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잉글랜드에는 석공조합같은 것들은 없었다.
프리메이슨 최최 입문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엘리아스 애슈몰Elias Ashmole(1646년 입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애쉬모리언 박물관을 설립한 자로 연금술사이자 헤르메티시스트 그리고 장미십자회운이었다. (또한 애슈몰은 템플 기사단이 박해를 받아 사라진 후 처음으로 그들을 지지하는 글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템플 기사단의 초대 그랜드 마스터인 위그 드 파앵은 세인트 클래어 가家 사람인 캐서린과 결혼 했다. 본래 세인트 클레어 즉 싱클레어 가문은 원래 바이킹족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성(姓)을 참수형을 당한 스코틀랜드인 순교자 세인트 클레어에서 따왔다.
얼 윌리엄 싱클레어Earl william St Clair와 르네 당주는 친한 사이 였으며 둘 다 <황금 양모의 기사단Order of the Golden Fleece>의 단원이었다.
램지는 프리메이슨이 다이애나, 미네르바 그리고 이시스 여신들의 신비학파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엿다.
프랑스 프리메이슨에는 '메트르 자크Maitre Jacques'에 관한 기이한 전승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신비스런 인물로 중세 프랑스 석공조합원들은 그를 자신들의 보호자로 삼았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솔로몬 성전을 짓던 마스터 석공들 중 한사람 이었으며 히람 아비프(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가 죽자 13명의 장인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떠나 배를 타고 마르세유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커다란 적, 마스터 석공 수비즈Father Soubise의 추종자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그는 생트봄(막달라 마리아가 은거했다고 하는 장소)로 숨어버렸다. 그후에 그는 배반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매년 7월 22일(막달라 마리아 축일과 같은 날짜)에 그곳으로 순례를 떠난다.
알렉산드로 6세는 신기하게도 그(피코 델라 미란돌라)에 대한 고소와 위협을 모두 취소했으며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 그를 지지하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교황은 자신의 저택을 고대 이집트 주제로 장식했고 그곳에 여신 이시스가 있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1583년에 잉글랜드에 도착항 재빨리 필립 시드니 경 같은 선각자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아케이디아Arcadia』의 저자로 유명했다. 시드니는 잉글랜드의 뛰어난 오컬티스트인 존 디(1527~1606)의 제자 이다.
<개정된 메이슨>이라고 불린 폰 훈트가 설립한 단체는 1764년부터는 <엄격한 템플러 계율>이라는명칭을 사용했다. 이 단체는 독일에서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형제단Brethren of St John the Baptist>으로 알려졌었다.
<예루살렘 성저의 오래된 군사의 기사단Ancent and Mlitary Order of the Temple of Jerusalem>은 18
04년에 베르나르 레이몽 파브르팔라프라 이라는 이름의 어떤 의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설립의 근거를『라메니우스의 양도 헌장』에서 찾았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파브르팔라플가 진짜 템플 기사단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읻. 왜냐하면 자크 드 몰레에 의해 그랜드 마스터로 지명된 요하네스 마르쿠스 레메니우스가 1324년에 그 헌장을 썼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고대의 공인된 스코틀랜드 의식Ancient and Accepted Scottish Rite in America>의 그랜드 마스터인 앨버트 파이크...
시온 수도회의 주장에 의하면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신비스러운 '요한의 교회'-다른 말로 오르무스 형제단-대표자들을 만났고 그 결과 '비밀 정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잔혹한 마녀사냥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주요한 동기들 중 하나가 바로 산파들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었는데, 출산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산파들의 지식이 점찮은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크램와 스프렝게르는 유럽에서 마냐 사냥꾼들의 지침서로 사용된『마녀의 망치』라는 악명 높은 책의 저자들인데, 특히 가장 먼저 손봐야 할 대상은 산파들이라고 지적했다.
스스로 루이 17세라고 주장했던 샤를 기욤 논드르프charles Guillaume Naundorff(1785~1845)라는 사람의 주장을 지지했던 단체들 중 하나가 가르멜의 교회church of Carmel였다. 1840년대 초반 외젠 뱅트라Euge'ne Vintras(1807~1875)에 의해 설립된 이 단체는 '자비의 일Oeuvre de la Misericorde' 로 알려져 있었다. 뱅트라는 최상층 사람들을 그의 운동에 끌어들였는데도 악마숭배라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당국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뱅트라와 논드로프는 서로를 지지했다. 그 결과 뱅트라는 자신이 여론조작을 위한 재판에 말려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뱅트라의 사기혐의에 대해 증이들이 무죄를 증언했지만, 1842년에 5년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1847년 석방된 후 런던을 갔다. 1848년 교황은 이 종파를 이단으로 선포했으며 모든 구성원들을 파문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독립했음, 남성과 여성 모두 사제가 될 수 있음을 자랑했다.
뱅트라와 논도르프의 배후에는 <루이 17세의 구원자들>이라는 요한주의자들의 종파가 숨어 있었다. 이종파의 기원은 1770년대가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혁명에 앞서 일어났던 소요사태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주의자들은 성모마리아에 대한 환상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면 1846년 알프스 산맥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라 살레트La Salette에 나타난 성모마리아 같은 경우가 그렇다.[1846년 9월 19일 토요일 멜라니 칼바트(15세 소녀)와 막시맹 지로드(11세 소년)라는 두 어린이가 성모 발현을 목격했다._옮긴이]
1838년에 모두가 사제들이었던 바이야르Baillard 3형제가 '그리스도교 교리의 형제들Brohers of christ
ian Doctrine'이라고 불리는 단체를 설립하였다. (나중에 가르멜 교회에 합병됨.) 스스로 가톨릭신자로 여기고 있었던 그들은 산 위에다가 두 개의 종교 건축물을 세웠는데, 알자스에 있는 생트 오딜과 로렌 지방의 시옹보데몽Sion-Vaudemont이 그곳이었다.
페리 드 보데몽Ferri de Vaudemont이 14세기에 <시온의 노트르담 기사단Order de Notre-Dame de Sion>을 이곳(시옹보데몽)에 설립하였다.
페리의 아들은 이오랑드 드 바르Iolande de Ber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르네 당주의 딸이다. 그녀는 1480~1483년까지 시온 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를 지냈다.
1875년 뱅트라가 죽은후, 이 운도은 조제프 불랑Joseph Noullan 신부(1824~1893)에 의해 계승 된다.
불랑은 그 전에 라 살레트의 수녀원에 있는 아델 슈발리에라는 한 젊은 수녀를 꾀어내어 1859년 <영혼의 보상을 위한 협회>를 설립하였다.
장미십자회의 조지들 중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단체는 툴루즈의 라 사제스La Sagesse로 '지혜' 또는 '소피아'로 알려진 조직인데, 약간은 변칙적인 프리메이슨 지부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1850년경 <라 사제스>의 일원이었으며 존경받는 의사이자 연금술사였던 비콩트 드 라파스Vicomte de Lpasse(1792~1
867)는 <장미-십자가, 성전 그리고 성배의 기사단>을 설립했다. 그의 뒤를 이어 조제필 펠라당Josephi
n Peladan(1859~1918)이 기사단의 수장이 되었는데, 그도 역시 툴루즈 사람이었음 당시 프랑스 장미십자회 단체들의 대부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펠라당은 프랑스 작가인 엘리파 레비(진짜 이름은 알퐁스 루이 콩스타Alphonse Louis Constant, 1810
1875)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에로틱한 가톨릭 신앙과 함께 하는 마법' 이라는 표현되는마법 체계를 개발하였으며, <장미십자 전람회>를 조직하였다.
불랑의 가르멜 교회에 침투를 한 구아이타는 펠라당과 교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구아이타는 가르멜 교회에 불만이 있었던 오스발트 위르트라는 회원과 함께『사탄의 신전』을 집필했는데, 그 책에서 불랑의 무리들이 악마를 숭배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때문에 불랑과 구아이타는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마법적인 수단을 사용한다고 서로를 고소했다. 얼마후 불랑는 자연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구아이타와 불랑의 제자들 중 하나인 쥘 부아Jules Bois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고 쥘 부아는 장미십자회원의 하나인(파퓌Papus로 더 잘여진)제라르 앙코스Gerard Encausse와도 싸웠다. 이 두 싸움은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원래 이름이 주세포 발사모Giuseppe Balsamo인 칼리오스트로 백작(1743~1795)은 1766년 몰타를 방문 할때 오컬트에 입문했으며, 그곳에서 연금술사이자 장미십자회원인 몰타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이를 만났다. 칼리오스트로는 결국 연금술사이자 프리메이슨이 되었다. 그릭 그는 폰 훈트의 <엄격한 템플러 계율>에 큰 영향을 받았다. 1777년 4월 런던 소호의 제라드 스트리트에서 <엄격한 템플러 계율>지부에 입문했다.
칼리오스트로는 '이집트' 프리메이슨 체계를 설립했는데(대지부는1782년 리옹에 설립되었다.) 남성과 여성 회원들로 구성됨 여성 회원은 그의 부인인 세라피나가 이끌었다.
멤피스/미즈라임 운동의 또 다른 후계조직이 1888냔 설립된 <황금 여명의 신비 교단The Hermetic Ord
er of the Golden Dawn>인데 회원들 중에는 극장 매니저이면서『드라큘라』작가로 더 유명한 브램 스토커, 아일랜드 시인이자 애국자이며 신비주의자인 옝츠 그리고 불운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아내인 콘스턴스 와인드가 있었다. 이 교단은 맥그릭 마더스와 와인 웨스터콧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 직계를 따라가면 <황금과 장밋빛의 십자가 교단>이라고 하는 <엄격한 템플러 계율>의 교단이 나오는데, 실제 등급 이름과 의식의 많은 부분에서 그 단체를 따라 했다.
<황금여명>의 설립자들 중에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누이인 무아나 마테르도 있었다.또다른 회원인 플로렌스 파는 런던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여배우 였다.
소니에르 신부는 1891년 양피지를 손에 넣는다.
생 쇨피스 성당은 파리의 자오선이 건물 바닥에 구리선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선은 렌르샤토 근처로 지나간다. 그 성당은 1645년 장자크 올리에가 이시스 사원의 기초 위에 세웠으며, 신성한 기하학의 황금률에 따라 설계된 건축물이었다. 성당 이름은 메로빙거 왕조의 다고베르트 2세 때의 부주 주교의 이름을 타서 지었다.[성 술피치오를 말한다._옮긴이] 그의 축일은 1월 17일 이다.
1781년 1월 17일에 죽은 마리 드 네그르 다블레 무덤인데 소니에르와 마리는 무덤을 덮고 있던 석판과 비석에 새겨진 문장을 지웠다.
앙투안 사제는 그 묘비들을 무덤 주인이 사망한 지 10년 후인 1791년에 세웟는데 동시에 '기사의 돌'을 갖다가 교회 안에 뒤집어 놓았다. 소니에르는 기사의 돌 밑에 있던 지하 묘 입구를 발견했으며 실제로 그곳으로 내려가었다고 한다. 글나 그는 그 이후에 성당 바닥을 새로 깔면서 그 입구를 다시 감추어버렸다.
들루와 브레티니가 쓴『렌르샤토: 프랑스 역사의 가장 큰 비밀』에 따르면, 마리 드 네그르의 석판은 실제로 앙투안 비구 신부가 이전의 아크르 무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존 스티븐슨은 아르크 무덤에 관한 지역 전승 하나를 들여주었는데 그 전승에 의하면, 그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무덤이었거나 어떤 점에서는 막달라의 무덤을 찾을 수 있는 이정표나 표식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마리 드 네그르의 석판을 보면 그 가운데에 화살표가 세로로 그려져 있다.
렌의 교구 사제가 되기 전 앙투안은 그곳에서 20km 정도 떨어진 르 클라Le Clat라는 산골마을의 사제로 있었는데, 소니에르도 렌르샤토에 오기 바로 전에 르 클라의 신부로 있었다.
1838년 <멤피스 의식>을 설립한 자크에티엔 마르코니스 드 네그르(Jacques-Etienne Marconis de Ne'gre(1795~1865)는 마리 드 네그르 다블레와 같은 집안 사람이었다.
오트폴Hauipoul가문 사람이었던 장마리알렉상드르는 1778년 <개정된 스코틀랜드 의식> 안에 템플 깃단의 완곡한 표현인 <성시의 자애로운 기사들>의 등급을 창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 가문 사람들은 라 사제스 프리메이슨 지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지부에서 <장미-십자가, 성전 그리고 성배의 기사단>이 생겨났다.
렌의 영주인 오트폴 가문은 관례상 교회 지하에 있다고 하는 가족 납골소를 이용하였는데, 왜 마리의 무덤은 그런 관례를 따르지 않았을까?
"그라네Granes에서 편지가 옴..." 1891년 9월 21일일자의 소니에르의 편지
양피지 서류는 필리프 드 셰리제가 그 서류들을 1956년 조작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클레르의 동료이며 1984년 시온 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 자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앙리 부데는 자신의 교회 묘지에 있는 묘비의 비문들을 수정했으며 그곳에 있는 경계표릉 이동시켰다고 한다.
드 주아이외즈de Joyeuse가문이 아르크와 또 다른 '요한'의 교회가 있는 쿠이즈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1646년 기즈의 공작 샤를의 미망인인 앙리에트 카트린 드 주아이외즈가 랑그도크에 있던 그녀 소유의 모든 땅을 프랑스 왕조에 팔았다.
쿠이즈와 아르크, 둘 중 한곳에는 노트르담 드 라 뻬로 알려진 검은 마돈나가 있었다. 그것을 1576년 드 주아이외즈가 사람들이 파리로 가지고 갔는데, 지금도 12구(區)에 있는 예수성심수녀회의 성당에서 볼 수 있다. 묘하게도 소니에르는 그 수녀회의 상급자인 오거스틴 마리 수녀와도 서린왕래를 하였다.
니콜라 빠비용은 다른 두명의 성직자인 성 빈센치오 드 폴과 생 쉴피스 성당의 설립자인 장자크 올리베에와 더불어 꼼바니에 뒤 생샤크레망(성체외)의 배후 인물이었다.
13세기에 베네딕트 교단에 속한 나르본의 대주교(리무의 영주)와 도미니크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대주교와 렌르샤토의 영주인 기욤 드 부아쟁guillaume de Voisins 사이에 소유권을 놓고 벌어진 싸움 때문에 나중에는 왕이 중재에 나서야만 했다. 1344년 3월 14일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 성당(리무의 북쪽의 노트르담 드 마르세유 대성당)을 파리의 나르본 대학에 넘겨주었음, 이후 그 상태가 지속되다가 17세기 중반에 알레레벵의 주교인 빠비용에게 소유권이 넘어 간다. (나르본 대학의 주요 수입원은 오드주 아질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 성당이었다.) 혁명 기간 동안 그 교회의 땅이 팔렸으나 검은 마돈나는 <엄격한 고해자들의 수도회>라는 알려지지 않은 단체가 숨겼는데, 그 단체는 프리메이슨의 <개정된 스코틀랜드 의식>과 셰프데비앙Chefdebien 가문과 관련이 있다.
<필라델피안>은 셰프데비앙 후작이 1780년 나르본에 설립한 프리메이슨의 <개정된 스코틀랜드 의식> 이었다.
소니에르의 동생 알프레드는 셰프데비앙 가문의 가정교사였으며 그 가문의 문서를 훔쳤다는 이유로 쫒겨난일이 있었다.
19세기 중반 노트르담 드 마르세유 대성당은 여러 명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렌르샤토를 관할하는 카르카손의 빌라드 주교는 소유자들을 대상으로 빈틈업이 사전 작업을 해놓은 다음 한 은행업자를 '앞세워' 그 모든 지분을 매입하였다. 흥미롭게도 판매가 이루어진 날은 1893년 1월 17일 이었다. (빌라드는 검은 마돈나를 손에 쥐게 되었으며 잠시 동안 리무에 보관하였다.) 넉 달도 안 되어 새로운 소유자인 은행업자는 다시 주교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1912년 교황 비오 10세는 그 성당이 대성당으로 격상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라드 드 세드는 노엘 코뷔로(소니에르 소유의 땅을 산 사람)부터 양피비를 건네 받았는데 그(코뷔)에 의하면 소니에르가 원본을 파리고 가져가기 전에 마을 장에게 준 사본들이었다고 한다. 코뷔는 이전부터 소니에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40년대 초반에는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일부러 소니에르의 재산등을 이어받은 마리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교회는 항상 소니에르의 부동산을 넣고 싶어 했지만, 그 만큼이나 그런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실 교회는 그 땅을 사기 위해 마리를 여러 번 설득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과정에서 고Gau라는 사제가 코뷔를 설득하여 그를 대리인으로 내세우는데, 암도 마리가 코뷔에게 땅을 팔면 다시 교회로 넘기기로 한 계약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뭔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중에 코뷔는 교황청에게 직접 양도를 신청했으며 교황은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자신의 특사를 주교관구에 직접 급파했다. 이때 파견된 교황 대사가 다름 아닌 론칼리 추기경으로 후에 교황 요한 23세가 된다. 주교관구에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으며 코뷔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황청은 코뷔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소니에르가 성당내 조상들을 조각하기 위해 선택한 조각가 지스카르Giscard는 전문적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일을 하긴 했지만 프리메이슨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제프 펠라당의 비서인 몽티는 1934년 <알파가라테 기사단>을 설립하는데, 1942년에는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클레르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다.
푸생이 그린「아르카디아의 목자들」 테마는 푸생의 창작물은 아니며 이미 20여년 전에 조반니 프란체스코 게르치오가 처음으로 표현했었다. 푸생에게 그림을 의뢰한 사람은 추기경 로스필리오시Rospiglio
si였는데 사람들은 게리치오에게 그와 같은 주제로 그림을 부탁한 사람도 역시 로스필리오시였다고 보고 있다. Et in Arcadis ego라는 구절이 예술작품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16세기로 어떤 독일인의 조각 작품인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황금시대를 연 후에 폐위된 새로운 시온의 왕...」
앙투앙 브루조는 막달라가 프랑스에 착륙한 지역은 까마르그가 아니며 루시용의 해안지역이고 막달라 마리아는 프로방스 지역이 아닌 렌르샤토 근처의 랑그도크에서 쭉 살았다고 한다.
14세기에 생트크로와에 있는 그 수도원에 예수가 살아있는 나무에서 처형되는 장면이 나오는 벽화가 그려졌다. 생트크로와의 탁발수도사이자 유명한 학자였던 동포리카르프 드 라 리비에르는 그 수도원 보수 공사의 책임자가 된다. 브루조에 의하면 리비에르와 푸생은 소시에테 안젤리크Socie'te' Ange'lique라고 알려진 비밀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르 필라 언덕에서 필라Plat 산으로 오라가는 아주 오래된 길이 있는데 그곳에 막달라에 헌정된 예배당이 하나 있다. 그 길은 말레발이라는 마을에서 시작된다. 그 마을의 성당에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와 성ㄴ 제르마나의 상이 있는데, 렌르샤토 성당에 있는 것과 똑같다. 유래를 찾아보니, 은자 성 안토니오(소니에르의 성당에 잇던 또 다른 성인으로 그의 축일은 1월 17일이다)에게 헌정된 성당이었다. 그리고 막달라 예배당에는 동굴 안에 있는 그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렌르샤토에 있는 것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소니에르가 제단에 묘사한 배경에 아치와 기둥이 하나씩 보인다. 브루조의 지적에 따르면, 켈트어로 아치는 필라pyla, 기둥은 라틴어로 필라pila이며, 따라서 발음으로 볼때 그곳은 르 필라를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평선에 보이는 산 봉우리는 필라산 근방으로 생각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1898~1899년에 리옹지역에서 마차와 말들을 빌리기 위해 작성한 송장들을 보건데, 확실히 소니에르는 그가 흠모했던 막달라의 유물을 찾기 위해 르 필라 지역을 조사하며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크레르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는 '요한 1세' 이며 이는 '상징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비워두었다'고 한다.
시온 수도회는 자신들이 이시스를 주요시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니콜 도우Nicole Dawq , 텍산 샤를 바이워터스Texen Charles Bywaters
19세기 중(?) 이시스 20세기 수메르, 엔릴, 인안다.
사라진 도시 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