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의 평양천도 내분의 시작인가?
번호 : 4361 글쓴이 : 추모왕
조회 : 145 스크랩 : 0 날짜 : 2006.11.08 08:43
장수왕은 국내성 귀족들의 강력한 힘을 제압하기 위해서 평양성에 있는 안학궁으로
천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뒤로 고구려는 평양계귀족과 국내계귀족들간에 투쟁이
계속 전개됩니다. 문자명왕까지 강력함을 유지하던 왕권이 무너지면서 왕실에서 귀
족의 싸움을 중재하던 지위를 안장왕, 안원왕을 거치면서 귀족들은 자신끼리 패를
나눠서(녹군, 세군) 싸우기도, 또는 왕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혼란으로
고구려는 북서쪽으로는 돌궐의 침입과 남쪽으로 백,신연합군의 공격으로 내우외환이
겹치게 되죠.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고구려귀족들의 합의로 인하여 한강은 신라에게
양보를 하며, 백제를 제압하고, 백신이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안정화시키고, 돌궐에
침입에 대해서는 신성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막아냅니다. 그뒤로 평원왕, 영양왕,영류
왕을 걸치면서 고구려왕들은 강력한 리더쉽을 기반으로 국가를 훌륭하게 경영하면서
다시한번 제2의 강력한왕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고구려왕실은 다시한번 시련을 당하게 되죠. 그런데 영류왕시해과정에선
연개소문을 주측으로 하는 평양계귀족(주전파)과 기존 국내성을 기반으로 하는 주화
파간의 알력싸움이 있었고, 거기에 영류왕이 주화파에 손을 들어주자 주전파가 쿠데타
를 감행, 주화파와 왕실을 제압하게 됩니다. 또한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많은
알력이 있었던 같고요. 연개소문 사후에도 평양귀족과 국내귀족은 이젠 자신들의 근거
지를 중심으로 내전까지 일으키게 되죠. 결국 이것을 보면 장수왕의 천도가 고구려내분
의 밀미가 된것 같은데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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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수 제생각의로는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적극적의로 추진하려고 수도를 옭긴것같습니다 고구려의 수도는 대체로 보면 졸본(동가강 유역)-국내성 (통구부근)-평양성(대동강 유역) 인데요 제가말하고십은건 장수왕은 왕권강화를 하기위해 수도를 옭긴것같습니다 06.11.22 23:34
장수왕의 평양천도
번호 : 4387 글쓴이 : 산중호걸
조회 : 186 스크랩 : 2 날짜 : 2006.11.25 08:14
1) 교육과정에 제시된 읽기 영역
9학년 3.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여러 글을 읽고, 주제나 관점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파악한다.
사건 : 장수왕 15년(427년) 고구려는 국내성지역에서 평양지역으로 도읍을 옮겼다.
(1) 김용만 - 고구려의 발견
ㄱ. 천도의 원인 : 평양지역은 국내성지역에 비해 생산성이 높고 교역에도 유리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고구려의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ㄴ. 천도의 결과 : 고구려는 정치. 사회적 안정을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문명을 창출해 냈다. 고구려는 당시 최고 문명국의 위상을 누리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실질적 리더가 되었다.
(2) 이덕일 -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ㄱ. 천도의 원인 : 국내성을 중심으로한 구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천도하였다.
ㄴ. 천도의 결과 : 고구려의 평양천도를 한반도 통일의지로 해석한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남방지역의 불안정은 고구려가 더이상 북방확대정책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고구려는 북수남진주의(북쪽은 현상유지 남쪽은 정벌한다.)로 선회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역사적 주무대는 만두에서 한반도로 바뀌게 되었다.
(3) 개인적인 생각
장수왕은 왕권강화와 고구려 문명의 발전을 위해 생산성이 높은 평양지역으로의 천도를 결심했다. 그러나 이를 고구려의 한반도 통일의지로 해석한 신라가 친고구려정책을 버림으로써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제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나제동맹의 결성은 고구려로 하여금 전통적인 북진정책을 버리고 북수남진주의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고구려의 남진주의 정책은 큰 성과가 없었다. 고구려는 북쪽의 잠재적 적국들(북위, 유연, 돌궐) 때문에 남쪽에 과도한 힘을 기울일 수 없었다. 또한 남방의 문제들 때문에 북방세력들에 대해 적절한 힘의 투사를 하지 못했다. 이러한 어정쩡한 상태속에서 6세기 말 중국대륙은 통일되었고 백제와 신라는 한강유역을 장악했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리더 위치를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북진남수주의를 택해야 옳았다. 북방의 적극적인 확대를 통해 제국적 질서에 충실했어야 했다. 장수왕은 만주로 천도하여 북방세력들을 견제하고 남부전선은 현상유지에 머무르게 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그의 실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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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호걸 예전부터 평양천도에 관해 김용만선생님과 이덕일선생님의 의견이 달라서 언젠가 한번은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국어교육론을 공부하다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여러 글을 읽고, 주제나 관점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파악한다." 부분에 대한 연습을 겸해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이덕일선생님의 의견이 더 공감을 주었고 그 이유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06.11.25 08:17
麗輝 이건 윤명철 선생님의 견해도 한번쯤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이에 대한 학계의 전반적인 견해에 대해서 같이 공부해 두시면 아주 좋지 않을까요?? 06.11.25 18:14
아이디 다 좋은데, 북방진출을 하면 무슨 이득이 있나요? 당시 고구려가요. 06.11.25 21:01
돌부처 오히려 장수왕은 북방진출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나요? 06.11.25 21:53
산중호걸 麗輝 님의 충고 감사합니다. 한번 정리해 봐야 겠네요 06.11.25 23:09
산중호걸 고구려의 안보상의 적이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은 남쪽이 아닌 북쪽에 있다 생각합니다. 중국의 제국들과 유목제국들의 국력은 백제, 신라, 가야와 비할바가 못되죠 고구려는 이들과 대등한 힘을 확보하여 자국의 안보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북방진출을 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06.11.25 23:11
산중호걸 장수왕이 북방진출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기 보다는 북방진출에 제약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06.11.25 23:11
아이디 서쪽의 북위는 모르겠지만 북쪽에 고구려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서북쪽의 유연이 고구려를 넘볼 여력도 없어보이고. 또 북방진출에 제약을 받았다면 남방진출이 잘못되었다고 할 순 없지않나요. 게다가 북방견제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무리하게 남방진출을 했을것 같진 않은데요. 그렇지 않나요? 06.11.25 23:24
아이디 제 말은 남방진출(혹은 평양천도)을 굳이 실책이라고 볼 구석은 없어보인다는 겁니다. 06.11.25 23:26
아이디 오히려 북방안보를 강화한답시고 그냥 웅크리고 있는 것보단 낳을 것 같은데요. 06.11.25 23:27
아이디 북방에 있다는 안보상의 적은 다 외교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북방진출 해바야 별 이득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굳이 북방진출에 노력을 해야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06.11.25 23:30
안양사랑 잠깐 끼어들어 질문 하나! ^^. 평양천도가 나제동맹의 원인이라면, 만약 평양천도가 없었다면 나제동맹도 없었을까요? 즉, 평양천도가 없었어라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백제정벌(그리고 장수왕의 신라공격)만으로도 나제동맹이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06.11.26 23:19
간도수복 북방 진출이니 남수북진책이니 말씀하시는데, 서방 진출, 서수남진책, 남수서진책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구려는 중국을 서토라고 불렀으며 대개의 유목 민족들도 고구려의 서쪽에 많이 있었습니다. 북진이라는 용어는 한반도 중심의 용어인데 고구려는 한반도에 국한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그다지 진출할만한 곳도 없었지요. 06.11.26 23:28
강감찬 이야.. 멋지다.. 난 끼어들 틈도 없네. 06.11.27 02:24
고구려의 평양천도의 반응및결과... 시대적인 흐름...
번호 : 4397 글쓴이 : 율리우스카이사르
조회 : 119 스크랩 : 0 날짜 : 2006.11.29 20:25
평양천도에 관해서 많은 의견들을 가지고 계시더군요.저도 댓글을 달려고 했으나
댓글로는 제 생각을 제대로 알릴수 없다고 생각되서 이렇게 글을을 올립니다.
고구려의 평양성 천도... 여기에 나타난 결과들은 시대적 흐름이 아니었을까 하는것입니다...
이미 평양은 오래전부터 고구려에 중요시되던 곳으로 장수왕대의 천도를 굳이 이상하게 볼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광개토 대왕도 백제와 신라,가야,왜를 견제하기 위해서 생전에 평양에서 엄청 많이 머물렀던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동천왕대에 평양천도했다는 말도 있구요. 그만큼 중요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고구려가 천도 했다고 해서 백제와 신라가 굳이 놀라고 같이 손잡을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백제와 신라가 놀라서 같이 동맹까지 해버렸던것일까요? 그건 시대적인 흐름입니다. 백제는 이전 대인 광개토대왕때 수많은 땅을 빼앗김니다. 여기서 더이상 고구려에게 땅을 빼앗긴다면은 이제 백제는 수도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까지 몰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해버렸습니다. 평양과 한성은 지척(국내성과 비교했을시). 고구려는 평양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일테죠. 즉 백제는 수도안보가 비상이 걸린 상태입니다. 혼자의 국력으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수 없는 백제. 당연히 신라에게 손을 내밀죠. 또 백제는 더 이상 영토를 빼앗긴다면은 왕권이 약화될수도 있죠.(확장으로 강화한 영토는 영토감소로 약화 될수도 있는거기 때문에) 더 이상 영토를 빼앗겨서는 안되고 이상황을 반전 시켜볼만한 카드가 바로 신라와의 동맹과 북위와의 외교죠.
그리고 신라. 광개토대왕 때부터 장수왕초기까지 다스림을 받아 어언 20년을 넘거나 그정도가 됬을것입니다. 그동안 고구려로 부터 배운 선진기술. 문화등으로 힘을 축적한 신라. 그리고 내부에서 고구려로 부터 벗어나자는 중론(?), 그래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가졌을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혼자의 힘으로는 안된다는걸 깨닫는것 시간문제겠죠...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사이 백제의 손이 도착합니다. 둘의 이해관계가 일치되는데 지체할일이 과연 뭐가 있을까요?? 바로 동맹을 맺습니다 이름하여 나제동맹.
이 동맹은 한나라가 침략을 받았을시 다른 나라에서 원군을 보내주거나 옆을 친다겟죠? 이렇게 됨으로써 백제는 한성안보를 확보하게 됬고,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고구려는 나제동맹의 파헤법으로 첩자전을 동반한 백제수도공략을 선택하게되고 백제는 여기에 걸려 무너집니다. 그리고 백제는 힘을 쓸수 없어 몇년감 잠잠해지죠. 이때 신라를 공략해서 남방을 안정 시켜버립니다. 즉 고구려는 남방이 불안해진것이 아니라 더욱더 확고해졌다는 것이죠. 하지만 더이상 북방으로 많은 진출을 하지 않기에 많은 분들이 고구려의 평양천도로 인해 남방이 불안정해져 북방으로 진출 안했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평양천도후 잠시 일어난 국지적인 부분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게됬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고구려(뿐만아니라 원조선)의 세계관을 제대 생각지 못한 발생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마지막으로 한가지더. 초기나제동맹은 공격적이 아니라 방어적이었다는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신라를 치면 백제가 구원병을 보내거나 고구려의 남쪽을 공략한다. 백제가 공격받음 역시 신라도 마찬가지. 즉 방어적인 일이 목적이지 고구려를 연합해서 공격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지는 않다는겁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마음놓고 북으로 올라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거죠(한예로 문자명왕때 동부여의 잔여세력을 합병시킵니다. 물론 잔여세력이라서 그렇게 많은 힘을 쏟을 필요가 없겠지만요) 물론 고구려가 이 의도를 몰랐을수도 있습니다만 고구려는 이 의도를 알필요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 조금더 생각해보죠. 고구려는 이미 북방안보라인 및 필요 영토는 거의 점령해서 이제 더이상 북으로 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면요? 광개토대왕시절 중국으로 갈수 있었으나 고구려는 가지 않았습니다. 즉 중국영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는것이지요.<고구려국력의 부족을 이유로 들수도 있으나 거란, 여진(특히 여진은 명을 점령하기도 합니다.)은 고구려보다 국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중국으로 갑니다.> 이런 면을 볼때 고구려는 자신의 안보를 확보하고 중계무역을 통한 부의 획득. 그리고 다물의 완성을 이룬상태에서 더이상 북으로갈 필요성을 못느꼈고 평양성으로 천도가 그 결과로 나타난것이 아닐까 한것입니다.
즉 평양천도의 결과는 시대적흐름이 었다. 는 것입니다.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일들이 겹치고 겹쳐져 평양천도로 인해 폭발(?)되고 이 폭발을 잠재우는 과정에서 더 잠잠해져버리는...그런 일들이 일어난게 아닐까요?
이상 허접한 글이 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밑 완결성과 통일성에서 좀 미숙한것 같지만... 계속해서 고쳐나가서 나중에 좀더 완벽한 글로 찾아 뵜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읽고 이 글의 내용에 대해 생각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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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RD 짧은 소견입니다만 북으로 갈 필요성을 느꼈다지 못했다라고 보기보다는 이미 고구려 서북방에는 유연이라는 강대한 유목제국 서남방에는 북위라는 강대한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북방으로 영토 확장을 하려고 해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장수왕의 현실적인 외교로 굳이 유연이나 북위와의 싸움을 하지 않고도 강국으로써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요 06.11.29 23:29
추모왕 글쎄요. 장수왕대에 고구려는 지두우분할 을 하면서 북방개척에 힘을 쏟았습니다. 유연과 북위라는 강대국이 있긴 하였지만 고구려로서는 더이상 영토확장은 필요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런 zard님 말씀대로 주위에 강대국들이 있는것 작용하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전쟁을 안한것은 아니죠.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500만이상인 고구려인구가 살기에는 넓은 땅이었습니다. 요동만과 평양, 한성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는 동방의 대규모 무역로를 장악했으며, 한강유역, 대동강유역, 요하유역등 동방의 대규모 생산지대를 얻었으며, 지두우분할을 하면서 고구려는 좋은말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밖으로 나갈 필요가없죠. 06.11.30 1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