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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이란 무엇이고, 또 어디를 가리키는가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12.04|조회수347 목록 댓글 0

"요동"이란 무엇이고, 또 어디를 가리키는가 
 
번호 : 1086   글쓴이 : 아이디
 조회 : 75   스크랩 : 0   날짜 : 2006.11.18 18:40
 
또 다른 유자민의 글을 번역해 보았다. '변강사지연구중심'의 기관지에 실린 글이다. "요동"을 지명과 행정구역명으로 분리해서 본 시도는 좋다고 본다. 유자민의 "요동"은 지명일 때 그 끝이 한반도까지라 했다. 그렇지만 관념 속 "요동"이란 지명의 경계를 두부자르듯 나눌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 남는다 . 시작위치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끝위치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中國邊疆史地硏究』1996年 第1期 pp. 78-85
 

 

“요동”에 관한 고찰

關於“遼東”的考辨

 

 

유자민(劉子敏)

[延邊大學師範學院 歷史系]

 

 

요약: 이 글은 역사상 “요동”이란 개념에 관한 서로 다른 다중적인 관계를 고증했다. 전국시대 연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하기 이전에 역사문헌에서 써먹던 “遼東”이란 지리관념엔 일정한 지리적 범위가 있는데 “古遼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요동군은 연나라가 설치한 이래 진·한을 거쳐 약 700년 동안 설치되어 있었다. 지리개념인 “고요동”이든 행정구역인 “요동군”이든 상관없이, 사료분석에 의하면, 그 동부 경계선은 모두 한반도 청천강·대동강 북부 일대에서 혹은 대부분의 시간은 응당 이 지역일대에서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문헌 중에 나타난 “요동”이란 개념이 가리키는 바는 개괄에 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글 중에 강조하여 지적하는 바는, 기자와 연계하여 한반도가 역사 시작단계에 도달한 것 또한 우리나라 중원지역과 한반도는 일찌감치 정보가 서로 통하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연나라의 요동군 설치에 따라 “고요동”은 자연스레 정식으로 행정구역에 편입된 것이다. 이 글에선 또한 외국의 몇몇 저술에 보이는 “요동” 개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쓸어 내렸다.

주제어: 古遼東 遼東郡 古朝鮮

 

 

“요동”이란 이름은 고대문헌 중에 꽤 흔히 보이지만 이 이름의 유래 및 내력의 변천 상황에 대한 사학계의 이해는 결코 분명치 않고, 때문에 先秦, 동·서한 시기의 동북아시아 역사를 파헤칠 때 언제나 모호한 인식이 나타나는데 심지어 어떤 착오가 나타나기까지 한다. 필자는 누구나 관심을 갖는 일부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몇몇 문제에 대한 일부 필요한 고증과 분석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바, 부당한 곳이 있다면 지적해 비평해 주길 바란다.

 

 

1. 고요동(古遼東)

 

여기서 “고요동”이란 전국시대 연나라가 요동군과 요서군을 설치하기 이전의 요동을 가리키는데, 다시 말하자면 가장 이른 시기에 언급되던 “요동”을 말하는 것이다. 

 

“요동”이란 이름은《관자·지수편》에 처음 보인다. “제에는 거전의 염전이 있고, 연에는 요동의 (짠물을 달이어 만든) 소금이 있다[齊有渠展之鹽,燕有遼東之煮]”. 여기서 제는 춘추시대의 제나라를 가리키고, 연은 제나라 북쪽에 이웃한 연나라를 가리킨다. 방현령(房玄齡)은 주를 달아 “거전이란 제나라 땅의 제수(泲水, 濟北에 있다)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으로 (짠물을 달이어) 소금을 얻을 수 있는 곳이고, 때문에 거전의 염전이라고 말한다. [渠展, 齊地泲水(濟北)所流入海之處, 可煮之所也, 故曰渠展之鹽.]”고 했다. 이를 근거로 거전은 응당 오늘날 발해 남안의 래주만(萊州灣) 일대다. “요동”에 관해 어떤 학자는 “요하 및 대·소릉하가 요동만에 입수하는 일대로서 발해 북안에 자리하는데 지금까지도 요녕성의 중요한 염전은 개평(蓋平)과 호로도(葫蘆島)가 이루는 각도 사이에 밀집분포하고 있다 [1]”고 했다. 그러나 춘추시대 연나라의 강역은 지금의 요하 및 대릉하 유역까지 도달하지 못했었다. 제 환공(齊桓公)이 북쪽으로 산융과 고죽을 정벌하기 전, 지금의 난하 이북으로 대릉하 일대까지의 연해지역은 고죽, 도하(屠何), 그리고 맥인(貊人)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당시 연나라는 “북쪽에선 만맥(蠻貉)이 으르고 있었고, 안쪽으론 제나라, 진나라와 맞물려 있어, 힘센 나라의 틈바구니 험난한 곳에 있었다. 그러하니 가장 힘이 보잘 것 없었고, 자주 망할 뻔 했었다. [北迫蠻貉,內措齊、晉,崎嶇强國之間, 最爲弱小, 幾滅者數矣]”[2]. 제 환공(齊桓公)이 “북으로 산융을 정벌했고, 영지를 눌렀으며, 고죽을 베니, 아홉 오랑캐[九夷]는 말을 듣기 시작했고, 바닷가 제후들도 찾아와 굽히지 않는 이가 없게 하면서 [北伐山戎, 制令支, 斬孤竹而九夷始聽, 海濱諸侯莫不來服]”[3] “연나라를 위해 땅을 열은 [爲燕辟地]”[4] 뒤에도 연나라의 세력 결코 대·소릉하 유역까지 미치지 못했었다. 수많은 유적의 상황을 미루어보아, 본래 시라무렌강 및 노합하 일대에 있던 동호가 이 틈을 노려 남하하여 대·소릉하의 공백지를 메꿔 이 일대를 점령했거니와 아울러 이 지역에서 하가점상층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고고학자의 말에 의하면 하가점상층문화는 동호문화인데 그 분포지역을 보면 북방한계는 시라무렌강 유역 및 이북의 구릉지대까지 달하고, 남방한계는 난하와 연산(燕山)을 넘지 않았고, 서남쪽은 대체로 칠로도산(七老圖山)이 경계이며, 동부는 유하(柳河)와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넘지 못한다. 또한 그 활동중심은 앞뒤로 변화가 발생했었는데 “초기의 활동중심은 북쪽 및 서쪽에 치우쳤으되 말기의 활동중심은 남쪽과 동쪽에 치우쳐있어, 북쪽으로부터 점차 남쪽으로 발전하고 이동하는 한가지 추세가 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관중(管仲)이 말하는 요동은 결코 지금의 요하와 대·소릉하가 요동만에 입수하는 지역 일대까지가 아님이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고, 따라서 당시 연나라는 동북방 발해연안 쪽으로 대단히 멀리까진 확장하지 못했고 기껏해야 지금의 요녕성 수중현(綏中縣) 이북지역까지 달했었다.

 

고요동에 관한 기재는 또한 《전국책·연책》에도 보인다. “소진(蘇秦)이 장차 합종책을 피고자 북연(北燕) 문후(燕文侯)에게 유세하여 말하길, ‘연나라 동쪽엔 조선· 요동이, 북쪽엔 임호·누번이, 서쪽엔 운중·구원이, 남쪽엔 호타·역수가 있다.’ [蘇秦將爲從, 北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沱·易水].”

 

여기에 관해서 어떤 학자는 “진실과 거짓을 반반씩 섞은 것인데, 그것은 연 소왕(燕昭王) 후기의 일부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되 슬쩍 주물러서 일부 터무니없는 말을 한 뒤, 소진이 유세하여 연왕(燕王)에게 한 말을 떠밀어 연 문후(燕文侯) 때로 올려 잡은 것”이므로 임호와 누번은 연나라 땅 (안에) 없었고, 구원과 운중 역시 연나라에 복속되어 있지 않았지만, “연나라 동쪽에 조선·요동이 있다[燕東有朝鮮·遼東]”는 것만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6]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가진 학자는, 그럼에도, “진개가 동쪽으로 조선을 공격한 뒤에, 요동 및 본래 조선의 일부 거주지는 다 연나라 강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여기면서, “이는『전국책』「燕策」의 말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분명히, 이 학자는 상술한 인용문 중의 “有”자를 ‘점유’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떤 외국학자는 “조선ᆞ요동[朝鮮·遼東]”을 두고 해석하길, 뜻밖에 그 단어 사이의 ‘ᆞ’점을 제거하고, 그 의사표현은 “조선 (소유의) 요동[朝鮮的遼東]”이라고 여기면서, “전국시대 중국은 조선의 요동을 인정했다”[7]고 말했다. 어떤 우리나라 학자도 “조선ᆞ요동[朝鮮·遼東”은 응당 “조선의 요동[朝鮮之遼東]”이라고 풀이해야 한다고 여기고, 때문에 “이 때 연나라는 요동지역을 점거하지 못했었다”고 했다 [8]. “조선ᆞ요동[朝鮮·遼東]”에서  ‘ᆞ’점을 제거한 견해에 관해 어떤 학자는 이미 그 착오를 지적한 바 있는데, 과연 그런 논리에 따라 문제를 이해한다면 그 “임호ᆞ누번[林胡·樓煩]”도 “임호의 누번”으로 고쳐야 할 것이며 “호타ᆞ역수[呼沱·易水]”도 “호타의 역수”로 바꿔야 한단 말인가?[9]

 

필자는 “연나라 동쪽에 조선·요동이 있다[燕東有朝鮮·遼東]”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우리가 중시하기에 충분한 중요문제라고 여기는데, 그 정확한 분석여부는 동북아시아 역사의 일부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결코 가벼이 볼 만한 것이 아니다. 첫째, 조선(즉, 고조선)과 요동 양자가 뒤섞이지 않도록 개념을 명확히 해야만 할 것이다. 어법으로 볼 때, “조선ᆞ요동[朝鮮·遼東]”은 마땅히 병렬구조이지 주종관계가 아니어야 하는데, 이는 응당 한가지 상식적인 문제다. 따라서 “조선ᆞ요동[朝鮮·遼東]”이란 의사표현은 두 곳의 서로 다른 지역을 지칭하는데, 조선은 요동을 포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요동도 조선을 포함할 수 없다. 둘째로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소진의 유세는 응당 연 소왕이 다섯 郡을 설치하기 이전의 역사지리를 설명하는 것이란 점인데 이에 반대할 만한 점은 없다. 그 문장 중의 “有”자는 ‘점유’란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고 마땅히 ‘존재’의 뜻으로서 “없음[無]”의 반대말로 쓰인 것인데, 소진은 연나라의 동서남북 경계를 설명한 것이지 전성기때의 강역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전국시대 초기, 연나라는 북쪽으로 동호와 마주하고 있었으며 고요동은 원래 뒷날의 요동 및 요서 지역을 포괄했었다. 소진이 동호를 언급하지 않고 단지 요동만을 언급했던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소진이 한 설명을 다 내버리고 “연나라 동쪽에 조선·요동이 있다[燕東有朝鮮·遼東]”는 말만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조선은 마땅히 동쪽에 있다는 점은 티끌만큼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조선과 연나라는 비록 요동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해도 바닷길로부터 보면 역시 아주 가까이 있는 이웃나라다. 그러므로, 조선과 요동 둘 다 연나라의 동쪽 이웃이라는 설명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것이다.

 

고조선과 고요동의 경계선에 관한 학계의 견해는 결코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 연 소왕이 요동군을 설치하기 이전의 고조선과 요동 사이의 경계선이 불분명하지만 실제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진개의 개척 이전 고요동의 경우, 그 서부는 동호가 점거하고 있었고, 그 동부의 주요 거주민은 맥인(貊人)이었으며 또한『대제례기』,『일주서』,『관자』에 나오는 發, 北發, 發人 그리고『좌전·昭九年』이 말하는 “肅愼, 燕, 亳” 중의 亳도 살고 있었다 [10]. 고조선의 선조는 응당《일주서·왕회편》에 나오는 良夷, 즉 樂浪夷인데, 西周 1년 때 發人, 穢人, 高夷(고구려족의 조상), 良夷, 그리고 肅愼 등은 각자의 땅에 살고 있었다. 숙신은 지금의 牡丹江 유역에, 예인은 지금의 길림성 대부분과 북한 함경도 및 강원도 일대에, 고이는 우리나라 渾江 유역에, 양이는 지금의 대동강 중·하류 지대(즉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일대에 있었다. 또한 맥인은 예인과 고이의 남쪽 및 양이의 북쪽(혹은 서쪽)에 있었는데, 그 거주지역은 서쪽으로 지금의 의무려산부터 동쪽으로 지금의 청천강까지 이르며, 남쪽은 큰 바다에 접했다. 맥인과 고조선(양이, 즉 낙랑이)의 경계선은 청천강이었음은『산해경』에 기록된 貊國의 역사로부터 실증될 수 있다 [11].

 

이상 종합하면, 고요동의 지리적 범위는 이러하다. 서쪽으로 연산과 난하 이북부터 동쪽으로 청천강 일대까지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적해 둘 것이 한가지 있는데, 바로 고요동 지역은 지명이 되어 뒷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점인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1) 봄, 2세 (황제는) 동쪽으로 군현을 순행했는데 이사(李斯)도 따라갔다. 갈석에 도착하여 …… 마침내 요동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다(『사기·진시황본기』)

[春, 二世東行郡縣, 李斯從. 到碣石, ……遂至遼東而還]

 

(2) 한나라 1년(기원전 206년) 정월, 항우가 즉위해서 …… 연나라 장수였던 장도(臧荼)를 연왕(燕王)으로 삼아 계(薊)에 도읍하게 했다. 때문에 연왕이었던 한광(韓廣)은 (요동)왕으로 (봉해져) 요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광이 듣지 않자 장도는 그를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죽였다.

 [正月, 項羽立……燕將臧荼爲燕王, 都薊. 故燕王韓廣徙王遼東. 廣不聽, 臧荼攻殺之無終.]

 

예(1)에서 “요동”은 옛날 호칭으로 쓰인 것으로 고요동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의 일부 사람은 고대문헌에서 상습적으로 쓰던 이런 옛 호칭에 대한 이해가 몹시 부족해서 문제를 토론할 때 항상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예를 들어 어떤 외국학자는 예(1) 중의 “요동”과 요동군의 “요동”을 똑같이 취급하고, 아울러 고대문헌에서 이른바 秦 장성은 “임조부터 요동까지[起臨洮至遼東]”라는 말의 “요동”과 예(1)의 “요동”을 동일한 개념으로 단언해서 진 장성의 동단의 위치를 현재의 산해관 부근에 있는 갈석산 부근으로 비정했다 [12]. 이와 동시에, 무종이 도읍이던 한광의 요동국(遼東國)은 “확실히 현재의 요동지방으로부터 1천 여 리 떨어진 무종(玉田으로 비정)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이 곳은 무종 인근의 산해관 이남 지역에 있었다”고 했다 [13]. 상술한 연 장성 동단에 관한 그릇된 견해에 대해 우리나라 학자 이건오(李健才) 선생은 일찍이 조예 깊은 분석을 했으되, 이건오 선생의 글 중에서 진나라 2세 (황제가) “동쪽 순행한 갈석이란 땅은 요서에 있었지 요동에 있지 않았다”[14]는 견해는 타당한 것 같지 없다. 2세 (황제가) 동쪽 순행을 한 곳이 요동이라는『사기』의 말은 잘못이 아니고, 당연히 동쪽 순행을 요서에서 했다는 이건오 선생의 설도 잘못이 아닌데, 문제는 이 요서가 일반적으로 郡 이름으로 쓰인 것에 있었고, 그 이름은 “고요동”의 서부 영역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뒷글에서 상세히 언급). 한광의 요동국 경우, 이건오 선생은 그 관할지에 우북평군(무종을 이곳으로 비정)과 요서군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겼고, 반대로 어떤 학자는 한광의 요동국은 “무종현(지금의 하북성 薊縣으로 비정)에 도읍했고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 세 郡을 관할했는데,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 요녕성 대부분, 그리고 내몽고 적봉시 이남 일대에 해당한다”[15]고 여겼다. 필자는 한나라 초의 요동국에 대한 여러 설에 관하여 말하고 싶진 않지만 한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이 있다. 즉, 설령 후자의 설대로 요동국이 세 郡의 땅을 포함하고 있더라도, “요동”이란 이름과 부합되지 못함이 없고, 그 땅은 고요동땅을 취한 것이고, 그 이름 또한 고요동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 안될 법이 있겠는가? 사서에 한·연 왕국과 고조선의 변계는 패수(浿水, 지금의 청천강)라고 명확히 적혀있는데, 우리들은 뒷글에서 또 이에 관련된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2. 요동군

 

수많은 사실이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고요동 및 이후 나타난 요동군의 관련된 문제를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한 것은 “요동”이란 말의 연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이고 특히 “요동”이란 말의 다의성(多義性)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만일 논리학적 시각으로 보더라도 사서 중에 나타난 “요동”은 동일 개념으로 풀이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요동과 요서는 요수(遼水, 지금의 요하)를 경계로 하면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것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지리 방위를 대표하여 전적으로 지리를 나타내는 명사다. …… 요동이 있고서야 요서가 있는 것이고, 역시 요서가 있으면 반드시 요동도 있는 것으로, 양자는 서로 의지하며 병존한다. 아울러 이들은 다 자연지리적 요소, 즉 요하가 주요 특징이자 그 이름의 유래가 된다.”[16]. 이런 설명은 실제 상황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고요동 및 뒷날의 요동과 요서 두 郡은 모두 요수를 참조하여 명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대개 일부 외국학자는 그런 인식을 근거로 옛 요수는 지금의 난하이고, 옛 패수는 지금의 대릉하라고 말하면서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요녕성 경내로 놓았다. 그래서 결국 역사지리를 크게 뒤바꾸어 놓아서 요동 대지를 뒤덮고 있는 연·한문화마저 모두 고조선 고유의 물건으로 변하게 하든지 아니면 고조선 사람이 애지중지하는 중국문물로 변하게 했다.

 

이른바 요동을 요수(지금의 요하) 以東으로 보는 설명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요수를 경계로 한 지역개념으로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겨우 “요동”이란 호칭의 한가지 측면에 관해서만 옳다. 정작 “요동”이란 호칭은 고대사상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중첩된 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요동과 요서 두 郡의 구획은 가장 이른 시기엔 요수와 아무 관계가 없다. 전술했듯이, 고요동 지역은 요수 동부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서부 그리고 심지어 뒷날의 요동군 관할구역도 포함했는데, 모두 요수의 동쪽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국시대의 연나라 사람이 郡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요서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요동은 최초에 무엇을 근거로 명명되었겠는가? 필자의 생각이지만, 명나라 정통(正統) 6년(서기 144년)에 나온『遼東志』의 풀이는 무척 일리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길 “요는 멀다는 뜻이다. 그곳은 구주(九州)의 동쪽으로 멀리 자리했고, 따라서 요동이라고 이름하였다. [遼, 遠也. 以其遠在九州之東, 故名遼東]”. 요동의 속뜻은 다름아닌 아득히 먼 동방이란 것인데 이는 중원인의 “구주설(九州說)”에 근거하여 그 동방의 멀고 먼 땅을 명명한 것이다. “요동”이란 중국어[漢語] 명사다. 뒷날에 와서, 연나라 장수 진개는 북쪽으로 동호를 쳐부수어 동호를 1천 리 내쫓아 지금의 시라무렌강 유역으로 물러나 살게 한 뒤에, 이윽고 “요동을 건너 조선을 공격하여[度遼東而攻朝鮮]” [17] 연나라와 조선과의 변계를 확정하여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삼았었다 [18]. 오래도록 사람들은 연나라가 차지한 요동군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고, 늘 연나라의 요동군은 마땅히 고조선의 일부 영토를 점유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심지어 요동군의 관할구역은 “본래 위만조선 (소유의) 땅을 차지한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19]. 위만조선은 서한 때의 일이고 전국시대의 고조선은 마땅히 기자조선이다. 물론 기자조선 또한 위만조선이지만 그 땅은 다 요동에 없었다. 정작 요동군으로 차지한 땅은 맥인의 거주지였으며, 그 땅은 고요동 동부에 있었다. 연나라의 요동과 요서 두 郡의 명명은 모두 고요동과 관련이 있다. 즉, 요서란 고요동의 서쪽이란 뜻이고, 요동이란 고요동의 동쪽이란 뜻이다. 두 郡의 분계선은 의무려산인데 이는 다름아닌 동호와 맥인의 분계선이고, 요동과 요서 두 郡은 지리환경은 물론이고 민족 구성상으로도 모두 자연스럽게 한 묶음을 이룬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바는 진개가 땅을 넓힐 때 일찌감치 고조선을 공격하고 심지어 고진번(古眞番)까지 지나간 점이지만, 이 진격은 결코 병탄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작 연나라 군대는 고조선과 진번을 정복했을 뿐 멸망시키지도 않았고 더욱이 그 토지를 합병하지도 않았다. 연나라와 고조선의 전쟁이 종결된 뒤에 연나라 군대는 즉각 고조선 영토로부터 물러났고, 때마침 고조선과의 변계로 삼았던 만번한은 대부분의 설에 따르면 청천강인데, 이는 맥인과 고조선인의 천연적인 분계선이다 [20]. 연나라의 요동군은 응당 고조선의 일부 영토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설은 찾아봐도 무슨 믿을 만한 근거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고요동과 연나라 요동군의 연혁을 명확히 이해하고 나서 옛 요수에 관련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요수란 명칭이 생긴 시기는 마땅히 요동군이 설치된 이후이지 그 이전은 아니다. 요수란 요동군 내의 큰 강물인데, 그 명명은 응당 요동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수에는 대·소 두 물줄기가 있었는데 대요수는 바로 지금의 요하다.『산해경·해내동경』에 따르면, “요수(潦水)는 위고(衛皋) 동쪽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발해에 흘러가는데 요양(潦陽, 요수의 북쪽)으로 들어간다 [潦水出衛皋東, 東南注渤海, 入潦陽]”. 이 문장엔 사이사이 틀린 곳이 있는데 바로 잡으면 응당 이렇게 된다. 요수는 위고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요양에 들어가서 발해로 흘러간다 [潦水出衛皋東, 東南入潦陽, 注渤海].『수경』에 따르면, “대요수는 새외(塞外)의 위백평산(衛白平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새(塞)로 들어와 요동의 양평현 서쪽을 지난다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역도원이 (이『수경』에) 주석을 달아 이렇게 말했다. “또한 말하길 요수는 지석산(砥石山)에서 나와 새외(塞外)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똑바로 요동의 망평현 서쪽, 즉 왕망(王莽)이 장설(長說)이라 이름 붙인 곳으로 가서, 구부러져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진나라가 시황제 22년에 연나라를 멸하고 설치한 요동군의 치소가 이곳이다”.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說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 滅燕置遼東郡, 治此]

 

상술한 인용문이 기록한 것은 대요수이다.『산해경』의 “위고”를『수경』이 잘못 옮겨 적어서 “위백평”이라 했는데, 이 산은 바로 오늘날 내몽고 경내에 있는 백차산(白岔山)이며, 이곳은 오늘날 요하 상류의 서쪽끝 발원지다. 요하는 서쪽 발원지인 백차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먼저 시라무렌강이 되었다가 이윽고 서요하가 되는데, 서요하의 말단이 꺽어져 남쪽으로 흐른 뒤 동요하와 합류하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시라무렌강과 서요하의 흐름을 보면 모두 동쪽으로 흐르는데 사서의 기록과 부합하는 것이다.『수경』과 역도원의 주석이 언급한 “새외”란 연나라의 북장성(北長城) 밖을 지칭하는데 이 장성의 주향은 이러하다. 서쪽으로 지금의 하북성 독석구(獨石口) 북쪽과 난하 남쪽의 대탄(大灘) 일대로부터, 동쪽으로 위장(圍場), 적봉(赤峰), 그리고 오한(敖漢)을 거쳐, 내만(奈曼)과 고륜(庫倫) 남부로부터 부신(阜新)에 진입하고, 또 창무(彰武)와 법고(法庫)를 지나 개원(開原) 일대에 이르고, 요하를 건넌 뒤에, 동남쪽으로 꺽어지고, 신빈(新賓), 관전(寬甸)을 지나고, 이어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진입한다 [21]. 한반도에 있는 연나라 장성 도막은 바로 북한 고고학계가 발견하여 “대령강장성(大寧江長城)”이라 명명한 것인데, 그 주향은 창성강(昌城江)과 대령강(大寧江)을 지나 청천강 하류 북안의 박천(博川)까지 이른다 [22]. 현재 요하 상류의 서단은 정확하게 연나라 장성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간다. “동남쪽으로 요양에 들어간다[東南入潦陽]”와 “동남쪽으로 새에 들어간다[東南入塞]”는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른바 “요양”이란 다름아닌 소요수의 북쪽이란 뜻인데 소요수는 바로 지금의 혼하(渾河)다. 지금의 법고에 있는 연나라 장성은 개원 일대에서 요하를 건너는데 이곳은 정확히 오늘날 혼하의 북쪽에 있다. 역도원의 설명에 따르면 요수는 “똑바로 요동의 망평현 서쪽으로 가서 …… 구부러져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直遼東之望平縣西……屈而西南流]”, 이 말 역시 헛된 곳이 없다. 어떤 학자의 고증에 근거하면, 한·위 때 요동군의 망평현 옛 터는 응당 지금의 요녕성 철령현(鐵嶺縣) 남쪽 신대자진(新臺子鎭)에 있는 전국∼한나라 때 성터로서, “이 땅 북쪽 가까이에 한나라 시대 요동변새(遼東邊塞)가 있고, 요하가 신대자로부터 서쪽으로 16리에 걸쳐 남쪽으로 흘러서 서남쪽 지금의 요양(襄平으로 비정)로부터 서쪽에서 태자하(古梁水로 비정)와 합류한 뒤에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며, …… 신대자 일대는 지역이 평평하게 탁 트여있어 1백리가 평원이고 아울러 교통도로가 반드시 거쳐가는 곳”인데, 여기는 대요수가 새(塞)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흘러갈 때 첫 번째로 거치는 현(縣)이다 [23]. 『한서·지리지』가 말하길, “망평(현)에 (흐르는) 대요수는 새외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 물길이다. (왕)망은 (이곳을) 장설(長說)이라고 불렀었다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고 했는데 이 말은 대단히 정확하다.

 

소요수에 관해,『한서·지리지』현도군 고구려현에 대한 주석에 따르면, “요산(遼山)이 (있는데, 여기서) 요수가 나와서 서남쪽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새외를 지난다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고구려현을 두고 학계는 문헌 및 고고자료에 근거해서 지금의 신빈현 영릉진(永陵鎭) 서남쪽 소자하(蘇子河) 남안에 있는 한나라 성터로 비정했다 [24]. 요산은 지금의 요녕성 청원현(淸原縣) 동북쪽에 있는 삼통배령(三通背嶺)이다 [25]. 남소수는 지금의 소자하이고 지금의 무순 대과방(大夥房)댐에서 혼하와 합류하는데, 그 합류지점은 정확하게 古고구려현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古남소수의 대부분 물줄기는 응당 연나라 장성 밖에서 흘렀음을 말해준다. 필자가 일찍이 고증한 것이지만,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의 동부 변계는 최초엔 그 장성 선상에 있었으나 나중에 장성 라인을 넘어가서 古고이 및 古맥국의 영역을 요동군의 행정관할구역 안에 두었고, 그 동부 변계를 “대령강장성”에서 지금의 청천강 및 대동강 상류 일선으로 이동시켰다. 古고이가 전국시대 말기에 요동군에 편입된 정황에 관해 우리는, 고구려(족) 옛 땅에 “遼”자로 명명된 산(遼山)과 물줄기(小遼水)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개략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 고고학적 측면으로 보아도 古고이 지역 내 연나라 사람의 활동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다. 즉 1974년 요녕성 환인현 대전자의 한 석곽묘에서 명도전 2백 매가 발견되었고[26], 1958년 집안현 태왕릉 부근에서 매납 단지 속 고대 화폐가 약 8∼9 포근(1포근 = 500그램) 발견되었는데 그 중 반수가 연나라 명도전이었으며[27], 1956년 집안현 마선구(麻線溝)에서 발견된 3∼4백 근의 고대 화폐 중에서도 연나라 명화원전(明化圓錢)과 일화원전(一化圓錢)이 있었다. 주활(朱活) 선생은,「郾幣管窺」란 글에서, 해방 후 길림성에서 출토한 언국화폐(郾國化幣)는 집안 부근에 집중하는데 “이 지역은 언국(郾國, = 燕, 北燕, 匽)의 요동군”이라고 했다 [28]. 이 밖에, 우리나라 고고학계는 집안현성에서 또한 전국시대 토성 터를 발견했는데, 어떤 사람은 이 유적을 두고 “압록강 상류 지대에서 (살던) 고대민족의 문화 유물”[29]일 것이라고 보았지만 이는 현저하게 타당성이 없다. 연나라 사람이 오기 이전, 우리나라의 동북과 한반도 등지의 거주민은 여전히 야외에서 혈거 생활을 하는 단계에 있었거니와 완전한 지상 건축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안현 전국시대 토성은 마땅히 토착민족의 건축이 아니거니와 응당 전국시대 연나라 사람의 문화유물이고, 연나라 사람이 장성 밖에 설치한 한 거점이었다.

 

요동군의 강역은 한나라 소제(昭帝) 원봉(元鳳) 연간 이전엔 결코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었다.『사기·조선열전』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본디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전성기가 시작되자 일찌감치 진번 및 조선을 빼앗아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는 연나라를 쳐없애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배속시켰다. 한나라는 일어나서, 거기가 멀고 지키기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새(塞)를 도로 고쳐 쌓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딸리게 했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또한 어환의『위략』에 따르면, “한나라가 노완(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으면서부터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는 패수(浿水)였다.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서한때의 패수(浿水)가 지금의 어떤 강인지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대령강장성”이 발견된 이후의 현재, 우리는 서한 때의 패수가 지금의 청천강에 속하지 않는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음은 전적으로 틀림없다. 따라서 서한 초기 한나라 왕조의 연나라 왕국과 기자조선의 경계선은 변함없이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당시 고구려족도 이미 형성되어 있었겠지만 고구려의 발상지인 혼하유역은 자연스레 여전히 요동군의 관할 하에 있었다. 당연히, 더 뒷날에 가서 변화가 생겼다.『한서·昭帝紀』에 의하면, “원봉 …… 6년 봄 정월, 전국[郡國]에서 (사람들을) 뽑아 모아서 (억지로) 이주시켜 요동 현도성을 쌓게 했다 [元鳳……六年春正月, 募郡國徒築遼東玄菟城.].” 또한『한서·천문지》에 의하면, “원봉 6년 정월, 요동 현도성을 쌓았다 [元鳳六年正月, 築遼東玄菟城]”. 여기서 “요동 현도성”이란 “요동의 현도성”이란 뜻으로서, 옥저 지역의 현도군 치소 옥저성과 구별되거니와 그 “요동”이란 요동군을 지칭한다. 즉, 현도성을 옛날 요동군 경내에 축조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대체로 원봉 6년(기원전 75년) 혹은 조금 뒤늦게 소제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파하여 낙랑군에 들어갔던 현도군을 새로이 도로 설치한 것이지만 이 郡 땅은 원래의 동옥저 옛 땅에 자리하지 못했고, 요동군 경내에 더부살이로 옮겨가게 된 것이었다. 본디 한 무제가 설치했던 현도군을 두고 학계는 제1현도군이라 부르고, 소제가 교치(僑置 = 徙置)한 현도군은 제2현도군이라 부르는데, 대략 서한 말 혹은 동한 초에 현도군은 재차 요동군 경내 안쪽으로 더 옮겨갔던 바 이를 제3현도군이라 부른다. 명확히 해 둘 것은, 제2현도군이 차지했던 땅은 장성 밖의 요동군 관할구역에 있었고, 응당 古맥국과 古고이의 옛 땅을 포함했으며, 낙랑군과의 경계선은 지금의 청천강이란 점이다. 현도군이 두 번째로 교치되면서부터 제2현도군 전역을 고구려가 몽땅 점령했었다. 이 점에 관해서 우리는『삼국사기』의 기사로부터 알 수 있다. “대무신왕 …… 27년(서기 44년) 봄 3월, (후)한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은 (후)한에 속하게 되었다 [大武神王……二十七年春三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또한 같은 책 태조왕 4년(서기 56년)조에 따르면, “가을 7월, 동쪽으로 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으니 땅끝은 동쪽으로 넓은 바다까지, 남쪽으로 살수까지 열렸다.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한국 측 사서인『고려사·지리3』에 의하면 “……청천강의 옛 명칭은 살수인데 바로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나라 병사 1백만을 이긴 땅이다 [淸川江, 古稱薩水, 卽高句麗乙支文德敗隋兵百萬之地]”. 『동국여지승람』또한 “청천강은 살수라고도 이름했다 [淸川江, 一名薩水]”고 말했다. 패수가 동한 때 살수라고 개칭된 뒤, 패수란 이름은 이윽고 동쪽의 대동강으로 옮아갔으며, 오늘날 대동강의 옛 이름인 “열수(列水)”도 문헌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 요동군 내로 이동한 뒤의 “요동”

 

요동군은 대략 기원전 300년 혹은 조금 뒤늦게 설치되었는데, 전국, 한, 그리고 위를 거쳐 서진에 이르러 요동국으로 바뀌었고, 뒤에 도로 郡이 되었다가, 5호16국 후연 말에 고구려 수중에 떨어졌다.『東史會綱』에 의하면, “광개토왕 11년(서기 402년)에 고구려는 요동성을 빼앗았다. (고)구려왕이 병사를 보내 숙군(성)을 공격하자 (후)연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숙군)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고구)려 병사는 마침내 요동성을 빼앗았던 것이다. [廣開土王十一年, 高句麗取遼東城, 麗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棄城走, 麗兵遂取遼東城]”. 요동군은 전후로 700 여 년 동안 존재했었다. 후에 북연이 또 요동군을 요서에 교치했었으나 북위 때 폐지했었고, 수나라가 대업(大業) 8년(서기 612년)에 다시 설치하여 치소를 통정진(通定鎭)에 두었는데 그 땅 역시 요수 서쪽에 있었고, 당나라 왕조 때 폐지되어 다시는 설치되지 않았다.

 

비록 행정구역으로서의 요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명으로서의 호칭은 변함없이 사람들이 사용했고, 동시에 또한 사서에서 누차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1)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하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자리한다.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후한서·崔馬因전』이현 주)

 

(2)요동의 땅은, 주나라가 기자의 나라로 삼았으며, 한나라의 현도군이었을 따름이다 [遼東之地, 周爲箕子之國, 漢家玄菟郡耳](『구당서·고려전』).

 

(3)요동은 본디 중국의 땅인데다 막리지 (연개소문이) 그 (군)주를 죽였으니 짐은 장차 스스로 가서 거기를 다스리고자 하오. 그래서 (여러) 어르신과 약속하건대 나를 따라가는 아들이나 손자를 내가 잘 어루만지고 돌볼 것이니 걱정 마시오. [遼東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約:子若孫從我行者, 我能拊循之, 毋庸卹也](『신당서·고려』).

 

장잠현의 지리적 위치에 관해 담기양(譚其驤) 등 여러 선생은 각 방면의 재료를 근거로 고증하여 한국학자 이병도의 견해가 비교적 믿을 만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의 설을 채택하여 장잠현를 지금의 북한 황해도 송화군(松禾郡)으로 비정했었다 [30]. 그러나 여러 선생은『후한서·최마인전』에 대한 이현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주석 뒷부분에 나오는 “在遼東 [요동에 자리한다]”이란 세 글자는 그릇된 것이라고 말했는데, 필자는 이 이현의 주석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현은 주를 달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하지[長岑縣屬樂浪郡]” 기타 다른 군에 속하지 않는다고 시원하게 말했고, 당연히 요동군에도 속하지 않지만, 확연히 “그 땅은 요동에 자리한다[其地在遼東]”는 말에서 “요동”은 요동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요수 以東 지역을 뭉퉁그려 지칭한 것이다. 이렇다함은, 우리는 예(2)와 예(3) 중의 인용문으로부터 완전히 알아차릴 수 있다. 예(2)는, 당나라 왕조의 대신 배구(裴矩)와 온언박(溫彦博)이 고조 이연(李淵)에게 한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고구려의 점령에 의해 떨어져 나간 영역을 수복해서 국가통일 대업을 완성하자는 주장인데, 그 문장에서 “요동의 땅[遼東之地]”이란 바로 “고려의 땅”을 지칭하는 것이다. 배구는 또한 수 양제(隋煬帝)에게도 고구려 출정에 대한 견해를 밝힌 바 있는데,『수서·배구전』에 실린 그의 말에 의하면, “고려의 땅은 본디 고죽국이다. 주나라 때는 거기를 기자에 봉해 주었고, 한나라 때는 세 郡으로 나뉘어졌으며, 진나라[晉氏] 또한 요동을 다스렸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신하노릇을 하지않고 따로 이역[外域]이 되었다지만 …… 이제 폐하 때마저 어찌 섬기지 않음을 그냥 두어 그런 중국의 땅[冠帶之境]이 오랑캐의 삶터로 불리는 꼴을 당하겠습니까? [周代以之封於箕子, 漢世分爲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爲外域……當陛下之時, 安得不事, 使此冠帶之境, 仍爲蠻貊之鄕乎]”.

 

“고려의 땅은 본대 고죽국 [高麗之地, 本孤竹國]”이란 배구의 말은 실제 역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주[冀] 동북과 요서 지역에 자리했었지 요하 以東에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려의 땅[高麗之地]”이란 배구의 말이 실은 “요동의 땅[遼東之地]”을 지칭한다함은 티끌만큼도 의심할 바가 없다. 실제로, 당나라 사람의 눈에는 고구려의 점령지역은 요하 以東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전역을 총칭하여 “요동의 땅[遼東之地]”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 “요동”은 이미 고요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요수 以東 지역을 지칭한 것이고, 거기에는 고요동 및 요동군의 일부 토지가 포함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반도 북부지역까지도 다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수·당 사람들이 고구려의 점령지역을 요동이라 지칭한 것은 어느 사서에든 다 그러해서 수·당의 고려 출정을 다 “요동 전쟁[遼東之役]”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볼 때, 장잠현 “그 땅은 요동에 자리한다[其地在遼東]”는 이현의 주장에 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실제로 “요동”이란 말은 당 왕조 이후에도 사람들이 널리 사용했었다. 원나라 왕조에 있던 요동로(遼東路)는 치소가 황룡부(黃龍府, 지금의 길림성 농안현)였고, 명나라 왕조에는 요동진(遼東鎭, 九邊의 하나인데 치소는 처음엔 지금의 요녕 北鎭에 있었지만 후에 지금의 요양시로 이전되었다)과 요동도위(遼東都衛, 치소는 지금의 요양시 老城區)이 있었지만 뒤에 요동도위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로 바뀌어 “동쪽으로 압록강까지, 서쪽으로 산해관까지, 남쪽으로 여순 항구, 북쪽으로 개원까지 [東至鴨綠江, 西至山海關, 南至旅順海口, 北至開原]” 관할했는데[31], 고요동 대부분 지역에 해당한다.

 

 

맺는말

 

이상 종합하면, “요동”이란 말은 이르면 춘추시대에 나타났지만 요동지역의 고대 민족과 중원지역의 연계는 대단히 아득한 연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서주 초기, 주나라 천자는 숙신, 燕, 그리고 亳(貊)을 자신의 북토(北土)로 보았는데, 이 “북토”는 실제로 우리나라의 현재 동북지역 전역을 포함했었다. 동북지역의 숙신, 發人, 穢人, 高夷, 그리고 良夷 등은 중원까지 찾아와 주나라 천자의 부름으로 “성주 모임[成周之會]”에 참가했던 사건은, 주나라 왕조 초년의 동북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거대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자와 연계하여 한반도가 역사 시작단계에 도달한 것 또한 우리나라와 한반도는 일찌감치 정보가 서로 통했음을 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요동지역은 그 두 지역간 왕래의 중요한 통로였다. 전국시대, 연나라 사람은 동쪽을 향하여 땅을 열어 요동지역을 자연스레 정식으로 자신들의 행정관할구역에 편입했거니와, 이 지역에 철기를 확산시키고 화폐경제를 발전시켜 동북아시아 각지에 있는 민족의 사회발전을 대대적으로 촉진시켰다. 5호16국 시대, 중국북방의 소수민족정권인 고구려국은 여전히 왕성하게 발전해서 요동지역을 계속해서 다스리고 개발했다. 뒷날, 고구려국은 비록 당나라 왕조의 통일전쟁 중에 멸망했지만, 그 유민 대부분은 우리나라의 기타 민족 속으로 녹아 들어갔고, 일부는 한반도의 한민족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더 뒷날, 요동지역은 시종일관 우리나라 역대왕조의 관할 하에 있었고, 현재에 이르러, 우리나라 요녕성 관할권은 의연하게 고요동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 朱活:「郾幣續窺」(齊魯書社,1984年出版),『古錢新探』.

2. 『史記·燕召公世家』.

3. 『管子·小匡篇』.

4.  『穀梁傳·莊公三十一年』.

5.  靳楓毅:「夏家店上層文化及其族屬問題」,『考古學報』,1987年第2期.

6. 閻忠:「<戰國策>燕國疆或辨析」,『史學集刊』1995年第3期.

7.  [朝]李址麟:「秦漢兩代遼東郡的位置」,『歷史科學』1963年1期.

8. 張博泉:『東北地方史稿』(吉林大學出版社),頁45.

9. 顧銘學、南昌龍:「戰國時期燕朝關系再探討」,『社會科學戰線』1990年1期.

10.   劉子敏:「談古文獻的標點斷句與古朝鮮地望之硏究」,『東疆學刊』,1995年,第2期.

11.   劉子敏、金榮國:「簡議“钜燕”與東北亞的若幹古族」,『民族硏究』1995年第4期.

12.   13.[朝]薑仁淑著、李雲鐸譯:「燕遼東郡的位置」,『東北亞歷史與考古信息』1986年3期(原文載朝鮮『歷史科學』(科學、百科辭典出版社),1985年,2期.

14.   李健才:「關於漢代遼東、樂浪兩郡地理位置問題的探討」,『社會科學戰線』1993年1期.

15.   『中國歷史地名辭典』(江西教育出版社,1986年出版).

16.   賀政權:「遼東一詞的由來及其他」,『東北地方史硏究』,1987年,2期.

17.   『鹽鐵論·伐攻篇』.

18.   魚豢:『魏略』.

19.   林潭:「“燕亳”和“燕亳邦”小議」,『史學集刊』1991年第2期.

20.   劉子敏、金榮國:『戰國時期燕朝關系新探』(1)(延邊大學出版社,1995年出版),載於金龜春主編『中朝韓日關系史硏究論叢』

21.   李文信:「中國北部長城沿革考」,『社會科學輯刊』,1979年,第1期;李殿富:『東北境內燕長城考』,載於『黑龍江文物叢刊』1982年第1期.

22.   顧銘學、南昌龍:「戰國時期燕朝關系的再探討」,『社會科學戰線』1990年第1期.

23.   孫進己等:「東北歷史地理」(黑龍江人民出版社,1989年出版),卷1,頁279.

24.   同上書,頁326.

25.   『中國歷史地名辭典』.

26.   曾昭藏、齊俊:「桓仁大甸子發現青銅短劍墓」,『遼寧文物』1981年第1期.

27.   古兵:「吉林輯安曆年出土的古代錢幣」,『考古』1964年第2期.

28.   見朱活:『古錢新探』(齊魯書社,1984年).

29.   孫進己等:『東北歷史地理』,卷1,頁238、239.

30.   譚其驤主編:『中國歷史地圖集釋文彙編·東北卷』(中央民族學院出版社,1988年出版).

31.   『明史·地理志』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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