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괴유.
번호 : 4434 글쓴이 : minamjun11
조회 : 208 스크랩 : 0 날짜 : 2006.12.24 23:00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 얼굴이 희다는 것은 피부가 하얗다는 표현일 수 있을지 모르나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동양인들의 눈은 흰자와 검은자 뿐이나, 백인들은 흰자와 검은자 뿐이 아니죠. 표현에 따라 빛날수도 있다 하니 백인일 가능성이 있군요. 게다가 키가 9척. 크죠.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濘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 斬頭. <扶餘>人, 旣失其王, 氣力摧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그는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틈을 노려 기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말을 급히 몰아 진군하다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앞으로 갈수도 뒤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 때 괴유를 출동시켰다. 괴유가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가니, 부여의 1만여 군졸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이 때 괴유가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이미 왕을 잃고 기세가 꺾였으나,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怪由>卒.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 “臣<北溟>微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 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司以時祀之.
괴유가 죽었다. 처음 그의 병이 위독했을 때 왕이 직접 가서 문병하였다. 그 때 괴유가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 말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그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관리를 시켜 철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 북명의 미천한 사람이라는 뜻은 "북쪽의 바다" "북쪽의 어두운... 즉 어두운 북쪽이란건 북쪽 저 멀리란 뜻이기에 뭐라고 해석하든 결국에 북쪽의 먼 곳이라고 공통적인 설명이 됩니다. 그럼 괴유가 북쪽의 어느 먼 곳에서 왔다는 것은 하나 확실합니다.
재미난건 무엇이냐면...
1. 실제 백인이라고 한다면 대체 어떤 식으로 말이 통했을까요? 고구려 사람이 당시 백인의 말을 썼을까요? 아니면 당시 백인들이 고구려 말을 썼을까요? 그리고 대화가 통한다는건 이들 사이를 통역해 주는 통역사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통역사가 있다는 것은 백인의 어느 국가건 집단이건 뭐건 간에 고구려가 아니더라도 당시 북방의 여러 국가와 통교를 했었다는 뜻이 되겠군요. 그렇다면 대체 언제 부터 백인과 만주 인근의 국가가 서로 통했을까요?
괴유가 백인이라면 부여나 고조선에도 백인 관리가 있었을게 뻔합니다.
더 크고 , 더 강하고 , 영토도 훨씬 넓은 두 국가에 고구려 처럼 백인이 와서 벼슬을 달라고 하는게 충분히 가능했을 겁니다.
만약 실제 백인을 처음으로 기용했다는 부분이라고 한다면 하멜표류기에 나오는 것 처럼 서로 말이 안통하고 뭐가 뭔질 몰라 하멜 일행처럼 감금당하기 일쑤였을 겁니다.
2. 괴유와 같이온 마로는 정체가 뭘까요?
赤谷에서 왔습니다. 적곡 사람입니다.
赤 - 붉다
谷 - 골짜기...... 그러나 벌거숭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백인 중에선 털이 흰 경우도 있고, 노란 경우도 있고, 갈색인 경우가 있는데 정말 진한 갈색의 경우도 있고 조금 붉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마로도 다시 생각해 보면 몸의 털이 붉은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적곡을 흔히들 붉은 골짜기라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붉은 벌거숭이... 지명이란게 삼국 초기는 적어도 무작정 지명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게 사실입니다.
그럼 붉은 벌거숭이들이 사는 곳에서 마로가 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적곡 사람들은 긴 창을 잘 사용한다.
2. 적곡 사람들은 부여에 대해 잘 안다.
마로는 적곡 사람이기에 긴 창을 사용하고 적곡 사람이라 부여에 대해 잘 알아 부여로 쳐들어가는 공격로를 안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괴유가 백인이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더 생각해 괴유와 마로 모두 백인이라는 생각을 하는건 무리일까요?
그럼 궁금한게 생깁니다. 북명이란 지명은 뭔가?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남해왕 16년 봄 2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이를 왕에게 바쳤다.
위치가 분명하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지명
""북명향"" ""북명산""
북명이란 지명은 사실 신라 본기에 딱 한번, 고구려 본기에도 괴유와 관련되어 한 번나온거 빼곤 나오질 않습니다.
사실 북명이란 단어 자체가 무언가를 특별히 지칭하는게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의 단어이기 때문에 잘 나오지 않는게 정상일지로 모르겠죠.
하나 더 생각해 봐야 할 점은, 고구려인 관점에서의 북명과 신라인 관점에서의 북명은 분명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일단 북명이란 단어가 어느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라는 점, 신라와 고구려의 관점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김부식이 말한 위치가 분명하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는 삼국시대 지명인 북명향과 북명산은 삼국 당시에 주목 받지 못한 외딴 지명인게 확실합니다.
결국 북명에서 왔다는 괴유는 그저 북쪽 어딘가에서 왔다는 뜻이 되겠고, 마로는 골짜기에서 왔다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나 몸에 털이 붉은 백인 이었다는 점으로도 추론이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로가 사용했다는 긴 창은 동이전을 참고해 보면 왜에서 부터 북방 민족까지 모두 사용하는 것인지라 어느 지역의 특징이라고 말하긴 힘듭니다. 다만 동이전엔 긴창을 주로 사용한다 안한다라는 차이와 긴창이 많다와 적다의 차이가 있기에 이런 것들을 걸러내어 추론한다면 괴유의 조상이 어느 지역에 정착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저는 괴유와 마로가 부여에서 새롭게 투항해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새롭게 투항해 왔기에 공을 세우기 위해 앞장섰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4년 겨울 12월,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 옆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밥을 짓게 되어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이었는데, 제 누이가 잃었다가 이제 왕께서 얻었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왕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주었다. 왕이 이물림에 도착하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부여 공격에 나선 대무신왕에게 부여의 세력들이 속속 투항합니다.
1. 비류수 근처의 세력(負鼎 - 부정을 저는 싸움졌다는 뜻이죠.)
2. 이물림 근처의 세력(이물림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날카로운 물건들의 숲" 즉, 매복한 병사들이라는 뜻으로 대무신왕이 이 매복병들을 제압하고 합류시켰다는 뜻이죠.)
헌데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등을 얻었다는 부분에서 이물림 근처의 세력은 부여의 왕족이거나 다른 부여 동맹국의 정규병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과 옥새 같은 귀한 물건이 나오겠습니까?"
3. 북명, 적곡 사람의 투항.
이게 모두 12월 한 달도 안되는 시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다음해엔....
부여와 전면전을 펼쳐 대소왕의 목을 베지만 부정씨와 신마 거루가 도망.. 즉 부여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세력이 다시금 배신하는 형태로 그려지고 이물림에 이르러선 병사들이 밥이 없어 굶주립니다. 대무신왕은 자기 잘못이라며 나랏 사람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즉, 대무신왕 4년에 투항한 세력인 비류수 근처의 부정씨와 이물림의 세력은 즉시 고구려를 재배반해 부여에 붙고 북명 적곡 사람은 이름이 남아 고구려를 따릅니다.
무슨 차이냐면 고구려를 끝까지 따르면 이름이 남고 끝까지 따르지 않으면 은유적 표현으로 남는 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고구려인 입장에선 당연한 조치입니다.
말도 안듣고 중간에 배반한 사람들을 지면 할애해 가며 잘 남길 필요는 없는 것이죠.
자 ... 이걸 말씀 드린 이유는 당연히 괴유와 마로 때문입니다.
괴유와 마로가 부여에서 새롭게 고구려에 합류된 세력의 대표주자들이라면 이미 백인 집단은 만주 일대에서 그 이전시기 부터 관직 생활을 해왔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장수왕에 대한 인물평은 "모습이 괴이하면서 걸출함. 지혜와 용기가 비범함"입니다. 모습이 왜 괴이할까요? 지나치게 너무 앞서나가는 것일지도 모르나 백인 집단이 이미 고구려 초기에 귀족화 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보여 주었습니다.
백인 괴유를 왕이 친히 살폈으니 당연히 귀족이었던건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괴유가 백인이던 아니던 그다지 상관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 내 조상님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단일민족이며 순수한 한개의 혈통으로 내려져 왔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사실아닌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기에 팍스 고구려를 만들기에도... 팍스 고조선을 만들기에도... 팍스 코리아를 만들기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괴유가 백인이라고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말해 보세요.
에이.... 말도 안돼~ 우린 단일민족이자나~~
라고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겁니다
의식의 변화를 통해 우리 역사에 흑인, 심지어 애스키모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인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도 안되는 억측은 안되겠지만 "가능성"만큼은 다양하게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모때 잠깐 들은 내용에 대해 저 나름대로 억측을 피워가며 글을 올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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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인 지금 생각해보니 괴유가 북명사람이고 부여왕을 치는데 단순 일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여왕의 목을 베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말을 볼 때 부여에 대해 상당한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괴유를 대무신왕이 받아들인 것은 그가 9척 크기의 대 역사인 것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처음보는 사람을 선봉으로 삼는 건 군 전체의 사기를 생각해 봤을 때 인사문제에서 큰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참전한게 아니라 부족 규모로 참전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북명인 괴유는 떠돌이 백인이 아니라 부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부족규모의 백인집단 수장이란 얘기가 됩니다. 06.12.24 23:16
한단인 그렇다면 대소왕의 부여는 이 당시 북명 부근(바이칼?)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거나 혹은 북명인 세력이 타격받을 만한 어떤 교역루트 독점,,?? 같은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06.12.24 23:19
신농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동성 지역에서 백인 유골이 출토되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백인은 유전적으로 황인과 그다지 멀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그 교류의 역사도 상당히 거슬러 올라가고, 사례도 꽤 보이는 듯 하니 괴유가 백인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06.12.25 00:22
★明治好太王★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 들을 수 있을까요? 먼 고대의 백인과의 교류 이야기는 치우천왕기에서 밖에 들어보지 못해서...^^;; 06.12.25 00:37
신농 저도 백인 유골 출토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백인과의 연관성 문제는 자주 등장하고 있죠. 켈트인이 동방에서 왔다거나, 흉노가 백인이었다는 설 등등.. 또 실제로 투르크인들도 백인의 혈통이 혼혈된 경우이지요. 우리 역사에서 백인을 만난 것이 조선 후기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고구려와 교류했던 서역인들도 코 큰 사람들이라고 하죠. 06.12.25 01:23
안양사랑 '가깝다', '멀다' 라는 개념은 상대적입니다. 즉, 비교상대가 있을 때에 써먹을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죠. 황인종과 백인종이 유전적으로 가깝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비교대상이 될 제 3의 인종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것이 흑인종이라면, '황인종은 흑인종보다는 백인종에 가깝다' 라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런데 '유전적으로 백인은 황인과 가깝다' 라는 말의 의미가 단지 그것 뿐이라면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06.12.25 01:54
안양사랑 왜 큰 의미가 없냐고 했느냐면, 유전적으로 백인이 황인과 가깝다는 이야기는, 최초의 이브로부터 시작된 인류가 처음에 흑인종에서 시작했다가 백인종과 황인종이 가장 나중에 분화되었다는 의미 이상으로 다른 정보를 주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백인종과 황인종이 흑인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이야기가 한국사에 뭔가 의미있는 정보를 줄까요? 참고로 백인과 황인의 유전적 거리가 가깝다는 이야기와 백인이 동북아시아에 거주했다는 이야기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06.12.27 15:48
신농 물론입니다. 3인종 가운데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말의 의미가 곧 "흑인종은 같은 인류여도 좀 다르다"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dna는 모두 동일하니까요. 06.12.25 22:08
견초 여담인데 -_- 저런 특징을 가지고 삼국지에 나오는 손권이 사실 오부인이랑 어떤 표류중인 외국인이랑 바람나서 낳은 자식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죠; 입이 크고 눈동자가 번쩍이는 빛을 내고(강표전) 자주빛 수염을 가지고 있다(배주) 그러고 보면 손권도 좀... 수상하네 -_- 06.12.26 01:11
강감찬 저. 괴유도 하멜처럼 부여에 잡혀서 고생하다가 고구려로 도망친게 아닐까요? 왜, 하멜 일행이 중간에 청나라 사신과 접촉한적이 있었잖아요.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을 숨겼지만 말입니다. 부여에서 잘 대해주지 않으니까 고구려로 투항했을 가능성은 있을까요? 06.12.26 13:13
minamjun11 저는 투항했다고 봅니다. 윗 글에도 적었지만 투항한 사람일 것 같습니다. 투항의 이유는.... 뭐.... 뭔질 모르겠네요. 기록이 없어서... ^^;; 06.12.2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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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 서양인의 만남과 '괴유'
번호 : 4436 글쓴이 : 麗輝
조회 : 91 스크랩 : 0 날짜 : 2006.12.25 14:46
정선 청동기 유적지 ‘서양인 유골’ 나왔다
현재의 영국인과 유사한 유전인자를 가진 약 3,000년 전의 인골이 국내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발굴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강원문화재단 강원문화재연구소는 4일 “강원 정선군 북면 여량 2리 아우라지 유적에서 지난해 출토된 인골을 1차 분석한 결과 영국인 유전자와 유사하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강원문화재연구소측은 “서울대 해부학교실 신동훈 교수팀이 DNA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유럽계통의 백인, 특히 현재의 영국인 유전자와 유사하다는 1차 분석결과를 내놓았다”며 “국제적으로도 구체적인 확인을 위해 영국과 일본에 이 인골의 분석을 의뢰했다”고 말했다.
이 인골은 지난해 10월 아우라지 유적내 4기의 고인돌 중 한 곳에서 토기 조각들과 출토됐다.
지현병 발굴조사단장은 “당시 두개골, 골반, 턱뼈, 대퇴골, 갈비뼈 등의 일부가 발굴됐다”며 “인골과 함께 출토된 부장품의 양이 적어 인골 출토 유적의 정확한
연대확인은 힘들다”고 전했다. 지단장은 “다만 인근의 유적·유물들과 비교할 때 조사단의 입장은 약 기원전 970년 정도의 유적으로 본다”며 “국내에선 아직 선사시대 유럽계 인골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없어 향후 고고학계의 연구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김병모 문화재위원(한양대 명예교수)은 “아우라지 인골은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라며 “개인적으로 볼 때 유럽계 유전인자를 가진 이 인골의 주인공은 벼농사 전래 경로를 따라 인도~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국내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서양인으로 보이는 인골이 출토되기는 1965년 충북 제천 황석리 유적 이후 두번째다.
‘황석리 인골’은 해부학적으로는 서양인으로 추정되지만, DNA염기서열 분석 등의 더 정확한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아직까지 없어 학계에서는 서양인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정선|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유골 DNA분석-
오래된 유골의 경우 뼈에 있는 DNA 염기서열을 분석한다. 일단 뼈를 모두 갈아서 용액에 넣은 후 DNA를 추출한다. 이후 DNA증폭기기(PCR)를 이용해 미토콘드리아 DNA에서 특정부위(D-루프)를 증폭해 사용한다. 염기분석 결과를 표준염기서열과 비교해 변이된 정도를 보고 인종을 구분할 수 있다. 동양인끼리의 구분은 쉽지 않지만 동양인과 서양인의 구분은 명확한 편이다. 다만 과거의 유골을 현재의 사람 유전자와 분석하는 것이므로 오차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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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전파과정 유럽인 유입 추정”…백인인골 주목
영국인 유전자와 유사한 인골이 출토된 아우라지 유적은 구석기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유적·유물이 발굴되는 복합유적으로 근래 고고학계의 큰 주목을 받는 곳이다.
강원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부터 발굴 중인 유적은 특히 국내 최고(最古)의 청동기 유적으로 신석기에서 청동기시대로 문화가 전이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확인된 청동기시대 유적·유물만으로도 남한내 청동기문화의 시작을 알려줌과 동시에 전국으로의 청동기문화 전파 과정을 드러내 “교과서에 실릴 만한 가치를 지닌”유적이란 평가다.
학계의 관심을 모으는 인골은 아우라지유적내 고인돌 4기 중 제2호에서 출토됐다. 윤석인 책임연구원은 “돌널 내에서 특별한 부장품은 없이 토기 조각들과 출토됐다”며 “인골을 분석한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따르면 신장은 약 170㎝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1차 인골분석에서 백인, 그것도 영국인 유전자와 가깝다는 결과에 대해 발굴단은 물론 학계에서도 그 해석을 놓고 당혹스러워하는 실정이다. 우리 고고학계의 큰 연구 숙제를 안긴 것이다.
지현병 발굴조사단장은 “분석에 대해 놀랐다”며 “일본, 영국쪽의 분석도 1차와 같다면 학계에 공식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단장은 “황석리 인골을 지금이라도 더 조사하는 등 학계의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는 “인도를 통한 벼농사문화가 전파되면서 인골의 주인공이 함께 이 땅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김교수는 “고인돌은 인도, 대만 등에서도 확인된다”며 “지금도 힌두어를 쓰는 인도인의 상당수는 유럽계 유전인자를 가진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문화교류상 가능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3일 발굴현장에서 가진 유적발굴 지도위원회에서 지도위원들은 하나같이 유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치밀한 발굴을 주문했다. 이건무 용인대 교수(전 중앙박물관장)는 “청동기문화가 신석기문화의 특성과 전통을 잘 이어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청동기문화인이 신석기문화를 밀어내고 들어왔다는 기존의 학설을 다시 생각해야 할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북한의 유적 등과 비교하는 등 학계의 많은 연구과제를 안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권구 계명대 교수도 “한마디로 신석기와 청동기시대가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유적”이라며 사적 지정을 통해 장기적인 발굴이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선아리랑’의 발원지인 아우라지와 접한 유적은 당초 아우라지관광단지 조성을 위해 발굴이 추진되다 문화유적이 확인되면서 선사유적공원이 들어설 전망이다. 유창식 정선군수는 “선사유적공원, 조양강과 접한 수변공원 등 여러 유적보전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지자체 재정상 발굴비용 등의 부담이 커 사적지정을 통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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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 청동기시대 인골 '백인' 추정"
신동훈 교수 "확신은 너무 성급"
정선 아우라지 유적의 청동기시대 고인돌묘에서 2005년 출토된 인골이 DNA 염기서열 분석 결과 백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신동훈 교수는 아우라지 유적 조사단인 강원문화재연구소(연구실장 지현병) 의뢰로 이곳 제2호 고인돌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지금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2호 고인돌묘에서는 두개골과 대퇴골이 각각 덮개돌(길이 1.7m, 폭 1.3m, 두께 30m) 아래쪽에 마련된 판자형 석관(石棺. 돌로 짠 널. 길이 1.1m, 폭 .5m) 내부 서쪽과 동쪽편에서 각각 발견됐다. 이 중 두개골은 지름 15cm, 대퇴골은 길이 42cm였다.
신 교수는 "1965년 충북 제천 황석리 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이 백인이라는 주장이 있어 아우라지 유적 인골에 대한 이번 1차 분석결과와 어떤 연관성을 지닐 지도 모르겠다"면서 "하지만 아우라지 인골이 백인이라고 확신하기에는 너무 성급하며 해외 관련기관과의 크로스 체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인골이 정말 백인이라면, 한국전쟁 같은 시기에 묻힌 백인 병사의 뼈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출토 인골을 백인이 접촉을 했을 경우에도 DNA 분석 결과는 백인으로 나올 수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신 교수는 이어 "국내 청동기시대 유적에서의 인골 출토 사례가 적은 데다, 그나마 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뤄진 경우가 거의 없어 이에 대한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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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계에서는 이미 인류 이동이나 문화 전파에 대해서 어느정도 국제성(?)을 인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이 기사를 제 까페에 12월초에 정리했었는데 그때 여기에도 기사를 올렸는 줄 알았는데 지금 찾아보니 없더군요. 다른 분들도 안 올리신 것 같고요. 암튼 괴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에 한번 올려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괴유'와 '부분노' 2명을 좋아하는데 이 2명의 활약상은「고구려본기」전체 중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전자는 당대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부여와의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뚫고 적장 대소(물론 이때 그는 총사령관이었지만 실질적인 지휘를 그가 안 했을 수도 있지만요)의 목을 쳤고 고구려 최초로 수묘인을 허락받은 고구려 초기의 명장이었습니다. 또한 후자는 당시 고구려와 인접하고 변경을 어지럽혔던 선비를 공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고구려 초기 명장으로서 활약했던 인물이었고요.
그 중에서 괴유에 대해서는 이미 몇몇 학자들이 백인일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후 사정에 대해서 학설이 될만큼 가설을 내세운 사람들은 없지요. 이럴때는 문헌사학이 아닌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지요. 흔히 형질인류학이라고 부르는 그런 학문적 도움을 얻으면 기록이 없는 시기, 인골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는 고고학적으로 어떤 사실들을 재해석하는데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주고요. 특히 이처럼 기록이 없는 분야에서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접근법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처럼 말이죠.
정선은 올해 말에 애산리라는 곳에서 발굴작업이 있어서 갔었는데 조선시대 기와요지가 20여기가 넘게 나와서 결국은 그중 상태가 양호한 것들은 보존처리 하기로 했습니다. 왜 그런 강원도 오지에 그처럼 대규모 기와요지가 자리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고서를 만들어봐야 알겠지요. 암튼...이처럼 강원도 지역은 고고학적으로 다른 지역들과 다른 문화적 양상을 보이는 곳이어서 독자적인 문화권 설정이 가능한 지역입니다. 흔히 역사적으로 동예라고 부르는 국가와 겹치는 문화적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보다 올라가면 임둔군이나 현토군의 흔적을 이 곳에서 찾기도 합니다. 다른 지역과 토기를 통한 교차편년을 시도했을때 강원도가 제주도처럼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이는 것 역시 이 지역이 독창적인 문화권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지요.
그런만큼 정선에서 청동기시대 서양인 유골이 나왔다는 사실은(물론 더 자연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지만) 그 지역이 결코 꽉 막힌 지역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실시했던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성 토양인 우리나라에서 인골이 많이 남지 않기 때문에 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런 흔적은 다른 지역에도 충분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위에서 보듯이 인도를 통한 벼 전파 루트를 따라 온 서양인으로 봤다면 청동기시대 수전 유적이 대규모로 확인되는 충청도 지역에 서양인이 많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실제 유골 출토가 많지 않으므로 속단하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괴유는 충분히 서양인이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을 듯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역사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딱히 어떤 해답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문헌사학자 중에서도 괴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암튼, 이제는 모든 학문이 하나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서로 통합해가는 과정이 필요한 상황인만큼 더 다양한 방법론들을 통해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확인해봐야 할 겁니다.
고로 위에서 님이 쓰신 괴유에 대한 가정은 충분히 검증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님의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한 근거가 희박한 것이 사실이고요, 보다 확실한 무엇인가가 필요할 듯 합니다. 정선에서 발견된 인골 또한 아무리 서양인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양자를 연결시켜줄 어떠한 문화적인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어디까지나 허공에 붕 뜬 존재가 되어버릴테니 말이죠. 그러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확실하고 다양한 근거들을 한번 알아보는 것 또한 님 스스로한테 많은 공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그리고 이번에 정모에 다녀오신 것 같은데(딴 게시판에 쓴 정모후기를 보니) 재밌으셨나봅니다.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대강 알 것 같은데 특히 님께서 신석기시대 유적인 홍산유적에서 확인된 다양한 성곽 유적에 대해서 감명받으신 것 같더라고요. 덧붙여서 차탈휘유크 유적이라는 곳이 있는데 신석기시대 1만명 가량이 거주하던 대규모 취락주거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계급사회 혹은 일종의 정치체라고 불릴 수 있는 단계의 시기적 구분을 청동기시대로 잡고 있는 것과 달리 이미 신석기시대때 만단위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 자체가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요. 네이버에서도 쉽게 검색이 되니까 한번 찾아보시고, 보다 자세한 자료가 필요하시면 제가 따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참고로 동아시아에서 거대 성곽 도시가 많았던 중국의 경우 춘추시대만 해도 왠만한 국가의 도시들은 많아봐야 5천호 정도 안팎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앞서는 신석기시대때 이미 수천호를 넘나드는 도시가 있었다면 이건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인류문명의 수준이 이른 시기부터 뛰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겠죠. 즉, 역사는 지금 보이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 우리가 그 안에서 과연 몇 %나 파악할 수 있는지를 모를 뿐이겠죠.
암튼...님이 고민하는 괴유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논리를 발전시킬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봅니다. 그럼 이만...
아,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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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amjun11 음.... 그렇군요. 좋은 자료 주셔서 감사합니다~ ^^ 06.12.25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