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질적 차이, 그리고 쟌다르크
번호 : 1106 글쓴이 : KWEASSA
조회 : 241 스크랩 : 0 날짜 : 2003.01.13 12:37
이게 의외로 꽤 컸습니다.
물론, 전반적으로 볼 때 보병들이 사회의 하층 계급(범죄자, 강도, 산적, 건달, 멋모르는 풋내기, 공명심에 들뜬 애송이, 가만있다 난데없이 끌려나온 농부.. 등등.. =_=;;;)이었던 프랑스나 영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전술 위에 있는 것이 전략이고, 전략 위에 있는 것이 정치이며, 정치 위의 것이 경제죠~ 프랑스와 영국의 내부적인 정치 상황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병들이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백년전쟁의 시기는 중세 중후반에서 중세의 몰락까지의 기간이며, 커다란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근세로 나아가는 변화를 영국이 유럽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냈고,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좀 쳐졌습니다.
영국은 죤 왕 이후부터 프랑스 내부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르만인 왕들도 완전히 영국인들이 되었고, 프랑스 영토를 상실했기 때문에 영국의 통치자들은 영국 섬의 내치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영토를 중심으로 농지수입에 의존하던 경제관계가 양모생산-모직물제작-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상업적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죤 왕의 시대는 대헌장이 도입된 시기입니다. 대헌장으로 인해 영국의 귀족과 중상층 계급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왕에 대한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13세기 말에는 시몽 드 몽포르의 등장과 함께 영국에 최초로 "국회"가 설립되었구요. 그런데, 상업경제가 부상하면서, 토지를 기반으로 하던 지주-영주 계급들 역시 권한이 크게 약화되었고,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던 영국의 왕들은 역으로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간 계급의 평민들과 상인들, 그리고 하층계급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3~14세기 사이에 유력한 상인조합과, 항구연합이 등장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각종 특권 및 특허장들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왕-귀족-평민 삼자의 이해관계가 작용한 결과, 귀족은 왕을 견제하고, 왕은 평민을 지원하여 귀족들을 견제하게 한 셈이죠. 그 과정에서 평민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불법적으로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하거나 세금을 강요당하지 않는 "자유민"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뿌리박혔습니다. 게다가, 넓은 영지를 바탕으로 수입을 올릴 수가 없었기 귀족과 대지주들도 점점 상업적 이해관계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하층 평민계급과의 융화를 이루어갔습니다.
즉, 보병의 중핵을 이루던 영국의 평민들은 스스로의 자유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왕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으며, 어느 정도의 훈련을 받으면서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해왔고, 특히 궁병 훈련은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민들이 중요한 전력이라는 사실을 왕도 귀족도 인정했으며 그들을 성실하게 지휘하고자 했습니다. 좁은 땅이기 때문에 대규모로 기사들을 양성하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웨일즈인들 장궁병들의 사기는 특히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웨일즈도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처럼 반란을 자주 일으키던 지역이지만, 14세기 중반 부터 웨일즈가 왕이 후견인인 특수한 자치지역으로 인정받은 이후(영국의 태자에게 내려지는 칭호인 "웨일즈 공"이 이 시기부터 비롯됩니다) 웨일즈인들은 지방색이 강하고, 거칠고,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왕과 영국에 대한 강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강력한 전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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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전혀 반대입니다. 필립2세 이후 넓은 프랑스의 영토를 대부분 영국으로부터 몰수하였으며 서서히 노화되고 있던 봉건제도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즉, 통일국가를 이루기 보다는, 여전히 여기저기에 영지를 갖고 있으며, 그 영지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지방귀족들이 득세하고 있었고, 그 드센 귀족들 위에 왕은 불안하게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어느 귀족이 가장 강한 사람인가가 큰 관심사였고, 왕이 죽을 때 마다 귀족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엄청난 규모로 일어났죠.
그런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의 넓은 영지를 바탕으로 살아갔기 때문에, 그 땅의 농민들을 착취하고 짓밟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밟히며 살던 사람들이 바로 프랑스의 보병들입니다. 영주에 대한 충성심도 별로 없고, 왕에 대한 충성심도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항상 활약하던 사람들은 직업적인 군인들인 기사들과 그들이 거느린 소수 사병들이었고, 보병들은 들러리, 몸빵, 화살받이로 내몰아졌습니다. 공을 세운다고 해서 신분이 상승할 가능성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전장에서 보병들이 뛰어난 역할을 하는 경우, 기사들이 시기심으로 인해 자기편 보병들을 뭉개며 돌격하여 공을 가로채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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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긴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서, 헨리 5세가 한 연설이 대충 영국군의 분위기를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와 함께 피를 흘린 사람은 나의 형제가 되리라"
반면, 프랑스군에게 보병들은 화살받이 떨거지이자 천한 인간들이었습니다. -_-; 결국, 전투에 나서는 순간, 궁병들도 싸움에 임해야 할 때, 영국군의 병사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과감히 활을 내리고, 단검을 뽑아들어 창병들 틈에 섞여 싸울 만큼 사기가 높았고, 창병들도 말에서 내려 싸움을 지휘하는 기사들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보병들은 완전히 오합지졸들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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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을 뒤바꾼 것이 성처녀 쟌다르크입니다. 쟌다르크는 지휘력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진정 기적을 행하는 신의 대리인이거나 해서 프랑스를 구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을 역사상 최초로 단결시켜, 그들에게 전장에서 간단하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쟌 다르크가 행한 일은, 우선, 프랑스 황태자를 찾아 그를 왕으로 만든 것입니다. 정치적 구심점을 세우고 영국의 왕위계승권 명분을 불식시켰습니다. 그리고, 성처녀라는 명분을 통해 새로운 왕이야말로 진정한 신의 축복을 받은 프랑스 왕이라는 것을 프랑스 민중들에게 보여준 것이죠.
확고부동한 왕이 등장한 이후부터 프랑스의 단결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오랜 영국의 침략에 프랑스인들은 이제, 귀족이거나 평민이거나 누구나 영국인들에게 이를 갈기 시작했고, 공통의 적대감은 두 계급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왕, 그리고 왕의 군대를 지배하는 것은 성처녀 - 이런 신념 아래에 프랑스군이 단결하였고, 처음으로 "내 땅, 내 나라"라는 강한 의식이 생겨났으며 "애국심"이라는 것이 발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프랑스군도 조직화되기 시작했고, 일반 보병들도 "성처녀를 따르라"라는 구호 아래 뚜렷한 목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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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에 나타나 19살에 죽을 때 까지 2년 동안 행한 단 한가지 일이, 바로 그 시기 프랑스에서 가장 필요로하던, 그러나 아무도 모르고 있던,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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