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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스파르타) 중무장 보병대 체계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2.28|조회수266 목록 댓글 0

이 름    mcm
 
제 목    그리스(스파르타) 중무장 보병대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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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700년에서 650년 (아마도 B.C. 675년쯤)에 이르는 무렵의 어느 시기에 그리스의 국가들은

고대 전쟁에 관한 그들 나름대로의 기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무장 보병(heavy ingantry),

소위 장갑보병(hoplite phalanx)이라 불리우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어느 지역에서 이것이 생겼는

지는 모른다. 그러나 원형의 코린트식의 도기들에서 보여지는 그림들은 적어도 코린트에서 B.C.

650년 무렵 밀집보병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논란의 여지가 없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장인들이 자

신들의 화병에 장식용 그림으로 사용하기 이전에 나타났으리라고 간주할 수 있다. 코린트, 스파르

타,아르고스는 이같은 새로운 대형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장갑밀집보병대는 몇몇의 창병으로 구성

되었는데 그들은 완전히 무거운 갑옷을 착용했으며, 기습군으로 쓰여졌으며 적군을 향하여 육박전

(창과 창 또는 방패와 방패)을 전개하였다. 로마의 보병군단(legion)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이 밀집

보병대는 고대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중무장 보병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밀집보병대는 그것이 처음 생겨진 B.C. 7세기 초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는 5세기 말엽까지

점진적인 개선, 특히 장갑 부문에서 이루어졌으나 B.C. 700-400의 300년 동안 장갑 밀집보병의 전

술적 배치는 경보병, 척후병, 또는 기병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집중 중보병의 원리에 입각하여

홀로 작전하였다. 장갑밀집보병의 전통적 모습에 관한 다음의 묘사에서 우리는 스파르타 육군의 조

직과 무기, 병력배치를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스파르타의 육군은 전형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군대가 거의 모든 면에서 그리스의 다른 국가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표준을 제

시했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무장한 보병대형은 전쟁으로부터 '영웅적'인 귀족병사

들을 곧바로 몰아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빽빽하게 정렬된 창촉의 견고한 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할

가망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갑보병이 장비한 장갑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새로운 형식의 방패, 즉 호플론(Hoplon)이라 불리우

는 것이었는데, 그리스 장갑보병의 이름 호플라이트(hoplite)는 이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본래 이

방패는 나무로 만들어지고 가장자리는 청동으로 둘러진 것이었지만, B.C. 425년 스파르타는 청동으

로 씌워진 방패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방패에는 손잡이가 2개 있는데 하나는 방패의 가운데, 다른

하나는 안쪽 가장자리에 부착되었다. 보병은 자신의 팔꿈치까지를 방패의 중앙부분에 있는 손잡이 띠

에 끼우고 그의 손으로 가장자리에 있는 가죽끈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 방패는 무거웠고 과거에 손

잡이 하나밖에 없었던 방패보다 훨씬 안정된 방위를 할 수 있으나, 뒤로 걸머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장갑보병들은 열(rank)을 유지하도록, 그리고 적군에게 자신의 등을 보이지 않도록 집중적으로 훈련

되었다.

장갑보병들은 방패 이외에도 몸전체를 방어할 수 있는 갑옷을 착용하였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헬멧,

앞을 가리거나 숨쉬기 곤란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의 얼굴, 목, 머리를 보존할 수

있었고, 주로 벨트천이나 가죽끈이 부착되었다. 때때로 말의 털로 만들어진 깃털로 헬멧(투구)의 윗

부분이 장식되었고 이것은 방패에 그려진 문장과 더불어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데 사용되었다. 청동

제로 만들어진 흉부보존용 갑옷은 두 쪽으로 만들어졌으며 어깨부분에서 서로 맞물려 이어질 수 있

게 되었고 그 길이는 엉덩이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장딴지와 정강이는 갑옷의 정강이받이에 의해 보

존되어질수 있었다. 어떤 병사들은 팔,목,발목,넓적다리를 보호할수 있는 장갑을 착용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부수적인 갑옷에 관해서는 어떤 표준이 있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장갑밀집보병의 공격력은 오로지 단거리 또는 충격무기인 창과 칼로 구성되었다. 밀집보병은 투창이나

활과같은 어떠한 종류의 중간 또는 장거리 화력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충격작전에만 이용될수

있었다. 창은 6 ~ 8피트(대충 2 ~ 2.7미터)정도로 길었고 끝부분은 철로 만들어졌고 손잡이 부분은 나

무로 된 것으로, 장갑보병들의 주요 무기였다. 그 창에는 일반적으로 쓰러진 적병을 찌를 수 있도록,

또한 기병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때 땅에 견고히 꽂을 수 있도록 손잡이 끝부분은 철로 되어있었다. 단

검은 본래 예비적인 무기로서 창이 부러졌거나 또는 창을 떨어뜨린 이후에 사용하였다.

그리스 전역의 장갑보병들은 같은 형태의 갑옷을 착용하였으며 거의 똑같은 전술적 원리에 의거하여 전

투를 치루었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장갑의 무게를 점차 가볍게 하는 경향이 나타났었다. 그

결과 B.C. 5세기의 밀집보병은 과거의 그것에 비하여 상당히 가벼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장갑보병은 결

코 경보병이 되지는 않았다. B.C. 5세기 모든 장갑보병은 각자가 자신 스스로의 장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복무했으나, 군사국가로 성장한 스파르타는 예외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에서마저

도 '급료'라는 개념은 군사적 보상 체계 네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야전에서 정갑보병의 전술은 장비의 종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왼팔에 부착한 방패는 무거웠고 마음대

로 휘두를 수 없었기 때문에, 장갑보병의 오른편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 결과 각개 장갑보병들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더 가까이 밀착하여, 옆에 있는 전우의 방패를 통해 자신의 오른쪽 부분을 보호하

려 했던 경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인 장갑보병의 대형은 전투보병을 열과 오(rank and file)로

배치시키는 것으로서, 항상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열의 길이는 8열이었다. (그러니까 열이 세로, 오가 가로)

밀집보병의 조직은 열보다 오에 의거하였고, 각각의 장갑보병은 그의 열보다는 그의 오에 속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열과 오는 전술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것이었다. 기본적인 생각은 적병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최

전방의 열을 견고하게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맨 앞열의 병사가 쓰러지는 경우 쓰러진 병사의 뒷편 오에 있

던 병사가 앞으로 나와서 자리를 메꾸어 전열의 견고성을 유지시켰다.

B.C. 7세기, 8세기 밀집보병들은 '영웅적' 귀족 군대를 쉽게 제압할수 있었기 때문에 테살리 남부의 그리

스 국가들은 이 같은 병법을 치택하였고 B.C., 675년~ B.C. 49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리스에서의 전쟁은

주로 밀집보병 사이의 전투로 이루어졌다. 밀집보병의 기병, 경보병, 척후병 등에 의한 후방 또는 측면공

격에 특히 취약하였으나 이 시기 전쟁에서 기병, 경보병, 척후병들은 별반 사용되지 않았다. 유일한 전투

방법은 한편의 밀집보병과 다른 편의 밀집보병과의 전투였고 이러한 전투는 평지에서만 가능하였다. 구릉

지역의 경우 열과 오를 유지한다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다. 이같은 방법의 전투는 대단한 훈련, 군기, 용기

등을 필요로 하였다. 고대 그리스 풍의 시들은 새로운 전술에 관한 윤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옆에서 자

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것, 죽을때까지 싸울 것, 방패를 집어던지고 도망치는 것처럼 비굴한 일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 아니라 열 속에 있는 전우 모두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스파르타 어머니의 유명한 말이 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방패를 들고 오든지, 죽

어서 방패에 눕혀져 오든지 하라고. 이처럼 방패를 던지고 도망치지 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들은

새로운 군사적 도덕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장갑보병들의 전쟁은 충격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전쟁사학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묘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어떤 학자는 두 밀집보병대가 접전할때 그들은 자신의 열을 벌려 맨

앞줄의 병사들이 적병들과 일대일의 전투를 벌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밀집대형을 이루어서 방위

의 일부분이 자신의 오른쪽을 옆의 병사에게 의존했던 그리스의 장갑보병이 열과 오로 단단히 뭉쳐서 창끝

을 앞으로 향해 진군함으로써 적군의 열을 파괴하고하 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

개될 경우 병사들은 전열의 아래 위 양쪽에 견고하게 서고, 맨 앞의 병사들은 3분 가량 싸우고 나면 완전

히 지치게 될 것이며, 뒤 열에서부터 밀려오는 압력을 감당하기 힘들것이다. 그러나 실전에 있어서 한편은

어떤 단계에 이르러 전열의 일부가 취약하여 무너지게 될 것이며 그 경우 상대방 맨 앞열의 병사는 자신의

뒷편 오에 있는 병사에 떠밀려 앞으로 뛰쳐 나오게 되어 자신의 방패를 가지고 적군의 등을 밀어젖히고자

할 것이다. 만약 이같은 상황이 적군의 전열을 흐트리게 되고 적병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면 그 전투는 이긴

전투가 된다. 그러나 계속 진격중인 오는 자신들의 선에 공백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열을 무시하지 않

으려 할 것이다. 적군의 전열 모두가 후퇴하지 않는한 공격자는 압력을 중지하고 열을 재정비해야할 필요가

있으며, 적병과 창찌르기 경합을 다시 벌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가장 훌륭한 병사들은 오른쪽에 배치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적군의 왼쪽 날개에 배치된 보다 덜 훌륭한 병사와 마주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양편의 오른쪽

날개의 동시적인 전진과 후퇴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 승리의 판가름은 한편의 왼쪽 날개쪽 병사들이

적군의 오른편 날개를 저지하고 자기편의 오른쪽 날개쪽이 계속 전진할 때까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 시기

의 끝 무렵 밀집장갑보병 중 한 열이 다른 열보다 앞서 진격하는 것이 허용된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와같

은 전투의 예를 다음 장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더.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열은 하나의

단위로서 진격을 했던 것이다.

장갑보병에 의한 그리스 전쟁은 전쟁사에거 독특한 위치를 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충격작전에만

의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끝날무렵, 스파르타의 장갑보병은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적군을 포

위하는 작전을 개발하기는 했지만 정면충돌의 접전이 당시의 전쟁 규칙일 정도였다. 19세기 듀피크(du picq)

는 전쟁에서 충격작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비록 고대전쟁에서 나타나는 예외를 존중하기는 했지만)주장하였

고, 금세기에 이르러 존 키간은 비록 듀피크처럼 강력한 주장은 아니지만 역시 충격작전은 전투에 있어서 보

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전쟁에서의 인간들은 두려움을 느

끼기 때문인 것이다. 전쟁터에서 인간의 본능은 도망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충격 또는 직접적인 육박전을

가장 두려워한다. 듀피크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싸우기 위해서 전쟁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승리하기 위

해서이다. 그는 첫번째가 되지 않기 위해서, 두 번째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또 다른 부분

에서는

  
   군기는 병사들로 하여금 적군과 조금 더 오래 직접전을 할 수 있게 할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보존이라는

   본능을 대체할수 없다. 두려움에 대한 느낌은 이 본능과 함께 있는 것이다.

   무서움!

   이것을 모르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히 희귀한 예외적인 용기 있는 사람

   들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서움에 떨것이다. 당신은 육체적인 본능을 억압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병사들은, 듀피크가 인정한 것처럼 다른 병사들에 비하여 육체적 본능을 더 잘 억제하였

고, 전쟁에서의 무서움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위험에 당면했을때 나타나는 공포는 자연적이며 강력한 인간의

본능이며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의 엄격한 훈련 때문에 치루어진 희생은 높은 것이다. 견고한 전술조직과

강력하고 민족적인 군사 이데올로기는 전쟁터에서의 공포심을 경각시키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

한 군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현대 사회의 정부들은 고대국가에서 보여지는 정도로 야만적인 군기를 강요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군기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있어서도 두 밀집보병 군대가 접전하게 될 경우 병사들은

놀랄것이며 쉽게 공포상태에 빠져들어 갔으리라는 사실은 확신을 가지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군기와 훈련도

모든 병사들을 지속적으로 전투하도록 할수는 없다. 위와 같은 논의에서 우리는 지연접전(drawn out engagement)

의 기교(?)를 고려하였다. 이런 유형의 전투가 몇몇 있었다. 그러나 장갑보병에 의한 대개의 전투시간은 대

단히 짧았으며 한 번의 충돌로 결판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병사들의 공포심을 덜어주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은 병사들에게 신뢰할수 있는 훌

륭한 장교를 제공하는 방법인데, 이는 어떤 군사 명령구조에서도 작동하는 하나의 기능일 것이다. B.C. 5세

기 후반의 스파르타 밀집보병대의 조직은 그들의 명령체계를 상당히 믿음직스러운 것으로 재편한 것임을 나

타내는 증거이다. 가장 중요한 전술단위는 100명으로 구성되는 대대[大隊 : 로코스(lochos)]였으며 이는 각

각 50명으로 구성되는 두 개의 중대(pentekostyes)로 구성되었고 중대는 두 개의 소대(enomotiai)로 구성되

었다. 소대는 20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대장(enomotarch)과 후열장교(rear rank officer : ouragos)가 있었

다. 각 소대는 세개의 분대 또는 오(伍)로써 구성되었다. 이러한 조직은 복잡하고 모호한 듯 느껴지지만 실제

로는 대단히 단순한 것이다

스파르타 후기에 이르러 스파르타의 군대는 6개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사단(mora)은 한 명의 장군(polemarch)

에 의해 지휘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도 이같은 정교한 조직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왜냐하

면 헤로도투스는 스파르타의 육군은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직된 군대라고 말하였다. 그는 '스파르

타 육군 거의 대부분은, 아주 작은 부분들만 제외한다면, 다른 장교의 밑에서 근무하는 장교들로써 구성되었

다......"고 말하였다. 아테네의 밀집보병들은 일반적으로 8열로 구성되었으나 10개의 사단(taxeis)으로 나뉘

어져서 텍시아르크(taxiarchs)라 불리우는 사단장에 의해 지휘되었다. 아테네의 10개 종족들은 각각의 사단

병력을 구성하였고 사단은 대대(lochos)들로써 구성되었다. 매년 10인의 장군(strategoi)들이 각각의 종족에

서 1인씩 선출되었으며, 아테네 병사들은 비록 그 중 하나가 전체를 통솔해 가기는 했지만 통일된 명령체계의

결핍에서 연유되는 희생을 치루었다.

그리스의 군대는 계급간의 밀접한 협력에 너무 크게 의존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방을 찌르기 위한 창과

방패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병사들은 열과 오를 흐트리지 않은 채 종대 대형

에서 어떻게 전투대형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훈련받았다. 스파르타 정부는 병사를 훈련시키는 데 거의 모

든 정력을 투자하였고 스파르타의 모든 성인 시민들은-소위 스파르티에트(sparitates)라 불리우는- 상업 및

농업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군사적인 기예를 닦을 것이 강요되었다. 스파르타의 군기는 지독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으며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나이 30세에 이를때까지 정기적으로 군대막사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다른 그리스 국가의 군대는 스파르타의 군대보다는 덜 정교했으며 그 결과 스파르타의 군대는 에게해 전지역

에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대의 중요한 존재이유 중의 하나는 스파르타의

노예(helots)를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밀집보병대가 펠로폰네소스 이외의 지역에서

침략적인 목적을 위해 자유로이 사용되어질수는 없었다.......

 

실제로 헬로트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일어난 반란을 여자들이 진압한적

도 있었다고 해. 스파르타는 여자들도 군사훈련을 받았으니 여자들이 창을 들고 스크럼을 짜면, 훈련안된 노

예들은 당해낼 수 없었나봐.  그리고 스파르타 지도층에서 장기간의 군대파견을 꺼렸던 이유는 노예문제 뿐

만 아니라 스파르타군 자체의 타락 때문이기도 했어. 형편없는 식사와 불편한 잠자리등 최악의 환경에서 훈련

만 받아오던 인간들이 갑자기 삐까번쩍한 세상으로 나갔으니, 향락적인 문화에 대한 내성이 없다고 할까. 

시골 촌놈이 서울에 올라온 격이지.

스파르타가 남긴 건 단순무식과격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스파르타라는 이름뿐이지만,  인류역사에

그런  남자들이 존재하는 국가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불의 문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해. 테르모필레에서 마지막 전투를 앞둔 아침, 다른 동맹군 병력을 철수시키

고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군에게 하던 연설인데, 물론 이 장면은 작가의 상상의 산물이지만, 가슴이 찡하다. 

마지막 까지 생존했던 노예가 나중에 죽어가면서 구술하는 형식이라 존대말이야.

 

  두 도시의 사람들이 각자 분리 되었습니다. 거기엔 2백명 남짓한 귀족들과 라케다이몬의 자유인들이 남았습

니다. 들은 계급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왕을 둘러싸고 빽빽이 모여 섰습니다. 모두들 레오니다스가 자유나 법

또는 폭군의 손으로부터 헬라스를 보호하자는 것 같은 대단한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몇 마디 되지 않는 간소한 말로 에우로타스와 파르논 그리고 타이게토스의 계곡에 대해, 그리고 우리

가 스파르타라고 부르며 폴리스와 국가를 이루는 다섯 개의 장벽 없는 마을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부터 천년 후, 2천  년, 3천 년이 될 때까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 세대의 사람들은 그저 즐기기 위해 우리 조

국으로 여행올 것이라고 레오니다스 왕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올 것이다. 아마 바다 멀리 학자들과 여행객들은 고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과 과거에 대

한 호기심을 품고 올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평야를 돌아보고 돌과 파편을 보고 우리의 조국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겠느냐? 그들의 삽은 아름다운 궁전이나 사원을 발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곡괭이는  영원한 건축이나 예술 작품을 파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스파르타인들은 무엇

을 남기 겠느냐?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이 아니라, 바로 이것,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행하는 것

을 남길 것이다."

  고갯길 너머에서 적군의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분명 이제 페르시아인들의 선봉과 그들의 왕을 태우

고 있는 2륜 마차와 무장한 근위병들이 보일 것입니다.

  "지금은 아침 성찬을 들도록 하라, 제군들이여. 저녁은 지옥 속에서 들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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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2 21:15:01

 
 
  새로고침  
 대갤팅  개념글! 221.144.84.197 2007/01/12  
 베르나도트  나중에 스파르타 군대가 경무장 보병한테 개발리지... 30킬로가 넘어가는 장비차고 있는 스파르타 중장보병과 달리, 경무장 보병들은 막 뛰어다니고, 활쏘고 돌던지고... 결국 스파르타 군대가 제풀에 쓰러짐 125.139.143.46 2007/01/12  
 대갤팅  그게 로마군이던가 투창으로 던졌다가 재빨리 방패 창으로 드는, 투창때매 상대 방패든 보병은 방패가 무거워져서 제대로 사용못하게되는 방패에 투창이 박혀있어서리. 암튼 그래도 창방패든 팔랑크스 시스템은 기병막는데 효과적이고 상대 화살에도 어느정도 카바가 됬기에 살아남은듯.. 221.144.84.197 2007/01/12  
 학생  잘 보았습니다. 사단은 몇 개의 대대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133.11.84.194 2007/01/12  
 mcm  오, 그게 빠졌네.1개 사단은 4개 대대로 구성되었고, 스파르타 육군 전체는 극왕에 의해 지휘되었어. 성인 남자수가 적어서 총병력은 다른 도시국가에 비해 적은 편이야. 211.59.173.91 2007/01/12  
 미스텔  개념글 잘봣어요 앞으로도 계속 써주시길 123.254.194.47 2007/01/12  
 홍성대  개념글 감사합니다. 근데 리플수가 좀 적군요. 122.254.153.137 200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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