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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여왕 후아나 라 로카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1.29|조회수2,17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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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European Palace
원문 http://blog.naver.com/snoopyzito/60020704144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녀이자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 라 로카(후아나 더 매드)
 
1479년 11월 6일 톨레도에서 출생
1555년 4월 12일 토르데시야스에서 사망
 
 
 
아버지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 엘 카톨리코, 어머니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 라 카톨리카
 
 
1496년 10월 22일 오스트리아 대공 필리프 폰 합스부르크와 결혼
 
필리프와 후아나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 1세는 일반적으로 "미치광이 후아나(Juana the Mad)"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별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후아나의 "광증"에 대해 종종 이의를 제기하곤 한다. 어쩌면 후아나는 단지 정치적인 이유로 감금됐던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간에 후아나는 자신의 남편을 미친듯이 사랑했고, 심지어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를 계속해서 애무했던 정열적인 여성이었다.

 

 

후아나는 1479년 11월 6일,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 사이에서 둘째딸로 태어났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결혼은 스페인을 결합시켰다.

후아나는 화를 잘 내고 발육이 느린 늦된 아기였으며, 부루퉁하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났다. 후아나는 쉽게 우울해졌고, 혼자 있길 더 좋아했다. 후아나의 냉담함은 종종 왕족의 위엄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후아나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인본주의자였던 안토니오 제라르디노와 알레산드로 제라르디노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후아나는 지적이고, 진지하고, 경건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많은 책을 읽었다. 후아나는 라틴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우아하게 춤을 추었으며, 클라비코드(역주: 피아노의 전신)와 기타를 연주했다. 후아나는 외모에 있어선 미인이었던 자신의 친할머니 후아나 엔리케스를 닮았지만, 기질에 있어선 외할머니인 '미치광이' 이사벨을 닮아 있었다.

148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스페인으로 사절을 보내 후아나 왕녀를 자기 아들인 필리프 대공의 신부감으로 청하였다. 그러나 149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후아나와 오스트리아 '미남(The Hansome)' 대공 필리프 폰 합스부르크의 약혼이 성사되었다. 이때 이중으로 약혼이 이루어졌는데, 즉 필리프와 후아나의 약혼과 더불어 후아나의 오빠인 후안 왕세자와 필리프의 여동생인 마르가레테 여대공의 약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후아나의 대리 결혼식은 1496년 초 바야돌리드에서 열렸다. 후아나는 필리프보다 두 살이 어렸다. 그 해 9월 후아나는 22,000 여명의 사람들을 태운 일단의 함대와 함께 '저지국(The Low Countries )'으로 향했다. 세 척의 배가 침몰하는 등 바다 위에서 위험천만한 한 달을 보낸 후, 후아나는 배멀미와 맹렬한 추위로 고통스러워하며 마침내 상륙하였다. 그러나 필리프 대공은 당시 오스트리아에 있었고, 신부를 만나는걸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필리프의 여동생인 마르가레테가 후아나를 환영해주었다.

그러나 10월 중순, 마침내 후아나와 필리프가 만나게 되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첫눈에 강한 열정을 느꼈다. 서로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즉시 성직자에게 자신들을 당장 그 자리에서 결혼시켜줄 것을 명령하였다. 성직자가 이를 끝마치자 마자 두 사람은 함께 침실로 사라졌고, 옷을 벗어던진 후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다음날 열린 교회 결혼식이 공식적으로 그들의 결혼을 완료하였다.

필리프에게 짙은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후아나의 매력이란, 육감적인 정도였던데 비해, 후아나는 남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필리프는 큰 코에 긴 머리칼, 강건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소년과 같은 활기찬 분위기를 가진 필리프는 쾌활한 성격이었다. 필리프는 18살 때 이미 '저지국'의 주권자였는데,  이 지역은 그가 어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필리프의 삶은 대부분 연회, 음주, 여자 쫓아다니기로 이루어졌다. 필리프는 장난삼아 연애하는 방식을 바꿀 의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후아나에겐 오직 절대적인 일체감만이 그러할 것이었다. 스스로가 정략 결혼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단 사실을 깨닫기엔, 후아나는 너무 어리고 미숙했다. 필리프의 연애 유희와 희룽거림은 후아나로 하여금 질투에 빠져 분노하게 만들었다.

필리프는 게으르고 무책임했으며, 언쟁을 몹시 싫어했다. 후아나는 화를 잘 내고, 오만하고, 과민하고, 침울한 성격이었다. 후아나는 자주 침울해졌고, 신경과민성의 발작적 졸도로 고생했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일 때마다, 필리프는 며칠동안 후아나의 침실을 찾지 않는 것으로써 아내를 벌주었다. 그러면 후아나는 밤새도록 울면서 벽에 몸을 부딪치곤 했다. 그러나 필리프의 명백한 불성실과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도 불구하고, 후아나는 여전히 남편을 미친듯이 사랑했다. 1498년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가 후아나를 조사하기 위해 '저지국'에 밀사를 파견했지만, 후아나는 필리프에 대해 그 어떤 부분도 말하길 거부하였다. 밀사는 후아나의 불안과 불행을 알아차렸고, '저지국'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엔 후아나가 너무 불안정하다고 이사벨 여왕에게 보고하였다.

후아나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음모들을 알지 못했다. 후아나 주변의 여자들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궁핍한 상황이었지다. 그러나 후아나는 돈이 부족했고 남편인 필리프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후아나도 이들을 도와주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던 스페인 사람은 후아나의 회계원이었는데, 그는 후아나의 수입을 그 플라망 사람에게 뇌물로 주는데 사용하였다. 후아나는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이국땅에서 외로움을 느꼈고,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후아나는 1498년 딸 엘레오노라를 출산하였고, 1500년에는 아들인 카를을 낳았다. 사람들은 후계자의 탄생을 매우 화려하게 경축하였고, 아이는 12일 후 세례를 받았다. 

한편 1496년 마르가레테와 결혼한 후안 왕세자는 결혼 후 여섯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후아나의 언니인 포르투갈 왕비 이사벨이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이사벨 역시 아들인 미구엘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둘째딸인 후아나가 카스티야, 아라곤, 멕시코, 페루, 카리브 제도의 상속녀가 되었다. 이 무렵 후아나와 필리프는 모든 후계자들이 의무적으로 행하는 의회 선서를 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오라는 압력을 받았다. 1501년 11월 후아나와 필리프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향했다. 이들 부부는 블루아에서 프랑스 국왕을 만났는데, 프랑스 국왕과 필리프는 함께 매사냥을 떠나기도 하고,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1502년 부활절 무렵에 후아나 부부는 마드리드에 닿았고, 이내 필리프의 수행원들은 대단히 종교적인 스페인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로 가던 길에, 필리프는 홍역에 걸리고 말았다. 필리프가 올리아스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후아나의 아버지가 도착해 딸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일주일 후, 그들 모두 후아나의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과 합류하기 위해 톨레도로 떠났다.

얼마 후, 후아나의 제부인 잉글랜드 왕세자 아더가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엔 페르난도 2세의 친척이 세상을 떠났다. 궁정은 곧 상복을 입었고, 후아나가 다시 임신하게 됨에 따라 지루해진 필리프는 사냥을 나가거나 장인과 함께 체스를 두었다. 필리프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들 부부가 선서를 하기 위해 의회에 소집되려면 10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의회는 필리프를 단지 후아나의 배우자(King consort)로만 인정하였는데, 이마저도 후아나가 살아있을 동안만이었다. 필리프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것이 만삭인 후아나를 남겨두고 떠난단 의미일지라도 말이다. 이 얘기를 들은 후아나는 상처를 받았고, 자제심을 잃었다.

1502년 12월 심하게 다툰 후, 필리프는 후아나를 두고 떠나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아나는 신들린 듯이 광포해졌다. 후아나는 즉시 말을 타고 필리프를 뒤쫓아가고 싶어했지만, 이사벨 여왕은 후아나를 라 모타 성에 가둬버렸다. 후아나는 플랑드르로 돌아간 필리프가 건강하고 가슴이 풍만한 미녀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음침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스페인의 두 주권자는 후아나의 거칠고 우울한 심기와 비탄이 그녀의 임신 때문이길 바랐지만, 1503년 3월 10일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페르디난트(페르난도)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후아나는 전보다 더 광포해져갔다. 후아나는 시종들에게 호통을 쳤고, 성직자들을 저주하였다. 후아나는 가능한 한 남편에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한편 후아나가 친정 부모에게 조종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필리프는 후아나에게 네덜란드로 오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후아나는 이 편지를 받자 마자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이 후아나에게 스페인에 머물러 있으라고 제의하였고, 이에 후아나는 격노하였으며 어머니와 사이 좋게 지내지 못했다. 필리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이사벨 여왕은 후아나가 여왕직을 준비하기 위해 한동안 스페인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1월의 어느 추운 밤, 후아나는 성에서 도망쳤다. 도시의 성문이 그녀 앞에서 닫히자, 후아나는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비명을 지르면서 그 쇠살문에 몸을 던졌다. 후아나는 그 지독한 바람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모든 노력들을 물리쳤다. 후아나는 심지어 주교에게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고, 자신을 감금한 것에 대해 괴롭게 했다.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이 도착했을 때, 후아나는 몹쓸 말로 어머니를 모욕하였다.

결국,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국왕 부부는 딸을 보내주었다. 아들 페르디난트(페르난도)를 남겨둔 채, 후아나는 1504년 4월 플랑드르로 돌아왔다. 후아나는 필리프가 정부를 두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싸우던 도중 후아나는 겁에 질린 그 정부의 긴 머리를 잘라버렸다. 필리프는 후아나의 얼굴을 때렸고, 후아나는 자기 방으로 물러나 며칠 동안 계속 그 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후에 후아나는 자신의 무어인 시녀들이 고안한 사랑의 물약과 여타 마법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넌더리가 난 필리프는 그 시녀들을 내쫓으라고 명하였고, 후아나를 그녀의 방에 가두게 했다. 후아나는 이에 항의하여 단식 투쟁을 했다. 며칠 후 이들 부부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머지않아 더 격한 다툼이 뒤를 이었다.

 

1504년 11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가 세상을 떠났고,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는 플랑드르 주재 스페인 회계원이 후아나의 불안정한 성질에 대해 묘사한 몇몇 기록들을 의회측에 읽어주도록 자신의 관리들에게 요구하였다. 당황한 의회는 페르난도 2세를 섭정으로 지명하였다. 필리프와 페르난도는 서로 자기들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도록 후아나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 사이 후아나는 1505년 딸 마리아를 낳았고, 출산 후 몹시 앓게 되었다. 필리프는 편지를 통해 페르난도에게 카스티야에서 나가라고 말했고, 그 다음엔 의회에 자신과 후아나가 스페인으로 가는 중이라고 알렸다. 1506년 1월 후아나와 필리프는 후아나의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스페인을 향해 떠났지만, 이내 폭풍우를 만나 어쩔 수 없이 잉글랜드에 상륙하였다. 헨리 7세는 이들을 환영하였고, 윈저 성으로 초대하였다. 후아나와 필리프는 윈저 성에서 두 달이 넘도록 체류하였고, 여동생인 카탈리나 왕세자비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사이에 후아나는 또다시 아이를 갖게 되었다. 

후아나와 필리프는 1506년 라 코루냐에 상륙했고, 대관식을 위해 남쪽으로 출발했다. 필리프는 곧 인기를 얻게 되었고, 페르난도는 필리프와 후아나를 카스티야의 군주로 인정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필리프와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와 상의하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두고 협상을 벌였고, 이에 후아나는 미친듯이 노하였다. 두 남자는 후아나가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페르난도는 후아나에게 통치할 틍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후, 필리프를 사실상의 지배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필리프는 의회로 하여금 후아나의 광기에 대해 확신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느 날 필리프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인 하이알라이를 하고 있었고, 땀을 흘리며 찬물을 요구했는데 몸이 편찮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날, 열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필리프는 사냥을 나갔다. 3일 후에는 오한이 났고, 나흘째 되는 날엔 피를 토했다. 임신 6개월이었던 후아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필리프와 함께 보냈다. 필리프는 1506년 9월 24일 2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임신 중인 여왕의 깨지기 쉬운 정신 균형을 흔들리게 했다. 후아나는 비탄에 잠겼다. 후아나는 남편의 시신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고, 시신을 계속 어루만졌다. 그 후부터 후아나는 오직 검정옷만을 입었다. 많은 사람들은 필리프가 페르난도 2세와 끊임없이 다투었었기 때문에, 장인인 페르난도 2세의 손에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필리프의 관은 임시로 부르고스 근교의 한 수도원에 묻혔다. 그리고, 미친 여왕이 매일 밤 관을 열게 한 후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껴안는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사실, 언젠가 한번 후아나가 관을 열게 하고 남편의 유해를 본 적은 있었지만, 이는 남편의 시신이 도둑맞았다는 소문에 대해 반응한 것이었다. 시신을 감싸고 있던 것이 제거되자, 후아나는 그 발에 키스하기 시작했고, 강제로 지하 납골소에서 떠나야 했다. 부르고스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후아나는 토르케마다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후아나는 필리프의 최종적인 안식처인 그라나다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필리프의 관도 함께 가져가고 싶어했다. 필리프의 유해가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번째로 관이 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아나는 필리프의 관을 여행내내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필리프의 관은 무장한 호위대의 호위를 받았고, 후아나는 여자들이 관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도록 명을 내렸다. 후아나는 밤에만 이동하였고, 낮 동안에는 일부러 수녀원을 피해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1507년 1월 후아나가 그 우울한 행진 도중 출산의 고통에 사로잡혔을 때, 그녀는 산파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서 딸 카탈리나를 출산하였다. 한편 필리프의 관은 가까운 어느 교회의 제단 앞에 놓여졌는데, 후아나는 질투 때문에 여자들이 그곳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 넉 달 후, 후아나는 그 관과 함께 다시 출발하였다. 그리고 별안간 폭풍우가 닥쳤을 때, 후아나는 수녀원으로 피신하기를 거부하였다. 후아나는 또다시 그 관을 열게 하고는, 한때는 잘생긴 남편이었던 그 냄새 나는 시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후아나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멈춘 후, 필리프의 관과 함께 그곳에서 몇 달을 더 머물렀다. 아버지가 나폴리에서 돌아오셨단 소식을 받고 아버지를 만나러 출발하기 전, 후아나는 필리프의 관을 네번째로 열었다.

나폴리에서 돌아온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를 철저한 감시 아래 토르데시야스 성에 가두게 하였다. 다시 한번, 페르난도는 후아나의 이름으로 섭정직을 맡았다. 후아나의 아이들, 즉 카를(카를로스), 엘레오노라(레오노라), 엘리자베트(이사벨), 마리아는 네덜란드에 남겨져 있었고, 고모인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르가레테를 새어머니로 생각했다. 후아나는 자포자기하여, 자신이 숭배한 남편의 마지막 유물인 막내딸에게 필사적으로 애착을 갖고 떨어지지 않았다. 후아나는 자신의 남편이 그 어린 딸의 더듬거리는 말을 통해 자신에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후아나는 막내딸을 빈틈없이 보살폈다. 후아나는 자신의 방에서 건너가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반침에다 카탈리나를 재웠다. 이 아이의 유일한 즐거움은 창 밖을 내다보는 것뿐이었지만, 아무도 뱃심 좋게 이 어린 공주를 그녀의 히스테리컬한 어머니로부터 데려오지는 못했다. 한편 후아나와 어린 공주 곁에는 시녀 두 명이 함께 하고 있었다.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 제도의 국왕인 페르난도 2세는 1516년 초,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이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왔고, 이때 누나인 엘레오노라도 함께 데려왔다. 처음에 이들 남매는 어머니를 방문하러 토르데시야스로 갔다. 후아나는 한 탑에서 두에로 강을 내려다보며, 당시 10살이었던 카탈리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카를은 양가죽 상의를 입고 있던 막내 여동생의 가엾은 모습에 괴로워하면서도, 어머니와 동생의 곁을 떠났다. 카를은 간수들에게 이런 글을 썼다.

"It seems to me that the best and most suitable thing for you to do is to make sure that no person speaks with Her Majesty, for no good could come of it."

 

보통, 빵과 치즈 뿐이었던 후아나의 식단은 문 밖에 놔두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후아나가 그곳에 누구라도 보는 사람이 있으면 먹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520년 초, 카를 5세는 자신의 어머니를 또다시 방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코무네로스(지방호족)의 봉기가 일어났고, 그 해 9월 반도들이 토르데시야스의 마을을 점령하였다. 이때 후아나는 자신의 단독 통치권을 다시 차지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의심이 많았던 후아나는 그들의 제안에 대해 계속 곰곰이 생각하였고, 그 어떤 것에도 서명하길 거부하였다. 카를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자 후아나는 또다시 토르데시야스 성에 갇히게 되었고, 어느 창문 없는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후아나는 먼저 간 남편보다 반세기 정도 더 오래 살았다. 후아나 라 로카는 1555년 4월 12일, 화창한 금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후아나는 그녀의 부모님, 남편, 조카와 함께 그라나다에 있는 카필라 레알에 잠들게 되었다.

 

필리프와 후아나의 묘
 
 

어머니가 75세의 나이로 운명하셨단 소식을 들었을 때 카를 5세는 우울해졌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카를 5세로 하여금 퇴위 날짜를 앞당기게 만들었다. 통풍을 앓고 있던 카를 5세는 삶으로부터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은퇴하였다.

 

 

후아나의 광기는 지금도 논쟁 거리인데, 왜냐하면 후아나는 분명 권력에 굶주린 주변 남성들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까지 전부 다 후아나 대신 카스티야를 지배하고 싶어했다. 후아나의 "히스테리컬한 짜증"에 대한 이 남자들의 기술은 후아나의 정열적인 천성과 후아나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무정하게 대했던 것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만약 후아나가 정말로 위험한 미치광이였다면, 과연 그들이 막내딸 카탈리나를 후아나의 곁에 내버려두었을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물론 후아나는 시무룩하고, 우울하고, 화를 잘 내며 결단력이 없고, 극단적으로 질투심이 많았지만, 이러한 징후가 광기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반면에, 후아나는 미치광이였던 외할머니를 많이 닮아 있었고, 이상 행동은 후아나의 후손들이 지녔던 명확한 특징이었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 후아나가 단지 가벼운 성격 장애를 앓았는지 아니면 진짜로 미치광이였는지를 단정짓기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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