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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벼농사의 발전
① 수리전(水利田)의 조성
송대에서는 산업의 발달이 현저했다. 특히 농업의 진보가 눈부시다. 농업생산의 향상은 수리전의 조성에 의한 경지면적의 증가, 이를 경영하는 장원제의 보급, 벼의 품종개량, 벼보리의 이모작, 농기구의 개량보급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수리전(水利田)이라 함은 우전․위전․호전(湖田) 등의 총칭이다. 이것들은 강동(강남동로), 회남․절강동로 등 양자강하류 델타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강남지역에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토지가 낮고 수분이 많은 땅이었으므로 제방을 쌓아 사방에 두르고 내부를 논으로 하였다. 이를 우전이라 한다. 제방의 외부의 수위는 높기 때문에 제방에 두문을 설치하고 이에 수로를 통하게 하여 두문(斗門)을 개폐하여 관개하였다.
우전․위전․호전의 이름은 다르지만 실체는 구별하기 어렵다. 원래 우전은 대규모의 것이고, 위전은 소규모의 것이었는데 남송시대에는 그 구별이 없어졌다. 단지 강동에서는 관유지의 경우에는 우전이라고 불러 지목명이 되었다.
우전에는 관유지의 경우와 사유지의 경우가 있고 장원조직에 의하여 경영된 것이 많다. 관우전에는 사우전에 비하여 규모가 큰 것이 많고 예를 들면 태평주 무호현의 만춘우(萬春圩)는 주위가 84리, 제방 안의 넓이 6장, 높이가 1장2척, 논127경이 있고 건강부 율수현의 영풍우(永豊圩)는 주위가 84리, 논1000경 84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비하면 민우전은 소규모이지만 수는 많았다.
강남의 우전개발은 이미 오대의 남당에서 상당히 이루어졌던 것 같은데 북송중기이후, 그 구축은 점점 활발해져 남송초에는 병화에 의하여 황폐해진 것도 있었으나 점차 수복되고, 따로 새로이 만들어진 것도 있어서 수리전의 면적은 크게 증가하고 강남지방의 생산향상에 공헌하는 바가 컸다.
우전은 “풍년은 있어도 수환은 없다”고 말해졌다. 그 땅의 성질은 강호의 진흙이기 때문에 비옥했고 풍부한 수확을 가져왔다. 그러나 수환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안 등의 수복을 게을리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므로 관은 민우에 대하여 돈이나 쌀을 빌려주어 수복하게 했고, 매년 자치적으로 우안을 수선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우전 가운데 관우는 장원을 이루어 경영되고, 그 전호는 전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민우에게는 관호형세호가 소유하는 것이 많았고, 마찬가지로 장원조직으로 경영되어 주로 전호에 의하여 경작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중소농민이 경작하는 것도 있어 이 경우 정부는 돈이나 쌀을 빌려주어 우안수복에 힘쓰게 했다.
② 벼의 품종개량
중국에서는 주로 벼는 남방에서 재배되었고, 보리 등의 잡곡을 북방에서 경작되는 것이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대세이다. 그것은 강우량․기온․수리 등의 여러 조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벼는 주로 양자강연안 이남에서 재배되었고, 북방의 황하유역에서는 섬서의 위수․경수 등 수리가 있는 지역에서 재배될 뿐이었다. 황하유역의 주요재배곡물은 기장․수수․보리․콩 등의 잡곡이다.
남방에서는 수전이 설치되어 벼농사가 이루어졌고, 북방에서는 육전에 의하여 잡곡이 재배되었다. 그 경계는 대개 회하에 있었다고 한다. 북방에 있어서 수전의 개발, 남방에서의 보리류의 재배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진전은 있으나 주요재배곡물 분포의 대세는 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벼의 품종에는 큰 변화․발전이 있었다. 그 발전은 당에서부터 북송․남송에 걸쳐 현저하게 나타났고, 남송말에는 주요품종은 모두 갖추어진 느낌이 있다.
벼의 품종분류의 기준으로는 쌀알이 끈기가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 성숙기가 이른가 늦는가 하는 점 등이 있다. 끈기 있는 것, 끈기 없는 것 모두 옛날부터 있었으나 남북조시대까지는 파종기는 빠르고 , 따라서 수확도 빨랐던 것 같아 조도(早稻)에 속했던 것 같다. 그것은 후한의 농서 《범승지서(氾勝之書)》, 진의 곽의공(郭義恭)의 《광지(廣志)》, 후위의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齊民要術)》 등에 벼는 3, 4월(음력)에 심고 7월에 익는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부터 알 수 있다.
그런데 송나라가 되자 벼는 조도․만도(晩稻)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 되고 남송도 말에 가까워지면 절동로나 임안부에서는 조도, 중도(中稻), 만도로 나뉘어 중도의 품종은 7, 8월에 성숙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심어져 중요한 것이 되었다.
명주(절강성 영파)의 지지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에 의하면 “명주의 곡에는 조화가 있고, 중화가 있고, 만화가 있고 조화는 입추를 기하
여 성숙하고 중화은 처서가 되어 성숙한다. 중화가 가장 풍부하고 조화가 그 다음이다. 만화는 8월에 성숙하고 조화에 비하여 더욱 드물다”라고 되어 있어서 조도는 7월 7일 무렵, 중도는 7월 23일 무렵, 만도는 8월무렵에 성숙하고 중도가 가장 많이 재배되었고 조도가 그다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도․만도의 성숙기는 지역에 따라 달랐던 것 같다. 조도․만도의 두 벼로 나뉘어지는 지역에서는 조도가 많이 심어진 것이 일반적이었다. 복건로나 광남동로 등의 남중국해 연안지대에서는 조도와 만도를 교대로 하여 이기작이 이루어졌으나 그 밖의 지방에서는 일숙이 보통이었고 산기슭의 논에는 조도를, 바다에 가까운 논에서는 만도를 심는 지방도 있었다.
③ 점성미의 보급
진종은 대중상부5(1012)년, 사신을 복건으로 보내 점성도 3만곡(斛)을 가져오게 하여 이것을 한해(旱害) 때문에 고심하는 강남․회남․양절 삼로에 분급하여 파종시켰다. 점성도는 지금의 남베트남에 해당하는 점성(챰바)원산의 벼이다.
점성도는 내한(耐旱, 햇볕에 강한)의 특성이 있고, 경지의 비옥함과 관계없이 잘 지어지고, 곡식에서 쌀을 얻는 일이 비교적 많다고 하는 여러 이점을 갖춘 우량품종이었으므로, 진종의 시도는 성공했고, 이후 그 재배가 보급하고 남송시대에는 강남동로․서로에서는 경지의 8, 9할은 점성도를 심게 되어 양절로에서도 그 재배가 번성했다. 복건․광동방면은 진종이전 송초부터 이미 점성도를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송 이후도 점성도계의 여러 품종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쌀농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점성도는 조도에 속하고 3, 4월에 심고 3, 4개월이 지나 성숙하므로 만도와 교대로 이기작이 번성하게 되었고 또 보리와 함께 이모작을 보급시키는 일에 공헌하는 바가 컸다.
끈기가 가장 많은 찹쌀(糯)도 각지에서 재배되었다. 이것은 주조의 원료로 쓰이는 일이 많고 정부는 술의 전매를 위하여 양조원료인 찹쌀을 조세로서 징수하고 또는 사들였다.
2) 보리․밀 재배의 발달
① 보리․밀 재배 지역의 확대
보리는 원래 화북을 주산지로 하였으나 남북조시대부터 당에 걸쳐 강남에서도 육전, 즉 논에서 경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북송에 들어서서도 보리는 각지에 심겨졌으나 그 중엽에 되자 소주에서 보리는 베고 벼를 심어 1년에 재숙했다고 하는(이모작) 사료(원풍7년의 주장문(朱長文) 《오군도경속기(吳郡圖經續記)》권상 물산(物産))도 보인다.
남송이 되자 화북인이 대거 강남으로 유입했으므로 북방의 면(麵)식의 풍조가 강남에서도 일반화되고 밀의 수요가 증가하고 보리의 가격이 등귀했다. 그 때문에 강남에서의 보리재배가 발달했다고 전해진다.
남송시대는 북송시대를 계승해 도시의 발달이 현저했고 도시를 무대로 하여 화려한 소비생활이 전개되고, 술의 수요가 상당히 증가했다. 송에서는 술은 정부의 전매품이 되어 있었고, 정부는 주무(관영 술양조기관)를 설치하여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남송에서는 더욱이 담군주고를 두어 술을 양조판매하여 그 이익을 군비로 돌렸다.
술의 제조원료는 찹쌀(糯米)과 밀로, 밀은 누룩으로 사용한다. 주무(酒務), 주고(酒庫)의 증설과 함께 찹쌀과 밀이 대량으로 소비되었다. 이 수요에 응하기 위하여 보리․밀재배가 활발해졌다.
보리는 군마의 사료로서의 수요가 컸다. 남송은 금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마군이 많이 두어져 있었다. 군마의 사료의 대부분은 보리이고, 정부는 말먹이용의 보리를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인민으로부터 보리를 사들이거나 추세를 보리로 절납하게 했고 영전․둔전을 설치하여 보리를 경작하거나 또 황전(荒田)을 개간할 경우에 보리․밀 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다.
남송에서는 북방인구의 유입도 있어 인구가 크게증가했기 때문에 기근의 경우 종래와 같이 쌀만으로 굶주린 인민을 구제하는 것은 곤란해졌다. 거기에 밀로 구제하는 정책이 취해졌고 보리․밀 재배는 정부관헌에 의하여 장려되었으며 보리․밀 재배의 보급을 자극했다.
② 벼․보리 이모작의 보급
장원내에서도 논에서 쌀․보리의 이모작이 이루어졌다. 민유장원에서는 일반적으로 전호는 쌀을 나누어 지주에게 조로써 납부하고 보리는 자기의 수입으로 하고 있었다. 즉 보리․밀 재배는 전호의 이익이 되고 있었으므로 전호는 나아가 보리의 이모작을 생각하였다. 지주도 노복을 사역하여 보리․밀 재배의 직접경영을 하였다.(관유장원에서는 전호는 벼․보리를 조로서 관에 납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사정아래에서 남송에서는 보리․밀 재배이 보급되고 양절․강남동서․복건․형호남의 여러 로에서 보리가 경작되었다.(광남동서로에서는 그다지 경작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것은 기후의 관계때문일 것이다)
또 양자강이북에서도 회남동서․경서․형호북로에서 경작되고 사천에서도 많이 재배되었다. 이들 중, 양절․강동서․복건․회남 여러 로에서는 수전에서는 쌀․보리 이모작이 상당히 행해졌고, 논에서는 콩․보리, 조․보리 등의 이모작이 이루어져 생산력 증진에 공헌했다. 보리․밀은 양세로서도 징수되었다.
남송에서는 지주․중소농민에서 전호에 이르기까지 보리․밀을 경작하고 자가소비나 납세로 하고, 남는 것은 시장에서 팔았다. 정부는 쌀․보리에 대해서는 상세를 면제하고 그 유통을 장려하였고, 상인은 이를 상품으로서 매매하고 많은 이익을 거두어 재부를 쌓는 자도 출현했다.
③ 보리․밀 재배기술의 진보
남송에서는 보리․밀 재배의 기술이 진보했다. 보리․밀은 주로 산지․육전․사지 등의 밭에서 경작되어 보리․콩 등의 이모작을 행하였다. 수전에서도 보리가 경작되었고 쌀․보리의 이모작을 행하였고, 수확시기가 빠른 조전, 토지가 높은 고전에 쌀․보리의 이모작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조생종 벼의 대표품종은 점성도로 만생종은 경도였다.
갱도(秔稻)는 비옥한 논에서 경작되는 반면 수확량은 많지 않으나 보존이 가능하므로 조세로서 징수되었고, 가격이 비싸 상호(上戶)의 식량이 되었다. 점성벼는 논의 비옥도와 관계없이 경작되어 수량도 많았고 가격이 저렴하여 중․하호의 식량이 되었다. 조전 내지 고전에서는 조도를 경작한 후, 보리․밀을 경작하는 이모작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보리의 파종기는 구력 8․9월에서 다음해 4․5월에 수확했다.
보리의 품종에는 조․중․만의 여러 종이나 춘맥이 있었고 음식에 적합한 것, 양주용에 적합한 것 등 각종이 있었고 밀의 품종에도 조․중․만의 여러 종류가 있었다. 밀기울이 두껍고 밀가루가 적은 것, 무망(無茫)한 것이 있었고 춘소맥도 있었다. 보리․밀 외에 쌀보리(穬麥)도 있었다.
남송에서는 보리는 벼에 다음가는 중요한 작물이 되고 강남에서도 중요한 식량이었다. 보리․밀 재배의 발전은 강남의 생산력발전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었고 중국농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되었다.
3) 강남의 개발
① 화북문화의 강남이동
중국의 문명은 황하중류 지역에서 일어나, 그 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방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남방의 양자강하류 지역, 즉 강남지방으로의 발전은 중국의 역사상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강남은 멀리 은․주를 거쳐 춘추전국시대가 되어도 중국문명권 밖에 있었고 이른바 남만화외(南蠻化外)의 땅이었으나 황하유역의 화북에 비하여 훨씬 고온다습하고, 농업생산의 가능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개발되어 화북의 농경에 기초를 두는 중원문명이 이식되고 전 중국의 주요생산지대가 되고, 문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 중국사의 대세였고, 강남개발의 의의이다.
강남의 개발은 진한이후 점차 진행되었으나 역사상 특히 획기적 진전을 나타낸 시기가 전후 2번이 있다. 앞이 육조시대, 뒤가 남송시대이다. 이 두 시기는 함께 화북은 북방민족 때문에 점령지배되고 한족왕조는 강남으로 옮기고, 국도를 이곳에 두고 개발에 노력했다.
강남개발의 진전은 시대의 큰 흐름이었다. 남조시대의 비약기를 이어받아 수, 당, 북송으로 그 발전은 계속되었고 남송에 이르러 재차 비약기를 맞이한 것이다.
강남개발의 고찰에 대해서는 일찍이 쿠와바라 지쯔조(桑原隲藏)씨가 「역사상으로 본 남북중국」이라고 하는 논문으로 회수․한수의 선을 경계로 하여 중국의 남과 북을 호구․생산력․문화 등의 여러점에서 비교하여 역사적으로 연구하였다. 또 그 후 가또 시게루(加藤繁)씨는 그의 논문 「송대의 호구」에서 당․송의 호구의 분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② 호구의 증대
지금, 이것들에 의하여 호수(戶數)에서 강남개발의 진전상황을 보면, 전한 원시2(서기 2)년에 9대 1, 서진 태강원(280)년에 7대 3, 당 천보원(742)년에는 6.오대 3.5로, 옛날부터 인구는 황하유역지방이 조밀하고, 양자강이남에서는 희박했으며 당의 중엽까지는 이 형세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북송 원풍3(1080)년이 되자 남북의 비율은 역전하여 3.5대 6.5가 되었고, 당의 강남․영남의 양도에 해당하는 양자강이남의 지역에 대하여 비교하면 북송은 당의 3배의 호수가 되었다. 또 북송 원풍3년, 전국 호수의 반이 이 지역에 존재했다. 즉, 당에서 송에 걸쳐 양자강이남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고, 전국인구의 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남송은 회수이북을 잃고 영토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남송의 영토중에서도 회남로․형호북로와 같은 국경지역은 금군과의 전쟁터가 되었기 때문에 그 손상으로 인하여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으나 양자강이남의 땅, 및 사천지방에 있어서는 호수가 증가했다. 따라서 인구수도 증가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강남서로․복건로․양절로 및 사천에 걸친 증가가 현저했다. 따라서 국토는 반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송 대환4년의 전국호수 2천88만호에 대하여 남송 가정11(1218)년에는 1천3백67만의 호수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표 11> 북송호구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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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주(부․군․감) |
호 수 |
구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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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태종지도3(997)
인종천성7(1029)
신종원풍3(1080)
휘종대관4(1110) |
1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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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
4,132,675
10,162,689
16,732,504
20,882,258 |
26,054,238
23,830,781
46,734,784 |
전국통일 980년
송대최고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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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
고종소흥32(1162)
효종건도2(1166)
영종가정16(1223) |
15 |
196 |
11,139,854
12,335,450
12,670,801 |
23,112,327
25,378,648
28,320,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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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화북을 능가하는 경제와 문화
옛날 강남이 개발되지 않은 시대에서는 화북은 식량에 있어 자급자족이었다. 강남의 개발이 진전되고 농업생산이 활발해지자 수․당이후 강남에서 생산되는 쌀이 화북으로 보내지고, 정치의 중심인 수도 장안․낙양이나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는 국경지대로 보내지게 되었고, 그 수송로로서는 운하가 만들어져 활용되었다. 이를 조운(漕運)이라 부르고 당대(唐代)에는 강남으로부터의 조운미는 그 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매년 평균 200만석정도였다. 이것이 북송시대에는 620만석에 달했다는 것은 심괄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나타난다. 당대에 비하여 북송강남의 쌀의 생산액이 약진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은 조운상공미의 증가는 송대의 강남수리전개발에 의한 경지면적의 증가, 벼, 보리의 품종개량, 이모작의 실시 등에 기초한 생산력의 향상에 의한 것이다. 남송이 되자 이 경향은 점점 심해졌고, 또 보리․밀 재배 등의 보급도 있어 남송의 경제력은 북송을 능가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진보로 인하여 문화면에 있어서도 강남지역의 중요도가 증가해 간다. 옛날부터 문무양면에 있어서 역사상 유명한 인물은 대개 화북출신이었다. 정치가․문인에 대해서도 화북출신의 인물이 대부분 독점하고 있는 경향이었다. 이 대세는 당에서 송초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적 개발을 따라 강남에서도 인재가 점차 출현하게 되고, 북송중기 이후, 정치가나 학자로서 남방인의 진출이 보이게 되었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미 ‘과거제 개혁의 추이’에서 언급하였다. 특히 강남서로출신의 왕안석을 비롯한 신법정치가에는 강남인이 많고, 더욱이 채경과 같은 복건출신자도 배출되게 되었다.
<표 12> 복건출신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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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
南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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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學 |
유초(遊酢), 양시(楊時) |
나종언(羅從彦), 이동(李侗), (주희(朱熹)), 황간(黃幹), 진순(陳淳), 이방자(李方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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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林 |
임개(林槩), 왕회(王回), 진양(陳暘) |
임지기(林之奇), 임광조(林光朝), 유자훈(劉子暈), 채원정(蔡元定), 채침(蔡沉), 호안국(胡安國), 호인(胡寅), 호굉(胡宏), 호녕(胡寧), 정초(鄭樵), 진덕수(眞德秀), 료덕명(廖德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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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苑 |
전희(錢熙), 황이간(黃夷簡), 황항(黃亢), 황감(黃鑑), 장망지(章望之), 황백은(黃伯恩), 왕무구(王無咎), 유선(劉銑) |
웅극(熊克) |
* 《송사》도학전․유림전․문원전에서 추출. 도학 22명 가운데 7명, 유림 78명 가운데 15명, 무원 75명 가운데 9명이 복건출신이다.
④ 송학의 중심․복건지방
남송에 있어서 복건지방의 개발은 현저했고, 양시(楊時, 龜山)나 주희가 나와 송학의 중심이 되었다. 주자학의 학파가 민학(閩學)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복건의 다른 이름인 민(閩)에서 비롯된 것이다. 송학의 대학자로는 복건출신자가 많았다.
전통중국의 학문․교육의 주요목표는 과거에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도에 오르기 위하여 학문에 힘쓰는 것이 실정이었다. 그러고 과거합격자의 다과는 그 지방의 문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되는 것이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송대의 과거는 지방의 각 주에서 행하는 시험(解試)과 중앙정부의 성시(省試)와, 천자가 친시하는 전시(殿試)의 삼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해시의 합격자가 각지에서 중앙으로 모여 성시를 치르고, 성시합격자가 전시를 치르는 것이다.
각주의 해시합격자수는 주해액(州解額)이라 하여 정원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 정원수는 그 지방(주)의 수험생의 수나 과거에 있어서 합격자수의 실적 등을 감안하여 정해지는 것이라 생각되므로 해액수는 주의 인재의 다과를 나타내고, 문화정도의 실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매우 적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토(京都)의 도우후쿠시(東福寺) 리쯔교꾸안(栗棘庵) 소장의 《여지도(與地圖)》는 남송말의 옛지도로서 귀중한 것인데 이 지도의 정면 왼쪽 윗편에 ‘제로주부해액(諸路州府解額)’이라 하여 남송 여러 부주의 해액의 정원수가 기재되어 있다.
이것에 의하면 전국해액총수 1907명에서 복건로는 325명으로 1위를 차지하고, 강남서로․양절로가 뒤를 잇고, 부주별로 보아도 복건로에 속하는 건녕부83명은 전국1위로, 복주, 흥화군과 같은 상위를 차지하는 것이 복건로에 많은 점을 알 수 있다. 복건은 남송말기에 있어서는 천하 제일 문화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복건의 문운은 서쪽 이웃인 광남동로에도 점차 파급되어 영남의 도학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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