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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중국의 정복과 지배
1. 한의 베트남 정복
조타(趙? : 찌에우 다)의 통치하에서 유지되었던 남월(南越 : 남 비엣)과 한나라 사이의 균형은 그가 사망하자 곧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타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그의 손자 호(胡, 곧 문왕[文王 : 반 브엉])는 아주 유약하고 통솔력이 부족했던 인물로 즉위 이듬해(B.C. 135년)에 민월이 쳐들어오자 응전도 해보지 않고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한나라는 왕회(王恢 : 왕후이)와 한안국(韓安國 : 한안궈)을 파견했다. 민월을 평정한 한나라는 장조(莊助 : 좡주)를 남월에 보내어 문왕에게 친조(親朝)를 명하니 문왕은 장자 영제(?齊 : 아인 떼, 곧 명왕[明王 : 민 브엉])를 대신 보냈다. 영제는 즉위하기까지 10여 년간 한나라의 장안(지금의 시안[西安])에 볼모로 잡혀 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가 호에게 내린 칭호는 번속국의 왕이었는데, 이는 이후 양국관계를 규정짓는 전형이 되었다.
기원전 125년 문왕이 사망하자 영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베트남에 부인이 있는데도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규(? : 주)씨라는 중국 여인과 결혼을 하여 아들 흥(興)을 낳았다. 영제는 즉위하자 규씨를 왕후로, 흥을 태자로 삼았다. 아인 떼의 사후에는 흥, 즉 애왕(哀王 : 아이 브엉)이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황태후 규씨가 섭정을 했다.
무제(武帝) 치하에 있었던 한나라는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남월 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규씨의 옛 연인이었던 소이(少李 : 사오지)라는 자를 사절로 파견했다. 친한적인 규씨와 소이는 결탁하여 한나라의 법률을 시행하는 한편 왕에게는 한나라에 입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은 승상 여가(呂嘉 : 르 쟈)가 중심이 된 토착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남월의 조정이 이처럼 친한파와 반한파로 나뉘어 대립하자 한나라는 친한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다. 여가는 마침내 반기를 들고 왕과 황태후 규씨와 소이를 죽이고 왕의 이복형이자 자신의 사위인 건덕(建德 : 끼엔 득)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남월의 마지막 왕 술양왕(術陽王 : 투엇 즈엉 브엉)이다.
이에 한나라의 무제는 장군 노박덕(路博德 : 루보더)와 양복(楊僕 : 양푸) 등을 남월에 보내 수도 번우(番寓 : 판위, 지금의 광주[廣州 : 광저우])를 점령케 하니, 남월은 얼마 못 가 멸망했다.(B.C. 111년) 노박덕의 군대는 더 나아가 교지(交趾 : 쟈오 찌) 지방에까지 진격했는데, 남월이 교지군와 구진(九眞 : 끄우 쩐)군에 파견했던 관리들은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선물과 호적을 들고 나와서 항복했다. 이들은 그 공로로 각각 교지와 구진의 태수에 임명되어 이전의 지위를 유지했고, 낙장(?將 : 락장)과 낙후(?侯 : 락후)들도 전과 다름없이 자기 영내의 주민들을 다스렸다. 구맥(?? : 어우 락)의 지배층 가운데 한의 침략에 저항한 세력이 있긴 했지만, 그 수가 적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한나라는 남월을 멸망시킨 그해(B.C. 111년) 남월의 판도 내에 7개 군을 설치하고 각 군 아래에 현을 두었다. 이는 그들이 우리 한반도 북부에 낙랑 진번 임둔 세 군을 두었던 해(B.C. 108년)로부터 3년 전의 일이다. 7개 군중 남해(南海 : 난하이) 창오(蒼梧 : 창우) 욱림(郁林 : 위린) 합포(合浦 : 허푸)는 오늘날의 광둥성과 광시성에 위치했으며, 교지와 구진 및 일남(日南 : 녓 남) 세 군은 베트남에 설치되었다.
베트남 내의 세 군 중 교지군은 홍강(紅江) 델타의 중앙에서부터 북부를 아우르며 10개현을 관할했으며, 구진군은 델타의 남부, 곧 지금의 타인 호아를 중심으로 하여 7개현으로 되어 있었다. 일남군은 오늘날 중부 베트남의 북쪽 지역으로 5개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교지군은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군이었으며, 호구 수도 제일 많았다. 당시보다 100년이 지난 조사이긴 하지만 서기 2년의 교지군의 호구 수는 각각 9만 2240호와 74만 6237인으로 구진의 3만 5743호, 16만 6013인이나 일남의 1만 5460호, 6만 9485인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한나라는 7개 군을 설치한 이듬해, 해남도(海南島 : 하이난섬)에 담이(?耳 : 단얼)과 주애(珠崖 : 주야) 2개 군을 증설하고 이들 9개 군으로 교지자사부(交趾刺史部, 교지는 203년에 교주[交州 : 쟈오 쩌우]로 개칭됨)를 구성하여 자사가 통괄케 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행정력이 이들 남방 군현까지 두루 미친 것은 아니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남월 때와 마찬가지로 토착 지배층 - 낙장과 낙후 -를 통제하고, 각 현은 낙장과 낙후가 다스렸다. 토착 지배층은 한나라의 통제를 받긴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독자적으로 주민을 다스리며 한나라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남방의 특산물을 조공으로 바칠 뿐이다.
한나라 무제가 남월을 정복하고 베트남 북부까지 진출한 목적은 자국 변방의 안정과 남방 물산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진나라 시황제 때는 남방의 물소 뿔, 상아, 비취, 진주, 루비 등을 얻기 위해 50만의 대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당시 번우(지금의 광저우)에서 북부 베트남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중국 북부에서 나지 않는 많은 진귀한 것들이 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여러 특산물들이 집산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나라 조정이 파견한 관리의 주요 임무는 이들 남방 물산을 확보하는데 있었고, 현지 사회에 대한 지배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나라의 이와 같은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기 9년 왕망(王莽)에 의한 왕위 찬탈로 중국 본토가 혼란에 빠지자, 당시 교지자사로 있던 등양(鄧讓 : 덩랑)은 왕망의 권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북쪽 변경을 폐쇄하고 남쪽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 무렵 적잖은 한나라의 관리와 지식인들이 난을 피하여 남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중국의 교양인으로 현지 중국인 관리들의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현지의 관리들도 종래의 방임주의에서 탈피하여 한층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를 이식하려 애썼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석광(錫光 : 시광)과 임연(任延 : 런옌)이였다.
석광은 전한(前漢) 평제(平帝 1년 ~ 5년) 때 교지태수로 부임했고, 임연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25년 ~ 56년) 때 구진태수로 임명되었는데, 후일의 중국 역사가들이 “영남의 중국적 풍속은 두 태수 때로부터 비롯된다”라고 평해졌을 정도로 중국 문물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임연은 화전과 어로, 수렵으로 살아가던 구진의 주민들에게 소를 이용한 농경법과 철제 농구 사용법을 가르쳐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되도록 했다. 한편 그는 당시까지 행해져 오던 일종의 군혼(群婚)같은 혼인 풍습을 중국식 부계제도로 고쳐 통치의 편의를 도모했다. 20세에서 50세까지의 남자와 15세부터 40세까지의 여자를 연령에 따라 짝을 지어 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결혼비용도 부조해주었다.
석광과 임연 등이 행한 통치정책은 새로운 행정조직이나 이질적인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종래의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것으로, 토착 지배계급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다음에 서술하는 토착 지배계층의 저항은 이런 동화정책에 대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자기 방어였다. 반란이 일어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중국 관리들의 착취였다. 베트남은 중국의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기후로 많이 달랐기 때문에, 파견되어 오는 관리는 대부분 천박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임지에 머무르는 동안 오로지 주민을 착취하여 사복을 채우는 데만 몰두했고, 그래서 살기 힘들어진 주민들의 불만이 커져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2. 중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
징씨 자매의 봉기
후한이 건국된 후 등양과 석광은 왕망에 저항한 공로로 작위를 받고 교지를 떠났으며, 임연도 곧 중원으로 돌아갔다. 석광의 뒤를 이어 새로 교지태수로 부임한 소정(蘇定 : 쑤딩)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웠다. 이미 중국 통치에 불만이 많았던 토착사회는 소정의 착취와 지배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고, 마침내 징측(徵側 : 쯩 짝)과 징이(徵貳 : 쯩 니) 두 자매가 중국 지배에 대항하여 베트남인 최초로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징측은 교지군 미랭현(?冷: 메 린, 오늘날 푸 토성의 비엣 찌 부근)의 한 낙장의 딸로 같은 군내의 주연(朱鳶 : 쭈 찌엔, 지금의 썬 떠이)에 사는 낙장 시삭(詩索 : 티 싸익)에게 시집갔다. 태수 소정은 늘 베트남 불만세력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차에 이 혼인을, 저항을 위한 세력 규합으로 보고 시삭을 체포해서 한나라 법에 의거해 처형했다. 평소 성격이 괄괄하고 총명했던 징측은 동생 징이와 함께 남편을 죽인 소정에게 복수하기 위해 교지 중심부를 공격했고, 소정은 남해군으로 도주했다.(40년) 중국인 관리들이 점차 직접 통치를 해나가자 자신의 권위가 위태롭게 된 토착 지배계급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면적으로 들고 일어나 징측의 세력은 순식간에 65개성으로 확대되었다. 징측은 이처럼 성공을 거두자 미랭현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교지군와 구진군의 주민들에게는 향후 2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소정이 한나라 법에 따라 시삭을 체포했다는 사실은 한나라의 지배 권력에 의해 토착 지배계층의 세력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음을 방증해 준다. 한편 이들 토착세력이 여성을 지도자로 받들고 그를 중심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권위가 강했던 모계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징측은 출가한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동생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고, 또 저항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왕이라 칭하고 도읍을 친정이 있는 미랭현 지방에 둔 것도 친정과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남성의 권위에 예속되지 않고 상당히 독립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징 짝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그녀를 도와준 지도급 인물들 중에는 여성*이 꽤 많이 있었다. 오늘날 징측을 모시는 핫 몬 마을의 사당에서는 이들을 기려 매년 2월 6일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큰 제사를 지낸다.
* 먼저 타인 티엔 부인을 들 수 있다. 그녀는 합포군에서 랑 박으로 진격해 오는 마원의 부대를 중도에서 급습했다. 그 밖에도 밧 난, 레 쩐 부인 등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마원의 원정
징씨 자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후한 광무제는 이듬해 마원(馬援 : 마위안)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약 3만의 병력을 주고 남방으로 진군하게 했다. 마원의 군대는 합포를 출발하여 육로로 홍강 델타의 중심부까지 진격했는데, 고라성(古螺 : 꼬 로아 성) 부근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막강한 원정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여러 성은 원정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의 열성이 급격히 식으면서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고라성 부근에서 한 차례 저항에 부딪친 마원의 군대는 한때 고라성의 동쪽 낭박(浪泊)으로 후퇴했다. 낭박에서 보급품을 지원받고 새로 전열을 가다듬은 마원은 42년 낭박에서 징측의 군과 접전하여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마침내 이들을 대파하고, 미랭현의 딴 비엔 산으로 도피하는 징씨 자매를 추격했다. 징씨 자매는 이후 1년 동안 산발적으로 마원 군대에 저항했으나 군사력에 밀려 거듭 패배했다. 이듬해(43년) 정월 마원은 징씨 자매를 사로잡아 사형에 처하고 델타 지방에 한의 권위를 다시 확고히 세웠다.
베트남의 전설에는, 징측과 징이 두 자매가 마원에게 처형된 것이 아니라 딴 비엔 산 근처 핫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뒷날의 역사가와 군주들은 물론 오늘날 베트남인까지도 두 자매를 중국의 지배에 항거한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 도시들에는 거의 하이바 징이라는 거리가 있을 정도다.
델타 지방을 평정한 마위안은 구진군의 징씨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예안(乂安 : 응에 안) 지방까지 쳐들어갔다. 마침내 교지와 구진의 두 군을 완전히 평정한 마원은 44년 봄 낙양으로 개선할 때까지 한나라의 통치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는 우선 가는 곳마다 군현의 성곽을 보수하고, 농민을 위해 관개수로를 만들었다. 수리시설을 정비한 것은 종래 낙장이 가졌던 관개수리권을 중국의 군현관이 직접 장악하려는 조치였다. 다음으로 마원은 반란의 중심지였던 서우(西于 : 떠이 부)현이 다른 현들에 비해 지역이 넓고 인구가 너무 많고 현청과 멀리 떨어져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퐁 케와 봉 하이 등 두 현으로 분할했다. 고라성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 서우현은 안양왕(安陽王 :안 즈엉 부엉) 이래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로 징씨 자매의 반란의 근거지였던 미랭, 주연 두 현에 인접해 있었다. 일대 격전이 벌어졌던 낭박도 서우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마원의 서우현 분할을 한편으로 행정의 편의뿐만 아니라 서우현의 토착세력을 분열시키려는 획책이었던 것이다. 마원은 군현제도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 동안 현의 통치제도였던 낙장 낙후제를 폐지했다. 낙장 낙후제는 현지민을 지배하는 데는 용이하긴 했지만 언제든 중국 지배에 저항하는 지도세력으로 바뀔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한은 3군 56개현에 중국인 관리를 파견했고 병력도 주둔시켰다. 마원은 또한 한의 법률과 토착민의 고유법 사이에 상충되는 10여 조를 낙양의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베트남인들에게는 반란 이전에 시행되었던 중국 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엄령을 내렸다.
마원의 원정과 그에 뒤따른 개혁은 베트남의 역사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의 토착 지배계급이었던 낙장과 낙후의 이름이 사라지고, 이들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중국 관리와 이주자 및 이들과 현지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후한은 종전과 달리 베트남을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여 보다 적극적인 직접 지배로 이행하면서, 토착 풍습과 관심을 타파하고 새로운 후한의 법률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후한이 점차 쇠락하면서 베트남의 토착세력이 후한의 통치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후한 말 베트남인의 반란
후한이 지배하는 동안 베트남에 부임해 오는 관리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이른바 양리(良吏)로, 명제(明帝 58년 ~ 75년) 때 일남군과 구진군의 태수를 지난 이선(李善 : 리산) 같이 덕으로써 주민을 다스리고 토착민의 고유한 관습을 인정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관리는 드문 경우였고, 대부분은 이선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교지태수를 지낸 장회(張恢 : 장후이)처럼 법을 악용하여 사복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이었다. 심지어 어떤 중앙의 가난한 관리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지자사를 청원하여 임명되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후한 조정이 현지의 관리를 제대로 통제하기도 어려웠고, 한편 어느 정도의 부패는 암묵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당시 남방에 부임해 오는 후한의 관리는 도착하자마자 부를 축척하기에 바빴고, 그것을 이용하여 중앙의 관리에게 환심을 사서 중국 본국으로의 전출을 꾀했다. 한편 중국인 이주자들도 관리와 결탁하여 베트남인들로부터 남해 물산을 가로채 막대한 부를 쌓아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는데,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 북부 베트남 각지에서 발견되는 한나라 때의 전묘(?墓)이다.
당시는 후한의 전성기로 후한의 권위가 토착사회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여 서기 1세기 말까지는 비교적 잠잠했다. 그러나 후한이 정치적 부패와 혼란으로 쇠락해 가자 반란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영원(永元) 12년(100년)에 일남군의 상주(象州 : 뜨엉 럼)현 주민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약탈하고 불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37년 뒤인 영화(永和) 2년(137년)에도 상주현의 원주민인 구련(區憐 : 쿠 리엔) 등 1천여 명이 현청 소재지를 공격하고 관리를 살해했다. 일남군의 남단인 상주현은 그 이남에 거주하는 참족과의 경계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구련은 참족의 지도자였던 듯하다.
이것은 베트남인과 인종도 문화도 다른 참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인의 문헌에는 이들이 세운 나라를 처음에는 임읍(林邑 : 럽 업), 나중에는 점파(占婆 : 참파)로 부르고 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교지군와 구진군의 병사들이 동원되었으나 이들 병사들이 오히려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후한 조정은 무력으로 다스리기보다 한편으로는 위엄을 보이고 다른 한편은 은혜를 베풀어 사태를 겨우 수습했다. 그러나 일남군의 주민들은 6년 뒤(144년) 다시 현청 소재지를 점령했고, 여기에 고무된 구진군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 후 157년에는 구진군의 거풍(居風 : Rm 퐁)현에서 주달(朱達 : 쭈 닷) 등의 현령의 지나친 수탈로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켜 현령을 살해했다. 후한 조정은 한때 원정군의 파견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불안한 내정으로 출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당시 명망이 높은 두 관리를 파견하여 위무책을 써서 난을 진정시켰다.
홍강 델타의 주변에서 일어나던 반란은 결국 그 중심부에까지 번져 178년에는 교지군와 합포군의 토착민이 난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점차 구진군과 일남군으로 번져 갔고 마침내 교지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반란세력은 수만 명 이상이었으며 주모자는 이주한인(移住漢人)이었다. 곧이어, 남해군의 태수도 여기에 가담했다. 조정에서는 181년 주준(朱儁 : 주쥔)을 교지자사에 기용했는데, 그는 한편으로는 무력을 사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달래며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고, 3년 뒤인 184년에 교지의 주둔병이 반란을 일으켜 자사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임해 오는 자사들은 대부분 남방의 진귀한 물산들을 중간에서 가로채 사복만을 채웠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후한 조정에서는 다시 현지민을 달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고 가종(賈琮 : 자충)을 교지 자사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케 했다. 교지에 도착한 가종은 반란의 원인을 파악하여, 주민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세금을 줄여주고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여 군현을 배치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그의 선정을 칭송하여 “가부(賈父 : 자푸)가 늦게 와 우리가 전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제는 살기가 편안하니 다시는 반(反)하지 않겠노라”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가종은 3년 후 영전되어 중원으로 돌아가고, 그의 뒤를 이어 교지 출신의 이진(李進 : 리진)이 자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진은 이주해 온 한인이었지만, 교지 출신으로 자사가 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임명되자 곧 상소를 올려 교지 출신자들도 차별하지 말고 중앙의 관리로 등용해 줄 것을 요청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많은 반란은 이른바 ‘만이(蠻夷)’라든가 ‘이민(吏民)’이라고 불리는 베트남인들이 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이주한인 지배계층도 가세하고 있다. 178년 교지군와 합포군에서 발생한 반란을 살펴보면, 반란의 주동자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주한인이고 여기에 남해군의 태수도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1세기부터 2세기에 걸쳐 베트남은 북방에서 오는 한인 이주민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농업생산이 향상되었고, 호구 수도 뚜렷이 증가했다.(아래 도표 참고) 결국 2세기에 일어난 반란들은 후한의 과중한 수탈로 인한 일반 주민의 저항의식에 새로운 지배계층의 지도력이 결합하여 나타난 조직적인 항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반란에 대하여 이미 대내적으로 통제력이 약화되어 내리막길에 접어든 후한은 마원의 원정과 같은 적극적이고도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건이 터지면 그저 한두 사람의 우수한 관리를 현지에 파견하여 그의 역량에 의지하는 소극적이며 고식적인 정책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종과 같은 인물이 나타나 원인을 규명하여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예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한 개인의 치적일 뿐이었고, 일관되게 이어진 바는 아니었다. 따라서 후한 조정의 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 독자적인 토착사회를 형성하려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교지 3군의 호구수
(1) 교지군
1) A.D. 2년
호(戶) : 92440
구(口) : 746237
2) A.D. 140년
호(戶) : -
구(口) : -
(2) 구진군
1) A.D. 2년
호(戶) : 35743
구(口) : 166013
2) A.D. 140년
호(戶) : 46513
구(口) : 209894
(3) 일남군
1) A.D. 2년
호(戶) : 15460
구(口) : 69485
2) A.D. 140년
호(戶) : 18263
구(口) : 100676
3. 중국의 분열과 베트남
사섭(士燮 : 스셰)
후한 말 중국 본토가 환관의 권력 남용. 황건적의 난, 군웅할거 등으로 한참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무렵. 교지 지방은 오히려 전보다도 더 평온했다. 이런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지태수로 있던 사섭(士燮), 베트남어 발음은 씨 니엡)의 통치력 덕분이었다.
사섭의 조상은(137년 ~ 226년) 본래 지금의 산둥성 영양(寧陽 : 닝양) 출신으로 왕망의 시대에 광시성의 창오(蒼梧)로 피난하여 정착해 살았다. 사섭은 이주 중국계 지배계층의 전형적인 경우인데, 6대째인 사사(士賜 : 스츠)는 환제(桓帝 147년 ~ 167년)때 일남태수로 임명되었다. 사사의 아들인 사섭은 청년시절 낙양에 가서 유자기(劉子奇 : 류쯔치) 밑에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배웠다. 곧 이어 그는 추천을 받아 관직에 입문하여 상서랑과 쓰촨 동부의 우(巫)현의 현령을 거쳐 교지태수가 되었다. 교지태수가 된 것은 가종의 천거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가종의 뒤를 이어 교지자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주부(朱符 : 주푸, 주쥔의 아들) 라는 인물이 있었다. 주부는 전횡을 일삼아 참다못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는 살해되고 말았다.(196년) 이리하여 교지가 일시 혼란상태에 빠지자 사섭은 그 질서유지를 구실로 세 명의 동생 사일(士壹 : 스이), 사유(士? : 스웨이), 사무(士武 : 스우)를 각각 합포, 구진, 남해태수로 임명하고 후한 조정의 형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한편 후한 조정은 주부가 횡사하자 장진(張津)을 교주(交州 : 쟈오 쩌우, A.D 203년 교지 자사부는 교주자사부로 바뀌고 교지는 그 아래 하나의 군[郡]으로 되었음)자사에 임명했다. 장진은 곧 북쪽에 인접해 있던 형주(荊州 : 징저우) 목(牧) 유표(劉表 : 류바오)와 대립했는데, 이는 후한이 극도로 분열되자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 중앙의 강력한 세력과 관계를 맺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자 위함이었다. 그 와중에 장진이 자기 부하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유표는 이에 일방적으로 자기의 부하 뇌공(賴恭 : 라이궁)과 오거(吳巨 : 우쥐)를 각각 교주자사와 창오태수로 임명했다.
조조(曹操 : 차오차오)가 권력을 쥐고 있던 중앙의 조정은 사섭을 수남중랑장(綏南中郞將)으로 임명하여 교주 소속의 모든 군을 다스리게 하였다. 사섭은 임명을 수락하고 중앙 조정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다가 강남에서 손권(孫權 : 쑨취안)의 세력이 강해지자 곧 대북정책을 바꾸어 그와 손을 잡았다. 210년 손권이 보즐(步? : 부즈)를 보내 교주를 통괄하게 했을 때. 사씨 형제는 보즐을 맞이하여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협력했다. 오(吳) 조정은 사섭을 장군에 봉했고, 이로써 교주는 오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복속은 명목일 뿐 교주의 실권을 사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갈량(諸葛亮 : 주궈량)이 맹획(孟獲 : 멍훠)을 칠종칠금(七縱七擒) 하였다는 지역을 베트남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 지역은 후한 때 영창(永昌 : 잉창)군이 있던 지금의 원난성 서쪽 지방으로 미얀마의 동북 변경과 가까운 곳이다. 베트남은 당시 오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촉(蜀)과는 정치적 관계가 없었다.
222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사섭은 다시 장남인 사흠(士? : 스친)을 오의 수도에 인질로 보내,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해 보였다. 한편 오와 촉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 때는 익주(益州 : 이저우)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오에 복종시키기까지 함으로써 손권의 환심을 사. 사섭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작위를 받았다. 사섭은 이후 거의 매년 사신을 오에 보내 남해의 여러 가지 진귀한 산물-향료, 진주, 조개, 유리, 비취, 코끼리, 과일, 약재-을 바쳤다. 이런 다양한 공물은 손권에게 주요 재원이 되었으며, 사씨 일가가 교주에서 전과 변함없이 지위를 누릴 수 있게끔 해주었다.
오와의 우호 관계가 사섭을 외부의 위협에서 보호해 주기도 하였지만, 그가 대내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토착사회의 지지였다. 사섭은 처음 한인 관리로서 교지에 파견되었지만 그때까지 부임해 왔던 다른 관리들과는 달랐다. 이전의 관리들은 부임하자마자 토착 주민을 착취하여,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였고, 또 이를 이용하여 다른 지역으로 승진해 가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고, 현지 사회와는 아무런 유대관계도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섭은 이들과 달리 그 조상이 남방에 이주하여 여러 대에 걸쳐 살면서 일궈놓은 생활기반이 있던 사람이다. 그는 토착사회와 밀착되어 있었고 또 현지 주민들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섭의 지배 아래 교지가 이처럼 살기 좋아지자. 전란에 시달리던 중국인들이 난을 피하여 남하 하였다. 더욱이 사섭은 학문을 애호하고, 학자를 후대했기 때문에 적잖은 수의 학자들이 그의 보호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유희(劉熙 : 류시), 허정(許靖 : 쉬징), 원휘(袁徽 : 위안후이) 등과 같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토착사회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고, 주민들을 차디찬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베트남인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하는 설종(薛綜 : 쉐쭝)조차 이곳 사람들은 금수와 같아서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중국 지방관을 두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중국인 유학자들은 삼국이 정립되면서 중국 대륙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자 대부분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이 베트남 사회에 전혀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전근대 베트남 역사가들은 사섭 시기에 유교가 베트남에 들어오는 단초가 되었다고 본다.
사섭이 개인적으로 학자들을 후대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중국 문물을 베트남에 이식하는데 그리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사섭 시대에 불교가 발달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사실 사섭은 유교적 소양을 쌓은 사람이었지만, 불교도 장려하여 그가 출입할 때는 항상 호승(胡僧). 곧 인도승 수십 명이 향을 피우며 그의 수레를 따랐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중국과 인도 두 문화 중 어느 하나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고 고루 수용했던 것이다. 이런 성향 역시 중국 문화가 베트남에 깊이 침투할 수 없었던 중요한 까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전례
교지의 불교는 애당초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승려들이 들여왔고, 그리고 얼마 후 남중국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교지에는 인도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많은 승려들이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강거(康居 : 소그디아나)의 승려 강승회(康僧會 : 캉썽후이)는 교지에서 많은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으며, 나중에는 오의 수도 건업(建業 : 젠예)로 가서 247년에는 손권을 불교에 귀의시켰다. 그때까지 남중국에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강승회는 오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승려이다. 월지(月氏)의 지강량(支畺良, 또는 彊梁婁至 : 칼리아나루치)라는 승려도 교지에서 불경을 한역하는 일을 했는데, 강승회보다는 약간 후대의 인물이다. 지강량과 같은 시기의 승려로는 천축(天竺, 곧 북인도)의 휘라자성(麾羅者城 : 자바카)가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에서 배로 부남(扶南, 현재의 캄보디아)에 도착한 후 교지와 광저우를 거쳐 3세기 말 낙양에 도착했다.
4. 육조시대의 베트남
오(吳)와의 관계
사섭이 교지의 태수로 40여 년간 재임한 후 병사하자, 손권은 이를 기회로 사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교지를 직접 지배 하에 두려 했다. 그는 우선 교지를 둘로 나누어 합포군 이북은 광주로, 합포군 이남은 교주로 명명했다. 광주자사는 여대(呂岱 : 뤼다이)를 교주자사에는 대량(戴良 : 다이랑)을, 그리고 교지태수에는 진시(陣時 : 쳔스)를 임명했다. 한편 사섭의 아들 사휘(士徽 : 스후이)는 구진태수로 삼았는데 구진군은 아직 사유가 태수로 있던 곳이었다. 손권의 이러한 조치들은 사씨의 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사휘는 자칭 교지태수가 되어 새로운 자사와 태수의 임명을 부정했다. 이에 환(桓 : 호안)씨로 대표되는 토착세력은 교지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우려하여 사휘에게 신임 관리들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종용했다가 사휘의 분노를 샀고, 양측은 드디어 무력충돌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교지를 완전히 장악하려고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합포태수 사일의 아들인 사광(士匡 : 스쾅)을 보내 사휘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사휘는 권고를 받아들여 형제들과 함께 항복했는데, 여대는 오히려 사휘의 목을 베고 다른 형제들을 조정에 압송하여 죄를 물었다. 뒤이어 반항하는 환씨도 제압하여 교지를 평정했다. 그러고는 다시 구진 지방으로 진격하여 수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남아 있는 사씨 일가를 몰살했다. 이렇게 교지를 평정한 공로로 여대는 안남장군(安南將軍)에 봉해졌다.
남방을 완전히 평정한 오나라는 교주와 광주를 다시 통합하여 전과 같이 하나의 교주로 하고 여대를 자사에 임명했다. 여대는 교주자사로서 곧 주응(朱應: 주잉)과 강태(康泰 : 캉다이)를 포 남에 보내 동남아시아 각국에 오나라의 세력을 과시하면서 교주와의 무역을 장려했다. 두 사람은 돌아와서 주응은 『부남이물지(扶南異物志)』를, 강태는 『부남토속(扶南土俗)』과 『오시외국전(吳時外國傳)』을 저술했다. 이들 책은 오늘 날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책들에 간간이 그 내용이 인용되고 있을 뿐이지만, 당시 동남아시아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들이다.
231년 여대는 다른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나라 조정으로 소환되었는데, 그가 교주에 있는 동안 오나라의 이익만 너무 추구하여 베트남인들의 저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구진 지방의 정복도 일시적인 성공이었을 뿐, 오나라의 세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린 것은 아니었다. 248년 교주의 구진에서 변란이 일어나 여러 성이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오나라는 육윤(陸胤 : 루인)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토록 했는데 그는 무력과 설득을 통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258년에 또 구진 지방에서 난이 일어났다. 이때의 지도자는 조교(趙嬌: 찌에우 끼에우)라는 농공(農貢 : 농 꽁, 지금의 타인 호아 성 소재)현 출신의 젊은 여인으로, 그녀는 수개월 동안 항거했지만 실패하자 자살했다. 조교의 이야기*는 징씨 자매의 이야기처럼 훗날 베트남의 역사책에서 전설화되어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다.
*조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오빠 찌에우 꾸옥 닷과 단 둘이 살았다.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오빠가 장가를 들었는데, 올케의 구박이 하도 심하여 홧김에 올케를 죽이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당시 중국인 관리의 착취에 시달리던 구진 주민들이 오빠 찌에우 꾸옥 닷의 주동 아래 반란을 일으키자 조교는 장정 1천 명을 끌어 모아 오나라의 진압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수적 열세로 인해 타인 호안 성 미 호아 현의 보 디엔 마을까지 쫒기다 막다른 길에 몰려 자결했다. 당시 그녀는 한창 꽃필 나이인 스물세 살이었다.
조교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교주에는 또 다른 소요가 잇달아 발생했다. 263년 교지태수로 부임한 손서(孫?: 쑨취)는 욕심이 끝이 없는데다 중앙정부의 요구도 과다하여 악정과 착취를 일삼았는데 사람들의 원성이 드높았다. 교지의 토착관리 여흥(呂興 : 르 흥)이 불만을 품고 주민들과 합세하여 태수를 죽이고 위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구진군과 일남군도 이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에 위나라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베트남의 지배를 실현하려고 여흥으로 하여금 교주에서의 군사를 총괄케 하는 한편 따로 자사와 태수를 파견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곧 멸망하여 진(晉)나라가 이를 계승하자 교주는 자연히 진에 귀속하게 되었다.
한편 오나라는 여흥이 교지태수를 살해했을 때 북변에서 촉나라를 멸한 위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주에서 다시 광주를 분리시키는(264년) 자구책을 강구했을 뿐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68년 군대를 보내 3년 만에 교주를 정복하고 도황(陶璜 : 타오황)을 자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얼마 후 오나라가 진나라에 병합되자(280년), 도황은 진나라에 항복했고 자사를 그대로 유임했다. 그는 민심의 동향을 정확히 읽고 통치를 한 자사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기꺼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도황이 떠나고 그의 후임자들이 오고부터 교주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진나라는 이때 8왕의 난(292년 ~ 306년)이 일어나 중앙권력이 약회되고 지방에서 관리들이 이권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고 이민족들이 일어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의 종실에 의해 동진(東晋)이 강남에서 중흥하기는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의 교주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 참족의 임읍(참파)이 교주의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다.
1. 한의 베트남 정복
조타(趙? : 찌에우 다)의 통치하에서 유지되었던 남월(南越 : 남 비엣)과 한나라 사이의 균형은 그가 사망하자 곧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타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그의 손자 호(胡, 곧 문왕[文王 : 반 브엉])는 아주 유약하고 통솔력이 부족했던 인물로 즉위 이듬해(B.C. 135년)에 민월이 쳐들어오자 응전도 해보지 않고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한나라는 왕회(王恢 : 왕후이)와 한안국(韓安國 : 한안궈)을 파견했다. 민월을 평정한 한나라는 장조(莊助 : 좡주)를 남월에 보내어 문왕에게 친조(親朝)를 명하니 문왕은 장자 영제(?齊 : 아인 떼, 곧 명왕[明王 : 민 브엉])를 대신 보냈다. 영제는 즉위하기까지 10여 년간 한나라의 장안(지금의 시안[西安])에 볼모로 잡혀 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가 호에게 내린 칭호는 번속국의 왕이었는데, 이는 이후 양국관계를 규정짓는 전형이 되었다.
기원전 125년 문왕이 사망하자 영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베트남에 부인이 있는데도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규(? : 주)씨라는 중국 여인과 결혼을 하여 아들 흥(興)을 낳았다. 영제는 즉위하자 규씨를 왕후로, 흥을 태자로 삼았다. 아인 떼의 사후에는 흥, 즉 애왕(哀王 : 아이 브엉)이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황태후 규씨가 섭정을 했다.
무제(武帝) 치하에 있었던 한나라는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남월 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규씨의 옛 연인이었던 소이(少李 : 사오지)라는 자를 사절로 파견했다. 친한적인 규씨와 소이는 결탁하여 한나라의 법률을 시행하는 한편 왕에게는 한나라에 입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은 승상 여가(呂嘉 : 르 쟈)가 중심이 된 토착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남월의 조정이 이처럼 친한파와 반한파로 나뉘어 대립하자 한나라는 친한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다. 여가는 마침내 반기를 들고 왕과 황태후 규씨와 소이를 죽이고 왕의 이복형이자 자신의 사위인 건덕(建德 : 끼엔 득)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남월의 마지막 왕 술양왕(術陽王 : 투엇 즈엉 브엉)이다.
이에 한나라의 무제는 장군 노박덕(路博德 : 루보더)와 양복(楊僕 : 양푸) 등을 남월에 보내 수도 번우(番寓 : 판위, 지금의 광주[廣州 : 광저우])를 점령케 하니, 남월은 얼마 못 가 멸망했다.(B.C. 111년) 노박덕의 군대는 더 나아가 교지(交趾 : 쟈오 찌) 지방에까지 진격했는데, 남월이 교지군와 구진(九眞 : 끄우 쩐)군에 파견했던 관리들은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선물과 호적을 들고 나와서 항복했다. 이들은 그 공로로 각각 교지와 구진의 태수에 임명되어 이전의 지위를 유지했고, 낙장(?將 : 락장)과 낙후(?侯 : 락후)들도 전과 다름없이 자기 영내의 주민들을 다스렸다. 구맥(?? : 어우 락)의 지배층 가운데 한의 침략에 저항한 세력이 있긴 했지만, 그 수가 적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한나라는 남월을 멸망시킨 그해(B.C. 111년) 남월의 판도 내에 7개 군을 설치하고 각 군 아래에 현을 두었다. 이는 그들이 우리 한반도 북부에 낙랑 진번 임둔 세 군을 두었던 해(B.C. 108년)로부터 3년 전의 일이다. 7개 군중 남해(南海 : 난하이) 창오(蒼梧 : 창우) 욱림(郁林 : 위린) 합포(合浦 : 허푸)는 오늘날의 광둥성과 광시성에 위치했으며, 교지와 구진 및 일남(日南 : 녓 남) 세 군은 베트남에 설치되었다.
베트남 내의 세 군 중 교지군은 홍강(紅江) 델타의 중앙에서부터 북부를 아우르며 10개현을 관할했으며, 구진군은 델타의 남부, 곧 지금의 타인 호아를 중심으로 하여 7개현으로 되어 있었다. 일남군은 오늘날 중부 베트남의 북쪽 지역으로 5개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교지군은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군이었으며, 호구 수도 제일 많았다. 당시보다 100년이 지난 조사이긴 하지만 서기 2년의 교지군의 호구 수는 각각 9만 2240호와 74만 6237인으로 구진의 3만 5743호, 16만 6013인이나 일남의 1만 5460호, 6만 9485인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한나라는 7개 군을 설치한 이듬해, 해남도(海南島 : 하이난섬)에 담이(?耳 : 단얼)과 주애(珠崖 : 주야) 2개 군을 증설하고 이들 9개 군으로 교지자사부(交趾刺史部, 교지는 203년에 교주[交州 : 쟈오 쩌우]로 개칭됨)를 구성하여 자사가 통괄케 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행정력이 이들 남방 군현까지 두루 미친 것은 아니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남월 때와 마찬가지로 토착 지배층 - 낙장과 낙후 -를 통제하고, 각 현은 낙장과 낙후가 다스렸다. 토착 지배층은 한나라의 통제를 받긴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독자적으로 주민을 다스리며 한나라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남방의 특산물을 조공으로 바칠 뿐이다.
한나라 무제가 남월을 정복하고 베트남 북부까지 진출한 목적은 자국 변방의 안정과 남방 물산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진나라 시황제 때는 남방의 물소 뿔, 상아, 비취, 진주, 루비 등을 얻기 위해 50만의 대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당시 번우(지금의 광저우)에서 북부 베트남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중국 북부에서 나지 않는 많은 진귀한 것들이 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여러 특산물들이 집산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나라 조정이 파견한 관리의 주요 임무는 이들 남방 물산을 확보하는데 있었고, 현지 사회에 대한 지배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나라의 이와 같은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기 9년 왕망(王莽)에 의한 왕위 찬탈로 중국 본토가 혼란에 빠지자, 당시 교지자사로 있던 등양(鄧讓 : 덩랑)은 왕망의 권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북쪽 변경을 폐쇄하고 남쪽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 무렵 적잖은 한나라의 관리와 지식인들이 난을 피하여 남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중국의 교양인으로 현지 중국인 관리들의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현지의 관리들도 종래의 방임주의에서 탈피하여 한층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를 이식하려 애썼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석광(錫光 : 시광)과 임연(任延 : 런옌)이였다.
석광은 전한(前漢) 평제(平帝 1년 ~ 5년) 때 교지태수로 부임했고, 임연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25년 ~ 56년) 때 구진태수로 임명되었는데, 후일의 중국 역사가들이 “영남의 중국적 풍속은 두 태수 때로부터 비롯된다”라고 평해졌을 정도로 중국 문물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임연은 화전과 어로, 수렵으로 살아가던 구진의 주민들에게 소를 이용한 농경법과 철제 농구 사용법을 가르쳐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되도록 했다. 한편 그는 당시까지 행해져 오던 일종의 군혼(群婚)같은 혼인 풍습을 중국식 부계제도로 고쳐 통치의 편의를 도모했다. 20세에서 50세까지의 남자와 15세부터 40세까지의 여자를 연령에 따라 짝을 지어 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결혼비용도 부조해주었다.
석광과 임연 등이 행한 통치정책은 새로운 행정조직이나 이질적인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종래의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것으로, 토착 지배계급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다음에 서술하는 토착 지배계층의 저항은 이런 동화정책에 대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자기 방어였다. 반란이 일어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중국 관리들의 착취였다. 베트남은 중국의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기후로 많이 달랐기 때문에, 파견되어 오는 관리는 대부분 천박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임지에 머무르는 동안 오로지 주민을 착취하여 사복을 채우는 데만 몰두했고, 그래서 살기 힘들어진 주민들의 불만이 커져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2. 중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
징씨 자매의 봉기
후한이 건국된 후 등양과 석광은 왕망에 저항한 공로로 작위를 받고 교지를 떠났으며, 임연도 곧 중원으로 돌아갔다. 석광의 뒤를 이어 새로 교지태수로 부임한 소정(蘇定 : 쑤딩)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웠다. 이미 중국 통치에 불만이 많았던 토착사회는 소정의 착취와 지배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고, 마침내 징측(徵側 : 쯩 짝)과 징이(徵貳 : 쯩 니) 두 자매가 중국 지배에 대항하여 베트남인 최초로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징측은 교지군 미랭현(?冷: 메 린, 오늘날 푸 토성의 비엣 찌 부근)의 한 낙장의 딸로 같은 군내의 주연(朱鳶 : 쭈 찌엔, 지금의 썬 떠이)에 사는 낙장 시삭(詩索 : 티 싸익)에게 시집갔다. 태수 소정은 늘 베트남 불만세력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차에 이 혼인을, 저항을 위한 세력 규합으로 보고 시삭을 체포해서 한나라 법에 의거해 처형했다. 평소 성격이 괄괄하고 총명했던 징측은 동생 징이와 함께 남편을 죽인 소정에게 복수하기 위해 교지 중심부를 공격했고, 소정은 남해군으로 도주했다.(40년) 중국인 관리들이 점차 직접 통치를 해나가자 자신의 권위가 위태롭게 된 토착 지배계급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면적으로 들고 일어나 징측의 세력은 순식간에 65개성으로 확대되었다. 징측은 이처럼 성공을 거두자 미랭현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교지군와 구진군의 주민들에게는 향후 2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소정이 한나라 법에 따라 시삭을 체포했다는 사실은 한나라의 지배 권력에 의해 토착 지배계층의 세력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음을 방증해 준다. 한편 이들 토착세력이 여성을 지도자로 받들고 그를 중심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권위가 강했던 모계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징측은 출가한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동생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고, 또 저항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왕이라 칭하고 도읍을 친정이 있는 미랭현 지방에 둔 것도 친정과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남성의 권위에 예속되지 않고 상당히 독립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징 짝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그녀를 도와준 지도급 인물들 중에는 여성*이 꽤 많이 있었다. 오늘날 징측을 모시는 핫 몬 마을의 사당에서는 이들을 기려 매년 2월 6일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큰 제사를 지낸다.
* 먼저 타인 티엔 부인을 들 수 있다. 그녀는 합포군에서 랑 박으로 진격해 오는 마원의 부대를 중도에서 급습했다. 그 밖에도 밧 난, 레 쩐 부인 등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마원의 원정
징씨 자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후한 광무제는 이듬해 마원(馬援 : 마위안)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약 3만의 병력을 주고 남방으로 진군하게 했다. 마원의 군대는 합포를 출발하여 육로로 홍강 델타의 중심부까지 진격했는데, 고라성(古螺 : 꼬 로아 성) 부근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막강한 원정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여러 성은 원정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의 열성이 급격히 식으면서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고라성 부근에서 한 차례 저항에 부딪친 마원의 군대는 한때 고라성의 동쪽 낭박(浪泊)으로 후퇴했다. 낭박에서 보급품을 지원받고 새로 전열을 가다듬은 마원은 42년 낭박에서 징측의 군과 접전하여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마침내 이들을 대파하고, 미랭현의 딴 비엔 산으로 도피하는 징씨 자매를 추격했다. 징씨 자매는 이후 1년 동안 산발적으로 마원 군대에 저항했으나 군사력에 밀려 거듭 패배했다. 이듬해(43년) 정월 마원은 징씨 자매를 사로잡아 사형에 처하고 델타 지방에 한의 권위를 다시 확고히 세웠다.
베트남의 전설에는, 징측과 징이 두 자매가 마원에게 처형된 것이 아니라 딴 비엔 산 근처 핫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뒷날의 역사가와 군주들은 물론 오늘날 베트남인까지도 두 자매를 중국의 지배에 항거한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 도시들에는 거의 하이바 징이라는 거리가 있을 정도다.
델타 지방을 평정한 마위안은 구진군의 징씨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예안(乂安 : 응에 안) 지방까지 쳐들어갔다. 마침내 교지와 구진의 두 군을 완전히 평정한 마원은 44년 봄 낙양으로 개선할 때까지 한나라의 통치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는 우선 가는 곳마다 군현의 성곽을 보수하고, 농민을 위해 관개수로를 만들었다. 수리시설을 정비한 것은 종래 낙장이 가졌던 관개수리권을 중국의 군현관이 직접 장악하려는 조치였다. 다음으로 마원은 반란의 중심지였던 서우(西于 : 떠이 부)현이 다른 현들에 비해 지역이 넓고 인구가 너무 많고 현청과 멀리 떨어져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퐁 케와 봉 하이 등 두 현으로 분할했다. 고라성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 서우현은 안양왕(安陽王 :안 즈엉 부엉) 이래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로 징씨 자매의 반란의 근거지였던 미랭, 주연 두 현에 인접해 있었다. 일대 격전이 벌어졌던 낭박도 서우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마원의 서우현 분할을 한편으로 행정의 편의뿐만 아니라 서우현의 토착세력을 분열시키려는 획책이었던 것이다. 마원은 군현제도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 동안 현의 통치제도였던 낙장 낙후제를 폐지했다. 낙장 낙후제는 현지민을 지배하는 데는 용이하긴 했지만 언제든 중국 지배에 저항하는 지도세력으로 바뀔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한은 3군 56개현에 중국인 관리를 파견했고 병력도 주둔시켰다. 마원은 또한 한의 법률과 토착민의 고유법 사이에 상충되는 10여 조를 낙양의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베트남인들에게는 반란 이전에 시행되었던 중국 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엄령을 내렸다.
마원의 원정과 그에 뒤따른 개혁은 베트남의 역사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의 토착 지배계급이었던 낙장과 낙후의 이름이 사라지고, 이들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중국 관리와 이주자 및 이들과 현지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후한은 종전과 달리 베트남을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여 보다 적극적인 직접 지배로 이행하면서, 토착 풍습과 관심을 타파하고 새로운 후한의 법률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후한이 점차 쇠락하면서 베트남의 토착세력이 후한의 통치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후한 말 베트남인의 반란
후한이 지배하는 동안 베트남에 부임해 오는 관리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이른바 양리(良吏)로, 명제(明帝 58년 ~ 75년) 때 일남군과 구진군의 태수를 지난 이선(李善 : 리산) 같이 덕으로써 주민을 다스리고 토착민의 고유한 관습을 인정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관리는 드문 경우였고, 대부분은 이선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교지태수를 지낸 장회(張恢 : 장후이)처럼 법을 악용하여 사복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이었다. 심지어 어떤 중앙의 가난한 관리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지자사를 청원하여 임명되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후한 조정이 현지의 관리를 제대로 통제하기도 어려웠고, 한편 어느 정도의 부패는 암묵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당시 남방에 부임해 오는 후한의 관리는 도착하자마자 부를 축척하기에 바빴고, 그것을 이용하여 중앙의 관리에게 환심을 사서 중국 본국으로의 전출을 꾀했다. 한편 중국인 이주자들도 관리와 결탁하여 베트남인들로부터 남해 물산을 가로채 막대한 부를 쌓아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는데,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 북부 베트남 각지에서 발견되는 한나라 때의 전묘(?墓)이다.
당시는 후한의 전성기로 후한의 권위가 토착사회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여 서기 1세기 말까지는 비교적 잠잠했다. 그러나 후한이 정치적 부패와 혼란으로 쇠락해 가자 반란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영원(永元) 12년(100년)에 일남군의 상주(象州 : 뜨엉 럼)현 주민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약탈하고 불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37년 뒤인 영화(永和) 2년(137년)에도 상주현의 원주민인 구련(區憐 : 쿠 리엔) 등 1천여 명이 현청 소재지를 공격하고 관리를 살해했다. 일남군의 남단인 상주현은 그 이남에 거주하는 참족과의 경계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구련은 참족의 지도자였던 듯하다.
이것은 베트남인과 인종도 문화도 다른 참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인의 문헌에는 이들이 세운 나라를 처음에는 임읍(林邑 : 럽 업), 나중에는 점파(占婆 : 참파)로 부르고 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교지군와 구진군의 병사들이 동원되었으나 이들 병사들이 오히려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후한 조정은 무력으로 다스리기보다 한편으로는 위엄을 보이고 다른 한편은 은혜를 베풀어 사태를 겨우 수습했다. 그러나 일남군의 주민들은 6년 뒤(144년) 다시 현청 소재지를 점령했고, 여기에 고무된 구진군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 후 157년에는 구진군의 거풍(居風 : Rm 퐁)현에서 주달(朱達 : 쭈 닷) 등의 현령의 지나친 수탈로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켜 현령을 살해했다. 후한 조정은 한때 원정군의 파견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불안한 내정으로 출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당시 명망이 높은 두 관리를 파견하여 위무책을 써서 난을 진정시켰다.
홍강 델타의 주변에서 일어나던 반란은 결국 그 중심부에까지 번져 178년에는 교지군와 합포군의 토착민이 난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점차 구진군과 일남군으로 번져 갔고 마침내 교지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반란세력은 수만 명 이상이었으며 주모자는 이주한인(移住漢人)이었다. 곧이어, 남해군의 태수도 여기에 가담했다. 조정에서는 181년 주준(朱儁 : 주쥔)을 교지자사에 기용했는데, 그는 한편으로는 무력을 사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달래며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고, 3년 뒤인 184년에 교지의 주둔병이 반란을 일으켜 자사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임해 오는 자사들은 대부분 남방의 진귀한 물산들을 중간에서 가로채 사복만을 채웠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후한 조정에서는 다시 현지민을 달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고 가종(賈琮 : 자충)을 교지 자사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케 했다. 교지에 도착한 가종은 반란의 원인을 파악하여, 주민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세금을 줄여주고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여 군현을 배치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그의 선정을 칭송하여 “가부(賈父 : 자푸)가 늦게 와 우리가 전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제는 살기가 편안하니 다시는 반(反)하지 않겠노라”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가종은 3년 후 영전되어 중원으로 돌아가고, 그의 뒤를 이어 교지 출신의 이진(李進 : 리진)이 자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진은 이주해 온 한인이었지만, 교지 출신으로 자사가 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임명되자 곧 상소를 올려 교지 출신자들도 차별하지 말고 중앙의 관리로 등용해 줄 것을 요청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많은 반란은 이른바 ‘만이(蠻夷)’라든가 ‘이민(吏民)’이라고 불리는 베트남인들이 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이주한인 지배계층도 가세하고 있다. 178년 교지군와 합포군에서 발생한 반란을 살펴보면, 반란의 주동자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주한인이고 여기에 남해군의 태수도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1세기부터 2세기에 걸쳐 베트남은 북방에서 오는 한인 이주민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농업생산이 향상되었고, 호구 수도 뚜렷이 증가했다.(아래 도표 참고) 결국 2세기에 일어난 반란들은 후한의 과중한 수탈로 인한 일반 주민의 저항의식에 새로운 지배계층의 지도력이 결합하여 나타난 조직적인 항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반란에 대하여 이미 대내적으로 통제력이 약화되어 내리막길에 접어든 후한은 마원의 원정과 같은 적극적이고도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건이 터지면 그저 한두 사람의 우수한 관리를 현지에 파견하여 그의 역량에 의지하는 소극적이며 고식적인 정책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종과 같은 인물이 나타나 원인을 규명하여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예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한 개인의 치적일 뿐이었고, 일관되게 이어진 바는 아니었다. 따라서 후한 조정의 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 독자적인 토착사회를 형성하려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교지 3군의 호구수
(1) 교지군
1) A.D. 2년
호(戶) : 92440
구(口) : 746237
2) A.D. 140년
호(戶) : -
구(口) : -
(2) 구진군
1) A.D. 2년
호(戶) : 35743
구(口) : 166013
2) A.D. 140년
호(戶) : 46513
구(口) : 209894
(3) 일남군
1) A.D. 2년
호(戶) : 15460
구(口) : 69485
2) A.D. 140년
호(戶) : 18263
구(口) : 100676
3. 중국의 분열과 베트남
사섭(士燮 : 스셰)
후한 말 중국 본토가 환관의 권력 남용. 황건적의 난, 군웅할거 등으로 한참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무렵. 교지 지방은 오히려 전보다도 더 평온했다. 이런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지태수로 있던 사섭(士燮), 베트남어 발음은 씨 니엡)의 통치력 덕분이었다.
사섭의 조상은(137년 ~ 226년) 본래 지금의 산둥성 영양(寧陽 : 닝양) 출신으로 왕망의 시대에 광시성의 창오(蒼梧)로 피난하여 정착해 살았다. 사섭은 이주 중국계 지배계층의 전형적인 경우인데, 6대째인 사사(士賜 : 스츠)는 환제(桓帝 147년 ~ 167년)때 일남태수로 임명되었다. 사사의 아들인 사섭은 청년시절 낙양에 가서 유자기(劉子奇 : 류쯔치) 밑에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배웠다. 곧 이어 그는 추천을 받아 관직에 입문하여 상서랑과 쓰촨 동부의 우(巫)현의 현령을 거쳐 교지태수가 되었다. 교지태수가 된 것은 가종의 천거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가종의 뒤를 이어 교지자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주부(朱符 : 주푸, 주쥔의 아들) 라는 인물이 있었다. 주부는 전횡을 일삼아 참다못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는 살해되고 말았다.(196년) 이리하여 교지가 일시 혼란상태에 빠지자 사섭은 그 질서유지를 구실로 세 명의 동생 사일(士壹 : 스이), 사유(士? : 스웨이), 사무(士武 : 스우)를 각각 합포, 구진, 남해태수로 임명하고 후한 조정의 형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한편 후한 조정은 주부가 횡사하자 장진(張津)을 교주(交州 : 쟈오 쩌우, A.D 203년 교지 자사부는 교주자사부로 바뀌고 교지는 그 아래 하나의 군[郡]으로 되었음)자사에 임명했다. 장진은 곧 북쪽에 인접해 있던 형주(荊州 : 징저우) 목(牧) 유표(劉表 : 류바오)와 대립했는데, 이는 후한이 극도로 분열되자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 중앙의 강력한 세력과 관계를 맺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자 위함이었다. 그 와중에 장진이 자기 부하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유표는 이에 일방적으로 자기의 부하 뇌공(賴恭 : 라이궁)과 오거(吳巨 : 우쥐)를 각각 교주자사와 창오태수로 임명했다.
조조(曹操 : 차오차오)가 권력을 쥐고 있던 중앙의 조정은 사섭을 수남중랑장(綏南中郞將)으로 임명하여 교주 소속의 모든 군을 다스리게 하였다. 사섭은 임명을 수락하고 중앙 조정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다가 강남에서 손권(孫權 : 쑨취안)의 세력이 강해지자 곧 대북정책을 바꾸어 그와 손을 잡았다. 210년 손권이 보즐(步? : 부즈)를 보내 교주를 통괄하게 했을 때. 사씨 형제는 보즐을 맞이하여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협력했다. 오(吳) 조정은 사섭을 장군에 봉했고, 이로써 교주는 오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복속은 명목일 뿐 교주의 실권을 사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갈량(諸葛亮 : 주궈량)이 맹획(孟獲 : 멍훠)을 칠종칠금(七縱七擒) 하였다는 지역을 베트남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 지역은 후한 때 영창(永昌 : 잉창)군이 있던 지금의 원난성 서쪽 지방으로 미얀마의 동북 변경과 가까운 곳이다. 베트남은 당시 오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촉(蜀)과는 정치적 관계가 없었다.
222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사섭은 다시 장남인 사흠(士? : 스친)을 오의 수도에 인질로 보내,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해 보였다. 한편 오와 촉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 때는 익주(益州 : 이저우)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오에 복종시키기까지 함으로써 손권의 환심을 사. 사섭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작위를 받았다. 사섭은 이후 거의 매년 사신을 오에 보내 남해의 여러 가지 진귀한 산물-향료, 진주, 조개, 유리, 비취, 코끼리, 과일, 약재-을 바쳤다. 이런 다양한 공물은 손권에게 주요 재원이 되었으며, 사씨 일가가 교주에서 전과 변함없이 지위를 누릴 수 있게끔 해주었다.
오와의 우호 관계가 사섭을 외부의 위협에서 보호해 주기도 하였지만, 그가 대내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토착사회의 지지였다. 사섭은 처음 한인 관리로서 교지에 파견되었지만 그때까지 부임해 왔던 다른 관리들과는 달랐다. 이전의 관리들은 부임하자마자 토착 주민을 착취하여,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였고, 또 이를 이용하여 다른 지역으로 승진해 가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고, 현지 사회와는 아무런 유대관계도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섭은 이들과 달리 그 조상이 남방에 이주하여 여러 대에 걸쳐 살면서 일궈놓은 생활기반이 있던 사람이다. 그는 토착사회와 밀착되어 있었고 또 현지 주민들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섭의 지배 아래 교지가 이처럼 살기 좋아지자. 전란에 시달리던 중국인들이 난을 피하여 남하 하였다. 더욱이 사섭은 학문을 애호하고, 학자를 후대했기 때문에 적잖은 수의 학자들이 그의 보호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유희(劉熙 : 류시), 허정(許靖 : 쉬징), 원휘(袁徽 : 위안후이) 등과 같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토착사회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고, 주민들을 차디찬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베트남인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하는 설종(薛綜 : 쉐쭝)조차 이곳 사람들은 금수와 같아서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중국 지방관을 두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중국인 유학자들은 삼국이 정립되면서 중국 대륙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자 대부분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이 베트남 사회에 전혀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전근대 베트남 역사가들은 사섭 시기에 유교가 베트남에 들어오는 단초가 되었다고 본다.
사섭이 개인적으로 학자들을 후대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중국 문물을 베트남에 이식하는데 그리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사섭 시대에 불교가 발달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사실 사섭은 유교적 소양을 쌓은 사람이었지만, 불교도 장려하여 그가 출입할 때는 항상 호승(胡僧). 곧 인도승 수십 명이 향을 피우며 그의 수레를 따랐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중국과 인도 두 문화 중 어느 하나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고 고루 수용했던 것이다. 이런 성향 역시 중국 문화가 베트남에 깊이 침투할 수 없었던 중요한 까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전례
교지의 불교는 애당초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승려들이 들여왔고, 그리고 얼마 후 남중국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교지에는 인도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많은 승려들이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강거(康居 : 소그디아나)의 승려 강승회(康僧會 : 캉썽후이)는 교지에서 많은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으며, 나중에는 오의 수도 건업(建業 : 젠예)로 가서 247년에는 손권을 불교에 귀의시켰다. 그때까지 남중국에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강승회는 오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승려이다. 월지(月氏)의 지강량(支畺良, 또는 彊梁婁至 : 칼리아나루치)라는 승려도 교지에서 불경을 한역하는 일을 했는데, 강승회보다는 약간 후대의 인물이다. 지강량과 같은 시기의 승려로는 천축(天竺, 곧 북인도)의 휘라자성(麾羅者城 : 자바카)가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에서 배로 부남(扶南, 현재의 캄보디아)에 도착한 후 교지와 광저우를 거쳐 3세기 말 낙양에 도착했다.
4. 육조시대의 베트남
오(吳)와의 관계
사섭이 교지의 태수로 40여 년간 재임한 후 병사하자, 손권은 이를 기회로 사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교지를 직접 지배 하에 두려 했다. 그는 우선 교지를 둘로 나누어 합포군 이북은 광주로, 합포군 이남은 교주로 명명했다. 광주자사는 여대(呂岱 : 뤼다이)를 교주자사에는 대량(戴良 : 다이랑)을, 그리고 교지태수에는 진시(陣時 : 쳔스)를 임명했다. 한편 사섭의 아들 사휘(士徽 : 스후이)는 구진태수로 삼았는데 구진군은 아직 사유가 태수로 있던 곳이었다. 손권의 이러한 조치들은 사씨의 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사휘는 자칭 교지태수가 되어 새로운 자사와 태수의 임명을 부정했다. 이에 환(桓 : 호안)씨로 대표되는 토착세력은 교지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우려하여 사휘에게 신임 관리들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종용했다가 사휘의 분노를 샀고, 양측은 드디어 무력충돌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교지를 완전히 장악하려고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합포태수 사일의 아들인 사광(士匡 : 스쾅)을 보내 사휘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사휘는 권고를 받아들여 형제들과 함께 항복했는데, 여대는 오히려 사휘의 목을 베고 다른 형제들을 조정에 압송하여 죄를 물었다. 뒤이어 반항하는 환씨도 제압하여 교지를 평정했다. 그러고는 다시 구진 지방으로 진격하여 수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남아 있는 사씨 일가를 몰살했다. 이렇게 교지를 평정한 공로로 여대는 안남장군(安南將軍)에 봉해졌다.
남방을 완전히 평정한 오나라는 교주와 광주를 다시 통합하여 전과 같이 하나의 교주로 하고 여대를 자사에 임명했다. 여대는 교주자사로서 곧 주응(朱應: 주잉)과 강태(康泰 : 캉다이)를 포 남에 보내 동남아시아 각국에 오나라의 세력을 과시하면서 교주와의 무역을 장려했다. 두 사람은 돌아와서 주응은 『부남이물지(扶南異物志)』를, 강태는 『부남토속(扶南土俗)』과 『오시외국전(吳時外國傳)』을 저술했다. 이들 책은 오늘 날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책들에 간간이 그 내용이 인용되고 있을 뿐이지만, 당시 동남아시아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들이다.
231년 여대는 다른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나라 조정으로 소환되었는데, 그가 교주에 있는 동안 오나라의 이익만 너무 추구하여 베트남인들의 저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구진 지방의 정복도 일시적인 성공이었을 뿐, 오나라의 세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린 것은 아니었다. 248년 교주의 구진에서 변란이 일어나 여러 성이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오나라는 육윤(陸胤 : 루인)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토록 했는데 그는 무력과 설득을 통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258년에 또 구진 지방에서 난이 일어났다. 이때의 지도자는 조교(趙嬌: 찌에우 끼에우)라는 농공(農貢 : 농 꽁, 지금의 타인 호아 성 소재)현 출신의 젊은 여인으로, 그녀는 수개월 동안 항거했지만 실패하자 자살했다. 조교의 이야기*는 징씨 자매의 이야기처럼 훗날 베트남의 역사책에서 전설화되어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다.
*조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오빠 찌에우 꾸옥 닷과 단 둘이 살았다.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오빠가 장가를 들었는데, 올케의 구박이 하도 심하여 홧김에 올케를 죽이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당시 중국인 관리의 착취에 시달리던 구진 주민들이 오빠 찌에우 꾸옥 닷의 주동 아래 반란을 일으키자 조교는 장정 1천 명을 끌어 모아 오나라의 진압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수적 열세로 인해 타인 호안 성 미 호아 현의 보 디엔 마을까지 쫒기다 막다른 길에 몰려 자결했다. 당시 그녀는 한창 꽃필 나이인 스물세 살이었다.
조교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교주에는 또 다른 소요가 잇달아 발생했다. 263년 교지태수로 부임한 손서(孫?: 쑨취)는 욕심이 끝이 없는데다 중앙정부의 요구도 과다하여 악정과 착취를 일삼았는데 사람들의 원성이 드높았다. 교지의 토착관리 여흥(呂興 : 르 흥)이 불만을 품고 주민들과 합세하여 태수를 죽이고 위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구진군과 일남군도 이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에 위나라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베트남의 지배를 실현하려고 여흥으로 하여금 교주에서의 군사를 총괄케 하는 한편 따로 자사와 태수를 파견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곧 멸망하여 진(晉)나라가 이를 계승하자 교주는 자연히 진에 귀속하게 되었다.
한편 오나라는 여흥이 교지태수를 살해했을 때 북변에서 촉나라를 멸한 위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주에서 다시 광주를 분리시키는(264년) 자구책을 강구했을 뿐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68년 군대를 보내 3년 만에 교주를 정복하고 도황(陶璜 : 타오황)을 자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얼마 후 오나라가 진나라에 병합되자(280년), 도황은 진나라에 항복했고 자사를 그대로 유임했다. 그는 민심의 동향을 정확히 읽고 통치를 한 자사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기꺼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도황이 떠나고 그의 후임자들이 오고부터 교주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진나라는 이때 8왕의 난(292년 ~ 306년)이 일어나 중앙권력이 약회되고 지방에서 관리들이 이권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고 이민족들이 일어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의 종실에 의해 동진(東晋)이 강남에서 중흥하기는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의 교주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 참족의 임읍(참파)이 교주의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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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2.01 저는 좀 다양한 역사 관련 글을 올리고 싶습니다. 대부분이 유럽 역사이고..... 뭐 좀 색다른 역사 관련 글 없을까요..제가 예전에 베트남 전설에 관한 글을 이곳에 올리려다가 날린적이 있었는데..그 후로 베트남의 초기 역사에 관해 (전설,신화)에 올리고 싶었는데...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유사하게나마 베트남 관련 역사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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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2.01 위에 적은 대로 그래도 많이 알려진 역사 외 어떤 역사가 있을까요..지역으로는...동남아시아나...라틴 아메리카 지역..물론 메소 아메리카나 북아메리카도...그리고 아랍지역...여러 부족의 흥미로운 역사가 있을 듯한데..고대 비교 관련 하여서도..또..그루지야..아르메니아..역시 이름이 비슷한 아제르바이젠..등..아프리카의 역사도 흥미로울듯 하고..전 개인적이로 아프리카의 언어 유형에 관심 있는데...어느지역은 이쪽 언어와 가깝고..뭐 이런...서유럽보다는 동유럽...드라큐라등과 관련하여....루마니아.왈라키아 등의 역사도 관심있고...어쨌든 인터넷을 뒤적이면서 올릴만한 것들을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