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몽골과 리투아니아의 대접전 (1) 폴타바 전투
번호 : 2505 글쓴이 : 타메를랑
조회 : 398 스크랩 : 0 날짜 : 2006.05.26 10:42
지금은 둘 다 작은 나라이지만, 몽골은 13세기에서 14세기 말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세계 제국이었고 리투아니아 역시 한 때는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동유럽의 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14세기 말에 서로 대규모의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죠.
서로는 폴란드의 변경에서 동으로는 알타이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킵차크 한국은 자니벡 칸이 죽은 1357년 후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인 상태였습니다.
이 틈을 노려, 1백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고 있던 러시아 제후들은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단결해 종주국이던 킵차크 칸국에 전쟁을 걸어오기 이릅니다.
1380년 9월 8일, 모스크바의 공작이자 블라디미르의 대공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의 지도하에 러시아 제후들의 연합군은 돈 강 상류에 있는 쿨리코보에서 마마이 칸이 이끄는 킵차크 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를 서술한 러시아 정교회의 연대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킵차크 군이 이겼으나 러시아인들이 증원 부대를 보내자 후퇴했고, 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양쪽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러시아인들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몽골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에 따르면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 정교회의 연대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그 당시 주변 각국에 교환된 외교 문서에 전혀 언급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실질성이 의심되고 있으며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다지 작은 규모의 전투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480년 우그라 강에서 벌어진 킵차크 한국과 모스크바 대공국 간의 전투의 경우도 총성 한 번 울리지 않고, 양쪽 다 철수하여 무혈로 끝났지만, 모스크바 공국의 연대기 작가들이 러시아 군대가 우그라 강에서 타타르에게 대승을 거두어 해방되었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견해라 볼 수 있습니다)
쿨리코보 전투가 실존했다고 해도, 이 전투는 정치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결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쿨리코보 전투가 있은 지 불과 2년 후인 1382년, 톡타미시와의 내전에서 패해 크리미아의 카파로 도망친 마마이가 제노바 인들에게 살해되자 그를 대신하여 톡타미시는 킵차크 한국의 새로운 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군을 규합하여 수즈달, 블라디미르, 유리엘, 모자이스크 등의 러시아 도시 공국들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같은 해 8월에는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 때, 쿨리코보 전투의 주인공이던 돈스코이(드미트리)는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톡타미시가 이끄는 몽골군이 러시아를 누비며 도시와 마을들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을 무렵, 발트해에 있던 리투아니아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4~16세기의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발트해 연안에서 살아가던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리보니아에 자리잡은 튜튼 기사단의 거듭된 원정에 위협을 받자 뛰어난 지도자인 민다우가스를 중심으로 힘을 합쳤고 게디미나스의 치세 때(1316~41)에는 강력하고 단합된 대공국을 형성해 북동쪽으로는 드비나 강 상류 너머, 남동쪽으로는 드네프르 강, 남쪽으로는 습지대인 프리페트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참고로 민다우가스는 리투아니아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도가 된 군주입니다.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제일 늦게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킵차크 칸국이 새롭게 상대하게 될 리투아니아는 이렇게 강력한 조직을 갖춘 국가였던 것입니다.
1382년 8월, 톡타미시가 모스크바를 불태워 버린 직후, 리투아니아인들은 러시아가 몽골의 맹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리투아니아의 세력을 광활한 남쪽까지 뻗칠 좋은 기회라고 여겨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폴타바 근처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은 킵차크 한국과 벌인 교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의 집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전쟁사]] 몽골과 리투아니아의 대접전 (2) 보르스클라 강 전투
번호 : 2506 글쓴이 : 타메를랑
조회 : 457 스크랩 : 0 날짜 : 2006.05.28 00:45
기회는 노리고 있는 자에게 반드시 돌아오는 법입니다. 폴타바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지 17년이 지난 1399년, 복수의 이를 갈고 있던 리투아니아 인들에게 뜻밖의 방문객이 망명을 해왔습니다. 바로, 폴타바 전투에서 몽골군을 지휘했던 킵차크 한국의 칸, 톡타미시였습니다. 적진에게 투항하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러시아 도시들을 공략하고, 리투아니아 인들마저 격파해 버려 위세가 충천한 톡타미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역대 킵차크 칸들의 숙원이었던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헌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바로, 14세기 말의 중앙아시아에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략가 중 한 명인 그 유명한 티무르가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1387년부터 1398년까지 장장 11년간 벌어진 톡타미시와 티무르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결국 승자는 티무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티무르는 많은 전쟁에서 보인 것처럼,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킵차크 한국의 영토를 차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본거지인 사마르칸트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숨을 돌리게 된 톡타미시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다름 아닌 킵차크 왕실 내부에서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티무르 쿠틀륵이라는 왕족이 톡타미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킵차크 한국의 왕위를 둘러싼 전투에서 패배한 톡타미시는 갈 곳을 잃고 헤매다 결국 추종자들을 이끌고 지난날의 적이었던 리투아니아 인들에게 망명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칸에서 폐위된 톡타미시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당시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던 비타우투스(또는 위토우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비타우투스는 이를 러시아 남부 전역에 리투아니아의 지배권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킵차크 한국으로의 원정을 결의했습니다.
마치 그 옛날,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남생처럼 톡타미시는 적군의 길잡이가 되어 조국을 침공하는 배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킵차크 한국을 향해 노도처럼 진격해 오는 리투아니아 대군은 러시아계 리투아니아 인으로 이루어진 비타우투스 직속 부대와 폴란드와 프로이센 등지에서 파견해 온 튜튼 기사단에 톡타미시가 이끄는 몽골 기병대와 최신식 무기인 대포까지 갖추고 있어 그 전력은 킵차크 한국보다 훨씬 막강했습니다.
이에 맞서 싸우는 킵차크의 몽골 군대는 수에서 열세였지만, 뛰어난 장수인 티무르 쿠틀륵과 에디귀가 지휘하고 있었으며, 조국을 지키려는 결의에 불타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군대는 1399년 8월 12일, 드네프르 강 하류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 연안에서 만나, 치열한 전투에 들어갔습니다.
수에서 훨씬 우세였고 잘 조직된 리투아니아 군은 에디귀가 이끄는 몽골 군대의 주력부대에 맞서 몇 시간 동안 격렬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리투아니아 군의 대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굉음과 함께 포탄이 작렬했고, 그와 동시에 몽골 기병들이 날리는 수만 개의 화살이 양측의 허공을 오가며 소나기처럼 퍼부어 졌습니다.
에디귀가 이끄는 몽골군은 화살을 구름처럼 쏘아대며, 기병 돌파를 시도했지만 리투아니아 군의 대포와 단단하게 뭉친 보병진에 번번히 막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군 역시, 몽골군의 공세를 막아내기만 급급했을 뿐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요격하지는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던 양측의 접전은 티무르 쿠틀륵이 이끄는 정예 몽골 기병대가 리투아니아 군의 후방을 급습함으로써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리투아니아 군대는 에디귀가 지휘하던 전방의 몽골군과 싸우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참이라, 후방의 방비에 전혀 주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톡타미시가 이끌던 몽골 기병들은 달아났지만, 러시아계 리투아니아의 많은 군주들은 거의 대부분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리투아니아 군의 총사령관인 비타우투스 또한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났습니다. 이 날의 전투에서 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철저하게 궤멸되었습니다.
이 보르스클라 강 전투는 몽골군이 거둔 기적적인 승리였습니다. 리투아니아 측은 전력과 숫자에서 훨씬 우세한데다 톡타미시 휘하의 몽골 기병대까지 가세해 중무장 보병 위주의 군대가 경무장 기마 궁사들과 싸우게 될 경우, 생길 기동성의 불리함까지 상당 부분 극복했습니다. 더구나 비타우투스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톡타미시를 통해서 킵차크 한국의 내정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어, 정보적인 면에서도 밝아 모든 면에서 킵차크 한국보다 우세했는데 말입니다.
대승리를 거둔 몽골군은 키예프 주변 지방과 포돌리아를 약탈하고, 리투아니아가 흑해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1363년에 점령했던 부크 강 하류 유역을 다시 점령했습니다.
보르스클라 강 전투의 비참한 결과로 인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러시아 남부 전체를 지배하려던 원대한 계획을 영원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패장인 비타우투스는 그 후로 다시는 킵차크 한국으로 진로를 돌리지 않고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 및 러시아 북부의 영유에만 전념했습니다.
한편 승자인 티무르 쿠틀륵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도져서 얼마 후 사망했고, 전장에서 간신히 벗어난 톡타미시는 다시 킵차크 한국의 칸이 될 기회를 노리다가, 티무르 쿠틀륵의 동생인 샤디 벡이 칸이 되자 그를 피해 시베리아의 튜멘으로 도망쳤다가 샤디 벡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보르스클라 강 전투는 러시아에 대한 몽골의 지배권을 확고히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480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은 킵차크 한국에 조공을 바쳤고, 1502년 킵차크 한국은 내분으로 인해 크림 한국, 아스트라한 한국, 카잔 한국 등 셋으로 분열되었지만 1571년, 크림 한국의 군대는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10만 명의 시민들을 살륙하거나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개혁 군주인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는 17세기 말까지 크림 한국에 조공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1783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게 크림 한국이 합병되기 까지 러시아는 무려 5백년 동안이나 몽골의 지배와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러시아야말로 전 세계에서 몽골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은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20세기 초에 몽골을 위성 국가로 지배하게 되자. 몽골의 시조인 칭기스칸을 폭군, 독재자로 규정하여 역사에서 영원히 말살하려 했던 것입니다.
(끝)
참고 자료: [세계사의 탄생]- 황금가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엠파스 열린지식]
예전에 데스라 총통님이 올려주신 서부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군사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몇 장 올립니다.
폴타바와 보르스클라 강에서 킵차크 한국과 싸웠던 리투아니아 병사들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