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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韓․中) 인형극의 비교연구*
― 역사적 전개, 텍스트 및 공연과 관련된 몇 가지 논제 ―
1)안 상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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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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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神木 : 戱神(蘇․扶蘇와 蘇塗․솟대)
3. 人形 : 神格人形과 동적 인형
4. 놀이꾼 : 傀儡․傀儡子․廣大
5. 놀이 : 傀儡雜戱, 郭禿戱․(꼭두놀이)無㝵之戱, 肉傀儡
6. 텍스트 및 공연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
7. 마무리
參考文獻
中文提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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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한국 인형극의 연구사를 검토해 보면 국내의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한국 인형극의 외래적 기원 또는 외래적 영향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장하는 학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국 너머로 기원을 찾아 나선 학자들도 전파 경로로서의 중국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자생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조차도 한중 관계의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고 있지는 있다.
한중 인형극의 동일 계통설은 초기부터 줄곧 거론되어 오던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송석하는 한국의 “꼭두는 일본의 ‘구구쓰’ 중국의 ‘곽독’과 결부시켜 괴뢰라고 하는 설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고 한 다음1), 한국의 사당과 일본 平安朝 傀儡子를 동일시하면서 그 기원이 서역의 표류민족인 집시와 연결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다.2) 김재철도 한국 인형극은 중국의 직계이며 중국 인형극은 다시 인도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3) 이두현 또한 “서역으로부터 전파된 괴뢰희는 장두양식의 神인형으로부터 골계희로 전성된 조종인형이며 곽독은 이때 함께 이입된 인형의 역명이며 동시에 인형희의 이름이기도 하였던 것은 우리의 ‘꼭두각시놀음’이 지금껏 그 유풍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물론 그는 곽독에 대하여 중국내 발생이 아닌 외래한 것이라고 보고 그 원어를 몽고어의 ‘고독고친’에서 찾으려고도 하였다.4)
이후 외래 기원설에 대한 논의는 유민영, 박진태 등을 거치면서 중국에 더 무게를 두는 쪽으로 전개되기도 하였고5), 다른 한편으로는 서역기원설의 확장으로서 지중해의 우가리(북시리아)신화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6)
임재해는 자생설을 극력 주장하였지만 그 또한 “비록 영향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원론은 결코 될 수 없다”고 하여 영향의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않았다.7)
이렇듯 대부분의 학자들이 중국을 거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중 두 나라 인형극을 본격적으로 비교한 성과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현실은 필자에게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중국학계에서도 양국 인형극을 아울러 논한 연구 성과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한중 인형극의 동일계통설 또는 서역전래설을 지지하든 아니든 간에 논의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는 두 나라 인형극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깊이 있는 비교 연구가 시급하게 요망되는 과제라 하겠다.
이에 본고에서는 역사적 전개와 텍스트 및 공연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논제들을 중심으로 한중 인형극의 비교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가깝게는 양국 인형극에 대한 종횡비교를 통하여 중국기원설 또는 중국경로설의 실체를 좀 더 명확히 파악하고 한국 인형극의 전개사를 체계화하고 구체화하는 데 기여하기 위한 것이요, 멀리로는 인식의 판도를 동아시아로 확장시켜 ‘동아시아 인형극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2. 神木 : 戱神(蘇․扶蘇와 蘇塗․솟대)
중국 인형극의 기원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대상 중의 하나가 蘇이다.
현재 중국 泉州의 提線傀儡戱에서는 戱神을 相公爺라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의 본성은 田이지만 혹은 어미의 성을 따라 蘇相公으로 부르기도 한다. 극단에서는 정식 공연을 하기 전에 반드시 蘇相公을 불러내 踏棚하게 하는데 이것을 「大出蘇」라고 한다. 소상공은 답붕 때 스스로를 낮추어 小蘇라고 칭한다. 또 천주의 梨園戱에서는 어린 배우들이 괴뢰희의 戱神인 소상공으로 분장해 막을 여는데 그의 踏棚을 모방했기 때문에 提蘇라고 한다.8) 이런 전언들은 괴뢰희가 처음부터 蘇와 밀접한 관련 하에 형성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吳自牧의 夢粱錄에는 “官巷口, 蘇家巷二十四家傀儡”9) 및 “蘇家巷傀儡社”10) 등의 구절이 전하고 있어 南宋 때 이미 양자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9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段成式의 酉陽雜俎 前集13 ‘尸穸’편에는 蘇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세간에서 사람이 죽으면 기악을 벌이는데 상악이라 한다. 기두는 죽은 자의 혼을 보존하는 것인데 일명 소라고 한다.11)
여기서 거론된 기두는 현대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방상과 함께 괴뢰와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때문에 당나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도 괴뢰희는 은연중에 소와 연결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에 何昌林은 “소는 소생의 뜻을 지녀서 원양지정이 되니 곧 도가에서 말하는 扶蘇이다.” “扶蘇는 태고 적의 社木으로 童男을 상징하며 남성 생식의 신이 된다. 이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어 희신으로 여기면서 소상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로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했고12), 康保成 또한 이 견해에 동의하면서 “방상 기두를 소라고 한 것은 扶蘇나무로 조각한 까닭이다.”고 주장했다.13)
이처럼 중국 학계에서 전개된 괴뢰희의 기원으로서의 蘇에 대한 논의를 보면서 필자가 다시금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은 蘇塗와 솟대이다.
蘇塗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陳壽의 三國志 卷30 馬韓傳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마한의 제국에는 蘇塗라는 별읍이 있었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영고를 매달아 귀신을 섬겼다.14)
그 蘇塗를 세운 의도가 부도와 비슷하다.15)
徐兢의 高麗圖經 卷3 ‘民居’편에도 유사한 습속이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전해지길 오직 창우들이 사는 곳에서만 긴 대를 세워서 양가집과 구별하였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대개 그 습속이 귀신을 제사지내는 것이니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재액을 물리치려는 도구일 따름이다.16)
손진태는 이를 두고 바로 마한인이 大木을 세우고 영고를 걸어서 귀신을 제사하던 그 유속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고 하였는데 공감이 가는 해석이다.17) 그는 蘇塗를 솟대와 연결짓기 위하여 계속 논증하였다.
그러한데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솟대’․‘솔대’로서 이것은 마한어 蘇塗와 가장 유사한 까닭이다. 蘇塗가 蘇子油로서 무슨 물체에 칠을 한다는 의미가 아닌 이상 이것은 명백히 입대목의 마한어의 음역일 것이다. 삼한 당시의 명칭이 금일까지도 거의 그대로 전승된 것이다. 그러면 蘇塗․솟대․솔대를 과연 동원어라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이들 명칭 중에 공통한 대에서부터 해명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대란 것은 금어에도 柱․竹․竿․棹․棒․杖 등 모두 直長한 물체를 말하는 데에 사용되나 往昔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으니 이조초엽의 두시언해(분류두공부시) 13권 13장에는 竿을 대라 역하였고, 동서 6권 13장 6권 52장 7권 9장 등에는 檣을 대(船柱의 意)라고 역하였다. 입목도 역시 일종의 대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여기서 의문되는 것은 소와 솔의 의미이다. 前引 여수 김응수 노인은 솔대를 높은 입목의 의미라 답하고 소주는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소나무가 솔나무라고도 일컬어지고 무(水)가 물이라고도 訛하는 것 같은 音便上의 變訛는 허다히 있는 것이므로 소와 솔과는 아마도 同一源의 말로 입목의 고유 조선명은 ‘솟대’ 또는 ‘솔대’에 가까운 말이었으리라고 대개 추측되는 바이다. 그런데 솟은 聳․湧의 동사․형용사에 쓰여지는 말로서 오늘날은 물론 이조 초기의 문헌에도……솟(踊躍의 의미)으로 역하였다. 만약 이것이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큰 변와를 입지 않는 말이라면 蘇塗는 그 원명 소대 혹은 솟대의 음역이고 또 이것은 聳木의 의미가 아니었던가 해석된다. 華語類抄 技戱條가 緣竿․上竿 등 광대(배우)의 연기를 번역하여 ‘숏 타다’라고 한 것도 聳柱․高竿의 의미일 것으로서 蘇塗의 솟대와 동일어이다. 일본 언어학자 白鳥庫吉박사의 담화에 의하면 蘇塗는 聳柱․高竿을 의미하는 몽고어 Soromoto 및 만주어 索摩․索莫(Somo) 등과 동원이며 So, Sore, Sor는 모두 聳․高의 의미이리라 한다.18)
蘇塗와 솟대의 발음상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접근하면 위에서 고찰한 내용이 틀렸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蘇塗나 솟대를 단순히 ‘솟다’의 솟과 곧고 긴 나무를 의미하는 대가 결합한 말로 이해하고 말면 그 본질적인 뜻까지 파악했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삼국지 원문에서 이미 ‘立大木’, ‘立蘇塗’라고 하여 세우다는 뜻의 立자를 두 번이나 쓰고 있다. 큰 나무를 세우면 그 나무는 위로 우뚝 솟는 것이 당연한데 ‘立蘇塗’의 소를 굳이 솟다는 의미의 ‘솟’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다. 또 나무를 세운 가장 중요한 목적을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라 한다면, 제사의 대상이어야 할 귀신의 격(神木)이 부각되지 않고 있는 점도 문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솟대의 예로 보아도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마을의 하당신이나 상당신 또는 주신으로 모셔진다. 따라서 蘇塗나 솟대 자체에 신목의 뜻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결 자연스럽다. 삼국지의 蘇塗 관련 기사에서는 새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 반면 후대의 솟대 위에 일반적으로 새가 앉아 있다는 점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새의 유무는 외형적인 차이 외에도 그것이 지닌 의미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필자는 蘇塗의 도를 우리말 대의 音譯으로 인정하면서 한편으로 蘇를 중국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蘇와 연결시켜 보고자 한다.
扶蘇는 詩經․鄭風의 「山有扶疏」에도 등장하는 나무이다. 毛傳에서는 이것을 ‘小木’이라고 하였고 馬瑞辰은 毛詩傳箋通釋에서 이 小木을 나무이름이라고 하였다.19) 김학주 선생의 주해에 따르면 呂覽, 漢書의 司馬相如․劉向․揚雄傳, 枚乘의 「七發」, 許愼의 說文解字에서는 扶疏를 大木이라 하였다고 한다.20) 毛詩傳箋通釋의 설명처럼 소목을 작은 나무가 아닌 특정 나무의 이름으로 이해하고 아울러 漢書나 「七發」에서처럼 큰 나무로 인정한다면, 삼국지에서 언급한 ‘立大木’의 大木은 蘇에 해당하고 蘇塗는 곧 ‘소라는 나무로 만든 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하창림의 말처럼 부소가 ‘태고 적의 社木으로 童男을 상징하며 남성 생식의 신’이라면 ‘소를 재료로 한 대’로서의 蘇塗가 신격을 지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蘇塗가 왜 신격을 지닌 神木으로서 모셔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단서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蘇塗와 솟대의 보다 내밀한 관계를 이해하려면 후대의 솟대에 등장하는 새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도 관건이 된다. 하창림의 견해를 다시 살펴보자. 그는 集韻에서 “소는 새의 깃이다. 이른 바 ‘유소’란 새의 깃을 모아 물이 흐르는 것처럼 늘어뜨린 것을 말한다.”고 한 대목을 근거로 “소는 꿩이나 닭의 상징 혹은 표지로 인신할 수 있고, 翼宿星君은 离괘에 속해 꿩이 되므로 소는 곧 翼宿인 것이다.”라고 하였다.21) 소 자체가 새의 깃을 의미하고 그것이 翼宿星君을 상징한다면 소를 재료로 한 신목 위에 새를 얹어 그 신격을 나타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손진태 선생이 인용한 Emile Bourdaret의 En Coree(Paris, 1904, pp.72-3)의 기록에서도 互證된다.
이 守讓神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읍락 또는 계곡 입구에 세워져 있고 흔히는 그 앞에 기다란 목간이 지면에 세워져 있으며 그리고 그 정상에는 졸렬하게 주조한 家鴨形으로 된 나무 뿌리가 달려 있다. 이 새는 장군의 표상이다. 사람들은 거기에다 춘추로 제물을 바친다. 그 木像은 역시 수사리(守護神列)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며 槲이나 松材의 長木에 粗荒하게 조각한 것이다.22)
솟대 위의 새가 신격의 상징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솟대 위의 새는 대개 오리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것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다준다거나 또는 火魔가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등의 종교적 상징성도 지닌다고 한다.23) 다시 말해 수신과 화신의 기능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소가 대변하는 翼宿星君은 팔괘에서 离에 위치하는데, 周易․說卦傳에 의하면 离는 곧 火이다. 翼宿은 또 남방의 주작(鳳)七宿에 해당하는데 남방과 주작은 모두 火가 된다. 한편, 黃帝占이나 開元占經 등에 의하면 翼宿은 또 바다를 책임진다(負海)고 한다. 결국 翼宿은 火와 水의 이중적 성격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24) 솟대 위의 새가 신격을 표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닌 물과 불의 이중적 상징성조차 일치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蘇塗․솟대의 So와 蘇가 발음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의미상으로도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소의 神木으로서의 격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다시 문제의 본론인 戱神으로서의 가능성을 따져보자. 한국측 자료에서는 蘇가 비록 人形化하지는 않지만 蘇塗―솟대가 놀이꾼과 밀접했던 사실은 확인된다. 바로 서긍이 “오직 창우들이 사는 곳에서만 긴 대를 세운다”고 말한 대목이다. 그는 그런 습속이 오래 전의 것이어서 당시에 이미 그 명맥이 끊어졌다고 전언했지만 손진태의 조사에 의하면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성천읍에는 사십년 전 모 진사 가의 문전에 건립되어 높이 數十尺의 直長 柏材에다 繩形으로 단청을 施하고 정상에는 역시 백재로써 開口의 龍頭를 조각하여 올리고 그 꼬리는 마치 방아다리와 같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용은 전신 채색을 하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리었었다. 건립 당일은 광대를 초청하여 步絃戱를 하고 성대한 연을 베풀었다. 선조의 山所에 이것을 세우는 사람도 있는데 그 때는 山神도 선조와 함께 위안한다고 山神木(임의로 적당한 나무 하나를 택한다)에 북을 걸고 여러 가지 才戱를 연출하는 것이다.(1923년 성천군읍내 김신호 老 談)25)
위의 예문만으로 보면 단순히 娛神을 위한 목적으로 광대패를 불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긍의 전언처럼 오직 창우들만이 자기들이 사는 곳에 긴 대를 세웠고 그것이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습속이었다면, 광대와 솟대의 관계는 보다 내밀하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솟대와 놀이패와의 관계는 현재 알려지고 있는 전통 유랑예인 집단 중의 하나인 솟대장이패(蘇塗牌)라는 명칭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심우성에 의하면 “솟대장이패란 명칭은, 이 패거리들이 꾸미는 놀이판의 한 가운데에 반드시 솟대와 같은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로부터 양편으로 두 가닥씩 네 가닥의 줄을 늘여 놓고, 그 위에서 갖가지 재주를 부린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26)
이제 다시 중국 천주지방의 인형극에서 蘇를 母姓으로 한 蘇相公을 戱神으로 모시고 있음을 상기해 보자. 蘇塗에서 솟대에 이르는 국내의 자료가 비록 인형극으로 발전된 과정을 확인해 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앞에서 살핀 내용에 의하면 적어도 최소한 놀이패들의 신격으로서의 솟대를 가정하기에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놀이패들의 神木, 곧 戱神으로서의 蘇塗―솟대에 이르는 역사적 맥락은 은은하게나마 확인되었다 하겠다.
蘇, 扶蘇, 蘇塗, 솟대 등은 신목이면서 동시에 놀이패와 관련된 희신으로서의 공통성을 지니므로 공히 한중 두 나라 인형극의 기원설에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 人形 : 神格人形과 동적 인형
본 절에서는 인형극에 선행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신격인형의 예를 살피되 동적 인형의 사례도 함께 파악해 보고자 한다.
먼저 중국측 사례부터 살펴보자. 史記․殷本紀에 전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 은나라 때 이미 신격인형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을이 포악무도하여 일찍이 인형을 만들어 천신이라 일컫고 그와 바둑을 두면서 옆사람에게 대신해서 두게 했다. 천신이 지면 그를 모욕했다.27)
무을이 천신을 모욕하는 내용으로 기록 자체로부터 제의적 성격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인형을 천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제의의 대상이던 신격인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 사람 蔡邕(132-192)의 獨斷 卷上에서도 신격인형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방상씨에게 명하여……병과 재앙을 물리쳤다. 그리고 나서는 도인(桃人)과 위색(葦索)과 이빨이 긴 호랑이를 세우는데, 신도(神荼)와 울뢰(鬱壘)가 귀신들을 잡아다가 이빨 긴 호랑이에게 갖다준다.28)
여기에 언급된 桃人은 벽사적 기능을 지닌 신격인형이라고 할 수 있다. 黑龍江省 依蘭縣志(民國14年本)에 의하면 매년 3월3일과 9월9일이면 巫家에서 跳神을 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哀米’라고 부르는 나무인형 둘을 들고 跳神한다고 한다.29)
상기한 예 중에서 뒤의 두 가지는 인형 자체로만 보면 정적일 가능성이 높지만 전체 활동 속에서 보면 사람에 의해 조종된 동적 인형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런 가능성이 인형극으로 진화되는 과정은 사천 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射箭提陽戱나 梓潼陽戱 등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놀이에는 각기 32天戱와 32地戱라는 놀이가 거행되는데, 여기서 32天戱라는 것은 실은 32명의 신격을 대변하는 32종의 神格人形이 등장하는 인형놀이를 말한다. 조종방식으로 보면 줄인형놀이에 해당한다.30) 놀이의 완성도로 보면 독립적인 인형극으로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어, 신격인형놀이로부터 인형극으로 진화하는 과도적 형식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지상에서의 신격인형과 구분되긴 하지만 동적 인형의 사례를 보다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무덤 속에서 발견된 俑이라 할 수 있다. 俑은 그 자체가 踊躍의 의미를 지녀서 동적임을 알 수 있는데 공자 생전에 그런 예가 언급되고 있다.31)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용과 인형극의 관련성을 제기해 왔는데, 특히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조립형 인형이 발견되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78년 12월 산동성 내서현에서 발견된 한나라 묘에서 여러 개의 목용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대표적인 동적 인형으로 보고된 바 있다. 높이가 193센티미터에 이를 정도로 크면서 전체가 13개의 나무로 구성되어 앉거나 서거나 무릎을 꿇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32)
酉陽雜俎 권13에는 무덤 속에서 사자를 보호하고 악귀를 막는 역할을 수행하는 인형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칼을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할 정도인 것으로 보아 동적 인형임이 분명하다.33) 이 예는 漢墓에서 발굴된 동적 인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한국측 상황이다. 北史․高麗傳에 고구려의 풍속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은) 불법을 믿고 귀신을 섬기며 음사가 많았다. 신묘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해서 나무를 깎아 만든 부인의 신상을 모셨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그 시조인 부여신의 아들을 모셨다.34)
신격인형이면서 정적 인형의 예라고 할 수 있다. 三國志․東夷傳에서는 이보다 진전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시월 국중대회 때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 위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에 모신다.35)
인형 자체는 정적으로 판단되나 제의 과정 속에서 움직임이 파악되고 있다. 이런 습속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는데 놀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한 걸음 진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중대회에서 신상이 모셔지는 과정은 요즘의 별신굿이나 장승굿의 양식과 상당히 일치한다. 하회별신굿의 경우에 신당에서 내림굿을 통해 각시신을 상징하는 각시탈을 무동태워 마을로 내려와서 집돌이 별신굿을 하며, 보름간 집돌이 별신굿을 마치면 다시 내림 받은 신격을 서낭당에 되돌려 놓는다. 이때 신격을 나타내는 것은 서낭대에 단 당방울과 각시탈이다. 각시탈은 곧 서낭각시를 나타내는 신탈이다. 초계 밤마리에서 전승되는 대광대패들의 탈놀이에서도 울산 서낭당 각시라는 인형을 안고 다니며 집돌이를 하면집 주인은 서낭당 각시를 맞이하면서 금품을 바친다. 이때 각시 인형이나 각시탈은 모두 서낭신으로 간주되었다. 집돌이 과정에서 각시탈 또한 다른 탈처럼 일정한 탈놀이를 했듯이 대광대에게 안겨 있던 인형도 풍물 가락에 맞추어져 놀려졌을 것이다.36)
위의 인용문에서 특히 ‘신격을 나타내는 것은 서낭대에 단 당방울과 각시탈이다’라는 구절은 그 외형이나 의미상 큰 나무에 영고를 매단 소도와 다를 바 없다. 괴뢰희의 발전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낙랑 분묘에 대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남정리 116호분과 오야리 19호분에서 각기 목용이 발굴되었다. 특히 남정리 116호분의 것은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조립형 인형이어서 앞에서 언급한 중국의 예에 상응하고 있다.37) 이것이 자생적 전통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한나라의 영향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만약에 한묘의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상가악에 사용된 괴뢰의 예라면 낙랑 지역에서 발견된 이 木俑도 동일한 용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고찰로 보면 한중 두 나라는 인형극의 출현에 앞서 공히 신격인형과 동적 인형에 의한 놀이의 단계를 거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사천 지역의 32天戱를 예로 볼 때 신격인형과 동적 인형에 의한 놀이는 본격적인 인형극 출현 이전의 과도적 놀이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4. 놀이꾼 : 傀儡․傀儡子․廣大
우리말로 가면놀이꾼을 광대라 하였다는 기록이 高麗史에 전해지고 있지만, 그 이전의 문헌적 용례를 발견할 수 없기에 광대만으로는 놀이꾼의 역사를 소원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광대를 통한 인형극의 역사적 소원 또한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반면에 傀儡나 傀儡子는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사용되었고, 또 문헌 용례도 상대적으로 풍부하여 좀 더 이른 시기까지의 역사적 소원이 가능하다.
중국 문헌에서 괴뢰와 관련된 용어는 대체로 한대부터 발견된다. 漢書 권70 鮑宣傳에 사용된 ‘魁壘’나 左思(약250-305)의 「魏都賦」에 나오는 ‘嵬壘’, 郭璞(276-324)의 「江都賦」 등장하는 ‘磈磥’ 및 應劭의 風俗通에서 언급하고 있는 ‘魁櫑’ 등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에들이다. 그런데 이들 용어들은 손해제의 고증에 의하면 대체로 ‘크거나 추하다(奇崛壯盛)’는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형용사에 불과하다.38) 이것은 舊唐書․音樂志에 전하는 기록과 비교하면 상당한 거리가 있다.
굴뢰자는 괴뢰자라고도 하는데, 나무인형을 만들어 놀았고 가무에 뛰어났는데 본래는 상가악이었다. 한말에 가회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북제 후주 고위(565-576)가 좋아하였고 고구려에도 있었다.39)
唐代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같은 언급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 우리가 한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쨌든 한대 특히 후한시대 이후로 위진시대를 거치면 괴뢰 혹은 괴뢰자가 인형극과 관련된 용어로 굳어져 간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北齊 顔之推(531-590) 顔氏家訓 ‘書証’편에서 “세속에서 괴뢰자를 곽독이라 한다.40)”고 했고 舊唐書․音樂志에서도 굴뢰자란 가무희를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무희로는 「대면」, 「발두」, 「답요낭」, 「굴뢰자」 등의 놀음이 있었다. 현종(713-755 재위)은 그것들이 정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방에 두고 궁중에서만 다루게 했다.41)
송대 기록에 이르면 괴뢰나 괴뢰희가 인형 또는 인형극의 의미로 제한되었음이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黃庭堅(1045-1105) 涪翁雜說 : 괴뢰희는 나무인형이다.42)
孟元老(12세기를 전후하여 생존) 東京夢華錄 卷5 「京瓦技藝」(약 12세기 전반) : 장두괴뢰의 임소삼, ……현사괴뢰의 장금선……43)
耐得翁 都城紀勝 「瓦舍衆技」(약 13세기 전반을 기술하고 있음) : 현사괴뢰, 장두괴뢰, 수괴뢰, 육괴뢰44)
상기한 용례를 배경으로 중국 학계의 괴뢰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우선 종래의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辭海의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첫째 나무인형놀음, 둘째 사람이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宋代 舞隊, 셋째 공연형식이 분명치 않은 宋代 肉傀儡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45) 그런데 최근에 翁敏華는 大江匡房(1041-1111))의 「傀儡子記」를 근거로 다소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괴뢰자가 초기에는 예인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리란 것이다. 괴뢰자는 당초 연예 외에 남자는 수렵, 여자는 매음 등에 종사하던 北狄 집단을 지칭하던 용어였는데, 이후 이들의 놀음을 괴뢰자희 대신에 괴뢰희로 줄여서 부르게 되었고, 그 결과 괴뢰가 인형을 지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를 폈다.46) 필자가 보기에 옹민화의 견해는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앞에서 인용한 舊唐書의 기록 자체에서 우리는 이미 놀이꾼과 놀이의 이중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또 한대 괴뢰와 관련된 용례들 중에, 예컨대 漢書․鮑宣傳에 전해지는 ‘魁壘之士’47)처럼 사람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있다는 사실도 놀이꾼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괴뢰자가 지닌 놀이와 놀이꾼의 이중적 의미는 일본에서도 동일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大江匡房(1041-1111))의 「傀儡子記」보다 약간 앞서 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藤原明衡( ? - 1066)의 新猿樂記에서도 괴뢰자가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의 괴뢰자는 놀이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괴뢰자가 놀이꾼과 놀이의 의미를 겸하였다는 사실은 한국의 인형극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국내의 용례를 아래에 예거해 본다.
訓蒙字會(1527) ‘人類’ : ‘傀 광대괴’‘儡 광대뢰 傀儡假面戱俗呼鬼臉兒’
譯語類解(1690) ‘技戱’ : ‘鬼臉兒, 鬼頭, 假面-廣大’‘面魁-곡도’
萬物草 : ‘傀儡 木偶戱 탈노름’, ‘鬼儡 광노름’, ‘面魁 곡도각시’
崔南善(1890-1957) 新字典(1915) : ‘傀儡木偶戱 망셕즁탈’
宋代보다 몇 세기 뒤진 16세기 이래의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놀이꾼과 가면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국내에서 사용된 괴뢰라는 용어는 후대까지도 인형이나 인형놀음 외에 탈, 탈놀음 그리고 그 놀이꾼까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였던 것이다.
괴뢰의 이런 다의적 특성은 중국과 일본의 예로 볼 때 시간의 경과에 따라 引伸되어 온 것이라기보다는, 애초에 분화의 가능성을 지녔었지만 실제로는 분화되지 못한 채 원형 혹은 그에 가까운 형태를 견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국내에서 사용된 괴뢰는 舊唐書에 언급된 굴뢰자 보다도 오히려 「傀儡子記」의 괴뢰자와 의미상 더욱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예를 찾자면 아마도 唐代 이전으로 소급해야 할 듯하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漢代 사용되었던 魁木壘가 무슨 뜻인지 불확실하지만 그 성격이 백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손해제의 견해에 공감한다.48)
괴뢰를 광대로 풀이한 대목에도 주의가 요구된다. 앞에 든 예들을 종합해 볼 때 광대는 놀이꾼이자 놀이의 의미를 지녔음이 분명하다. 가면이자 가면희의 의미도 지녔으며 나아가서는 그 형상이 鬼를 모방한 鬼臉兒 혹은 鬼頭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 최남선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펼친 바 있다.
후대의 조선어에서 무릇 倡優를 휘뚜루 「광대」로 일컫지마는 <高麗史>의 全英甫傳에 「國語、假面爲戱者、謂之廣大」라 한 것을 보면、광대는 탈놀음의 노릇바치요、<譯語類解>에도 鬼臉兒․鬼頭․假面의 諸語를 「廣大」로 역하였으며 <訓蒙字會>에는 傀儡를 다 「광대」로 새기고 合註하여 가로되 「傀儡、假面戱、俗呼鬼臉兒」라 하였으며 <譯語類解>에 또 面魁를 「곡도」라 역하고, <士小節>에 「山臺、設棚爲之、今俗傀儡假面戱是也」라 하여 많이 둘을 혼동하였으니、이를 요하건대 광대란 말은 실상 假面戱와 및 傀儡子의 노릇바치를 따로 부르는 명칭이며、여기 인하여 생각하건대、‘광대’와 ‘곡도’(꼭둑)도 본래 同源語이었을 듯도 합니다.49)
국내의 자료로만 놓고 보면 ‘광대․곡도 同源語’설은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 어쩌면 동일계통설로 간주할 수 있는 한국과 중국의 인형극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전통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괴뢰자와 광대(혹은 곽독)라는 어휘의 차이 속에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결국 괴뢰나 괴뢰자는 광대에 대응하는 말이고 그 뿌리는 아마도 鬼로 소원할 수 있을 듯한데, 후대적 전개는 양국의 상황이 상당히 달랐던 것 같다. 중국의 경우에는 唐代를 기점으로 인형극이 상당히 발전한 반면, 한국에서는 6세기에 이미 알려진 꼭두놀이라는 옛 형식에서 크게 진전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최근 괴뢰자 혹은 광대가 놀이꾼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착안해 고구려 장천1호분의 앞방 왼벽 벽화를 괴뢰자도 혹은 광대도일 것으로 추정했는데50), 만약 이러한 견해가 받아들여 진다면 大江匡房(1041-1111)의 「傀儡子記」에 언급된 괴뢰자 집단을 뒷받침하는 물증이자, 일본 괴뢰자집단의 유입경로가 고구려임을 입증하는 물증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중국계가 아닌 서역계의 영향이 강했음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5. 놀이 : 傀儡雜戱․郭禿戱․(꼭두놀이)無
之戱․肉傀儡
5.1 傀儡雜戱
중국인형극의 전개과정을 보면 인형극의 성립에 앞서 인형으로 백희나 잡희를 연출하는 현상이 먼저 확인된다. 裴松之는 三國志․杜夔傳 注에서 당시 뛰어난 공인이었던 마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큰 나무로 둥근 모양의 통을 만들어 평지에다 설치하고 물에 담궈 움직이게 했다. 여악이 춤추는 장면을 펼쳐내고, 나무인형으로 하여금 북을 치고 소를 불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또 산악을 만들고 나무인형으로 하여금 방울받기와 칼던지기, 줄타기 물구나무서기를 시키는 등 출입이 자유자재였다.51)
이와 같은 인형으로 잡희를 연출하던 전통은 隋 煬帝(605-617재위) 때에도 여전히 지속된다. 양제가 水飾圖經의 완성을 기념하여 펼친 수식 공연에서 인형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跳劍, 舞輪, 乘竿, 擲繩 등의 백희를 산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연출했다고 한다.52) 이러한 연출은 인형을 놀리는 기술적 발전과 동궤를 그린 것 같다. 예컨대 張鷟의 朝野僉載에는 唐代 工匠이었던 양무렴이 만든 나무인형에 관한 일화가 전하는데, 그가 만든 중(僧) 인형은 손에 그릇을 들고 스스로 구걸할 수도 있었고, 그릇에 돈이 가득차면 저절로 소리까지 낼 수 있었다고 한다.53)
成俔(1439-1504)의 「觀傀儡雜戱」시는 조선시대에도 인형으로 잡희를 연출했던 풍속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빛 허리띠 번쩍번쩍 붉은 옷 빛나는데,
거꾸로 매달렸다 몸을 날리니 마치 새가 나는 것 같고,
줄타기와 방울받기 갖가지 현란한 기술들까지,
줄에 꿰인 나무인형 신기를 자랑하네.
송나라 곽독만 어찌 홀로 훌륭할까?
한나라 고조도 평성에서 포위를 풀 수 있었다네.
경하위해 조정에서 욕례 펼쳤으니,
중국 사신 안목 높아 비웃지나 않을지.
煌煌金帶耀朱衣,
跟絓投身條似飛,
走索弄丸多巧術,
穿絲刻木逞神機.
宋家郭禿奚專美,
漢祖平城可解圍,
爲敬朝廷陳縟禮,
皇華眼大定嘲譏.54)
이 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견해는 둘로 나뉘어 있다. 한 쪽은 여러 가지 잡희가 공연되는 와중에 꼭두각시놀이가 언급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55) 다른 한 쪽은 놀이전체를 꼭두각시놀음으로 이해하고 있다.56)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찬동한다. 임재해가 지적한 것처럼 제목에서 괴뢰잡희라고 했으므로 괴뢰에 의한 잡희여야 옳다. 그런데 이 괴뢰가 꼭두라는 사실은 시 속에서 언급된 송나라 곽독을 통해 확인된다. 내용상 송나라의 꼭두가 비교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전반부의 내용이 모두 꼭두놀이여야 자연스럽다. 여기에 더하여 三國志․杜夔傳 注에 수록된 수력 인형놀이의 종목도 이같은 해석에 타당성을 더해준다. 중국측 문헌의 시기로 보건대 이렇듯 인형에 의한 잡희 연출의 전통은 늦어도 삼국시대이므로 국내에서 그런 놀이가 연출된 시기도 조선시대 이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요약하면 앞에 제시한 자료들은 한중 두 나라의 인형극 전개사가 공히 잡희 연출의 단계를 거쳤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5.2 郭禿戱․(꼭두놀이)無
之戱
중국의 꼭두놀이라 할 곽독희가 6세기 무렵 북제 때 이미 존재했었음은 顔氏家訓이나 舊唐書 등의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다. 곽독희의 대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은 唐代 기록을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다.
段成式 酉陽雜俎 前集 卷8 : 또 고릉현에서는 몸에 문신을 한 송원소란 자를 잡았는데, 문신이 71곳에 달했다. 왼팔에는 “……”라 하고 오른팔에는 호리병박을 새겼는데 위로 사람의 머리가 나온 것이 마치 괴뢰희의 곽공과 같았다. 현리가 이해하지 못해 물었더니 호리병박귀신이라고 대답했다.57)
梁鍠 「詠木老人」(一作傀儡吟, 一作窟磊子人) 詩 : 나무 깎아 실을 꿰어 노인 만드니, 닭같은 피부와 흰머리가 사람과 진배없네. 순식간에 놀이 파하고 아무 일 없이 고요하니, 마치 뜬 구름같은 인생과도 같구나.58)
段安節 樂府雜錄 : 그중 가무를 인도하는 자로 곽랑이란 자는 머리가 벗겨졌고 우스개를 잘하여 민간에서는 그를 곽랑이라고 불렀다. 모든 희장에서 반드시 배우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했다.59)
舊唐書 : 가무희로는 「대면」, 「발두」, 「답요낭」, 「굴뢰자」 등의 놀음이 있었다. 현종(713-755 재위)은 그것들이 정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방에 두고 궁중에서만 다루게 했다.60)
곽독희가 가무희라는 점, 주인공 곽공의 형상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禿頭 외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 버전도 있었다는 점, 인형의 몸체를 호리병박으로도 제작하였던 점 등이 확인된다. 또 극단에서 곽독이 우두머리 지위를 지녔음도 확인되는데, 이런 전통은 현재 복건성 안영현 풍전양촌이나 용계현 건미촌 및 황용촌 등지에서 戱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현상에서도 확인된다.61) 곽독이란 어휘 자체에 신격으로서의 의미가 내재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마침 서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꼭듸각시도>에 ‘新羅本音人之腦後謂之꼭듸指其背後高處’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데62), 내용으로 볼 때 머리 부분이 크게 강조된 鬼라는 글자나 그런 鬼의 머리를 의미하는
자와 부합하고 있다. 앞에서 광대와 곽독의 동원어설을 거론했고 나아가 그것이 鬼頭나 鬼로 수렴되고 있음을 되새겨 보자. 위의 자료들은 곽독희는 한중 자료를 동시에 검토할 때 그 실체가 보다 명료해질 수 있음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필자가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전승되었던 無㝵之戱이다. 관련 기록으로는 一然(1206-1289)의 三國遺事 卷4 ‘元曉(617-686)不羈’와 李仁老(1152-1220)의 破閑集 下(1260년 목판본)에 수록된 기사가 중요하다. 차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원효가 계율을 어겨 설총을 낳은 뒤에는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가 춤추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습이 기괴하였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본떠 도구를 만들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라는 구절에 근거해 무애라고 이름 붙이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원효는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시키고 읊으며 돌아옴으로써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나 옹기장이나 무지몽매한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게 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으니 그의 교화는 크다고 하겠도다.63)
예전에 원효대성이 천한 사람들 속에 섞이어 놀았다. 일찍이 목 굽은 호로박을 어루만지며 저자에서 가무하고 이를 무애라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일 좋아하는 자가 금방울을 위에 매달고 채색 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하여 두드리며 진퇴하니 모두 음절에 맞았다. 이에 불경에 있는 게송을 적취하여 무애가라 하니 밭가는 늙은이는 이를 모방하여 유희로 삼았다. 무애지국이 일찍이 제하여 이르기를 “이 물건은 오래도록 무용을 가지고 사용하였고 옛 사람은 도리어 불명으로써 이름이 났도다.” 근래 산인 관휴가 게를 지어 이르기를 “두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이장을 끊은 까닭이요, 세 번 다리를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한 까닭이다.” 하였으니 모두 진리로써 이를 비유하였다. 나도 또한 그 춤을 보고 찬을 지으니 그 찬에 이르되 “배는 가을 매미마냥 비었고 목은 여름 자라처럼 꼬부라졌도다. 그 굽힌 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요 허한 것은 물건을 용납할 만하도다. 밀석에 막히는 것을 볼 수 없고 규호에 비웃음 받지 않도다. 한상은 이로써 세계를 숨겼고 장자는 이로써 강호에 떠다녔도다. 누가 이 이름을 지었는가, 그는 소성거사요. 누가 찬을 지었는가, 농서의 타리로다.” 하였다.64)
위에 제시한 양국 자료를 비교해보면 호리병박 인형, 가무희, 瑰奇한 형상-여기서의 瑰는 傀, 魁와 통하는데 瑰, 傀, 魁 세 자는 모두 鬼로 수렴된다-이라는 점 등이 공통점으로 부각된다. 무애지희가 꼭두놀이였으리란 견해는 이에 근거한 것이다.
高慮史에 의하면 무애지희는 서역에서 기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꼭두놀이는 서역에서부터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불교와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3 肉傀儡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육괴뢰는 남송대 나타나고 있는데, 그 연출의 실상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어 현재까지 몇 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다.
첫째, 어른이 아이를 받치고 노는 형식이란 설로 손해제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都城紀勝의 육괴뢰 아래에 달린 “어린아이들로 논다”는 주의 내용에 근거해 당시 도성에서 어른이 여동을 어깨 위에 올리고 춤을 추게 한 隊舞를 육괴뢰로 지목하였다.
둘째, 臺閣 및 水傀儡라는 설로 周貽白이 제기하였고 董每戡 또한 육괴뢰가 오늘날 복건에서 말하는 포대희일 것이란 설을 제기하였다.
셋째, 육괴뢰를 가면희곡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로 王兆乾이 대표적이다.
넷째, 어린 아이를 실로 조종하는 형식으로 오늘날 천주 이원희에서 연출하는 提蘇의 형식이라는 설로 葉明生이 대표적이다.
위의 네 가지 설 중에서 육괴뢰를 가면희곡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에 대해서는 찬성하기 힘들다. 한국측 사료로 보면 괴뢰 자체에 이미 가면희의 뜻이 담겨 있는데 후대에 새삼 肉자를 덧붙여 가면희라고 불렀을까 의심스럽다.
나머지 세 가지 설은 각각 나름대로 근거를 지닌다고 보이는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첫 째와 둘째의 擡閣설이다. 한국측 자료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설과 관련해서는 우선 董越의 「朝鮮賦」(1488)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무산협의 물을 마시네.(어른의 두 어깨 위로 두 명의 동자가 춤을 추네.65)
형식으로 보면 앞서 언급한 남송대 대무형식과 일치하는데, 그것을 원숭이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명대 사람들은 그것을 猴戱로 간주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최초의 괴뢰희는 鬼戲이자 偶劇이며 또한 猴戱라는 견해와 연결되고 있어 주목된다.
19세기 말 吳宖黙, 咸安叢瑣錄 己丑年(1889) 12月 30日(음력) 기록에서도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다시 몇 명의 아이들이 어른의 어깨에 올라서서 손을 휘저으며 나아갔다 물러섰다 하며 춤을 추었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매귀희라고 한다.
又有幾箇妙童, 直立於大人肩上, 擧手翩翩, 舞進舞退, 俗所謂埋鬼戱也.
이것은 연말에 행해진 나희의 일종인데, 팔다리의 단순한 움직임이나 그 명칭이 매귀희라는 점에서 보면 은연중에 육괴뢰와 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위에 제시한 두 가지 사례가 육괴뢰로 인정된다면 한국 인형극의 역사에는 새로운 형식이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그것도 최소한 4백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양식으로.
둘째설과 관련해서는 三國志․東夷傳에 전하는 국중대회 때 신상이 과정에서부터 요즘의 별신굿이나 장승굿의 양식에서 발견되는 行像적 행위를 제시할 수 있다.66)
비록 자료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육괴뢰로 의심되는 인형극의 양식이 한중 두 나라에 모두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6. 텍스트 및 공연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
본절에서는 텍스트 및 공연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통해서 양자의 연관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텍스트의 내용과 관련해 한중 인형극에서는 공히 喪事를 주요 제재로 다루고 있다.
중국 인형극이 상가악의 성격을 한대이래 현재까지 근 2천여 년 동안 지녀왔음은 문헌기록에 의해 맥락이 확인된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응소는 풍속통에서 괴뢰를 상가악이라고 밝혔고, 이어서 8세기에 封演은 封氏見聞錄에서 절도사의 장례식에 인형놀이가 베풀어졌던 사례를 적어서 남기고 있다. 9세기 무렵 단성식 또한 酉陽雜俎에서 상악과 괴뢰희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현재 천주 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괴뢰희 대본 目連全簿 또한 상사를 주된 제재로 삼고 있다.
한국의 꼭두각시놀음에도 상가악의 전통이 보존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현재까지 채록된 다수의 채록본들에 의하면 모두 상여거리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통은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고구려 장천 1호분 벽화 속의 괴뢰자도까지 소급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덤 속의 벽화는 그 자체가 장의예술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둘째, 텍스트의 구성방식에서도 한중 인형극 사이에는 유사성이 발견된다.
외형상 중국 인형극은 장편의 번듯한 형식을 지니고 있고 한국 인형극의 텍스트는 채록본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다루는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한국꼭두각시놀음의 채록본과 천주 괴뢰희 目連全簿를 비교해 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서로 독립적인 내용이 한 데 모여 있는 현상이 그것이다. 꼭두각시놀음이 몇 개의 거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 장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인 내용을 지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장편의 「目連」全簿에서도 상호 유기적 연관성이 없는 「李世民遊地府」, 「三藏取經」 그리고 「目連救母」의 세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목련희를 구성한다. 이야기 자체의 장편화와 완정화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습속이 보존된 결과가 아닌가 판단된다.
셋째 곽독과 박첨지는 각색과 인물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중국 인형극에서 곽독은 단순히 극중인물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배우들의 우두머리이자 나머지 배우들을 인도하는 인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 배역에 있어서도 구체적인 성명 없이 곽공이니 곽랑이니 노인 등으로 불리운 것으로 보아 부류나 계층을 대표하는 수준에 머무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극중인물과 각색으로 나누어 말하자면 극중인물보다는 오히려 각색에 가까운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곽독이 수행했던 인희의 전통은 희곡에서 冲末을 거쳐 副末로 전승된다. 그 결과 1699년에 탈고된 桃花扇이란 전기작품에서도 부말이란 각색이 개장을 담당하고 또 해설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곽독은 축이란 각색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는데 그것은 형상과 성격 두 가지 측면에서 동질적 특성을 지닌다. 양자는 형상적으로는 공히 추한 몰골을 특징으로 삼으며, 성격적으로는 공히 골계적 특징이 부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곽독의 특징은 한국 꼭두각시놀음의 박첨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꼭두각시놀음의 주인공인 박첨지의 첨지는 관직을 나타내는 명칭일 뿐으로 그는 구체적인 성명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점은 탈춤의 영감할미 과장에서 영감이 그런 것과 동일하다. 또 그는 극중 배역과 아울러 해설자의 역할도 수행한다. 개막도 그의 몫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역할은 극중인물의 역할을 뛰어넘는 것으로 중국 전통극에서 말하는 이른 바 각색의 역할에 해당한다. 인희로서의 역할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된 예를 찾자면 조선시대 羅湜(?-1546)의 「傀儡賦」에 등장하는 곽랑이라 하겠는데, 역할상 박첨지의 선행모델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첨지의 외모가 추하고 양황의 시에 묘사된 나무노인처럼 鷄皮와 鶴髮이란 특징을 지닌다는 점, 그가 극중에서 수행하는 재담이 매우 골계적이란 점 등은 또 곽독―축의 특징에 부합하고 있다.
여기서 꼭두가 극중인물이 아닌 각색의 의미를 지녔음에 착안하면 꼭두각시놀음의 주인공이 왜 꼭두가 아닌 박첨지냐에 대한 논란에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각색으로서의 꼭두는 굳이 극중인물의 명칭과 일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배우나 관중은 여전히 꼭두라고 불러도 그 꼭두는 극 속에서 얼마든지 다른 명함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넷째, 鮑老와 婆羅門 그리고 和尙 사이에는 내적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중 두 나라 모두 송대이래 옛 시인들의 시에는 곽독과 함께 포로가 곧잘 언급되고 있다. 포로는 다른 인형극과 달리 가면희곡으로 알려져 있다. 왕국유는 고극각색고에서 이 鮑老가 婆羅門에서 왔을 것이라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최근에는 왕조건이 다시금 이런 관점에서 弄婆羅-抱鑼-鮑老로 변화되었으리란 견해를 제시하였다.67)
조선시대 시나 부에서도 포로를 언급하고 있으니 16세기 중반에 박승임(1517-1586)이 읊은 「傀儡棚」이 그 한 예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그것이 婆羅門 곧 화상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이다. 만약 이 견해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한국 인형극에서 포로와 곽독의 실례를 원효의 무애지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1인 조작의 인형극이라면 인형을 조종하는 놀이꾼이나 조종당하는 인형이 유사한 춤을 추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형의 외형이 대머리인데 그 조종자가 화상이라며, 인형이 춘 춤의 특징이 소매가 헐렁한 袖舞였는데 포로가 화상이라면 그는 당연히 가사를 입었을 터이고 그 복장으로 추었을 춤은 역설적으로 袖舞와 훌륭한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포로가 잔치자리 앞에서 곽랑을 비웃네, 그의 춤소매 너무 헐렁하다고. 만약 자신더러 나와서 춤추라고 한다면 더더욱 춤소매 헐렁할 터인데도.68)
북송 楊億(974-1020)이 지은 위의 「傀儡」詩는 이러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하겠다.
7. 마무리
본고에서는 5가지 논제를 가지고 한중인형극의 종횡비교를 시도하였다. 자료적인 측면에서의 불균형을 고려하여 한국측 자료를 기준으로 징검다리식 논제를 추출하여 역사적 대강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런 방식을 취한 까닭은 시대적 공간적 범위가 너무 넓기에 부득이 그런 것이다. 지면적 제약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논의의 초점은 양자의 관련성을 부각시키는 데 맞추었다. 이는 본고 자체가 지니는 시론적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향후 깊이 있는 논의의 전개를 위하여 전체를 개관하는 스케치가 필요했고, 그러자면 우선 연관성부터 파악되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고에서 선택한 5가지 논제를 통해 얻은 결과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蘇․扶蘇와 蘇塗․솟대는 공히 神木으로 파악되며 또한 놀이패와 긴밀한 戱神으로서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중 두 나라 인형극의 기원설에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둘째, 한중 두 나라에서는 본격적인 인형극의 출현 이전에 공히 신격인형과 동적 인형에 의한 놀이가 행해졌을 것으로 판단되면 그것은 놀이와 극 사이에 개재하는 과도적 형태였을 것이라 했다.
셋째, 괴뢰와 괴뢰자는 광대에 대응하는 말이고 그 뿌리는 鬼로 소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한편 광대와 곡도가 同源語였으리란 견해에 찬동했다. 7-10세기를 지나면서 한중 두 나라 인형극의 전개사가 각자의 노선을 걸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넷째, 놀이적 측면에서는 먼저 인형에 의한 잡희 연출의 전통이 두 나라 모두에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중국의 郭禿戱, 곧 한국의 꼭두놀이에 해당하는 실례로 新羅시대부터 高麗시대에 이르는 무애지희를 적시했다. 마지막으로 국내에도 중국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육괴뢰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섯째, 텍스트와 관련해서는 喪事를 주요제재로 삼고 있다는 점을 말한 다음 구성의 측면에서 비유기적이고 독립적인 내용이 연결되고 있는 점 등을 공통점으로 제시했다. 연출과 관련해서는 곽독과 박첨지가 지닌 각색과 인물의 이중적 역할을 지적하였고, 이어서 화상-婆羅門-鮑老의 연관선상에서 무애지희에서 수행했던 원효의 역을 되새겨보았다. 포로의 예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총괄하면 한중 두 나라 인형극은 기원적 측면에서 동일계통설이라고 할 만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독자적인 성격도 적지 않다. 역사적 전개는 대체로 중세까지 동일한 궤적을 그리다가 그 이후로는 점점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神木의 단계 - 神格人形과 동적 인형의 단계 - 傀儡雜戱의 단계 - 郭禿 혹은 꼭두놀이의 단계’까지의 전개는 동일한 궤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 언급되었던 문제를 재론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역사적 전개, 텍스트나 공연과 관련된 문제를 통해서 볼 때 한중 인형극의 동일계통설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국 인형극이 중국의 직계라거나 또는 중국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설은 구체적인 근거가 박약하다. ‘서역―중국―한국’식의 漸播的 경로설도 그 실체가 모호해진다. 경로설이 의미를 지니려면 중국화된 인형극의 국내로의 영향이 파악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윤곽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 확인된 내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에 그친다. 향후 좀 더 깊이 있는 탐색이 요구된다 하겠다. 또 ‘서역―중국’ ‘서역―한국’의 동시적이며 구분되는 이입경로도 예상되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결국 한중 관계론은 한중의 범위를 넘어서서 동아시아권역과 서역권역의 비교연구를 기다려야만 좀 더 객관적인 결론이 얻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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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韓中人形劇的關係到底有什麽關係? 對這一題目從來少有人作過比較. 因此, 一些韓國學者已往提出的‘中國對韓國的影響說’還沒找到立脚點. 爲了解決這一問題, 本文以韓中兩國的傳統人形劇爲對象進行了初步比較和探討. 具體說, 經過從五個論題入手的縱橫比較, 得到了兩國人形劇發展史的大綱. 據此結果, 我達到初步認識 : 韓中兩國人形劇大體上可以說是同一系統, 但是具體內容上也有不少獨有的特性. 兩者的歷史發展情況, 大約至中世, 是大同小異的. 後來分道揚鑣, 至今相差得很.
據本文所得的結果來看, 一些學者提出的在人形劇史上‘中國對韓國的影響說’缺少具體根據. 所以我主張, 這種說法的正確與否, 不如先把握‘西域對中國與韓國影響說’的具體情況, 再說也不晩.
주제어 : 인형극, 인형놀이, 傀儡戱, 神木, 戱神, 蘇, 蘇塗, 神格人形, 동적인형, 傀儡, 傀儡子, 廣大, 傀儡雜戱, 郭禿戱, 꼭두놀이, 無㝵之戱, 肉傀儡, 郭禿, 박첨지, 鮑老, 和尙
출처:한국중국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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