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겔라시우스 1세가 494년에 동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491~518년 재위) 보낸 유명한 편지에는
교황이 어떤 방식으로든 세속적 권한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중세 초기에는 이 편지를 이따금 인용하기는 했어도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겔라시우스 1세 이후로 수백 년 동안이나 어떤 로마 주교(교황)도 동로마 황제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지상권의 한계성을 지적하지는 못했다.
비잔틴과의 결속이사라지면서 로마에서는 살인과 싸움이 벌어졌다. 교황이 살해당한 뒤 769년에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서 로마 시의 제한된 성직자 그룹 즉 사제 추기경과 부제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경건왕 루트비히, 오토 대제가 일종의 총감독을 요구했지만 선거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로마 시의 귀적층이었다.
교황의 아들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겨졌고 9세기 말에서 10세기의 교황들은 편안한 죽음을 맞지 못햇다. 교황의 아들이었던 요한네스 11세는 교회법이 교황의 나이를 최소 30세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고 정력적이던 어머니 마로치아의 극성으로 20세가 채 되기 전인 931년에 로마의 주교(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악명높은 요한네스 12세는 요한네스 11세보다 더 어릴 때 교황이 되었다. 로마 시를 통치하던 그의 아버지 알베리히는 로마 시민들에게서 아들을 교황으로 선출하겠다는 맹세를 미리 받아냈다. 6세기의 별 중요성이 없는 특벼한 경우를 제외하면 요한네스 12세는 지나치게 이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자신의 시민이름인 옥타비안을 버린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교황은 선출되면서 스스로에게 직위를 부여한다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관습을 세운 셈이 되었다.
추기경들은 주요교회에서 예배임무를 맡은 성직자들이었다. 주교추기경들은 로마 주변지역에 있는 교구의 관리업무를 맡았으며 또한 라테라노의 성 조바니 교회에서 일 주일에 하루씩 교황의 예배주관을 보조했다. 그래서 주교추기경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사제추기경은 도시 성벽 안에서 본당구의 책임을 맡고 다른 한편으로 네 개의 교황 대성당인 성 조반니, 성 베드르, 성벽 바깥 성 바울로(산 바울로 푸오리 르 무라) 그리고 대 성모 교회(산타 마리아 마조레)에서 각각 일곱 명이 주일예배를 맡았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28명이 된다. 마지막 그룹인 부제추기경은 원래 도시의 구호사업을 관리하고 자선을 지휘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추기경을 합쳐보며 11세기에는 50명 가량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추기경들은 예배 보조임무와 구호사업 보조임무에서 벗어나 가톨릭 교회의 장로회(상원)을 이루었고 이들이 바로 교황을 선출하는 협의기구가 되었다.
어린 소년의 몸으로 성 베드로의 옥좌에 앉은 교황이 있었는데, 그는 적대적인 가문 출신의 대립교황이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자신의 직위를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은화 2000파운드(제1차 세계대전 이전 가치로 환산해서 대략 금화 5만 마르크에 해당했다. 그러니까 아주 비싼 것은 아니었다)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그 직위를 산 사람은 직위에 잘 어울리는 개혁적인 사제였는데 아마도 유대인 가문이 그에게 돈을 대주었던 것 같다. 1046년 하인리히 3세는 이 세사람 즉 원래의 교황, 대립교황, 개혁교황을 차례로 해임하고 짦은 기간 사이에 연달아 도이치 주교들을 교황으로 만들었다. 그개 맨 먼저 임여한 사람은 밤베릌크의 쥐트거 주교였다. 이 사람은 클레멘스 2세로서 겨우 몇 달 동안 교황직에 있었다. 12년 동안 다섯 명의 도이치 교황들이 극히 짧은 임기를 채우면서 교체되었는데 이 외국인들의 죽음에는 부정한 일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이 일찍부터 펴졌다.
그 뒤의 몇 년 동안 도이치 왕의 개입이 아무리 혼란한 로마의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해도 개혁적인 사람들은 왕의 이러 행동을 속인의 외람된 개입으로 여겼다. 이에 개혁성직자들은 1059년 주교회의에서 교황선출법령을 결정했다. 교황이 죽을 경우 추기경들이 후계자들을 선출한다는 내용이었다.
도이치 왕이 임명한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 원래는 라벤나의 대주교였던 빌베르트는 1080년 단 한 명의 추기경에 의해 선출된 뒤 자시의 선거결과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후보자가 선출되는 데 필요한 표결수가 확정되지 않은 것이 교황임명 과정에서 결함으로 드러났다. 113
0년에 추기경들은 선거의 권한을 여덞 명으로 제한함으로써 그런 재앙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1159년에 추기경들은 오직 만장일치의 선거만이 효력을 가진다는 기본원칙에 합의했다.
1179년 공의회에서 교황선출에서 추기경들 사이에 만장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예외 없이 3분의 2의 표를 얻은 사람이 전체 교회에 의해서 교황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첫번째 교황선출 비밀회의는 1241년에 이루어졌다. 1241년 8월 20일에 그레고리우스 9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도시 밖에는 교황에게 파문당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군대를 거느리고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 추기경을 포로고 잡고 또다른 추기경은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1268년 11월 29일 클레멘스 4세가 죽었다. 3년이 다 될 무렵인 1271년 9월 1일에 부제인 뤼티히의 테오발트가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는 본래 이탈리아 태생이었지만 당시에는 십자군전쟁에 참전애서 동방에 있었다.1272년 4월 6일에 그는 로마에서 성직수여식을 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10세인 그는 원래 추기경이 아니었다.
162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교황 선거규칙이 분명하게 만들어졌다.
교황명부를 헤아려보면 대략 270명의 교황들 중에서 겨우 78명이 성인의 명부에 올랏다. 그들 중 대부분인 73명이 1000년 이전 사람들이고 1500년 이후로는 겨우 두 명의 교황, 피우스 5세(1566~1572 재위)와 피우스 10세(1903~1914 재위)가 성인이 되었다.
인정은 할수 있으나 주교들과 주교회의에 누군가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일을 관장하는 어떤 심의기관도 없었다. 알렉산데르 3세와 인노켄티우스 3세는 로마 주교(교황)의 허락없이 성인을 공식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제한했다.
500년경 심마쿠스를 둘러싼 혼란이 있었던 시대에 교황은 심판받을 수 없고, 면직될 수 없다는 원칙.
첫 자리는 누구에 의해서도 심판받지 않는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의 조항들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는 교황은 비록 적법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직분을 맡게 되었다 해도 유다와 같으며 성스럽지 않다. "교황은 직분에 의해서 성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교황이 의도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일반) 또는 '전 교회' 공의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이 공의회는 '가능성의 영역' 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톨릭 교회의 일반공의회 가능성은 말릭이 말한 것처럼 '무한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회의 통합 또는 결속에 대해 가톨릭교도가 아닌 그리스도교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도 드러났다.
세계공의회의 결정은 성서의 신적 권한에 뒤이어 지상의 교회법에서 최고 단계로서 교부의 원칙과 교황의 교령보다 더 위에 있다.
9세기까지의 세계공의회는 모두 동로마 제국에서 열렸다. 로마 황제, 뒷날 동로마 황제가 이 회의를 소집했고 여기에서는 신앙의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여기에 참석한 주교들은 사도의 직분, 진리의 은총에 따르는 것이지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메로빙거 왕들과 관련 있는 문헌 중 대략 절반 정도가 거짓이다. 카를 대제에 관한 약 270종의 원전서류 중에서 100종 정도가 가짜이다. 385년에 처음으로교황으 교서가 나왔었다. 그 이전의 것이라고 주장되는 수백 종의 교서들은 모두 가짜이이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말은 라틴어 아우게레(auguere, '늘리다' 라는 뜻)에서 온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들어가는 까치문 앞으로 나가서 가톨릭 교회의 법전들을 모아서 불태웠다.
'성서로 돌아가라'는 루터의 외침을 듣고 인문주의자들은 처음에 환호성을 올렸다. '원전으로 돌아가라!"는 그들의 구호와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측은 서로 다른 것을 뜻했다. 루터의 원전은 오로지 성서일 뿐이었고, 인문주의자들의 원전은 성서와 전통 두 가지였다. 교황제가 (루터의 생각에 따르면) 신의 기구가 아니고 복음서에 근거를 두고 창설된 기구도 아니라면 1500년 동안 교황의 법령들이 하나의 세계를 세웠다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신의 은총에 대한 물음을 놓고 본다면 전통이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뤁의 등장을 기쁨으로 환호했던 인문주의자들은 거의 아무도 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예전에는 그리스도교를 날카롭게 공격했지만 루터가 전통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것의 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문헌학적 기술에 정진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전통에 대한 비판자들이었으나 이제는 전통을 소중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원칙으로 여겨 옹호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전통을 옹호하는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은 자기들의 도덕적 가치를 확신하고 있는 문서들의 본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것이 분명했다. 처음에 루터를 격려했던 나이든 인문주의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머물렀다. 가톨릭 전통과 단절할 각오를 보인 것은 루터에서 출발하는 젊은 세대였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 학자들은 고대인들의 정신적 유산을 보호하는 것이 가치 있다는 확신에서 문헌학을 학문으로 정초했다. 그들은 전승되어 내려오는 텍스트가 언제나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는 거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뒤에 덧붙여진 것을 찾아서 제거하거자 노력했다. 당시에 벌써 문헌학의 기초개념이 나타난 것이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기념의 해인 1300년의 30일 동안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로의 교회를 방문하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그리고 15일 동안 참회하고 회개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죄와 형벌을 완전히 사면함'을 약속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군전쟁에 참여해야만 얻을 수 있던 완전사면을 로마에서 얻을 수 있다는 교황의 제안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였다.
웃음이 중세에는 인간 육체의 허약함으로 여겨졌다.
9월 29일인 미카엘 축일은 학교가 끝나는 날, 연시(年市), 추수시작 등과 연결되었다. 11월 11일인 마르티누스 축일에는 계약이나 계약해지를 예고하고 하인을 교체하고 세금을 내고 공과금을 냈다.
교황의 파문교서는 성목요일에 나왔다. 한자동맹은 오순절에 모였다.
1232년 그레그리우스 9세는 교구 축제일을 빼고 85일간 노동 없이 신을 예배하는 날이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많은 교구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날이 100일이 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몇 살인지 정확하게 몇 년에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중세에서 가장 민중적인 황제였던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해서는 그가 태어난 해를 이정한 기간으로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1122년 아니면 늦어도 1124년이나 1125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연도는는 출생연도보다 사정이 약간 낫지만 그래도 큰 차이는 없다. 우리가 가장 잘 알수 있는 것은 사망연도가 아니라 사망날짜 이다.
당시 사람들은 생존시기와 나이를 알기가 어려운 것은 주로 생일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은 것과 상관이 있다. 그리스도교 공인 이전 로마의 명사들은 상당한 비용을 들여서 생일을 축하했다.
성직자계층으로 들어서는 날도 '생일'로 여겼다. 그래서 수도사와 사제는 이 날을 축하했다.
전에는 축하하는 일이 드물던 명명일(세례를 받은 어린이에게 성인의 이름을 주는 날)은 가톨릭 개혁의 시기에 특별한 중요성을 얻었는데 성인숭배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감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1158년 제국법을 정하려고 지도적인 법률전문가를 초빙한다. 이들은 모두 로마법 해석자드리었다. 그들은 볼로냐를 법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오릴락의 게르베르트(Gerbert von Aurillac, 훗날 실베스테르 2세)는 900년에서 1050년 사이에 가장 학식이 풍부한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거의 기적에 가까웠던 그의 학식은 그에게 검은 마법사라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도이칠란드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은 아주 오랫동안 최근의 과거만을 다루는 것을 뜻하다시피 해왔다. 19세기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으며, 특히 학교교육에서는 공식적으로 과거를 깍아내리고 있다.
기요 드 프로방스(guiot de Povins, 대략 1205년 사망)
Horst Fuhrmann
Georges Duby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7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