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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 상해공방전 / 남경방위전. 그 처절했던 순간..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1.11|조회수261 목록 댓글 0
[중일전쟁사] 상해공방전
번호 : 58   글쓴이 : 깜빡이
조회 : 254   스크랩 : 0   날짜 : 2006.10.1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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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서안사건직후 장개석은 이전의 이른바 "선안내후양외"(우선 안을 공고히 하고 후에 외적에 대항한다)라는 정책을 버리고 드디어 중국을 하나로 뭉쳐 일본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은 만주국을 발판으로 대규모 육군을 파병하여 점차 남하하고 있었다. 또한 한편으로 상해에 파견된 해군이 제 2전선을 열어 양자강과 수도 남경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중국의 상황은 매우 위급했고 장개석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해 활로를 열어야 했다.

 

그가 보기에 상해 파견군은 북중국에 전개하고 있던 일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하였다. 북지나에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남해해 오기전에 우선 상해의 일본군을 구축한다면 남경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중국 인민과 중국군의 사기를 드높일 수 있었다. 게다가 상해에서 남경에 이르는 일대에는 대규모의 중앙군이 포진하고 있었고 이들은 북중국의 군벌연합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원, 장비면에서 잘 장비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독일 군사 고문단에 의해 훈련된 총통직속의 최정예 사단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일본 정부도 상해는 제 1차 상해사변이후 정전협정을 통해 상해일대에 중국측의 군대주둔이 금지되고 방어시설 구축이 불가능해짐으로서 공략하기가 편리한 곳으로 보여졌고 또 상해는 장개석의 수도 남경과 가깝기 때문에 곧장 남경까지 공략해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측은 충돌하여 제 2차 상해사변이 발발하게 되었다.

 

당시 상해에는 일본 해군 제 3함대가 주둔하여 상해일대의 양자강을 경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휘하의 "상해특별육전대"라고 불리는, 해군만의 육상전투 전문부대가 상주하고 있었으며 병력은 약 2500명이었다. 일본군외에도 공동조계에 영국군 2600명, 미군 2800명, 프랑스군 2000명, 이탈리아군 800명등이 주둔하여 상해는 조계를 중심으로 "국제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장개석의 군대가 상해주변지역에 주둔을 시작하면서 양측의 분위기는 점차 악화되었고 1937년 7월 24일을 시작으로 일본은 상해침공의 명분을 쌓기위한 공작에 돌입했다. "虹橋空港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군 해병대 측은 사병 한명이 실종되었다며 24일 국민정부에 항의했고 이틀 후 국민정부 측은 실종된 사병을 수색, 일본 영사관에 넘겼다. 이 일이 어렵게 되자 일본군 해병대는 재차 공작을 수행하였다. 8월 9일 大山勇夫 중위가 해군 1명을 거느리고 중국군용비행장에 차를 몰고 들어가려 하자 중국군이 응사 모두 이들이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아 동경에 전해지자 해군은 육전대증파를 결정하고 항공공격의 준비도 시작했다. 동시에 육군에 대해서도 증원을 요구했다. 육군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평진방면의 전투가 우선이었고 이 방면이 정리되면 휴전교섭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류민보호를 명분으로 2개사단을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이 8월 10일의 일이었다. 이 군대는 상해파견군이라 명명되어 8월말에 순조롭게 상해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해에서 장개석이 선수를 쳤다.

 

8월 11일, 국방최고회의(일본식으로 말하자면 대본영)을 구성하고 장개석을 주석으로 작전, 지휘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15일에는 전국에 총동원령이 선포되고 중국공산군 총사령관 주덕은 장개석의 지휘하로 들어감을 선언하면서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 8로군으로 명명되었다. 그 규모는 3개사단(제 115, 120, 129사단) 약 4만명정도였다.

 

장개석은 처음으로 전 중국군을 통일지휘하게 되어 일본과 전쟁을 하는 대의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롭게 군사행동을 하고 작전지역의 민중공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서 중국측의 항일능력과 세력은 완전히 통합되었다.

 

당시 중국군은 5개 전구 약 350개 보병 사단(1개 사단은 정원은 1만. 실제는 6000~8000명) 300만명에 달했다. 그외에도 독립여단과 수백만에 달하는 지방 민병대가 있었다. 공군은 약 50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미제 커티스 복엽기, 소련제 I-15, I-16, 영국제, 프랑스제, 이탈리아제등등 각국에서 원조받은 항공기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구식 복엽기였다.(그중에서 SB쌍발폭격기는 가장 위협적으로 39년 10월 키쿠키앙 비행장 폭격에서 한번에 100대이상의 일본기들을 지상에서 박살내었다.)

광동지방을 기반으로 한 중앙군이 약 30만정도였는데 이들은 황포군관학교출신으로 지휘되었으며 장개석과 남경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았다. 그중에서도 총통직속의 8만가량의 친위대는 중국군 최정예부대로 독일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되었으며 기관총과 자동소총, 박격포로 무장하여 중국군에서는 그나마 근대전에 걸맞는 부대였다. 이들이 보유한 37mm대전차포는 일본군 전차의 천적이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북벌과정에서 이해관계에 의해 뭉쳐지거나 투항으로 국민군에 흡수된 군벌 군대였다. 대표적인 것이 장학량의 동북군, 염석산의 섬서군, 이종인 백숭희의 광서군, 용운의 운남군등이었다.

8월 12일에 중국군 2개사단이 상해북정거장에 도착해 공동조계밖 사천로에서 일본 상해파견군 본대와 대치하였다. 매일 1,2개 사단이 계속 도착함으로서 총 5만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하였다.(최종적으로 60~70만명이 집결)

 

13일 중국군은 일본군 본대 북측의 팔자교근방에서 공격을 시작해 그것을 시작으로 도처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4일 중국공군은 제 3함대에 대해 공습하여 기함 출운을 비롯해 일본 함정들을 폭격했다. 명중탄은 거의 없었으며 한발이 빗나가 프랑스조계내의 대세계라는 호텔 부근에 떨어져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5일 오전 3시 일본 해군항공대 폭격기 20대가 남경상공을 날아 비행장을 폭격했다. 이는 1천km이상의 장거리를 비행하여 수도 남경을 폭격함으로서 일본 항공능력을 과시한 것이었다.

같은 날,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발진한 14기의 폭격기가 남창비행장을 폭격했고 왕복 거리 1400km의 장거리였다. 폭격기는 96식 육상공격기였다. 이런 장거리 폭격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그 예가 없는 것이었다.

 

8월 30일까지 남경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소주, 항주, 통구, 남창, 구강, 서주, 한구등을 지속적으로 폭격했다. 해군은 중국 공군의 암호를 거의 해석해 중국공군의 비행기가 집중되는 장소, 시간에 맞추어 공격했다. 이 공폭으로 남경정부는 오지로 이전할 준비를 시작했다.

 

지상에서는 약 5000명으로 증강된 해군 육전대가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었다. 중국군은 일본 육군이 상륙하기전에 이들을 일소하려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약 5만명에 달하는 중국군이 5000명의 육전대를 포위해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총통친위대인 정예 제88사단이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육전대에게는 대구경중포가 없었으나 그 점에서는 중국군도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무기는 기관총, 박격포, 속사포, 경포등이었다. 대신 육전대는 중국군에게는 없는 전차와 장갑차를 가지고 있었고 제 3함대의 항공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압도적인 열세에서도 진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카가, 류죠우, 호쇼등 대형공모도 증원되어 15일부터 공습을 시작했다. 중국공군의 전투기들도 발진하여 이들과 대항해 혈전을 벌였다. 그들은 중과부적으로 대부분이 격추당했으나 일본측의 피해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본 상해파견군은 제 3사단, 제 11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전차, 중포, 공성용 중포, 고사포, 항공부대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령관은 마쓰이 이와네대장이었다.
수송에는 전함 나가토, 무츠 2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4척이 동원되었다. 통상적으로는 수송함이 수송하고 구축함이 호위하나 고전중인 육전대를 한시라도 빨리 구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편성된 것이었다.

 

이들은 상해북방 오송해안가에 상륙했는데 상해정전협정으로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였으나 1, 2년전에 진지를 구축해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륙은 8월 23일부터 도착한 차례로 시작했으나 군함에서 상륙용 주정에 탑승할 때부터 중국측의 맹렬한 사격을 받았다. 물론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맹렬함은 일본군으로서도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오송에 상륙한 제 3사단은 17일동안 고작 3km밖에 전진하지 못했고 1일 100미터에서 600 미터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제 11사단 선견대는 상륙 5일간 6km를 전진하여 주요 지점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 이후 1개월이 걸려도 그 이상을 전진하지 못할 정도였다. 11사단 44연대는 육탄공격을 감행했고 폭파 결사대까지 보내 27일 만에 주요 지점을 점령할 수 있었다. 12연대는 10일간 병력 3400명에서 900명으로 감소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맹렬한 저항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완전히 예상밖이었다. 참모본부는 더 많은 증원을 요청했다.

 

9월 10일에는 대만군에서 1개 연대가 급히 증원되었고 본국에서 3개사단이 동원되었다.(제 9사단, 제 101사단, 제 13사단) 제 101사단과 제 13사단은 30대후반의 예비역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특설사단이라 불리었는데 높은 연령대로 제대로 된 훈련도 없었고 지휘관도 현역출신은 거의 없어 동경의 참모본부입장에서도 도저히 전력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새로 편성된 3개 사단이 수송되는 동안 일본군의 고전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었다. 중국군은 매일 1, 2개 사단 규모(1개 사단은 1만정도)의 병력이 계속 증원되었고 장개석 직속의 도이치식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도 건재했다. 증원부대는 광동, 광서, 호남, 사천, 강서등의 각성에서 차례로 도착했다. 전장에는 도처에 설치된 대형의 크리크가 일본군의 진전을 방해했다.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공격해 하나의 클리크를 점령하면 다른 크리크가 그것을 공격해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크리크는 폭 5미터에서 큰 것은 200미터에 달했고 그것은 하천, 가교등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전은 하고 있었으나 제공, 제해권은 완전히 일본측 것이었다. 양자강 해안가는 일본 전함의 사정거리내였다. 그들의 지원사격으로 일격에 600명이 전사했다.
중국군의 사기는 여전히 왕성했지만 일본군에 대항할 중포도 없었다. 중국군은 필사적으로 육탄으로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점차 진격에 나섰다. 9월말 일본군은 크리크를 모두 제압했고 중국군은 주력을 대양진 부근에 집결시켰다.

 

대양진은 상해시가지에서 4킬로 서북에 있었고 인구 4만정도의 마을이었다. 남경-상해를 잇는 철도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처음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지였다.
상해파견군은 이 대양진에 포진한 중국군에 대한 공략을 시작했다. 제 9, 11, 13사 과 대만 파견군이 참가하였다. 이 중에는 155mm이상의 대구경 중포부대도 있었다. 

이런 중포를 120문이나 동원하였고 탄약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포격은 콘크리트 요새를 차례로 파괴하였다. 또한 육해군 항공대를 총동원해 3일간 맹폭격을 가했고 이것은 상해전을 통틀어 최대 규모였다.

10월 23일부터 총공격을 시작해 25일에는 제압했다. 중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소주선까지 퇴각해 남안에 포진했다. 한편, 그동안 8개월 반이나 포위되어 있던 육전대도 처음으로 공격에 나서 북정거장의 중국군을 공격했다. 해군 항공대의 지원아래 북정거장, 도서관, 철로관리국등 주요 건물들을 점령했다. 중국군은 "800장사"라는 결사대를 편성해 4일간 혈전을 벌인후 장개석의 명령으로 조계로 후퇴했다. 조계내에서는 일본군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중국군이 일본군의 맹공을 받아 대양진을 방어하고 있을때, 제 10군은 소주천 남안을 따라 상해전선을 향하고 있었다. 상해 남방 항주만에 상륙해 중국군의 배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제 10군은 제 6사단, 제 11사단과 독립산포병 제 2연대, 중포 제 6여단, 제 1, 제 2 후비보병단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병력은 1개사단당 15,000~2만으로 총병력은 약 8만에 달하는 것이었다.

 

참모본부는 제 10군을 항주만에 상륙시키는 한편, 상해에도 제 16사단을 증파하였다. 제 16사단은 11월 13일 상해복방 75km의 백유구에 상륙했다.

 

항주만 상륙지점인 금산위에는 중국군의 견고한 진지는 없었다. 11월 5일 제 10군은 해안가를 따라 손쉽게 상륙하였다. 그들은 상륙과 함께 "일군 100만명 항주만북안에 상륙!"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워 중국군을 위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상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국군은 포위될 것을 두려워한 11월 9일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후퇴를 시작했다.

 

약 3개월에 걸친 상해전은 중국군의 후퇴로 종결되었다. 장개석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제공권과 화력의 크나큰 차이로 인해 엄청난 상처만을 남긴채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한번 후퇴하기 시작한 중국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채 도주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인파의 물결을 막은 것은 중앙군 소속의 독전대였다. 기관총이 총열이 벌겋게 달구어질때까지 불을 뿜었고 아군의 총탄에 적어도 1만이상이 쓰러졌다. 그래도 후퇴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남경의 방위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상해전 기간중 일본군의 피해는 11월 8일까지 전사자 9115명, 부상 31257명 계 40672명이었다. 중국군의 피해는 총 85개 사단이 동원되어 사상자 33만 3500여명을 냈다. 게다가 장개석 직속의 정예부대를 비롯한 중앙군의 60%를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상해를 잃은 것은 수도 남경을 찌르는 큰 위협이 되었고 같은 시기 화북에서도 전선이 점차 확대되어 남하해 오는 일본군 북지나방면군에 대항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중국군이 북상하고 있었다.

 

간만에 글 하나 올려보네요. 쓸데없는 논쟁성 글보다는 이런 읽을거리를 더 많이 올려야 하는데..

귀찬니즘땜시...

중일전쟁은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보니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스틸웰이 "장개석은 할 마음이 없다"라며 항상 맹비난을 했는데 37년~41년까지 미국은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무얼했나 자문부터 해보고 나서 비난해야겠지요. 초반에 너무 큰 피를 흘리다보니 힘을 다 빼어 나중에는 거의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해공방전은 중일전쟁 초반에서 가장 큰 전투이자 일대 결전이었고 만약 여기서 중국군이 이겼다면 이후의 일본의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을 것이며 이후의 태평양전쟁 발발과 동북아의 역사까지 뒤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중일전쟁도 그렇게 일방적인 전투가 되지는 않았겠지요.

 

다음에도 중일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좀 더 올려보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

[중일전쟁사] 남경방위전. 그 처절했던 순간..
번호 : 63   글쓴이 : 깜빡이
조회 : 285   스크랩 : 0   날짜 : 2006.10.1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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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총통 친위대의 모습..

그야말로 일대 결전이었던 상해전투는 중국군의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서안
에서 풀려난 장개석은 모처럼 큰 맘 먹고 그간 아까두었던 최정예부대를 비롯한 중
앙군 대부분을 투입해 쪽수로 밀어붙였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하였죠. 근 80만이
상의 대군을 동원해 3개월간의 전투에서 30만이상의 사상자를 내었고 10년이상 심
혈을 기울여 만들어두었던 정예군과 장비 대다수를 잃었습니다.

 

거봐~ 내가 뭐라 했어~~. 우리는 안된다니깡~~

 

11월 9일 상해에서 전면 총퇴각 명령이 내려집니다.

40만에 달하는 짱개대군단이 머리위로 일본기의 폭탄세례를 받으며 정신없이
주합니다.

 

원래 계획은 설령 상해전투에서 패하더라도 상해-남경 사이에 설치된 수백개의 콘
크리트 토치카 진지(이른바 "장개석 라인")에서 적을 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전대의 기관총조차도 이미 "우리는 안돼~~" 물결을 막을 도리는 없었고
장개석 라인에 배치된 병력도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도주하는 판국이었습니다. 토
치카에 남은 것은 발목에 쇠고랑을 채운 불쌍한 짱개 소년들뿐이었죠.

 

한편, 이겼다고는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도 4만이상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고 그동안 들어간 물자, 인적자원의 손실은 일본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더구
나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소련에 대한 두려움은 일본이 중국전선에만 신경쓸 수가
없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만주로 밀고 들어온다면 무대포 관
동군이라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요지를 점령해 나가고는 있다지만 그만큼 병력은 자꾸 분산되었고 중
국군의 게릴라전술에 병참은 위협당하고 소부대는 포위 섬멸당했으며 점령했다고
생각한 마을은 어느 사이 중국군에게 다시 탈환당해 또 병력을 급파해 재점령해야
하는, "지옥의 묵시록"의 미군꼴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동경 정부와 대본영, 황실 모두 "이쯤에서 적당히 먹고 떨어지자"라는 분위
기였고 이번 승리를 이용해 우월한 입장에서 정전교섭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교섭의 역할은 일본, 중국 양측에게 신뢰를 받고 있던 독일에게 의뢰되었습니다. 3
0년대 당시 한창 콧수염 총통이 설치던 독일은 일본에게도 맹방이었지만 중국에게
도 주요 군사원조국이자 맹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역할은 독일 재중대사
인 트라우만에게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요구안(트라우만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몽고에 자치정부를 수립한다.
②화북과 상해의 비무장지대를 대폭 확장한다. 국민정부는 화북 전역에 대해 행정
권을 가질 것이며 그 행정관은 친일적 인물로서 임명한다.
③배일운동을 중지하도록 한다.
④중일 양국이 공동으로 공산당에 대처한다.
⑤일본 엔에 대한 관세율을 인하한다.
⑥중국에 있어서의 외국의 권리를 인정한다.

 

12월 2일 트라우만은 장개석을 만나 일본측 안을 전달하였습니다. 하응흠, 백숭희,
 당생지, 고축동등 최고 참모들을 비롯해 장개석은 이 안에 수락할 의지를 보였습
니다.
백숭희는 "만일 일본이 요구하는 조건이 이것뿐이라면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여태까지 싸웠단 말인가?" 라는 말로 일본측의 속셈을 의심하였으나 트라우만과
일본측은 "이이상의 요구는 없을 것"이라며 자신있게 보장하였습니다.

 

협정안은 12월 6일 수락되어 주일 독일 대사를 통해 동경정부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측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백숭희의 우려대로 원숭이들의 마음은 뭔가
갈대와 같았던 것입니다.

 

현지군은 현지대로 불만이 높앗습니다. 소련을 의식한 동경에서 "자숙" 명령이 내
려왔지만 승리로 도취된 현지군은 동경의 명령과 관계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식으로 멋대로 자꾸자꾸 전선을 넓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마쓰이대장은 3개월간의 혈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해파견군
을 일단 재정비 한 연휴에 남경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습니다만 항주만 상륙이래 별
다른 전투를 겪지 못해 혈기왕성했던 제 10군은 명령도 없이 즉각적인 남경 추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동경에서도 육군 참모차장 오오다중장은 남경공략은 하지 않는다, 라는 입장이었고
 작전부장 시타무라소장이 남경공략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참
모총장을 비롯한 군 최고 수뇌부가 신중한 입장이었던 것에 반해 정작 실무 과장
클래스들중에 시타무라소장에 동조하는 강경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해군은 해군대로, 상해전은 어디까지나 중국군에게 포위당했던 "상해특별육전대
"를 구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지 중국 대륙의 전투는 육군의 것으로 그들의 관심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육전의 확전에 대해서도 "니들 멋대로 해
라"라는 식이었고, 그것을 이른바 "해군 먼로주의"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대본영은 강력하게 자중할 것으로 명령하고 마쓰이대장도 정지를 명령하였고 대신
 진격 한계선을 최초의 소주-가흥 선에서 무석-호주까지 연장해 주었습니다
.(요만
큼만 먹고 떨어져~~라고)

 

그럼에도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했던 제 10군에 대해 당연히 건방진 짓에 대한 본때
를 보여 주어야 할 대본영은 본때는 고사하고 "소부대단위의 추격은 상관없다" 라
는 식으로 못 본 셈 처주었습니다.

 

군벌연합체로 이름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었지만, "황군"의 내부사정도 만만치 않
아 파벌대립은 극에 달하고 암만 자기 상관이라도 같은 파가 아니면 "개X"취급도
아니었습니다. 육군과 해군의 대립은 말할 것도 없었죠. 중장, 대장급 원로들은 중
좌, 대좌급 눈치보느라 정신없고. 괜히 강직한 척하다가는 총리, 황족이라도 일개
소위의 칼부림에 목이 달아날 판이었습니다. "황군"은 콩가루 군대인가?

 

기존 방침을 바꾸어 천황의 "남경공략" 재가가 떨어진 것은 12월 1일이었습니다.
결국 바보된 것은 그것도 모른채 혼자서 열나게 뛰어다니던 트라우만뿐이었죠.

 

재가가 떨어지자 상해파견군과 제 10군 총 30만 대군이 남경을 향해 경쟁적으로 내
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상해와 항주의 주둔병력, 잔적소탕부대, 도중의 마을
을 점령하고 그기에 병력을 또 배치하여 실제 남경전투에 투입되는 것은 20만정도
였습니다.

 

상해 파견군(제 3, 제 9, 제 11, 제 13, 제 16사단 제 101 지대, 제 5 야전중포여
단)이 북쪽에서, 제 10군(제 6, 제 18, 제 114사단 및 쿠사나기 지대, 제 6 야전중
포여단)이 남쪽에서 남경으로 포위해 갔습니다.

총 8개 사단, 2개 여단, 2개 지대 20만에 달하는 대부대였습니다.

 

중국군도 두개로 나누어, 태호 북쪽 주랑에 좌군(제 15군, 제 19군, 제 21군)이 방
어하고, 우군(제 8군, 제 10군, 제 23군)이 태호, 난징, 항주의 방어를 맡았습니다
.

11월 13일, 일본군은 남북 두 방향으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고, 그날 밤, 중국 좌
익군은 복산(福山), 쑤저우 방위선 진지까지 후퇴하고, 양측은 창서우(常熟), 싱룽
(興隆), 복산에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11월 19일, 상숙(창서우,常熟), 쑤저우(蘇州), 자싱(嘉興)이 연달아 함락되고, 우
푸(吳福)전선이 무너져, 중국 군대는 시청시앤(錫澄線)까지 후퇴합니다.

11월 20일, 전황이 점점 악화되자 남경에 있던 국민당 장개석 정부는 중경으로의
천도를 선포하고
, 남경수비사령부를 설립하게 됩니다.

 

장개석은 막료회의를 열어 최고 막료들과 남경 수비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 백숭희
를 비롯한 막료들 대부분은 "남경의 수비는 어렵다"라는 것을 이유로 남경 포기가
대세였습니다만 당생지가 강경히 남경방어를 주장합니다. 장개석은 숙고끝에 "남경
의 무조건 포기는 국제 여론에도 국내 여론에도 좋지 않다"라며 남경 결사 방어를
공포합니다. 그리고 가장 강력히 주장했던 당생지에게 그 임무를 내리죠
. 니가 하
자고 했으니 니가 해라라는 것. 그것이 11월 24일입니다.

 

여러 잔존부대를 모아 남경방어에 나서게 되는데 총 13개 사단에 정규군, 헌병, 병
참부대, 경찰, 비정규군, 노무자까지 합해 15만명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상해-항주
전투에서 후퇴해온 잔존부대들을 긁어모은 것으로 장비도 빈약했고 병력도 사단 정
원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대로 항공지원을 받으며 중포와 전차까지 보
유한 일본군 정예부대에 맡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사기만은
충천했고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부대배치는 제 72군의 제 88사단이 수서문, 중화문, 무정문, 우화대의 수비를 맡고
, 제 78군 제 36사단이 현무문, 홍산, 막부산, 읍강문의 수비를 맡았습니다.

본대가 광화문, 중산문, 태평문, 자금산, 기린문, 천보성의 수비를 맡고, 제 71군
제 87사단이 통제문, 광화문 일대를, 헌병대가 정회문, 한중문, 청량산을 맡았습니
다.

그기에 상해방면에서 철수해온 병력과 증원된 부대가 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제 7
4군이 우수산에서 순화까지, 제 66군, 제 83군이 탕산 동쪽과 서쪽 양측에 배치되
었습니다.

 

당생지는 원래 호남군벌출신으로 염석산등과 대립하다가 장개석의 북벌과정에 참여
한 인물입니다. 국민당의 요직을 거치다가 남경전투에 패한후 좀 조용히 지내다가
국공내전때 배신하여 공산당쪽에 넘어가 호남성 부성장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국민
당에서도 입지적인 "생존력"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결전이 다가오자 당생지는 전장병들에게 "남경사수"를 명령하고 무단 후퇴자는 참
수하겠다고 엄포합니다. 그리고 남경성 뒤로 흐르는 양자강 선착장에는 독전대의
기관총이 배치되었습니다.



 

12월 4일부터 일본전투기와 폭격기 편대가 5대씩 무리를 지어 남경을 폭격하기 시
작합니다.

12월 6일 일본군은 서하산, 탕산, 순화, 말릉까지 진격하여 남경 전면을 포위합니
다.

12월 7일 마쓰이 중지나 방면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중국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
합니다.
물론 사생결단의 각오를 다진 중국군은 일언지하에 거부하였습니다.

12월 9일 오전을 기해 일본군이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제 16사단이 기린문을 공격
해 점령하고 제 9사단이 효령문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남경비행장을 점령한후
광화문, 통제문, 중화문으로 진격합니다. 제 6사단이 우수산을 점령, 주력은 중화
문으로 진격합니다.

12월 10일 재차 남경 수비대에 투항을 권고한후 정오 12시부터 남경시 총공격에 나
섭니다.
제 제 6, 제 114사단이 중화문을, 제 9사단이 광화문을, 제 16사단이 중산
문과 태평문에서 성내로 돌입하려 하였습니다. 중국군의 저항도 맹렬하여 돌격하는
 일본군에게 집중포격을 퍼붓습니다. 중국군포병은 영국, 미국, 독일, 스위스제에
일본제까지 뒤섞여 사용되고 있었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탄이 쏟아부었습니다.
 장개석 직속으로 상해에서 활약했던 제 87, 88사단의 혈투도 대단하여 여단장들이
 줄줄이 전사하지만 일본군으로서도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대 혈전이었습니다.

 

사실 일본군의 형편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이, 남경시밖 10리이내의 민가는 모
조리 불태워져 식량 한톨 없는 상태에서 그동안 보급도 무시한채 미친듯이 달려온
일본군은 며칠째 쫄쫄 굶어가며 싸우는 상태였습니다
.

 

12일까지 전투는 외곽 성벽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피로 물들뿐 전투는 고착화됩니
다  그러나 제 9사단 36연대 공병대가 광화문의 일부를 폭파시키고 1개 대대가 성
벽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을 본 종군기자가 "남경공략"이라고 속보를 보내
어 NHK가 그대로 방송하여 일본 거리는 그야말로 축제분위기가 되었습니다만 실제
로는 그때까지도 남경은 대혈전중이었고 간신히 광화문을 돌파한 부대조차도 좀처
럼 성내로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2일 저녁이 되면서 남경 최대 요새였던 자금산이 2일간 유례없는 공방전끝
에 함락되고 요지들이 줄줄이 떨어지자 광화문, 중화문, 중산문을 돌파해 돌입한
일본군과 중국 수비대간의 시가전이 벌어집니다. 일본 제 3함대가 우룽산 강 수면
에 도착하고 쿠니사키지대가 하화현을 공격하여 포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미 11일에 장개석으로부터 남경포기 명령이 내려지고 남경함락이 목전에 다다르
자 당생지는 수비대에게 "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나머지는 양자강을 도강해 퇴각하
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12일 밤에 참모들과 함께 제일 먼저 탈출해 버립니다.
 
그러나 상세한 후퇴계획이 각 부대에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또 "무단 후퇴 금지"
의 명령도 그대로 유효한 상태에서 "남경 사수"를 외치던 지휘관부터 도주해 버리
그때까지 잘 싸우고 있던 장병들이 동요하고 사기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13일 중국군이 후퇴하는 것을 감지한 일본군이 성내로 돌입합니다.

오후 4시. 중산문을 통해 들어온 제 16사단이 국민 정부 청사에 점거하고 일장기를
 내 걸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경함락의 순간이었습니다.

 

중국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붕괴되고 잔존부대의 일부는 "비무장"으로 선포되어 있
던 외국인 거주지로 도망가고 대다수는 선착장으로 밀려듭니다. 수십만에 달하는
민간인들과 중국병들에 의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지만 그 위로 끝까지 명
령에 충실한 독전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습니다(자국국민들 살해)뒤로는 일본군이 밀려오고 포탄이
피난민들 위로 떨어집니다. 그들은 포탄과 기관총세례를 받으면서 양자강을 뗏목이
나 또는 헤엄쳐서라도 탈출하려 하지만 그 앞에는 이미 우회해 온 일본군 기관총이
 배치되어 건너오는 중국인 무리들에게 불을 뿜었습니다. 양자강은 수만의 시체들
로 붉게 물들게 됩니다.

 

탈출에 성공하는 것은 15만명중 겨우 2만정도였고 나머지는 학살에 미친 일본군들
에게 끝까지 쫓겨다니며 사살당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심지어 협정을 어기고 외국인
 거주지를 포위해 중국군 부상자들을 일일히 색출해 처형하였습니다. 거대한 남경
대학살의 일부였죠.

그리고 17일, 마쓰이대장이 정식으로 남경입성식을 거행합니다.

중국군의 전사자는 최소 8만명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무능한 당생지의 명령
으로 그때까지 잘 싸우다 조직적 후퇴도, 제대로 된 시가전조차 벌이지 못한채 마
지막 순간에 생존자 다수가 포로가 되어 대학살극의 희생자들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피해도 막대해 전사자만 최소 3천이상, 부상자도 1만이상이었습니다.(일
설에는 전사 9천명, 부상 5만명)

 

중국으로서는 압도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잘 싸웠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장개석
의 어정쩡한 태도는 비판받을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처
하려기 보다, "우리는 어차피 일본에게 안된다"라는 패배주의적 전제하에서 계속
중국이 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국제사회가 일본에게 압력을 가할 것만을 기대
하였습니다. 남경이 완전히 포위당해 함락직전상황에 이르름에도 구원군을 보내지
도 않았고, 포위된 병력과 민간인들의 철수계획도 수립치 않아 남경 대학살을 사실
상 방조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당생지같은 무능한 인간을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이 큰 실책이었습니다. 중국의 쥬코프라 할 만한 백숭희나 탕은백을 그 자리에 앉
혔다면 적어도 그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중국으로서는 참담한 패전이었지만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 산해관을 돌파해 북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남하해오자 서주를 놓고 또 한번의 대
규모 결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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