 훨씬 적은 수가 돌궐로 투항했겠죠.

고구려의 멸망을 극적으로 표현한 사서의 한 문구로 고구려 인구가 전멸해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입니다.

마지막으로 요동태수님의 말씀대로 저는 고구려,발해역사가 말갈족역사의 본류니 지류니 따질 주제가 못됩니다만, 상식적으로 본 것일 뿐입니다.

부여, 삼한, 옥저, 동예등 한사군 시절에도 엄연히 독립된 우리선조의 국가가 있었는데, 구태여 한사군을 우리민족역사의 본류로 볼 가치 없어 보입니다.

말갈족의 입장에서도 애초부터 독립을 유지해오다, 금을 건국한 생여진을 그들 역사의 본류로 보고싶어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딴지맨 (2006-10-13 21:46:34)
물론 만주족이 아직도 독립국을 유지했다면,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고구려, 발해역사를 그들만의 역사로 주장했을 가능성은 농후하겠죠.
딴지맨 (2006-10-13 23:22:35)
여담입니다만, 검색해보니 대씨 성과 관련해 예전에 이곳 게시판에 논란이 많았었군요.

저는 화랑세기가 진서인지 위서인지 전혀 모를 뿐더러, 그런 논쟁에 끼어들 실력도 없지만, 화랑세기에 의할 경우 신라에서도 대씨가 등장합니다.

대씨,태씨=한씨=고씨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전 모르겠습니다만, 성씨연구도 참고해 볼만하다고 생각되는군요.

대조영이 진짜 말갈족이었느냐, 순수고구려인이었느냐?

저는 모르겠습니다.
요동태수 (2006-10-14 01:37:25)
딴지맨//그럼 무얼보고 역사적 사실을 판단한답니까?그렇다고 신당서가 정사가 아닌 야사라도 됩니까?
중국 정사 25사중 하나인 당서에 기록된 이말을 무시할만한 근거라도 있습니까? 그렇지않고는 자기편의대로 기록을 무시하면서 사료해석을 할수는 없지요.
기록을 부정하려면 근거라도 대던가..그런데 그것만 보고는 믿을게 못된다니...... 게다가 화랑세기는 진위도 의심스럽다는 마당에 거기서 나오는 신라인중에 대씨가 있다는 기록하나로 아래의 글을 부정할수는 없습니다.

(1) <신당서> 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써져 있는 그대로 입니다. 이것을 부정할만 더 신빙성있는 근거라도 대지 않는다면 무시한다는 것은 우스운일입니다.

또 그들이 말갈계 고구려인일지라도 그들이 속한 부족자체가 친고구려계라서 강제이주 당한처지면 무엇이 거리낄게 있습니까? 민족반역자라도 됩니까? 쓸데없는 비약이 아닙니까? 그들은 말갈족으로서 공백상태인 문명국을 계승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말갈족을 지배했습니다.
이것이 위의 한사군논리와 같다고 보십니까? 이것은 러시아가 동로마멸망후 로마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한것과 같은 것이지요.
한나라가 망한후에 변두리외곽의 한반도에서는 후한같은 것을 건설해바야 소중화겠지만 말입니다.그런예는 명멸망후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서 찾으십시오.

그리고 원고구려인은 대부분 한반도북부와 요동에 거주하는데 특히 수도가 있고 농업생산력이 가장우월한 한반도북부가 제일 많았겠지요?
그런데 말갈족의 추장들이 엑소더스하면서 목숨걸고 싸우면서 건국할때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지요? 그당시 발해가 건국한것은 거란과 돌궐이 반란을 일으키고 설치면서 일종의 완충지대가 형성된 탓이 큽니다. 그래서 간섭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기에 발해가 버텨내고 성장한것입니다.

그런데 그난리통에 부흥운동하겠다고 일어나는 원고구려유민이 있었습니까? 하다못해 역사에 이름을 들어낼만큼 어느정도 세력을 가지고 건국에 가담한 고구려유민집단의 대표자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이 그렇다고 당에 충성심이라도 있어서 그럴리는 없을테지 말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을 한이 멸망시킨다음에 한일이 한4군설치이듯 당연히 현지지배체제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대로 한반도북부에 있어서 적게 잡아도 100만정도 있었다면 그들을 통제할 행정구역이라도 구비되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발해건국당시에 그런것이 한반도북부에 있었습니까? 그렇다고 통제에서 해제되어 들고 일어난 다수의 고구려유민이라도 있었습니까? 100만이 아니라 수십만 정도만 되어도 나라하나 그냥 세웁니다. 그런데 무슨 그럴듯한 활동같은 것도 없었지요.

이미 그들은 고구려부흥운동을 기점으로 갈갈이 찢어져서 흩어졌다고 봐야됩니다. 고구려유민들의 저항을 못이겨서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옳기는데 당연히 고구려부흥군이 일어났습니다.그리고 신라의 원조를 받으면서 저항하던 그들은 당에 의해 궤멸되었습니다.그런 그들은 당연히 당에 잡히면 당으로 그렇지 않으면 신라로 가야지요. 보덕국이 그래서 있는 것이고요.

당연히 그후에 이렇다할 현지지배체제가 한반도북부에 구축되지않은 이상 그들은 더이상 그땅에 남아있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게 없으면 독립하라는 소리가 따로없지요. 그렇다고 독립하기 더 좋도록 고구려의 동북부에 살게라도 하겠습니까? 당연히 당의 영역으로 강제이주시키지요.

설사 그곳에 유민들이 있더라도 비옥한 한반도북부를 버리고 말갈족을 따라 만주동북부 구석으로 갈리는 없습니다. 수도는 방어하기 힘든 평양에 둘수는 없더라도 그곳에 그대로 살면서 한반도북부에 기반이 있었다면 나라를 건국하더라도 그곳에 건국했을테지요.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 타국으로 유입된것이 맞습니다.그리고 돌궐은 말그대로 수용능력이 떨어질테니 말할것이 없으나 당과 신라는 얼마든지 유입된 고구려유민을 자기영역에 두고 흡수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갈족은 여진족의 후손이 아닌 조상인데 그들이 무엇을 판단하겠습니까?
그것은 얼토당토 않는 말씀이지요.
딴지맨 (2006-10-14 01:43:04)
요동태수/

신당서는 발해가 남긴 발해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송대 지어진 당나라 역사책입니다.

조선의 역사를 볼때 조선왕조실록을 먼저 보지, 명사나 청사는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삼국사기를 먼저 봐야지,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고 2-3세기 신라,백제는 없었다고 단정지어 얘기할수가 없죠.

불행히도 발해가 자기역사를 남기지 못해, 참고사항인 중국의 사서를 볼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참고사항을 그대로 믿어버리는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하고 끝난게 아니라, 고구려지역 곳곳에서 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급기야 676년 안동도호부가 요동성으로 물러나게 되고, 이후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영주(오늘날 조양일대)까지 후퇴, 유명무실해집니다.

676년을 기해서 한반도북부지역 대부분이 고구려유민 손에 넘겨진 겁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고구려인들이 당이나 신라에 왜 유입이 됩니까?

고구려유민의 동요를 막기위해, 당이 보장왕을 요동으로 보냈으나, 오히려 고구려인들을 책동하고 말갈과 연합하여 고구려부흥을 꽤해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안동도호부가 요서지역으로 후퇴한 시점엔 요동지역까지 고구려인 손에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데요?

여기저기서 파상적으로 부흥운동이 있었고, 최소 한반도북부와 요동일대를 되찼았으나, 평양일대 지배계층 대부분이 당으로 끌려가 중앙정부없이 지내오다, 요서지역으로 후퇴한 안동도호부가 거란족의 침입에 함락되어, 대조영이 무리를 이끌고 탈출하여 오자 발해건국에 적극참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고구려부흥운동이 있었고, 안동도호부가 요서지역가지 밀려났다면, 안동도호부를 밀어낸 주체는 고구려유민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이래도 고구려유민은 당,신라에 흡수되어 존재치 않았다고 말씀하실렵니까?

그리고 요동태수님이 고구려,발해가 말갈족의 역사라길래, 저도 말갈족을 앞뒤 순서를 고려치 않고 사용했습니다.

만주지역의 민족계승에 대해선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동태수 (2006-10-14 02:17:33)
딴지맨//
중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가 없다면 고조선을 알겠습니까?
삼국사기에는 발해를 기록했습니까?
그럼 무엇으로 역사를 파악하시겠습니까? 그대로 믿지 않는 대신 무엇으로 그것을 대신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대신기록한 사서도 없고 그동안 방치했던 발해역사를 무슨기준으로 판단하겠습니까?
남은 것은 우리의 뇌밖에 없습니다.

또 딴지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고구려부흥운동이 있었고, 안동도호부가 요서지역가지 밀려났다면, 안동도호부를 밀어낸 주체는 고구려유민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

이것은 그후에 곧 당의 의해 궤멸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그리고 그후에 한반도북부일대에 살던 고구려인을 지배할 현지지배체제는 구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발해가 말갈족의 역사인것은 그들자신의 손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건국했으니 그렇지요 고구려를 이은 명분이 당시에 그들말고 누가 있습니까? 신라마저도 아닐겁니다만...그리고 같은 말갈족이었던 여진족은 발해,고구려를 부정하고 이탈한 존재들이지요.
요동태수 (2006-10-14 02:22:59)
위 덧글에 적었던 "동로마,러시아제국이 러시아의 역사라는 말이 고구려.발해의 역사가 말갈족의 역사라는 말과 같다"는 말은 그들이 고구려와 발해에 비하면 관계성면에서 미미하기에 삭제했습니다.
딴지맨 (2006-10-14 10:42:31)
요동태수/

1. 발해가 고구려를 가장 강하게 계승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2. 왜 논쟁이 길어졌는지 논쟁의 요점들을 검토해주십시요.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인지 아닌지는 단정지어 얘기할 수 없는 겁니다.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려면, 화랑세기가 위서여서 신라에는 대씨가 없었음 증명하여 대씨가 한민족 고유의 성씨가 아님을 보여줘야하고, 대씨,태씨,고씨,한씨가 같은 성씨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라는 주장도 논파를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참고사항에 하나인 신당서의 문구하나 붙잡고 이게 진실이다 고집할게 아닙니다.

그리고 요동태수님이 고구려유민이 당,신라,돌궐에 흡수되어 남아있지 않았기에, 발해는 속말말갈족 국가였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여 저는 안동도호부를 후퇴시킨 장본인이 고구려유민이라 말씀드렸고, 요서로 후퇴한 후 안동도호부의 지배력은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에 의해 고구려유민의 저항이 궤멸되었다고요?

첨들어보는 얘깁니다.

당이 물러난 이상 고구려유민의 저항이 궤멸된게 아니라 더이상 저항할게 없었겠죠.

안동도호부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는데 고구려유민의 저항이 궤멸되었다?

논리적으로도 모순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유민이 증발되어 버렸다는 의견은 접으신 겁니까?

3. 발해라는 나라를 기록한 유일무이한 사서가 신당서입니까?

우리가 발해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아는건 우리사서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서 여기저기서도 확인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렇습니다.

고조선도 마찬가지고요.

마치 신당서만이 발해사를 기록한 유일무이한 절대사서라는 식으로 말하는게 이해가 안가는군요?

4. 이건 의심스러워서 묻습니다.

요동태수님이,

//그리고 같은 말갈족이었던 여진족은 발해,고구려를 부정하고 이탈한 존재들이지요. //

라고 했는데,,,

말갈족에서 이탈한 민족이 여진족이라고요?

경천동지할 내용입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하고, 거란에 속한 말갈을 숙여진, 속하지 않은 말갈을 생여진으로 부르기 시작하며 여진이 말갈을 대체한 걸로 아는데,,,

여진족은 말갈족의 한 부족이었습니까?

신당서의 문구하나로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으로 단정짓질 않나, 고구려의 멸망을 극적으로 표현한 부분을 가지고 고구려유민은 증발했다 하질 않나,

전 요동태수님의 역사지식이 의심스럽습니다.
요동태수 (2006-10-14 15:46:11)
딴지맨//
반론을 하셔도 아예 본문은 쌩까시고 덧글을 다시니 짜증마저 나는군요. 뭐 역사지식이 의심스럽다고요?

1.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인지 아닌지는 단정지어 얘기할 수 없는 겁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디 고려의 별종이다.)

<신당서> 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도대체 뭘 더바라십니까? 이걸 부정하고 싶으면 다른 근거라도 들고오셔야 납득이 되던말던 할것 아닙니까?

2.안동도호부는 요서에 있는데 고구려인이 평양에 그대로 살면 이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고구려부흥군이 궤멸되었으니 당나라는 이근행을 보내서 신라마저 먹으려고 20만대군으로 쳐들어오는 것은 아닙니까?

3.기록을 부정할려면 근거를 대시라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4.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토착말갈인들은 여진족으로 불리며 발해를 섬긴것과 같이 거란의 요를 섬겼으며 후에 스스로 금을 건국하는데 이 금나라는 거란의 요와 같은 정복왕조이며 그들의 후신인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역사서 <만주원류고>에서는 발해이전에 이미 범 퉁구스적으로 팽창했던 고구려를 숙신-말갈-여진퉁구스의 만주역사에 대한 주도권을 주장하기위해 배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건국이후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으며 이과정에서 유입한 고구려유민들을 같은 고구려를 정체성으로 하는 발해인으로서 동화시킨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말갈인이었지만 또한 고구려인이었으며 그들이 가진 정치적,문화적인 실천성은 상당하였습니다. 이에반해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하는 토착말갈인들은 종족적인 정체성을 중시하였으며 발해가 멸망한후에는 이들은 더이상 고구려에 대한 관계성을 가지기는 힘들었다고 봅니다.

결국 고구려는 정치적,문화적계승자인 속말말갈 중심의 발해에 의한
말갈족의 역사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갈족이었지만 고구려와의 관계성을 상실하고 중국의
정복왕조를 건설한 여진족의 역사인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읽지도 않은 군요..... 정말
딴지맨 (2006-10-14 17:42:12)
1. 저는 분명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구당서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 하였음은 고구려와 다르다는 말이 아닙니다.

같은 구당서에서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지만, 고구려와 부여가 다르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씨 성이 우리민족 고유의 성으로 대씨,태씨=한씨=고씨라는 설도 있고, 화랑세기에 의하면 신라에도 대씨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요동태수님이 신당서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증명작업을 해야하는거 아닙니까?

왜 대조영이 대씨 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대씨,태씨=한씨=고씨라는 설이 왜 틀렸는지, 신라에도 대씨가 있었다고 증언하는 화랑세기가 왜 위서인지등등,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라고 주장을 할려면, 최소한의 기본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 어느것도 이뤄진거 없이, '신당서 봐라,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란다, 그럼 된거 아니냐'란 식으로만 응수하고 있습니다.

이런식이면 논쟁은 이뤄질수가 없어요.

2. 그리고 안동도호부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건지도 의심스럽군요.

이근행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치러온건 아직 안동도호부가 요서로 후퇴하기 전인 675년입니다.

이근행이 이 전쟁에서 패하여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성으로 옮기게 되는 거고요,

나당전쟁도 끝이 나게 되는 겁니다.

그 후에도 고구려유민의 저항이 계속되어 요서까지 후퇴하고요,

근데 이근행의 20만대군이 고구려유민의 저항을 분쇄시켰다고요.

정말 역사책 읽어보고 하는 말입니까?

3. 위에서 제가 한말 못알아 들으셨습니까?

신당서는 당나라 역사책으로 발해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우리역사인 삼국사기는 보지도 않고, 삼국지만 읽고서는 2-3세기 신라는 없었다고 얘기하는거랑, 신당서의 기록만 보고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라 주장하는거랑 뭐가 다른지요?

대조영인 진짜 속말말갈인인지 아닌지는 알수가 없는 겁니다.

왜 말기를 못알아 들으시는지,,,

4. 착오가 있었던거 같습니다.

분명 젤 위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나,

//그리고 같은 말갈족이었던 여진족은 발해,고구려를 부정하고 이탈한 존재들이지요. //

라는 말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합니다.
요동태수 (2006-10-14 18:58:10)
딴지맨//

먼저 사료라는 것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사료자체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부정은 일단 근거가 필요로 합니다.

근거로서

1. 사료에 대한 신빙성문제입니다. 사료자체가 당시사실을 그대로 기록했다고
믿기힘든 출처나 저작환경이라면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기는 힘들지요.

2. 기록된 사실에 대한 현실성문제입니다. 사서에 기록된 사실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면
기록된대로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기 힘들수밖에 없습니다.

3. 사료의 기록된 사실에 대한 엇갈림입니다. 예를 들면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 왕이 마한 예맥과 더불어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고 이를 깨뜨렸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했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더불어 군사를 행함은 멸망하고 다시 흥한 것인가?)

이렇게 되면 백제 온조왕때의 마한멸망이나 후대의 군사적주체로서 마한존재는 기록만으로는 불가해한일입니다.

4.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서가 다수인데 그것이 서로 엇갈리는 것입니다.
이럴경우에는 사료가치를 구분하여 우열을 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딴지맨님이 지금껏 제기하신것중에 위에 해당하는 바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안동도호부는 제가 언급한바가 잘못이 맞습니다.고구려의 저항으로 물러난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라에 의한 패배가 결정적이었군요.

그런데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옛땅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였고, 다시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 도독부를 두었습니다.

이게 이대로 되었던가요? 지도상에 깃발을 꼽아둔것을 군대를 보내서 실행하려다가 고구려부흥군까진 궤멸시킨것으로 보입니만 是平壤痍殘不能軍, 相率奔新羅

이 안동도호부라는 것은 계림도독부,웅진도독부와 같이 요동,요서로 후퇴하기전까지는 서류상의 계획이었습니다. 저는 고구려부흥군이 요동,평양지방에서 저항군을 일으킨것으로 보아 요서로 후퇴했다고 본것이었지요.그런데 이게 서류상으로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평양에서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는말은 실제로 그곳에서 기능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도상에 깃발을 꼽고 서류상에 설치한다음에 군대가 실행하러 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고구려부흥군당시에 당군이 요동에 대한 통제권도 마땅치 않았거늘 평양에 안동도호부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다고 보십니까?

상대방의 실수를 지적하시는 것은 좋습니만 딴지맨님은 남을 비웃기에는 객관적인 판단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딴지맨님은 사료에 대한 접근자체가 불량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측에 정사가 있답니까? 삼국사기에 <발해기>라도 있던가요?
<당서>같은 경우는 후대의 왕조인 송나라가 편찬하는 전형적인 정사이며 그것도 중국이 인정하는 정사 25사입니다. 당의 역사를 기록하며 동시대의 타국들에 대한 기록을 언급하는 정식역사서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서가 우리나라에 있던가요? 차라리 발해가 전한 국서를 적은 <속일본기>가 가치가 있을겁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삼국사기>와 같은 정사가 발해역사를 기술되지 않은 이상 그것을 부정할 기준은 뇌밖에 없습니다.
딴지맨 (2006-10-14 19:02:39)
구당서

1. 高麗者 出者夫餘地別種也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온 별종.

2. 百濟國 本亦夫餘之別種
백제는 본래 부여의 별종.

3. 鐵勒 本匈奴別種
철륵은 본래 흉노의 별종.

4. 奚國 蓋匈奴之別種
해국은 보통 흉노의 별종.

5. 蓋匈奴之別種也
습은 보통 흉노의 별종.

신당서

1. 高麗 本夫餘別種也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

2. 百濟 夫餘別種也
백제는 부여의 별종.
딴지맨 (2006-10-14 19:03:26)
위에서 사용된 別種의 뜻이, 다른 종족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딴지맨 (2006-10-14 19:08:39)
신라에 의해 이근행이 패퇴되었다면, 당연히 신라가 한반도북부를 장악했어야죠.

근데 못했거든요.
요동태수 (2006-10-14 19:08:50)
딴지맨//

별종이 어쨋다고요
그 별종이라는 말을 쓰는 사서에서 본래 속말말갈이라는데.......

추론따위로 기록한 사실을 자기 멋대로 유리한대로 붙이는태도로 무슨 사료해석을 한답니까?
딴지맨 (2006-10-14 19:45:35)
그럼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위에서 신당서의 기록과 상충되는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 대씨, 그리고 대씨가 한씨,고씨등과 뿌리가 같다는 의견까지 소개했습니다.

전 어느 것이 맞는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시지요.
요동태수 (2006-10-14 19:53:01)
화랑세기는 필사자의 뇌에서 나왔는지 실제 김대문이 지었는지 판명이 안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사는 더더욱 아니지요.....
화랑세기에 나오는 내용이 발견되는 금석문이나 사서라도 있던가요?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는 증거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사료라는 것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사료자체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부정은 일단 근거가 필요로 합니다.

근거로서

1. 사료에 대한 신빙성문제입니다. 사료자체가 당시사실을 그대로 기록했다고
믿기힘든 출처나 저작환경이라면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기는 힘들지요.

2. 기록된 사실에 대한 현실성문제입니다. 사서에 기록된 사실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면
기록된대로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기 힘들수밖에 없습니다.

3. 사료의 기록된 사실에 대한 엇갈림입니다. 예를 들면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 왕이 마한 예맥과 더불어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고 이를 깨뜨렸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했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더불어 군사를 행함은 멸망하고 다시 흥한 것인가?)

이렇게 되면 백제 온조왕때의 마한멸망이나 후대의 군사적주체로서 마한존재는 기록만으로는 불가해한일입니다.

4.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서가 다수인데 그것이 서로 엇갈리는 것입니다.
이럴경우에는 사료가치를 구분하여 우열을 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화랑세기>와 <당서>는 어디에 해당될까요?
딴지맨 (2006-10-14 20:01:29)
음 그럼 성씨연구결과에 대한 비판도 부탁드립니다.
요동태수 (2006-10-14 20:03:27)
<당서>는 딴지맨님식의 "중국측사서"라는 기준외에는 해당하는바가 없으며

<화랑세기>의 기록이라는 것은 근거를 부정할이유는 1번항의 신빙성문제가 있으며 4번항의 사료우열또한 <당서>같은 정사와는 비교할 가치가 못되는 수준으로 사료됩니다.

게다가 화랑세기의 성씨 어쩌고는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이런 명확한 기록을 부정할 구체적인 표현도 없지요.
요동태수 (2006-10-14 20:05:23)
저는 <화랑세기>는 진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용자체에 신빙성을 두지 않으며 정사와 비교하여
판독할 생각또한 전혀 없습니다.
딴지맨 (2006-10-14 20:11:56)
화랑세기 찬반논쟁에서 흔히 보아왔던 수박겉핥기식 비판입니다.

내용에 대한 분석적 비판이 없다면 별로 설득력있게 보이지 않습니다.
딴지맨 (2006-10-14 20:18:20)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신당서는 발해사를 기록한 많은 사서중 하나입니다.

다른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 실려있다면, 3가지 입장을 가질수 있게 됩니다.

첫째는 그 내용을 신뢰해버리는 경우

둘째는 그 내용을 무시해버리는 경우

셋째는 보류해버리는 경우.

저는 첨부터 말씀드렸지만, 확인하기 힘든 내용일 경우, 어느정도 수준이상 확인이 되기전까지는 보류를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요동태수 (2006-10-14 20:24:47)
딴지맨//

확인하기 힘들다니요.....

<구당서> 발해말갈전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디 고려의 별종이다.)

신당서> 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려에 붙었던 자로 성이 대씨이다)

정사에서 명확히 말하며 신당서는 구당서의 내용을 보충하고 보완할 따름인데 중립적인 단어하나로 멋대로 추론하고 야사축에도 못드는 사서를 들이대면서 무슨 "확인하기 힘든 내용"입니까?
딴지맨 (2006-10-14 20:36:12)
구당서의 내용은 대조영이 말갈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라는 신당서의 기사가 사실일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2-3세기 한반도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아직도 삼한시대입니다.

삼국지도 정사입니다.

그렇다고 삼국지가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당서가 사실을 기술한 것인지 아닌지 판별이 안됩니다.

그럼 인용에 조심해야겠죠.

중국인이 아닌 담에야.
요동태수 (2006-10-14 20:41:55)
삼한시대니 삼국시대니 후대의 명칭이거늘 무슨소리를 하시는지.....

<구당서>와 <신당서>에 엇갈림이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근거로서
"별종"이라는 단어라든가 <화랑세기>는 합당한바가 아닙니다.
딴지맨 (2006-10-14 21:04:33)
마한,진한,변한이 여러 소국을 거느리며 한반도 남부를 다스리던 시대를 삼한시대라고 편하게 부르지, 마한,진한,변한이 여러 소국을 거느리며 한반도 남부를 다스리던 시대라고 불편하게 부르지 않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던 시대라 부르지 않고, 그냥 편하게 삼국시대라 부릅니다.

고조선시대라는 명칭 있습니다만, 요동태수님의 의견에 따르면 뭐로 불러야 하는지요?

단군이 열었다, 기자가 먹고 나서, 위만이 찬탈한 조선시대라고 부르시는지,,,
요동태수 (2006-10-14 21:32:23)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뭐가 적혀있길래 불만이신이지요?

중국인들 생각이야 자기말고는 오랑캐니 지편한데로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거 가지고 일일이 뻘뻘거릴 필요가 있습니까?
그나마 적어줘서 사료라도 제공해준게 어디입니까?
딴지맨 (2006-10-14 21:38:59)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뭐가 적혀있길래 불만이신이지요?//

삼국지 위지동이전 읽어보세요. 내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니 자꾸 핀트가 엇나가지,,,

//중국인들 생각이야 자기말고는 오랑캐니 지편한데로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거 가지고 일일이 뻘뻘거릴 필요가 있습니까?
그나마 적어줘서 사료라도 제공해준게 어디입니까?//

그렇군요. 우리역사를 어떤식으로 기술했던지, 고마워해야할 일이군요.

새일본역사교과서 만세! 동북공정만세!
djflqjfl (2006-10-14 22:20:39)
나라이름 발해 와 발해만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도사 (2006-10-18 07:46:34)
말갈은 우리역사에서 인정하지않고있는 우리자신들입니다. 지배층위주로만 역사를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왜"가 우리자신인것과 마찬가지지요. 피지배층이라고 해서 현세에 살아남지말라는 법이있나요. 아마 피지배층의 사람들이 지금세상에 더많이살아 남아있을겁니다. 현세의 주인은 살아남아 유전자를 다음세대에 전할수있는 집단이지 꼭 과거의 지배층 집단이 아닙니다. 되려 과거의 지배층 집단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가는성 이 많지요. 그럼 우리가 얘기하는 원고구려, 백제 인 등 은 그시대에 살았던 그지역에 살았던 모든사람 들이여만하지요.

그리고 문헌과 유물/유적은 상생의관계지 하나만봐서는 불완전합니다. 특히 중국병에 걸려있는 사람들의 중국사서 보기는 유물만보는것만 못할수도 있어요. 그리고 유골은 미래에 지금부족한 것을 메워줄수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단지 "고"유골에대해 자세한 연구가 되지않아서 문제지 연구가 진행대고 많은 결과가 나오면 아마 역사의 많은 부분의 해결사로 자라잡을겁니다 만 많은 과학적 생물학/화학 적 유전학적 지질학적 장비와 기술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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