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씨(Sissi)로 더 잘 알려진 유제니 아말리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Eugenie
Amalie Elisabeth von Wittelsbach) 는 183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바바리아 왕국 막시밀리안 1세의 딸 루도비카 왕녀와 막시밀리안 공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을 포센호펜에 있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아무 근심걱정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소녀시절 그녀는 다소 소년같은 몸매에 겁많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열성적이고 장난기 많으며 시적이고 천진난만했다고 한다. 1853년 그녀는 사촌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 루도비카와 언니 헬렌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갔다. 시씨와 달리 순종적 귀부인 타입의 헬렌이 마음에 든 바바리아의 왕녀출신인 프란츠의 모후 소피는 이때 프란츠를 헬렌과 약혼시키려 했지만 온천 도시 이쉴의 무도회에서 헬렌의 동생 엘리자베트(15세)를 본 프란츠는 넋을 잃고 매달렸고 모후의 열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엘리자베트와 결혼을 결정했다. 모두가 그녀를 부러워했지만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공만은 "딸아, 고지식하고 시를 이해 하지 못 하는 빈의 청년(프란츠)이 너를 이해할지 걱정이구나"하고 탄식했지만 조숙하고 로맨티스트였던 시씨는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의 탄식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첫사랑을 생각한 시씨는 결혼식 날 눈물을 펑펑 흘렸고 하객인 퀴백 남작은 "결혼식은 기쁨과 환희의 물결이었지만 어둡고 무거운 전조가 드리웠다"라고 썼다.
결혼은 8개월 뒤인 1854년 4월 24일 빈의 성 아우구스틴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시씨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궁중예절에 답답함을 느꼈고 동화같은 결혼식 2주
후 시씨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시씨는 첫 딸 소피 프레데릭과 둘째 기셀라를 낳았지만 이이들의 양육권은 모두 소피 모후에게 있었다. 소피는 엘리자베트가 교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두 공주를 감금하다시피 길렀지만 모후에게 대항하기로 맘먹은 시씨는 양육권을 요구하여 소피프레데릭의 양육권을 얻어낸다. 그러나 모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갓난 딸들을 데리고 헝가리로 여행을 떠났다가 2살 된 소피 프레데릭을 잃은 시씨는 죄책감에 시달려 아이들의 양육권을 포기하고 기셀라와 뒤에 태어나는 황태자 루돌프에게서 완전히 손을 떼고 루돌프를 엄격한 가정교사에게서 풀어준 외에는 일생동안 자식들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시씨는 결혼 직후부터 문을 잠그고 울거나 식욕 상실증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하루에 우유 몇잔, 혹은 아이스크림 하나, 가끔 오렌지 여섯개)갇힌 황실 생활과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지친 시씨는 하루종일 승마 등의 운동에 매진했고 살을 빼기위해 자리에 앉지 않거나 10시간의 체조, 승마 등을 하곤 했는데 그녀는 172이 넘는 키에 체중은 43kg밖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그녀의 2미터 넘는 머리칼 무게를 빼면 더 낮을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집착을 보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황실에서 외면받는 아내를 몹시 사랑했고 시씨도 처음에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바바리아의 소녀 시절에 본 남자와 지금의 남편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를 미친듯이 사랑했고, 자신이 인생을 통해 무한한 관용을 베풀었다. 마침내 시씨는 답답한 빈을 떠나 세계를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는 무참한 전쟁과 연이은 패퇴로 몰락해가고 국민들은 굶어죽어갔지만 시씨는 불행한 자국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엄청난 경비를 낭비해가며 유럽을 떠돌고 있었다. 박애 주의자라곤 하지만 개인적 불행과 슬픔 때문에 다른 이들의 불행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전 시씨가 박애 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더군요. 그런 사람이 국민들 냅두고 혼자 돈 낭비하고 다니나..-_-) 엘리자베트는 자기 연민에 빠져 공식 석상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전쟁 중 황제가 "나의 천사여, 당신은 여러 공공 기관들을 방문해서 활기찬 수도를 만들어 주시오"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의 일에 빠져 몇번 고아원과 정신병원을 들른 이외에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헝가리에 관심을 가져 헝가리 어를 배우고 헝가리 옷을 입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우도록 남편을 종용했습니다. 마침내 1867년 6월 8일,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가 제국의 황제로서 부다페스트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한다. 시씨는 오스트리아보다 헝가리를 사랑했다. 헝가리 사람들도 그녀를 사랑했다고 한다. 시씨는 옷 입는데 3시간, 머리 손질에 3시간을 소비하며 성장한 자식들의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황제가 연이은 전쟁 속에서 자식들을 위해 산책이나 서커스를 관람한 반면, 시씨는 기셀라의 첫 성체 배령에도 불참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에서의 즉위식 1년 후, 막내인 마리 발레리를 낳은 시씨는 이 아이만은 미친 듯이 사랑하여 자신이 여행을 떠날 때 언제나 이 딸을 데리고 다녔고,(마리 발레리는 거의 황실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으로까지 생각되었다)이 딸은 어머니의 지나친 애정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시씨의 아름다움은 전 유럽에 걸쳐 전설이 되어있었다. 시시는 35세부터 아름다움이 시들기 시작한다고 생각하여 초상화도 그리지 않고 두꺼운 베일과 파라솔로 자신을 가리고 다녔다. 오스트리아가 비참한 몰락을 거듭하고 남편이 표류하는 국가를 붙들고 있는 동안 그녀는 유럽을 떠돌아 다니며 플라토닉 러브에 빠져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헝가리의 재해 때만은 제국으로 돌아와 그것을 큰 희생처럼 여겼다. 45세 무렵부터 그녀는 시를 써서 훗날 그것을 판매한 돈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도록 했다. 그녀는 자기 마음대로 여행다니고 결혼하면서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았다고 믿었지만 그 자유도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녀는 정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망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정신병원에서 인생을 끝낼지도 모른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갇힌 생활 속에서 자유로운 소녀 시절로 이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889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인 아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이 일어났다. 루돌프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자랐고(황제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아들을 탐탁치 않아하고 공개적 모욕까지 주었다), 어머니의 애정을 원했지만 어른이 되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나 시씨는 아들을 만날 때 최대한 아름다워 보이려고 노력했다)그는 정략결혼한 아내 스테파니가 아니라(시씨는 그녀를 싫어했다고 함)17세의 요녀 마리 베세라에게서 위로를 찾았지만 결국 그들은 사냥터의 오두막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다.(그러나 사실 황제 암살 음모에서 발을 빼려다가 살해당했다는 가설이 유력,,,)황태자는 죽기 전 어머니를 만나 팔에 매달려 울었지만 그녀는 당황해서 아들을 밀어냈다. 황태자는 포기하지않고 어머니에게 자신의 애정을 보이기 위해 귀한 선물을 했지만 시씨는 마리 발레리의 결혼 계획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들의 자살은 엘리자베트를 황폐화 시켰다. 그녀는 황태자의 죽음을 먼저 들었고, 매일 아들의 묘소에 찾아가 "이 긴 생애를 어떻게 보내야 할 지 모르겠다"며 몸을 떨며 울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 이후 배에서 시간을 보내며 물 속에 가라앉아 사라질 때까지 항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과 발레리가 있는 곳에서는 안 죽을 거예요. 난 혼자 죽을 거예요." 1898년 시씨는 스위스를 여행하고 있었다. 9월 10일, 몽트뢰로 가는 증기선을 타려고
막 호텔을 떠나려던 시씨는 칼에 찔렸다. 범인은 무정부주의자인 루이지 루체니. 원래
그는 이탈리아 귀족인 오를레앙 왕자를 암살하려 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자 다음 희생양으로 시씨를 선택한 것이었다. 시씨는 칼에 찔린 채 달려가 배에 들어어자마자 쓰러졌고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소원대로 황제와 딸이 없는 곳에서
혼자 죽은 시씨의 장례는 빈에서 장엄하게 열렸고, 그녀는 황실 납골당에 묻혔다. 시씨는 죽어서도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기고 있다. 그녀의 비극적인 생애는 많은 이들을 매료시켜 오늘날에도 그녀에 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그녀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는 인종차별적인 면도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본적은 없지만...) 시씨의 장녀 소피는 2살때 요절했다. 차녀 지젤라는 시씨의 친정인 바바리아이 레오폴드 왕자에게 시집갔다. 발레리는 같은 오스트리아 황족인 프란츠 살바토르 대공에게 시집갔다. 이 두 딸이 후손을 많이 남겼다.
시씨의 부모인 막시밀리안 공과 루도비카 공작녀(역시 부모부터...)
17세의 엘리자베트
동생 소피 공작녀와 (소피는 사촌인 미친 왕 루드비히 2세와 약혼했으나 결혼식 직전에 파혼당했다. 루드비히는 일생 동안 소피의 언니 시씨만을 그리워했다)
비운의 황태자 루돌프
막내딸 발레리.(오른쪽)자녀들 중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아이.
자살한 황태자 루돌프와 아내인 벨기에의 왕녀 스테파니.
그녀는 아름다운데다가 비극적인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녀를 소재로한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죠.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영어나 독일어로 된 자료들이 많으니까 'Empress Elisabeth' 'Sissi' 'Kaiserin Elisabeth' 등으로 검색해 보세요. |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시씨)
시씨의 남편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이 때 25세.
시씨의 이모이자 시어머니인 소피. 헬렌 대신 시씨가 며느리가 되자 며느리를 들들 볶아댐.



2살에 요절한 장녀 소피
바바리아 레오폴드 왕자와 결혼한 차녀 기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