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巫俗敍事詩 연구의 새로운 관점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1.15|조회수187 목록 댓글 0

巫俗敍事詩 연구의 새로운 관점 | ▶ 문학  2005.03.07 19:11 
 
 가우리(uuuau)  카페매니저  
http://cafe.naver.com/gaury/8111 
 
 


巫俗敍事詩 연구의 새로운 관점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한국의 비교를 통한 시론―

 

 

 

박  종  성

 

 

1. 머리말

문학사 전개의 보편적 인식에 근거하면 역사기록의 대체물로서 구비서사시의 존재와 의의는 충분히 인정된다. 그렇다면 구비서사시의 다채로운 전승을 보여주는 한국에,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구비서사시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한국에는 口碑英雄敍事詩가 巫俗敍事詩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글은 한국의 무속서사시 연구의 방향전환을 위해 試論的으로 쓰여진다. 이를 위해서 구비영웅서사시의 전통이 강한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그외 논의에 필요한 몇 지역을 살펴서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이를 한국의 경우와 상호비교·대조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구비영웅서사시 형성과 전개과정을 정치·경제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통해 살펴서 그 역사성을 확인한 다음, 이를 통해 한국의 무속서사시를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을 마련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무속서사시 연구는 그 신화적 성격과 타 장르와의 상관성, 구비서사시로서의 성격 등을 밝히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장주근은  판소리 형성의 기반으로서 서사무가를 주목했으며1), 서대석은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서사무가의 현황을 조사, 정리하고 각 지역별 특징과 변이양상, 그리고 시대적 변화를 고찰했다2). 아울러 다양한 서사시로서의 기능을 살폈다. 한편 판소리와 서사무가의 관련성을 여러 측면에서 고찰하여, 서사무가의 서사시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했다3). 이수자는 제주무가의 신화적 성격을 고찰하고 제주도 큰굿의 구조를 再調整한 바 있다4). 박경신은 현장론을 바탕으로 무가일반의 작시원리를 새롭게 밝혀 서사시 작시원리의 일반론을 무가를 통해 수립했다5). 김헌선은 경기도 도당굿을 자료로 무가의 작시원리와 마을, 연행자, 관중에 의한 변형양상을 고찰했다6).

개괄적으로 소개한 이상의 연구성과들은 신화로서의 서사무가, 서사시로서의 서사무가를 고찰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글은 선행연구에서 논증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신화이면서 서사시인 서사무가가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는 외국의 구비영웅서사시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미리 말해 두자면, 본고는 역사 영웅에 관한, 혹은 역사적 사실을 내포한 구비서사시가 오늘날의 무속서사시, 적어도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무속서사시에 용해된 채 잠재적으로 전승되고 있다고 가정하고 이를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구비서사시의 전승이 활발한 지역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그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글은 그 일차적 작업이 된다.

비교문학의 관점으로 구비서사시의 세계적 분포와 변천에 관해서는 이미 조동일이  고찰한 바 있다. 조동일은 <한국문학통사 1~5>의 문학사 시대구분에 근거하여 장편서사시의 분포와 변천에 관한 일반론을 수립하고자 했다. 7) 그래서 고대서사시, 기록된 중세서사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서사시 구전, 근대 이후 서사시의 양상이 세계 각처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찾아서 정리했다. 요컨대 고대서사시 구전에서는 고대 자기중심주의에 입각한 배타적 투쟁이 확인되고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시되고, 기록된 중세서사시에서는 문명권 전체의 중세보편주의의 가치관과 민족적 영웅의 위업을 찬양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가 복합되어 있으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서사시 구전에서는 영웅서사시가 범인서사시로 바뀌고, 일상적 관심사가 중요시되고, 관중을 흥미롭게 하려는 변화를 공통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조동일의 논의는 구비서사시라는 현상의 파악과 분류·정리에 무게가 실려 있어 정작 구비서사시가 많고 적은 지역적 차별성과 구비서사시가 어떤 변인에 의해 변모하는가 하는 원인론적 접근은 하지 않았다. 조동일의 방법론은 구비서사시에서 분석 대상의 단위를 발견하고 다시 결합시키거나, 개념의 同異관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구비서사시의 세계적 보편성에 주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구비서사시의 형성과 전개가 그 전승·향유 집단의 역사 전개 과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으며, 구비서사시의 내용이 그들의 삶의 양상, 그리고 거기에 연유하는 역사의 전개 과정을 반영한다는 전제에 입각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곧 구비서사시 형성과 전개가 그 전승집단의 정치·경제적 체제와 외부 세력과의 관계 등에 무시할 수 없는 상관성을 지닌다는 점과 이 문학양식이 그들의 역사와 같이 호흡하면서 전승된다는 점을 검토·확인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무속서사시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보려는 의도에서 본고를 시작하고자 한다.

 


2. 구비서사시의 역사성:서구 학자들의 견해

실제로 역사와 구비서사시는 관련이 있는가? 일찌기 영웅서사시를 논의한 논자들은 모두 역사와 구비서사시의 밀접한 상관성을 인정한다. 머챈트의 다음 진술은 음미할 만 하다.

 


이와 같이 서사시가 한편으로는 역사와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적 리얼리티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서사시의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본원적 기능을 명백히 강조해 주고 있다. 서사시는 연대기이자 ‘종족의 역사책’이었으며 풍습과 전통의 생생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반 대중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이야기 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 어쩌면 서사시 그 자체가 체계적인 역사 기록에 대한 필요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A. D. 98년에 타키투스(Tacitus)는 그의 게르만족 연구서 <<게르마니아>>(Germania)의 서두에서 그 당시 게르만 부족들은 그들의 조상들을 ‘옛노래들’로 기념하는데, 그것이 “유일한 민족적 기억 또는 연대기”라고 적고 있다. 8) 

 


바우라 역시, 구비서사시는 기록연대기가 없는 사회에서 역사의 기능을 대치하며, 시인들은 과거에 대해 권위를 느끼면서 구연한다고 하면서 영웅시가는 ‘사실의 저장소’로 간주했다. 9) 유명한 영웅들은 역사적 기원을 가지며 다른 역사적 형상들과 이름을 공유한다고 했다. 10) 슐브래이드도, 역사적 관점으로부터 보면, 비록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발라드나 민담, 서사시들은 한 민족의 사회적, 도덕적, 정신적 의식(사상)에 대한 가치있는 기록이며,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그것(서사시)을 만들어낸 민족들의 발전단계에 관해서도 흥미있는 편린들을 제공한다고 했다. 11) 그리고는 모든 역사적 이야기들(Historical tales)에서, 환상적이고 순전히 허구로 보이는 그들 이야기들의 근본에는 어떤 이유로 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실제적 사건의 기억recollection이 놓여 있으며, 역사적 사건과 자연현상 등은 그들의 환상 속에서 서사시 창작자에 의해 신화적, 영웅적 치장으로 덧입혀진다고 보았다. 12)

역사와 구비서사시의 관련성은 위 두 논자의 진술에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논의의 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짚어나갈 터인데, 한국의 경우 이러한 전제가 그대로 인정될 수 있는가가 참으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문에 다가서기로 한다.

 


3. 중앙아시아의 구비서사시

이 지역에는 크게 투르크(Turks)민족, 몽고민족의 두 민족이 각기 분파를 지으며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들은 광활한 중앙아시아의 스텝지역에서 유목의 전통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The Iranian Turks는 수세기간 이란의 영향을 받았는데, 지리적으로 카스피해 스텝의 투르크와 舊소련의 Turkmenistan의 Turks가 해당되며, The Turanian Turks는 대부분의 터키 스텝 지역과 남부 시베리아, 북몽고를 포함한다. 13)

구비서사시의 개략을 보면, 몽고 분파14)인 부리야트족의 서사시는 신화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어 비교적 고형에 가깝다고 보고 내륙아시아 영웅서사시 발전의 초기형태를 보여주며, 몽고서사시는 보다 역사적 사실이 개입됨으로써 후기 형태를 보여준다. 15) 터키서사시는 역사영웅서사시와 무속서사시가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는 지역으로, 구비서사시의 보편적 원리를 탐색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우선 이 지역의 무속서사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부리야트족의 울리게르(Uliger) 영웅은 무당을 무시하고 심지어 영웅에게 대항하는 여자 무당을 죽이기까지 한다. 16) 이는 이 지역의 무속서사시가 역사서사시와 엄격한 변별을 지닌 채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만한데, 그 연유를 사제권과 정치권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이 지역의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다. 하자노프는 “지배적인 계층 혹은 계급의 사제들로 이루어졌고 이들이 모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그러한 정치체제는 유목민 사이에서는 설혹 있었다 해도 드물거나, 불완전한 예외에 불과하다”17)고 주장했다. 그러기에 이 지역에서는 샤만의 무속서사시와, 王이나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영웅서사시가 개별적으로 전승되거나 상호대결을 벌였던 게 아닌가 일단 짐작해 본다. 이들 무속서사시는 서사시 자체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제 부족의 신화적·종교적·종말론적 사상의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무당에 의해 구연되는 무속서사시에는 두 개의 대립적 세계와 인물이 존재한다. 천상계와 지하계라는 대립적 세계가 그것이고 영웅과 적이라는 대립적 인물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당 자신은 무속서사시 연행 현장에서 출발하여 천상계와 죽음의 세계를 여행한다. 키르키즈의 <Er Toshuk>는 이러한 사만적인 자부심과 그에 상응하는 한 인간의 위대한 전기이며, 사가이(Sagai)族의 그것은 영혼을 정화시키고, 신부를 얻기 위해 천상을 여행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18) <Two Princes>와 <Ak Kobok>이라는 것은 샤만적인 경쟁을 뚜렷하게 형상화하고 있는데, 한국의 <천지왕본풀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이러한 무속서사시는 서사보다는 주로 ’Bai Ulgen(神)‘에게 드리는 연중 희생제의의 의식 동안에, 샤만에 ㅡ이해 구연되는 다수의 시들을 가지고 표현되면서 동시에 종교적 목적이 아닌 이리종의 흥미거리(흥행물)로서 작시되고 구연되기도 한다. 19)

무속서사시 외에도 이 지역에는 역사적 사실과 결부된 영웅서사시가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무속서사시와 별도로 역사영웅서사시가 전승된다고 하는 사실은 역사영웅서사시가 그 전승집단의 삶의 양상과 방식, 고난과 극복의 역사와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대다수는 이 지역 제 부족(민족)의 이동과 전쟁, 패배와 승리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이 서사시를 통해서 자부심을 확인하고 긍지를 드높였다. 키르기즈 서사시가 현재까지 감동을 주면서 남아있는 까닭은 그 서사시의 내용과 구성이 대부분 역사적 실존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서사시가, 태무진이 생존과 주권을 위해 동료 부족과 그리고 적대 부족과 싸운 <몽고비사>의 초기 부분과 병행하면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 <Manas>가 키르기즈 종족의 불안정한 생존을 다루고, <Korolglu>의 행적에 대한 기억은 유프라테스江과 메르브江 사이의 광활한 스텝지역을 이동하던 터키 제 부족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전승되면서 그 역사적 실존을 확보하고 있다. 21) 슐브레이드도 키르키즈(Kyrkkyz로 표기했다. ) 서사시가 역사와의 상관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고, 여기에는 적어도 세가지의 역사성에 대한 변별적 특징이 있음을 지적했다. 첫째, 이들 중 최고의 것은 B. C. 6C ~ 4C경 Pri-Aral부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모권사회가 나타나며니서 부권사회도 포함하는 그 지점에 존재하며, 둘째, 다음 층위는 중세 투르크에서 비롯된 듯 한데, 이는 서사시에서 그 시대에 관련된 많은 민족학적 단서에 의해, 그리고 오늘날 Karakalpak에 의해서 잊혀진 관습의 서술에 의해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는 역사에 대해 최대의 유사성을 지니는 것으로 18C에 일어났던 Gulaim과 Aryslan간의 전투를 보여준다고 했다. 22) 뿐만 아니라 야쿠트族의 오롱크로(Olongkho) 역시 역사적 세부사항과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수세기 전의 민족상호간의 관계와 옛날의 사회질서의 붕괴를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23)

그리고 15C~18C 융가리안(Jungarian)스텝의 大오이랏트(Oirat) 왕국의 패권과 칼묵크(Kalmuck)의 약탈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상응하는 <Alpamysh>24)나, 14C~15C 초반에 티무르(Timur)와 金호르드(Golden Horde)의 톡타미슈(Tokhtamysh)汗의 영주권 쟁탈전에 근거하고 있는 <Edigei(Idige)>,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서 옐라이(Jelai)의 반란 주동자 중 한명으로 인식되고 있는 <Koroglu-Gorogla>25), 오구즈族이 8~10C 킵챠크, 페체네그와 투쟁하다가 아나톨리아로 이동한 사시리과 새땅에서 정착하고 난 후 게오르기안, 킵챠크, 그리스(트레비콘드 비쟌틴)와의 투쟁 등 오구즈족의 총체적 삶을 투영하고 있는 <The Book of My Grandfather Qorqut; Kitag-i Dresden Qorqut>26), 筆寫로 전하는 몽골의 지도자 징기스칸의 서사시와 티무르(Timout, Tamerlane)의 서사시는 또한 역사적 인물들의 서사시 전승27) 등은 이 지역의 구비서사시가 지니는 역사성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라 하겠다.

특히 ’Awaz-Narali-Jahangir-Gorogli‘로 이어지는 서사시 영웅의 계보와 이들과 관련을 맺는 <Semeteri>, <Manas>의 존재, 그리고 투르크멘(Turkmen)서사시가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벡 서사시의 중간적 고리에 해당한다는 점28)과, <Alpamysh>의 체계적 비교를 통한 전파와 발전의 양상이 7~8C 경 알타이 산맥의 터키카가나테 시대부터 9~10C경 오구즈족과 함께 lowersyr-Darya를 향해 퍼져나가고, 킵차크족의 西進에 따라 카작흐 스텝지역 내에 각편들이 형성되고, 16C초 Sheibai-Khan의 유목우즈벡이 南우즈베키스탄으로 서사시를 가져가서 오늘날 우즈벡, 칼팍, 카작흐로 <Alpamysh>의 최종적 형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고 한 사실29)은 이들 지역에서 서사시간 상호작용이 이 지역 유목민족의 해체와 통합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후에 건서로디는 국가들 사이에 경제적, 문화적 결속을 더욱 굳건히 하는 요인으로써 서사시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30)

그러므로 중앙아시아의 역사영웅서사시의 주인공은 트릭스터도, 천사도, 신도 아니면서 불안정한 생존을 극복하고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위대한 인간영웅인 것이다. 채드윅은 스텝생활의경제적 조건이 이러한 영웅주의에 대한 주된 동기라고 했다. 31)

결국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구비서사시는 주변의 정주국가와의 끊임없는 투쟁과 유목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그리고 여기에서 야기되는 불안정한 그들의 생존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소략하게나마 이 지역에서의 무속서사시와 역사영웅서사시의 특징에 관해 서술해 보았는데, 그러면 이들 두 계열을 묶어내는 고리로서 우리는 서사시 담당층을 들 수 있다. 주지하는 바, 무속서사시는 Shaman 혹은 bakshy로 표현되는 巫堂에 의해 구연된다. 그런데 무속서사시 뿐만 아니라 그외 구비서사시를 구연하는 전문적 광대가 필연적으로 무당과 관련을 맺고 있어서 주목을 요한다. 숙련된 主巫 아래에 여러 명의 학습자가 있어서 主巫를 따라 각 마을을 돌아다니고 전통적인 구절을 암기한 후 독자적인 작시를 연습하고 주무에게 심사를 받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독자적인 서사시 구연이 가능해지는 것이 이 지역 구비서사시 담당층의 사정이다. 실제로 bakshy는 샤만의 전문적 기능과 광대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른 시기에는 부족민을 단결시키는 역할도 수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서사시든 그 구연의 기술은 神에 의한 신비한 은총으로 인식되었고, 그 기능이 자기네 부족의 풍요와 영광을 노래하고 경쟁부족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데 있었으며, 이것이 사제의 기능과 서사시 광대의 기능을 공유하고 있는 무당의 존재와 더불어,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약 4천개의 단어를 사용하다가 서사시 구연시에 약 1만 2천개의 단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무당의 언어능력의 차이는 구비서사시의근원이 무속서사시에 있다는 깊은 암시를 준다. 일반 서사시 광대의 구연 전설과 무당의 구연 전설이 거의 유사한 이 지역의 경우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32) 한편으로, 무속서사시 계열로 주인공의 지하세계 여행담과 그에 수반되는 일곱 거인과의 대결이 주 내용인 <Er Uoshuk>이 역사영웅서사시인 <Manas>에 등장하는 사령관들 중 한명과 같은 이름이어서 <Manas> 사이클로 인식되기도 하는데33) 이는 무속서사시의 부분을 역사영웅서사시로 차용하는 하나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4. 아프리카의 구비서사시

아프리카 역시 중앙아시아와 더불어 구비서사시의 보고이다. 이 지역은 서아프리카 지역과 반투어족의 중앙(동부)아프리카 지역으로 서사시권역을 설정할 수 있다. 전자에는 밤바라의 <몬존>, 푸라니의 <실라마카>, 만데카의 <손자라>, 남부나이지리아 이와브의 <오즈디>, 아당그메의 <클라마>, 소닌케의 <가시레>서사시가 대표적이며, 후자에는 반양가의 <므윈도>, 몽고의 <리앙가>, 발레카의 <무빌라>, 즈베느구에마의 <므베트>서사시 등을 꼽을 만하다. 34) 그외 지역의 서사시 수다하게 전등되고 있는데, 이들은 논의의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소개하고자 한다.

아프리카의 구비서사시에서 역사적 배경을 간취해 내기란 중앙아시아의 경우에 비해 어렵고 또한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도 않다. 이런 난점은 이 지역의 역사가 정확하게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 사정에 기인한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에서 확인한, 이 지역 서사시의 역사적 배경 존재유무를 다시 검토하는 선에서 본고의 논의를 진행하고자 하며, 보다 구체적인 사실 확인이 가능한 서사시는 그것대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밤바라의 <몬존>은 몬존Monzon과 그의 아들인 다몬존 Da Monzon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서사시로서 1787~1827까지 Segu(Mali공화국)를 지배한 영웅의 이야기다. 35) 한편 <실라마카>는 푸라니족의 지도자로서, 다 몬존의 통치 아래에서 그에게 반기를 들고 대항한 영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6) 이 서사시는 <몬존>서사시에서 마지막 부분, 즉 Segu왕국에 복속된 카르타Karta지역의 지도자 티에마(Thiema)가 다 몬존에게 대항하다가 결국 패배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몬존>서사시에서는 티에마가 푸라니족의 족장인 함보디데오 Hambodideo에게 패하여 포로가 된다고 했는데, 정작 <실라마카>서사시에서는 약탈자 다 몬존에 함께 대항한 긍정적 인무리로 묘사하고 있다. 함보데디오 역시 실라마카의후계자로서만 나타나지 다 몬족의 통치에 협력한 인물로는 묘사되지 않았다. 이런 편차는 밤바라족과 푸라니족의지배-종속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연유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방의 주정적 평가는 타방의 긍정적 평가일 수밖에 없으며, 각 부족은 자기에의 권위와 자긍심을 견지하기 위해 각기 유일한 쪽으로 서사시를 형성해 가기 때문이다. 따로 기록의 역사가 없는 이 지역에서 서사시는 문학이면서 역사이다. 한국의 경우, 비류와 온조라는 두 시조를 가진 백제건국사의 이원적 기술과 마찬가지다.

<손자라>는 사하라사막 남부의 고대 가나제국을 무너뜨리고 1240年 말리제국(1240-1550)을 건설한 손자라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서사시다. 37) 전반부에는 손자라가 이복형에게 쫓겨 시련을 겪는 내용이나 후반부로 가서는 만데族의 지도자로서 이웃부족 소쏘族의 수마무루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것으로 내용이 채워져 있다. 어떤 각편은 손자라가 푸라니족과의 협정을 파기하고, 물에 빠져 죽고 또 하마로 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른 몇편의 각편들은 손자라의 후손들과, 현재까지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以上에서 살펴본 서부아프리카의 세 서사시, 만데카의 <손자라>, 밤바라의 <몬존>, 푸라니의 <실라마카>는 이들 세 부족의 역사에 관해 꽤 많은 통찰을 제공한다. 38)

그외 아단그미족의 민족서사시 <클라마>는 자기네 부족의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며 연극으로도 행해지는데, 각각의 연(Stanza)에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언급을 내포하고 있다. 39)

반투어족 계열의 제 부족사이에서 잘 알려진 서사시 사이클은 <리아냐>인데, 그는 콩고분지의 느쿤드 민족영웅으로 느쿤드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40) 르완다의 <The Spring of Progress>라는 서사시는 역사적 정확성을 찬양의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어, <리옹고>가 활발히 전승되는 안클레족 보다 더 정교하고 역사적인 사실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41) 쇼나(Shona)족의 <The Tale of without a Head>에는 수다한 역사적 사건들이 용해되어 있으며, 42) 줄루(Zulu)족에는 수다한 역사적 서사시가 존재하는데, 국가, 왕, 승리자에 대한 찬양이 주내용으로 되어 있다. 긴 서사를읽는 동안에는 서사시이기 이전에 하나의 편년사라는 느낌을 받는다. 43)

북부 반투의 <킨투 Kintu>사이클은 공식석상이나 궁정에서 35王의 왕역을 나열하는 행상에서 불리워지는데, 이는 왕들의 역사이면서 적어도 그 민족의 역사가 된다. 44) 뚜렷한 유목민족인 투아레그족은 여성중심의 사회구조를 지녔으며 특히 이 민족 여인들의 作詩기술은 매우 뛰어나다고 하는데, 한 가문(가족)이나 부족에서 대대로 서사시를 전승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왕족의 계승이나 역사의 세부적 상황과 관련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45)

스와힐리서사시에는 또한 <우텐지Utenzi>사이클이 존재하는데, 이는 이미 이슬람화된 내용으로 전승된다. 총 21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지며, 주로 전쟁장면의 잔인하고 상세한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러나 스와힐리서사시 전통내에서 가축무리에 대한 것을 회고하는 자가 많으며, ‘말타기’, ’가축무리‘, ’말탄 적과의 전쟁‘, ’낙타‘ 등 현재의 남소말리아와 東케냐의 건조지대에서의 삶에 대한 회고46) 등 다분히 스텝지역의 유목생활의 옛 역사에 대한 회고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4. 구비서사시 전승지역의 정치·경제적 구조의 한 특징

 


지금까지 우리는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비서사시의 현황, 특히 서사시에 포함된 역사적 배경·사실 등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들 서사시의 전승지역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구비서사시의 전승이 어떠한 토대화에서 더 활발해지는가를 짚어보려 한다.

주지하다시피 중앙아시아에는 기록의 전통이 약하다. 8세기 이전까지는 자기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투르크제국에서 문자가 발명되면서부터 스텝민족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기 시자기했다. 그러나 그 사료들 역시 지극히 제한된 양이어서 사정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 이처럼 기록의 전통이 약하고 구전의 전통이 강한 것은 무엇보다 이들 지역이 광활한 카작흐·키르기즈 초원지대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대다수 민족들이 유목생활을 영위해 왔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스텝지대는 오직 유목에만 이용될 수 있는 자연적인 광활한 목초지이기 때문에 초원지대의 삶이란 모두가 유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목민족읫 활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나서는 빈번한 이동과, 부족한 물자를 감당하기 위한 침략, 거기에 수반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언제나 불안정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옛 키르기즈서사시의 중심주제가 <몽고비사>의 불안정한 예수계이(-태무진의 父)계열의 생존을 다루는 점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이전 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그리고 이런 불안정한 생존은 필연적으로 자기 부족의 결속을 더욱 다지고 긍지를 확인하는 공식적 행사를 필요로 했을 터인데, 이때 그들의 보상심리를 충족시켜 준 것이 바로 구비서사시가 아닌가 한다. 게다가 빈번한 이동과 침략·전쟁은 자기네 부족의 역사나 혈통을 기록화해서 보관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으며, 다른 부족을 아우르고 그들에게 한 혈족이라는 일체감을 즉각적으로 주입시키기 위해서는 연행의 공식적 장치를 통한 구비서사시가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하자노프는 대다수 유목민들이 자기네의 사회를 확대가족, 혹은 최소종족, 혈통원리 그리고 계보원리에 의해 파악한다는 특징이 있음을 지적하고, 특히 계보의 원리는 다수의 유목민집단을 부드럽게 통합시키고 기본구조의 근본적인 수정 없이도 외부집단을 자신의 성원으로 적응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이러한 계보의 기억상실증(genealogical amnesia)은 그것으로 인해 계보의 동화작용(genealogical similation)을 촉진시킨다47)고 한 바 있다. 더우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직선적이기 보다는 순환적인 시간관념에 익숙해 있었고, 그러한 조건 하에서 구전의 전통은 쉽게 전설적인 성격을 띨 수 있었다. 구전의 전통에서 부족간의 대결은,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각 부족의 통합과 승리가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그 주인공이 스스로 통합군주가 되기 이전부터 그러한 통합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가르쳐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48) 즉 순환적인 시간관념에 근거한 구전전설의 토대는 부족간의 대결에서 항시 등장하는 승리자, 영웅이 스스로의 힘과, 그리고 이전부터 순환적으로 전승되던 예전의 통합방식에 근거해 天定의 방식으로 통합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피정복민이나 자기네 부족민에게 알리는 것이 용이했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서사시 형성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조직 체계를 살펴야 하겠는데, 간단히 도식화해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국가(STATE)            봉건제 국가

      

              부족(TRIB)             

      

              씨족(CLAN)

      독자성                              통합성

              천막(TENT)

 


중요한 점은, 이들 각 층위의 조직이 모두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같은 층위의 다른 조직과는 항상 균형잡힌 대항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상위로의 통합, 즉 부족은 잘 조직되어 있지 않았고 이질성을 내포한 가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침략하거나 아니면 경쟁하는 부족으로부터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할 때에는 모종의 정치조직이 생겨나곤 했다. 이 조직체의 지도자는 항상 도전받을 가능성이 있는 불명확한, 집단의 일시적인, 그리고 세습이 아닌 추대된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 지도자의 권위는 지배자 개인의 용맹성이나 극심한 자연조건의 극복, 즉 스텝지역에서 유목이동하는 과정에서 질서있게 집단을 통솔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부여된 것이어서 위대하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그에 대한 서사시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14C~15C에 걸쳐 이 지역은 부족체제에서 봉건적 체제로 이행하면서 각 부족들이 하나의 국가내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부족들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치권 아래에 놓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한 부족의 권한은 봉건제내에서도 각 영주의 강력한 권한으로 지속되어 독자성을 계속 확보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 예전부터 전승되어 이들을 결속시키고 긍지를 확인시켜 주었던 구비서사시는 국가의 건국서사시와 별도로 그 전통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이란에서, 일한국의 붕괴 이후, 국가가 상이한 유목 집단들을 서로 맞서게 함으로써 이들 간의 싸움을 스스로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은 봉건제 내에서도 유지되었던 각 집단의 독자성을 시사한다.

아프리카의 경우에서도, 중앙아시아와 차별이 있지만, 유목의 전통과 구비서사시의 관련을 읽어낼 수 있다. 동부 반투어족의 文化의 중심은 유목이다. 이 지역 유목민은 그곳의생태적 조건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목지를 배분하거나 목축이동로를 규제해야 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동시에 정치적 통합과 중앙집권화를 유리하게 하는 요인들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이 지역 구비서사시들이 각 부족간에, 서부 아프리카의 경우와 달리, 상호융합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유목적 전통이 강한 지역은 구비서사시의 전승에 든든한 토대가 되고 있음은 여기서도 확인가능하다. 앞서 언급했던 투아레그족의 경우처럼, 유목의 전통이 매우 뚜렷한 이 부족의 모든 성원들이 훌륭한 시인이며, 특히 여성들의 작시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채드윅이 스텝지역에서는 즉흥적 작시기술이 모든 계층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진술한 것과 상통한다. 아프리카 유목집단은 중앙아시아와 달리 다층적인 사회족직이라든가 계보적 원리와 같은 특징들, 그리고 혈통집단이나 분절집단들의 서열 등의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전 사정은 유목이면서 쉽게 중앙집권화되는 이 지역의 특징을 설명해 준다. 서부아프리카의 푸라니족은 기아니에서 중앙아프리카의 카메룬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영위하지만 쉽게 이슬람화하고 중앙집권체제로 편입되면서 서사시 대다수가 구전에서 기록으로 바뀌었던 사정이 있다. 이는 유목의 전통이 구비서사시의 풍부한 토대는 되지만, 그 개별적 특징에 따라 구전의 전통이 기록으로 변화하는 차이가 생겨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유목과 중앙집권화의 상관성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은 지역에서, 즉 느양가나 레가 Lega, 몽고 Mongo, 팡 Fang 지역에서 풍부한 서사시의 구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중앙집권화된 사회에서 구비적 형태가, 전 성원의 구연능력의 쇠퇴로 인해 전문화의 길로 들어서며, 기록의 종교(이슬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바다. 중앙아시아에서 14C-15C경에 봉건제로 이행하면서 EPIC이 EPIC ROMANCE로 변한 것과 스페인의 풍부한 구전서사시가 14-15C 중엽에 Historical ballad라는 단형의 서술시로 변한 것49)은 개별집단의 독자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일어나는 문화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구비서사시는 그 전승집단의 역사와 맞물려 있으며, 또한 그 집단의 독자성이 지속되는 한 유지되며, 정치·경제적으로 유목이동의 체제에서 발전을 보이다가 봉건제로 바귀거나 중앙집권화로 이행하면 구전의 전통이 기록으로, 서사시의 형태가 보다 산문화하거나 단형화하여 변화한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잠정적 결론을 근거로 해서 한국의 구비서사시, 구체적으로 무속서사시를 바라보는 한 관점을 마련해 보기로 한다.

 


5. 한국의 무속서사시와 역사성에 대한 시론적 검토

앞에서 필자는 유목민족의 구비영웅서사시가 특별히 활발하게 전승된다는 점과 역사적 사실의 충실한 반영물 혹은 역사로서의 구비영웅서사시의 성격과 기능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유목민족들이 독특하게 갖고 있던 사회구조와 정치조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이라는 추론을 했다. 이제 여기서는 한국에서의 구비영웅서사시 곧 무속서사시가 앞서 살핀 외국의 사례들과 같이 이해될 수 있는지를 고찰하려고 한다.

한국에는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혹은 먼 옛날 역사기록의 기능을 담당했던 역사 영웅의 구비서사시가 왜 現傳하지 않는가, 예전에 있었던 것들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태로 변화하여 현전하고 있는데 이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결국은 무속서사시에 역사적 사실이 용해되어 있음을 논증하는 작업이겠는데, 본고에서는 앞서 살핀 두 지역과의 비교 연구의 관점을 견지할 것이므로, 이들 지역과 친연성이 있는 유목전통의 옛 부여 諸族(특히 고구려)의 경우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서 스텝지역의 유목민족에게서 구비서사시가 활발히 전승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구려를 포함한 부여계 역시 유목 전통이 강한 집단으로 이해된다. 부여족의 구성요소를 봐도 통치민족인 맥인은 목축(유목)을, 피통치민족인 예인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형태이다. 이는 스텝지역의 유목민족이 주변의 정주민족을 정복해서 새로운 형태의 집단으로 자리잡아 가는 현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여섯 가축으로 관명을 삼아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었던 점과 고고학의 관점에서, 서풍의 <서차구문화>, 요원의 <석역채람문화>, 유수의 <대파문화> 등 부여문화가 모두 서쪽의 목축민족 문화와 많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50)부여의 유목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Idige>와 유사한 <동명전승>이 부여계 제족의 공통시조신화로서 전승되고 있었고, 주몽의 고구려 역시 이를 바탕으로 <주몽전승>을 만들어 냈다. 다시 말하면, 부여계 계통의 여러 족속들 중에는 <동명전승>을 빌어 동명을 자기의 조상으로 하는 관념과 계보 체계를 가진 집단들이 다수 존재했을 것이다. 고구려족 내에서도 가령 5부의 여러 집단들 중에는 동명을 자기 집단의 조상으로 여겨 모셨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주몽전승>의 기본적인 틀은 원래 부여족 공유의 설화로서, 부여족이 여러 차례 分岐와 이동을 해 나가던 파장 속에서 각 단계마다 어떤 역사적 사실과 결부되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첨가된 형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본다. 51) 그러기에 ‘광개토왕비’ 모두루묘지에선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기󰡕’ 주몽설화에 의하면 동부여에서 옮겨 온 것으로 달리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고구려족, 특히 계루부 왕실의 시조인 주몽의 전승이 고구려의 국가 건설 이후인 5세기 경의 陵碑나 墓誌에서 고착화되어 나타나서 왕실과 왕권의 초월적 권위와 위엄으로 상징되었다. 그러한 변모에 따라 고구려 영역 내의 다른 집단이 지녔을 수 있는 <동명전승>은 더이상 힘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명왕이 이제 부여 - 고구려의 종족 시조신의 성격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통의 여러 종족을 포괄하고 있는 고구려 국가의 신으로, 즉 超種族的인 신으로 되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2) 조동일 교수가 “동명은 부여 계통 여러 갈래가 공동으로 내세우는 시조를 뜻하는 보통명사이고 주몽는 고구려 시조이기만 한 인물의 고유명사인지도 모른다”고 한 추정은53) 이런 의미에서 타당하다.

주몽의 능력은 ‘말’과 ‘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유목민족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인데 주몽은 이를 갖추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정치 조직이랄 수 있는 5부의 성격과 이들의 변모 양상은 중앙아시아 제민족의 조직과 매우 근접해 있다. 5부의 부는 那라는 부족적 집단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다수의 那가 완만한 연맹체를 구성하였는데 점차 다섯으로 통합되고, 한편으로 가장 강력한 계루 집단에 의해 여타 4那는 자치적인 연맹 부족에서 고대국가의 부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는 대외적으로 당시 고구려족 내의 제 부족에 작용하여 그들을 분열시켜 패마하고 있던 외세, 즉 漢帝國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과정이며 5부의 정립은 고대국가 고구려의 성립과  동일궤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54) 이런 과정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경우와 쉽게 맞닿을 수 있다. 물론 고구려는 외세의 대항 과정에서 통합된 조직을 국가의 형태로 발전시켰고 중앙아시아는 그렇지 못했던 차이점은 있다. 그러나 조직 형태나 그에 따른 서사시의 전개 과정은 양자 사이에 강한 친연성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고구려는 유목민족으로서 국가를 형성한 이후에 중앙아시아의 터키 민족과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다음의 인용 자료는 A. D. 732년에 건립된 ‘Kul Tegin’ 비문의 동면 제 4행의 기록으로 이런 사정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Muhan Kaga의 장례식(572년)에 조문객들이 발을 이었는데, 고구려(동쪽의 해뜨는 곳, 스텝국민), 중국, 티벳, 아바르, 비잔틴, 키르기즈, 오투즈 타타르, 키타이가 사절을 보내 조의를 표하다55)

 


735년에 건립된 ‘Bilge Kagan’ 비문에도 같은 기록이 보이고, 그외 비문의 곳곳에 투르크와 고구려 간의 군사 충돌을 언급하고 있다. 56) 6-7C에 고구려와 투르크는 접경한 이웃으로서 밀접한 관계와 광범위한 교류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전술한 <Idige>와 <동명전승>과의 상관성 역시 유사한 자연 조건과 조직 체계를 지닌 양민족 사이의 자생적 측면과 교류에 의한 영향 관계의 측면을 함께 고려해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고구려를 포함한 부여계는 중앙아시아와의 대비를 통해 볼 때 풍부한 구비서사시의 전통을 지녔던 민족이라고 판단된다. <동명전승>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와서도 강한 전승력을 지니면서 서민에 회자되고, 부여계 건국신화가 후대의 문학과 깊이 연결될 수 있는  풍부하고도 다채로운 원천이 될 수 있었던 것은57) 유목민족으로서 지녔던 서사시의 강한 전통이 깊게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부여 諸族 특히 고구려가 구비서사시의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현재 그들의 역사를 노래한 구비서사시가 전승되지 않는다. 그 사정을 <천지왕본풀이:이하 <천지왕>으로 略稱한다>를 통해 추론해 보기로 한다58). 이는 역사영웅서사시의 전개와 변형과정에 대한 탐색인 동시에 무속서사시와 역사영웅서사시의 상호교섭에 대한 추론작업이 된다.

<천지왕>은 창세신화와 인세차지 경쟁담이 골간을 이루는 무속서사시이다. 서대석은 <천지왕>의 신화소를 천지창조, 인간창조, 일월조정, 인세차지 경쟁, 시조의 출생과정으로 나누어 각 신화소가 지니는 의미를 풀어내었다. 59) 임석재는 7편의 자료를 소개하고 문화적 의미를 고찰했다. 60) 김헌선은 창세신화의 지역적 특징을 고려하면서 각 신화소들의 결합방식에 관해 깊은 관심을 표하였다. 61) 이지영은 <천지왕>의 신격 좌정 경위와 전승체계를 추출하여 건국신화 및 <제석본풀이>와 상관성을 고찰한 바 있다62). 그런데 이상의 선행연구들은 크게 보아 신화소의 의미해석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각 지역별 편차를 보이며 전승되는 <천지왕>의 변이동인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글에서는 그 변화의 동인을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켜 추론함으로써 무속서사시의 역사성과 이것과 역사영웅서사시간의 상호교섭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천지왕>은 본토의 함흥, 강계, 평양, 오산, 강릉, 영해, 울진 등지와 제주도 지역에서 채록된 바 있는, 전국적 분포의 무속서사시이다. 이 서사시는 전국적 분포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지역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여 주기에 주목을 요한다. 즉 한강이북지역, 오산지역, 동해안지역 그리고 제주도지역 채록본들은 서로 같고 다른 점이 분명해서 이러한 현상이 생겨난 원인을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무속서사시를 史書에 기록된 고대건국사(건국신화)와 상호 연관시키면서 고찰하는 방법을 취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천지왕>을 고구려 출자의 비류와 온조를 중심으로 한 백제 건국사와 대응시켜 <천지왕>의 지역별 변이동인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으로 삼은 자료는 아래와 같다.

 


번호  자료명         구연자      전승지역   채록자        자료소재

 1.   창세가          김쌍돌이    함흥      손진태      조선신가유편

 2.   셍굿           강춘옥      함흥      임석재 외    관북지방무가(추가본) 

 3.   삼태자풀이     정운학       평양      임석재 외   관서지방무가

 4.   당고마기노래   박용녀       강릉     김선풍    한국시가의 민속학적 연구     5.   당금아기       최음전       영해     최정여 외    동해안무가

 6.  순산축원     권순녀      울진  A. Guilemez    김영돈 교수 화갑논총           7.   시루말         이종만       오산     적송지성      조선무속의 연구

 8.   천지왕본풀이   박봉춘       제주     적송지성      조선무속의 연구

 9.   천지왕본풀이   강일생       제주     임석재        제주도 17호

 10.  천지왕본풀이   안사인       제주     현용준        제주도무속자료사전

 11.  천지왕본풀이   고대중       제주     장주근      한국의 민간신앙 자료편

 


이상의 자료를 검토해 보면 북부지역과 제주도지역에서 잔승이 활발하고동부지역은 <당금아기>의 부분삽화 정도로 전승되고 있어, 그 기능도 차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차이는 <천지왕>을 북부, 중부, 동부, 제주도지역을 나누어 소개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 북부지역

      김쌍돌이본          강춘옥본         정운학본

a     미륵/석가           미륵/석가        미륵/석가

b         -                  -                 -

c         +                  +                 +

d       석가                석가              석가

    a:경쟁주체       b:부모의 존재      c:인세차지 경쟁      d:승리자

 


북부지역 자료의 특징은 우선 경쟁주체자가 미륵과 석가로 설정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점은 다른 지역과 대비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경쟁주체가 미륵과 석가로 설정됨으로써 부모의 존재 역시 나타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원래부터 종교적 신격을 획득한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부모의 신성성을 빌어올 필요가 없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B. 동부지역 채록본

이 지역의 자료는 모두 당금애기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한다. 즉 석가가 애가슴을 취한 뒤, 아들 삼형제의 출생을 예언하고 제석궁으로 길을 떠나는 과정에서 미륵과 잠자기 내기를 하여 속임수로써 조선국을 차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북부지역과 대비할 때, 별다른 차이는 발견되지 않아 북부지역의 자료가 그대로 동부지역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63)

 


C. 오산지역(중부지역)

이 지역에서는 한편의 자료가 채록되어 남아 있다. 앞의 두 지역과 다르게 부모의 존재가 천하궁 당칠성과 매화뜰 매화부인으로 분명해졌고, 석가와 미륵도 선문이와 후문이로 다르게 나타난다. 부모의 결연에 의한 쌍둥이의 출생과 이들의 일월조정이 주요 내용이며, 인세차지 경쟁은 없이 (당칠성에 의해) 정해진 대로 선문이(형)는 대한국을, 후문이(아우)는 소한국을 차지하는 것이로 되어있다. 인세차지 경쟁이 탈락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을 끄는데, 이 문제 역시 <천지왕>의 전체적인 변이동인을 논하는 과정에서 상술하도록 하겠다.

 


D. 제주지역

가장 완전한 서사구조를 가진 자료의 채록이 이루어진 지역이다. 천지왕과 바지왕의 결연으로 대별왕고 소별왕이 출생하고(강일생본에서는 母의 존재가 사라지고 그저 천지왕의 아들 3형제가 솟아난다고 되어 있다. ) 이들이 인세차지 경쟁을 벌이는 것이 주 내용이다. 각편의 차이가 드러나도록 자료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박봉춘본>       <안사인본>        <강일생본>        <고대중본>

a           +                +                 +                 +

b     대별왕/소별왕     대별왕/소별왕     대별왕/소별왕     대별왕/소별왕

c       인세차지          용상차지          인세차지           인세차지

d          +                 +                 -                  +

e          -                 +                 -                  -

 ◉  a:경쟁화소  b:경쟁주체  c:경쟁목적  d:부모의 존재  e:수명장자 징치

 


위의 자료 중에서 <안사인본>은 ’초감제‘의 굿거리에서 구연되는데, 천지개벽과 일월조정은 <배포도업침>에 포함되어 있고, 천지왕이 수명장자를 징치하고 총맹부인과 결연하여 대·소별왕을 낳고 이들이 인세차지경쟁을 벌이는 내용은 <천지왕본풀이>에 포함되어 있다. 현전자료 중에서 가장 완벽한 서사구조를 가진 자료로 생각된다.

이상의 검토를 바탕으로 우리는 북북지역에서 제주지역으로의 지역적 이동에 따라 다음의 편차를 읽어내게 된다.

 


         북부(동부)              중부                 제주

a           -                     +                    + 

b           +                     +                    +

c           +                     -                    -

d           +                     -                    +

e        미륵/석가           선문이/후문이       대별왕/소별왕

f           +                     -                    +

 


  ◉ a:부모의 존재  b:일월조정  c:인간창조  d:인세차지 경쟁 

    e:경쟁주체  f:수명장자 징치

 


이렇게 보면, 북부지역에서 중부지역으로, 다시 남부지역으로 내려갈수록 종교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탈색되고, 부모의 결연에 의한 쌍둥이의 출생이 강화되는 현상을 알 수 있다. 이런 변이양상을 역사적 사실·배경 등과 관련시켜 본격적으로 검토하여 그 의미를 알아보기로 한다.

<천지왕>에서의 대·소별왕의 경쟁이나 아우인 소별왕의 승리 등은 백제 건국사에서 비류·온조와 닮았다. 신화나 고대사의 記述은 당시에 공통적인 패턴을 유지했다고 판단된다. <제석본풀이>와 주몽전승이 그렇고, 주몽전승과 <Idige>의 경우가 그렇다64). <천지왕>과 백제 건국사의 비류·온조 관련기사도 또 하나의 신화 기술 패턴일 수 있다고 보아 둘 사이의 관련을 따져보기로 한다. 그런데 백제건국사는 현재 국사학계에서도 쟁점으로 남아 있는 미묘한 문제거리다. 건국시조가 누구이며 왕권의 양상은 어떤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많은 학설이 제기되어 있고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백제의 건국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국사학계에서 수다한 논의를 덧보탠 바 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결국 東明과 仇台 그리고 溫祚외 沸流의 관계인데, 각 사료마다 그 인명이 달라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여기서 인명의 같고 다름을 통해 백제시조 기사를 재졍리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동명이 夫餘 諸族의 시조임에는 異論이 없다. 그러면 동명전승이라 할 만한 이 내용이 부여족 고유의 것인가가 다시 문제되는데, 중앙아시아 터어키의 서사시 <Idige>가 주인공인 영웅의 말기르기, 왕의 아들과의 관계, 왕의 아들보다 뛰어난 지략의 입증과 같은 모티프를 지님으로 해서, 65) 우리는 이러한 내용의 시조전승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무대로 생활하던 제 민족들의 보편적인 신화기슬 패턴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게 된다. 각 민족마다 개별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넓게는 유목, 기마 민족의 공통전승이 분명히 존재했을 개연성을 일단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명전승 역시 부여족의 시조에 관한 신황이면서 유목, 기마 민족의 공통전승에 기대고 있을 뿐 아니라, 부여에서 분파한 다른 갈래들의 건국신화를 형성시킨 부여 제족의 공통전승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주몽은 동명의 후예라 하지 않고 자신의 행적을 동명과 일치시킴으로써 동명이 곧 주몽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 주몽이 범부여계의 공통시조인 동명을 自稱함으로써 자신이 곧 부여의 적통을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논리를 세웠다. 부여왕실은 물론이고 백제왕실에서도 일찍부터 東明廟를 세워 제사지냈고 동명을 시조로 여겼던 사실과, 백제의 온조가 주몽계와의 세력다툼에서 밀려 만하하여 주몽묘를 세우지 않고 동명묘를 세운 것으로 봐서도 주몽과 동명은 결코 동일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仇台는 곧 동명이 아니라 그 후손이라 함으로써 仇台집단은 주몽집단과 달리 부여왕실을 혈통을 이어받은 한 분파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와중에 주몽의 졸본부여(고구려)가, 정확하게는 桂婁部가 인근 제집단을 정복하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이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고구려에 편입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소국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沸流國과 曷思國이다. 비류국은 비류수가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주몽이 이곳에 도읍하려 하자 마찰이 생겼다. 관련기사를 소개한다.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道日淺 爲我附庸可乎···三年夏六月 松讓以國采隆 以基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二年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즉위년, 2년 및 유리왕 2년조> 

 


송양은 비류수 지역에서 누대로 왕노릇했다고 했는데, 결국 주몽에게 항복하여 속국이 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 5부 중에서 주몽의 계루부로 왕권을 넘겨준 涓奴部를 주목해 볼 필요를 느낀다.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위략󰡕, 고구려조>

 


본디 왕노릇하던 견노부가 점차 세력을 잃어 계루부로 왕권을 넘겼다는 내용은 누대로 비류수 지역에서 왕노릇하던 송양이 주몽에게 굴복한 사정과 흡사하다. 비류수 유역의 비류국이 인근 소국의 맹주였다가 이를 주몽에게 넘겨준 것이 곧 견노부에서 계루부로 왕권이 넘어간 것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면 비류국은 곧 견노부일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66)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비류라는 국호이다. 백제건국의 시조로 나타나는 비류와 동일한 것이기에 어떤 상관성을 엿보게 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백제 건국시조에 가서 논의하겠다.

한편 갈사국은 동부여와 금와의 막내아들이자 帶素의 아우가 갈사수가에 세운 나라로서 태조왕 16년에 갈사왕의 손자 都頭가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十六年 秋八月 曷思國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16년조>

 


위 인용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于台라는 명칭이다. 비로 이어 살필 仇台 혹은 優台와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인용했다.

仇台는 중국측 사서에 관련기사가 주로 등장한다.

 


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有仇台者 始國於帶方···王姓夫餘氏 號於羅가 民呼爲건吉支 夏言幷王也···又每歲四其始祖仇台之廟

   <󰡔周書󰡕, 백제전>

 


대표적으로 周君의 기사를 소개했지만 北史나 수서 통전 등에서도 백제의 시조는 仇台라 되어 있다. 천관우는 仇台가 于(優)台의 오기이며, 이는 백제 정치사에서 우시계의 부침을 통해 볼 때 더욱 구러하다고 했다. 67) 어쨌든 백제 건국시조로 온조와 비류 이외에 仇台가 등장함으로 해서 혼란을 보탠 것은 사실이다. 필자는 仇台든 于(優)台든 결국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이표기라고 생각하거니와 이는 앞서 소개한 갈사국 기사에서 등장하는 于(優)台라는 명칭을 보더라도 仇台나 于(優)台가 특정인물의 이름이기보다는 왕이나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王民信 역시 仇台와 夫餘·餘의 고대음을 상호 비교하고 관계기사를 검토한 결과仇台는 부여의 이칭이며, 부여와의 통칭일 따름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68) 따라서 스스로 부여계라고 표방하는 집단이면 누구나 차용가능했을 명칭이 바로 仇台나 于(優)台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조동일은 일찍이 동명은 보통명사요 주몽은 고유명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69) 결국 주몽이 자신의 이름 외에 보통명사인 동명을 함께 가졌다는 점에서, 부여계의 왕들이 仇台라는 보통명사를 자연스럽게 차용했을 개연성은 높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비류와 온조에 대해 검토하기로 한다. 기록을 보면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기도 하고 于(優)台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于(優)台의 아들이면서 주몽의 양자이가도 하다. 세 갈래의 기사를 요령있게 정리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는 다음의 가설을 세워놓고 있다. 우선 비류를 주몽에게 항복한 비류국의 일파로 보는 것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비류는 남하하여 굳이 미추홀에 근거를 정했다. 미추홀은 사기의 기록대로 물과 인접한 지역이다. 비류가 굳이 물을 가까이 하여 도읍을 정했다는 사실은 남하 이전 비류집단의 생활근거가 물가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비류국은 비류수에 의지해 세워진 나라고 비류수는 지금의 富爾江과 渾江이 합쳐지는 곳이다. 이를 염두하고 다음 기록을 보면 비류국과 하천이나 바다와의 관련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 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삼국지󰡕, 고구려전>

 


소수는 곧 지금의 혼강이므로 비류수와 거의 같은 위치에 있다. 70) 그리고 그 지역에 근거를 둔 집단을 소수맥이라 불렀고 주명이 이 지역에서 송양과 주도권 다툼을 별였기에 고구려를 소수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국 원래 이 지역의 맹주였던 비류국이 곧 소수맥이었는데 주몽집단에게 복속되면서 그 명칭도 자연히 고구려의 별칭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국명과 인명과의 상관성이다. 주지하다시피 부여계는 부여(부)로써 姓을 삼았다.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국호와 성씨가 같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원용한다면, 비류라는 인물 역시 비류국의 분파일족으로 남하하면서 그 집단의 지도자가 자기 본래의 국호인 비류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71) 추측건대 국호를 분파시조의 이름에 차용하는 관례가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야만 분파집단 자체가 원 집단의 적통을 이어서 새로이 근거를 마련했다는 권위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온조가 남하하여 위례성에 도읍하여 국호를 곧 십제라고 정헀던 반면에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하고도 국호를 무엇이라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는 비류집단이 지속적으로 비류국이라는 국호를 견지했기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仇台와 비류의 관계를 살피기로 하자. 앞서 필자는 仇台나 于(優)台는 공히 동일한 의미의 이표기라고 했거니와 비류의 부가 仇台는 于(優)台든 이는 물론한다. 비류가 于(優)台의 아들로 나타난 것은 비류가 부여계 중 소수맥 이전 비류국에 족원을 두었기 때문에 부여왕의 이칭인 于(優)台의 자식으로 당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김성호는 仇台와 비루는 기능, 이동경로의 비정을 통한 건국지와 활동시대가 합치하므로 동일인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72) 김성호의 견해는 필자의 입장에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즉 仇台와 于(優)台는 모두 부여계 집단의 지도자를 뜻하는 명칭이므로 족원을 부여계에 두고 있는 분파집단도 자연스럽게 이를 차용했을 터이고 따라서 비류도 비류 외에 仇台라는 명칭을 더불어 사용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비류가 남하하는 과정에서부여계의 또 다른 일파가 선주하던 대방고지에 집단을 잠서 가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선주집단의 왕인 仇台 이후에 비류가 이 집단을 이끌고 함께 패수와 대수를 건너 남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온조는 어떤 인물인가? 온조는 어디에서나 비류의 아우로 나타난다. 생부는 于(優)台이기도 하고 주몽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디서나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타나는 것은 이들의 모는 분명히 소서노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생부가 달라지는 것은 어느 한 쪽의 착오라기보다 자기 혈통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사관적 대립인 덧하다. 즉 비류가 강조되면 졸본부여와 仇台가 나타나고, 온조가 강조되면 졸본부여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주몽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비류와 온조는 각각 于(優)台와 주몽의 생자로서 어머니인 소서노에게서 태어난 이부동복형제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73) 그리고 이들 형제는 주몽 말기에 주몽의 적자인 유리가 새로운 세력으로 들어옴에 따라 할 수 없이 남하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비류와 온조집단이 같이 행동하면서 동시에 남하했는가 아니면 시기적으로 선후가 있게 남하한 것인가는 지금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들 두 집단이 부의 계통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남하하였기에 이들이 남하하여서는 각기 다른 근거지를 확보하여 독자적인 세력으로 재출발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들 두 집단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상호경쟁과 협조를 하다가 이후 온조집단의 세력이 우세하여 비류집단을 병합했다고 보이는데, 이를 사서에는 “비류가 미추는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가 없다 하여 위례로 돌아와서 이곳의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평안함을 보고 그만 부끄럽고 한스러워 죽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술방식, 즉 병합당한 똑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열세와 무능을 자각하여 병합의 사실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것은 르네 지라르식으로 말하는 ‘폭력 지우기’의 한 전형적 기술방식인 것이다.

그러면 온조와의 세력경쟁에서 패배한 비류집단은 어떻게 된 것인가? 기록에는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즐겁게 따랐다”고 되어 있으나 이 역시 병합한 온조집단의 일방적 시각에서 서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비류집단의 멸망 후에 일부는 이에 반발하여 남하를 계속하면서 근거를 다졌다고 본다. 이런 사정은 김성호의 논저에서 자체의 논리에 충실하게 다룬 바 있어 여기에 의존한다. 김성호는 다물계 지명분포가 압록강 중류로부터 대동강 하류와 황해도 일대, 그리고 경기만에서 옹진을 거쳐 서남해안, 제주도와 일본열도에 걸쳐 있음을 주목하고 이 이동경로가 바로 비류집단의 남하 및 도왜경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제주도에 탐라·두무·대수라는 담노계·축수계·다물계의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A. D. 227년에 목라근자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비류백제의 원정군이 제주도를 정복한 결과이며, 이곳이 비류백제의 영토인 오개권역의 하나로 흡수된 것이라 했다. 74) 비류집단은 남하하면서 강력한 해상국가 건설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추홀 입도가 그렇고 제주도 입도가 그렇고 일본열도 진출이 또한 그렇다.

이상에서 우리는 백제건국사와 비류집단의 이동경로를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 정이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동명과 仇台(于(優)台)는 특정인물의 이름이기보다는 범부여계 공통시조와 부여계 제족의 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다. 다만 주몽은 스스로 동명임을 자처했고 그외 부여계 제족은 동명의 후손으로서 권위를 세웠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주몽잡단이 부여계 제족을 복속시켜 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범부여계의 적통이 자신이며, 자신으로부터 부여계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동명임을 자처했다고 보아지며, 그외 복속된 부여계 제족은 여전히 자신들이 동명의 후손이라는 혈통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둘째, 국호와 분파시조의 이름이 동일시되던 관습에 따라 비류는 주몽이 복속시킨 비류국의 일파로 추정되며, 이는 비류국이 물과 천연한 소수맥이었으메 따라 비류 역시 미추홀에 굳이 입도한 것이 아닌가고 판단된다. 그리고 미추홀 입도 이후에도 비류집단의 국호가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전의 비류국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셋째, 비류가 仇台의 자라고 한 것은 비류가 부여계 왕족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부여계의 모왕인 仇台(于(優)台)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넷째, 비류와 온조는 이부동복형제로서 주몽 말기에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등장함으로써 왕권경쟁에 밀려 남하하게 되었는데 각기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여 경쟁, 협조하다가 온조세력에 의해 병합되었다.

다섯째, 비류세력의 일부는 온조세력에 귀화하고, 일부는 독자적으로 남하를 계속하여 근거지를 확보해 나갔는데, 해상세력화를 지향한 관계로 제주도와 일본열도에 그 세력을 형성했다.

이상의 잠정적 결론을 바탕으로 해서 <천지왕>의 내용과 변이동인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는 앞서 <천지왕>의 분포지역과 각 지역에 따른 특징을 정리하였다. 이를 근거로 논의를 진행한다.

우선 북부지역본은 대결주체가 석가와 미륵으로 종교적 신격으로 나타난다. 그럼으로 해서 대결주체의 부계와 모계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내용과 일월조성, 인세차지 경쟁이 고루 나타나기에 다른 지역본에 비해 종교적 색채를 많이 갖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이 지역의 <천지왕>이 타지역에 비해 보다 고형이라는 판단을 하게 한다. 고형이라고 하지만 곧 원형이라고 하기 어렵다. 대결주체가 이미 미륵과 석가라는 불교신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가>를 보면, 인간창조의 주체는 미륵인데, 뒤에 석가가 나타나서 경쟁이 생겨나는 것은 곧 민속신앙(무속)과 불교의 대결의 의미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륵은 주지하다시피 민속신앙의 대상인 용과 연계될 개연성이 높다. 미륵신앙은 조선후기 용신앙을 덧입고 신흥종교로 나타난 점을 감안한다면 미륵을 토착적인 신앙대상으로서 용신의 형상화로 이해되며, 석가는 후래한 고등종교인 불교신의 형상화로 이해가능하다. 이 둘 사이에 대결이 벌여져 능력이 뛰어난 미륵이, 열등한 석가의 속임수에 의해 패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불교가 민간신앙, 무속 등을 아우르면서 고등종교로서 한국에 기반을 잡아나간 사정과 상통하는데, 특히 불교, 승려와 용, 뱀과의 관련성은 여러 군데에서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고등종교인 불교의 석가가 음흉한 속임수로 승리하는 부정적 신격으로 형상화된 것은, 이 무가가 여전히 미륵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무속신앙의 소산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패배를 능력의 패배가 아니라 속임수에 의한 패배로 설정함으로써 보상의 장치를 마련했다고 하겠다.

원래 <천지왕>은 토착적인 二位 神들의 상호경쟁담 형식으로 존재하다가 불교의 유입으로 변이되어 오늘날 북부지역본으로 남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부지역본과 제주도지역본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을까. 이는 앞서 살핀 부여계, 특히 고구려의 풍부한 구비서사시 전승의 가능성과 그들의 남하라는 역사적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설명의 단서를 잡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비류와 온조의 남하와 백제건국, 그리고 둘 사이의 대결과 비류의 패배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천지왕>의 지역적 편차를 만들어낸 결정적 요인이라 판단되는데, 이는 역사와 문학의 교섭이자 무속서사시와 역사영웅서사시의 교섭이다.

경기도 오산의 <시루말>은 부계와 모계가 분명하다. 부는 천하궁 당칠성이고, 모는 매화뜰 매화부인이다. 부계와 모계가 분명하므로 미륵과 석가는 선문이와 후문이라는 인간화의 변이를 거친다. 일월조정담은 있으나 인세차지 경쟁담은 없다. 선문이는 대한국을, 후문이는 소한국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는 비류와 온조집단은 고구려에서 분기하여 각각 미추홀과 하남 위례성에 별다른 대결없이 도읍을 정한 사정이 <천지왕>의 본래적 모습과 혼융되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미륵과 석가가 비류와 온조의 역사적 인물과 연결되면서 선문이와 후문이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계통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부계와 모계가 설정되었다고 생각한다. 천부와 지모의 결합으로 영웅 혹은 건국주가 출생한다는 보편적 틀을 차용하여 선문이와 후문이의 신성성을 확보한 것은 일반 건국신화의 기술방식 그것이다. 신에서 신적인 존재의 아들로 변하고 이승과 저승이 대한국과 소한국의 두 나라로 변한 것은 바로 비류와 온조의 백제 건국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두 집단이 각각의 필요(남하 이전의 생활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에 따라 도읍을 정했기에 한 지역을 두고 대결하는 양상은 벌어지지 않았고, 이런 사정이 오산 지역 <시루말>에서 인세차지 경쟁담이 탈락한 원인이 아닌가 한다. 

제주지역본은 상대적으로 완벽한 서사구조를 보여준다. 북부지역본의 내용을 포괄하면서도 경기지역본처럼 부모의 계통이 분명하고 대결주체도 미륵과 석가에서 대별왕과 소별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제주지역본은 부모의 결연에 의한 대·소별왕의 출생, 아버지 찾기, 친자확인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인세차지 경쟁에서는 부의 역할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천신의 성격을 지닌 천지왕이 두 아들의 대결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사정을 해석해 내는 것이 요점이다.

백제건국기사를 다시 음미해 보자. 󰡔삼국사기󰡕에는 비류가 도읍을 잘못 정하여 이를 뉘우치고 자결함으로써 두 집단이 하나로 통합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기사의 내용은 통상 두 집단의 대결과 일방의 패배로 이해되므로 쌍방간에 모종의 대결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그 결과 비류집단이 패배하여 일부는 온조집단에 귀속되고 일부는 남하를 계속했을 터인데75), 이때 비류계 남하집단은 여전히 자기네 신앙체계나 그와 관련한 무속서사시 등을 保持했으리라 본다. <천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겠는데, 자신들의 패배와 불행한 처지를 다시 <천지왕>에 삽입하면서 전승을 계속 했을 것이다. 제주지역본 <천지왕>은 계속 남하한 비류계 잔존세력들이 자기네의 불행한 역사를 종교적인 무속서사시에 개입시킨 결과라고 생각된다76).

신으로서 무한한 능력을 지닌 아버지로서의 천지왕이 두 아들의 대결에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로 형상화된 것은 비류·온조와 주몽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비류와 온조는 異父同腹兄弟로서 주몽의 庶子였는데, 適者인 유리에게 밀려 남하한 자들이다. 물론 비류의 부는 다르지만 주몽세력에 복속되어 있었고, 유리의 개입 이전에 왕권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온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이라 한것은 왕권에 대한 이들의 도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비류·온조의 남하는 필연적 과정이 되고 남하 이후 이들의 국가 건설에 주몽의 존재는 아무런 배경이 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동명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주몽을 통해 확인한 정도에 그쳤다. 無所不爲의 천지왕이 두 아들의 인세차지경쟁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극단적으로 사라진 아버지로 전락하고 만 것은 비류·온조와 주몽의 관계를 고려하면 무리없이 이해된다. 북부지역본의 인세차지 경쟁담을 덧보탬으로써 경기지역본의 역사적 배경이 스며든, 변이된 무속서사시가 또 한번의 굴절을 겪게 되었다고 본다. 제주지역의 안사인본에서 인세차지경쟁이 용상차지경쟁으로 변이된 것과 용상의 뿔을 잡고 흔드는 불경한 행위에도 천지왕이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점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능력이 우월한 대별왕이 속임수에 의해 소별왕에 패배한 사정은, 제주도에 입도한 비류계 집단의 관념적인 자부심과 현실적인 패배 모두를 수용한 결과로 이해된다77). 󰡔삼국사기󰡕기록에서 비류의 참회로 온조의 승리를 미화한 승리자 중심의 서술시각이 <천지왕>에서는 소별왕의 속임수로 대별왕의 패배했다는 패배자 중심의 서술시각으로 상반되게 나타나 각자의 관점을 드러내었다. 역사는 승리자나 강자의 시각으로 서술되지만 무속서사시는 약자나 억울한 패배자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특징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로 보인다.

서대석은 창세신의 기능에서는 미륵과 천지왕이 상응하고, 인세차지경쟁의 주체에서는 미륵과 대별왕, 석가와 소별왕이 상응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따라서 <천지왕>은 단일신화가 아니고 복합신화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78). 김헌선도 <천지왕>의 천부지모 결합과 시조출생의 화소가 창세과정 이후에 다른 신화적 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시조의 출생담으로 이해하고 이 화소가 제석본풀이와 동명왕 신화와 부합하고 특히 오산의 <시루말>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이 어떠한 역사적 전개와 내력을 보이는지가 중요한 문제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79). <천지왕>을 상세하게 검토하다 보면 갖게 되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 무속서사시의 지역적 편차를 요령있게 읽어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 지역적 편차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한 복합 요인에 의한 결과라는 적극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무속서사시와 역사(건국신화)와의 관련성은 서대석이 <제석본풀이>와 동명왕신화를 통해 이미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천지왕>도 비류계 남하집단의 무속서사시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역사서사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고, 남하와 정착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현전 <천지왕>의 지역적 편차를 만들어낸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속서사시와 역사서사시 중 어느 것이 더 선행했겠는가와 왜 무속서사시에 역사적 사실이 혼융되어 있는가이다. 이들 문제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제주도의 사정을 살펴 해결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제주도는 ‘堂 五百 절 五百’이라는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무속 신앙의 뿌리가 깊은 지역이다. 현용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 당신의 수는 400이며, 당수는 277이다. 이 중에서 삼성 신화와 관련되는 것은 성산읍 온평리의 당본풀이이다. 이 본풀이는 세 자매가 서울 정기땅에서 솟아나 조천면 조천리로 들어와 조천리, 구좌읍 금령리 그리고 온평리의 당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온평리 당신 맹호부인이 숭앙을 받기 위해 문씨 영감에게 흉험을 주어 무구를 주워 오게 하니 문씨 영감이 전속사제무가 되어 위하다가 그도 죽은 뒤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현용준 교수는 이들 본풀이가 삼신녀의 출생국이 <서울 정기땅>, <대국 명나라> 등 차이가 있으나 삼신녀가 바다로 표착해 왔다는 점에서 삼성신화의 삼신녀 표착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고, 온평리 당본풀이와 관련된 김령 큰 당본풀이에서도80) 역시 조천, 김령, 온평리 당신이라는 계보가 일치함을 보였다. 그리고 이상의 본풀이에서 그 출생국이 서울, 명나라, 강남천자국 등으로 다름이 있으나 해외의 나라에서 삼신녀가 표착해 와서, 조천리, 김령리, 온평리의 당신이 되었다는 일치된 전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삼신녀 표착 전승이 삼성신화의 삼신녀 표착 전승과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81) 그러므로 삼성신화는 본래 삼성씨족의 조상본풀이요, 이 씨족이 숭앙하던 당본풀이적 성격의 신화이며 그러기에 삼성혈 및 그 제의가 본래 무속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현용준 교수는 따라서 무속서사시에서 씨족의 조상본풀이가 파생되어 나갔다는 입장에 서 있다고 본다. 이를 확대하면 무속서사시에서 한 국가의 건국서사시 역시 파생되어 나갔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는 것인데, 이 견해는 조동일 이 “건국서사시는 무당이 굿할 때 부르는 서사무가로 이어지면서, 역사적 사실과의 관련은 마멸되었지만 사건전개의 방식이나 노래부르는 수법은 면면히 이어졌다”고 하고 “고구려의 주몽이나 신라의 탈해의 행적을 문헌에 올려 소개한 데서도 확인되는 ‘영웅의 일생’이 서사무가를 통해서 풍부하게 전승되다가 후대의 소설로 이어졌다”고 한 것과 일견 상치의 감이 없지 않다. 82) 그러나 이 두 견해는 상호 보완적인 관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양자의 상호교섭의 측면에서 그렇다. 이를 위해 우선 앞서 살펴본 중앙아시아의 bakshy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우리는 bakshy가 샤만의 전문적 기능과 광대의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른 시기에는 부족민을 단결시키는 역할도 수행했으며, 따라서 어떤 형태의 서사시든 그 구연의 기술은 神에 의한 신비한 은총으로 인식되었고 그 기능이 자기네 부족의 풍요와 영광을 노래하고 경쟁부족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데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사제의 기능과 서사시 광대의 기능을 공유하고 있는 무당의 존재, 일상생활에서 약 4천개의 단어를 사용하다가 서사시 구연시에 약 1만 2천개의 단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무당의 언어능력의 차이와 더불어 구비서사시의 근원이 무속서사시에 있다는 강한 암시를 주며, 일반 서사시 광대의 구연전설과 무당의 구연전설이 거의 유사한 이 지역의 경우가 바로 이런 사정에 말미암는 것이라는 언급을 했었다. 한국의 경우에서도 무속서사시 안에서 건국의 역사(건국신화)를 읽어내는 관점을 마련하는 데에 인접한 중앙아시아의 사례는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따라서 발생론적인 측면에서 무속서사시의 선행을 인정하고 양자 공존의 시기에 건국서사시의 우월을 인정한다면 별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현재 전승되지는 않지만 건국서사시는 무속서사시의 구조를 빌어 형성되었으며, 이후 집단의 규모가 국가의 개념까지 확대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전승되었다고 생각한다. 83) 하나의 국가가 형성되어 자기네 국가의 긍지를 자랑하는 시기가 되면 상대적으로 무속서사시는 경쟁력이 약화되어 건국주의 혈통과 행적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나 배경을 다루는 건국서사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건국영웅의 일대기나 역사적 사실과 무속서사시와의 관련은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에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바다.

 


李世勣 功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 鼓조聲振天地 城有朱蒙祠 祠有鎖甲섬矛 妄言 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 神巫言朱蒙悅城必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四年 夏 五月條)

 


당군과의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고구려군이 이를 극복하는 방도로 그들의 수호신인 건국주 주몽에게 처녀를 바쳤다는 것인데, 이를 주재한 자가 바로 무당인 점이 중요하다. 적어도 이 시기의 무속 신앙은 국가적인 차원의 종교로서 무당은 건국주의 수호신화를 자기네의 무속서사시와 함께 본풀이의 형태로 구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고 보는데,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그 증좌가 된다. 그 첫머리에 “世多說 東明王 神異之事 雖愚夫駿婦 亦頗能說其事 僕嘗聞之笑曰 先師中尼 不語怪力亂神 此實荒唐奇詭之事”의 기록을 보면 당대에 동명전승이 강한 전승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이규보 자신이 老巫篇 등의 작품을 지은 것으로 보아 무당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당대에 무당의 활발한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규보의 노무편과 동명왕 서사시를 이어 보면 당대에 무당들이 동명전승을 여전히 구연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규보가 이를 듣고 동명왕 서사시를 한시로 창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정은 동명왕편 서두 부분과 제석본풀이의 서두 부분을 비교해 보아도 추측 가능하다.

 


가) 복희씨는 희생 제도를 마련하였고 수인씨는 나무를 비벼 불을 마련하였다. 명형이 난 것은 요임금의 상서요 서속을 내린 것은 신농씨의 상서다 …84)

나) 인왕씨는 사람마련 / 금송씨는 쇠를 마련 / 목덕씨는 낭구마련 / 수인씨는 물을 마련 / 화덕씨는 불을 마련 / 염주와 신농씨는 농사법을 마련해야 / 역산에 밭을 갈고 / 수직이는 씨를 던져…85)

 


가)는 동명왕편의 서두이고 나)는 제석본풀이의 서두이다. 한문학 양식에서 동명왕편의 서사시 형식은 특이하게 시작하고 있거니와86) 이는 제석본풀이와 동명전승이 구조와 모티프에서 상사한 점과 아울러 이규보가 무당의 본풀이를 경험하여 동명왕편을 창작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또한 동명왕의 神異之事를 오히려 愚夫駿婦들이 頗能說하게 했던 까닭이 동명전승이 서사무가적이고 본풀이 같았던 가능성에 기인한다고 한 장주근의 주장에서도 무속서사시와 역사영웅서사시의 관련성을 읽어 볼 수 있다.87)

이런 과정에서 국가의 체제가 확립되고 중앙통제력이 강화되면서 중앙아시아나 스페인의 경우처럼 서사시 양식이 산문화와 기록화의 길을 걷게 되어 건국서사시의 형태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던 무속서사시만이 건국서사시의 내용을 용해한 채 비공식적이고 음성적으로 전승되었다고 보며88) 우리가 살펴본 <천지왕>의 구조와 내용이 지역별로 편차를 보이며 전승되는 이면에도 이러한 사정이 개재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는 것이다. 89)

 


6. 중간 점검 및 과제

소략하게 우리는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비서사시가 그 전승 집단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이러한 구비서사시의 전승이 집단의 독자성이 약화되고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면 산문화와 기록화의 길로 들어선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여기에 근거하여 한국에서 그 전승 집단의 역사를 노래하는 서사시가 무속서사시에 용해되어 전승되고 있다는 추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추론은 자체로 논리와 자료의 결핍을 갖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과제를 많이 남겨 놓고 있다. 우선 한국에도 다른 지역의 사정과 비교해 볼 때 역사적 사실을 노래한 구비서사시가 존재했다고 보는데,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무속서사시에 용해되어 들어갔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며 그 전개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요인으로서 정치 체제나 지방통제 체제 그리고 국가의 중심이념 등을 세밀하게 살펴야 할 것으로 본다. 바로 여기서 본토에서 당본풀이가 사라지게 된 까닭과 제주도에서 여전히 당본풀이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무속서사시를 이제 역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새롭게 조망해 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한국구비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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